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log.kakaocdn.net/dn/Jz97Y/btra33MmLNo/M4eHlhT9w48b2YcWeKTq80/img.jpg)
요세푸스의 삶과 저서들
목차 1. 요세푸스 - 역사가로서의 삶 2. 요세푸스의 저술들에 나타난 역사해석 1) 하나님의 섭리에 관해서 2) 예언과 성취에 대한 요세푸스의 주장 3) 요세푸스가 말하는 의인과 악인 4) 유대 변증가로서의 요세푸스 5) 요세푸스의 자서전 요약 6) 아피온 반박문 요약 3. 요세푸스의 작품들이 신약성경 해석에 주는 영향력 나가는 말 |
1. 요세푸스 - 역사가로서의 삶
요셉 벤 맛디아(Joseph ben Matthias)라고도 불리는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100)는 사제요 군인이며 학자였다.
베스파시안 장군에게 투옥 당한 후 베스파시안 장군이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한 후에 가울과 스폐인에서 봉기가 일어났으나 곧 진압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 때 사람들은 “검을 닮은 혜성”이 하늘에 멈춰 있는 것을 관찰했다. 요세푸스는 십자가처형 대신에 구금되었다. 네로는 A,D 69년 6월경에 죽고 A,D 69년 1월에 네로를 몰아내었던 갈바가 네로의 계승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 때 당시 큰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비텔리우스와 오토가 권력 투쟁을 벌여서 오토가 패배 하였고 비텔리우스가 권력을 얻었지만 대중의 인기는 없었다.
이것을 베스파시안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고 요세푸스의 예언은 A,D 69년 7월에 사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요세푸스는 석방되었고 로마의 시민권을 얻고 이집트인 아내를 맞이하게 되었다. 동족을 배신했던 요세푸스는 그러나 로마인들의 신임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티투스 - 베스파신안의 아들 - 의 반년 가까이 걸린 예루살렘의 포위 공격이 있을 때 그는 티투스의 통역관으로서 티투스가 유대 민족을 이해 할 수 있도록 조력하였고 예루살렘의 봉기 자들에게 투항하도록 설득하였다. 이리하여 이전에 유대인의 사령관 이었던 요세푸스는 플라비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져서 티투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라는 로마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는 제사장 가문인 마타니아스와 왕족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예수의 활동시기 몇 해 후이며 유대 땅을 로마가 점령하고 있었을 당시인 A,D 37년경에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으며 엘리트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그는 유대교 제사장으로서 율법과 종파 들을 연구했고 유대인들의 대표자로 로마에 파견되기도 했다.
요세푸스는 유대교의 종파들을 연구함에 있어서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그리고 엣세네 파에 대해서 소상히 그들 종파의 내력과 활동 범위와 종교 사상들을 소개하였다.
A,D 64년에 네로 황제에 의하여 인질로 잡혀 있던 여러 사제들에 대한 석방을 중재하기 위해 그는 유대인들의 대표단의 일원으로 로마에 갔었다.
네로 황제에게 인질로 잡혀 있었던 사제들과 함께 그의 고국으로 돌아 왔을 때 그의 나라는 로마의 집정관 게시우스 프로루스에 대한 봉기로 엄청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요세푸스는 게세우스 프로루스가 그래도 온건한 인물이며 혁명의 결과는 절망적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의 로마 주둔군에 의해 거의 전멸되다시피 했던 젤롯당과 시카리파의 그룹에 속하는 민족 주의 그룹들이 갈릴리에서 일으킨 봉기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전의 관리들은 그를 갈릴리로 보냈고 베스파시안 장군의 지휘를 받고 있던 로마 군대가 주둔한 근처에 저항 조직을 건설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는 갈릴리에서 유일한 군사 지도자는 아니었다. 이미 거기에는 기살랴의 요한이라 불리는 사람이 이미 시민군을 조직해놓고 봉기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두 지도자는 사사건건 서로간의 불화로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로마군과 싸우기 보다는 서로의 갈등을 조정하는 일로 많은 시간을 보냄으로써 로마군의 첫째 공격목표인 세포리라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를 장악하는데 실패했다. A,D 67년에 그들은 세포리로 통하는 길목을 차단당하고 요세파타에서 포위되었으며 베스파시안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 받았다.
요세푸스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로마에 대항해 싸우는 군사 지도자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전쟁의 와중에서 로마에 항복한 뒤 유대인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로마 군인들의 편에서 지켜보아 유대인들로부터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했으며, 로마로 건너가 플라비우스 가문 황제들의 보호를 받고 저술 활동을 하면서 여생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요세푸스는 정치가, 외교관, 군사 전략가, 종교가, 저술가 그리고 예언가등으로 변화무쌍하게 살았지만 오늘날 그는 유대역사가로서 더 잘 알려져있다. 이것은 그가 남긴 네 권의 책 때문이다.
요세푸스의 대표적인 네 권의 책은 요세푸스의 자서전격인 “생애(Life)", "유대 전쟁사(Jewish War)”, "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 "아피온 반박문(Against Apion)"을 말한다.
“유대 전쟁사에”에서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 장군에게 항복한 뒤 갈리리를 방어했던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그들은 동굴에 숨었고 항복하기 보다는 제비를 뽑아 서로를 죽여가면서 최종적으로 남은 사람은 자결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 운명적인 제비뽑기에서 요세푸스 자신이 마지막으로 선택되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마지막이 어떠했음을 알리고 유대전쟁의 경과와 결과를 남기기 위한 위대한 신적인 간섭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결하지 않고 로마군에 항복하였다.
요세푸스가 예언가로 회자되는 것은 베스파시안 장군에게 투항한 뒤 감옥에 투옥 된 후에 그는 자신을 에언자로 소개했다.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강림을 언급한 것으로 믿고 있던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 편까지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멸하리로다(민 4;17-19)”의 예언을 베스파시안에게 적용하여 “이스라엘을 일으켜 세울 통치자가 유대인이라고 누가 말하였는가?라고 간언하며 그가 로마의 황제가 될 운명이라고 단언하였다.
요세푸스가 예언가로 회자되는 것은 베스파시안 장군에게 투항한 뒤 감옥에 투옥 된 후에 그는 자신을 에언자로 소개했다.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강림을 언급한 것으로 믿고 있던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 편까지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멸하리로다(민 4;17-19)”의 예언을 베스파시안에게 적용하여 “이스라엘을 일으켜 세울 통치자가 유대인이라고 누가 말하였는가?라고 간언하며 그가 로마의 황제가 될 운명이라고 단언하였다.
이 책들 중 “유대 전쟁사”와 “유대 고대사”는 그의 대표적 저서들로 구약 시대부터 기원후 1 세기까지의 유대교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특히 기원전 400년경부터 기원후 100년경까지의 유대 역사를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요세푸스의 저서들은 유대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하고 신뢰할 만한 정보를 상당히 제공하지만 그 내용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는 난점이 있다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역사 서술 이유 중의 하나가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왜곡된 주장을 논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L, L Grabbe에 의하면 오늘날 우리가 요세푸스의 역사기록을 이해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 몇 가지를 항상 고려해야 한다고 한다.
1) 요세푸스가 사용한 자료들은 무엇인가?
2) 요세푸스의 기록들은 그리스 - 로마의 역사가들, 쿰란문서, 고고학적 자료등과 어떻게 다른가?
3) 요세푸스의 작품들에 나타난 저술 목적과 개인적인 관심 혹은 편견은 무엇인가?
4) 요세푸스의 저서들에서 같은 사건에 대한 두 종류의 기록이 발견되는데 그것들의 차이는 무엇 이고 왜 다르게 기록되었는가?
