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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랍비전통과 문헌”

by 은총가득 2020. 4. 23.

                          “랍비전통과 문헌


 

목차

 

. 랍비 문서 이해를 위한 당시 역사 개요

 

. 2중의 토라

1. 기록된 토라(The Written Tora)

2. 구전의 토라(The Oral Tora)

 

. 세 가지의 구전 토라

1. 할라카(הקלה)

2. 아가다/하가다(הדגא/ הדגה/)

3. 미드라쉬(שרדם, Midrash)

 

. 주요 랍비문헌 개관

1. 미쉬나(הנשׁמ, Mishinah)

2. 피르케 아보트(תובא יקרפ, Pirke Avot)

3. 토세프타 (אתפסות, tosefta)

4. 탈무드 (דומלת Talmud)

 

. 바리새주의의 계승자 랍비전통

1. 요하난 벤 자카이(Rabban Johanan ben Zakkai)

2. 사라진 종파주의

3. 요세푸스와 신약성서의 기록

 

참고문헌


. 랍비 문서 이해를 위한 당시 역사 개요

랍비 문서의 탄생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이 중요하다. 이 기간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 시점인 A.D. 70년에서 A.D. 1040년 바벨론 아카데미 폐쇄까지 약1000년 가까운 기간이라 볼 수 있으며 그 당시 유대인들의 삶과 종교의 근거지는 두 곳이었는데 팔레스타인과 바벨론이었다. 그 기간을 4단계 시기로 나누어 부르고 있는데, 1시대 A.D. 70-3세기 초로 타나임 시대(the period of Tannaim), 2시대는 3세기 초부터 A.D. 500년경까지 아모라임 시대(the period of Amoraim), 3시대는 A.D. 6세기부터 7세기까지로 사보라임 시대(the period of Saboraim), 4시대는 A.D. 500년경부터 A.D. 1040년까지의 게오님시대(the period of Geonim)로 나누어 부르고 있다. 

 

Tannaim: 미쉬나와 미드라쉬에 나오는 선생님들을 의미한다.

Amoraim:예루살렘 탈무드와 바벨론 탈무드에서 언급한 언급된 사람들’.

Saborim: ‘의견을 갖고 있다, 발표하다, 결정하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말.

Geonim: Gaon의 복수형으로 탈무드 아카데미 책임자를 가리킨다.  

 

로마의 디도(Titus)장군에 의한 A.D. 70년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로 이스라엘이 소멸되어진다. 성전 파괴는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인들의 종교적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 하였고, 동시에 성전 제사장 계층의 소멸을 초래하게 하였다.

 

이로써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의 자치 체제가 완전히 무너지고, 그들의 새로운 양상에서의 구심점이 얍네(Yabneh)를 중심으로 요하난 벤 차카이(Yohanan ben Zakai)가 핵심 인물로 등장하여 발생되게 되는데 그는 흩어진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을 중심으로 성전과 국가가 소멸된 상태에서 새로운 유대교를 이끌 지도자들을 가르침의 전당(Lehrhaus)”을 중심으로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A.D.132-135년에 바르코르바 봉기(Bar kokhba Revolt) 대 규모로 일어나 로마에 항거하게 되고 이로써 많은 유대인들이 죽게 되고 핍박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A.D. 138년 로마 하드리안(Hadrian) 황제 서거 후 유대 지도자 예후나 하-나찌(랍비)”가 유대교 복구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A.D. 135년 이후에 가르침의 전당이 얍네를 떠나 갈릴리의 우샤(Usha)로 옮기게 되고 이후에 다시 벳 셔아림(Beth Shearim)과 셰포리스(Seppdris)를 거쳐 3세기 중엽에 티베리아스(Tiberias)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 때 유대인의 최고 지도자 -(Patriarchate)”의 권위가 커졌고, 랍비 모임인 라비낫(Rabbinate)”의 지위가 상승되었다. 이렇게 안정된 시기에 미쉬나(Mishna) 문서의 편집이 이루어지게 되고, 이후에 생기는 랍비 문서들은 이 때 편집된 미쉬나를 토대로 한 것들이다.

 

A.D.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틴(Constantin)의 밀란 칙령(Edit of Milan)을 따라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됨으로써 유대인들의 삶과 종교 발전에 큰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팔레스타인과 로마제국 전체는 니케아 신조(Nicene Creed, A.D 380)의 영향을 받게 되고, 결국 유대교 자치조직 파트리아르키지도체제가 A.D415-429년에 걸쳐 소멸되어진다.

