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는 공동서신의 하나로서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유대교적인 서신이다. 야고보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두세 번의 언급을 제외한다면 차라리 구약에 적합한 책이다. 야고보서가 권면하는 생활은 모든 면에 있어서 율법을 준수하는 아주 경건한 유대인의 생활이다. 사실 야고보서에 대한 평가는 이외에도 매우 혹독한 비난만이 난무할 뿐이다. 예를 들어 '루터'(Luther)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혹평하였다. 물론 그는 야고보서와 바울서신간의 화해할 수 없는 갈등을 발견하고, 특히 바울의 '오직 믿음'의 교리에 배치되는 서신이라고 평가하였는데, 그의 혹평은 바로 이 갈등에 기인한다. 그러나 야고보서와 바울서신 사이에는 어떤 상충점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호 보완적이라는 견해가 최근에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즉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에 대해 논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못박고, 성도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도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함으로라고 말함으로써 바울의 칭의 교리를 보완해 준다고 본 것이다. 이와 같이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야고보의 가르침은 마태의 교훈과 아주 흡사하다(참조, 마 7:22). 따라서 '루터'의 혹평과 많은 비평학자들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는 그리스도교인에게 실천의 종교, 행함의 신앙을 가르치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하겠다.
제1부 야고보서의 역사적 배경
Ⅰ. 저자 및 수신자
1. 저자
1) 문제점
본 서신의 서두에서 저자는 자신이 야고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야고보란 이름은 이스라엘 민족에서 흔히 사용되는 이름 중 하나이다. 신약성경에서 야고보라 불리는 사람은 여럿 있는데 ① 세베대의 아들이요 요한의 형제 야고보(참조, 마 10:2; 막 3:17; 눅 6:14) ②알패오의 아들인 사도 야고보(참조, 마 10:3; 막 3:18; 행 1:13) ③ 주의 형제 야고보(참조, 마 13:55; 갈 1:19) ④마리아의 아들이며 요셉의 형제인 야고보(참조, 마 27:56; 막 15:40; 눅 24:10) ⑤ 사도 유다의 아버지 야고보(참조, 눅 6:16; 행 1:13) 등이다. 따라서 본 서신의 저자 문제는 쉽게 결정될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위의 야고보들 중에서 알패오의 아들과 마리아의 아들 야고보는 동일 인물로 간주되며, 사도 유다의 아버지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기록할 만큼 저명하지 않으므로 두 사람을 저자 문제에서 논외로 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그리고 주의 형제 야고보 중 하나로 좁혀지게 된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이들 중 오직 주의 형제 야고보만이 본 서신의 저자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유세비우스'(Eusebius)와 '제롬'(Jerome) 등이 야고보서를 위서로 규정한 점이다. 이들 초대교회 학자들의 언급은 현대의 비평학자들을 자극하여 적잖은 혼란을 야기한 바 있다.
2) 세베대의 아들과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가 본 서신을 기록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고 다른 학자들로부터 지지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들은 본 서신의 내용에 주안점을 두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첫째, 예수의 교훈과 세례 요한의 교훈 등과 유사한 표현과 내용들이 언급되므로 저자는 그들의 교훈을 친히 들은 예수의 초기 제자일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 약 2:1에 언급된 '영광의 주'란 표현은 벧후 1:16-18과 상통하므로 저자 자신이 변화산의 영광을 목격한 인물일 것이라는 점이다. 셋째, 야고보서에서 저자는 시기와 다툼을 반복해서 경계하는데 이는 저자가 주의 보좌 오른편과 왼편을 구하다가 그리스도께 질책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근거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를 본 서신의 저자로 간주하지만(Neander, Hilgenfeld, Michaelis),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44년에 순교하였으므로 본 서신의 기록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한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본 서신의 저자일 것이라는 추측은 그를 주의 형제와 동일시하는 '제롬'에 의해 크게 대두되었었다. 하지만 '작은 야고보'라 불리었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이름 그대로 저명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본 서신의 저자로는 부적당하다 하겠다.
3) 주의 형제 야고보
야고보서의 저자가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라는 견해에 대한 외증은 고대로부터 매우 풍부하게 전해진다. 열두 사도를 통해 이방인에게 교훈으로 주신 교훈집(Didache), 바나바의 서신, 이그나티우스의 서신, 허마스 목자서 등에서 야고보서를 인정하고 그 내용을 반영하는 듯한 유사점들이 다양하게 발견되었다. 또한 '이레니우스'(Irenaeus), '데오빌로'(Theophilus), '오리겐'(Origen), '저스틴'(Justine), '터툴리안'(Tertullian),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등 1-3세기의 저술가들은 직접, 간접으로 야고보서를 인용하거나 언급하였다. 그리고 이들 외증들은 거의 본 서신의 저자가 야고보임을 강조한다. 한편 야고보서에서 저자 문제와 관련하여 내증을 찾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야기된다. 왜냐하면 저자는 자신이 주의 형제라는 단서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본 서신의 저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길을 체험하였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영적 관계만이 중요했지 육적 관계가 문제되지 않았던 듯하다.
