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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누가복음서의 경제신학/ 임인호

by 은총가득 2020. 4. 23.

 

     


          누가복음서의 경제신학

                                                               임 인호(호서대학교)

 

.들어가는 말 : 연구 목적과 중요성

 

1) 연구목적

본 논문은 누가복음서에 나타난 경제용어들이 누가복음서 본문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 가를 규명하고 나아가 그 용어들의 문학적 동기를 밝히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누가복음서의 배경이 되는 그레꼬-로마(Greco-Roman) 세계는 물질적 부가 아주 불공정하게 분배된 세계였다. 이로 인하여 경제적인 문제는 그 당시 가장 관심사 중 하나이었으며, 동시대의 저작물인 누가복음서에서도 경제적인 문제 또한 중요한 문제이었을 것이다. 임인호,“누가복음서의 경제신학”,신약논단 제 112(2004년 여름),263.

 

최근 들어 누가복음서의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 문제와 재물에 대한 논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 결과의 하나는 누가복음서에는 많은 경제 용어들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누가의 특수 자료에는 재물 문제와 재물을 다루는 인간의 태도에 대한 주제가 부각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것들을 면밀히 분석하고 누가복음서 본문에서 그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분석하려고 한다.

 

 

2) 연구방법

이런 이유로 인해

(1) 누가 복음서를 종교적이고 신앙적 관점에서 보다는 사회경제적인 현실 문제와 연관하여 경제적인 접근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들은 누가복음서가 교회 공동체의 문서라는 사실을 간과하였다. 누가복음서에는 누가 공동체가 처한 상황, 특히 유대교 회당에서의 축출에 따른 소외의 아픔과 고통을 해소하려는 생존의 몸부림이 드러난다. 누가는 그가 속한 교회 공동체의 생존 문제 해결을 찾고자 했을 것이다. 서용원 박사는 초대 기독교가 처한 구체적 현실인 박해, 순교의 상황에서 신앙공동체 형성의 과제에 대한 관심과 관련하여 생존이라고 하는 언어로 규명하고자 하였다.


(2) 본 논문에서는 경제신학이라는 용어를 누가의 재물관과 같은 맥락에서 사용하고, 누가복음서의 중요한 경제 진술에 대한 주석을 통해 누가의 신학적 메시지와 입장을 보이고자 한다.

 

 

.경제신학 정의

  

A. 경제의 정의


경제학에서는 경제의 정의는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 교환, 분배, 소비하는 행위를 경제 행위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경제 행위가 계속적 규칙적으로 이루어져 형성된 사회 질서,’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 분배, 교환, 소비와 관련되는 사회 제도와 인간 행위를 뜻하는 헬라어‘oikonomia'는 가정 관리, 곧 집안 살림 살이를 뜻한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의 삶과 그들의 역사적 환경을 흔히 집이 없는 상태, 집으로부터 뿌리 뽑힌 상태, 때로는 집이 있는 또는 집안에 있는 상태로 묘사한다.


누가 복음서가 쓰여진 환경인 그레꼬-로마 세계에서 정치경제의 가장 기초단위는 집이었는데, 집은 고대사회에서 그의 사회적 신분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사회적 구조와 가치를 판단하는 중요한 사회적 지표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oikos'는 그레꼬-로마 세계에서나 경제학 그리고 교회론에서도 핵심적인 용어이다.


신약성서의 기자들과 초기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일에 관한 지식으로 세상 창조와 구원에 관한 것이며 삶과 죽음, 선과 악, 질서와 무질서, 국가의 통치와 가정의 의미가 모두 경제에 속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업을 하나님의 경제(경륜)’로 표현하였는데, 이를 통해 경제의 어의론적 영역과 하나님에 관한 성서의 표현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신탁, 성실성, 수탁자, 약속어음, 신임, 부채, 상환, 저축, 증권, 선물, 채권과 같은 말은 경제를 언급하는 기초 언어들인데, 이러한 표현들을 통해 성서는 하나님에 대해 묘사한다.

  

신앙과 관련된 파생어들을 살펴보면 성서적 종교와 경제학은 충실, 신요, 신뢰라는 말들을 그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기초적인 단어들로서 공유한다. 경제는 믿음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신앙 또한 믿음 없이 생각할 수 없다. 성서와 경제학은 모두 상환, 저축, 보장, 이윤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B. 경제신학 정의


경제신학경제신학으로 구성된다. 본인이 이 용어 사용에 있어서 신학경제라고 말하지 않고, ‘경제신학(Theology of Ecconomics)’이라 말하는 것은 이 용어가 신학을 말하는 용어임을 의미한다. 경제신학에서 중요한 것은 경제가 아니라 신학이다. 경제신학에서 경제는 내용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 겉으로 드러난 형태를 의미하며, ‘신학은 그릇 안에 담긴 내용을 의미한다.


누가가 자신의 신학을 표현함에 있어서 경제적 용어로 표현한 것은 그가 속한 공동체가 경제적 상황과 많은 부분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이런 진술은 당시의 시대적 정황을 반영하는데. ‘경제신학이해를 위해서 말리나(Malina)의 진술은 도움이 된다.

 

모든 자원이 제한된 것이라는 인식과 더불어 1세기의 명예로운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 미래의 이득을 위하여 절약하며 숙련된 기술과 능력을 가짐으로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이런 것들이 출세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땅과 자원은 제한되었고, 기술을 촉진시키는 비활성적 에너지가 결핍되어 있음으로 해서 열심히 일하고 기술을 향상시키는 것은 의미 있는 이익을 산출하지 못함을 발견하였다. 자작농이 큰 땅을 소유하고, 작은 상점이 주인이나 기술자가 자력으로 부자가 되는 길은 없었다. 1세기 구어체에서 어려운 상황에서의 구출을 의미하는 헬라어 구원은 오늘날 상환이란 말처럼 하 나님 지향적인 말이 아니다.” 위의 책,


1세기 사회의 가장 중요한 형태는 호혜(互惠)관계의 원리이다. 이것을 죠지 포스터는 상호관계적인 계약이라고 부른다. 자본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본을 축적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수치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부를 축적하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사용된 말은 탐욕이며, 부자와 가난한 자는 탐욕스러운 자와 사회적으로 불행한 사람들을 말하는 용어이었다.


