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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및 신앙 서적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 유기성 지음

by 은총가득 2020. 4. 22.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

                                                     유기성 지음 

 

                                                                                                                                                          

CONTENTS

추천사

프롤로그

Chapter 01. 십자가 능력을 경험하면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한 인생이 된다.

Chapter 02. 하나님께 자백하고 죄 씻음 받는 삶으로 죄를 이겨나간다.

Chapter 03. 하나님께 내 자아를 바쳐야 나는 죽고 예수가 산다.

Chapter 04. 온전한 순종이 성령 충만의 능력이다.

Chapter 05. 염려하지 않는 진짜 믿음을 발휘하라.

Chapter 06. 하늘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천국 소망에 눈뜬다.

Chapter 07. 사랑만 하며 사는 축복을 누리는 인생을 살라

에필로그

    


 

 

Chapter 01. 십자가 능력을 경험하면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한 인생이 된다.


 ◆ 십자가의 도는 어떤 능력인가?

구원 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를 보고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에 십자가는 그저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우리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첫째, 십자가는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한다. 

십자가의 도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게 뭐 대단한 능력이라고’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나 같은 죄인’, ‘말할 수 없는 죄인’,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 구원 받았다고 기도하고 찬송할 때마다 고백하면서도 누군가 자신의 허물을 지적하거나 비판하면 얼마나 화를 내는지 모릅니다. 실제로는 자신이 말할 수 없이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십자가를 깨달은 성도가 경험하는 첫 번째 은혜는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죄인인지 전율에 휩싸일 만큼 자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게 되면 통회 자복하는 역사부터 일어납니다.

 

둘째, 십자가는 진짜 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십자가의 도는 우리가 어떤 복을 받았는지 깨닫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언젠가 터질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다들 그럴싸하고 멀쩡하게 보여도 그 사람의 과거를 들추고 파헤쳐보면 정말 기막힐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심판대 앞에서 그 죄들이 낱낱이 공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악과 허물이 다 씻음을 받아 깨끗해지는 복을 받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셋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한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하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하고, 그 죄가 모두 사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성도는 이제 십자가의 또 다른 능력을 경험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격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 다시 십자가 

다시 한번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가 정말 능력으로 다가오는지 이 시간에 점검해보십시오. 당신이 예수님을 진정 구주로 믿었다면 성령님이 역사하십니다. 십자가의 도가 어째서 하나님의 능력인지 우리는 이제 경험해야 합니다. 십자가 외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놀라운 은혜를 완전히 깨달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실제로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해야만 나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죄인인지, 그런데도 이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도대체 얼마나 큰지 비로소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기본입니다. 이 기본을 깨닫고 나면 우리 인생이 확연히 달라집니다. 세상 것을 추구하고 그것이 채워져야만 복인 줄 믿었던 삶이 하나님만으로 충분한 삶이 됩니다. 십자가만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는 삶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기적이자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Chapter 02. 하나님께 자백하고 죄 씻음 받는 삶으로 죄를 이겨나간다.

 

◆ 여전한 죄의 역사

구원 받았다는 것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회심한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여전히 사람의 몸을 입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죄를 떠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죄를 용납하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죄 위에 복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 없으며, 부흥이 임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죄가 있으면 기도의 문이 막히고, 감사와 기쁨이 사라지고, 연단이 지속됩니다.

  

◆ 회개의 복음을 들어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 죄들은 더 이상 내 안에서 역사하지 못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성도들 속에 남아 있는 내적 죄성을 온전히 없애주시기 위해 성결의 은혜를 예비해두셨습니다. 이것이 회개의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이 말씀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가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비록 죄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죄가 사해질 뿐만 아니라 모든 허물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예 죄를 지은 적도 없는 것처럼 여겨주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가요? 회개는 그 자체가 복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지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기쁨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회개 없이 살기 때문에 기쁨이 사라진 것입니다.  

