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1. 개관
말라기는 느헤미야 시대에 산 선지자로 부패한 제사장, 사악한 행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특권적인 관계 때문에 안전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빠진 백성들에게 그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말라기는 질문과 대답의 형식을 사용하므로 그들의 위선, 부정, 혼합결혼, 이혼, 거짓된 예배, 그리고 거만에 대한 그들의 문제를 깊이 파헤치고 있다. 그 나라는 그렇게 죄가 많았으므로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어떤 영향도 줄수 없었다. 따라서 말라기의 정죄후에 400년간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세례요한이 나오므로만(3:1) 하나님은 다시 선지자의 음성을 통해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시간적으로 말라기는 학개와 스가랴 100년후에 예언하고 쓰기 시작했다.
말라기란 이름은 나의 메신저란 의미이며 아마도 malakya "여호와의 사자“란 말의 준말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약의 메신저의 임함에 대해 말하고 있는 본서에 적합하다.(2:7; 3:1). 칠십인역에서는 ‘그 메신저의 손에 의해’로 번역될지라도 그 명칭은 malachias를 썼다. 라틴역에서의 명칭은 maleachi이다.
말라기에 대한 구약의 유일한 언급은 1장 1절이다. 말라기서의 저작, 연대 그리고 말라기서의 통일성은 결코 심각한 도전을 받은 적이 없다. 본서의 통일성은 그것을 함께 묶은 변중법적인 형태에서 보여진다. 말라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심지어 그의 아버지의 이름까지도). 그러나 유대의 정통은 그가 대회당의 회원이었다고 한다. 다만 불확실한 유대의 전통은 말라기가 느헤미아의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말라기서는 주전 430년에서 420년 사이에 썼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느헤미야는 바벨론에 있었다.
1) 그 연대는 주전 516년 성전의 완공후였다(1:7, 10; 3:1)
2) 그때는 페루시야 통치기간이었다(4:8에 폐하(Pehah),란 말은 페루시아의 말로 총독이다).
3) 그때는 느헤미야가 그 땅에 있지 않았다. 느헤미야가 있었을때는 그런 죄들이 교정됐었다
(참고, 느 13장)
4) 그러므로 그때는 주전 433년후 느헤미야가 바벨론으로 돌아갔을때였다(느 13:6, 7).
말라기는 성전이 재건된 후 남은 자에게 썼다. 그들은 그들의 앞선 조상들의 열정을 상실했으며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타락했다. 그때는 도덕과 사회가 퇴락한 시대였다.
그때 말라기의 청중들은 팔레스틴 땅에 있었고 그 메시지는 특별히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자들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
1. 역사적인 목적
말라기는 이스라엘의 사회적이며 도덕적인 부패를 질책한다. 따라서 타락한 남은 자들을 경고하고 있다.
말라기는 하나님의 백성안에 정결함이 없는한 거기에는 하나님의 채찍에 의한 정결케함이 있게 된는 것이다. 이는 신실함과 정결함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미리 요구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언약의 사자이시며(3:1), 연단하는 불이시고(3:2), 의의 태양이시다(4:2).
말라기 시대 사람들은 우상숭배에서는 자유로웠으며 비교적 정통진리를 믿었으나 그들의 신앙은 죽은 정통에 가까웠다. 그들은 윤리적으로는 타협했으며 적합한 예배에 대한 엄격한 요구가 희석되어 있었다. 말라기는 그 시대의 해이한 신앙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언약에 충실할 것을 깨우치고 있다.
중요한 단어 : 타락한 자들에게 호소함
요절 : 2:17-3:1; 4:5-6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2:17-3:1)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4:5-6)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주님과 세례요한의 도래에 관한 주권 예언으로 결론짓고 있다. ‘내가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3:1). 이스라엘은 400년후 선지자적 계시의 오랜 침묵을 깨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마 3:3)는 세례요한이 나타났을때 요단강으로 모여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말라기 3-4장은 메시야와 그의 선두자자의 오심을 기록하고 있다.
1. 기독교 세계관의 요인들
말라기는 제사(제물), 이혼 그리고 십일조에 관한 법과 같은 언약에 대한 특별한 위반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을 꾸짖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을 바르게 세울 사자가 올 것도 예언한다. 말라기는 특별히 언약과 구속 그리고 윤리와 도덕에 관한 범주를 다루고 있다.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 사람들은 그 언약의 약정에 순종하여 살 중요한 의무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언약의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 삶을 살수 없다.
2
말라기는 하나님의 불변하심을 소개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그의 약속은 영속적이다. 더 나아가 그는 그 자기 백성을 시초부터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더욱이 영원하신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이 책에서 “나”라는 대명사를 자주 씀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제사장과 백성을 다같이 깨끗게 하시는 사자로 예언되었다(3:1-5). 성령은 언급이 없다.
본서에서 언급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아직도 낙담되어 있고 환멸을 느끼고 있다. 앞선 선지자들이 황금시대가 오고 있다고 한 예언은 헛된 것처럼 보였다. 이 백성들은 때때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해 일하시기 위해 나타나시지 않을때 자기만족에 빠지기 쉽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심지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도덕적 명령들을 순종하는데 대해 무관심하기가 쉬웠다. 본서는 그런 의심하는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의 치유를 제시해 준다.