또한 본 서신의 저자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형제요 자매라는 의식으로 본 서신을 기록하였던 듯하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주의 형제임을 굳이 역설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Meyer). 그러나 본 서신에서 저자가 주의 형제 야고보라는 증거들이 전혀 없지는 않다. 먼저 야고보서에 넘치는 유대적 색채는 저자나 수신자가 모두 유대인이며, 당시 유대교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가 기록한 서신일 것이라는 가능성을 보인다. 둘째, 주의 형제 야고보는 예루살렘 사도 회의(참조, 행 15장)의 의장이었고 거기에 나타나는 야고보의 연설은 본 서신과 현저한 공통점을 보여준다(참조, 행 15:13-29). 셋째, 야고보서와 산상수훈은 공통점이 매우 현저하다. 이는 저자가 주의 교훈을 직접 들었으며 예수와 친밀한 관계에 있던 사람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본 서신의 저자를 주의 형제 야고보로 보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하겠다.
4) 진보적인 견해
주의 형제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고 유대 기독교의 대표자였기 때문에 본 서신을 기록할 만한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했던 전통적인 견해에 반대하여 진보적인 학자들은 본 서신의 저자를 1세기 말경에 활동했던 익명의 기독교인으로 생각한다. 진보적인 학자들은 전통적인 견해에 대해 비평학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자신들의 견해를 주장하였다. 먼저 그들은 야고보서의 훌륭한 헬라어 구사로 보아 팔레스틴 유대인의 글로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즉 당시 헬라어가 유대인들에게 알려지기는 했지만 아람어를 병용했던 유대인들로서는 야고보서와 같이 훌륭한 문체를 구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 그들의 생각이다.
둘째로 약 2:14 이하에 언급된 믿음과 행함에 대한 논의는 바울이 전도하던 시기에서 상당히 긴 시간적인 간격을 반영한다는 점이다. 셋째로 역사적 배경의 문제로서 야고보서에 언급된 사실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주의 형제 야고보의 행적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엄격한 유대주의 신봉자인 사도행전의 야고보가 '자유의 율법'을 말하는 야고보와 같은 인물일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평학자들은 야고보서의 정경화 과정에서 겪은 진통을 근거로 제시한다. 즉 야고보서는 교회, 특히 서방 교회의 반대로 인해 오랫동안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비평학자들은 야고보서가 진정 주의 형제에 의해 기록되었다면 그 권위에 있어서 의심받을 만한 근거가 없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을 한 것이다. 따라서 비평학자들은 익명의 기독교인이 본 서신을 쓰고 서신의 권위를 위해 과거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였던 야고보의 이름을 도용하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완벽하지 못하고 이들에 대한 전통학자들의 논리적인 반박 또한 거세기 때문에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하겠다.
2. 수신자
야고보서의 서두에 나타난 표현에 따르면 본 서신의 수신자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라고 한다. 하지만 유대인의 지파 구분은 기독교 시대 이전에 이미 사라졌기 때문에 서두의 열두 지파를 문자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더욱이 '흩어진 자'는 당시 헬라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의 별명이었으며, 야고보서 자체 안에서도 독자들이 꼭 유대인이라는 암시도 없다. 야고보서가 지적하는 죄조차도 유대인의 죄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인 죄이다. 또한 완전케 하는 자유의 율법이라는 말도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기보다는 기독교적인 사랑의 법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보다 더 적합하다. 따라서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가 유대인의 열두 지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다만 세계 도처에 흩어져 살던 기독교인들 전체가 본 서신의 수신자인지 아니면 지엽적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인지가 문제이다. '메이어'(Meyer)는 '흩어진 자'란 명칭 자체가 바벨론과 메소보다미아 지방에 정착한 사람들을 가리키기 때문에 본 서신의 수신자는 동방에 흩어진 기독교인들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착안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대다수의 학자들은 본 서신의 수신자를 '참된 이스라엘', 혹은 '영적 이스라엘'로 생각되는 기독교인들이라고 이해한다.