신약성서 대부분은 하나님이 후견인(patron), 중재자(mediator), 예수는 중계인(broker)이며, 백성들은 예속자(client)의 유비로 묘사된다. 은혜라고 하는 신학적 어휘는 하늘에 계시는 우리의 후견인(patron)에 의한 모든 호의를 의미한다(, 고후 8:9).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만일 이 구절을 단순히 물질적인 측면으로만 이해한다면, 부자인 그리스도가 단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가 됨으로 우리를 부자되게 했다는 말이 되어 버림으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되어 버린다.


후견인-예속자, 이 제도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분명한 특징으로 제시되는 가난한 자들을 향한 자선과 관대함으로 발전하였으며, 이것은 다음 세대 외부인들에 의해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독특한 특징들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았다.


후견인-예속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경제적 재화와 명예의 교환임을 생각했을 때, 이러한 모습은 누가복음서의 경제신학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 경제적 제공으로 인하여 명예를 획득하였던 이 제도는 누가복음서에 와서는 경제적 제공(손실)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으로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가 경제적 손실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경제적 획득(탐욕)이 하나님이 아닌 재물을 섬기는 것으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이에 대해 말리나와 필치(John J. Pilch and Bruce J. Malina)는 예수와 관계하여, 명예와 수치가 수난 이야기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고 말한다.


예수의 죽음은 가장 치욕스런 죽음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일으킴으로 특별한 명예를 부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명예가 집단가치임을 지적한다. 이렇게 누가복음서의 환경인 그레꼬-로마 세계에서 중요 근간이 되는 제도는 후견인(patron)-예속자(client) 제도는 누가복음서 저자로 하여금 경제신학적 진술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경제관련 본문 개괄

 

146-56(마리아 송가)에서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자기 비천함을 돌보아 주심을 찬양하며, 찬양 내용은 경제적 진술로 되어 있다. 사가랴 찬가(1:67-80)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누가의 예수는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그는 강보에 쌓여 구유에 있으며(2:7,12), 그는 율법대로 비둘기 한 쌍 혹은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였다(2:23-24)

 

 

1. 3:7-14의 요한 설교


3:7-14의 요한 설교는 경제적 진술들로 구체적 요구를 한다.

경제적 시험(4:1-14)을 예수가 승리한다.

나사렛 회당 설교(4:15-24)는 복음의 수혜자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을 선언하고, ‘부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한다.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의 것이다. ‘주린 자배부름을 선언하는 반면, ‘부유한 자의 저주를 예수는 선언한다.


예수는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며, 구하는 자에게 주며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라고 명령할 뿐 아니라(6:29b-30), 받을 것을 기대하고 빌려주지말고,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6:34-35)고 일반 상식과는 다른 경제 논리를 제자들에게 말한다.


2. 잔치와 관련된 경제원리

잔치와 관련해서도 누가는 부한이웃을 청하지 말고 복음의 수혜자인 가난한 자들을 초청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잔치의 초청 대상자 선정의 기준을 누가는 경제적으로 갚을 수 있느냐의 유무와 관련시킨다(14:12-14).

큰 잔치 비유(14:15-24)에서 초대받은 사람들이 잔치를 거절한 이유는 밭을 샀다는 것과 소를 샀다고 하는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그리하여 잔치의 초대 명단은 가난한 자들로 수정된다.


3. 5:1-6:16과 관련된 경제원리

5:1-6:16은 일련의 제자직과 관련된 누가의 문학적 구성이다. 여기서 누가는 기적적인 어획량이라는 경제적 이득이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린 후제자직을 수행한다.

                    

임인호 교수또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5:26, 27, 33의 제자훈(弟子訓)을 반복 기술함에 있어서.

26절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제자가 됨

27에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쫓음으로 제자가 됨

33에서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림으로 제자가 된다.” 고 한다.

 

 

제자직과 관련한 요구 사항과 33절의 모든 소유를 버림27절에서는 자기 십자가라는 말로 대치된다. 누가는 이렇게 경제적 진술을 십자가라는 종교적 의미로 연결시킨다. 특히 27절과 33절의 제자됨을 사이에 두고 28-32에서 망대를 세우고자 할 때 비용을 계산하는 행위를 제자직과 연결시키고, 자기 모든 소유를 버려야만 제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14:25-35).

 

 

4. 9:1-10:16와 관련된 경제원리

9:1-10:1612파송과 70인 파송 사이에 위치하며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열두 제자를 파송할 때 예수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는 무소유를 요구하며(9:3),칠십인 파송에서도 예수의 지침은 경제적인 표현으로 반복된다.


첫 번째 부분인9:7-213부분으로 구성된다. 누가는 이 구성을 통해 예수가 누구인가를 보여준다. a(9:7-9)a'(9:18-21)부분에서는 예수의 정체와 관련하여 안팎(헤롯과 제자들)으로 예수를 요한, 엘리야, 선지자와 연결한다.


Talbert9:7-50이 누가복음 구성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됨을 지적하면서 눅 4:16절에서 시작한 갈리리 사역에 대한 결론이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에수의 정체성에 대한 두 질문과 예수를 불러 자신과 동일한 발전과정을 거치도록하고 있다고 말한다. Talbert, Reading Luke, 102-3.

 

 

그리고 누가는 이런 상황 속에서 b(오병이어/10-17) 사건을 통해 예수의 정체를 드러낸다. , 9:7-99:18-21에서 말하는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10-17절에 의해서 그가 경제적 빈곤의 상황을 해결하는 분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은 4:17-19에서 언급하였던 가나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고자 예수에게 기름 부으신 그대로 이다.


