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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연구

히브리서 10-13장

by 은총가득 2020. 3. 23.

 

  히브리서 10장 - 단 번에 이루신 완전한 제물


1.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제사는 구약 율법의 제사와 같이 반복될 수 없다는 논지를 유지한다(1~4). 만일 제사의 효력이 완전하다면 왜 해마다 속죄일이 될 때 지성소에 들어가서 죄를 속해야 했겠는가? 그 제사들은 반복될 때마다 오히려 죄를 생각나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3). 황소와 염소의 피가 어떻게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없다.구약시대의 제물의 불완전성을 예수그리스도의 완전한 제물되심, 완전한 제사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2. 기자는 예레미야 31장의 더 좋은 언약(16~17절)과 시편 40:6의 더 좋은 제사(5절)를 설명한다. 먼저 시편 40:6을 70인역에서 인용하는데, 히브리어 사본에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이라고 한 것을 70인역은 “주께서 내게 열린 귀를 주셨으니”라고 번역하였다. 이 구절은 출 21:6과 신 15:17에서 자발적으로 주인을 사랑하여 자기 몸을 영원한 종으로 드리는 노예의 귀를 뚫는 풍습을 언급한다고 볼 때, 자원과 순종을 강조한 표현이다. 여기서 열린 귀와 ‘복종하는 몸’은 같은 의미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그분의 귀를 여셨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그분의 몸을 드리셨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소원이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순한 제사가 아니라 순종이다. 제사는 순종을 대체할 수 없다. 사랑의 헌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제사도 하나님께 열납될 수 없다. 선물로 하나님의 마음을 살 수는 없다.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제사의 엄청난 대가를 설명하고 있다(5~10).


3. 이어서 그는 그리스도의 제사의 거룩하게 하는 효력을 말한다(11~18). 먼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이다(11~14). 그리스도의 제사는 죄와 우리의 성화를 위한 것이었다. 10절에서는 우리의 성화가 완성된 것으로 묘사하지만(완료시제로 쓰인 이것은 확정적 성화라고 부른다), 14절에서는 2:11과 같이 과정으로 다시 묘사한다. ‘거룩하게 된 자들을’이란 표현은 현재 수동태 분사 형태로, ‘거룩하게 만들어져 가고 있는 자들을’(those who are being made holy, NIV)이란 의미다(14).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을 온전하게 하셨다. 10:10에서는 제사로서 되풀이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성격을 강조하지만, 14절에서는 성별된 백성으로서의 그들의 신분이 초시간적으로 묘사되는데 바로 앞의 그 제사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특권이다.


4. 그리스도의 제사의 거룩하게 하는 효력은 또한 성령께서 반복해서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15~18). 성화의 과정이 우리 삶에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쓰여진 내주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시는 것이 필요하다(15). 성령은 무엇을 할지를 말씀하실 뿐 아니라 순종할 능력도 주신다. 가장 분명한 메시지는 사죄의 확신에 대한 메시지다(17). 이것이 히브리서의 결론부를 열어준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범위와 확실성, 효력을 지닌 사죄를 받았다면 이전의 구약 율법 아래 있는 제사제도를 계속 지켜야 할 필요가 없다(18).


