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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21세기를 위한 평신도 신학 / 폴 스티븐스 지음

by 은총가득 2020. 4. 21.

 

 

21세기를 위한 평신도 신학

                                                         

                                                                                   폴 스티븐스 지음

 

1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별이 없는 한 백성

 

1한 백성 신학의 정립

 

1. 하나님의 온 백성신학 : 성직자 중심의 신학을 넘어서

 

결국에는 단 하나의 건전하고 충분한 평신도 신학만 있을 뿐인데, 그것은 곧 총체적인 교회론이다. .. 그것은 또한 하나의 인간학일 것이며, 심지어 기독론과의 관계에서는 하나의 창조신학일 것이다. -이브 콩가르(Yves Congar)-

 

우리가 이 총체적인 교회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오해를 해결해야 한다.

첫째, 우리가 신약 성경에서 평신도를 찾으려는 수고는 헛수고일 뿐이다. 거기에는 평신도도 없고 성직자도 없다.

 

-‘평신도(laikoi)'란 용어는 1세기 말엽 로마의 클레멘트가 처음으로 사용. 성경에 나오는 사도가 이 용어를 훈련 받지 않고 구비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을 지칭할 때 사용한 예는 전혀 없다. 성경에서 언급된 이 용어는 하나님의 온 백성이 누리는 엄청난 특권과 사명을 내포하는 매우 영예로운 호칭이다.

-‘성직자(clergy)'란 단어는 클레로스‘(kleros)라는 헬라어에서 왔는데 그 의미는 지명된 혹은 상속받은자들이란 뜻이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백성의 지도자가 아니라 백성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 성경에는 한 백성,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백성, 곧 한 분이신 하나님-어거스틴이 말했듯이 사랑하는 자이자 사랑받는 분이며 사랑 그 자체이신, 그리고 보내는 자이자 보냄받는 분이며, 보냄 그 자체이신-을 드러내는 한 백성만 있을 뿐이다.

 

둘째, 교회 역사의 대부분에 걸쳐 교회는 두 부류의 사람들, 곧 사역자들과 비사역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역은 목회자가 하는 일로 규정되어 있을 뿐, 직장, 교회, 가정, 학교, 사무실 등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주님의 일에 헌신한다는 것은 목사나 선교사가 되는 것을 의미했을 뿐, 교회와 세상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 곧 창조하고, 지탱하고, 구속하고, 완성하는 일에서 그분과 동역자가 되는 것을 뜻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유감스런 현실로 인해서 소위 평신도 신학에 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보통 보충적인 과업-불균형을 시정하고, 성직자 평신도에게 폐를 끼치면서 비성직자 평신도를 격상시키기 위한-에 해당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온 백성에 관한 신학은 성직자 중심의 신학도, ()성적인 신학도 아니다. 우리가 정립해야 하는 것은 새로운 의미의 성직주의, 곧 기능상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차별이 없는 한 백성, 기존의 성직주의를 초월하는 한 백성의 신학이다.

 

셋째, 하나님의 온 백성의 신학은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하는 삶(에클레시아) 뿐만 아니라 직장, 정부 기관, 사무실, 가정 등 세상에서의 흩어진 삶을 포함해야 한다. 여기에서 나는 이브 콩가르가 요청하는 것처럼 평신도 신학이 곧 총체적인 교회론일 뿐 아니라 하나의 인간학이며 심지어는 기독론과의 관계에서는 창조신학이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것은 이 땅의 현실을 포함하며, 비천하고 하찮고 필수적인 것들을 깊이 다루는 신학이어야 한다. 여기에는 빨래, 청소, 이 세상의 구조를 유지하는 일, 놀이, 게임, 예술, 여가활동, 직업, , 사역, 선교, 정사 및 권세와 싸우는 것 등이 포함된다. 그 신학은 우리로 하여금 성(), 가족, 우정을 이해하고 경험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 신학은 자동차, 여행, 전화, 컴퓨터, 이메일과 사는 삶에 대해서도 다뤄야 한다. 결국 하나님의 온 백성의 신학은 하나님 백성의 함께 하는 삶 뿐 아니라 흩어진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가운데, 그 백성의 하나됨을 정립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온 백성을 위한신학 : 비실천 신학을 넘어서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에게 학문적인 신학은 삶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레슬리 뉴비긴은 이 문제를 한탄하면서 우리는 지금 이전의 위대한 종교 개혁가들이 불평했던 현실과 유사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온 백성을 위한 신학을 회복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신학의 실천성에는 신학 이론의 적실성 이상의 것이 내포되어 있다. 종종 사람들은, 신학이 실천성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믿음 충만한 행위와 삶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에 대한 케케묵은 직선적 사고 방식이다. 먼저 이론을 습득하고 그 다음에-신학 교육의 경우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그것을 적용한다는 식이다. 그런데 행동이 진리의 일부라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이 하신 많은 말씀이 강조하는 바는 순종이야말로 계시의 통로라는 사실이다. 인류는 자신이 실천에 옮긴 만큼의 지식을 가질 뿐이다. 그 의미는 당신이 진정 알고 있는 -온전한 성경적, 히브리적 의미에서-만큼 실제로 살아낸다는 뜻이다.