모든 상황의 해석을 가난한자와 귀결시키 고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5. 18:18-25와 관련된 경제원리

18:18-25에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묻는 관원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경제적 요구가 주어주지만

 그가 이 명령을 듣지 못한 것이 부자이기 때문임을 밝힌다.

베드로는 자기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쫓았다고 예수께 말한다(18:28).

예수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한 여인(향유담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에게 구원을 선포한다(7:36-50).


경제적 손실을 한 여인의 행동은 탕감 받은 두 빚진 종의 비유를 통해 경제적 손실의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은 바리새인의 행동과 대조하여 기술한다. 이를 통해 누가는 빚 탕감을 사랑의 행위로 연결한다. 8:3은 자기 소유로 섬긴 여인들에 대해 기술한다. 8:14에서 가시밭에 떨어진 씨앗이 결실하지 못한 이유가 재리에 대한 유혹 때문이다. 이렇게 누가복음서는 소유를 신앙적 결단으로서의 사랑과 열매 맺는 것을 연결시킨다. 하지만 사랑으로 드러나지 않은 열매 맺지 못함은 심판받는다(13:6-9).

 

 

19:1-10의 삭개오 본문은 그가 부자이었지만,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줄 것과 토색한 것에 대한 4배의 보상을 선언함을 말한다. 삭개오의 이런 모습은 18:18-25의 부자 관원과는 대조적이다. 부자인 삭개오이지만 그는 경제적 포기 선언을 통해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스스로 밝힌 부자 관원과는 다르게 그의 행위는 구원으로 이어진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10:25-37)에서는 사마리아 사람의 자비로운 행위가 경제적인 표현으로 언급된다.

예수는 귀신축출에 대해 모함하는 자에게, 강한 자가 자기 집을 지킬 때는 소유가 안전하지만, 더 강한 자가 저를 이겨 저의 재물을 나눈다고 하는 경제적인 언술을 통해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축출을 하였다는 모함에 대처한다(11:14-26).

그리고 예수는 탐욕스런 바리새인에게 구제를 명령 뿐 아니라(11:41),

 

 

유업분배에 대한 불만을 품은 동생: 예수께 재산분배에 대해 형에게 말해달라고 요구하는 동생에게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한다(12:13),


부요치 못한 어리석은 부자: 뿐만 아니라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해,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치 못한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를 들려준다(12:16-21). 비유속의 등장하는 부자의 어리석음이 경제적 진술로 표현된다.


이어지는 12:22-34에서 누가의 예수는 제자들에게는 경제적인 걱정(먹거리,)을 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권고를 위해서 누가는 어떤 경제 활동도 하지 않는 까마귀와 백합화에 대한 예시를 제시한다. 살기 위해서 어떤 경제적 활동도 하지 않는 까마귀, 백합화의 모습은 앞 구절의 어리석은 부자의 행위와 대조된다. 경제적 고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유를 팔아 구제하는 것이다. 누가의 이런 요구는 보물이 있는 곳에 사람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12:34).


주인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를 찾는다(12:41-48). 이 청지기는 때를 따라 종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는 자이며, 주인이 이러한 청지기를 찾는 것은 자기 모든 소유를 맡기기 위함이다.


15장의 잃었다 찾은 세 비유에서 누가가 잃은 것은 양과 드라크마와 같이 경제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아들과 관련해서는 누가는 많은 경제적 표현들을 사용한다.


예컨대,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 상속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는 재산을 받아 먼 나라에 가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허비한다. 이렇게 누가는 아들의 허랑방탕함을 경제적 표현으로 기술한다.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고자 한 결심과 관련해서 그에게 주어진 것은 최소한의 경제적 충족이 되지 않는 주려 죽는 궁핍한 현실이다. 이런 자신의 현실 속에서 그가 생각한 것은 아버지 집의 풍족함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경제적인 풍족함을 제공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 주며, 신을 신기고 살찐 송아지를 잡으며 잔치를 베푼다. 일련의 경제적 표현들을 통해 기술된 아버지의 행위는 아버지의 재산을 허비하고 돌아온 아들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집에 있는 아들은 아버지의 이러한 경제적 제공의 행위에 대해 원망한다. 아들의 원망의 표현은 경제적 진술로 되어 있다. , 돌아온 아들에게 행한 것보다도 작은 경제적 손실(염소)을 자신에게 행하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다.


15장은 경제적 표현으로 전체가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16장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16장은 경제신학의 가장 중요한 길반을 제공한다. 그것은 16:13인데, 여기서 누가는 하나님과 재물을 대립적인 명제로 다룬다(두 주인), 이 명제는 16:1-13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와 관련해서 주어진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대한 바리새인의 비웃음(14-18)과 관련해서 누가는 바리새인이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말한다.


계속되는 본문인 부자와 가난한 나사로 비유(19-30)에서도 경제 진술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브라함 품에 가거나 혹은 가지 못한 이유가 살았을 때의 경제적 상태 때문이다.


인자의 때와 관련해 제시하는 본문(17:20-37)에서 누가는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다고 기술한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경제 행위를 멸망의 이유로 말한다. 롯의 경우에서도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집 짖는 경제적인 행위가 멸망과 연결되어 나타난다. 만일 이 본문에서 이 표현들이 단지 표현 그대로 경제적 행위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본문은 난해한 본문이 된다.


가장 기본적인 경제적인 행위를 멸망과 연결시키는 누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16:13의 빛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9:11-27의 므나 비유는 왕위를 받고자 떠나면서 종들에게 므나를 주며 장사하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 비유는 주어진 므나를 가지고 장사하여 이익을 남기는 것이 종말지연에 대처하는 자의 태도임을 보여준다(19:11).

 

 주인의 칭찬을 받은 자들은 남긴 자 들이며, 주인의 심판을 받는 자는 남기지 못한 자이다. 주인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익을 남겨야 했다고 말한다.


19:45-48에서 누가의 예수는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며 그들을 강도라 표현한다.