5.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이제 견고한 소망으로 부름을 받은 것을 알고 살아가야 한다(19~39). 먼저 히브리서 기자는 ‘들어가라’고 권면한다(19~22).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셨다면,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면(7:25) 우리도 그분을 따라 그곳으로 들어가 그분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보좌로 들어갈 때 담력을 가지고 들어가라고 말한다(19). 구약의 성도들이 주저함과 두려움으로 나아가야 했다면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의 피가 뿌려졌으므로 담대하고 기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이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시련의 때라도 나아오라는 권면을 듣는다(4:16).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되고 자양분을 공급받아 강해지고 탄력을 얻어 삶의 위험들과 어려움을 헤쳐나가게 한다. 담력뿐 아니라 감사함으로 들어가라고 기자는 말한다(20~21).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성소에 들어갈 때마다 첫마디에 감사와 찬양과 경배, 감사의 말을 외치게 될 것이다. 그분이 흘리신 보혈, 그분이 열어놓으신 길, 그분이 이루신 구속 사역을 기억해야 한다. 성소에 들어가는 길은 ‘새로운’ 길이다. 이전에는 들어갈 수 없었던 길이기 때문이다. 성소에 들어가는 길은 또한 ‘산’ 길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지만 영원히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성소에 들어가는 길은 ‘그의 육체의 휘장을 통해 난’ 길이다. 찢어진 휘장처럼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 위에서 찢어지심으로 우리는 성소에 들어가며 하나님을 뵐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그분이 이루신 일뿐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이루고 계시는 일을 인하여 감사를 드리게 된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a great priest)’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집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인 교회다. 성도는 또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다(22). 구약 성도들은 외적 씻음의 의식을 필요로 했다면 이제 우리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6. 히브리서 기자는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고 말한다(23).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굳게 잡으라는 것은 인내뿐 아니라 증거를 요구하는 말이다. 신앙은 참고 견디는 것만이 아니다. 도리어 그 선한 증거를 세상을 향하여 증거하는 것이다. 이런 성도의 삶은 서로를 격려하는 일을 통해서 더욱 힘을 얻는다(25). 성도들은 서로에 대한 책임을 가진다. 가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선행을 베풀면서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자극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는 무한하지만 시간적으로는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의 재림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서로 권면하고 자극하는 일을 더욱 힘써야 한다(25하).


7. 히브리서 기자가 주는 또 하나의 권면은 ‘기억하라’는 것이다(26~35). 그는 먼저 ‘넘어진 자들을 기억하라’고 경고한다(26~31). 넘어진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부한 사람들이었다. 한때는 열심히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듯 했지만 이제는 그 가르침을 거부하고 ‘짐짓 죄를 범하고 있는’ 자들이다. 처음에는 신앙을 공공연히 고백했지만, 그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지 못한 유대인들일 것이다(3:14). 새언약 아래서 이들에게는 영원한 죽음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저버린 자들이고, 성령을 경멸한 자들이다(29). 기억해야 할 자들은 이들만이 아니다. 성도들은 또한 ‘끝까지 견딘 자들을’ 기억해야 한다(32~35). 이것은 부정적인 경고가 아니라 긍정적인 권면이다. 이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세례를 받고(빛을 받은 후에) 믿음이 아직 어린데 핍박이 들이닥쳤다. 이 핍박은 오히려 성도들의 교제를 더욱 깊게 했고(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후에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품게 했다. 그들은 노략질과 약탈과 폭력을 ‘기쁘게 당했다’(10:34). 예수님의 말씀대로 말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 5:11~12). 핍박은 그들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해주었다. 약탈자가 침입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 영원한 기업은 결코 훔쳐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앞으로 나아가라’고 권면한다(36~39). 믿음의 인내를 촉구하는 말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처음부터 말해온 대로 믿음은 인내다. 그것은 상을 바라보는 믿음이다. 이것은 의인이 살아가는 방식이다(38). 그리고 영혼의 구원을 완성하는 믿음, 곧 구원하는 믿음이다(39).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영웅들


1. 기자는 10:36~39에서 믿음의 인내를 권면한 후에 구약 조상들의 모범을 제시한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적 동의가 아니다. 믿음은 그 말씀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믿음은 미래를 기대하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지나가는 순간을 위해 살지 않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1).” 이것은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아직 보이지 않아도 확실하게 일어날 소망을 근거로 사는 것이다(1). 믿음은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다(2). 조상들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은 믿음으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은 믿음을 보신다. 믿음의 사람들이 추구한 것은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었다. 또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태도다(3).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안다. 즉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나왔다. 기자는 창조 때의 이야기를 원용하고 있다.

