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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고린도를 찾아서

by 은총가득 2022. 5. 1.



문제 많은 고린도교회

코린트(Corinth)라고도 하는 고린도는 ‘뿔’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덴(아테네) 서쪽 64㎞ 지점에 위치한 고린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아가야 주(州)의 수도이며 항구 도시이입니다. 지중해 연안 국가들의 해상 교통과 무역 중심지였고, 동시에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각 나라와 민족의 우상들이 총집결한 현란한 우상 도시였습니다.

한창 번성할 때는 인구 30만 명이었다고 하니 고대 도시로는 대도시였습니다. 주전 146년 로마제국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주전 44년에 재건되었고 수차례의 지진으로 파괴되었지만 지리학적인 요건으로 다시 재건되었습니다. 2만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야외극장이 있었고, 이곳에서 고대 운동 경기 등이 치러지기도 했습니다. 또 고린도에는 대략 1천 명 정도의 신전 여사제(창녀)들을 거느리고 있던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어 온갖 음행이 자행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고린도는 음행이 보편화 되었습니다.

 

 

 


무역항이 있다 보니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은 이곳의 정보를 얻기 위해 많은 돈을 주고 여자들을 하룻밤 사서 산으로 데리고 가 거기서 밤새 정보를 교환하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이 지역이 성적인 문란이 심했다는 것은 고전 5:12절에도 나타납니다.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 도다.” 물론 친 어머니는 아니더라도 아버지의 아내인데 그를 범하고 교회는 이를 덮어두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성접촉을 예사롭게 여겼기 때문에 주로 처녀들이 무역상들을 접대를 한 것으로 보이고 그것은 은밀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아는 것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교회에 나오니 지식이 많은 여자들이 교회에서 시끄러울 것은 뻔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4:34-35절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일침을 놓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런 일도 공중목욕탕이 생기면서 점차 사라졌다고 합니다. 무역상들은 공중목욕탕에서 적은 돈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린도 항으로 들어오는 모든 물품들은 등급을 매기기 위해 끌어올렸다가 다시 배출하는 과정에서 신전을 거쳐야 했기에 시장에 나오는 식료품들이 신전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보니 성도들이 우상의 제물이라 사먹기가 주저함이 있어 바울은 고전 8장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도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공중 목욕탕


학문(철학)과 우상 숭배가 극명하게 대립되며 조화를 이루던 이런 고린도에 사도 바울이 첫 발을 내디딘 것은 제2차 선교여행 때였습니다.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본도 출신의 천막 제조업자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게 됩니다.

 

 

 

부자들은 이런 몸 석상을 사서 자기들의 머리를 만들어 붙여 정원에 세워 두었다고 한다.

 


하나님은 묘하게도 바울과 아굴라의 직업인 천막제조업으로 연을 맺어 만나게 하셨고 바울을 만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납니다.
‘브리스길라’(행 18:2)는 ‘브리스가’의 애칭이며 정식 이름은 ‘브리스가’(프리스카, 롬 16:3)로 ‘작은 노부인’이란 뜻이고, ‘아굴라’는 ‘독수리’란 뜻입니다. 브리스길라는 유대 사람인 아굴라의 아내가 되었는데, 로마 귀족 출신으로 추정됩니다.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 때(A.D. 41-54년) 로마에서 추방되어 고린도로 이주해 왔습니다.(행 18:2)

전승에 의하면 성경에 여섯 차례 언급되는 이들 부부의 이름 가운데 네 번이나 ‘브리스길라’가 먼저 언급되고 있는데,(행 18:18, 26; 롬 16:3; 딤후 4:19), 이는 브리스길라가 남편 아굴라보다 신앙심과 열정이 뛰어나고, 더 활동적이었을 뿐 아니라 로마 태생으로서 남편보다 더 로마의 문화적 여건과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바울이 에베소로 건너 갈 때 함께 동행하여 에베소에서 머물며 바울의 전도활동을 도왔고 교회를 섬기는 자로 기록되고 있습니다.(행18:18-19)

 

 



바울은 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고린도에서 복음 사역을 시작합니다. 또한 마게도냐로부터 온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하고 고린도의 회당장 그리스보의 회심으로 복음 사역은 일취월장(日就月將)하였습니다(행 18:1-8).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은 18개월을 체류하며 사역하였습니다(행 18:11).

고린도교회는 고린도라는 도시의 특성상의 문제들이 그대로 나타나는 그야말로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여러 민족이 뒤엉켜 살고 있었고, 음란한 도시였으며, 철학과 이방신들의 우세가 그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에도 많은 민족이 뒤엉킨 것과 같이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었고, 음행이 있었으나 덮고 있었으며, 이혼문제, 우상제물, 제사문제, 은사문제 등이 있었습니다. 그런 고린도교회를 위한 바울의 처방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좋은 교훈을 남기는 사례가 되었습니다.

 


고린도 운하


고린도에는 세계 3대 운하 중 하나인 고린도 운하가 있습니다. 서쪽 바다인 이오니아해와 동쪽 에게해를 연결하는 길이 6.7Km, 폭 25m, 수심 8m, 운하 양쪽 벽을 잇는 다리에서 수면까지의 높이가 약 90m가 되는 운하입니다. 이 운하로 인해 약 700Km를 운항거리를 단축한다고 합니다.

이 운하는 고대 고린도인들이 계획을 하였지만 기술과 재정문제로 실패를 하였고 주후 67년에는 로마의 네로황제가 수천 명의 죄수를 동원하여 상당히 진척을 하였으나 정치적인 문제로 결국 실패를 하고 맙니다. 결국 1893년 9월 25일 완공이 되었습니다.


출처 :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