 

A.D. 614-628년에 걸친 페르시아의 서방 진출로 팔레스타인도 종속되고 A.D. 638년 또 다른 아랍 사람들의 침공으로 그들의 지배아래 놓이게 된다. 그리하여 이후에는 예루살렘에서 기독교 세력은 완전히 쇠퇴되어진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이후 정치 지배의 변화에 따라 팔레스타인의 여러 랍비학파가 바벨론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그들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과 전혀 다른 양상의 삶을 살게 된다.

 

바벨론 당시 유대 자치조직은 정치 담당 레쉬 갈루타와 종교 최고 지도자 가온(Gaon)을 중심으로 잘 조직되어졌다. 이로써 바벨론 학파가 팔레스타인 학파를 능가하게 되었다. 이에 편승하여 6세기의 정치적 안정은 바벨론 탈무드를 집필하게 하였고 그리하여 바벨론이 유대인의 삶의 중심이 되어졌다. 바벨론 탈무드가 팔레스타인 탈무드를 양적으로나 구성적으로 능가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더욱 중시하게 되었다.

 

A.D. 640년에 페르시아 사씨닛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의 세력으로 넘어가자 유대인의 두 거점이 같은 이슬람 자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어진다. 이 통일 아랍세계의 수도가 처음에는 다마스커스(A.D. 661-750)에서 바그다드로 옮겨졌다. 이로써 바그다드에 가까운 바벨론의 유대인들의 비중이 커지게 되고 수라(Sura)와 품베디타(Pumbedita)에 있던 아카데미는 황금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유대인의 전성기도 아랍 구심점인 칼리팟의 멸망으로 쇠퇴 되어지게 되었고

 

A.D. 1040년에는 바벨론에 있던 유대 아카데미가 폐쇄되었으며, A.D. 1099년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으로 유대 공동체는 종말을 고하고 중심 거점이 스페인 북아프리카 지역 등으로 이동되었고 이로써 랍비 문서를 배출한 1000년의 시대가 끝나게 된 것이다.

  

. 2중의 토라

 

일종의 도그마’(Dogma)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이 개념은 랍비전통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내린 계시에 근거를 두고 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록된 율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에 해당되는 해석을 동시에 구두로 전수받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고가 미쉬나에 전해지고 있는 문서 가운데 하나인 아봇’(Avot=조상들) 11절에서 잘 나타나 있다.

 

모세는 토라를 시내산에서 받아 이를 여호수아에게 전하였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장로들에게, 그리고 장로들은 예언자들에게, 그리고 예언자들은 이를 저 큰 모임의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토라라는 말은 구전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이 구두로 전해 받은 해석은 온갖 종류의 실천사항을 포괄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토라는 두 가지가 있으며 하나는 기록된 토라이며 다른 하나는 구전의 토라이다.

 

1. 기록된 토라(The Written Tora) 기록된 토라는 히브리어로 토라 쉐브 크타브’(בתכ שב הרות)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모세 오경을 뜻하는 토라는 B.C. 5세기경 페르시아 시대에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다른 성문서는 B.C. 2세기에 와서야 완결된다. 이 정경화 작업은 예언자에게 그 근원을 두고 있는지 아닌지가 거르는 규범으로 거르는 작업을 한 것이다.

 

2. 구전의 토라(The Oral Tora)

구전의 토라는 히브리어로 토라 쉐브알 페’(הפ לעבש הרות)라고 부른다. ‘토라라는 말은 원래 가르침혹은 교훈을 뜻하는데 이미 여기에 구전의 성격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요세푸스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전하여 준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지 아니한 규정들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이것이 사두개파가 바리새파를 배격하게 된 이유라고 설명하며 이 구절에서 요세푸스는 구전의 토라가 바리새파에서 유래하였다고 보고 있다. 이 구전의 가르침은 글자 그대로 외우는 작업이었다. 바벨론 탈무드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                라바난이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어떠한 방식으로 가르침이 전승되었나? 모세는 전능하신 분(하나님)의 입을 통해서 배웠다. 이어서 아론이 나오는데, 이 사람에게 그의(그가 외울)부분을 가르쳤다. 그런 후 아론이 물러나서 모세의 좌편에 앉았다. 이어서 아론의 아들들이 들어 왔고 모세가 이들에게 그들의(그들이 외어야 할 부분)을 가르쳤다. 그런 후 그의 아들들이 물러났다. 엘르아살이 모세의 우편에 앉고 이다말은 아론의 좌편에 앉았다. 아론은 계속해서 모세의 우편에 앉아 있으라고 랍비 예후다가 말하였다. 이어서 장로들이 들어왔고 모세가 그들에게 그들의 부분을 가르쳤다. 이 장로들이 물러나자 온 백성이 들어왔다. 모세는 그들에게 그들의 부분을 가르쳤다. 이리하여 아론은 그 부분을 네 번이나 들었고, 그의 아들들은 세 번, 장로들은 두 번, 그리고 온 백성은 한 번을 들을 수 있었다(54).