왜냐하면 다른 역사가들처럼 요세푸스 자신도 역사 서술 방식과 해석 방법 그리고 편집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요세푸스의 역사기록 이해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요세푸스는 역사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그는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해석했는가? 그의 역사 해석에 나타난 주요 사상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서 본 발제는 요세푸스의 주요 역사서인 “유대 전쟁사”와 “유대 고대사”에 나타나 있는 주요 신학적 개념과 주제들을 살펴보고 “생애”와 “아피온 반박문”의 중심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요세푸스의 저술들에 나타난 역사해석
1) 하나님의 섭리
요세푸스의 역사 해석에는 하나님이 전제 되어 있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분으로 묘사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자요 주관자며 통치라고 믿었다. 또한 그는 이 하나님이 안전하고 치밀하며 정의로운 분이라고 여겼다. 요세푸스는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이 역사를 통해서 나타나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에 의해서 운행 되는 역사는 완전하고 정의로운 그의 뜻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에피큐리아 학파의 신관을 비판 하면서 하나님과 역사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에피큐리아 학파는 섭리를 인간의 삶 밖으로 내동댕이친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만사를 돌보시고 우주는 바로 그 복되고 영원불멸한 분에 의해서 통치되고 지속 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세계가 통치자나 관리자 없이 저절로 운행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세계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없다면 세계는 항해사가 없어 바람에 의해 침몰되는 배나 기병이 없어 전복되는 전차와 같을 것이다. 따라서 세상이 어떤 섭리 없이 운행된다면 엉망이 되어 파멸하고 무로 돌아갈 것이다. 『유대 고대사』10, 278-279
요세푸스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간여를 섭리(Providence)라는 용어로 묘사하는데 하나님의 섭리는 그의 역사 해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도 아마도 가장 특징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그에 의하면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기록으로 하나님은 선한 자에게 복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는 벌을 내리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요세푸스가 말하는 “섭리”란 “주의 깊은 보살핌” 혹은 “사전 계획이나 사전 의도”등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출애굽 시대에 홍해에서 이집트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은 뒤 그들의 무기로 무장하고 시내산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시각에서 묘사하고 있다.
"그 다음날 모세는 이집트인들의 무기들을 한데 모았다. 이 무기들은 해류와 바람에 밀려 히브리인들의 진영까지 오게 되었는데 바람은 바로 그 방향으로 불었다. 따라서 모세는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면서 거두어 들였다."『유대 고대사』2, 349
적군의 무기가 바람이나 물결의 출렁임과 같은 자연 현상에 의해서 이스라엘 진영으로 떠내려 온 것은 우연의 일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주의 깊은 보살핌의 결과이자 미리 계획된 결과라는 것이다. 요세푸스는 이스라엘 민족이 당하는 시련도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하였다. 요세푸스는 또한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는 고통을 당했을 때 요셉이 감옥 안에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자신을 인도하고 있다는 증거를 알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도 하나님의 의도된 계획의 결과로 이해했다. 그는 로마에 대항해서 전쟁을 한 이유와 그들이 로마에 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힌 그의 책 “유대 전쟁사”에서 로마가 이긴 것은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이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군사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낸다.
예를 들면, 그는 아그립바 2세가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유대 백성들에 행한 긴 연설을 통해서 로마는 헬라나 게르만등 주변의 많은 강대국들을 굴복 시켰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한다. 또한 그는 로마 군대를 소개할 때에 로마 군인들은 일사 분란하고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며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력까지도 강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정복당한 사람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고 그들의 통치에 순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세푸스는 이렇게 강한 로마가 거대한 제국을 건설 할 수 있었고 유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와 같은 친 로마적 견해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반역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수단은 하나님의 도움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로마인들의 편에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움 없이 그렇게 광대한 제국이 건설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 전쟁사』2, 390.
"그대들은 지금 로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 전쟁사』5, 378.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에서 “섭리”라는 용어 대신에 “운명(destiny)”
"숙명(fate)" “행운(good fortune)"등 비 인격적인 힘을 지칭하는 결정론적
언어들을 주로 사용했다.
"그들은 아나누스가 매시간 도처를 순시하며 경비병들을 독려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다른 날 밤에는 그렇게 행해졌었지만 그날 밤은 생략되었다. 이것은 아나누스의 나태함 때문이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명령 때문이었다. "『유대 전쟁사』4, 297.
"그리하여 베스파시안의 행운은 그가 원하는 대로 모든 곳에서 따라 다녔으며......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섭리가 없이는 통치권을 장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대전쟁사』4, 622.
"그러나 성전은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에 의해 불에 타 멸망하기로 판결되어졌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제 그 운명의 날이 왔다." 『유대 전쟁사』6, 250.
요세푸스가 하나님의 섭리 대신에 이와 같은 결정론적 용어들을 사용한 것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할을 제거하거나 약화 시키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유대 전쟁사 2, 360 : 4, 297 : 4, 622 : 6, 250 참조)
오히려 이런 용어들을 통하여 요세푸스는 역사에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의지와 뜻이 나타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했던 것 같다.
2) 예언과 성취에 대한 요세푸스의 주장
요세푸스는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예언에 따라 성취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예언과 성취가 가능한 것은 인간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에피큐리아 학파를 비난하면서 하나님의 섭리와 예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리하여 다니엘의 예언을 놓고 볼 때 에피큐리아 학파는 하나님이 인간사에 어떠한 섭리도 행사하지 못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진리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만일 사실이라면 즉 세계가 기계적 필연에 의해서 운행된다면 우리는 모든 일이 그의 예언에 따라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유대 고대사』10, 280.
요세푸스에게 있어서 예언이란 미래에 대한 예측(prediction)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을 통해서 미리 알려 주시고 그대로 성취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세푸스는 역사를 기술할 때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주어졌던 예언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에 관심을 보인다. 이제 요세푸스가 언급한 예언과 성취의 실례들을 몇 가지 살펴보자. 먼저 “유대 고대사”에 의하면 야곱은 죽기 전 그의 후손이 가나안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예언했다.(유대 고대사, 2, 194)
요세푸스에게 있어서 미래에 대한 예언은 하나님의 약속을 대체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예를 들자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뒤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창 22;15-19)에 대해서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번창하여 열국을 이루고 매우 부유해지면 족장들에 대한 영원한 기 억이 있을 것이고 가나안을 무력으로 정복 한 뒤 만인의 부러움을 얻게 될 것이라고 예언 하셨 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그러한 축복의 약속을 들으면서 서로 껴안았다.” 『유대고대사』1, 235-236.
또한 모세의 탄생은 미래사를 정확히 예측할 줄 아는 이집트의 한 서기관의 예언의 성취이며, 이것이 바로에게 알려졌을 때 히브리 아동들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출애굽 사건은 모세의 예언대로 차례로 진행되었고(유대고대사 2, 292-293) 당시 이집트인들에게 내린 열 가지 재앙도 모세의 예언대로 이루어 졌는데 여기에서 모세는 미래를 예견하는 예언자로 묘사 되었다. 이처럼 예언의 성취로 보는 필로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⑴ 솔로몬의 탄생과 그의 성전 건축은 다윗에게 주어진 예언의 성취였다.
(유대 고대사 8, 109-110)
⑵ 요세푸스는 엘리야(유대 고대사 8, 418-420), 이사야(유대 고대사 11, 5-6), 에레미야 (유대 고대사 10, 142 ; 11,1)등 구약 예언자들의 미래에 대한 예언도 그대로 성취되 었다고 언급한다.
⑶ 다니엘은 다른 예언자들과는 달리 미래를 예언할 뿐만 아니라 그 예언의 성취 시기까 지도 정확히 언급했고 다른 예언자들은 늘 불길한 일만을 예언했지만 그는 길한 일을 예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유대 고대사 10,268)
요세푸스는 성서적 의미의 예언자들의 활동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들과 함께 사라졌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미래를 예견하는 예언 활동은 폐르시아 시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 믿었다.(천사무엘, 『구약 외경의 이해』(천안; 한국 신학 연구소, 1996), p. 178-179. )
마카비 일서에 의하면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들 이후 예언이 중지 되었다.(4;46, 9;27, 14;41 참조) 요세푸스도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 자이자 과거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견하면서 성경을 기록한 예언자들의 활동이 중지 되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미래를 예견하는 예언의 능력은 소위 “예언의 중지” 이후에도 계속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견해는 랍비 문서에도 나타난다.
“유대 전쟁사”에서도 예언과 성취는 요세푸스의 주요 관심사였다.
