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목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니 (고전 6:19)
리더란 무릇 목표를 갖기 마련입니다. 그 목표를 바라보며 사람들과 조직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옳지 않은 목표 세 가지와 참된 리더들이 지향하고 나아가야 할 목표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옳지 않은 목표를 언급합니다. 그가 리더의 목표를 언급하면서 옳지 않은 목표를 먼저 밝힌 것은 그것이 옳지 않은 목표임에도 일반적으로 교회나 조직에서 목표로 삼는 경우가 많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가치 없는 목표
첫째, “결과 지향주의”가 있습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리더를 새로 뽑을 때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보다 결과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E-MART 지점장이 있다고 합시다. 그에게 목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분명 ‘많은 매출’일 것입니다.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서 목표를 설정한 후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일 것입니다. 응암동 지점의 경우, 일 년 365일 내내 영업을 하는 것은 물론 저녁 11시까지 영업을 하면서 고객을 끌어 모으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결과 지향주의”입니다. 그러나 가치 없는 목표일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결과 지향주의”가 사람들의 눈에 당연시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영적 리더들이 추구해야할 목표가 아님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리더들의 목표에 높은 가치를 둡니다. 더 큰 문제는 교회 리더들도 여과 없이 “결과 지향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교회의 목표를 외부적인 모습으로 설정하는 일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성공의 기준을 외부적인 모양에 두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배당의 좌석 수나 헌금의 액수, 프로그램의 숫자 등으로 성공의 기준을 삼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목회자들 세계에서는 이런 요인들이 성공의 척도가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공한 사람을 훌륭한 리더로 봅니다. “결과 지향주의”가 교회 내에 들어온 결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결과 지향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리더가 훌륭한 리더는 아닙니다. 참다운 영적 리더가 추구해야할 목표가 아닙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이에 “우리의 목표는 사람 중심적이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중심적인 목표”야 말로 성경적인 가치관입니다. 물론 사람의 비위를 맞추거나 사람의 평가를 받으려는 가치관을 말하지 않습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또 “목표 달성이 곧 하나님의 주신 복의 결과는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 리더의 목표를 달성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우선순위를 아는 영적 리더들은 목표달성을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 자체가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시아에서 가장 큰 예배당을 지었다고 할지라도 전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사상 최대의 매출액을 기록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할 수 있습니다.
둘째, “완벽주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높은 곳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목표이며, 높은 곳에 있는 목표입니다. 사실 이 목표를 앞에 두는 순간 우리들의 말과 행동은 너무나도 “거룩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 앞에 우리 자신들이 너무나 거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숙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라시면서 영육 간에 성숙하셨고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해서 영적으로 성숙해 가셨습니다. 바울은 성숙해 가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성숙했을 때를 목표 삼고 자라나라고 말한 것입니다. 말라기 6장 1절부터 6절부터 14절입니다. 위 구절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되 완전한 것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 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이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이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 도다 [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 이니라 [14]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 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 이니라
물론, 완전하라고 하는 의미는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완전함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탁월함을 추구하는 완벽주의가 아닙니다. 결코 세상적인 안목에서 바라보는 완벽주의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이 언급하는 완벽주의는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설명 드리겠습니다. 어느 교회에 A라는 찬양리더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B라는 사람이 새로 입교했는데 A보다 훨씬 더 노래를 잘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A라는 리더를 그만 두게 하고 B라는 사람을 리더로 세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적인 탁월함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올바른 목표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람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노래를 더 잘하고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받으시는 분이기에 그렇습니다. 상한 심령의 제사를 받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 1:28-29)
바울의 목표가 잘 나와 있는 구절입니다. 바울의 목표는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즉 성숙한 사람으로 세우는 일이 바울의 사명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능력으로 권하고 가르치고 성령의 힘을 따라 섬겼습니다. 자기 인생을 투자했습니다. 이것이 사람중심적인 목표입니다. 바울은 ‘실적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숫자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이길수 목사님의 경우, 주일낮예배 시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성도들 숫자를 헤아리고 있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너 무엇하고 있느냐?”라고 하신다고 합니다. 반복적으로 숫자에서 눈을 떼게 하시는 겁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완벽주의적인 목표는 옳지 않은 목표입니다.