말라기에서 구원은 두가지 국면을 지닌다. 첫째는 언약의 개념이다(6회 언급함).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에서 그것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온다는 것이다. 둘째는 오시는 사자의 사역이다. 말라기는 그의 오심이 정결을 초래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3:2). 이 예언의 암시는 예수님이 그의 구속의 죽음으로 그것을 성취하시기까지는 완전히 깨끗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말라기는 타락한 남은 자들이 삶의 여러 부분들을 고발한다. 그것은 종교적인 침체, 사회적인 타락, 도덕적 결함 그리고 물질적인 낭비였다.
말라기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로 시작한다(1:1-5). 그리고 제사장들의 죄를 질책한다(1:6-2:9). 그들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최선한 동물 대신에 병든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였다.
사회적으로도 영적인 점에서처럼 그 경향이 야비했다. 바벨론에서 배운 교훈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가 나타났다(10-13).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가 이혼을 미워하신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혼했다(14-16).
하나님의 공의가 사람들에 의해 의심받았다(2:17).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그러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심판이 오고 있다고 대답하셨다”(3:16).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당하며 그가 나타나시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들이 하나님이 명하신 십일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였다(3:7-12). 더욱이 그 백성들의 저항은 억세고 고집스러웠다(3:13-15). 그러나 여호와의 대답은 분명했다. 그는 심판날에 의로운 자를 기억하시며 아버지가 아들을 아낌같이 그들을 아끼실 것이다(3:16-18).
악자의 정죄가 메시야의 오심과 더불어 성취될 것이다(4:1). “보라 용광로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같을 것이다.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그러나 그 날은 의로운 자에게는 위로가 될 것이다(4:2).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이 될 것이다. 본서는 율법에 순종하라는 명령으로 마치고 있다(4:4). 그리고 주를 위한 예비로 엘리야의 올 것을 예언한다(참고, 마 3:1과 11:14).
구약성경은 창조로 시작해서(창 1:1) 여기 말라기에서 저주로 마치고 있다(4:6). 인간의 죄는 죽음과 하나님의 저주를 가져왔다. 그러나 구원은 오고 있다. 구원에 대한 구약의 기대는 신약에서 실현될 것이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책으로 시작하며(마 1:1) 주 예수의 은혜로 마치고 있다(계 22:21).
Ⅰ. 그 민족의 특권 1:1-5
Ⅱ. 그 민족의 오염 1:6-3:15
1)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의 죄 1:6-2:9
(1)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함 1:6-14
(2) 여호와께서 제사장들을 저주하심 2:1-9
2)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2:10-3:15
(1) 백성들이 우상숭배의 죄를 범함 2:10-13
(2) 백성들이 이혼함 2:14-16
(3) 여호와가 오심으로 심판하실 것임 2:17-3:5
(4) 백성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함 3:6-12
(5) 백성이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함 3:13-15
1) 기억의 책의 보상들 3:16-18
2) 그리스도의 오심의 상급 4:1-3
3) 엘리야의 도래에 대한 예언 4:4-6
2. 본문 내용 1장
(1) 제사장의 타락(말1:1-14)
1-1. 말라기와 시대적 배경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1)."
선지자들은 계속해서 메시아의 오심을 예고해 왔다. 말라기는 이러한 선지자들 중에 가장 마지막에 예언한 선지자였다. 말라기의 개인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말라기"란 말이 "나의 사자"라는 뜻이며, 고유 명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자유주의 비평가들은 이 책이 원래 익명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에서 "사자"라는 말은 "천사"라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몇 몇 교부들은 말라기를 성육신 한 천사로 간주하기도 했다. 이 책은 특히 제사장에 대해서 두드러지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말라기가 제사장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요나단의 아람어 탈굼은 에스라가 말라기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박국과 오바댜처럼 말라기도 그 혈통과 출생지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다. 유대 전승은 말라기가(학개, 스가랴와 같이) 대회당에 속한 회원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 익명으로 전달된 선지서는 없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말라기가 바로 이 책을 기록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선지자는 느헤미야가 다스리던 시기에 활동했다. 그는 분명히 포로기가 끝난 후에 활동했다. 당시에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로 인해 성전이 재건되었으며, 제사장들을 통해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으로 침체해 있었다. 말라기는 학개와 스가랴보다 약 1세기 정도 지난 후에 활동을 했다.
학개와 스가랴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격려하고 인도했던 것처럼, 말라기도 느헤미야를 격려하고 인도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주전 5세기 말 경으로 볼 수 있다. 말라기의 메시지는 대부분 죄의 선고와 책망이었다. 그 당시에 나타난 백성들의 정신은 후일 바리새주의나 사두개 종파로 발전되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도덕적, 영적 상태는 오늘날 기독교의 도덕적, 영적 상태와 같았다. 여기에는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돌아온 남은 자들의 영적 생활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을 향해 나타난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해 무감각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뜻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 지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멸시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영적 인식력이 부족해서 자기들의 행위가 지적을 받을 때에도, 자기들이 왜 책망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을 책망하는 선지자들에게 다시 그 말의 의미를 묻고 있다.
느헤미야를 격노케 했던 이스라엘의 죄는 말라기를 분노케 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말라기를 통해 보면 그들의 잘못은 1) 제사장들의 부패와, 2) 이스라엘 아내들과 이혼한 후에 이방 여인들과 재혼한 일과, 그리고 3) 십일조와 헌물을 소홀히 한 일 등이었다. 말라기는 그 백성 중에 있는 신실한 남은 자들의 위치와 전망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책은 연속되는 일련의 설교이다. 말라기는 직접적이며 강력하고 신랄한 산문 문체를 취하고 있다. 이 책의 서문은 후기 유대교에 널리 알려진 변증법적 형태의 가르침이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일어난 여덟 번에 걸린 논쟁이 1:2,6,7, 2:14,17, 3:7,8,13에 나타나 있다. 그들은 죄 때문에 비난을 받을때마다 하나님을 대적했으며, 그 증거를 대라고 도전하였다.