 

여기에서 구전의 가르침은 글자 그대로의 반복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일종의 새 창조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구전의 토라가 점차 기록되어 문서화 작업이 이루어지게 된다.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이 문서화는 맞고 틀림의 문제를 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특정시대를 대표하는 것이다. 한 구전전승이 문서화될 때, 이는 공식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고 일종의 사적인 성격만 띠게 된다. 다시 말하면, 유대교의 가르침의 전당에서 공식적인 공부자료 등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이 문서화 과정은 B.C. 5-6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이 구전의 토라 토라 쉐브알 페는 항시 토라 쉐브 크타브와 구별되었다. 이는 구전의 토라가 읽는다’(read)라는 동사와 함께 사용되는 반면에, ‘기록된 토라배운다’(learn)라는 동사와 더불어 사용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 구전의 토라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세 가지의 구전 토라

 

성문화된 기록된 토라’(‘토라 쉐브 크타브’)가 세 부분(‘토라’, ‘크투빔’, ‘느비임’)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본 따서 세 가지의 구전 토라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할라카’, ‘아가다/하가다그리고 미드라쉬를 말한다.

 

1. 할라카(הקלה)

 

이는 아람어로 ךלה, 히브리어로는 קלה라는 걷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유래한 말로 이스라엘이 걸어야 할 길을 표시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종교법과 관련된 모든 사항들다시 말하면 실천사항에 관련한 모든 것이 할라카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할라카는 변하지 않고 고정된 것을 의미한다기보다는, 항시 변동하며 바뀌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대교 전통의 독특성이 바로 이 할라카에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할라카는 세분하여 아래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

 

좁은 의미로는 탈무드에 나오는 할라카 모음들 중 가장 작은 단위(파러그라프)를 뜻한다.

보다 넓은 의미로는 개개의 법조항들을 통칭하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가장 넓은 의미로는 유대교내의 여러 상이한 법률구조를 가리키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다.

법률적인 사항과 관련 된 것들을 모은 문학의 장르로서 이해할 수도 있다.

 

2. 아가다/하가다(הדגא/ הדגה/)

유월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 탈출한 사건을 이야기하는 페사흐 하가다’(Pessa-Haggada)와 구별하기 위해, ‘하가다라는 말보다도 일반적으로 아가다란 아람어화 된 표현을 선호하고 있다. ‘아가다역시 앞서 언급한 할라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의 전통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이 말은 이야기하다’, ‘말하다’, ‘연설하다라는 뜻을 지닌 lehaggid(דיגהל)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가다란 개념은 보통 부정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사무엘 하-나기드(Samuel ha-Nagid, A.D. 993-1055)아가다란 율법이 아닌 온갖 주제에 대하여 탈무드에 나오는 모든 해석이다.”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곧 랍비전통에 나타나는 할라카를 제외한 모든 것이 이 아가다의 영역에 속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율법문제를 다루며 언어사용이 아주 정확하며 잘 정의가 내려진 표현들로 되어 있는 할라카와는 달리, 아가다는 어떠한 통일적인 언어사용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아가다는 특히 성서에 대한 짤막한 주석들과 이야기, 삽화, 동화 등의 형식을 담기도 하며 그 밖에도 현자들의 세계관, 삶의 지혜, 다양한 신학주제, 지방풍속 또는 자연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주제등 다양한 종류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아가다는 그 많은 부분들이 대화나 논쟁의 성격을 띠기도 하며, 이러한 문학적 표현을 이용하여 가르침의 내용을 전하고 있다.

 

아가다의 문학적 표현의 자유는 이것이 성서 본문에 얽매일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구속력이 없는 가르침이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었으므로 아가다는 무엇을 증명하기 위한 자료로 사용될 수 없었다.

 

할라카와 아가다의 경계선을 확실히 긋기는 쉽지 않지만 강조할 점은 아가다의 본래 핵심은 성서주석과 관련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바벨론탈무드의 산헤린’(bSanh 38b)에나오는 랍비 요하난’(Johanan)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 “랍비 메이어의 강좌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3분의 1은 할라카요, 3분의 1은 아가다, 또한 3분의 1은 비유들로 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아가다는 현재의 삶을 종교적으로 극복하는 데에 그 의도가 있었으며 할라카를 보충하는 역할을 맡았다.

