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0편
Ⅰ. 구원에 대한 감사 30:1-5
새 집을 지었을 때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신 20:5)은 명백히 명령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허락되고 받아들여진, 경건한 유대인들의 칭찬할 만한 관습이었다. 다윗은 집을 지어 소유하게 되었을 때(삼하 5:11) 그 집을 하나님께 바쳤다. 우리는 우리가 거한 집에 처음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그 집을 작은 성소로서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가족 그리고 우리의 모든 가사를 온전히 하나님의 지도에 맡기고 그의 임재와 축복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1)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행하신 큰 구원에 대하여 친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1절)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곧 "여호와여 내가 주의 이름을 높이고 주를 높이 오르신 자로 찬양하리이다"라는 의미이다.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으며 또한 나를 고치셨나이다. 즉 병든 몸을 고치시고 어지럽고 불안한 마음을 고치시며 무질서하고 혼란의 나라의 일들을 고치셨나이다." 그는 극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즉 무덤에, 곧 '음부에 내려가기'직전에까지 이르렀으나 구출되어 살아났다(3절). 그러므로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은 생애는 마땅히 우리 생명의 하나님을 높이는 데 쓰여져야 한다.
(2) 그는 다른 사람들도 그와 함께 찬양하도록 요청한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성도들아 그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라. 이는 거룩함이 온 세대에 걸쳐 그를 기억케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만일 우리가 진심으로 그의 거룩한 이름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 그의 거룩함을 나누어 갖고 있다는 좋은 표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찌푸린 얼굴이 이내 풀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진실로 우리는 그의 찌푸린 얼굴을 영원히 대해야 마땅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사르시기까지 우리에게 진노하시며 결코 우리와 화해하지 않으신다 해도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노여움은 잠깐이다'(5절).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새벽빛이 반드시 돌아오는 것만큼 확실히 기쁨과 위로가 이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 언약은 낮의 언약만큼이나 확고하기 때문이다.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즉 "모든 선이 평생이로다"는 말이다. 그것은 영혼의 생활이다. 곧 영적 생활로서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다.
Ⅱ. 기도와 그 응답에 대한 감사 30:6-12
본문에는 다윗이 잇따라 처해 있었던 여러 가지 상태와 각 상태에서마다 하나님에 대해 품은 그의 생각들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1) 내가 형통할 때에(즉 내 몸이 건강하고 하나님께서 내 모든 원수들로부터 나를 보호하여 내게 안식을 주셨을 때)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나이다. 즉 어떤 위험도 결코 걱정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번영을 굳게 믿었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7절). 다윗은 자신의 번영을 자신의 '천국'으로 생각하지 않고(자신의 번영을 더없는 행복으로 여기는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다만 자신의 '산'으로 여길 뿐이다. 그것은 평지보다는 약간 더 높을 뿐 여전히 땅이다.
(2) 그는 갑자기 근심에 사로잡히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간절히 도움과 구원을 간청하였다. 그의 산이 요동하자 그도 함께 흔들리게 되었다. 이로써 그가 안심하고 있었을 때 사실 그는 별로 안전하지 못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즉 그의 마음과 몸이 근심으로 쇠약해졌으며 그의 생활이 곤궁해졌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면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어떤 재난이 그에게 내리지 않을지라도 반드시 근심하게 마련이다. 해가 지면 반드시 밤이 오고 달과 뭇별들로는 낮을 만들 수가 없다. 그의 산이 흔들렸을 때 그는 눈을 들어 산 위, 곧 하늘을 바라보았다. 근심하는 자가 있는가? 그는 기도하라.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8절). 여호와께서 손을 거두셨기 때문에 그의 기도가 더욱 간절해졌다. 내가 무덤에 내려 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9절). 이 말은 만일 그가 죽음으로써 하나님께나 하나님의 나라에 어떤 봉사를 할 수 있다면 기꺼이 죽으려고 하였으나(빌 2:17), 비록 그가 명예롭게 죽었을지라도 그랬겠지만 병들어 죽어서는 더더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아무 유익도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성화된 영혼,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영혼은 여전히 주를 찬양할 것이다. 그러나 땅으로 돌아가는 진토는 하나님을 찬송할지라도 그의 진리를 선포하지도 못할 것이다.
(3)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의 근심에서 그를 구원하시고 그에게 이전의 번영을 회복시켜 주셨다.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고 그의 '슬픔은 변하여 춤이 되었다'(11절). 자신의 일이 이처럼 복되게 변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그는 이제 무어라고 말하는가?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12절).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곧 탄식이 변하여 찬송이 된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다양한 섭리에 순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라 (시 30:1-12)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라 (시 30:1-12)
1. 어려움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라
1절에 보면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고 했습니다. 특히 ‘끌어 내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딜리티니’는 물웅덩이에서 끌어 올린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기막힌 상황을 모면하게 해 주셨다는 것, 즉 기가 막힌 웅덩이 같은 무서운 곳으로부터 끌어내셨다는 표현입니다.
다윗이 당면했던 위험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의 추측으로는 사무엘하 24장이나 역대상 21장에 나오는, 인구조사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내리신 역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결과 백성들에게 내려진 재앙을 원수들이 조롱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심으로 그런 모욕을 당하지 않게 해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녀들이 실수로 잘못을 저지를지라도, 회개할 때 은혜를 베푸셔서 불신자들의 비웃음을 받지 않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2.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2-3절에 보면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고 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필경 극심한 질병으로 죽음에 이르게 될 정도의 심각한 상황임을 짐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질병을 고쳐주심에 대한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질병이 앞에서 언급한 역병이라면, 다윗은 백성들이 역병에서 살아난 것을 함께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과 관련해 더 생각해야 할 것은 ‘고치셨다’는 말입니다. ‘고치셨다’는 말의 히브리 원어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라파’이지요. 이 라파는 일반적으로는 질병에 한정되어 사용되지만, 때로는 ‘회복하다’, ‘다시 세우다’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고치셨다’는 어떤 종류의 구출 사건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신체적 질병의 어려움이든, 아니면 마음에 병이 들 정도로 힘든 상황이든 구출돼 고침받고 마음의 위로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인생 길에서 질병 외에도 다른 여러 경우를 통해 극심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견디기 힘들어, 때로는 목숨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신체적 질병뿐 아니라, 죽음에 이를 정도의 심각한 상황에서도 고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3.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0-11절에서는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이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을 띠 띠우셨나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을 간구하는 탄원의 기도를 들으셨다는데 대한 찬양입니다.
다윗이 간절한 탄원의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들어주셨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베옷이 벗겨져 기쁨이 됐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통곡할 때 베옷을 입는 것이 일반적 관례였다고 합니다. 이유는 ‘베옷’이 신의 용서를 비는 겸손과 자신의 잘못에 대한 인정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는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그 노여움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4-5절). 김충렬 박사
스펄젼의 시편 30편 강해
[개 요]
주제
이 시의 머리말은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 혹은 다윗의 집을 봉헌하면서 바친 시와 노래이다. 이는 믿음의 노래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여호와의 성전을 다윗의 생전에는 결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찬양의 시편이다. 왜냐하면 쓰라린 심판이 연기되었고, 큰 죄가 용서되었기 때문이다. 영역본에 의하면, 이 시편은 다윗에 의해 백향목 궁전이 건립된 것을 노래한 듯한 인상을 준다. 그 궁전을 건립함으로써, 다윗은 더 이상 아둘람 동굴 속에 몸을 숨기지 않아도 되었고 위대한 왕으로서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만일 그러한 인상이 사실 그대로라면, 신자가 이주했을 때 자신의 새 거주지를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은 적절한 행동이라 하겠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친구들을 불러 모아, 우리가 거하는 곳에 하나님이 거하시며 또한 우리가 장막을 친 곳에 하나님이 제단을 세우신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 노래가 성전과 관련된 것이므로, 우리는 솔로몬과 관련하여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의 실현을 내다보는 그 거룩한 믿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 성전을 준비하는 것이 다윗의 기쁨이었고, 그는 훗날 오르난의 타작 마당을 구입하여 성전 부지를 마련해 두었다. 믿음은 다음과 같이 노래할 수 있다.
“내가 아직 맛보지 못한 모든 은혜로 인하여
당신께 영광을 돌리나이다.”
이 시편 전체를 통해 암시된 바에 의하면, 다윗은 스스로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때에 개인적으로 그리고 상대적으로 큰 곤경을 겪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한 편으로 번영을 누릴 때, 대개 다른 한 편으로는 시련을 당한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 번영만을 감당할 수 있는 이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소망의 기쁨마저도 체험의 고통과 혼합될 필요가 있으며, 안락함이 세속적 안전과 자만심을 제공할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회개할 때에는 곧장 용서가 뒤따르며,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영광을 돌린다. 이 시편은 노래이지 불평이 아니다. 이것을 다윗의 말년 상황에 비추어 읽도록 하라. 그때 그는 백성의 인구 조사를 실시했고, 하나님은 그를 징벌하셨다. 그러고 나서 자비를 베푸사 천사로 하여금 그 칼을 거두게 하셨다. 또한 시인은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영감을 받아 이토록 탁월한 송가를 지었다. 이 시는 인구조사와 관련된 시편이며, 역병을 멈추게 한 사실을 기념하며 성전을 봉헌하는 내용의 시편이다.
