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이 모세의 시체를 두고 미가엘과 다툰 이유(유1:9)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느냐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한편 행악자는 마지막 순간 예수를 믿고 간구함으로 낙원을 허락 받았다. 그러나 예수를 3년 반이나 따랐던 제자 중 가룟 유다는 마지막 예수를 배신하고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었다. 성경에서 위대한 삶을 살았고 또한 위대한 죽음을 보여준 인물로 '모세'를 꼽을 수 있다. 물론 모세의 삶에도 실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고, 모세를 통해서 많은 기적과 이사를 행하셨으며, 그를 통해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의 규범을 전해주셨다. 모세의 위대한 삶과 그의 실수 그리고 그의 위대한 죽음을 통해,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며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을 생각해보자.
1. 모세의 위대한 삶
1) 모세는 120살까지 살았다.
모세는 초기 40세까지는 바로왕의 궁전에서 세상 학문을 배우며 자랐다. 그럼에도 그는 유아기에 친어머니 요게벳을 통해 이스라엘의 신앙 교육을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면서 자랐다. 애굽 학문의 소산으로 그는 살인죄를 범하고 도주하여 미디안 광야에서 중간 40년을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면서 지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지도자로 세우시기 위한 연단의 기간이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모세를 온유하고 겸손한 자로 변화시키셨다. 성경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12:3)"라고 증거한다. 그 인생 마지막 40년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출애굽시켜, 광야 생활 40년 동안 위대한 지도자로써 이스라엘을 인도하였다.
2) 모세는 하나님께 충성했다.
이스라엘 광야 40년 생활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그마한 고난이 오면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고, 심지어 모세를 돌로 치려고까지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고 그 응답대로 행하여 수 많은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시내산을 8번씩이나 오르락 내리락하며, 두 번씩이나 40일 금식하며 하나님과 대면하며 대화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출33:10)'라고 성경은 말한다. '모세는 ..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Servant)으로 충성하였고(히3:5)'라 성경은 말한다. 참으로 겸손히 하나님의 종으로 충성을 다했다.
3) 모세는 자기 백성들에게 신실했다.
모세가 시내산에 여섯 번째 올라가 십계명 두 돌판을 받아오는 동안 산 밑에서는 아론을 중심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하고 있었다. 이를 본 모세는 돌판을 던져 깨뜨렸다. 모세는 다시 일곱 번째 산에 올라 이스라엘의 사죄를 구하며 중보 기도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어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32:31-32)라고 자기 자신보다 자기 백성의 사죄와 구원을 간구하는 모습에서 모세가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신실함을 보게 된다.
2. 모세의 실수
1) 애굽인을 은밀하게 살해함 - 모세의 초기 40년 바로 궁에서 학문을 익혔던 모세는 애굽 사람이 자기백성 이스라엘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주위에 사람들이 보나 안보나 살핀 후에 애굽인을 살해하였다. 이 사건이 발각되었을 때 모세는 미디안으로 도주했다. 물론 모세의 실수였다. 이것은 애굽 학문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모세를 광야 40년의 연단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일을 행하게 하셨다. 우리도 많은 실수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 마저도 마침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유용하고 아름답게 하신다.
2)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을 내게함 -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광야 40년 초기에 르비딤에서 반석에서 생수 내게 하셨다. 이 때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석을 쳐서 물을 내라고 하셨고 모세는 그대로 행했다. 그러나 광야생활 40년 말기에 또 이스라엘은 마실 물이 없어 아우성 칠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명하심대로 하지 않고 전에 행했던 경험대로 반석을 치면서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민20:10)'말하여 반석을 쳤다. 물론 모세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물이 단번에 나오지 않았으며 반석을 두 번째 치니 나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지도자 모세의 체면을 생각하사 물이 나오게 하신 것이다. 그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20:12)"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왜 모세에게 이토록 엄벌을 내리셨을까? 반석에서 생수가 나게 한 사건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간 구속사에 가장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류에 구원의 길 즉 영생하는 생수를 제공해 주심을 예표해 준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 사건이다. 그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한번 죽으심 (Once for all) 모든 믿는 자들의 죄를 속죄하신 것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절대로 예수께서 두 번 세 번 죽으셔야 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인데 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거룩하심을 모세가 흐려버렸기 때문이다. 아주 중요한 이 사건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모세는 자기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했다. '나로 건너가게 하소서(신3:25)'라고 간구했다. 하나님의 법정 심판을 바꾸어 달라고 호소했으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신3:26)'고 하셨다.