 

3. 미드라쉬(שרדם, Midrash)

 

이 말은 구하다혹은 묻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다라쉬’(שרד)에서 나온 명사형으로 연구또는 공부를 의미하고 있다. 이미 성서 안에서 하나님이나 토라를 목적어로 하는 신학적인 의미로서 사용 되었다. 에스라서 710절에 보면 다라쉬라는 동사가 하나님의 토라와 관련 되어 나타나고 있다.

 

 

랍비시대의 미드라쉬는 특히 성서본문에 대한 연구나 그 주석을 뜻하고 있다. 동시에 미드라쉬는 이와 같은 연구나 주석에서 나온 그 결과물들의 모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또한 성서 주석가나 설교가를 다르샨’(ןשרד)이라 부른다.

 

미드라쉬의 근원은 이미 성서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역대기서를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 대한 일종의 미드라쉬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시락서 44-50장에 나오는 조상들의 찬미부분이나 솔로몬의 지혜서 10-19장도 일종의 미드라쉬로 간주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쿰란문서 가운데서도 이에 해당되는 것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G. Vermes는 랍비시대의 미드라쉬 주석방법을 두 종류로 나누고 있다. 첫째는 순수 주석’(Pure Exegesis)이라 부르고 있다. 이는 오늘날 보편화되어 있는 역사비평학 방법과 유사한 것이다. 둘째는 응용주석’(Applied Exegesis)이라 하는데 이는 주석가가 현재와 관련 지어 행하는 주석을 말한다. 랍비시대에는 다양한 종류의 미드라쉬가 있었는데 이들을 보통 할라카적인 미드라쉬’(Halakhic Midrashim)아가다적인 미드라쉬’(Aggadic Midrashim)로 구분하기도 하며 그 형태에 따라서는 주석 미드라쉬’(Exegetical Midrashim)설교 미드라쉬’(Homoletic Midrashim)로 나눌 수 있다.

 

성서본문에 아직 모음이 없었을 당시에는 이와 같이 다양한 종류의 미드라쉬가 가능하였으나, 모음이 자음에 함께 붙은 마소라본문이 생긴 이후로는 더 이상의 미드라쉬 작업이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자음 본문에 모음이 없었을 때는 그 본문의 내용이 모음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었는데 모음이 확정되면서부터는 본문의 내용이 그만 하나로 고정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 주요 랍비문헌 개관

 

1. 미쉬나(הנשׁמ, Mishinah)

 

랍비 시대의 여러 문서를 이해하려면 우선적으로 미쉬나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 한다. 이는 두 탈무드(팔레스타인 탈무드, 바벨론 탈루드)가 이 미쉬나를 주석하여 이를 더욱 발전시키고 확대시킨 작업물이라는 사실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다루는 토세프타’(Tosefta)라는 문서가 이 미쉬나에 대한 일종의 보충서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분명해진다.

 

(1) 미쉬나의 의미

미쉬나는 반복하다라는 뜻을 지닌 샤나’(הנשׁ)라는 히브리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형이다. 여기에서 반복하다라는 의미는 구전전승을 반복하여 배운다라는 사실과 관련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미쉬나라는 말은 배움을 뜻하기도 하고 구전의 가르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미쉬나란 배움과 가르침을 통하여 나타난 결과물 곧, ‘가르침의 문서화된 형태를 뜻하기도 한다.

 

(2) 미쉬나의 형성과 특징

2차 성전 멸망 이후 율법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구전으로 내려오던 현자들의 많은 가르침이 마침내 기원 2세기 말경 수집되어 기록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편집된 책이 미쉬나(Mishnah)이다.

 

미쉬나란 히브리어로 반복한다’, ‘연구한다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성경, 특히 토라의 해설인 미드라쉬(Midrash), 그리고 토라와 상관없이 내려온 전통적인 법과 규례에 관한 설명인 할라카(Halaka)가 포함되어 있다. 미쉬나 편집을 위한 수집과 편집 작업은 미쉬나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야브네의 아키바(R.Akiva)와 여호수아(R.Yoshua ben Hananya), 엘리에젤(R.Eliezer ben Hyrcanos), 메이르(R.Meir) 및 그의 동료로부터 시작하여 유다 나시(Rabbi Judah Ha-Nasi,c.180-220C.E)가 담당하였으며, 여러 시대에 걸쳐 수백 명의 랍비들에 의해 첨가, 수정되어 최종 확정되었다.