1-2.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2-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2),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3).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찌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4),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5)."
이 예언의 표제는 하나님의 경고이다. 이 말은 이 메시지가 격래나 위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책망을 위한 것임을 보여준다. "경고"라는 말은 이 구절과 (슥 9:1, 12:1)에서 사용되고 있다. 말라기는 이스라엘, 즉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12지파 모두에게 이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이 예언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영광스럽고 즐거운 사실을 지적함으로 시작하고 있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 예언이며, 거룩한 말씀의 마지막 페이지인 말라기서에서 하나님은 이라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신 것은 야곱의 분에 넘치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사람들을 선택하셨다는 교리는 변덕스럽거나 독단적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책임을 감소시키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선언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경건하지 못한 태도로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느냐?"고 물었다. 이스라엘의 모든 죄악의 뿌리는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죄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인내로서 에서보다 야곱을 더사랑하셨다고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이다. 많은 해석자들은 이 책에 사용된 "미워한다"는 말을 비교급으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예로 (창 29:30-31, 신 21:15-16, 잠 13:24, 마 6:24, 10:37, 눅 14:26)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책망하기 위해서 주권을 행사하지 않으신다. 에서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해 왔기 때문에, 에서에 대한 미움은 타당한 것이었다. 이것은 구약 성경의 끝에 언급되어 있다.
1:4에는 책망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드러내기 위해서 선택된 예는 산들이 황폐해지고 그 산업이 황폐케 되어서 시랑이 거하는 장소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나바티안이 에돔을 정복한 것이나, 바사와 애굽이 전쟁한 일, 그리고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해하고 있다. 주전 586년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지 5년 후에 갈대아인들이 에돔을 침범했다. (사 13:22)과 같이 "황무지'와 병행하기 위해서는 이사야 13:22에서 처럼 "황무지"와 병행하기 위해서는 "시랑"으로 번역된 말을 "거처"로 변혁할 수 없다. 이러한 번역은 이사야서의 구절에서 그 의미를 잃게 되는데, 이는 '거처"라는 말의 어원이 좀 복잡하기 때문이다.
에서가 교만하게 황폐해진 곳을 재건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들이 건축한 모든 것을 엎어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로 인해 그 땅을 재건하려는 모든 실행은 모두 실패하게 될 것이다. 1:4에서 하나님은 에돔이 그 지위를 되찾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전에 에돔의 지경, 즉 에돔의 땅이라고 불리웠던 곳을 사악한 지경이라고 불리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에돔의 황폐화된 상태가 죄 때문임을 알게 될 것이다. 선지자 말라기가 에돔의 이름을 완전히 없애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간주할 필요는 없다. 에돔의 쇠퇴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 그 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이 진실로 은혜스러운 것임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1-3. 더럽혀진 제사(6-8)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6).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8)"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에 대해 어떻게 응답했는가? 이제 선지자는 이야기의 초점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배은망덕한 것으로 돌리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녀처럼 대해주셨다.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공경했는가?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와 자녀로 대하지 않고, 주인을 모신 종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를 드렸는가? 이러한 경배는 제사장들의 신실치 못함으로 인해 실시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책임을 제사장들에게 돌리고 있다. 레위인들이 지은 첫 번째 죄는 성전에서의 직무 태만이었다. 이러한 행동으로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범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음 절들에 언급되어 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제단에 더러운 제물을 드렸다. (신 15:21)은 이 일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말라기가 사용한 떡이라는 말은 제사 제물, 즉 동물의 고기를 의미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 이것은 제단에 드려졌다. 2) 1:8의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 3) (레 21:6,8,18)에서 제물을 상징하는 떡이 나옴. 말라기가 말한 떡이 희생 제물을 의미한다면, 산은 제단이 아니라, 희생제물사를 드리는 제단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예배를 멸시하는 일은 결국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된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 즉 눈 먼 것, 저는 것, 그리고 병든 것을 제물로 드려서 하나님을 진노케 만들었다. 그들은 항상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수정하려고 했다. 그들은 뻔뻔하게도 그들의 통치자, 즉 페르시아의 총독에게도 드릴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 말라기는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의 예절 감각에 호소해서 설명하고 있다. 어디든지 하나님의 칭찬보다 인간의 칭찬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1-4. 하나님의 불만(9-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10)."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얼핏 보며 이 말은 회개하라는 말을 간접적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불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부정한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정한 제물을 제단에 드리는 한, 그들의 기도는 전혀 응답을 받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특히 이러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말라기는 특히 더욱 강력하게 이야기 한다. 하나님은 그들이 드리는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그들이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차라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더러운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언급된 "헛되이"라는 말은 "값없이"라는 말로도 번역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탐욕스러운 제사장들이 문을 열고 닫는 사소한 일을 위해서도 돈을 요구했다고 생각한다. 제사장들은 너무 게으르고 부주의해서 제 시간에 성전 문을 닫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가장 적절한 설명은 그들이 드리는 예배가 형식적이 되고,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배를 그치게 하셨다는 설명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헛된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차라리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이 더 낫다. 하나님은 진심이 없는 제사장이나 제물, 그리고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1-5. 열납되는 예배(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11)."
