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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연구

왜 그들은 복음을 배반하는가? -존 오웬(히브리서 6장4절-6절)|

by 은총가득 2020. 3. 23.

 

왜 그들은 복음을 배반하는가? -존 오웬(히 6:4-6)

 

1. 복음을 배반하는 이유 및 그 성격  (1)

역사적 배경

초대교회는 누구를 성도의 교제에 들어오게 하는 일에 대해 아주 신중을 기했다. 죄를 범한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공개적 회개를 통해서만 그 교제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그러나 살인이라든가 간음 또는 우상 숭배와 같은 극악무도한 죄를 범했을 경우에는 성도의 교제에 다시 들어갈 수 없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믿음 때문에 순교당하는 것이 두려워 우상 숭배를 했을 경우에는 두 번 다시 성도의 교제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웬만한 일은 대충 넘겨 버리는 등 징계에 대해 그다지 엄하지 않았다. 터툴리안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감독 제피리누스(Zephyrinus)가 간통한 사람들의 회개를 받아들여 그들로 하여금 성도의 교제를 다시 나눌 수 있게 해준 데 대해 책망하고 있다.

노바투스(Novatus)와 노바티아누스(Novatianus)는 극단적인 정반대의 길을 취함으로써 이 방종에 대해 대항했다. 그들은 세례 받은 후 죄를 범한 사람은 누구든지 용서하지 않았으며 성도의 교제에도 다시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 치리에 질린 그 추종자들은 아주 극악무도한 죄를 범한 사람들만 성도의 교제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누구든지 다 회개하면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다.

노바투스와 노바티아누스가 그토록 엄하게 치리했던 것은 세례의 본질적 성격에 근거해서 교회의 기강을 잡아 보려 한 데서 연유한다. 세례의 본질적 성격이란, 일단 한번 받고 나면 또 다시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례 받을 때 죄로부터 깨끗이 씻음 받은 사람들이 다시 그 죄에 빠지는 것에 대해 용서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히브리서 6: 4-6 말씀이 이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성경의 한 구절이나 한 본문에서 어떤 특별한 교리나 가르침을 발견하고 그것을 하나님 말씀 전체에 비추어 해석하지 않을 때 항상 그 구절이나 본문에 대한 오역 또는 오용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런 식으로 해서 이 히브리서 말씀도 역시 오역되고 오용된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경의 다른 부분들에 비추어 볼 때, 노바티안들이 극악무도한 죄를 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지 않아 성도의 교제에 다시 참여할 수 없도록 한 것은 복음의 사랑 및 징계의 규범에 어긋난 것이라고 판단했는데 그것은 잘 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히브리서 6: 4-6 말씀에 대해서 노바티안들에게 어떤 해명을 해주어야 할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 말씀에 섣불리 동의했다가 불리한 판단이나 비판을 받게 되느니 차라리 이 히브리서 말씀의 권위에 동의하는 것을 보류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해서 결국 나중에 가서야 몇몇 학자들이 자신들의 건전한 해석에 근거해 볼 때 이 본문이 노바티안들의 엄한 치리를 정당화 해주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밝힌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이러한 일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성경의 권위에 굴복하기보다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런 태도는 성경 진리에 아주 치명적인 해를 가하는 것으로 증명되어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의 편견과 무지로 말미암아 그 가르침에 대해 무어라 해석하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서신(히브리서)은 결국은 그 목적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논쟁은 그 때 이후 오랜 세월 동안 파묻혀 있었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세례 받을 때 자신들의 죄를 공개적으로 회개한 사람들이 다시 죄를 범했을 경우에도 성도의 교제에 다시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본문의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다른 시대에도 역시 대단한 논쟁을 불러일으켜 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이 참 신자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참 신자들도 얼마든지 타락해서 마침내 멸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런가 하면 은혜의 언약 안에 있는 신자들은 절대 궁극적으로 타락해서 영원히 멸망할 수 없다고 가르치면서, 이 구절의 말씀은 참 신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만약 본문이 참 신자들에 대한 말씀이라면 그 구절은 참 신자들이 타락해서 배도하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경고라고 본다.

또 이 구절을 읽거나 듣고서, 자기들은 복음을 믿는다고 선언한 후 침륜에 빠져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했으니 이 구절에 나오는 죄를 범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영락없이 지옥에 가게 생겼다고 믿고 낙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의 발아래 엎드려 용납되기를 구하는 사람은 낙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그런 의도로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부주의한 신자들 모두에 대한 경고로 쓰여 진 것만은 사실이다.

히브리서 6: 4-6

(히 6:4)"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본문에 나오는 말씀을 공부할 때 우리는 그 말씀의 문맥 그리고 누구에 관해 쓰여 졌으며 그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점을 두루 다 살펴보아야 한다.

문맥. (한글 개역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본문은 “왜냐하면”(for) 이라는 단어로 시작되고 있다. 그 말은 곧 우리가 이 말씀 전에 쓰여 진 글로 돌아가서 이 말씀이 쓰여 진 원인을 발견해야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이라는 단어 바로 앞에 있는 말은“만약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9절에 보면, 히브리서 저자가 신자들은 이보다 낫고 구원에 가깝다고 확신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 말은 본문이 신자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시사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신자들에게 이런 사람들이 되지 말라고 이 경고의 말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이런 사람들은 게으르며 무지하다고 비난하고 있다. 믿음의 지식과 그리스도인의 행실에 있어서 자라가는 대신 잘 해보았자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요 아니면 오히려 퇴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현재의 행동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위험하게 될 것이라고 그들에게 경고한다. 복음을 아는 지식과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자라가지 않으면 결국 믿기 이전의 불신과 무지의 상태로 되돌아가서 복음을 부인하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신자들을 경고하기 위해, 처음 공중 앞에서 복음을 받아들일 때는 시작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무지와 태만으로 말미암아 옛날 상태와 습관으로 돌아가서 결국 복음을 저버리게 된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그 안에 들어 있는 엄한 경고의 말씀이 얼마나 유용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누구에 관해 쓰여 졌나. 그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큰 특권과 혜택을 누린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특권과 혜택을 경멸하고 등한히 함으로써 복음에서마저 떠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렇게 되는 날이면 그들은 절대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히 2:3참조)

이들이 누렸던 특권은 성령의 특별 사역에 기초한 것으로 복음의 시대에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들은 유대주의의 율법 아래서는 이런 특권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이었다.”(갈 3:2참조) 이 특권은 곧 그들이 복음의 큰 특권인 성령에 참여함으로써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구원 얻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본문은 그들에 대한 은혜라든가 자비의 언약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으며 그들의 믿음의 역사나 순종의 의무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들이 칭의 되고 성화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는 선언도 없다. 나중에 가서 서신의 저자는, 독자들이 그 서신에 묘사된 사람들과 같이 되지 않기를, 그래서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큰 근거 위에서 그 당부를 하고 있다.

(1) 참 신자는 구원에 따르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그 특징들은 구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이러한 특징들 중 어느 것도 구원과 분리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 상태가 안전하다고 말하는 히브리서 저자의 주장은 틀린 말일 것이다.

(2) 참 신자는 그들의 순종과 삶에서 나타나는 믿음의 열매로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그들의 사랑의 수고요 행위이다.(10절) 이렇게 말함으로써 저자는 독자들에게 자신이 기록한 사람들, 즉 영원히 멸망할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이런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진지한 사랑의 열매를 갖고 있는 사람은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

(3) 참 신자는, 영원히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보호 아래 살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잊어버리는 불의한 분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영원히 멸망치 않을 것을 약속하셨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이 약속이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느 면으로 보나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안전하게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사람들이 되기에 합당치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히려 그 반대의 사람들이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은 그들이 참 신자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자칭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몇 가지 복음의 특권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구원이 수반되지 않는 복음의 특권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선적 특권은“비췸을 얻는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한 번 비췸을 얻고” 시리아 번역본에는 이 말이 “한 번 세례를 받았다”로 되어 있다. 초대 교회에서는 세례를 “조명(照明)”이라 불렀으며 “비취다”라는 말을 “세례 주다”라는 뜻으로 사용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세례식 때 새로 개종한 사람들을 가리켜 “빛의 생애들”이라 불렀다. 시리아어 해석자는 이 사실을 마음에 두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한 번”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이 해석 속에 뭔가 중요한 것이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교회가 생긴 이래 지금까지 세례는 오직 한 번만 받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세례를 “조명”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세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새 개종자가 교회의 신비를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례를 받음으로 개종자들은 어둠의 나라로부터 빛과 은혜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이다. 이 말은 본문이 세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세례는 본문에 기록된 나머지 모든 영적 특권들을 누릴 수 있는 시작이요 기초이기 때문에 본문이 세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당시에는 세례 받을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사도 시대에나 가능했던 특이하고 놀라운 영적 은사들을 덧입혀 주는 일이 예사였다.

 

“비췸을 받은”이라는 말이 이와 다르게 해석될 필요가 없다면 나는 아마 이 견해를 지지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이 단어가 신비스럽게 세례라는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본 서신과 신약의 다른 부분들이 쓰여 진후 꽤 오랜 시간, 적어도 한 두 세대는 흐른 뒤의 일이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보면 이 단어는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외적 의식 집행이 아니라 성령의 내적 사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이고 있다. 어떤 단어의 뜻을 해석할 때 성경의 다른 모든 부분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의미와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 그 본문이 반드시 그 뜻을 요구하지 않는 한, 그런데 히브리서의 이 본문은 그렇지도 않다 - 건방진 일이다. 여기서 “한 번”이라는 단어는 “비췸을 받은”이라는 말에만 해당되는 말이다. 따라서 “한 번”은 본문에 묘사되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그런 특권과 축복에 참여했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비췸을 받는다.”는 것은 복음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이다. 종종 보면 “가르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가 “비췸을 받은”이라는 뜻의 헬라어로 번역되고 있다.(출 4:12; 시 119:33, 잠 4:4; 사 27:11과 같은 구절들)히브리어로 “가르치다”라는 말이 70인 역에(헬라어 구약성경)에서는 “비췸을 받은”으로 번역되어 있다(삿13:8; 왕하12:2, 17:27). 바울은 이 단어에 해당되는 동일한 헬라어를 고린도전서 4:5과 디모데후서 1:10에서 사용하고 있다.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저는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또한 요한복음 1:9에서도 이 말씀이 나타나고 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리스도께서는 가르침을 통해 “빛을 주신다.”

바울은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었느니라.”(고후 4:6)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아는 빛”이란 복음이 갖고 있는 영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복음의 교리에 대해 가르침 받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 안에는 우리가 이해하고 영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우선 복음이 그 빛으로,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가져다 준 일들을 이해하고 영적으로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다. 복음은 우리에게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딤후 1:10)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어두운 데서 나와 그의 기이한 빛으로”(벧전 2:9 참조) 들어갈 수 있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복음이 없는 이 세상은 사단의 왕국이요(요일 5:19참조),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은 그 악한 자, 어둠의 권세 잡은 자의 능력 아래 놓여 있다. 따라서 흑암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세상은 “어두운 곳”(벧후 1:19)이다. 이 세상은 무지, 어리석음, 오류, 미신 등이 거하며 다스리는 곳이다. 이 어둠의 막강한 세력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이것을 가리켜 “어두운 가운데 행한다.”(요일 1:6)고 말한다. 그리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것”의 반대는 빛 가운데 행하는 것“(요일 1:7)이다.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을 아는 지식 안에 있는 이 가르침 때문에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을 가리켜 ”조명“이라 부르는 것이다. 즉, 그 자체가 빛이기 때문이다.

복음이 갖고 있는 이러한 영적 진리들을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서는 그 마음 자체가 “조명을 받아야”할 필요가 있다. 복음을 알게 되면 자연인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어둠과 무지 및 혼돈이 추방된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을 자신과 화목 시키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리스도의 직무와 사역 및 중재 역할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다른 교리들에 관한 복음의 가르침에 대해 알게 되면 사람들 마음에 영적인 빛이 비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들 자신의 무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져 있을 동안에는 전적으로 감추어져 있던 진리들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게 해준다(엡 4:18 참조)

그런데 이 빛과 지식에는 여러 등급이 있다. 그 등급은 그들이 어떤 가르침을 받았는지, 또 배운 것을 얼마만큼 수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배운 것을 학습하고 기억하는 데 얼마만한 노력을 쏟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아무튼 복음의 가르침에 의해서만 사람의 마음이 빛을 받아 어둠과 무지로부터 자유케 될 수 있는 것이다.(벧후 1:19-21 참조).

이것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이 누렸던 특권이다. 그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받을 때 그 가르침에 의해 비췸을 받은 자들이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가르침이 마음에 새겨질 때 깊은 감명을 받은 자들이다. 이것은 신자에게나 불신자에게 다 같이 임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 위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복음의 가르침을 받아 우리 마음이 비췸을 얻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으로 말미암아 복음 안에 있는 진리들을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긍휼이요, 우리로서는 굉장한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태만이라는 죄로 말미암아 이 크신 긍휼과 특권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그 죄와 판결이 더욱 중해진다.

이 큰 특권을 전적으로 무시한 채, 복음을 아는 지식에서 커가려 하지 않을 때 그런 사람의 형편은 아주 위험한 것으로 결국 완전히 타락하여 다시 회개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도 혹시 본문에 나온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 아닌지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일을 위해 구원에 수반되는 특권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1) 첫 번째 특권은 “영적 비췸”(또는 영적 조명)이다.

이 세상에는 일종의 순수 자연 학문처럼 성령의 사역이나 특별한 도우심을 받지 않고도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 알 수 있는 영적 지식이 있다. 그것은 여느 다른 학문이나 예술과 같이 연구와 노력을 통해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비췸”은 성령의 선물로서 자연적 지식과는 다르며 그 지식을 능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비췸을 받아 영적인 것들을 깨닫게 될 때는 그 본질적인 것, 즉 어떠한 자연적 지식으로도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자연적 조명은 성령의 일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긴다(고전 2:14 참조) 그러나 영적 조명을 인간의 마음에 영적 복락들에 대한 만족감과 기쁨을 부여해 준다. 이 영적 조명이 비치면 비록 복음을 완전히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의(義)의 도(道)”(벧후 2:21 참조)임은 깨닫게 된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복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자연적 지식은 인간의 영혼에 아무 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즉, 그것은 영혼으로 하여금 죄를 떠나게 하지도 못할 뿐더러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지도 못한다. 많은 죄인들이 이 자연적 지식의 그늘 아래 있으면서 자기들은 안전하여 절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 놓고 있다. 그러나 영적 조명은 인간의 양심과 영혼에 효과적으로 일하면서 그 영혼이 죄로부터 멀어져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을 다할 수 있게 만든다. 그래서 이 조명의 능력과 이 조명이 주는 확신 아래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물들지 않고 깨끗하게 흠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이 영적 조명에도 역시 영적 은사들이 수반된다(마 7:22 참조) 그러나 자연적 깨달음과 지식에는 이러한 영적 은사들이 뒤따르지 않는다. 영적 조명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여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구원의 빛과 지식이 아니다. 그러나 영혼이 그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첫걸음이라고는 할 수 있다. 영적 조명을 받게 되면 인간의 마음은 아마 영적인 일들의 아름다움과 그 영광 및 탁월함을 어렴풋이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직접, 꾸준히 깨닫게 되지는 못한다. 이러한 직접적이며 꾸준한 깨달음은 인간 이성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것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고후 3:18, 4:6참조) 이 영적 조명은 또한 그리스도의 성품을 인간의 가슴에 심어 주고 그 의지를 변화시킴으로 영혼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화(化)하게 해주는 일도 하지 못한다. 그 일은 오직 구원하는 빛과 지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후 3:18; 롬 6:17, 12:2 참조)

(2) 두 번째로 언급된 영적 특권은 그들이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하늘의 은사라는 것이 무엇이며 이 은사를 “맛보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사”라는 말은 때로 주는 행위를 뜻한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5) 여기서 말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부어 주신 관대한 정신을 말한다. 즉, 그들에게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넘치도록 관대하게 헌금할 정신을 부어 주신 것을 말한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엡 4:7), 즉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사람에게 성령의 열매를 주시는 대로”(롬 5:15-17; 엡 3:7 참조)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사”이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자체를 말할 때도 있다(약 1:17참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 ……알았더면.”(요 4:10), 즉 “하나님께서 주신 것 혹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을 알았더면”이라는 뜻이다. 이 구절에서 선물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문맥을 볼 때 선물은 성령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생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수는 주 예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을 말한다.

내가 알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선물”이라는 단어는 성경 어디서나 성령을 말할 때 사용되고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도행전 2:38에 나오는 “선물”(“너희가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자신을 뜻하는 것이다. 성령은 기적을 행하시는 그의 능력 가운데서 주어진다(행 10:45, 11:17참조). 따라서 신약 시대에는 성령이 곧 하나님의 크신 선물이다.

성령은 하늘로부터 오시기 때문에 그를 가리켜 “천상(天上)적”이라고 말한다. “천상적”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성령의 사역과 능력만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의 사역과 능력은 세상적이요 육신적인 것과 반대되는 천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주로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후 친히 보내시는 성령 자신을 말할 때 쓰인다(행 2:33참조).

성령에 대한 약속은 곧 성령께서 하늘로부터 혹은 “위로부터” 보내심 받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위에 계신”하나님 이라고 할 때 그 말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뜻과 같은 이치이다(신 4:39; 대하 6:23; 욥 31:28; 사 32:15, 24:18 참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시기 전 그의 사역을 위해 기름 부으시려고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위로부터 임하셨다(마 3:16 참조). 오순절 날에는 성령께서 “하늘로부터 오는 소리처럼” 사도들에게 임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보내신”(벧전 1:12) 성령이라고 했다. 물론 성령께서 보내신 다른 은사들에 대해서도 “하늘의 은사”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늘의 은사”라고 말할 때 그것은 주로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후 친히 보내 주신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하늘의 은사”란 곧 성령을 말한다.

이와 같은 해석을 불리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 다음에 바로 성령이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무엇 때문에 성령을 두 번이나 언급했단 말인가?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답변하고 싶다. 즉, 어떤 것을 강조하기 위해 똑같은 것을 서로 다르게 두 번 언급하는 일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이다. 특히 본문에서처럼 그 동일한 것이 서로 다른 면을 가지고 있을 때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성령에 참여한바 되었다”는 특권이 “하늘의 은사”를 부연 설명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일은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로서 여기서도 그렇게 보는 것이 합당하다면 굳이 이 해석을 부인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성령은 복음 시대의 큰 선물로 언급되고 있다. 즉, 성령은 하늘에 더 이상 계시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땅위에서의 특별 사역을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큰 선물이다. 성령의 특별 사역이란 지금까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드려지던 예배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 특권에서 보면 성령의 외적 사역에 관해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은 신약 시대 아래에서 주어지기로 약속된 하늘의 은사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새로운 예배 의식을 제정하실 것이다. 성령에게는 교회 개혁의 임무가 주어졌는데 이제 그 때가 온 것이다(히 9:10참조). 하늘로 승천하실 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세 시대 이래로 지켜져 내려오던 구약의 예배법을 그대로 두고 가셨다. 비록 그 예배를 근본적으로 아주 풍요롭게 만들어 놓으시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늘로부터 성령이 내려오시기 전까지는 어떤 변화도 시도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행 1:4,5참조). 따라서 신약 시대를 위해 약속된, 하나님의 크신 선물이신 성령께서 임하시는 때, 모세식의 옛날 예배를 모두 제거해 버리신다. 그는 이 일을 행하시되 그동안 모세 식 예배가 이제 올 것이라고 상징하며 지적해 주었던 모든 것을 드러내심으로써 그 일을 행하신다. 이제 성령께서 복음이라는 거룩한 새 예배를 시작하셨는데 그것은 이전에 행했던 성전 예배를 대신하는 것이다.

이처럼 진리와 예배에 있어서 이 새 복음 상태를 소개하기 위해 특별히 주어진 하나님의 영을 가리켜 “하늘의 은사”라 말한 것이다. 따라서 이 서신을 읽는 독자들은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히 12:25)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하늘로부터 임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복음 시대인 지금도 여전히 이 경고의 말씀을 하고 계시다.

이제 “이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맛보다”라는 단어는 어떤 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시험해본다 혹은 시도해본다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즉, 어떤 것을 “경험”해 본다는 의미이다. 음식 먹을 때를 예로 들면 아주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기 전에 먼저 맛을 본다. 맛을 보는 행위 속에는 삼키거나 소화시키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어떤 것을 맛보았다가 그 맛이 싫으면 뱉어 버린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신 포도주를 맛보시고 마시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마 27:34참조).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어떤 구절들을 보면 “맛본다”는 말 속에 실제로 먹는 행위까지 포함된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어 다윗은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삼하 3:35)고 맹세하는데 여기서 맛본다는 말은 “내가 해 지기 전까지는 떡이나 무엇을 먹는 것은 고사하고 맛도 보지 않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런 맹세를 한 다윗이 무엇을 먹었을리 만무하다. 그런데 요나단이 꿀 조금을 맛보았다고 했을 때(삼상 14:29참조) 는 또 다르다. 그때 그의 말투로 미루어 볼 때 꿀을 실제로 먹은 것이 아니고 맛만 보았으니까 사울 왕의 명령을 어긴 것이 아니라고 해명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아무튼 이 단어는 누군가가 무엇을 체험한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현숙한 아내는 “자기의 무역하는 것이 이로운 줄을 안다(taste)”. 다른 말로 하면 그녀는 자신이 직접 무역을 해보았고 그것이 이로움을 발견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들은 성령의 사역을 직접 맛보고 그것이 좋음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맛본다는 말은 어떤 것을 “체험한다”는 의미로 자주 쓰인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 베드로도 이와 유사한 말을 하고 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벧전 2:3). 따라서 “맛본다”는 말은 어떤 것을 직접 “체험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히브리서 서신을 받은 교인들이 누린 영적 특권이란 곧 복음 안에서 제공된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을 체험한 것을 말한다. 그들은 진리를 계시하신 자요 복음의 새로운 영적 예배를 소개하신 분으로서의 성령을 체험한 것이다. 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도래된 이 새로운 상태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맛보고 체험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누리지 못했던 하나의 특권으로서 말이다. 그것을 맛봄으로써 그들은 이 복음이 자신들이 과거에 드리던 예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훌륭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에 의해 그들에게 온 그 복음의 영광을 체험하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이 특권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묵은 도토리를 되찾기 위해 이 가장 좋은 밀을 버리고자 하는 유혹에 빠진 것이다.

따라서 이 영적 특권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위대한 진리를 배우게 된다.
우리는 신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든 은사가 하늘의 은사임을 배운다. (요 3:12; 엡 1:3참조) 따라서 그것들을 등한히 하거나 경멸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히 2:3참조)

우리는 성령이 신약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크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배운다. 그리고 성령은 복음의 신비를 계시하고 영적 예배 및 그에 관한 규례들을 도입하기 위해 주어졌음을 또한 배운다.

우리는 이 하늘의 은사에는 선함과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리고 구원의 능력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조차도 그 선함과 영광은 어느 정도 “맛보고”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그 진리를 말로는 맛보아 알지만, 그 진리로부터 생명을 주는 능력은 맛보지 못한다. 그들은 교회에서도 순서에 따라 예배는 드리지만 그 예배가 내적으로 가지고 있는 영적 아름다움은 보거나 체험하지 못한다. 그들은 교회의 선물은 체험하지만 교회의 은혜는 체험하지 못한다.

우리는 복음 안에 있는 그 부요함과 영광을 조금 체험한 후 그 복음의 진리와 영적 예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주 무시하는 행위로, 그 당사자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될 위험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3) 세 번째 특권은 그들이 “성령에 참여한바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모든 영적 특권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이것을 중심으로 앞뒤로 각각 두 가지 은사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 모든 은사들은 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따라서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성령에 참여한바”되는 것에 달려 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들임으로써 성령에 참여한 자가 된다. 성령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도 되고 우리 안에서 혹은 우리에게 그의 사역을 행하신다는 말도 된다.

우선 “이 세상은 성령을 받을 수 없다”(요 14:17참조). 그래서 이 세상이 참 신자들을 대적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성령에 참여한 자들이 아니었다. 성령께서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 안에 거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성령께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 안에 거하시게 하도록 성령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은사들을 받아 체험했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성령에 참여한 자가 된다. 그들은 참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영적 은사들 중 어떤 것들을 받아 누리는 특권을 가졌다(고전 12:11참조). 베드로는 마술사 시몬이 아무런 영적 은사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그가 성령에 참여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행 8:21참조). 이처럼 성령에 참여한 자가 된다는 것은 그들 위에 임하시는 성령의 사역 중 어떤 것을 체험하고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만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모든 특권이 다 성령의 은사요 사역 아닌가? 만약 성령에 참여한 자가 된다는 말이 그의 은사와 사역을 받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 특권이 구태여 본문에 언급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나는 여러분에게 성경은 우리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똑같은 것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진술하고 있다는 점을 이미 살펴보았음을 상기시키고 싶다. 그러나 여기 본 서신의 저자는 아마 이 배도자 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즉, 그들에게 그토록 은혜스러웠던 성령,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이 큰 영적 은사들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신 성령께 그들이 얼마나 무서운 경멸과 모욕을 가하고 있는지 깨달으라는 말이다.

다른 모든 특권들이 성령께 달려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성령에 참여한바 되었다는 이 특권이 한 중앙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이 성령에 참여한 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늘의 은사”인 성령께서 “그들에게 비췸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을 체험하는 가운데 그들은 “성령에 참여한 자”가 된 것이다.

이 특권은 성령께서 그들로 하여금 이런 일들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게 해주셨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런데 그 체험이란 그들이 이런 일들에 대한 설교를 듣거나 교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직접 목격한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성령께서 그들로 하여금 직접 체험하게 해주셨다는 의미도 된다. 따라서 그들 자신이 이런 일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친히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교회의 은사 사역으로 말미암아 혜택을 입고 그 은사들에 동참한다는 것과 자기가 직접 그 은사들을 받는다는 것과는 서로 별개의 문제다.

따라서 그들이 복음 아래서 누리게 된 그 큰 특권에 대해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그 특권은 그들이 유대주의 아래서 누리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주의 아래서는 성령이 계시다는 소리조차 별로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행 19:2참조). 그런데 이제 그들은 개인적으로 성령에 참여한 자들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의 입장에서 볼 때 이처럼 큰 특권을 등한히 하고 경멸하는 것보다 더 큰 모욕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더 사악한 배신이 어디 있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비록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다 성령이 내주하는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롬 8:9참조). 성령의 은사들은 받았으나 그의 구원하시는 은혜는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마 7:22,23참조).

(4) 이 배도자들이 누린 네 번째 특권은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을 맛본” 것이다.

여기 “말씀”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본래 구어, 즉 입으로 낸 말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 서신에서만은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히 1:3, 11:3참조) 그러나 성경에서 이 단어는 주로 “입으로 낸 말”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적용하면 설교되고 선포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롬 10:17; 요 6:68참조) 따라서 이 배도자들이 맛본 것은 설교되어진 복음이었다.

그러나 유대주의 아래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기지 않았던가? 물론이다. 그때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겼다.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기”(롬 3:2)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좋은 일들(그들이 맛본 특권들)이 전해지게 된 것은 복음 아래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뿐이다.(롬 1:16; 행 20:32; 약 1:21참조)

이 말씀은 꿀이나 송이꿀보다 더 단 “좋은” 것이다(시 19:10참조). 특히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선한 말씀”(렘 29:10)이라 불리고 있다. 이것은 약속된 “선한 일”이다(렘 33:14).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평화와 구원이라는 “복된 좋은 소식”인 것이다.(사 52:7)

본 서신의 저자는 그들에게, 전에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던” 것처럼 그렇게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맛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 배도자들은 복음을 믿는 참 신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로 영접하여 생명의 떡 되신 그를 먹고 그로 말미암아 사는 그런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요 6:35, 49-51, 54-56참조)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영혼을 위한 영적 음식을 받아먹어 소화시킴으로써 그 음식을 자신의 영적 양분으로 삼은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맛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자신의 영적 건강과 성장을 위한 젖으로 생각하고 소원해야 마땅한데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대신 그 선한 말씀을 등한히 하고 이제 그 말씀으로부터 돌아섰다. 마치 자기 앞에 차려진 음식을 우습게 여기는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 있는 그 선하심과 영광은, 그 말씀에 절대로 진지하게 순종하지 않을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매혹시키고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의 말씀 및 그 약속의 성취를 설교하는 데는 특별한 선하심이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하고 영광스러운 이유는 그것이 하늘의 영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모든 진리는 바람직하고 아름답다. 인간의 마음이 진리를 받으면, 진리는 자신이 갖고 있는 이미지에 그 마음을 일치시키면서 그 마음을 온전하게 만들어 준다.

참된 것은 무엇이든지 또한 선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진리와 선을 나란히 적어 놓았다(빌 4:8참조). 그리고 진리는 그 자체가 선하므로 마음에 미치는 영향 또한 선하다. 진리는 마음에 평안과 만족감을 가져다준다. 어둠, 오류와 거짓은 그 자체가 악하므로 인간의 마음을 교만, 불안정, 미신, 두려움 및 속박으로 채운다. 영혼을 자유케 하는 것은 진리이다.(요 8:32참조) 하나님의 말씀만이 순전하고 순수하며 확실한 진리이다(요 17:17 참조). 하나님의 말씀에 없으면 인간의 마음은 끝없는 추측으로 방황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만이 변함없이 확고하며 절대 무오하다. 이것이 영혼에 안정을 가져다준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은 무오한 진리로서 눈을 밝게 하고 영혼에 안식을 가져다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안에 있는 선한 가르침 때문에 선하다.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이 이 말씀 안에 선포되고 있다. 유일하게 선하실 뿐 아니라 모든 선의 유일한 원천이요 근원 되시는 하나님, 그분의 즐거움 안에 모든 안식과 축복이 놓여 있으며, 그로 말미암은 계시, 그분의 본질과 속성,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선한 것으로 만든다(요 17:3 참조). 온 세계 및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즐기는 것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훨씬 더 나은 것이라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그의 말씀은 선한 것임에 틀림없다(렘 9:23,24 참조). 하나님의 말씀은 삼위일체라는 영광스러운 신비를 계시하고 있는데 그 점 때문에도 역시 놀랄 만큼 선하다. 다른 모든 거룩한 진리들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 곧 삼위일체라는 신비요 그에 대한 지식이다. 그 진리 없이는 어떠한 진리도 바로 이해할 수 없으며 또 어떠한 진리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보고자 하시는 참 선(善)으로 인도해 주지 못한다. 이 진리만이 영혼에 참 평안과 안식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신앙 면에서나 순종 면에서 볼 때 이 세상에서 가장 미흡한 신자라도 이 진리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비록 그가 삼위일체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해 줄 수는 없지만 말이다. 모든 은혜와 진리가 다 삼위일체라는 교리 위에 세워져 있으며 그들은 죄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 위한 모든 능력을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이끌어 낸다. 따라서 이 신비를 계시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선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을 때 우리 것이 되게 되어있는 하나님의 자비, 은혜, 용서, 칭의, 양자 삼음 그리고 다른 모든 놀라운 축복들을 계시해 주고 있기 때문에 선하다.

그것은 또 말씀이 가지고 있는 복된 효과 때문에 선하다(시 19:7-9, 행 20:32, 약 1:21 참조). 하나님의 말씀이 지니고 있는 탁월함, 가치 및 선하심과 견줄만한 것이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선하다.

본문의 그 배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그 말씀이 진실됨을 인식했을 때 이 말씀을 맛보았다. 이것이 마음에 평안을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음이 새롭게 됨을 받지 못했다. 세례 요한이 진리를 설교할 때 들은 자들은 그 진리로부터 얻은 마음의 만족감 때문에 즐거워하였다(요 5:35 참조). 이런 현상은 그리스도의 설교를 들은 자들 가운데서도 나타났다(눅 4:22, 요 7:46 참조). 우리 주요 구세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됨으로써 정욕으로 더럽혀진 이 세상의 오염들을 피하고 잘못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청산할 때, 인간은 그 마음에 안식과 만족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선하심과 달콤함을 맛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이 구원에 도달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오직 “하나님 말씀의 선하심을 맛본”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씀 안에 있는 가르침에 관해서라면 그들은 그 선하심을 맛보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가르침들이 그들이 장차 누리게 될 것들에 대한 소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자비, 용서, 생명, 영원히 죽지 않음, 영광,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안에 선포되어 있다. 그들은 이 진리들을 기쁘고 만족스럽게 맛본 것이다. 그러고는 자기들은 그것들을 정말 받았으며 그것에 순복해 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 진리들을 정말 받지도 못했고 그 진리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도 못했기 때문에 핍박자의 불이 일어나면 곧 넘어져 버린다(마 13:20 참조).

이것을 맛봄으로써 마음과 양심에 말씀이 효력을 발하여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또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들으며 기쁨과 만족을 느낄지도 모른다(겔 33:30-33 참조). 그들은 듣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들은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헤롯은 세례 요한이 하는 말을 기쁘게 듣고 많은 일을 행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맛만 보았을 뿐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당시 많은 군중들 역시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을 쫓아다녔다. 그러나 그 말씀을 실제로 영접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그때의 군중들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 맛봄은 말씀을 들을 때 기쁨을 줄 뿐 아니라 들은 것들에 대해서도 역시 기쁨을 갖게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우리 구주께서 돌밭에 비유한 그런 사람들처럼 말씀을 듣는 자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을 때 기쁨으로 그 말씀을 받았다(마 13:20 참조). 세례 요한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처럼 말이다(요 5:35 참조). 오직 맛만 보았기 때문에 그 말씀은 그들이 들은 것에 대한 기쁨만 일으킬 정도의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기쁨은 견고하게 내주하는 그런 기쁨이 아니다. 이것은 참 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이 아니다(벧전 1:8 참조). 그들의 기쁨은 곧 사라져버리는 아침 안개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자비, 용서, 은혜, 영원한 생명, 영광에 대해 생각하고 기뻐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구원을 위해 이런 것들을 확실히 받고자 하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맛보면 많은 의무를 수행할 준비가 될 만큼 그렇게 삶에 변화와 개혁이 일어날 수도 있다(벧후 2:·18, 20; 막 6:20 참조).

