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의 세계관과 문헌들
I, 들어가는 말
II, 본 말
1, 필로의 생애
2, 필로의 성경 관(종교성)
1) 알레고리(Allegory)적 해석 방법
2) 성경을 철학의 상위 개념으로 이해한 필로
⑴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인도하는 수단으로서의 성경
3,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필로의 주장
1)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
2) 필로가 보는 성경의 무오성
4, 필로의 저술들
1) 수필적 저술들 : 변증학적 저술들
2) 율법의 해설 : 율법강해
3) Allegory적 해석에 따른 분류에 속하는 저술들
5, 필로가 성경해석에 미친 영향력
I. 들어 가는 말
수천 년 전 팔레스틴 땅에서 전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고 평화의 삶으로 인도하는 역사적 사건을 일으킨 예수 그리스도의 어록과 그의 행적들을 후세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예수의 어록과 행적들을 기록한 성경 외적인 문헌들을 연구하고 조명 해봄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의미는 성경에서 드러내고알리고자 하는 의도에 대해 보다 분명한 해석과 사실적 보도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셨던 당시를 전, 후해서 시대적인 배경과 사회적인 모습 그리고 유대교의 여러 모습들을 정리 기록하고 있는 유대 역사가이자 사상가요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필로의 생애와 그의 문헌들을 그리고 요세푸스의 생애와 그의 문헌들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 손에 들려져 있는 성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는 진정한 평화의 실현과 구원의 메시지가 던져주는 참된 의미가 무엇 인지를 그리고 왜 메시야가 십자가 처형을 당하면서까지 나를 구원하고 전 인류를 죄악의 수렁에서 건져 내기를 원했던 가를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자료들을 이 두 사람이 기록한 문헌들 안에서 발견해낼 수가 있고 또 이 기록물들은 그런 단서들을 충분하게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II, 본 말
1. 필로의 생애
알렉산드리아의 부유한 명문가 출신인 “필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사도 바울과 동 시대적인 삶을 산 인물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의 문헌들을 중요시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필로가 이해한 유대주의는 사실상 기독교의 기원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도움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주의 : 시오니즘(Zionism)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 인이 그들 선조의 땅인 팔레스타인에 조국을 재건하려던 운동. 1948년에 이스라엘의 독립으로 그들의 오랜 꿈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시온 운동. 시온주의. 유대주의.
이것은 필로가 당시 팔레스틴 밖에서 살았던 유대인의 역사와 정황을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헬레니즘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교 사상은 기독교의 급속한 헬라화를 설명하는데 독특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필로의 문헌들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Platon, Aristoteles, Stoic 학파의 철학에 조예가 깊었던 철학자로도 인정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 필로”라고 지칭되는 필로는 A,D 42-43년경에 저술된 그의 글에서 그 자신을 “노인”이라고 묘사했다. 따라서 필로는 B,C 25-20년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고 그가 죽은 시기는 A,D 50년경 일 것이라고 추측된다. 필로가 살았던 기간은 헤롯 대제, 유명한 랍비인 힐렐과 샴마이 그리고 사도행전에 언급되고 있는 가말리엘과 그리스도 예수와 바울 등의 생애와 중첩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고 그 지방에서 성장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필로는 유대 지방 밖에서 살았던 유대인들의 생활과 경험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A,D 70년에 로마인들에 의하여 성전이 파괴되고 제사 제도가 중단되기 전에 사망했다고 추정되기 때문에 성전은 그에게 있어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진 대상이었고 또 필로는 평생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그의 문헌들에는 회당 유대주의(Synagogue Judaism)의 요소가 잘 반영 되어 있으며 이러한 이유가 그의 종교성을 파악하는 것과 그의 문헌들이 제공하고 있는 기독교 사건을 이해하는 일에 좋은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필로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지도급 유대인 출신이었고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도 상당한 부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필로의 형 알렉산드는 “그 당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문과 부로 가장 유명”하였다고 한다. 