 

20:9-18의 포도원 비유는 주인을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간 사람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가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자 종들을 보내고 심지어는 아들 마져 보내지만 세를 주어야 할 농부들은 종들을 때리고 심지어 아들을 죽인다. 농부들이 아들을 죽인 이유로 누가는 아들의 유업을 자기의 것으로 삼고자한 경제적 이득 추구가 있음을 말한다.

 

21:1-4에는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한 것에 대해 예수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어떤 사람보다 많이 넣었음을 말하는데, 그 이유로 경제적인 상태에 의한 것임을 말한다. 경제적 부족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전도여행을 상기시킨다(22:35). 이것은 맘몬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넉넉함이며 누가는 이것을 근거로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다.


6. 결론

이렇게 누가복음서에는 경제적인 진술이 다른 복음서와 비교할 때 양적으로 많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기술들 속에 누가의 중요한 신학적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누가복음서의 경제진술에 대한 총제적인 연구가 없었다. 그리고 피상적으로 누가복음서가 사회경제적 관심이 많은 복음서로 취급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본 논문은 이러한 태도에서 한걸음 진일보하여 경제진술들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누가복음서 이해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며, 누가복음서가 이러한 경제용어들을 통해 자신의 신학적 메시지를 함의 하고 있다는 것을 연구를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입장을 경제신학(Theology of Economics)”이라는 말로 함축하여 부르기를 제안한다.

 

누가복음서 이해에 있어서 이 용어가 필요한 것은

누가복음서 서사세계에서 표현되는 경제 진술들을 단지 경제적으로만 이해하는 한계를 방지할 뿐 아니라 경제용어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것임을 인식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경제문제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주요한 문제임을 주지시키게 하는 기능도 할 것이다.


누가가 경제진술에 자신의 신학적 장치를 배치시킨 것은 그만큼 경제적 현실이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즉 누가의 경제진술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경제 문제에 대한 관심을 등한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생활에서 경제 문제가 매우 중요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단순히 누가복음서 시대뿐 아니라 오늘의 시대에서도 경제 문제가 신앙에서 중요한 것이었음을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경제생활이 단순히 경제적인 태도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태도임을 인식하게 함으로 보다 더 진지한 경제적 태도로 나아가게 한다.


그리고 경제신학은 누가교회 공동체 구성원과 복과 저주의 대상으로 언술하고 있는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나아가게 함으로 소유의 많고 적음으로 인한 계급적 갈등을 말하기 보다는 그것이 사회적 문제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임을 인식하게 할 것이며, 부와 가난,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등으로 인한 경제적 갈등을 말하기 보다는 각 개인의 신앙적 결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임을 주지시킴으로 모든 인간을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하게 할 것이다.

 

 

.16:1-13절 주석

 

A. 구성과 해석문제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신약성서 중 가장 수수께끼 같은 비유로 인식된다.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단락과 관련해 해결할 문제들이 있다.

본문 구성에 있어서 비유를 7절까지, 1-8절까지,1-8a까지, 그리고 9절까지 보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해석에서도 다양한 견해가 있다. 부자인 주인은 부정적인가? 긍정적인가? 청지기는 관리인, 노예, 농장 관리인, 이자를 취급하는 법정 대리인인가?

본문이 말하는바 불의한 청지기는 1절의 청지기의 행동과 관련한 표현인가? 시종일관된 표현인가? 청지기의 탕감 행위는 과연 정당한가?

 

주인의 칭찬 이유는 무엇인가? 주인의 칭찬은 청지기의 탕감 행위에 근거한 것인가? 탕감 행위가 아니라 청지기의 위기의식, 신속함, 과단성있는 결정 때문인가? 아니면 그레꼬-로만 세계의 수치와 명예와 관련하여 주인의 칭찬을 이해해야 하는가?

 

불의한 재물은 방법론적인 의미인가? 재물의 속성인가? 청지기가 창감해준 빚이 주인의 폭리인가? 주인의 정당한 몫인가? 청지기의 수당인가? 해석에 있어서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학자들 간의 합의는 이루워지지 않았다. 이런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함은 바로 누가복음서에 대한 경제신학적 이해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B.16:1-13 주석

본 단락의 해석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점은 무엇보다도 주인의 칭찬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과 그와 관련된 청지기의 행위가 분명하게 설명되어야 한다.

 

1) 1.1-9

16:1-13은 비유 부분인 1-9절과 비유의 적용 부분인 10-13절로 구성되어 있다.

1-9절은 청지기 행위를 중심으로 단락 전체를 연결되어 있으며, 10-13절은 비유의 적용으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한다. 이 본문의 주석에는 몇 가지 어려운 점이 있다. 여기서는 주석적인 접근만을 시도하고자 한다. 해석을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대한 명쾌한 해석이 나오지 않음은 무엇 때문인가?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주인이 청지기에게 한 칭찬에 대한 해석이다.

이를 위해 본문이 제공하는 것들에 주목해야 한다.


1-9절은 청지기에 대해 두 가지 상아한 정보를 제공한다.

1절은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였다고 말한다. 이 청지기의 행위가 어떤 행위를 하여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였는가?

청지기의 행위에 대해 본문의 청지기나 주인은 허비하였다와 관련한 어떤 반론도 제기하지 않음은 청지기의 주인 소유의 허비가 사실임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주인은 이것과 관련하여 청지기직의 파면을 선언한다. 주인의 사직 통보는 청지기로 하여금 이전과 다른 행동을 하게 한다.


행동은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이러한 청지기의 태도에 대한 주인이 칭찬한다.


1) 허비한 청치기

16:1은 청지기를 허비하였다고 묘사한다. 청지기를 묘사하는 허비하다는 누가복음에서 3번 사용되었다. 이 비유에 앞서 나오는 탕자 비유 15:13에서 누가는 탕자가 재산을 허비하였다고 탕자의 구체적인 행동을 말하기 보다는 주관적 평가가 내포되어 있는 표현으로 말한다. 이어지는 15:14은 탕자가 허랑방탕하게 삶으로 재산을 허비하였다고 말한다.