복음의 말씀과 복음 안에 선포된 그리스도는 우리 영혼을 위한 양식이다. 참 믿음은 이것을 맛볼 뿐 아니라 양식으로 섭취하여 은혜 및 영혼의 양분으로 삼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먹고 살려면 먼저 그것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눅 1:66, 2:19 참조). 음식이 위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어떤 자양분도 그 음식으로부터 섭취할 수 없다. 위 속에 들어가야 비로소 그 음식이 소화되어 온몸에 자양분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묵상과 기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받지 않는다면 그 말씀 때문에 잠시 기뻐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영혼을 위한 양식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음식은 소화액과 섞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양분이 되지 못한다. 어떤 사람에게 아무리 많은 음식을 준다 해도 그 사람이 소화액의 부족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라면 그 음식은 양분이 되어 그 사람 몸속으로 흡수되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말씀도 믿음으로 소화되어 가슴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절대 우리 영혼을 위한 양분이 되지 못한다(히 4:2 참조). 이것은 단순히 맛만 보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사람이 말씀을 먹고 살면 그 말씀이 인생의 원리가 되며 영적 성숙을 낳는 영적 힘이 된다. - 이것은 맛보는 것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음식이 소화되면 피와 살이 되듯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도 우리 영혼에 생명을 가져다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명”이 되시며 우리의 영적 성장을 일으키는 능력으로 “우리 안에 사시게 된다.”(갈 2:20; 골 3:3 참조). 우리는 말씀에 의해 영적으로 성장한다(벧전 2:2 참조). 단순히 맛만 보는 것은 순간적인 상쾌함은 가져다줄지 모르지만 내주하는 힘은 절대 부여하지 못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말씀이 선포될 때 그것을 즐거워할 수는 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그 말씀을 자기 가슴에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영적 생명도 소유하지 못하고 영적 능력이나 성장도 누리지 못한다. 말씀을 진실로 받으면 그 말씀이 영혼을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우리를 변화시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우리를 자신처럼 만드시기 위해 이 음식을 보내 주신 하나님처럼 말이다(엡 4:21-24; 고후 3:18 참조). 그러나 단순히 맛만 보고서는 이 중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요 또한 모든 시련과 시험 가운데서도 끝까지 말씀에 충실할 정도로 진리에 대한 사랑을 갖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살후 2:10 참조). 또 맛만 보고서는 말씀에 대한 순종의 열매들도 맺지 못하게 될 것이다.

 

(5) 마지막으로 언급된 특권은 “내세의 능력”이다.

그 배도자들은 이 특권 역시 개인적 체험으로 맛보았다. 이 내세의 능력이란 성령의 크고 놀라운 활동과 사역을 말한다. 성령께서 행하실 이적과 기사 및 놀라운 일들에 대해서는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한 바 있다(욜 2:28-32; 행 2:16-21 참조). 이 배도자들도 이러한 능력들, 즉 방언의 은사라든가 성령의 다른 기적적 사역들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그들에게 이와 같은 능력을 부여하신 성령을 무시한다는 것은 성령 모독죄를 쌓는 행위로 그들의 죄만 더욱 가중시킬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많은 이적과 기사로 하나님이 증거 하신 진리 그리고 성령이 나누어 주신 여러 은사들과 이적들로 말미암아 증거 된 진리를 거절하고 있다(히 2:4 참조). 그렇다면 성령이 나누어 주신 초자연적 은사들로 말미암아 증거 된 이 큰 구원을 등한히 하고 멸시했으니 저들이 어찌 피하리오(히 2:3,4)?

성령이 주시는 보통 은사들도 역시 “내세의 능력”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한 모든 것 역시 내세의 능역이다. 왕국을 처음에 세울 때는 큰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왕국이 일단 세워지고 나면 보통 능력만으로도 그 왕국을 지킬 수 있다. 그리스도의 왕국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처음 세울 때는 성령의 특별한 기적적 은사들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일단 세워지고 난 후부터 그 왕국은 보통 은사들에 의해 계속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보통 은사들 역시 “내세의 능력”에 속하는 것이다.

 

 

 

1. 복음을 배반하는 이유 및 그 성격 (2)

(히 6:4)"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우리는 이 모든 영적 특권들로부터 이 서신의 저자가 심중에 두고 쓴 사람들이 누구인지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 그들은 진지한 참 신자들이 아님이 분명하다.
본문에는 신앙이라든가 믿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또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졌다고 생각할 만한 아무 이야기도 없다. 저자는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 받은 자들”이라 칭하지도 않고 있다. 또 그들이 중생했다는 기록도 없으며 칭의 되었다든가, 성화되었다든가, 그리스도께 연합되었다든가 혹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기록도 없다.
한편 본 서신의 저자는 그들을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흡수하지만 가시와 엉겅퀴만 내는 땅에 비유되고 있는데(히 6:7), 이것은 참 신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믿음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정원 안에서 특별히 자란 약초이기 때문이다. 본 서신의 저자는 참 신자들을 묘사하면서 이 배도자들과 구분하고 있다. 신자들 안에서는 그보다 더 나은 것, 구원에 가까운 것을 발견한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다(9절). 신자들이 그들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은 오직 참 믿음뿐이기 때문이다(10절). 그러나 그 배도자들에 대해서는 이 중 어느 것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
본 서신의 저자는 신자들에 대해 다음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신실하심 때문에 그리고 그들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 때문에 그들은 영원히 보존된다는 사실 말이다(10,17,18절). 이 모든 것 그리고 다른 많은 점에서 신자들은 배도자들과 구분된다.

(2)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특별한 영적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방언이나 이적을 행하는 은사 등과 같은 성령의 특별 은사들을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과 메시아의 왕국(그들이 “내세”라 부르는)이 자기들에게 임했음을 확신시켜 주는 증거들을 자신들 및 다른 사람들 안에서 발견하였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 중 몇 가지를 직접 체험하고 만족 해 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마음에 비췸을 받고 가슴이 변하는 체험을 했으니 아마도 신자들 간에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그리스도와 복음의 진리 및 거룩함에 대항하는 악의에 찬 적대감과 죄와 세상에 대한 광포한 사랑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이들로 하여금 신앙으로부터 돌아서게 하고 그들이 받은 그 모든 빛과 진리에 대한 확신을 말살시키려 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니 거창한 은사나 특권을 받아 누리는 것보다 최소한의 구원의 은혜를 받는 것이 천국 가는 데는 훨씬 더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만약 타락하면”(If they fall away, 한글 개역에는 “타락한 자들은”으로 번역됨 - 역자 주, 히 6:6). 본 서신의 저자는 이 배도자들이 타락할 수도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부인했으나 나중에 회개하여 다시 새롭게 된 베드로의 예를 보더라도 우리는 사람이 유혹을 받아 타락하여 죄를 짓기도 하지만 회개하면 새롭게 될 수 있는 것이지, 회개가 불가능한 어떤 특정한 죄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타락하다”라는 말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해서 반항하고 불순종하는 것을 뜻함에 틀림없다. 사람은 죄를 짓다가도 그 마음에 여전히 복음의 빛이 주는 원리와 확신을 지니고 있어서 다시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다. 이런 사람에게 회개의 가망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 진리의 전체 취지에 어긋난다(겔 18:21; 사 55:7 참조). 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그 삶이 변화되는 체험을 몇 번 했다가도 또다시 타락하여 오랫동안 악한 길로 행할 수도 있다. 이에 해당되는 아주 좋은 예가 바로 악한 왕 므낫세이다. 그는 결국 회개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용납을 받는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 안에 어떤 빛의 씨앗이라든가 소생할 가망이 있는 진리에의 확신이 있는 한, 그래서 그것이 그 영혼 안에서 다시 한 번 더 능력 있게 역사할 가망성이 있는 한 이런 사람들을 회개가 전혀 불가능한 배도자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들이 지금 현재 아주 위험한 삶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바울은 “실족”과 “타락”(넘어짐)을 구분하고 있다(롬 11:11 참조). 바울은 유대인들이 넘어지기까지 그래서 회복의 가망이 전혀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실족”에 해당되는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다만 그 실족의 도가 심하다는 표현을 주기 위해 전치사 “away"가 첨부되어 있을 뿐이다. 이것은 그들이 아주 끔찍하고 무서운 방식으로 실족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든가 실족해서 결국은 넘어지게까지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본문에 나오는 “타락하다”(넘어지다)라는 말이 뜻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그것은 그 죄의 성격이 무엇이든 간에 실제로 이 죄 또는 저 죄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2) 그것은 어떤 유혹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유혹에 빠졌다가 다시 회개에 이른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유혹에 빠지는 일은 사전에 계획된 것도 아니요 의도적으로 택해서 빠지게 되는 것도 아니다.

(3) 그것은 기독교의 중요한 본질적 원리 몇 가지를 부인하는 그런 타락이 아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인하는 죄에 빠졌었고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얻게 되는 칭의를 부인하는 죄에 빠졌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타락은 기독교의 주요 원리 및 교리를 모두 전적으로 부인하는 타락임에 틀림없다. 복음을 부인하고 유대교로 돌아간 자들의 죄가 바로 이런 타락인데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타락도 바로 이런 것에 해당된다. 이 타락이 정말 구원의 소망도 없는 마지막 타락이었다면 이러한 부인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 당사자가 유대교든 아니면 다른 종교 혹은 이교(異敎)로 돌아서기 위해 기독교를 완전히 저버리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으로는 이미 복음을 완전히 저버리고서도 어떤 세상적 이목이나 두려움 때문에 여전히 기독교를 믿는 것처럼 행세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배도를 눈가림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조롱당하시는 분이 아니다. 이러한 철저한 거짓말은 오히려 그들의 죄만 가중시켜 나중에 더 중한 판결을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타락”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복음의 규례 및 그에 대한 순종을 자진해서 저버리기로 결심한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그리스도 자신에게 최대의 비난과 모욕을 안겨 주는 일이다.

이러한 배도자들에 대해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

그들은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
새롭게 되어 회개할 수 있는 길이 그들에게는 막혔다. 사실 그들이 새롭게 되어 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을 전적 불가능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단지 도덕적 불가능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 “불가능”이 어떤 불가능을 의미하는지 그 참 뜻을 결정하려면 다음과 같은 원리들을 참작해야 할 것이다.

(1) 미래의 모든 사건들은 홀로 반드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사건도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것은 존재하지 말라 혹은 저 사건은 일어나지 말라고 제정하신 미래의 일들을 사실 불가능한 것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울과 그의 후손이 이스라엘 나라에서 존속되는 일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질에 반(反)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일을 금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삼상 15:28,29 참조). 그러나 이 본문에서 의미하는 것이 구원하시고자 택한 사람들(그들이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정하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이 없다면 구원 얻는 사람들이나 구원 얻지 못하는 사람이나 다 똑같은 상태 혹은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롬 9:11,12 참조). 하나님이 정하시는 일은 하나님 혼자만 속으로 알고 계시는 비밀이기 때문에 그 정하신 일이 역사를 통해 실제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사 40:13,14; 롬 11:34 참조).

(2)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불가능한 일들이 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운 공의와 율법을 만족시키지 않은 채 죄를 용서하실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법도를 존중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이 배도자들의 회개가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몰론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나는 여기서 불가능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배도자들을 회개로 이끄신다는 데에는 그의 본성에 반(反)하는 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새롭게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까닭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보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 주권자 되신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하신 영광의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마귀나 지옥에 있는 자들에게보다 이 배도자들에게 더 많은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본 구절의 의미가 그런 뜻이라고 단언하지는 않겠다.

(3) 어떤 일이 가능하고 불가능하고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든 일의 질서와 규칙에 준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더러 이 배도자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의 길로 인도하라고 명하시지 않았다. 우리에게 그들을 회개로 이끌 수단을 제공하신 것도 아니요 만약 우리가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의 길로 이끌 경우 우리를 돕겠다고 약속하신 거서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배도자들을 새롭게 해서 회개케 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히 11:6). 이처럼 하나님께서 명령을 내리신 거서도 아니요, 수단을 제공하신 것도 아니요, 도움의 약속도 하시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이 배도자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하려는 어떤 시도도 할 수 없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이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시키려 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나 도움의 약속도 전혀 받지 않고 우리 고집대로 그 일을 자행하는 셈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일을 성사시키지도 못할 것이요 그 일을 시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도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제시하신 뜻과 도우시겠다는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행하는 일이 아니면 그 일은 죄이기 때문이다(롬 14:23 참조).
따라서 우리가 배도자들을 회개로 이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모두 알듯이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의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일들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배도자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하는 일은 그런 일에 속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행하실 것이라는 것과 우리에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신다 혹은 원하시지 않는다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여기서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이 배도자들이 다시 새롭게 되어 회개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사용된 “회개”라는 헬라어 단어는 “마음의 은혜로운 변화”라는 뜻이다. 그 변화는 복음의 원리 및 약속이 그 영혼 전체를 하나님께로 돌이키면서 일어나게 된다.
“새롭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헬라어로는 “새롭게 하여 다시 회개케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 배도자들이 자신을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뜻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그 배도자들을 새롭게 해서 회개케 하는 일이 불가능 하다”는 뜻인가?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불가능은 다른 사람들의 의무와 노력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이런 말이다. 누구든지 이 배도자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하려고 해보았자 그것은 쓸데없는 일이요 시간 낭비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한다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새롭게 한다.”는 단어는 우리 본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다시 헌신한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따라서 이 새롭게 한다는 말 속에는 우리의 본성을 회복한다는 뜻과 우리의 전인격을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뜻이 다 담겨 있다.
이 새롭게 됨은 내적으로 참되게 새롭게 되는 것이거나 아니면 외적 표시나 입술로만 하는 신앙의 외적 고백에 지나지 않는 것, 둘 중 하나이다.

우리는 성령의 새롭게 하시고 성화시키시는 사역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새로워진다(딛 3:5; 살전 5:23 참조).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배도자들은 한 번도 새롭게 되고 성화된 적이 없었으므로 다시 새로워진다는 말은 해당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새롭게 된다는 말은 외적 표시나 입술로만 하는 신앙의 외적 고백을 의미할 뿐이다. 이런 뜻에서 새롭게 변화되었다는 것은 세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을 받아들여 회개한 사람 누구나 다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배도자들은 비록 회개와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까지 받았지만 한 번도 새롭게 되거나 성화된 적이 없다. 이처럼 외적 변화만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타락하여 기독교 신앙과 자신들이 받은 세례마저 그렇게 철저히 부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 어디에고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용납되었다가 다시 거절되었다는 말은 전혀 있지 않다. 또 본문은 어떤 사람이 주님을 믿다가 아주 큰 죄를 짓고 다시 죄 된 길로 돌아서서 그런 삶을 오랫동안 영위하다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고자 할 때, 그가 성도의 교제를 다시 나눌 수 없다는 뜻도 아니다.
본문은 오히려 이런 죄인들에게 용기를 주는 구절로, 그들은 본문에 기록된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시켜 주고 있다. 그렇지만 본문은 또 유대교로 돌아가고 싶어 하거나 혹은 기독교 신앙을 영접하기 전에 자신들이 살던 옛 생활방식대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경고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파할 때 배도하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중한 다스림을 사람들에게 분명히 밝혀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선하심뿐 아니라 그의 엄하심 또한 보여 주어야 한다. (롬 11:22 참조)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히 12:29)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즉 하나님은 무한히 순전하시고 거룩하시며 의로운 분이므로 만약 우리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그를 기쁘시게 섬기기 위해 은혜”를 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갑자기 예상치 않았던 때에 아주 엄하게 우리를 다루실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 원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하심과 지혜에 따라 반항하는 배도자들을 이처럼 엄히 다스리신다. 그런데 이런 엄한 처사는 만약 우리가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거스를 경우 우리도 그와 같이 엄히 다스려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예로 주어진 것이다. 세상에는 하나님이 그 공의나 위엄 혹은 지혜에 비추어 반드시 처벌하는 죄나 죄의 정도가 있는데 그것은 그와 똑같은 길을 가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의 본보기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경우 하나님께서 엄하심을 나타내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엄하심은 무모하고 아주 극악무도한 죄인들, 특히 교회와 영광을 대적하는 원수들에게 내려지는 심판에서 볼 수 있다. (나 1:2 참조)
이 세상으로 하여금 정신 차리고 앉아서 하나님의 엄하심을 보게 하려면 그분의 심판은 아주 이색적이어야만 한다.(민 16:29,30 참조) 그리고 모두에게 분명하고 확실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신다. (신 7:10 참조) 하나님께서 당장에 보응하신다는 것은 그 보응을 공개적으로 만인이 보는 앞에서 하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할 그 때에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른다.(살전 5:3) 이러한 멸망이 큰 성 바벨론과 바벨론을 지지한 모든 자들에게 언젠가 임할 것이다.(계 18:7-10 참조)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심판은 그런 심판이 아니다.
하나님의 엄하심은 영적 심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영적 심판에 의하여 배도자들을 다시는 새롭게 되어 회개에 이를 수 없는 형벌 아래 두신 것이다. 이 심판에는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는 형벌이 있다.(딤전 5:24 참조) 다시 말해 그들이 다음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를 절대 피할 수 없도록 이 세상에서 심판을 내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더 이상 관심도 갖지 아니하시며 그들로부터 어떤 영적 열매도 기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개종과 회개의 수단을 자비롭게 제공해 주실 때는, 그분이 회개의 열매를 찾고 계시다는 뜻이다. 마치 포도원을 가꾸는 사람이 포도 열매를 기대하듯 말이다.(사 5:2,4 참조) 따라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회개할 수단을 더 이상 주시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 사람으로부터 회개의 열매를 더 이상 기대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무도 사막을 돌보지 않듯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더 이상 돌보시지 않는다. 그분의 백성은 돌보시지만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절대 회개하거나 믿지 못하게 하시려고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다. (요 12:39,40 참조)
하나님은 자신의 엄하신 심판에 따라 저희들이 악한 정욕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실 수도 있다.(롬 1:26,28,29 참조) 저들은 마치 쇠사슬에 묶이듯 이 정욕에 사로잡혀 있어 도저히 일어나 회개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믿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시려고 유혹을 저희 가운에 역사하게 하시어 저희로 거짓말을 믿게 하신다.(살후 2:10-12 참조) 복음의 진리가 저들에게 전파되었고 저들은 한동안 그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했다. 그들은 그 진리를 영접했다. 그러나 그것에 순종할 만큼 그 진리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와 정욕 및 불의를 즐거워하여 회개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복음이 이런 죄들을 정죄하고 심판하자 그들은 진리 자체를 싫어하고 은밀히 증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계속 믿는 척해야 하니까 이런 죄들을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이 단계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사단의 세력에 넘겨주신다. 그러자 사단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그들이 믿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거짓말을 가지고 그들 눈을 멀게 하고 유혹하며 속이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겉으로 그리스도인 신분은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죄나 정욕은 버리려 하지 않는 그 많은 사람들이 로마 가톨릭의 우상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배반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신자들이 다시 새롭게 되어 회개케 된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인간의 타락한 본성 속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들을(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려는” 성향이 있다.(롬 2:4,5) 그래서 그 영적 완고함과 뉘우칠 줄 모르는 마음 때문에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자신들에게 쌓고 있다.
따라서 설교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뿐 아니라 엄하심도 설교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배도할 위험에 대해 경고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도 회개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 이런 배도의 위험에 처한 모든 사람들에게
“만약 누구든지 뒤로 물러가면 하나님의 영이 그를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해야 한다.
그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경고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죄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심판받게 하시려고 그들 가운데 유혹을 역사하게 하신다”는 사실도 경고해야 한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하시겠다는 약속 대신 오히려 그들에게 가혹한 협박만 많이 하셨다는 사실을 경고해야 한다. 그들은 마치 “두 번 죽는 나무요 뿌리채 뽑힌 나무”와 같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소망이라고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께서 그들을 사셨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래서 이런 홀연한 멸망을 자초한 것이다.
본문이 최초로 사도 시대에 성령의 특별하거나 기적적인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공정하게 분석해 볼 때 이 경고는 그러한 기적적인 은사가 그친 오늘날의 교회의 교인들에게도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성령께서 주시는 평범한 은사나 특권을 받고 있는 우리들도 그 때와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복음에 신실한 의무가 있다. 따라서 이 경고는 처음 쓰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한 경고이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두려운 마음을 갖도록 하라.” 벼랑 끝에 너무 가까이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배도자들이 새롭게 되어 회개에 이를 수 없는 이유

어떤 헬라어 필사본들을 보면 “그들 자신에게”라는 헬라어가 빠져 있다. 따라서 그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해석은 아니지만 본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다.
즉, 누구든지 이 배도자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배도자들은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완전히 거부했다.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받게 된 모든 혜택들도 다 공공연히 부인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처음부터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는 의미가 되는데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그리스도가 또다시 제물로 드려질 수는 없다. 따라서 그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일도 있을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의 죄는 속죄될 수가 없다. 당시에는 미사에서 매일 드려지는 피 흘림 없는 그리스도의 제물이 아직 제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에 나오는 율법 아래서의 속죄 제물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제물은 그들이 과거에 범한 죄만 법적으로 속죄하는 것이므로 그들이 또 짓는 죄에 대해서는 다른 속죄 제물을 드려야 했다. 따라서 죄를 범할 때마다 그 죄를 위해 새로운 속죄 제물이 드려져야 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일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죄를 위해 단번에 드려진 예물이므로 그 예물을 거부하고 그이 피가 자신들의 죄를 속죄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또 드릴 수 있는 다른 예물이 없다. “그리스도는 더 이상 죽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가 드린 단 한 번의 제사로 말미암아 모든 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 그리고 율법 아래서 속죄될 수 없었던 모든 죄까지 다 속죄된다.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행 13:39) 율법 아래서는 어떤 희생 제물로도 속죄될 수 없는 죄들이 있었다. 그런 죄를 범한 사람은 가차 없이 죽어야만 했다. 살인과 간음이 바로 이런 죄에 해당한다. 그래서 두 가지 죄를 다 범한 다윗이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시 51:16)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희생은 이런 죄들도 속죄했다.
그러나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배도를 속죄할 희생 제물은 없었다. 구약시대 때는 율법의 근본 원리들에서 완전히 떠났거나 혹은 “도에 지나친”죄를 범했을 경우 이를 속죄할 다른 제사가 지정되어 있지 않았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을 멸시하는” 행위였다. 때문에 이런 죄를 범한 사람은 “긍휼 없는 죽음”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히 10:28) 그리고 이것은 복음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고의적으로 배도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받게 되어 있는 모든 권리를 상실하게 될 뿐 아니라 어느 곳에서도 그들을 위해 지정된 다른 희생 제물을 발견할 수 없다. 대신 그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 멸망당할 일만 남아 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모든 긍휼, 은혜, 구원은 오직 한 가지 예물,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물로만 국한된 것이다.(히 9:25-28, 10:12,14 참조) 그의 무한하신 지혜와 주권적 기쁨 아래 하나님은 그 모든 은혜와 긍휼과 축복을 그리스도 한 분 안에만 두셨다.(요 1:14,16,17; 행 4:12; 골 1:19 참조)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이 “단 한 번의 예물”만으로도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 오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속하기에 충분하며 아주 강한 효력을 발한다. 그래서 단 한 번의 예물 되신 그리스도께 오는 죄인 중, 죄를 위한 제사를 단 한 번만 드리고 더 이상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만약 누군가 이 한 번의 제사를 거부하고 멸시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 잘못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다른 제사(가령 미사와 같은)를 드리게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이 단 한 번의 제사가 가져다주는 어떤 축복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을 보면 이것은 곧 배도자들 자신의 행위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일”이라고 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다시 못 박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실제로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을 수는 없지만, 그분을 도덕적으로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그들은 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못 박는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악인으로 취급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행위를 옳다고 인정하고 정당화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은 셈이다.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복음에 순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를 거짓말쟁이요 하나님을 모독한 자요 악인으로 간주하는 것이며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주장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그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여지든지, 악인으로 몰려 거부당하든지 양단간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 배도자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고 악인으로 선언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를 저버리고 유대교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들은 또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및 그의 도를 믿어 보았지만 그 안에서 어떤 진리나 선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았다. 배도자 율리아누스 황제의 모토는 “당신의 복음을 읽고 알아 본 결과 나는 그것이 나쁘다고 본다”는 것이었다.
자기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믿어 본 결과 그 안에는 흠모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공공연히 선언하는 것보다 더 예수 그리스도께 불명예를 안겨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들은 만약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다시 십자가에 못 박겠다고 선언하는 셈이다.
이 죄만도 엄청난 죄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쁜 것은, 그들이 자신들에게 다시 못 박은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아직 굴욕의 자리에 계실 때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즉, 그가 “자신을 비우고 어떤 선한 증거도 얻지 못하셨을” 때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그분의 외적 조건이나 약함을 통해 “그의 영광,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하신 영광”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배도자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영에 의해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것이다. 이 배도의 죄가 막중함은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분을 직접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배도함으로 말미암아 “그를 현저히 욕보였기” 때문에 그 죄가 더욱 가중하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아들을 멸시한 것이다. 여기서 “현저히 욕보였다”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 헬라어는 다음과 같은 뜻을 담고 있다. 즉, 가해자로 생각되는 사람을 공개적으로 처벌하여 만인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는 것으로, 그를 본 사람이 모두 그를 혐오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했음을 알았을 때도 이와 똑같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마 1:19 참조). 그는 “마리아를 공공연한 본보기로 삼고 싶지 않았다.” 즉, 그는 혹시 간음을 범하게 될지도 모를 어떤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의 본보기로서 그녀가 부끄러운 형벌받기를 원치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히 12:2)고 말하고 있다. 십자가 위에서 그는 참혹한 고통을 겪으시며 공개적인 수치를 당하셨다. 그 당시 십자가형은 특히 수치스러운 죽음이었다. 그런데 이 배도자들이 그와 똑같은 죄를 범한 것이다.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고 공개적으로 그를 욕보였다.”
“그러나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고 그를 현저히 욕보인 자들도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받을 수 있는데 왜 이 배도자들은 그 용서와 긍휼을 받을 수 없단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다음과 같다. 즉, 복음의 진리를 맛본 후 그리스도와 복음을 저버린 자들의 죄는 그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죄보다 훨씬 더 중하다는 것이다.
그 죄가 더 중한 이유는,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십자가에 못 박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었다(행 3:17; 고전 2:8; 딤전 1:13 참조).
이 배도자들은 복음의 진리 및 그 선하심과 영광을 체험했다. 그리스도를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그 중 어느 것도 체험하지 못했고 체험할 수도 없었는데 말이다. 이 배도자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성령에 의해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은혜와 사역마저 거부한 이 배도자들에게는 더 이상 긍휼과 은혜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이 배도자들이 범한 죄 속에는 성령을 훼방한 죄도 들어 있다. 그들은 성령을 체험했고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는 그의 능력도 체험했다. 따라서 그들은 성령의 이 사역을 마귀의 일로 돌리지 않고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12:3).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고 부르는 것은, 곧 그는 저주받을 자요 몹쓸 사람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공공연하게 선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배도자들이 행한 일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감히 이런 일을 자행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배도자들이 이전에는 그리스도와 그 복음의 진리 및 선하심에 대한 성령의 증거를 받았던 것처럼 이제는 그들의 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을 공개적으로 욕보인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성령으로부터 배운 것과는 위배되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 복음에 대한 부분적 배반 이제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손에 의해 고난당하실 수 있는 곳은 그의 복음과 교회 안에서 뿐이다.
중요한 복음적 진리 중 어느 것을 저버리고 거부할 때, 복음에 대한 순종을 계속 등한히 할 때, 복음이 가르치고 요구하는 대로 살지 않고 다른 것들을 믿기 시작할 때, 우리는 복음을 부분적으로 배도하는 셈이다.
인간은 자신을 기쁘게 하고 자신에 대해 좋게 생각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교회들은 자기들이 드리는 예배 의식이나 순서가 제대로 지켜지면, 특히 그로 말미암아 세속적 유익을 얻게 되면 아주 만족해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대해 내리는 판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대해 내리는 판단과 다를 때가 상당히 많다.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자기들이 “부자고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그 교회의 실상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눈에는 그들이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교회였다. 이것은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그리스도의 판단이다(계 3:14-17).
마치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의 교회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오늘날의 교회를 보시고 아마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것이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렘 2:2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었도다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사 1:21,22)
따라서 오늘날 많은 교회 안에서는 복음의 은이 찌끼가 되었고 그 순전한 포도주에 전통과 이성이라는 물이 섞였다. 인간은 복음의 진리에 대해 너무 금방 싫증을 느껴 그것을 자신들이 생각해낸 아이디어나 방법들과 바꾸려 든다.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렘 2:11)

로마 가톨릭 교회의 특별한 주장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는 별난 특권을 주장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오류에 빠지거나 참 구원의 진리와 순종을 저버리게 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그 교회의 교제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뜻 가운데 역사하시는 은혜의 내적 특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흠 없이 완전하다는 외적 특권을 주장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 무흠하다는 은사가 교회를 복음이 요구하는 상태에 완벽하게 거할 수 있도록 지켜준다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 은사가 어떻게 역사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또 그들이 그것을 원하든 원치 안든 아무튼 이 은사는 역사한다는 것이다!
이 무흠의 은사는 구약시대 때 유대인들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바 있다.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렘 7:4).
그들은 자기들이 여호와의 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큰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이 배도하지 않도록 틀림없이 지켜 주시리라 믿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들이 거짓말을 믿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라.”(렘 7:8-10)

모든 사도들 가운데 유독 베드로만 자신의 완벽(무흠)을 주장했다. 그는 위기가 닥쳐오더라도 자기는 절대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는가! 물론 다른 모든 사도들도 그리스도를 버리고 도망갔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버렸을 뿐 아니라 부인까지 하지 않았는가!
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 교회도 자기네만은 완벽하다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있는 다른 어느 교회보다도 더 심한 특별 배도를 자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이 완벽함을 부인할 만한 증거는 많지만 지지할 만한 증거는 전혀 없는데도 이런 주장을 하다니, 이보다 더 심한 거짓말도 없으며 또 이보다 더 인간 영혼에 해를 가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가톨릭교를 신봉하는 국가들은 그동안 무시무시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 뚜렷한 대의명분도 없는 전쟁을 일삼아 왔다. 그래 그들이 평화의 왕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들이라 그렇게 전쟁만 일삼아 왔단 말인가? 역사가 분명히 보여주고 있듯이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동안 참으로 사악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 역사 전체를 통틀어 볼 때 한 번도 사랑과 평화의 본을 보여준 적이 없다. 오히려 전쟁과 가혹한 핍박의 본만 보여주었을 뿐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행위가 어떻게 이사야 2:2-4 말씀에 나오는 내용과 같다고 할 수 있으며 사랑과 평화 및 하나 됨을 가르치시는 그리스도의 교훈과 일치된다고 볼 수 있겠는가?

만약 로마 가톨릭 교회가 참으로 흠 없이 완벽하다면 우리는 그 교회가 이 땅에 가져다 준 황폐함보다 더 나은 것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교회는 자칭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하고 평화와 사랑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정욕과 분노를 통해 이 땅에 황폐만 가져다주었을 뿐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어느 모로 보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세우기 위해 오셨던 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를 대표하지 않는다.
역사를 살펴볼 때 로마 가톨릭 교회는 빛과 진리 및 거룩한 나라, 그 원리나 소원 및 행실에 있어서 이 세상과 분리된 나라,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내고 인간에게는 사랑과 친절을 보이는 하나의 본보기, 성령 안에서 의와 기쁨 및 평화의 본보기가 되기보다 오히려 흑암, 교만, 무지, 야망, 핍박, 피, 미신 및 우상 숭배의 나라가 되어 왔다.
그들은 자기들의 연합을 주장한다. 그 이유는 모든 가톨릭교도들이 교황이라는 한 머리 아래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이 연합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유일한 연합이라 믿고 있다. 그러나 복음에서 말하는 연합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이요 그의 법에 순복하는 것을 말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또 자기들 가운데는 성인(聖人)들이 있다는 것, 경건하고 관대할 일을 많이 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자선)을 증거했다는 것, 이것들을 들어서 예배의 신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은 성화와 거룩 및 사랑을 요구한다. 복음은 경건함과 순종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하나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으나 “그 능력은 부인하고 있는” 셈이다(딤후 3:5)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의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라”(딛 2:11-12)고 가르친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피차 미워한 자”(딛 3:3)로서 지내기를 더 좋아하여 이것을 거절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 3:5)으로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경건의 능력을 상실할 때 인간은 그들 존재의 명분을 세우려는 헛된 노력에서 경건의 모양에 치중한다.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를 빼앗아 가자 르호보암 왕은 그 대신 놋 방패를 만들어 놓았다.(왕상 14:25-27 참조)

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 교회 교인들 대다수가 기독교의 참 영광을 모두 부인하고 경멸하며 믿음, 사랑, 평화, 거룩함, 그리스도와 하나 됨, 자기부인 및 천상적 행실의 모든 원리라는 금방패의 능력을 상실하고 부인했을 때, 그 자리에 그 영광의 모양 혹은 형상에 지나지 않는 놋 방패를 대신 만들어 놓았다. 이 모양 혹은 형상을 가지고 자기네만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참 교회라고 믿으며 만족스러워한다.

