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메섹 회심은 바울에게 무엇인가?
송영목
신약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분량을 기록한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은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Christophany) 회심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apokalypsis: 갈 1:12)이었다. 바울은 다메섹 사건을 그가 전한 복음의 기원(the origin of Paul's Gospel)으로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중생과 소명이 서로 얽혀 있는’ 다메섹 사건을 바울이 여러 차례에 걸쳐서 언급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행 9:1-19, 22:3-16, 26:9-17; 참고. 고전 9, 15; 갈 1; 카슨, 무, 모리스, 1993:247).
그렇다면 다메섹 사건은 바울의 사상에 어느 정도 그리고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 물론 바울의 유대-바리새인적인 배경과 헬라적 배경도 바울의 신학에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흔적으로 남아 있다. 길리기아 다소(Tarsus)는 헬라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기에, 황제숭배(the imperial cult)와 스토아 철학과 같은 사상적 영향이 바울에게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바울은 엄격한 디아스포라의 유대교 가문 출신임을 기억해야 한다(참고. 메이천, 1988:62).
즉 다소에는 헬라어로 예배를 드리는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인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어릴 적에 예루살렘에 이사 와서 바리새인으로서 교육을 받았다(빌 3:5). 하지만 바울의 신학의 기초는 이러한 헬라적 혹은 유대교적인 배경이라기보다는 급작스런 다메섹 체험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메섹 사건은 회심차원을 너머 사도적 소명과 권위 그리고 계시와 연관되어야 한다(갈 1:1).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와 같은 사람에게 배워서 획득한 계시를 선포하지 않았다(갈 1:11-12). 대신 하나님의 은혜로 직접적인 계시를 받아 복음의 핵심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그러나 다메섹 사건이 바울 신학의 주요 논점 그 자체는 아니다. 바울에게 다메섹 사건을 선포할 의향은 없었다. 바울이 자신의 복음, 소명, 그리고 사도적 권위가 다메섹 체험에 뿌리박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다메섹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마륵센(W. Marxsen)과 같은 편집비평주의자에 의하면 예수님의 부활 자체가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묵시적) 신앙과 고백의 문제이기에, 바울이 부활의 주님을 실제로 만났다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본다(재인용 in 플레브닉, 2000:30).
하지만 다메섹 사건은 묵시적 사상이 반영된 허상이 아니라 실제로 바울과 부활하신 예수님 사이의 직접적인 대화가 이루어졌던 사건이다. 사실 학자들은 다메섹 사건을 여러 차원에서 설명하려고 시도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비평적인 해석은 물론, 바리새적 가르침과 율법의 타당성에 대한 바울의 내면의 갈등과 같은 종교-심리적인 현상만으로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신비적 체험, 환상, 황홀경과 같은 용어들은 다메섹 사건의 한 부분만을 설명할 뿐이다 (참고. 고후 12:1-4). 바울은 오히려 이 사건을 ‘계시’와 ‘주님을 보는 것’으로 묘사한다.