필로의 부에 대한 평판은 필로가 9개의 헤롯 성전 문을 입힐 금과 은을 제공하고 아그립바 1세와 그의 아내 시프로스(Cypros)에게 받을 보장도 없이 200,000드라크마를 빌려 줄 수 있었던 점으로 봐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필로는 이후 가이우스 황제의 우상화 계획에 반발한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파견단을 이끌고 황제 Gaius에게로 갔었다. 여기에 대한 사실의 보도를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필로는 다섯 권의 책 속에서 카이우스 황제의 통치 하에서 유대인들이 겪은 환난에 대한 기사를 제공한다. 그는 또 카이우스 황제의 광기도 거론 하였는바 카이우스는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했고 권력을 이용하여 지독한 학정을 베풀었다. 필로는 카이우스 통치 하에서의 유대인들의 비참한 상태 및 알렉산드리아에 거하고 있는 동포들을 위해 로마로 파견 되어가서 수행한 자신의 대사직을 언급하였다. 그는 카이우스 황제 앞에서 자기 조상들의 율법과 관례를 옹호 하였는데 카이우스는 그를 비웃고 조소하였으며 자칫하면 그는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이처럼 필로는 여러 경로를 통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변호하고 증거하며 그들의 여러 사정들을 알리기 위해 많은 저서들을 집필하였고 그 작품들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 적잖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2, 필로의 종교 및 성경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였던 필로의 문헌 가운데는 오직 구약 성경만을 인용해서 그의 문헌들을 기록하였음을 엿 볼 수가 있다. 그는 외경(Apocrypha)과 위경(Pseudepigrapha)에 속하는 책 중에 어떤 것도 인용하지 않고 오직 구약 성경만을 인용할 정도로 구약 성경에 대한 경외심이 대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운데 필로는 율법(Torah)을 헬라의 철학적 용어 즉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을 사용하여 당시 지성인들에게 모세 오경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하였다. 분명히 필로의 종교는 유대교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종교성은 매우 독특했다고 할 수 있다.
* Allegory ; 그리스의 알레 고리아(allegoria ; 다른 이야기)에서 유래 한 말로 어떤 이야기의 추상적인 개념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다른 구체적인 대상을 이용하여 표현하고 해석하는 문학 형식을 말함. 해석 대상을 의인화 하는 경우도 많다. 알레고리를 사용한 해석 방법의 가장 큰 목적은 어떤 한 사람이 그 자신을 거룩한 성경 본문과 계속적으로 관련시킬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요점을 말하자면 그의 종교는 랍비들의 것과 분명하게 다른 점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종교성은 달랐다. 종교성의 차이에 대한 한 가지 단서는 모세가 받은 율법의 위치였다. 랍비들의 유대교에서는 율법 그 자체가 곧 목적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필로에게 있어서 그것은 더 위대한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도달하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필로에게 있어서 성경은 고대 사건에 대한 기록일 뿐 아니라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현재적 경험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1)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
필로가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을 취한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첫째는 해석하고자 하는 문헌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이미 낡고 쇠퇴한 것에 대한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셋째는 속된 이야기를 철학적 표현으로 미화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견해이다.
필로는 유대인이었다. 그의 종교는 유대교였고 철저하게 회당 중심의 유대주의를 표방했던 애국자였다. 그리고 그는 철저하게 구약성경을 경외했던 철학자로서 그가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을 사용한 진정한 목적은 성경의 권위를 높일 뿐 만 아니라 성경의 내용을 당시의 사람들에게 소개할 목적으로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 방법을 사용하였다고 생각 된다.
알레고리의 기본적 의미는 “다른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을 말한다. 성문서를 해석함에 있어서 알레고리는 해석하려는 본문의 말하는 바가 그 본문이 표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알레고리는 문자적 해석의 반대 입장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알레고리는 비 문자적 해석의 특별한 종류가 되는 것이다.
알레고리적 해석의 방법을 예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필로에게 있어서 성경은 율법과 마찬 가지로 고대의 사건에 대한 기록 일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현재적 경험으로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는 오래 전에 살았던 성경의 등장인물들의 경험이며 동시에 당신과 나의 현재적인 경험이라는 것이다.
태초에 첫 번째 사람(창 1;27)은 사람에 대한 플라톤적 이데아였고 그 첫 번째 사람은 이데아였기 때문에 결코 지상에 내려오지도 않았고 물질적 존재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창 2;7)을 땅의 먼지로 만드셨고 그에게 생령을 불어 넣으셨다.
