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4장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1. 기자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고 격려한다(1~13).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안식은 가나안에 들어갈 때 다 성취된 것이 아니다(8~9). 진정한 안식은 여전히 남아있으며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인생의 마지막에 충성스럽고 신실한 순례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1절에서 ‘그의 안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나안은 일차적으로는 안식이었지만 이것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내세의 안식이었다. 아브라함이 바라보았던 것과 같은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이다(11:10). 왜 광야에서 조상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는가(2)? 그들도 신약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복음 전함을 받은 자들이었으나(능력의 말씀을 들었으나)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음으로 듣고 읽어야 함을 경고해준다. 믿은 우리는 이미 안식에 들어갔다는 말은 또 무슨 말인가(3)? ‘저 안식’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처음으로 예수를 믿고 고백했을 때, 이미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지상 순례길에 들어왔다는 말이다. 성화는 영화의 첫 단계다. 그러나 시 95편의 인용,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말씀의 미래시제는 불신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안식을 누릴 수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안식은 이미 시작되었다. 세상을 창조하고 칠일째 쉬실 때에 이미 하나님의 안식은 시작되었다(3~4절). 그리고 이미 믿음 안에서 죽어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자들은 지금 하나님과 더불어 쉬고 있다(10). 그리스도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고 싶은 욕구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마음이다. 그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단순히 입으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신앙만으로는 안 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에 두 가지로 동기부여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과(12) 하나님의 본성이다(1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분이시라면 우리는 그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해야 한다. 말씀은 하나님의 목적을 반드시 이루며 힘이 있다. 말씀의 검은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깊이 꿰뚫고 말하지 않은 생각이나 숨겨진 개념들까지 감찰한다. 말씀은 영적 존재의 가장 깊은 잠재의식 속에 있는 동기도 빛 가운데로 끌고 온다. 또한 하나님은 얇은 껍데기 같은 외적 경건 밑에 감추인 인간의 진정한 생각을 보신다. 우리는 다 그분 앞에 벌거벗은 자와 같이 드러나게 될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2. 정결케 된 사람들이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도움이 필요하다. 기자는 우리를 도우시는 분, 큰 대제사장 예수님을 소개한다(14~5:10). 그리스도는 이미 승리하셨다(2:9, 14~18).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사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에 나아가심으로써 대제사장의 사역을 성취하셨고 그 효력은 사람들에게 지금 미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대제사장이시다. 모든 이전의 대제사장을 능가하신다. 사역의 범위, 효과, 대가 모두에서 뛰어나시다. 예수님은 ‘인간’ 대제사장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이해하시고 우리의 시련을 아신다. 예수님은 ‘독특한’ 대제사장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분의 승천은 하나님의 보좌가 계시는 하늘의 지성소로 단번에 나아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한다. 믿음의 도리는 우리가 소유한 신앙 고백이다. 굳게 잡으라는 것은 단순히 인내하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대해 두려움 없이 담대히 증거하라는 것이다. 또한 주님은 인자한 제사장이시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시험을 받고 있었던 것처럼 그분도 모든 면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14절이 적대적인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15절은 우리가 외롭다고 느낄 필요가 없음을 확신시켜준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수 있는 힘은 빌라도 앞에서 믿음의 고백을 드러내신 분으로부터 온다(딤전 6:13). 예수님께서 우리를 동정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때, 우리는 용기를 얻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굳게 설 수 있다. 우리는 이 서신에서 신약의 가장 중요한 초청을 마주 대한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16). 은혜의 보좌는 지성소에 있는 시은소(mercy seat)를 말한다. 짐승의 피가 아닌 그리스도의 피가 이미 뿌려졌다.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찢어졌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뿌림을 통하여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아가게 되었다. 왜 나아가야 하는가? 긍휼하심을 얻고,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받기 위해서 나아가야 한다. 긍휼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주시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벌을 받을 것이라는 불안함으로가 아니라 담대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호의를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함과 함께 전능하신 아버지의 도우심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다. 포사이스(P. T. Forsyth)는 기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모든 죄의 근원이라고 했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진지한 믿음의 기도에 바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런 태도는 교만의 극치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실제적 무신론의 죄를 최악의 형태로 범하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만 그분 없이도 다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기도의 자리를 소홀히 여기는 것은 중대하고 시기 적절한 자원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3. 우리가 참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안식을 맛보고 살아가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안식을 맛볼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의 안식을 맛볼 수 없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보장이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5장 영적 무지
1.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는 것은(4:16) 절대적으로 중보자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점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대제사장의 존재를 설명하고 주님은 대제사장과 비교할 수 없는 큰 대제사장이심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이 더욱 담대하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도록 격려한다. 먼저 기자는 구약의 대제사장의 조건과 자격을 말한다. 무엇보다도 대제사장은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4) 연약한 자들을 동정할 수 있어야 한다(2). 구약의 대제사장은 비록 자신이 희생제사를 담당하긴 하지만 그 자신도 죄인이었다. 대제사장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3) 자기도 제사가 필요한 존재였다.
