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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쉽

비전

by 은총가득 2010. 6. 21.

 

 

비전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잠 29:18)


리더쉽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비전입니다.

존 맥스웰은 비전과 관련하여 사람들을 네 부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째 부류는 “방랑자”입니다. 즉 비전이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사람입니다. 마치 태평양에서 부지런히 항해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목적지가 없이 항해를 하는 형상과 같은 사람입니다. 비전은 나침반과 같은 것입니다. 리더는 어디로 가야할지 알아야 하는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목적이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 안됩니다.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열심은 있지만 목표가 없는 사람입니다.

 

둘째 부류는 “겁쟁이”입니다. 비전을 보긴 하지만 치러야할 대가가 두려워서 비전이 제시하는 곳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는 부류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도 동참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두려워하는 이유에는 사람들의 평가, 치러야 할 대가 등이 있습니다.

 

셋째 부류는 “성취자”입니다. 비전을 보고 그대로 따라가서 비전을 성취한 사람들입니다.

 넷째 부류는 비전을 따라가서 성취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그곳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존 맥스웰은 이들이 바로 리더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먼저 성취자가 되어야 하고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을 그 비전으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들이 리더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리더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비전을 성취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그곳으로 인도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는 비전의 출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이 언급한 “비전의 출처”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데 비전의 출처를 살펴보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적 비전’이 어떻게 ‘하나님 중심적 비전’과 다른가 하는 부분을 분별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리더가 비전을 갖는 출처(sourse)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즉 리더가 비전을 어떻게 해서 갖게 되었는가? 하는 부분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첫째, ‘맹목적’이 비전의 출처가 된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불필요함’, ‘특별한 이유가 없는 목표’가 출처가 된 경우입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의 글을 인용합니다.


1924년 영국의 학교 교장이자 사교계 명사인 조지 리 멜러리(George Leigh Mallory)는 아직 누구도 정복해 보지 않은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오르기로 결심했다. 어느 기자가 그에게 어렵게 고산에 오르려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산이 있으니까”라고 답했다. 6월 8일 세 자녀를 둔 38세의 맬러리는 동료 앤드류 어바인과 함께 등장하는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75년 후인 1999년 미국의 등반 팀은 산비탈에서 완벽하게 보존된 맬러리의 시체를 발견했다. 맬러리는 불필요한 듯 보이는 목표를 이루려다 목숨을 잃었다.


이와같이 맹목적 적인 비전이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비전입니다. 물론 목표가 아주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맬러리의 경우에도 목표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목숨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리더들이 장애물을 극복하는 일에 급급한 나머지, 왜 이 일을 하는지 무엇을 위해 하는지도 모른 채 충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충동적이 되면 목표가 없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배가 풍랑을 만나니까 무작정 아무 섬에 피신간 경우와 같습니다. 이렇게 살다보면 당면한 문제들을 피해가서 그때마다 위험은 비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모른 채 어디론가 무작정 달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달리기는 달리지만 방향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삶입니다.


둘째, ‘다른 사람의 성공을 모방함’이 비전의 출처가 된 경우입니다.


성공을 모방하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과거의 성공을 모방함입니다. 오늘 자신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과거 이렇게 일해왔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일하는 경우입니다. 특히 과거에 이렇게 했더니 성공했을 때 사람들은 더욱 그렇게 합니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확신을 갖고 그렇게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과거에 해 온대로 말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과거는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성공이 오늘의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음도 아셔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는 더 말 할 것도 없습니다. 맥스 드프리(Max Depree)가 한 말입니다.


성공은 편견보다도 더 빨리 사람의 마음을 닫을 수 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과거의 성공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하는데 성공에 집착한 나머지 나아가질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공이 현재의 적이라는 뜻입니다. 피터 드러커의 말입니다.


비참한 실패라면 어렵지 않게 떨쳐내고 정리할 수 있지만 어제의 성공은 오래오래 떠나지 않는 법이다


여러분, 주님 따라갈 때 오늘날 가장 어려워하는 분들이 어떤 분인 줄 아시나요? 주님을 좇으면서 가장 힘들어하는 분들은 대개 과거에 신앙생활을 잘 했던 분들입니다. 과거에 신앙생활을 잘 하지 못했던 분들이나 은사의 경험이 별로 없었던 분들은 현재라는 시점에서 신앙생활하기 쉽습니다. 과거에 잘못했던 것을 잘 아니까 “아, 이게 하나님의 길이 아니었구나” 하면서 돌이키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과거의 길을 쉽게 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길을 붙잡는 일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열심히 주님을 좇으면서 은사를 나름대로 경험했던 분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것 때문에 어렵습니다.