 

미쉬나가 취급하고 있는 내용은 매우 다양할 뿐 아니라 상호 대조되는 자료들이 함께 편집되어 있다. 미쉬나의 마지막 편집자의 목적은 법규를 변경할 수 없도록 최종 확정 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 가능한 해석들을 종합하여 나타내고자 함에 있다. 그런점에서 미쉬나는 법 교재라기보다는 문학 작품으로 규정된다.

 

표현의 방식이나 특징에 있어서 현자와 랍비간의 대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들이 선택하고 사용하는 어휘나 문장은 취급하는 내용과 더불어 미쉬나의 문학적 가치를 잘 대변해 주는 증거가 된다. 나아가 자주 사용하고 있는 두운법(alliteration), 교차배열법(chiasmus), 반복법(repetition), 그리고 대구법(parallelism)등의 많은 수사학적 표현 방식 역시 미쉬나의 문학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미쉬나의 편집 원칙은 할라카를 한 법전으로 묶는다는 의도 하에서 이루어 졌으며, 특별한 교육적 원칙에 의해 좌우되었다. 아카데미아에서 구두로 가르쳐온 내용을 체계적으로 묶는 작업 자체가 교육적 기능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교육적 원칙이 편집의 원칙 가운데 중요하게 인정된 것이다. 이러한 의도 하에서 다음의 몇 가지 편집 원칙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미쉬나는 익명이 많이 사용되는데, 이는 특정한 주제와 가르침이 특정한 상황의 제약을 가능한 한 받지 않도록 보편화하는 과정을 반영한다.

 

둘째, 토론 과정에서 상호 다른 입장과 의견이 소개된다. 경우에 따라서 다른 견해를 매우 길게 소개한다. 이러한 과정을 학생이나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경험하고 선택하도록 함으로써 최종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보다 자연스럽고 확실하게 해 나간다.

 

셋째, 각기 다른 장소에서(경우에 따라서 각기 다른 시대에) 이루어진 복잡한 토론을 소개한 후 이를 한 대화의 형식으로 묶은 다음 최종적으로 의견을 결정할 때 가장 권위 있는 랍비를 내세워 토론을 종결하는 형식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각기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각각 살던 랍비들이 같은 토론의 한마당에 등장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넷째, 한 주제의 최종 결론을 얻어 내기 위하여 매우 폭넓은 다양한 자료를 선택하여 취급하고 있다. 이는 아카데미아에서 가르치기 위하여 사용된 많은 자료를 그대로 선택하여 기록함으로써 교육적 효과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3) 미쉬나의 구조

미쉬나는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부분들을 가리켜서 세다림’(םירדס)이라 한다. 세다림이란 규칙(order)이란 뜻을 가리키는 세더’(רדס)란 말의 복수형이다. 또한 각각의 세더은 7-12개의 마쎄켓’(תכסמ, tractate)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개개의 마쎄켓은 다시 페렉’(קרפ, chapter)별로 나누어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ZERAIM(씨앗)에는 농사와 관련된 법들이, MOED(축제)에는 안식일와 축제들 같은 약속된 절기에 관련된 법들이 있다. NASHIM(여성)에서는 결혼, 이혼, 가족 관계의 율법을, NEZIKIN(손해)에서는 시민과 범죄에 관한 법령과 재판 과정에 관한 율법을 다루고 있다. KODASHIM(거룩한 것들)에는 희생 제사와 성전 제사에 관한 율법이고, TOHOROTH(정결)는 성전과 가정에서의 정결에 관한 율법이다.Jacob Neusner, The Classics of JUDAISM, (Louisville, Kentuc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5), p. 28-29

 

 

2. 피르케 아보트(תובא יקרפ, Pirke Avot)

 

이 작품은 미쉬나의 네 번째 세더’(Seder=order) 중 아홉 번째 마쎄켓’(tractate)으로, 줄여서 아보트라고도 부른다. 아보트라는 말은 아브’(בא)란 명사의 복수형으로 조상들을 뜻한다. 아보트는 모두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첫 번째 장이 가장 중요한데, 여기에 모세부터 시작되어 한 번도 끊어짐이 없이 계속 내려온 유대 전승고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아래는 아보트 11절에서 18절까지 이어지는 조상들의 이름이다.

                                                 Moses

Joshua

Elders

Prophets

Men of the Great Assembly

Simeon the Righteous

Antigonus of Sokho

 

1. Yosé ben Yoezer Yosé b. Yohanan

2. Joshua b. Perahyah Nittai the Arbelite

3. Judah b. Tabbai Simeon b. Shetah

4. Shemaiah Avtalyon

5. Hillel Shammai

Gamaliel

Simeon his son

Rabban Simeon b. Gamaliel

 

 

1장에는 모세로부터 A.D. 68~70년의 전쟁시기까지의 전승보관을 추적하고 있다. 2장에는 더 많은 명단이 제시되어 있는데, 연대기는 소홀히 하고 있으며,

그 보다 전쟁 후의 전승이 어떻게 재구성되었는가를 지적하고 있다. 3장과 4장은 이 후기의 여러 전승을 제시한다. 5장에는 격언자료들이 추가되어 있는데 저자들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 관련되어 있다. 6장은 오랜 시기가 지난 후까지 분명히 아보트에 첨가되지 않았다.

