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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쉽

자질의 분별

by 은총가득 2010. 6. 24.

 

 

 

자질의 분별

 

  교회는 리더들을 분별하여 양육해야 하는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리더들을 잘 분별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교회들이 리더를 잘 분별하여 일군들을 세웠더라면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리더들을 세운 일로 인해 많은 문제가 생겨난 것이 사실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교회 역시 기준이 아직 없는 상태입니다.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일군이 없으니까 교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일저일 맡기기 바쁩니다. 규모가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기준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다만 ‘십일조 생활을 하는가, 주일 예배에 잘 나오는가, 기도 생활을 하는가, 나온 지 얼마 되었는가’ 따져서 일군으로 발탁합니다.

 

 

  물론 이런 내용들이 일군의 선발 기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적 기준은 아닙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이런 기준으로 보자면 훌륭한 일군들이니까요. 그런데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이런 기준도 없이 그저 ‘성도 수를 늘리기 위해, 또는 일군으로 세우지 않으면 교회를 떠날까봐, 건축을 위해 재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직분을 주면서 예산을 충당하기 위해’ 일군으로 세우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교회에서는 장로나 권사 취임을 위해 선거운동까지 한다고 합니다. 이는 세상의 정치 선거 풍토가 교회 내에 들어온 예들입니다. 아주 타락한 예들입니다.

 

 

  리더는 건물의 골조와 같은 것이라 튼튼해야 교회가 든든할 수 있습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조직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든든하게 세워질려면 어떤 사람이 일군으로 세워지는가에 많은 부분이 달려있습니다. 골조가 튼튼할수록 건물은 든든한 법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골조에 해당하는 일군들이 튼튼해야 합니다. 이처럼 리더십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서 그 가운데 운행하시며 통치하시는 교회로 세워지려면 더욱 더 말할 것도 없이 리더들이 골조처럼 튼튼하게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누가 리더인가?’하는 안목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그저 외부적인 종교적 행위를 잘 하면 리더 감으로 여길 정도입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신학교를 다니는 사람이거나 졸업한 사람이면 검증함도 없이 환영하며 세우기 바쁩니다. 또 어느 신학교를 나왔는가하는 부분은 사람을 분별할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상관없이 작용합니다. 성적 역시 리더십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만약 이런 요소들이 리더십을 결정하는 요인들이라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부적격자들입니다. 그들 중 누구도 성적이 우수하거나 신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중에는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언어에 탁월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사람들을 리더로 세울 것이며, 어떤 사람들을 잠재적인 리더로 분별하여 양육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교회는 지속적으로 리더를 양육해야 하는 과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리더가 골조와 같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리더가 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리더가 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양육하는 일에 힘서야 합니다. 리더이면서 리더를 키우는 리더 중의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일에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가능한 한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교회의 리더들은 리더감들을 분별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일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생활의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여기서는 쇼핑리스트를 통해 리스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리더로 세우는 일, 그리고 자신을 리스트에 비추어 보면서 자신은 리더로 자라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삼기 바랍니다.

 

 

  첫째, 리더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일해 가시는 행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비전은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목회자에게 주신 비전입니다. 물론 목회자 개인에게만 주신 비전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교회를 향한 비전을 보는 일이 중요한 까닭이 있습니다. 리더십이란 사람들을 현재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자리로 인도하는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리로 사람들을 인도해 가는 영향력있는 지도자가 리더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리더가 교회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반드시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을 그리로 인도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거듭거듭 보는 것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열매를 맺는 밭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예수님은 “깨닫는 자가 열매를 결실을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예수님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았으며 그 일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었다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은혜를 받았지만 예수님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한 번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어려워 떠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떠나가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생명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답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생명의 말씀을 보았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성경이 말한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조금 어려워지자 다음 순간에 떠나갑니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표면적으로만 알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반면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말씀을 보았기에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리더들은 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즉 교회 가운데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보는 자여야 합니다.