 

놓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성공적인 사역자라고 칭찬을 들었다면 더더욱 어렵습니다. “아, 옛날에 이렇게 했어도 성공했었는데” 하면서 잘 버리질 못합니다. 문제는 “지금도 과거처럼 해도 잘 되는가?”하는데 있습니다. 안됩니다. 잘 된다면 하나도 문제가 없지만 지금 현재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끊어진 상태에 있다면 안됩니다.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있질 않기에 안됩니다. 그렇다면 왜 돌이키기가 힘든 것일까요? 과거의 성공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놓기가 힘든 것입니다. 이분들이 주님을 좇을 때 제일 어려워 하는 분들 가운데 한 분들입니다. 과거의 성공을 놓아야 하는데 놓질 못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동일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백성들을 인도하실 때 한번도 똑같은 방법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실 때에는 지팡이를 내밀라고 하시면서 바람이 불어오게 하여 바다를 가르셨습니다. 요단강을 가르실 때에는 제사장들로 하여금 언약궤를 메고 물에 발을 대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께서 홍해를 가르신 장면을 눈으로 보았지만 요단강 앞에서 똑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처럼 자기 손에 든 지팡이를 내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실 때에도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는 두 번째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할 때, 하나님께 대하여 영적으로 민감하질 못했습니다. 화를 내면서 반석을 내리쳤습니다. 그 결과, 반석에서 물은 나왔지만 가나안에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큽니다. 방법이 아닌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방법을 의존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존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들의 방법을 의존할 때 이미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것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A라는 방법을 통해 놀랍게 일하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지금은 더 이상 그 방법으로 역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방법을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존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라는 방법을 통해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속히 그 방법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방법이 아닌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다른 방법을 사용하시면 그 방법으로 가야합니다. 과거 때문에 하나님을 의존하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이유로 과거의 성공이 오늘의 적이라는 것입니다.


예배형태만 해도 그렇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예배 형태는 수없이 변천해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 형태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겁니다. 형태란 옷과 같은 것이라 언제든지 바꿔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옷이란 낡아지는 것이기에 시대마다 예배 형태는 다를 수 있습니다. 본질에 해당하는 몸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본질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시대마다 예배 형태는 바뀔 수 있습니다. 다만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이것은 바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소홀히 하면서 옷만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 앞에 순종하는 삶이 변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경외함으로 보좌 앞에 서려고 하는 삶이 변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각 시대마다 신앙의 본질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예배 형태를 찾는 것입니다. 예배 형태는 시대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A라는 형태에 B라는 옷을 입혔더니 예배의 본질이 가장 잘 살아났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 시대에는 그 예배 형태가 가장 옳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 당연히 더 이상 그 형태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양과 형태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모양과 형태에 의존하는 일은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양과 형태를 의존하는 일을 버리고 다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시대에 맞도록 다른 형태의 예배 모습이 주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성경에 기초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물론 성경에 예배의 형태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예배의 본체만이 나와있을 뿐입니다. 옛날에는 “불길 같은 성령이여” 노래하며 박수를 쳤습니다. 그 때에는 그렇게 예배하는 일이 옳았습니다.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런 모양으로는 성령께서 더 이상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 방법을 따릅니다. 방법에 매달립니다. 방법을 붙잡지 말고 하나님을 붙잡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질 않습니다. 여기서 리더는 하나님이 인도를 따라야 한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방법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좇아야 합니다. 그래서 리더는 과거의 성공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태 당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과거의 성공으로부터 빌려오는 비전은 올바른 비전이 아닌 부분을 나눴습니다. 과거의 성공은 어제의 기름부음으로 남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일반 사회에서도 다른 사람의 성공을 자기의 비전의 출처로 빌려오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 한 때 “PC방 하면 돈 벌더라”라는 말이 무성했습니다. PC방이 처음 생길 때의 일입니다. 이런 말이 도니까 너도나도 PC방을 개업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개업한 사람들은 돈을 벌었지만 뒤늦게 문을 연 사람들은 상당수가 망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성공의 출처를 자기 비전의 출처로 빌려왔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예가 될지 모르지만 한 때 우리나라 교회에 키보드 열풍이 분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부흥사례를 발표하시면서 “키보드를 사용하니까 교회가 성장했습니다”라고 말한 때문이었습니다. 이 교회 저 교회 할 것 없이 너나없이 다 키보드를 예배에 사용하였습니다. 종로2가 낙원상가에 악기가 모자랄 정도로 대단한 열풍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래가지 않아 키보드를 중고품으로 내다 팔기 시작했습니다. 종로2가 낙원상가에 이번에는 키보드 중고품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쌓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풍경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때 바람이구만, 유행이었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비전을 갖되 다른 사람의 성공에서 비전을 빌려왔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우심이 다 다릅니다. 모세를 세우신 하나님의 세우심이 다르고, 노아를 세우심이 다릅니다. 요셉을 세우신 하나님의 세우심이 다르고 아브라함을 세우신 하나님의 세우심이 다릅니다. 만약 모세가 노아처럼 세워지려고 했다면 아마 실패했을 것입니다. 만일 노아가 모세처럼 떨기나무 아래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했다면 반드시 실패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모세 외에는 딸기나무 아래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세우심이 제각각 다 다릅니다. 모세에게는 이스라엘을 인도하라고 하셨고, 노아에게는 방주를 짓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어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재빠르게 흉내내어 성공에 이룰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변의 다른 영적 거인들을 따라하기 위해서 흉내내어서는 실패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영적 거인들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새부대의 교회’가 세워지는 일은 세상 사람들의 인기와는 무관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전존재로 주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과 통치 아래 머무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다림줄에 합당하게 서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기준 가운데 서게되면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기준에 맞도록 서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표방하는 바와는 정반대일수 있습니다. 성공에 대한 개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경우 성공에 대한 개념이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단순히 성도수가 많아진다고 성공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의 교회들을 보면 더욱 깨닫게 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기신 부분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비전을 갖되 다른 사람의 성공을 가져와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뜻이 이루어지는 영적 리더쉽에 대해서 나누고 있는 중입니다.