예를 들자면 요세푸스는 자신이 로마에 항복한 이유가 하나님이 꿈을 통해서 보여준 유대인들의 재난과 로마 황제들의 미래에 대한 예언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로마에 대한 유대인들의 항쟁을 이끌었던 열심당원들은 유대인들이 분란을 일으키고 성전을 더럽히는 날이 오면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성전은 불에 탈 것이라는 예언자들의 예언을 무시했고 그 예언이 어떻게 성취 되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요세푸스는 자신도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요타파타가 47일만에 로마에 의해 함락될 것이고 자신이 로마의 포로가 될 것임을 예언했다고 한다.
그는 또 베스파시안 장군이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요세푸스가 예언의 성취에 대해서 강한 집착을 보인 것은 요세푸스는 하나님이 미래를 알려주신 이유가 인간으로 하여금 지혜롭게 미리 대처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3) 요세푸스가 말하는 의인과 악인
앞에서도 언급을 하였지만 요세푸스가 역사를 읽는 이유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교훈을 깨닫는 것이라고 했다. 즉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자들은 모든 면에서 번성하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자들은 기능한 것도 불가능하게 되며 좋은 것도 재난으로 바뀌게 된다는 교훈을 얻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역사를 알고 싶어 했던 사람은 이 역사로부터 특별히 배울 것인데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고 잘 제정된 율법을 범하지 않는 자들은 모든 일에서 번성 할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보상으로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반면에 그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실행 가능한 것들도 실행 불가능하게 되며 열심히 추구했던 선한 것들도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불행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유대 고대사 1,14)
역사에는 의인이 복을 받고 악인이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법칙이자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나 있는데 역사를 읽는 독자들은 이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를 통하여 악인과 의인에 대한 교훈을 주려고 했던 요세푸스는 유대 역사를 기술할 때 영향력을 행사 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Feldman 에 의하면 요세푸스에게 있어서 역사는 전기로 변화 되었다. 그리하여 어떤 부분은 이스라엘 전체 역사가 아니라 개인의 활동에 대한 전기적 기록이다. 따라서 요세푸스는 등장인물의 심리 상태, 행동의 동기, 감정, 미덕 등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등장인물들을 의인과 악인, 본받아야 할 인물과 본받지 말아야 할 인물 등으로 묘사하면서 독자들에게 주고자 하는 인과응보의 도덕적 교훈을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출애굽 사건 때의 열 가지 재앙을 살펴보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인간이 하나님을 거스리는 일을 할 때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죄의 댓가를 치러야만 한다는 교훈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 (유대 고대사 2, 293) 그리하여 이집트인들은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는 악인으로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은 구원받는 의인으로 묘사하였다. 또 요세푸스는 다윗과 나발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나발을 하나님의 벌을 받는 악인이자 본받지 말아야 할 인물로 그리고 다윗을 의인이자 본받아야할 인물로 묘사하였다. (유대 고대사 6, 300-309)
요세푸스는 성서의 영웅들이나 역사적 위인들, 의인들이나 본받아야 할 사람들의 위대함을 묘사할 때 그들의 미덕을 부각 시키면서 찬양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미덕이란 지혜, 용기, 절제, 정의, 경건, 온유, 친절, 우정 등인데 이들 중 처음 네 개는 플라톤이 제시한 이상적 철학자 왕이 가져야 하는 덕목이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⑴ 예언자를 통해서 자신이 전사할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도 전쟁에 나가 죽은 사 울은 정의, 용기, 지혜 등의 미덕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 고대사, 6, 346)
⑵ 다윗은 왕이 갖추어야 할 모든 덕망과 인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가진 덕목은 용기, 사리분별, 신중, 온유, 친절, 정의, 인정, 경건 등이었다. (유대 고대사 , 7, 390-391).
⑶ 로마 장군 티투스는 용감하였으며, 부하들에 대한 배려, 적에 대한 자비 등의 덕목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 전쟁사, 5, 310-319)
반대로 요세푸스는 독자들이 본받지 말아야할 악인들이나 피해야 할 악한 행동을 묘사할 때는 악덕을 부각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자만, 탐욕, 육욕, 야심, 시기심, 불 경건, 억측, 비방, 중상모략, 율법 위반, 도덕적 타락, 신성 모독 등을 자행했다고 비난했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⑴ 가인은 특히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아우를 살해했다. (유대 고대사 1, 53)
⑵ 요압은 야심이 있어서 음모를 꾸며 살인했다. (유대 고대사 7, 37-38)
⑶ 웃시야는 교만하여 하나님께 범죄하고 문둥병에 걸렸다. (유대 고대사, 9, 222-223)
⑷ 헤롯은 비난과 중상모략으로 미움과 시기심 그리고 분노를 이기지 못해 아내와 친구, 자식 까지도 죽였다.
요세푸스는 이처럼 성경의 등장인물들을 의인과 악인이라는 이분법에 의하여 일괄적으로 분류하고 의인들에게는 악덕이 전혀 없었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사울과 다윗처럼 회개 하면 의인의 대열에 합류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4) 유대 변증가로서의 요세푸스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의 첫 부분에서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왜곡된 역사 기록을 바로 잡으려는 데 있다고 밝혔다.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심이나 로마에 대한 과잉 충성심 때문에 역사 기록을 유대인들에 대한 중상모략의 수단으로 이용 한 것에 대한 대응으로 자신의 역사책들을 집필했다는 것이다. 요세푸스가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서 역사를 재해석하고 기술 했다는 것은 그의 저서인 「아피온 반박문」처음(1,1)과 「유대고대사」서문에서도 발견된다.
이것은 요세푸스가 유대 종교와 역사를 변증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나타낸다.
즉 유대교의 관습이나 역사 기록의 왜곡을 통하여 야기되는 유대교와 유대인들에 대한 오해나 비하를 막고 유대 종교는 존중할 만하며 매력적인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자신의 작품들을 썼다는 것이다.
요세푸스의 주요 저작 목적이 유대교에 대한 변증이라고 해서 그리고 이에 관한 내용이 그의 작품에 강하게 나타나 있다고 해서 그가 쓴 역사가 변증을 위한 위조나 역사성이 결여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저서에는 유대 종교와 역사 그리고 관습과 전통을 변증하고 변호하려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요세푸스는 유대 종교를 변증하고자 했다. 이를 위하여 그는 무엇보다도 유대교의 하나님을 당시 헬라인들에게 친숙한 용어인 섭리, 운명, 필연 등을 사용하면서 표현했다. 또한 이 하나님이 정의를 사랑하고 도덕을 중시하며 질서와 법칙을 가지고 역사를 운행하고 헬라의 신들과 비교하여 결코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리고 헬라 철학에 여러 학파들이 있는 것처럼 유대교에도 여러 학파들이 있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 사두개파, 바리새파, 엣세네파 등 여러 학파들이 있을 만큼 유대교는 연구할 만하고 고차원적인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였다.
둘째로 요세푸스는 유대 역사가 오래 되었고 이에 대한 기록은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사람들이 신뢰하는 로마 법령이나 편지들, 특히 친유대 문서들을 인용하거나 언급하기도 하였다.
셋째로 요세푸스는 유대인들과 그들의 권리를 변호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는 헬라나 로마인들처럼 유대인들도 훌륭한 전승과 제도를 가지고 있고 유대인들이 실천하는 전통적인 관습도 결코 야만적이거나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합리적이며 이상적이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5) 요세푸스의 자서전
(1) 나의 가문 요약
나의 가문은 족보를 추적하여 오래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조상들이 제사장 이었으므로 미천한 가문이 아니다. 민족들마다 각기 다른 근거에서 귀족 성을 주장하는데 우리 민족은 제사장 집안을 명문으로 여긴다. 더구나 나의 조상들이 제사장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집안은 제사장 24반차 중에서 첫 번째 반차에 속하기 때문에 제사장 가문에서도 단연 탁월하고 특별히 구별되는 집안이다.