그래서 이 지상의 아담은
물질적인 육체와 비물질적인 영혼의 복합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필로의 알레고리 해석 방법이 동원된다. 우리가 태어나서 어린 아기로 있는 동안은 우리는 전적으로 우리의 욕망들, 육체들에 전적으로 복종한다. 우리는 좀 더 자라서 청소년기의 성숙하지 못한 모습으로 인해 야기되는 여러 문제점에 이르게 된다. 청소년기를 여행하는 동안에 우리는 이성적 피조물이 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알레고리적으로 아담은 우리가 우리 모두가 소유한 지성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하와는 감각과 인식이라는 것이다. 지성은 처음에는 감각을 통하여 작동한다. 그러므로 지성과 감각 인식은 서로 연합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예는 에덴동산과 관련된 알레고리적 해석의 방법이다. 알레고리적으로 미덕을 상징하는 에덴동산에 쾌락을 추구하는 뱀이 들어왔다. 그러자 지성(아담)과 감각과 인식(하와)은 쾌락에 굴복했으며 그들은 미덕의 영토로부터 쫓겨남으로 인해 미덕을 상실했다. “아담”과 “하와”는 지각할 수 있는 네 개의 기본적 미덕들도 상실했다. 그 넷은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오는 네 개의 강들에 의해 대표된다(창 2;10-14). 만일 우리가 쾌락에 굴복하면 우리도 또한 미덕을 박탈당하게 될 것이다. 미덕을 상실했기 때문에 인간 아담은 절망에 굴복하였다는 것이다.
2) 성경을 철학의 상위 개념으로 이해한 필로
필로는 신학과 윤리학을 철학의 최고 분야로 보았고 철학이 모세의 계시된 율법 안에서 발견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지혜(wisdom, σοφια)와 분별(prudence, φρονησις) 혹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인간 생활의 규칙을 신학과 윤리학을 나타내는 말로 취하였는데 이것들이 다 모세의 율법에서 구체화된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철학의 최고 두 가지 분야에 대한 암시가 필로에 의해서 성경 구절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인용된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understanding, συνεσις)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wise, σοφος)와 지식(understanding, σεπιστημων)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신 4;6).”
이처럼 필로가 “지혜”와 “분별”을 구별 한 것은 지혜는 신성한 것 혹은 “확실한 원인들과 원리들”에 관한 지식이며, “분별”은 개인의 삶의 규칙과 마찬가지로 가정과 국가의 직무에 관한 규칙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것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지혜는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the way which leads to God)"이라고 진술한 필로는 지혜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다양한 올바른 인간 행동의 지식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았다.
지금까지 논의된 것들을 다시 정리하자면 필로는 스토아학파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서 지혜에 관해서 정의를 했지만 필로가 지혜를 “하나님께 대한 예배” 혹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혹은 “신적이고 인간적인 것들과 그것들에 관한 지식”이라고 정의한 것은 모세의 율법에 묘사된 예배와 예배를 찾아가는 길과 지식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필로는 인간 지식에 근거한 철학의 한계성에 대해서는 분병하게 인식을 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의 지식인 성경의 권위에 관하여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로는 특히 모세의 오경 연구에 몰두했고 그의 방대한 저서의 반 이상이 모세 오경을 해석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1)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인도하는 수단으로서의 성경
아마도 필로의 종교는 유대교로서 여느 랍비들과 종교적인 것에서는 차이가 없었으나 종교성에 있어서는 유대교 랍비들과 분명한 차이가 있는 듯이 보인다. 종교성의 차이에 대한 한 가지 단서는 모세가 받은 율법의 위치였다. 랍비들의 유대교에서는 율법 그 자체가 곧 목적이었으나, 필로에 있어서 그것은 더 위대한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도달하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의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이었다.
우리가 만일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연히 어떤 일에 대해서 당황하게 되었거나 또는 오류를 범했다면 성경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가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당황과 불안과 오류는 제거될 것이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인도하는 수단이 되며, 성경을 차량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그 차량을 타고 앞으로 나아간다. 필로는 이와 같이 성경을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이라는 영적 성숙의 성취에 이르는 필수적인 수단으로 이해하였다.
3,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필로의 주장
필로는 알렉산드리아의 헬레니즘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필로가 영적 성숙에 이르는 수단으로서의 성경과 성경의 무오성에 의심을 했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가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모세가 기록한 율법이 무오 하기 때문에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고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이 무오 즉 결함이 있다면 견고하지 않을 것이고 흔들릴 수 있을 것이며 움직일 수 있을 것이지만 율법이 무오 하기 때문에 여기에 가감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고 그래서 율법이 선포 된 날로부터 오늘날 까지 확고하게 남아있는 것이라고 필로는 주장하였다. 다시 말한다면 율법이 모세에 의해서 처음에 선포 된 날로부터 오늘날까지 확고하게 남아 있는 것은 율법이 처음부터 틀린 점과 오류가 하나도 없이 절대무흠하고 완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필로의 주장이다.