구성
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3절 다윗은 자신을 구원하신 여호와를 드높인다.
4, 5절 하나님의 자비를 기념하는 일에 동참하도록 성도들
을 청한다.
6, 7절 다윗은 자신에게 임한 징벌의 원인이었던 잘못을 고
백한다.
8-10절 자신이 제시한 탄원을 반복한다.
11, 12절자신에게 임한 구원을 기념하고 영원히 찬송드릴 것을 서원하면서 마감한다.
[강 해]
1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2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3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1절. "내가 주를 높일 것은." 나는 주를 높고 영예로우신 분으로 여길 것이며, 최선의 음악으로 그분을 노래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주를 잊고 주께 불평하며, 주를 멸시하고 또한 주를 모독할 수 있지만, 나는 "주를 높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그 누구보다도 내게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의 이름과 성품과 속성과 나를 향하신 주의 자비와 내 백성에 대한 주의 인내를 높일 것입니다. 특히 주님 자신을 칭송할 것입니다. "내가 주를 높이는" 일은, 오 여호와여, 나의 즐겁고도 지속적인 과업이 될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다윗이 여호와를 높이는 이유가 여기 제시된다:"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자신이 받은 바 유익에 의거하여 답례하겠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의 찬양은 합당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깃든 찬양에 대한 이유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마치 죄수가 감옥에서 석방되듯이, 마치 요셉이 구덩이에서 구출되듯이 끌어내졌다. 그래서 자신의 구원자를 사랑했다. 은혜는 지옥의 구덩이로부터, 죄의 수렁으로부터, 낙심의 늪으로부터, 질병의 병상으로부터, 그리고 의혹과 두려움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들어올린다. 이 모든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서 아무런 노래도 나오지 않겠는가? 우리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높이 올리셨는가? 우리를 자녀의 자리로까지 이끌어올리사 한 가족으로 삼아 주셨다. 우리를 이끌어올리사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 처소에 앉게 하셨다."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라.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별들 위로 올리셨기 때문이다.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이는 다윗이 자신의 세 가지 죄악들로 말미암아 가장 두려워했던 심판이다. 그는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삼하 24:14)고 했다. 만일 우리가 대적들의 뜻에 넘겨진다면, 우리의 운명은 너무도 끔찍할 것이다. 복되신 하나님 덕분에, 우리는 그토록 무서운 운명으로부터 보호받아 왔다. 마귀와 우리의 모든 영적 대적들은 우리로 인하여 기뻐하도록 허락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옛 죄악 가운데 다시 빠져들 것이라고 예언했던 악한 동료들은 실망하고 만다. 우리의 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지켜보며 "아하! 그 꼴을 곧 보게 될 터이다"라고 서슴없이 말하던 자들이 아직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 여호와의 지속적인 돌보심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의 시라소니 같은 눈에도 아무런 허물이 발견되지 않는 자들은 복되다. 우리의 경우가 바로 이러한가? 우리를 온전한 상태로 존속시켜 주신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리자.
2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역병이 닥쳤을 때, 다윗은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자기 백성을 위해서 기도를 올렸다. 그는 즉시 사령부로 향했으며 잘못되기 쉬운 우회적 수단들을 찾지 않았다. 하나님은 최고의 의사시며, 우리의 육체적 질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망각할 때 우리는 매우 사악하고 어리석게 행한다. 아사 왕의 죄인즉, 그가 의사들을 의뢰하고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의사를 찾아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하자.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찾도록 하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술 그 자체에는 치유 능력이 전혀 없음을 기억하자. 치유의 에너지는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 시계가 고장나면, 우리는 시계 제조공에게 그것을 들고 간다. 몸이나 영혼이 곤경에 처해 있다면, 그것들을 지으신 분께 의뢰하자. 그분은 그것들을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확실한 기술을 갖고 계시다. 우리의 영적 질병으로 말하자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 외에는 그 무엇도 이를 치유할 수 없다. 그분의 옷술을 만지기만 해도 우리는 온전해질 것이다. 반면, 모든 의사들을 찾아다닌다 해도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 처방도 내릴 수 없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믿음으로써 사용하는 언약 칭호에 주목하라:"내 하나님." 여호와 그분을 자신의 분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너무도 행복하다. 다윗의 믿음이 어떻게 상승하고 있는지 주목해 보라. 1절에서 그는 "여호와여"라고 노래했지만, 2절에서는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노래한다. 심혈을 기울인 천상적인 음악은, 마치 향단으로부터 연기 기둥이 피어오르듯이 위로 올라간다.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그는 단순히 기도만 할 수 없고 부르짖었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가 그 바라는 바를 거침없이 토로하듯이 자신의 영혼을 토로하였다. 그는 자신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그는 누구에게 부르짖을지를 알고 있었다. 자기 친구들에게나 어떤 육신의 팔을 향해 부르짖지 않았다. 그리하여 분명하고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나를 고치셨나이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는 그것을 확신한다. 이제 그에게는 영적 치유에 대한 증거가 있다.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라! 죄의 질고로부터 놓여나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든 겸손한 탄원자들은 시편 기자처럼 급속한 치유를 경험할 것이다. 하지만 그처럼 치유를 간구하지 않으려 하는 자들은 자신의 상처가 썩어들어가고 자신의 영혼이 죽는다고 해서 놀랄 필요가 없다.
3절.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가 아니라 "주께서 이미 그렇게 하셨습니다"라는 어투임에 유의하라. 이러한 어투가 세 차례나 사용되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큰 일을 행하셨음을 확신했고 전혀 의심치 않았으며, 이로 인해 너무도 기뻐하고 있다. 그는 무덤 언저리까지 추락했었지만, 다시 회복되어 하나님의 인내를 노래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을 지극히 낮은 지옥으로부터 지켜 준 것은 오로지 은혜라고 고백했다. 또한 이로 인해 그는 이중으로 감사했다. 무덤에 던져지지 않은 것은 큰 일이다. 구덩이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은 더 큰 일이다. 따라서 찬양의 이유가 점차 더해가고 있다. 왜냐하면 두 가지 구원 모두가 오직 여호와의 영광스러운 오른손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분은 유일하게 우리 생명을 지키시는 분이며 우리 영혼을 지옥으로부터 구해내는 유일한 구속주이시다.
4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5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4절.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내 노래에 동참하라. 나와 함께 감사를 드리자." 그는 자기 혼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마음을 동참시키고자 했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다윗은 자신의 성가대를 불량자들이 아니라 성결함을 입은 자들로 채우고자 했다. 후자는 진심으로 노래할 수 있는 자들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인 여러분을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성도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죄인들이 사악하게도 침묵을 지킨다면, 여러분의 거룩성으로 하여금 여러분이 노래하게끔 재촉하게 하라. 여러분은 그분의 성도들이다. 하나님을 위해 택하심 받았고 피로 사신 바 되었으며, 부르심을 받았고 또한 구별된 존재들이다. 여러분이 성별된 것은 매일 찬양의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다. 이 천상적인 의무에 충실하라. "여호와를 찬송하며." 이는 즐거운 일이다. 이것은 유익한 일이다. 그토록 즐거운 봉사를 굳이 그렇게 자주 상기시킬 필요조차 없다.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여러분의 노래로 하여금 감사의 노래가 되게 하며, 그 노래를 통해 여호와의 자비가 즐거운 기억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하라. 설령 현재의 즐거움이 없다 할지라도, 과거에 대한 기억을 통해 하프를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거룩한 이름에." 거룩함은 가장 깊은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속성이며, 경건한 마음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감사를 드린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는 스랍들과 그룹들의 노래이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공포에 질리듯이, 침울한 마음으로 그 노래에 참여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겸허하게 기뻐하며 즐겁게 참여하자.