역대상 24;7절에 의하면 여호야립이 제일 먼저 제비 뽑혀 대제사장으로 됨을 기록하고 있다.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7권, 14;7에 의하면 제사장들의 조직이 24반차로 나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어머니 쪽으로 보더라도 나는 왕족의 피를 받았다. 나의 모친은 아사모나이스의 자손이었는데 그 가계를 더듬어 보면 우리나라의 대제사장직과 왕 직을 오랫동안 함께 공유했던 집안임을 알 수 있다. 시조인 하쉬몬(Hashmon)의 이름을 따라 하스모네안(Hasmonaeans) 혹은 마카비(Maccabees)라고 불리웠다
나는 나의 족보를 차례대로 기록하려고 한다. 나의 5대 조부는 시몬이며 프셀류스(Psellus)라고도 부른다. 5대 조부는 대제사장 힐카누스와 동시대에 사셨는데 힐카누스는 그의 부친 시몬에게서 대제사장직을 이어 받았고 힐카누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 중 첫 번째 사람이었다. 5대 조부 말더듬이 시몬에게는 9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 한분이 마티아스(Matthias)인데 에파이우스라고도 불리운다. 그분은 대 제사장 아사모나이스의 장자이며 대제사장 시몬의 형인 대제사장 요나단의 딸과 결혼했다.
요나단은 알렉산더 에피파네스가 보내준 대 제사장복을 입고 대제사장직에 올랐으며 군대를 강화 시켜 지위를 공고히 했다(마카비 1서 10;21). 요나단이 대제사장직에 오른 것은 셀류시드 왕조 160년 칠월 초막절로 주전 152년 10월 이었다.
마티아스는 쿠르투스라고도 부르는 아들 마티아스(요셉푸스의 증조부)를 힐카누스 통치 원년에 얻었다. 아들 쿠르투스(마티아스)는 알렉산드라 재위 9년에 요셉(요세푸스의 조부)을 낳았다. 요셉은 아르켈라우스 재위 10년에 마티아스(요세푸스의 부친)를 낳았다. 그리고 나는 가이우스 가이사가 황제가 된 해에 이 마티아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는 세 명의 아들을 낳았다. 첫째 아들 힐카누스는 베스파시안 재위 4년에 태어났으며, 둘째인 유스투스는 7년에 태어났고 그리고 막내 아그립바는 베스파시안 가이사 통치 제9년에 태어났다. 이와 같이 나는 내가 발견한 공문서 안에 기록된 것을 본 그대로 인용하여 내 가족의 족보를 씀으로써 나의 가문을 비방한 사람들에게 답변을 대신한다. 이하 중략...
이후 요세푸스의 자서전에는 다음과 같이 소제목 하에 그 내용들을 소상히 기술하고 있다.
(2) 나의 교육 (3) 로마 방문 (4) 전쟁 전야 (5) 폭도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요세푸스 (6) 케스티우스의 패배 ; 주후 66년 (7) 갈릴리에서의 요세푸스 (8) 갈릴리의 상황 (9) 디베랴의 세 당파 (10) 기스칼라의 상황 (11) 가말라와 야키 무스의 아들 빌립 (12) 디베랴의 지도자들과 회합을 갖고 무질서를 바로 잡다.
(13) 기스칼라 요한의 전략
(14) 갈릴리의 평화를 지키려는 요세푸스의 노력. 이하 생략 ...
6) 아피온 반박문
아피온은 북부 애굽 지방에서 태어나(아피온 반박문 제 2권 3(29))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 했으며 디베랴, 칼리쿨라, 글라우디오 등의 황제 치하시 로마에서 수사학을 배웠다. 특히 칼리쿨라 시대 때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대변인인 필로와 맞서서 논쟁을 벌일 때 반 유대 대표의 자격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 황제에게로 파견되기도 했다. 박학 다식 하면서도 지나치게 과시하는 경향이 있는 저술가이며 호머의 해설자로도 알려져 있다.(유대 고대사 2권 2;3(14)) 그는 또한 5권으로 된 애굽의 역사서를 기록하기도 하였는데 여기에 유대의 역사도 포함되어 있다.
이 유대의 역사가 그의 저서 가운데서 독립본으로 분리 되어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의 연구열로 인하여 “노동(μοχθος)”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으며 또한 그의 과시적인 성격 때문에 디베료 황제로부터 “세계의 심벌(cymbalum mundi)"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Harvard University Press, 출판사 달산 번역)
(1) 제 1권 내용 요약 ;
에바브로디도 각하여! 저는 저의 저서인 “유대 고대사”에서 그 책들을 숙독하는 독자들에게 우리 유대 민족이 매우 훌륭한 고대사를 지니고 있으며 처음부터 독창적으로 자신의 생존을 유지해 왔던 민족임을 분명하게 주지시켜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 저서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 어떻게 우리 민족이 들어와 살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중략....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과 우리에게 악의를 지닌 사람들이 우리에게 퍼붓는 비판에는 귀기울여 들으면서도 제가 우리나라의 고대사에 대해 쓴 것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중략..
따라서 나는 악의를 품고 적극적으로 거짓말을 하면서 까지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과오를 깨우쳐 주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무지를 시정하기 위하여 더욱이 우리가 위대한 고대사를 지녔다는 사실을 알기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이러한 주제들을 간략히 나마 서술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스스로 지니게 된 것입니다. 중략...
저는 또한 왜 그러한 사건이 생겨났으며 헬라인들 중 그들의 역사에 우리 민족에 관해 언급을 한 역사가들이 많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하는데 노력할 것입니다. 이하 생략...
(2) 아피온 반박문 제 2권 내용 요약
에바브로디도 각하여! 저는 이 책의 첫 권에서 베니게인들과 갈대아인들 그리고 애굽인들의 기록들을 인용하여 저희 민족의 고대성에 대해 말씀 드렸던 내용들이 진실한 것들이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또한 저는 마네토와 카이레몬 그리고 몇몇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하였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제부터 우리에 관해 악평을 한 그 외의 저자들을 논박할까 합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문법학자인 아피온을 힘들여 가면서까지 반박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약간의 의심이 생기는 것을 솔직히 시인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쓴 몇몇 작품들을 보면 앞서 말씀드린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비난했던 것과 똑같은 내용이거나 어떤 것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무가치한 내용을 덧붙였습니다. 또한 그가 말한 대부분의 이야기는 아주 질이 낮은 내용이며 더욱이 그가 유식한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하 생략....
3. 요세푸스의 작품들이 신약성경 해석에 주는 영향력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신약 성경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요세푸스의 작품이 갖는 특성과 그 중요성에서 원인을 찾을 수가 있다. 요세푸스가 남긴 네 개의 작품들 즉 “유대 고대사” “유대 전쟁사” “자서전” “아피온 반박문” 중 “유대 전쟁사”와 “유대 고대사”는 각각 일곱 권과 스무 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이루어진 요세푸스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A,D 66-70년 사이의 유대-로마 전쟁에 대한 자세한 묘사를 하고 있는 “유대 전쟁사”의 기록 연대는 베스파시안 통치 말기에 완결되었으므로 늦게 잡아도 베스파시안이 사망한 주후 75년 내에서 79년 사이로 기록 연대를 측정할 수 있다.
이후 요세푸스는 구약 성경의 창조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유대 민족의 장구한 역사를 “유대 고대사”라는 이름으로 출판 하였는데 이 집필 연대는 요세푸스가 밝히고 있듯이 도미티안 통치 제 13년 즉 A,D 93-94년경이다.
