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의 영원성(10:1-18)
a. 완전하고도 영원한 새 언약 1-10
b. 새 언약의 우월성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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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4:14 이하에서 전개된 논제의 결론적인 부분이다. 여기서는 그리스도 제사의 단일성을 보다 충분하게 재강조하는 동시에 그 제사의 영원성을 밝히 드려내고 있다.
a. 완전하고도 영원한 새 언약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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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적인 제사는 불완전할 뿐 아니라 계속 반복되어야 한다(1-4). 또한 그것은 계속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직도 남아있는 타락한 죄의 본성의 뿌리 때문에 다시 범죄하게 된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경에는 이미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가 예언되어 있다(5-7; 시 40:8). 그리고 마침내 이 예언은 성취되어, 그리스도가 오셔서 불완전한 제사를 패하고 완전한 제사를 완성하셨다(8-10). 하나님께서 율법적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과 그 아들의 뜻을 받아 주시는 것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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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1 개역 성경에는 'ga;r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8:3-5, 23-26과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 저자는 본문에서 `율법 the law'과 '장차 오는 좋은 일 a shadow of good things to com'의 대조를 통해 율법의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다. '율법'은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제사 제도를 포함한 모든 구약성경을 의미한다.
저자는 본절에서 율법을 두 가지로 정의한다.
(1) 그림자. "그림자 Skia;n 스키안, a shadow"는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에서 유래하는 '비실제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초대 교회의 종말론적 특성을 반영한다. 율법은 미래의 실체를 증언하는 과거의 증거이다. (2)참 형상이 아님. “참 형상 eijkovna tw'n pragmavtwn 에이코나 톤 프라그마톤, the very image of things”은 문자적으로 ‘그러한 실체들의 형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비슷하거나 닮은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실체를 완전히 구현한 화신을 가리킨다. 율법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림자에 불과하며 초월적인 실체 자체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한편 율법의 대조 개념인 “장차 오는 좋은 일 tw'n pragmavtwn ajgaqw'n 톤 프라그마톤 아가돈 of the good things to come”과 동일한 의미로 새 언약으로 이루어진 새 시대의 축복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장차 오는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서(9:11) 이루신 구속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곧 영원한 구원과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의미하며 동시에 불완전한 옛 언약이 성취할 수 없는 완전함을 뜻한다(5:9).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 본문은 참 형상의 그림자인 율법의 한계에 대한 진술이다. “늘 eij" to; dihneke;" 에이스 토 디에네케스, continually”의 어순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해마다'를 수식한다(NIV). (2)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를 수식한다(NEB).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헬라어 본문의 어순도 '에이스 토 디에네케스'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를 수식하고 있으며 본문이 옛 언약인 율법의 한계성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옛 언약인 율법은 해마다 속죄일에 동물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였지만 그 효력은 일시적이며 불완전한 것으로 죄를 제거하는 데에 아무런 효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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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 본절은 율법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논증이다. 본절의 “죄 suneivdhsin aJmartiw'n 쉬네이데신 하마르티온, conscience of sins”는 문자적으로 '양심의 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율법이 정결케 할 수 없었던 내적인 죄를 가리킨다. 율법에 의해서 행해진 희생 제사만으로는 외적인 죄만을 정결케 할 뿐 내적인 죄인 양심의 죄는 단번에 완전히 정결케 할 수 없었다(9:9). “정결케 되어 kekaqarmevnou" 케카다리스메누스, purged”는 완료 분사로서 최종적인 정결을 성취할 수 없었다. 만약 율법이 완전하여서 온전히 정결케 할 수 있었다면 매년 속죄일에 희생 제사를 반복적으로 드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매년 속죄일에 희생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은 율법의 불완전성을 나타내며 한계성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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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 대제사장이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백성들은 이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죄를 인식하게 되었으며(민 5:11-15)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나 징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저자는 옛 언약 하에서의 제사의 역할이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과 새 언약에서 약속을(8:12) 대조시켜서 반복적인 제사와 그리스도를 통해서 단번에 드린 제사 사이의 차이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생각나게 하는 것이 있나니 ajnavmnhsi" 아남네시스, there is a remembrance again made”는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을 베푸시면서 당신을 '기념하라'하실 때에도 사용되었다(눅 22:19; 고전 11;24,25). 