『이것이 예배이다』
A.W. 토저 지음
차례
Ⅰ부 인간은 예배를 위해 태어났다.
1장 인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2장 숨질 때까지 우리의 의무는 예배이다
3장 하나님은 일꾼보다 예배자를 찾으신다
Ⅱ부 오직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려라.
4장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한 거짓된 예배를 경계하라
5장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접하는 참된 예배를 드려라
Ⅲ부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진정한 예배를 회복하라.
6장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것은 참예배이다
7장 이제 예배 중심으로 살기로 결단하라
Ⅳ부 예배에 관한 31가지 묵상
Ⅰ부 인간은 예배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는 예배를 위해 태어났고 예배를 위해 거듭났다. 우리가 창조되고 또한 재창조되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다. 예배를 위해 최초의 시작이 있었고 또한 예배를 위해 ‘중생’이라는 새로운 시작이 있다. 교회의 존재 목적도 예배이다. 우리의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한다.
1장 인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항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인간의 초고 목적은 바로 예배이다. 예배! 이것이 나의 일련의 메시지의 주제이다. 당신이 예배에 관심이 없고 예배를 싫어한다면, 당신은 이 책을 덮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예배에 대한 나의 구체적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기 원한다면, 이 책을 숙독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권할 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메시지를 통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로서 사람들에게 나의 혼신의 힘을 다바쳐서 그들이 왜 창조되었는지, 왜 그들이 이 세상에 발을 딛고서 있는지를 말해주려고 한다.
하나님은 아무 목적 없이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성을 가지신 분이다. 지성은 하나님의 속성들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행하든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행하신다. 바꾸어 말해서 하나님은 지성을 통해 분명히 인식할 수 있는 목적이 없이는 결코 행동하시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의미 없는 것이 없다. 문제는 우리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2장 숨질 때까지 우리의 의무는 예배이다.
나는 마지막에 평안히 숨을 거두면서 “나는 하나님을 예배했으며, 지금도 예배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26)라고 말씀하신 후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 인간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것들을 좋아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정하신 바이다. 예를 들어보자. 아기가 태어남ㄴ 아기의 아버지는 즉시 아기의 붉은 얼굴을 유심히 살핀다. 이것은 아기가 자기를 닮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남자는 자신의 이런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격적으로 무뚝뚝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강하고 용기가 있어야 하고 여자는 부드럽고 상냥하고 눈물이 많아야 한다는 일반적인 통념이 어디서 생겨났는지 잘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세상도 그렇게 돌아간다. 아무튼 이제까지 나는 갓 태어난 아기가 자기를 닮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기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지 않는 아버지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는 우리를 닮은 것들을 만들어낸다. 하나님은 인간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이라는 거울을 보고 그 거울 안에서 자신을 보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한다.
당신이 창조된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거울이 되기 위해서이다.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짜릿한 즐거움이 우리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심지어 인생의 순수한 기쁨도 우리의 최고 목적은 아니다. 이제 거울의 비유를 하프의 비유로 바꾸어 말해보자.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프를 주셨다. 이것은 그 어떤 피조물에게 주어진 하프보다도 큰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 하프로 전능자를 찬양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하여 무섭고 비극적인 타락의 구덩이에 빠졌을 때 그는 이 하프마저 진흙 구덩이에 던져버렸다. 하프는 진흙 구덩이에 빠져 모래가 잔뜩 끼었고, 줄이 다 끊어졌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프, 즉 하나님이 본래 연주하기를 원하셨던 하프에 세상의 진흙이 잔뜩 묻었다. 이 하프의 줄들이 끊어져 녹슬어 버렸으니 어떻게 소리가 날 수 있겠는가? 형제들이여! 구속이 무엇인가? 구속은 우리를 하나님께 다시 되돌리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하프를 다시 하나님께 맞춰 조율하는 것이다. 하프에 잔뜩 낀 진흙과 모래를 제거하여 깨끗이 하고 다시 윤을 내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어린양의 보혈’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가능하다. 인간은 그 어떤 피조물보다 하나님을 더 닮았기 때문에 그 어떤 피조물보다 더욱 기쁘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갖고 만물을 지으셨다. 그런데 그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다. 성경 전체가 이 진리를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진리는 성경전체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전혀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원하시는 것이다! 창조되는 않은 본질 가운데 완전히 자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원하시는 것이다!