 

미쉬나는 그 편집 후 전체적으로 랍비 학교에서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아보트는 중세시대에 대학과 회당에서 안식일 독본의 교재로 사용하게 되었다. 어떤 유대 독본들이 6주 동안 읽혀지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6장을 첨가하게 된 이유가 된 것 같다. 이 마지막 장은 보통 랍비 메이어의 장’(Chapter of Rabbi Meir), 또는 토라의 습득’(Acquisition of Torah)으로 불리어지는데 후자의 명칭은 그 내용을 꽤 정확히 묘사한 것이다.

 

3. 토세프타 (אתפסות, tosefta)

 

토세프타란 말은 아람어로서 삽입혹은 보충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곧 미쉬나에 대한 삽입과 보충을 의미하는 말인 동시에 삽입과 보충을 담고 있는 책을 의미하기도 한다.

 

토세프타의 구조는 미쉬나의 구조와 같아서 6개의 세더와 총33개의 마쎄켓’(=)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몇몇 마쎄켓의 이름과 순서가 미쉬나의 것과 약간 다를 뿐이다.

 

 

토세프타의 기능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토세프타는 미쉬나에 대한 가장 이른 주석으로 볼 수 있다. 랍비 아키바와 그의 제자들이 토세프타의 시발점을 이루고 있다. 둘째, 미쉬나에 들어 있는 할라카를 더욱 자세히 다루고 있는 일종의 보충서라고 볼 수 있다. 셋째, 미쉬나에 들어오지 못한 타나임 시대 가운데 마지막 세대의 할라카 결정들을 담고 있는 미쉬나의 연속물로 이해할 수 있다. 미쉬나 이후에 생긴 토세프타는 미쉬나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토세프타의 4분의 1가량은 미쉬나와 무관한 것으로서 독자적인 할라카 전통을 담고 있다.

  

4. 탈무드 (דומלת Talmud)

 

탈무드란 말은 라마드’(lamad=배우다) 혹은 림마드’(limmad=가르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서 연구혹은 가르침”/“교훈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동시에 탈무드란 말은 전승된 모든 가르침’, 특히 아모라임 시대(A.D.3세기 초 - A.D.500년경)에 미쉬나 주석을 통하여 얻은 가르침을 뜻할 수도 있다. “탈무드는 미쉬나의 근간을 주석한 이전에 있던 교사들의 지혜이다.”라고 셰리라’(Sherira)는 정의 하였다. 보다 좁은 의미에서의 탈무드란 미쉬나에 대한 주석을 가리킨다.

 

 

탈무드가 문학적으로 볼 때 하나로 통일된 성격을 보여주기보다는 수많은 차이점들과 모순들을 비롯하여 많은 반복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탈무드를 어떤 편집자나 혹은 한 학파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이는 결국 탈무드는 어느 한 시점에서 일괄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기에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자료를 다루는 가운데 여러 학파들의 입장을 모아놓은 다양한 문서의 모음집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탈무드는 미쉬나 본문과 그에 대한 주석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주석을 두고 게마라’(Gemara)라 부른다. 이 말은 게마르’(gamar=완성하다/배우다)란 동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통을 배움혹은 전통에 따른 가르침이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게마라문서화된 토라의 완성혹은 연구의 완성이란 의미도 담고 있다.

 

 

탈무드는 팔레스타인 탈무드’(혹은 예루살렘 탈무드’ )바벨론 탈무드로 불리는 두 종류가 있다.

 

 

(1) 팔레스타인 탈무드(The Palestinian Talmud : pT or yT)

팔레스타인 탈무드는 팔레스타인 아모라임의 미쉬나 주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A.D. 5세기에 티베리아스, 케사레아, 세포리스에 있던 학파의 전승물의 모음집이다. 하지만 이것은 미쉬나에 엄격하게 묶여있지 않고 그와는 연관이 없는 수많은 자료들도 담고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탈무드는 미쉬나 주석으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스승들의 가르침을 미쉬나 구조에 따라서 수집하였으며 티베리아스에서 이 수집물에 대한 편집작업이 있었다고 짐작할수 있다.