1)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
필로는 모세 오경과 구약 성경을 “성경(ιερος γραφαι)”라고 명시 하였고 무엇보다도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필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용한 말씀들을 영감된 것으로 인정하였다. 여기에 대한 증거로서 필로는 그의 저서에서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호 14;9)” 하는 호세아 선지자의 말과 “그들이 또 여호와께 묻되 그 사람이 여기 왔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그가 행구 사이에 숨었느니라 그들이 달려가서 거기서 데려왔다 (삼상 10;22-23)”는 사무엘의 말을 인용했다.
2) 필로가 보는 성경의 무오성
다음에 인용하는 구절들을 보면 필로가 성경에 대한 무오성을 확신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예언자(혹은 예언서)는 결점이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 말씀하 고자 하시는 것을 일러주는 하나님의 해석자이기 때문이다.”
필로에 의하면 하나님은 결점이 하나도 없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예언이나 그 예언이 기록된 예언서도 결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곧 예언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을 일러주는 하나님의 해석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거짓 증거가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류는 하나님의 능력과 일치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의 내용에 결점이나 오류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성경은 결점이 하나도없고 거짓 증거가 결코 없을 뿐만 아니라 오류도 전혀 없다는 것이 필로의 주장이다.
4. 필로의 저술들
필로는 많은 저서들을 기록했는데 그의 저술들을 몇 가지 범주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수필적 저술들 ; 변증학적 저술들
⑴ 플라쿠스에 대하여 혹은 플라쿠스에 대한 반박(In Flaccum) ; 이 작품은 널리 보아 역사적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플라쿠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회당을 강탈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유대인을 외국인과 이방인이라고 선언하고 그들에게서 시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들을 박탈했다. 계속되는 폭력 속에서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리아의 거주지에서 추방되었고 그들의 집들과 가게들은 약탈당했으며 폐허로 변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육체적으로 얻어맞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이들은 불에 태워 죽임을 당했다.
즉 티베리우스 황제가 세자누스 총독을 음모를 꾸민 혐의로 사형시킨 후에 총독으로 임명된 아울루스 아빌리우스 플라쿠스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글이기 때문이다. 플라쿠스는 32년에 총독이 되었으며 38년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유태인에 대한 대학살이 있었다. 그 후 플라쿠스는 38년 이후 어느 시기에 로마로 소환당한 후 로마 정부에 의하여 안드로스 섬으로 추방을 당하여 그곳에서 사형을 당했다.
필로가 이 글을 쓴 것은 플라쿠스가 죽은 뒤인 41년 이후라고 추정되는데 이 글의 성격은 유대인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은 누구나 같은 종류의 형벌을 받을 것이며 그것은 플라쿠스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작품으로 어느 면으로 보면 신학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필로는 플라쿠스가 유대인을 학살한 주범으로서 그도 똑같이 비참한 최후를 경험한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작품을 기록했다고 생각된다.
⑵ 가이우스에게 가는 사절단에 대하여(De Legatione ad Gaium) ;
플라쿠스에 대한 반박과 같이 이 작품도 역사적이며 동시에 신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을 역사적이라고 한다면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이 로마에 사절단을 보내도록 만든 알렉산드리아의 어떤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신학적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눈이 어두워서 현실만 가지고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 글의 대 부분이 칼리쿨라의 성격과 인품을 다루고 있으며 칼리쿨라가 스스로 신인 듯이 행동한 것에 대해서 조롱을 퍼부었으며 전 로마 제국이 칼리쿨라의 자기 신격화에 굴복을 했을 때에도 오직 유대인들만이 칼리쿨라의 신격화에 따르지 않았으며 그것이 유대인들의 유일신론적인 신앙에서 나온 것임을 자랑했다.
칼리쿨라는 유대의 총독인 페트로니우스에게 명령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의 신상을 세우게 한 장본인이다. 칼리쿨라는 스스로 제우스의 “나타난 모습”이리고 선언하여 자신을 신격화시켰다.
