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지상명령』
존 파이퍼 지음
목차
서문 : 순종의 기쁨은 명령에서 나온다
불가능한 마지막 명령
하나님을 영화뢉게 하는 가르침과 순종
예수님은 ‘감히’ 온 세상에 명령하시는가?
최종 명령의 권세와 친밀감
1 : 마음 명령 - 기쁨을 맛보라
01거듭나라
02회개하라
03내게로 오라
04나를 믿으라
05나를 사랑하라
06내 말을 들으라
07내 안에 거하라
08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09하나님을 사랑하라
10기뻐하고 뛰놀라
11하나님을 두려워하라
12하나님을 예배하라
13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도하라
14매일의 필요를 염려하지 말라
15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16교만과 싸워 자신을 낮추라
17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라
18화내지 말라
19먼저 자신의 들보를 빼고 용서하라
2 : 행동 명령 - 기쁨을 드러내라
20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함을 받으라
21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라
22좁은 문으로 들어가 승리하라
23좁은 문으로 들어가 깨어 있으라
24좁은 문으로 들어가 하나님 나라 안에 거하라
25바리새인처럼 외식하지 말라
26너희 안을 깨끗이 하라
27정결한 마음을 품으라
28원수를 진리로 인도하라
29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
30원수에게 선을 행하며 구하는 자에게 주라
31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여 주라
32네 이웃을 사랑하라
33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34예수님이 사랑하신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
35희생적으로 후하게 주라
36보화를 하늘에 쌓아 두라
37하나님 나나를 위해 베풀라
38진리를 소중히 여기고 맹세하지 말라
39맹세하지 말고 “예”나 “아니오”만 하라
40성경적으로 사랑하라
41하나님이 짝 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42죽을 때까지 은혜로 함께 살라
43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44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
45예수님의 교회가 되게 하라
46제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주의 만찬을 먹어라
47너희 빛을 세상에 비추라
48너희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49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50세상 끝까지, 때가 찰 때까지 증거하라
서문 : 순종의 기쁨은 명령에서 나온다
예수님의 모든 계명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선을 행함으로써 그 계명을 지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순종하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실체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나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신 최고의 명령은, 모든 민족에게 그분이 명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다. 이 명령은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과도 연결된다. 우리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세상은 그분의 영광스러운 일의 열매와 그분의 영광스러운 존재의 가치를 볼 수 있다. 세상이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이유이며 그분의 사명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그분의 명령을 행해야 하는 이유이다.
1 마음의 명령 - 기쁨을 맛보라
♣거듭나라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 오직 하나님만이 당신을 위해 하실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라.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좀 더 도덕적인 삶이 아니다. 새 생명이 있어야 한다. 새 생명은 온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으로, 근본적이며 초자연적이다.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죽은 자들은 스스로에게 새 생명을 줄 수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야” 한다(요 1:13).
♣나를 사랑하라
예수님이 세상을 향해 그분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그분이 사랑받기에 무한히 합당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분의 영광과 임재와 보살핌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궁극적인 이유는,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흘러넘치게 하시려는 것이다.
♣내 안에 거하라
예수님이 지속적 헌신의 필요성을 가르치시면서 “내 안에 거하라”고 명령하신다. ‘거하다’라는 단어는 특별한 종교적 의미가 없다. 신약의 언어에서 이 단어는 ‘머물다’, ‘계속하다’, 때로는 ‘살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평범한 단어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뜻이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내 안에 계속 있어라. 항상 나를 네 거처로 삼아라.” 바로 평생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하시면서 이러한 명령을 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에, 우리를 가지에 비유하신다. 비유의 핵심은 열매를 맺는 능력, 즉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으로 열매 맺는 삶을 사는 능력은(요 15:12) 우리가 예수님에게 생생하게 붙어 있을 때 그분에게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와 같아서 생명을 주고 열매를 맺게 하는 모든 수액이 우리에게로 흘러들 수 있다.