 

 

  존 윔버 목사님은 개교회 집회를 한 후, 항상 담임목사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어젯밤에 무엇을 보셨습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담임목사가 ‘보는 자’인가를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로렌스 콩 목사님이란 분은 존 윔버 목사님을 강사로 모시고 집회를 한 후 이렇게 물어오는 존 윔버 목사님에게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글쎄요, 별 다른 일은 없었는데요. 몇 사람을 하나님이 만지신 것 같고, 그리고는 별 일이 없었는데요.” 여기에 존 윔버 목사님은 “어젯밤에 교회 역사상 가장 큰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셨습니다.” 실제로 로렌스 콩 목사님은 별 보였던 일이 없었다고 그의 책에서 술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주일에 일이 생겼습니다. 주일 낮예배 설교를 마친 후 사람들을 초청하였는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면서 통회하고 자복하고 꼬꾸라지고 놀라운 성령의 역사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처럼 똑같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도 어떤 사람은 보고, 어떤 사람은 보지 못합니다. 안목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리더의 덕목은 교회 가운데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보는 것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안은 신앙의 본질 위에 서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는 일이 보는 것의 관건입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인생의 목적과 목표가 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구하는 삶으로 인생이 조정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보는 것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목적과 목표가 되어지면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자라고, 이렇게 하나님과의 친밀함 속에 있어야만 하나님의 행하심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친밀함 속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기 보다는 자기의 야망을 합리화시킬 수 있습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의 말입니다.

 

 

리더는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자기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로 결정을 내릴 때, 반드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성령의 음성을 들을 때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다른 사람들을 통해 듣는 것입니다. 즉 자문이 중요합니다. 문제는 결정을 자문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로 그 사람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에 가서는 자기 생각을 말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조직을 위해 좋은 생각을 말할지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 앞에서 내 생각은 별 의미가 없는 법입니다. 이 말은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할 말입니다. 이사야 55장입니다.

 

[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 55:8-9)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많이 배운 것, 많이 아는 것에서 나온 개인의 지혜는 하나님의 그것과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개인의 생각으로 사람을 인도하면 사람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자기 개인적인 생각을 따라 행하면 망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필연적으로 망할 것입니다. 인간들의 눈에는 그럴듯한 성공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저주일 수 있으니까요. 이처럼 인간의 생각으로는 안 됩니다.

 

 

  영적 분별력은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 위에 설 때에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는 일이 필수이며 가장 핵심입니다. 잠재력인 리더들을 구할 때 이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 교회 가운데에서 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비록 현재는 사역자가 아니지만 신앙의 본질 위에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워지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는 일은 어느 날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친밀함 속에 늘 엎드려있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한 번 주님과 만난 경험을 했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주님을 인생의 목적과 목표로 삼는 신앙의 본질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또 교회의 사역이 확장되면서 중요한 것은 사역의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가?’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면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도 사역은 확장될 수 있지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인 수가 수천 명이 모인다고 하지라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만이 하실 있는 일인 ‘사람들이 진정으로 거듭나는 일,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하는 일, 세상적인 가치관이 버리고 전존재로 주님을 사랑하는 일, 자신의 삶을 드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 성도들이 죄와 세상을 이기는 일’등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일들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속적으로 계시려면 우리가 항상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친밀함 속에 있어야 항상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또 섬기더라도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섬길 수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리더들에게 이 부분은 핵심입니다.

 

 