그리스도인들을 진정으로 연합시키는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사시고 위해 기도한 그리스도와의 신비하고 영적 일치라는 금 방패 대신 그 교회의 유일한 연합의 표로 교황에게 순종할 것을 고백하는 놋 방패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위해 나누는 천상의 사랑과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을 위해 신자들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은혜라는 금 방패 대신 로마 가톨릭 교회는 자선과 관대한 행위라는 놋 방패를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 자선과 관대한 행위라는 것이 실상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 교회의 유익 및 세상적 부요와 진흥을 위해 행해진 일들에 대해 답례로 주는 보상으로 측정 평가되는 것들이다.
영혼 안에서 효과적으로 일하시는 성령의 은혜라는 금 방패 대신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인간이 세운 규례라는 놋 방패를 만들어 놓았다.
거듭남이라는 금 방패가 세례라는 놋 방패로 변했다.
은혜 안에서의 성장이라는 금 방패가 주교의 승인이라는 놋 방패로 변했다.
우리를 위해 거룩한 제사 안에서 단번에 드려진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다는 금 방패를 죽은 자와 산자들의 죄를 위해 매일 드려지는 미사 예배라는 무가치한 놋 방패가 대신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영적인 몸부림을 치는 금 방패 대신 고해성사와 몸에 가혹하고 고통스러운 형벌을 가하는 놋 방패를 만들어 놓았다.
예배를 다스리시는 은혜와 탄원의 영이라는 금 방패 대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져 한데 합쳐진 예배 의식이라는 놋 방패가 세워졌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 그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모든 참 신자들로 하여금 순종과 사랑 안에서 하나 되어 열매 맺게 하려는 성령의 겸손하시고 거룩하신 그리고 온유하며 부지런한 수고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신자들의 영혼과 양심에 적용함으로써 이 일을 행하신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것을 거부하고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전제주의 국가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세력, 사기, 착취, 압제, 폭력 및 피 흘림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교회 위에 군림하는 하나의 세상적 지배권을 세워 놓았다.

이런 비판들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답변

“너희가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어떤 비판이나 정죄를 하든, 그것에 상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겠다고 하신 성령의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뿐 아니라 그 약속은 오직 우리에게만 국한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악에 빠지든 상관없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모든 사람은 그 신앙과 믿음이 영원히 안전하다. 우리만 약속된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있다. 그것 때문에 우리 교회만이 흠 없고 완벽한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승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것으로, 그 교회는 어떠한 비난이 가해져도 절대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약할 뿐 아니라 한심하기까지 하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결국 다음과 같은 말이 될 것이다.
“우리만 교회다. 따라서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우리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이 그렇다고 주장하니까 그들만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로마 가톨릭 교회가 “약속된 성령이 우리에게만 주어졌으므로 우리만 교회다”라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보다 쉽게 시험해 볼 수 있고 또 만족스런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약속에 의하면 성령이 계신 곳에 그리스도의 참 교회가 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기”(롬 8:9)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는 곳에서 그분의 사역과 은사 및 은혜로써 자신을 가장 확실하게 계시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세상은 그분을 받을 수 없다. 따라서 만약 성령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제 속에만 거하신다면,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주장하고는 있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교제 속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모든 교회들은 성령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시지 않음이 분명히 보여야 할 것이다.
만약 로마 가톨릭 교회가 자기만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를 즐기고 자기만 그의 은사(보통 은사든 특별한 은사든)를 받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로마 가톨릭 교회만이 유일하게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주장이 증명될 것이며 배도의 위험이 바로 그 문 앞에 있다는 어떤 비난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되는 대신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 안에 참 복음의 기미라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할 만큼 그렇게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죄인들을 하나님께 이끌어 그와 화목하게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영광에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인간에게 가르치기 위해 주어진 성령의 안내서에 불과하다. 성경이 주어진 목적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 외에 다른 목적은 없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자기만 진리를 소유하고 있으며 자기만 성경의 참 해석자(자신이 성경을 그 적절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든 하용하지 않든 상관없이)라고 주장할 때, 로마 가톨릭 교회에 그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영원한 장래를 확보해 줄 수 있다 - 그들이 복음에 대해 무지한 채 계속 죄 된 삶을 영위하며 아직 하나님께 대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은 상태에 있을지라도-고 말할 때,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 눈앞에 드러내 놓고 복음을 경멸하고 비웃는 셈이 된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무어라 주장하든 우리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부분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배도해 왔는지 그 진상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왜 그랬는지, 어떻게 해서 이런 부분적 배도의 상태에 이르렀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런 배도를 하게 했는지에 대해 질문을 제기할 것이다.
 

 

 

 

 

 

3. 복음 진리의 배반

복음은 다음 세 가지로 구성된다.

(1) 복음에는 신비한 가르침이 있다. 즉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
(2) 복음에는 거룩한 명령이 있다. 즉 우리가 살아야 하는 방식.
(3) 복음에는 순전한 예배가 있다. 즉 우리가 고백한 믿음과 순종을 테스트하는 법.

참 거룩과 진정한 기독교 예배의 기초는 복음의 가르침, 즉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교리가 무시되거나 버려지거나 혹은 부패할 때 참 거룩과 진정한 예배 또한 무시되고 버려지면 부패하게 마련이다.
인간이 말로는 진리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진리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다(딛 1:16; 딤후 3:5 참조).
복음이 요구하는 순종은 “믿음의 순종”이다(롬 1:5).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에 순종”하게 되어 있다(행 6:7). 그것은 하나님께 용납되기 위해 “이 세상에서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살라고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은혜다”(딛 2:11,12 참조). 따라서 복음의 가르침이 무시되거나 버려지면 참 복음적 예배와 거룩함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바울은 사역 말년에, 자신은 “믿음을 지켰다”고 선언했다(딤후 4:6-8 참조). 그의 전 사역을 통해 그의 주요 관심사는 바로 믿음을 지키는 것이었다.
바울이 “믿음을 지킨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가혹한 전쟁과 투쟁을 겪어야 했다. “믿음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과 비교해볼 때 바울은 얼마나 다른지 모른다.
디모데 역시 “믿음을 지켜야”한다는 것이 바울의 큰 관심사였다(딤전 6:20,21; 딤후 1:13,14 참조).
바울은 디도에게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사람들의 명령을 좇기 위해 복음의 진리를 무시하고 저버리려 하는 자들을 책망하라고 부탁했다(딛 1:13,14 참조).
유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우라고 권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빨리 믿음의 도를 더럽히고 그것으로부터 돌아서기 때문이다(유3 참조).

초대교회는 사도들이 개척해서 가르쳤으니 복음의 신비와 진리를 아는 데 있어서 우리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도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해 주고, 그들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도 숨기지 않고 다 그르쳤다(행 20:18-21, 26, 27 참조). 사도들의 권위는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것으로서, 그들이 가르친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무오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초대교회는 믿음을 순전히 지키고 믿음의 도로부터 떠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심고, 대 복음 전도자 아볼로가 물을 준 교회였다. 그런데 세워진지 오륙 년 만에 그 교회의 많은 신자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인하게 된다(고전 15:12-18 참조).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 또한 바울이 개척했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쳤다. 그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로 대우했고 마치 그가 예수 그리스도라도 되는 것처럼 영접했으며 할 수만 있었다면 자신들의 눈이라도 빼어 그에게 주었을 정도로 그를 높이 평가했다(갈 4:14,15).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은혜와 칭의 교리로부터 멀어져 율법의 행위로 의를 구하려 애썼다. 바울은 그들의 이런 처사에 너무 놀라 그들이 누군가의 꾐에 빠졌다고 생각했다(갈 3:1). 그들이 받은 진리가 분명히 실증(實證)하고 있고 체험한 말씀이 그 능력을 나타내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갑자기 그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이처럼 멀어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영접한 후 너무 쉽게 복음으로부터 멀어진다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하나도 없다.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을 보면 진리로부터 떨어져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경고로 가득 차 있다. 요한 역시 그의 서신에서 복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배도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유다가 그의 서신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배도할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교회가 거의 모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배도에 대한 비난을 받고 있다.
따라서 만약 사도들이 아직 살아있을 때인 그 당시 교회들이 그렇게 쉽게 배도에 빠졌다면 그들처럼 유리한 입장에 있지 않은 우리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따라서 복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하며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정경이 다 기록되고 사도들이 죽은 다음에 세워진 교회들은 어떠했는가?
바울은 아직 생존해 있을 당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안고”고 경고했다(행 20:29,30).
베드로 역시 그들 가운데 들어와서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값 주고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할 멸망을 스스로 취할 거짓 선생들에 대해 경고했다. 그런 다음 많은 사람이 그 교사들의 멸망할 도를 좇게 될 것과 그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에 대해서도 경고했다(벧후 2:1,2 참조).

나중에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회에 대해 하신 판단을 볼 때 그 교회 장로들에게 한 바울의 경고는 필수적인 것이었다(계 2:4,5 참조). 바울은 또 디모데에게 앞으로 올 배도에 대해 유익한 경고들을 주고 있다(딤후 4:1-4, 딤전 4:1,2 참조).
다른 사도들 역시 믿음의 도에서 떠나려 하는 교회들을 경고하고 있다(유 17,18 참조). 요한 사도는 적 그리스도가 올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으며(요일 4:3),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에게 “불법의 사람”이 나타날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살후 2:3,5,6 참조).
당시 하나님의 영이 그토록 열심히 증언했던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즉 눈에 보이는 가견적 교회는 믿음에서 멀어질 것이라는 것 그리고 사단이 이런 배도를 주도하기 위해 사용하는 주요 방법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 교회 혹은 저 교회(예를 들어 로마 가톨릭 교회)는 흠 없이 완벽하므로 절대 믿음의 도에서 떨어질 수 없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단은 사람들을 현혹하여 성령께서 주신 경고를 무시하게 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안심하게 만들었다. 성령의 경고를 무시하고 저버렸으니 그리스도인들은 깨어 있지 못하고 사단에게 현혹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자기네 교회는 무오, 무흠하므로 절대 배도할리 없다고 믿었던 그리스도인들이 그처럼 수월하게 큰 배도의 길(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그 극에 달함)로 인도되었던 것이다. 마귀는 그리스도인들을 설득하여 복음에서 떠난 가르침을 진리라고 믿게 하였으며 결국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무오설로 자기들의 배도로 정당화하는 자리에까지 이르도록 만들었다.

성령이 주신 네 가지 기본적인 경고는 다음과 같다.

(1) “어그러진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목사와 교사들 중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것.
(2) “양떼를 아끼지 않는 흉악한 이리들이 교회에 들어올 것” 이라는 것
(3)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 듣는 일을 싫어하여 진리로부터 신화로 돌아설 것이라는 것.
(4) 배도 현상이 가견 교회 전체에서 전반적으로 일어나되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점진적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것. 이것이 곧 “불법의 비밀”이다.
이 모든 경고는 때가 됨에 따라 예언대로 다 이루어졌다.

(1) 초대교회 교부들, 사도시대 이후 초기 교회에서 일하던 주요 교사들, 특히 그 저서가 후대에 전해진 교사들 중 많은 사람들이 복음과 복음의 단순성을 무시하고 그 대신 그들에게 맡겨진 복음과는 상반되는 어그러진 일들을 많이 수용하고 가르쳤다. 그들은 존경심이나 경외감을 가지고 복음의 비밀을 대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이 의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들은 기독교의 근본 원리들에 들러붙어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가르친 순전하고 거룩한 복음의 가르침을 더럽히고 손상시켰다. 교묘한 공론, 철학적 선입견 및 전제, 영적 억지 해석,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되는 견해와 생각들을 제시함으로써 이 일을 자행했다. 이렇게 해서 성령의 첫 번째 경고는 그대로 이루어진 셈이다.

(2) 그러더니 온갖 종류의 이단들이 교회 안에 들어왔다. 나는 이들을 바울이 경고한 “흉악한 이리들”로 본다.
그들은 복음과는 관계없이, 아니 오히려 복음을 경멸하면서 어리석고 엉뚱한 이방적 생각 또는 이해할 수도 없고 끝도 없는 환상들(이런 근거 없는 생각들에는 대부분의 경우 악한 행습도 수반되었음)에 빠진 이단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었으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으로부터는 완전히 떠난 그런 자들이었다. 베드로는 이런 이단들이 들어올 것을 예언한바 있다(벧후 2:1,2). 영지주의자들(Gnostics), 마르키온주의자들(Marcionites), 마니교도들(Manichees)이 바로 이런 이단에 속한다.
또 다른 종류의 이단으로 복음의 비밀로부터 완전히 떠난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상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는데 그 저자나 추종자들은 자기들이 기독교 신앙을 고수하는 척하며 자칭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했다. 이런 이단들은 주로 그리스도의 인성 및 신성에 관한 교리와 그의 은혜에 관한 교리에 관심을 기울였다.
옛 뱀의 입에서 홍수가 터지듯 아리우스주의가 쏟아져 나와 격류처럼 모든 것을 휩쓸어간 반면 펠라기우스주의는 독약처럼 살며시 교회 안으로 스며들어와 교회의 생명력을 죽이려 했다. 아리우스주의는 교회에서 다 깨끗이 쓸려 나간 반면 펠라기우스주의는 오늘날도 많은 교회 안에 상당히 살아남아 있는 편이다. 이렇게 해서 성령의 두 번째 경고도 그대로 이루어진 셈이다.

(3) 그러자 이번에는 사람들이 복음의 건전한 교리나 가르침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약 3세기쯤 해서 수도사들이 만들어 내는 신화들이 이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은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칭의, 믿음과 회개, 거룩한 순종 등의 교리를 설교하는 대신 꿈과 환상에 대한 이야기나 하고 자기들이 천사처럼 완전하다는 이야기나 했다. 그리고 또 스스로 고안해 낸 헌신을 주창하고 몸에 고행을 가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등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미신들을 설파했다. 이런 신화들 때문에 셀 수 없이 많은 영혼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친 전체를 경멸하며 진리와 단순한 복음으로부터 멀어져갔다. 이것이 디모데전서 4:1-3에 예언되어 있다. 따라서 세 번째 경고도 이루어진 셈이다.

(4) 성령의 마지막 경고는 “불법의 비밀”이 은밀히 활동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인간의 허망한 마음 및 정욕들과 함께 거짓 교사, 흉악한 이리, 건전한 교리를 듣기 싫어하는 것 그리고 수없이 많은 사단의 다른 속임수들에 의해 발생한 치명적 배도였다. 세상이 이 끔찍한 배도 아래서 신음하고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멸망했다. 이 끔찍한 배도는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 그 극에 달했다. 복음의 순전한 포도주가 유독(有毒)해졌으며 복음의 순전한 예배가 가공할 정도로 타락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것이 이제는 인간 영혼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쓰리게 만들 저어도이다. 마치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맛을 보고 마시기를 거부했던 신 신포도주처럼 말이다.

이 기간 동안 참 교회는 광야로 쫓겨났다. 참 교회는 그곳에서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밀하게 양육되었으며 여전히 남아있던 소수의 증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했다. 그리고 자기들의 피로 그 증거가 참됨을 보증했다(계 12:11, 11:3,7,8 참조).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자비하시게도 그의 기업에 남아 있는 자들을 방문하시고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들을 많이 일으키셨다. 그들에 의해 종교개혁이 성공적으로 시작되었고 그 개혁이 여러 나라 및 교회들에서 진행되었다.
이 개혁이 정말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진리들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
종교 개혁자들의 교리는 성경에 일치했다.
사람들의 양심이 진리로 말미암아 두려움, 미신, 어리석은 생각들로부터 자유케 되어 복음에 순종하는 길로 들어섰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 뿐 아니라 그를 위해 고난 받기위해 그리스도 편에 섰다. 그들은 피 흘림으로써 자기들의 증언을 입증했다. 그들이 죽는 것을 본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으로 되돌아왔다.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섰으며, 영적으로 성장하여 거룩한 순종을 하게 되었고, 죽고 사는 일에 대해 확고한 영적 위로를 얻었으며, 그 외에도 다른 많은 영적 축복들을 누렸는데 이 열매만 보더라도 종교개혁은 정말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동안 많은 교회들이 오랫동안 죽을병의 권세아래 짓눌려 있었는데 그 병으로부터 회복되었다. 이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병이 재발되지 않고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려면 많은 보살핌과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그 모든 배도를 다 깨끗이 쓸어낼 수 있기 전에 그만 그 세력을 잃고 말았다. 그러자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자유케 된 교회들이 다시 한 번 더 배도의 길을 밟기 시작했다. 슬프게도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복음의 진리를 배우고 난 후 그 진리에 금방 싫증을 내고 여러 가지 이유를 갖다 대며 배도의 길로 떨어지는 인간의 타락성을 보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다시 로마 가톨릭 교회로 되돌아갔다. 그 이유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찬 중시주의가 그들의 죄책감을 다루기에 “쉬운”길처럼 보였기 때문이거나, 로마 가톨릭 교회가 자기들 죄를 숨기기에 좋은 종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처럼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보다 누군가 그들을 인도하여 애굽으로 되돌아가기를 더 원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게 마련이다.

그런가 하면 종교개혁 이후 복음으로부터 이탈한 다른 주의들이 또 일어났다. 알미니안주의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소시누스주의 또한 영향을 미쳤다. 소시누스주의는 종교개혁 당시 랠리우스 소시누스에 발생한 사상으로 그 조카 파우스투스 소시누스에 의해 보급되었다. 소시누스주의는 본질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주의로서 인간의 타락한 이성이 곧 믿음을 측정하는 잣대라고 보는 이론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삼위일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신성 그리고 그 외의 다른 중요한 교리들을 부인했다.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변장하고 나타났든 그것에는 복음을 전반적으로 다 거부하는 사상들이 담겨 있다.

순전한 기독교에 대한 이러한 공격들이 때로 참 신자들의 증언을 약화시킬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배도가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4. 복음을 배반하는 이유 및 원인

복음을 영접한 후 그 복음의 진리에서 다시 등을 돌린다는 것은 가장 악한 죄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구약시대 때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백성이 “그를 잊고” 그로부터 멀리 떠났다고 자주 불만을 토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의 가르침을 잊고 그와 백성들 간의 영적 교감 및 교제의 수단인 그의 율례들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신 28:20; 삼상 8:8; 대하 34:25; 렘 5,7,19, 16:11 참조).
그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끔찍하게 대했는지를 확신시켜 주시려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무슨 불의를 행했는지, 무슨 잘못을 행했는지, 그들이 그의 율례를 싫어하고 그에게 예배드리는 것에 싫증을 내어 그것들을 거부하고 거짓 신과 그 악한 길을 좋아할 만큼 하나님께서 그들을 실망시킨 일이 무엇인지, 그런 것이 있으면 그것을 찾아 하나님께 보여 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허탄한 것을 좇아 보았자 이생에서나 금생에서나 결국 자신들만 많은 곤란을 당할 뿐인데 말이다(렘 2:5; 겔 18:25 참조).
만약 하나님의 율례와 예배에 불평할 아무 이유가 없다면, 만약 그 율례와 예배가 전적으로 거룩하고 공평하며 선한 것이라면, 만약 그것을 지키는 데에 큰 상급이 보장되어 있다면, 만약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들 평생 동안 선을 행하시는 것이요 악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배은망덕에 대해 변명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영접하고 공개적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의 백성임을 고백한 후 그 복음의 가르침을 잊어버린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한 행위보다 더 악한 것이다. 복음을 영접한 후 그 복음으로부터 멀어져간 사람들의 죄책은 옛날 유대인들이 저지른 그 우상숭배의 죄보다 훨씬 더 크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을 보다 더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으며 율법 아래서 주어진 어떤 계시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계시이기 때문이다.
배도자들이 자신의 어리석음과 배은망덕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대체 어떻게 복음을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복음을 영접한 후 다시 복음을 저버리는 것일까?


복음을 배반하는 원인과 이유

사람들이 복음을 저버리는 이유는 영적인 모든 일을 대적하는 마음이 그 심령에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롬 8:7)
회심하지 않은 심령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그 심령에 계시될 때 그것에 순복하기를 원치 않는다. 비영적인 자연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이다.(빌 3:18) 자연인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저버리는 자다.”(딛 1:16)
복음이 처음에 전파될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 진리에 마음이 움직여 기쁨으로 그것을 영접했다. 왜냐하면 표적이 그 복음의 진실성을 확증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의 가르침에 따를 의사는 그 마음에 조금도 없었다.(요 2:23,24; 행 8:13 참조)

예수님께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시는 이적을 베푸신 후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린 생명의 떡”이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요 6:34)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영적인 일을 대적하는 자연적 성향이 그들 마음 가운데 여전히 남이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비밀들에 대해 가르치시자 그들은 즉시 “그에 대하여 수군거리고” “서로 다투기”시작했다. 그러고는 그가 자기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어려운 말씀”이라고 간주해 버렸다.(요 6:41,52,60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불신하는 이유를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그들의 육신적인 생각 속에 들어있는 그 대적하는 마음을 움직이시어 그리스도께로 이끌지 아니하시는 한 그들은 그의 가르침을 받지도 믿지도 못한다는 것이다.(요 6:64,65 참조)
그 군중들은 어렵고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영생의 말씀”으로 이해했던 것이다(68절 참조).

복음의 진리가 인간 마음속에서 행하고자 하는 것

복음 진리의 목적은 인간의 눈을 뜨게 하여 현재의 평강과 미래의 영광이 자기 자신 및 자기 의(義)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의에 달려 있음을 보게 하는 것이다. 복음의 진리는 죄인의 타락한 마음, 의지 및 소욕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인간 전인-육체, 혼, 영-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되도록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가 인간의 양심을 파고들어가 실천을 강요하게 되면 마음에 도사리고 있던 적대감이 일어나 그것을 대항하게 만든다.
회개치 않은 마음은 이 진리를 가지고 사색, 쟁론하며 장난을 치는 동안 이 진리를 아주 기쁘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어쩌면 많은 일들을 하기 위해 이 진리의 인도까지 기꺼이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회개치 않은 마음은 자신의 자유의지 아래 모든 일이 다 지배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며 여전히 자기 충족 및 자립이라는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막 6:20 참조).
그러나 이 진리가 가슴에 있는 지성소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 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 자기 충족, 자립 및 자기 의에 대한 믿음을 부인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질 것을 촉구하면, 그때는 그들 마음속에 잠복해 있던 그 옛 원수가 그 복음 전체에 일격을 가할 기세로 독사처럼 즉시 일어서는 것이다. 육신과 마음 안에 있던 모든 정욕들, 옛 성품의 온갖 거짓된 소욕들, 죄의 모든 세력, 장사 지내지 않은 모든 육신적 소욕들이 진리에 대적하기 위해 일어선다.
그래서 지성(mind)으로만 받아들여진 영적 진리가 우선 무시 된다. 그런 다음 그 진리가 경멸되고 마침내 잊어버림을 당한다.
인간은 설득이나 자연적 이유 및 동기들에 의해 복음을 진리로 영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진리가 그들 양심에 적용되고 그 의지와 욕망이 자신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 안에서 걷도록 회개할 것을 촉구 받을 때면 그 옛 원수가 일어나 진리를 대적한다.
복음의 진리는 알미니안주의가 부르짖는 대로라면 아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알미니안주의대로 믿으면 인간 마음속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원수가 마음의 모든 결정을 장악하고 자립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 진리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고 하자. 즉,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우선되지 않으면 인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만한 능력이 전혀 없다고 가르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원수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호소해서 그 모든 힘을 다 동원하여 인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에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다.

자연계시에 대한 적대감

바울은 인간의 적대 감정이 어떻게 자연계시를 대적하는지 그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롬 1:18-32참조).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자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에 대해 계시하셨다. 인간은 이 계시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로부터 도망갈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 창조의 일부분인 자신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고 싶지 않아서 그들은 그 진리를 불의로 막았다(18절). 하나님을 예배하는 대신 그들은 버러지 형상의 우상과 짐승 같은 정욕에 자신들을 내맡겼다.


영적계시에 대한 적대감
바울은 또 영적계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임을 보여주고 있다. 불의의 모든 속임수가 역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살후 2:10) 무엇보다도 그들은 진리가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한다. 그런 다음 진리를 거부하고 대신 가장 더러운 오류와 역겨운 미신들을 받아들인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별별 사람들이 다 있는데 거짓되고 허탄하며 어리석은 사상들을 다 받아들인다. 그들은 강한 관심과 편견을 가지고 이 사상들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것들은 마음에 못처럼 단단히 박히게 된다. 그 생각들이 마음속에 어찌나 단단히 박혔는지 복음의 진리(무오한 증거와 가장 엄중한 경고가 수반된)를 아무리 강력히 제시한다 해도 회개하지 않는 한 그들은 그 받아들인 오류들을 부인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예는 거짓 그리스도인들과 이단 종파들에게서 볼 수 있다.
역사상 이에 대한 큰 예가 두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유대인과 로마 가톨릭 교회이다.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불합리한 불신앙에 집요하게 매달려 조상 아브라함이 믿던 믿음으로부터 배도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렇게 극심한 역경과 끔찍한 재앙들이 그들에게 임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심지어 오늘 이 때까지도 그 오류, 우상, 신성모독, 미신들에 꼭 들러붙어 있다. 그 교회 안에는 학식 있는 지혜로운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말이다. 하기야 그동안 열방의 왕이나 통치자들마저 어리석게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오류, 불경, 미신 및 우상을 지지해 왔으니 더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보다 더 어리석고 한심한 종교도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집요하게 달라붙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항상 있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새롭게 되지 않는 상태에서 오류를 일단 진리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 오류는 진리보다 훨씬 더 강하게 인간의 육신적인 마음에 뿌리를 내리는 법이다. 왜냐하면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오류가 타락한 마음에 더 잘 맞기 때문이다. 타락한 마음에는 인간 마음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영적인 일들과 하나님에 대한 그 적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전혀 잘못된 것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와 선으로부터 타락한 인간 마음은 무엇이 선과 악이며 무엇이 참과 거짓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며, 그 자신의 구부러진 길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닌다(전 7:29참조).
이래서 “불법의 비밀”이 이처럼 큰 배도를 성공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그 배도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절정에 달했다.

만약 인간이 진리를 이성으로만 받고 가슴으로 사랑하거나 의지적으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항상 배도의 위험이 있다. 이 원수가 정복되어 쫓겨나지 않는 한, 그 마음이 전적 부패로부터 자유케 되지 않는 한, 그 진리가 인간의 가슴과 영혼에서 능력 있게 효율적으로 역사하지 않는 한, 그 진리를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 그대로”배워 인간이 “그들의 이전 행실을 벗어 버리고 타락하여 거짓된 정욕들로 가득 차 있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타락하여 거짓된 정욕들로 가득 차 있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그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 형상 안에서 의와 참 거룩으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지 않는 한,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가 자신들에게 가져다주는 영적 평강, 능력 및 자유함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한, 핍박이 오면 그들은 복음을 버리고 다른 것들을 찾아 떠날 것이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한 후 복음의 가르침을 떠나게 되는지, 이 가슴 속에 있는 원수가 바로 그 첫 번째 원인이다.
이 복음의 배도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슴으로 진리를 사랑하며 그 진리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다.
참 종교는 율법에 의해 세워져 권위자들에 의해 지지 옹호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원수가 인간의 마음속에서 뿌리째 뽑히고 그 자리에 진리에 대한 사랑이 대신 심기지 않는 한 배도에 대한 진정한 방어책은 없다.
그렇게 영광스러운 종교 개혁을 단행한 후 어떻게 로마 가톨릭 교회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하면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세계에 있는 이 나라 저 나라로 다시 돌아와 황폐화하는 일을 막을 수 있을까?
그것이 돌아오는 것을 금하는 엄중한 법을 세우면 가능할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아무튼 참 종교의 영광에 무서운 벌칙이 수반된 엄중한 법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오류에 대해 반증하는 글을 쓰면 그것이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그 글을 읽고 진지하게 생각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성령께서 복음의 진리에 대해 인간 가슴에 대고 효과적으로 알려 주시는 길만이 배도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복음의 가르침은 마음으로 이해하여 가슴으로 사랑하고 의지를 동원하여 기꺼이 즐겁게 순복해야 하는 것이다(롬 6:17 참조). 그 진리의 능력과 사랑이 사람들 가슴 속에 심겨질 때, 그때에야 비로소 로마 가톨릭 교회가 우리 땅에서 다시 한 번 내침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복음의 진가를 모르는 한, 그들이 가슴으로 복음을 받아 그 말씀대로 살 때 복음이 가져다주는 그 엄청난 유익을 모르는 한, 어느 누구도 복음을 끝까지 신실하게 믿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가슴으로 복음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려움이 생기면 대뜸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의 율례를 지킨다고 해서 무슨 유익이 있는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음을 가지고
“인간의 마음에 빛을 비춰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신”다면, 그들이 미신과 전통이라는 무거운 멍에로부터 양심이 자유케 되었으며, 자기들이 영접한 그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중생하여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되었으며, 속사람이 새롭게 되고 자기들 삶이 변화되었음을 발견한다면, 그래서 영생한다는 소망이 속사람 속에 굳건히 박힌다면, 무슨 일이 닥치든 이제 그들은 죽기까지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그 진리 안에 거하게 될 것이다.
참 종교의 단순한 외적 모양만으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배도하는 일을 막지 못할 것이다.

복음을 신실하게 전하는 일 -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열심과 거룩의 본을 보이며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여 사람들 마음을 얻고, 복음의 진리 안에 있는 그 기쁨을 듣는 모든 자들에게, 그리스도께 기꺼이 순종하고자 하며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 의지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해주며, 본인들이 그의 거룩하신 뜻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이 정말 그들 심령 가운데 능력 있게 심겨져 있음을 증명하는 일 - 만이 교활하게 계속되고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배도를 막을 수 있는 길이다.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축복하시는 유일한 방법이다(행 20:32참조).

“그러나 우리에게는 평범한 은사밖에 없는 반면 사도들에게는 놀라운 은사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이 점에 있어서 우리보다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있었던 것 아닌가?”
사도들은 놀라운 일을 하기 위해 부르심 받았기 때문에 놀라운 은사들을 받았다. 우리는 평범한 일을 하도록 부르심 받았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평범한 은사만 주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평범한 은사들을 놀라운 은사만큼 효과적으로 사용하실 수 있다. 인간의 심령에 있는 그 원수를 뿌리째 뽑아 버리고 그곳에 참 회개와 믿음을 심는 것은 표적이 아니라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사역이다. 그리스도는 놀라운 표적을 많이 행하셨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믿지 않았다(요 12:37 참조).
바울은 젊은 디모데에게,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인간은 자기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 설교하는 교사들을 지명할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은 진리에서 떠나 허탄한 이야기로 돌아설 것이다(딤후 4:3,4 참조).
그렇다면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디모데는 무엇을 해야만 했던가?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1,2,5).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도록 부르심 받은 평범한 일이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평범한 은사를 덧입혀 주셨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에 의해 하나님께 돌아선 사람들을 가리켜 “죄의 종이었으나” 저들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롬 6:17,18참조).

배도한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 종교를 보존, 확장하는 법

첫째, 힘을 사용함으로써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 동안 이 세상에서 그 종교를 보존 확장하는데 있어서 항상 힘을 사용할 것을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히 자기네 종교를 옹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 핍박, 파멸 및 파괴를 일삼으면서 동시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며 평강을 누릴 수 있겠는가? 평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자신의 종교를 보존, 확장하시기 위해 힘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셨던가?

둘째, 인간의 죄된 정욕과 타락에 편승함으로써
배도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사람들이 계속 죄를 지으면서도 겉으로는 참 그리스도인의 모양을 지닐 수 있도록 허용해 준다.
자연인은 악한 행실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골 1:21 참조).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8-19 참조).
이처럼 죄를 사랑하고 하나님과 그의 복음에 대해 대적하는 마음이 뿌리 깊이 박혀 있으니 인간은 마음으로부터 그 진리를 증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요 3:19,20 참조).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 인간을 더 찬양한다(요 12:42,42 참조). 진리를 영접한 것처럼 보이나 그 진리를 사랑하지는 않는다(살후 2:10 참조).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 그리고 “이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이 사도의 명령에 순종하든지 아니면 인간의 정욕에 편승하든지 해야만 한다.
죄인이 가지고 있는 은밀한 목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현세에서 가능한 별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서 동시에 내세에서 받게 될 형벌은 절대 받지 않고도 자신의 죄 된 삶을 계속 영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부인하라.
선과 악에 대한 모든 생각들 그리고 장래의 상벌에 대한 의식을 모두 지워 버리라(시 14:1, 10:4 참조).
그러나 무신론자가 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이기 때문이다(롬 1:19). 무신론자는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도망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할 수 없으며 또한 모든 창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의 증거들로부터 도망할 수 없기 때문이다(롬 1:20참조). 무신론자는 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도 없다(롬 1:32참조). 따라서 무신론자가 겉으로 큰소리치는 것은 사실 보면 속에 있는 두려움을 그렇게 위장하는 것뿐이다.

(2)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죄된 정욕에 빠져 살면서도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행세할 수 있게 해주는 종교를 그들에게 주라(딤후 3:5 참조).
죄와 양심이 평화롭게 공존해서 살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 죄는 양심을 거절하고 양심은 죄를 거절한다. 그래서 둘이 공존하는 한 평화란 절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타락한 본성 속에서는 그 둘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벧후 2:18,19 참조).
이 일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먼저 타락한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바꾸는 중생이라는 사자(獅子)를 제거한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참 종교로 들어가는 것을 단념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라는 외적 의식이 중생시키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그 다음에는 죄에 대해 영적으로 죽고 전심을 다해 순종하게 되는 전인의 내적 성화를 대신하는 무엇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양심은 만족을 얻으나 죄가 그 사람을 계속 지배하여 결국 죄에 빠져 살게 되도록 말이다.
따라서 사죄, 매일의 미사, 속죄를 가져다주는 기도 또는 사물-최악의 경우에는-연옥이 있어서 죄인이 회개하지 않고서도 장래의 형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해준다. 죄를 자백하고 고해성사를 하며 자선금을 기부하면 사람들이 죄를 그대로 짓고 살면서도 자기 양심을 달랠 수 있다.
이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가르침을 영접한 후 배도한 로마 가톨릭 교회가 다시 돌아선 것이다. 사람들은 그 교회 안에서 양심을 달래면서 편안히 자기들의 죄된 방식대로 계속 살 수 있기 때문이다.
 