 

둘째,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통틀어서 이론과 실천을 분리시키는 행습은 최근에야 생겨난 것이다. 교회 형성에서부터 11세기에 이르기까지 신학은 실천적 행동의 기초가 아니라 신학자체가 본질적으로 실천성을 띠고 있었다. 초대 교회 내의 신학은 지역 기독교 공동체나 수도원의 삶과 통합되어 있었고 그 속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신학은 하나님 백성의 예전(禮典)과 삶에서 발생하는 실제적인 문제 및 의문과 연관되어 있었다. 아무도 신학을 3년간 공부해서 졸업한 후에야 적용하지 않았다. 18세기에 이르러 목회 신학은 도덕 신학에서 분리되어 하나의 학문 분야로 등장했으며 그 중심 내용은 목회자의 활동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19세기에 가서는 실천 신학이 성직자의 손아귀에 완전히 귀속되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학교에서 실천 신학은 종종 일종의 방법론으로 전락했으며, 주로 교회 성장의 효력 및 성공 여부로 가늠되곤 한다. 그러면 신학은 과연 치유될 수 있는가

 

셋째, 우리는 신학이 실천적인 지혜의 위상을 회복하는 현상을 목도하고 있는데 그것은 특히 세군도(Segundo), 구티에레즈(Gutierrez), 보니노(Bonino)와 같은 해방 신학자를 포함한 많은 신학자들과 세계 전역에 걸친 토착화된 신학들에게서 뚜렷이 드러난다. 그들은 그들의 사고 방식을 거쳐 새로운 생활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방식을 거쳐 새로운 사고 방식으로 나아간다.

 

1949년 이안 프레이저(Ian Fraser)스코틀랜드 신학 저널”(Scottish Journal Theology)신학과 행위라는 제목의 중요한 글을 실었는데, 이런 대목이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항상 현재의 신학적인 틀을 뛰어 넘어야 한다. 아브라함이 길을 나섰을 때 그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 신학의 역할은 그러나 순종의 행위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행위를 섭취하며 자란다. .. 신학은 그 생명을 예배로부터 이끌어 내고, 그 생명의 영양분은 순종으로부터 얻는다.”

 

3. 하나님의 온 백성에 의한신학 : 학문적인 신학을 넘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대안은 신학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비판적인 사고라는 시험을 통과한 훌륭한 신학이냐, 검토되지 않은 개념과 편견과 느낌으로 뒤죽박죽된 신학이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조목조목 다뤄보자.

 

첫째, 일상 생활은 신학적 성찰을 필요로 하는 일들로 가득차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직면하는 실존적인 질문들은 현실에 뿌리박은 신학을 소리 높여 요구한다.

둘째, 교회 역사를 통틀어서 많은 중요한 신학자들이 비성직자, 비전문인 신학자였다. 터툴리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그리고 동방 교회의 경우 소크라테스, 소조메노스 등. 종교 개혁도 본질상 평신도 운동이었다.

셋째, 오늘날에도 신학은 보통 사람들에 의해 논의되고 있다. 예를 들어, 나이 어린 손녀가 무신론자친구로부터 하나님도 없고 천국도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 때 손녀는 글세, 천국이 없다면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신학이 아닌가!

넷째, 이 아래로부터 신학은 그저 호기심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신학 세계 전체에서 근본이 된다. 칼 바르트는 정규적인 교의학이 비정규적인 교의학을 깔보아서는 안된다고 충고한다. 그리고 정규적인 교의학-신학교에서 하는, 그리고 교의학의 완성과 합리성에 일관성에 관심을 두는-항상 그 기원을 비정규적인 교의학에 두고 있으며, 후자의 자극과 협조가 없다면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인정한다.

다섯째, 하나님의 온 백성에 의한 신학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학의 과업을 재설정해야 한다. 학문 기관은 교회의 회중, 가정, 사업 현장 등과 더불어 일해야 한다.

여섯째, 온 백성의 신학을 회복하는 데는 전문적인 신학자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그들 역시 연구와 역사적인 안목을 통하여 공동체에 기여하는 일원이다. 존 매콰리는 이것을 함께 신학하기리고 부른다.

 

2장 평신도와 성직자 개념의 재정립

 

1. ‘평신도가 없는 한 백성

 

오늘날 교회에 들어가면 두 백성을 보게 되는데, 하나는 사역을 받는 평신도층이고 또 하나는 사역을 베푸는 성직자층이다. 그러나 우리가 신약 성경의 세계로 들어가 보면 오직 한 백성, 곧 참 하나님의 백성 라오스’-그 백성 가운데 지도자들이 함께 있다-밖에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새 언약 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묘사할 때 다음 두 가지 용어는 거부했다. 첫째는 헬라어 라이코스인데 이는 평범한 무리에 속한 자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인을 지칭할 때 이 용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1세기 말 로마의 클레멘트였다. 그는 당시 장로가 그 기능을 박탈당한 상황에서 그들에게 이 용어를 사용했다.

 

둘째는 헬라어 이디오테스인데 이는 바보라는 영어의 어근이다. 그런데 영감 받은 사도들 중 그 누구도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데 이 용어를 사용한 적은 없다!

사도행전에서는 유대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이 학문없는 범인들’(이 경우에는 베드로와 요한을 지칭했다)이라고 지칭할 때 이 단어를 쓴 바 있으며, 고린도 전서에서는 교회 외부인이 난생 처음 교회에 왔다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모르는 경우를 묘사할 때 썼다. 이 같이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두 단어가 보통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데 사용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 대신 두 개의 단어가 사용된다. 그 중 하나는 헬라어 라오스인데, 사도행전 15:14을 보면 야고보는 사도들이 공의회에서 의도적으로 구약 성경의 이스라엘 민족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이 제정된 하나님의 백성을 연계시킨다. , 그 의미는 교육 받지 못한’, ‘평범한이란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 곧 참으로 비범한 백성이란 뜻이다.