 

◆ 회개하는 삶이 죄를 이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잘못한 사람이 와서 용서를 빌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 490번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라 한없이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회개할 때마다 용서해주시니까 아무리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뜻인가요? 여기에는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회개의 삶을 살면 죄를 이기게 됩니다. 스스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해도 죄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해도 죄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회개하는 삶을 살면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 회개는 부흥의 불씨다.

회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입니다. 회개의 순간 부흥이 시작됩니다. 한국 교회의 부흥 역시 회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 자백하는 남자들

진정한 회개란 무엇일까요? 회개란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악을 행하는 것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롬 7:19)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절대 죄 짓지 말 것을 요구하신다면 그것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죄를 어쩌지 못해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입니다. 우리에게 죄를 자백하기 원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겨우 자백하는 것이 회개입니까?”라고 의문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자백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몰라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시인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남자들의 은밀한 전쟁≫의 저자 패트릭 민지 목사는 그의 책에서 진정한 회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자신이 싸우고 있는 죄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고백하여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면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그 문제를 기꺼이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밤새도록 가슴을 치며 울고 금식하여도 아직도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회개 잘하는 그리스도인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아무 죄도 짓지 않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심령을 쓰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하시며 사랑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더불어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버리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사울 왕이 다윗보다 죄를 많이 지어서인가요? 사울 왕과 다윗의 차이는 바로 회개에 있습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나의 모든 허물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어느 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아느냐?” “예, 제가 잘 압니다.” “그러면 네가 다른 사람을 볼 때에도 그 마음으로 보아라.” 나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째서 내 허물과 죄악을 그냥 두시는가? 그것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지 말도록 그러신 것이구나!’ 진짜 회개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Chapter 03. 하나님께 내 자아를 바쳐야 나는 죽고 예수가 산다.

 

◆ 예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그 자리에 함께 계셨는데도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던 경우가 몇 군데 나옵니다. 그중 하나가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아 가셨습니다. 그런데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이 계셨는데도 중요한 잔치 음식이 떨어져서 혼주측이 난감해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디베랴 바닷가로 간 베드로와 여러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부활하신 예수는 동일하게 그 바닷가 현장에서 고기 잡는 베드로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밤 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요 21:4,5) 예수님과 한 장소에 있었는데도 베드로는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채 결실 없는 수고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으니 늘 승리와 풍성한 축복으로 가득하리라 기대하건만, 우리는 이런 난감한 사태나 결핍의 상황이 삶의 한가운데 벌어지는 것을 수없이 경험하게 됩니다. 분명히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먼저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 일어난 일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잔칫집에 초청을 받아 가셨지만 그곳에서 아무 일도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손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저 초대받은 자리에 앉아 내오는 음식을 대접받으며 계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 하인들에게는 “이분이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지 하라”고 일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항아리에 물을 떠다 날랐더니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바닷가에 계신 것도 모른 채 자기 생각대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라고 하셨고 그 말씀을 따랐을 때 고기가 153마리나 잡혀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베드로는 자신에게 명령하신 분이 예수님인 줄 알았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어도 예수님을 단지 손님으로 모셨다면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처럼 우리 삶의 포도주가 떨어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 우리에게 명하시는 위치가 되고 우리가 순종하기 시작할 때 문제는 해결됩니다. 예수님을 멀리 바닷가에 세워두지 말고, 예수님을 내 인생 한가운데서 직접 명령하시는 자리로 모시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 죽음으로 하는 순종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는 말은 이제 예수님께 온전히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순종의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노력하여 순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력하여 순종하려고 하면 힘들어서 못합니다. “예수님, 힘들어요.” “주님이 하라고 하시는 대로 하려니까 죽을 것 같아요.” 힘들다, 어렵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노력하여 순종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노력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으라고 하셨습니다. 내 힘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예수님과 함께 자신의 자아가 죽었음을 믿음으로 취하는 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노력으로 죽으려 하는 사람은 죽은 척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 더 무섭습니다.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곁에 와서 건드려보면, 화들짝 일어나서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생기면, 몇 번은 참습니다. 그러다가 폭발하니까 더 크게 화를 내게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은 도를 닦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 죽으려고 하니까 속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진리는 믿음으로 취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자아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죽어야 비로소 주님이 역사하십니다.