예수님은 열매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다. 그분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생명을 주며, 능력을 주며, 열매를 맺는 가지에, 즉 예수님에게 생생하게 붙어 있다는 뜻이다. ‘생생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게 무슨 뜻인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할 때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과 열매를 맺거나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서로 같지 않다는 것이다. 열매를 맺고, 계명을 지키는 것은 그분 안에 거함으로써 오는 결과다. 그분 안에 거함으로써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이 말씀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라는 뜻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열매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열매가 포도나무에 직접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음으로 열매를 얻는 것이다.
예수님이 의미하신 것은, 우리가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즉 우리가 사랑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요 15:12), 우리가 더 이상 그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진리의 말씀과 그분의 확실한 사랑을 지속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우리의 생수로 믿는다는 것은 그물을 마신다는 뜻이다. 그 물을 맛보고 그 물에 만족한다는 뜻이다. 포도나무 줄기에서 가지로 흘러드는 수액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것을 받고, 이것을 마시고, 이것을 맛보고, 이것으로 영혼을 만족시킨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 날마다 새로운 만족을 얻는 것이 열매를 맺는 비결이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 우리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덕분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라
세상 모든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예배한다.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에서 가장 세속적인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을 만큼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게 있다. 그것이 하나님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무엇인가를 소중히 여기는 행위가 예배가 되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보화에게는 우리의 감정과 의지와 생각과 행동을 빚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영광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할지니라”고 명령하셨다(요 4:24). 당신의 영이 진정으로 그 진리를 깨닫고 영혼이 깨어나는 예배, 감동적인 예배가 되게 하라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때 새로운 ‘성전’ 곧 하나님과 만나는 새로운 장소가 되실 거라는 뜻이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6).
“다윗의 아들 메시야가 여기 있으니, 그가 성전을 대신하리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을 만나는 성전이다. 그분은 우리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마 26:28) 자신의 피를 쏟으셨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으며”(막 10:45), 친히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할 길을 열어 놓으셨다(요 3:16, 36). 죄인들이 예수님의 피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영이 없는 예배는 죽은 것이다.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헛된’ 것이다. 진정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배하는 마음이 예수님의 진리를 파악하고, 예배하는 영이 그 마음이 아는 진리로 일깨움과 감동을 받아야 한다.
모든 삶이 예배가 된다. 예배의 본질은 우리 마음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시각과 우리 영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애정에 달려 있다. 하나님을 귀히 여기는 영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그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도하라
믿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항상 구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하나님이 예수님 때문에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그분에게 가장 좋아 보이는 방법으로 우리를 도우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거나 더 나은 것을 주신다는 뜻이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떡을 달라 하면 아버지가 그에게 돌을 주겠는가? 아니다. 그러나 떡이 곰팡이가 피었다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떡을 주지 않을 것이다. 대신 케이크를 주실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의 기도보다 더 나은 것을 받았을 때는 하나님의 응답에 놀랄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응답은 음식 맛이 아니라 약처럼 쓸 수도 있으며, 그렇게 그 약이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할 것이다.
♣매일의 필요를 염려하지 말라
몇몇 왕이 백성을 계속 염려하게 만들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매우 효과 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백성이 먹고 사는 것을 염려하다 보니 왕의 곳간에서 필요한 양식을 얻기 위해 왕의 명령을 더 잘 들었던 것이다. 염려가 백성이 제자리를 지키게 한다. 두려움이 군주 정치를 확고히 한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약속은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게 하시겠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생명을 지키시겠다는 뜻도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내일 몫으로 두신 문제를 미리 풀려 하지 말라. 내일 문제를 염려라는 형태로 오늘에 끌어들이지 말라. 하나님은 내일도 우리 하나님이시다. 내일의 문제를 위한 은혜는 내일 주실 것이다. 그 은혜는 오늘 주시는 게 아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라
겸손의 열쇠는 단순히 공로가 없다고 느끼는 게 아니라 값없는 은혜를 느끼는 것이다. 겸손은 단지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말하는 종과 같지 않고, 아버지의 품에 안겨 쉬는 어린아이와 같다. “진실로 너희이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 무익한 종처럼 자신을 낮추고, 신뢰하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어린아이와의 비교에서 핵심은 무엇인가? 원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초점은 주로 세 단어에 집중된다. 겸손과 작은 자들과 믿음이다. 참된 겸손은, 겸손이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선물이라는 것을 안다. 겸손이 노력의 산물이라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겸손을 자랑스럽게 느낄 것이다. 겸손은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자신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선물로 받기 위한 선물이다.