다른 하나는 헬라어 클레로스란 말로 여기서 성직자를 의미하는 영어 ‘clergy'가 파생되었는데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묘사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2. ‘성직자가 없는 한 백성

 

신약 성경의 교회에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평신도가 없었고, 진정한 의미의 성직자로 가득 차 있었다.

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주되심, 성령의 강림, 종말의 시작(2:17)과 함께 전 교회가 참 사역체 곧 일주일 내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공동체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성직자인데, 하나님의 기업으로 존귀케 되고 섬기기 위해 하나님의 임명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성직자인 셈이다. 모두가 성령의 시대에 속한 능력과 복의 분깃을 공유한다.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 됨에 뿌리를 둔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면에서 평신도인 셈이다. 모든 이가 사역을 베푼다. 모든 이가 사역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속성이다.

 

3장 한 하나님, 한 백성

 

  백성의 지도자와 나머지 사람들과의 관계 묘사

공동체-유일한 성경적 방식

각 지체가 풍성한 사회적 연합을 도모하는 다양한 기능 가운데 다른 지체에게 기여하는 관계, 다양성을 통한 사랑의 하나됨과 유사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하여

-같은 몸의 지체들로 표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로 인해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자유자와 종을 나누는  '중간에 막힌 담?이 무너짐 몸의 한 부분과 다른 부분 사이에 다시 담을 세우는 것은 옳지 못함.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라오스)의 정체성과 사역

-하나님처럼 창조적이고 회복적인 사역과 연합적이고 치유적인 사역을 모두 담당(보통 대위임령 마28:19-20을 유일한 사역으로 주장하는 것에 반해)

 

#성부 성자 성령

성부-창조, 섭리

성자-중보, 기도

성령-능력부여,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케 하심

각 위격은 다른 위격의 사역에 동참-상호 소속되고, 상호 침투하고, 함께 역사하다. 서로 본질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분이다.=>셋이기 때문에 더욱 한 분

 

라오스가 됨의 의미

-하나님의 백성의 지체들이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 교통하는 것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합체되거나 합병되지 않고 상호 소속되고 서로 생기를 불어넣고, 서로 생명을 부어 주는 것

 

페리코레시스적 교회-삼위 일체의 상호교통

1. 개별적인 지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호 의존적인그리스도인의 삶

 

2. 사역의 위계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일을 다른 일과 거룩과 세속으로 구별할 수 없다. 우열의 관계가 아니다.

3. 하나님의 라오스의 모든 지체는 서로에게 속하고, 서로에게 사역하며, 서로를 필요로 하고, 풍성한 하나됨과 전체사역에 기여한다.

 

                 제2부 하나님이 부르시고 구비시킨 백성

 

 

   제 4장 소명 이후 시대에서의 소명

 

하나님의 온 백성의 신학에 그토록 중심적인 기독교의 소명교리는 우리가 어떤 일올 하도록 부름받기 전에 누군가에게 부름 받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것은 직업을 고르듯이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우리는 선택받은 자들이다. 소명에 대한 성경적인 교리는 우리의 인생 전체가 선하신 하나님의 부드러운 소환과 관련해서 그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고 말한다.

 

1. 개인적 소명

 

청교도들은(16,17세기) 최초로 ?일반 소명?(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효력을 발휘한 소명)?특별 소명?(우리가 하나님의 소환에 직접 응답하여 섬김의 본분을 감당하게 하는 소명)을 체계적으로 구별한 사람들이다.

그 후 루터가 고전7:17?정박지?로 해석했는데, 그는 이 단어를 모든 정당한 직업에 적용함으로써, 소명을 하나님의 온 백성에게 확장시켰으며 특히 삶의 정황의 견지에서 소명을 부각시켜 신분과 직분과 책무를 융합시켰다. 사실상 루터는 소명과 상황을 구별하였는데, 소명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의무(믿음의 일)이며 말씀을 따라 각자의 상황 속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루터와 대조적으로 칼빈은 ?소명?을 주로 구원으로의 부르심이나 사역으로의 부르심을 묘사하는데 사용했다. 하지만 칼빈은 ?소명?을 사람이 하는 일 자체(루터의 경우처럼 그 일을 하는데 요구되는 믿음만을 지칭하지 않고)를 묘사하는 데에도 사용했다. 루터와는 달리 그는 그리스도인이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소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각 사람을 향한 개인적인 소명이라는 것이 있는가

첫째, 제자가 되라고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유효소명이 있다. 이것은 모든 신자가 일차적으로 경험하는 소명이다. 둘째, 섭리적인 소명이 있다. 요셉, 에스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등과 같이 성경에는 많은 사람이 초자연적인 부르심이 없이도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아 특정한 일에 종사하게 되는 모습이 나온다. 셋째, 은사적 소명이 있다. 여기서 사용하는 은사(카리스마)의 의미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은사들과 은혜를 뜻한다. 재능(달란트)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25:14-30). 넷째, 마음속의 소명이 있다. 성령은 구비시키실 뿐 아니라 강권하시기도 한다. 교회에서든 세상에서든 하나님이 꼭 필요한 일을 하게끔 우리 마음에 소원을 불러일으키시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사회에서 직업을 택하는데 굳이 강력한 실존적인 체험을 통하여 ?부름받을?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동기를 유발하시고 은사를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신다. 따라서 직업적인 인도는 우리의 ?부르심?올 분별하는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제자로, 거룩함으로, 섬김으로 부름 받았다는 맥락에서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를 분별하고 모든 차원에서 그 분을 기쁘시게 하며 사는 법을 배우는 문제이다.

