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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쉽

리더의 섬김

by 은총가득 2010. 6. 24.

 

 

 리더의 섬김

 

         사도행전 19장 21절과 20장 17절부터 24절입니다.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회복시키시고 계십니다. 회복된 교회는 전례없이 주를 알고 사랑하며, 전례없이 거룩하며 하나되고, 전례없이 강한 능력의 교회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교회가 회복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어떤 분은 오늘날의 교회를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에 비유하곤 합니다. 마른 뼈가 의미하는 바는 ‘철저한 죽음’과 ‘소망 없음’입니다. 사실 주일 성수를 잘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생명이나 친밀함, 하나님의 실재, 하나님의 은혜는 실제로 많은 성도들에게서 경험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과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또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서 일반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 내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걷혀 있습니다. 교회 운영 역시 세상의 기업 운영 방식과 다를 바 없는 실정이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말세가 되면 그리스도의 신부를 회복시키셔서 단장할 것’을 약속하시고 계십니다.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물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마른 뼈들이 다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능히 살겠느냐?”라고 물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기에 에스겔은 “하나님이 아십니다.0”라고 답변하였습니다.

 

[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14]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위 구절은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4절과 5절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과 “생기”에게 명령하는 것은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의 은유적 표현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이 회복되었을 때 뼈들이 살아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큰 군대가 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를 보면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일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회복될 것을 암사하신 말씀입니다. 교회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며, 목회자나 평신도 상관없이 여호수아처럼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구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목적 앞에 순종한 결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임하여 하나님이 백성들 가운데 운행하시며 그들을 통해 역사하셔서 잃어버린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이 있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지며 하나님의 생명이 백성들 가운데 넘쳐남으로 세상의 갈급한 자들이 주님께로 돌아와 날마다 구원받는 자들이 더해가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교단은 다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 드려지는 일들이 불가능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금 언급한 일들을 이루실 수 있다는 것이 에스겔 골짜기의 교훈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이 일들을 조금씩 이루어 나가시며 하나하나 성취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나라 전체의 교회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서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인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크게 여섯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첫째, 비전을 끊임없이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 즉 우리 모두가 끊임없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으로 이 나라 교회와 사회 가운데 역사하셔서, 모든 교회가 변화될 뿐만 아니라, 모든 예배가 회복되며, 하나님이 친히 그 가운데 운행하시며, 백성들의 삶을 다스리시며 통치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세상과 죄를 이기고 그 속에 하나님의 거룩함이 충만하며, 주를 깊이 알고 온 삶으로 주님께 드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교회로 회복되어지는 비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제키 플랜저가 여인의 몸으로 홍콩의 버려진 도시로 갈 때에 그녀가 한 말입니다. “나는 그 때 버려진 도시 속에서 또 하나의 도시를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폭력과 갱들의 도시, 마약과 매춘, 도박이 성행하고 있던 도시에서 그녀는 부모가 누군지 모른 채 태어나고 자라난 아이들이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도시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버려진 도시 속에서 희망을 보았던 것입니다. 수십 년간 마약에 빠져있던 사람들이 주님의 능력으로 변화되어 생산적인 삶을 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삶을 드려 귀하게 쓰임 받는 도시를 본 것입니다. 젊은 시절을 매춘하며 보낸 창녀들이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도시를 그녀는 버려진 도시 속에서 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 이전과는 새생명 가운데에서 살아가며 다른 삶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희망없던 사람들이 보람있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녀는 보았다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제키 플랜저가 보았던 희망의 도시는 눈에 보이는 도시가 아닙니다. 그녀가 보았던 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이었고 우리는 이것을 비전이라고 부릅니다. 비전이란 우리가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교회회복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초청하셨고 이 일을 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비전을 다시 더욱 뚜렷하게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정확하게 비전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온 세계에 복음이 뿌려지고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곳에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더 나아가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스페인에도 가기를 원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이 그의 비전이었습니다.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13-14)

 

  여기서 푯대란 비전을 말합니다. 여기서 푯대란 주님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빌립보 3장은 주님을 아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의 본질은 삶 그 자체였습니다. 살아가는 목적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토대가 되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바울을 부르신 부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푯대였습니다.