3장 하나님은 일꾼보다 예배자를 찾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일꾼보다 예배자를 찾으신다. 즉, 그분은 일꾼보다는 예배자에게 무한히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신다. 우리는 먼저 예배자가 된 다음 일꾼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충만하고 깊은 예배를 드린 후에 일해야 한다. 오늘 나는 우리를 자기중심성에서 해방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은혜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의 눈은 밖을 보거나 위를 보기 위해 만들어졌다. 로마의 한 시인은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인간이 위를 보는 반면 짐승은 아래를 본다는 것이다. 인간은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만, 짐승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그들의 짧은 다리 아래의 땅을 본다. 인간은 눈을 들어 하늘을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깊이 명심해야 할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교회의 역사 속에서 탄생한 위대한 찬송가들이 거의 전부 부흥의 체험 다음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다음에, 존 웨슬리의 부흥운동 다음에, 모라비아 교도의 부흥 다음에 은혜로운 찬송가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하나님의 교회가 힘써 노력하고, 성령님이 교회에 임하시고, 천국의 문이 열리고, 교회가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하늘 보좌의 밝은 빛이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에서 반사되어 비칠 때 신자들은 위대한 찬송가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현재 그들이 물려준 찬송가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자판기 그리스도인, 형식적인 그리스도인, 메마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살아서 펄펄 뛰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해서다. 즉, 우리의 성품과 뜻과 마음을 다하여 거룩함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되기 위해서다. 예배는 도덕적인 존재들의 정상적인 활동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이다.
Ⅱ부 오직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려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릴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어 우리에게 왔다가 우리를 거울삼아 반사되어 다시 하나님께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이다. 하나님은 다른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
4장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한 거짓된 예배를 경계하라
우리가 교육을 많이 받아 손을 놀리는 범과 입을 여는 범에 능숙할지라도 우리에게 속죄의 피가 없다면 우리는 ‘가인의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를 때 사람들은 ‘가인의 예배’를 드리게 된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종교적 체험과 예배가 있을 수 있다. 이런 예배를 가리켜 나는 ‘가인의 예배’라고 부르고 싶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를 정죄하고 거부하셨기 때문이다. 가인의 예배는 속죄가 빠진 예배였다. 가인은 속죄의 피가 없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는 “나의 창조주께 예물을 드릴 때가 돌아왔다”라고 중얼거리며 하나님께 나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멋진 꽃 한 다발과 맛있는 열매를 따다가 하나님께 드렸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피는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는 “무슨 피 말씀이십니까?” 라고 물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너는 죄인이기 때문에 내게 나아올 수 없다. 네가 내게 나아오려면 너를 위한 속죄의 죽음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는 내 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나는 단지 예물을 가져왔을 뿐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예물을 받지 않으셨고, 이에 격분한 가인은 나가서 자기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죽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창 4:4)을 하나님께 드린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가인의 예배’는 바로 속죄의 피가 없는 예배이다. 신학교를 졸업했다고 하면 매우 유식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속죄를 모르는 자유주의자가 설교단에 서는 일이 있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음악을 예배로 착각한다. 물론, 종교음악이 정신을 고양하고 영혼을 거의 황홀경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배자가 예배의 체험을 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 성경은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자가 신령(성령)과 진정(진리)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가르침은 예배를 둘러싼 모든 모호성을 일거에 제거한다. 이 교훈은 예배를 사람들의 손에서 빼내어 성령님의 손에 맡겨드린다. 형제들이여! 이제까지 나는 설교단에서 성령님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해왔다.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진리 역시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어 우리에게 왔다가 우리를 거울삼아 반사되어 다시 하나님께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이다. 하나님은 다른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 우리는 성령님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 진리 없이 성령님 안에서만 예배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진리가 없는 곳에서는 성령님이 일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서 진리만으로 예배해서도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불’은 없고 ‘신학’만 남는 예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영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그것에 순종하는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하면 그의 지극히 작은 속삭임까지 예배가 될 것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고 진리에 순종하면 어떤 것이라도 예배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도 않고 진리에 순종하지도 않는다면 우리가 드리는 소위 예배라는 것은 실상 전혀 예배가 아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당신은 오늘밤 진리 앞에 서서 판단을 받아야 한다. 성령님은 사치품 같은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분이시다. 우리는 믿고 순종하는 가운데 성령님을 알고 뜨겁게 사모해야 한다.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다. 성령님이 임하시지 않는 예배는 찬된 예배가 아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예배를 다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점잖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드린다고 해도, 그들의 예배 중에는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에서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많다.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시는 종교적 체험도 많다.