 

2. 기독교적 소명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부르심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일 뿐 아니라 공동체적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부름 받은 백성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부르심??부르심?의 언어가 족장들, 사사들, 선지자들 등에게 사용된 예를 연구한 것에 따르면, 각각의 경우 하나님의 부르심은 어떤 기능 곧 어떤 구체적인 과업을 위한 것이지 어떤 직책으로의 부르심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부르심?의 언어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참여하도록 소환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일차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구원으로의 부르심, 거룩함으로의 부르심, 섬김으로의 부르심 등이다.

신약 성경에서의 ?부르심?이 구약과 다른 것은 백성 전체가 부름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신자 개개인이 모두 부름 받았다는 사실이다.

?부르심?은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써 얻은 구원으로의 초청, 거룩한 개인적 및 공동체적 삶으로의 소환, 섬김으로의 부름 등을 지칭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모두가 함께 부름 받았다. 모두가 일상생활의 총체적인 면에서 부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삼중적이다.

첫째, 소속-하나님께 속하라.

둘째, 존재-삶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

셋째, 행위-하나님의 일을 하라.

 

 3. 인간적 소명

 

기독교적 부르심은 총체적인 인간적 소명을 포용하도록 요구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께 속하라는 부르심은 상호 교통을 회복시킨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부르심은 공동체 건설을 회복시키는데, 지금으로서는 두 초점 즉 언간 공동체(가정, 이웃관계? 도시와 국가)와 믿음의 공동체(교회)를 갖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부르심은 공동 창조성올 회복시키는데, 이것 역시 우리가 이 땅의 섭정자로서 섬기는 방식에 따라 하나님의 세계가 돌아가게끔 하는 것과 이에 덧붙여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다. 후자는 기독교적 소명의 목표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사랑하라는 소명가운데 내포되어있으며, 이는 곧 우리 모두를 아마추어(어떤 일올 사랑해서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 때문에 행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세 가지 전임 사역의 견지에서 그리스도인의 아마추어 신분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그 영광스러운 구속으로 생산하시는 것은 새로운 세대의 천사들이 아니라 참된 인간들과 새 창조의 시작이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궁극적인 소명은 단지 에덴을 회복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것이다.

 

5장 주님의 일을 하는 것

 

일이란 금전적인 보상이 있든 없든, 정신적. 정서적 혹은 신체적 에너지, 또는 이 세 가지가 모두 소요되는 목적

 

지향적 활동

1. 일에서의 변화

- 대대수의 사람들이 오늘날 유형적인 것보다는 무형적인 것과 더불어 일한다. 정보 산업이 가장 거대한 부분 중 하나가 되었다. 힘든 일에서 스트레스가 많은 일로 바뀌었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하고 있지만 서구 및 신흥 사업국의 경우 사람들은 새로운 심리적 /영적 만족을 얻기 위해 일한다. 우리는 생존문화에서 정체성 문화로 옮겨왔다.

일터에서의 변화: 일터는 세계화되었다. 또한 하나의 장소로서도 근본적인 변화선상에 있다. 예를 들어 재택근무, 이동 전화, 모뎀, 팩스 등으로 민해 일터는 이제 더 이상 고정된 장소가 아니다. 또한 이런 현상은 부지중에 일중독을 조장할 수도 있다. 보상이 따르는 일은 이제 자율적인 활동이 아니며 이 복잡한 정보 사회에서 정사와 권세 내에 구조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일의 신학은 구조의 문제와 악마적 권세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도 고찰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직면한 이슈들: 신자들은 이웃을 성기고 사랑하기로 헌신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직업들을 높이 받드는 경향이 있다. (예롤 들어, 선교사가 맨 위, 다음 순서 목사 등) 소위 기독교적 가치에 따라 사람을 돕는 직업에서 머리를 쓰는 직업, 창조적인 직업, 육체 활동을 하는 직업, 정치와 관련된 직업 순으로 내려간다. 비록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합당치 못한 직업을 열거하고 있지 않지만(매춘, 강탈 제외), 각각 세대는 나름대로의 목록을 갖고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일에다 순위를 매겨야하나 무엇이 더 존귀한 일인가

 

2. 일의 어제와 오늘

- 고대 세계에서는 일을 멸시했다. 그들은 이원론자(이데아론을 생각해 보라!) 추측컨대 그리스도가 노동자였다는 사실이 당시 헬라인들에게 걸림돌이 된 어리석음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 이후의 발전 헬라인들의 견해는 기독교화된 형태로 중세 교회에 유입되었다. 그래서 현세에 속한 신체적 필요를 채워 주는 생산직은 영구적인 가치가 없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관조적인 삶은 응원을 위한 삶으로서 수도원 생활에서 성취되었다. 영적인 삶과 세상적인 삶은 상하 계층적인 관계로 구조화되어 있었다. 15세기에 이르러 르네상스가 일어남으로써 헬라 철학이 재발견되었다. 그때 관조에 대한 이해가 역전됨으로써 최고의 예술가요 건축가이신 하나님에 대한 참된 묵상이 이제는 세상에서 하는 창조적인 활동으로 표현되었다. 이런 면에서 개신교 종교개획은 심대한 유산을 남겼다. 이것은 대부분 중세의 수도원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정립된 것이다.

