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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묵상

시편 29편/ 주님은 나의 산성

by 은총가득 2022. 2. 11.

시편 29편

 

 

 

Ⅰ.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에 대한 찬송 29:1-11

 

(1) 다윗은 땅의 권세 있는 자들에게 위대하신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라고 요구한다.

그는 천둥치는 소리를 자신과 다른 군주들에게 크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외치는 소리로 해석하였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1절). 즉 "너희 권세를 지닌 강대한 자들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다시 두 번 세 번 말하노니 여호와께 그의 능력과 우리를 다스리시는 그의 통치를 인정하여 영광을 돌리어라. 먼저 너희 자신을 여호와께 돌리고 그 다음에 너희의 봉사를 돌리어라."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어라. "여호와의 영광과 능력을 인정하고 그가 너희에게 주신 영광이나 능력은 무엇이든지 봉사하는 중에 그의 영광을 위해 쓰이도록 돌리어라. 그에게 너희의 면류관을 벗어드려라. 면류관을 그의 발 앞에 내어 드려라.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넘겨드려라. 그리고 그것들을 사용함으로써 그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도록 하라." 여기서 권능있는 자들에게 한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바로 이것이 영원한 복음의 총체이며 골자이다(계 14:6,7). 경건한 예배는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2절). '거룩함의 아름다움에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참조. 한글 개역 난외주). "그를 경배하되, 무한히 두려우시므로 무엇보다도 경외해야 할 분으로서 뿐만 아니라 무한히 자비하시므로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기뻐해야 할 분으로서 경배하라." 특별히 우리는 그의 거룩하심의 아름다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거룩함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리고 바로 그 거룩함이 모든 예배 행위에 아름다움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

 

(2) 이 요구를 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1) 여호와 곧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그 이름에 암시된 하나님의 자충족성 : 그 이름은 이 짧막한 시에서 무려 열 여덟 번이나 반복되어 있는데, 세 구절을 제외하고는 매 구절마다 두 번씩 나오고 그 세 구절 중에서도 두 구절에는 한 번씩 나왔다.

 

2) 만물을 통치하시는 그의 주권 : 시편 기자는 여기서 하나님의 세 가지 통치를 공표한다.

① 자연 왕국에서의 하나님의 통치 : 이 통치는 자연의 놀라운 인과 관계와 그것을 운용하는 데서 나타난다. 뇌성을 발하시는 이는 바로 영광의 하나님이시다(3절). 천둥소리를 듣는자마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있음'을 인정할 것이다(4절). 그의 소리가 그처럼 두렵다면 그의 팔은 어떠하겠는가? 뇌성 가운데서 발하시는 '여호와의 소리'는 종종 '백향목'을, 심지어 가장 강하고 가장 당당한 레바논의 백향목마저도 꺾어 부수시곤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여호와의 소리를, 백향목을 세차게 흔들어 그 꼭대기 가지를 부러뜨린 광풍으로 생각한다. 지진 또한 나무들이 자라난 땅 자체를 뒤흔들고 '레바논의 시룐'을 춤추게 만들었다. '가데스 광야' 역시 마찬가지로 진동하였는데(8절) 나무들은 바람에, 땅은 지진에 뒤흔들렸다. 해몬드(Hammond) 박사는 그것을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고 다윗을 대적한 이웃 나라들의 정복으로 생각한다. 즉 레바논 숲 근처에 영토가 위치해 있는 아람 족속이나 헤르몬 산에 접해 있는 아모리 족속, 가데스 광야 근처에 위치해 있는 모압과 암몬 족속들을 정복한 사실로 생각한다. 천둥 치는 가운데서 여호와의 소리를 따라 번개가 치므로 불이 타오른 것이 여기서는 '화염을 가르다'고 표현되었다(7절). 암사슴들은 천둥소리에 놀라 좀더 빨리 새끼를 낳는다. 어떤 사람들은 천둥소리가 암사슴들로 하여금 천둥소리가 없을 때보다 좀더 쉽게 새끼를 낳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또한 천둥소리가 '숲을 말갛게 벗긴다'고 하였다. 즉 천둥소리가 숲의 들짐승들을 놀라게 하여 그들이 숨어 있던 굴과 수풀더미에서 뛰어 나오게 하므로 그들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② 섭리 왕국에서의 하나님의 통치(10절) : 하나님은 인간 세상의 통치자로서 찬양받으셔야 한다. 그는 '홍수 때에 좌정하신다.'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이 낮은 세상의 흥망성쇠나 그 세상사의 동요와 변혁도 영원한 지성이신 하나님의 평안이 지혜에 조금도 동요를 일으키지 못한다. 그의 통치는 끝이 있을 수 없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경영은 영원부터 그의 지혜에 일치하여 이루어져 왔고 영원까지 그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다.

 

③ 은혜 왕국에서의 하나님의 통치 : 그의 영광은 여기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 그 전에서(곧 그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계시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며 찬송과 함께 그에게 나아가는 곳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9절), 즉 그 지으신 모든 것이 그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오직 성도만이 주를 송축하며 그의 하신 일을 보고 그의 영광을 말한다(145:10). 여호와께서는 모든 악한 일을 대항할 수 있도록 그들을 강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도록 그들을 구비시키기 위해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11절). 평안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든 백성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으로서 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축복이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

 

 

 

 

스펄젼의 시편 29편 강해

 

[개 요]