3) 모세는 자기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됨을 백성들의 잘못으로 핑계함. -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됨은 분명 모세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됨을 이스라엘 백성 때문이라고 핑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신3:26)고 모세는 말한다. 모세는 자기 잘못을 이스라엘 백성 너희들 때문이라고 전가한다. 하나님은 모세 너의 불신과 불순종 때문에 네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신32:51)고 말씀하시는데 모세는 줄곧 너희들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진노하여 자기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거듭해서 말했다(신1:37, 3:26, 4:21) 모세의 실수와 같은 실수들이 우리 일상생활에서 자주 있음을 고백하며 은밀한 중에 악을 행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 행하며, 마음을 잘 다스려서 분노를 절제해야 하며, 나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는 일을 삼가야 할 것이다.
3. 모세의 위대한 죽음.
1) 하나님의 뜻(말씀)대로 죽음 - 본문 5절에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어'라고 말해준다. 모세는 광야 40년이 되었을 때, 즉 그의 나이 120이 되었을 때 그는 혼자서 느보산(신32:39)에 있는 비스가산(신34:1) 꼭대기에 올라가서 저편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다.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모두 완수하며(후계자 여호수아를 세웠고, 이스라엘의 후손을 축복하였음) 자기 사랑하는 백성들이 저 축복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하는 모세에게는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내가 다 이루었다' 말씀하심과 같이 실수 많은 부족한 자이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 승리케 하신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생을 마쳤지 않겠는가?
2) 영육에 강건할 때 죽음 - 본문 7절에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 하였더라'고 성경은 말한다.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분별력이 있음을 말해주며,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기에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에서도 홀로 산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로 모세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그의 영과 혼과 육이 강건하였다(살전5:23)고 말할 수 있었으니 참으로 복된 죽음이었다.
3) 하나님께서 모세의 장사하심 - 세상의 모든 사람의 장례예식은 다 사람들에 의해서 사람들이 참석하는 가운데 장사한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이 장례를 맡아하셨다. 우리말 성경에는 본문 5절에 '모압 땅에서 죽어'라고 표현했지만 영어 성경에는 'He buried him'라고 말해준다. 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장사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유다서 9절에는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길 원하노라' 하였거늘'이라 말해준다.
이 의미는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를 장사할 때 마귀는 이를 막아서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 거대하게 장례하고 모세의 묘를 거창하게 만들어 세우길 주장했었을 것으로 간주된다. 왜냐면 마귀는 모세의 묘가 대대로 알려져 유명해지길 바랐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모세의 묘가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지길 원치 아니하셨디 그래서 본문 6절에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가 없더라'고 말씀한다. 이는 모세의 묘가 우상이 되는 것을 하나님은 막으신 것이다. 실로 모세는 시종일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었고 그의 묘를 남기지 않고 죽었다. 먼 훗날 신약에 와서 예수께서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 예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영광중에 계셨던 것을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보았던 것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
모세는 인간으로 실수도 했지만 위대한 삶을 살았으며 또 위대한 죽음으로 생을 마쳤다. 주님의 뜻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자는 참으로 복된 자들이다. 모세가 변화산에서 예수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났었던 것처럼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다가 마지막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 후엔 우리는 영광 중에 주님을 뵈옵고 영원한 천국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유다서의 미가엘과 사탄과의 논쟁
유1:9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유다서 9절은 보수주의 주석가들에게 몇 가지 어려운 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다가 다시 그려내고 있는 이 사건은 구약에서 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나 오리겐 같은 교부들의 글에 근거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유다가 이 이야기를 외경인 『모세의 승천서』에서 빌려왔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에는 일반적인 외경에 대한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물론 심지어 본문이 외경에서 온 것일지라도 우리는 정경의 무오류성에 대해서 옹호할 수 있습니다. 즉 비록 그것이 비정경적인 책에서 왔을지라도, 성령께서는 유다가 이 이야기를 외경에서 인용하도록 인도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의 질문들이 계속 우리를 귀찮게 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인가? 혹은 유다가 자신의 신학적인 관점을 지지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전설을 인용하였는가?