5절. "그 노염은 잠간이요." 여기서 다윗은 잘못을 범한 자녀들에 대해 아버지처럼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암시한다. 다윗의 죄악으로 인해 예루살렘에 역병을 보내신 것이 바로 그러했다. 그것은 단지 짧은 심판이다. 참된 회개를 통해 용서를 탄원하며 받아들여질 만한 희생 제사를 드리자마자 이내 제거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자비인가! 만일 여호와의 진노가 오랫동안 지속된다면, 인생은 그분 앞에서 완전히 파멸당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징벌이 이행되자마자 기꺼이 그 회초리를 거두신다. 그분은 노하기는 더디하시고 분노를 거둘 때는 신속하시다. 만일 그분이 일시적으로 발하시는 아버지로서의 진노가 그토록 심각하여 단축될 필요가 있다면, 심판주께서 그 대적들에게 발하실 영원한 진노는 얼마나 무시무시하겠는가?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주께서 다윗을 긍휼히 여기시자마자, 예루살렘이 살아났고, 왕의 마음도 살아났다. 여호와께서 얼굴을 찌푸리실 때 우리는 시든 꽃처럼 죽지만, 그분의 감미로운 미소는 마치 이슬이 들판을 신선하게 적시듯 우리를 소생시킨다. 그분의 은총은 생명을 북돋우며 발랄하게 할 뿐만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자 생명의 본질이다. 생명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로 하여금 여호와의 은총을 구하게 하라.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하지만 밤이 영원하지는 않다. 황량한 겨울에도 샛별은 빛을 비춘다. 밤에는 근심의 이슬이 떨어지는 것이 합당한 듯이 보인다. 신랑이 없음으로 인해 방 안이 어두울 때, 과부와 같이 외로운 영혼이 사랑하는 이를 다시 볼 날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의의 태양이 떠오를 때, 우리는 눈물을 닦고 스며드는 슬픔을 벅찬 기쁨으로 몰아낸다. 예수님을 안다면 누가 기뻐하지 않겠는가? 아침의 첫 햇살이 우리에게 위안을 가져다 주듯이, 예수님은 새벽 여명이 되시며, 모든 신자들은 이것을 알고 있다. 애곡은 아침이 오기 전까지만 지속된다:밤이 지나면 어둠도 사라질 것이다. 본절은 성도의 노래에 대한 이유로서 제시되고 있으며, 그 이유란 참으로 설득력이 강하다. 짧은 밤과 즐거운 낮이 시를 읊고 하프를 연주하게 한다.
6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7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6절. "내가 형통할 때에." 그의 모든 대적들이 잠잠해지고, 모반을 꾀했던 그의 아들이 죽어 장사되었을 때, 바로 그때가 위험한 시점이었다. 수많은 배들이 고요한 가운데서 가라앉는다. 고요함보다 더 심각한 시험거리도 없다.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오! 다윗이여, 그대는 참으로 지혜로운 말을, 생각하기 힘든 말을 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홍수 위에 세우사, 이 세상이 그 얼마나 보잘것없고, 변덕스러우며 유동적이고 또한 일관성이 없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 위에다 터전을 짓는 자는 불행하다! 그는 자신의 소망들을 가둘 지하 감옥을 짓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결코 요동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대신, 조만간 함께 옮겨질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달 아래에 영속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내가 오늘 번창하기 때문에 내일도 높은 위치에 있을 것이라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마치 구르는 바퀴의 가장 높은 부분이 정해진 과정에 따라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처럼, 죽을 운명에 처한 인생의 상황도 그러하다. 상황은 부단히 순환되며, 오늘 먼지더미 속에 있는 자들 중에는 내일 높은 위치로 올라갈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현재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 중 얼마는 조만간 땅바닥에 짓이겨질 것이다. 번영이 시편 기자의 생각을 변하게 했음에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그토록 자만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은혜로 말미암아 일어섰지만 자신을 망각하였고, 따라서 추락에 직면했다. 독자들이여, 우리의 마음속에도 그와 같이 거만한 요소들이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가? 성공의 흥분으로 인해 들뜬 나머지, 어리석은 상태에 이르게 되지 않도록 주의하자.
7절.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그는 자신의 번영을 여호와의 은혜 탓으로 돌렸다. 자신의 모든 안정과 부귀를 여호와의 손길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너무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선한 사람 속에 있는 선이 혼합된 선임에 주목하라. 왜냐하면 이 선함은 세속적 안도감과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산에다 비유한다. 차라리 흙두둑에 비유하는 편이 더 타당했을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아무리 보잘것없는 존재로 생각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자신의 산이 견고하게 섰다고 자랑했지만, 앞에서(시 29편에서) 시룐과 레바논이 들송아지처럼 뛴다고 말했다. 다윗의 상태가 과연 레바논보다 더 견고했을까? 그것은 헛된 자만심이었고, 우리 모두에게 너무도 흔히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자만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별들 아래에서 그리고 이 회전하는 행성 위에서 영구적인 불변성을 만끽할 것이라는 공상에 사로잡힐 때 그러한 망상은 그 얼마나 신속하게 터뜨려지고 마는가! 하나님이, 자신의 종이 범한 잘못을 교정시키시는 방법은 그 얼마나 감동적이고도 교훈적인가!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타격을 가하실 필요조차 없었으며, 얼굴을 가리우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는 먼저, 다윗이 신실한 성도였음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땅에서 하나님의 얼굴이 가리워진다고 해서 죄인이 근심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는 성도의 기쁨이 여호와의 임재에 의존함을 입증한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다면, 그리고 그분의 얼굴이 가리워진다면, 제 아무리 견고한 산이라도 우리에게 안식을 제공할 수 없다. 그런 경우에는 근심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의 얼굴 빛을 듬뿍 받는 일 다음으로 가장 좋은 것은, 그러한 축복이 우리에게서 멀어질 때 철저히 불행해 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저로 하여금 죄로 인해서만 울게 하소서!
그리고 오직 당신을 사모하여 울게 하소서!
그러할진대 저는 끊임없이 우는 자가
되겠으며, 또한 될 수 있겠나이다!"
8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9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10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8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 신뢰할 수 있는 자원이다. 설사 그들이 어찌할 줄 모르는 상황에 내몰린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속죄소로 나아갈 수 있다. 지진이 산을 진동시킬 때에도, 은혜의 보좌는 굳건하게 서 있으며, 우리는 그리로 나아갈 수 있다. 기도하기를 결코 잊지 말며, 기도의 효력에 대해 결코 의심하지 말자. 상처를 입히는 손이 치유도 할 수 있다: 우리를 치시는 분께로 돌이키자. 그리하면 그분이 우리의 탄원을 들어 주실 것이다. 기도는, 가인이 지은 성보다도 혹은 사울이 요청한 음악보다도 훨씬 더 나은 위안이 된다. 떠들썩한 웃음과 육욕적인 향락은 절망에 사로잡혀 산만해진 마음에 대해서는 변변치 못한 처방이다:다른 모든 것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 기도는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
9절.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다윗의 기도 형식과 그 방법을 보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변론이요, 논리에 입각한 주장이며, 또한 자신의 입장을 탄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교리적 견해를 진술하거나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척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간교하게 빈정대는 것은 더 더욱 아니었다. 물론 어떤 기도 모임에서는 거룩한 탄원이 이러한 것들과, 그리고 심지어는 더 나쁜 것과 대치되기도 한다. 그는 열정적인 간구로써 언약의 천사와 더불어 씨름했고 마침내 이겼다. 사랑의 여호와 앞에 자신의 입장을 올바로 고하기 위해 머리와 가슴, 비판과 애정, 그리고 기억력과 지성 등 모든 것을 작동시켰다.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주의 성가대에 속한 가수를, 그리고 주를 찬송하기를 사모하는 자를 잃으시지 않겠나이까?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그러므로 주님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이 가련하고 무익한 자를 용서하소서!
10절.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어느 때에나 유용하게 쓰이는 짤막하고도 이해하기 쉬운 간구이다. 이 간구를 종종 활용하도록 하자. 이것은 세리의 기도이며,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신다면, 그것은 크신 자비 덕분이다. 우리의 간구 그 자체는 응답받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압축되고 의미심장한, 그리고 너무도 적절한 또 하나의 기도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수많은 백성들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 간구이다. 이것은 설교하러 가는, 고통의 병상에서 신음하는 자들을 문병하는, 힘들게 수고하는 봉사자들에게 격려하러 가는, 시험당하는 신자들을 위로하러 가는, 그리고 역경에 처한 하나님의 사람을 위안하러 가는 목회자에게 잘 어울리는 기도이다. 하나님이 도우실 때 곤경들은 사라진다. 그분은 자기 백성의 도움이시며 곤경 중에 항상 함께하신다. 나는 이 구절에 나오는 짤막한 두 개의 간구들을 사업차 분주한 신자들에게 짧으면서도 강력한 기도문으로서 추천하는 바이다. 반면에, 퇴직한 후 오래도록 헌신할 시간을 지닌 자들은 이러한 짧은 간구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다.
11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12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11절. 대조법에 주목해 보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슬픔을 제거하신다. 그리고 그분이 그들에게 슬픔 대신 무엇을 주시는가? 평온과 평강? 이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을 주신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그분은 그들의 마음으로 하여금 그분의 이름을 듣고 춤을 추게 하신다. 그분이 그들의 베옷을 벗기신다. 이는 좋은 일이다. 재앙의 복장을 제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기쁨인가!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하시는가? 그분이 우리에게 옷을 입히신다. 어떻게? 일상복을 입히시는가? 그렇지 않다. 왕의 예복으로 입히신다. 이 예복은 천국에서 거룩한 영들이 입는 정장이다.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것은, 자수로 장식하고 보석들을 아로새긴 비단옷이나 금장식한 의복을 입는 것보다 더 낫다. 가난하여 싸구려 옷이나 코르덴 의복만 입지만 이 천상의 의복으로 자기 마음을 두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은 화려한 모든 것들로 치장한 황제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오 하나님, 당신께 영광을 돌립니다. 온전한 용서와 칭의를 확신케 함으로써 주께서 나의 영성을 부요하게 하셨으며,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나를 채우셨습니다.