주제

이 시에는 “다윗의 시”라는 머리말이 붙어 있다. 머리말은 다윗이 이 장엄한 노래의 저자라고 하는 사실 외에는 우리에게 아무런 정보도 제공해 주지 않는다. 현대 주석가들의 일반적인 견해에 의하면, 이 시는 뇌성 가운데 들리는 그리고 춘분이나 추분 때의 심한 폭풍 가운데 보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한 것이다. 8편을 밝은 별빛과 달빛에 비추어 읽어야 제격이듯이, 또한 19편을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며 떠오르는 태양 광선에 비추어 읽어야 제격이듯이, 이 시는 대폭풍우의 시커먼 날개 아래에서, 번쩍이는 번갯불에 비추어, 혹은 폭풍우의 전쟁을 알리는 수상쩍은 어두움 가운데서 읽어야 그 의미를 가장 잘 음미할 수 있다. 각 구절들은 번개의 번쩍이는 장단에 맞추어 전개된다. 하나님은 어디에서나 밝히 보이시며, 온 땅은 그분의 임재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잠잠해진다. 율법과 복음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서도 그 권능의 위엄 가운데 묘사되고 있다. 우레의 아들들이 진정한 사역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은 위엄으로 가득하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결합된 모습을 본다:신학과 과학이 서로 적대적일 가능성이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따라 그분의 사역과 말씀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아마도 우리는, 예언적 시각을 통해, 이 시에서 말세의 무서운 대폭풍우 및 택함받은 백성의 안정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구성
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 2절 경배에의 부름.
3-10절 폭풍의 길을 추적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속성을 음미함. 그리고 무서운 권능의 위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찬미함.
11절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과 평강을 주시리라는 확신으로 감미롭게 전체 장면을 마감함.
천지가 사라질지라도,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분명히 축복해 주실 것이다.


[강 해]


1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2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1절.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너희 땅과 하늘의 큰 자들, 곧 왕들과 천사들아, 복되며 유일하신 권세자께 경배드리는 일에 참여하라. 너희 사람들 중에 군주로 행세하는 자들은 일깨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너희는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자들이 열정을 보이는 부분에서 낭패를 경험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낭패를 경험하지 말고, 곧장 너희 머리를 숙이고서 왕 중 왕께 충성스러운 경의를 표하라. 고관들과 권세자들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일에 아랑곳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들이 여호와를 찬양하기에 이르렀을 때, 그들의 경건은 자신의 면류관들을 장식하는 가장 값진 보석이 되었다.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영광과 능력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독점적인 특권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을 과시하고자 이것들을 내세우려 하기 쉽다. 면류관과 검을 지닌 자들은 자신이 하나님께 의존된 존재임을 시인해야 한다. 왕들이여, 너희 팔에다 영광을 돌리지 말며, 너희 전사들에게서 힘을 얻으려 하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의 모든 겉치레들은 단지 시들어가는 꽃과 같으며 너희의 힘은 스러지는 그림자와 같기 때문이다. 왕들과 군주들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길 날은 언제 도래할까? 모든 덧옷에는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경배를 드려야 한다"는 내용의 문장을 새겨야 한다.


"여호와께." 오직 그분께만 영예를 돌려드려야 한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자연적인 원인들은 하나님의 활동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우리는 그 능력을 그것들에게 돌려서는 안 되며, 만물의 참된 근원이시며 무한하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그분께 돌려야 한다.


"돌릴지어다." 사람들이나 천사들이 여호와께 무엇을 수여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그분의 영광과 능력을 깨달아야 하며, 또한 노래를 통해 마음으로부터 그것들을 그분께 돌려야 한다.


2절.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이러한 권고가 세 번째로 주어지고 있다.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는 뒷걸음질을 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권세자들은 자기 자신의 영광을 높이는 일에 너무도 가슴이 부푼 나머지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을 돌릴 시간조차 없는 경우가 흔하다. 오직 지극히 정당하고 합당한 찬양만이 그들에게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분명 사람들은 마땅한 것을 바침에 있어 그토록 압박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흔쾌한 마음으로 바쳐야 할 때는 특히 그러하다. 불신과 의혹, 불평과 불만 등은 하나님의 영예를 실추시키려는 태도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건대, 심지어 성도들조차 자신의 왕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일에 실패하는 때가 많다.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헌신된 경의와 신성한 외경심을 지니고서 그분 앞에 엎드리라. 그분이 지정하신 바대로 그분께 경배드리라. 옛날에는, 의식들이 예배에 방해가 되었으며, 사람들은 지정된 건물 주위로 모였다. "거룩한 옷"은 그 건물의 엄숙한 겉모습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예배가 영적이며, 건물의 구조와 예배자들의 의복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의 눈에는 내적 순결함과 외적 거룩함이라고 하는 영적 아름다움이 한층 더 고귀하다. 성도들이 거룩한 동기와 거룩한 방법으로 예배드릴 수 있게 된 것은 그 얼마나 큰 은혜인가! 이 두 절 속에 나오는 경배에의 부름은 요란한 뇌성과 함께 울려 퍼진다. 그것은 왕들과 천사들에게 울리는, 그리고 땅의 모든 자손들을 헌신에로 초대하는, 우주적인 교회 종소리이다.