2. 기자가 이제 열거하는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을 보자. 먼저 세 사람, 아벨, 에녹, 그리고 노아다(4~7). 아벨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무를 인정한 사람이다(4). 아벨은 형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그것은 믿음으로 드린 제사였다. 우리가 외적으로 드리는 예배와 헌금과 봉사가 우리의 사랑과 헌신의 진정한 표현인가? 아벨의 제사는 가장 중요한 제사인 그리스도의 뿌린 피(12:24)를 상기시켜 준다. 예수님은 아벨의 제물과는 달리 자원하는 제물이 되셨다. 둘째로 에녹을 보자(5~6). 그가 평생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므두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한 순간이 있었다. 에녹처럼 하나님께 나아가 그와 동행하려면 그분의 존재(계신 것)와 그분의 관대하심(상주심)을 믿어야 한다. 이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세번째는 노아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의 전형이다(7).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한 경고를 받고 순종했다. 그는 믿음을 통해 온 세상이 그릇된 자리에 있음을 보여준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의 믿음으로써 세상을 정죄한다.

3. 이제 기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그의 믿음을 약간 길게 언급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희생적 믿음이었다. 그는 안전하고 부유하며 평화스럽고 즐길 수 있는 모든 환경으로부터 기꺼이 떠나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비록 가는 길을 다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선한 것으로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13:21). 또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의 용기는 어떤가?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기업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순종에 대한 상으로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75세였고 그의 용기는 믿음이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 것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에게서 믿음의 끈질김(인내)을 본다. 그가 가나안에 들어가 기업의 약속을 받았을 때에도 그 땅이 즉시 그의 소유가 되지 않았고 그는 평생 소유 없이 살았으며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매장지를 사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약속을 신뢰함으로 살았다. 그는 장막에 거하는 유목민의 삶을 살면서, 장막에 도사리고 있는 삶의 위험과 불확실성을 넘어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고 위로를 얻었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사라 역시 믿음의 한 요소인 의존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자연적 조건을 뛰어넘어 행하실 하나님의 역사를 철저하게 의존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것이 믿음이다. 이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는 못 했지만 믿음으로 죽었다. 그들은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다. 이것은 그들의 목적지가 천국임을 보여주는 삶의 방식이었다. 그들은 본향을 추구하고 살았고 이 세상은 무상하고 일시적이며 소멸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믿음으로 분별하고 살았다. 믿음의 사람은 더 나은 것이 있음을 안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에 걸맞게 아니 그와 비할 수 없는 영광으로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해 주셨다.

4. 순례자의 삶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증거하는 삶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는가? 인간이 자신의 삶을 회계해야 한다는 것은 초대 기독교의 설교에서 두드러진 것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물질주의에 적응된 삶은 어떤가? 탐심은 불경건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생활 방식은 우리의 믿음을 증거하는가?

5.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들 이삭을 바치는 순종에서 절정에 이르고 빛을 발한다(17~19).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설령 아들이 죽게 되면 그를 다시 살리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믿는 절대적 복종의 믿음이었다. 이삭은 야곱을 축복할 때 장차 올 일에 관하여 말했다. 비록 야곱의 속임수가 여기 개입되었지만 하나님의 복은 우리가 그것을 받을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준다. 이삭은 지혜로우시고 주권적이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행동을 지각하게 되었다. 야곱은 눈이 어두워졌을 때, 요셉이 불편하게 여김에도 불구하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손을 어긋맞겨 축복함으로써 의도적으로 둘째인 에브라임을 크게 축복했다. 야곱은 허약했지만 믿음은 강건했다. 요셉은 임종시에 자기 시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옮길 것을 유언했다. 칼빈은 이 유언이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요셉은 백성들의 갈망을 일깨워 자신들의 구속을 더욱 진지하게 바라보게 하고 또 그들이 마침내 해방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소망하게 했다는 것이다.

6. 이제 기자는 모세에게 우리를 인도한다(23~29). 두려움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고질적 문제다. 그가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1세기 로마 황제의 명령 앞에서 살아야 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적절한 권면이었을 것이다. 신자는 종종 믿음으로 책임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 모세는 사회적 명예, 육신의 만족, 물질적 풍요를 거절하였다. 이 또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소유를 빼앗기고 고통을 당하던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실성있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모세가 상주심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눈을 고정시켰다는 말이다. 마치 예술가가 그림이나 조각으로 재현하려는 물체나 모델에 눈을 고정시키듯이 그는 상주시는 분과 상주심에 눈을 고정하였다. 그는 바로의 분노 대신 하나님의 자비를 묵상함으로써 인내했고 두려움을 이기고 참을 힘을 얻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순종함으로 유월절을 지켜 구원을 얻었다. 이런 말씀을 통해서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기를 히브리서 기자는 바라는 것이다.