12절.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내 영광으로." 말하자면, 내 혀로 혹은 내 영혼으로. "잠잠치 아니하고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만일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후에 우리가 그분을 찬양하는 일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범죄가 될 것이다. 그토록 많은 감사의 주제들이 도처에 퍼져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혀가 잠잠한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분은 집 안에 벙어리 자녀를 두려고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 모두는 하늘에서 노래해야 하며, 땅에서도 노래해야 한다. 시인과 더불어 다음과 같이 노래하자.
"나는 여기서 노래를 시작하고자 하며,
그리하여 내 영혼을 일깨운다.
천상의 가락을 읊으며
내 열정은 창공으로 비상한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내 생애에 그분을 찬양하며,
죽어서도 그분을 찬양하리라.
그분이 내게 호흡을 주시는 한
내가 그분을 찬양하리라.
그리고 죽음의 이슬이
내 이마를 싸늘하게 적실 때에라도,
나의 예수님을 항상 사랑할 것이라."
[주해와 설명들]
머리말. "시와 노래." 어느 시편의 머리말에서 시와 노래라는 두 단어가 함께 나올 때, 그것은 성전에서 이 시편을 노래할 때 악기 소리와 음성이 결합되었음을 뜻한다. '노래와 시'라고 되어 있을 경우에는 음성이 먼저 나오고, '시와 노래'라고 되어 있을 때에는 음성이 뒤에 나왔다. -조반니 디오다티(John Diodati).
머리말. "하주와트 하와이트"(tywh twzh)는 '그것을 봉헌하면서'라는 뜻이다. 원어 "하자크"(^zj)는 '처음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처음 시작하는 것, 혹은 무엇을 만들어 처음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이 집을 완공하고 그리로 이주했을 때, 크게 기뻐하여 기념하고 잔치를 베풀어 친구들을 초대하며 또한 하늘의 보호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어떤 종교적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두번째 성전이 완공되었을 때에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포로 귀환민들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전을 봉헌했고 수많은 희생 예물들을 바쳤다(스 6:16). 신약성경(요 10:22)에는 '수전절'이 언급된다. 이는 유다 마카비에 의해 정해진 것으로서, 안티오쿠스 에피파니우스에 의해 더럽혀지고 황폐화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고 다시 복원시킨 것을 기념하는 절기였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까지 이 절기는 매년 지켜졌고, 엄숙한 희생 제사, 하나님께 올리는 음악과 노래와 찬양, 축제, 그리고 백성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모든 일들이 8일간 연속적으로 행해졌다. 유다는 지정하기를, "수전절은 즐거움과 희락 가운데서 해마다 제때에 지켜져야 한다"고 했다. 백성 개개인이라도 새 집에 처음 들어갈 때에는 일종의 종교적 예식을 사적으로 거행하는 것이 관습이었던 것 같다(신 20:5). 그래서 새 집을 지은 자가 "낙성식을 행치 못했다면," 군복무 의무에서 제외되었다. 여기서 낙성식을 행한다는 것은, 그러한 경우에 일반적으로 행하였던 의식에 따라 그 집을 정식으로 소유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관습은 거의 모든 나라들에 두루 퍼져 있었다. 그래서 로마인들도 그들의 신전들, 극장들, 입상들, 그리고 그들의 궁전들과 가옥들을 봉헌했다. -사무엘 챈들러(Samuel Chandler, D.D.).
머리말. 이 시는 시편 첫 권(1-41편)에서는 유일하게 "쉬르"(ryv,노래)라고 불리는 것이다. "쉬르"라는 단어는 시 45편, 46편, 48편, 65-68편, 75편, 83편, 87편, 88편, 92편, 108편, 그리고 120-134편 등에서 발견된다. 시 18편 머리말은 "그의 대적으로부터의 구원에 관한 '쉬라'(노래)"이며(한글 개역 성경과 문자적으로 동일하지는 않다-역자 주), 이 시의 "쉬르"와 18편의 "쉬라"는 짝을 이루기도 한다. -크리스토퍼 워즈워스(Christopher Wordsworth, D.D.).
머리말.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그들은 한 해 전체의 산물을 그분으로 받았음을 시인했듯이, 자신의 집을 하나님께 봉헌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임차인임을 선언했고 또한 그들이 외인이며, 그들에게 거주지를 주어 머무르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고백했다. 그러므로 설령 전쟁을 위해 징집 명령이 내려지더라도, 아직 집을 봉헌하지 않았음을 입증하기만 하면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 의식을 통해 자기 집을 잘 관리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성소가 되게 하고 또한 그 속에서 진정한 경건과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예배가 행해질 때에만 그 집을 올바로 그리고 온전하게 향유할 수 있다는 권면을 받았다. 율법의 모형은 이제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라고 정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고 하는 바울의 교훈을 여전히 명심해야 한다(딤전 4:4, 5). -존 칼빈(John Calvin).
시 30편 전체. 칼멧(Calmet)의 추정에 의하면, 이 시는 왕국을 거의 황폐화시켰던 지독한 '역병'이 그친 후에 다윗이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마련된 성전 부지를 봉헌하면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삼하 24:25 대상 21:26). 이 시편의 모든 부분들이 이 추정과 부합된다. 다른 어떤 가설보다도 그의 추정이 너무나 타당하므로, 나는 바로 이 원칙에만 입각하여 주해를 전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아담 클라크(Adam Clarke).
시 30편 전체. 다음과 같은 응용 시를 통해, 나는 이 시편의 정신을 살려보려 했으며, 여기 흔히 나타나는 대조법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만군의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높이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사탄의 자랑을 막으셨으므로
내가 주 안에서 자랑할 것입니다
내 죄가 나를 무덤 언저리로
곧 시커먼 절망의 무덤으로 몰아갔습니다
내가 기도를 통해 위로 바라보기까지는
아무리 돌아보아도 구원해줄 자가 없었습니다
나의 경건한 부르짖음이 응답됨으로
지옥의 캄캄한 가장자리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공중에서 나를 살피셨고
급속한 구원이 임했습니다
밤새도록 쓰라린 눈물을 흘렸지만
아침과 더불어 구원이 임했습니다
예전에 내 뼈를 꺾었던 그 손이
이제 내 슬픔의 뼈를 꺾었습니다
그분이 나의 슬픔을 춤으로 바꾸시며
베옷 대신 기쁨을 주십니다
여호와여, 주의 진노는 잠시 타오르지만
주의 은혜는 오래도록 살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함께 노래하자
오래도록 그분의 은혜를 누려온 자들이여
그분의 얼굴을 발견한 순간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회상하자
-C. H. S.(Charles Haddon Spurgeon의 약자임.)
1절.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높이셨기 때문입니다. -아담 클라크.
1절.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딜리타니"(yntyld). 이 동사의 원래 의미는 '우물 두레박들의 왕복 운동'을 나타낸다. 그 우물 두레박들은 하나가 올라가면 다른 하나는 내려가는 식이었다. 여기서는 이 시편에 묘사되어 있듯이 번영과 역경 사이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변화무쌍한 다윗의 운명을 나타내기 위해 너무도 적절하게 적용되고 있다. 특히 이제 다윗은 자신의 곤궁한 상태가 은혜롭게 역전된 사실, 즉 하나님이 큰 영예와 번영 가운데로 그를 끌어올리신 사실을 기념하고 있다. 다윗은 자기 궁전을 건립함으로 인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을 삼으신 것과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다(삼하 5:12). -사무엘 챈들러.
2절. "나를 고치셨나이다." "티리파에니"(ynaprt). 이 동사가 사용된 것은, 육체적 불구에 대한 치유를 나타내기 위해서이거나(시 103:3), 혹은 개인적이거나 국가적인 온갖 종류의 곤궁이 제거됨으로써 사적 또는 공적 생활상의 여건이 행복스럽게 변경됨을 시사하기 위함이다(시 107:20 사 19:22). 그러므로 "나를 고치셨나이다"는 주께서 나를 곤궁으로부터 건져내셨고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셨으며, 또한 나를 안전하고 번창하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다윗은 사울 밑에서 너무도 절박한 생명의 위협을 자주 당했지만, 하나님이 그러한 상황들로부터 건져내셨다. 그는 3절에서 이 사실을 강한 어조로 표현하고 있다.
3절.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나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했고, 아무것도 나의 파멸을 막을 수 없는 줄로 알았습니다. 주께서 내게 베푸신 구원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옮기면 이러하다:"주께서 나를 구덩이로 내려가는 자들 가운데서 되살리셨나이다." -사무엘 챈들러.
4절.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만일 다른 그 무엇에 대한 노래라면, 나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그 노래에 참여하도록 요청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노래이므로, 세속 적 음성이 이 합창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오직 "성도들"만이 그 "거룩"을 노래하기에 적합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노래함에 있어서는 특히 그러하다. -리처드 베이커(Richard Baker).
