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의한 삶(8)
주님을 아는 것과 믿음
롬4:17
주님을 아는 것-> 신앙의 본질(핵심)로써 신앙의 필수.
신앙의 본질인 주님을 아는 것과 믿음의 관계
1.하나님을 아는 만큼 믿을 수 있다.
1)율법주의 신앙안에서는 어떤 참다운 믿음도 가능하지 않음
2)하나님을 아는 것이 믿음을 위한 필수이다.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교리적
하나님을 아는 것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 ->성령의 조명으로 가능
출34:5-7
하나님께서 모세 앞에 영광으로 임하심, 하나님 자신을 모세에게 계시하심.
우리는 이것을 읽을때 하나님에 관해서 듣는 것, 그러나 모세가 그날 경험한 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뵙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이론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 경배하고 더 계시기를 열망하고 사모함. 이처럼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르다.
믿음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믿으면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사랑,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만약에 이것이 믿음이라면 바리새인들은 엄청 믿음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5장에서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는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성경이 말한 믿음은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전 존재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이 말한 믿음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참다운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하나님에 관해 아는 지식을 하나님을 잘 아는 것으로 착각해 버립니다. 여기서는 절대 믿음이 자랄 수 없음.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로이드 존스 -> 죽은 전통주의라고 부름.
이사야29, 30장에 잘 나타나있음.
사29,30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고 회복되는 과정을 기록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이 얼마나 율법주으로 타락했는가를 볼 수 있음.
29: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예수님이 막7:6절에서 이말씀을 인용하며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심
막7: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당시 이스라엘의 신앙상태인데 입술로는 나를 존경했다 ->입술로만 나불나불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수많은 의식이 있었음(번제와 희생, 기도) ->이사야 1장
그런데 문제는 신앙의 본질이 없는 의식으로 가득찬 율법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결과 30장 1-3절
1,2-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찐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 죄에 죄를 더하도다
3-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
우리는 이런 성경을 읽으면 아~~당시 사람들은 참 믿음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시 그런 상황을 당하면 달라집니다. 여러분이 유다의 왕이 었다고 생각해보세요.
당시상황 -당시 이스라엘나라 조그만한 나라, 동쪽 -> 바벨론이 등장하여 니느웨가 패망, 이때 이스라엘은 풍전등화였습니다. 바베론의 세력앞에 이스라엘은 너무 초라한 거예요. 왕 자신만 죽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 백성이 죽임을 당하고, 약탈을 당하고, 여인들은 노리게 감이될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이 왕이 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시 이스라엘 왕 회의를 했겠지요. 그라고는 남쪽의 애굽과 동맹을 맺고 바벨론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이사야 30:1-3말을 합니다.
화있을 찐저라고 말하고, 패역한 자식이라 말하고, 나로 말지 암지 않았다 말하고, 스스로 강하려 하였다하며, 바로의 새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수욕이 될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기 이렇게 말했을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당신은 선지자니까 그런말을 하지 내 입장이 되어보면....그런데 환경이 절박했을지 모르나 문제는 그 상황에서 믿음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똑 같은 유대나라에 여호사밧 임금이 있었습니다. 3나라가 연합하여 처들어옮, 이때 여호사밧이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만 신뢰함, 온 백성으로 엎드리게 함.
대하20:12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이때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15절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그러니 너희는 싸울 것이 없고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말씀할 때 그 앞에 경배하고 성가대를 조직하여 찬송하며 나아감, 찬송을 시작할 때 서로 죽이게 하므로 승리하게 하심
똑같은 상황인데 다른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절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믿음은 하나님을 전 존재로 신뢰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에서는 하나님에 관여 알면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리에게 아무런 힘도, 능력도 될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싸인이 있는데
1)순종하지 않게 됨 ->특히 선별적 순종
2)하나님을 대치하게 됨, 불신하게 됨 -> 하나님을 떠난 증표.
대하15
하나님을 찾는다(2절) ->하나님 그분 자신을 구하는것(하나님 사랑하기를 구하는 것) -> 하나님을 구할려면 마음을 다하여 구해야함 ->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금 나의 현 시점에서 나의 유일한 열망인, 나의 유일한 목표인 그 마음으로 주님을 알기를 구하는 것 -> 이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야 만난바 됩니다 -> 거기에 생명이 있음 -> 하나님이 생명이시기 때문에 -> 이 때 평안 주심 ->
여기 평안은 히브리어로 ->살롬으로 마음만의 어떤 평안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전영역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므로 있는 평안을 말함, 즉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에 평안이 왔음. 하나님을 찾으니 하나님이 오셔서 생명이 넘침.