7.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믿음의 조상들은 어떠했는가? 기자는 히브리인들의 믿음의 끈기(인내)를 강조한다. 여리고성을 6일간 매일 한 바퀴씩 돌고 7일째는 일곱 바퀴를 돈 것은 믿음의 끈기를 보여준다. 또 라합이 스파이들을 자기 집에 들인 것은 생명을 건 모험이었다. 그러나 라합은 자기가 구원받을 권리가 없음을 알았고 그래서 구원을 간청했다. 이것이 라합이 보여준 믿음이다. 이외에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는 믿음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사사 시대에 믿음을 보여준 인물들이다. 이들은 다 결점투성이의 인간들이었다. 기드온은 겁이 많았고 바락은 우유부단했으며 삼손은 경솔했고 입다는 성급했다. 다윗은 감각적이었고 사무엘은 불경건한 자녀들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믿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던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지만 하나님은 연약하지만 끝까지 인내하는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셨다.

8. 믿음은 종종 공격적이다. 믿음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힘이다. 비록 세상은 하나님의 종들을 거부하지만 결국 세상은 신자들을 이기지 못한다. 이것은 세상이 받는 형벌이다. 칼빈의 말대로 하나님의 복은 신자들과 함께 오기 때문이다. 용감한 그리스도인들은 정복하는 능력 대신 고난을 견딜 능력을 받았다. 그들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어려움을 승리의 성취로 바꾸었다. 이들의 믿음은 풍성했지만 옛 언약의 한계에 갇혀 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들의 믿음은 ‘더 좋은 것’을 얻고자 했고, 그들이 바랐던 온전함은 새 언약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더 좋은 제사로 말미암아 가능해졌다. 그리고 모든 믿는 자는 모든 사람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유일한 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구속을 받았다.


 히브리서 13장 마지막 권면

1. 많은 배교자들로 인해 교회가 어수선해져 있을 때,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교회를 세우는 중요한 일이다(1). 이런 형제 사랑은 관대한 손님 대접으로 표현된다(2). 손님 대접은 그리스도인 가정의 정규적인 사역이 될 수 있다. 사랑은 구체적이고 관대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1세기에는 여관이 비위생적이었고 비쌌던 것 때문에 손님을 집에 모시는 것은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순회 사역자들을 위한 중요한 사역이었다.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하였다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언급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또 초대교회에는 신앙으로 인하여 감옥에 갇히게 된 형제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형제들을 동정하고 자신도 갇힌 자인 것처럼 그들을 섬기라고 권한다. 마태복음 25장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는 권면이다.