종교인들의 모임에서 따뜻한 인간관계가 느껴지고 엄숙한 오르간 소리와 아름다운 찬송가가 울려 퍼진다 할지라도 진리와 성령님이 없으면 참된 예배도 없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얼마나 크고 넓고 포괄적인가! 회개와 중생과 성령님의 임재는 필수적이다. 성령님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눈을 감고 어둠 가운데 헤매다가 결국 길을 잃고 말 것이다. 성경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고 진리가 날마다 선포되는 복된 시대에 사는 우리는 성령님을 거부하는 죄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이런 죄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 기도하자!
5장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접하는 참된 예배를 드려라
우리가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는다면 그분을 예배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크신 하나님으로 본다면 우리의 예배는 살 것이고, 하나님을 작은 하나님으로 본다면 예배는 죽을 것이다. 나는 예배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첫째, 예배는 태도이다. 내적 태도이다. 육체적 태도가 아니라 정신적 태도라는 말이다.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둘째, 예배는 행동이다. 그것도 지속적 행동이다. 우리는 가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태도이며 마음의 상태이며 지속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배의 강도와 완성도는 경우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강도는 예배자 개인과 관계된 것이고 완성도는 교회 구성원들과 관계된 것이다.
♣셋째, 예배는 감정적인 것이다. 즉,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 여기서 ‘느낀다’라는 말에 주목하라. 나는 이 단어를 과감히 사용할 것이며, 이것에 대해 결코 변명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감정이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평소 나의 소신이다.
Ⅲ부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진정한 예배를 회복하라
우리는 클럽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한다. 이 사실 때문에 나는 매우 슬퍼하며 근심하고 있다. 우리의 예배가 온전히 회복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우리의 교회에 들어와서 우리가 거룩한 백성임을 즉시 느낄 것이다. 그들은 엎드려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고전 14:25)라고 말할 것이다.
6장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것은 참예배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있다. 없는 것은 오직 예배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서다. 그런데 현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예배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예배를 배우지 못하고 대신 연예오락을 배웠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있다. 없는 것은 오직 예배뿐이다. 우리는 교회 화장실에 난방장치를 설치하는 데 얼마의 돈을 써야 할지 결정하기 위해 예산집행위원회에 앉아서 머리를 짜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따뜻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도회에 참석하는 것을 이만큼 중요하게 여긴다면 아마 교회는 확 달라질 것이다. 기도회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우리가 예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교회를 경영하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내가 볼 때 현재 아주 끔찍한 현상이 우리 가운데 벌어지고 있다. 기도하지 않고 예배도 드리지 않는 집사와 장로와 목사들이 교회를 경영하면서 교회의 나아갈 길을 결정하고 있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닌가? 기도하지 않고 예배도 건성으로 드리는 사람은 교회의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거나 투표할 권리가 없다. 그러나 작금의 교회들에서 여자 교인들은 기도하고 남자 교인들은 투표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남자 교인들도 밤늦도록 기도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 시간에 교회의 사안에 관해 결정을 내려야 한답시고 소파에 앉아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낸다.
