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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믿 음 의 본 질/ 박 영 선 지 음

by 은총가득 2020. 4. 21.

 


믿 음 의 본 질

                                                                                                         박 영 선 지 음 

 

1.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반응

믿음은 인격과 인격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한 인격에게 당신을 나타내시고 알리시며 설득하시는 것을 전제로 시작한다. 그것은 믿음이 기계적이지 않고 인격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동전을 넣으면 음료수가 나오는 자판기 같은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믿음은 선물책임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믿음은 그 기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점에서 선물이다. 인간이 타락한 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구원 얻는 믿음을 소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동시에 믿음은 책임을 수반한다. 그 이유는 믿음이 살아 계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지속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자기 암시가 아니다.

하나님은 질서, 법칙, 힘 같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다. 따라서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주술적 행위나 종교적 열심, 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한 방편이나 비법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믿음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을 알며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이다

 

2.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설득

믿음의 법칙은 세상의 법칙과 다르다.

이 세상의 법칙은 어느 정도 인과율을 반영한다. 노력하는 자가 얻고, 심는 자가 거두는 것이 합당해 보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의 법칙은 세상의 법칙과 다르다. 성도는 결코 자기 자신의 것으로 심고 자기 자신의 것으로 거두지 않는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으로 인한 결실을 맺게 된다.

 

믿음은 이 세상 너머를 바라본다.

믿음은 이 세상에서의 보상과 아무 관련이 없다. 아벨과 에녹이 동일한 믿음의 사람이었음에도 상반된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은 그 좋은 예이다. 오히려 믿음은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삶의 형태에 구애됨 없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본다. 이런 믿음은 세상에서 무엇을 얻을까하는 것보다 어떻게 살까하는 데 주의를 기울인다.

 

믿음은 초월이 아닌 계시에 의존한다.

세상의 종교에도 초월은 존재한다. 그들은 주문을 외우거나 부적을 사용할 때 자연법칙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현상이 벌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세상을 초월해 내재해 있고,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인격이신 하나님을 가르친다. 믿음이 초월이 아닌 계시, 즉 말씀에 의존해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3. 하나님의 믿음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믿음으로 반응한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에서 부름을 받은 순간부터 하나님을 믿었다고 표현되는 순간까지 많은 세월이 흐르게 된다. 그 기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간섭과 보호 속에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경험한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 여기신 사건은 이런 과정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의 결과이다.

믿음을 논할 때는 인간의 반응, 책임, 결단, 순종 등을 먼저 거론할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 부르심과 간섭과 보호하심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믿음은 인간의 행동을 통해 드러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신 결과이다. 따라서 신적 기원을 가진 믿음은 소멸됨 없이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해 간다.

 

구원 얻는 믿음은 인과율이 아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은혜요 선물이다. 이 믿음은 우리 자신의 결단이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요, 우리의 자발적인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여 조건 없이 주신 것이다. 따라서 이 믿음은 인과율이 아니다. 우리에게 원인이 있지 않으나 결과가 주어진 것이다

 

4.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

믿음에는 지ㆍ정ㆍ의의 조화가 요구된다.

믿음은 배우고 경험하며 행하는 것이 조화를 이루도록 되어 있다. 이는 성도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행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을 추구하거나 신비주의적 명상에만 몰두하거나 사회의 개혁만을 강조하는 것은 균형잡힌 신앙이라 할 수 없다.

 

믿음은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

하나님은 약속하셨고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은 아담과 약속하셨고 노아와 약속하셨으며, 아브라함과 약속하셨고, 이스라엘과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당신의 아들을 이땅에 보내주셨다. 믿음은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며 사랑하는 것이다.