셋째, ‘허영심’이 비전의 출처인 경우입니다.


이 세상은 ‘허영심 박람회장’입니다. 이 세상은 허영심을 가지고 먹고사는 곳입니다. 언젠가 버스 안에서 본 일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큰 소리로 “나 어제 골프장 갔었어. 넌 어땠어?”떠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은 자신이 골프장 간 사실을 은근히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알아달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허영심’입니다. 이생의 자랑 중 하나가 허영심입니다. 이생의 자랑이란 세상에 속한 것을 자부심으로 여기는 자세입니다. 허영심이 바로 이생의 자랑입니다.


문제는 비전이 허영심을 기초하여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모든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했습니다. 그 때 드러난 사실이지만 많은 기업들이 겉으로 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매출액만 높이기 위해 불필요한 사업확장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수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어야 했습니다. 허영심이 나라의 경제를 기초부터 흔들었습니다.


교회 역시 허영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의 말입니다.


종교 리더들은 진정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예배당을 증축하거나 예배를 TV 중계하는 식으로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다. 이런 이기적 리더쉽은 흔히 조직에 대한 충성의 표현이나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경건한 문구로 포장되는 법이다.


겉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한다고 하지만 중심에는 개인적 야망이나 탐심이 동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무 쓸모 없는 비전들입니다. 나폴레옹이 바로 이런 야망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성공했다면 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전쟁을 통해 자기의 영달과 명예를 높이기 원했습니다. 아마 부하들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나폴레옹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지도 않았을 뿐더러 사령관을 가만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이 리더의 잘못된 비전의 출처 때문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넷째로, ‘필요’가 비전의 출처가 된 경우입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의 말입니다.