Ⅱ. 기록 연대
1. 전통적인 견해
야고보서의 기록 연대는 저자가 누구냐에 대한 판단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가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면 본 서신의 기록 연대는 그가 순교한 44년 이전이어야 한다. 또 전통적인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 주의 형제 야고보가 본 서신의 저자라면 그가 순교한 62년 이전이 된다. 그러나 전통적인 학자들이 또 선택해야 될 문제가 있다. 그것은 본 서신에 49년 예루살렘 사도 회의의 결정 사항인 식물(食物)의 구약(참조, 행 15:20)에 대한 언급이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따라서 야고보서의 저작 시기가 예루살렘 사도 회의 이전이냐 아니면 이후냐 하는 문제가 야기된 것이다. 외관상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 축적된 부(富)가 있었고 여러 정황들을 볼 때 본 서신의 기록 연대는 가능한 한 늦은 연대, 즉 60년경을 시사하는 듯하다.
적어도 '요세푸스'(Josephus)는 로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교회 내에는 얼마간 부가 축적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들 논증들 중에서 어느 것도 본 서신의 후기 연대를 지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교회 내에서 부를 축적했던 시기는 이미 45년 이후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전통적인 학자들 중에서도 이른 연대를 취하는 학자들(Meyer, Robertson)은 45-48년경에 야고보서가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사실 야고보서에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의 존재에 대한 지식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고 49년의 예루살렘 사도 회의의 결정도 반영되지 않았다. 또한 주의 형제 야고보는 그리스도교 초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올랐다. 뿐만 아니라 저자 및 수신자의 유대적 성격은 초기 기록 연대를 지지한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45-48년을 야고보서의 기록 연대로 취한다.
2. 진보적인 견해
야고보서의 저자를 익명의 기독교인으로 생각하는 비평학자들은 본 서신의 기록 연대 문제에 있어서 매우 자유스러운 견해를 제시한다. 왜냐하면 본 서신 서두에 언급된 야고보가 누구인가를 결정할 필요 없이 단순하게 내용과 정황을 통해서 기록 연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주장의 폭도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연대를 추정하는데 있어서 일차적인 근거는 야고보서와 다른 문헌들과의 관련성이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비교적 초기의 저작들을 인용하지 않는다. 대부분 바울의 후기 서신들이거나 1세기 말경에 나타난 기독교의 주변 문헌들이 언급되었다. 하지만 야고보서의 저자는 로마서, 고린도전서, 에베소서, 그리고 누가복음, 히브리서, 베드로전서 등을 알고 있었다.
더욱이 야고보서와 베드로후서가 모두 이단들이 바울의 교훈을 잘못 사용하는 점에 관심을 쏟는다는 사실은 가능한 기록연대가 125-150년경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즉 바울서신들은 그것이 전해진 지 약 25년 동안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2세기 중반에는 이단들에 의해서 바울의 사상이 지지받았기 때문에 기독교 교회에서는 인기를 잃어 갔다. 비평학자들은 바로 그 인기가 기울어 가는 시기에 본서가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왜냐하면 125-150년경에 바울서신은 교회에서 도외시되다시피 하였는데 야고보서는 베드로후서와 함께 바울서신의 실천적인 면을 보완해 주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진보적인 학자들은 대부분 125-150년경을 야고보서의 기록 연대로 결정하였다(Windisch, Hauck, Easton, Greeven).
Ⅲ. 기록 목적
야고보서의 기록 목적은 분명히 실제적이며 윤리적이다. 하지만 교리는 명백하게 표현되었다기보다 오히려 가려져 있고 간접적이다. 야고보서의 요지는 행위와 순종에 관한 교훈이다. 율법은 생활 속에 정착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만약에 성도들이 거룩한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려면 새로운 신앙의 윤리적인 의미는 실제적인 실체들로 적용되어 나타날 필요가 있다고 한다. 또한 본 서신의 분위기는 권면적이다. 이렇게 볼 때 본 서신의 목적은 구속함을 받고 친교를 나누는 자들, 곧 이방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 중에서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허물을 바로잡아 주고, 요동하는 자에게 훈계를 베풀며, 경건에의 훈련을 주입시키며, 신앙상의 퇴보를 꾸짖고, 참된 거룩을 권면하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진보적인 학자들은, 야고보서는 사랑과 믿음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자 바울의 가르침이 전통적인 것임을 가르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야고보서가 진실성을 찬양하고 거짓을 비난하려는 의도를 지녔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에 의하면 야고보서의 목적은 종교성이 도덕적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물론 비평학자들의 주장은 본 서신의 목적을 보다 폭 넓게 설명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일면 본 서신의 목적의 핵심을 벗어난 듯하다. 왜냐하면 야고보서의 진정한 목적은 교리를 강조한 나머지 도외시되는 신앙인들의 도덕성을 회복시켜 건전한 그리스도교 윤리관을 확립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Ⅳ. 특징 및 구조
1. 특징
1) 문학적인 특징
야고보서는 서신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서두만 서신의 형태를 취하고 그 이외의 부분에서는 특별한 형태를 취한다. 물론 야고보서의 마지막도 문안 인사나 축복 기도 등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런데다가 수신자의 실제적 형편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다이스만'(Deissmann)은 야고보서를 순수한 형태의 서신으로 보지 않고 윤리적인 교훈집(Didache)으로 본다. 또 야고보서의 문체는 히브리서와 유사하고 문학적인 체계는 헬라 철학에서 볼 수 있는 대화식(Dialogue) 전개이다. 여하튼 야고보서는 체계적인 교리서는 결코 아니며 기독교적인 설교라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야고보서는 문학적인 면에서 구약성경의 지혜 문학에 비견되는 일대 도덕적 교훈집의 성격을 띤다 하겠다.