 

현대 세계와 포스트모던 세계 산업현명은 이련 관점을 많이 변모시켰다. , 일을 제도화시키고 돈을 위해 일하도록 만들었다.

일은 분업화되고, 단순화되고, 틀에 박히게 되었으며, 그 결과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일은 현대 사회에서의 어떤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자끄 엘룰). 마르크스는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에 대한 대안으로 우리가 손수 하는 일을 통하여 스스로를 묵상함으로써 성취감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또한 프로이트는 일을 비극적인 필연으로 보았다. 또 이제는 특히 도처에 만연한 서비스 업종과 관련해서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이 생겨났다(맥도날드의 예). 이와 같은 역사적 추세와 현대 그리스도인이 지니 태도 사이의 연관성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사회에서 하는 일은 내재적인 가치가 없다고 여겨진 반면에 사역이라는 일은 영원히 남는다고 여겨진다(헬라 이원론). 전임 목회 사역이나 선교 사역은 소명 중의 소명이다(중세의 수도원주의). 육체 노동과 수공은 ?창조적?일과 종교적 일보다 열등하다(르네상스). 우리는 각자의 일상적인 일 가운데서 개인적인 성취감을 찾을 수 있야 한다.(마르크스, 르네상스식 인간의 자율성, 포스트모던적인 개인주의 사생활주의)

 

3. 성경에서 말하는 일

- 일꾼이신 하나님: 구약에서는 일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은유가 많다 그것들은 우리의 일이 하나님과의 진정한 연계점이요 따라서 의미와 영성의 근원임을 시사한다.

축복이자 저주인 인간의 일: 최초의 인간의 일은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것이었다. 주의할 점은...세계를 위해 우리 인간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가 우리는 아주 평범한 방식으로부터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도 세계를 돌본다. 일은 졸은 것인데, 창조 세계를 위해, 우리 이웃을 위해,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이다. 하지만 일은 제한된 것이다. 인간은 또한 하나님처럼 쉬도록 창조되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일이 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권세들이 무장 해제되었기 때문에 또한 실질적인 치유가 있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우리가 제도의 피해자가 아니라 일터에서 ?이기는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치유는 주님이 재림하시기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날까지 일과 더불어 씨름해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만이 진정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신자의 일 :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6:20: 2:13).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다. 주의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이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일상적인 일을 면제시켜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서신서에서 바울이 말했던 바를 떠올려 보라!

 

주인과 종 : 주인과 종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관계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용납을 보상으로 받기 위해 일하는 자들이 아니라 무보수의 종들이다. 그들은 믿음에 의해 은혜로 의롭게 되었다. 그러므로 일은 생존을 위한 필요나 자기 성휘의 수단을 훨씬 넘어선다. 일은 영적인 유익을 가져오고, 하나님 나라의 목적을 이루며,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끈다.

 

6장 성직주의를 초월한 사역

 

# 사역의 정의

오늘날

- 목사가 하는 일() [장소, 기능, 필요, 호징, 지명에 의해서]

성경

- 행위의 모습과 행하는 위치가 아닌 누가 섬김의 대상인가에 의해서 규정[외적인 형태가 아닌 내적인 형태에 의해]

 

@ 성경에 나오는 ?사역?단어

?아바드?(abad) - ?일하다 혹은 만들다?와 후에 ?예배하다?라는 의미가 결합[사물이나 사람 혹은 하나님께 행한 봉사] )에덴 동산의 봉사

?사랏?(sarat) - 통치자와 같은 중요한 인물에게 드려지는 개인적인 봉사(39:4) 제사장처럼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자들 편에서 드리는 예배 사역(28:35)

?디아코니아? - 헬라어로 단순히 ?봉사?(섬김)를 뜻함,

다른 사람에게 ?고용되어? 한 일이라는 뜻이나 말씀에 대한 봉사, 실제적인 사랑,

사도적인 활동, 음식준비 등을 지칭하는데 사용됨.

 

주님의 종

- ?에베드?(ebed)

- 스스로 종이 되신 하나님 : 하나님 스스로를 위함 뿐만 아니라 백성 전체를 위한 것

- 그리스도인 종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종이며, 이 때문에 사람들의 종이라 칭할 수 있다.

 

# 삼위일체적 사역

* 예수 그리스도는 사역의 모범이라기보다 사역의 근원이다.

* 사역이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능력을 부여하는 분으로 임재하는 것이 표출된 것

* 봉사란 - 삼위 상호간 사랑의 삶이 성령의 임재 가운데 라오스를 통하여 표출되는 것

 

# 성경은 리더십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앞서가는 자 - 12:8

행정가들 - 고전 12:28

감독들 - 1:1, 20:28, 딤전 3:1

- 딤전 3:8

장로들 혹은 더 나이 많고 지혜로운 사람들 - 1:5

목사 혹은 목자들 - 4:11

@ 제사장(bierus)을 의미하는 단어는 빠져 있다.

2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와 믿음의 공동체 전체에 한정해서 사용되었다.

 

# 교회 지도자

* 교회 지도자들은 그 공동체의 바른 질서와 사람들의 은사를 끌어내고 양육하기 위해 꼭 필요!

*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동시에 교회의 부름도 필요하다.