우리는 예배하지 않기 때문에 교인들의 헌금을 엄청나게 낭비하고 있다. 우리는 일하는 시늉만을 낸다. 우리의 자동차는 차축이 도로 포장용 나무벽돌에 걸려 공회전만 하고 있다. 엔진 소리만 요란하고 기름만 낭비했지 도대체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한다. 오, 형제자매들이여!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서다. 그런데 현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예배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예배를 배우지 못하고 대신 연예오락을 배웠다.
지금 연예오락이 가장 판치는 곳을 꼽으라면 영화계 다음으로 교회를 꼽을 수 있다. 오늘날 행동보다 말이 앞서고 내실보다 허세가 통하는 동네를 꼽으라면 단연 정치 분야이고 그 다음이 교회들이다. 혹시 “예배만 하고 다른 것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라고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다면 걱정할 것 없다. 예배만 드리고 다른 것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예배를 드린 사람은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이것이 예배의 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들에 대해 침묵하는 지를 범해서는 안 된다. ‘교회를 따분한 곳으로 만드는 사람’이 되거나 ‘교회를 귀찮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 중에서 양자택일해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후자가 되겠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찬양하지 않고 침묵에 빠진 권태로운 교회보다는 사람들을 귀찮게 할지라도 계속 찬양하는 교회가 낫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루신 놀라운 일들이 침묵에 묻혀 잊혀져서는 안 된다. 온 땅이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해야 한다. 온 땅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해야 한다. 그리하면 이방인과 유대인이 거룩한 일과 거룩한 예배에 동참할 것이다. 교회는 크랭크를 돌려가며 거대한 기계를 조작하는 장소가 아니다. 어떤 목회자는 미소를 지으며 크랭크를 돌린다. 모든 사람은 그를 사랑하고, 그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그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월급이 나오기 때문이다.
결국 목회자는 크랭크를 돌리고, 그 힘으로 교회라는 큰 기계가 돌아간다. 이런 현상을 볼 때 나는 너무나 슬프다. 나는 예배자들 가운데 있고 싶다! 당신은 그 이유를 잘 알 것이다. 나는 당신이 비록 작은 무리이지만 모두 성령 충만하여 예배하기를 원한다. 나는 거대한 기계를 원하지 않는다. 예배자의 무리를 원한다. 당신도 나와 같은 생각이면 좋겠다!
7장 이제 예배 중심으로 살기로 결단하라
오늘 당신에게 갈망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결단하라. 미지근한 신앙에서 탈피하라. 반쯤 죽은 것 같은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나라.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 당신과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와 그분을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믿으려면 성경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의 교훈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담배를 끊기 위해서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담배를 피우라는 말은 아니다. 담배는 당연히 끊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담배를 피도록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코가 굴뚝 역할을 하도록 콧구멍을 하늘로 향하게 만드셨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술을 끊기 위해서도 아니다. 물론 술을 마시라는 말은 아니다. 당연히 술을 끊어야 한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 것은 아내를 구타하는 행위를 그만두기 위해서가 아니다. 물론 아내를 구타하라는 말은 아니다. 당연히 아내를 때려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은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본래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우리를 지으신 위대한 하나님을 숭모하고 찬양하는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 믿는다는 말이다.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 믿는다는 말이다. 얼굴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존전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며 하나님을 닮기 위해 믿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의 이마에 있도록 하기 위해 믿는다는 말이다.
Ⅳ부 예배에 관한 31가지 묵상
01. 위기에 처한 기독교(출애굽기 3:5)
사실 지금의 교회들에게 부족한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문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배’이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우리에게 없다.