게다가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유다가 묘사하고 있는 사건은 정말로 이상한 것이나 다름없어 보이고, 유다는 그것의 의의에 대한 설명을 하지도 않습니다. 왜 미가엘이 사탄과 모세의 몸에 대해서 논쟁했습니까? 모세의 몸이란 무슨 뜻입니까? 기발한 사고가 요구되어지지만, 그들 가운데 무엇도 진지하게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아마도, 유1:9의 끝 부분의 인용문인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리라”는 것의 본래 구절을 추적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얼마간의 진전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슥3:1-2의 인용입니다.
슥3:1-2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이 힌트를 대충 보는 것으로는 기대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슥3:2과 유1:9은 단지 병행되게 인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정밀하게 관찰하면 다른 병행들도 보다 잘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첫째, 유9절에서 “누가 하나님과 같으신가?” 라는 이름을 가진 미가엘(참고.출15:11)은 오직 다니엘서(10:13,21,12:1)와 계시록(12:7)에서 언급됩니다. 다니엘은 미가엘을 “군장 중 하나”(10:13), “군(Prince, 君)”, “위대한 군(大君)”으로 묘사합니다. 미가엘은 바사와 헬라의 군들과 맞서 확고하게 서있는 유일한 존재였습니다(10:20-21). 다른 경우에 다니엘은 메시야와 동일한 것으로 군을 인용했습니다(9:25). 계12:7에서 미가엘은 용과의 전쟁에서 천사들을 이끌었습니다. 이 모든 구절들이 미가엘은 그리스도일 개연성을 뒷받침합니다.
게다가 David Chilton이 그의 계시록 12:7 주석에서 지적한 것처럼, “archangel”은 단지 “천사장”(살전4:16)을 의미하고, 이 이름은 “여호와의 사자” 혹은 “여호와의 군대장관”등으로 폭넓게 적용되고 있습니다(수5:13-15, 출23:20-23).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동의하기를 “여호와의 천사”는 성육신하시기 전에 성자께서 나타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천사장 미가엘”은 “여호와의 사자”면서 “그리스도”입니다.
둘째, 슥3:2의 “사탄”과 유1:9의 “마귀”는 무엇입니까? 히브리어 “사탄”은 비록 군사적인 적대자와 관계가 있을지라도(삼상29:4, 왕상11:14,23,25), 때로 법정의 고소자라는 특별한 의미로 쓰였습니다(욥1-2장, 시109:6). 그런데 슥3:1에서 사탄은 여호수아 우편에 서 있습니다. 이는 법정에서 고소하는 자의 자리입니다. (일부 주석가들은 여호수아가 성전에 서 있다고 하는데, 성소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에 법정적인 측면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사탄의 LXX의 번역은 “διαβολος” 즉 “마귀”입니다. 이는 유1:9에 쓰인 단어와 같은 것이고, LXX에서 자주 쓰이는 것입니다 [대상21:1, 에7:4, 8:1(하만에 대하여), 욥1-2장 여러곳에, 시109:6]. 사탄 혹은 마귀가 유1:9과 별로 관계없이 병행되어 언급된 다른 구절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슥3:2로 돌아가면, 우리는 유1:9에서 강화된 병행을 발견합니다.