3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여호와의 소리가 힘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5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6그 나무를 송아지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같이 뛰게 하시도다
7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하시도다
9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10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3절.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우레는 시적으로뿐만 아니라 교훈적인 의미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이라 지칭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높은 곳에서부터 울리며, 다른 모든 소리들을 압도하고,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며, 인간의 힘과 전혀 무관한 것이며, 또한 때로는 그것이 아담의 후손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과 함께 동반되는 것으로서 사용되어 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깊은 바다가 바다를 부르고 격노한 바다가 분노한 하늘에 메아리를 발할 때, 바다에서 맞는 폭풍우는 심한 공포를 야기시킨다. 배의 돛대 주위로 번쩍이는 번갯불보다 더 무시무시한 광경도 없으며, 폭풍우의 부르짖는 소리보다 더욱 경외심을 고무시키는 것으로 생각되는 소리도 없다. 천상에 속한 자녀들은 종종 성도들에게서 특별히 찾아볼 수 있는 겸손한 즐거움을 지니고서 그 요란한 소리를 즐겨 경청해 왔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도 폭풍우가 지속되는 동안 본의 아니게 경외심을 나타내어 왔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사실 뇌성은 단순한 전기 현상인 것만이 아니며, 하나님 자신의 개입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기도 하다. 심지어 고대의 이교도들도 주피터 토난스(Jupiter Tonans)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현대의 현인들은 우리로 법칙들과 에너지들을 믿게 할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을 배제시키고자 할 것이다. 전기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그것은 부름을 받아 나름대로의 임무를 띠고 보내져야 한다. 그리고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명하시기 전까지는, 그 불벼락은 자동력이 없으며 무기력하다. 화강암 바위나 쇠빗장이 하늘로 날아다닐 수 없듯이, 위대하신 첫째 원인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지 않고서는 번개가 발해질 수 없다.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아직 시편 기자의 귀에는 여호와의 음성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소리는 위에 있는 구름 바다의 엄청나고 캄캄한 물로부터 울려나오며, 아래에 있는 폭풍우 드센 바다의 거대한 물결로부터 메아리친다. 궁창의 위 아래에 있는 물들은 영원하신 음성에 놀란다. 성령께서 우리 영혼의 곤경이라고 하는 큰 물결 위로 하나님의 약속이 들려오게 하실 때, 하나님은 우주에서나 영적 세계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 위와 아래에 있는 모든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4절. "여호와의 소리가 힘있음이여." 거역할 수 없는 권능은 번개를 동반한다. 우레는 번개를 알리는 역할을 한다. 여호와께서 원하시면, 단 한 순간에 전기의 힘은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 이 주제를 다룬 한 기자는 이러한 결과들에 대해 이르기를, 그분의 힘으로 인한 태양만큼 강렬한 빛과 가장 견고한 금속도 녹일 수 있는 열 그리고 가장 힘센 짐승의 근육을 한 순간에 마비시키는 힘 등이 야기된다고 한다. 이는 지구 어디에나 미치는 중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힘이며, 가장 단단히 결합된 것들도 분해 및 개조시킬 수 있는 에너지이다. 이를 가리켜 톰슨은 "정복할 수 없는 번개"라고 잘 표현한 바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물리적인 힘들 중 으뜸가는 것이며 아무도 그 힘을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 속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그토록 강력하듯이, 은혜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독자는 유사한 내용을 쉽게 추론할 수 있을 것이며, 복음서내에서도 폭풍우 속에 들리는 여호와의 우레로써 설명될 수 있는 사항을 많이 발견할 것이다. 그분의 음성은 자연 속에서건 계시 속에서건 간에 하늘과 땅 모두를 뒤흔든다. 그분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만일 그분의 음성이 그토록 강력하다면, 그분의 손은 어떠하겠는가! 그 손의 타격을 유발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여호와의 소리가 힘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왕 중 왕께서 왕처럼 말씀하신다. 사자가 포효할 때 숲의 모든 짐승들이 잠잠하듯이, 여호와께서 놀랍게 우레를 발하시는 동안 땅은 입을 닫고 침묵한다.
'이 소리를 들으면 두려움과 놀라움 가운데 모든 것이 침묵한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말하자면, 그 위엄은 문체와 주제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 미치는 힘 등에 있어 명백하게 드러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그것은 은으로 만든 홀을 휘두르시는 자비로운 위엄이다. 그러한 위엄으로부터 우리의 구원에 관한 말씀은 충만히 넘쳐 흐른다.


5절.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위로부터의 타격을 받아 검게 그을은 소나무는,
서글프게 부숴진 둥치만 서 있다.
귀한 나무들이 신비한 벼락을 맞아 쓰러져 있다. 혹은 벼락의 힘에 대한 기념물로서 황량한 모습으로 서 있다. 레바논이 높은 곳에 위치해 있을지라도, 또한 그곳의 귀한 나무들이 오래되었다고 하더라도, 레바논 그 자체는 안전하지 않다.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여호와께서 노를 발하시는 때에는 가장 크고 귀한 나무들(혹은 사람들)이라도 면제받을 수가 없다. 예수님의 복음이 죽을 운명에 처한 존재인 사람들에게 미칠 때에도 그와 같은 힘을 발휘한다. 여호와께서 말씀을 보내실 때, 그것은 백향목보다 훨씬 더 단단한 마음들을 부순다.


6절. "그 나무를 송아지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같이 뛰게 하시도다." 나무들뿐만 아니라 산들 자체도 마치 송아지들이나 영양들이 까불며 뛰어 돌아다니듯이 움직인다. 오늘날 시인들이 자신이 익히 아는 언덕과 골짜기들을 언급하듯이, 기자는 리바누스 산맥을 따라 떠들썩하게 울려 퍼지는 굉음을 듣고 있으며, 그러한 소동을 회화적인 필치로 묘사한다. 우리 시대의 어느 전원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카나번 산맥 가운데로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지고
흉칙한 모습으로 창공을 향해 치솟은
펜멘 마우르의 거친 바위들이
강렬한 굉음과 더불어 깊은 물 속으로 빠져든다.
낭떠러지가 무너지고 스노우돈의 정상이 해체되어,
갑자기 황량한 길을 낸다.
멀리, 체비오트의 뜨거운 화염이 높이 치솟고,
툴레의 굉음은 먼 섬들에게까지 미친다.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은, 바위처럼 단단한 인간의 완고함과 산처럼 드높은 교만을 능히 파하고도 남을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다. 우리 주님이 죽음을 맞으면서 발하신 음성은 바위들을 갈라지게 하고 무덤을 열었다. 그분의 음성은 아직도 살아서 동일한 이적들을 일으킨다. 그분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자. 그분의 개입하시는 음성이 들릴 때, 우리 죄악의 언덕들이 그분의 무덤 속으로 뛰어들며 그분의 피의 홍해 속에 매장된다.