⑶ 관조하는(명상적인) 삶에 대하여(De Vita Contemplativa) ;
이 글의 원래의 제목을 문자적으로 번역한다면 “꿈(Vision) 또는 탄원자들의 삶에 대하여”라고 할 수 있다. 이 탄원자들의 꿈이 테라퓨타이(Therapeuetae)이다. 이들은 알렉산드리아의 근처에 있는 마레오티스라고 불리우는 호수가에 정착하여 사는 일원론적 교리를 가진 교단을 말한다. 아마도 작품은 엣센파와 같이 공동생활을 하는 테라퓨타이파의 명상적인 삶에 대하여 쓴 작품인 것 같다.
필로는 테라퓨타이파의 사람들이 무엇을 명상하였는지 묻는다면 그 대답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다. 테라퓨타이파의 어원은 “치료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도시의 의사들은 오직 신체만을 치료하는데 반하여 그들은 영혼을 치료한다는 뜻이다. 테라퓨타이파 사람들은 하루에 두 번씩 동틀 때와 해질 때에 기도했다. 그 기도 시간 사이의 낮 동안에는 온전히 실천적 영적 훈련에 전념했다. 또 그들은 거룩한 책들을 읽었다. 테라퓨타이파는 그들의 식사를 정해진 시기에 따라 먹었고 그들은 흰색의 옷을 입었다. 그들은 질서 정연하게 줄을 지어서 눈과 손은 하늘로 들고 그들의 하나님께 열납되도록 기도했다.
⑷ 모세의 생애(De Vita Mosis) ;
모세에 대하여 라는 저술은 두 분으로 나뉘어 있다. 모세에 대하여 제 I부는 성경의 기록들을 다소 직설적으로 반복하여 서술하고 있는 문헌이며 따라서 알레고리와는 거의 상관이 없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필로는 모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장 위대하고 가장 완벽한 이 사람의 이야기를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만 큼 멀리 알리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필로는 모세를 무시하는 그리스 사람들을 초보적 학문에 매여 있다고 꾸짖는다. 그는 그들이 “희극들이나 주색잡기의 허가장 조각이나 쓰면서 선한 사람에 대해서 가르치는 교훈들”을 제공할 용의는 없다고 공격하였다.
모세에 대하여 제 I부에서는 고의적으로 시내산 사건을 생략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모세에 대하여 제 II부에서는 시내산 사건이 기록된 것으로 봐서 아마도 이는 필로가 저술하고자 하는 어떤 저술 목적과 부합하지 않는 의도와 다르기 때문인 듯 하다.
필로는 모세에 대하여 제 II부 초두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 왕, 율법 수여자, 대제사장 그리고 선지자가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제 I부에서는 모세를 왕으로서의 역할로서 등장시켜 스토아 철학 이론에서의 왕의 역할을 말하고 있다. 왕으로서 적합한 자는 “구체화 되고 합리적인 율법”을 말로써 전달할 수 있는 자여야 했다. 이처럼 필로는 제 I부에서는 철학자적 왕으로서의 모세를 취급한 후 제 II부에서는 나머지 세 개의 직분인 율법 수여자, 대제사장, 그리고 선지자로 다루고 있다.
모세에 대하여 제 II부에 나오는 시내산 사건의 언급은 제사장으로서의 모세에 대해 서술한 단락에서 모세가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모세는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모두 깨끗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그는 먹고 마시는 것과 성적인 관계를 갖는 것을 삼갔다. 이렇게 삼가면서 준비한 후에 모세는 그 지역에서 가장 높고 성스러울 뿐만 아니라 길도 없고 근접하기 어려운 산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사십일을 지낸 후에 모세는 그가 산에 올라갔을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려왔다. 그 때 백성들은 그로부터 발산되는 눈부신 광채가 마치 태양광선 같아서 견딜 수 없었다(출 34;30-35). 라고 저술하고 있다.
모세에 대하여 라는 글이 어떤 사람들을 위하여 쓰여 졌는지를 살펴본다면 II 권의 한 부분에서 필로는 유대인들이 “융성하지는 않다 그러나 만일 밝은 미래를 향하여 참신한 새 출발이 이루어진다면 이 세계의 각 민족들은 그들의 독특한 방식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선조들로부터 전래된 관습도 모두 버리고 우리의 율법만을 숭배하는 길로 방향을 바꿀 것이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봐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고 있음을 쉽게 알 수가 있다.