 

 

5. 배도의 원인 : 어둠과 무지
 
복음의 목적은 인간의 마음을 오류라는 어둠으로부터 끌어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다(고후 4:6).
그런데 슬픈 사실은 인간의 마음이 본질상 영적으로 어둡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영적인 일들을 분별하려면 영적 조명이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이 영적 조명이 비치면 오류라는 어둠이 추방될 것이다. 빛의 목적은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영적으로 어둡다는 사실이 먼저 인정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비치시는 그 빛의 은혜와 선물이 틀림없이 거부될 것이다. 인간이 영적으로 어둡다는 사실은 인간이 영적인 빛에 대한 어떤 필요에 대해서도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잘 증명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 조명은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고후 4:6)하시던 분의 선물이다. 하지만 인간이 영적인 장님이라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복음의 영적 진리 안에는 비영적인 인간이 볼 수 없는 영광과 아름다움이 있다. 복음의 영적 진리 안에는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고전 2:6,7 참조). 여기에는 각종 지혜가 있는데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지혜이다(엡 3:10; 고전 2:9,10).

복음의 진리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지혜의 탁월함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은혜 안에서 계시된 대로의 영광과 지혜이다. 복음 안에 있는 그 모든 영광가운데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의 목적은 믿음과 순종이라는 천상의 생활 방식을 통해 우리의 본성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하시는 사역 없이는 이 영적 가르침 중 어떤 것도 이해되거나 영적으로 분별될 수 없다. 인간이 그 지성으로는 복음의 가르침을 이해할지 모르나 아직 영적 어둠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그 영적 본질과 영광은 분별하지 못한다. 이를 증명해 주는 예가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거룩한 사람들의 기도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영적 가르침과 빛을 간구하고 있다. 그리고 구원하는 빛을 비추어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모든 약속 안에서와 조명 사역에 대한 그의 언급들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영적인 깨달음과 이런 일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이미 이 조명을 체험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마음이 틀림없이 저와 같은 형상으로 변하고 있으며 또한 변할 것이다(고후 3:18참조).
이 조명 없이는 인간의 마음이 진리 안에 거할 수 있는 어떤 안정된 기반이나 지속적인 힘 또는 능력도 갖지 못한다. 유혹이나 반대 혹은 거짓말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진리 안에 거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이런 일들이 진리라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영적인 일들을 외적으로 그리고 자연적으로 이해한 것만 가지고는 확신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비췸을 받지 못한 이성은 우리 마음에 이 진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도 증명해 주지 못한다.
이 진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확신하게 되면 우리는 유혹이나 반대에 대항해서 확고히 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확신은 오직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진리를 볼 수 있게 해주실 때에만 갖게 되는 것이다. 일단 그 실체와 능력이 우리 마음 가운데 체험되기만 하면 우리는 그것이 진리이며 또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완전히 믿게 된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모든 유혹에 대항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에는 영적 조명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이 포함된다. 그리고 또 의지적으로 이 일들을 알고 믿어야할 진리로 포용하는 것, 지칠 줄 모르는 천상의 거룩한 사랑을 가지고 그것들을 모든 것 안에 있는 선하시고 용납할 만하며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계속 승인하고 찬양할 것을 포함한다. 영적 조명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이 확신은 자연적인 이해나 이성이 줄 수 있었던 어떤 확신보다도 더 강한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는 이 확신이 훨씬 더 선호되어야 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영적 조명의 결여 : 많은 사람들이 복음이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원인
가톨릭 교회 산하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복음의 진리와 복음적 예배의 영적 영광을 모두 버리고 서서히 배도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적 진리의 아름다움에 대한 영적 분별력이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그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배도하게 되었다. 그들은 육안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것들을 택한 것이다.
복음의 가르침에 능한 학식 있는 사람들 그래서 진리의 기둥으로까지 간주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알미니안주의, 펠라기안주의, 소시누스주의 및 가톨릭주의 등에 빠져 들어가면서 복음의 도를 떠났다.
 
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두 가지 진리
복음에 능한 많은 학식 있는 사람들이 배도하는 것을 보면서 참 신자들 중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도 그들과 똑같이 배도하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두 가지 진리를 제시한다.
 
(1)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이들의 완전 구원을 일임하시면서 그리스도께 이들을 내어 주셨다. 하나님의 목적은 자신의 선민을 보존하고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완전히 배도하는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지키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 6:39,40).

(2) 하나님은 자신의 선민을 거룩하게 보존하기 원하신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9)
진리를 버리는 자는 아무도 그 영광을 본적이 없으며 또한 그 능력을 체험한 적이 없다(요일 2:19; 히 6:9 참조). 성령께서 구원의 진리를 조명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항상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믿음에 굳게 서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다.
 
회의주의
영적 조명이 없으면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얼마든지 의심할 수 있다. 회의론자들은 겉으로는 진리를 부인하거나 저버리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에 대해 말하고 논쟁할 때 그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고 안 하고는 당신 마음대로”라는 태도를 취한다. 그것이 참이든 참이 아니든 그들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들은 의심스럽다는 식의 뻔뻔스럽고 무례한 토론을 통해 성경, 삼위일체, 그리스도와 그의 직무, 은혜로 말미암는 칭의 및 복음의 다른 진리들을 저울질하고 조사해 본다. 그들은 종교를 가르치는 교사는 될지 모르나 진리와 오류 사이에 있는 근본적 차이조차 모르는 무지한 자들이다. 그들은 진리의 영광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영광을 볼 수 없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진리나 오류나 다 매한가지인 것이다.
하늘의 영적 진리는 하나님 자신 및 그분의 무한하신 지혜와 사랑 그리고 그 선하심 및 은혜와 관련이 있다. 그 진리에는 하나님의 이 모든 특성들이 다 들어 있다. 그 진리에는 하나님의 이 모든 특성들이 다 들어 있다. 그래서 이런 신적 증거들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진리가 그처럼 영광스럽고 사랑할만하며 전적으로 소원할 만한 것이 되는 것이다.
한편 배도의 원조인 사단과 관련이 있는 오류는 왜곡되고 뒤틀렸으며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진리에는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고 진리에 대한 사랑과 그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으로 채우는 위력이 있다.
한편 오류는 인간의 마음을 어리석음이나 미신 혹은 교만이나 스스로를 높이는 구부러진 길로 인도한다.
인간이 진리와 오류 사이에는 실제로 이런 차이가 있음을 깨닫는다면 진리를 의심하고 공론을 일삼거나 진리에 무관심한 대신 그 안에 있는 생명과 능력을 발견하기 위해 진리를 궁구하게 될 것이다.
진리가 진리 그대로 알려지기만 한다면, 인간의 영혼에 진리에 대한 거룩한 경외심과 사랑을 심어줄 것이다. 그래서 감히 진리를 의심한다거나 온갖 어리석은 상상력을 다 동원하여 그것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일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어둠은 인간의 마음과 영혼이 진리를 진리로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영혼이 진리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방해함으로써 그 사람이 배도에 대항할 어떤 방어책도 가질 수 없게 만든다.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오류인지 모르는 무지 속에서 인간은 각자 스스로 진리와 오류를 결정해야 할 판이다. 그러나 각자 어떤 것이 진리인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는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느 사람의 견해나 다 타당하다고 볼 때 진리를 떠나 오류를 믿게 되는 것은 아주 쉬운 노릇이다. 그것이 바로 회의주의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서서히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배도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동일한 길로 접어들 준비가 되어 있다.
진리만이 바른 생각을 하게 하는 길잡이다. 만약 인간의 마음이 진리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다면 그 생각하는 것이 오류에 빠지는 것은 순간적인 일이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생각들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유일한 길잡이는 하나님의 진리뿐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면 인간은 절대 하나님에 대해 바른 생각을 할 수 없다.
가장 순전하고 고상한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마음으로 영접한 많은 사람들도 종종 그 생활이 오류와 미신에 의해 인도되는 생활이나 진배없이 사악하고 불결할 때가 있다. 개신교도들 중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보면 가톨릭교도, 유대교도, 회교도들의 삶보다 나은 것이 없다. 아니 어떤 때는 더 악하기까지 하다. 오히려 그 마음이 오류와 미신에 의해 인도되는 가톨릭교도, 회교도들이 복음을 진심으로 영접했다고 고백하는 많은 개신교도들보다 더 자선을 베풀고 더 관대하며 육신을 죽이고 자신을 부인하는 일에 더 열심인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모든 거짓 종교들은 자기네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신자들보다 더 거룩한 삶을 산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사람들을 자기네 종교로 개종시키고자 할 때 곧잘 써먹는 논쟁거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진리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들의 생활만 보고 그들이 믿는 진리가, 진리가 아니면 오류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진리가 그 마음에 강하게 역사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그 진리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다 더 완전하게 반영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확고하거나 안정된 그리스도인도 아니요, 배도로 이끄는 모든 유혹들을 다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요, 성령의 조명을 받아 진리를 영접한 것도 아니요, 삶 속에서 성령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체험한 것도 아닌 자로 알려졌다고 하자. 그렇다 해도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믿는 바가 자신의 삶에 의해 공정히 판단 받는 것을 구태여 꺼리지 않을 것이다. 이 때 그는 완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에 합당하게 살려는 신실함을 구할 뿐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완전해질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삶이 진리를 판단하는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오류가 승리하는 때도 있을 것이다.
 
복음은, 그것이 먼저 그 영적 진리들을 전하지 않는 한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사역이 효과를 거두려면 영적 진리가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아 보라. 부대나 포도주 모두 다 못 쓰게 되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의 가르침을 새롭게 되지 않는 의심 많은 타락한 인간 마음에 담아 보라. 그 복음은 곧 오염되고 더럽혀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마음에 들어간 복음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지도 못하고 복음에 대항하는 의심도 없애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은 육적 인간에게 복음의 비밀을 담아 보아야 아무 효과가 없음을 보고 그들에게 복음 설교하는 것을 포기했다. 자연인은 인간의 자연적 이해에 합당한 가르침, 가령 도덕적 행위라든가 율법에 대한 순종과 같은 것에만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복음이 요구하는 거룩함은,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롬 12:2)에 기꺼이 순종하는 새 성품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볼 수”있을 때에야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우리가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고후 3:18). 우리는 또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시지”(고후 4:6) 않는 한 “그 영광을 뵈올 수” 없다. 이래서 진리를 공공연히 인정하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과 삶 속에서 복음의 가르침이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는 것이다.
 
거짓 종교가 가지고 있는 이점들
사람들의 삶을 개혁해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 임무를 수행하게 하려는 거짓 종교의 동기들은 모두 자연인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 이해 혹은 미신, 두려움, 소욕, 교만 및 다른 부패한 성품들과 부합된다.
자연인의 마음이 이해할 수 있는 동기는 많이 있다. 옛날 이방 철학자들은 그들 안에 있는 “자연의 빛”을 향상시키려고 추종자들을 구했다. 율법에 대한 순종 또한 촉구된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의 순종을 요구하는 내적인 순전한 도덕률이 아니라 인간의 전통적 요구에 부응해야만 하는 외적인 도덕성일 뿐이다. 이 인간적 전통들이 율법의 요구를 낮추고 그 요구를 전통이 요구하는 저급 차원의 요구로 대치함으로써 율법을 무효화시킨다. 이 자연적 동기들은 사이비 기독교 종파 및 이단 종파들을 포함한 모든 거짓 종교 안에서 발견된다.
다른 동기들도 있는데 특히 가톨릭교도들 가운데는 공덕 쌓기, 죄에 대한 보상, 죄의 고백, 고해성사 및 연옥에 관한 교리들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마음에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복음의 진리나 동기들이 미치지 못하는 영향력을 그들 삶 가운데 미친다. 그들이 가톨릭 교회의 원리 및 동기에 순종하는 것을 보면 굉장히 헌신된 것 같고 선행과 자선도 많이 베푸는 것 같이 보이며, 대단한 금욕가요 자기부인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복음의 진리는 왜 그 진리를 영접하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 속에 이처럼 영광스러운 순종의 역사를 일으키지 못하는 것일까?
 
진리가 안고 있는 불리한 점들

오류보다 진리가 월등 우수하다. 미신보다 천상의 빛이 훨씬 다 탁월하다. 인간이 만들어 낸 비실제적 고행이 가져다주는 가공할 공포보다 믿음이 훨씬 더 우수하다. 그리고 외적 명성이나 영광보다 참 평강이 훨씬 낫다.
성령에 의해 진심으로 거듭나서 성화된 자들, 그 마음과 영혼에 진리의 능력을 받은 자들 중에는 복음의 진리로 말미암아 생겨난 거룩함과 선행의 열매가 있다. 이 거룩함은 인간 마음에 있는 부패한 정욕에나 맞게 되어 있는 거짓 종교의 모든 원리 및 동기들에 의해 만들어진 거룩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인간이 그 마음을 거듭나게 해서 새롭게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에 대해 무지하면 그들의 삶 역시 가톨릭교도들이나 모든 사이비 이단 종파 및 이방종교 교도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나쁠 수 있다. 더 나쁘지 않으면 다행이다.
거짓 종교에는 많은 미신과 거짓 원리들이 담겨 있는데 이 원리들은 어느 정도는 죄된 정욕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칭찬할만한 행실도 하도록 자극해 주는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자기들 삶 속에서 복음의 진리가 나타내는 능력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이름만 그리스도인인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도 없고 진실 되고 거룩한 삶을 살 수도 없다. 인간의 영혼 그리고 이 세상에 유익한 것은 그 진리가 가지고 있는 내적 능력이지 입으로만 하는 그런 고백이 아니다.
 
따라서 자연적인 이해로 파악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 가령 도덕적 규범을 외적으로 순종하는 것과 같은 일을 설교하는 것이 복음의 비밀들을 선언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다. 자연인은 복음의 비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아주 깜깜하다. 왜냐하면 그 비밀의 영광을 볼 수도 없고 그 비밀의 능력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계시하는 영적 동기들만이 하나님께 열납 될 만한 참 순종의 동기들이다. 그 동기들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17).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진리 안에 서기를 원한다면, 믿음에 굳게 서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배도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기를 원한다면, 가장 중요한 일은 참되고 영적인 복음의 진리를 알고 그 진리의 능력을 생활 속에서 체험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진리를 이론적으로만 아는 것, 복음의 가르침을 머리로만 아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토론하게 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를 배도로부터 보호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비록 이 영적 조명이 우리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마 7:7-11참조).
만약 우리가 분명히 배도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원리들에 주의해야만 한다.
 
진리의 영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고전 2:9-12; 엡 1:16-20, 3:14-19; 골 2:1-3참조).
진리를 배우되
“그 진리를 예수 안에 있는 그대로” 배워야 한다(엡 4:20-24 참조).
 
진리를 예수 안에 있는 그대로 배운다는 말은 곧 진리 안에 있는 변화시키는 능력을 우리 삶 속에서 체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본성에 새롭게 되어 의와 거룩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계시하는 목적은, 그것이 우리 안에서 영적이며 실제적인 능력으로 역사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계시된 일들을 행할 수 있게 되도록 말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등한히 하게 될 경우 인간은 복음을 겨우 이론적으로만 이해하는 데 그치는 것으로, 결국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거부하고 말 것이다.
 
지적으로 아주 높이 평가하는 어떤 사색이나 사상보다 구원과 성화에 대한 참 이해를 가져다주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 지식을 높이 평가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 사색이나 사상이 비록 기량, 영리함, 달변, 기지, 학문이라는 명성으로 겉을 번드르하게 꾸미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마음의 정결함을 구하고 유용한 삶을 살기 원하는 가운데 스스로 온유하고 겸손하며 낮아지고 인내하기를 배운 사람, 자신을 부인하며 거룩하고 평화로운 삶을 열심히 살기로 결심한 삶이야말로 복음의 진리를 알기에 가장 합당한 사람이다. 따라서 이 복음의 진리를 아는 지식을 세상에서 명성을 추구하기에만 급급하여 머리로만 아는 모든 교만한 지식보다 더 높이 평가하도록 하자.
 
개인적인 체험으로 영적인 것들을 안에 있는 그 선함과 탁월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때까지는 절대 만족하지 말라. 지칠 줄 모르는 사랑과 기쁨으로 이 진리들을 포용하게 될 때까지는 절대 만족하지 말라. 이것이 없다면 당신의 믿음은 귀신의 믿음보다 조금도 나은 것이 없다(약 2:19참조).
 
배도의 또 다른 원인 : 무지
인간이 그 머리로는 성경의 교훈을 알지만 그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고 또 삶 속에서 그 교훈의 능력을 전혀 체험해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게을러서 그것에 대해 알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도 있다. 또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의 교훈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도 있다(잠 29:18참조). 만약 교사들도 장님이고 배우는 사람들도 장님이라면 그들은 둘 다 결국 영원한 지옥의 구덩이로 들어가고 말 것이다.
그런가 하면 복음의 지식을 스스로 거부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도 있다(호 4:6참조).
명 설교를 들을 때는 사람들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구약에서 요시야 왕의 개혁 당시 많은 사람들이 참 종교를 고백하며 돌아섰다. 그러나 그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오직 그러는 척했을 뿐이다(렘 3:10참조). 즉, 그들은 위선적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맨 처음의 회개는 사도들, 전도자들, 및 다른 사람들의 설교에 의해 일어났다. 그때는 표적과 기사들이 뒤따랐으며 핍박 아래서도 회개한 사람들이 인내하며 굉장히 거룩한 삶을 살았다. 개인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고 그 비밀에 대해 가르침 받고 그 명령에 순종하며 핍박 아래서도 신실한 것을 다짐했던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기독교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황 및 다른 고위자들에 의해 가르침 받은 왕, 통치자 및 고관들이 이방 종교에 반대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러자 그들의 동맹을 맺은 자들, 혈연 및 하인들도 그들을 따라 교회로 들어왔다. 이 사람들은 그 외적 예배 의식이나 아는 정도지 기독교에 대해서는 거의 백치였다. 그래서 옛 우상들은 섬기지 않았으나 결국 성인들을 우상처럼 섬기게 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은 했지만 그들은 복음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 및 복음에 뒤따르는 의무에 대해서는 완전 백치 상태였다. 따라서 소위 인도자들이 그들을 온갖 어리석은 교리, 우상숭배 행위, 미신, 헌신,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부들에 대한 맹목적 순종의 길로 인도하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이래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그 절정에 달한 운명적 배도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반드시 알아야 할 것(복음의 가르침)을 알되 아주 조금밖에 모른데다 그나마 아는 것에 순종하여 거룩하게 살 것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도 쓰지 않았으니, 그들이 기꺼이 오류와 미신을 수용한 것은 아주 당연한 귀결이다. 그들이 오류와 미신을 어느 정도 수용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기하시기까지 했다. 이 미신이나 오류들은 그들을 복음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게 한 “거짓 것들”이었다(살후 2:11참조).
마찬가지로 이 나라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도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가장 훌륭한 대안책으로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등한시, 소홀, 나태, 무지, 게으름 그리고 복음에 대해 “싫으면 그만두라”는 식의 태도를 취함으로써 이제 많은 사람들이 참 종교의 근본 원리조차 모르는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복음에 대해 무언가를 알거나 영적 진리를 전혀 분별치 못하는 인간의 본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사도들이 다음과 같은 자세로 교회의 기초를 세우고 계속적인 가르침을 통해 사람들이 영적 온전함에 이르도록 양육했다고 생각하겠는가? 즉, 기록된 기도서나 읽고 아무 열심도 생명도 능력도 영혼에 대한 열정도 없이 설교를 하고, 게다가 경박하고 어리석은 세속적 행동이나 하는 그런 자세를 가지고 말이다.
이 등한시로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었으며 깜깜함이 사람들을 덮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배우려 들지 않아서, 또 어떤 사람들은 가르쳐 줄 사람이 없어서 못 배웠다. 그래서 그 마음이 세상의 정욕으로 가득차서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배도가 일어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종교가 육적이고 미신적인 이 마음들에 딱 들어맞아서 그들을 모두 오류와 신화 가운데로 이끌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눈이 멀어서 자기들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의 중요한 진리들을 집어던지고 대신 수도사들의 꿈이라든가 사람을 현혹시키는 어리석은 기적들에 대한 전설 및 다른 이교의 미신들을 믿게 되었다.
이처럼 속이는 자들에게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그들이 무지했기 때문이다. 이 무지 때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배도를 고안해 낸 자들이 그들의 사상 및 의식을 사람들-그들을 배도하는 교회로 유혹해서 이끌어 들일 사람들-의 세속적 관심에 딱 들어맞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참 종교, 특히 그 종교의 주된 가르침과 그들에게 안식을 제공해 주는 단단한 기초에 대해 무지하면 그들은 마치 옛날에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던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행동하게 된다(요 4:22참조). 그 결과 자기들에게 덤벼드는 그 거짓 책략들에 대항해서 자신들을 방어하지 못하게 된다.
요한은 우리가 배도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수단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진리의 영에 의해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요일 2:19,20,27 참조).
많은 사람들이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에 속아 넘어간다(롬 16:18). 그래서 바울은 우리더러 영적으로 성장하라고 말하고 있다(고전 14:20, 6:2; 히 5:14 참조). 우리는 영적으로 약해서도 안 되며 무지해도 안 된다(엡 4:14 참조).
 
로마 가톨릭 교회는 가톨릭 교회의 사절단들, 즉 양의 옷을 입은 이리들을 파견한다. 그들의 목적은 개신교 교회, 특히 우리나라에 있는 개신교 교회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되는 개신교도들이 로마 가톨릭 교도들과 맞섰을 때 그들을 복음의 진리로 논파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개신교도들은, 교회에는 늘 가지만 진리에 대한 확신은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니 말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자기들이 개신교가 생기기 전에 존재했으며 사도시대 때부터 존재해 온 교회이기 때문에, 자기네만이 참 기독교 신앙을 대표하는 교회라고 주장함으로써 무지한 개신교도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개신교가 혼란, 무질서 및 분열을 가져오기 전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완전한 연합 속에 존재해 있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부들은 모든 종류의 죄를 다 사해 줄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으며 성인들, 천사 및 그 복된 동정녀 마리아까지 모든 가톨릭교도들에게 자비와 은혜 및 선을 베풀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매일 기적이 일어났는데 특히 전 세계적으로 드려지는 매일 매일의 미사 속에서 그 기적이 일어났다. 즉, 성체 성사에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은 그대로이나 그 본질은 예수의 살과 피로 완전히 실체화되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다 가톨릭교도들의 삶을 보면 놀라운 만큼 거룩한 경건의 본을 보이고 있다. 이런 것들 및 기타, 다른 영광들을 가지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많은 무지한 개신교도들을 현혹하여 그 교회가 더 낫다는 사실을 믿게 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회심하지 않은 비 영적 개신교도들은 복음의 위대한 진리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 진리가 그들에게는 “이상한 일”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진리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자연적이며 세속적인 그리고 회심치 않은 비 영적 마음에는 가톨릭교가 더 잘 맞는다.
육적이고 비 영적인 사람에게는 가톨릭교가 아주 이상적으로 맞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 및 복음의 참 영적 예배는 비 영적인 사람에게 지루하고 난해할 뿐이다.
가톨릭교가 사용한 또 다른 속임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안에 있는 “자연적이 빛”을 찾게 한 것이다. 자연인은 자신 안에 빛이 있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발견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 안에는 양심의 빛이 있기 때문이다(롬 2:14,15 참조). 성령의 참 조명을 체험하지 못한 그들은 양심이라는 자연적 빛을 가톨릭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믿는다. 그래서 막연한 충동 및 이상한 내적 감정들을 마치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생각하며 갈팡질팡한다.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전통에 의해 받아들일 경우 그 진리로부터 배도하기는 아주 쉽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식이 없어서 멸망했는가!
 
전통적 개신교 교리들만 붙잡고 그 교리들을 삶 속에서 능력으로 체험하지 못한, 영적으로 무지한 개신교도들은 가톨릭교도들에게 경멸의 욕을 퍼부을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한다. 가톨릭교도들이 개신교도들에게 경멸적인 욕을 퍼부었듯이 말이다. 그러나 만약 이 개신교도들에게 그들 안에 있는 소망이 무엇인지 그것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부탁한다면 그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꼭 다물 것이다. 이러한 개신교도들은 배도의 위험률이 아주 높으며 결국에 가서는 가톨릭교를 믿게 될지도 모른다.
무지한 설교자나 교사들은 악하게도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의 손과 발을 꽁꽁 묶어 영적 원수들의 세력에 넘겨준다. 한편 복음에 충실하며 영적 비췸을 주는 설교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주된 교리들을 정기적으로 신실하게 가르쳐 주는 일, 이런 것들은 배도를 막을 수 있는 확실한 길이다.
피상적 율법이나 외적 형식 및 의식을 준수한다 해서 배도를 안 하게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진리를 가르치고 영적 조명으로 그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백성들을 배도로부터 지켜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방편이요, 가톨릭교의 확장을 막는 유일한 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열심히 이 일을 행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복음의 진리들을 정기적으로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사람들을 가톨릭의 배도로 돌아서지 않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종교 개혁은 사람들을 영적 어둠으로부터 복음의 영적인 빛 가운데로 이끌어 냈다. 그런데 이제 그 동일한 큰 진리를 가르치는 일을 등한히 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다시 영적 어둠으로 돌아서서 가톨릭의 밥이 되게 생겼다.
모든 사역자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부탁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딤후 4:1-5 참조).
설교자들은 언제 어디서고 설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들은 오래 참음과 충성된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해야 한다. 듣는 자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허탄한 이야기만 들으려 할 때조차 말씀 전하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도인의 일에는 어려운 수고가 따른다고 말하고 있다. 거룩한 생활로 그 증거를 보이면서 “복음의 말씀과 가르침에서 수고하는 일”에는 휴식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신실한 기독교 사역자에게는 오직 끝없이 계속되는 수고와 땀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한편 가톨릭교의 사역은 아주 수월하다. 가톨릭 신부가 사람들을 가톨릭 교회 안에 붙잡아 두기는 아주 쉽다. 가톨릭교의 교역자들은 얼마든지 이 세상의 쾌락과 명예를 추구하고 또 사용할 수 있다. 그들은 그 모든 성가신 수고와 끝없이 고통스러운 그 노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 그 백성들은 무지하면 할수록 그들을 신부들의 권위에 복종시키는 일은 더욱 용이해질 것이다.
가톨릭이 궁지에 몰리게 되려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영적 이해에서 자라고 복음의 비밀을 아는 지식에서 세워져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특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목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령께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그를 사용하실 수 있게 되도록 말이다.
사역자로서 성령의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것이 곧 우리의 지혜일 것이다. 우리의 설교가 복음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래서 거기에 인간적 생각이나 미신이 덜 가미되면 될수록 사람들에게 복음을 알게 하는 일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
 
비 영적이고 육적인 인간의 마음은 복음의 진리보다 허탄한 이야기나 오류 및 미신을 훨씬 더 잘 이해하고 기억한다. 허탄한 이야기나 미신이 타락한 마음에는 더 잘 맞기 때문이다. 인간의 타락한 마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대해 원수이기 때문에, 그 마음이 복음적 진리를 싫어하여 그것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그 원수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제거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아는 데 몇 년이 걸리는 데 반해 회개치 아니한 사람들은 사오일 정도의 빠른 기간 내에 거짓 종교의 오류를 알아갈 것이다. 한 달 만에 그 교회의 경건의 비밀에 전문가가 되는 가톨릭교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와 비밀에서 자라가는 일은 그 속도가 느리다.
따라서 복음의 영적 진리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는 계속해서 부지런히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가톨릭 교회의 배도의 밥이 될 가능성이 크다.
 

 

 

6. 배도의 원인 : 교만, 태만, 속된 마음
 
복음의 일은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 것”이다(고후 10:5).
그런데 타락 이후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 높아진 것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한다(시 12:4 참조). 아무도, 심지어는 하나님조차 그들 위에 그리고 그들의 미래 운명에 대해 주로 군림하실 수 없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고 순종할 수 있거나 혹은 행할 수 있는 일 이외에 어느 것도 인간에게 요구되어져서는 안 된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수세기 동안 소위 기독교 교리라는 여러 가지 교리 하에 인간의 이 자기결정 및 자유의지를 옹호해 왔다.
자연인의 능력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사이에 있는 모든 논쟁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편에서는 인간의 마음과 뜻이 스스로 만족하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은 그 자신의 능력으로 바른 것을 선택할 수 있으며 영적 축복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 다 바르게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은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영원한 축복에 대한 인간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다고 주장한다(고후 3:5, 9:8참조).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 높아져서 자기가 모든 것을 다 결정할 수 있고 다스릴 수 있으며 인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혼자 선과 악 그리고 진리와 오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부패한 마음은 그 자신의 생각을 높인다.
부패한 마음은 그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사랑하되 맹목적으로 사랑하며 칭찬하고 그것을 굳게 포용한다. 이래서 모든 종류의 오류가 생성, 성장,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전 7:29참조). 인간이 영적이고 종교적인 모든 일에 있어서 스스로 진리와 오류를 결정하려 들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 마음을 창조하신 그 고결한 상태로부터 타락한 결과인데 그 결과 중에서도 가장 해롭고 주된 결과이다.
 
부패한 마음은 자기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존재라고 스스로를 높인다.
부패한 마음은 아무런 초자연적 인도나 도우심 없이 혼자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인지 참인지, 선한지 악한지, 받아들여야 할지 거부해야 할지를 결정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논리적 체계와 맞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경멸하고 조소한다.
복음은 하나님의 형상과 이름이 담긴 하나님의 권위로 인(印)쳐져서 이처럼 부패한 인간의 마음에 찾아온다. 하나님의 지혜, 선하심, 은혜, 거룩하심, 능력이 복음의 가르침에 너무 강하게 박혀있어서 그 자체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딤전 1:11)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거룩한 경외심을 가지고,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광스러운 것이요, 하늘에서부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깨달으며 복음을 영접해야 한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라고 경고하고 있다(히 12:35).
복음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보지 않는 한 우리는 복음을 영접하지도 않을 것이요 그것을 진심으로 이해하거나 확고하게 믿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살전 2:13)
우리는 영혼과 양심을 순복시켜 복음을 영접해야 하는데 그것은 티끌과 같은 우리가 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려야 할 마땅한 자세이다(창 18:27 참조).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고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의 모든 견해나 사상을 부인하지 않는 한, 겸손하여 가르침을 받을 만한 영혼이 되지 않는 한, 우리는 절대 복음을 영접할 수 없다. 하나님은 겸손하고 온유한 자들을 가르치겠다고 약속하셨다(시 25:9,14; 사 28:9; 시131:2 참조). 교만한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데 있어서 큰 장애물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겸비치 아니한 생각과 마음과 더불어 한곳에 거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 자신에 대해 육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자들 그리고 그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자신의 지혜를 믿고 있는 자들에 의해 부패된다.
복음은 이성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 위에 있다. 부패한 이성은 이 진리를 용납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이성으로 이해하거나 믿을 수 없는 것은 어떤 것이든 용납하지 않는다.
복음 안에는 계시된 하나님의 비밀들이 들어 있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복음 그 자체의 본질은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이성은 유한하며 제한, 속박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가 고안해 낸 일들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없다(욥 11:7-9). 따라서 이성은 하나님의 계시에 겸손히 순복하여 그로부터 기꺼이 배워야만 한다.
복음 안에는 또 부패한 이성이 싫어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들이 들어 있다. 이성 및 마음을 포함해서 전인(全人) 손상되고 부패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인간 전인을 회복시키려고 오셨을 때 또한 인간의 마음과 이성도 회복시켜 고쳐 주려고 오신 것이다.
부패한 이성에는 영적인 일들을 바로 분별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그 자신의 편견과 전체에 따라 복음이 가르치고 요구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곧잘 고안해 낸다. 따라서 복음의 목적은 인간의 이성을 사로잡아 믿음에 복종케 하는 것이다.
유한하고 제한된 이성
복음은 인간에게 이성이 판단하거나 발견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일들을 믿으라고 요구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단순히 하나님의 계시라는 권위 위에서만 어떤 것들을 믿으라고 요구한다(고전 2:9,10 참조). 그러나 부패한 이성은 하나님의 일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긴다(고전 1:18-25).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이성을, 하나님의 모든 계시를 참되고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재판관으로까지 치켜세운다. 그래서 이렇게 주장한다. 이성이 동의하는 것만 믿고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믿지 말아야 한다.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거절해야 한다. 이처럼 무한하고 무제한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은 반면, 하나님의 계시와 명철은 유한하고 제한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복음에는 인간의 유한한 이성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들어있기 때문에 이성은 복음을 판단할 수 없다. 이성은 복음에 들어 있는 이 진리들을 증거 하는데 있어서 믿음의 하녀가 될 수 있을 뿐이다(고전 2:11참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믿어야 한다든가 혹은 그것이 이성에 반한다든가 하는 가정 하에 이성이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는 능력 밖의 것은 모두 다 거부해도 좋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복음과 하나님의 모든 계시를 부인하는 것이다.
 
타락, 부패한 이성
부패되고 타락한 이성은 그 정욕과 기호 및 이성에 상반되는 명령이나 율법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타락한 이성은 항상 선행을 통해 그 자체를 정당화하려 든다. 은혜의 언약이라든가 행위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따위의 이야기는 타락한 이성과 상반되는 것들이다. 따라서 이성은 그런 이야기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거부한다(롬 11:6, 8:7참조).
복음은 자연인이 하는 순종조차 그리스도의 중재 및 성령의 은혜와 능력이 없이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이 자기 의(義)를 내세우는 타락한 이성에게는 상반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은 이것을 비합리적인 것이므로 참이 될 수 없다고 거부한다. 이성은 복음의 의무들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및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용납될 만하게 의무들이 행해질 수 없다고 말하면 그 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거부한다.
이성은 이성이 지지하는 어떤 파 혹은 당의 전통에 의해 복음을 판단한다. 그래서 이성이 인정하는 전통과 맞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거부당하게 되어 있다.
바울이 아덴에서 설교했을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이 그의 설교에 반대했다(행 17:18).
에비구레오 철학자들은 이 세상 정부를 하나님께서 섭리 하신다는 것 그리고 사후에도 인간 영혼이 존재하며 영원한 상벌이 존재한다는 것을 거부했다.
스도이고 철학자들은, 인간은 스스로의 안에서 그리고 스스로부터 모든 행복을 발견해야 하며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 내에서 모든 행복을 발견해야 한다고 근본적으로 믿고 있었다.
바울의 가르침은 이 두 학파와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바울의 가르침이 자신들이 주장하고 있는 전제 및 편견과 일치하지 않으므로 그들은 그 가르침을 거부했다. 그리고 훨씬 뒤에 이러한 철학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고백하긴 하는데 자신들의 교리적 전통을 복음에 가미함으로써 복음을 부패시켜버리고 만다.
 