유1:9에서 천사장 미가엘은 마귀를 꾸짖었습니다. 슥3:2에서 주의 천사가 사탄을 꾸짖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두 구절 모두 법정의 충돌 속에서 동일한 배역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슥3:2에서 (여호와의 천사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사탄을 꾸짖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다른 곳에서 “여호와”와 “여호와의 천사”가 교차적으로 쓰이고, 동일한 분을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합니다(참고. 출3:1-6)
만약 슥3:2이 유1:9과 병행구절이라면, 모세의 몸은 무엇입니까?
슥3:2에서 여호와의 천사와 사탄은 제사장 직분에 대해서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고소자인 사탄은 분명하게 대제사장의 때묻은 옷에 대해 주목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때묻은 옷을 입은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직분을 감당하기에 적절하지 못했습니다 (신23:13-14). 게다가 제사장 여호수아는 이율배반에 빠져 꼼짝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즉 그는 성전 제사를 재정비하여 깨끗하게 될 필요가 있었으나, 더 이상 성전이 없는 한 그는 정결 의식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에 의한 모든 체계는 정결한 제사장이 없으므로 붕괴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제사장 제도와 새로운 성전 체계를 세울 새로운 “모세”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스가랴가 깨끗함의 선포를 들은 새로운 모세가 되었습니다. 그의 옷과 관으로 제사장인 여호수아의 임관식을 인도했습니다(3:5)
그러므로 유1:9의 “모세의 몸”은 아론적인 제사장 직분이고, 함축적으로 모세에 의한 모든 제사와 사회 체계가 될 것입니다. 왜 제사장 직분을 모세의 몸이라고 했겠습니까? 아마 새 언약의 제사장 직분을 가진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모세의 몸”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히3장의 “모세의 집”과 “그리스도의 집”이란 용어를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은 것과 같이, 옛 언약의 사회가 모세 안에서 세례를 받은 것(그래서 제사장 민족이 됨)이 분명합니다(고전10:2). 이는 다소 무리한 해석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육체를 묻은 것에 대해서 미가엘이 사탄과 논쟁을 했다는 것보다는 무리한 해석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는 슥3:1-2의 환상을 구속사 안에서 앞뒤로, 즉 에덴으로 그리스도에게로 확대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인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후에 영광의 옷을 더럽히고 성소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아담을 시험한 고소자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담은 당신의 한 인격 안에다가 환상 안에 있는 세 모습을 모두 결합하셨습니다. 즉 사탄을 꾸짖으시고 성부 앞에서 우리의 변호인이 되신 여호와의 천사, 참된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기 위하여 부활의 몸인 깨끗한 새 옷을 입은 더럽혀진 옷을 입었던 제사장 여호수아, 영광스런 새로운 제사장을 위해 새 옷과 관을 준 선지자 스가랴 입니다.
수세기 동안 일부 주석가들은 이 해석 같은 것을 따랐습니다. 즉 이미 17세기에 젠킨(W.M. Jenkyn)은 유1:9의 한 해석으로 이것을 인용했습니다. 오늘날의 주석가들은 유1:9 끝부분을 스가랴서에서 인용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유다서가 슥3장의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다라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무시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말하기를 유다는 병행하는 상황에 이 인용문을 단순하게 적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구절에는 보다 강한 관련이 있습니다. 즉 유1:9에 있는 것은 슥3장에 기록된 환상의 특수한 반영입니다.
좌우간에 유1:8-9의 실제적인 점을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의 문맥은 천사적인 위엄을 욕하고(8절) 사탄을 꾸짖기를 망설이지 않았던 1세기 교회의 이단들의 토론에 대한 것입니다. 요점은 이단들이 귀신의 힘에 반응하는데 부주의하고 무모하다는 것입니다. 마귀와 직접 대적하는 것을 포함하여 귀신으로부터 구원받는 자의 수가 많아지는 등 교회에 보고되어지는 모든 이상한 일들에서, 우리는 유다가 권고한 주의를 새겨들어야 합니다. 즉 사탄에 대해서 꾸짖는 심판을 성급하게 말하는 것보다도, 우리는 미가엘의 본을 받아야 하고, “여호와께서 너를 꾸짖으시리라”고 성부에게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 By James B. Jordan /tr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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