다메섹 사건은 바울의 삶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점이었으며, 박해 받던 기독교 공동체는 이 회심 사건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지만(갈 1:23-24), 동료 유대인들은 율법의 마지막이신 그리스도를 믿었던 바울을 오히려 율법을 범했다고 대적하며 정죄했다(고후 11:24-25; 갈 6:17; 참고. 신 25:2 이하). 그 때 바울은 표면적인 유대인을 벗고 이면적인 유대인이 되었으며, 표면적인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을 할례를 받았다(롬2:28-29).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주님으로 믿고 알게 되었다. 바울은 십자가는 저주가 아니라,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과 사랑의 표시였음을 알게 되었다(롬 5:6-10; 8:31-32; 갈 2:20). 바울은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새로운 구원의 질서이며(갈 4:4), 옛 시대와 율법을 대치하였음을 깨달았다. 다메섹에서 바울이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신앙이 시작되었다. 즉 바로 이 사건이 바울이 독특하게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주되심에 대한 신학적 강조점의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신앙으로 이전의 율법과 할례 등에 관한 자신의 지식과 신념을 재평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것은 더 이상 하나님과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되지 못했다(롬 5:18-21; 7:1-25; 빌 3:3-9).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만 통로가 되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성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고 동참하는 것이다. 심지어 다메섹 사건은 바울의 (구약)성경 이해에도 변화를 주었다. 고후 3:6-18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구약을 읽을 때 수건을 벗은 얼굴로 보게 하여 그리스도의 빛 속에서 해석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고 새 언약의 일군으로 자청한다(고후 4:6).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계시만 받은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사도로서의 소명도 받았다(행 26:16-18; Cerfaux, H. Schlier, J. Jeremias, J.C. Beker, P. Stuhlmacher [1986:78] 등). 김세윤 (1994:96-97)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구약과 유대교에서는 말씀에 의한 계시가 없는 신의 현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항상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증거의 말씀과 자신의 사도 임명의 말씀이 수반되는 것으로 묘사되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사도로 임명하시는 것과 같은) 다른 부활의 나타남과 같은 성질의 것으로 생각한다”(마 28:9-10, 16-20; 눅 24:13-35, 36-43; 요 20:19-29; 21:1-23).
따라서 다메섹에서는 단지 핵폭탄과 같은 사도로서의 소명만 받았고, 시간이 흘러 이방인의 사도로 구체적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참고. B. Rigaux). 아마 바울과 지상의 예수님과의 대면이 없었고(데이비드 웬햄, 2002:19), 다메섹에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신 예수님과의 바울이 대면한 것은 주로 성취-완성의 빛 속에서 계시가 주어진 이유가 된다. 즉 구원의 보편성, 새 창조, 믿음, 율법의 마침과 같은 주제(롬 10:4)는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상의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유이다.
따라서 바울의 전체 신학이 다메섹 체험의 영향 하에 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물론 바울의 신학 안에 발전된 모습이 등장한다. 여러 가지 상황과 선교적 필요성 등으로 인해 그의 신학은 발전되었을 것이다. 즉 다메섹에서 회심한 이후 약 25-30년이 지나서 기록된 서신들에는 파루시아에 대한 기대가 긴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든가, 대신 그리스도와 교회의 현재적 연합이라는 주제가 부각되고, 이신칭의 등에 초점이 맞추어 지는 것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다메섹 사건에서 복음 선교의 본질적 내용이 부여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바울의 모든 신학이 다메섹 사건에서 결정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바울은 다메섹에서의 직접적인 계시 이외에, “내가 받은 것(paralamban)을 너희에게 전하였다” (paradka)라고 말한다(고전 15:1-3). 이 용어들은 랍비들이 전통의 전승(oral and written tradition)을 묘사할 때 주로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에 관한 전승을 가리킨다. 복음의 사건에 대한 역사적 이해나 새로운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다른 것들을 포함한 복음의 형태는 바울 이전에 있던 사람들에 의해서 그에게 전달되었다(참고. 갈 1:18).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바울이 받은 전승의 인용과 자신의 구성에 이 전승된 용어를 사용한 것 사이의 구분은 매우 모호하다. 그리고 이 전승에 대한 근원이나, 신학적 경향과 같은 추상적이고 막연한 자료들을 사용하여 주석적, 신학적 결론을 도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런 전승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이 약 90회 이상이나 인용한 구약 성경이다. 바울은 율법과 선지자를 성취하신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의 완결된 구속 사역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바리새인의 관점에서 구약을 읽던 것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구약을 읽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도 완결적 독법’(Christotelic reading; Peter Enns의 용어)이라 부른다(참고. 카슨, 무, 모리스, 1993:248-249). 덫 붙여서 주목할 점은, 바울의 영향력은 교회 역사를 살펴볼 때 현대까지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거스틴이 386년 여름에 죄악 된 생활을 청산하지 못한 체 내면의 깊은 갈등 속에서 몸부림 치고 있었을 때, 롬 13:13-14절 말씀을 읽고는 의심의 그림자는 씻겨 내려갔다.