- 칼빈의 소명의식에는 교회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사역으로의 특별한 부르심을 강조했다.

- 교회적인 부르심이란

교회 리더십에 적합한지 여부를 교회가 판단 (은사와 성품의 측면) [딤전3:1-13]

* 신약 성경은 리더십의 카리스마를 교회에 주어진 은사로써 높이 받든다.

 

요약 정리

* 사역이란 무엇인가

교회와 세상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우리 자신을 하나님 손에 맡기는 것이다.

 

*사역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온 백성이 공동체로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진정한 사역체이다.

 

* 사역은 어떻게 수행되는가

말과 행위에 의해 개인과 조직을 대상으로 직, 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

 

* 사역은 어디서 수행되는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섬김과 하나님을 위한 섬김, 교회와 세상 양쪽에서 다 일어난다.

 

3부 세상 속에서의 백성의 삶

 

7장 선지자, 제사장,

 

삼중직 :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 임재를 중개하는 제사장, 통치를 하나님의 창조 세계 전역에 확장하는 왕

 

1. 세 가지 리더십 역할(이스라엘 안에서)

-제사장 : 믿음의 공동체(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는 특징을 소유한)를 세움<개인적, 영적 필요 담당>

-선지자 : 참 영성과 사회의 도덕성 가늠함, 하나님의 목적을 천명<공적, 사회적 필요>

-: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대표자<조직적, 정치적 필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는 선지자(61:1-2), 제사장(110:4), (89:35-37; 110:1)으로 세 가지 메시아적 직분 모두 성취하심

칼 바르트 ?선지자 직분은 갈릴리, 제사장 직분은 수난, 왕의 직분은 승천시 각각 그리스도안에서 작용했다?

 

성직자 안에서-지식은 선지자적 직분으로부터, 양심을 다스리는 통치력은 왕의 직분으로부터, 인내는 희생적인 제사장직으로부터 흘러나온다.

 

하나님의 온 백성 안에서-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모두 그분에 의해 보냄 받은 자들 안에서 이차적인 연속성이 있게 된다?고 말함

 

2. 선지자적 백성종말론의 영

-성령이 부어짐으로써 모든 신자가 예언을 하도록 구비됨,

예언은 한 사람 안에 있는 자질, 능력, 타고난 재능이란 의미에서의 영적인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가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직접 표출된 것, 곧 성령이라는 선물이다. (만인 선지자직)

 

보편적인 말씀 사역

-지도자들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고 스스로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도록 구비시켜야 한다.

1. 하나님에 의해 구비된다.

2.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3. 지속적인 성령 충만

 

선지자적 교회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선지자적 개척자가 되는 것(포사이드?복음의 가장 크고 가장 깊은 준거틀은 세상 및 그 사회적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영원과 그 사회적 의무에 대한 것이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세상에서 봉사하도록 구비되어야 하는 것

 

3. 제사장적 백성

만인 제사장직 -보편적인 사역, 성령 안에서의 보편적인 능력 부여, 보편적인 부르심 등을집약

 

제사장적 공동체

1. 하나님 백성의 사역은 예수님의 영원한 대제사장직에서 유래한다.

2.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제사장 사역에 참여한다.(제사장직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

3. 에클레시아적(모인 교회의 삶) 성격과 디아스포라적인(흩어진 교회의 삶) 성격을 둘 다 갖고 있다.

 

제사장직은 하나님의 온 백성의 사역 지닌 내향성을 의미하고 왕직과 선지자직은 전신자 사역이 지닌 외향성을 의미한다.

 

선지자직에 대한 오해

-) 한교인당 한 투표권을 배당하는 것으로 변질, 남자 교인(!) 모두가 돌아가면서 설교단에 서는 것으로 전락

-공동체 전체가 왕적 제사장이라는 사상과 공동체는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그 자체 내에서가 아니라) 이 제사장직을 갖고 있다는 사상이 대체로 상실됨

 

제사장직올 경험하는 것

1) 예배와 중보를 통하여

2) 세상에서의 섬김을 통한 제사장 사역

3) 일상생활에서 하는 제사장 사역

 

4. 왕 같은 백성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고 그분의 통치권과 왕권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에서 왕의 신분을 가진 자들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나라는 왕되신 하냐님의 통치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분의 통치와 백성들의 반응을 모두 포함한다.

-교회는 총체적인 하나님 나라가 아니며 ?지금? 존재하지만 우리가 최종적인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는 면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고 섬기는 기관이다.

-우리의 왕 되신 하나님을 대신한 섭정(군주의 대리인으로)

 

왕 같은 제사장파 제사장 같은 왕

-왕권이 없는 제사장직은 그저 순전한 종교성으로 전락 할 수 있다. 제사장 없는 왕권은 하나님의 개입이 없는 선행주의 영적인 변화가 없는 세계 변혁으로 쉽게 전락.

-왕 같은 제사장만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언질(행동이 수반된)을 통해, 그리고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목적으로 세상을 향해 성육신적 선교를 함으로써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다. [독성강한 나트륨과 염소가 합쳐져야 소금이 되듯, 하나님의 라오스(백성) 역시 제사장직과 왕직을 겸해야 비로소 세상의 소금 역할을 하게 된다]

 

5. 세상 속의 선지자, 제사장,

선지자(그들의 일올 분별하고, 의사소통하고, 알리고,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감찰하고, 결과를 밝혀는 일) : 회사와 가정에서 할 수 있는 그런 일들

-조직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 발견하도록 도움.