 

불신자가 복음을 듣고 처음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사람들과 만나 인사를 나눈 것밖에 없는데, 가슴이 울렁거리고 충격과 감동이 전해진다면 어떨까요? 대답은 동일합니다. 그 교회의 성도들이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였기에 새 신자는 교인들을 만난 것 같지만, 사실은 그 교인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교회 오기 전에 ‘주님, 오늘 제가 주님의 도구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해보십시오. 그러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을 법한 성도가 눈에 들어옵니다. 웬일인지 그의 낯빛이 어두운 것 같습니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그가 마음에 걸립니다. 지나칠 수도 있지만 어색함을 이기고 옆자리에 앉아 그의 손을 꼭 붙잡고 “집사님, 힘드시지요? 제가 기도해드릴게요”라고 말을 건네는 순간, 그는 주님의 위로와 만져주심을 경험합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가 죽고 예수가 산 사람이 체험할 수 있는 기적입니다. 나 자신의 감정, 생각, 계획, 판단이 죽으면 거기서 주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죽은 사람은 표시가 납니다. 지금 내 옆에 시체가 누워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그가 시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는 코로 숨을 쉬지 않고 가슴에 손을 대보아도 심장이 뛰지 않습니다. 주위의 어떤 자극과 변화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아가 죽은 사람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어떤 말이나 평가에도 죽었고, 칭찬에도 죽은 사람이 진짜 죽은 사람입니다.  

 

Chapter 04. 온전한 순종이 성령 충만의 능력이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

 

◆ 성령 충만을 정말 간절히 구하는가?

성령을 충만히 받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성령 충만의 약속을 진정으로 믿고 구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구하라

당신은 성령 충만을 구하고 있습니까? 정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으려면 언제 어디서나, 집에서나 교회에서나, 모였을 때나 파했을 때나, 홀로 있을 때나 밤낮으로 줄곧 “하나님, 성령 충만을 주십시오!”라고 구해야 합니다. 현재 물질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당장 필요한 물질을 구하는 기도는 매일, 매순간, 밥을 먹을 때나 잠자리에 들 때나 끊이지 않고 나옵니다.

 

결국 지금 우리가 정말 간절히 성령 충만을 원하는지, 정말 간절히 성령 충만을 구하는 것인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밤이고 낮이고 성령 충만을 달라는 기도가 나오는지 한 번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우리가 진심으로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런데 돈 달라는 기도, 병 고쳐달라는 기도, 우리 아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기도는 매일매일 하면서 성령 충만함을 달라는 기도는 어쩌다 한 번 간신히 나온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성령 충만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 완전한 순종이 성령 충만이다.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완전한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완전히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 5:32)

  