2) 사상적 특징
야고보서의 내용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여러 가지 난점이 생긴다. 그 중 하나가 사상적인 것으로서 야고보서에는 기독교적인 복음의 선포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적 설교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본 서신 전체 가운데 단지 두 번 사용되었는데(참조, 약 1:1; 2:1), 이 두 구절은 문맥에서 삭제하더라도 내용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런 측면에서 비평학자들은 야고보서가 기독교적 문헌인지조차 의심한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야고보서가 본래 비기독교적인 문서였는데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삽입하여 '기독교화'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Mussner, Luther). 그러나 야고보서의 가치는 본 서신에 나타난 많은 교훈의 말씀들에 있다. 즉 야고보서에서 강조된 행함이란 단순한 세속적 윤리가 아니라 믿음을 전제한 신앙인의 윤리이다. 더욱이 야고보서의 저자는 공관복음에서 언급된 예수의 말씀을 비롯하여 구약성경의 잠언, 헬라의 교훈들로부터 많은 교훈들을 취하여 기독교인의 생활을 지도하려 하였다. 따라서 야고보서의 사상적 특징은 실천적 윤리 면에서 찾아야 한다. 사실 윤리적인 측면에서 야고보서는 신약성경의 어느 책보다도 현저하게 탁월하다.
3) 공관복음과의 관계
야고보서는 공관복음과 공통되는 본문을 많이 함축하고 있다. 특히 예수의 산상수훈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데 이는 신앙의 실천적인 면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한 야고보서는 베드로전서 및 구약 외경 중 솔로몬의 지혜서, 집회서 등과의 유사점도 많이 지적되며, 이로 인해 본 서신의 베드로후서 모방설, 애굽 기록설 등의 가정까지 대두되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공관복음에서의 실천적인 권면들이 야고보서에서 강력한 명령형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다른 지혜 문헌의 인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공관복음과의 관계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잃어 가는 성도들에게 산상수훈의 경험을 상기시킴으로써 신앙에 있어서의 실천적인 권면을 위해 인용한 것이 유사점으로 드러난 것이라 하겠다.
2. 구조
야고보서는 주제가 다양하고 그 주제들이 고정된 형식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요약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야고보서의 주제를 설정하려고 시도하는 학자들은 본 서신의 구조를 나름대로 제시하였다. 그 중에 하나가 야고보서의 주제를 '하나님의 의'로 보고 크게 셋으로 나눈 구조 분석이다(Knowling). 즉 '노울링'은 진실과 허위(참조, 약 1:2-2:26), 지도자들의 자격(참조, 약 3:1-18), 기독교인의 신앙(참조, 약 4, 5장) 등의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Plumptre). 이처럼 본 서신의 구조에 대한 제 견해의 공통점은 역시 윤리적 권면이란 점이다
제2부 야고보서의 특별 주제들
Ⅰ. '가난한 자의 경건'에 대하여
부자들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절대적인 빈곤에 처해 있는 가난한 자들과 약한 사람들, 하층민들의 경건에 대해서 야고보서는 훌륭하게 기술하고 있다(참조, 약 2:1-13). 본서에서 저자 야고보는 부자들과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윗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차별하는 사실을 문제로 삼는다. 즉 야고보는 사람을 차별대우하는 그 행위자체가 바로 죄라고 지적한다. 이 행위는 비록 그들이 다른 계명 전체를 준수한다 할지라도 율법 중의 율법을 범한 행위이기 때문에 율법 전체를 범한 것이 된다(참조, 레 19:15; 약 2:9-11). 이제 구약성경과 후기 유대교에서 가난한 자들이 어떤 관심과 대우를 받았는지, 그리고 그들의 경건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자.