셋째, “더 크게 더 빨리 더 많이式 주의”가 있습니다. 사실 이 구호는 지극히 미국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지극히 한국적인 구호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문명은 사이즈로 정당화되곤 합니다. 크면 좋은 것이고 작은 것은 좋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어져 버렸습니다. 사실 작은 교회가 찬양과 경배로 예배하면 이단 소리를 듣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큰 규모의 교회가 찬양과 경배로 예배하면 시대를 앞서 가는 교회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것이 한국 교계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풍토가 있게 된 걸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리더가 조직을 큰 규모로 키워놓으면 그것은 곧 하나님이 축복하신 결과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이 역사하신 증표로 “큰 것”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조직이 키워질 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커진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신임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신 증표가 반드시 ‘큼’에 있지 않습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의 말입니다.
종교계에서도 대형 교회를 키울 수 있는 리더는 영적 영웅으로 통한다. 그들은 성공담을 책으로 펴내라는 권유를 받고, 교회 성장 세미나에도 단골로 등장한다. 그들이 부도덕한 삶에 빠져도 교회는 웬만해서 그들을 해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복 주시는 손길이 아직도 그들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목사님이 한 일이 그렇게 잘못이라면 하나님이 왜 목사님한테 복을 주시겠습니까?”라고 반문한다. 물론 이것은 양적 성장과 하나님의 복을 동등시한 결과다. 과연 그럴까?
성장은 건강한 교회의 불가피한 현상이기는 하다. 사도행전에 분명히 예가 나와 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복 주심 없이도 수적으로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다. 즉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과 교회를 세우는 데는 큰 차이가 있다. 예컨대 마케팅 담당자는 사람을 끌어 모을 수는 있지만 교회를 키울 수는 없다. 숫자의 성장이 하나님이 주신 복의 확실한 징표라면 다수의 이단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엄청난 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인가.
지금 전 큰 교회가 잘못이라는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외적 성장이 곧 하나님의 복 받은 징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교회가 세워졌거나 자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벽돌이 쌓았다고 해서 집이 되는 것이 아닌 이치와 같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기초하여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시는 교회로 자라기 위해서는 전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만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이 목적이 되어 자라가면 하나님께서 교회에 임하시고 그 결과 교회는 성장해갑니다. 그러나 숫자적인 성장이 곧 하나님의 복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아도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외적 성장과 하나님의 은총을 동일시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 결과 “더 많이 더 빨리 더 크게”式의 사고가 목표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올바른 목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목표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 영적 성숙이 영적 리더의 올바른 목표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 리더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영적 성숙으로 이끌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영적 리더십의 궁극적 목표가 숫자적 결과의 성취나 완벽한 일처리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 리더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로 데려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출애굽기 19장 4절입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한 뒤 목적지가 어딘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출애굽 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런 생각을 반박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당신에게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시기 위해 구원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개념은 너무너무 중요한 개념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구원의 목적은 믿음과 순종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 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나안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광야에서의 삶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도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만나나 고기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절했습니다. 심지어는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에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머물기를 거절함으로 마침내 가나안을 빼앗기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세상과 죄악에서 건지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장소나 프로그램, 실적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리더로 부르셨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가 리더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인도되지 않는다면 교회가 세워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리더는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리더들을 본다면 너무나 심각한 수준에 리더들이 머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목표와 연관하여 중요한 한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리더가 어떤 프로그램에 사람들을 인도하는 자라면 자신이 먼저 갈 필요가 없습니다. 행사를 잘 치루는 자가 리더라면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어도 무관합니다. 그러나 리더가 하나님께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자라면 리더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아니하면 절대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의 말입니다.
영적 리더십의 목표가 관계라면 리더는 자기가 본 곳 너머로는 절대 사람들을 데려 갈 수 없다. 자신이 경험한 것보다 더 깊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관계로 이끌 수 없다. 사람들은 리더의 영적 미성숙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깊이 자랄 수 있지만 그 리더로 인해 자랄 수는 없다. 따라서 영적 리더가 아랫사람들을 그리스도와 성숙하고 친밀한 관계로 이끌려면 자기 자신이 끊임없이 자라야 한다. 리더 자신이 높은 차원의 기도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사람들을 그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없다. 리더에게 성숙한 믿음이 없다면 사람들을 더 깊은 차원의 믿음으로 인도할 수 없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여기에다가 하나 더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삶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입니다.