◆ 순종의 마음을 원하시는 하나님

한번은 성경공부를 인도하다가 모인 분들에게 다들 지갑을 꺼내보라고 했습니다. 모두 의아해 하면서 지갑을 꺼냈습니다. 지갑을 든 열 명에게 나는 다시 개별적으로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그 지갑이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당신의 것입니까?”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 모인 자리인 만큼 알아서 하나님 것이라고 대답하는데, 두 사람이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습니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대답하면 지갑에 있는 돈을 다 꺼내서 헌금하라고 할 것 같았는지 ‘이럴 줄 알았으면 돈이라도 적게 넣어가지고 올 걸’ 하는 얼굴입니다. 나는 다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집에 통장 있으시죠? 그 통장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두 사람 정도만 “하나님 것입니다”라고 대답했고 나머지 여덟 명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또 물었습니다. “집문서, 땅문서 있으세요?” 그러자 이번엔 전부 얼굴빛이 변했습니다. 목사가 성경공부 하다말고 난데없이 있는 거 다 팔아서 교회에 바치라고 하나 하고 놀란 모양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네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누구의 것이냐?”라고 물으신다면 당신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두 번도 생각하지 말고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고 대답하길 바랍니다. 혹시 그렇게 대답했다가 하나님이 진짜 전부 바치라고 하면 어떡하나 걱정되십니까? 하지만 이런 걱정만큼 어리석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내가 가진 것을 다 가져가시겠다고 작정하셨으면 내 허락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울고 매달리며 “하나님, 이것만은 안 됩니다!”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기로 작정하셨으면 다 거두어 가십니다. 다들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우리의 생명까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럼 필요하시면 그냥 가져가시면 되지 무엇 때문에 굳이 “네가 가진 것이 누구의 것이냐?”라고 물으시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중 하나님께서도 임의로 가져가시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애당초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록, 저절로 열심히 기도하고, 저절로 열심히 전도하게 만들어놓으셨다면 어땠을까요? 그러면 우리는 죄와 싸울 필요도 없이 온전히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타락한 이후 우리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데 인격적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돌이키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주시며 끊임없이 하나님께 이끄셨고, 우리 마음의 주인이 되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그 마음을 주관하기 원하셨습니다. 그 마음 가운데 역사하시어 순종하는 마음, 곧 믿음을 받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자원하는 심령으로 순종하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Chapter 05. 염려하지 않는 진짜 믿음을 발휘하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 착한 것이 믿음은 아니다.

예수를 믿고 받은 가장 큰 축복은 믿음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지식, 교리 지식을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산에서 목회할 때 믿음이 좋다고 칭찬이 자자한 어느 젊은 집사님 댁으로 다함께 심방을 간 적이 있습니다. 함께 심방을 가던 분들도 하나같이 요즘 젊은 사람들 중에 이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드물다고 이구동성으로 칭찬하여 나도 큰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직접 만나보니 선한 인상에 내내 겸손한 태도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역시 듣던 대로 정말 신실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다과를 들며 신앙상의 고민과 기도제목을 나누는 자리에서 나는 그 집사님의 이야기에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분이 다니는 회사에 교회 다니는 사람을 아주 싫어하는 상사가 한 명 있는데, 그 상사에게 누치가 보여서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하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어째서 그를 그토록 믿음이 좋다고 칭찬하는 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심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동행했던 분들에게 그 집사님이 어째서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모든 예배에 빠진 적이 없다, 술 담배도 하지 않는다, 십일조 생활을 한다, 항상 겸손하다, 교사와 찬양대 등 활동과 봉사에 열심히 라는 칭찬이 줄을 이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깨달았습니다. 그 집사님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교회예배에만 빠지지 않는 게 아니라 학창 시절에 결석 한 번 한 적 없는 모범생 이었습니다. 십일조 헌금만 잘 내는 것이 아니라 초등학교 동창회비도 떼먹은 적이 없습니다. 교인들하고만 잘 지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면서 어느 누구와도 척을 지거나 언성을 높여가며 싸워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천성적으로 착하고 성실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그의 이런 본디 착한 성격을 믿음과 동일시했던 것입니다.  

 


◆ 믿음이 있는가?

하나님은 착한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착한 데 있지 않습니다. 물론 착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들어 쓰시는 목회자들을 옆에서 지켜보면 때로는 자질상의 흠결도 보이고 간담이 내려않을 만큼 놀라는 순간도 경험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분들의 믿음이 남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 절대 못 맡기는 믿음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염려에 대처하는 태도를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이 아니라 ‘염려와 근심’입니다. 우리는 다 염려를 주께 맡기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염려하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염려하지 않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염려는 노력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염려보다 더 큰 것을 믿게 될 때 사라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면 염려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 돈을 믿는 믿음?