한 권으로 된 “자서전”과 두 권으로 되어있는 “아피온 반박문”은 “유대 고대사” 이후에 발간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요세푸스의 작품들이 보존 되지 않았다면 유대인들의 역사 이해는 물론이고 신약성경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어떤 윤곽을 그리는 것도 불가능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요세푸스의 작품은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된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 손에 들려있는 최종 형태의 신약 성경은 어떤 역사적 사건의 보도나 시대적인 상황 그리고 다양한 삶의 방법을 시시콜콜 묘사한 소설 형식의 문헌이 아니고 진정한 삶의 평화와 너와 내가 함께 공존하는 이웃 사랑의 실천에 대한 섬김의 본을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의 어록과 행적들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역사적 배경이나 시대적인 상황 그리고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성경 내에서는 중요하게 서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요세푸스가 아니면 우리는 유대-로마 전쟁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알 길이 없을 것이며 바리새파, 에쎄네파, 사두개파 등에 대해서도 현재 신약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 외에는 전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면 요세푸스의 작품들이 아니면 현재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신약성경 연구의 폭은 현저하게 좁아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문서들이 당시의 세속 사건에 대한 역사적 보도를 목적한 글들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의 신앙적 문서로서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또한 신약성경 저자들과 해당 독자들은 당대의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관한 공통적 이해가 이미 전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상세한 소개를 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을 대하는 오늘날의 독자들은 신약성경 시대의 배경 역사를 대부분 신약성경 밖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요세푸스의 기록은 신약성경 문서들의 본문에 대한 보다 깊이 있고 폭 넓은 이해를 가능케 하는 가장 중요한 정보의 보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대개 요세푸스의 기록을 신약성경의 배후 역사를 밝히기 위한 일차적인 참고서나 보충 자료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가는 말
유대인이면서 유대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에서 살지 않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살면서 유대인들의 입을 대변했던 철학자요 그리고 종교가인 필로는 그가 기록한 작품들의 중심 내용을 어떤 외경적인 요소나 위경의 문서들을 참고로 하지 않고 정확 무오하다고 생각한 구약성경을 중심으로 다양한 제목의 작품들을 기록하여 그 기록한 문서들을 통해서 후대의 독자들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많은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유세비우스가 요세푸스의 말을 인용하여 기록한 “유세비우스 교회사”에 의하면 필로는 가이우스 황제의 통치 하에서 유대인들이 겪은 환난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가이우스 황제에 대한 광기도 거론 하였는데 가이우스는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고 권력을 이용하여 지독한 학정을 베풀었다. 이처럼 비참한 현실 속에 있는 동족의 비극을 따지기 위해 가이우스 황제에게 유대인의 대표로 참석하였는데 그는 가이우스 황제 앞에서 자기 조상들의 율법과 관례를 옹호 하였는데 가이우스 황제는 그를 비웃고 조소하였으며 자칫 하면 그는 목숨까지 잃을 뻔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 알렉산드리아 인들을 대표해서 참석한 아피온은 유대인들을 비방하는 말을 많이 했으며 유대인들이 가이우스 황제를 예배하는 것을 경멸했다고 하였다. 유대인들의 대표자인 필로는 이 비난에 맞서 유대인들을 변호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황제는 그에게 퇴장을 명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뜻대로 변론도 못하고 모욕을 당하고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종교-문화적으로 유대교 제사장 집안에 속해 있었고 경제-사회적으로는 유대의 최상의 귀족 계층에 속해 있었으며 정치적으로는 하스몬 왕조의 전통을 계승했다. 그는 로마에 항복 한 뒤에도 권력 계층의 보호를 받으며 경제적, 사회적으로 부유층의 특권을 누렸지만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유대 율법이나 전통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비유대인들과 그들의 문화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고 특히 헬라문화와 로마 제국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다. 이러한 그의 사회적 배경과 위치 그리고 정치적 성향은 그의 역사해석에도 반영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는 로마의 팔레스틴 지배를 받아 들였고 로마에 대한 항거를 부정적으로 보았으며 다수 군중들의 무력 봉기를 폭도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평화적인 항의와 이의 제기가 유대인들에게 이로운 결과를 가져오며 이를 위하여 유대 역사의 재해석이나 저작 활동, 토론, 대화 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두 유대인이 기록한 문헌들이 후대의 독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은 현재 우리 손에 들려져 있는 성경에서 보도하고 있는 외적인 상황들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성경이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을 전할 목적으로 기록되어진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있는 역사적 사건들을 오류없이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대하는 오늘날의 독자들은 성경 시대의 배경 역사를 대부분 성경 밖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 한계를 인식하고 이러한 한계를 극복케 하는 중요한 자료를 두 유대인이 그들의 작품을 통하여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1. 요셉푸스는 누구였을까?(Who Was Josephus?)
플라비우스 티투스 요셉푸스는 제1차 유대인 로마 항쟁(AD 66?70) 당시 갈릴리 방어를 맡은 유다의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그 후 붙잡혀 분쟁 중에 지지하는 편을 바꾸었고, 후에 로마에서 제국주의 후원 하에 중요한 역사적, 자서전적, 그리고 변증론적 작품을 썼다. 그의 의의는 무엇인가? 1세기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유대인들의 역사와 종교에 가장 중요한 목겨자 한 명을 꼽으라면 단연코 요셉푸스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의 알려진 작품은 유대인 전쟁사 ( Bellum judaicum)과 유대 고대사 (Antiquitates judaicae), 요셉푸스의 생애(Vita), 아피온에 반대 (Contra Apionem) 등이다.
요셉푸스의 본명은 요셉 벤 마티야후(Yoseph ben Mattiyahu)이다. 그는 서기 37년 예루살렘의 부유한 제사장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는 것은 그리스 교육, 스물여섯 살에 외교 임무를 띠고 로마에 파견된 것, 예루살렘에 땅을 소유하고 있은 것, 로마와의 전쟁 중 갈릴리 지역 사령관에 임명된 것 등에서 암시적으로 알 수 있다. 10대에 요셉푸스는 3대 유대교 종파 (에세네, 사두개파, 바리새파) 모두에 가입하려고 시도했다고 전해지며, 한동안 황야에 사는 유대 금욕주의자 바누스 (Bannus)를 추종하기도 했다. 그 후에 소문에 의하면, 요셉푸스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바리새파 사람들과 합류했다고 한다.
Flavius Josephus: Eyewitness to Rome's First-Century Conquest of Judaea
Flavius Josephus: Eyewitness to Rome's First-Century Conquest of Judaea
www.amazon.com
로마의 침략에 대비하여 갈릴리 지역 책임자로 혁명 평의회에 의해 선발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기살라의 요한 (John of Gischala)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결국 요타파타(Jotapata)에서 베스파시아누스의 군대에 항복하고야 말았다 (Josephus, J.W 3.340?92). 요셉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살아 남았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살았던 요세푸스는 유대-로마 전쟁 때 유대군 장교로 참전했다가 동료 병사들, 자신을 포함해 총 41명과 함께 요타파타[1]에서 서기 70년에 황제가 될 베스파시아누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에게 포위되었고, 동료들은 로마군의 손에 죽느니 스스로 죽겠다고 집단자살하기로 했다. 그러나 직접 자살하는 것이 어려웠는지, 그들은 서로 죽이기 위한 알고리즘을 세운다. 요세푸스를 따라온 동료들은 위의 그림과는 다르게 2명 살리고 한 명 죽이는 식으로 자살했다.[2] 그러나 요세푸스는 동료들의 뜻에 반대하고 살고 싶었고, 수학적 논리력을 발휘하여 끝까지 살기 위한 자리를 찾아서 결국 살아남아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항복했다.
1 . 유래 2 . 문제 3 . 방법1. 점화식을 이용한 풀이 4 . 방법2. 이진법을 이용한 풀이 5 . 방법3. 프로그래밍을 이용한 풀이 1. 유래 [편집]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가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문제이다. 당시 예루살렘 에서 살았던 요세푸스는 유대-로마 전쟁 때 유대군 장교로 참전했다가 동료 병사들, 자신을 포함해 총 41명과 함께 요타파타 [1] 에서 서기 70년에 황제가 될 베스파시아누스 가 지휘하는 로마군에게 포위되었고, 동료들은 로마군의 손에 죽느니 스스로 죽겠다고 집단자살하기로 했다. 그러...
2년 동안(서기 68?69년경) 그는 로마에 구금되어 있었지만, 예루살렘 함락 작전에서 번역가, 고문, 협상가 등의 역할을 하여 호의를 얻었다. 로마에 협력함으로써, 요셉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가 차례로 왕좌에 오르는 동안에 권력에 영합하여, 플라비안 가문에서 로마 시민권과 후견을 받았다.
로마에 사는 동안, 요셉푸스는 "유대 전쟁사"을 처음에는 아람어로 (서기 73년), 나중에는 그리스어로 (75?81년경) 출판했다. 이 책의 주된 목적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유대의 불경건함때문에 하나님이 사실상 로마의 편을 들어주었다고, 로마인들을 위해 변증하기 위함이다. 둘째로, 서기 70년의 재난에 뒤따라오는 독설에 찬 비판으로부터 유대인의 성격을 방어하기 위함이다.