비전의 보편적 출처는 필요를 인식할 때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어떤 회사가 마케팅을 위해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조사하여 회사의 상품을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편으로 제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참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에 좋으며, 상품의 질과 성능을 계발할 수 있어서 장점이 있습니다. 분명 좋은 일입니다.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마케팅 방법이 교회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설문조사를 하곤 합니다. 신자와 불신자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조사하여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함입니다.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영적 리더쉽에 있어서 이것이 자칫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보다는 사람의 야망을 성취시키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목회자가 아니라 국무총리였습니다. 반면 모세는 한 나리의 백성들의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이 말은 영적 리더쉽이란 반드시 교회 내에서만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교회 내에서든지, 사회에서든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일군으로 세우실 때에는 반드시 영적 리더쉽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요셉이나 모세는 분명 다른 영역에서 쓰임 받았던 인물들입니다. 전자는 정치계에서 쓰임 받았으며, 모세는 종교계에서 쓰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똑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에게는 똑같은 영적 원칙이 적용되었습니다.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다루시며 세우시는 원칙은 같았습니다. 그들에게 적용된 하나님의 기준은 똑같았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비전은 사람의 필요를 따라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행하심을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십시오. 요셉이 꾸었던 꿈들의 대부분은 꿈을 꾼 당시 바로 이루어질 일들이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일들이었습니다. 요셉의 꿈들은 요셉이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 행해질 때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마케팅 전략을 수용한 결과 외향적으로는 성장했을지 모르지만 세속화를 면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인본주의가 교회 내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목회자들이나 평신도 지도자들의 초점은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맞춰져 있습니다. 교인들이 무엇을 원하는가? 교인들이 듣기 원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교인들은 설교 시간이 얼마이기를 원하는가? 예배하는 시간은 1시간이 적당한가 아니면 1시간 반이 적당한가? 예배 분위기를 위해서 강대상은 어떤 모양이 좋은가? 실내 장식이 예배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의자는 장의자가 좋은가 아니면 개인용 의자가 좋은가? 그들의 관심에는 성령이 계시지 않습니다. 예배가 성령의 통치 아래 드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행동합니다. 단지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교회 살림을 꾸려 나갑니다. 물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그 자체가 모두 다 악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위기 신경 쓰는 자체가 악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비전의 출처가 어디냐는 것을 추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가시는 방향을 주시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가는 방향을 주시하여 보는 버룻이 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는 방향 앞에 뛰어가서 ‘내가 리더니 나를 따르라’고 소리친다.


필요가 비전의 출처가 된 경우는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겉으로는 ‘필요’의 문제이지만 속에는 개인적인 야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개인적인 야망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미명 아래 교회성장의 탈을 쓰고 리더들을 미혹합니다. 필요가 비전의 출처가 되면 목회자들은 메시지를 정직하게 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하나님의 관점으로 설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은 성경에나 등장하는 이야기가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주기에 교회가 성장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뜻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게 됩니다. 마케팅을 통해 교인수는 늘어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은 성취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교회들이 바로 그런 교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인기있는 교회였지만 하나님께는 쓸모 없는 교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사람들의 필요를 따라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비전을 품지 않습니다. 헨리 블래가비 목사님은 미국의 유수한 CEO(최고 경영자)들을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말은, 많은 CEO(최고 경영자)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기업을 운영하기 위해서 고민하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회사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CEO(최고 경영자)들을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많이 보았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우리를 훙분시키는 말입니까.


다섯째, ‘자원’이 비전의 출처가 된 경우입니다.


비전을 가지게 된 원인이 ‘자원’, ‘인력’, ‘장비’, ‘재정’이 된 경우를 말합니다. 자원이 있기에 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말합니다. 헨리 불랙가비 목사님이 든 예를 보십시오.


교단에서 주민 배포용으로 전도 비디오를 만든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교회는 놓칠 수 없는 좋은 기회라 보고 비디오 1,000개를 주문한다. 그리고 한 달 동안 토요일마다 교인들을 동원해 인근 지역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비디오를 배포한다.


분기 순이익이 발생하자 기업체는 현재 돈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새장비를 구입하고 인력을 충원한다.


여유 자금이 생기자 사업을 확장하는 경우입니다. 자원이 풍성해진 까닭에 만들어진 비전이 이런 경우입니다. 놀랍게도 어떤 군사령관은 병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전투에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정말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는 비전이 자원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원이 비전을 따라갑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원이 비전을 따라가면서 성취됩니다. 새물결선교회 전국 컨퍼런스를 치르며 경험하는 일들입니다. 어떤 분은 “한 번의 행사를 위해 수천만원씩이나 쓸 필요가 있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컨퍼런스를 행사로 보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좇아가는 것으로 보느냐? 의 차이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물질을 채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좇아가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도움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55장 8절과 9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람들이 아무리 인간의 지혜를 동원하여 계획을 세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도는 인간의 그것과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의도와 개인의 계획이 다르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목회자들은 나름대로 수많은 비전을 품습니다. “아름다운 교회를 세워야지”하면서 성공적인 목회자들의 목회 방법을 연구하고, 자료를 분석하고, 최근 경향들을 연구하면서 비전을 만들어갑니다. 그런데 이것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하면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하는 가운데 계획들을 빼곡이 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혹 효과가 나타난다고 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이 노력해서 얻은 결과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의 계획으로 성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 모두 자기들 계획대로 비전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비전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룬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비전이 어떠해야 함을 봅니다.


