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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연구

히브리서 1-3장

by 은총가득 2020. 3. 23.



히브리서 1장 신앙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

1. 1세기의 어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동등됨을 이상 인정할 수 없어서 신앙을 포기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의 첫 과제는 하나님의 아들을 설명하는 것이고 그분을 높이는 일이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아들은 선지자들과 비교할 수 없는 우월한 분이심을 기자는 몇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셨고 그를 통하여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2).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고 본체의 형상이시다(3). 그분은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는 분이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속죄제물이 되셨으며 하나님의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4). 여기 묘사된 그리스도는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의 모습이다. 구약의 기름부음 받은 자(히브리어로는 메시아,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성취하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다.

2. 히브리서 기자는 이어서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우월하시다고 말한다(4~14). 이것은 초대교회에 일어난 천사숭배와 같은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말한 부분일 것이다. 예수님은 천사들처럼 단순한 전달자(messenger)가 아니라 말씀 자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보다 우월한 이름을 지니셨다(4~5). 천사들은 경배자들이지만, 예수님은 천사들의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으로서(시 97:7) 우월한 위엄을 지니셨다(6). 천사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목적 수행을 위한 바람과 불꽃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우월한 본성을 지니셨다(7). 그리스도는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시다(8a). 천사들은 유혹에 직면해본 적이 없지만 그리스도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을 위해서 사셨고 흠 없는 삶을 통해 의의 자질들을 몸소 보이셨다(8~9). 천사들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지만 그리스도는 창조주시다(10~12). 그리고 그리스도는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3, 13). 천사 중 아무도 하나님 우편에 앉으라고 초청을 받은 적이 없다. 천사들은 성도를 섬길 뿐(14) 아무도 구원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주가 되신다.

3. 히브리서 기자가 박해와 거짓 교훈 속에서 흔들리는 성도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값싼 위로가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성도들의 눈을 그리스도께 주목하게 한다. 신앙은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묵상함으로 하늘의 위로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우리를 순간만이 아니라 영원히 지켜주는 힘이다. 히브리서 1장은 이런 면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우리 모두를 초청한다.


히브리서 2장 표류하지 않는 신앙의 중심

1.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함으로 믿음에서 표류하지 말라고 권고한다(1). 믿음에 견고히 서는 길은 ‘들은 것’ 즉 복음의 모든 진리를 더욱 붙잡고 그것을 더욱 간절히 주목하는 것이다.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이라는 말은 목적 없이 떠내려감으로써 정박할 곳을 놓쳐버리는 배를 묘사하거나 또는 손가락에서 빠져버린 반지 혹은 깨진 항아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묘사하는데 사용되는 말이다. 위대한 복음의 진리도 이와 같이 놓쳐버릴 수 있다. 말씀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다른 물살에 휩쓸려 무한한 가치를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들은 것’(복음의 진리)을 마음에 깊이 그리고 굳게 간직해야 한다. 모든 들은 것을 꽉 붙잡으라!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은 천사의 중보를 통해 받은 것이라고 유대인들은 이해했고 신약의 저자들에게서도 이것이 발견된다(살 3:19; 행 7:53).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 공정한 처벌을 받았다면, 천사보다 우월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전해주신 ‘이같이 큰 구원’의 복음을 경멸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transgression and disobedience)’에서 전자는 선을 넘어가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는 것을 말한다(2). 즉, 전자는 지나친 범죄(an overt sin of commission)이고 후자는 소극적 범죄(a sin of omission)다. 이토록 중요한 구원의 복음의 메시지는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다양한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여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 합당한 반응—순종—을 보여야 한다. 많은 사람이 이 메시지에 헌신했다. 히브리서 기자도 직접 예수님이 전하는 메시지를 들은 사람은 아니었다(‘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3절). 그와 독자들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그 말씀에 헌신하여 확증하여 준 것을 받았다. 그러나 말씀의 진실성은 그것을 우리에게 전해준 사람들의 증언에만 달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표적과 기사 그리고 여러 능력들로 그 말씀을 확증하셨다(4). 이것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그리고 사도들의 기사에서 나타난 일들이었다. 이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결단을 요구한다.