Bellum_Judaicum-sulman-1862
후에 93?94년경, 요셉푸스는 자신의 "생애"를 부록으로 첨부하여, "유대 고대사"를 집필했다. "고대사"는 장르로는 "다시 쓰여진 성경"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하다. 즉 유대 전쟁에 이르는 사건들에 대한 광범위한 정보와 결합하여 이스라엘 역사의 성스러운 이야기 전개를 요약하고 편집한다.
Antiquities of the Jews - Wikipedia
Antiquities of the Jews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Antiquities of the Jews ( Latin : Antiquitates Iudaicae ; Greek : ?ουδα?κ? ?ρχαιολογ?α , Ioudaik? archaiologia ) is a 20-volume historiographical work, written in Greek , by the Jewish historian Flavius Josephus in the 13th year of the re...
en.wikipedia.org
"생애"는 요셉푸스의 유대 전쟁에 대한 설명과 관련하여 디베랴의 유스투스가 제시한 거짓 혐의로부터 요셉푸스 자신이 아무런 죄가 없음을 입증하려고, 자신의 인격과 신임도를 극찬하기 위해 쓰여졌다.
곧이어 요셉푸스는 알렉산드리아 학자 겸 정치인 아피온 (Apion)이 제기한 이의에 맞서서 유대교와 유대인들을 옹호하는 "아피온에 대항하여"를 집필했다. 요셉푸스는 아마도 서기 100년 경에 죽었을 것이다.
Against Apion - Wikipedia
Against Apion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This article relies too much on references to primary sources . Please improve this by adding secondary or tertiary sources . ( December 2013 ) ( Learn how and when to remove this template message ) Against Apion ( Greek : Φλα?ου ?ωσ?που περ? ?ρχα...
en.wikipedia.org
신약 이해를 위해 요셉푸스의 저술이 어떤 상황적합성이 있는지는 다중적이다. 첫째, 그는 유대교와 유대 역사에 대한 엄청나게 많은 배경 정보를 제공한다. 실은 그가 유대인들에 대한 "관습과 이유" (Customs and Reasons)'라는 작품을 쓸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 후회해야 할지도 모를 정도이다. 둘째, 빌라도, 헤롯 아그리파, 쿠레니우스 (구레뇨) 인구조사, 예루살렘 성전 등 신약에서 알려진 사건, 기관, 단체, 관습, 장소, 사람들에 대해 작품에서 언급하고 있다. 셋째, 신약의 설명과는 별개로, 그는 세례 요한과 예수, 예수의 형제 야고보의 경력을 입증하는 자료를 제공한다.
Josephus on John the Baptist - Livius
Josephus on John the Baptist In the war between the Jews and the Romans of 66-70, the Jewish general Joseph son of Matthias defended Galilee against the Roman legions. After he had been defeated, he defected to his enemies, and advised the Roman general Vespasian . When the latter became emperor, hi...
www.livius.org &
4. 세례 요한에 관한 요셉푸스의 언급
(Josephus on John the Baptist)
정경에 속한 복음서들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의 선구자로 간주된다. 공관복음 저자들 (막 6:17?28; 마 14:3?11; 눅 3:19?20)에 따르면, 세례요한이 체포되어 처형된 이유는, 레위기법(레 18:16; 20:21)과는 달리, 헤롯 안티파스가 형 필립의 아내 헤로디아스와 결혼했다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요셉푸스는 나바테안 왕 아레타스 4세에게 헤롯 안티파스의 군대가 패배를 당한 사실에 관하여, 유대 고대사 18장에서 삽입어구 형식으로 세례 요한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요셉푸스는 다음과 같이 자기가 알고 있는 바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일부 유대인들에게 헤롯의 군대가 괴멸을 당한 것은 그가 세례자라는 성을 가진 요한을 처치한 행동에 대한 신의 보복으로 여기게 되었고, 신적 보복은 아니더라도 정당한 복수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는 선한 사람이었고, 유대 사람에게 의로운 삶을 살고, 동료에 대한 정의와 하나님을 향한 경건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세례에 합류하도록 도록 촉구하여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롯이 그를 처형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견해로는, 세례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렇게 행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예비 조치였다.
그들은 [유다 백성들] 어떤 죄를 지었든지 용서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이 이미 올바른 행동에 의해 깨끗해졌음을 암시하는 바 육신을 봉헌한다는 측면에서 그것 [세례]를 채택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들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군중들에 합류하였다.
이는 그들이 그의 설교로 한껏 고양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에 헤롯은 불안하게 되었다.
인류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치기까지 감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폭동을 선동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이는 마치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요한의 지도를 받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롯은 판단했다.
격변이 일어나기를 기다려서 어려운 상황에 말려들게되고 자신의 잘못을 보는 것보다, 오히려 그의 사역으로 인해 봉기를 일으키기 전에, 먼저 치고 그를 제거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물론 요한은 헤롯의 의심을 쌌기 때문에, 우리가 이전에 언급했던, 견고한 진인 마케루스 (Machaerus)로 쇠사슬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사형에 처했졌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평결은 달랐다.
하나님께서 헤롯에게 그런 타격을 가할 만하다고 보셨기 때문에, 헤롯의 군대가 직면한 괴멸은 요한이 정당함을 입증하는 것이었다.(Ant. 18.116?19 LCL)
John the Baptist in Josephus
BLOG ? READ ? SHARE? COMMENT ?
crossexamined.org
요셉푸스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1) 요한은 대중에게 인기가 있었고,
많은 군중을 끌어들일만한 매력이 있는 유다의 거룩한 사람 (성자)으로 간주되었다.
(2) 요한은 "세례" (baptist?s)로 유명해졌고, 그의 활동동에서 따와서 '세례자'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3) 요한은 청중들에게 의로운 행위, 정의, 하나님을 향한 공경으로 뚜렷하게 표시가 나는,
유효적절한 언약적 행동으로 돌아가라고 촉구했다.
(4) 의로운 삶에 위탁하는 것은 세례의 전제조건이었지,
마치 세례가 죄를 감면받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서, 무법한 행위를 저질러도 된다는 면허가 아니다.
(5) 요셉푸스는 세례를 정화와 연결시킨다.
물론 그는 헬레니즘 철학적 용어의 방식으로 세례 활동을 말하여 윤색하고 있다.
즉 세례를 고귀한 행동으로 정결함을 받은 영혼의 상징으로 간주한다.
(6) 헤롯 안티파스는 민중들에 마치는 요한의 영향력이 반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요한을 투옥시켰다.
(7) 아라비아 아레타스 왕과의 전투에서 안티파스의 군대가 패배를 당한 것은
세례 요한의 처형 때문에 하나님이 안티파스에게 드러낸 신적 분노의 징조이었다고 여기는 것이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공통적인 견해였다.
[Michael F. Bird, “John the Baptist,” in Jesus among Friends and Enemies
(ed. C. Keith and L. Hurtado;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1), 63.]
Jesus among Friends and Enemies: A Historical and Literary Introduction to Jesus in the Gospels
Jesus among Friends and Enemies: A Historical and Literary Introduction to Jesus in the Gospels
www.amazon.com
5. 예수에 관한 요셉푸스의 언급
(Josephus on Jesus)
요셉푸스의 가장 유명한 구절은 유대 고대사에서 예수를 두번 언급하는데, 첫번째 언급이 포함되어 있는 "플라비우스의 증언" (Testimonium Flavianum)이다.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본문의 양식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다.
Josephus on Jesus - Wikipedia
Josephus on Jesus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The extant manuscripts of the book Antiquities of the Jews , written by the first-century Jewish historian Flavius Josephus around 93?94 AD, contain two references to Jesus of Nazareth and one reference to John the Baptist . [1] [2] The first a...
en.wikipedia.org
이 무렵에는 예수가 살고 있었는데,
실은 그를 사람으로 불러야 한다면, 지혜로운 사람 (현자)이었다.
이는 그가 깜짝 놀랄만한 행위를 수행하였고, 진리를 즐거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유대인과 그리스인들 중에 많은 이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는 메시아였다.