2. 두 번째로 기자가 주는 서신의 마지막 권면은 거룩하고 영적인 삶을 지키는 것에 관한 것이다(4). 결혼생활은 정결하게 지켜져야 한다. 성적인 죄가 난무하는 오늘날 이 말씀은 더욱 적절한 말씀이다. 하나님은 성적 범죄—이런 것은 어느 시대나 타락의 특징으로 빠지지 않고 나타났다—를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 또한 경건을 파괴하는 해악이다. 그래서 기자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것을 족하게 여기라고 권면한다(5).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겠다고 하신 주님의 약속을 기억할 때, 우리는 만족할 수 있다(6). 우리는 그 주님으로 만족하는가? 주님으로 만족함이 없다면 우리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끊임없이 무언가 다른 것을 추구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은 아무 힘도 없는 허수아비 같은 신앙이 될 것이다. 자족이 경건을 유익하게 한다(딤전 6:6).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도 돈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우리의 경건을 무너뜨리는 요소다(6). 사람들의 칭찬, 인기, 갈채를 원하거나 비난, 정죄를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를 넘어지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3. 세 번째 권면은 충성스러운 삶을 살라는 것이다(7~12). 8절은 히브리서에서 가장 유명하게 알려진 구절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이 구절은 7절과 9절의 문맥에서 보아야 하는데, 7절은 교회의 이전 지도자들에 관하여, 9절은 거짓 교사들에 관하여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자들의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는 말씀은 그들의 증거, 지속적인 열매, ‘삶으로 나타난 결과’를 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라는 것이다(7). 그냥 목사니까 장로니까, 무조건 본받으라는 말이 아니다! 9절에서 음식을 정하고 부정한 것으로 나누는 정결규례에 관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다룬다. 신자의 마음을 강건케 하는 것은 은혜지, 음식의 규칙을 지키는 데서 오지 않는다(9). 여기서 기자는 제사의 이미지를 다시 소개한다. 일반적으로 제사장들이 제물을 먹을 수 있었지만, 속죄일의 제사는 그렇지 않았다. 제물 전부가 불태워졌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배척을 받고 속죄제물로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성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울타리—안전 지대—를 벗어나서 세상을 섬기라는 권면일 것이다. 아무래도 약간은 배타적이었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을 따라서 우리도 우리의 안전 지대 밖으로 나아가 세상을 섬기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선교하는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무시하고 주위에 안전한 성벽을 쌓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다. 성문 밖으로 나아가자는 권면은 충격적 호소였을지도 모른다. 이 권면은 회당에서 쫓겨난 영웅적인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그 안에 머물고 싶어했던 주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성도라면 모두가 장차 올 도성을 기다리면서 이렇게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는 것이다(14).

4. 기자는 새로운 형태의 예배(제사)를 소개한다(15~16). 새 언약의 성도들에게는 찬미의 제사와 그 이름을 증거(인정)하는 입술의 열매로서의 제사, 그리고 선을 행하는 구제의 제사가 있다.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라는 것은 놀랍지 않은가? 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지도자들을 존중하여야 한다(17~21). 첫째로 목회자는 돌보는 영혼들을 위해 경성하는 자들이다(17). 경성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영혼을 돌보되, 목자가 양을 지키듯이 초병처럼 주의하여 밤새 지키는 태도를 말한다. 기자의 권면은 지도자들에 대하여 무분별한 순종과 지각 없는 복종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목회자에게 열심히 반응함으로써 목회자가 자신의 사역을 행복과 즐거움으로 하게 하라고 권면한다. 교인은 목회자의 기쁨과 자랑이고 면류관이다(살전 2:19). 목회자는 영혼을 위해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처럼 하는 자다. 왜냐하면 마지막 날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때 양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설명드려야 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5. 히브리서 기자도 한 사람의 순회 목회자로서 말한다. 자신이 영적 책임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한다(18~19). 이런 점에서 목회자 자신도 성도들의 기도에 의존한다. 어떤 지도자도 자신을 위한 성도들의 기도와 무관하게 사역할 수 없다. 성도들은 목회자가 사명을 감당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와 성도 모두는 다 양의 큰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의존한다(18~19). 기자는 자신을 위한 기도를 요청할 뿐 아니라 직접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한다(20~21).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신다고 할 때, ‘온전하게’란 말의 뜻은 그물을 깁는다는 말이다. 회복하고 수리하고 고쳐서 온전케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일인데, 그리하여 우리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부족함이 없게 만들어내신다.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도록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우리를 통해서 무언가를 이루시려고 하기 보다는, 그 일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고 주의 형상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기자는 마지막 인사를 전하면서 서신을 마친다.

6. 13장에서  마지막 권면을 하고 있다. 위기의 시대에 그리고 교회가 환난에 처해 있을 때,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또는 책망하고 경고하였다. 인간의 말로 이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준다. 그들이 이 서신의 처음부터 끝까지 썼듯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데 실패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모든 환난을 이길 것이고 살아남을 것이며 오직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다. <khy>

 

 * 히브리서의 특징 - 논문처럼 논리적으로 시작하여 설교처럼진행하다가 편지로 끝을 맺고 있다.

  *이처럼 히브리서는 신약성서중 가장 아름답고 수련한 문체와 구약의 핵심적인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조명하며  관통하고 있다.

* 히브리서의 중심 주제는 탁월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