2) 율법 강해 ; 율법의 해설
⑴ 천지 창조에 관하여(De Opificio Mundi) ;
이 글은 성경의 맨 처음에 나오는 창조에 관한 내용을 토대로 하고 있다. 즉 창세기 1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그 취급 방법은 대부분 플라톤적이다. 이 글에서는 유대 적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개의 주제로 서술 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무로부터 창조 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이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 사용하시거나 재료로 삼을 아무런 재료 즉 선재적 물질도 존재 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다르면 세계의 시작이란 있을 수 없으며 우주는 영원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 견해는 한편으로는 시작을 암시하는 창조를 실제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 만일 세계가 영원한 것이라면 -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세상을 시작 하셨다면 또한 하나님이 세상을 종결시킬 능력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는 사실상 능동적 존재 일수 없고 오직 수동적일 뿐이다.
다른 한 가지 주제는 세계가 필연적으로 영원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고 부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위하여 섭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세계는 보살핌을 받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창조 이후에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되었다는 불경건한 관념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와 섭리는 이 글을 형성하는 주제들이다.
필로는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사용하여 쾌락(뱀)이 어떻게 감각(이브)에게 작용하여 지성(아담)을 무디게 만들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필로는 이상적인 사람이며 영적인 사람인 “첫 번째 사람”과 그 첫 번째 사람의 물질적 복사판인 아담을 구분하고 있다. 필로의 알레고리에 있어서 아담은 곧 지성(mind)으로 표현된다. 즉 아무런 재능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다고 특별한 결점이 있는 것도 아닌 일반적인 보통 지성을 말한다.
필로는 이 글을 모세가 가르친 다섯 가지의 중요한 교리에 대한 언급으로 끝맺는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 ; 이것은 무신론에 대한 반박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단일성 ; 이것은 다신론에 대한 반박이다.
셋째는 세계는 시작된 때가 있으며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넷째는 세계는 통일체이다.
다섯째로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를 통하여 세계를 돌보신다.
⑵ 아브라함의 이주에 관하여(De Migratione Abrahami) ;
이 글은 “창조에 대하여”의 연이은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후속편은 창세기의 기록 내용과 출애굽기에 있는 율법 사이의 직접적 연관을 보여주는 형태를 띠고 있다.
필로에게 있어서 모세 오경의 그리스어 번역이 νομος 즉 법이라는 사실이 가진 특이성을 설명하는 것이 하나의 문제점이었다. 왜냐하면 모세 오경속의 창세기 이야기는 하나의 사건서술이지 율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창세기를 어떻게 하면 법이라고 하는 부류에 논리적으로 넣을 수 있을까? 필로가 제시한 대답은 “특별한 율법들” 즉 구체적이고 문자로 표현된 요구들과 소위 문자화 되지 않은 자연의 법을 구별하는 것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스토아학파의 범주들을 사용하고 있는 필로는 문자화되지 않은 자연의 법을 관념의 세계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기록된 율법은 문자화 되지 않은 자연의 법의 모방 또는 대치물로 보았다. 그래서 창세기는 자연의 법에 대한 책이므로 율법서에 포함된다고 필로는 주장하였다.
족장들은 구체화 되고 합리적인 율법이라는 것인데 이 표현 속에 들어있는 관념은 왕권에 대한 헬레니즘적 관념과 관련이 있으며 왕은 법의 화신(化身)이며 그가 행하는 것은 무엇이나 합법적인 법이다. 그런 군주가 법령을 발할 때 그 법령은 음성으로 나타날 것 이다라는 견해가 숨어있다. 이처럼 족장들은 태어날 때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자질들을 통하여 화육된 법의 탁월함을 얻었다.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자질들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족장들의 자질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 대한 자료는 두 부분으로 나뉘게 되는데 첫 번째는 아브라함의 경건 즉 하나님에 대한 그의 관계를 말하고 그리고 두 번째는 그가 사람들과 맺었던 관계를 묘사하는 네 가지의 미덕을 소유 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 네 가지는 스토아학파의 기본 덕목 - 정의, 용기, 신중 그리고 절제 - 을 말한다. 경건에 대한 부분에서 필로는 아브라함을 교훈과 동일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그리고 하나님께 도약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필로의 견해를 피력하는 요약판이라고 할 수있다.