여섯 번째, 계시가 비전의 출처가 된 경우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비전 즉 참된 비전입니다.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참다운 비전은 계시에서 나옵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잠 29:18)


이 말씀은 우리나라에서 너무나 남용되었습니다. 그 참 의미가 오도되어 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묵시”라는 부분을 ‘킹 제임스 영어성경’은 “vision"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비전이 없으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방자히 행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오해하여 흔히 인용하는 구절인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와 더불어 이런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그래, 비전을 품자. 하나님은 이루어주실 꺼야.“ 그 결과, 모두 다 나름대로 목표를 세웁니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나는 할 수 있다”라는 문구를 책상 앞머리에 붙여 놓습니다. 직장인들은 직장인대로 “긍정적인 사고를 갖자”외칩니다. 목회자들은 목회자들대로 “나는 세계를 품는 목회자가 될 것이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당을 세우리라”라고 스스로 외칩니다. 다들 나름대로의 조감도를 그려놓고 매일 그것을 들여다봅니다. 그러다가 뜻한 바가 이루어지면 “아,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구나”라며 흥분해 합니다. 그러나 설령 목표한 바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열매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열매는 맺히는 법이니까요.


‘킹 제임스 영어성경’이 “vision”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원어는 사실상 “계시”로 번역하여 해석해야 옳습니다. 우리 말 번역인 “묵시”가 사실은 옳은 번역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묵시”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아서 이해가 선뜻 되지는 않습니다. 묵시란 계시를 말합니다. “방자히 행하다”는 말은 ‘방황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비전은 무엇일까요? 우선 비전은 하나님 편과 인간 편에서 이해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또한 인간 편에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볼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일을 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하셨던 일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이 하실 일 즉 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하신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더라도 확연합니다. 아브라함이 가진 하나님을 향한 계획이나 자신의 인생을 구상하는 계획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세대 속에 세워놓으신 뜻이 중요했으며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을 그 뜻에 맞도록 조종하여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모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 역시 한 때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비전을 세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그는 살인자와 도망자 신세를 면치 못했을 뿐입니다.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모세가 섰을 때에는 그의 계획이나 하나님을 향한 비전으로 서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의중을 알리시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획에 자신의 인생을 조종했을 뿐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교회 내에서든지 교회 밖에서든지 자신이 세워놓은 비전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 행하심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 때 앞서 언급한 비전의 세상적 출처를 따라 계획을 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잘 분별하여 하나님의 행하심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비전은 계시에서부터 옵니다.


제키 플린저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홍콩의 암흑가에 하나님의 사랑을 심는 일에 쓰임받고 있는 여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녀는 처녀 시절 예수를 믿은지 얼마되지 않은 때에 아시아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키 플리저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시아로 가는 배룰 탔습니다. 배가 홍콩에 이를 즈음 그녀는 다시 음성을 듣되 “여기서 내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홍콩에 내린 그녀는 암흑가의 대명사인 ‘월드 시티’라는 장소에 인도되었고 그곳에서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 후 수많은 매춘부, 갱단, 마약 중독자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녀의 말입니다

 

. “전 그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또 다른 도시를 보았습니다.” 그녀는 우리 눈에 보이는 암흑가, 우범도시를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로 새 삶이 시작되는 또 하나의 도시를 본 것입니다. 매춘녀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도시, 마약 중독자들이 마약을 끊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도시, 부모 없이 태어나 뒷골목을 전전하는 아이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도시를 본 것입니다. 그녀는 환상을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전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게 하신 비전, 하나님의 행하시는 바를 본 것입니다. 그녀는 그 비전에 자신의 인생을 투자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걸었습니다.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처녀의 몸으로 그런 무서운 곳에서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답변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 일을 안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있으라고 하신 곳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비전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다만 하나님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그녀에게 보이셨을 때 인생을 조정하고 순종한 것뿐입니다.