영적 조직은 모든 구성원이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을 줄 알고 기꺼이 순종으로 반응할 때만 잠재력이 극대화될 수 있다. 리더가 하나님께 들어서 그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식별하고 말씀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리더는 자신의 비전을 주입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단순히 사람들에게 나눈 뒤 사람들 스스로 확증을 구하게 하면 된다.
리더는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인도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도록 하여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도록 만드는 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리더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었던 간증들을 서로 나누게 하며 교회 전체에 알림으로 한 지체로서의 경험에만 머물지 않고 교회 전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행하심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어떤 경험은 한 개인에게만 국한 될 수 있는 경험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험은 교회 전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차기 리더를 키우는 것’이 목표여야 합니다.
알 티 킨델 목사님은 “오늘의 사람” 즉 오늘 하나님이 쓰시는 종들에게 주어진 소명은 내일의 리더를 발굴하여 오늘 훈련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차기 리더를 키우는 것’은 내일의 사람들을 키우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진 배경에 관해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걸핏하면 휘하 장군들의 실수를 책잡았지만 그들에게 자신의 전술을 가르치거나 참모 학교를 세우려고 조직적으로 시도해 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나폴레옹은 휘하 장군들이 자기의 명령의 문자적 메시지만 복종하도록 따르도록 훈련되었지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나폴레옹의 실패는 차기 리더들을 세우는 일을 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무엘 역시 차기 리더를 세우는 일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사무엘에 대해 평하면서 “입에서 나온 말이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만큼 하나님이 뒷받침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대도 그는 아버지로서 실패했으며 차기 리더를 세우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1]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2]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3]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삼상 8:1-6)
존 윔버 목사님은 살아계실 때 주된 사명 중 하나를 일군 세우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돌아가신 뒤에도 전 세계에 퍼져있는 빈야드 계통의 교회들이 잘 세워져가는 이유는 존 윔버 목사님이 리더들을 잘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수첩에는 일군들의 이름이 항상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항상 수첩을 보면서 그들을 언제 세울 것인지, 아직 기다려야 하는지, 시간은 있는지, 자라나고 있는지 등을 살폈다고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목표여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바 되었기에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기에 영적 리더는 기독교 조직이든지 비기독교 조직이든지 사람을 이끄는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표를 지녀야 합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미명 하에 큰 규모의 교회를 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커다란 교회 건물을 짓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물량 위주의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포장할 때가 많습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야망을 교묘히 포장한 것에 불과합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의 말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당신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과 조직을 통해 세상에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사람의 영광이 아니다. 그러나 조직은 그 일을 자발적으로 잘하지는 못한다. 그 일을 조직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 것이 바로 리더의 목표다. 리더의 업무와 직위는 시간이 가면 바뀌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목표는 누구에게든 항상 최우선 근거가 돼야 한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어떤 회사의 CEO인 존 베케트라는 분을 예로 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사업에도 적용하기 원하는 헌신된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모든 사업을 예수님의 방식으로 수행하려 한다. 그의 사업체는 기독교 조직은 아니지만 그가 기독교 원리로 회사를 운영하는 것까지 막지는 못한다. 그는 무엇보다 직원들과 가족들의 필요에 우선순위를 둔다. 회사는 유급 출산 휴가를 넉넉히 주고 아기를 키우도록 3년간 휴직을 허용한다. 등록금 지원으로 젊은 직원들의 학업 재개를 독려하기도 한다. 그는 ‘내 최고의 사명은 하나님을 뜻을 알고 행하는 것’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존 베케트의 회사는 업무상으로는 세상적인 회사이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했습니다. 알려진 바로는 회사가 매우 영적이라고 합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의 말입니다.
그리스도인 리더들은 자신의 첫째가는 소명이 재계나 스포츠계나 의학계나 법조계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성공하는 것임을 안다.
예수님이 기성 전문 종교인들을 제치고 사업가들을 열두 제자로 뽑으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중에는 어부 넷과 세관원이 있었다. 그분은 세상 돌아가시는 방식을 알고 그 한복판에서 겁내지 않고 일할 자들을 찾으셨다. 그분은 시장의 언어로 말하는 자들을 뽑으셨다. 세상을 뒤엎기 위해 사업가들을 전략적으로 뽑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우연이 없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리더의 자리에 놓았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분 뜻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첫째가는 소명은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열렸을 때 송종국 선수를 비롯한 기독교인 선수들의 기도하는 모습으로 인해 많은 팬들이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는 일은 매우 고무적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택하셔서 여러분들이 있는 곳에서 같은 일을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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