4절.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하나님이 외적 예배와 내적 예배 모두를 요구하시듯이, 내적 예배를 위한 영적 틀이 외적 평정에 의해 조성될 수 있다. 물끄러미 바라보며 조는 태도는 영혼의 활동을 방해하지만, 그 반대의 태도는 그 활동을 촉진시키며 도와준다. 찬송은 영혼을 고무시켜 그것을 일깨운다. 그것은 마음을 자극하여 생기발랄하게 해준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는 우리가 공적으로 행하는 묵상들 중 최상의 것이다. 그것은 입으로 발한 내용을 가장 오래도록 마음속에 간직하게 한다. 들을 때나 기도할 때는 한 문장에서 다른 문장으로 신속히 넘어간다. 말씀을 들은 후에나 목회자와 함께 기도한 후에는 묵상이 뒤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계속 말이 이어짐으로써 이미 언급된 말을 생각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찬양은 기도와 묵상을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찬양하는 동안 먹음과 동시에 되새김도 할 수 있도록 정해 두셨다. "힉가욘"(묵상)이라는 지시어가 시편 구절 속에 나오기도 한다(예. 시 9:16). "묵상"이라는 용어 속에는 모든 지시가 다 내포되어 있을 수 있다. 최선의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자세를 취해 보라. 하늘을 바라보는 눈은 자신의 마음도 거기 있기를 원하는 바람의 표현이다. 그는 찬송을 통해 기도하고 슬픔을 토로하며 찬양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언급한다. 무엇인가를 노래하는 동안, 자신의 마음은 그것을 묵상할 수 있다! 차분한 시간에 부르는 우리의 노래는 음악 그 자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묵상을 위해 가치가 있다. 시편들을 노래하면서 이러한 유익을 찾지도 발견하지도 않는 자는 시편의 진정한 의미를 아직 배우지 못한 셈이다. -존 라이트풋(John Lightfoot, 1602-1675).
5절. "그 노염." 하나님은 종종 그분 자신의 종들에게도 진노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을 두려워하는 여러분이 단지 그분의 노여움을 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에 그분을 찬양한다는 식으로 생각할 이유는 없다. 그분이 과녁으로 삼아 화살을 쏘시는 사람들도 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떠나셨다고 괴로워하는 자들의 신음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여러분의 마음은 그들처럼 슬퍼지지 않는다. 여러분의 눈은 소망을 담고서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반면에, 그들의 눈은 슬픔의 베일로 가리워져 있다. 그분이 그들에게는 거칠게 말씀하시지만, 여러분에게는 위로의 말씀을 베푸신다. 그분이 그들을 대적으로 여기시지만, 여러분에게는 사랑스런 친구로 대하신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얼굴에서 소생케 하는 미소를 보지만, 그들은 계속 무섭게 찌푸리고 계시는 얼굴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이고도 탁월한 은혜에 경탄하라. 편안하게 지내는 여러분이 불타는 화로 속에서 고통당하는 하나님의 수많은 백성보다도 과연 나은가? 과연 여러분은 그들에 비해 무가치한 찌꺼기들을 적게 지니고 있는가? 여러분은, 그들의 범죄가 여러분이 범한 적 있는 그 어떤 죄악보다 더 심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분은 그들의 미지근하고 역행적인 태도에 분노하신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은 항상 사랑으로 타오르는가? 여러분의 발은 항상 그분의 길로 행하고 내리막 길로는 나서지 않는가? 여러분은 결코 방황한 적이 없는가? 여러분은 좌로나 우로 한번도 치우친 적이 없는가? 분명 여러분도 그런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그들에게 진노하시듯 여러분에게 진노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참으로 큰 자비이다······이 사실로 인해 주제넘게 행동하지 말라. 왜냐하면 비록 그분이 아직은 여러분에게 분노를 발하지 않으시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의 결함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6절). 그러나 곧이어,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라는 고백이 나온다(7절). 지금은 태양이 여러분을 비추고 여호와의 촛불이 장막을 신선하게 밝혀 준다.
하지만 여러분은 수많은 폭풍우나 먹구름에 직면할 수 있으며, 앞에 놓인 어둠이 여러분의 여행을 중단시킬 수 있다. 한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형을 목격하고서 크게 기뻐했다. 그리스도와 모세 그리고 엘리야간의 멋진 만남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은 자신이 하늘에 있는 줄로 생각했다. 하지만 먹구름이 닥쳐 조금 전의 영광을 가리우자, 그 가련한 자들은 두려워했다. 하나님의 노염이 "잠간"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잠깐 동안이 너무도 슬프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울음이 "저녁" 동안만 지속되지만, 그것은 너무도 쓰라리고 침울한 밤일 수 있다. 그것은 애굽인들이 겪었던 것과 같은 밤이다:그들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모든 장자들이 죽음을 당한 것을 보았으며, 소름끼치는 절규와 애곡이 온 땅에 퍼져 있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진노의 밤이 우리의 위안을 멸할 수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으뜸가는 기력과 확신 그리고 즐거운 소망 등을 버리게 만들 수 있다. -티모시 로저스(Timothy Rogers).
5절.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본서에 실린 영역 성경상으로는 "그분의 은총 속에 생명이 있다"로 번역됨-역자 주.) 양과 염소에게 각각 주어지는 축복과 저주를 재는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자. 우리가 천국에서 누리는 행복은 영생이라는 선물이 아니다. 다만 다윗이 말하듯이, "그분의 은총 속에 생명이 있다." 설령 저주받은 영혼이 하나님의 은총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영생의 모든 즐거움을 누리도록 허락받는다고 하더라도, 천국이 그에게는 지옥이 될 것이다. 지옥에서 어떤 영혼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어둡고 무시무시한 재앙의 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노여움이다. 만일 택함받은 영혼이 그리로 던져지되 하나님의 은총을 간직하고 있다면, 그에게는 지옥도 천국이 될 것이며 지옥의 모든 마귀들도 그에게서 기쁨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의 밤이 낮으로 변할 것이다. -에드워드 마베리(Edward Marbury).
5절. 한 견습공이 무려 7년 이상이나 고되게 일하면서 열악한 처우를 받았지만, 그 모든 기간 동안 자기 스승에게 아무런 불평이나 푸념을 늘어 놓지 않고 봉사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간은 곧 지나갈 것이고 자신의 속박이 항상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며, 결국에는 자유로운 위치로 풀려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유형의 십자가나 곤궁이든간에 그 짐 아래에서 신음하는 모든 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고 인내하면서 모든 불평과 푸념을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악인의 막대기가 의인의 운명을 항상 괴롭히지는 않을 것임을,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올 것임을, 그리고 곤경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끝날 것임을 알고서 스스로를 독려해야 한다. -존 스펜서(John Spencer).
5절.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이 구절이 문자적으로 진실되다는 점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경험해 왔던가! "저녁에는" 그 얼마나 무거운 곤경이 우리를 억누르는가! 우리의 지친 신경과 두뇌는 그 압박 아래에서 견딜 수 없는 듯한 지경에 이른다. 열이 나고 불안정한 몸은 더이상 참지를 못한다. 우리는 비참하고 무기력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공격 아래에서 격렬한 울음을 터트린다. 마침내 잠이 든다. 곤경과 시험, 그리고 우리를 압도하려 드는 모든 것이 이미 한걸음 더 한계를 넘어 있으며, 강력한 힘으로써 가련한 우리 인생을 더이상 견딜 수 없는 시련으로 몰아간다. 그러한 고투의 밤이 지나고 탈진 상태로 깊은 잠을 자고 나면, 우리는 심란한 마음으로 깨어난다. 생각을 추스리고 기억을 되살림과 더불어, 우리는 자신의 강인함에 놀란다. 그토록 절망적이고 암담하게 여겨졌던 것이 무엇인가? 왜 그토록 무기력하고 절망적인 느낌을 받았던가? 이제는 상황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슬프긴 하지만 참을 만하며, 힘들긴 하지만 더이상 불가능하지는 않고, 조악한 상태이지만 더이상 절망하지는 않는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그러므로 우리를 줄곧 투쟁하도록 만들었던 고투와 고역 그리고 죄악으로 얼룩진 삶이 죽음을 무릅쓴 싸움 끝에 마침내 마감될 때,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시 127:2).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자며, 다시는 사라지지 않을 아침의 기쁨 가운데서 깨어난다. 의의 태양이 우리를 비추고 있다. 이제 우리의 모든 길에 빛이 비치고 있다. 땅에서 살던 날의 절망과 암담함과 고역 그리고 그 격렬한 삶 등을 회고할 때 우리는 단지 놀랄 뿐이며, 땅에서 종종 말하였듯이 "울음은 단지 밤 동안만 지속되며, 이제 아침이니 기쁨이 도래했다!"고 말한다. 그토록 오랜 시련의 밤을 견뎌낼 힘에 대한 절망감과 더불어 우리에게 닥쳤던 슬픔들, 의혹들, 곤경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등, 이들은 이제 어디에 있는가? 너무도 아름답게 묘사된 찬송가 가사 내용에 공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아버지의 행복한 땅에서
우리 다시 만날 때,
예전에 울었던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메리 덩컨(Mary B. M. Duncan, 1825-1865).