우리에게는 참 걱정거리가 많습니다. 돈 문제, 자녀 문제, 건강 문제 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염려를 모두 주께 맡겨 버리라고 하지만 솔직히 염려의 실체가 잡히지도 않고 또 그것을 어떻게 맡겨야 하는 건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힙니다.

그런데 도통 안 맡겨질 것 같은 염려도 돈에 얼마나 잘 맡기는지 모릅니다. 갑자기 천만 원이 생겼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그러면 천만 원에 해당하는 만큼의 염려가 싹 맡겨집니다. 자녀 대학등록금, 이번 달 생활비 걱정도 천만 원이 생기는 순간, 어디 다른 데 맡기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이것도 믿음의 역사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돈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천만원이 있으면 천만 원만큼의 염려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통장에 언제든지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는 거액이 있다면 아마 웬만한 일에 대한 염려가 사라질 것입니다.

교회에서 재정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보면 하나님을 믿는 교회인지 돈을 믿는 교회인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어떤 행사를 하느냐 안 하느냐를 결정할 때 하나님께 묻는 것이 아니라 회계에게 예산이 있는지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돈이 행사 여부를 허락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돈을 믿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돈으로 환산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과연 얼마나 나오겠습니까? 감히 계산할 수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시며 항상 나와 함께하십니다. 나를 정말 사랑하시며 복 주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면서도 돈 십만원, 백만 원어치의 걱정거리조차 내려놓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과연 이것이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일까요?

  

Chapter 06. 하늘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천국 소망에 눈뜬다.

 

◆ 노란 고무신

1950년대 초반 강원도 어느 깊은 산골에 상수라는 아이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상수는 큰아버지로부터 노란 고무신 한 켤레를 선물 받았습니다. 난생 처음 받아본 새 고무신이 너무 아까웠던 상수는 그 신발을 신지 않고 손에 들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상수는 개울에서 노란 고무신을 씻다가 그만 한 짝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고무신은 물살을 타고 떠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상수는 고무신을 건지려고 무작정 개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고무신은 계속해서 떠내려갔고 큰 강이 이르렀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고무신을 따라갔는지 상수는 결국 길을 잃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처구니없이 졸지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된 상수는 온갖 고생을 하며 한 많은 세월을 살았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초로의 노인이 된 상수는 TV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에 나와 굵은 눈물을 흘리며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했습니다. 마침 그 시간에 그의 형님이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동생을 알아보고 방송국에 연락했고 그렇게 해서 다시 가족과 만나게 되었지만, 어머니는 이미 자기를 잃어버리고 난 뒤 얼마 안 되어 돌아가셨고, 늙으신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치매를 앓아 5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자식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된 상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나는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우리 인생도 저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란 고무신처럼 별것 아닌 것을 붙잡으려고 내달리다가 정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는 허탄한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삶이 끝날 때, 죽음 앞에 섰을 때에야 비로소 여태까지 좇은 노란 고무신 한 짝 때문에 더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돈, 명예, 권력, 건강, 일 등을 꼽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일 뿐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정말 소중하고 절대적인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은 언제나 죽음 앞에서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떠오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동안 마땅히 소망해왔던 것이어야 합니다.

  

◆ 천국 소망이 분명한가?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을 상실의 길로 인도하는 헛된 노란 고무신 대신 무엇을 붙잡아야 할까요? 그것은 천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노란 고무신 한 짝이 인도한 곳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북아프리카 알제리에서 선교하던 찰스 마쉬 선교사는 현지에서 7명에게 세례를 주었지만 모두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이 선교사는 너무 안타까워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래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의 말씀이 요한계시록 14장 13절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4:13)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얻게 된 가장 귀한 축복은 ‘천국을 소유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천국 소망을 가진 자일까요? 나는 어려서부터 천구고가 지옥에 대해 배웠고 수없이 설교를 들었기에 천국이 있다는 거소가 내가 천국에 갈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천국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의 천국 소망에 대하여 물으셨습니다. 그것은 천국에 갈 것을 믿는 내가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농부’ 처럼 기쁘냐는 것이었습니다. 남의 밭에 가서 일하던 농부가 그 밭에서 남모르는 보화를 발견하는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샀을 때의 심정처럼 가슴 뛰고 설레며 기쁘고 만족스러우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예수님의 천국 비유에 나오는 농부에 대해서는 알지만 그 기쁨은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소망에 대하여 머리로만 알았지, 진정한 소망이 없었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천국의 보화를 소유했으면서, 자신이 엄청난 보화를 얻었다는 기쁨과 만족은 소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보화를 알지도 못한 채 이 땅의 것에만 소망을 두고 현재만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아직도 사망 권세에 사로잡혀서 살아갑니다. 아직 소망의 사람이 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놓아주려고 오셨습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히 2:15)