2. 오는 세상은 다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증거한다(5~13). 당시 쿰란 종파는 두 명의 메시아적 인물 즉 왕과 제사장의 역할을 각각 맡게 될 인물들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 둘은 모두 종국에는 천사장 미가엘의 권위에 종속할 것이라고 믿었다. 즉, ‘장차 오는 세상’(5)은 결국 천사들의 권위에 종속하게 된다는 신학적 관점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정면으로 이 사상을 반박하면서 세상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종속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장차 올 세상’은 무엇인가? 그 세상은 성격상 1:2의 ‘이 모든 날 마지막’과 같은 것이다. 물론 미래에 속한 것이지만, 그 미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즉 그 세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완전히 새로운 세계 질서다. 구원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아들은 새 시대의 개막을 여는 분(an inaugurator)이시다.

3. 구원의 새 시대를 여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 그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17절). 히브리서 기자는 천사보다 우월하시지만 잠시 천사보다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예수님은 기꺼이 좌절과 고난으로 위협받는 우리의 인성을 짊어지셨다. 시편 8편을 인용하여 기자는 예수님이 우리의 인성에 전적으로 동참하셨음을 보여준다. ‘예수를 보니’(9)라는 구절은 시편 인용의 절정이다. 주님은 인성을 입으셨으나 죄와 반항의 특성을 가지지 않으셨지만 우리의 고난은 취하심으로 고난으로 허우적대는 우리 연약함을 아신다. 주님은 죽음을 맛보셨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가장 비참한 상태까지 경험하셨다(9).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의 선구자가 되심으로 그를 아는 자들로 두려움을 이기게 하신다.

4.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어서 말한다(10).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구원의 창시자가 되실 충분한 자격을 얻으셨는데, 구원의 길은 고난을 통한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고난을 통해서 온전함에 이르게 되셨다. 성화는 히브리서의 주요 주제 중 하나다(10:14,29; 13:12). 우리는 정결케되었을 뿐 아니라(1:3) 이제 그분과 함께 거룩해지는 은혜를 입었다. 우리를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하셨고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으며 함께 하나님의 집에서 나누는 교제를 기뻐하셨다(11~12).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제요, 자녀가 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을 누릴 수 있다(13).

5. 히브리서 기자는 또한 우리의 해방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한다(14~18). 그리스도는 사망으로 사망을 이기시고 마귀를 정복하사 죽음을 두려워하는 우리들을 그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시켜주셨다(14~15). 성도는 이 은혜를 삶에서 누려야 한다. 어떤 이의 말이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죽기를 꺼려하는 이는 충분히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아직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했으며, 이 세상을 장차 올 세상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기꺼이 죽을 수 없는 이가 그리스도인으로 불려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 자비를 나타내심으로써 우리를 도우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자비하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으로서 백성의 죄를 구속해주셨다(17). 그는 우리를 향하여 자비하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충성되시다. 이것이 사람과 하나님을 향한 제사장 사역의 온전한 양면이다. 우리와 같이 시험을 당하시고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시험 받는 우리 연약한 인간들을 능히 도우신다(18). 그는 능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그 능력을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 당신은 매일의 유혹과 위험 속에서 이런 그리스도를 날마다 의지하고 살아가는가? 당신은 주께서 주신 복음의 모든 진리를 더욱 붙잡음으로써 신앙의 표류를 막고 있는가?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라.