복음의 목적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믿음에 복종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 3:18)고 말하고 있다. 육적 지혜와 자신들의 전제 및 편견들을 거부하지 않는 한 인간은 위로부터 오는 지혜로 인해 결코 지혜로워지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지혜로워지기 위해 먼저 어리석어져야 한다. 인간은 복음이 자기들 마음의 자연적 교만과 이성의 절대적 주권에 항거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복음에는 돌아서서 배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어리석어질 것을 거부하고 어린아이처럼 겸손해져서 가르침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될 것을 경멸하며 복음을 거절하고 자신들의 교만한 사유(思惟)에 더 잘 맞는 교사들을 따른다. 타락한 인간이 자기 이성을 종교 문제에 대한 절대적 권위자로 치켜세우게 되면(이것은 불가피한 일인데), 아무튼 각자 자기 이성이 자신이 받아들이는 유일한 판단 기준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에는 유한하고 제한된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부패하고 타락한 이성과는 상반되는 것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유한하고 제한된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가르침
삼위일체,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및 모든 신자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 등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가르침들이다. 따라서 유한하고 제한된 이성은 이런 가르침들을 거부한다.
 
부패한 이성에 반감을 주는 가르침
하나님의 속성, 영원하신 뜻, 그리스도의 직임 및 중재 사역, 그리스도의 의를 인간의 것으로 간주하는 칭의, 속사람을 새롭게 하여 성화시키는 성령의 사역, 죽은 자들의 부활, 이 모든 것은 부패하고 타락한 이성에게 반감을 주는 가르침들이다. 따라서 이성은 이 가르침들을 거짓으로 간주하여 부인한다.
그러나 그 용어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타락한 이성이 그 용어들에 불합리하고 신앙을 파괴하는 그런 해석들을 가한다. 그래서 부패한 이성은 하나님의 모든 계시를 사로잡아 자신의 그릇된 견해나 사상 밑에 복종시키려 한다.
이러한 배도는 복음의 진리를 하나님의 권위에서만 받아들일 것을 거부할 때 생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성경을 인간의 유한하고 제한된 그리고 부패된 이성 밑에 두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참과 거짓, 선과 악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오한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이다. 이 원리는 에덴동산에서 처음 생겨난 이래 지금까지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이 원리의 독소가 전 세계에 상당히 많이 퍼져 있기 때문에 복음이 많이 부패되었다. 가령 영원한 예정, 영적인 일에 대한 인간의 전적 타락, 죄인들을 회개시키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능력, 중생,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 치의, 복음으로 말미암는 내적인 거룩의 필요성, 성령의 은혜 및 도우심의 필요성, 성경의 신적 권위, 이 모든 것이 다 거부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성에게는 이런 가르침이 아주 비논리적인 것들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성은 스스로를 높인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가 갖고 있는 권위에 고개 숙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선인지 결정한다. 이렇게 해서 어리석은 인간은 배도의 길로 인도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겸손히 그 마음과 양심을 순복시켜야만 배도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
 
거짓 확신과 근거 없는 자신감
 
배도할 위험에 대한 성령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은 곧 거짓된 안전감에 빠지는 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깨어 있지도 믿음에 굳게 서지도 못하며 강건하여서 다른 사람처럼 되지 않는 일도 못하는 것이다(마 24:11,24; 계 3:10 참조). 배도한 자들은 정말 영원히 멸망할 것이다.
 
배도하는 일이 크게 일어날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거짓 안전감 속에 잠자게 될 것이라고 하신 성령의 경고를 무시하면 정말 거짓 안전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는데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할 것이다(살전 5:3 참조).
생활에 대한 염려 및 걱정과 함께 세상에 대한 사랑, 번영과 평안함이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런 경고를 무시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들은 큰 배도가 일어날 때 그것에 빠질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악하고 위험하다는 것에 대해 듣는다. 그러나 갈리오처럼 “그들은 이런 일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은 배도하는 일이 크게 일어나는 때를 대비해서 믿음을 위해 싸우려 들지 않는다. 참 종교가 부패되는 이유는 바로 이 등한시하는 태도 때문이다.
이처럼 복음 지키는 일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배도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다 똑같다”, “우리 모두 똑같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 “진리란 무엇인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오류인지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때에 복음을 위해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은 핍박당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경고를 받을 필요가 있다(갈 5:2-6; 살후 3:12; 벧후 2:1,2 참조).
 
거짓 안전감 때문에 사람들은 어리석은 자만심에 빠지게 된다.
베드로는 다른 모든 제자들은 그럴지라도 자기만은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자만심에 빠져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은 배도할 리가 없다고 어리석은 자만심에 빠진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시기 위해 주신 방편들을 등한시한다.
그들이 보기에는 자기들의 배도를 막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이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그리고 성령의 은혜도 다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깨어 기도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어리석은 자만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배도하게 되는 것이다.
 
배도의 또 다른 이유 : 세상 및 세상이 주는 쾌락에 대한 사랑

바울는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그를 저버렸다고 불평했다(딤후 4:10). 데마는 사도의 사역을 버렸을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마저 저버린 것 같다.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했다”(막 4:7,18,19).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핍박의 때가 되면 알 수 있다(마 13:20,21참조). 세상적 관심, 부, 집, 토지 및 소유가 위험해지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떠나간다.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은 또 미신이나 오류가 판을 치게 될 때도 드러난다. 진리 편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서 세상적 영예, 부와 직업을 빼앗아 보라. 그러면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결국 배도하게 될 것이다.
태양의 온기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의 외투를 벗어 던지게 하는 반면, 거세게 몰아치는 차가운 바람은 사람들로 하여금 외투를 더 단단히 잡아당기게 만든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인기와 용납의 때에 더 배도하기 쉽다. 극심한 핍박의 때에는 그리스도를 절대 집어 던지지 않을 텐데 말이다.
인간의 마음에서 세상이 그 보좌를 차지하고 있는 동안은,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고난 받는 것보다 영예와 호의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사단 역시 많은 사람들을 배도하게 만든다.
사단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첫 번째 배도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사단 자신이 바로 처음 배도한 자이다. 그는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어진”(유 6)모든 타락한 천사들의 우두머리이다.
사단의 큰 목적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복음을 영접했을 때는 그 복음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인 되고자 하는 생각을 단념 시키려고 피비린내 나는 핍박을 일으켰다. 인간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에 진리에 항거하는 편견들을 가득 채움으로써 사단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떠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고후 4:4참조).
사단의 목적은 인간의 마음을 부패시키는 것이다(고후 11:3). 그는 거짓 복음을 불러들임으로써 이 일을 행했다(4절 참조).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되게 해석함으로써 하와를 속였듯이 복음을 거짓되게 해석함으로써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하나님은 은혜의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 많은 놀라운 약속들을 주고 계시다. 그런데 사단은 그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를 반대하면서 이 약속들을 더럽히려 든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단순함으로부터 떠나기를 바라며 복음 안에 명백히 나타난 하나님의 분명한 뜻으로부터 사단의 거짓되고 어리석은 생각들로 돌아서기를 바라는 것이다. 큰 배도가 일어날 때마다 사단은 얼마나 맹활약을 하는지(살후 2:9-11 참조)! 사단은 아주 그럴듯한 속임수를 쓰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거짓말을 믿게 하면서 그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미혹케 하는 영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믿음으로부터 떠났다(딤전 4:1 참조).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자들의 말을 듣기보다 마귀와 그의 일꾼들의 말을 더 잘 듣는다.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을 배도하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 마음을 어둡게 하고 정욕에 불을 붙이며, 유혹을 쏟아 붓고, 그들로 하여금 거짓되고 부패한 사유에 빠지게 하면서 그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며 거짓 이적과 기사를 사용하는데, 이 모든 것이 그의 속임수를 유효하게 만든다. 사단은 절대 지치지 않는다. 그는 휴가도 안 간다.
하나님은 무심한 방관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방관하고 앉아서 아무것도 안 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다. 그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모든 것을 통치하시며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사건들을 강권적으로 다스리신다.
그는 인간이 그의 가장 큰 긍휼, 그의 말씀, 그의 진리를 과소평가하고 경멸하여 거부하거나 잊어버리면 반드시 심판하신다. 그리고 사악한 배도자들에게는 가장 가혹한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진리에서 떠나면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운 심판으로 그들을 더 큰 속임수에 넘겨주신다. 그래서 그들이 완전한 마지막 배도를 하고 그 안에서 점점 더 배도를 굳혀 결국 영원한 멸망에까지 이르게 되도록 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모든 기독교 교회는 역대하 15:2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그분을 의도적으로 저버린 자들을 버리신다.
하나님께서 고의적으로 복음을 배도한 자들을 벌하시고 복수하시는 방법은 그들이 완전한 배도에 이르도록 두셨다가 더욱 더 강퍅하게 배도하는 한 다음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분은 그들 가운데서 우선 촛대를 옮기심으로써 이 일을 행하신다(계 2:5참조). 그리스도는 뒤로 물러선 에베소 교인들에게, 만약 회개치 아니하면 오셔서 그들로부터 촛대를 제거하시겠다고 경고하셨다. 하나님은 배도자들로부터 진리를 아는 빛과 방편을 빼앗으실 것이다. 그래서 어둠과 무지가 그들에게 덮치도록 말이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그들이 거짓말을 믿게 되도록 강한 속임수를 보내신다. 그 이유는,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살후 2:11참조). 그분은 그들이 영원토록 거짓을 믿도록 내버려 두신다.
강한 속음수를 보내시는 일에는 다음 세 가지가 포함된다.

(1) 하나님은 고의적인 배도자들을 사단의 능력에 내어주신다. 그분은 사단을 제한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친히 그 배도자들을 가장 강력한 속임수 가운데로 이끌도록 허락하신다. 이것이 바로 가톨릭 교회의 배도 하에 일어났던 일들이다. 그때 사단은 대부부의 가톨릭교도들을 배도시키는데 성공했었다. 그리고 그의 성공을 보여주기 위해 늘 그러는 것처럼 미혹된 영들을 가지고 놀았다. 속임수에 그처럼 쉽사리 넘어가는 영들을 유혹하지 않는다면, 사단으로서야 그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2) 하나님은 완강한 배도자들을 거짓 교사 및 사기꾼들에게 넘기신다.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배도자들에 대한 자신의 공의로운 노여움을 내리실 때, 사단에 의해 속임을 당하고 사단의 가르침을 받은 이 사람들을 이용하신다. 이 배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사단의 세력에 넘기신 것이다. 속임수에 넘어간 사람들은 교회 내에서 이 거짓 교사들과 사기꾼들을 아주 높은 자리에 앉히고 그들에게 굴복한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게 괸 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교회 내에서 주어진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그들은 인간의 양심을 다 쥐고 흔든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주기도 했고 또 그들 스스로 주장하기도 한 바로 그 권위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두려움 속에 가두어 놓은 채 말이다.
 
(3) 하나님은 완강한 배도자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다(사 6:10; 요 12:39-41; 행 28:25-27; 롬 11:7,8에서 설명됨).
이런 심판 아래-사단, 거짓 교사, 눈이 멀고 마음이 완고해짐-있는 배도자들의 상태는 참으로 비참하며 다시 돌이킬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의 경고를 등한히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7. 복음의 가르침을 저버림

복음의 위대한 가르침을 영접했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그 가르침으로부터 돌아서면서 하는 말이, 자기들은 그 속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 사람들이 왜 복음 속에서 만족스러운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고 그 크신 은혜의 복음으로부터 돌아서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
많은 사람들이 복음 안에 있는 그 크신 은혜의 가르침으로부터 돌아서는 첫 번째 주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통해서만 자기들이 구원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 무지 때문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오순절날의 그리스도인들이나 빌립보 감옥 간수가 체험한 것과 같은 그런 체험, 즉 구원 받으려면 그리스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한 번도 깊이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다(행 2:37, 16:30참조).
만약 그들이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데다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그 필요를 실제로 체험까지 했다면 왜 그리스도를 저버리겠는가? 죄 사함과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알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라면 절대 그리스도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으려면 먼저 죄의 성격, 죄의 죄 됨, 죄의 오염, 죄의 능력 및 죄에 대한 형벌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그 진상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바로 우리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뱀에 물려 사경을 헤매 본 사람이 아니면 놋으로 만든 뱀을 쳐다보아도 별 감각이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죄를 범했는데 만약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구해 주시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절대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사단이 하는 일은 바로 죄에 대한 구실을 찾아내서 죄 범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그의 희생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들이 원죄의 지배를 받지 않지 않기 때문에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선한 존재라고 믿어버리기 쉽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복음에 대항하는 죄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우습게 여길 수 있으며 율법을 위반하는 부도덕한 죄에 대해서도 보통 있을 수 있는 일로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은 그리스도와 그의 직임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 대해 설교하는 일도 별로 없다.
그리스도께서 죄와 죄의 능력, 그 오염 및 형벌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셔야 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돌아서서 그로부터 멀어지지 않으려 애쓰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으려면 먼저 우리 자신의 의는 그것이 아무리 최선의 의라 할지라도 마지막 심판날 하나님 앞에 서게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의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리스도 없이는 어떤 선도 행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 열납 될 만한 어떤 일도 행할 수 없다는 우리 자신의 전적 무능력을 엄숙히 깨닫는 것 그리고 우리는 최선의 행위를 가지고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없는 존재라는 전적인 부적절함을 깨닫는 것, 이것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의무에 있어서 우리의 거룩이라는 것이 그 의무가 요구하는 거룩의 기준에 얼마나 미달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라. 우리가 행하는 가장 최선의 의라는 것이 고작해야 더러운 누더기와 같지 않은가(사 64:6 참조)!
우리가 하는 최선의 일이라는 것도 사실 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완전, 자기 의, 자기변호의 꿈을 꾼다. 자신의 의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변호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무엇 하러 또 다른 의를 구하겠는가?

그리스도께 와서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 수 있게 되려면 사람들은 먼저 자기들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저주받은 채 서 있는 정죄 받은 죄인이라는 사실부터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만이 자기들의 죄를 용서해서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출해 낼 수 있는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키신 분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또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의(義)를 전혀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요구들을 다 충족시키시면서 하나님께 열납 될 만한 의로 그들을 옷 입혀 주실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택을 믿는 믿음이다. 그리고 이 믿음이 있어야 사단의 모든 계략과 속임수를 능히 이길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스스로 체험함으로써 확신을 얻게 되면 아무것도 그 확신을 무너뜨릴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일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끝까지 믿지도 못할뿐더러 핍박이나 유혹의 때에 믿음으로 그분께 붙어 있지도 못한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직임의 영적 영광을 볼 줄 아는 능력의 결여
구약시대 때는 구약의 예배 의식과 상징 및 하나님의 약속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되어 있다. 이런 것들은 구약 성도들의 믿음의 생활이었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때를 보고 기뻐하였다(요 8:6 참조). 이런 일들은 선지자들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로서 즐거이 연구되고 부지런히 살펴졌다(벧전 1:11; 마 13:17). 그들의 소망은 왕 되신 메시아를 그분의 모든 영광중에 뵙는 것이었다(사 33:17). 구약 종교의 모든 영광과 생명, 하나님과의 모든 교제는 이 상징, 희생, 예배 및 선지자들에게 주어진 약속들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첫 번째 약속 위에 놓여 있었다.
그리스도는, 그분이 우리에게 전부이듯 이 모든 것들에게 있어서도 전부였다. 구약의 사역으로부터 그리스도와 그분의 직임을 빼 보라. 그러면 그 모든 사역은 무가치하고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이 그를 거절했던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흠모할 만한 풍채나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요 1:11; 사 53:2).
따라서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의 직임 안에 있는 그 영광을 영적으로 분별해서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끝까지 그리스도께 신실하게 남아 있을 사람은 없다.

사도들 신앙의 기초는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의 영광을 개인적 영안으로 친히 볼 수 있었다는 데 있다(요 1:14 참조). 그래서 그들은 개인적으로 체험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열심히 나누어 주었다. 그 다른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과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도록 말이다(요일 1:3 참조). 이것이 교회의 반석이다(마 16:16-18 참조). 그리고 이 반석 위에 그 믿음을 세우지 않은 자는 누구나 다 모래 위에 그 믿음을 세운 것으로 폭풍이 몰아치면 결국 무너져 내릴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자기 머리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육적 마음에 의해 미혹되어 어리석게 교만해질 것이다. 그들은 많은 어리석은 오류에 빠지게 될 것이다(골 2:18-19 참조). 복음에 대한 모든 믿음의 전 기초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직임의 영광에 달려 있다(히 1:2,3; 골 1:15-19 참조). 그분에 대한 이러한 지식을 가져야 비로소 우리는 그분과 비교해서 다른 모든 것들을 경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빌 3:8-10 참조).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영적으로 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복음 안에 있는 은혜의 가르침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게 될 것이다. 사단이 하는 악한 일은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은 완전히 허용하되 우리의 구원에 관한 한 그분은 거의(아니 전혀) 소용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왕 되신 그리스도를 대항해 싸우는 것이다.

죄를 이김에 있어서 성령과 그리스도의 은혜의 능력을 개인적으로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죄를 이기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는 그분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데 그것을 구하려면 영적 지혜와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성령의 비췸을 받지 못한 이성은 이런 문제에 대해 이해도 하지 못할뿐더러 그 필요성도 인식하지 못한다. 사실 그런 이성에게는 이것뿐 아니라 복음의 다른 비밀들마저 다 어리석어 보인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이겨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타락한 이성은 이에 반항한다. “만약 우리가 영으로 육체의 행실을 죽이면 우리는 살 것이다.” 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인간이 자신 안에 거하는 죄의 세력이 아주 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자신을 “죄의 종”으로 굴복시켜 “그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육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든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죽이고 억제하려 들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을 힘입어 이 일을 시작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과 자신의 노력에 의지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따라서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을 힘입어 죄에 대항하기를 그친 그들은 결국 죄의 세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들을 굴복시켜 죄의 종노릇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해성사를 하고 가혹한 훈련을 하는 등 자신을 혹사시킬까? 그것은 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참된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유일한 참된 방법이란 곧 참 신자들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죄를 극복하는 것이다.
죄를 극복하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 일을 전혀 행하지 않게 됨으로써 결국 죄의 종이 될 위험이 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무지
유대인들이
자신의 의를 내세우려 애썼던 이유는, 하나님의 의를 몰랐기 때문이다(롬 19:3). 유대인들은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자신들을 의롭게 만들려고 애썼다(롬 9:31,32참조). 그들은, 자기들은 율법의 선생들이므로 하나님의 의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고 생각했다(롬 2:17-20 참조).
하나님의 의는 세 가지 일을 의미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의를 말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말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칭의를 위해 마련해 주신 의를 말할 수도 있다. 복음에서 설교되는 의는 바로 이 세 번째 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칭의를 위해 마련해 주신 그 의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으려면 먼저 하나님 자신의 의와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의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 자신의 의
하나님은 그 본성에 있어서 무한히 순결하시며 거룩하시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만유의 심판주로서 절대적으로 영원히 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우리 자신에 대해 마땅히 가져야 할 생각을 갖게 될 것이며 그분 앞에 서기 위해 가져야 할 완전한 의의 필요성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깨닫게 될 것이다(히 12:29; 출 34:7; 롬 1:32; 수 24:19 참조).
인간이 일단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를 깨닫고 그분의 떨림과 두려움 속에서 뵐 수 있게 되면 인간 스스로의 의를 쉽사리 의지하지 않게 될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의 의를 이해하고 깨달은 두 종류의 사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달은 죄인이요, 두 번째 사람은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 거룩한 신자들이다.
다음에 나오는 예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 죄인들이 자기 자신 및 자기 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담(창 3:10)과 다른 죄인들(사 33:14; 미 6:6,7).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서 숨을 생각을 했거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불가능한 일들을 시도했거나 혹은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
그들에게 자기 의를 내세우라고 한번 말해 보라. 그러면 그들은 여러분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그래서 자기들의 비참함과 무서운 절망감만 더 가중시키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거룩하고 겸손한 신자라면 누구나 다 아무도 자기 의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분의 의 앞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욥 4:17,19, 9:2; 시 130:3, 143:2 참조).
이 진리를 충분히 묵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죄인들의 칭의에 관해 그렇게 주제넘은 견해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성경은 칭의에 관해 말하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듯 그렇게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칭의를 이해하려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시 143:2; 롬 3:20 참조).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듯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어떤 토대 위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지를 고려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모르는 인간은 하나님을 자기들 수준밖에 안 되는 분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다지 거룩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우리에게 그처럼 높은 기준을 요구 하시지는 않을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우리의 의무에 대해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시는 분, 우리의 죄에 대해서는 더더욱 관심을 갖지 않으시는 분으로 본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자기 의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가하면 또 하나님은 죄에 대해 그처럼 가혹하시지도 않고 죄에 대해 저주를 퍼부으실 만큼 거룩한 분도 아니라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다.
이처럼 자기 의를 믿거나 행위로 말미암아 칭의될 수 있다고 믿게 되면 저급한 도덕 기준에 준한 삶이 양산될 수밖에 없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행위로 말미암는 의가 높임을 받을 당시, 사람들의 삶은 그 사악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선행의 대부분은 자기들이 저지른 끔찍한 악덕과 부도덕에 관한 사죄의 의미로 하나님께 흥정을 하는 것이며 양심을 달래자는 소행에 지나지 않았다.
행위로 말미암는 칭의는 사람들 가운데 거룩함과 의를 만들어 내야 마땅한데 실상은 불경스럽고 불의한 생활만 양산해 내는데 성공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견해 때문이다. 즉, 자신들의 선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게 허락해 주셨다고 생각한 인간들은 또 하나님은 자기들의 죄를 그처럼 가혹하게 다루실 만큼 사랑이 없으신 분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결국 자기들의 정욕대로 산 것이다.
자기 의를 내세우면 반드시 방종 된 삶을 살게 마련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와 칭의 만이 죄를 저지할 수 있다.
인간이 자기 의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는 결국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문을 열어 주는 셈이다.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의
만약 사람들이 율법의 정결함, 영성(靈性), 가혹함 및 무자비함에 대해 잘 안다면 감히 자기 자신의 의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만약 율법은 외적 행위나 아주 큰 죄들과만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이원화하여 해석함으로써 쉽게 자신들을 변명하려 들 것이다. 율법의 참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자신이 그 마음과 영혼 및 행위에 있어서 과연 그 기준대로 살고 있는지 조사해 보게 하기 위함이다. 그 형상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났을 경우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마 자기 의에 만족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나님께 복음 안에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의(롬 10:3,4).
이것은 “믿음에서 난 의”다(롬 9:30).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거룩한 정의의 요구를 완벽하게 충족시키셨기 때문에 그리고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부여된 그런 의이다. 이 의(義)에 대해 모르는 자는 자기 자신의 의를 세우고 그 의만 믿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깨닫게 되면 할 말을 잃고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서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의 복음이 그에게 전파된다(롬 3:21-26; 롬 5:18,19 참조).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율법을 모두 만족시키시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는데 필요한 모든 요구들로부터 자기를 해방시켜 주셨다고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의롭게 되는 것을 경멸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덧입혀 주신 그 의를 경멸하고 무시하거나 거절하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못 박아 현저히 욕보이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으려 애썼으나 그 안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 자기 의를 믿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 큰 모독을 가하는 일이요 자기 자신들에게는 그 사악한 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자초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기를 꺼림
은혜 언약의 유일한 기초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주권적 지혜와 은혜다. 하나님은 이 은혜 언약 안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신다. 하나님의 주권적 지혜는 복음의 비밀 전체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 주권적 지혜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여 죄인들의 구세주가 되시기에 필요한 모든 은혜들이 채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요 3:16; 골 1:19; 요 1:16 참조).
하나님의 주권적 지혜와 은혜는, 그리스도를 우리 죄의 대속자로 보내시어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시고 우리 대신 형벌을 받게 하셨다(사 53:6,10; 고후 5:21 참조).
영원한 선택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 지혜와 은혜로 말미암는다(롬 9:11,18 참조). 또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택한 죄인들을 회개와 믿음으로 이끄시는 성령의 효과적인 내적 사역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 지혜와 은혜에 속한 일이다(마 11:25,26 참조). 복음의 나머지 모든 비밀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 은혜 및 선하심이 믿고 영접해야 할 진리인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부어진다.

그러나 회개치 아니한 육적 마음은 이 중 어느 것도 기뻐하지 아니할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반대하고 나선다. 육적인 마음으로서는 하나님의 뜻과 지혜 및 그의 기쁘심에 순복하여 그것을 경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그 회개치 않은 마음에는 어리석게 보이는 것이다(고전 1:23-25 참조). 그들은 또 선택과 유기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부당하고 불공평한 것으로, 종교 전체를 파괴시키는 것이라 생각한다(롬 9:17-21 참조).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는 율법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우리 자신의 모든 의를 불필요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육적 마음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말미암은 복음의 전체 비밀과 그 가르침, 그 명령 및 약속들을 반대하고 나선다. 육적 마음은 인간의 유한하고 제한된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어 있는 신앙, 즉 타락하고 이기적인 이성의 혐오감을 일으키는 그 신앙을 거부한다(롬 11:18-21).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지혜에 반대해서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빛을 기준으로 세워 그 기준에 근거해서 복음의 진리를 측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이성과 지혜를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시킴으로써 먼저 어리석은 자가 되어 참 지혜로운 자가 되는 대신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며 속는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어리석음 속에서 점점 더 교만해져 갈 뿐이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기”를 거부하고 하나님 주권(하나님 자신의 계시 및 우리의 순종에 관한 모든 것들 안에 나타난)을 거부하는 것보다 더 빨리 배도로 가는 길은 없다. 모든 일(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포함해서)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이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하기를 거절하는 데서 펠라기안주의, 알미니안주의 및 모든 현대판 이단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한 체험적 증거 부족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증거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성경에 두신 그 신적 증거들을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자는 핍박과 어려움이 올 때 절대 믿음으로 굳게 서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듣고 떨며 그 말씀 안에 있는 권위를 인정하는 자들만 존중하신다. 그러나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권위를 개인적으로 체험하지 못한 곳에서는 “무지하고 심지가 굳지 못한 자들”이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을 자초하거나” 다른 것들, 가령 전통이라든가 이성 같은 것들, 혹은 최소한 그것들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들을 선호하게 된다.
따라서 그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그 주장들에 순복하며, 우리의 온 영혼과 양심이 그 진리에 전적으로 복종해야지 단순히 하나님 말씀의 진리에 동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육적인 인간 지성은 모든 상상력을 다 동원해 그 말씀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높이며 자기 이성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과 동일한 권리와 권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의의 모든 속임수”에 넘겨 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리의 사랑”(살후 2:10,11)을 받거나,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이 이렇게 되면 사단은 그들을 끝없이 속이면서 아주 완고한 이단들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첫 번째 방법이다. 그들은 복음의 가르침 안에는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의 소산이요 그분의 영광스러운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의 가르침을 거부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를 다시 못 박고 현저히 욕보이는 것”이다.

 

8. 복음의 명령으로부터 돌아섬

복음의 거룩한 명령으로부터 돌아선다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복음의 진리를 부분적으로 배도하는 것보다 더 끔찍하고 위험한 일이다. 일단 복음의 명령으로부터 돌아서게 되면 인간의 마음은 죄의 속임수로 더욱 강퍅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소행이 그다지 악하거나 위험하게 생각되지 않는 법이다. 복음의 가르침 안에 있는 오류는 금방 눈에 띄고 인간은 그것에 대해 경고를 받는다. 그러나 온 세상이 정욕과 쾌락에 빠져 있으면 마치 어둠이 빛을 대신하듯 인간은 복음의 규범에 반대되는 그런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삶이 외적 예배 의식을 방해하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계속 선한 가톨릭교도 혹은 개신교도로 남아 있게 하는 한 그런 삶에 대해 어떤 경고도 취해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복음의 가르침을 오해하고 설혹 실수를 저지른다 해도 여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용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의 거룩한 명령에 반하는 어떤 죄를 짓고도 그 죄를 회개치 아니하고 살다가 죽은 사람이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다고 가르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안에 거하시며 죄를 이길 수 있도록 도우시는 성령의 사역도 받지 않은 채 혹은 회개하고자 하는 소원도 전혀 갖지 않은 채 습관적으로 계속 죄악 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곧 기독교를 부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음의 거룩한 명령으로부터 돌아선다는 것은 최소한 복음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것으로서 주의해야 할 배도이다.
우리는 이 배도에 대해 좀 더 간절한 경고를 받아야 한다. 복음의 거룩함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복음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것만큼이나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행위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배도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딤전 4:1 참조). 나는 디모데에게 주어진 이 경고야말로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경고라고 믿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경고가 그들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또 우리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해당되는 경고이기도 하다.

바울은 또 “말세”에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가장 더러운 정욕과 가장 혐오스러운 죄악들을 자행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딤후 3:1-5 참조).
만약 우리도 이런 배도에 빠질 위험이 있다면, 이런 일을 하게 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 숙명적인 악(배도)을 저지르지 않을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지금 거짓 안전감에 사로잡혀 생각 없이 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깨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부지런히 구하라는 경고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복음에 순종해서 신실하게 산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마음이 흔들리거나” 요동할 필요는 없다. 우리 믿음은 성경의 무오성에 근거한 것이다. 성경은 그 예언을 통해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을 이미 경고해 왔다.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곧 우리가 “말세”에 살고 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마 24:9-13,24; 행 20:29; 살후 2:3; 딤전 4:1-5 참조). 만약 이런 일들이 자기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기 위해 깨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나 교회가 있다면 그보다 더 치명적인 일도 없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성전 및 예배에 대해 이런 자만심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그들이 세운 성막인 실로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라고 명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전에 일어났던 일이 다시 일어나기는 아주 쉬운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초대 교회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빨리 배도에 빠졌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계 2:4,5, 3:1-3, 14-17 참조). 우리는 그들에게서 외적 특권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배울 수 있다.

복음의 가르침은 거룩함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이다
복음의 가르침은 거룩할 것을 요구하며 거룩할 것을 명한다. 복음의 가르침에 의하면
“거룩하지 않고는 아무도 주를 볼 수 없다.”

복음이 요구하는 거룩은 다른 교리나 가르침이 요구하는 순종과는 그 성격이나 종류가 전혀 다른 순종이다
자연법은 하나님, 우리 자신 및 다른 사람들에 의해 중요한 의무들을 많이 제시하고 있다. 기록된 율법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 요구하신 그 모든 도덕적 의무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에서 요구하는 거룩은, 비록 그 안에 도덕적 율법이 요구하는 요구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구된 순종의 성격과 동기가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과는 아주 다르다. 복음이 요구하는 거룩한 순종은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로부터 우러나오는 순종이지 자기 덕을 세우려는 데서 오는 노예적 순종이 아니다.