1. 구약성경에서의 가난한 자의 경건
1) 사회학적 관심
레 25:23 이하에 따르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일하게 여호와의 기업을 사용하고 거기에서 이익을 취하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적어도 안식년에는 소유가 없는 자들도 토지에서 나온 수확을 같이 나눌 권리를 가진다(참조, 출 23:10, 11; 레 25:2-7). 더욱이 50년째 되는 '희년'에는 백성들 모두가 자기의 옛 소유 재산으로 돌아가야 하며 채무로 인한 종살이로부터 풀려난다(참조, 레 25:8-17). 하나님은 과부와 고아를 보호하시며(참조, 출 22:21-23), 가난한 자들의 송사에서 공의가 지배하도록 인도하신다(참조, 출 23:3, 6). 더 나아가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사회 규범을 예시한다. 즉 여호와의 땅에는 가난한 자가 없을 것이나(참조, 신 15:4),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핍한 자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참조, 신 15:11). 따라서 부유한 자는 궁핍한 형제를 위해 구제의 손길을 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경에서는 '가난'이 완전히 사회적으로 이해되었다. 즉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실천이며 가난한 자는 동포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은 왕조 시대에 이르러 점차 소멸되어 갔다. 따라서 부(富)는 왕과 그의 신하들, 그리고 왕이 총애하는 자들의 손에 축적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오만하며 폭력을 일삼는 부자들에게 반대하면서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옹호해야 했다. 그들은 부자들의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을 비난했다(참조, 사 5:8; 10:1, 2; 렘 5:26-28; 암 5:12; 미 2:2; 3:1-3). 하지만 선지자들에게 있어서도 '가난함'은 전반적으로 사회-경제적 개념에 머물렀다.
2) 종교적 관심
가난한 자들에 대한 종교적 관심과 이해는 시편에서 특히 강조되어 나타난다. 여기에서는 폭력에 의해 억눌리는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들과 동일시된다(참조, 시 37, 45편; 146:8, 9; 147:6). 특히 '탄식시'(Lamentations)에서 가난한 자는 박해받고 권리 없는 자, 곧 폭력을 일삼는 자들을 피해 여호와께 피난처를 구하며 판결에 져서 잃어버린 권리를 의로운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의탁하는 자로 나타난다(참조, 시 9:19; 10:2, 8-10, 14; 18:28; 35:10; 74:19). 이는 모두 하나님의 섭리의 도식으로 이해되는 낮추어짐-높여짐이라는 도식에 따라 소망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부유하고 권세 높은 자들에 의해 쫓기고 핍박받는 가난한 자가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고, '높여지는'데 반해서 이 악인들은 하나님에 의해 '낮추어진다'(참조, 시 37, 49, 73편)는 것이다. 이로써 가난한 자들은 경건하고 겸손한 자이며 부자와 권세자는 악하고 교만한 자라는 종교적 측면에서의 이해가 성립되게 된다.
3) 후기 유대교에서의 가난한 자
바벨론 포로 이후의 시기에 형성된 유대교 공동체에서는 가난한 자와 경건한 자가 단순하게 동일시되지 않았다. 습 3:12에서는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희 중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고 하였다. 즉 여기에서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단순히 가난해서가 아니라 겸손한 까닭이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교만한 자들을 질타하고 위협하신다(참조, 습 3:11). 반면에 가난한 이에 대해서는 악인과 달리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서 있으며, 구원을 오직 하나님께만 바라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굳게 믿으며, 항상 겸비한 영을 소유한 자라고 칭찬하신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경건한 자의 이상적인 전형이 드러났다 하겠다. 즉 가난한 자는 그야말로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의 전형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약성경, 특히 바벨론 포로 이후에 형성된 유대 공동체에서는 '가난한 자의 경건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하나의 관점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 점은 더욱더 발전하여 쿰란 공동체 내에서는 '가난한 자'가 곧 '겸비한 자'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2. 야고보서와 가난한 자의 경건
구약성경에서는 '가난한'이란 용어가 '겸손한'이나 '의로운'이란 표현과 동일시되었다. 그리고 야고보서에서는 구약성경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의 낮추어짐과 높여짐이라고 하는 종말론적 도식이 나타난다. 즉 권세 있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부자들에 의해 가난한 자가 낮추어지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이 부자에게 내릴 심판에 의해 가난한 자가 높여진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이다. 이 점은 후기 유대교의 전통 안에서도 발견되다. 하지만 야고보서의 주장과 후기 유대교 공동체의 하나인 쿰란 공동체 문헌의 주장과는 차이점이 있다. 특히 '전쟁에 관한 두루마리'라는 명칭을 갖고 있는 문서와는 전혀 생소한 느낌을 줄 정도로 차이가 난다. 쿰란 문서 중의 하나인 전쟁 두루마리는 종말에 하나님을 모르는 부자들인 벨리알의 아들들을 대적하여 가난한 자들이 일으킬 성스러운 전쟁에 관하여 언급한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은 이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얻게 된다고 한다.