한 번은 교회가 시험에 들어 기도원을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기도원 원장이 설교를 하시고 있었습니다. 설교를 듣다가 안 사실이지만 그분은 하나님께서 당장이라도 나타나셔서 “내가 너희 교회를 어떻게 하랴?”라고 하시면 “네, 주님 우리 교회를 이러이러하게 만들어주세요”라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설교 중에서 느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전 방랑자였음을 깨닫습니다. 나아가는 방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부지런히 노를 젓기는 하였지만 목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전 어떻게 성도들을 인도해야 할까요?” 그 때 또렷히 하나님께서는 말씀해 오셨습니다. “너는 내 신부를 준비시켜라.” 하나님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했던 질문이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를 준비시키다”는 생각이 들자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지하실에서 성도 십여명 두고 신부로 단장시키는 일이 연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선교도 하고, 사람들에게 성공적인 목회자란 소리도 듣고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새부대의 교회를 세우라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이것은 제가 하나님을 위해 세운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저의 목표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획을 보이신 것입니다.


비전은 계시를 통해 주어집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다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이면 그것이 계시입니다. 이 때 비전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속하시려는 계획을 스스로 세우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아버지를 알기를 구했습니다.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면 순종하기를 힘썼습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이런 비전의 출처가 교회 내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두 분의 예를 듭니다. 마이클 허커비의 예와 존 베케트의 예가 그것입니다.


마이클 허커비는 목사님이었습니다. 약 2,500여명이 모이는 교회의 담임목사였습니다. 그런데 마이클 목사님은 무언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데서 오는 부족감을 늘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날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칸소주 정치계로 부르신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는 순종했고 유명한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이클 목사님은 정치계에 뜻이 있어 목회를 떠나 정치계로 입문한 것이 아닙니다. 정치를 위해 목회를 수단삼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날 선거 때가 되어, 교회 예배에 방문하여 “난 장로입니다”라고 강조하는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영달의 수단으로 삼은 사람들은 정치할 때 세상적인 가치관 그대로 일을 합니다. 그러나 마이클 주지사는 달랐습니다. 아직도 주지사를 하고 있는 줄 압니다. 그는 신앙적으로 정치를 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신앙의 삶으로 정치 업무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친밀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구하면서 미국 한 주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의 고백입니다.


주지사가 되면서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신앙에 의지하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믿음을 구하지 않고는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날마다 부딪힌다. 


존 베케트는 한 석유회사의 CEO입니다. 경제 위기가 와 모두 다 감원과 구조조정, 생산량 감축을 추구할 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생산량을 늘리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는 순종했으며 이 일을 통해 그의 석유회사가 다른 모든 석유회사의 생산량을 주도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경험을 하였다고 술회합니다.


제 마음에 열망이 있습니다. 목회하듯 사업하는 사람들이 세워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목회하듯 사업하는 리더의 필요입니다. 목회나 사업이나 똑같이 하나님의 일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저같은 경우는 하나님께서 목회자로 부르셨습니다. 목회 현장에서 교회성장을 목표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목표로 삼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을 목표하여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회복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가 임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여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며 십자가의 복음에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저의 일입니다. 반면 사업을 목회하듯 하는 사람이 세워지기를 바란다는 말은 이렇습니다.

 

  사업을 하되 목회하듯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목적이 되고 목표가 되어 사업하는 방법 역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저와 똑같은 가치관과 방법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세워지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면 사업은 더 이상 자신의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로 그 사람을 부르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만약 이것이 없으면 빨리 전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에 있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시간만 낭비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순종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뒷받침되기를 당연히 신뢰하며 기다리며 기대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채우십니다. 이렇게 사업이면 사업, 회사면 회사, 학교면 학교, 교직이면 교직, 사회 전반에서 이와같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리더로 세워질 때 이 땅은 치유될 것이며 회복될 것입니다. 그저 교회에서는 예수쟁이이지만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방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마치 하나님은 경제에 대해서는 백치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부와 명예를 끌어 모으는데 관심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식으로는 이땅은 고쳐지지 않습니다.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부추기는 가치관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나 뒷받침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처지를 보면서 하나님의 안목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전적으로 하나님의 뒷받침을 받아 행할 그 날을 바라봅니다. 그렇게 각 요소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워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개인적인 열망입니다. 모든 분야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 아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리더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목회자와 똑같은 가치관으로 사업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이 장에서는 리더가 비전을 얻는 출처를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세상적 출처와 성경적 출처를 살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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