히브리서 3장 예수님만 바라보는 인내하는 믿음


1. 기자가 주는 목회적 권면은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 초점을 고정하라는 것이다(1).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통해서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12:2~3). ‘깊이 생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마음을 어떤 것에 부지런히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Hughes). 기자는 의도적으로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라는 인간 이름을 강조한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고통과 시련과 유혹을 가지셨던 분이다. 그러나 그는 승리하셨다. 그는 계속해서 우리를 생각하시고 동정하신다. 율법의 수여자 모세는 ‘충성된 자’였다(3:2,5). 그러나 예수님은 ‘더욱 영광 받으실 만 하다’. 모세는 일시적인 ‘사환’이었지만 그리스도는 영원한 아들이시다. 여기 ‘사환’(servant)은 노예(slave)와는 구별되는 나름의 권위와 자유를 가진 존재다. 모세는 장래에 나타날 것 즉 장차 주어질 더 낫고 더 충분한 계시...를 증거하는 증인이었던 반면, 그리스도는 계시 그 자체시다(1:1~3). 모세는 하나님을 사랑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모세의 길을 따르기 위해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은 일시적인 것을 위해 영원한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회당에서, 유대 사회에서 쫓겨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여전히 그들이 집의 주인이 되시는 그리스도께 속했음을 확신시켜줌으로써 위로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2. 신자들에게는 약속된 구원의 안전과 인내 사이에 균형이 요구된다. 신자의 안전은 보장된다. 우리는 그분의 집이다(6). 우리에게는 도우시는 대제사장이 계시다. 우리의 확신의 근거는 우리 소망을 우리가 하는 일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신 일에 두는 것이다. 신자는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아야 한다. “지속적인 인내는 실재에 대한 테스트(the test of reality)다”(F. F. Bruce).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의 집에 있지만 그 믿음이 실재가 되려면, 처음에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 이상이 요구된다. 끝까지 담대하며 더 나은 것들에 대한 분명한 소망 안에서 기뻐하는 단호한 믿음이 요구된다. 구원 얻는 믿음은 인내하는 믿음이다. 우리를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분은 영원히 성실하시며 당신의 백성을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3. 신약의 기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새로운 출애굽 사건으로 여겼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출애굽(개역개정에 ‘별세’로 번역됨)’으로 묘사되었고(눅 9:31) 유월절 양으로 표현되었으며(고전 5:7), 고전 10:1~10은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에 연결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발은 좋았지만 믿음 안에서 계속 나아가지 못했고 따라서 약속된 안식에 들어가는 일에 실패했다. 확실하게 출발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의 출발이 강렬했다고 해도 계속되는 믿음과 충성된 순종이 뒤따라야 한다. 히브리서는 배교의 문제를 다룬다. 적잖은 신자들이 흔들림을 경험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끈질긴 믿음을 발휘하라고, 그들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끝까지 지켜주는 당신의 능력을 의지하라고 하신다. 그 안전은 우리 자신도 ‘끝까지 견고히 잡을’ 것을 요구한다(14절). 시 95편을 기자는 여러 차례(3장에서 2번) 인용한다. 이 시편은 1세기 회당 예배에서 안식일마다 정기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인데, 영원한 안식이란 주제를 다루기에 적합한 본문이다. 이 시편은 ‘예배’와 ‘충성’, ‘믿음과 순종’을 나뉠 수 없는 것으로 연결한다. 기자는 ‘내가 그 세대에게 노하여’라고 해야 하는데,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라고 바꾸어 인용함으로써 현재의 그리스도인들도 강퍅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경각심을 주는 것이다(10).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해야 한다(12). 이것은 하나님의 변화시키시는 은혜와 계속적인 도움이 없을 때의 인간 상태에 대한 암울한 묘사다.

4. (말씀을 들으라.)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3:7,15; 4:7).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또 인격적으로 읽으면서 삶을 변화시키는 그 메시지를 묵상해야 한다. 이것은 체계적인 성경읽기와 기도를 통해 생생하게 될 수 있다. 또 우리는 말씀을 공적으로 들어야 하고 함께 공부해야 한다(히 10:25). (말씀을 믿으라.) 말씀을 듣는 것과 믿는 것은 별개다. 믿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12). 조상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광야에서 죽었다(19). 말씀에 자신의 믿음을 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4:2). (말씀에 순종하라.)


또한 즉시 행동해야 한다.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은 상급을 잃어버렸다(18). 순종은 히브리서의 핵심사상이다. 예수님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는 것을 기억하라(5:8). (말씀을 나누라.) 문자적으로 ‘매일’ 서로를 만나 하나님의 경고와 약속들을 반복해서 권면할 것을 강조한다(13). 그렇게 할 때 거짓된 죄의 매력과 속임수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공동체적인 책임을 모두가 감당해야 한다. ‘권면하여’는 강한 격려다. 이것은 전쟁을 앞두고 확신에 차서 군인들을 고무하는 대장의 역할을 가리킨다. 신자들은 매일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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