반면에 야고보서에는 억눌리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모든 도움이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다고 한다(참조, 약 5:2 이하). 따라서 야고보서에 나타난 가난한 자들은 철두철미하게 종교적으로 옳다고 규정된 것이다. 물론 이들 가난한 자들이 일반적으로 경제적인 면에서 실제 가난한 자들이었고 부자들이 물질적인 면에서 부유한 자들로 이해되기 때문에 사회적인 규정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가난한 자의 경건성은 종교적인 성격을 갖는다. 즉 야고보서에 드러난 가난한 자의 경건성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는 종말론적 인내와 확신에 있다. 그들은 비록 가진 것이 없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실 그때에 모든 것을 채워 주시리라고 확신했다. 따라서 야고보서에 나타난 가난한 자의 경건은 구체적으로 일어난 역사적 경험, 곧 실제로 압제당하고 소유를 빼앗기는 경험을 낮추어짐-높여짐이라는 도식에 비추어 해석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같이 신실하고 겸손한 삶의 종교적인 이상을 서신의 수신자들에게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제시함으로써 해이해져 가는 신앙생활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두 가지 기능을 발휘하였다 하겠다.
3. 예수의 선포와 가난한 자의 경건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한 예수(참조, 눅 1:52, 53; 2:7, 24)는 가난한 자들을 축복하였는데(참조, 눅 6:20), 이때는 물론 실제로 가난한 자들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바로 그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되었다(참조, 마 11:5; 눅 4:18, 19; 7:22). 예수는 소유 자체를 근본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부자들이 화를 입을 것이라고 소리쳤고(참조, 눅 6:24), 재물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이야기했다(참조, 막 10:23). 즉 재물을 섬기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다는 교훈이다(참조, 마 6:24). 또한 재물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게 하고(참조, 막 4:19), 임박한 종말의 시대에 사는 자들을 나태하게 만들어 결국 구원에서 멀어지게 한다(참조, 마 6:19, 20; 막 8:38; 눅 12:15). 반면에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귀중한 진주이며 밭에 감추어진 보화로서 지상의 모든 소유를 무가치하게 만든다(참조, 마 13:44 이하).
따라서 재물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면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일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찾는 자에게는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기 때문이다(참조, 마 6:33). 특히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라고 부른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참조, 마 10:9, 10; 막 1:18; 눅 14:33). 이처럼 예수의 선포 속에서 재물은 무가치하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방해가 될 뿐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난한 자는 경건한 자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배설한 잔치에 참여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물론 예수는 단순하게 그들이 가난해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그들의 겸손과 경건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불 때 야고보서의 '가난한 자의 경건'은 예수의 선포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고 하겠다. 예수나 야고보나 모두 '화가 있으리라'는 경고를 통해 부자들을 질책하며, 양자 모두 부자들의 물욕을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또한 양자는 가난한 자의 낮추어짐-높여짐의 도식 안에서 사고하며, 고난당하는 이웃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한다. 단지 가난한 이의 경건에 관해서 예수보다 야고보가 더 일관성 있게 관철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야고보는 특히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에 의해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시한다. 예수가 자신의 가르침을 비유의 형식을 빌어 제시한 것에 반해서 야고보는 매우 분명한 사건들을 범례로 들어 교훈을 제시한다. 따라서 예수의 선포와 야고보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서로 표현양식에 있어서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동일한 내용을 말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부자들에 대해서 야고보가 예수보다 더 큰 혐오감을 가졌던 듯하다. 아마도 그것은 초대교회가 겪는 상황과 관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야고보는 초대교회 내에서 발생한 재물로 인한 신앙의 해이함과, 부자와 권세자들에 의한 가난한 자들의 억압 상태를 구약으로부터 전승된 낮추어짐-높여짐의 도식을 이용하여 표현하였다 하겠다. 따라서 야고보서의 가난한 자의 경건 도식에는 초대교회가 겪었던 박해가 간접적으로 표현되었다고 하겠다.
Ⅱ. 야고보서의 종말론
1. 마지막 시간인 현재
야고보서에서 역사의 마지막 시간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확고한 믿음은 약 5:8, 9에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그것은 두 문장으로 명시되었는데, 하나는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이다. 첫째 문장이 주의 강림의 시간적인 절박성을 강조하는데 비해서 둘째 문장은 이미 문밖에 서 계시는 심판자의 형상에 주목한다. 즉 지금 당장이라도 심판자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따라서 현재의 시간은 위협적으로 눈앞에 다가서 있는 종말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현재는 곧 마지막 시간이다. 부자들은 눈이 멀어서 이러한 성격을 띤 시간을 알아보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말세에'(약 5:3), 그리고 다가올 심판의 날, 곧 '도살의 날'(약 5:5)을 위하여 재물을 모은다.