아브라함이 세 명의 방문자들을 그의 집으로 인도한 일에 대해서 창세기 18;1로 가서 필로는 우리에게 그 집이 아브라함의 내적 존재였다고 확신시킨다. 하나님(로고스의 형태로)은 인간의 내적 존재로 들어와서 인간들이 그들의 내적이며 영적인 집안을 정돈하도록 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창세기 18;2-3에서 아브라함이 그의 육체적 집안을 정돈한 것과 같이 질서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 진다. 우르에서 하란으로 이주한 것은 아브라함이 교훈에 의해서 진보하는 한 측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 대한 다양한 성경의 내용들은 모두 이와 비슷하게 교훈에 의한 진보라는 주제에 연결시킬 수가 있다. 아브라함의 목표는 완전함에 이르는 것 즉 신성(神性)을 보는 것이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고 하였다(창 12;1). 그리스어로 “나타나다”는 “보다”의 수동형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여졌다”는 것은 사람들이 실제로 신적인 영상을 받을 수 있고 또 마땅히 받을 준비를 해야만 한다는 교훈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받을 수 있는가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다고 필로는 말하고 있으며, 아브라함에 대한 가장 영광스러운 칭찬은 창세기 26;5절에서 발견된다고 하였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했다. 그가 그렇게 행한 것은 기록된 말씀에 의해서 깨우친 것이 아니라 문자화 되지 않은 자연의 법으로부터 배운 바의 귀결이다. 하나님 백성의 첫 번째 구성원이자 기초를 수립한 사람의 삶은 그와 같이 법을 준행하는 것이다.”
⑶ 이삭에 관하여 (현재는 분실되었음)
⑷ 야곱에 관하여 (현재는 분실되었음)
⑸ 요셉에 관하여(De Josepho) ; 생략
⑹ 십계명에 관하여(De Decalogo) ;
이 글은 “아브라함에 대하여”와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인 경건성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기본적 미덕들 사이에 균형을 가진 작품이다. 첫 부분의 다섯 계명은 경건성을 반영하며, 둘째 부분의 다섯 계명은 기본적 미덕들을 반영한다. “십계명에 대하여”에서는 시내산 사건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시내산의 이름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필로는 시내산을 계시의 장소로서만 생각하였던 것같다. 그래서 마치 성스러운 산은 존재 하지 않는 듯이 기록하고 있다. 필로가 “십계명에 대하여”를 저술한 목적은 십계명은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그의 입을 통하여 주신 것이다라고 하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⑺ 특별 법률들에 관하여(De Pecialibus Legibus) ;
필로는 이것을 네 권으로 나누어 다루고 있다. 첫째 권은 제사에 대하여 관심을 집중 시키고 있다. 즉 성전, 제사장들, 레위인들, 대 제사장, 그리고 제사 제도 등이 성경에서 다루어 진 것과 같이 서술되었다. 둘째 권에서 필로는 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는 것에 기초해서 맹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다음에 필로는 안식일, 월삭, 그리고 해마다 지키는 다른 절기들을 설명하고 있다. 둘째 권은 처음의 다섯 계명들을 불순종 할 때의 벌과 순종에 대한 보상은 그 미덕 자체임을 밝히는 것으로써 끝맺는다. 셋째 권은 “너희는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에 기초하여 결혼의 순결과 성적 탈선의 금지를 먼저 다루고 있으며, 그 다음에 살인과 과실치사의 주제로 이어지고 있다. 거기에는 과실치사 자에 대한 도피성에 대한 단락도 포함되어 있다(민 35;11-12, 신 4; 41-43). 넷째 권은 십계명의 나머지 계명들을 다루고 있다. 즉 “너는 도적질 하지말라” “너는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너는 탐내지 말라” 이것들 중에서 첫 번째와 관련해서 특히 밤에 하는 도적질을 통한 손실 등에 대한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거짓 증거라는 제목아래 필로는 군중에게 아부하는 것, 점치는 자들의 속임수 그리고 재판장들의 의무에 대해 논하고 있다. 탐심이라는 제목 아래서는 음식에 대한 욕망의 조절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
⑻ 미덕에 관하여(De Virtute) ;
여기서는 필로가 기본적 미덕들의 일반적인 열거 - 즉 정의, 사려깊음, 용기 그리고 인내 - 에 집착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글의 구성 부분은 다음과 같은 소제목이 붙어있다. “용기에 대하여” “인류애에 대하여” “회개에 대하여” 그리고 “고귀함에 대하여”이다. 이런 주제들은 사람과 그의 이웃 사람들에 대한 관계를 다루고 있다. 예를 든다면 “용기에 대하여”는 먼저 평안할 때의 용기라는 미덕 예컨대 환자나 가난한 자가 그의 물질적 결핍을 극복하는 것 같은 내적 용기를 치켜세운다. 또 전쟁에서의 용기도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 대한 주된 자료를 신명기 20장 - 병역 의무로부터의 면제에 대한 내용 -과 민수기 25;1-8절 그리고 31;1-18(미디안 사람과 모압 사람과 같은 적에 대한 내용)에서 얻은 것이다.