그러나 하나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예배가 있다. 하나님은 장차 이러한 예배에 대해서 온 세상에 계시할 것이며. 또한 사람들이 이러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해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라는 말은 온 세상을 의미한다. 이 예언은 장차 온 세상에 이루어질 것이다. 에스겔의 마지막 장(48장)을 보면, 재건된 성전에서 온전한 예배가 드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예언이 이방인들이 온전한 예배에 참여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지금은 온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지고 수많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신령과 진리의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보다 더 세계적이고 온전한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각처에 알려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각처에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며, 하나님은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참된 예배를 받으시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부정하고 열심히 없는 이스라엘의 예배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장차 하나님은 만국 백성들로부터 깨끗한 마음으로 성심을 다해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게 될 것이다.
1-6. 성전 모독(12-14)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13).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14)."
1:12에서 말라기는 제사장들의 죄,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위엄을 멸시했다는 주제로 돌아온다. 여기에서는 1:7에서 했던 책망이 반복되고 있다. 그들은 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나님의 위엄을 더렵혔다. 여기에서"더럽힌다"는 말은 분사로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이 분사로 상요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행동을 습관적으로 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단과 제사를 멸시하고 모독했다. 진실된 마음이 담기지 않은 제사는 귀찮고 짐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일을 무시하고 코웃음을 쳤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폭력으로 빼앗은 것과 저는 것과 병든 것을 제물로 드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속임수와 모독이 담긴 제사를 받으실 분이 아니다. 그들이 좋은 제물을 드리지 못한 것은 그들이 가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마음에 탐욕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원을 할 때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그들이 정작 제물을 드릴 때가 되면 좋지 못한 것을 선택해서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을 행한 영적 사기꾼들에게 저주를 내리실 것이다. 병들고 허물 많은 제물을 드리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중에서 멸시받고(1:6), 그 이름이 더렵혀졌다(1:2). 그러나 위대하신 왕이신 하나님은 이방인 중에서 높임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1:11).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모독하는 일을 속히 버리고 신령과 진리로 위대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1-7.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다! 이것은 보잘 것 없는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선포이다. 어떤 사람은 야곱이 하나님의 징계와 분노의 대상일 뿐이며, 그 이상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들의 거역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야곱과 그의 후손, 즉 이스라엘 민족을 진심으로 사랑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하늘의 가장 값진 보화이신, 독생자, 즉 이스라엘을 구속할 메시야를 보내주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고 심판을 선포하셨지만, 한 편으로는 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 그들을 용서해 주실 독생자를 준비해 주셨다. 이러한 선포는 우리들에게도 적용된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멸시하고, 그 이름을 더럽히는 일을 많이 저질렀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무한한 사랑과 은혜로 덮어주신다
(2) 제사장들에 대한 훈계 (말1:6-14)
예언자는 여기에서 특별한 사명을 받고, 비록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다루는 재판관으로 뽑혔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을 추궁하고 있다. 성전을 돌보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책임을 지고 있는, 그들보다 높으신 분이 있음을 알게 하라. 그래서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노라" 고 했다(6절). 하나님께서는 악하고 게으른 종들에게 말씀하실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신 바를 듣고, 그의 명하시는 말씀을 경청하여, 먼저 그들 스스로를 구원받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들이 "자기들의 말을 들은 일반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도울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제사장들에게 내려진 것은 분명한, 의심할 나위없는 정당한, 그리고 준엄한 책망이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은 저들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만일에 제사장들의 죄였다면, 그런 잘못은 모든 사람들이 저지르지 않게 하고 두려워하게 해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들에게 말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말한 것이다. 아니,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우리들," 즉 하나님의 백성이며 제사장인 우리 자신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살피자.
Ⅰ. 하나님이 저들로부터 기대한 것은 무엇인가? 또 그분이 무슨 이유로 기대하셨겠는가를 살펴보자(6절).
"자기 아버지이기에,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한다." 자연(본성)이 이 법칙을 자녀들의 심중에 새겨두었다. 하나님이 그것을 시내산에서 기록해 주시기 전의 일이다. 아니 종은, 비록 주인에 대한 자기의 의무가 자연스럽지 않고, 강압적인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는 해도, 주인을 공경하는 것을 자기 의무로 생각하고 있고, 그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며, 그의 이해 관계에 충성하려 한다. 자녀와 종들은 부모와 상전에게 존경을 표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며, 스스로의 마음속에서도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가족의 질서는 지속되며, 그것이 가족의 미덕이요, 장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이며 동시에 종이었던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경외하지도 않았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아버지인 동시에 주인이었으며, 그렇게 불리울 것을 기대하였다(사 18:19; 마 22:7, 10). 그런 만큼 존경받고 순종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저들은 저들의 하늘에 계신 주인과 아버지를 잊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저버렸다. 우리도 오늘 제사장들에게 내려졌던 책망을 각자 받아야 할는지 모른다. 이점을 주목하자.
1.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이며 주인으로 여기며, 우리 자신은 그의 자녀이며 종이라고 생각해야 함을 명심하자.
2. 우리의 아버지와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관계는 그를 경외할 것을 강력히 요청한다. 우리가 육신의 아버지를 공경하거늘, 하물며 우리 영의 아버지이랴?(히 12:9)
3. 하나님이 그를 아버지와 주인으로 생각하는 자들에게서 경외받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통탄할 일일 것이다. "그를 공경함이 어디 있는가? 그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는가?"