  둘째, 리더는 충성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리더가 되든지 충성스런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피터 와그너는 세 가지에 충성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주님께 충성하고 둘째는 주님의 교회에 충성하고 셋째는 세상에서의 주님의 목적에 충성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피터 와그너는 충성하는  순서가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만일 주님께 충성하는 일에는 소홀하고 세상에서의 주님의 목적에만 충성한다면 이것은 분명 커다란 잘못입니다. 또 어떤 성도들은 주님께 충성함이 없이 교회의 일에만 열심을 낸다면 이것 역시 잘못입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곤 합니다. “가정이 먼저냐? 아니면 교회가 먼저냐?” 여기에 서구의 목회자들은 “가정”을 손꼽습니다. 반면 한국의 목회자들은 “아니, 교회가 먼저지, 어떻게 가정이 먼저일 수 있느냐?”하면서 비방합니다. 그렇다면 서구의 목회자들이 하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서구의 목회자들 역시 무엇보다 주님께 충성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맡겨진 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들이 가정이라는 말입니다. 이 자세가 맞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리더들은 교회에 세우신 목회자들에게 충성해야 합니다. 모세에게는 아론도 함께 있었고, 미리암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보다는 여호수아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여호수아가 모세의 몸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주님으로 섬겼다는 사실 역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엘리사의 몸종은 게하시였습니다. 아마 게하시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엘리사 이후에 하나님이 쓰실 일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 …  (왕하 5:20)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성도들은 오해합니다. 이 말은 목회자에게 '예스 맨‘이 되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는 일에 방해가 됩니다.

 

 

  목회자에게 충성하는 일에 대해 오해가 있습니다. 이 말을 오해하여 목회자 개인에게 친절하고 잘 대해 주는 일을 ‘충성’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회자에게 개인적으로 잘 대하는 일도 물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무엇보다 주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교회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토대 위에서 목회자에게 충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주님께는 충성하지만 교회에는 충성하지 않은 채 목회자 개인에게 잘 하려 합니다. 이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오해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자에게 부담을 주는 행동입니다.

 

 

  우리의 공통분모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단순한 말 같지만 깊은 뜻이 있습니다. 저 분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분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 역시 하나님의 사랑하기에 우리 모두 힘을 합하여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너무나 차갑게 느껴지는 말 같지만 가장 소중한 가치관입니다. 가장 튼튼한 끈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공통분모’를 빼고 서로 간에 개인적으로 친해져 보려고 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닙니다. 물론 지체 간에는 정말 친해지고 끈끈한 관계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어디까지나 공통분모 위에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의 충성심입니다.

 

  교회는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교회에 더해졌을 때,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할 일은 교회를 위해 봉사하기 전에, 교회의 지체가 되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그렇지 않습니다. 봉사부터 배우지 않으면 목회자와 개인적으로 친해지는 일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지체가 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혹 배우려고 오시는 분들도 있지만 교회 지체가 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몸이 되어야 진실로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의 지체가 되고나서 그 토대 위에 목회자에게 충성되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몸종이었습니다. 이 말은 모세의 개인적인 종이라기보다 모세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에 종이 된 것입니다. 모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종이된 것입니다. 이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담임목사님을 통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전적으로 협력할 일이 없거든 그 교회를 떠나라. 그것이 당신에게 좋다.” 이 말은 한 편으로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목회자가 하는 일을 불평하면서 자기는 자기대로 봉사하고 성도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인도하면 이것은 개인에게 불행입니다. 옳지도 않을뿐더러 교회에 유익이 되질 못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떠나는 것이 좋습니다. 최소한 죄는 짓지 않을 것이니까요. 차라리 자기를 인도해 주는 곳에 가서 열심히 사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자기에게도 좋고 교회에게도 좋습니다.

 

 

  어떤 분들은 어디에 가도 적응을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참 큰일입니다. 자기가 목회할 수도 없는 일이고 말입니다. 옳지 않은 자세입니다. 또 충성하라고 하니까 ‘Yes Men’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도 잘못입니다. 충성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건의만 하는 사람이 옳다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하게 감당한 다음 건의를 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역시 앞으로 일군이 더욱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세는 금물입니다. “나를 세워줘 봐, 지금 저 일군보다는 잘 할 거야.” 이는 잘못입니다. 셀이나 중식 팀, 여전도회, 형제회 등에서 리더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 순복함이 없이는 일군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쓰실 수 없습니다. 보통 저 사람에게 일하시는 것과 자기의 그것과를 분리하는 버룻이 있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다만 제 개인적으로 성도들이 제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셋째, 리더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결국 일은 성령이 이루십니다. 그런 까닭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이 개인에게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보는 일은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현재는 기름부음이 없을 수 있지만 앞으로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기름 부을 사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주님 안에서 분별력이 예리하게 요구됩니다. 일군을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다윗은 그의 아버지가 볼 때 리더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 역시 이새의 장남을 보는 순간 이 사람인가 하여 기름을 부으려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어떤 사람입니까? 말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만큼 하나님이 뒷받침한 사람입니다. 이새의 모든 아들들을 다 본 다음에야 다윗은 불려 사무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만큼 다윗은 사람들보기에 리더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의 재목감이었습니다. 메시야의 조상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메시야의 언약을 이어나갈 리더감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리더를 분별함에 있어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부음이나 은사를 통한 세우심이 있는가 하는 부분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말씀드린 것처럼 은사나 기름부음만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본질 위에 서 있는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자신의 전존재로 동참하는지, 충성심이 있는지 등을 어느 것보다 앞서 살펴야 합니다.