02.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중심이시다(마태복음 18:20)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런 프로그램이 하나님의 임재를 대신하는 현상이 우리 시대에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영광의 주님을 보지 못하고 온통 프로그램에 관심을 쏟는다. 대개의 경우, 어떤 도시에서든지 가장 인기 있는 교회는 가장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교회이다. 대중을 즐겁게 해주는 프로그램을 가장 많이 제공하는 교회가 가장 인기 있는 교회라는 말이다.
03. 진정한 예배의 회복(시편 96:8,9)
대개의 경우, 우리의 집회에서는 경건한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없고, 지체간의 연합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인식이 없으며, 차분함과 엄숙함과 경이로움과 거룩한 두려움도 없다.
04. 예배의 기술을 가르쳐주소서(요한계시록 5:13)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기독교가 이 격변의 시대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렇게 되려면 예배의 열심을 회복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을 새롭게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더욱 깊이 있는 영적 생활에 대한 공포증과 편견을 버리고 다시금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차가운 마음에 불을 붙이고 진정한 예배의 기술을 가르쳐주실 수 있다.
05. 헛된 예배 활동을 중단하라(시편 122:1)
그리스도인의 여러 활동 분야 중에서 가장 낭비가 심한 분야가 예배인 것 같다. 어떤 사람이 20년 동안 주일 대예배에 참석했다고 해보자. 주일만 돌아오면 그는 집을 떠나 교회로 가서 예배에 참석한 다음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판에 박은 듯한 행동을 하는 데 매주 2시간이 소요 되었다. 20년 동안 했으니 총 2,080시간이 소요된 셈이다. 이것을 날짜로 환산하면 약 87일이 된다. 그런데 만일 그가 20년간 예배를 헛되이 드렸다면 그는 결국 87일을 낭비한 셈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비극적인 낭비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보내는 매순간을 즐기며 거기에서 유익을 얻을 것이다. 제대로 배워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순종하듯이 하나님께 순종할 것이다. 이런 순종은 낭비가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영광을 가져다준다.
06. 향기로운 예배를 드려라(이사야서 1:16)
대제사장이 향을 가지고 성소로 들어가 하나님께 피워 드렸던 시대로 돌아갔다고 가장해보자. 만일 제사장이 자신과 사람들의 코를 틀어막게 하는 악취를 풍기는 재료를 향기로운 재료에 섞는다면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겠는가? 불에 탈 때 향기 대신 악취를 내뿜는 것이 우리의 본성 안에 있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겠는가? 훈련받지 못하고 교정하지 못하고 정화되지 못하고 순수하지 못한 것이 우리의 본성 안에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본성 중에 악한 것을 그대로 지닌 채 우리의 일부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절반쯤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생명의 길이 될 수 없다.
07. 경외의 탄성을 발하라(로마서 11:33)
인간이 무릎을 꿇고 경외하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듣고 두려움에 떨 때 인간의 정신은 철저히 무력해진다.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정신에게 충실히 종노릇 해온 말도 완전히 힘을 잃기 때문에 정신이 보고 들은 것 역시 표현해내지 못한다. 이런 놀라운 순간에 예배자는 오직 “오!”라고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다. 이런 단순한 외침은 유식한 언어적 표현보다 더 훌륭한 웅변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달변보다 이런 짧은 외침을 더욱 기뻐하신다.
08. 얼굴을 땅에 대라(창세기 17:3,4)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인간은 순종하는 태도로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이것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이상적인 교제이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살아 있는 개인적인 체험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09. 당신의 생각을 성소로 만들라(이사야서 57:15)
최근에 나는 나의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았다. ‘악한 행위’ 뿐만 아니라 ‘악한 생각’도 나를 고통스러운 회오와 회개로 몰아넣을 수 있다. 단지 ‘악한 생각’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의 임재의 느낌 그리고 신령한 느낌을 상실 할 수 있다. 이제껏 하나님은 나에게 “나는 너의 생각 안에 거한다. 너의 생각이 내가 거할 수 있는 성소가 되게 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 당신의 생각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가 되게 하라. 그리고 생각뿐만 아니라 당신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말라.