5절.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그들의 울음 소리는 아침이 오기 전까지만 지속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겨울 밤을 여름 낮으로, 그들의 한숨을 노래로,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그들의 울음을 음악으로, 그들의 쓰라림을 감미로움으로, 그리고 그들의 광야를 낙원으로 변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질병과 건강, 연약함과 강건함, 궁핍함과 부요함, 수치와 영예, 십자가와 위로, 곤궁과 자비, 기쁨과 슬픔, 웃음과 울음 등으로 가득 어우러져 있다. 벌꿀만 먹으면 우리에게 해가 되며, 쓴 쑥만 먹어도 해가 된다. 이 세상에서 우리 영혼을 건강한 상태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가 결합되어야 한다. 은총의 남풍과 역경의 북풍 모두가 우리에게 불어오는 것이 영혼의 건강을 위해 가장 좋다. 비록 모든 바람이 성도들에게 좋은 결과를 실어다 주지만, 은총과 번영의 온화한 바람은 물론이고 건조하고 싸늘한 역경의 북풍이 불어올 때, 그들의 죄악이 가장 수그러들고 그들의 은혜는 가장 무성해진다. -토머스 브룩스(Thomas Brooks).
5절.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하반절에서 "울음"이 의인화되어 있다. 그것은 전날밤에 들어와 묵었던 숙소를 아침에 떠나는 방랑자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가 떠난 후에 다른 손님이 도착한다. 그의 이름은 "기쁨"이다. -헹스텐버그(E. W. Hengstenberg).
5절.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경건한 사람의 기쁨은 "아침에 온다." 그때 악인의 기쁨은 사라진다. 왜냐하면 악인에게 있어 아침은 죽음의 흑암과 같기 때문이다(욥 24:17). 그는 책망과 징벌을 두려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힘과 시간과 돈을 허비하고 손상함으로 인해, 아무도 그 사실을 모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근심하며 고통당한다. -자카리 보간(Zachary Bogan).
5절.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왕이자 선지자인 시인은 "밤 동안 압박감이 지속되지만, 아침에는 기쁨이 온다"고 확언한다. 두 천사가 롯을 찾아와 그와 함께 하룻밤을 묵고서 용무를 마친 뒤 아침에 돌아갔듯이, 하나님의 천사 내지는 심부름꾼인 곤경도 그렇게 한다. 하나님은 곤경을 보내사 우리를 향한 용무를 보게 하신다. 그 용무란 우리가 하나님을 망각하고 자신을 잊고 있으며 너무도 교만하고 자기 기만적이라는 사실을 일러 주는 것이다. 맡은 용무를 마치면 그것들은 이내 떠나고 만다. -토머스 플레이피어(Thomas Playfere).
5-10절. 어떤 사람의 마음이 피조물에 고정될 경우, 그 모든 것에는 가시가 있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그것들에 너무 집착하면 그 속에서 가시를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것에 대처하도록 훈련받으며, 하나님은 그들로 죄악 가운데 빠지도록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너무도 음란하게 오염된 상태라면, 그들은 그 속에서 십자가를 발견할 것이다. 여러분은 시 30편에서 이 점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이 그 자녀들과 관련하여 개입하시는 일종의 순환 과정을 볼 수 있다. 5절에 언급되듯이, 다윗은 여러 가지 곤경들을 겪었다:"내가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내게 돌이키셨고 기쁨도 찾아왔다." 그 다음에 다윗이 어떻게 했는가?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그의 마음이 방탕해졌고, 하나님은 그를 그런 식으로 버려 두려 하시지 않았다:"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주지하다시피 7절에서 그는 다시 곤경에 처한다. 8절과 10절에서 다윗이 다시 부르짖자 하나님은 다시금 그의 울음을 기쁨으로 변하게 하셨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그 자녀를 다루시는 방법이 이러하다는 점을 성경 전반에 걸쳐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특히 이 시편을 언급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그러한 방법이 여기에 너무도 뚜렷이 부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존 프레스턴(John Preston D.D., The Golden Scepter held forth to the Humble, 1587-1628).
6절.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특별한 봉사를 시작할 때, 혹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을 때, 이는 사탄이 시험을 위해 활용하는 때이다······그러한 일을 하거나 은총을 받을 때 혹은 그 후에, 우리는 교만하고 부주의하며 자만심에 빠지기 쉽다. 이는 사람들이 포식한 후에 잠들기 쉽고, 영예로운 자리에 올랐을 때 자신을 잊기 쉬운 것과 같다. 욥은 평강과 풍족함을 누림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고백하듯이, 너무도 자신감에 찬 나머지 "내 보금자리에서 선종하리라"(욥 29:18)는 결론을 내렸다.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흥망과 변화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보통 이상으로 누리고 있었던 다윗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고 생각하며 점점 더 안도감을 느낀다. 그런가 하면 그는 자신의 실수도 인정한다. 그래서 그 체험을 기록으로 남겨 다른 이들에게 경고거리로 제시한다:하나님의 얼굴 빛 아래에서 포근해질 때 그는 안도감에 빠지기 쉬웠다. 또한 그는 대체로 자신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때 어떤 곤경이나 근심에 가장 가까워져 있었다.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이는 분명 마귀가 자신의 얼굴을 내밀 때이다-"내가 근심하였나이다." 만족은 확신을 낳는다. 확신은 부주의를 야기시킨다. 부주의는 하나님을 떠나시게 하며 사탄에게 보이지 않는 음모를 꾀할 기회를 제공한다. 따라서 종종 승리한 군대가 안도감에 사로잡히다가 갑자기 놀라듯이, 흔히 우리는 영적 진보 후에 방심에 빠진다. -리처드 길핀(Richard Gilpin).
6절. "내가 형통할 때에." "베샬레"(ywlvby). 이 단어는 '풍족하고 번창한 상태로부터 말미암는 평강과 평정'을 시사한다. 하나님이 조용히 보좌에 앉으셨을 때 그는 자신의 모든 곤경들이 끝났다고 생각했으며, 방해받지 않고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하나님이 "그의 산을 굳게 세우심으로 그것이 결코 요동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하나님이 그를 모든 위험으로부터 벗어난 안전한 곳에 두심으로 그가 접근할 수 없는 산 위의 피난처에 있는 것처럼 여겼다. 하나님이 그의 번영을 견고케 하사 마치 산이 그 위치를 옮기지 않듯이 그의 번영도 변함이 없게 하신다고 그는 생각했다. 혹은 탁월한 영예와 번영의 자리로 올리움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산은 그 높이로 인하여 매우 탁월한 상태와 괄목할 만한 능력, 풍족함, 그리고 위엄 등을 나타내는 자연스러운 상징물로 사용된다. 그는 시온산의 요새를 언급했다. 그것을 '그의 산'이라고 말해도 무방했다. 왜냐하면 그가 그 위에 자신의 거처를 건립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든든했고, 더욱이 요새화됨으로써 거의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다. 그는 이를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했고, 스스로에게 약속하기를 자신에게 임할 장래의 평강과 행복이 시온산 그 자체처럼 요동치 않고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사무엘 챈들러.
6절. "내가 형통할 때에." 형통이란 우리에게 유익하기보다는 즐거운 것이다. 비록 외관상으로는 완연한 여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황량한 겨울이며, 신성한 고생을 통해 거두어들인 모든 열매들을 허비하고 있다. 형통의 햇살을 받고 있을 때 우리는 가장 큰 위험에 처해 있다. 항상 하나님의 관대하신 배려를 받는 듯이 느끼며 한번도 곤경을 겪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사랑의 표시라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방치당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윌리엄 스트러더(William Struther).
7절.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이 세상 것을 많이 소유하고서 탕자처럼 멀리 떠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형통할 때, 즉 우리가 이 세상을 많이 의존하고 그것으로 만족할 때, 계속 하나님을 가까이하기는 힘들다. 심지어 하나님을 의존하고 마치 그분을 벗어나면 달리 생명이나 삶이 없는 듯이 그분만을 우리의 만족과 의지처로 삼을 경우에도, 육신적인 상태에 빠지기 쉬우며, 하나님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믿음으로부터 멀어지며 또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희미해지기 쉽다. 다윗의 경우를 살펴보자:"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그는 갖가지 외적 편의들에 의해 위안을 얻었으며, 다른 어떤 지원이나 힘 혹은 만족도 필요하지 않았고, 변화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하나님을 자신의 지속적인 기쁨과 의지처로 삼기 위한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자신의 몫으로 여기기 위한 염려를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는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했고, 세상에 대해서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오직 주님께 순종해야 했다.
여기서 어떤 일이 생겼는가?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말하자면 그는 감각적인 삶에 너무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모의 품에 안겨 성장함으로 인해 걸음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들은, 걸음마를 시키면 마치 발이나 땅이 없는 것처럼 넘어지고 만다. 황금빛 햇살 아래에서 실컷 뛰어다니며 해가 지고 밤이 다가온 줄도 모른 채 놀다가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난, 그래서 집으로 돌아갈 길을 잃고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아이들, 그들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세상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앗아가며, 믿음의 삶을 살아갈 기회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세상은 감각적인 삶을 사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제공하고 하나님께 의존하려는 마음을 제거한다. 그래서 우리는 곤경에 처하여 자신의 무기나 의지처를 회복하기도 전에 좌절하기 쉽다. 믿음은 우리의 음료이다. (건강할 때, 혹은 그것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흔히 그러하듯이) 만일 그것이 손에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회복하기도 전에 낙심에 빠져버릴 수 있다. -엘리어스 플레저(Elias Pledger)의 설교(The Morning Exercises, 1677).