 

  넷째로, 리더는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배우고자 하는 자세는 어떤 자세보다도 중요한 자세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가질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자세입니다. 신앙생활의 감초라고 불리는 자세입니다. 이 자세가 없이는 일군 되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자만과 안일함은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상실할 때 생성되는 자세입니다. 또한 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또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없으면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변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그 속에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좌충우돌 하더라도 엉뚱한 얘기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하나님의 길 가운데 서고자 하는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있으면 때가 되니까 바꿔주시더군요. 그래서 이 자세는 매우 중요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  (롬 14:4)

 

 

  이 말씀은 하나님이 “그는 나의 종이다. 그를 세움이 내게 있는데 네가 어찌하여 나의 종을 판단하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 전능한 능력으로 일군을 세워 가십니다. 따라서 외모를 보고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종들은 하나님이 이들이고 하나님의 종들이기에 함부로 판단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친절하고 상냥하고 많이 웃어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다섯 번째, 리더는 섬기고자 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리더는 종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섬기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은사가 가르치는 은사이기에 가르치는 일만 열심히 하면 되노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섬기는 일에는 등한시 합니다. 이건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또 다른 교회에서 옮겨온 이들 가운데에는 “나는 전에 있던 교회에서 수석 장로였다. 여기 왔으니 직분에 걸맞는 일을 맡겨 달라. 그러면 열심히 하겠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전에 집회를 갔던 교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모세는 리더 중의 리더였습니다. 성도가 200백만명이 되는 교회의 리더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를 인식할 때 종으로 인식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위치를 종으로 생각했습니다. 다윗 역시 놀라운 일군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는 자기를 가장 먼저 종으로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자신이 왕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의 위치를 하나님 앞에서 설정하기를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종으로 오셨습니다.

 

 

  성경은 권세가 클수록 섬김이 컸습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가장 섬기는 자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군은 섬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리더는 종입니다. 그러기에 리더를 분별할 때 섬기는 자를 분별하여 세워야 합니다. 섬기는 자가 리더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우실 때에는 점진적입니다. 아무리 과거에 어떤 직분을 가졌다 할지라도 섬기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존 윔버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섬길 수 없는 천한 일이 없어야 한다

 

  맞는 말입니다. 아무리 높은 사회적 위치에 있다고 할지라도 교회에 와서 봉사할 때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사회적 위치를 고려하여 해야 할 일을 제한하면 이런 사람은 리더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사회에서는 회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일도 천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리더십은 어떤 자리, 권세, 능력, 존경, 특권, 명예가 아닙니다. 자기희생을 통해 섬기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천한 일도 없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천한 일로 여긴다면 이건 자존심 때문일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치 못한 자세입니다. “나에게는 청소가 맞지 않아, 청소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난 다른 일을 해야 할 것 같아. 설거지가 나에게는 아직 이른 것 같아. 나는 하나님만 더 구해야 해. 나는 마르다보다 마리아가 더 좋아.”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 받을 것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대기업의 회장이라 할지라도 교회에 와서는 청소나 궂은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일군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은 섬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리더는 섬김을 통해 사람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섬김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과 하나님 안에서 자기의 신분을 이해하는 일에서 나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깨닫고 자존감을 깨달으면 섬김이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의 자존감을 발견하지 못하면 청소를 할 때에도 부끄럽게 하게 마련입니다. 리더의 역할은 직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희생에서 나옵니다. 간디나 루터 킹 목사님 등은 말로만이 아니라 자기희생을 통해 자기주장을 실천했다는 데 존경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인도와 미국의 영웅들입니다.