10. 도덕적 존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한계시록 4:10,11)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예배의 사례를 살펴보라. 그러면 도덕적인 존재들은 마땅히 깊은 헌신과 기쁨과 경건 가운데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1. 감사의 단계를 넘어서 감탄의 단계로 나아가라(시편 145: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긍휼에 대해 감사하는 것은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관점을 조금 바꾸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하나님께 감탄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묻고 싶다. 감탄의 단계까지 올라서지 못하는 예배는 초보적인 예배에 불과하다. 예배자가 자신의 문제와 자신의 행복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그는 예배자로서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우리의 예배가 감사의 단계를 지나 감탄의 단계로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성장하기 시작한다.
12.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시편 33:8)
절대적으로 순수한 것이 이 세상에서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 매혹, 놀라움, 감탄 그리고 헌신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순수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순수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영혼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요, 지고의 순수이다.
13. 인생의 목적에 충실하라(창세기 17:1)
피아노를 만든 사람은 피아노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그 목적을 위해 만들었다. 그는 “이것은 열아홉가지 용도로 쓸 수 있는 아주 좋은 피아노입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이것은 아름다운 음악 연주를 위해 만들어진 피아노입니다”라고 말할 뿐이다. 방금 말한 피아노의 비유에 깊은 진리가 담겨 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지혜롭게 적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속에는 “너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네가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면, 너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다. 너는 나를 예배하고 나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네가 이 목적에 충실하지 않으면 너의 삶은 천박하고 이기적이고 인본주의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삶으로 변질될 것이다”라는 교훈이 들어 있다.
14. 하나님을 올바로 알게 하소서(이사야서 6:3)
우리는 기독교의 질을 끌어올려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사도, 지혜자, 선지자, 성자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한 ‘하나님의 개념’을 우리도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깨닫는다면, 우리의 영성은 저절로 높아질 것이며, 우리의 신앙생활은 새로운 활력을 얻을 것이다.
15. 날마다 예배하라(하박국서 2:20)
나는 당신에게 일주일에 7일을 예배하지 않으면 일주일에 하루도 예배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주일예배 다음에 월요일 예배, 화요일 예배, 수요일 예배가 뒤따르지 않으면 하늘에서는 주일예배가 인정되지 않는다. 생활 전체와 유리된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16. 우리의 진정한 의무는 무엇인가?(에베소서 5:8-10)
나는 우리가 항상 교회에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항상 교회에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책상에 앉아 일하거나 전철을 타고 가거나 자동차를 모고 가는 중에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설거지를 하거나 다리미질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 불법적이고 악하고 잘못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 우리가 교회에 가서 예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하고 나머지 6일 동안 예배(경배)속에 살지 않는다면 주일의 예배는 참예배가 아니다.
17. 월요일에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라(고린도전서 10:31)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상자 안에 넣어 둔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단시 교회의 성소에 계실 뿐이다. 교회의 문을 나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하나님을 큰 상자 안에 넣어두고 온 것 같다고 느낀다.
18. 창조주 앞에 절하다(출애굽기 34:8)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거룩하신 분인지 깨닫기 위해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외하는 분이시다. 이사야는 경외하는 하나님을 보았을 때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라고 외쳤다. 다니엘은 이 하나님을 알았을 때 경외심으로 가득하여 무릎 꿇고 경배하였다. 온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다. 놀라움과 신비로운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 앞에 절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19. 너무나 바쁜 그리스도인들(시편 51:16,17)
많은 교회에서 끊임없는 종교활동이 곧 봉사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많은 설교를 통해 현대 교회는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바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큰 가치는 없다고 가르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이라도 정ㅈ기해질 수 있다면, 조용한 시간에 우리에게 깨달음이 찾아와 “오늘날, 믿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진정한 영적 예배를 찾아보기 힘들다”라고 속살일 것이다.