Ⅱ.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대해 저질렀던 모욕은 무엇인가?
1. 이것이 일반적으로 저들에게 내려진 책망이다.
(1) 저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했다. 그 이름에 대한 제사장들의 친밀감이 그 이름을 모욕하는 기회가 되었고, 그것을 기회로 자신들과 자신들의 이름만 존경을 얻었고, 하나님 이름은 하찮게 되었다. 하나님의 이름이란, 하나님이 자기를 알리는 데 사용한 모든 것, 곧 그의 말씀과 규례이다. 이것들을 그들은 경시했고, 찬양을 드려야 할 것을 비천하게 만들었다. 또한 "엘리의 아들들처럼 그들이 스스로 그 일을 경멸하게 되자,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이 경멸받게 되었다는 점은 뻔한 일이다.
(2) 저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다" (12절). 저들은 그것을 "더럽혔다" (7절). 거룩한 제물은 저들의 안중에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릇되이 사용했으며, 제물을 사악한 목적에 악용했다. 즉 그들 자신의 교만, 탐욕, 사치에 이용하였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노하게 하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이름은 거룩하고 존경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성결은 인간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더럽혀질 수 있다. 그 이름을 존경해야 하는 책임을 맡은 제사장들의 실책 이상으로 그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없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에게 가해진 총괄적인 책망이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하나님께 저들의 범죄를 증명해보라고 도전했으며, 뻔뻔스러움을 더하게 했던 그 일을 옳다고 하면서 "죄가 없다" 고 하나님께 대들었다.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6절) 우리가 어디서 당신을 더럽혔나이까? 하는도다." 책망받을 적에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일이 교만한 죄인들에게는 흔한 일이다. 이 제사장들은 가증스럽게도 제물을 더럽혔음에도, 마치 "간음한 여인" 처럼 그들은 자기가 "악을 행하지 않았다" 고 주장하였다. 저들은 기억도 안하고 그들이 저지른 행위를 반성도 하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에 대해 태만했다.
또 자기들이 한 일에는 아무런 해가 없다고 하면서, 저들이 행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로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했다. 또한 그들은 자기의 죄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모르실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무신론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은 진지하고 정당한 책망을 희롱하고 그것을 웃음거리로 돌려버리는 교만을 보일 정도로 하나님과 예언자들에 대해서 경멸적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그들은 그 책망을 경멸하며 비웃었고,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며 비웃었다. 또 그런 책망은 받지 않을 것이며,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리라고 결심한 사람처럼, 웃어 넘겨 버렸다. 우리가 그 일을 어떻게 보든, 그들의 변명은 죄악이었으며, 그들 자신을 의롭게 하는 데서 오히려 저들 자신의 혀가 저들을 비난한 것이며, 우리가 "어디서 주의 이름을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 그들의 말은 저들의 사악함과 교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자기들의 주장에서 특별히 겸손한 마음을 지니고 그런 물음을 물었다면, 그 물음은 그들의 회개의 표지가 되었을 것이고, 개전의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시와 멸시로 이처럼 물은 것은 "악을 행하는 데에 저들의 마음을 완전히 허비하는 것" 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악인은 스스로의 뉘우침을 좌절시키는 법을 배움으로써 스스로를 멸망케 한다는 것을 살피자. 그러나 저들은 "가시(양심의 가책)를 향해 발길질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 을 발견할 것이다.
2. 마땅히, 제사장들은 일반적인 책망을 듣고 뉘우치며 자숙하고, 그들의 주장은 쓸데없는 것으로 알아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을 이기실 뿐 아니라, 그가 심판할 때는 그의 의가 분명해지므로, 여호와는 저들이 어느 점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모욕했으며, 그에게 내뱉았던 경멸이 무엇이었던가를 매우 자세히 보이신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저들의 우상 숭배를 문제 삼았지만, 이제 하나님은 신성 모독을 문제삼으시어, 저들에게 "골짜기에 있는 너희의 길을 보면 너희 행한 바를 알리라" (렘 2:23)고 하신다.
(1) 저들은 말하는 중에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였다. 저들은 천박한 생각에서 그들이 지닌 거룩한 제도를 멸시하였다. "너희 제사장들은 심중에, 또는 잔을 받을 때,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니라고 말한다" (7절). "여호와의 상은 더러워졌다" 고 말한다고 했다(12절). "어떤 다른 식탁만큼도 중히 생각되지 않았다." 성전에 있는 상은 진설병을 둔 곳이었는데, 그것을 멸시했다.
또는 하나님과 제사장과 그의 백성들이 교제 속에서 함께 희생제의 잔치를 하는, 번제단-이것을 "상" 이라 했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멸시하였다. 이전에 미신을 섬기던 때에는, 번제상은 이교도들의 우상 제단과 비교해 보잘 것 없다고 여겨 따로 구분해 방을 꾸며 놓았었다(왕하 16:14, 15). 그러나 이제는 번제상이 자기들의 식탁과 비교해서 보잘 것 없는 상으로 생각되었다.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도 경멸히 여길지니라." 제단을 섬기는 자는 제단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가난하고 비천하게 사는 것을 불평하였으며, 그 제단에 과일과 고기로 제사드리는 일은 참예할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언제나 같은 일을 반복하는 아주 일상적인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맛있는 음식, 또 여러 가지 음식도, 훌륭한 음식도 없었다. 아니, 저들이 하나님께 드린 희생 제물들, 피와 (고기)기름을 저들은 경멸의 눈으로 봄으로써 하나님의 제사에 대한 수많은 법칙을 적용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겼다. 저들은 "기름을 태우고, 피를 뿌리는 일에 이렇게 많은 법석을 떨 필요가 있는가?" 라고 질문하였다.