 

 

  여섯 번째, 리더는 믿을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가지 면에서 보아야 합니다. 어떤 일을 맡기던지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뢰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하나가 말의 신빙성입니다. 말로 허풍떠는 사람은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세일즈 맨 기질 즉 말로 사람을 붕 뜨게 하는 기질을 가진 사람은 리더가 되면 안 됩니다. 성품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작은 일을 맡기더라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어떤 일을 맡기든지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존 윔버 목사님은 사람을 분별할 때, 작은 일부터 시켜본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일처럼 일처리를 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자꾸 잊어버리고 성의가 없이 일처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를 보며 리더를 분별한다고 합니다. 신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신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존 윔버 목사님은 이런 경우 그 사람을 비껴 놓던지 아니면 한 번 더 기회를 준다고 합니다. 배우고자 하는 자세와 더불어 중요한 자세가 정직성입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자세입니다. “아니, 집사가 뭐야, 나정도 되면 장로쯤은 돼야지”라는 자세가 있다면 일군은 아닙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충성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사회나 국가, 교회 모든 일에 필수입니다.

 

  다음으로 말의 신빙성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날 존 윔버 목사님에게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전 목사님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화장실 청소를 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더랍니다. 여러분, 설교하는 일이나 화장실 청소하는 일이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같은 일입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한 말을 책임질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심령을 고치시길 기뻐하십니다. 말씀 앞에서 말씀이 그러하니까 고민하며 상함을 드러내는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특유의 융통성을 발휘하여 말씀과 현실을 분리하여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일곱 번째, 리더는 가족을 돌보는 자이어야 합니다.

 

  이 자질 가운데에서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제적인 면입니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경제적인 생활을 어떻게 하는가를 보는 일이 필수입니다. 기도 열심히 하는 일도 좋지만 경제생활의 면은 매우 중요합니다. 남들을 위해 잘 베푸는데 경제생활을 엉망이면 아직 아닙니다. 돈이 없어 이집 저집 돈을 꾸어 쓰지만 갚을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면 아닌 사람입니다.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해도 아닌 사람입니다. 지도자감이 아닙니다.

 

 

  또 경제적인 면에서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족들은 굶는데 관심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닙니다. 옳지 않은 자세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집안 살림은 어려워서 엉망인데 비싼 자가용을 빚을 내어 샀습니다. 이제 곧 부흥강사로 나가야 하니까 좋은 차를 타고다녀야 사람들이 잘 나가는 부흥강사로 알 것이니까 그랬다는 것입니다. 경차 타고 다니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 가치관. 이건 리더의 가치관이 아닙니다 사회에서도 손가락질 받을 가치관입니다. 허풍, 허영이 가득한 사람들은 리더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책자에는 시골교회 목회자의 얘기가 실려 있는데 작은 교회라 가족을 부양하기 어려워 교회가 세워지기 까지 20여년 동안을 주유소에서 일한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참 아름다운 얘기입니다.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그렇게 하면 마치 목사가 세상으로 나간 것처럼 여기는데 미국같은 곳에서는 아닙니다. 그저 우리 선입견일뿐입니다. 그래서 책임감이 중요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극단적인 믿음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해 주실 겁니다”라고 믿는데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자식들이 굶고 있는데도 그 말만 되풀이 합니다. 무작정 기다리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자세가 옳지 않습니다. 가장이면 책임감있게 허드레 일을 하더라도 부양하려고 해야지 그리고 또 그런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를 부으시지 안그런가요? 나쁜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사실 이렇게 살면서도  교회에서는 열심히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만 열심히 하는 것보고 리더로 세우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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