7절.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묵직한 해머를 내려치면 모루로부터 불꽃이 튀는 것과 같이, 여호와의 우레에는 번개가 동반된다.


처음에는 하늘 가장자리 너머로
폭풍우의 엄숙한 굉음이 들리더니,
그것이 점차 가까워옴에 따라,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울림이 바람에 실림에 따라,
번갯불은 더 크게 번뜩이고, 그 소리는
간담을 더욱 서늘하게 하며,
마침내 머리 위로 격노한 불꽃이 두루 확대된다.
그 불꽃은 사라졌다가 더 크게 번뜩이기를 거듭하다가
거대한 섬광 속에 휩싸인다.


섬광이 번뜩이는 시점 이후로 우르릉거리는 뇌성은 마치 그 불꽃을 가르는 듯이 보인다. 그 불꽃이 진짜 화염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가끔 집이나 교회 등에 떨어져 그것들을 화염에 휩싸이게 하는 데서 입증된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뜨거운 벼락으로 패역한 피조물들을 멸하시기란 그 얼마나 쉬운 일인가! 중죄를 범한 자들을 그토록 쉽게 부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으시는 그분의 손길은 또 얼마나 은혜로우신가!
복음 가운데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에도 화염이 동반되며,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비추고 또 그것을 녹인다. 이를 통해 그분은 우리의 정욕을 태우시며, 우리 안에 고무적인 사랑과 거룩함이라고 하는 불꽃을 지피신다. 오순절은 본절에 대한 간접적인 주석인 셈이다.


8절.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하시도다." 폭풍우 소리가 진동함에 따라, 그것은 광야를 뒤흔든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갈채를 구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가장 위대한 일들을 사람의 호기심 어린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행하신다. 사람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곳에, 하나님의 음성이 무섭도록 분명하게 들린다. 광대하고 잠잠한 평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진동했다. 침묵을 통해 전능자의 음성에 경의를 표했다. 높은 산들뿐만 아니라 낮게 깔린 평원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권세자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도 여호와의 영광을 인식해야 한다. 고적하고 황량한 곳들은 복음에 담긴 천상의 소리로 인해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흔들며 뒤집어엎는 능력이 들어 있다. 하나님이 명하시면 변화를 거부하는 광야마저도 진동하며 어떤 움직임을 보인다.


9절.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겁많은 이 짐승들은 폭풍우 소리에 너무도 놀란 나머지 때이른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엉겁결에 자신의 뱃속에 든 짐스러운 새끼를 떨어뜨린다. 아마도, "참나무를 떨리게 하시고"가 더 나은 독법일 것이며, 특히 이 독법은 이어지는 구절인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와 적절한 조화를 이룰 것이다. 삼림의 짙은 그림자는 번개의 눈부신 섬광으로 인해 환히 밝혀지며, 가장 어둡고 후미진 곳들마저 잠시 그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낸다.


침침한 나무들이
불꽃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그 깊고 후미진 곳에까지
섬광이 비취매, 그 속에 거하는 것들이
두려워 떨고 있다.


우리의 시조들은 나무들 가운데서 은신처를 찾고자 했지만, 여호와의 음성은 이내 그들을 찾아내셨고 그들의 마음을 떨리게 하셨다. 전능자의 불꽃 같은 눈길로부터 숨겨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의 분노한 눈길이 단 한 번 번뜩이면 한밤중도 대낮으로 변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 역시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속을 밝히 드러내는 힘을 갖고 있다. 그것은 한 순간에 불경건한 마음의 어둡고 후미진 모든 부분을 밝히 드러내며, 그 영혼으로 하여금 여호와 앞에서 떨게 만든다.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성전에서 예배하고 있던 자들은, 거듭되는 천둥소리를 듣게 됨에 따라,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고백해야 했다. 온 세상 역시 하나님의 성전이며, 그분이 바람 날개를 타고 날으실 때 만물이 그분을 찬양하는 소리를 발한다. 구속하심을 받아 주께 속한 그리고 그분의 성령을 위한 살아 있는 성전들인 우리 역시, 피조물 가운데 드러난 그분의 놀라운 권능을 보며 그 크신 은총을 느낄 때, 합력하여 그분의 이름을 높인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그분의 영광을 주제로 삼을 때 그 누구도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위엄을 감지한 모든 것들은 환희 가운데 "영광, 영광"이라고 외치기 마련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원래적인 위엄을 접한 자들의 당연한 외침이다. 우리는 감리교인들을 위한 그리고 열정적인 웨일스인들을 위한 좋은 선례를 바로 여기서 엿보게 된다.


10절.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폭풍우에 이어 홍수가 닥치지만, 여호와께서는 이미 그 비상사태를 준비하고 계신다. 그 어떤 대홍수도 그분 보좌의 기초를 허물어뜨리지는 못한다. 깊은 물이 제아무리 포효하며 위협할지라도, 그분은 평온하시며 동요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통치는 피조물들 중 가장 불안정하고 요동스러운 것들까지도 다스리신다. 여호와는 사나운 물결에 아랑곳하지 않으시며, "당신의 발자취를 바다 위에 남기시고 폭풍우를 타고 다니신다."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깨에다 영원토록 정사를 매고 계신다. 가장 심한 폭풍우를 맞는 때에도 우리는 그분의 손길 안에서 안전하다. 사탄은 왕이 아니며, 예수님은 여호와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경배하며 영원토록 기뻐하자.