제사의 직무를 경시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모독하는 자들에게는, 제사직무가 비록 존경받을 만한 것일지라도 그런 수고는 할 가치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고, 종교의 가치가 상당하더라도 수고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안다는 것을 명심하자. 이런 사람들은 거룩한 의식을 무시하고 소홀히 여기며, 불경스럽게 제물을 드리며, 다시 무관심 속에서 떠나면서도, 실지로는 이렇게 말한다. "주의 상이 더러워졌나이다. 그래서 이런 행위로부터는 아무런 미덕도 가치도 신뢰도 위안도 기대할 수 없나이다."
(2) 저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경멸했는데, 그 경멸은 그들이 한 말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부정한 행동과 생각은 슬픔의 근원이며, 타락한 행동의 신산고초를 가져오는 고통의 근원이다. 저들은 주의 제단과 상을 경멸거리로 여겼다. 그리하여
[1] 저들은 제물로는 어떤 것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제사를 드려야 할 때는, 제일 좋은 것이 아니라 아주 비천하여 자기의 식탁에도 쓰지 않을 나쁜 것을 골라서 하나님의 제단에 드렸다. 저들은 모든 희생 제사에서, "기름섞인 좋은 가루" 의 소제물을 가져왔어야 하거늘, "더러운 떡" 을 가져왔다(7절). 형편없는 떡, 하인의 떡, 아마도 마르거나 곰팡이가 난 것이며, 또 밀찌꺼기로 만든 것을 저들은 제단에서 태우기에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저들은 "무슨 목적으로 낭비하는가?" 고 말하기를 더 좋아했었기 때문이다.
저들은, 율법이 희생제물로 흠없는 것을 드릴 것을 명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먼 것, 절름발이, 병든 짐승을 드렸다(8절). 반복하면(13절),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과 저절로 죽은 것들이었다. 저들은 제물을 불태우는 것 이상을 생각지 않았다. 만약 다른 곳에 쓸 수 있는 좋은 것이라면 태우기에는 아까운 일이라고 변론하였다. 백성들은 저들이 희생 제물로 드려야 한다는 의무를 아직은 알고 있었다. 저들은 감히 제사 의무를 송두리째 빼먹지는 않았으나, 쓸모없는 제물을 가져와 하나님을 비웃고, 가진 것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을 가져옴으로써 저들 자신을 속였다.
백성들을 보다 잘 가르쳐야 할 제사장들은 가져온 제물을 받아서 제단에 그대로 드렸다. 왜냐하면 제물을 거절할 경우, 다음에는 사람들이 하나도 가져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고, 그렇게 되면 저들은 부수입을 잃게 될 것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이익을 더 생각하였기 때문에 저들은 받지 않아야 할 줄 알면서도 받았다.
목자는 8절을 제사장이 경멸조로 말한 7절의 계속으로 본다. "너희는"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눈먼 것으로 드릴지라도,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도 악하고 말하지 아니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든 않든지 간에, 눈먼 것, 저는 것, 토색한 것, 병든 것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드리는 것은 지극히 악하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무지에서 또는 이해없이 예배한다면, 그것은 눈먼 것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주의없이, 생각없이, 둔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한다면, 병든 예물을 주께 드리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육신의 일을 쉰다면 그것은 마음의 일도 하지 않는 것이며, 절름발이의 예물을 가져오는 격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가운데 쓸데없는 생각과 오락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저는 것, 토색한 것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이 악하지 않은가?" 하나님께 대하여 큰 모욕이 아닌가? 또 자기 영혼 자체에 해가 되지 않는가? 우리의 책들이, 아니, 우리의 마음이 "이것은 나쁘다" 고 말하지 않는가? 하나님께 대하여 최선을 다하는가? 최고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지닌 것 중 최선의 것을 받으셔야만 한다.
[2] 저들은 자기들이 보수받는 것 이상의 일을 하지 않으려 했다. 제사장은 제단에 바치는 희생 제물은 기꺼이 드리려 했다. 그 중에 그들의 몫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전의 어떤 다른 제사에는 특정한 보수가 따르지 아니했기에, 저들은 그 일에는 한걸음도 움직이지 않았고, 전혀 손을 놀리지 않았다. 이런 행동이 일반적인 저들의 기질이었다(10절). 제사장 가운데는 "성전문을 닫거나, 촛대의 불을 끌 자가 없었다." 만약 제사장이 가장 적은 소규모의 예배를 드려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내가 얼마를 받게 되는가고 되물었을 것이다. 삯을 받지 않고는 저들은 제사를 드리지 않았으며, 그들이 드린 모든 제사는 자기의 수입을 위한 모든 것이었으며, 삯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사 56:11). 비록 하나님이 자기의 종들은 이 세상에서 많은 삯을 받게 된다고 명하였다고는 하나, 돈만을 위해서 일하며 보수가 생기지 않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 그런 자는 용납될 수 없음을 명심하자.