7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어떤 영혼이 버림받고서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분이 계시지 않을 때 우리는 가장 큰 슬픔으로 애곡하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의 영혼에게 있어 세상의 모든 기쁨보다 그분의 임재가 더 소중하다. 구원의 증거가 애매하며 하나님의 얼굴 빛이 어둡고 성령의 위로가 뜸해질 때, 하늘이 그다지 가깝지 않은 듯하며, 약속들이 그다지 감미롭지 않으며, 규례들이 별로 생명력이 없는 것으로 입증되고, 영혼 위로 드리운 구름이 흑암을 모으고, 의혹이 일어나며, 두려움이 압도해오고, 공포가 늘어나며, 곤경이 심해지고, 또한 온갖 걱정거리들로 말미암아 영혼이 말할 수 없는 근심 가운데 빠진다. -로버트 모섬(Robert Mossom).
7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신자가 회개의 베옷을 입는 것은 완전이라는 의복을 벗었기 때문이다. 막대 설탕을 포도주에 담그면 녹아내리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감지할 때 우리의 심령도 녹는다. -윌리엄 세커(William Secker).
7절 하반절. 중세 작가들이 각별히 상고하고 싶어했던 영광스럽고 위로를 주는 진리를 이 구절만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도 없다. 그 진리란, 피조물의 행복과 불행은 바로 하나님의 눈길이 그 피조물을 향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며, 또한 때로는 스스로 생겨나는 듯이 보이고, 다른 사람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기쁨의 비밀스러운 원천은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인 눈길일 뿐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특별한 원인을 찾을 수 없었던 슬픔-이를테면 우울 등-은 단지 그분이 우리에게서 얼굴을 돌리신 때문일 뿐이다. -존 메이슨 닐(John Mason Neale).
7절 하반절. 영적으로 버림받는 일과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우시는 것이 신자들을 우울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문제인가? 정말 그렇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을 풀죽게 하며, 아무것도 그들을 위로할 수 없다.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외적 재난은 살갗을 다치게 하지만, 이것은 가장 내밀한 부분을 건드린다. 전자는 마치 기와에 비가 떨어지는 것과 같지만, 후자는 집 안까지 젖어든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신자들에게 본질적 위로를 주심으로써 버림받는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한때 그분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으셨고, 이로 인해 그들로 하여금 영원히 버림받지 않게끔 해주셨다. -존 플라벨(John Flavel).
7절 하반절. 만일 하나님이 여러분의 몫이라면, 그 하나님을 상실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상실은 이 세상에 없다. 하나님을 자신의 몫으로 지닌 사람에게 있어 그 하나님을 상실하는 것보다 더 그토록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하늘 아래에 없다. 다윗은 허다한 상실을 경험했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잃는 것만큼, 곧 하나님의 은총을 잃는 것만큼 자신의 영혼을 슬프게 하고 또한 그것을 훼손시키는 것은 없었다:"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히브리어 "바할"(lhb)은, "그 여인이 사무엘에게 이르러 그 심히 고통함을 보고"라는 사무엘상 28:21 말씀에서 엿볼 수 있듯이, 심한 근심과 공포를 느끼는 것을 가리킨다. 거기서도 동일한 히브리어인 "바할"이 사용되어 있다. 사울은 사무엘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마귀가 자신에게 전했던 무시무시한 소식을 듣고서 너무도 두렵고 놀란 나머지 기절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하나님이 그 얼굴을 숨기셨을 때 다윗의 상황이 바로 그러했다.
하나님이 구름 속에 자신을 감추셨을 때, 다윗은 마치 꽃이 그 수액과 생기와 활력을 모조리 상실한 채 시들어버린 것과 같았다. 어떤 생물들이 태양 빛과 그 온기를 통해 생명을 유지하듯이, 성도들의 생명 역시 하나님의 얼굴 빛과 그 온기를 통해 유지된다. 그리고 일식 때에 자연 만물이 축 늘어지듯이,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우실 때 경건한 영혼들은 활력을 잃고 의기소침해지며 그분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무감각한 생물들 중에는, 금잔화나 튤립처럼 꽃봉오리를 여닫음으로써 혹은 해바라기나 당아욱처럼 고개를 숙이거나 돌림으로써, 태양 빛이 비추는지의 여부에 너무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까닭에 마치 그것들과 태양간에 교감이 이루어지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들이 있다. 또한 만일 태양이 지거나 구름 속에 들어가면 그것들은 꽃봉오리를 움츠리거나 고개를 떨어뜨리고 마치 자신에게 생명력을 공급해 주지 않는 존재에게는 그 모습을 보이기를 기피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나님이 그 얼굴을 구름 속에 숨기셨을 때 다윗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다. -토머스 브룩스.
8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베르나르(Bernard)는 주목할 만한 우화를 제시하고 있다:세상 정부와 교회를 각각 상징하는, 바벨론 왕과 예루살렘 왕이 늘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 교전 과정에서, 예루살렘 병사들 중 한 명이 공의라는 성으로 도주하였다. 수많은 대적들이 그 성을 에워싸고 그 둘레에 참호를 팠다. 두려움이라는 장수가 모든 희망을 포기하였지만, 신중이라는 장수는 위로하고 다녔다. 그의 말인즉 이러했다:"우리 왕이 영광의 왕이신 줄을 모르느냐? 우리 왕은 강하고 힘센 왕이요, 전투에 능하신 주가 아니시냐? 그러므로 그분께 우리의 곤경을 알릴 사자를 보내자." 두려움이 대답했다:"하지만 누가 적의 진지를 뚫고 나갈 수 있는가? 어둠이 땅 위에 내리덮였고, 무장한 군대가 우리 성벽을 감시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한번도 그 먼 곳까지 가본 적이 없다." 이 문제를 의논하면서 정의는 이렇게 말했다:"힘을 내라. 내가 특별히 신임하는 사자가 한 명 있는데, 그는 왕에게 그리고 그분의 궁전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기도라는 그 사자는, 밤의 적막 가운데 아무도 알지 못하는 길을 헤치고서 왕의 비밀스러운 처소에까지 도착하는 법을 잘 알고 있다." 기도라고 하는 사자는 즉시 길을 재촉하여 닫혀진 문을 발견하고서 힘껏 두드리며, "열어라, 의의 문들이여. 열려라, 영원한 문들이여. 나로 들어가서 예루살렘 왕께 우리의 처지가 어떠한지를 고할 수 있게 하라"고 외쳤다. 우리가 보내야 할, 가장 진실되고 가장 능력 있는 그 사자란 의심의 여지 없이 기도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미덕을 올려 보내면, 하늘의 별들이 그것을 흐릿하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하늘에 있는 가장 순전한 존재들마저 그분의 눈에는 불순하게 보이는 마당에, 하나님의 발등상에 거하는 우리가 감히 순전한 척하려 해보았자 소용이 없다. 만일 우리가 두려움과 의혹을 올려 보낸다면, 길이 너무 멀어 도중에 지쳐 쓰러지고 말 것이다. 그것들은 쇠막대처럼 무겁고 볼품이 없다. 그것들은 구원의 보좌에 절반도 이르기 전에 땅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신성모독이나 저주를 올려 보낸다면,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피조물들이 연합하여 우리를 대적할 것이다. 해와 달이 피와 불과 뜨겁게 타는 석탄들을 비오듯 내리퍼부을 것이며, 공중에서는 우리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질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기도야말로 가장 확실한 대사이다. 도중에서 직면하게 될 지루함이나 어려움들도 기도의 목적을 방해하지 못한다. 기도는, 신속한 속력과 신실한 믿음을 품고 성공을 확신하는 행복감에 사로잡혀, 창공의 독수리보다 더 높이 날아올라 하늘의 하늘로 들어갈 것이며, 마치 불전차와 같이 우리를 태워 하나님의 존전으로 이끌어올려 그분의 도움을 구하게 해줄 수 있다. -존 킹(John King).