20. 온전한 찬송가를 부르자(시편 146:1,2)
첫째, 모든 훌륭한 찬송가들의 가사가 함량 미달의 절들을 제거하는 편집 과정을 거치고 살아남은 절들이다. 둘째, 통상 찬송가 한 절을 부르는 데 채 1분도 걸리지 않는다. 셋째, 최고의 찬송가들 중 상당수는 수준 높은 사람들까지 모두 만족시킬 수 있도록 최대한 축약된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볼 때, 우리는 예배를 지루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예배를 빨리 끝내기 위해 찬송가를 생략해 부르는 것이라고 결론 내리지 않을 수 없다.
21. 찬송가가 성령님을 증거한다(요한복음 14:16,17)
교회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기독교 찬송가들은 성령님의 신성을 분명히 증거했다. 기쁨과 은혜로 충만한 찬송가들을 통해 교회는 성령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경배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의 찬송가들 중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너무 친숙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그것들의 참의미를 놓치는 경향이 있다.
22.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시편 55:17)
당신에게 두 무릎이 있다면 당신은 얼마든지 하늘을 향해 무릎을 꿇을 수 없다면 마음으로라도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할 수 있다. 무릎을 꿇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는 것이 기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감옥 안에서도, 비행기 안에서도, 배 안에서도 당신은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며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3.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라(시편 143:5,6)
하나님을 제대로 알려는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에 대해 깊이 묵상해야 한다. 인간은 이제까지 자신과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했지만 깊은 영성에 도달하는 손쉬운 지름길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깊은 영성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이지만 거기에 도달하려면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24. 하나님을 찾고 또 찾으라(출애굽기 33:13)
과거의 거룩한 남자들과 여자들에 대해 깊이 알아보라.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갈망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언제나 밤낮으로 몸부림치고 탄식하고 기도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의 기쁨은 몇 배로 증가하였다.
25. 당신만의 은밀한 장소를 가져라(시편 5:3)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을 피해 날마다 당신만의 조용한 장소를 찾으라. 온전히 하나님께 당신 자신을 바쳐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말하는 것들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본래 당신을 찾으라. 당신의 관심사를 두세 가지로 제한하라. “어떻게 하면 손해를 보지 않을까?”라고 고민하지 말라. 영적인 일에 집중하는 습관을 길러라.
26. 낮아짐을 통해 진리로 인도하신다(열왕기상 17:4)
주님은 우리가 지극히 낮아졌을 때 우리 각 사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잘 아신다. 주님은 우리를 진리에서 진리로 인도하신다.
27. 하나님이 높아지소서(사무엘하 22:47)
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의 소유물보다 더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저의 삶에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저는 이 세상의 보화가 부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친구들보다 높아지소서. 제가 친구들에게 버림받아 땅의 중심에 호로 서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높아지시기를 원합니다.
28. 성령 충만의 목적은 무엇인가?(디도서 3:5,7)
성령님의 첫째 사역은 ‘중생의 씻음’을 통해 죽은 영혼을 살려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도록 만드는 것이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봉사를 위한 능력과 은사를 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봉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거룩함과 신령한 예배이다.
29. 고독 속에서 주님을 경배하라(마태복음 14:23)
현대 문명사회는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그리스고인의 경건생활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현대인들은 주위의 산만함 때문에 지치고, 혼자 조용히 보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없어서 낙심한다. 그러나 조용한 시간을 낼 수 있다면 그들은 새롭게 힘을 얻어 세상으로 나가 세상과 다시 맞설 수 있을 것이다.
30. 묵상과 경배를 위해 시간을 내라(시편 119:130,131)
우리는 정신없이 빠르게 달리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시간을 드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부르실지라도 우리는 그 부름에 대답할 시간이 없다. 우리는 묵상과 경배를 위한 시간을 내는 데 아주 인색하다.
31. 우리는 하나님의 친구들이다(야고보서 2:23)
성자와 선지자들이 역사 속에서 영적 거인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들에게 분명히 임재하신 분과 의식적으로 교제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그들 곁에 계신 분과 대화를 나눈다고 온전히 확신하는 가운데 기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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