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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및 신앙 서적

믿음으로 사는 삶7

by 은총가득 2012. 7. 26.


믿음에 의한 삶(7) 주님을 아는것과 믿음

요11:17-27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중 하나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믿음의 중요성

롬1:17 “보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도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씀과 같이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도 믿음으로만 가능하며


2)주님이 내안에서 사시는 것도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3)진정한 성령의 역사도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갈3:2,5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4)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롬1:17 믿음에서 믿음으로 -> 원어  -> 처음부터(예수 믿을때) 끝까지(주님앞에) 이렇게 믿음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누가복음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믿는자는 많지만 참 믿음을 가진자는 너무 적다는 말입니다. 왜입니까? 믿음이 무엇인가 조차도 가리워져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데 그것도 믿음으로만 가능한데 우리는 믿음이라는 말의 의미조차도 가리워져있으니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에보면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죽은지 나흘째 되는 날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소식을 들은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급히나가 예수님을 맞이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21절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소연쪼로 이야기합니다.


미르다의 하소연은 다음과 같은 고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22절 “그러나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줄 아나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시든지 하나님께서 다 이루저 주실 줄을 마르다 자신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는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동사의 헬라어 원어는 “에이도”로서 본디 ‘본다’의 의미입니다. 알기는 알되 희미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아서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마르다 자신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 그것은 분명하고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마르다는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시던지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실히 보고 안다고 자신했음.


이롷게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마르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23절)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나사로는 이미 죽었는데, 그의 모든 것이 다 끝나 버렸는데, 주님께서는 그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마르다의 반응을 본문 24절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24절)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할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는 또 다시 안다고 합니다.비록 오라비가 죽었지만 지금은 오라비의 모든 것이 다 끝나 버렸지만 이 세상의 종말이 임하는 그 날 다시 살줄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2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는 사람이 죽으면 죽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종말의 날에 다시 산다고 믿고 있는 반면, 주님께서는 주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육체가 죽어 땅 속에 장ㅅ 지낸 바 되더라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 속에 오랫동안 버려졌다가 먼 훗날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자는 육체와는 상관없이 아예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말씀하신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님의 이 질문에 대한 마르다의 고백을 27절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난이다”


마르다는 내가 믿나이다 라고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주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자 않는다는 것을, 주님을 믿는자는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는 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분명한 고백입니까? 가히 확신에 찬 믿음이 분명합니다.


자! 그런데 보세요.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무덤입구를 가로막는 돌문을 치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육체를 일으키시기 위해 무덤 문을 열라 하시는데, 마르다는 이미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 시체가 심하게 썩었으므로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시든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것임을 확실히 보고 안다고 자신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다 아노라고 공언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고로 주님을 믿는자는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믿나이다”라고 자신의 확신을 힘주어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의 육체를 무덤에서 일으키시려는 지금, 마르다는 그것은 불가능하다며 예수님을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그렇다면 마르다가 하나님과 주님을 다 아노라고 호언장담했던 그 앎이란 도대체 무엇이었단 말입니까? 내가 믿는다고 그토록 힘주어 강조했던 그의 믿음의 내용이란 또 무엇이란 말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있습니다.


1.성경내용을 그대로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겁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시든지 하나님께서 다 이루저 주실 줄을 믿었습니다.

또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다 아노라고 공언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고로 주님을 믿는자는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믿나이다”라고 확실히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의 특징이 있는데

내가 할 수 있으면 하나님도 할 수 있고, 내가 할 수 없으면 하나님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마르다는 믿음의 근거를 환경에 두었습니다. 상황에 두었습니다. 만약 나사로가 죽지 않고, 숨이 붙어있었다고 한다면 마르다는 믿었을 겁니다. 아니 금방죽었다면 다시 살릴줄 믿었을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더운 나라에서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다는겁니다. 날씨가 더운 나라에서 나흘이되었으니 벌써 썩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환경적으로도, 상황적으로도, 생각으로도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도 못하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지금 가는 길이 잘못가는 길임을 이정표를 통해서 알았다면 우리의 당장 수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생의 길을 가면서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면 우리의 삶을 조정하지 않습니다. 


예) 동방박사 - 서기관들 ->자기들은 성경구절을 외우면서 가르처 주면서 가보지 않음


그러면서 우리는 성경을 믿는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믿는 것이아닙니다. 단순히 이론적으로 아는 것일 뿐입니다.


2.확신이 믿음이 아닙니다.

마르다의 확신은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3.열심이 믿음이 아닙니다.

마르다의 열심은 오늘날까지 소문난 열심입니다. 그래서 여전도회 이름을 ‘마르다 여전도회’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열심이 믿음이라면 마르다는 누구보다 믿음이 좋았을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내용을 한글자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라고 합니다.

열심도 냅니다.(기도회, 성경공부, 전도...)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믿습니다’라고 확신에 찬어조로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말씀하시면 마르다와 같이 우리는 불가능합니다 라고 외처됩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에 관하여서는 누구보다 잘 아는데 그 하나님을 실제적이고 개인적으로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모르게 때문입니다.


환경은 전혀 아니지만 성경에서 말씀하신 그대로의 하나님이심을 경험적으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하나님의 뜻은 항상 최선이며, 그분은 전지 하시기에 그분의 인도는 항상 옳다는 것을 우리가 실제적으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오시옵소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하나님 내가 믿음 없음을 보게해주세요

하나님을 더 알게해주세요

그리하여 믿음으로 순종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보게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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