♣화내지 말라
예수님은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하거나 믿으라는 명령에서처럼, 그분의 명령을 단순히 외적행위나 단순히 의지만 굳으면 된다고 정의함으로써 충분히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우리의 감정보다 더 통제하기가 쉽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분노의 예를 보자. 예수님은 외적인 살인 행위도 잘못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뒤에 있는 내적 분노도 잘못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외적 살인뿐 아니라, 나아가 외적 살인 뒤에 있는 내적 분노의 감정까지도 느끼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2 행동 명령 - 기쁨을 드러내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 승리하라
예수님은 삶이 전쟁이라고 가르치셨다. 그분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을 때(눅 13:24), ‘힘쓰라’로 번역된 헬라어 아고니제스데는 우리가 투쟁하고, 씨름하며, 스스로 노력해야 함을 암시한다. 그러나 ‘힘쓰다’라는 단어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8장 36절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시는데, 거기서 예수님은 만약 그분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그분의 제자들이 ‘싸울’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여기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은 들어가는 것이 곧 싸움과 같다는 뜻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 하나님 나라 안에 거하라
하나님은 좁은 문을 통하여 들어가길 힘쓰라고 명령하시면서, 동시에 우리의 노력이 소망과 확신으로 가득하도록 이미 준비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쓰는 것은 들어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초조감 때문이 아니라, 이미 들어와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들어가기를 힘쓰라. 왜냐하면 너희는 이미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심오한 진리다.
♣바리새인처럼 외식하지 말라
예수님은 우리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5:20). 어떤 사람은 자칫 바리새인을 능가하는 바리새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바리새인은 모세 율법을 가장 세밀하게 연구하는 유대 학자들이었으며, 모세율법의 세세한 부분까지 가장 엄격하게 지켰다. 전승에 따르면 율법에는 246개의 긍정적인 계명과 365개의 금지 명령이 있다고 한다. 이것들을 바로 세우고 세밀하게 지키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을 말하고 율법을 중심으로 행동할 때 훨씬 더 세밀해야 한다는 뜻인가? <존 스토트는 이렇게 대답한다. 최고의 바리새인들이 230개의 계명만 지켰다면 그리스도인들은 240개의 계명을 지키는 데 성공하라는 그런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큰 것은 더 깊은 의, 곧 마음의 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의는 마음과 동기의 내적인 의다. “여호와는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너희 안을 깨끗이 하라
바리새인들은 바보처럼, 마치 겉을 만드신 하나님이 속은 전혀 개의치 않으시는 것처럼 행동했다. 예수님은 외치셨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눅 11:40) 그런 다음, 예수님은 이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최대한 분명하고 솔직하게 말씀하셨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 23:26). 예수님은 행동을 눈여겨보시지만, 행동 자체를 중히 여기지 않으신다. 사회 복음이 결코 예수님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선한 일을 하라”는 게 예수님의 중심 메시지가 아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예수님께 순종하는 모든 행위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겉이 중요하지만 오직 안의 열매로서 중요할 뿐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이었는가?(마 5:20).
스토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스도인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큰 것은 더 깊은 의, 곧 마음의 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의는 마음과 동기의 내적인 의다. ‘여호와는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물론, 스토트는 이러한 참된 의가 삶에서 외적으로 표현되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마음의 의다.
♣정결한 마음을 품으라
바리새인들이 실패한 까닭은, ‘잔의 겉’만 깨끗이 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데는 소홀했기 때문이다. 본 장에서는 바리새인들을 능가하는 정결에 초점을 맞추겠다. 모든 전투가 그렇듯이 이기는 게 중요하다.