9절.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는 그가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그분의 나라를 위해 참된 봉사를 할 수만 있다면 죽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뜻을 시사한다(빌 2:17). 하지만 자신이 병상에서 죽는다면, 영예롭게 죽었을 때와는 달리 아무런 유익이 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는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심이여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시 44:12)라는 고백을 통해 표현한 것과 같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
9절.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주께서 그 백성이 요청하는 자비를 거부하실 경우에 별다른 유익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 이 사실이 간청거리로 사용될 수 있다.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는 간청을 통해,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보장받고자 했다. 포로기의 교회 역시 이렇게 간청했다(시 44:12):"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심이여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하나님의 가련한 성도들이 주께 나아가 간구드릴 때 그분은 정죄하거나 좌절시키시거나 혹은 그들을 내어쫓으실 수 있으며, 계속해서 얼굴을 찌푸리실 수도 있다. 그분은 이러저러한 간구들이 단지 그들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들이라는 이유로 그 간구들을 거부하실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이 무슨 유익을 얻으실까? 반면에 그 간구들을 듣고 그들을 도우심으로써 그분은 많은 찬양을 받으실 수 있다. 그러나 대적들에 의해 억압받는 그들을 보실 때 그분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혹은 한숨짓고 낙심하며 서글픈 압박하에서 쇠약해져 가는 그들을 보실 때 그분께 무슨 기쁨이 있겠는가? 이것은 우리에게 허락된 그리고 매우 성공적인 간구 형태이다. -토머스 코벳(Thomas Cobbet).
9절.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아무리 많은 존재들이 주를 찬송한다고 해도 충분할 수 있겠습니까? 주의 진리를 충분하게 선언할 수 있는 입술이 있겠습니까? 만일 주께서 저를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도록 배려해 주신다면, 저 한 사람-죄악된 존재이긴 하지만-이라도 주를 찬송할 수 있지 않겠나이까? -리처드 베이커.
9절. 하나님께 상달될 수 있는 기도는 논리정연한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간청하고, 논리정연한 기도로써 그분을 설득하는 것을 좋아하신다.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
11절.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역경으로부터 구원받은 다윗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사실이다. 무덤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사 더이상 죽지 않으시는 그리스도께도 적용될 수 있다. 자신의 베옷을 구원의 예복으로 갈아 입은 참회자에게도 적용되는 사실이다. 또한 마지막 날에 수치스러운 무덤을 벗어버리고 영원한 영광 가운데서 빛날 우리 모두를 통해서도, 이 사실은 입증될 것이다. -조지 혼(George Horne).
11절. "주께서······변하여." 시편 속에서 발견되는 인생의 부침(浮沈)들을 나는 너무도 좋아한다. -애들레이드 뉴턴(Adelaide Newton).
11절.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나는 사도 바울처럼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고, 기쁨으로 슬픔을 이기라고 말한다. 기쁨은 슬픔에 대한 참된 처방이다. 다른 처방이란 없으며 결코 있을 수도 없다. 항상 우리는 우는 영혼에게 기뻐할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다른 모든 위로는 전혀 무익하다. -알렉산더 로돌프 비네(Alexander Rodolph Vinet, D.D., 1797-1847).
11절.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베옷"은 헐렁하게 두르는 옷이므로 마음만 먹으면 쉽게 벗을 수 있다. 그러나 "기쁨"은 꽉 죄이도록 두르는 띠이며, 좀처럼 느슨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을 내게서 빼앗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리처드 베이커.
12절. 예전에 갈대아인들의 날수 계산법은 이스라엘인들과 달랐다. 그들은 낮을 밤보다 먼저 계산에 넣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은 정반대였는데, 이는 창조 때의 질서에 따른 것이다. 왜냐하면 태초에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고, 여섯 날들 각각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는 식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시간과 교회의 시간은 정반대 방향으로 진행된다. 즉, 세상의 시간은 일시적인 번영이라는 낮으로 시작하여 영원한 어둠과 고통이라는 밤으로 끝난다. 반대로, 교회의 시간은 잠시 겪게 되는 역경이라는 밤으로 시작하여 영원히 누리게 될 위안이라는 낮으로 끝난다. 이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의 진노로써 시작하여 그분의 은총으로써 이 시를 마감하고 있다. 이는 옛적에 성막에 들어가는 자들이 처음에는, 희생짐승을 잡는 칼들, 희생물의 피, 그리고 제단 위에서 제물을 태우는 불 등과 같은 불쾌한 것들을 보았던 것과 같다. 하지만 거기서 조금 더 지나면, 금촛대, 진설병, 그리고 향을 올리는 금제단 등이 놓인 성소가 있다. 그리고 마침내는 지성소와 언약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지칭되는 속죄소와 그룹들에게 이른다. -티모시 로저스.
12절. "감사하리이다." 무엇이 찬양인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소작료와 같은 것이다. 농장이 넓을수록 그 소작료도 많은 법이다. -보즈(G. S. Bowes, 1863).
[설교힌트]
머리말. 주택 봉헌 및 그 방법.
시 30편 전체-이 송가를 통해, 우리는 곤경을 당하기 전과 겪는 도중 그리고 그 후의 다윗의 마음 상태를 엿볼 수 있다. (1) 곤경을 당하기 전(6절). (2) 곤경을 겪는 도중(7-10절). (3) 곤경을 당한 후(11, 12절). -윌리엄 제이(William Jay).
1절 상반절.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은 서로를 높인다.
1절 중반절. 원수들의 경멸을 받지 않도록 보호받는 행복.
1절. 마귀의 실망.
2절. 병자, 의사, (의사집에 설치된) 야간용 벨, 약, 그리고 치유. 언약의 하나님, 병든 성도, 부르짖는 마음, 치유의 손길.
3절. ‘이끌어올리시며 보호하신다’고 하는 두 가지 각별한 은총이 “음부”와 “무덤”이라는 두 가지 끔찍한 표현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 또한 (주께서 이미) “······하셨나이다”라는 표현에 유의하자.
4절. ‘찬송’은 신성한 예배이다. 특별히 “성도들”이 그 찬송에 초대된다. 찬송의 각별한 주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다. 그리고 지난날 받은 은총에 대한 ‘기억’은 찬송을 고무시킨다.
5절.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관련하여 드러내시는 진노.
5절. 울음의 밤, 그리고 기쁨의 아침.
5절. 하나님의 “은총” 속에 있는 “생명.”
5절. 신자에게 닥치는 곤경의 가변성, 그리고 그에게 임하는 기쁨의 영속성.
6절. “형통”의 위험성.
6-12절. 다윗의 형통함은 그로 하여금 안전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이에 하나님은 그 착각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곤경을 보내셨다. 연속적으로 변하는 그의 마음 상태가 여기서 분명히 언급되며, 우리는 이를 순서대로 살펴보면서 스스로에게 적용해 보아야 한다. (1) 육신적 안전. (2) 영적으로 버림받음. (3) 간절한 기도. (4) 빠른 회복. (5) 감사 찬송. -찰스 시미언(Charles Simeon).
7절 상반절. 육신적 안전. 그 원인, 위험성, 그리고 치유.
7절 하반절. 영적 어둠 속에 처한 영혼의 은혜로운 비탄.
8절(3절과 관련하여). 우주적 치유책을 구하는 기도.
9절 상반절. 삶을 지속시키고 새로운 은총을 얻기 위해 하나님과 더불어 벌이는 변론.
9절 하반절. “진토”가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분의 “진리”를 “선포”할 부활의 날.
10절. 기도의 두 가지 보석들:짧지만, 충분하고 꼭 필요한 내용.
10절.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나는 몰락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만일 주께서 나를 붙들어 주지 않으시면, 앞으로도 나는 몰락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연약합니다. 나는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내 마음은 거짓됩니다. 나의 대적들은 강합니다. 나는 사람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미 받은 은혜도 주님 없이는 나를 지켜 주지 못할 것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모든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 모든 싸움에서, 모든 시험에서, 주님의 뜻을 고무시키고자 하는 모든 노력에 있어서, 모든 형통한 시기에,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시간에, 이 짧으면서도 영감어린 기도가 효력을 발휘한다. 우리 마음에서 이 기도가 흘러나오고, 종종 우리 입술을 통해 이 기도를 발하며, 또한 경험을 통해 응답받게 되기를 기원한다. 만일 여호와께서 도우시면, 우리가 이행할 수 없는 의무란 하나도 없다. 우리가 이겨낼 수 없는 대적이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우리가 극복하지 못할 곤경은 전혀 없다. -제임스 스미스(James Smith, Daily Remembrancer).
11절. ‘전환들.’ 갑작스럽고, 완벽하며, 신성하며(“주께서”), 개인적이며(“나의”), 또한 은혜롭다.
11절. 거룩한 춤. 은유적 표현이다.
11절. 신자의 옷이 바뀜:이는 모르드개나 요셉의 생애를 통해 예시된 바 있다. 신자가 애곡하는 자로서, 간청하는 자로서, 혹은 범죄자로서 입게 될 옷들이 모두 언급됨.
12절. 우리의 “영광” 및 그것과 하나님의 영광과의 관계.
12절. 은혜로운 섭리의 목적.
12절. 침묵. 이는 범죄하였을 경우에 취하는 행동이다.
12절 하반절. 신자의 서원, 그리고 서원해야 할 때.
cafe.daum.net/correcttheology
'시편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편 44편 주석 (0) | 2022.02.16 |
---|---|
왕의 혼인식에 대한 노래(시편 45:1-17) (0) | 2022.02.16 |
시편 29편/ 주님은 나의 산성 (0) | 2022.02.11 |
시편 설교하기 (0) | 2022.01.24 |
시편 135-136편 묵상하기 (0) | 2022.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