허랑방탕하게는 신약성서에서 유일하게 이곳에만 사용된 단어인데 이 단어는 구원하다에 부정접두사가 붙여진 단어이다.

 하지만 이 구절 또한 허랑방탕하게 살았다고 하는 탕자의 행위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허비하였다와 관련하여 구원하게 하지 못하는어떤 행동을 탕자가 행하였음을 생각할 수 있다. 15:30에서 큰아들의 말을 통해 탕자의 행동이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이 근거를 통해 1절의 청지기 행동은 탕자의 행위와 같은 어떤 행동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2) 탕감하는 청지기

두 번째 청지기에 대한 묘사는 3-8절에 나오는데, 여기서는 청지기의 구체적인 행위를 말한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각각 불러 자신의 주인에게 진 빛이 얼마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청지기는 주인에게 진 빚의 내용을 수정하게 한다. 주인은 빚 문서 변조 행위를 하는 청지기를 칭찬한다.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빚을 탕감해준 청지기를 칭찬하는 주인의 모습은 너무나 이상하다. 사실 이 비유를 해석하기 어려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 주인이 청지기를 칭찬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럼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로움은 무엇인가? 그것은 8절 후반부 호티이하 문장은 그가 칭찬을 받은 것이 그가 지혜롭게 행하였기 때문임을 말한다. 그럼 본문에서 청지기가 지혜롭게 행하였다고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누가복음서 16:3, 4을 보면 이 청지기는 무엇을 행해야 할까를 생각하였고, 그리고 자신이 행할 일을 찾아 행한다. 바로 이 점을 본문은 청지기가 칭찬을 받을 행위를 하였다고 말한다. 주인의 청지기 칭찬의 이유는 분명 16:4-7의 그의 행위와 연결된다.


3) 이 세대의 아들

8절은 불의한 청지기와 이 세대의 아들을 연결시켜 말한다. 그러므로 불의한 청지기는 이 세대의 아들들, 즉 빛의 아들과 대조되는 개념의 대표격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 불의한의 사용을 살펴보면, 8절의 불의한 청지기,’ 9절의 불의한 재물,’ 10절의 불의한’ 11절의 불의한 재물이 나온다. 8절과 9절은 명사 형태이며 10절과 11절에서는 형용사 형태이다.

 

 

11절의 문장의 대칭구조는 불의한 재물에 대한 해석의 근거를 제공한다.

불의한 재물남의 것과 대칭을 이루며 이것은 참된 것과 너희 것과 대조되는 개념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불의한은 재물을 얻게 된 방법과 관련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 자체의 속성을 보여준다. 8, 9절과 11절에서 누가는 불의한을 속성의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불의한 청지기는 세속적인 이 세대로 표현되며, 불의한 재물은 자신의 것이 아니며, 참된 것이 아닌 남의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4) 주인의 칭찬

1절의 허비하였다고 하는 청지기의 행동은 사직을 언급할 그런 행동이었으며, 탕감하는 행위는 칭찬할 만한 행동이었다. 청지기의 행동이 반대되는 것임을 뒷장의 분석에서 드러나는 대로 교차대칭구조로 이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은 청지기의 태도를 분명 두 부분으로 구분한다. 이것은 청지기의 행동에 대한 주인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 1절의 청지기는 부정적인 행동을 한 사람으로 3-7절의 청지기는 긍정적인 행동을 한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칭찬한 청지기에 대한 행위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본문이 그리고 있는 청지기에 대한 묘사를 열거해 볼 필요가 있다.

1절에서 묘사된 청지기의 허비하는 행위는 3-7절에서 말하는 빚 탕감의 행위와 반대되는 어떤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주인의 태도에서 확인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1절의 청지기의 행위는 말만 있을 뿐 구체적 행위는 나오지 않는다.

 

 

과연 청지기는 무엇을 하였기에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였다고 하는 평가를 받고 있는가?


청지기의 행동에 대한 주인의 칭찬과 관련하여 청지기의 빚 탕감행위는 분명 주인이 원하는 행동이었음을 가정할 수 있다.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5-7절의 청지기의 탕감 행위를 1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와 관계되는 언어로 바꿔서 이것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는 것이 아닌 허비한 것과는 반대되는 이익을 남긴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반대로 1절에 나오는 허비하였다는 청지기의 탕감행위와 관련해서 탕감하지 않은 행위로 말할 수 있다.


 

1

3-7

청지기 행동

주인의 빚을 탕감하는 행위와 반대적인 어떤 행위

주인의 빚을 탕감하는 구체적인 행위

청지기 묘사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였다.

주인의 소유로 남김

 

 

이 도식에 의하면, 주인으로 하여금 청지기직을 사임하게 한 청지기의 허비한 행동은 3-7절처럼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주인이 청지기를 칭찬한 것은 청지기직의 사임과 반대되는 행동, 즉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 것은 어떤 행동이며,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지 않는 행동은 어떤 행동인가?


청지기처럼 빚 탕감행위를 하는 것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지 않는 것이며, 빚 탕감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는 것이다. 3-7절의 청지기의 모습은 외견상으로는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주인은 이런 청지기에 대해 칭찬을 한다. 이 주인의 행동은 1절의 청지기의 행위에 대한 태도에 대한 반응과는 상반된다. 그러므로 이 빚 탕감한 이 청지기의 행위를 1절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허비의 행동이 아니라 남기는 행동이라 표현 할 수 있다.


누가복음서는 삭개오가 나눠주었음에 주목한다(19). 사마리아 사람의 경제적 손실을 감수한 행동은 높이 평가 받는다(10:25-37).하지만 어리석은 부자가 재물을 쌓아두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리석다는 평가를 한다(12). 12:38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라고 한다.

제자직과 관련하여 소유를 버리고 쫓는다는 구절(5:28; 14:33)이나 소유 금지에 대한 명령(9:3; 10:3) 그리고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움(18:25)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버린 자에게 주어지는 영생(18:29-30)을 기억하는 것도 필요하다.