 

믿음 자체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결과에 주목할 때가 많다. 믿었더니 무엇을 얻게 되었다던가, 어떤 문제가 해결받았다던가 하는 것을 중요시 여길 때가 많다. 그러나 믿음으로 인해 나타난 결과보다 믿음 자체가 훨씬 가치 있다. 그 이유는 믿음만이 하나님과 인간을 인격적으로 연결시켜 주는 유일한 끈이기 때문이다


5.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믿음

믿음은 방법이 아니라 은혜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은 사람이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선물을 다르게 표현한 단어라고 할 수 있다. 구원의 문제에 있어 은혜나 선물이 아닌, 믿음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이유는 이 단어가 구원의 의미, 즉 이전에 깨어졌던 관계가 회복되어 새로운 관계와 교제를 형성하게 됨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법정적 의를 넘어서 인격적 의를 보여준다.

구원은 한 사람의 죄를 사하고 의롭다하는 법정적 선언에서 끝나지 않는다. 구원은 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자라게 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질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인도함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은 법정적 선언 이후의 인격적 관계를 중시한다.

 

믿음은 하나님 자신을 목적으로 한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요 결합이요 순종이요 사랑이요 열심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됨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에 만족할 뿐이다. 믿음은 하나님만을 삶의 유일한 의미요, 목적으로 한다.

 

6. 성화의 과정 속에 있는 믿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성, 도덕성, 인격성 등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며,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고, 독립된 인격으로서 사물을 대하며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전제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악과 금령은 인간의 본분을 보여준다.

선악과 금령은 인간의 기원에 어디에 있는지, 인간이 누구의 권위와 보호 아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이 비록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이 세계를 다스릴 권위를 부여받았지만 이 세계의 최종 권위자가 아님을 보여준다. 인간은 마땅히 선악과 금령을 통해 자신의 피조물 됨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했다.

 

믿음은 성화의 도구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비전이나 꿈 등으로 채색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을 좋은 믿음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믿음은 나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는 도구가 아니라, 내 인격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통로이다. 좋은 믿음은 인격이 자라가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서는 것이다.

 

 

2.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가?

 

7. 믿음은 은혜인가, 책임인가

하나님은 더듬어 찾을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범죄한 인간은 죄와 사망 가운데 죽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도, 알수도 없다. 따라서 믿음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낼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성령님의 내적인 사역에 의해 발생한다.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인간을 살리시고 가르치실 때에 비로소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은 은혜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신 이유는 야곱에게 더 탁월한 성품이나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의 근거는 당신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으로 자녀를 삼을 자를 택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 따라서 참된 믿음은 자기 자신의 영광이나 자랑에 몰두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

 

믿음은 지향점을 가진다.

구원은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인간을 불러내어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화목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을 함의한다. 따라서 믿음은 분명한 지향점을 가진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완성이다. 이 지향점을 향해 나가는 것이 책임의 영역이다.


8. 말씀을 통해 주시는 믿음

믿음은 맹신이 아니다.

믿음은 열정이나 맹신이 아니다. 믿음은 아무 의심이나 불만, 갈등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은 생각하고 고민하며 분별할 것을 요구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자아가 여전히 죄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믿을 만한 분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믿을 만한 분으로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할 만한 분으로 여기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실 일을 기대하는 것이다. 또한 믿음은 부조리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것이다.

 

믿음은 오랜 시간을 통해 자라간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기까지 오랜 시간 믿음의 여정을 거쳐야 했고, 이스라엘인은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사십 년 간 광야를 배회해야만 했다. 이것은 믿음이 오랜 시간의 시련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무한하며 풍성하고 높으신 하나님을 배우기에 인간의 능력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평생의 과정이다.  

 

9. 은혜와 동시에 책임으로서의 믿음

믿음은 인격을 전제로 한다.

믿음은 한 인격을 변화시키며 돌이키게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따라서 믿음은 언제나 인격적인 결단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죄인됨, 하나님 없이 살아왔던 잘못을 깨닫고 예수님이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인격을 대상으로 하나님이 일하셨기 때문이다.

 

구원은 은혜와 책임의 양면성을 지닌다.

구원파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반면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구원파는 인간의 인격적 반응을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혜를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약점이 있다. 구원은 하나님이 선행하시는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반응이다. 믿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은혜와 책임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는 구원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시행된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은 몸된 교회에 책임을 요구함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희생이 제물이 되심으로 값없이 구원 얻는 길을 여셨지만 동시에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 몸된 교회가 거룩할 것을 요구하신다.