그리고 빌라도가 우리 가운데 가장 주요 인물들의 고발로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서 정죄했을 때,
처음 그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그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서 그들에게 모습을 보였다.
이는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이런 일들과 그에 관하여 다른 수천가지의 경이로운 점을 예언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딴 그리스도인이란 종족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Ant. 18.63?64 LCL. 이탤릭꼴 첨가)
Reproduction showing the so-called Testimonium Flavianum inserted into Flavius Josephus’ ”Jewish War” at 2.167; Codex Vossianus, Graec. F 72, early 15th century.
그리스도의 추종자가 아닌 어떤 사람이 글을 썼다고 보기에는, 예수를 향하여 너무 긍정적인 경향을 띄고 있다고 들리기 때문에, 이 글의 진위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위의 인용문 중 이탤릭꼴로 표시된 부분을 참조). 3세기에 글을 쓴 오리겐은 요셉푸스가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는데 (Comm. Matt . 1.15; Cels. 1.47), 이는 아마도 오리겐이 가지고 있는 요세푸스의 판본에는 "예수에 관한 문장"이 전혀 있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논증하기를, "증언" (Testimonium)이 격변과 로마 총독들의 어리석음을 다루는 문맥을 방해하는 반면, 그러한 격변이 여기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본다. 그렇지만 우리는 문맥과 관련하여 우리가 말 할 수 있는 것은, 요셉푸스가 그의 작품을 쓸 때에 다소 눈에 띄도록 문맥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띄고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증언"은 빌라도의 총독 재위시절에 일어난 사건들을 계속 재조명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글의 흐름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없다. 오리겐이 예수에 관하여 언급한 점은 요셉푸스가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않았음을 시사할 뿐이지, 요셉푸스가 예수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예수에 대하여 극찬하며 논평을 곁들인 설명은 기독교 필사자들이 본문에 손을 대어왔다는 사실로 설명이 가능하다 (즉, 위의 이탤릭체 부분).
Maybe the most cited and controversial version of the Testimonium is found in an Arabic chronicle from the tenth century. It is a text written by the Arabic Christian historian Agapius who was bishop of the Syrian city of Hierapolis Bambyce. He is perhaps best known for his chronicle Kitab al-?unwan (Book of headings or Book of History) that he was working on until his death in 941 or 942 CE.[130] In this he gives a shorter version of the Testimonium, however, hardly in the form of a quotation, but more by paraphrasing it, and then of course in Arabic and thus in translation. The part therein corresponding to the Testimonium says:
[2. 예를 들어, "그는 메시아였다"라는 구절에서, 앨리스 윌레이 [Alice Whealey (“The Testimonium Flavianum in Syriac and Arabic,” NTS 54 [2008]: 573?90)"]는 시리아인 미카엘 (12세기)과 제롬 (4세기)이 보존한 "증언"에 주목하는데, 이 판본에서 "그가 메시아라고 생각했다"고 독자적으로 사본을 읽을 수 있다. 이 독법은 요셉푸스가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않았다는 오리겐의 주장에 상응한다. 히에라폴리스의 아가피우스 (Agapius)의 "아라비아 연대기"(10세기)에서도 다른 독법이 발견된다: "그는 아마 메시아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증언"에 예수를 메시아로 지칭하는 언급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마도 어떤 면에서는 예수의 메시아적인 신분이 의심스럽다고 말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요셉푸스의 본문을 전수한 기독교 필사자들은 이러한 의심스러운 내용을 "증언"에서 제거하고, 대신 "그는 메시아였다"를 삽입했다. 다른 대안으로는, 제롬의 버전은 고대사 20.200의 동화 현상일 수도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에, 고대사 20.200과, 아마도 고대사 18.63에 메시아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기독교 필사자들에 의해 (삽입이라기 보다는) 확대되었다고 보는 편이 낫다.]
요약하면, 증거는 비록 현재 형태에서는 아니지만, 적어도 "증언"의 진정성에 손을 들어준다.
(1) "증언"의 언어는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요셉푸스의 문체와 비교하여 볼 때, 일관성이 있다 [H. St. J. Thackeray, Josephus, the Man and the Historian (New York: Jewish Institute of Religion, 1929), 137; 하지만 다음을 참조. Ken Olson, “Eusebius and the Testimonium Flavianum ,” CBQ 61 (1999): 305?22].
(2) 예수의 죽음에서 유다 지도자의 역할에 대한 강조가 전혀 없다.
(3) 고대사 20.200에서 예수를 다시 간략하게 언급한 것은 고대사 18.63?64에서 예수를 언급한 내용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만일 기독교 필사자가 요셉푸스의 작품에 예수의 구절을 삽입했다면, 18권과 20권에 걸쳐 퍼뜨리기보다는 한 곳에 모아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4) "증언"의 아랍어와 시리아 판본은 일반적으로 공인된 그리스어 본문 형식과 약간 다르며, 겉으로 보기에 예수에 대한 긍정적인 묘사를 생략하거나 수정하고 있다 [논의를 위해서 다음을 참조. John P. Meier, A Marginal Jew (4 vols.; ABRL; New York: Doubleday,1991), 1:56?69; Alice Whealey, Josephus on Jesus: The Testimonium Flavianum Controversy from Late Antiquity to Modern Times (New York: Peter Lang, 2003)].
Reproduction showing the so-called Testimonium Flavianum in the oldest preserved manuscript of the latter part of Flavius 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Codex Ambrosianus (Mediolanensis) F. 128 from the 11th century.
”Γ?νεται δ? κατ? το?τον τ?ν χρ?νον ?ησο?? σοφ?? ?ν?ρ, ε?γε ?νδρα α?τ?ν λ?γειν χρ?: ?ν γ?ρ παραδ?ξων ?ργων ποιητ??, διδ?σκαλο? ?νθρ?πων τ?ν ?δον? τ?ληθ? δεχομ?νων, κα? πολλο?? μ?ν ?ουδα?ου?, πολλο?? δ? κα? το? ?λληνικο? ?πηγ?γετο: ? χριστ?? ο?το? ?ν. κα? α?τ?ν ?νδε?ξει τ?ν πρ?των ?νδρ?ν παρ’ ?μ?ν σταυρ? ?πιτετιμηκ?το? Πιλ?του ο?κ ?πα?σαντο ο? τ? πρ?τον ?γαπ?σαντε?: ?φ?νη γ?ρ α?το?? τρ?την ?χων ?μ?ραν π?λιν ζ?ν τ?ν θε?ων προφητ?ν τα?τ? τε κα? ?λλα μυρ?α περ? α?το? θαυμ?σια ε?ρηκ?των. ε?? ?τι τε ν?ν τ?ν Χριστιαν?ν ?π? το?δε ?νομασμ?νον ο?κ ?π?λιπε τ? φ?λον.”
“At this time arises Jesus, a wise man, if indeed one shall call him a man. For he was startling deeds’ doer, a teacher of people the truth with pleasure receiving, and [he] won for himself many Jews and also many of the Greek. This was the Messiah, and on accusation by the leading men among us Pilate having him to stake condemned, those who previously had loved him did not cease. For [he] appeared to them on the third day, living again. The divine prophets had spoken of these and ten thousand other wondrous things about him. And up until now the tribe of Christians, named after him has not ceased.”
기독교 필사자가 윤색하고 장식했다는 명백하게 인정되는 내용을 벗겨내면, 본문의 원래 형태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때 현자인 예수가 나타났다.
이는 그는 깜짝 놀랄만한 행위의 실천가였고, 진리를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많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그리고 많은 그리스 출신들 사이에서 추종자들을 얻었다.
빌라도는, 우리 가운데서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이 제기한 고발 때문에,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하지만 이전에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이날까지도 (그의 이름을 딴) 그리스도인이라는 족속들은 자취를 감추지 않고 있다
[Meier, Marginal Jew , 1:61].
12th century (?)
Mosaic
St. Mark's Cathedral, Venice, Italy
The panel gives the essential elements of the story. As the crowd on the left listens, the saint stands on the parapet of the Temple and tells them that Christ was resurrected, ascended into Heaven, and will come again. For this, the Pharisees call for him to be pushed off the parapet. One of the crowd then beats him to death with a fuller's club. Then he is buried near the Temple.