이 '도살의 날'은 부자들의 욕망이 얼마나 헛되고 부질없는 것인가를 극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야고보는 이들이 모은 재물이 마지막 날에 하나도 남김없이 없어지리라고 선언한다(참조, 약 1:10, 11; 5:1-3). 이렇게 이해된 현재는 믿음을 가진 교회에게는 시련의 시간으로서 주어지는데 이 시기에 교회는 인내하는 가운데 자신을 지켜야 한다(참조, 약 1:2-4, 12; 5:7-11). 이러한 생각 역시 현재를 마지막 때라고 이해하는 종말론적 설교의 전형적인 주제이다. 한편 마지막 때는 치열한 시험의 시기이기 때문에 교회로서는 인내를 키울 수 있고 또 이를 증명해 보일 수도 있는 특별한 기회이다. 이러므로 야고보서의 시간 이해는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초대 교인들의 전형적인 시간관을 보여준다 하겠다.
2. 인간의 한계성
야고보는 이 마지막 때의 인생의 허무함을 부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난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부자는 들판의 꽃과 같이 사라지며(참조, 약 1:10), 그가 이룬 업적과 함께 없어진다(참조, 약 1:11; 4:14). 이처럼 야고보는 마지막 때의 인간 실존을 표현하기 위해 풀의 시듦이나 사라짐 등의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인간 실존의 허무함과 빨리 지나감을 강조하였다. 특히 야고보는 현지라는 시간의 종말론적인 성격을 극단적으로 제시하였다. 즉 야고보에게 있어서 현재가 갖는 종말론적인 성격은 교회로 하여금 독자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거나 허무맹랑한 계획을 세우는 모든 행위를 금지시킨다(참조, 약 4:13-16). 왜냐하면 지상적인 '내일'은 교회로서도 보장할 수 없으며, 따라서 내일의 실존이란 불안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하나님에 의해서만이 가능한 내일, 곧 미래에로 수신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킨다(참조, 약 1:12, 18, 21, 25; 2:5; 4:12; 5:7, 8). 그는 특히 다가올 심판을 강조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미래를 낭만적으로, 혹은 공상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재의 일상생활에서 그들의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 진지하게 강조되었다. 이처럼 마지막 때를 사는 인간의 실존은 매우 불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현실 생활에서 도외시된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자의 교훈이다.
3. 강림, 심판, 구원
강림, 심판, 구원은 종말론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들이다. 야고보서에서는 심판자<krithv" ; 크리테스>, 심판<krivsi" ; 크리시스>, 심판하다<krivnein ; 크리네인> 등 이 세 단어가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리고 다가올 심판을 위협적으로 시사하는 구절 등에는 이들 세 단어 중 어느 하나가 반드시 쓰였다(참조, 약 2:12; 4:12; 5:9, 12). 심판은 유일한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다(참조, 약 4:12). 삶 가운데서 자비를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 역시 자비롭지 않으리라는 것이 야고보의 선언이다(참조, 약 2:13). 곧 야고보는 믿음만으로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인간이 구원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참조, 약 2:14). 반면에 자비를 베풀었고 이웃 사랑이라는 최고의 계명을 지킨 자는 심판 때에 하나님의 긍휼을 받으리라고 한다. 그리고 긍휼은 심판을 이기리라고 선언하였다(참조, 약 2:13; 5:11). 또한 야고보는 심판자가 이미 문 앞에 서 계시며 그는 강림하실 주와 동일하신 분이라고 선포하였다(참조, 약 5:8, 9).
그러면서도 야고보는 '형제들'에게 재림을 인내함으로 기다리라고 권면한다(참조, 약 5:7-11). 즉 야고보는 임박한 재림의 때와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견인에 대해 권면한 것이다. 이 점은 야고보서에 '재림의 지연'이라는 내용이 언급되지 않은 사실로도 증명된다. 뿐만 아니라 야고보서는 종말론적인 가르침 가운데서 긍정적으로 교회의 구원을 선포하며, 또한 하나님에 의해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약 1:12)이 교회에 주어지리라고 설명한다. 특히 야고보서에는 가난한 자의 경건이 강조되고 있으며, 지금은 박해받고 권세자들로부터 배척받지만 이들 가난한 자들이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약 2:5) 받게 될 것이라고 한다. 더욱이 야고보는 병든 자들의 구원을 확약한다(참조, 약 5:15). 그리스도의 교회는 박해받고 억눌린 상태를 견디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새 창조의 '첫 열매'이다(참조, 약 1:18). 이와 같이 야고보서에서 그리스도인의 전 실존은 철저하게 구원, 곧 생명이냐 심판이냐는 종말론적인 목표를 향하고 있다.