  

10. 예수 안에 있는 믿음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한다.

명분과 형태에서만 그리스도를 내세우는 것을 참된 믿음이라 할 수 없다. 참된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자로서,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다. 단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다고 해서 그것을 참된 믿음의 발로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신적 성품을 나누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은 하나님의 신적 속성을 드러낸다. 즉 그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원하는지 보여준다.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그 분의 성품에 참여하게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것을 함께 나누며 자라가게 한다. 신적 성품에 참여한 자로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자리에 이르도록 한다.

 

믿음은 존재의 변화를 가져온다.

믿음은 옛사람과 새사람을 나누는 기준점이다. 옛사람은 죄로 죽어 있으며 자아에 고착되어 있다. 그러나 새 사람은 죄와 자아의 울타리를 벗어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주인임을 인정할 뿐 아니라, 주인의 뜻대로 주인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간다. 따라서 믿음을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은 여전히 옛 사람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3. 믿음은 어떻게 자라는가?

 

11. 하나님 아버지를 닮는 믿음

믿음은 존재에 관한 것이다.

몇 가지 죄로 사람을 죄인으로 여겨서도, 몇 가지 의로 사람을 의인으로 여겨서도 안된다. 그 이유는 믿음이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존재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한 사람의 인격적 성숙, 됨됨이에 초점이 있지 그의 몇 가지 행위나 업적에 초점이 있지 않다. 믿음은 나는 누구이며, 누구를 지향하는가에 관심이 있다.

 

믿음은 하나님을 닮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분으로 소개된다. 또한 하나님은 악인에게나 의인에게나 동일하게 햇빛과 비를 주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믿음은 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닮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아량을 베푸시듯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른 이들을 포용하며 사랑하는 것이다.

 

믿음은 맞다, 틀리다를 넘어서 사람 자체에 관심을 갖는다.

성도는 진리를 소유하고 있지만 그 진리를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 원수에게마저도 그의 악한 행실을 넘어 그런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는 그의 상황과 존재에 관심을 갖는다. 믿음은 당신은 이런 저런 점에서 틀렸소하고 말하기 전에 당사자를 위해 기도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12. 하나님 아버지를 닮는 믿음

믿음은 ‘~다운것이다.

한국 사회는 경쟁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인데, 교회에마저 이런 분위기가 유입되어 신앙이 마치 경쟁하고 비판하고 잘잘못을 가르는 것처럼 오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믿음은 ‘~다운것이다. 교회가 교회답고 성도가 성도답고 아버지가 아버지다우며, 자녀가 자녀다운 것이다. 믿음은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다울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다.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 할 때, 하나님은 마땅히 죄인을 벌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야 합당함에도, 하나님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내기를 기뻐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죄인을 불쌍히 여겨 용서하시는 분으로, 부패와 절망과 형벌에 처한 인간을 싸매고 회복시키는 분으로 드러내신다.

 

믿음은 이웃 사랑으로 드러난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드러나듯, 성도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자녀됨을 드러내게 된다. 성도는 이웃을 사랑하고 아끼며 용서하고 기다리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신의 것으로 한다. 믿음은 십자가를 통해 얻게 된 유익에만 몰두하지 않고, 그것을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13.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믿음

사랑없는 믿음은 공허하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성도를 연결시켜 주는 통로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성도는 하나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공유한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했듯,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랑으로 반응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사랑없는 믿음은 공허하다. 사랑 없는 믿음은 땅에 떨어져 썩지 않는 밀알 같은 것이다.

 

믿음은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창조주, 천하만물의 주께서 피조물이 되셨다. 하늘 아버지와 영광을 누리던 분께서 누추한 인간의 땅에 오셨다. 무한이 유한이 되셨으며, 결핍이 없으신 분께서 결핍과 고통과 좌절의 땅에서 모든 것을 경험하며 친히 30여년을 사셨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낮아짐을 바라본다.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셨던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 배운다.

 

사랑은 본질이다.