 

 

전통랍비 유대교가 바벨론 탈무드를 더욱 중히 여김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탈무드를 경시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첫째, 팔레스타인 탈무드는 타나임시대의 문서들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므로 그 당시의 문서이해에 도움이 된다. 둘째, 팔레스타인 역사이해에 도움이 되는 기초자료가 된다. 셋째, 유대교 예배의식 발전이해에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팔레스타인 탈무드는 미쉬나 전체에 대한 주석을 담고 있지 않고 총63개 미쉬나 마쎄켓 가운데 39개의 마쎄켓만 주석을 하였다.

 

 

(2) 바벨론 탈무드(The Babylonian Talmud : bT)

유대교에서 구별없이 말하는 탈무드라 하는 것은 이 바벨론 탈무드를 가리킨다. 이 바벨론 탈무드는 양적인 면에서 팔레스타인 탈무드보다 훨씬 능가하며 유대교의 카논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것은 일종의 백과사전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랍비 전통 가운데에서 보존의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이 이 안에 들어있다. 그러기에 우화, 전설, 그리고 각종 학문분야와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바벨론 유대교의 국립도서관이라는 별칭도 있다.

 

팔레스타인 탈무드와 비슷하게 바벨론 탈무드의 게바라는 총 63개의 미쉬나 마세켓 가운데 단지 362분의 1개의 마쎄켓과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바벨론 탈무드는 A.D. 2세기 말이나 3세기 초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Nehardea, Pumbedita, Sura를 거치면서 발전하고 A.D. 600경에 오면서 대부분 완성되고 A.D. 8세기에 와서 최종완성이 이루어 진다.

 

 

. 바리새주의의 계승자 랍비전통

 

랍비문헌은 신구약 중간 시대의 유대교에 대한 증거를 위해서 중요한 자료인데 여기에서는 초기 바리새파 전통이 랍비 전통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유대전쟁 이후의 유대사회에서의 가장 큰 변화는 성전파괴로 인한 구심점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심점 상실에 대해 코헨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성전이 파괴되고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제사장들은 일자리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할 제도적 기반을 상실했다. 이스라엘 본토의 유대인 공동체에는 더 이상 사회적 엘리트 혹은 기존 체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해외 유대인들에게는 더 이상 그들을 결속할 중심이 없었다.” 이 당시에 유대교는 70년 대재난 이후에 바리새적 서기관들의 주도하에 새롭게 정비되는 단계에 놓여 있었으며, 이와 동시에 바리새적인 가르침과 실천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집단을 구별해 내어서 추방하기 시작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처음에는 백성의 지도권을 두고 사두개인들과 다투었지만, 예루살렘이 멸망한 뒤로는 유대교 사상을 주도하고 결정하게 되었다.

 

 

1. 요하난 벤 자카이(Rabban Johanan ben Zakkai)

 

AD 70~80년 율법학자 요하난 벤 자카이는 바리새파들을 이끌고 텔아비브 남동쪽 약 20지점에 위치한 야브네(그리스어로는 얌니아)로 가서, 성전이 파괴되었으므로 오로지 율법 중심의 유대교를 재건했다. 그는 율법학교(베트 미드라시)를 개설했고, 또한 요세푸스와 신약성서에 의해 바리새인으로 잘 알려진 그의 후임자 가말리엘 2세는 최고의회(베트딘)를 창설하여 유대교 최고의결기관으로 삼았다.

 

 

랍비 전통은 성문 율법과 마찬가지로 구전 율법 또한 모세와 시내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미쉬나의 Aboth의 서문은 모세부터 시작하여 여호수아 그리고 예언자 그리고 포로 이후 회당의 사람들나아가 힐렙과 샴마이까지 다섯 집단으로 이루어진 전승의 고리를 말하고 있다. 요하난 벤 자카이-70년 성전 파괴이후 유대교의 아버지-는 힐렐과 샴마이로부터 구전을 전해 받은 사람으로 알려졌다. 여기에서 전통의 전승에 대한 전문 용어로 받다’, ‘맡기다’, ‘보내다가 사용되었다.