2. 그리스도도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성부)께서 저더러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고 하심으로 대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으셨다(5). 주님은 아들이면서(5) 동시에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다(6). 그는 아론의 계열에 속하신 것이 아니라 제사장이요, 왕이었던 멜기세댁의 계열에 속한 대제사장이시다(6). 주님께서는 또한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으셨다”(7).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깊은 기도를 통해 십자가를 감당하실 수 있는 평안을 주셨고, 이것은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영광을 다시 얻으실 것이라는 확신으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주님이 여기서 보여주신 모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 즉 ‘공경하는 복종’(reverent submission)이다. 이 결정적인 시간에 주님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과 뜻을 거역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또한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사 온전하게 되셨다(8~9). 이는 주님께서 순종을 모르다가 배우셨다는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그의 순종의 필연적인 부분이었다. 온전하게 되셨다 함도 이전에는 불완전하다가 온전하게 되셨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삶과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세주가 되기에 온전히 합당하게 되셨다는 뜻이다. 순종은 주님만이 아니라 당연히 우리에게도 요구된다. 9절은 ‘믿는 자에게’라고 하지 않고, ‘순종하는 자에게’라고 한다. 믿는다는 것은 곧 순종한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매력적이지 않다. 하지만 성경은 어디에서도 즉각적이고 단회적인 순종으로 뭔가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신앙은 지속적 순종이다. 주님은 우리의 합당한 대제사장이 되시기에,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3. 히브리서 기자는 더 이상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음을 유감스럽게 여기면서 이것이 히브리서를 읽는 수신자들의 무지 때문이라고 말한다. ‘듣는 것이 둔하다’는 것은 게으르다는 말이다(11). 6:12에 ‘게으르지 아니하고’와 같은 단어다. 즉, 말씀을 배우는 일에 게으른 태도를 가진 자들을 히브리서 기자는 책망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서 어른이 되어야 마땅한데 아직도 어린 아이이고, 선생이 되어야 마땅한데 아직도 학생인 사람들을 책망한다(12). 이제는 이들이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가르쳐야 할 텐데,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도움과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이들은 영적 무지로 말미암아 교리적으로, 윤리적으로, 영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른다. 그러나 의의 말씀을 경험한 자들은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다(13~14). ‘의의 말씀’은 바른 교훈, 바른 교리를 가리킨다.
4. 신자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주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사역을 알면 알수록 더욱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기도의 삶이 깊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신자의 무지는 모든 분별력을 잃게 하고 자라지 못하게 하며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영적 어린 아이로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과 돌봄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의 말씀을 배우고 경험하는 일에 게으르지 말라. 이 일에 게으른 자는 결코 깊은 기도 가운데로 나아갈 수 없으며 온전한 신앙으로 설 수 없다.