    ◆ 당장은 지금 당장 천국 가고 싶은가?

교인들에게 “천국 가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면 모두들 “아멘”하며 기쁘게 화답합니다. 그러나 “지금 천국 가시기 바랍니다” 하면 대개 당황합니다. 더러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내색을 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이 좋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급히 가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솔직한 말로 돈 있고 건강하면 이 세상도 살 만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좋은 곳, 멋진 곳을 보아도 “야, 여기가 천국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도무지 천국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짜 천국을 보여주신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아마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서 빨리 천국에 보내달라고 떼를 쓸 것입니다. 천국 이외 다른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져버릴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을 보여주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천국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대하고 간절히 사모할 만한 우리의 영원한 본향입니다.

   

Chapter 07. 사랑만 하며 사는 축복을 누리는 인생을 살라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람에게는 누구나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내 경우에는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이 시기마다 달랐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싸움을 잘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싸움은 커녕 말다툼 한 번 제대로 못했던 나는 도네 골목대장 노릇을 하던 친구가 늘 부러웠습니다.

 

그러나 중학교에 진학하자 기준이 바뀌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고교 입시가 있었기 때문에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우열반이 편성되었습니다. 공부를 잘한 나는 1반이 되었고 골목대장이던 친구는 13반이 되었습니다. 중학교에서는 아이들이나 선생님도 모두 공부 잘하는 아이를 제일로 여겼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나는 ‘싸움을 잘해봐야 소용없구나. 공부 잘하는 것이 제일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올라가니까 생각이 또 바뀌었습니다. 사춘기인 그때는 온통 머릿속에 여학생 생각뿐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여학생에게 인가가 있을지 항상 고민했습니다. 3센티도 안되는 머리카락을 계속 빗어 넘기고 교복바지는 항상 칼주름을 잡고 다녔습니다. 그때는 여학생에게 인기기 있는 것이 제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보니 돈이 최고였습니다. 모든 것이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제일이라고 여기며 삽니다. 돈보다 명예를 더 추구할 때가 있고, 병에 걸리면 건강이 제일이라고 믿게 됩니다. 당신은 무엇을 ‘제일’이라고 생각하며 사십니까?

 

지금껏 목회하면서 나는 많은 성도들을 만나보았지만 ‘사랑’이 제일이라고 여기며 사는 사람이 참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제일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사랑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는 사람을 별로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 사랑 안에서 똑똑하라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세우고 살릴 수 있겠습니까? 영혼을 살려야 할 교회가 영혼을 실족시키고 죽음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심각하고 두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 사람이 세상을 이긴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가 사랑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았다가는 손해를 볼 까 두려워서 사업을 해도 속이면서 하고 장사를 해도 저울눈을 속이고 직장생활을 해도 불성실하고 비겁하게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행복이고 자유입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과 함께 ㄴ내가 죽었기에, 나의 죄, 연약함, 좌절, 실패는 이미 주임이 담당하셨으며 주님의 사랑, 기쁨, 충만함은 내 것이 되었습니다. 그 주님이 지금 내 안에 계셔서 나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주님만 바라보면 주님이 친히 하십니다. 믿음, 소망, 사랑도 다 주님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