1513년 루터는 시편 강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시 31:1절의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구절을 결국 롬 1:17절 말씀의 빛 속에서 이해하여, 하나님의 의는 공의의 하나님이 죄인을 심판하시는 것이라기보다는,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는 바 바로 그 의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1738년 존 웨슬리는 런던의 한 모임에서 로마서 강해를 듣던 중 구원을 위하여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웨슬리 형제의 복음 전파와 부흥에 영향을 미친 것은 바울 신학 중, 하나님의 최초의 용서하시는 은혜와 계속적인 성령의 내적인 사역일 것이다(참고. 갈 4:19).
칼 바르트의 1918년 로마서 주석 초판도 중요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은 스코틀랜드의 변호사이자 목사였던 Thomas Taylor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다. 교회개혁과 복음전도의 부흥의 영향을 받아 민주주의적 발전이 진행된 나라에서는 바울이 교회 개혁과 복음전도의 부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민주주의적 발전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은 성례들이나 사제가 집례했느냐의 여부에 의해 구원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전하게 응답하는 것이 구원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더 이상 주교의 말에 마술적이고 신비적인 힘을 부여하는 사제들의 카스트제도가 아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코틀랜드의 민주주의의 기원을 본다. 즉 Taylor는 바울이 기독교의 모임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인종적, 종교적, 성적, 사회적 편견들 또는 차별이 모든 새 창조에서 사라질 그 날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보라. 브루스, 1992:502-507).
1.
‘바울과 테글라 행전’(the Acts of Paul and Thecla, 1:7)에 보면, 디도는 오네시보로에게 바울의 외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바울은 신장이 작은 사람이고 머리숱이 별로 없었고, 다리는 휘어져 있었고, 건강은 안 좋았고, 눈썹은 서로 붙어 있었고, 코는 약간 구부러져 있었지만 은혜로 가득 차 있었는데, 때로 사람으로 보이다가 천사로도 보였다”(고전 2:3; 고후 10:10; 참고, Hone, 1820:100).
이런 대략적인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라는 인상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2세기 중엽의 전승에 기초한 문학적인 묘사일 뿐이다. 이런 바울의 외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사상적 측면이다. 예수님 당시에 율법 해석의 관점에서 볼 때 샴마이(Shammai)학파와 힐렐 (Hillel)학파로 구분된다. 힐렐은 바벨론에서 온 유대인으로서 샴마이에게서 배웠다. 엄격한 보수주의자였던 샴마이는 이방인들을 멀리하고, 때로는 인간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바울은 가말리엘(1세)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그는 힐렐의 손자로 여겨진다(카슨, 무, 모리스, 1993:246; 브루스, 1988:45; 참고. J. Jeremias).
그래서 개종 전의 바울은 이방인에게 열린 태도를 가진 비교적 자유로운 할례의 전파자였다(갈 5:11). 개종 후에는 이방인의 선교사로 나갈 수 있었던 것도 바울이 받은 힐렐의 영향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Jacob Neusner와 같은 이들은 힐렐과 가말리엘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가말리엘이 샴마이에 더 가깝다고 본다. 김세윤도 Neusner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회심 전의 바울은 극단적인 보수파 바리새인으로서 샴마이학파에 속하였고, 열심당의 신학적 동기로 교회를 박해한 자로 본다(참고. 메이천, 1988:64). 그러나 바울이 힐렐적인지 샴마이적인지는 더 시간을 두고 고찰해 볼 일이지만, 바울은 이 두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 같다.
2.