비유 속에 등장하는 주인인 부자는 부의 근원인 하나님이다.

그는 구약성서에서부터 내려온 이해대로 모든 소유의 근원이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만이 부자이다. 그에게 청지기가 있다. 12:42,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를 찾는다.”와 연결해서 주인은 청지기가 나누기를 원한다. 하나님인 부자에게 속한 청지기가 지닌 소유는 청지기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다.


여기서 청지기는 주인인 하나님이 찾는 사람이다. 그런데 실제 세계의 사람들은 자기에게 관리하라고 맡겨진 소유를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한다. 그리하여 주인인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자기 마음대로 사용함으로 주인의 뜻을 위반한다.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야 말로 1절의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와 연결된다. 이것은 은유적 표현이다. 비유 속에서 일어난 일은 현실의 일에 대한 은유이다. 만일 현실에서 주인의 뜻과는 다르게 허비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면, 비유 속의 주인처럼 그의 청지기직은 사임될 것이다.


이것은 1220-21절의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된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여, 바로 이 밤에 네 영혼을 너로부터 요구한다. 그러면 네가 준비하였던 것들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제 자신을 위하여 쌓아둔 자,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다(사역).”


이 비유는 12;15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생명이 그의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않음과 관련하여 주어진 비유이다. 그리고 이런 삶은 제자들에게 준 교훈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와 관련해 교훈하는 10-13절 형식과 비슷하다.


청지기가 행한 빚 탕감의 행위는 그러므로 12;42에서 언급되는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청지기와 연결된다. 12:43진실한 청지기와 여기서의 불의한 청지기의 표현의 차이는 이 사람이 이 세대의 사람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서는 이 세대의 사람과 비유되는 불의한 청지기의 행위를 통해서 빛의 아들들에게 교훈한다.


청지기의 탕감 행위에 나타난 빚은 실제로는 주인에게 진 빚이지만 현실세계에서는 자신에게 청지기 자신이 빌려준 것이다. 하지만 청지기가 빌려준 빚은 실제로 주인의 돈으로 빌려준 것이기 때문에 청지기에게 진 빚이 아니라 주인에게 진 빚이다. 현실에서 사람들이 이 점을 착각한다. 자신의 돈으로 빌려준 빚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삶은 주인의 뜻과는 어긋나는 삶이며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 삶이 된다. 허비한 삶을 산 청지기는 이 빚을 탕감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위기상황이다.

 

 

이 위기상황은 12장 어리석은 부자에서 언급되고 있는 죽음과 관련된 위금한 상황이며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에게 주어진 먹을 것이 없는 상황과 관련된다. 16장에서 청지기에게 위기상황은 청지기직에 대한 파직이다. 청지기는 이로 인하여 고민한다. 그리고 청지기는 고민의 결과로 빚을 탕감해준다. 이제 주인은 이런 청지기를 칭찬한다. 주인의 칭찬은 청지기의 탕감 행위가 주인의 뜻과 일치됨을 보여준다.


잘못된 행위를 즉각적으로 벌하지 않고 기다리며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는 내용이 누가복음서 내에 많이 나온다. 세례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설교하였다(3:8). 예수가 나사렛 회당에서 읽은 이사야의 구절은 희년 선포와 관련된 구절이며 이 구절과 관련하여 누가는 예수 사역을 말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4:18-19). 뿐만 아니라, 요한의 메시아 질문에 대해서 누가의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사 29:18-19과 사 35:561:1과 관련된 구절을 인용하여 말한다. 흔히 이 구절은 메시아의 취임 설교라는 제목으로 불려지기도 하며 여기서 언급된 내용은 구약성서의 희년선포와 관련된다. 4:19의 예수는 죄용서의 권세를 지닌 분이다(5:24). 예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5:32). 15장의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 아버지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 17:4은 무한한 회개에 대한 용서를 명령한다.


청지기의 탕감 행위와 관련해서 누가복음서에는 탕감하다가 37(7:21,42,43)에서만 사용된다. 특히 42절과 43절은 빚 탕감의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이것은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누가복음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경제적 표현을 통해 신학적(신앙적)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누가의 경제신학적 면모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그리하여 누가는 16:13에서는 맘몬을 하나님과 대립되는 명제로 표현하여 재물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임을 말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여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구절의 표현

다른 구절의 언어로 다시 표현하기

의 미

허비하였다(1)

탕감하지 않음

재물을 쌓아두고자 한다.

탕감하는 행위(5-7)

허비하지 않았다.

자신이 꿔 준 돈을 탕감해 준다

주인, 부자

 

하나님

청지기

 

사람

 

살면서 청지기가 빌려준 빚

청지기에 대한 주인의

칭찬

 

자신이 빌려준 돈을 탕감해준

것을 칭찬한다.

 

 

2. 10-13

지극히 작은 것에 신실한 자는 큰 것에 신실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 그러므로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신실하지 않으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그리고 만일 너희가 남의 것에 신실하지 않는다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하인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어떤 것을 미워하면 다른 것을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그가 하나를 중하게 여기게 되면 다른 것을 경히 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섬길 수 없다(사역).


10-13절은 1-9절을 위한 해석의 단초를 제공한다. 10절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A :지극히 작은 것에 신실한 자는 큰 것에 신실하다.

B :그리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


AB가 대칭을 이룬다.

신실한불의한의 단어를 제외하고는 AB에 사용된 단어들은 모두가 같다.

10절의 대칭 구조를 통해 누가는 신실한불의한이 대조적인 개념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누가는 10절을 통해 지극히 작은 것에 대한 행동을 큰 것과 연결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신실함에서나 불의함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누가는 왜 작은 것신실한 자/불의한 자큰 것에도 신실/불의하다고 말하는가? ‘작은 것은 무엇이고 큰 것은 무엇인가? 이어지는 11절의 그러므로를 주목하여야 한다. ‘그러므로11-12절이 10절과 논리적으로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11절은 10절에서 말하고 있는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의 발전된다는 논리를 이어 받는다.