 

 

전승의 고리는 요하난 벤 자카이에게서 끊어지지만 중요한 것은 이 전승의 고리는 전통의 계속성을 보여 주려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랍비 전통에 비추어 주후 70년의 상황은 초기 전통과 힐렐과 샴마이가 전해준 전통의 연속에 불과하다고 의식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주후 70년 이전의 초기 단계의 전통은 바리새적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유대전쟁이후 요하난 벤 자카이를 중심으로 한 랍비적 유대교가 전쟁에 패하여 충격에 사로잡힌 유대사회의 중심적 기관의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사라진 종파주의

 

유대전쟁이후의 유대사회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유대교의 여러 종파가 사라진 것이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하여 함락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불에 타게 되는 사건은 유대인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다. , 바리새인, 사두개인, 엣세네파, 열심당, 시카리, 4철학 등의 다양한 유대교 종파가 70년 이후에는 바리새인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외에는 자취를 감춘 것이다. 쾨스터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원후 66-70년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로마인들은 많은 종파를 제거했고 최소한 크게 약화시켰다. 혁명적 집단들(열심당, 시카리, 4의 철학)이 멸망되었다. 쿰란 공동체는 기원후 68년에 파괴되었다. 사두개인들이 성전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로 구성되었다면, 그들의 수효는 로마와 혁명군의 군사 행위로 심각하게 줄어들었다. 다양한 종파들을 제거하는 것 이외에 전쟁은 또 종파주의의 핵심을 제거했다. 종파주의의 핵심은 성전이었다. 성전이 파괴되고 대제사장직이 비참한 지경에 이르면서 종파들은 그 존재 이유를 상실했다. 이렇게 해서 전쟁은 종파가 없는 사회로 가는 길을 마련했다.”

 

 

특히 성전파괴 이후 유대전쟁의 패배원인이 율법에 대한 불순종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인 이 당시의 상황에서 생활 속의 율법의 실행과 율법해석에 관한 한 대중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한 랍비적 유대교가 대중적 지지와 권위를 차지하게 되었을 가능성 높다. 이제 성전과 제사가 쇠퇴한 상황에서 유대인의 구심점의 역할이 토라로 집중되은 지지기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래의 자유분방한 분파간의 대립은 사라지고, 바리새파가 주축을 이루는 랍비유대교로 굳어져 가는 경향이 있었다.

 

3. 요세푸스와 신약성서의 기록 

랍비 자료의 구전과 전통에 관한 정보는 신약성서와 요세푸스의 기록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요세푸스는 미쉬나의 시므온 벤 가말리엘은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이었으며 신약성서 사도행전 5:34에서도 라비전통의 가말리엘을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미쉬나의 랍비들은 요세푸스와 신약성서가 묘사하는 바리새인들과 공통되는 특징들을 많이 갖고 있다. 그리고 예수 시대의 바리새 전통과 요세푸스가 살던 시대의 바리새 전통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7:3, 5는 바리새인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에 따라 손을 씻기 전과 시장에서 귀가한 후 자신의 몸을 정결하게 하기 전에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또한 잔, 항아리와 청동 그릇을 씻는 관습이 있었으며, 바리새인과 예수의 제자들이 조상의 전통을 무시하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이에 대해 예수께 따졌다. 이에 예수는 마가복음 7:8에서 그들의 전통을 사람의 전통이라고 꼬집었으며 마가복음 7:13과 마태복음 15:2-9에서 유산으로 받은 전통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한다고 꾸중하셨다. 갈라디아서 1:14에서는 바울이 그가 바리새인이었을 때 조상들의 전통을 위해 얼마나 열성적이었는지 고백한다.

 

결론적으로 바리새파주의는 유대 종교와 하나님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필요한 행위의 때문에 생겨난 일종의 종교운동이었지만 그들의 역사를 통해 볼 때 그 요소들은 하나의 지속적인 힘 내지는 지도 방침으로서 자리잡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어떤 면에서 바리새파주의는 단지 포로 이후의 규범적인 유대 종교일 수도 있다.

 

또한 Emil Schuerer2성전 시대 동안 바리새주의가 일반 유대교와 구별될 수 있는 특수성이 발견되지 않는다. 영성에 관하여 말하면 바리새파주의는 단지 대다수의 유대인과 포로 이후 유대인 지도자들이 선호한 경향과 일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국가 내에 한 집단을 형성했으며 바리새인들이 그와 같은 이름을 얻었던 것은 틀림없이 그들의 엄격한 정결 개념에 입각하여 자신들을 분리하려는 경향 즉 이방인이나 혼혈 유대인들의 부정뿐만 아니라 백성들 전체가 부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구별된 자혹은 스스로 구별하는 자라고 불리었다.”라고 이야기한다. 바리새인들의 전통은 아주 견고한 것이었으며 백성들 다수는 그들이 이해하는 유대교를 신봉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초기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학문이 70년 이후 유대교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러한 변화와 재형성의 과정은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하나의 전통이 새로운 교사들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70년 이후에 새로 창조되었던 전통과 아울러 상당한 양의 하가다와 할라카 전통은 그들의 전임자인 바리새인들에 의해 후세대의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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