1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폭풍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으며, 이 시에서는 그 사실을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제 폭풍 뒤의 싸늘한 고요 속에서, 그 힘은 택함받은 자들에게 주어질 힘으로 약속된다. 정확히 벼락을 날리신 분이 이제 구속함받은 그분의 백성에게 독수리 날개를 주실 것이다. 그 음성으로 땅을 뒤흔드신 분이 그 성도들의 대적들을 놀라게 하실 것이며 그분의 자녀들에게 평안을 주실 것이다. 우리에게는 피신처로 삼을 신성한 힘이 있는데 우리가 어찌 약하겠는가? 주님의 평안이 우리 것인데 어찌 우리가 근심하겠는가? 권능의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평안이 되신다. 오늘날 이는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또한 그것은 주님의 날에 우리에게 그 얼마나 큰 축복이 될 것인가!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그날이 빛이 없는 어둠 속에 임할 것이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이 시는 폭풍우 사나운 날에 불러야 할 고귀한 노래가 아니겠는가? 여러분은 천둥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는가? 마지막 천둥 소리가 스러지고 예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때 여러분은 노래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여러분이 신자라면, 이 마지막 절은 여러분 몫의 유산이며, 그것은 분명 여러분으로 노래를 부르도록 해줄 것이다.




[주해와 설명들]


시 29편 전체. 이 시편에서는 여호와의 권능을 찬양하고 있다. 그리고 레바논의 천둥-폭풍우를 여호와의 권능에 대한 예증으로 삼은 것이 분명하다. 이 시는 천사들을 대상으로 지어진 듯하다. 시편 89:7을 참조하라. 이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곧이어 천둥-폭풍우에 관한 묘사가 뒤따르며, 이러한 묘사를 통해 역사의 진전 과정을 엿보는 것이 단순한 공상에 불과하지는 않은 듯하다. 처음에는 요란한 천둥소리만 묘사되는 듯하며, 천둥소리가 더욱 가까워옴에 따라 그 묘사 역시 점차 강렬한 어투로 변해간다.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하지만 이제 그 결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폭풍우가 산들과 숲 위로 쏟아져 내려온다.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그 나무를 송아지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같이 뛰게 하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폭풍우는 산들로부터 평원으로 휘몰아쳐 내려간다. 하지만 그 결과는 산들 위에 미친 영향만큼 무섭지 않다.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하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이 시는 범람하는 홍수를 묘사함으로써 마감된다.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그러고 나서 이 시 전체와 관련된 윤리 혹은 적용이 이어진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로버트 머리 맥셰인
(Robert Murray M'Cheyne, 1813-1843).


시 29편 전체. 자연 현상 중에서 뇌우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호머와 버질에서부터 단테와 밀턴에 이르기까지 혹은 심지어 그레이엄과 팔럭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시인들이 그것을 묘사했다. 성경(시 29편)에서도, 뇌우에 관한 묘사가 나온다. 여기 묘사된 폭풍우는 지중해로부터 생겨나서 레바논과 내륙 산악지대를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며, 그럴 때 사람들은 성전의 기둥이 있는 현관 안으로 피한다. 또한 여기서는 폭풍의 지리적 이동을 무서운 필치로 묘사함과 아울러, 연속적인 뇌성 가운데 계시는 여호와의 임재를 묘사함으로써 신성한 활력과 권능을 암시한다. -제임스 해밀턴(James Hamilton, The Literary Attractions of the Bible, 1849).


시 29편 전체. 폭풍우가 몰아치는 동안 불리우는 영광스러운 찬양의 시편이다. 그 폭풍우의 위엄은 자연 만물을 뒤흔들어, 하늘과 땅 모두에서 주님의 크신 권능을 느끼게 한다. 주님은 자기 백성의 하나님이시며, 권능과 평강으로써 그들을 축복하신다. 이 시인의 감명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동양의 폭풍우를, 특히 팔레스타인의 산악 지대에서 발생하는 폭풍우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 폭풍우는 둘러선 산들로 인해 일어나는 섬뜩한 메아리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동반하며, 종종 사람들과 짐승들을 공포에 떨게 하며, 또한 도시와 들판들을 파괴시킨다. 여행가인 윌슨은 바알벡 인근에서 만난 폭풍우를 이렇게 묘사한다:"나는 폭풍우와 맞닥뜨렸다. 그것은 마치 하늘의 수문이 터진 것 같았다. 그것은 일순간에 들이닥쳐, 세상 종말을 느끼게라도 하려는 듯 거세게 요동했다. 엄숙한 어둠이 땅을 뒤덮었다. 억수 같은 비가 쏟아져 산허리로 미끌어져 내렸고, 폭풍우의 무서운 힘에 의해 두터운 안개 구름으로 변했다." 마태복음 7:27에 수록된 우리 주님의 비유와 비교해 보라. -톨룩.


1절.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70인역은 이를, '너희 새끼양들아!'라고 옮긴다. 방울달린 길잡이 수양들은 자기 코를 높이 치켜올려서는 안 되며 갈기를 더 높이 세워야 한다. 왜냐하면 목자가 그들에게 방울을 달아주었기 때문이다. -존 트랩.


1절.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돌리고, 돌리고, 돌리라. 이는 하나님께 합당한 권한을 돌려드리는 것이, 혹은 이런 목적에서 주어진 권고의 말을 감내하는 것이 대체로 마음 내키지 않는 일임을 시사한다. -존 트랩.


1, 2절. 이 두 절 속에 '돌리라'는 말이 세 차례 나온다:"여호와께 돌리라, 여호와께 돌리라,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여호와께 돌리라." 영광은 하나님의 권한이며, 그분은 자신의 권한을 주장하신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이를 알고 있다. 따라서 그는 그분의 권한을 그분께 돌리며,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예와 영광을 그분께 돌린다. 하지만 내 말뜻을 곡해하지 않도록 기도하라. 나는, 진정 신실한 자들이라면 실제로 자신의 모든 행위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게끔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렇게 되는 것이 이 땅에서 참으로 바라 마지않는 행복이지만, 우리가 하늘에 이르기까지는 결코 그러한 경지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최선의 마음 상태를 가진 자들에게도 천박하고 왜곡된 목적과 목표들이 슬며시 밀려들지만, 신실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그런 목적과 목표들 아래에서 한숨쉬며 신음한다. 그들은 그것들로 인해 하나님께 불평하고, 공의를 구하며 부르짖는다.