복음의 가르침을 설교하는 것과 함께 성령의 사역이 있는데, 이 성령의 사역이 인간에게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하는 것이다(사 59:21; 요 16:7-11 참조). 주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뜻과 마음에 따라 선포되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든지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이 일을 수행하신다. 인간의 영혼에 이 사역이 임함으로써 마음과 생활이 거룩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거룩해졌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나와 거룩한 삶을 살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 이 사람들은 결코 참 거룩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끝까지 보존될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도 복음의 거룩한 명령에 대해 전심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잠시 동안 열매 없는 삶을 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모든 침륜에는 다 부분적 배도가 있게 마련이며, 그리스도께 그만큼 모욕을 안겨 드리는 일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자신의 침륜이 결국 완전한 배도로 끝나게 될지 어떨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법이다.
이것은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도들이 이 세상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웠을 때 그 교회들은 복음의 가르침이나 예배 및 거룩함에 있어서 아주 순결하고 거룩한 상태에 있었다. 처음 세워졌을 때는 그 교회 모두 “순전한 씨앗을 가진 고상한 포도나무들” 이었으나 나중에 “이상한 열매를 맺는 타락한 포도나무로” 변했다. 그리스도와 약혼한 순전한 처녀의 상태에서 떨어져 영적 매춘부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떨어짐으로써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지도 못하게 되었으며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능력과 영향력도 나타내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이 세상의 열방들에게 오게 되어 있던 축복이 박탈되고 말았다.
참 거룩이 존재하는 곳 그래서 그 열매로 말미암아 능력이 나타나는 곳, 그런 곳에서만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실 수 있다. 우리 주요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일들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것을 우리에게 명하셨다. 가령 진리를 증거하고 복음적 예배를 준수하는 일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만약 이런 일들에 거룩한 생활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혀 증진시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교회나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롭게 변화되는 곳, 그들의 가슴이 깨끗해지고 겉으로 나타나는 그들의 행실이 열매를 맺는 곳, 그들이 화평, 사랑, 온유, 친절, 자기부인의 정신 아래 있으며, 천상으로 향한 마음을 가지고 선행을 많이 하는 곳(이런 것들이야말로 참 거룩의 실체임)에서는 복음의 영광과 복음의 주인 되신 주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널리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런 일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은혜의 능력, 그 순결함 및 효능이 증명되는 것이요 결국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신실한 증거 속에서 그리스도는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다(사 53“11).
그러나 그의 이름으로 불리 우며 그의 권위를 고백하고 그로부터 긍휼과 자비를 기대하면서 동시에 이 거룩함에 미치지 못하고 그 반대의 길을 걷는 교회나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 현저히 욕보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복음의 거룩함으로부터 멀어지는 두 종류의 배도
어떤 사람들은 복음이 요구하는 여타의 가르침이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순종, 다른 종류의 율법을 거부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의 율법과 의무는 받아들이지만 복음의 동기는 거부한다. 이것이 복음의 거룩함으로부터 멀어지는 배도의 한 종류이다.
그런가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복음의 거룩함으로부터 전적으로 멀어져서 완전히 죄악된 생활 가운데 빠져든다. 오늘날 이 세상은 바로 이 배도 아래서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배도 때문에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기독교를 진정으로 믿는 믿음의 고백이 없어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그것을 경멸하고 있는 실정이다. 거룩한 의무라든가 훈련된 행실 그리고 은혜의 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일 등은 단순히 등한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조롱당하고 있다.
어느 곳에서도 이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진정한 기독교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배도
로마 가톨릭교도들은 복음적 순종이라는 거룩한 길로부터 돌아서서 스스로 만들어 놓은 길로 간 자들의 대표적 예다.
로마 가톨릭 교회만큼 거룩을 자랑하는 교회도 아마 없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 교회는 신성하므로 자기들 교회야말로 참 교회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톨릭교도들의 생활을 보면 그 대부분이 거룩하지 못하고 그 교회의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 역시 거룩한 생활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누가 청빈, 순결, 순종을 서약할 것인지 그리고 누가 수도원 생활에 자신을 헌신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엄격한 규율과 의무에 복종해 살 것인지를 지명하는 것이다. 이들만이 그 사람들 중에서 종교적이라는 소리를 들어 왔다. 그러나 이 중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매일의 일과(자기 시간의 거의 전부가 투자되는)가 헛되고 미신적이며 위선적이라는 사실을 아미 발견해 왔다. 아무튼 이 거룩한 순종은 복음에서 요구하고 명령하는 그런 순종이 아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하는 거룩에 대한 서약은 복음적 거룩의 영적 자유를 보여 주지 못한다.
진리가 우리 마음에서 하는 첫 번째 일은 모든 오류와 편견들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요 8:32 참조). 진리는 모든 거룩의 원리로서 마음과 영을 넓혀 준다. 그래서 진리를 “참 거룩”이라고 하거나 “진리의 거룩함”(엡 4:24)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의 영(혹은 진리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후 3:17).
타락 이후 인간은 “죄의 종”이 되어 기꺼이 죄를 섬기며 죄의 정욕을 만족시키고 죄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그들은 “의로부터 자유하다.” 그들은 의를 섬기고 의의 요구들에 순종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역사하는 곳에서는 인간이 죄로부터 자유케 되어 하나님의 종이 되며 그 생활 속에 거룩한 열매들을 맺게 된다(롬 6:20,22 참조). 그래서 모든 신자들은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딤후 1:7)을 받았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신자들의 마음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으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긍휼에 대한 감사로 거룩이 요구하는 모든 의무를 자원해서 즐거이 하고자 하는 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의무를 행하지 않았다가는 혼날테니까 잘해야지 하는 두려움에 의해서가 아니라, 참으로 기쁘게 순종하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순종한다. 그들은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부어주신 그 크신 구원이 너무 감사해서 기쁘게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으로써 하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서약과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 아래 있으면서 종교적 의무를 행하느라 매일매일 살아가고(로마 가톨릭교는 이것을 거룩이라 부르는데) 있는 자들은 그런 자유의 영이 아니라 비굴한 노예의 영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들이 있다. 그들은 그 공동체 안에 살고 싶으면 서약을 함으로써 그들 자신들 그곳에 매어 두라는 강요를 받는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 교제에 위배되는 일이다. 이 서약들을 순종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주인이 되어 자신을 훈련시키고 다스리는 것아 아니라, 실패할 경우 외적 벌을 가할 다른 사람들의 엄한 훈련 아래 있게 되는 것이다. 종교적 의무에 있어서 사람의 종이 된 자들은 하나님의 자유인이 아니다. 종교적으로 자신들을 인간에게 예속시킨 그들은 또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사람들로 하여금 수도원 생활을 하고 인간이 만든 종교적인 엄한 생활 규칙을 지키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어느 곳에서도 요구하시지 않는 서약이요 생활 규칙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생활을 계속하는 주된 이유는, 자기들이 복종할 것을 서약했으므로 윗사람들에게 그 서약을 지킬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의 참 거룩을 이루어 내는 근원은 영적으로 자유케 된 마음으로서 이와는 얼마나 대조적인 것인지 모른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서약 및 종교적 생활 규율은 또한 공덕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 의해 생겨났다. 이 생각이 그들로 하여금 더욱 엄한 종교적 훈련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공덕을 세우려는 욕구 또한 그들이 하는 모든 행위 안에 비굴한 노예정신을 만들어 낸다. 왜냐하면 공덕을 이루기 위해 그들이 행한 모든 일은 완전한 성실이라는 엄하고 가혹한 기준에 의해서 행해졌을 뿐 아니라 절대 완전이라는 균형 속에서 저울질 되어졌을 테니 말이다. 이런 생각 속에서 거저 받은 선물인 칭의와 영생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겁고 기쁘게 기꺼이 행하는 그런 순종은 있을 수 없다. 로마 가톨릭교의 서약 아래 있는 사람들은 또 자기들이 금세에나 내세에 하나님께 용납 받을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이 의심에 시달려 더욱 더 복종하게 된다. 따라서 그 모든 의무를 행하되 “능력과 온전한 마음”이 아닌 “두려움의 영”에 쫓겨 행하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의 서약과 종교 생활에 관한 규율은 인간을 복음이 아니라 인간이 고안해 낸 법과 규율을 지키도록 구속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베네딕트의 규율을 지키고 어떤 사람들은 프란시스의 규율을, 또 어떤 사람들은 도미니크 규율을 지킨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그나티우스나 기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낸 규율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하는 모든 복종은 복음의 거룩과 아무 상관이 없음을 증명해 준다. 왜냐하면 복음의 거룩은 하나님의 뜻인 복음의 규율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책망하신 옛날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의무들을 첨부한다. 따라서 그들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마 15:6,9 참조) 셈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그 거짓된 종교적 의무들의 수가 아주 많다고 하자. 그 의무를 수행하는 그들의 매너가 아주 빈틈없이 정확하다고 하자. 그러면 무슨 소용인가? 그 모든 것은 결국 복음이 요구하는 순종으로부터 인간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들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혀”(마 15:13)서 불에 던지워질 것이다.

이 규율과 서약을 만든 자들이 규정한 모든 것 그리고 그 제자들이 행하는 그 모든 것 안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없이 행해진 일이거나 영혼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소치에서 행해진 일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복음이 요구하는 순종은 “믿음의 순종”이다. 이 믿음의 순종이라는 뿌리 위에서만 복음적 거룩이 자라갈 것이다. 복음적 거룩의 핵심은 우리로 하여금 그 거룩을 행하도록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있다(고후 5:14 참조).
그러나 수도원의 이 모든 서약과 규율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에 못 이겨 강권적으로 행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무엇이 과연 들어 있는가? 구원하는 믿음이나 사랑이 조금도 없는데 기도를 외우기 위해 한밤중에 일어난다거나, 맨발로 걷는다거나, 베옷을 입는다거나, 항상 혹은 때에 따라 고기를 일체 먹지 않는다거나,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는 훈련에 순종한다거나, 그 모든 무시무시한,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고행을 다 수행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모든 거짓 종교에는 항상 자신들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고행과 속죄 행위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로마 가톨릭의 서약과 규율로 말미암아 행해지는 모든 선은 공덕을 얻고 여덕의 업적을 쌓는다는 자만심 때문에 완전히 부패되어 버린다. 여기서 여덕의 업적이란 그들에게 요구되어지는 의무 이외의 일을 하는 것으로, 이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의 공덕이 부족할 때 그 부족을 메우는 데 사용될 수 있다. 공덕이나 여덕의 업적 등과 같은 생각은 은혜 언약을 전적으로 약화시키고 그리스도의 피와 중재 사역을 우습게 여기는 소치로 복음의 근본 원리들에 전적으로 위배되는 사상이다.
이 서약들에다 그들이 헌신적으로 행하는 모든 미신적 행위 및 우상숭배들 까지 합치면 로마 가톨릭교도들이 행하는 일 중 가장 훌륭한 일조차 복음이 요구하는 거룩함(그것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볼 수 없는데)의 기준에는 사실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로마 가톨릭교도들은 한결같이 자기네들만 거룩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더 철저히 의무에 순종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도덕성을 가장한 배도
어떤 사람들은 도덕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복음의 명령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들은 자기들이 고상하고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리석은 광신주의”로 몰아세우며 조롱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복음이 요구하는 모든 순종은 고상하며 도덕적이요 정직하고 고결한 생활이므로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그 순종을 위해 복음적인 은혜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절대 아니라고 말이다.
그런가하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도덕적 행위는 복음이 요구하는 참 거룩에 미치지 못한다. 복음에 순종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 안에서 모든 도덕적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도덕적 덕목이나 의무들을 유용하게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복음과 복음의 법에 불순종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도덕적으로 선한 일을 한다고 해서 그의 하는 일이 모두 하나님께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부터 행하지 않고 자아를 사랑하고 칭찬하기 위해 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덕성은 그것이 위에 언급된 복음의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양심의 빛에 의해 인도되고 지배당할 때 배도가 되고 만다. 양심의 빛은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의 법에 따라 전 인류에게 의무가 된 그런 도덕적 덕목들만 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을 뿐이다. 양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복음이 요구하는 그런 영적 순종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지 못한다.
성령의 초자연적 도우심이나 하나님의 은혜 없이 이성의 힘만 가지고 이루어진 확신으로부터 생긴 도덕성은 복음적 순종이 아니다. 우리 자신 및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복음적 순종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다.

중생을 통해 우리 영혼이 새롭게 되어 이루게 된 도덕성이 아니라면 그 도덕성은 복음적 거룩이 아니다. 열매가 선해지려면 우선 나무부터 선해져야 한다. 옛 본성에서 나오는 모든 도덕성은-설사 그 일을 하는데 그리스도께 도와주십사는 기도를 드렸으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해진 일이라고 주장한다 할지라도-절대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다. 사람이 중생하여 본성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새롭게 변화되지 않는 한, 위로부터 오는 영적 생명(그로 하여금 복음에 합당하게 살 수 있게 해주는)을 덧입지 않는 한, 그는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새롭게 변화된 영혼 안에 있는 이 은혜의 원리로부터 우러나오는 도덕성이 아니라면 그것은 복음의 거룩함이 아니다.
성령의 내적 조명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은 영적 방법으로 영적인 일들을 분별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들을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내적 조명이 없는 자들이 주장하는 도덕성은 복음이 요구하는 거룩이라 볼 수 없다.
초자연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태어난 저 근본적, 초자연적 복음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는 도덕성은 복음이 요구하는 참 거룩이 아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중재 및 보혜사로서 교회에 거하시는 성령과 같은 이런 초자연적 진리들 위에 세워진 도덕성이야말로 참 복음적 도덕성이다. 복음의 가르침과 무관한 도덕성은 복음이 요구하는 그런 거룩이 아니다.
따라서 만약 복음의 참 도덕성에서 멀어져 자연적 도덕성으로 돌아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복음이 요구하는 거룩에서 떨어져 나가 회복이 불가능한 배도의 길로 빠질 위험이 있다.

완전을 가장한 배도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 행위가 완전하다고 주장함으로써 복음이 요구하는 참 거룩으로부터 멀어진다. 이런 주장은 은혜 언약을 파기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중재 사역 및 끊임없는 죄 씻음의 시역이 모두 필요 없다고 보는 소행이요, 성경에 나와 있는 수많은 증언 및 모든 신자들의 체험에 위배되는 주장이다(요일 1:8-10 참조).
위에 나온 예들이 바로 참 복음적 거룩에서 배도하는 예들에 해당된다.

복음이 요구하는 거룩
복음적 거룩이 유지되려면 영적 전쟁에 끊임없이 가담해야 한다.
마귀와 육 그리고 이 세상은 복음의 참 거룩으로부터 무언가 다른 것(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우리를 내몰려고 온갖 수단을 다 강구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마귀를 “대적”해야만 한다(벧전 5:8,9 참조).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엡 6:12,13 참조).
우리는 영혼을 대항해 싸우는 육체의 정욕들로부터 “도망쳐야”한다(벧전 2:11 참조).
그리고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아야”한다(요일 2:15).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이기되 믿음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이겨야 한다(요일 5:4,5 참조).
하나님은 우리가 그저 종교적 의무 중 몇 가지나 행하고 몇 가지 특별한 죄나 피하는 식으로 사는 것을 용납지 않으실 것이다. 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 자갈물리지 않은 정욕들을 죽이는 것, 마귀를 대적하는 것, 육체의 정욕으로부터 도망하고 세상을 사랑 하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은 복음의 의무로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계속해서 지켜야 할 것들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에 가나안 국경에 도착했을 때 열 정탐꾼의 보고를 전해 듣고 낙심하여 용기를 잃었듯이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평생 동안 싸워야 하는 이 영적 전쟁에 대해 듣고는 낙심하여 용기를 잃는다(민 13:32; 막 12:34 참조).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그들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적 거인들만 볼 뿐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는 보지 못한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그 전쟁을 치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중생하지도 않고 거룩의 적들과 싸울 영적 힘도 전혀 없으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고 애쓴다. 그들은 육신의 힘만 가지고도 그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육신은 곧 지치고 말 것이요, 어떤 의무들을 행하지 못하는 데 대해 구구한 변명들을 늘어놓기 시작할 것이다. 육신에게 오는 대부분의 지원은 회개치 비 영적 마음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의무를 행하다가 하나씩 하나씩 생략하는 것들이 생기게 되고 마침내는 아예 다 잊어버릴 것이다. 계속해서 몸을 쳐 복종시켜야 한다는 의무는 등한시될 것이다(고전 9:27 참조).
참 신자라면 이처럼 의무를 태만히 한 데 대해 겸비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돌아와 이전의 열심을 다시 낼 것이다(시 119:176 참조). 그러나 위선자들은 복음의 의무들을 태만히 한 데 대해 별로 개의치 않을 것이다.
내주하던 죄가 거룩과 대항해 싸워 종종 승리를 거둘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내주하던 죄는 이전처럼 계속 육을 지배하려 들 것이고 결국 그 당사자의 마음은 지치게 될 것이다. 이 때 위선자는 자기 안에 거하는 죄에 대해 주의를 집중시킨다. 그러나 신자는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도록”(롬 6:14)하라는 약속을 붙잡는다.

우리는 오직 성령의 은혜와 도우심을 통해서만 복음이 요구하는 거룩한 상태에 안전히 거할 수 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성령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참 길을 모른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자신을 방어해야 하며, 곧 육신이 만들어 내는 거룩함에 만족해 버린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그의 영 없이 이루어지거나 존재하는 그런 거룩함에 대해서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더군다나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는 거룩에는 절대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요 15:5 참조).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의 의를 세우려 애쓰듯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힘으로 계속 사는 방법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이 요구하는 거룩보다 훨씬 낮은 수준에 머물고 마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전혀 거룩이 아닌데도 말이다.
회개치 아니한 사람은 진정한 복음적 회개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할 수도 없다.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행 5:31, 11:18; 딤후 2:25). 참 회개라는 이 은혜 때문에 신자들은 그 모든 실패, 약함 그리고 죄를 다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거룩에 이르는 문이요 참 신자들이 계속해서 거룩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지켜 주는 보호자이다. 신자들은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함을 깨닫고 자신들이 행하는 최고의 선도 그분의 영광에 견주어 보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에서 우러나오는 겸손, 바로 그 겸손이 신자들로 하여금 거룩을 추구하고 거룩 안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참 회개의 단맛과 유익함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 회개의 은혜를 체험하고 슬퍼하는 가운데 영적 위로를 맛보지 못한 사람, 회개란 단지 율법 및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만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매일매일 회개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복음적 거룩은 복음의 모든 의무에 끊임없이 습관적으로 순종할 것을 요구하며 마음이나 육체에서 나오는 어떠한 정욕도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고후 7:1)야만 한다. 육체에서 그 정욕을 채울 기회를 제공해서는 절대 안 된다(롬 13:14 참조). 이 말들은 복음적 용어들이다. 복음의 한 가지 의무라도 등한시되어서는 안 된다. 한 가지 죄라도 그것에 계속 빠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복음은 우리의 약함 때문에 매일매일 저지르게 되는 죄들을 용서하고 제거해 준다(벧전 4:1,2 참조).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그중 한 가지 죄라도 마음에 품고 간직하며 애지중지하기를 용납하지 않는다. 습관적으로 죄를 지으며 사는 생활이란 복음적 순종에 전적으로 위배되는 일이다(요일 3:6-9 참조).
새 언약 안에서 요구되는 완전은 곧 새로워진 생명 안에서 거짓 없는 정직으로 성실하게 육이 아닌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창 17:1; 요일 3:7-10 참조).
이래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죄를 보되 복음이 보듯 볼 수 없으며 복음이 죄라고 선언하는 것들을 죄나 악으로 판단할 수도 없다. 이러한 어둠과 무지 아래서 인간은 그 마음에 온갖 거짓된 정욕들을 품고 키우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 속에 남아 있는 죽지 않은 정욕들에 대해 의식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스도께 왔던 그 젊은이는 아마 마음에 있는 재산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지 않았을 것이다.
사울 왕이 찾아갔던 그 신접한 여인은 “심부름 마귀”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 그 마귀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매일매일 그 마귀를 즐겁게 해주다 보니 그 마귀는 어느새 그녀의 심부름 마귀가 되었다. 그녀는 마귀가 자기 손안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녀가 그 마귀 손안에 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죽지 않은 정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정욕도 자꾸 행하면 아주 절친한 사이가 되어 버린다. 사람은 자기가 그 정욕을 지배하고 있으며 원할 때는 언제든지 그 정욕을 내어 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정욕이 그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복음의 명령에 담겨 있는 그 내적이며 영적인 깊이를 무시하려 든다. 교육을 받아 미신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진데다 통이 커진 인간의 마음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자그마한 죄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보았자 설교자들의 관심거리나 증진시켜 줄 뿐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죄의 사악함과 오염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실수를 좀 저질렀다고 해서 그렇게 괴로워해야만 하는가? 라고 질문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의 율법의 거룩함에 대해 전혀 모르면 이렇게 쉽게 그들의 타락한 마음에 의해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교만, 야망, 탐심, 세상에 대한 사랑, 불결, 탐욕, 자랑, 게으름, 이 모든 것 때문에 인간은 이런 죄 저런 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납도 받지 못하며 하나님의 축복이나 도우심을 기대할 근거도 갖고 있지 못하다. 사람이 한 가지 죄만 지어도 율법 전체를 어긴 것이라 했다(약 2:10 참조). 시편 기자는 만약 자기가 마음에 불의를 품으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했다(시 66:18 참조).
한 가지 죄에 탐닉하게 되면 곧 다른 죄들을 더 짓게 될 가망성이 있다.
사람이 한 가지 죄에 탐닉하게 되면 그 영혼은 죄에 대항하는데 사용해야 할 방편들에서 멀어져 한눈을 판다. 그 방편들을 이용해서 다른 모든 죄들에 대항해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말이다.

사람들은 또 복음의 거룩으로부터도 돌아선다. 왜냐하면 그 은혜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도덕적 철학자들은 자기들이 덕을 사랑한다고 선포했다. 왜냐하면 덕을 사랑해야 자기 자신에게 영예와 영광 및 명성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들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이런 덕성들은 사람의 칭찬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종교적 행위를 했다. 그들이 행한 모든 종교적 행위의 동기는 곧 자기 사랑과 인간의 칭찬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겸손한 자, 마음이 청결하고 애통하며 남을 긍휼이 여기고 화평케 하는자, 의에 굶주린 자, 그 영이 단순하고 정직한 자, 어떤 해든 다 견뎌내며 해한 자들을 용서하는 자, 하나님께 열심을 내는 자, 세상을 경멸하고 죄짓는 것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자, 이런 자들은 인간의 칭찬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기뻐하신다. 이들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보화들이다.
그렇지만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유약하고 미신적이며 어리석고 의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복음의 거룩은 결국 마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런데 죽을 수밖에 없는 눈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마음을 볼 수 없으며 또 그런 일에 관심을 갖는 자도 거의 없다. 따라서 복음이 요구하는 덕성들은 세상이 높이 평가하는 그런 덕목들에 밀려 푸대접을 받게 마련이다.

큰 배도가 시작되고 교회들이 복음의 능력과 순결로부터 돌아설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사람들에게 눈에 확 띄는 경건과 자선을 행하도록 격려함으로써 복음의 주된 은혜들(가령, 중생의 필요성이라든가 영적 생활이라는 천국 원리에 대한 필요성과 같은 것들)을 등한히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더러워졌든, 정욕이 죽지 않았든, 마음이 교만과 완고함으로 가득 차 있든, 영혼이 영적 천상의 은혜를 무시하든, 그런 것은 전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보여 져서 칭찬을 받게 될 이러한 외적으로 영광스러운 일들이 틀림없이 그들을 불멸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위선적 가면을 책망하며 속사람만 은혜를 받으면 된다고 고집하는 가운데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인류에게는 선이 되는 복음의 외적 의무들을 등한히 하는 일이 없게 되도록 우리 모두 깨어 있자. 복음이 요구하는 참 거룩은 우리의 속사람을 정결케 할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신”(엡 2:10) 선행들을 행하게 하는 것이다. 

 
 

 

9. 안수 받은 사역자의 의무

어떤 교회가 복음의 순결을 지킬지 아니면 배도할지는 그 교회의 목사, 지도자, 교사 및 설교자들에게 많이 달려 있다. 마치 구약시대 때 교회의 순결 여부가 제사장들의 신실성에 달려 있었듯이 말이다(말 2:1-9 참조).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사역자가 거룩하고 겸손한 삶을 살면 열심을 다해 일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교회 안으로 인도되어 복음적인 순종을 해나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가르침, 정신, 모범, 삶, 기도, 설교 및 노고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교회는 더욱 더 창대해졌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설교하는 복음의 능력과 진리가 참되다는 사실도 뒷받침되고 증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뒤에 오는 세대들이 영적 퇴보를 거듭하게 됨에 따라 기독교의 주류는 타락한 교사들, 즉 불화, 분열, 야망 및 세상적 마음이라는 슬픈 본을 보여준 교사들에 의해 오염되었다.
구약시대 때는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두 가지 종류의 배도를 하게 했다.
첫째,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미신과 우상숭배로 인도했다(렘 23:9-15 참조). 이 배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거기서 그들은 자기들이 섬기던 모든 우상들을 시날 땅에 묻게 된다(슥 5:11 참조).
둘째,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 그들은 자신들의 무지, 나태, 및 나쁜 본보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거룩한 것들을 경멸하게 만든다. 이것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말라기 시대 때 시작되어서 마침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교회와 나라가 다 망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 의해 거절당하셨을 때 백성으로 하여금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치게 만든 것은 바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교회 내에서의 첫 번째 배도도 미신과 우상숭배에 의한 것이었다. 이 미신과 우상숭배가 성행하자 결국 모든 사람들의 생활은 점점 더 사악해졌다.
그런가하면 미신과 우상숭배를 피할 수 있었던 많은 교회들은 또 세상적이요 감각적이며 이교적인 행위들로 빠져 들어갔다. 왜냐하면 그 교회들 내에서 행해지는 사역이 세상적이요 감각적이며 이교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볼 때 임명받은 사역자가 교회를 순수하게 지키고 교회가 배도의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있다.

교회의 순결과 복지는 그 교회 사역자들의 순결과 신실성에 달려있다(엡 4:11-15).
교회는 그 교회의 임명받은 사역자가 흥하느냐 망하느냐에 따라 흥하고 망하는 것이다. 만약 사역자들이 나태하고 부패되어 있다면 교인들 역시 복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이다. 목자가 게으른데 양떼들이 안전하게 보존 될리 없다. 만약 목자가 교회를 끊임없이 돌보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잡초와 가시덤불들로 무성하게 될 것이다.
사역자의 중요한 의무 몇 가지
임명된 사역자는 복음의 가르침, 특히 거룩에 관한 가르침을 순결하게 지킬 의무가 있다.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한다.”(말 2:7; 엡 4:11-15 참조) 이것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부탁한 가장 중요한 의무였다(행 20:28-30 참조). 바울은 또 디모데에게도 복음의 순전을 지키라고 당부했다(딤전 6:13,14,20; 딤후 2:14,15 참조). 그리고 이 복음의 가르침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충성된 자들에게 맡겨져야 한다고 했다(딤후 2:1,2).
성경, 신자들의 마음, 안수 받은 사역자, 이 셋이 함께 있어야 그 안에 거룩한 진리가 담길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지옥과 세상의 모든 반대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안전하게 지켜진다.
신자들 마음에 있는 거룩한 진리는 그리스도의 영과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켜진다(요 14:16,17,26, 16:13; 요일 2:20,21; 요 6:45; 히 8:10,11 참조). 신자들의 마음에 진리를 보존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배도하던 시대에도 성령께서는 이 일을 하셨다. 마치 이스라엘이 배도하던 시절에도 성령께서 이 일을 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때는 엘리야 혼자 참 종교를 위해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자 7,000명을 남겨 두셨다.(왕상 19:18 참조)
거룩한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모든 일이 임명받은 목사에게 맡겨졌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 교회는, 거룩한 진리는 전통이라는 수도원의 밀실에 보존되거나 그 순전함을 지키려는 어떤 보살핌이나 지혜 또는 정직함도 요구하지 않고, 단지 그 진리를 열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열쇠만 가지고 있으면 되는 그런 비가시적이며 환상적인 보고(寶庫)에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런 생각 때문에 진리와 거룩이 이 세상으로부터 추방된 것이다.

복음적 거룩은 복음의 진리라는 뿌리 위에서만 자랄 수 있다. 만약 그 뿌리가 부패하면 그 열매 역시 부패할 것이다. 복음의 경건은 복음의 가르침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의 가르침이이 없거나 부패하거나 혹은 경시되는 곳에서는 경건의 능력을 유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편 사람들이 일단 거룩에 대해 싫증을 내기 시작하면 그들은 성실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갈구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오늘날 복음의 모든 가르침이 반대에 직면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거룩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모든 뜻을 가르치는 것이다. 무엇이 유용하고 유익한지 그리고 자기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현재의 영적 상태에 비추어 볼 때 어떤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을 볼 줄 모르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가 될 자격이 없다.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파하는 것이 임명받은 목회자가 해야 할 의무이다(행 20:27 참조).
그들은 보살핌과 근면함과 충성됨을 가지고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파해야 한다(딤후 4:1,2 참조). 디모데에게 한 바울의 이 말은 자기 의무를 충성되이 수행하고자 하는 모든 목회자들에게도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서 세우고 보존해 주는 일을 하는 데에 지금이라고 해서 사도시대보다 노력을 덜 기울여서야 되겠는가?
목회자들은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파해야 한다(행 6:4; 딤전 5:17; 고전 16:16: 살전 5:12 참조).
그들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해야 한다(행 6:4). 기도의 뒷받침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면 그 위에 어떤 축복도 임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기도에 있어서 초특급 모본을 보여 준 사람이다(롬 1:9,10 참조). 만약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엡 6:18,19참조). 전파한 말씀이 열매를 맺도록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은 채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는 마음속에 무신론주의를 은밀히 품고 있는 자일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 거룩을 만들어 내려는 노력도 별로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목사의 의무는, 사역과 삶을 통해 자기가 설교하는 그 크고 거룩한 가르침의 능력과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임명된 목회자들은 삶을 통해 온유와 겸손,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들은 중용 및 자기부인 그리고 언제든지 십자가를 짊어질 자세 등에 있어서 본을 보여야 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 자신의 부패한 소욕들을 극복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자는 세상을 경멸하고 그 마음을 하늘나라에 두며 누구에게나 오래 참고 친절함으로써 복음의 사역자다운 표징을 나타내야 한다.
만약 사역자들의 삶 속에서 어떤 악덕이나 부패상이 드러날 경우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그 사역자 안에 아직도 거하고 있는 타락한 옛 본성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 대신 복음을 비난할 것이다. 따라서 사역자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선행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딛 2:7참조). 그들은 자신들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살후 3:9; 딤전 4:12참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역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영예의 표지이다.
임명받은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의 순결과 거룩 및 순종을 보존하기 위해 지정해 주신 거룩한 훈련 및 규율을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 복음의 가르침 그리고 복음의 비밀을 타락하지 않도록 순전하게 지키는 데 있어서도 신실하지 못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가지고 있는 그 비밀들을 조사해 볼 의욕도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성경을 충성되이 연구하는 노고를 경멸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지하게 되고 이 지식의 결여로 말미암아 패망해 간다. 그들은 물론 그들 죄로 죽어야 하고 또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피 값을 이런 충성되지 못한 사역자들에게서 찾으실 것이다(겔 3:16-21참조).

로마 가톨릭 교회에 있는 신부들의 대다수가 얼마나 무지한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무지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것을 전해 문제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일이라는 것이 사람들을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무지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방 정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 그것들을 신봉하는 많은 나라들이 스스로 기독교인들이라 자처는 하고 있지만 실상은 무식하여 어리석기 짝이 없고, 타락할 대로 타락하여 거룩한 일들을 우습게 여기고 경멸할 뿐 아니라, 혐오스러울 만큼 부도덕한 일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실정이라 그 도가 지나쳐 이방인들보다 더 심할 정도이다.
만약 복음을 전파하는 것만이 인간의 본성을 중생시켜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지정하신 유일하고 효과적인 방편이라면(이것을 부인한다는 것은 곧 기독교 자체를 부인하는 것임). 그 두 종료를 믿는 나라 사람들을 가르칠 유능한 목회자가 없는 한 그것들이 세상에서 기독교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회복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는 것은 헛된 일일 것이다.
충성되지 못한 타락한 사역자, 가령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사역자를 통해 그동안 복음의 진리는 그 품위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타락하여 부패했다. 우리 시대만 해도 부패되지 않은, 아주 복음적인 순종을 증진시킬 만한 가르침이 하나도 없다. 진리가 순전히 지켜지려면 하나님에 대한 기도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만 사역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부패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많은 사역자들이 자기들이 하는 일에 대해 게으르고 냉담하며 무관심하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심과 인간 영혼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부지런히 자기 사역을 수행하는 자는 아주 드물다.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들이 하는 매일의 일과-가령 말씀과 복음의 가르침에 대한 연구는 손톱만큼도 하지 않으면서 성무일도(聖務日禱) 시간에 성무일과를 말해 주고 고해성사를 듣고 죄를 사해 주는 것 등-가 곧 하나님께서 기독교의 능력과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방편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들이 하는 일이란 고작해야 인류를 죄와 무사안일 속에 효과적으로 가두어 놓는 것뿐이다. 그리고 인간은 또 그것을 좋아한다.
많은 사역자들이 아주 공공연하게 야망적이며, 한없이 탐욕스럽고 교만하며 감각적일 뿐 아니라 최악의 인간(부패한 마음이 고질화된 사람)을 사랑하고 동정하는 선한 자들까지 증오한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사도들이나 복음을 처음에 전파했던 사람들과 견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시여, 다시 한 번 더 “하나님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저희에게 주시어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저희를 양육하게”(렘 3:15참조) 하소서.
능력 있는 복음의 사역이 회복될 때에야 비로소 교회는 현재의 배도 상태로부터 영광스러운 상태로 변화되어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들릴 수 있게 될 것이다.
 