A: 그러므로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신실하지 않으면

B: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A': 그리고 너희가 남의 것에 시닐하지 않는다면

B': 누가 너희에게 너희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위의 분석은 11절과 12절이 대칭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AA'에서는 불의한 맘몬남의 것은 다른 표현으로 대칭되지만 다른 단어들은 모두 같은 단어들로 반복된다. 이 구성을 통해 누가는 만일과 만일,’ ‘불의한 맘몬남의 것,’‘동사동사’‘신실하다신실하다,’ ‘부정어부정어를 연결한다.


이 구조에 의하면 불의한 맘몬남의 것과 병렬된다. ‘불의한 맘몬과 남의 것의 병렬은 불의한 맘몬이 불의하게 번 맘몬을 가리키지 않고 남의 것이을 말한다. 남의 것불의한 맘몬은 다시 참된 것과 대조된다. 이것은 BB'의 분석을 통해 드러난다. BB'는 모두 의문문이다. 그리고 참된 것너희 것,’‘맡긴다줄 것이다그리고 누가너희가 평행을 이룬다. BB'참된 것너희 것을 연결시키며 남의 것네 것의 대조를 보여준다.


11-12절은 다시 10절과 관련해서

작은 것불의한 맘몬남의 것과 연결되어 있으며,

큰 것참된 것너희 것과 연결되어 있는 개념임을 보여 준다.

 

이러한 누가의 구성은 불의한 맘몬남의 것임을 분명하게 지시한다. 그리고 누가의 불의한 맘몬이라는 표현은 남의 것이라고 하는 맘몬의 성격을 드러낸다.

 

맘몬자기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다. 맘몬이 주인(하나님)의 것임을 말한다.

자기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기에 맘몬은 불의한 맘몬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불의한 맘몬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라는 표현은 다시 남의 것이라 표현 되어 불의한 맘몬이 작은 것이고 남의 것임을 드러낸다.

 9절에서 말하고 있는 불의한 맘몬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은 작은 것이며 남의 것맘몬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청지기가 탕감한 돈의 성격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청지기가 탕감한 돈은 주인에게 빚진 것이었으므로 자기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다. 청지기가 탕감한 돈이 주인의 것임에 대해서는 본문은 청지기가 탕감한 빚이 주인에게 빚진 것임을 5절에서 분명히 보여 준다. 13절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A: 하인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B: 왜냐하면 그가 어떤 것을 미워하면

C: 다른 것을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C': 혹은 그가 하나를 중하게 여기게 되면

B': 다른 것을 경히 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A': 너희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섬길 수 없다.


A A'부분은 동일한 단어들이 대칭된다.

부정어,‘’할 수 있다,‘ 두 주인과 하나님과 맘몬그리고 섬기다가 대칭이며

BB'부분에서는 어떤 것다른 것,’ ‘미워하다와 경히 여기다대조이다.

CC'부분에서는 다른 것과 하나,’ ‘사랑하다와 중하게 여기다가 대칭이다.

 

이렇게 이 문단은 교차대칭 구조이다.

이 구조는 두 주인하나님과 재물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미워하다’‘’‘경히 여기다,’ ‘사랑하다중히 여기다가 평행이며,

미워하다사랑하다’ ‘경히 여기다중히 여기다의 대조를 통해 사랑하다중히 여기다미워하다경히 여기다를 개념적으로 서로 연결시킨다. ‘맘몬하나님두 주인으로 드러난다.


사람은 하나님맘몬을 섬긴다. 이 둘은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은 맘몬이 절대적으로 대립된 관계라고 말하는 누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리고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나 하나님 현존으로 올려지는 것이 경제적인 교환이라는 용어로 언급되곤 하였다. , 누가는 보상이나 보답, 혹은 하늘에 안전한 보화가 그것이다.


맘몬9절의 불의11절의 불의한과 함께 사용하여 맘몬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재물이 불의한 것은 앞에서 밝혀진 대로 남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인과 주인이라는 표현은 1-9절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의 부자를 주인이라고 표현한 것과 연결되어 불의한 청지기는 하인과 연결된다.

뿐만 아니라 불의한 청지기의 행위는 1절에서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였다5-7절에서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누가가 청지기에 대해서 경제적 표현들로 언급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누가가 맘몬과 하나님을 두 주인으로 말하면서, 맘몬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 섬기는 것을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비유의 1절의 허비하는 청지기 행위는 맘몬을 섬기는 행위와 연결되며, 5-7절의 탕감하는 청지기의 행위는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와 연결된다

 

표 현

다른 구절의 언어로 표현하기

하나님(13)

큰 것(10), 참된 것(11), 너희 것(12)

맘몬(13)

지극히 작은 것(10), 불의한 맘몬(11), 남의 것(12)

미워하다(13)

경히 여기다(13)

사랑하다(13)

중히 여기다(13)

섬기다(13)

신실하다(10,11,12)

 

 

 

   3. 재물과 하나님

누가복음서에는 맘몬이 3 나오는데 모두 16장에만 나오며, 그 형태는 불의한과 결합하여 나온다(9,11) 불의한은 신약에 26, 불의한은 12회 사용되었으며, 누가에는 가각 13:27, 16:8,9, 18:616:10, 10, 11; 18:11에 나타난다. 동사형태인 불의하다가 10:19에 나타난다.

 

문자적 의미로는 잘못을 하다이며, 법률적이고 상업적인 용어이다.

신약성서에서 이 단어의 주체는 인간(7:26; 25:10; 고전 6:8), 두 번째 죽음(2:11)으로 나온다. 이 단어는 주체의 성질, 행동을 나타낸다.

 

고데(Godet)는 이 단어(맘몬)가 흔히 동양의 돈의 신 부르는 이름이 아님을 지적하면서 시리아와 페르시아에서는 돈 자체를 의미라며, ‘맘몬을 부에 대한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부터 비롯되었음을 말하기도 한다.