2세기의 무라토리안 정경과 이단 말시온의 정경(AD 144년 경)의 목록에 바울 서신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아서 바울 서신의 집성이 이미 아주 이른 시기에(아마도 2세기 초)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약 15년에 걸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개인이나 교회에 서신들을 보냈다. 그러면 누가 이 편지들을 모아서 집성했는가? 바울 사후에 어떤 한 사람(예. 디모데)이 했나? 아니면 교회에서 바울의 서신을 예배 중 성경낭독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 교회적인 차원에서 흩어진 서신들을 모았는가? 정확한 답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바울 서신의 연대가 어떠하든, 바울 서신들이 수집죄면서 새롭게 편집되거나 수정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한 편집자나 아니면 여러 편집자들이 바울의 서신들을 모아 재구성했다고 보기 보다는, 단순히 바울의 서신들을 수집해서 복사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참고. 카슨, 무, 모리스, 1993:263). 19세기 비평시기 이후 현대 비평학계에서 바울의 진정성이 인정되는 것은 롬, 고전후, 갈, 빌, 살전, 몬 7권뿐이다.
소위 ‘제 2바울 서신’들은 ‘엡, 골, 살후, 딤전후, 딛’ 이렇게 6권이다. 특별히 데살로니가후서의 바울 진정성을 인정하는 비율은 비평학자 안에서 반반이며, 목회서신과 관련하여 비평학자들의 80-90%는 바울 저작을 반대한다. 만약 이 7권의 바울 진정성만 인정한다면, 통일성 있는 바울 신학 전체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3.
바울이 예수님의 ‘현현’을 ‘계시’(apokalypsis)라고 부르는 것은 그 현현이주님의 파루시아의 예시 또는 선취적 실현이었음을 암시한다. 즉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오실 때 보여줄 형상으로서 바울에게 제시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부활의 나타남과 선취적인 파루시아라는 점에서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독특한 사건이었고, 그러므로 나중에 일어나는 카리스마적인 주님의 계시(고후 12:1)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높임 받으신 부활의 주님이 영광의 광채를 동반하여 바울에게 계시되셨는데, 이것은 최종 파루시아 시의 주님의 영광스런 계시를 미리 예시하신 것이다. 이 객관적이고 외적인 사건은 바울 존재의 중심부에 영혼을 뒤흔드는 영향을 주었다.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행 9:3; 22:6; 26:13; 고후 4:6; 참고. 김세윤, 1994:95).
4 바울의 회심에 대한 심리적인 준비를 규명하기 위해 노력한 학자들은 박해 하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절개가 핍박자 바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며, 그의 광적인 핍박을 유대교에 대한 그의 억눌린 내적 회의의 표현이었으리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혹자는 행 26:14절의 격언(“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 네게 득이 없다는 의미)과 롬 7장의 율법 하에 있는 사람의 갈등에서 회심을 위한 심리적인 준비를 찾는다. 롬 7:7-25절은 바울이 과거 유대교에 있었을 때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 인간(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된 인간과는 구분되는)에 대한 객관적인 경험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에는 바울의 생애와 쉽게 들어맞지 않는 요소들이 있으며, 사람의 율법을 지킬 능력에 대한 의심 등이 급진적인 어조로 포함되어 있다. 장래가 촉망되며 열심 있던 바리새인 바울은 그의 회심 이후에야 비로소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 인간의 무력함에 대한 통찰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기억할 것은 바울은 이러한 율법과 관련된 인간의 경험을 묘사함에 있어서 자신의 율법 아래에서의 경험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고 볼 이유는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바울이 율법에 대해 회의를 느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유는 만약 바울이 그런 갈등과 회의를 느꼈다면 ‘토라의 기치 아래 투쟁하기 위해 투구를 더욱 단단히 조여 매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유대교의 몰락을 목표로 하거나 유대교를 원수시하는 복음을 선포하도록 감동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바리새적인 신앙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감동되었던 것이다(참고. 김세윤, 1994:88-91; 슈툴마허, 198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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