4. 종말론과 야고보서의 윤리
야고보서에 있어서 종말론과 윤리의 밀접한 관계는 무엇보다도 본 서신의 윤리적인 동기를 살펴볼 때 분명해진다. 특히 다가올 심판에 대한 위협적인 시사가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약 3:1에서는 선생이 되려는 욕심에 대한 경고가 나온다. 즉 야고보는 교회의 선생에게는 '더 큰 심판'이 내려질 것이기 때문에 무분별하게 선생이 되려는 욕심을 버리라고 권면한다. 또 약 4:11과 약 5:9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시사와 더불어 이웃을 비난하는 행위가 경고된다. 즉 교회는 심판 받지 않기 위해(참조, 약 5:12) 말을 할 때 전적으로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부자들의 사악하고 반(反)사회적인 행위에는 '마지막 날들에' 축적된 그들의 재산과 그들까지를 모두 멸절시키는 무서운 심판이 내려지리라고 선언한다(참조, 약 5:1-5). 이처럼 야고보서에서는 윤리가 종말론적인 이유로 강조되었다. 거꾸로 긍정적인 종말론적 동기 설정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약 1:12의 축복의 말에는 시련 가운데서 견뎌낸 자에게 하나님에 의해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이 확증되었다. 또 말씀을 결연히 행동에 옮기는 자에 대한 축복의 말(참조, 약 1:25) 역시 종말론적인 어조를 띤다.
약 1:21에는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과 윤리적인 결단이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약 2:5에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유업의 상속자로 택하셨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가난한 자들에 대한 올바른 대우를 촉구하였다. 그리고 그릇된 길로 빠진 형제의 영혼 구원을 위해 애쓰는 일은 종말론적인 죽음으로부터의 영혼 구원과 연결되었다(참조, 약 5:20). 또한 교회는 가까이 다가온 주의 강림을 생각하며 이 시기의 고난을 인내와 끈기로 견뎌내야 한다(참조, 약 5:7-11). 아울러 야고보는 사랑의 실천과 하나님께 대한 복종 가운데서 생동적인 믿음을 견지하라고 권면한다(참조, 약 2:14-26). 즉 야고보는 성도의 목표를 이미 종말론적인 완성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설정하는 것이다(참조, 약 1:4). 따라서 야고보서의 윤리적인 가르침은 그 동기를 스토아 철학의 윤리와 같이 자연적인 완성의 교리에서가 아니라 종말론에서 발견한다. 물론 스토아 철학의 윤리적인 요청들과 유사한 내용들이 야고보서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의 저자는 자신의 수신자들에게 종말론적인 자각을 불러일으키려고 의도했기 때문에 본 서신의 종말론적인 동기 설정을 부인할 수 없다. 야고보는 수신자들에게 가까이 온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어내고 그 약속에 참여하기 위해 이 '마지막 날들'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말하였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언급은 인내(patience)를 가지라는 간곡한 권면에도 불구하고 수동적으로 기다리라는 권면은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교회는 말씀의 근본적인 실현이라는 의미에서 능동적인 부름을 받았다. 즉 교회는 마지막 날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적극적으로 생동적인 믿음을 실천해야 한다. 이점은 바로 예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약 1:19 이하에 언급된 말씀을 실천하라는 권면에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인 첫 열매에 대한 지적이 선행되었다는 사실이다(참조, 약 1:18). 즉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이 생동적인 믿음을 지키며 신앙을 견지하기 위하여 인내하는 모든 행위의 근거를 종말론적인 첫 열매에 둔 것이다. 이처럼 바울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야고보에게서도 '행동'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표징이었다.
5. 결어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야고보서의 종말론은 윤리적 실천 문제와 결부되어 선포되었다. 따라서 야고보서에는 신학이 결여되었다고 하는 '디벨리우스'(Dibelius)의 언급은 재고되어야 한다. 물론 신학이라는 개념 속에 '그리스도론'만을 포함시킨다면 야고보서에는 신학이 거의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신학이 본질적으로 종말론이기도 하다면 야고보서는 신약성경에서 종말론을 증거하는 여러 문서들 속에 들어갈 수 있다. 게다가 야고보서의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언급과 매우 유사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마지막 때를 윤리와 결부시키면서 예고하셨기 때문이다. 예수의 종말론적인 선포에도 심판에 대한 생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윤리적인 가르침 역시 종말론적인 동기 설정을 드러낸다. 그리고 예수가 인간 실존을 종말론적인 시각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야고보도 임박한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자들의 윤리적 실천에 대해 가르친다. 이렇게 볼 때 야고보서는 종말론적 시각으로 조명한 기독교인의 윤리 규범서라 하겠다. cafe.daum.net/okn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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