Left to right, the inscriptions at the top read IUDEI ("Jews"), PELITUR ATERGO ("He is pushed from behind"), PERCUSSUS OBIT ("He is beaten and dies"), SEPELITUR ("He is buried"). The word over the stylized image of a city on the right is an abbreviation of "Jerusalem." Over the prostrate saint is his name in Latin, S IACOBUS.
6. 야고보의 순교에 대한 요셉푸스의 보고
(Josephus on the Martyrdom of James)
요셉푸스는 유대에 로마 총독들의 재위 기간 사이에 틈바구니가 있는 시기에, 대제사장 아나누스가 "메시아라고 불리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과 그의 동료들을 서기 62년 경에 어떻게 즉결로 처형하였는지를 이야기한다.
베스도 (Festus)는 이제 죽었고, 알비누스 (Albinus)는 오는 도중에 있다.
그[아나누스]는 재판관 회의를 소집하여, "그리스도"라고 불렸던 예수의 형제,
즉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이와 다른 어떤 이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이 법을 어겼다고 비난하면서, 그들을 돌로 쳐 죽이도록 넘겨주었다.
그러나 율법에 관하여 공정하고 엄격하다고 여겨지는 성읍 사람들은 이를 불쾌하게 여겨서,
왕에게 은밀히 아나누스에게 더 이상 그런 행동을 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도록 촉구하였다.
(Ant. 20.200 LCL).
Martyrdom of James the Just in Menologion of Basil II, a manuscript dating from late tenth or early eleventh century. (Image: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야고보는 기독교 전통에서 순교자로 추앙받았고, 심지어 "의인 야고보 (James the Just)"라고 불렸다 (Gos. Thom. 12. 참조). 야고보가 죽은 정확한 이유는 요셉푸스를 비롯한 어떤 자료들에서도 알 수 없다. '법 위반자'라는 죄명은 사회학적 일탈자를 딱지 붙이는 한 형태이다. 누군가의 신념과 실천 (praxis)이 공유된 정체성과 공통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될 때, 일탈자라고 부른다. 아마도 야고보는 유대교 내 종파주의의 희생양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 종파주의 내에서는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과 특히 제임스가 그들의 메시아적인 신앙으로 인해서, 유대교 율법의 고결함에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위협으로 간주되었기에, 폭력적인 견책을 정당하게 행사하도록 빌미를 제공하였다.
James, brother of Jesus - Wikipedia
James, brother of Jesus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James the Just" redirects here. For the King of Aragon, see James II of Aragon . James the Just , or a variation of James, brother of the Lord ( Latin : Iacomus from Hebrew : ???? Ya'akov and Greek : ??κωβο? Iak?bos , can also be Anglici...
en.wikipedia.org
나가는 말
요셉푸스는 1세기 유대교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유일한 자료이다. 그는 유대의 정치, 종파, 문화, 법률, 종교에 관하여 결정적인 배경 정보를 제공한다. 요셉푸스는 또한 신약에서 다시 이야기하는 많은 사건들에 대해 독립적인 역사적 입증 근거를 제공하는데, "플라비우스의 증언"에서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의 실존을 증거한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A Jew Among Romans: The Life and Legacy of Flavius Josephus
A Jew Among Romans: The Life and Legacy of Flavius Josephus
www.amazon.com
2. 학계와 역사에 미치는 영향 (Scholarship and impact on history)
요셉푸스의 작품들은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 대한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하며 사해문헌과와 후기 유대교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학 자료도 대변한다.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요셉푸스 학계는 요셉푸스의 바리새파 종파와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다. 그것은 일관되게 그를 종파의 일원으로 묘사했고 유대 민족에 대한 배신자로 묘사했다. 이는 요셉푸스의 고전적 개념으로 알려지게 된 관점이다. 20세기 중엽에 신세대 학자가 이러한 견해에 도전하여 요셉푸스의 현대적 개념을 공식화하였다. 그들은 그를 바리새파라고 생각하지만, 부분적으로 애국자와 일부 지위의 역사가로서의 명성을 회복시킨다. 스티브 메이슨은 1991년 저서에서 요셉푸스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정통 귀족-제사장으로서 바리새 철학과는 존중을 표하려고 인연을 맺게 되었고, 종파에 가입하려는 의향을 가지고 유대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Scanned from a copy of Josephus' 'The Jewish War' dated 1888.
로버트 아이슬러가 요셉푸스라고 생각한 1세기 로마 흉상. 현재 덴마크 코펜하겐의 Ny Carlsberg Glyptotek에 보존되어 있다.
1925년 Robert Eisler는 이 흉상을 Flevius Josephus로 확인했는데, 주로 신체적 고정관념을 기반하였다.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요셉푸스는 로마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고, 조각상이 그에게 헌정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근거가 약한 것으로 간주되며, 오늘날 학자들은 그의 추측이라고 강조한다. 참조. Voir P. Plagnieux, Les sculptures Romanes Dossiers d'Archeologie, (janvier 2001) .
(1) 역사와 고고학에 미치는 영향
요셉푸스의 작품에는 개인, 집단, 관습, 지리적 장소에 관한 역사가들에게 유용한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요셉푸스는 그의 시대에 240개의 마을과 마을들이 상갈릴리와 하갈릴리에 흩어져 있었으며, 그 중 일부는 그가 이름지었다고 말한다. 그가 지명한 유대인의 풍습 중에는 집 입구에 고운 천의 장막을 걸어두는 관습과 안식일 식사에 참여하는 유대인의 풍습이 하루 중 여섯 번째 시간(낮 12시)에 있다는 등의 내용이다. 그는 또한 유대인 남성들이 많은 아내와 결혼 (polygamy)하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언급한다. 그의 저술은 마카비 왕조, 하스모니안 왕조, 헤롯 대왕의 출세에 대한 후기 포로기 시대에 대한 유의미하고 외경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그는 사두개파, 당대의 유대인 대제사장, 바리새인과 에센파, 헤롯 성전, 구레뇨의 인구조사, 열심당원 등을 묘사하고 있으며, 본디오 빌라도, 헤롯 대왕, 아그리파 1세와 아그리파 2세, 세례 요한, 예수의 형제 야고보, 그리고 예수 (유대 전쟁사 슬라브어판에만 발견)를 묘사하고 있다. 요셉푸스는 성전 후기 유대교의 직접적인 연구와 초기 기독교의 맥락을 위한 중요한 자료를 대변한다.
헤로디움의 헤롯 대왕 무덤 발굴
Ehud Netzer
요셉푸스의 글과 수년간의 발굴을 세심하게 읽어본 결과, 히브리 대학의 고고학자 에후드 네처(Ehud Netzer)가 35년 동안 헤롯의 무덤의 위치라고 생각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Kraft, Dina (May 9, 2007). "Archaeologist Says Remnants of King Herod's Tomb Are Found". NY Times]. 요셉푸스의 글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평평한 사막지대에서,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2km 떨어진 헤로디움 언덕 중간쯤에 있는 수로 위와 웅덩이 위였다. 2013년 10월 고고학자인 조셉 패트리히 (Joseph Patrich)와 벤자민 아루바스 (Benjamin Arubas)는 이 무덤이 헤롯의 무덤으로 확인되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패트리히와 아루바스에 따르면, 이 무덤은 헤롯의 무덤이 되기에는 너무 겸손하고 몇 가지 있음직하지 않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네처의 사망 이후에 발굴 지도자로 그를 대신한 로이 포라트 (Roi Porat)는 네로의 무덤이라고 확신했다.<팡세>
'성경과 신학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 음 의 본 질/ 박 영 선 지 음 (0) | 2020.04.21 |
---|---|
필로의 세계관과 문헌들 (0) | 2020.04.20 |
십자가의 도 / 제씨 펜 루이스 지음 (0) | 2020.04.16 |
대적의 문을 취하라 /신디 제이콥스 지음 (0) | 2020.04.16 |
틸리히 신학의 일반적인 특징 (0) | 2020.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