사랑은 행위가 아닌 본질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처럼 성도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은 ‘~하자라고 언급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랑은 사랑에서 나온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기도 하며 동시에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는 인격적 요소이기도 하다.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재가 없는 것이다

 

14.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믿음

믿음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생명의 주께서 생명을 내어주셨으며 심판주가 심판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함으로, 오직 사랑만이 사랑의 결실을 맺음을 보여주신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사랑을 받는 자의 반응에 관계없이 먼저 된 것이었다. 믿음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반응하는 것이다.

 

믿음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듯이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자기 십자가를 지게 한다. 자기를 자랑하거나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에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자기를 포기하는 법을 배우게 한다. 믿음은 나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묻게 한다. ‘내가 사는 이유?’ 그것은 사랑이다.

 

은사는 남을 지향한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은 성도가 자기 자랑이나 자기 증명을 하도록 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은사를 받았다고 교만할 것도 없고 은사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열등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교회의 직분 역시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을 섬기라고 주셨기 때문이다.  

 

15. 바울을 본받는 믿음

믿음은 옛 사람을 벗어버린다.

옛 사람은 죄의 유혹을 쫓아 자기의 욕심만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다. 반면 새 사람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리스도로 채워가는 것이다. 믿음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을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훈련하고 연습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생명이 자라나 결실을 맺도록 한다.

 

바울은 부요한 사람이었다.

바울은 새 사람의 부요함을 안 사람이었다. 그 부요함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을 얻고 그를 배워가며 그의 안에 있는 영적 풍요를 자신의 것으로 삼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세상의 오해와 핍박이나 동료의 시기가 그의 기쁨과 만족을 꺽지 못했다. 그는 참된 만족과 기쁨을 이 세상이 아닌 그리스도께 구했기 때문이다.

 

믿음은 기교가 아닌 생명과 관계된 것이다.

적절한 프로그램이나 공연이 믿음을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다. 기교적인 것으로 믿음을 다루게 될 때 믿음은 이 세상의 법칙과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오해되기 십상이다. 또는 믿음이 누가 크고 훌륭한가 하는 것을 재는 척도로 오해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믿음은 생명과 관계된 것이다. 따라서 연약한 믿음일지라도 귀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

  

 

16. 바울을 본받는 믿음

믿음은 주를 위해 사는 것이다.

기도하고 말씀보며 전도하고 봉사하는 것은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주를 위해 사는 것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주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구원, 축복, 진리, 생명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또한 삶과 운명과 존재의 기초요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인생이 주인이 되심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바울의 자기 인식은 겸허하다.

바울은 육체를 신뢰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베냠니 지파였으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대로 할례를 받았으며,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고 가말리엘의 문하에 있던 엘리트였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자신을 스데반을 죽인 자요, 하나님을 대적했던 자로 인식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전적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기초한 것으로 인식한다.

 

믿음은 그릇에 담겨진 보배와 같다.

성도는 질그릇과 같다. 십자가가 사람들의 눈에 초라해 보이는 것처럼 성도의 삶 역시 십자가와 방불하다. 성도는 모든 것을 잃고, 슬퍼하며, 실패하는 자 같아 보인다. 그러나 십자가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듯 질그릇 같은 성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믿음은 역경과 고난 속에서 더 아름답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4. 좋은 믿음이란 무엇인가

 

17. 인격의 성숙으로 표현되는 믿음

믿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르다. 전자가 정보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면 후자는 인격적 차원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전저가 공허한 사변으로 흐를 수 있는 반면, 후자는 인격의 변화를 불러온다. 좋은 믿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데서 자라가며 표현된다.

 

믿음은 삶의 전 영역에서 드러난다.

믿음은 종교적인 형태로만 드러나지 않는다. 믿음은 삶의 전 영역에서 드러난다. 믿음의 행위는 말씀보고 기도하는 것이요, 세속의 행위는 일하고 먹고 자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믿음은 한 사람이 먹고 자고 일하며 생각하고 예배하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낸다는 점으로 볼 때 외형상의 기준을 철폐한다.