[3] 저들의 일은 저들에게 완전히 지겨운 일이었다(13절). "너희가 말하기를, 보라! 얼마나 번잡스러운가?" 라고 했다.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이러한 마음이었으며 저들에게 하나님은 너무 힘든 일을 부과하였다고 생각하였다. 백성들은 희생 제물을 준비하는 비용에 인색하였고, 제사장들은 그 제물을 바치는 수고에 인색했다. 저들은 주의 축제일이 너무나 많아서 너무나 자주 주님의 전에의 참석을 강요한다고 생각하였다. 제사장들은 제단에 나가서 거룩한 제물을 먹을 적에 요구되었던 바, 스스로를 정결케 하라는 명령이 저들에게 과중한 고행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자기의 직무가 힘들고 고된 것이라고 여겼으며, 부당한 처사라고 "코웃음" 치며, 견디기 어려운 짐이라고 생각하였다.
저들은 제사를 드렸으나, 인색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드렸다. 하나님은 그 일에 대해서도 자기의 율법이 정당하다고 하셨다. "예물로 인하여 수고롭게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인하여 너를 괴롭게 아니하였다" 고 말씀하신 것이다(사 43:23). "내가 무엇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미 6:3) 그러나 저들 자신의 사악한 마음은 그 일을 괴로운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저들은 도엑처럼 "여호와 앞에 억류되었다." 그들은 오히려 그밖의 다른 어떤 곳에 있고 싶어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제사를 지루하게 느끼고 그 일을 비웃는 자들은 자신과 하나님께 대해 똑같이 아주 해로운 것임을 알자.
Ⅲ. 하나님께서 이런 경우 그들을 회개케 하고 겸손케 하기 위해 어떻게 타이르고 설득시키는가를 살펴보자.
1. 저들이 땅의 군주에게도 이 같은 모욕을 할 수 있는가? "너희는 저는 것과 병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는데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아라" (8절). 기뻐 즐겨받겠느냐? 네가 그에게 은혜입기를 간구할 때나, 그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할 때,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차라리 그가 모욕이 되는 그 물건을 없애지 않겠느냐? 이같이 제사의 직무에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자들은 그들의 통치자에게 드려도 모욕이 되는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임을 알아야 한다.
2. 이 같은 제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 또 제물의 목적에 부합될 수 있을까? "내가 네 손에서 이것을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절). 너는, 내 자신의 율법의 위반을 내가 묵인하며, 내가 받은 모욕을 분해하지 않거나 무시할거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않으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 아니할 것이다." 만약 사람 가운데 하나님의 기쁨이 같이 하시지 않는다면, 또 사람이 의로와지지 않고 성화되어 있지 아니하다면, 하나님께서는 드리는 제물을 받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아벨에게 관심을 두시며, 그의 제물에는 나중에 관심을 두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제물을 받으시게 하기 위해서는, 선한 것을 행하는 것으로 불충분하며, 올바른 원칙, 바른 방법, 바른 목적에서 해야 한다. "만약 네가 잘하면 너를 받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하신 옛 율법이 있다(창 4:7).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헛되이 그를 예배하는 것이며, 그 일은 모든 수고의 댓가를 잃어버린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의 수납에 미치지 못한다면, 전혀 행치 않은 것이 되며, 영원히 행치 않은 것이 된다.
그러므로 종교적 비용을 절약하려는 자들은 자기들에게도 불리한 일을 하는 것이요, 제사의 모든 목적을 잃는 자들이다. 가장 안이하게 일하는 방법을 생각하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여호와께서 받아 주시는 것" 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자들은 "토색한 것, 저는 것, 병든 것" 을 감히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3. 그런 제사장들이 희생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마주하여 백성들을 위해 중재할 때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설복하리라 기대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9절을 역설적으로 말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제, 너희가 제사장의 의무를 다하고, 너희 가운데 내릴 하나님의 재앙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 사이에 서게 된다면,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은혜 베푸소서 라고 내가 너희에게 빌리라." 그리고 "우리 땅에게도 은혜 베풀기를 빌리라" (3:11 참조). "이제 너희가 지닌 은혜의 보좌에서 너희가 바라는 바를 시험해보라. 그 역병을 없애는 데 이용해 보라.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너희의 방법이었으니까. 너희는 재앙이 내리도록 하나님을 분노케 했다.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을 모독하는 일을 계속한다면, 그분이 너희 인격이나 너희 기도에 관심을 갖겠는가? 아니, 너희는 그 역병이 떠나도록 하나님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마음속에 사악한 것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기원을 "듣지" 아니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이 저들의 손에서 이런 것을 받아야 했는가? 아니다. 그분은 저들을 위해 위로를 마련하셨으며, 그들에게 그의 일이 즐겁고 잘될 것을 약속하사, 저들에게 즐겁게 일하도록 격려해 주었다. 혹자는 10절을 이렇게 본다. "너희 중에 문을 닫을 자, 또는 타오르는 불을 끌 자가 있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를 위해 아무것도 봉사하지 않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너희는 그것에 대해 좋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하나님을 위해 준 것은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혜를 알고, 순종 가운데 오는 보답을 아는 자가 하나님께 의무를 다하지 아니하면, 그 나태와 인색함은 더욱 가증스런 것이다.
Ⅳ.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는 것을 회개하라고 저들을 촉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9절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이제, 내가 간구하노니, 하나님께 우리에게 은혜를 줍시사고 구하라. 죄를 인해서 너희 자신을 낮추라. 힘있게 하나님께 사죄를 부르짖으라. 그리하여 너희 제물의 값과 가치에서 부족했던 것을 기도의 열심과 신앙으로 보상하라. 우리가 당하는 모든 섭리의 견책은 너희의 행위로 왔음이라." 죄로 인해서 불을 지르게 된 사람은 회개, 기도, 개인의 변화로써 그 불을 끄는 데 크게 관심을 높여야 한다.