그런데 언제까지 아사왕 35년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때 하나님을 떠나기 쉬움.
16장 1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음 ->불신 ->하나님과 친밀한 가운데 있지 않기 때문에
7절 -처음 들을때는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역사는 그대로 되었음.
9절 -하나님을 향한다 -> 하나님을 찾는다 ->전심으로 찿아야함.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믿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 믿음은 전 존재를 걸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친밀함에 있지 않으면 믿음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본질 가운데 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떠나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음.
2.하나님을 믿는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믿을수 있고 하나님을 믿는 만큼 하나님을 알 수있음
롬4: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믿음이 있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함. 말씀이 없으면 믿음은 시작도 되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계획을 세우고 믿습니다~~~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앞서 가시며 행하심을 보이심 -> 우리를 그 일로 초청하심, 이 초청에 순종하기 위해서 믿음이 필요함. 주님을 따라가려면 믿음으로 전적 신뢰해야 따라갈 수 있음.
오늘 아브라함에게 먼저 말씀하심, 그리고 그 하나님을 신뢰함.
오늘 아브라함이 신뢰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1)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2)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 ->예언적 완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실것이기 때문에 이미 이루신 것처럼 말씀하신 것
여호수아 -> 요단강 이편에서 여리고 성을 너희에게 주었다 ->완료형으로 말씀 ->예언적 완료
아브라함의 믿음이 약해지지 않은 이유?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이심을 신뢰한한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의로, 기쁨으로 받으셨다고 하심.
처음에 아브라함도 실수함(하갈을 통한 이스마엘탄생, 가나안에서 기근으로 애굽으로 내려감 사라를 누이라 속임.. 실수와 약함을 통하여 더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음의 사람으로 새워짐)
그리하여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라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 -> 믿음으로 순종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함. 부르심의 소망대로 세워가심.
허더슨 테일러 ->자기의 마음을 지킬려고 하는 것 까지 내려놓고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함.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을 믿는 만큼 순종하게되고 순종하는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됨
3.믿음에 의한 삶을 위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필수.
왜? 하나님을 아는 만큼 그분을 신뢰할 수 있고
하나님을 믿는 만큼 그분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음.
때문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할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필 수 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신뢰할 수도 없음
왜? 율법주의에서는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을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율법주의 가치관에서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실제적으로 알 수 없기에 믿음이 있을 수 없음.
예) 출14장 홍해앞에서의 사건.
그 환경은 한마디로 절망적이었습니다. 때문에 원망과 불평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불평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백성들을 향하여 나를 불신했다, 하나님을 대적했다, 하나님의 노를 활활 터오르게 했다, 악심을 품었다, 하나님을 배반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더했으면 더했지
그런데 그들은 믿음을 갖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음. 왜? 믿음은 배짱에서 나오지 않음, 성경 내용을 그대로 믿는데서 나오지 않음.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데서 나옴. 하나님을 모르지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불신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믿음이 환경에 따라 좌우됨, 홍해건너고 나서는 난리.... 마라에서는 또 원망...
왜? 믿음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환경에 있기 때문에...
참다운 믿음은 환경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 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르라엘 백성들은 믿음을 가질 수 없었음 -> 하나님을 손을 구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 이 손을 구함에서는 하나님과 친밀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반대로 모세는 달랐어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 그런데 여기서 순종하기는 쉽지 않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믿음이 자라났기 때문에 순종이 가능.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차이점
이스라엘 백성 ->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 ->하나님과 친밀함이 열리지 않음.
모세 ->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 ->하나님과 친밀함
모세-> 하나님의 얼굴을구함. 모셍게는 그 놀라운 축복, 은혜, 세상 성공, 안식 안락 그 좋은 음식보다 하나님 그분이 소중함. 하나님의 임재가 소중하였음.
하나님을 구함, 하나님의 길을 알기를 원했고, 그 길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을 더 알기를 원했고,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기를 원했고, 하나님이 주신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모세에게 있어서 생명이었습니다. 삶의 유일한 목표요, 목적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구하니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심. 믿음이 자라게 하심 -> 하나님의 영광을 더 경험함.
믿음의 의한 삶을 위해선 하나님의 자신을 구하는 것이 필수 입니다.
PLO의 삶이 중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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