두 언약에 사용된 `아남네시스'는 옛 언약의 제사가 죄를 기억하고 그것을 용서받기 위해 매년 드려져야 하는 반면에 새 언약에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더 이상 죄를 기억지 아니하심을(렘 31:34) 비교하여 옛 언약의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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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4 이는 황소와 염소의 죄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 '황소와 염소의 피 the blood of bulls and goats'는 죄를 제거함에 있어서 '피'를 전제로 해야 함을 나타낸다(9:22). 이처럼 속죄일에 드려진 동물의 희생 제사로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교제하는 것을 방해하는 외적인 죄를 깨끗이 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으나 양심의 죄까지 깨끗께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황소와 염소의 피'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형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본절에서 희생 제물의 피를 통해서는 죄를 제거하는 것이 불충분한 것임을 드러냄으로 죄를 완전히 제거해 주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피를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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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5,6,7 본문은 시 40:6-8(시 39:6-9, LXX)의 인용이다. 시편은 본래 다윗의 시였으나 저자는 본문을 인용하면서 기독론적으로 해석하여 다윗에 관한 내용이 아닌 그의 자손 즉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으로 이해하고 있다. 저자는 이 인용을 통해서 옛 언약 하에서 드렸던 희생제물보다 새 언약 하에서 드려진 그리스도가 더 탁월함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성육신의 이유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 '세상에 임하실 때 when He came into the world'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들어오실 때 즉 성육신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다음에 언급되는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a body You have prepared for Me'와 연관된다. 저자는 이런 표현을 통해서 다음 인용문들의 화자(話者)가 다윗이 아닌 그리스도 자신임을 드러낸다.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 저자는 본문에서 옛 언약을 나타내는 네 가지 종류의 제사를 언급하고 있다. 네 가지 제사 중 “번제 hl;[('olah) 올라, burnt offerings”와 “속죄제 taF;j' (chatta'th) 해타트, sacrifices for sin”는 구약성경에서 나타나는 다섯 종류의 제사 -번제 burnt offerinfg 속죄제 sin offering, 속건제 Guilt offering, 화목제 peace offering, 소제 Cereal offering에 속하며, “제사 jb'z< (zebach) 제바흐, sacrifices”는 종류에 상관없이 동물 희생 제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특별히 구약성경에서 화목제와 연관되며 “예물 hj;n]mi (minchah) 민하, offering” 역시 일반적으로 제사를 가리키나 레위기에서는 곡물 제사 즉 소제와 연관되어 사용된다. 이러한 네 가지의 제사는 레위기에 묘사된 주요한 종류의 제사들을 모두 내포하는 것으로 옛 언약을 대표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불만족은 제사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단순히 의식적인 행위만을 반복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 결과 하나님의 불만족은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드리는 새 언약을 맺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삼상 15:22; 시 40:6; 50:8-10; 51:16-17; 사 1:10-13; 66:2-4; 렘 7:21-24; 호 6:6; 암 5:21-27). 하나님께서 만족해하시고 열납하시는 제사는 자발적으로 드리는 마음에서 비롯된 제사이다.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 본문은 앞서 언급된 `세상에 들어올 때'와 연관된 것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능동적인 순종이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희생시켜 드린 제사가 율법에 의해서 드려진 동물 희생 제사보다 질적으로 우월함을 시사한다(8-10절). 한편 헬라어 본문은 70인역의 영향을 받아서 맛소라 본문과는 약간 상이하다. 맛소라 본문(MT)의 '귀'(시 40:7)가 70인역이나(시 39:7) 본문에서 `몸'으로 변화된 것에 대해서 혹자는 잘못 번역된 것이라고 주장하나 70인역자들이 일부러 '귀'를 '몸'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70인역자들이 위와 같이 해석한 것으로 보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구약 시대에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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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뚫어 주인에게 평생토록 종노릇하겠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2) 혹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귀로 들어 몸으로 행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3) 혹자는 신체의 일부인 귀가 신체 전부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세 가지 견해 중 첫번째 견해를 제외한 나머지 두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 “두루마리 책 kefalivdi biblivou 케팔리디 비블리우, the volume of the book”은 문자적으로 두루마리의 봉을 가리키는 것으로 토라 즉 모세 오경을 포함한 모든 구약성경을 의미한다. 저자는 율법에 기록된 사실을 언급함으로 그리스도께서 성경 전체의 내용을 성취함은 물론 율법보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음을 시사한다(막 14:49). 한편 본문은 70인역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헬라어 본문에는 70인역에 언급되어 있는 두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 “나의 무”와 “내가 원하옵건데 에불레덴”이다. 저자는 70인역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내용을 생략시킴으로 인용문 전체를 보다 더 자연스럽게 기독론적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성취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세상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한다.