또한 그들은 그것들을 면하게 되기를 너무도 진지하게 갈망하며 그렇게 되고자 매일 애를 쓴다. 따라서 그것들에 대한 책임이 그들에게 지워지지는 않으며, 그것들로 인해 선한 목적을 갖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평범하고, 보통이며, 또한 습관적인 경로를 밟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그리하면 당신은, 그의 모든 행위와 일의 목적과 목표들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며, 또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존귀케 해드리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위선자가 자신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왜곡된 목표들과 육육적인 목적들을 삼켜버릴 것이다. 이는 마치 아론의 지팡이가 애굽 술객들의 지팡이들을 삼켜버린 것과 같다(7:10-12). 보라, 태양이 환한 불빛을 발산하듯이, 하나님의 영광은 그것이 비치는 곳마다 왜곡되고 천박한 모든 목표들을 발산시켜 태워버릴 것이다. 보라, 바로의 야윈 소가 살진 소를 잡아먹듯이(창 41:4), 하나님의 영광은 종교적인 일을 추구하는 영혼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피둥피둥하고 세상적인 모든 목적들을 집어삼킬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인생의 최대 목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곳에서는, 천박하고 왜곡된 모든 목적들이 아래로 밀쳐질 것이다. -토머스 브룩스.



2절.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당신은 이렇게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의 이름은 모든 찬양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시 148:13). 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랍비들은 이 시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이 시에서 하나님의 성호가 열 여덟 차례나 언급되고 있으며, 특히 대인들이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분께 돌릴 수 있다. 그들은 경외심을 지니고 살며 범죄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또한 그분은 위대한 왕이시며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시기 때문에(말 1:14), 경외의 대상이신 그분께 최선의 예물을 드릴 수 있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존 트랩.


2절.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누군가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질 수 있다:여호와께서 경배를 받으셔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분이 높은 곳에 있는 자들로부터 높은 그토록 높은 영예를 받으셔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에서 그분께 그러한 경배를 드리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다윗은 신학적으로뿐만 아니라 기상학적으로도 대답한다. 예컨대, 그는 구름을 통해 대답하기도 한다(3, 4절):"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비록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고레스나 알렉산더처럼 외적이고 과시적이며 정치적인 왕국을 세우시지는 않을 것이나, 복음의 사역을 통해 그분은 영적 왕국을 세우실 것이며, 땅의 모든 민족들로부터 당신께로 교회를 모아 영원토록 존속되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이스라엘 백성(혹은 유대인들)에게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포함한 온 세상에 전해지고 증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밝아지고 깨어나며,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이라고 하는 들어보지 못했던 교리로 말미암아 감동받을 것이다. 그 교리는 대대로 감취어 왔던 것이다. -조셉 캐릴.


3절.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 내 눈에서 억수같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내 영혼 속에 계시는 당신의 신성한 임재를 선포합니다. 지금까지 이 심령은 너무도 메마르고, 너무도 무미건조하며, 또한 너무도 완고했습니다. 당신이 두번째로 치신 이 바위는 더 이상 당신을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거기로부터 유익한 물이 풍성하게 내뿜어지기 때문입니다. 산들을 뒤집고 뇌성벽력을 치며 죄인을 덮은 하늘을 가르시던 바로 그 하나님의 음성이, 이제 구름을 명하여 축복의 소낙비를 퍼붓게 하시며, 영혼의 광야를 변화시켜 백배의 결실을 거두게 하는 논밭이 되게 하십니다. 그 음성을 나는 듣고 있습니다. -장 밥티스트 마시용.


3-10절. "여호와." 우리가 보통 자연력이나 운동의 법칙에 따른 결과라고 말하는 모든 것들은, 실제로는(만일 엄격하게 그리고 적절하게 말하자면) 매 순간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하나님의 활동에 따른 결과들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직접적으로 친히 사역하시거나 혹은 지성적인 어떤 피조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사역하기도 하신다. 결국 자연의 원인이나 자연력과 같은 것은 없다. -사무엘 클라크(Samuel Clarke, 1675-1729).


3-10절.


여호와의 음성이 대양 위에서 들리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신다
그 보좌 깊은 곳에서부터 울리는 여호와의 음성은
공포요 권능이라 자연 만물이 두려워한다.


숲의 정적 가운데 들리는 여호와의 음성이
그 메아리를 일깨우며,
그 동굴 속으로 번갯불을 비춘다.
여호와께서는 사나운 홍수 위에 좌정하시며,
바람과 물결을 종으로 부리신다.
-제임스 몽고메리(James Montgomery, 1771-1854).


3-11절.


메시아의 음성이 구름 속에 있고,
영광의 하나님이 우렁찬 뇌성을 발하신다.
메시아께서 홍수 위를 타고 다니시며,
나는 구름 위로 걸으신다.
메시아의 음성은 권능으로 가득하고,
폭풍우가 수그러들 때 그분의 번개가 활약한다.
메시아의 음성이 백향목을 꺾으시며,
레바논의 기초가 진동한다.
메시아의 음성이 언덕을 제거하시고,
광야는 온통 강이 되어 흘러 넘친다.
거친 숨을 내쉬며 발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바위들을 사방으로 흩기 시작할 것이다.
시온산과 시룐산이,
레바논과 함께 경계를 점할 것이다.
그분이 창공에다 숨을 내쉬실 때,
화염이 그분 주위로 휘감아 올라갈 것이다.
메시아의 음성이 땅을 뒤흔들 것이며,
보라! 무덤들이 산고로 신음할 것이다.
그러한 산고의 결과로서,
무수한 사람들이 살아날 것이다.
복음이 이르기를, 하나님의 평강이라 하면,
땅도 하나님의 평강이라 화답한다.
복음이 영원토록 비추는 빛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빛이다.
이것은, 세상 끝까지 축복하기 위해
여호와께서 보내시는 빛이다.
-바클리(Barclay)의 의역.