 

 

10. 배도의 또 다른 이유들

예레미야 시대, 즉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책망을 받고 그의 심판이 가까이 왔다는 경고를 받았을 때, 그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렘 7:4)고 부르짖었다. 마치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하듯이 말이다. “예레미야, 무슨 말이든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이요 하나님의 유일한 교회다. 하나님은 절대 성전과 그 성전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파괴되고 백성이 이 땅에서 추방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 때 예레미야는 이렇게 대꾸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 하는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렘 7:3,4,8,9,10,12).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그것은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속았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기들에게 성전이 있고 그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한 어떤 심판도 자기들에게 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심판의 홍수는 나머지 세상에나 떨어질 수 있는 것이지 자기들은 이 세상에 있는 유일한 참 교회, 즉 방주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세례 요한 역시 이 문제를 다루어야만 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마 3:9)고 말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자기들은 죄를 짓든 상관없이 언약의 특권을 자동적으로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예들을 볼 때 자기들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가망성이 더 많은 교회나 개인일수록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과 영적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더 강조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사실 그들로서는 그 외에 믿을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만약 구약시대 때 사람들이, 자기들은 하나님의 총애를 받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면-그들에게 이런 거짓말을 믿는 대신 죄를 자백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하라고 경고한 예레미야의 간절한 예언 사역에도 불구하고-그렇게 해도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현 상황에서야 오죽하겠는가? 그런 거짓말 속에 자기 자신을 숨기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이겠는가!
교회가 사악하고 죄악 된 정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세속적 사람들을 신자로 환영하여 교회의 모든 외적 특권에 참여하도록 허락한다는 것은 곧 그들로 하여금 거짓 안전감을 갖게 하는 행위요 이로 말미암아 결국 그들을 회개시킬 기회를 놓치고 마는 셈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마저 그리스도인으로서 깨어 있거나 열심을 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게 될 것이다. 아무튼 진정으로 회개하고 죄와 싸워 이기는 삶을 살지 않아도 이처럼 쉽게 하나님의 사랑과 총애가 약속된 모든 외적 특권을 누릴 수 있는데 무엇 하러 구태여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겠는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은 사데 교회가 실제로는 죽었다고 책망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 교회를 계속 죽어 있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 교회에 “살았다”는 이름을 주는 것이었다(계 3:1참조).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라고 하자. 그리고 교회의 의식들(세례식이나 성례전 등)을 실시하는 주된 이유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중재로 말미암아 구원 얻게 된 사실을 확신시켜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하자. 그런데 교회가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지 않고 계속 사악한 일을 저지르면서도 여전히 교회의 외적 특권들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다면 이보다 더 사람들의 정욕을 눈감아 주고 부채질해 주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에 순종하는 것이 곧 그의 교회의 참 신자가 된 외적 증거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만이 복음의 특권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다. 우리가 영원히 구원받으려면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복음의 명령에 있는 대로 “회개하고 믿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 영혼의 복락을 외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 교회의 모든 외적 특권들을 누릴 권리와 함께 그 교회에 참 신자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진정한 회개나 믿음 없이 계속 죄악 된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단순히 교회의 의식에 순종하기면 하면 그 교회의 외적 특권은 다 누릴 수 있고 또 영혼의 안전에 대한 확신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자. 무슨 수로 그 사람을 진정한 회개와 믿음의 길로 인도하여 복음에 순종하는 거룩한 삶을 살게 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복음에 대한 순종으로부터 배도하게 하기 위해 사단이 쓰는 수법이다. 그는 아주 성공적으로 이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배도에서 그 극에 달했다. 그 교회를 통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평강과 영생의 확신으로 인도하는 기독교의 진리나 능력, 거룩에 대한 확신이나 개인적 체험도 없이 명목상으로만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열방의 지도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 자신의 복지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교회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이런 것들을 다 잃어버리게 생겼으니 교회로 들어올 수밖에. 이렇게 해서 신자가 된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데 그들은 복음의 진리나 거룩에 대해 무지했으므로 교회에 들어오자마자 곧 자기들은 영원히 안전하다는 말만 듣고 거짓 안도감에 사로잡혔다.
사실 그들의 삶을 보면 복음이 요구하는 거룩의 기준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이방인들의 삶보다 더 악할지라도, 또 자기들이 얼마나 거짓되고 사악하든 그런 것에 상관없이, 유일한 참 그리스도 교회인 로마 가톨릭 교회 교인인 한 가지들은 영원히 안전하며 멸망하지 않을 거서이라고 믿으며 스스로 속았다.
이 거짓말을 믿은 그들은 자기들이 왜 죄를 이기고 자기부인을 해야 하며 마음과 손을 깨끗이 하고 복음이 요구하는 다른 모든 의무들을 지켜야 하는지를 전혀 몰랐다. 이렇게 쉽게 기독교의 모든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거룩한 순종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 즉 단순히 자기들처럼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방주 안에 들어와 안전하게 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불과 칼에 죽임을 당하고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이 무지한 사람들은 그 거짓말이 정말이라는 확신을 더 굳히게 되었다. 이렇게 쉽게 영원한 지옥 불에서 구원 얻었을 뿐 아니라 현세에서도 안전을 누릴 수 있게 되다니 자기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이며 또 축하해야 할 일인가! 그리고 어떤 죄에 대해서든 충분한 대속을 하지 않고 죽은 사람은 지옥에 내려가지 않도록 연옥에 그 자리를 확보해 놓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고해성사만 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데, 어느 누가 복음이 요구하는 거룩을 버리고 그 쉬운 길을 택하지 않겠는가? 그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거룩에 작별을 고한 거서도 당연한 일이다.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불법의 비밀”이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그 극에 달할 때까지 역사했다.

사람들은 무지와 오류로 말미암아 전반적으로 복음의 가르침을 잃어버렸다. 거룩의 뿌리인 복음의 가르침이 다 말라 부패되었으니 어떻게 순종의 삶과 능력을 유지한단 말인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진리에 대한 무지와 거룩에 대한 증오는 배도를 증진시키는 쌍두마차라 할 수 있다.

진리를 상실한 대가로 얻어진 그 기반은 자기들 죄에 대해 생전 회개 한 번 하지 아니한 온갖 종류의 사람들에게 이름, 직함, 특권 및 그 교회의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공고히 다져졌다. 회개치 아니한 자들에게는, 비록 죄 된 생활을 계속하는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다는 확신을 다짐해 주었다. 비록 중생한 증거는 전혀 없었지만 그들은 참 그리스도인들이요 참 그리스도교의 회원들이었다. 중생을 하거나 거룩한 삶을 살지 않고서도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데 누가 구태여 중생과 거룩한 삶을 추구하겠는가? 단지 로마 가톨릭교의 회원이 되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데 죄와 정욕과 쾌락에 깊이 빠져 있는 자들이 무엇 하러 그런 것들과 결별하겠는가? 게다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실시하는 칠성사는, 그것이 신부에 의해 집행되기 때문에 그것만 받으면 영원한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모든 은혜가 자동적으로 부여된다고 가르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더 거짓된 안심에 빠지게 하였다. 그들은 특히 누구든 한 번씩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실 수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영생을 갖게 된다고 가르쳤다(요 6:53,54 참조). 이런 저런 방법으로 해서 극악무도한 죄인들도 영생과 영원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결국 큰 배도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영생의 확신과 안심을 증진시키기 위해 사람들에게 지옥과 멸망은 오직 로마 가톨릭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떨어진다고 가르친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 밖에는 구원이 전혀 없다.” 따라서 아무리 사악한 사람이라도 그가 일단 로마 가톨릭교인만 되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 교회는 노아의 방주나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이 방주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다 구원 얻고 그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을 보존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주인 그 교회에 항상 붙어 있어야만 했다.

이보다 더 복음과 복음적 순종의 영광에 위배되는 사악한 음모도 아마 없을 것이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자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해를 가하고 죽였다. 그것도 그들보다 더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지만 단지 기독교 신앙의 몇 가지 점에 대해 그들과 의견을 달리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핍박하고 죽인 것이다. 도덕적으로나 거룩함에 있어서 그토록 우수한 사람들(개신교도들)보다 복음의 눈으로 볼 때는 자기들(가톨릭교인들)이 훨씬 더 의롭고 우수하다고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그런 죄악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보다 더 안심하고 죄를 저지르도록 보장해 주는 확신이 어디 있단 말인가? 독설가요 술주정뱅이며 야비하고 불결한 자들로서야 정말 거룩한 사람들, 그래서 사람들 눈에 술 취하지 않고 자제력이 있으며 기도와 선행을 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핍박하는 것이 곧 기독교를 유리한 상황에 놓는 일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만약 그들 중 어떤 사람이 혹시 그 마음과 양심이 찔려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때는 고해성사와 선행을 통해 그 죄책감을 무마시키면 되는 것이다. 만약 이것만 가지고 자신들의 죄책감을 제거할 수 없었다면 그때는 연옥으로 가면 되니까 또 괜찮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사악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경멸하고 복음이 요구하는 참 거룩을 우습게 여겼다.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또 소원하지도 않았다. 대신 여러 가지 미신적 행위들에 의해 잘못 형성된 맹목적 헌신으로 복음이 요구하는 거룩을 대신했다. 이처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이름 과 그 특권 아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들 사이에서 완전히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복음의 명령은 가장 거룩하며 그 약속은 가장 영광스럽다. 그러나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 역시 가장 가혹한 것이다. 그런데 이 복음에 순종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어떤 이방인들보다 더 악한 생활을 살고 있었다. 그렇다면 복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생활을 하도록 부추긴다는 말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런 생각은 복음을 대적하되 아주 얕잡아 보는 식으로 대적하는 것이다.
이 모든 배도는 다음과 같은 생각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즉, 내가 로마 가톨릭 교회 회원으로 남아있는 한 얼마나 악하게 살든 그것은 상관없다. 나는 지금 방주 안에 있는 것이니 영원한 심판이라는 홍수에 절대 떠밀려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배도로부터 돌아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교회내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이다. 그래서 복음의 모든 명령에 완전히 동의하며 그것에 복종하여 살지 않으면서도, 나는 참 그리스도인이요 의롭다 칭함을 받았으니 영생은 맡아놓은 당상이라고 말하며 우쭐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대신 만약 어떤 특정한 장소나 나라에서 태어나 로마 가톨릭 교회 교인이 되기만 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가르친다면 우리는 그 배도의 악(그 밑에서 이 세상이 탄식하는)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 만족하고 있어야지 별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배도의 원인 : 교회내의 고위 성직자들의 사악한 삶(렘 23:15)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황과 대주교 및 주교들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무신론자로 돌아섰다. 만약 종교 지도자들이 거룩한 삶의 본을 보이는 대신 비종교적이요 부도덕하며 사악한 생활을 일삼고 자기들 의무를 등한히 하고 고약한 죄를 책망치 아니하고 오히려 그런 죄를 찬양한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전 세대에 순식간에 영향을 미쳐 저들도 역시 타락하고 부패하게 만들 것이다. 집을 관리하는 청지기가 악한데 그 집이야 오죽하겠는가(마 24:48-51)?
로마 가톨릭 교회 교인들은 자기들 교사보다 더 현명해지려 하지도 말고 신부들에게 순종이나 잘 하고 그들의 본이나 따르라는 경고를 받고 있는 판인데 그들이 무엇 하러 신부들보다 더 나아지려 하겠으며 앞서 걸어간 지도자들의 발자취가 아닌 다른 발자취를 따라가려 하겠는가? 그들은 그럴만한 이유를 발견할 수도 없고 또 발견하려 들지도 않는다.
구약에 보면 대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은 아주 야비하고 부도덕한 생활을 했다. 그 결과 그 나라 백성 대부분이 곧 부패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졌다(삼상 2:12-17 참조).
로마 가톨릭 교회의 큰 배도는 그 교회가 로마 제국의 보호를 받게 된 이후 교황 및 고위 성직자들이 교만해지고 야망에 불타 분쟁만 일삼고 세상과 짝하게 됨으로써 더욱 심해졌다.
사람들은 어느 모로 보나 자기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으나 단지 “성직자” 혹은 “교회의 인도자”라는 이름과 명칭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와 영예를 안겨 줌으로써 교회의 특권을 샀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부패되어 갈수록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은 더욱더 높은 지위와 권력을 누리게 되면서 그 생활이 사악해졌다. 이렇게 되자 평신도들의 삶 역시 썩을 대로 썩게 되었다.
세상은 교회를 그 교회의 지도자 및 인도자에 의해 판단한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들은 정말 거룩의 표상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한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자신들의 삶 속에서, 이 세상과 세상의 감각적 쾌락이나 이생의 자랑을 경멸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은 열심과 힘을 다해 부지런히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의 능력과 거룩으로 부터의 배도는 계속적으로 더 악화될 것이다.

핍박으로 말미암아 촉진된 배도
내가 여기서 말하는 핍박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받을 것이라고 경고 받은 그런 핍박이 아니다. 그 핍박은 배도의 원인이라기보다 오히려 교회에 영광을 돌리는 핍박이다. 여기서 말하는 핍박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겸손하고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한 무섭고 잔인한 핍박이다. 이것은 이미 요한계시록에 예언되어 있던 핍박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자기들의 배도에 동참하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들을 다 핍박하고 죽이는 아주 잔인한, 배도하는 교회가 예언되어 있다. 성경은 그 배도하는 교회의 잔인함과 우상숭배 때문에 그 교회를 바벨론이라 칭하고 있다. 그리고 바벨론이 멸망할 때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느니라.”(계 18:24)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성했기 때문에 죽음을 당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를 핍박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가 어떤 구구한 변명을 하든 상관없이 언젠가 완전히 멸망해버릴 그 배도한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일찍이 인간 본성으로부터 떠났던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시키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는 인간의 생명을 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려 오셨다.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는 상태로부터 그리고 평화와 사랑을 미워하는 상태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오신 것이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를 마땅히 예배해야 할 방식대로 예배하고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해치고 감독에 가두고 벌금형을 매기고 추방하고 죽이고 멸했는데, 제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이것을 보고 기독교는 정말 평화와 사랑의 왕 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여주는 종교라고 생각하겠는가? 이런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오히려 기독교란 불같이 화를 잘 내며 잔인하고 억압과 보복을 일삼으며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인류가 이것을 보고들은 다음, 이것이 참 종교인데 이 종교는 자기네와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들을 다 핍박하고 죽이라고 가르친다고 믿게 된다면, 그들은 결국 복음과 복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유익을 다 잃어버린 것이다. 이 핍박하는 종교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참 교회가 됨을 보여주기보다 오히려 적그리스도의 종교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이런 종류의 핍박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횡행하게 될 때는 사람들 사이에 기독교의 형태나 면모 혹은 모습이 전혀 남아있지 않게 된다. 복음을 믿는 신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표지인 인간을 향한 사랑, 화평, 온유, 자비, 동정 및 친절이 사라지고 대신 저주, 반목, 복수, 악한 추수, 거짓 비난, 소요, 무질서, 완력 및 모든 악한 것들이 판을 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런 핍박이 그 교회에 유익을 가져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유익이 무엇이든 간에 기독교의 도덕성을 부패시킴으로써 오류의 세력을 몇 천배나 더 유리하게 만들어 놓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국가적인 죄로 인해 지지되고 증진된 배도
“누구나 다 하는데 뭐!” 복음이 그 나라 전역에 거의 다 받아들여졌는지의 여부를 확인해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증거는 바로 이것이다. 즉,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에서 자행되고 있던 죄들이 어느 정도 사라졌느냐 하는 점이다. 만약 그 나라에서 범해지고 있는 죄들이 제압되지 않는다면, 사람들 마음이 그 죄들로부터 돌아서서 죄를 경계하게 되지 않는다면, 이런 죄들을 저지르면서 죄책감을 느끼는 대신 “누구나 다 하는데 뭐!”라는 식의 구구한 변명이나 늘어놓는다면, 그 나라가 아무리 기독교국임을 자처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들의 고백은 다 헛되고 쓸데없는 것들인데 말이다.
바울은 그레데인들의 죄는 저들이 항상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딛 1:12,13참조). 따라서 그레데인들이, 자기들은 기독교국이라고 아무리 떠들어댄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거짓말이나 한다면 그들의 고백은 결국 거짓말이요 그 나라에서 복음이 생명을 주는 능력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무슨 말로 기독교국임을 자처하든 자기들이 저지르는 죄를 버리지 않는 한, 그들은 오랫동안 건전하게 믿음을 지키지도 못할뿐더러 순종의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될 것이다.

유대인 백성 전체가 범한 죄는 곧 목이 곧고 완고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해 끊임없이 불만을 토하셨다. 그래서 선정을 베푼 왕 요시야는 “그 마음이 연했기 때문에”(대하 34:27)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요시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밥 먹듯 짓는 그 죄의 세력에 붙잡혀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요시야에게 하신 그 칭찬은 다른 어느 때 내려진 칭찬보다 더 큰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마음이 연한 사람을 찾기가 아주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점에 대해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우리도 그와 똑같은 죄를 밥 먹듯 저지르고 있지 않은가?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것”은 우리의 감각을 만족시키는 일 아닌가? 그리스도의 비유에 나오는 그 어리석은 농부처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그저 감각적 정욕과 쾌락이나 만족시키는 것이다(눅 12:13-21참조).
복음이 우리를 이런 죄로부터 구출해냈는가? 오직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만 우리는 이런 죄(온 국민이 다 저지르는)를 짓지 않을 수 있다.
이사야 시대에는 사람들이 여론이라는 물결에 대항해서 홀로 선다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의연히 서기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사야와 그의 가족처럼 극소수의 사람들이 그런 일을 행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의 징조와 예표”로서 경멸과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사 8:11-18참조). 그러나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두려워하며 놀랄” 분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들은 많은 사람들의 조소의 대상이 되는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부패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 나라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통 저지르는 죄를 짓게 되는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나태, 등한시, 거짓 안심 때문에 그렇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또 “누구나 다 그 죄를 범하니까” 자기도 따라서 그 죄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다.
이처럼 한 나라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짓는 죄들 때문에 그 백성이 복음을 순종하는 데서 멀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죄들이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공공연히 범해진다면, 그 나라에서 기독교는 이방 종교 수준으로 하락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그 나라 백성들이 보통으로 저지르는 죄들은, 기독교의 심장부와 능력을 좀먹어 들어가 결국 경건의 모양이라는 허울만 남겨 놓게 만든다.

기독교의 복음은 사람들을 “모든 경건치 못한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돌이켜 이 세상에서 건전하고 의로우며 경건하게 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 목적이 성취되지 않는 곳이 있다면 그곳에서는 복음이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거나 사람들이 복음으로부터 떠났거나 둘 중 하나라는 뜻이다.
복음은 마치 토양이 척박해서 가시덤불이 가득한 광야나 숲에서 일하고 있는 농부처럼 한 나라에 찾아온다. 거기서 복음은 가시덤불들을 뿌리째 뽑아 불사르고 종자가 좋은 나무들을 그 자리에 대신 심는다. 그러면 곧 황폐했던 광야가 열매 맺는 들판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을 꾸준히 보살피고 가꾸지 않는다면 그 땅 자체 내에서 잡초와 가시덤불들이 자연스럽게 다시 자라기 시작할 것이다. 이 잡초와 가시덤불은 금방 자라 무성해져서 좋은 나무들을 질식시켜 버릴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 열매 맺던 들판이 다시 황폐한 광야로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지는 죄들을 복음의 능력으로 한동안 억제했다가 또다시 그 죄가 백성들 마음을 장악해서 그들 안에 있던 복음의 은혜들을 질식시켜 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방치해 두는 것보다 더 큰 배도 증진의 길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아름다움과 영광에 대한 오해로 인한 배도


구약시대 때는 참 종교의 영광이 그 성전과 희생제물 및 대제사장이 입은 옷에 있었다. 이모든 것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참 종교의 영광이 성령의 내적 사역에 있다. 즉, 우리의 본성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변화시키고 의롭고 거룩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를 맺게 해주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에 있는 것이다. 온유와 겸손 그리고 관대함이 참 기독교인의 표지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 속에 있는 아름다움이나 영광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복음의 영적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 곳에서는 복음이 반드시 경멸되어 버려지고 그 자리에 다른 것이 대신 들어선다. 그 자리에 들어선 다른 것은 인간이 고안해 낸 것이므로 사람들은 점점 더 복음이 요구하는 거룩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어 있다.
자연인의 육안으로는 기독교의 영적 능력 안에 있는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 마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했을 때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었듯이 말이다(사 53:2참조). 그래서 성경에 선포된 하나님의 지혜를 버리고 그들 자신이 만들어낸 것들을 가지고 그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령의 은혜와 은사로 충만해져서 이 세상의 영예나 존경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예만 구하면서 겸손하고 거룩하며 열심을 내는 사역을 하는 대신 오만하고 야심에 차서 성경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세상의 화려한 제의(際衣)를 입고 있다. 요란하지 않고 검소하며 그 생명과 우수함이 눈에 보이지 않는 효과적인 성령의 사역에 놓여 있는, 즉 성령의 은혜 사역으로 말미암는 온유, 자기부인, 죄를 이기고 극복함, 의의 열매 등을 나타내 보이는 영적예배를 드리는 대신 그들은 이 세상에 더 용납될 만한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말씀하시지 않은 눈에 보이는 외적예배를 드렸다.
따라서 기독교의 영광이 이제는 그 교회의 미신과 우상숭배로 가득 찬 오만하고 의식적인 예배와 신부들의 오만한 위풍에 의해 부패되어 버렸다. 그 교회 사람들은 죄악 된 생활을 계속했고 교회를 부강하게 함으로써 자기들의 양심을 무마시켰다. 결국 그 교회 건물이 웅장해지고 많은 선물들이 들어옴으로써 그 교회 성직자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게 되었다.
이런 것이 기독교의 참 영광이며 이런 것들을 기부함으로써 사람들이 자기 정욕과 죄 속에 계속 빠져 있을 수 있다고 세상이 일단 믿게 되자 복음이 요구하는 순종이나 거룩은 점점 더 등한시되고 경멸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악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 성직자들 가운데 누가 그 교회의 요직을 차지하느냐 하는 문제로 시기와 야망에 가득 찬 싸움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이로 말미암아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기독교를 타락하고 부패한 종교로 경멸하게 되었다.

배도자 자신인 마귀에 의해 야기된 배도
배도자 중 가장 큰 배도자이인 마귀가 노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 땅 위에서 멸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경우 교회를 완전히 타락시켜 자기 교회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우는 사자로서의 마귀는 피를 흘리게 하는 난폭한 핍박을 통해 교회를 대적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교회를 멸망시키지 못할 경우 마귀는 독사 같은 뱀의 모습으로 교회에 살그머니 기어 들어온다. 일단 교회에 들어오면 많은 사람들 마음속에 권력과 야망에 대한 헛된 생각 및 미신을 은밀하게 서서히 심어준다. 이렇게 해서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의 영적 능력과 단순함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든다. 그가 태초에 하와를 속였던 것처럼 속여서 말이다(고후 11:14,15)하기도 한다.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런 거짓말로 더럽힐 뿐 아니라 그들 정욕에 불을 지른다. 그러고는 그들에게 좀 더 경건하고 헌신된 것처럼 가장하라고 제안함으로써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이런식으로 해서 “불법의 비밀”이 성공적으로 역사하는 것이다(살후 2:7참조).

마귀가 감쪽같이 그 책략에 성공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감각적인 정욕에 자신을 내어 맡기거나 미신의 세력 아래 자신을 내어 맡기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와 거룩을 거절하고 마귀의 미혹에 빠져들게 되면 하나님은 그들을 마귀의 세력에 던져주신다. 그래서 마귀로 하여금 그들이 영원한 멸망을 당할 때까지 속이고 그 마음을 더 강퍅케 하도록 내버려 두신다(살후 2:11,12참조). 이렇게 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배도가 완전히 이루어진 셈이다. 그리고 그 동일한 속임수를 가지고 사단은 지금도 교회에서 역사하면서 종교개혁 때 구출된 교인들을 그 상태로부터 다시 돌아서도록 그래서 결국 배도하게 되도록 인도하고 있다.

교회의 분열과 그리스도인들의 무익함 때문에 생기는 배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만약 그들이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3:35참조). 서로 사랑함을 통해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믿는다는 것 그리고 그 가르침에 신실하게 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입증해 보여 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것도 바로 제자들 사이에 이러한 순수한 연합과 사랑이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요 17:20.21참조).
이 명령에 순종한 열매와 효과들이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하던 자들 사이에서 한동안 아주 대단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의 상호 사랑은 그들이 고백하는 복음의 진리 및 그 가르침의 능력과 거룩이 참되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연합과 사랑이 있는 곳에는 화평, 질서, 유용함 및 모든 선한 일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연합과 사랑이 결여되어 있는 곳에서는 반목, 시기, 혼란, 무질서 및 온갖 악행들이 있게 마련이다.
초대교회 교인들 중에도 서로 싸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사도들이 권위를 가지고 중간에 개입함과 동시에 그들 사이에 팽배해 있던 사랑의 정신으로 곧 중재되었다(행 11:1-18, 15:20참조).
그러나 나중에는 이것이 악화되었다. 기독교의 타락을 알아볼 수 있었던 첫 번째 징조는 그리스도인들 사이, 특히 지도자들 사이에서 반목, 분열 및 싸움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분열과 반목은 교만, 야망, 시기, 원한과 같은 악한 정신에 의해 자행되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이 세상에 기독교인들만큼 상대방의 견해를 듣지 않고 논쟁만 일삼으려 하는 사람들로 아마 없을 것이라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한쪽이 권력을 잡으면 그들은 이교 사상으로부터 온 폭력을 칼(이미 순교자의 핏자국이 묻어있는)을 잡아 빼어 자기들의 의견을 달리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아주 잔인하게 핍박하기 시작했다. 이런 모든 원한과 증오를 보고도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자비와 보살피심 덕분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자기네들만 복음의 진리를 고수한다고 주장하는 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또 파당을 만들어 내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어떤 사람들은 이런 분열의 화염 속에서 살고 논쟁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을 일은 이 세상에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열을 보면 그것은 아주 사소한 신학적 견해차에서 생긴다. 이것 때문에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그 놀라운 권위 중 많은 부분을 상실해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복음의 참 능력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과 양심에 복음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게 되었다.
또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무익함 때문에 아주 불쾌해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이들에게 축복이 되어야만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이기적이다. 자기들은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만족감에 젖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약간 친절하고 도움이 되며 선행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오직 자기 집과 자기 교회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모든 사람에게, 심지어 아주 악한 사람에게도 자기 능력껏 사랑과 관심을 보이고 관대함과 친절을 나타내며 도움을 주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을 찾아보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그들은 이 기독교적 사랑을 나타내지 않는데 온갖 구실을 다 갖다 댄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살전 3:12) 되어야만 할 것이다.
모든 사람에 대해 선행을 하고 모든 사람에게 유용하며 모든 사람에게 사랑의 친절을 나타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복음에 진지하게 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주된 방법이다. 이런 그리스도인 한 사람이 복음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치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수천의 그리스도인보다 훨씬 더 크다.
만약 이 세상이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어떠한 선도 볼 수 없고 오직 증오와 반목만 보게 된다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교제하고 싶은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약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이 즉시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긍휼과 자선을 베풀며 선을 행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들은 정말 기독교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요약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면서 거룩한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할 것을 거부하는 자요 그의 약속을 경멸하는 자로, 그 대신 죄의 즐거움을 더 사랑하는 자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명령 안에서 하나도 사랑할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든지, 그 명령을 지켜보았지만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든지, 그리스도의 약속에 대해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었다든지, 이 세상과 죄가 제공해 주는 즐거움에 비교해 볼 때 그 약속된 것들에 더 나을 것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의 어떤 명령들, 가령 서로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것과 같은 명령들을 거부하거나 그저 남에게 해나 끼치지 않을 정도로 살자는 식의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즉,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해로운 일을 하지 않겠다.”는 자세 말이다. 그러나 복음이 그토록 부지런히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 사랑, 즉 서로 경고해 주고 권면하며 위로해 줌과 동시에 유모처럼 보살펴 주는 사랑을 가지고 서로 서로 돌보라는 그 사랑은 등한시되고 있을 뿐 아니라 아예 우습게 여겨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이런 의무에 대해 언급만 해도 벌써 그 사람을 위선자로 여기며 경멸하고 비난할 정도로까지 무시되고 있다. 이보다 더 그리스도를 불명예스럽게 하고 우습게 여기는 행위가 어디 있겠는가?

위선자들은 그 입술로 계속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함으로써 이 세상에 거짓된 그리스도와 복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를 현저히 욕보이고 있다” 그들이 계속 죄를 범하면서도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척하고 영생과 영원한 복락을 위해 그리스도께 소망을 둔 것처럼 행세하니까 세상 사람들은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승인하시고 그의 복음은 그런 악한 생활도 허용해 준다고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11. 복음적 예배로부터 멀어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제정하시고 이것이 조금도 변경되지 않고 세상 끝날 까지 계속되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보존하신 주된 이유는 바로 이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신자들로부터 공개적으로 받기 원하시는 영광이다. 복음의 다른 의무들은 설사 그곳에 교회가 없다 할지라도 인간이 자기 혼자 다 이행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지정하신 그 예배가 제대로 드려지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는 교회의 주된 존재 목적을 망각한 교회라 할 수 있다.
복음적 예배로부터 멀어지는 일은 두 가지 형태로 일어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정하신 것을 지키지 않거나 등한히 하는데서 발생하거나 우리가 고안해 낸 예배 방식을 그것에 첨부함으로써 발생한다.
어떤 교회들은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의 모양만 가지고 있는 것들을 행함으로써 복음적 예배로부터 멀어졌다. 그들은 편리주의와 자신들의 내적 빛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의 신비한 예배에 있어서 그토록 중요한 부분인 세례식과 성찬식은 거절한다.
어떤 사람들이 이 성례전들을 저버리는 주된 이유를 보면, 그것은 그 성례전들이 자기들이 믿고 있는 거짓 신앙과 순종대신 참 신앙과 복음에 대한 순종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복음의 성례전은 우리에게 우리가 믿는 복음의 가르침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내 주는 것이다. 세례식은 중생을 나타낸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중생과 같은 영적 사역은 없다고 믿는다면, 그래서 이런 사역이 전혀 필요치 않다고 본다면 그때는 세례식이 무의미해지고 그것을 자연히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성만찬식은 또 빵과 포도주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보여주는 의식이다. 그것은 우리 죄 때문에 우리 대신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써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그 피로 새 언약을 맺어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해주신 것을 기억하게 한다. 그러나 만약 이런 가르침을 거절한다면 성만찬 역시 무의미 해질 테고 그 의식에 참여하기를 거절하게 될 것이다.
복음의 가르침들을 진정으로 믿을 때에야 비로소 이런 성례전들이 기쁨과 즐거움이 되며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안위와 평안과 확신을 가져다 주시면서 교제를 나누실 수 있는 방편이 되는 것이다.
복음의 이 성례전들을 저버린 또 다른 이유로 영적 조명의 결핍을 들 수 있다. 영적 조명이 있어야 눈에 보이는 외적 표시라는 베일을 통해 그 표시가 정말 의미하는 영적 실체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그런 성례전들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신앙의 지혜가 결여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복음적 예배는 순전히 영적이다. 그러나 그 성례전들 속에는 눈에 보이는 이 외적 요소들이 들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이 외적 요소들을 맛본 다음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가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영적으로 예배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성례전들은 그리스도께서 영혼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아주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하시기 위해 제정하신 것들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이런 성례전들을 사용함으로써 유익을 얻으려면 우리 영혼과 양심을 그 성례전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권위에 순복시켜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 성례전들이 대표하는 은혜와 자비를 우리 영혼에 가져다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 성례전들에 대해 주신 약속들을 믿음으로 받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 성례전이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그 성례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권위에 순복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 약속을 믿을 수 있게 된다.
만약 성례전을 활용하되, 성심으로 활용함으로써 유익을 얻기 원한다면 우리는 성례전이 가지고 있는 눈에 보이는 그 외적 표시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 사이에 있는 신비한 연합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들이 의미하는 가르침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또 그 의미를 믿지도 못한다면 결국 모든 복음적 예배의 창시자요 주되신 하나님의 아들을 욕되게 하면서 복음의 참된 영적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사람이 복음적 예배로부터 멀어지는 또 다른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꾸밈없는 복음적 예배의 간소함을 거절하고 그것이 제정된 순수성을 저버린 채 미신적이며 우상 숭배적인 예배를 따라가는 것이다(고후 11:3 참조). 참되고 순수한 복음적 예배를 저버리는데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동안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참된 복음적 예배가 완전히 부패하고 타락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의식 중 부패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그들 중 대부분이 완전히 부패하되 그 본질과 의도까지 다 파괴될 만큼 그렇게 부패하였다.
교회에 이러한 의식을 주실 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이 그의 종교로서, 그분 혼자만이 그에 대해 권위를 갖고 계심을 분명히 보여주셨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지키라고 정해주신 의식을 제거해 버리고 본래 의식과는 전혀 다른 형태와 본래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목적을 도입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적그리스도임을 선언하는 행위요,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현저히 욕보이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바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이런 일을 자행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결국 스스로 적그리스도임을 선언한 셈이다.

사람들이 점점 육적으로 변해가고 복음의 정신과 생명 및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육적이고 현시적이며 오만한 예배를 도입하게 되어 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에게 “우리가 우리를 인도할 신, 곧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을 만들자”고 말하면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처럼 말이다.
구약시대 때는 그 예배 의식 속에 눈으로 볼 수 있는 외적인 것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임재를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복음으로부터의 배도가 일어날 때면 으레 육적이며 비영적인 예배에 알맞은 미신적이며 우상숭배적인 송아지들이 세워졌다. 바로 이것이 로마 가톨릭 교회가 고안, 제정해 낸 예배이다.
그러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참으로 영적이고 거룩한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우상 숭배적 예배는 오랜 기간에 걸쳐 아주 서서히 도입되었다. 이렇게 해서 “불법의 비밀”이 참되고 순전한 복음적 예배를 파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12. 만연된 배도의 위험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들의 배도를 상기시키면서 유대인들이 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가지를 꺾어 버리셨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 차지였던 가지에 대신 접붙여지게 되었다. 그런데 자기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교만해진 이방인들이 유대인을 거슬러 자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바울은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롬 11:18-21).
어떤 사람들은 참 종교를 보존하는 일은 임명받은 사역자들이나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염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염려해야 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자기 자신의 마음과 삶 속에 거룩의 능력과 진리가 살아 있도록 지켜보아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게 해야만 배도를 피할 수 있다. 만약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거룩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거룩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국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국민이 거룩하지 않으면 그 나라 역시 거룩해질 수가 없다.
현재 배도가 만연되어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 사람들도 자기는 절대 복음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은 배도의 위험에 대해 경고를 받아야 하지만 자기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들은 베드로의 예를 망각하고 있다. 베드로는, 자기만은 절대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 장담이 얼마나 오래 갔는가! 후에 그의 첫 번째 서신을 쓰면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치 자기들은 절대 배도하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건방지게 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낼 뿐 아니라 그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그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당부했다(벧전 1:17, 3:14,15 참조).
 
첫 번째 경고

지금 현재 복음으로부터 배도하는 일이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 무지, 신성 모독, 세속적 마음, 이 모든 것을 볼 때 사람들이 얼마나 여호와를 만홀히 여기고 그를 저버렸는지 알 수 있다. 국가가 범죄하고 그 국민은 행악하니 그들이 다 여호와의 노를 격발시켰다(사 1:4-6 참조).
만약 우리나라에 유행성 전염병이 돌고 있는데 한 두 사람이 그 전염병으로 이미 죽었다는 경고가 내려졌다고 하자. 그러면 아마 우리는 이 점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그 병에 전염되지 않기 위해 조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염병이 온 나라에 다 퍼져서 이미 그 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하자. 그런데 설마 나는 그 병에 전염되지 않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조심도 하지 않고 오만하게 살고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죄의 속임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해졌다. 그렇다면 그 속에 사는 우리 역시 강퍅해지지 않겠는가? 우리 영혼도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똑같은 것들-죄와 세상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배도의 유혹에 넘어가는 그 사람들보다 더 낫고 더 강한가? 만약 우리가 이처럼 배도의 위험이 큰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는다면 정말 어리석은 자들이다.
 