 

제사장(다리를 만들고, 중재하고, 의미를 표현하고, 믿음을 촉구하고, 축복하고, 은혜를 가져오는 것) : 소위 세속적인 직업 분야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섬기는 여러 방법-사람들을 돌보고 하나의 모델로 섬김.

 

: 인적, 물적 자원을 잘 관리하는 신실한 청지기 역할

 

8장 선교 : 하나님에 의해 보냄 받은 백성

 

1. 보내시는 하나님 

선교는 교회의 삶에서 이 세상적인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선교는 하나님이 교회를 통하여(아니 심지어는 교회를 통하지 않고도)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인데, 그 목적은 자기 피조물의 완성,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일성과 충만함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이다(122~23/1:15~20).

 

2. 하나님의 선교

 

선교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회중을 모으는 일에 헌신하는 것일 뿐 아니라, 구속된 전체 창조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확립할 목적으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안에서 성자의 보내심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참여하는 선교 운동의 근원은 삼위 하나님 자체에 있다.

 

따라서 선교는 창조세계, 보살핌, 최종적 완성과 관련된, 하나님으로부터 세계로의 움직임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그분이 보냄 받은 상태에서 세상 가운데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다. 성부가 성자를, 그리고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보내실 뿐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이 교회를 세상 속으로 보내신다. 선교는 시종일관 하나님의 보내심인 것이다.교회가 하나님의 선교의 도구라는 일반적인 견해는 교회가 선교사를 보내는관행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사명(선교)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교회는 보내는 기관이 아니라 보냄 받은 기관이다. 하나님이 곧 사랑으로 보내는 원천이시기 때문에,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움직임에 참여하는 것이다.

 

선교로 인해 교회가 태어난 것이지 교회 때문에 선교가 생긴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에서 선교하신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바울이 어떻게 이방인 선교의 맥락에서 이신칭의(以信称義)를 이끌어 내었는지 주목해 보라. 선교는 신학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요약하면, 신학적으로 선교는 대위임령에 대한 의무감이나 단순한 감사의 마음에서 비롯된 인간적인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선교로서 우리가 그 안에 편입된 것이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부으심을 통하여 하나님이 열방에 복 주시려고 하시는 일이다. 선교 사역 자체는 세상의 필요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니라 부르시고 능력을 주시는 보내시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선교를 위해서 그리고 이러한 선교 안에서 하나님의 온 백성이 사도적(보냄받은) 지위를 얻게 된다. 하나님의 라오스전체는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인해 창조된 것이요, 그분이 보내시는 일을 계속 하시는 수단이다.

 

3. 선교의 내용

 

첫째, 하나님의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포되고 구현된 복된 소식(4:17)에 근거하여 개개인에게 회심을 종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둘째, 하나님의 선교는 사회 전체와 삶의 구조를 대상으로 의와 정의를 이룩하며, 가난한 자에게 힘을 실어주고 억압된 자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4:18~19). 우주의 그 어떤 영역도 너무나 악해진 나머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그런 곳은 없다.

셋째, 하나님의 선교는 사람들의 사고 및 행동 방식을 형성하는 사상과 문화를 대상으로 한다.

넷째, 하나님의 선교는 창조 세계 전체, 자원 보존, 환경 친화적인 개발, 지구의 회복 등과 관련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선교는 권세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여기에는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전진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구조와 타락한 영적 존재들이 포함된다.

 

 

4. 보냄 받은 백성

선교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선교에 관심 있는 자들이 간헐적으로 하는 그런 활동이 아니다. 교회가 선교를 하나의 사역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선교다. 옛 언약과 새 언약 하에서 선교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깊이 관여하도록 의도된 과업이지, 다만 선택된 소수의 대표자나 지명된 선교사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평범한 그리스도인 모두가 선교사인 것이다.

 

5. 선교를 위해 구비시킴 

우리의 선교 사역은 사람들을 교회에 나오게하는 것이 아니라 인자와 함께 세상 속으로 가게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교회가 때때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 나라와 비슷한 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즉 이교도 개종자를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비의 원리들

 

첫째, 주권적인 하나님이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을 특정한 일터와 동네 그리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각각 위치시킨다는 점을 교회 내에서 인정하고 지지해야 한다. 심장과 폐가 몸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모인 교회 역시 흩어진 교회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모여있을 때는 피가 정화되고 산소를 공급받는다. 흩어져 있는 동안에는 질병과 싸우고 에너지를 공급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교인들이 세상 어느 곳에 흩어져 있는지 그 위치를 분별해야 한다.

 

둘째, ‘가라의 구조를 오라의 구조와 병행해서 잘 개발해야 한다. 현대 교회의 구조는 대부분 오라구조인데, 교회의 존재 자체와 존재 양식이 와서 들어라’ ‘와 보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라의 구조에도 동일한 관심을 갖는 것, 곧 신자가 사회의 특정 영역에서 선교하는 것을 돕는 방법을 정립하는 것이다.

 

셋째, 우리는 목회 사역을 할 사람에게 안수를 줄 때 만큼이나 진지한 자세로 사회 내의 선교를 담당할 사람들, 즉 정치인, 주식 중개인, 가정 주부, 교사, 기술자, 예술가등을 안수하고 파송해야 한다.

 

넷째, 고든 프리스는 교회가 일터에서의 선교를 위해 교인을 구비시킬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제안한다. 즉 교인들로 하여금 일터야 말로 사람들을 만나는 일차적 장소요, 자연스런 전도의 장소로 보게 하는 것이다.