 

믿음은 윤리, 도덕적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

믿음이 삶의 전 영역과 관계된다는 차원에서 믿음은 윤리, 도덕의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성도의 윤리, 도덕은 세상의 그것과 같지 않다. 성도의 윤리 도덕이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의 발현이라면 세상의 윤리 도덕은 자기 의의 표현일 뿐이다. 혹 세상의 그것이 더 나아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18. 순종하는 믿음

율법은 인간의 위치를 확인시켜 준다.

율법은 율법을 주신 분이 누구인지를 확인시켜 준다. 율법은 하나님만이 천하만물의 창조주시오, 통치자시며, 모든 인류의 주인이심을 보여준다. 또한 하나님만이 유일한 복의 근원이시며 진리와 생명의 주인이심을 보여준다. 반면 율법은 그 율법 아래 순종해야 할 인간의 위치를 확인시켜준다. 인간은 의존적인 존재이다.

 

믿음은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함으로 온전하게 되심같이 성도 역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이 요구된다. 예수께서 온전케 되신 것은 부족과 결핍으로부터가 아니라, 인류의 대표로서, 당신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시기 위함이었다. 성도는 순종을 통해 인격적 완성의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

 

믿음은 의지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께 무릎꿇기를 거부한다. 죄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은 결핍된 존재이며 의존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공급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속한 진리와 생명을 공급받는다. 성도는 일상의 사소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알고 감사한다.

 

19. 일반 은총과 믿음

믿음은 초월주의가 아니다.

종교적인(초월) 영역만을 강조하고 일반적인(자연) 영역을 등한히 하는 것은 균형 잡힌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도하고 말씀 보는 것만이 믿음 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우 삶의 나머지 영역에서 드러나야 할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간과될 수 있다. 구원받는 순간은 초월적인 사건이지만 구원 이후의 삶은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믿음은 자연주의가 아니다.

자연주의는 초월적인 권위를 외면한다. 자연주의는 이 세상이 합리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여 간다고 믿는다. 또는 범신론은 인간의 자기 개발에만 관심을 갖는다. 범신론은 역시 절대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은 절대자의 초월적인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일상적인 삶의 영역일지라도 절대자의 권위에 기초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믿음은 모든 영역의 주권자가 하나님임을 인정한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영역에서도 주권자시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에서 뿐만 아니라 이웃과 관계를 맺고 교제하고 일하는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드러나기를 소원해야 한다. 믿음은 상식, 교양, 예의로도 드러난다. <!--[endif]--> 

 

20. 구원과 믿음

구원은 성화를 포함한다.

구원은 신분의 변화와 성화의 과정을 포함한다. 신분의 변화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이루어지며, 성화의 과정은 인간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음을 보여준다. 구원이 신분의 변화로만 이해될 경우 성도의 삶은 종교적인 영역에만 국한되거나 노력과 연습 없이 인격의 성숙을 이룰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구원은 세가지 시제로 표현된다.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으며,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질 것이다. 이는 구원의 세가지 측명을 보여주는데, 과거 시제는 신분의 변화를, 현재 시제는 성화의 과정을, 미래 시제는 완성의 상태를 보여준다. 따라서 구원은 순간적인 사건에 국한되지 않고 지속적인 과정과 완결을 포함한다. 성도는 바로 과정 중에 있는 존재이다.

 

믿음은 사소한 것에서 드러난다.

종교적인 행위에 열심인 사람이 삶의 다른 영역에서 인격의 결함을 곧잘 드러내곤 한다. 그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 종교적인 행위만큼 높은 수준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믿음은 몇 가지 영역에서의 몇가지 행위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드러나는 그 사람의 됨됨이를 따라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21. 교회와 믿음

믿음은 십자가와 교회를 붙잡는다.

믿음은 십자가와만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도 관련이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얻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부름을 받는다. 즉 죄인의 자리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자기를 위해 살던 자리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으로 하는 자리로 옮겨지는 것이다.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갈 것을 요구받는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갈 것을 요구받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가며 신적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내용은 비록 초월적일지라도 방법은 초월적이지 않다. 그것은 오랜 시간 시행착오와 연습과 훈련을 통해 이루어진다.