두 번째 경고

현재 만연되어 있는 배도는 그 자체 내에 또 다른 위험을 안고 있다.
전염병이 사라져 가는 단계에서는 그 병에 전염될 위험이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러나 전염병이 신속히 퍼질 때는 그 병에 전염될 위험이 아주 높다.
모두 오늘날 이 세상이 점점 더 사악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열방들을 복음으로 돌이키고 그 백성들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도록 변화시킬 수 있는 부흥의 조짐이 어디 보이는가?
우리나라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 종교를 거절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은 증가 일로에 있다. 이단 종파들은 점점 많아져 가고 성경적 진리가 뿌리를 내릴 땅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이런데도 우리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조심성 없이 살아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자신 안에서 배도의 조짐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마음에서 사랑과 열심이 식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를 등한시한 적은 없는가? 우리와 우리 교회에는 뜨뜻미지근한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가(계 3:15-17 참조)? 우리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영적으로 죽었거나 거의 죽은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닌가(계 3:1 참조)?
배도가 가지고 있는 큰 위험은 그것이 눈에 띄게 확 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나 교회로 하여금 배도가 퍼지거나 증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하는 식으로 서서히 퍼진다.

세 번째 경고
우리는 이 배도가 어느 정도로 만연되고 어느 정도까지 극에 달할지 모른다. 하나님은 어느 때고 그 배도를 끝내실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악한 세상이 감사를 전혀 모르는데 대해 분노하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랫동안 그의 성령의 능력 있는 영향력을 붙잡고 계실지 우리 중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전 세계가, 자기네들은 성경적 진리를 고수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지원을 받아 로마 가톨릭화하든지 아니면 무슨 종교를 믿든 상관없이 심히 부패한 세상이 되든지 둘 중 하나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배도가 만연되어 있는 때에 위로를 가져다주는 진리가 두 가지 있다.
첫 번째 진리는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딤후 2:19)는 것이다 택함 받은 자들은 다 보존될 것이요 주께서는 저들이 돌이킬 수 없는 배도에 빠져들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다.
두 번째 진리는 모든 배도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끝이 있다는 것과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합 2:14)는 것이다.
주께서 언젠가 심판의 재앙들을 바벨론에 쏟으실 것이며 그 때는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실 것이다(계 11:15 참조). 그러나 우리는 언제 이 일이 일어날 것이며 이런 일이 일어나기까지 무슨 일이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른다. 따라서 이 큰 배도에 삼킴을 당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네 번째 경고

이 배도가 얼마나 슬며시 교활하게 사람들 삶 속에 파고 들어와 그들을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지 한번 보도록 하라.
불안정한 영혼들은 미묘하고 교활한 여러 가지 방법에 속아 배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일터에서, 가정에서 식구들을 통해, 우리가 즐기는 쾌락을 통해, 혹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물이라는 수단을 통해 배도하게 된다.
불신, 죄의 기만성, 부패한 정욕과 욕망들, 영적 나태, 돈에 대한 사랑과 그에 따른 염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유혹하여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히 12:1) 버려야 한다. 우리는 또
“혹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해야” 하며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해야” 한다(히 3:12,13. 또 다음과 같은 경고를 명심해야 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4-17)
 
사단은 우리 마음을 부패시키고 우리 정욕을 더럽히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후 11:3; 벧전 5:8 참조).
어떤 자들은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벧후 2:1) 배도에 빠진다. 또 어떤 이들은 미신과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어떤 이들은 복음의 비밀을 멸시함으로 말미암아 배도한다. 야망, 교만, 세상에 대한 사랑, 영적이며 윤리적인 의무들에 대한 등한시, 세상적 지혜, 감각적 정욕, 초자연적인 하늘의 일들에 대한 의심과 무관심, 헛된 세상의 인기와 찬양에 대한 사랑,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함, 이 모든 것들이 사람들을 미혹하여 배도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고전 15:33).
뱀과 전갈이 우리 발에 치일만큼 많이 널려있다. 올무와 함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한 가지 악을 피하는 자들은 또 다른 악에 빠질 위험이 있다. 만약 우리가 복음의 한 가지 의무라도 등한시한다면 어찌 배도를 피할 수 있겠는가?
 
다섯 번째 경고

배도에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그래서 그 배도한 영혼이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배도가 있다.
복음의 법에 따르면 구원 얻을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은 어떤 인간도 스스로에게 절대적 주권을 가진 재판관이 되도록 허용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신적 대권을 침해하고 하나님 자리에 그 죄인을 앉히는 셈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절망에 빠진 그 죄인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이다. 나는 죄를 대단히 많이 지었으므로 나 자신이 영원히 버림받도록 심판한다. 하나님이 아무리 선하시다 할지라도 나 같은 자에게 자비나 은혜를 베푸시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악한 태도를 책망하신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극악무도한 배도자들마저 놀라운 자비를 베푸시어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는데 바로 므낫세 왕 같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대하 33:10-13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즉 구원이 불가능한 배도가 있다.
그 배도는 구원 얻는 은혜의 방편을 맛보고도 복음을 믿지 아니하고 거절하는 것, 즉 잡초와 엉겅퀴를 내는 배도를 말한다(히 6:4-8 참조). 큰 구원을 등한시하고 그 구원의 규례들을 경멸하는 것도 이런 배도에 해당한다(히 10:26-29 참조).
만약 우리가 조심하지 않는다면 복음에서 멀어졌다가 언제라도 이런 돌이킬 수 없는 배도에 빠질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죄라도 멀리해야 할 것이며 어떤 죄 된 정욕도 품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여섯 번째 경고

전적으로 복음을 저버리는 것이 어떤 것이며 그 죄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런 배도를 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가혹한지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와 복음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선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보다 더 큰 죄이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은 복음을 전해 듣고 그중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여 복음을 영접한 후 영원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완전히 거절하는 자에게 더 전파할 다른 복음을 가지고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반한 자들의 죄를 위해 대속해 줄 또 다른 그리스도를 가지고 계시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배도자들이 다시 구원 얻게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전적 배도가 잠식해 들어오는 위험한 징조들

징조 1.
복음의 진리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선함과 탁월함 및 영광에 대한 이해를 상실하는 것이 바로 첫 번째 조심해야 할 징조이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흠모할 만한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처럼 전적인 배도의 기미가 있는 사람도 복음 안에서 흠모할 만한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이 징조와 함께 죄와 세상적 쾌락에 대한 사랑이 생긴다. 그리스도를 즐거워하고 복음을 즐거워하던 것이 점점 더 둔해지거나 아예 없어지기까지 한다.
 
징조 2. 첫 번째 징조가 있은 후 즉시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진리요 참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께 복음 안에 두신 그 모든 증거들이 이제 더 이상 사실로 믿어지지 않는다. 이제 복음은 단순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신화”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에 대해 동의하지 않게 되며 불신자가 된다. 그는 이제 성경도 존중하지 않는다.
 
징조 3. 복음 안에 약속되어 있는 것들을 우습게 여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오심에서 그 배도자는 복음 안에 있는 약속들을 거절하고 경멸하며 그 약속들을 자기 영혼으로부터 영원토록 빼앗아 버린다. 그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자신을 구원하게 하느니 차라리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가장 분노하게 만드는 죄이다. 그리스도의 진리나 그의 능력을 존중하지 않는 것보다 더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죄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조차 이런 죄는 범하지 않았다.
 
징조 4. 그 배도자는 아마 기독교를 완전히 거절하고 다른 종교로 돌아서든가 아니면 복음과 복음적 예배의 순수성을 부분적으로 거절하고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신적 교리나 우상 숭배적 예배를 구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종교개혁을 통해 우리를 그 악으로부터 구출해 주신 그리스도에 대한 큰 모독이다. 어떤 배도자는 또 하나님을 전적으로 거절하며 더 이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의 하나님은 그 자신의 정욕과 욕망이다. 그는 이 세상의 쾌락을 즐기기 위해 살 뿐이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약속보다 세상적 쾌락을 더 사랑하며 복음을 거절했을 경우 당하게 될 멸망에 대한 그 모든 경고를 무시한다(빌 3:18,19 참조).
 
징조 5. 그리스도와 그의 순전한 복음을 거절하는 배도자는 또한 그리스도의 충성된 백성들도 경멸하고 거절한다. 그동안 항상 보면 심한 배도자가 심한 핍박꾼이 되었다. 그들은 말과 행동으로 뿐 아니라 사력을 다해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은 그의 백성 또한 사랑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증오하는 자들은 그의 백성 또한 증오한다. 그들은 복음을 계속해서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아주 유약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경멸한다. 그래서 배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하지 않는다(요일 2:19 참조).
 
징조 6. 마지막으로 그들은 성령과 성령께서 복음 안에서 하시는 모든 은혜의 역사를 경멸한다(히 10:29 참조).
성령은 특히 복음시대를 위해 약속된 분이다. 성령에 대한 이 약속은 복음에만 있는 특권이요 영광이다. 성령은 부활하고 승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분이다(행 2:23 참조). 성령이 하시는 모든 일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그를 높이며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을 인간들의 영혼에 유효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령은 곧 복음의 생명이요 혼이다.
따라서 복음을 배도한다는 것은 곧 성령과 성령의 사역에 대해 특별한 적대감을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배도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길 때 그들은 곧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할 것이며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히 10:29 참조).
 
징조 7. 전적 배도는 복음에 대한 자신의 증오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선언하되 세상적 이권과 일치하는 한도 내에서 그렇게 할 것이다. 세상적 이권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전적으로 거절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별로 현명하거나 바람직한 일이 아닐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배도가 온 세상에 만연되어 있어서 얼마든지 해도 되는 일이라면 배도자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배도자로서 자신의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전적 배도의 징조들인 이 일곱 가지 징조에 대해 항상 유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복음을 공공연하게 전적으로 배도한 자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신실하심에 맞지 않는 행위이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의 진리를 영접하고 그것이 참으로 탁월한 진리라는 사실을 확신했다가도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마련해 주신 유일한 길인 그 복음을 완고히 거절한다. -그러고는 구원 사역에 가담하신 성삼위 전체를 경멸한다. 하나님은 실실하시기 때문에 이런 뻔뻔스러운 죄인들에게 긍휼을 베풀지도 않으실 뿐더러 또한 거룩하시기 때문에 긍휼을 베푸실 수도 없다. 하나님은 이런 사악한 배도자들을 한동안(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참으실 수도 있고 또 실제로 참으시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내려질 영원한 심판이라는 자신의 공의에 만족하신 채 이들에게 어떤 불쾌한 내색도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지 그들을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으로” 그리고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잠시 참고 계실 뿐이다(롬 9:22; 벧후 2:3). 그리고 배도할 위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정도의 경고면 충분할 수 있다. 또 아직 “죄의 속임수를 통해” 그 마음이 강퍅하게 되지는 않았으나 배도를 고려해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이 정도의 경고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자기들이 영적으로 메말라 죽어 있다고 느껴지거나 또 그 동안 죄악 된 쾌락 때문에 영적 의무를 등한시해서 절망감에 빠져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그래서 자기들도 회복이 불가능한 배도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권면하고 싶다.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이루어졌든 아무튼 영적 퇴보는 다 위험하다. 이런 상태에 있게 되면 누구든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오는 평강과 위로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회개하고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6,7).
 
만약 자신의 퇴보가 악함을 영적으로 의식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래도 회복될 가망성이 있는 것이다. 회개할 가망이 전혀 없는 사람이 구원받을 가망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이 주는 모든 확신을 거절하고 스스로 강퍅케 되기 전에는 회개할 가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는 뒤로 물러섰던 사람들을 부르시며 전심으로 그를 찾는 자를 도우신다(계 2:5, 3:1-1 참조).
하나님은 신자들 가운데서 이처럼 뒤로 물러선 자들을 돌이켜 치유케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호 14:4 참조).
 
만약 이렇게 말해도 회개할 의향이 없다면 당신은 죄의 세력이 당신을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 계속 나빠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당신이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든 그 속셈은 다 마찬가지다. 즉, 당신은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불신 때문이든 아니면 하나님보다 세상의 쾌락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든 아무튼 당신은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싫어해서 복음의 거룩함과 순종으로부터 멀어진 것이 아니라면,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보다 그것이 더 좋아서 어떤 다른 종교나 죄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회개하라. 그리고 복음의 방편을 모두 사용하여 복된 회복의 길로 들어서도록 하라. 그러나 회개하라는 명령은 롯에게 소돔을 떠나라고 명했던 명령만큼이나 아주 시급한 것이다(창 19:15,16 참조). 지금은 우물쭈물하며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볼 그런 때가 아니다. 이제 지체할 시간이 없다.

“그러나 내가 회개해도 계속 죄를 짓게 되는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한 번도 복음이 요구하는 그런 거룩한 삶을 완전히 살아보지 못했다. 따라서 나의 형편도 복음의 거룩함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죄가 나를 다스리고 있다. 나는 한 가지 죄를 계속 짓고 있어서 이것이 이제는 하나의 습관적이 죄가 되고 말았다.”
 
당신이 죄의 세력에 대해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세 가지 있다
첫째,
죄에는 사로잡는 능력이 있다(롬 7:23 참조). 이 능력 아래서는 인간의 의지가 죽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즉, 이 죄의 세력에 대항해서 아무리 선한 일을 하고자 소원해도 결국 그 선을 행치 못하고 만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의지가 이 죄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 세력과 싸우려고 안간힘을 다 쓰며 괴로워한다. 이처럼 죄의 법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그 사람이 실제로 죄를 범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마음으로 죄에 대항해 싸우는 분투를 뜻하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아무도 이 상태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롬 7:24 참조).
 
둘째
, “죄를 이기는 능력”이 있다(벧후 2:19 참조). 인간은 죄가 인간을 “이겨 노예로 삼았다”는 점에서 볼 때 사실 “부패의 종들”이다. 그들은 자기가 자진해서 죄의 노예가 된 것이 아니고 죄의 세력에 굴복하여 죄의 노예가 된 것이다.
 
셋째, 완전히 죄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이 양심의 번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죄를 섬기게 되는 그런 죄의 상태가 있다(롬 6:16,19 참조).
따라서 자기는 습관적인 죄의 세력 아래 있어서 그것을 극복할 수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아마 이런 사람들일 것이다. 즉,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확신에도 불구하고 또 그 죄를 극복하려고 무진 애를 쓰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떤 죄의 세력 아래 있어서 실제로 그 죄를 자주 범하게 되는 그런 사람들일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아주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들은 절대 자기들이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사람이라면, 그래서 이런 습관적인 죄를 이겨 보려고 애써도 도저히 이길 수 없다면 여러분을 도와줄 수 있는 영적이며 능력 있는 사람을 찾아보도록 하라.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약 5:16).
사단의 공작으로 이 명령이 잘못 사용되어 모든 죄를 반드시 신부(그들은 사죄의 능력을 받는 것으로 인정됨)에게 고백해야 하는 것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수없이 많은 악이 생겨났고 사람들에게 이 명령의 본래 목적(그 목적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서로 도움을 구하기 위한 것인데)을 알려 주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많은 영혼들이 멸망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 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 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당신은 삶 속에 이와 같은 습관적 죄가 없는지 살펴본 다음 그런 죄가 발견되면 그 죄를 당신의 삶 속에서 뿌리 채 뽑아 버려야 한다. 당신은 그것을 끊어서 추방해 버려야 한다. 당신은 그 습관적 죄를 짓고자 하는 첫 번째 유혹이 올 때 바로 그것을 거절해야 한다. 그것을 도적이나 혹은 여러분을 악한 일에 가담시키려는 악인 다루듯 다루라. 절대 그 죄에 동의하지 마라(시 50:18; 잠 1:10-19 참조). 술주정뱅이가 술을 거절해야만 하듯이 그 죄를 거절하라(잠 23:31 참조). 품행이방정한 남자가 행실 나쁜 여인을 거절하듯 그것을 거절하라(잠 5장 참조).
이 습관적이 죄를 계속 지어야 하는 모든 이유들을 다 거절하라. 이 죄를 허용하는 모든 장소와 사람들을 다 피하고 이 죄를 저항하기 힘들게 만드는 곳이 있다면 그곳도 피하라(잠 4:14,15 참조).

끝으로 이 습관적인 죄를 극복할 수 있는 은혜를 받기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세의 손이 내려갔을 때 아말렉군이 이겼다. 그러나 모세의 손이 올라갔을 때는 아말렉군이 졌다(출 17:11참조).
이 습관적인 죄는 바로 당신의 아말렉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기도의 능력을 가르쳐 주시어 당신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기도하게 하시기 위해 사용하고 계신 수단일 수도 있다. 그것은 또 당신으로 하여금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의존케 만들기 위한, 즉 당신을 겸손케 하기 위한 “육체의 가시”일 수도 있다(고후 12:7-10 참조).
 

 

 

13. 배도를 막을 수 있는 길
 
어떤 유혹이 오더라도 절대 배도하지 않으려면 항상 하나님 영광 우선주의로 살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신앙으로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거절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저들을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열방들 사이에서 영광을 받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멸하신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이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기로 한 그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멸하셨다고 말할 것이다(민 14:11-19 참조).
이런 태도는 여호수아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 여리고를 기적적으로 함락시킨 이스라엘군은 아이성에서 패했는데 그때 여호수아 역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호수아는
“주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가나안 사람과 이 땅 모든 거민이 이를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수 7:8-9 참조)라고 기도했다.
지금 만연되어 있는 이 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크신 이름이 땅에 떨어졌다. 하나님의 모든 충성된 백성들이 하나님을 저버린다면 누가 그의 크신 이름을 영화롭게 하겠는가?
그동안 복음을 영접했던 나라들 가운데 지금은 회교, 이방교, 무신론에 빠져 있는 나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데 과연 얼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나라에서만 해도 자칭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름만 그리스도인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으나 그 생활 속에서 경건의 실체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을 바라보는 이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아주 우습게 여긴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이처럼 만연되어 있는 위선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 의해 욕먹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 교회들을 한번 둘러보라. 교인들 중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가르침, 복음적 예배 및 순종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이 마당에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겠는가?
그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진리로부터 멀어져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신과 우상숭배로 되돌아가고 있는데 우리는 그 점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는가? 이런 일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이 모든 가증스러운 일들에 대해 한탄하며 통곡해야 하지 않는가(겔 9:4 참조)? 아니면 갈리오처럼 이런 일들에 대해 상관치 않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행 18:17 참조)?
하나님은 예루살렘과 성전 안에서 행해진 그 모든 가증한 일들을 보고 한탄하며 울던 자들 이마에 표시를 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 땅에 내려졌을 때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와 보살핌을 받았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고 가증스러운 배도, 마치 치명적인 전염병처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영적 생명을 파괴시키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이 배도를 보며 은밀히 애통해 한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와 보살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배도가 유혹하여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할 때 우리를 도와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이마 위에도 표시하게 하실 것이다.
 
어떤 유혹이 와도 배도하지 않으려면 기독교의 영광과 능력 및 순전함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 안에 기록된 약속들을 붙잡고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종일 종야로 잠잠치 않았던 예루살렘 성벽의 파수꾼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 여호와로 하여금 기억하시게 하는 우리는 잠잠하지 말아야 하며 또 여호와께서 기독교의 복음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게 해야 한다(사 62:6,7 참조).
하나님이 하시기에 너무 어려운 일이란 하나도 없다. 그는 이 세상에 평화와 진리 및 의를 보내실 수 있다. 땅이 열려 구원을 움돋게 할 때까지 하늘에서 의를 비같이 부어내리실 수 있다(사 45:8 참조). 만약 이 일이 타락한 사람들의 의지에 맡겨져 있다면 이 배도는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주권적이요 효율적인 하나님의 은혜만이 이 배도를 중단시키고 큰 부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어떤 유혹이 와도 배도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한다(유 3절). 이 세상과 배도자들이 복음의 진리를 경멸하고 조롱한다 해서 싸움을 포기하면 안 된다. 우리는 말 뿐 아니라 행실로 그것을 충실하게 증거 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기 위해 선한 양심을 가지고”(벧전 3:16참조)거룩하며 의롭게 살아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어떤 유혹이 와도 배도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부지런히 살펴야 한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이것은 솔로몬의 충고인데 우리의 최대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이기도 하다.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보다 마음이 복음의 진리 안에 있도록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만약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로 결심한다면 그 결국은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 마음이 배도하기로 결심한다면 그 결국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가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은 우리 영혼 안에 있는 모든 기능을 다 일컫는다.
우리는 마음을 부지런히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렘 17:9)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잠 28:26)이다.
베드로 사도를 기억하라. 그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믿었다가 결국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말았다. 우리는 그보다 더 나을까? 결코 더 낫지 않다.
우리는 마음의 생각들이 오직 그리스도만 의지하도록, 그래서 그리스도께로 부터만 도움과 위안을 얻을 수 있게 되도록, 우리 마음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전적인 배도를 면할 수 있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 22:32).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대제사장이 계시다.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할 것이다(히 4:15,16참조).
또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약속을 꼭 붙잡고 있어야 한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10).
따라서 어떤 유혹이 와도 배도하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두 자신의 마음을 부지런히 살피되 그리스도만 의지하여 도움과 힘을 얻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마음을 살피되 영적 진보를 이루어 점점 거룩해지고 있는지 아니면 거룩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살피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배도의 위험에 노출시키고 말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살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기 때문이다(히 4:12,13참조).
 
어떤 유혹이 와도 배도하지 않으려면 교회에 다님으로써 누리게 되는 외적 특권을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교회의 특권과 복음의 규례를 맡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긍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구약시대 때 드려진 예배와 의식들은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롬 3:2참조). 구약시대 때는 저들이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을 모두 다 맡았다(롬 9:4,5참조). 신약시대에 드려지는 예배와 비교해 볼 때 구약의 직분이 가지고 있는 특권은 영광될 것이 전혀 없지만 말이다(고후 3:10참조).
따라서 복음의 규례를 멸시하는 자들은 복음의 거룩과는 전혀 관계없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명령을 공공연히 저버리고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 무슨 거룩이 있을 수 있겠는가? 복음의 규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서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 그리고 그의 교제할 방편으로 주신 것이다. 따라서 아무것으로든지 그 영광을 손상시켜서는 안 되며 영적 나태로 말미암아 그것을 멸시해서도 안 된다.
 
자신의 영적 성숙을 위해 복음의 규례를 어떻게 활용할지 아는 사람은 영적으로 쑥쑥 자라는 그리스도인이다. 그 규례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외적 수단, 동시에 그리스도께 우리의 사랑과 찬양 및 감사를 드리고 충성과 순종을 다짐하는 외적 수단이다. 따라서 이 규례들을 잘 활용하느냐 남용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점점 더 거룩해질 수도 있고 아니면 거룩으로부터 멀어질 수도 있으며,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한 우리 자신의 고백에 충실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것에 충실치 못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규례가 우리를 구원시켜 준다든가 혹은 배도로부터 지켜 준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이 규례를 부지런히 지켰으니까 안심해도 된다는 식으로 믿었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실상은 거짓 안도감에 사로잡혀 배도하게 된 사례가 많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이 단순히 교회에 가서 그들이 좋아하는 종류의 예배 의식이 진행되는 동한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양심의 만족을 얻는다. 특히 그들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등 자기들은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외적 확신을 얻게 될 경우 더욱 만족해한다.
그런가 하면 선포되는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에 비추어 자기 자신을 조사해 볼 생각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들은 바를 속히 잊어버린다. 그들은 마치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다(약 1:23,24참조).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는데 왜 전심을 다해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그렇게 적은가?
우리가 영적 선물들을 가지고 있으므로 절대 배도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을 속이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은사들을 믿고 그것으로부터 얻는 도움과 만족을 의지한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은사나 지식, 기도의 능력, 또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 말하는 능력 등을 믿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영적 은사가 있다고 해서 배도를 안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이 점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다(마 7:22,23참조). 그리고 칠십 명이 성공적인 사역을 하고 돌아와서 귀신조차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그들에게 복종하였다고 기뻐하며 보고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 은사에 기뻐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는 것에 대해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눅 10:17-20참조).
물론 영적 은사는 복음의 참됨을 확증하는 것이요 교회를 세우기 위한 선물이다. 그러나 은사 자체가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은사는 은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 따라서 영적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자기는 정말로 중생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중생의 표가 아니요 영적 은혜의 증거이다. 이렇게 말하면 또 은사를 받아야만 자기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처럼 영적 은사를 받으면 우리는 실제로 큰 배도가 일어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일이 다 잘 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할 수 있다.
 
은혜 없는 은사는 영혼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은사는 어떤 특정한 때나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된다. 그러나 은혜는 무슨 일을 하든 항상 우리 전인(全人)에 영향을 미친다. 은혜는 영혼 안에서 거룩한 순종을 이루어 낸다. 그러나 은사는 그렇지 못하다. 은사는 우리가 은혜 안에서 성장해 가는 그 정도를 측정하지도 측정할 수도 없다. 그리고 또 우리가 배도의 길에 빠졌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말해 줄 수 없다.
따라서 영적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절대 배도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지 말라.
우리는 또 어떤 특별한 예배 방식을 너무 높이 평가하여 우리만 올바른 예배를 드리고 있고 다른 모든 예배 의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예배는 항상 “신령과 진정으로”(요 4:24) 드리는 예배이다. 그러나 우리가 드리는 예배만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유일한 예배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사 65:5)는 태도를 갖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런 태도에는 사랑, 겸손, 온유 및 다른 사람들로부터 기꺼이 배우려는 마음가짐 등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질서 있게 관리하며 예배의 순전함을 지키고 정기적으로 세례 및 성찬식을 행하는 데 대해 큰 상을 주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식만 최고요 우리가 드리는 예배만 참 예배 방식이라는 태도를 갖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것들은 우리 식 예배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예배라고 주장하게 될 때 생기기 쉬운 몇 가지 위험들이다
종교의 개인적 의무들이 등한시될 수 있다. 이런 일은 세속적인 생각, 즉 우리 식 예배만 바르고 정확하다는 것을 믿는 죄악 된 정욕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다. 이 모든 일이 동시에 발생하게 되면 하나님의 깨우쳐 주심이 없는 한 그 영혼은 아주 위험하다. 사람이 함께 모여 드리는 공적 예배로만 만족하고 그것을 빙자해서 개인적으로 행해야 하는 영적 의무를 등한시하게 될 경우 그 사람은 이미 배도의 길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적 정욕은 육신을 만족시키는데 여념이 없을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죄의 속임수”가 하는 큰 일이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을 속여 그로 하여금 어떤 죄를 짓고서도 그 죄에 대해 합리화하도록 만든다. 그런 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즉, 자기는 올바른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교만,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금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로부터 “아버지”라는 칭함을 받는 교만, 종교적인 명성으로부터 오는 교만, 교회의 특권을 받아 누린다는 데서 오는 교만 등등(마 23:9참조)이 그것이다.
이런 교만에 빠지게 되면 결국 영적으로 나태해져서 부주의한 비 영적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절대 배도를 하지 않으려면 교회의 특권과 복음적 예배의 규례들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런 것들을 등한히 하거나 우습게 여긴다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멍에를 집어 내던지는 일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거부하는 행위인데, 그의 권위를 거부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고 소망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아마 없을 것이다.
한편 교회의 특권만 믿고 어떤 특정한 죄에 빠진다면 사실상 배도의 길에 서 있는 것이다.
배도에 빠지지 않는 안전하고 온전한 방법은 우리 영혼이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그런 방법이다. 이 방법은 바로 우리 영혼의 영적 성장을 위해 마련된 복음의 규례들을 겸손하게 그리고 양심적으로 조심스럽게 활용하는 것이다.
 
복음의 규례들로부터 영적 유익을 얻고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들 

그 규례들을 사용함으로써 우리 마음의 소욕들이 좀 더 거룩해지며 천상의 것들로 가득 차게 된다면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 우리 마음이 겸손해진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 규례들로부터 유익을 얻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 규례들이 가지고 있는 목적은 우리를 은혜 안에서 성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게 되며, 죄를 점점 더 미워하고 은혜와 거룩을 사모하며, 모든 선행에서 열매를 맺기를 소원하고 순종의 의무를 다 하고자 하며, 영적인 일들과 우리 안에 일어나는 자기 겸손에서 기쁨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그때는 우리 마음이 우리 자신을 정죄할 필요가 없다. 비록 우리 자신이 여러 가지 면에서 아직 약하고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지만 적어도 우리 자신이 진지하지 못하다는 책망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타락과 부패를 통해 육신과 불신이라는 약점을 통해 우리가 때로 우리 영혼에 유익을 주는 어떤 것을 체험하지 못했다고 하자. 그렇다 해도 만약 우리가 그런 유익을 얻지 못한 데 대해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을 겸손히 낮춘다면 우리 자신이 여전히 진지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겸손이라는 이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복음의 규례를 죽은 것이요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거절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이 규례들을 형식적으로 부주의하게 취급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메말라 간다. 위선적인 모든 베일에서 다 벗겨져 파멸될 때에야 비로소 그런 것들이 교만의 열매요 죄의 속임수의 열매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영적인 일들이 우리에게 실제가 되고 가까이 있을 때 우리는 그 규례들로부터 유익을 얻게 된다.
복음을 설교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발견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면, 우리가 태초부터 있는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보고 느끼고 주목하면”, 그리고 “바라는 것들이” 우리 영혼에 실체가 된다면, 그 때는 그 규례들로부터 참 유익을 얻는 것이다(갈 3:1; 롬 6:17; 요일 1:1; 히 11:1).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 의식들에 형식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해서 이 의식으로부터 아무런 감동이나 경고도 받지 못한다면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복음이 요구하는 순종의 다른 모든 의무들에 대해 좀 더 부지런히 신경을 쓸 때 그 의식들로부터 유익을 얻게 된다. 복음의 다른 의무들은 등한시한 채 그런 행동을 한데 대한 죄책감에서 이 의식에 참석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배도할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 의식들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고난 받을 힘을 얻게 될 때 그 의식들로부터 유익을 얻는 것이다. 이 의식들 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본 자는 쉽사리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게 될 것이다.
 
만약 어떤 유혹이 와도 배도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사람들이 보통 저지르는 죄들을 짓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지 “누구나 다 하는 일인데 뭐!”라며 세상 여론의 인도를 받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점에 대해 아주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고후 6:17). 우리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마치 여호와에게 로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같이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면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행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행해야 할지 말해 주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미 5:7). 우리는 그들 중에 있지만 그들과 한통속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 나라 안에서 보통 저질러지고 있는 죄들을 범하지 않게 되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빠져서 세상 사람들이 하는 식을 배우고 그들 견해대로 따른다면 그리스도인들 역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고 말 것이다.
구약시대 때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 살며 다른 민족들이 그의 백성 가운데 함께 섞여 살 때 그의 백성들을 신뢰하실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백성이 유혹에 못 이겨 결국 이방인들의 경건치 못한 방식을 따르게 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나안 땅 거민을 모두 다 내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레 18:30).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를 무시하고 그의 뜻을 어긴 채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 방식을 배운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파멸을 자초했다.
복음 아래 사는 하나님의 참 교회는 그들 안에 그리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 순전함과 거룩함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 자기 백성들(믿음의 순종 속에서 살도록 부르심 받은)에게 열방들 가운데서 살라고 명하신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그 위험을 여전히 경고하고 계시며 각자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되도록 조심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다(약 1:27 참조).
 
이의.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 세상 관습 중 어떤 것들에 동조해서 따라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경멸받을 것이요 아무도 우리를 알아주지 않을 것이다.”
 
이의에 대한 답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지배적인 악덕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장소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그런 악덕들에 굴복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우리도 남들처럼 똑같은 일을 행했다. 따라서 이제 그 사람들은 우리가 더 이상 그들과 함께 악한 일을 행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우리를 비방하는 것이다(벧전 4:3,4 참조).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이 세상과 짝하기 위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싶다는 말인가(요일 2:15-17; 약 4:4 참조)?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정직함이나 친절함, 관대함, 유용함, 온건함, 자선을 베푸는 일, 궁핍한 자들을 동정하고 돕는 일 등에 있어서 이 세상 사람들을 단연 앞서는 것이다.
 
어떤 유혹이 와도 배도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이 저지르는 특별한 죄들, 복음으로부터 사람의 마음을 분리시키는 그런 죄들을 짓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이 부족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예배로 하나 되는 일을 거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와 예배 순서를 좀 달리하는 다른 참된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거부해서도 안 된다.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성도들 가운데 그 이웃에게 전혀 친절한 행위도 보이지 아니하고 또 별 도움도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이런 죄를 피하고 가능한 한 유용한 사람이 되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세 번째 죄는 영적 교만과 비판 정죄하는 정신이다. 우리는 이 죄 또한 조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조심성 있고 거룩한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를 잠잠케 만들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우리의 신실함을 증명해 보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벧전 3:16)해야 한다. “참고 선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지옥의 모든 악과 악독을 극복해야 한다.
그 마음이 복음에 의해 확증된 사람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악한 말을 할지라도 계속 선을 행할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용납되었다는 의식과 현재의 행복 속에 그만한 대가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과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이 멍에는 자기가 아주 쉽고 짐이 가볍다”고 말한다.
 
여러분이 배도가 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더 이상 퍼지는 것을 돕지 않도록 조심은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진실 되고 정직하게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 부당한 비판을 온유하게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당신의 견해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견해를 강요하지 않는 것, 다른 사람들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실수들을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는 것, “진심으로 주를 사랑하는” 모든 자들과 교제를 가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 이 모든 것이야말로 배도에 푹 빠져 있는 이 세상이 모든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보아야 할 것들이다.
만약 모든 그리스도인이 겸손하고 조용하며 화평하고 술 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고 겸손하며 유용하고 친절하며 관대하고 기꺼이 경청하며 어떤 시련을 당해도 명랑하며 항상 “주 안에서 기뻐한다.”면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불쾌해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도 그리스도인들처럼 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게 될 것이요,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되고 말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든지 정직하고 진실하며 의롭게 행동한다면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큰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
 
끝으로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삶을 삶으로써 그 삶을 통해서만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라면 이 세상은 화를 낼 수 없을 것이다. 거룩한 삶 자체가 이미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마음에 스스로 판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화가 나서 싸움을 시작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들의 죄와 그 생활의 사악성만 드러낼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배도하지 않게 되도록 조심하자. 왜냐하면
“잠시 잠깐 후면 오실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 10:37,38)고 주께서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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