 

9장 저항 : 권세를 상대로 한 씨름

 

1. 권세에 대한 묘사 : 현대의 혼동

우리가 논의하려는 정사와 권세란 정부, 인간 권세자, 국가의 구조, 가정 및 부족의 구조 등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영적 실체인 귀신에 대한 것인가

 

2. 권세에 대한 경험 : 다차원적 저항

새로운 이론의 옹호자들은 구조를 무시하지 말라고 경고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구조 자체를 마귀화 시키지 말라는 경고의 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두 가지 극단을 모두 피해야 한다. 만약 권세를 오로지 구조와 전통이라는 인간적 영역에만 국한 시키는 것이 위험하다면, 권세를 천사와 귀신의 영역에만 국한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3. 권세에 대한 이해 : 성경 신학

권세는 타락의 결과도 아니고 인류를 보호할 목적으로 인간의 육신성을 억제하려는 필수불가결한 조치도 아니며, 실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세계의 일부다. 에베소서 6장에서 바울은 이 권세들이 사단에 의해 식민지화된 상태라고 시사한다. 이 권세들의 방향성은 남녀 인간의 타락과 병행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각각의 경우 섭정자(군주의 바람을 이룰 책임이 있는 자)가 신이 된다. 그는 현재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 그와 모든 정사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것을 자기 소유인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4. 권세와의 싸움 : 선교와 사역

우리는 악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는 비순응적인 (본받지 말라) 자세로,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순응하는 자세로 대해야 한다 (122). 육신에 대해서는 금욕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동일시하기)그리고 열망함으로써 (성령안에서 호흡하기)대처해야 한다. 마귀에 대해서는 대적하고 피함으로써(4:7) 대처해야 한다. 이는 다각적인 전투로서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모두 상대로 하는 싸움이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각 전선에서 우리를 만나주신다.

 

5. 권세에 대한 최종적 평정 : 종말론

현재 가능한 최대한도로 그리스도인들은 권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켜야 하는데, 이는 교육, 정부, 사회적 활동 등에 참여함으로써 권세를 화평케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권세를 정복하는 일은 그리스도만이 하실 과업이라는 점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로마서 8:19~21은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는 현재와 탄식이 없는 미래가 단절없는 연속선으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일(공력)가운데 어떤 것이 영구히 남게 될 것인지는 깊이 숙고해야 마땅하다.

 

성경은 그러나 무엇이 영원히 남을지 말해준다. “그런 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터인데...”

 

후기 신학적으로 사는 인생

 

신학적으로 사는 인생 추상적이고 이성적으로 여겨지는 신학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 생활과 연관을 가질 수 있는가

?신학이란 영원히 축복받은 삶에 관한 학문이다? - 윌리암 퍼킨스 삶과 신학의 연계성에 대한 세가지 렌즈

 

1. 정통 교리(orthodoxy)

 

헬라어 orthos:?똑바로, 옳은?+doxa?영광, 예배? 성경에 따른 바른 교리는 일상 생활의 복을 주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송축하게 한다.

일상적인 삶의 구속 : 하나님의 사랑, 물질관, 종말론 등은 모두 똑바른 사고를 필요로 하고 성경에 따른 포괄적이고 비판적(이 세대에 대해)이며 일편단심(그리스도에 대해)인 사고는 일상 생활에 복을 준다.

비실천 신학의 위험 : 그러나 지적인 차원에 머물러 하나님 위에 올라선 신학은 금물이다. 그분을 이해하고 주님을 위해 자발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욥과 그의 친구들 -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에 관해 말했으나 욥은 하나님께 말함 욥이 바른 신학

?최상의 신학은 축약된 기도다?(포사이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진리 충만한 삶: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그분을 찬양하는 길이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양육해야할 회중 즉 교회가 있어야 한다. 신학교, 교회, 일터와 더욱 긴밀한 동반자 관계의 형성 필요. 삶의 현장에서 교육 내요의 현실성 점검.

 

2. 정통행위(orthpraxy) 

정통행위 : 교회와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조화를 이루는 행습, 즉 세상에 가치와 선을 가져다 주는 실천.

온전한 의미의 신학적 삶 : 예수님은 믿으라는 권면보다 더 자주 ?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10:28; 19:21)고 권면 행동과 섬김을 통해 신학적으로 훈련된다.

기독교적 행습의 핵심 : 종교적 행위를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어떤 일을 기독교적으로 만드는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다. 신학교육의 목적은 우리가 심판 날에 부지중에 예수님을 위해 사랑의 행위를 했음을 알고 놀라게 만드는 것.

 

3. 정통 심성(orthodopathy)

정통심성 :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 선지자의 삶 하나님의 복음이 머리뿐 아니라 가슴에 미치게 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마음을 갖는 것. 머리와 가슴을 하나로 묶는 하나님을 아는 실천적 지식이 신학.

마음을 교육하라 : 학문기관이 유일한 교육기관 일 수 없다.

교육자로서의 이웃 :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는 곳은 생의 한 복판.

하나님을 향한 열정 : - 치유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우정을 바람(29:4) 하나님 나라에 절박한 자, 하나님의 관심사에 관심을 갖는 것,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 하나님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정통 심성

 

성경에 기반한 바른 교리를 알고 온전히 그것을 행하는 삶을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른 평신도 신학 아니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야 할 신학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