과연 우리가 이 전투에서 이길 것인가? 이 싸움과 관련해서 세 가지를 주목하라.
첫째는 지체 가운데서 눈이 가장 먼저 공격받는다는 것이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성적인 죄가 문제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그런 행실을 피하기 위해 네 성기를 잘라 버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그런 정욕을 피하기 위해 네 눈을 빼어 버리라”고 말씀하신다. 마음의 청결을 위한 싸움이 침실의 청결을 위한 싸움보다 먼저다. 마음의 청결이 없으면 침실의 모든 것이 깨끗하지 못하다.
둘째, 예수님이 당신의 오른 눈을 빼어 버리라고 말씀하신다는 데 주목하라. 이것은 왼 눈이 더럽혀지지 않고 예전처럼 깨어 있게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 말씀의 요점은 말 그대로 오른 눈을 빼 버린다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적으로 지체의 한 부분을 제거한다고 해서 내적 욕망을 제어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오른 눈보다 더 엄청난 게 걸려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큰 게 걸려 있기 때문에 죄악 된 욕망의 결박을 끊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 놀랍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예수님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한쪽 눈을 빼고 한쪽 손을 자르는 것과 같은 긴박한 마음으로 청결한 마음을 위해 싸우라.
셋째, 무엇이 걸려 있는지 주목하라. 지옥이다.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믿음으로써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사랑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나도 이 진리를 사랑하며, 이 진리가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예수님의 위협들을 액면 그대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들을 피할 길이 없다. 이것들은 복음서 전체에서 나타나며, 우리가 청결을 위한 싸움에서 지면 멸망하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의 기도에 해답이 있다. “나를 죽이는 자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씀은 한 가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용서가 필요한가?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아버지,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에게는 죄가 없고 따라서 용서도 필요 없습니다.” 둘 가운데 하나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며 따라서 용서가 필요하거나,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용서가 필요없거나.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들이 스스로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다고 하시면서 하나님께 이들을 요서해 달라고 기도하시는가? 그들의 죄는 바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용서는 죄가 있을 때만 필요하다. 그 누구도 무죄한 사람을 용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의 말씀은 이들이 죄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의 말씀은 “저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저들의 죄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라는 뜻이다. 그들에게는 진리의 증거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들의 무지는 한가지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은 진리를 보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강팍하고 완고하며 죄로 눈이 멀어 있다. 그들에게 용서가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이 계명을 통해 우리 죄악의 뿌리를 찾아내신다. 예수님은 사실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의 타고나고, 깊고, 결정적인 인간적 특징, 즉 자신을 위한 너희의 사랑에서 시작한다. 나의 명령은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너희는 자신을 사랑한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너희에게 자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너희가 당연히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너희 모두에게는 자기 보존과 자기 성취를 바라는 강한 본능이 있다. 누구나 행복하길 원한다. 살기를 원하고, 만족하며 살기를 원한다. 자신을 위해 먹을 것, 입을 것, 살 곳을 원한다. 폭력에서 자신을 지키려 하고, 자신의 하루하루를 채워 줄 의미 있고 즐거운 활동을 원한다. 또한 너희를 좋아하고 너희와 함께 시간을 보낼 친구들을 원한다.