4절. "여호와의 소리." 이 표현을 열정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일련의 천둥소리를 연상케 한다. 어떤 이는, 그 소리가 메아리로 거듭 울림에 따라, 무시무시한 하늘 대포가 연발사격을 실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C. H. S.


4절.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분께 돌리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내 마음속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내 속에는 불경건한 완고함과 고질적인 무질서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분은 나를 이 무기력한 상태로부터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시키셨고, 자신의 이름의 영광과 그 은혜의 권능을 눈부실 정도로 빛나게 하셨다. 그토록 경이로운 일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분뿐이다. 창조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불신자들은 이 경우에 있어, '이것이 하나님의 손가락'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 혼돈은 당신을 어떻게 거역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음성을 유순하게 경청하지만, 완고한 마음이 당신을 거부하며, 또한 당신의 힘찬 음성을 듣고서도 순복하지 않는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주께서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때보다도 패역한 심령을 명하사 그 죄악의 심연으로부터 일어나게 하시며 당신의 명령을 따르게 하시는 때가 더욱 위대하고 놀랍습니다. 주의 위엄에 찬 말씀을 통해 범죄와 무지의 혼돈을 흩어버리시며 가장 참담한 어둠에 빛을 비추시고 또한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곳에 성령을 통해 조화로운 질서를 세우시는 일 등은, 첫 혼돈으로부터 천체와 그 법칙들을 일으켜 세우신 일보다 당신의 전능하심을 훨씬 더 분명히 드러냅니다. -장 밥티스트 마시용.


4절. 복음의 "보아너게"('우레의 아들'이라는 뜻으로서,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에게 붙힌 이름-역자 주)들이 하늘 아래 모든 곳에 영광스러운 복음의 소리를 전함으로써 온 세상으로 하여금 분별력을 회복하게 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는 인자의 음성이 나중에는 심판으로 부르는 음성이 될 것이다. -조지 혼.


4절. 왕의 말씀이 있는 곳에 힘이 있다. 하지만 그 어떤 황제의 음성이 여호와의 장엄한 뇌성에 비견될 수 있을까? -C. H. S.


5절. "여호와의 소리." 철학자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을 멀찌감치 분리시켜 놓지 않는 한, 그들은 하등 원인들에 관해 흡족할 정도로 능숙하게 사유해 왔다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악마적인 과학은 우리의 생각을 자연의 활동에 고정시키고 하나님께로부터는 돌이키게끔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을 알기를 원하는 자가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 손톱에만 자신의 눈을 고정시킨다면, 그의 어리석음에 대해 조소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역 그 자체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그분의 손길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지 않기 위해 간접인(間接因)과 근인(近因)에 착안하여 스스로를 베일로 가리우는 철학자들은 훨씬 더 어리석다. -존 칼빈.


5절.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폭풍우가 일어나고 순식간에 그리고 잽싸게 번개가 쳐서, 산들과 가장 큰 나무들을 뒤흔들어 엎는 것과 같이,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하고 거만하며 자만심에 사로잡혀 있고 무례한 그리고 평온하게 지내는 경건한 자들을 훼방하려 드는 자들을 비참하게 넘어뜨리신다. -로버트 코드레이.


5절.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고대의 주해가들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바에 의하면, 바람에 의해 백향목이 꺾인다는 것은 그날에 성령의 강력한 돌풍에 의해 이 세상의 거만하고 교만한 것들이 쓰러짐을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백향목을 꺾으시고 높은 자를 낮추신다'(성 제롬, 그리고 성 바실). -크리스토퍼 워즈워스.


5절.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며 무섭게 위협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완고한 마음이 깨트려지지 않고 순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존 트랩.


5절.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소나무가 하늘 높이 치솟을 때,
돌연히 일진광풍이 닥쳐 그것을 부러뜨린다.
하늘 높이 치솟은 궁전도
육중한 굉음을 내며 무너진다.
또한 하늘로부터 번개가 날아가서
거만한 자가 서 있는 언덕을 강타한다.
-호레이스(Horace),
신학박사 필립 프란시스(Philip Francis, 1765) 역.


5절. "레바논의 백향목." 오랜 기간 동안 폭풍우의 힘을 견뎌온, 그리고 항상 눈으로 덮인 지역에서 커다란 상록 가지들을 뻗고 있는 이 위엄스러운 하나님의 나무들은 격노한 번개의 첫번째 표적이 된다. 번개가 가장 높은 물체에 먼저 떨어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로버트 머리 맥셰인.


6절. "그 나무를 송아지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같이 뛰게 하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강력한 음성인 천둥을 통해 먼저 그들로 두려움에 놀라 뛰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소생의 기쁨으로 뛰게 하실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7절). 말하자면, 모든 이들에게 각자의 필요에 따라(고전 12:11) 성령을 보내어주실 것이다. 이 성령은 불에 비유되며 불이라 불리우시기도 한다(마 3:11). 또한 성령은 돌풍을 동반한 뇌우와도 같이, 그리고 불처럼 보이는 "갈라진 혀"의 모습으로 나타나, 각 사도들 위에 임하셨다(행 2:2, 3). 갈라진 화염을 동반한 이 뇌성은 단지 예루살렘에서만 들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8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어지기 때문이다:"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하시도다." 즉, 여호와께서는 권능에 찬 복음의 음성을 통해 광야와 같고 선한 것이 메마른 그리고 영적으로 미숙한-비록 그들이 훌륭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도시에서 살고 근사한 윤리를 갖추고 있을지라도-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실 것이다.