본 문 | tou' poih'sai oJ qeov" to; qevlhmav sou 투 포이에사이, 호 데오스, 토 델레마수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I have come--In the volume of the book it is written of Me--To do Your will, O God.(NKJV) |
LXX 시 편 39:9 | tou' poih'sai to; qevlhmav sou oJ qeov" mou ejboulhvqhn 투 포이에사이 토 델레마 수, 호 데오스 무 에불레덴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I was mute, I did not open my mouth, Because it was You who did it.(NKJ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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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8,9 본문은 5-7절의 인용문에 대한 설명으로 저자가 그 본문을 본서에 인용한 강조점을 나타낸다.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 앞서 언급된 인용문(5-7절)에서는 “제사와 예물 qusivan kai; prosfora;n 되시안 카이 프로스포란, sacrifies and offering”은 단수로(5절), “번제함과 속죄제 oJlokautwvmata kai; peri; aJmartiva" 홀로카우토마타 카이 페리 하마르티아스, burnt offerings and offerinf for sin”는 복수로 나타난다. 반면에 본절에 언급된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 Qusiva" kai; prosfora;" kai; oJlokautwvmata kai; peri; aJmartiva" 뒤시아스 카이 프로스포라스 카이 홀로카우토마타 카이 페리 하마르티아스, Sacrifices and offerings and whole burnt offerings and (sacrifices) for sin”는 모두 복수이다. 본절에서 사용된 복수는 총체적인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네 종류의 제사가 구약성경에 언급된 모든 종류의 제사를 대표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저자는 단수에서 복수로의 변화와 반복을 통해 율법 속에 나타난 희생 제사들이 근본적으로 부적당함을 나타내고 있다. 즉 율법에 나타난 희생 제사들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뜻과 죄 문제에 대한 결정적인 해결책은 아니었으며 단지 방법만을 제시하는 부분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 7절의 “말하기를 에이폰”은 부정 과거인 반면에 “말씀하시기를 에이레켄”은 완료 시상이다. 이러한 시제의 변화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의 지속성을 시사한다. 한편 본문에 나타난 인용문 즉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는 시편에 나타난 그리스도에 대한 본질적인 언급임을 의미함과 동시에 자신을 희생시킨 그리스도의 제사가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희생 제사임을 시사한다.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 ‘아나이레이 토 프로톤 히나 토 듀테론 스테세’ 헬라어 본문은 구조적으로 교차 대구법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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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심 그 첫 것 하심이라 그 둘째 것 세우려'
He takes away the first that He may establish the second.(NKJ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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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본문 자체를 교차 대구법으로 기록하면서 앞서 언급된 시편 인용의 목적을 기술하고 있다.
(1) 첫 것: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첫 것'은 8절에서 묘사된 율법과 희생 제사를 가리킨다. 희생 제사는 율법에 의해서 규정된 제사로서 부분적인 것이며 불완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첫 것은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식적인 행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2) 둘째 것: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삶 전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된 하나님의 뜻이라 하겠다. 둘째 언약 즉 새 언약이 효력이 있고 유용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드리신 희생 제사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언약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세우신 새 언약은 옛 언약인 첫 것의 폐지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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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목적인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 대한 방법과 결과를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 '방법'은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는 것이다. “드리심으로 프로스포라스”는 70인역에서 희생 제사를 드릴 때 사용된 용어이다(LXX, 시 39:7; 단 3:38). 저자는 '프로스포라스'를 사용하여 효력이 없는 동물 희생 제사와 온전하고 효력있는 희생 제사 즉 그리스도의 몸을 드리는 인격적인 제사를 비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몸을 드리신 것은 완전한 것으로 더 이상 반복될 필요가 없는 '단번에' 드린 제사이다. “단번에 에파팍스”는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 사건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시사함과 동시에 구속 사역의 완전성을 암시한다(7:27; 13:12). 한편 그 '결과'는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거룩함을 얻었노라'는 말은 하나님께로 성별됨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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