자신의 삶이 의미 있길 원한다. 이 모든 것이 자기 사랑이다. 자기 사랑은 고통을 줄이고 행복을 키우려는 깊은 갈망이다.” “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당신의 마음을 다 채울 만큼 깊은 만족을 찾으라는 뜻이다. “네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당신의 마음을 다 채울 만큼 깊은 만족을 찾으라는 뜻이다. “네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당신 영혼의 아픈 구석을 모두 채울 만큼 풍성하고 깊은 의미를 찾으라는 뜻이다. “네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인간의 지성을 인도하며 인간의 지성이 갖춰야 하는 것을 모두 채워 주는 풍성한 지식과 통찰력과 지혜를 찾으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뜻을 만족시키실 때까지 당신의 모든 자기 사랑, 즉 기쁨과 희망과 사랑과 안전과 성취와 의미에 대한 당신의 모든 갈망을 사로잡아 하나님께 집중시켜라. 그리하면 이것이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포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자기 사랑의 성취이자 변화다. 자기 사랑은 좌절과 죽음이 아니라 생명과 만족에 대한 바람이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마무리하기 전에 예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듣고는 이웃의 개념을 축소함으로써 사랑 없는 우리의 모습을 정당화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셨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자. 누가복음 10장 30절은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고 말한다.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이라고 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를 가장 먼저 발견하지만 이들은 그를 피해 그냥 지나가 버린다. 그 다음에 사마리아인이 왔으며, 이 삶에 대한 핵심 어구는 누가복음 10장 33절 끝에 나온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처음 두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달랐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예수님이 하신 질문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강도 만난 사람이 이웃이었느냐?”였는가? 아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했다(눅 10:37).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으신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서 새로운 종류의 사람이 되어라. 가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라.
♣희생적으로 후하게 주라
왜 예수님은 우리가 재물로 무엇을 하느냐에 이렇게 관심을 보이시는가? 예수님이 제시하신 기본 원칙 때문인 것 같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눅 12:34). 재물이 중요한 이유는 재물로 무엇을 하느냐를 보면 마음이 있는 곳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있는 곳’이란 우리의 예배가 있는 곳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경고를 보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섬김’이란 말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섬김은 봉사보다 예배와 더 관련이 잇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재물을 어떻게 섬기는가? 대답은 재물을 위해 봉사한다거나 재물에게 도움을 준다거나 재물의 필요를 채워 준다든가 하는 게 아니다. 재물을 섬긴다는 것은 재물이 우리에게 봉사하고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필요를 채워 주길 기대한다는 뜻이다.
재물을 섬긴다는 것은 부를 극대화하고 재물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을 극대화하는 위치를 차지하려고 계획하고, 꿈꾸고, 전략을 세우고,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종주 관계에서는 재물이 곧 주는 자이자 은인이다. 우리는 재물에게 유익한 일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재물이 우리에게 유익한 일을 해 주길 바란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두 관계에서 ‘섬김’의 의미는 아마도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봉사하거나 그분에게 도움을 준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와는 정반대 의미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우리를 도우시는 분으로, 우리의 은인과 보화로 보고 의지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 땅에서 희생을 감수하며 후하게 베풀수록 하늘에서 우리의 즐거움은 커질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이기심은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둘째, 땅에서 얼마나 희생적으로 후했느냐에 따라 천국에서 상급의 단계가, 기쁨의 단계가 다르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바리새인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게 옳으냐고 예수님께 물은 것은 그분을 정치적 딜레마에 빠뜨리기 위해서였다. 유대인들은 억압당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살아가는 약속의 땅이 로마인이라는 이교도의 지배를 받는 현실에 분개했다. 이들에게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은 종교적 모욕이었다. 그러나 로마에 세금을 바치지 않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덫에 빠뜨리려 하는 게 분명했다. “예수님이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을 지지한다면 그분의 인기와 메시야적 지지도가 추락할 것이며, 그분이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데 반대한다면 ……헤롯당원들이 그분을 반역 혐의로 고소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분은 처형을, 그것도 곧바로 당하셔야 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예수님은 이들의 위선을 폭로하시고, 제자들이 그분의 나라와 이 세상 나라의 이중 국적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 주는 의미 깊은 대답을 하신다.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데나리온 하나를 그분에게 건네주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바리새인들이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 22:17-21). 예수님은 질문을 회피하신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각을 촉구하는 방식으로 질문에 답하셨다. 결국 그분의 대답은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최고 권위에 대한 철저한 충성을 요구하신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는 첫째 명령의 의미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둘째 명령에서 나온다. 