⑼ 상급과 징벌에 관하여(De Praemiis et Poenis) ; 생략
3) 풍유적 해석(Allegory)에 따른 분류에 속하는 저술들
⑴ 비유적 해석(3권) ; 제1권은 창 2;1-17 제 2권은 창 2;18-3;1 제 3권은 창 3;8-19
⑵ 스랍 천사에 관하여 (창 3;24와 4;1)
⑶ 아벨과 가인의 재물에 관하여(창 4;2-4)
⑷ 더 나쁜 자가 더 선한 자를 공격 한다 (창 4;8-15)
⑸ 가인의 후손과 귀양 (창 4;16-25) ⑹ 거인들에 관하여 (창 6;1-4)
⑺ 하나님의 불변하심에 관하여 (창 6;4-12) ⑻ 농업에 관하여 (창 9;20)
⑼ 노아의 재배자로서의 일에 관하여 (창 9;20) ⑽ 술 취함에 관하여 (창 9;21)
⑾ 금주에 관하여 (창 9;24) ⑿ 언어의 혼동에 관하여 (창 11;1-9)
⒀ 아브라함의 이주에 관하여 (창 12; 1-6)
⒁ 누가 신령한 것들의 상속자 인가 (창 15;1-18)
⒂ 예비적인 연구들에 관하여 (창 16;6-14)
4) 주석서
⑴ 창세기에 대한 질의응답 ⑵ 출애굽기에 대한 질의응답
5) 그 외의 논문들
⑴ 세상의 불 파괴성에 관하여 ⑵ 모든 선한 자는 자유 하다는 것
⑶ 신의 섭리에 관한 것
⑷ 알렉산더(미련한 짐승들이 이성적인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하여)
5. 필로의 저술들이 성경해석에 미친 영향
septuagint는 오랜 디아스포라 상황에 처해 있었던 유대인들이 그들의 고유한 언어인 히브리어를 말할 수 없고 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헬라적인 문자에 익숙한 공동체에 맞추어서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기록된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 되었고 유대의 범위 안과 밖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필로의 저술들 안에서 그려지고 있는 여러 공통적인 요인들과 연결되어지고 있다. 이유는 필로의 저술들이 포함하고 있는 유대 땅의 안과 밖의 지리적, 언어적 특성들이 당연히 우리로 하여금 신약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하는 면에 있어서 도움을 주는 문학 형태와 사상에서 필로의 저술들이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필로에 관한 이상의 연구 내용을 종합해 볼 때 필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열렬한 유대인 애국자로서 외경(Apoccrypha)과 위경(Pseudepigrapha)에 속하는 책 중에 어떤 것도 인용하지도 않고 언급조차 하지 않고 구약성경만을 언급할 정도로 구약 성경에 대한 경외심이 대단하였다.
그것은 그가 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라는 구약 자체의 증언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과 철학을 성경과 신학의 시녀로 인식한 필로는 율법(Torah)을 헬라의 철학적 용어로 해석함으로써 당시 지성인들에게 모세 오경의 가치를 증명하고 성경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알레고리적 해석방법을 취했다. 뿐만 아니라 필로는 성경이 말하는 성경의 신적 영감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성경 자체가 증거 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인 성경의 무오 교리를 완전히 확신하고 있었다.
또 유대인들의 종교를 위협하는 세력들에 맞서서 그리고 그 유대인들을 변호하고 그 종교를 지키는 일에 헌신한 것을 기록한 그의 문헌들 속에서 표현되고 있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여러 외적인 상황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이 신약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현재에까지 미치는 영향력은 크다 할 것이다.
< 신학함에 있어서 요세푸스와 필로가 중요한 것은 이들이 에수그리스도와 동시대의 인물이라는 점과 그들의 저서들을 통해 성경의 배경을 추적하고 이해 하는데 다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 필로는 한마디로 모세 신봉자로서 모세를 완벽한 사람으로 이해했고,
모세오경을 가장 중시 여겼다.
*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아볼로"(행 18:24)가 필로의 제자로 추측된다
(알렉산드리아 출신, 구약성경에 능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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