이와같이 불의한은 맘몬의 속성과 청지기의 속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 맘몬13절에서는 하나님과 대립되는 용어로 나온다.

 

그럼 왜 누가는 맘몬을 불의한 맘몬,’ 남의 것이라고 말하는가?

누가의 이런 생각의 기원은 구약성서에서 기인한다. 모든 재물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은 구약의 사상이다.


레위기는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25:23)’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토지 매매에 있어서 토지의 주인은 야웨이기에 일상적인 매매는 단지 소유물에 대한 잠정적인 교환일 뿐이며 경작할 권리만이 바뀜을 의미한다. 신명기 사가에 있어서 땅을 얻는 것은 야웨의 계약을 ㄹ지켰다는 것을 의미하며, 땅을 잃거나 땅이 생산하지 않는 것은 야웨의 계약을 위반하였다고 말한다(4:26; 6:15; 11:17; 28:12,63; 29:27; 23:13,15,16: 왕상 9:7; 13:34; 14:15). 재물은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며 지금 가지고 있는 재물도 내 것이 아니다.

 

에반스(Evans), 렌스키(Lenski), 시컴브(Seccombe)13절의 맘몬이 세상적 재물을 의미하며, 11절의 불의한 재물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큰 것’, ‘참된 것’, ‘너희 것은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하늘의 재물을 의미한다고 아일랜드(Ireland)는 말한다.

클레멘트 서신은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의 이름이 히브리어의 소유(=얻다)와 시기에서 기원한다고 말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소유는 죄라고 말한다.

 

또한 요세푸스는 가인이 오직 소유를 얻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레고리 나찌안젠은 사유재산, 즉 부와 재산은 타락의 결과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자선 행위는 이 상실의 상태를 회복하는 데 중요하다고 말한다. 초대 교부들은 사유재산이 인간 불화의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크리소스톰은 사유재산도 해와 공기와 땅처럼 함께 공유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교부 바실(Basil, 329-379)은 눅 12:18을 근거로 자기 소유를 가나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 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만을 위해 부를 축재한 사람이 절도이며 강도라고 설교하였다.

재산이 타락의 결과로 생긴 것이라는 생각은 교회사를 통해 보면 많이 나타난다.

 

에세네파는 재산의 공유를 통해 완전한 형태의 공동체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들의 목표는 아담의 지위와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었다(1QS 4:23, 1QH17:15).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딤전 6:10은 견유학파와 스토아학파의 경건한 자족에도 나온다.

 

또한 돈을 사랑함은 모든 악의 고향이다는 말은 데모크리투스와 디오게네스의 작품에서 나온다. 가까이 있는 친구가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 놓은 재물보다 더 귀한 법이다.

유리피데스(Euruipides)재물은 우리 자신의 것이라 불리되 우리의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쿰란 공동체에서 불의한 맘몬은 그저 일상적인 돈을 의미한다.

헹엘과 에반스은 초대교회가 맘몬이라는 이 셈족 계통의 외래어를 ㄹ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쓴 것은 우상의 이름으로 여겼기 때문임을 지적한다. 헹엘의 이런 주장은 누가에서 사용된 맘몬 역시 우상의 성격이 있음을 보여 준다. 사람이 부를 갈망하고 부에 매여 소유를 계속 증가시키고 재물로 타인을 지배하고자 할 때 재물은 숭배가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사유재산은 불의하다는 의미로 눅 16:9을 해석한다.  

존슨은 모든 형태의 유상숭배는 소유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말한다.

이와 더불어 우리의 주목을 끄는 본문은 22:1-2에서 사단이 들어간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예수를 넘겨줄 것을 의논하면서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고 이들은 유다에게 돈을 건네는 것으로 묘사한다. 여기에서도 사단이 들어간 유다가 예수 대신에 돈을 취하게 됨을 누가복음서는 그린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각과 관련해서 사도행전에서 성령 받은 이후의 교회를 누가는 경제적인 재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으로 그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소유를 감춘 행위는 성령을 속인 행위로 기술한다. 이러한 기술은 단순히 경제적인 묘사가 아니라 신앙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가장 많이 강조되고 있는 교훈 중 하나는 우상숭배에 대한 금지와 유상숭배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표현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누가복음서에서는 직접적으로 우상숭배에 대한 금지 명령이나 우상에 대한 경고가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누가는 구약성서의 우상을 맘몬으로 대치시켜 말한다. 그리하여 누가에서 재물의 올바른 사용은 구원의 전제 조건이 되며(18:18-30),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이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이 재래에 대한 유혹 때문이라고 말한다(8:14). 그리하여 눅 16:13은 맘몬과 하나님을 대립 명제로 놓는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섬기든지,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이러한 누가의 사상은 눅 12:21에도 드러난다. 이 구절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뒤에 결론적으로 말해지고 있는 구절로 부자의 어리석음을 잘 함축하고 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구절에서도 자기하나님그리고 재물을 쌓는 것부유하다가 병렬되어 서로 대조된다.


재물을 쌓아두는 것으로 누가는 하나님께 부유하지 못함을 말한다. 이렇게 누가복음서에서 재물은 단순히 경제적인 의미만이 아닌 신앙적이고 다분히 신학적인 의도가 내포된다.

 

 

.나가는 말

 

본 연구는 그동안 누가복음서의 경제용어에 대한 구체적 연구가 부족한 시점에서 누가복음서의 경제용어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의 신학을 규명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서는 경제적 진술들을 통해 자기 신학적 의도를 전달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이해를 위해 경제신학적 이해가 필요함도 확인하였다. “경제신학은 누가복음서를 독자 자신의 목적 상황에 의해서 단편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여타의 시도를 방지하며, 누가복음서의 경제적 진술을 단편적으로 이해함으로 누가 복음서의 의도를 곡해하는 것을 예방 것이다. 경제적 문제가 중요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오늘날처럼 누가복음서의 세계에서도 경제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었다. 그러므로 경제 문제에 대한 태도는 단지 경제 영역의 문제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태도임을 누가복음서는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