Ⅴ. 하나님은 그 자신의 이름의 영예의 확보와 그 이름을 모독하는 자에 대한 심판, 그 두 가지의 결심을 선언하신다.
하나님과 종교에 대해 모욕을 퍼붓는 자, 신성한 것을 경멸하는 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게 하라.
1. 저들이 목적하는 것을 얻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저들은 하나님의 법을 비천하게 만들고 모독할지라도 하나님 자신은 그것을 확장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해뜨는 곳으로부터 해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되리라" 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11절). 그것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만약 이들은 하나님이 받아들이는 예배자들이 아니라면, 하나님에게는 예배자들이 없으리라." 마치 하나님은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최선을 다해 받지 않으면, 그에게는 예배가 전혀 드리지 않을 것이라는 식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위대한 이름을 위하여 그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러나 그가 홀로 그 이름을 위대케 하도록 버려 두라. 비록 이스라엘이 불충성하고 흩어졌다 해도, 하나님은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분노케 하사 그로 하여금 의식 율법을 제거하고, "아무 것도 완전하게 만들지 못하는 계명" 을 폐기하도록 했지만, 하나님은 끝내 그들에 의해 손해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1) 저들이 모욕한 이런 육적인 규례 대신에 영적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가 시작되며 이룩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와 양의 기름과 피 대신에, "유향이 하나님의 이름에 드려지게 되리라" (이것은 기도와 찬양을 의미한다. 시 141:2; 계 8:3). 그것은, 제사장들의 행위 속에 있었던 부패로부터만이 아니라, 그 제도 자체 속에 있었던 "육적인 의식" 이 없는 "정결한 예물" 이 되리라. 그런 것은 개혁의 때까지만 있는 "육적인 규례" 라 했다(히 9:10).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릴 때가 오는데, 그때에는 "유황" 과 이 "정결한 예물" 이 드려졌던 것이다.
(2) 유대인만이 드리는 예배와 제물을 드리는 대신에, 온 세계에서 사람들이 그를 섬기고 예배할 것이며,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모든 장소에서 그의 이름에 찬미를 드릴 것이다." 나라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기사)에 대하여 말할 것이며, 배우게 될 것이며, 그들 자신의 언어로 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은총의 왕국에서 있을 커다란 혁명의 분명한 예언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방인에 의한 것이며 나그네와 타국인이었던 이방인에 의해서 이루어질 일이다. 이방인이 "하나님의 권속과 성도들과 더불어 동료 시민" 이 되며, 이전에 유대인들이 받았던 것처럼 은혜의 면류관을 받으리라. 이 일은 두 번이나 말해졌다. "내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크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유대에만 알려져 있던 그 이름이 크게 되었도다" (시 76:1).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에게 선언될 것이고, 그 선언은 받아들여질 것이며, 믿게 될 것인데, 이방인 중에도 유대인들이 행했던 것이나 제사장들이 섬긴 것보다 더욱 잘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돋보이게 할 자가 있을 것이다.
2. 저들은 반드시 벌을 받게 될 것이다(14절).
여기에 그런 제사장들을 좋아했던 사람들의 운명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 관한 선고는 그 같은 모든 자들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살펴 볼 것이 있다.
(1) 경배하는 자에 대한 서술을 살펴보자. 저들이 자기들의 양떼 중에 "수컷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같이 부패한 것을 주님께 서원과 제물로 드렸다." 저들에게는 충분한 재물이 있어서 하나님을 존귀하게 섬길 훌륭한 재물이 있었지만, 저들은 가장 나쁜 것이 하나님께 드리기에 알맞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배은망덕한 행동이 하나님에 대한 저들의 답례이었다. 이것이 백성들의 죄이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그 일을 묵인하였고, 그 제물로 만족해하였다. 우리는 레위기 22장에서 "서원을 위해서는 열납될 수 없으나" "자원제(낙헌 제물)로는 가한" 예물에 관한 율법을 발견한다(레 22:23). 그러나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이전과는 달리 아무 것이나 받는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받아들였다.
(2) 이런 예언자가 지닌 성격을 살피자. 저들은 "사기꾼" 이다. 저들은 하나님을 속이고 부정하게 대하였다. 저들은 위선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에게 대한 공경을 가장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제사를 드렸을 때는, "이처럼 서원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않는 것" 이 더욱 좋았을 정도로 무례히 행했다. 그러나 스스로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왜냐하면 하나님은 조롱받을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기만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에는 그들 자신의 영혼에 대해 저주스런 속임수를 쓰는 것임이 드러날 것이다. 위선자는 사기꾼이며, 또 자기 기만자임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자기 자신이 멸망케 될 것이다.
(3) 그들에게 닥쳐올 운명을 살펴보자. 그들은 축복을 원했으나 저주받았고, 기록된 심판 대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4) 그 심판의 이유. "나는 큰 임금이라. 만군의 주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나를 그들과 같은 한 인간으로 대하는 자들을 내가 심판하리라. 내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백성 중에서 멸시받는 것을 참지 않을 것이다." 이방인들은 비록 우상을 섬겼지만, 유대인들이 유일하고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드린 것보다 더 많은 공경을 그들의 신에게 바쳤다. 하나님의 세계 통치권에 대한 생각과 그 통치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불경스러움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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