이러한 두 명령의 병치는 첫째 명령에 적절한 범위를 정해 준다. 예수님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말씀하실 때 청중들이 긴장하면서 숨을 죽이는 못브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예수님의 대적들은 음흉한 미소를 띠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로마의 권세에 항복하는 것처럼 들린다. 나는 예수님이 첫째 명령을 하신 후 둘째 명령을 하실 때까지 어느 정도 간격을 두셨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첫째 명령을 하신 후 둘째 명령을 하실 때까지 어느 정도 간격을 두셨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첫째 명령의 의미가 청중의 마음에 전달될 수 있을 만큼 시간을 끄셨을 것이다. “가이사도 어느 정도의 소유권과 권세가 있다. 그러니 거기에 순응하라.” 이러한 생각이 들기 시작할 때, 예수님은 짧지만 엄청난 명령을 덧붙이신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대적들의 얼굴에 번졌던 미소가 사라진다. 그들이 기대했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두 방향 모두에서 충성을 명령하셨다. 하나는 가이사의 소유권과 권세에 준하여 가이사에게 충성하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소유권과 권세에 준하여 그분에게 충성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혜롭게도 두 개의 소유권과 권세의 범위에 대해서는 청중들이 스스로 답하게 하셨다. 이것이 로마에 대한 굴복인지는 각자가 가이사의 소유권과 권세의 범위와 연관해서 하나님의 소유권과 권세의 범위와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각하라고 촉구하시는 것이다.
생각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둘째 명령이 명확하게 추정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명령에서 이것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실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사실은 언급되지 않았으나 분명한 것을 들으려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분명한 사실이다. 이 사실은 언급되지 않았으며, 그럼으로써 단지 예수님을 덫에서 건져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대적들이 물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광범위한 질문에 답한다.
♣너희 빛을 세상에 비추라
우리의 빛을 세상에 비추라는 명령에는 목적이 있다.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빛을 세상에 비춤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다양한 완전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함을 말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렇더라도 그분의 완전함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무한한 가치가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분의 도덕적인 아름다움이다. 영광스럽게 창조된 세상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 영광스러운 자신의 창조자를 나타낼 때만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수님에게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또한 이것이 우리를 향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본질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우리처럼 영적으로 주린 피조물들이 영광을 누리며, 영광 가운데 궁극적인 만족을 얻게 하려고 자신들의 영광을 나타내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귀하게 여기지 못한 데 대한 심판을 면할 수단으로 그 영광을 나타내고 계신다(요 5:29). 자신과 아들을 영화롭게 하려는 하나님의 열정은 사랑의 행위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분이 이것을 소중하게 여기시며 이를 위해 지불하시는 값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의 영광을 주시며, 이를 위해 자신의 아들의 생명을 지불하신다. 하나님의 모든 영광에서 하나님 자신보다 더 큰 선물은 없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보다 더 큰 값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구속의 큰 사역이 십자가 죽음과 부호라에서 이루어졌을 때, 예수님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믿음 안에서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끄는 사역을 중점적으로 하실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자신을 위해 사람들을 모으려 하셨다.
그분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3-14). 성령의 중신 사역은 아버지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큰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눈을 열어 예수님의 진리와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요 3:3, 8; 마 16:17). 그분이 누구신지 알 때, 그분을 영접하고 신뢰하고 예배하며 그분께 복종하게 된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시기에 앞서 이 사명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8:18).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라면 다른 주를 따르는 사람에게 회개하고 돌이켜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에게 우주의 모든 권세가 있기 때문이다. 권세는 아랫사람들에게 우리가 원하는 대로 무언가를 시킬 수 있는 권리와 힘을 말한다.
예수님이 모두와 모든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권세가 있으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하늘과 땅’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두와 모든 것이 예수님의 권세 아래 있다. 모든 인간이, 모든 천사가, 모든 사탄이 그분의 권세 아래 있다. 마귀도 그분의 권세 아래 있다. 모든 자연 세계와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모든 것도 그분의 권세 아래 있다. ‘세상 끝날까지’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사명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명령은 제1세대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이 명령은 사명을 떠받치는 약속이 계속되는 한 지속된다. 그 약속이란,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리라는 것이다. 시간이 계속되는 한, 전해야 할 민족이 있는 한,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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