 

  우리 역시 삶의 모든 것이 주님을 아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 알기를 열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어야 하는 필요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교회회복의 부분을 성취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이 푯대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이 푯대를 줄기차게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순간마다 보아야 합니다. 이 일은 영적인 경각심이 필요한 일입니다. 깨어있어야 가능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순간순간 세상에 눈을 돌리기 쉽습니다. 오락, 돈, 명예, 일, 인간관계 등에 쉽게 눈길을 두게 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쉽게 빠집니다. 이렇게 되면 비전이 너무나 쉽게 흐려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세상을 떠나서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돈을 벌어야 하고, 인간관계도 가져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때그때 하나님 앞에 다시 기도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푯대를 뚜렷이 보고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회복을 경험하시게 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만을 지속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비전을 꾸준히 바라보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일이 리더의 섬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일을 이루실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사실 매우 적습니다. 아니, 거의 없습니다. 비전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뒷받침이 있어, 우리나라 전체에 하나님의 부흥이 일어나려면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강력한 뒷받침이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부흥의 역사는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일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살아나기 위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야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빠삭 말라버린 뼈들을 다시 살리는 일이 어찌 사람의 일일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오셔야 가능합니다.

 

  예수를 믿지만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말씀과는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비즈니스를 위해서는 세상의 오락과 쾌락을 그대로 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술에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교회가 능력이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는 오늘날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기도사역 때 “하나님만 의지하시라고 합니다”라는 언급이 나오면 하나님의 비전을 지속적으로 보라고 하시는 음성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일을 성취하실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비전을 성취하실 수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비전을 보면서 지속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이렇게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은 당연히 의지하는 차원이 아니라 줄기차게 기도하며 하나님만을 찾는 차원의 일입니다.

 

  셋째, 추수할 일군을 양육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마 9:36-38)

 

  오늘날이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거짓신앙이 판을 치는 가운데 참다운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구하며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에서 행하고자 하는 무리는 적습니다. 이 때 일군들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실제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군들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넷째, 예수로만 옷 입고 예수로만 충만하기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지속적으로 구해야 할 것들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거룩하기를 구하는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예수로만 옷 입는다”는 의미는 개인적인 의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주님의 의만 의지하여 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로만 충만하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성품으로 충만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해 오십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제 자신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으로만 옷 입혀 주십시오. 주님으로만 충만케 하옵소서. 아버지의 거룩하심처럼 저 역시 거룩하게 해 주옵소서. 이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하실 역사를 위해 전례 없는 성령의 역사를 부으실 것입니다. 스가랴 4장 6절에 언급하신 7중 성령의 역사를 부으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와 동행하는 거룩한 삶이 필수입니다.

 

  다섯째, 전도와 섬김의 부분이 활성화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실제적인 사역을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위로는 예배가 회복되고, 아래로는 양육이, 그리고 신자들 간에는 사랑의 교제가, 불신 세계를 향하여는 전도와 섬김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전도와 섬김의 부분이 부족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가운데 엄청난 은혜를 부으실 것입니다.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대한 은혜의 물줄기를 교회에 부으시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불신 세계와 가난한 자들을 만지기 위함이십니다. 성령의 은혜의 물줄기가 병든 자, 가난한 자, 아픈 이, 장애인, 상한 자, 잃어버린 영혼들을 섬기는 일로 나아가지 않으면 이 물줄기는 끊어질 것입니다. 이 사역을 하면 은혜는 더욱 증가될 것입니다. 반드시 이 하나님의 은혜는 교회 내에 먼저 부어집니다. 그리고 여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때에는 마약 중독자들에게, 어떨 때에는 가난한 자들에게 어떨 때에는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의 사역은 균형 잡히면서 자라나야 합니다. 이 방면에서 활성화시키셔야 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세워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나라 전체를 바꾸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이 보이고 있다는 자체가 벌써 하나님의 일하심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14절부터 30절 말씀입니다.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 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위 구절은 달란트 비유입니다. 그런데 위 구절에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야단을 맞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오늘날의 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믿음이 매우 좋은 사람이란 점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24절과 25절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이 말은 무슨 말일까요? 이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능히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임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 이 한 달란트마저 잃어버릴까봐 두려워서 감추었나이다. 그리고 이제 여기 있나이다. 보소서. 당신은 당신의 것을 받았나이다.” 보십시오. 이 얼마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나름대로 신앙이 있는 소리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표현을 보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비전을 지속적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가운데 씨앗을 심어야 하는 필요성을 보게 됩니다.

 

  씨앗을 심지도 않고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니까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믿는 자세는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자세입니다. 어리석은 자세입니다.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받은 것마저도 빼앗길 수 있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씨앗을 심어 열매를 기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슨 씨앗을 심어야 할까요?