히브리서 6장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는 인내하는 신앙
1.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떠나라는 말씀은 그것이 나빠서가 아니다(1). 그리스도 도의 초보만을 계속해서 붙들고 있으면서 더 깊고 성숙한 영적 지식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거나 나아가는데 게으른 성도들을 향하여 기자는 더 성숙하고 더 깊은 데로 나아가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란 초대교회 당시에 강조했던 기본적인 가르침이었다. 가령, 죽은 행실을 회개함,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세례 또는 씻음, 안수, 죽은 자의 부활, 영원한 심판과 같은 주제들이다. 유대교 배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은 행실을 회개한다는 것은 아마도 행위 구원을 위한 자기 노력을 의미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에 그들에게 이런 문제는 중요했을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회개 만으로는 안 되고 믿음의 적극적 차원이 요구된다는 강조였을 것이며, 세례와 씻음은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이 가르치신 세례 사이의 혼동과 같은 문제들에 대한 가르침을 의미할 것이다. 안수는 임직을 위한 안수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기독교회에 들어올 때 안수 받던 초대교회의 관습을 의미할 수도 있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은 종종 초대교회가 종말론으로 혼동을 가졌던 것과 관련한 종말론적 가르침을 의미할 것이다. 이런 문제들에 매여서 더 이상 깊은 경건의 지식으로 가지 못하고 영적 어린 아이에 머무는 것을 기자는 책망한다.
2. 기자는 이어서 박해와 핍박 속에서 신앙을 저버린 사람들 즉 배교자들에 대해서 말한다. 배교자의 특성은 세 가지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경멸했고(4~5)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했으며(6)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렸다(7~8). 이 부분은 난해하다. 하나님의 선물은 한 번 비췸을 얻고(세례를 의미할 수 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성찬을 의미할 것이다)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것이다. 존 오웬은 이 모든 것들은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이라고 설명함으로써 구원하시는 사역과 구분하였다. 이것들은 잠시 하나님의 선하심과 말씀과 은혜를 경험하지만 지속적인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은혜 아래 있다가 떠난 자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 13)나 백보좌 심판의 말씀(마 25)은 본문의 해석에 도움이 된다. 우리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살피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도 마찬가지다(고후 13:5). 우리의 영적 안전은 회심 체험의 강도나 회심의 순간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에 달려 있지 않다. 열매가 열쇠다(마 7:14).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다루었던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분별과 같은 주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다.
3. 비록 배교자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신실하게 믿음 안에 머물렀다. 이제 기자는 서신의 성격을 경고에서 격려로 돌린다. 많은 사람이 믿음을 저버렸지만,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한다”고 말한다(9). 그러나 그 더 좋은 것의 원인은 성도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기인하는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은 의로우시다(9~10).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보여준 섬김과 행위, 그리고 그것이 흘러나온 원천인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을 보고 아시고 그것을 갚아주실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은 관대하시다(11~15). 그들이 사랑 안에서 나타냈던 그 동일한 부지런을 이제는 믿음과 소망의 영역에서 끝까지 나타내야 한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본을 소개한다. 그는 어려운 삶 속에서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의 약속을 붙잡고 산 인물이다. 이 점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가르치는 믿음은 인내하는 믿음이다. 셋째로 하나님은 의지할 만한 분이시다(16~20). 하나님은 약속을 주셨을 뿐 아니라 믿음이 약한 백성들을 위하여 맹세까지 하심으로써 자신의 말씀의 확실성을 확증해 주셨다. 아브라함의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신 하나님을 생각해보라(창 15). 하나님은 당신의 성품을 두고 맹세하셨다. 맹세로 주신 약속과 함께 하나님의 신실한 성품을 성도들은 기억해야 한다. 2세기 말에 닻은 성도들의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가리키는 의미심장한 상징이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구자가 되셨다. 우리는 그를 따라서 하늘의 성소,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기자는 이 영혼의 닻 같은 소망을 붙잡으라고 권면한다(19,20).
4. 1세기 신앙의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키려는 자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후한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 격려는 절대적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런 격려는 중요하다. 목회자의 격려도 필요하고, 성도 간의 서로를 격려함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격려는 성경적이며 진리에 부합해야 한다. 이런 격려 속에서 성도는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며 거기 영혼의 닻을 내리고 끝까지 인내함으로 주님을 따라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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