 

믿음은 원리에 관한 것이다.

성도의 표는 외형적인 삶의 형태로 판별되지 않는다. 그가 기도원을 전전한다든가, 선교에 전념한다든가 하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성도의 표는 외형적인 데 있지 않고 삶의 내적 원리에 있다. 외견상 다른 이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일상의 삶 속에서 다른 원리, 다른 목표, 다른 가치를 갖고 사는 데 있는 것이다

 

22. 성령과 믿음

성령의 일차적인 사역은 그리스도를 가르치는데 있다.

성령께서 오시는 첫 번째 목적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그분의 말씀을 듣고 생각하게 하며 삶의 자양분으로 삼게 하는 데 있다. 그런데 성령께서 사람들은 가르치는 방식은 초월적인 경우도 있고 일반적인 경우도 있다. 기적적인 방법이 동원되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말씀이 사용되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령 충만은 순간적인 자기 완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으로 충만해진다고 해서 죄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는 것도,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성령 충만으로 완전한 변화, 완성의 경지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성령 충만은 오히려 성도로 하여금 노력하고 분별하며 죄와 싸울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열매 맺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들을 극복해 갈 것을 요구한다.

 

믿음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성도를 유혹하고 시험하며 협박한다. 세상은 성도로 하여금 이런 상황을 피해가지 못하도록 한다. 세상은 성도가 타협하지 않을 때 여러 가지 불이익과 고난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러나 믿음은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의 가치와는 견줄 수 없을 만큼 고귀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23. 성화를 돕는 믿음

믿음은 하나님만이 ~’라고 고백한다.

다위은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이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하고 고백한다. 믿음은 하나님만이 삶의 유일한 원천임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한다. 반면 거짓된 믿음은 종교적인 색채로 위장하나 그 근거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믿음은 의심이 없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

의심은 하나님을 부정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반면 더 강하게 확신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불신자의 의심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데서 나오지만 성도의 의심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 토대 위에서 나온다. 성도의 의심은 대체로 삶이 부조리하다고 느낄 때 발생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더 깊이 깨닫도록 하는 동기가 된다.

 

믿음은 절망이 없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

절망은 성도에게 죄의 뿌리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즉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과 진리와 생명의 기준에 턱없이 모자라는 성도의 실존적 상황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절망이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극한 연습과 훈련을 통해 한계를 극복해 가는데서 발생하는 부산물을 의미하는 것이다.

 

 

24. 인내하는 믿음

믿음은 인내를 요구한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소망을 이루실 것을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신비한 방법이나 묘책으로 단숨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인내와 연단과 시련을 통해 성취된다. 따라서 참된 믿음은 모든 시련과 연단을 참고 견디며 인내할 것을 가르친다. 믿음이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거짓 가르침이다.

 

인내는 하나님과의 약속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필요하다.

성경은 하나님을 공의롭고 자비로우며 선하신 분으로 묘사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피조계인 이 세상은 공의롭지도 자비롭지도 선하지도 않으며,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역시 희미한 미래의 일로 남아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성도에게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는 하나님의 약속을 실체화한다.

성도는 인내하고 씨름하는 기간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더 깊이, 풍성하게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대한 물음은 삶의 여정에서,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인류의 역사에서 구체화되어 나타나게 된다. 그 절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은 성도의 삶의 여정에 깊이 있게 각인된다.

  

25. 온전한 믿음

온전한 믿음에 도달할 유일한 방법은 말씀기도이다.

말씀과 기도는 인간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방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알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유일한 통로임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성도들의 삶의 유일한 원천이요, 근거요, 공급자임을 인정하는 수단이요,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들의 방편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나의 뜻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말씀을 본다는 것은 내가 내 삶의 의미와 목적과 내용와 소원을 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내 인격에 발언하게 하시며, 내 삶의 의미와 목적과 내용과 소원을 결정하시도록 하겠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이 내 삶의 최종 권위자요, 결정권자며 통치자임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바램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는 행위요, 인간의 비극적인 상황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기도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우리에게 선한 것을 공급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분임을 아는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있어 연약하고 무능한 존재임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