 

  무엇보다 말씀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새물결선교회에서 개최하는 전국 집회나 컨퍼런스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많은 돈을 들여 컨퍼런스를 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 컨퍼런스를 열게 하시는 이유는 말씀의 씨앗을 뿌리게 하기위한 목적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모두 이것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며 헌금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회 되는대로 말씀을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말씀의 씨앗을 심는 일은 한 번 심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마치 깃발을 높이 세우는 일과 같습니다. 성경에는 네 종류의 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디 바라건대 여러분 모두 좋은 밭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좋은 열매 맺는 일들이 풍성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음으로, 기도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 인생의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가운데 로마에 가기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했던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입니다.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노라 [8]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롬 1:7-15)

 

  이는 바울이 푯대를 향해 지속적으로 기도하였음을 봅니다. 여러분, 만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이 나라 가운데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셨다면 그 푯대를 바라보면서 씨앗을 뿌리되 말씀의 씨앗과 더불어 기도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다윗의 장막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나라에 부흥이 임하여 전체 교회가 새부대의 교회로 변화되고 새로워질 수 있도록 줄기차게 밤낮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중보기도의 영이 부어져 계속적으로 기도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고난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입니다.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전 4:9-15)

 

  예를 들어, 어느 지역이나 국가에 회복과 부흥의 역사가 있으려면 누군가가 그 지역이나 국가를 위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순교의 피로 교회가 세워지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고난주간에 고난을 재현하는 일을 말하지 않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면서 수많은 고난을 당했던 바울의 경우를 가리킵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고난을 말합니다. 복음의 일에 동참하기 위해 당했던 고난에 동참한다는 말이 참의미입니다. 바울은 이런 고난을 통해 생명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 하게 하려 함이라  (고후 1:3-11)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 11:23-28)

 

  위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죽음의 고난이 왔을 때 자신에게 생명이 넘쳐났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난이 닥쳐와도 어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고난에 동참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말이지만, 우리들은 사도 바울보다 훨씬 더 수월한 환경 가운데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누군가가 여러분을 감옥에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한다고 여러분을 굶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태장으로 때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우리들은 바울보다 훨씬 좋은 환경 가운데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방은 받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전체 교회가 바뀌려면 지각 변동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진과도 같은 일이 있어야 합니다. 이 때 비방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부분적으로 바뀌어서는 전체 교회에서 지각 변동은 없을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점진적으로 오든지, 갑자기 오든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야 지각변동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의 권세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때, 분리되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 앞에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신들이 이제껏 가지고 있던 신앙관, 편견으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는 부류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단이라고 정죄할 것이며, 어떤 이는 신비주의라고 조롱할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하나님이 역사하셨던 시기에는 항상 이런 일들이 있어왔습니다. 항상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고난을 감수하지 않고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 조롱받아도 비판받는 일을 감수할 수 없다면 이단소리를 듣는 것을 두려워하면 절대로 하나님이 이 나라에서 역사하시는 일을 위해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각오해야할 일들입니다. 이사야 54장입니다. 이사야 54장은 말세에 세우실 종들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14] 너는 의로 설 것이며 학대가 네게서 멀어질 것인즉 네가 두려워 아니할 것이며 공포 그것도 너를 가까이 못할 것이라 [15] 그들이 모일지라도 나로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니 누구든지 모여 너를 치는 자는 너를 인하여 패망하리라 [16] 숯불을 불어서 자기가 쓸만한 기계를 제조하는 장인도 내가 창조하였고 파괴하며 진멸하는 자도 내가 창조하였은즉 [17] 무릇 너를 치려고 제조된 기계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라 무릇 일어나 너를 대적하여 송사하는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이는 그들이 내게서 얻은 의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사야뿐만 아니라 예레미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전하면 대적하는 무리들이 일어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안전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강한 성이 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뒷받침하셔서 이기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회복되어져 갈 때, 이 땅에 십자가의 복음을 다시 증거할 때, 사람들은 대적해 올 것입니다. 기존의 가치관을 무너뜨린다는 명목으로 반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정직하게 전하면 하나님께서 대적을 물리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교회를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따르는 자들과 받아들이는 자들, 세워지는 자들을 늘려 가실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많은 반대라도 하나님의 역사를 반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이 나라 전체에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바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선교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열방을 위해 기도하라.” 언젠가 하나님께서 우리가 자녀임을 보여주시면서 열방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흔히 다른 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보다 열망이 적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모든 나라들이 다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나라를 위해서도 줄기차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곧 우리나라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에 대한 씨앗을 심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치 다른 교회들을 섬기다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교회를 세워 가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다른 나라를 섬겨야 합니다. 필리핀이나 중국을 섬기는 일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하는 것입니다.

 

  가끔 어떤 이들은 “우리 주제를 알아야지. 우리 성도가 몇 명인데 해외 해외를 운운하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을 몰라서 하는 말들입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상황을 이용하셔서 일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친히 이루십니다. 우리들은 다만 순종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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