또한 그 복음의 음성은 황량한 광야에 거하며 예의범절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질 것이다. 우레같이 울리는 여호와의 음성이 이 광야들을 이제까지 뒤흔들어 왔고, 이 날도 뒤흔들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도 뒤흔들 것이며, 그리하여 이방인들이 충분히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복음의 음성을 통해 이 광야들 중 상당수를 비옥한 들판과 살기 좋은 땅으로 변하게 하셨다. 왜냐하면 (9절에서 이어지듯이) 이 광야에서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분은 사나운, 교육을 받지 않은, 그리고 암사슴처럼 길들여지지 않은 자들을 혹은 숲의 짐승들과 같은 모든 자들을, 새로운 탄생을 위한 고통으로 인도하시며, 복음 안에서 겸비케 하고 회개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심으로써, (시편 기자가 계속해서 언급하듯이) 그분은 "숲을 말갛게 벗기"신다.

말하자면, 사람들의 두터운 마음을 열어 젖히시는 것이다. 그 마음은 공허와 교만과 위선과 자기애와 자만으로 가득하며, 또한 방탕과 육욕으로 가득하다. 이는 마치 두텁게 자라나서 통행을 가로막던 나무들을 불사르고 찍어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 여호와께서는 칼과 불로써 즉, 말씀과 복음의 영으로써,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삼림을 열어 젖혀 드러내신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마감될 때, 숲은 성전으로 변하며, 9절 결론부에서 언급되듯이,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한다. 만일 복음의 천둥과 번개를 통해 그리스도께 순복하여 거룩한 성전으로 화한 자들에게 불경건의 홍수가 덮친다면, 시편 기자는 우리를 이렇게 확신시킨다:"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심이여." 이는 그 홍수가 그분의 권능 아래에 있으며 그분이 그것을 다스리고 지배하신다는 뜻이다:"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또한 11절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따라서, "하나님이 기이하게 음성을 울리신다"(욥 37:5). 그분이 천둥소리를 발하사 죄인들을 회개시키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럽고 기이한 일이다.

따라서, 비록 내가 성경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이 시와 성경의 다른 내용들을 비유적 해석에 의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말씀 선포를 통해, 천둥과 번개의 권능을 드러내신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이다. 우리는 천둥과 번개의 권능, 이 두 가지 모두에 주목해야 한다. -조셉 캐릴.


6절. "그 나무를 송아지같이 뛰게 하심이여." 그분은 벼락에 맞은 나무들을 산산조각으로 동강내어 공중으로 내던지신다. 혹은 바람이나 폭풍우 혹은 지진에 의해 그것들이 요동치기도 한다. -조반니 디오다티.


6절. 원문은 다음과 같다.


"그들을 송아지처럼 뛰게 하시며,
레바논과 시룐을, 마치 들송아지처럼."


첫눈에 이것은 여전히 백향목과 관련된 내용인 것처럼, 그리고 레바논과 시룐은 그곳들에서 자라는 백향목을 암시하는 환유법적 표현으로 사용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1) 우리는 시룐(이는 셰니르 혹은 헤르몬이라는 지명으로도 불리움)에 백향목이 자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2) 시편 114편에 나오는 평행구절을 보면, 이러한 해석을 거의 지지할 수가 없다. 시편 114:6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너희 산들아 수양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같이 뛰놂은 어찜인고."


여기서도 같은 동사가 나온다. '뛰다', '춤추다'는 뜻인 이 동사는 나훔 3:2에서 덜커덩거리는 병거들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요엘 2:5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두 경우들은, 시끄러운 소음을 동반한 거친 움직임을 나타내고자 한 듯하다. 물론 이는, 뇌우의 일반적인 영향에서 착안한 매우 상징적인 묘사로 이해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볼네(Volney)의 다음과 같은 언급과 비교해 보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그 내용인즉, 레바논산에서 흔히 나타나는 특정한 자연 현상에 대한 묘사로서, "산들이 뛰는 것"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제시할 수 있다.

"여행자가 이 산들의 내부로 뚫고 들어설 때, 바위투성이인 울퉁불퉁한 길들과 가파른 내리받이들 그리고 깊은 낭떠러지들이 처음에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를 태운 영리한 노새로 인해 이내 확신감을 가지게 되고, 당혹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연속해서 이어진 그림 같은 장면들을 느긋한 심정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된다. 때때로 거기서 마치 알프스에서와 같이, 그는 출발 무렵에 시야에 들어왔던 한 지점에 도착하기 위해 하루 종일 전진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는 돌이키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며, 돌아가거나 기어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는 중에, 그는 어떤 신비한 힘이 매 걸음마다 아름다운 전경들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갖기 쉽다. 때로는 마을들이 눈에 띄며, 가파른 내리받이가 시작됨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마을들은 매우 잘 정돈되어 있어 일렬로 늘어선 지붕들이 그 윗부분에 늘어선 집들을 위한 행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마치 티그레 골짜기의 마샤야처럼, 따로 분리된 봉우리 위에 자리잡은 수도원도 시야에 들어온다. 여기서는 바위가 급류에 의해 깎인 나머지, 나하르 엘 레바논에서와 같이 천연 폭포를 형성하고 있다. 또 어떤 바위는 마치 천연적인 성벽과 같은 모습을 한 상태이기도 하다. 종종 양 옆으로는, 물살에 의해 깎인 암붕들이 인위적으로 무너뜨린 폐허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어떤 곳에서는, 경사진 바닥과 만나는 물이 중간 지대를 파헤쳐서, 아투라 근방의 나하르 엘 켈브에서와 같이 동굴을 형성시켰다. 또 다른 곳에서는, 저절로 지하 수로가 형성되어, 마르 하마에서처럼, 그곳을 통해 간헐적으로 실개울이 흐른다. 때로는 이처럼 그림 같은 장면들이 끔찍한 모습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해빙이나 지진에 의해 균형을 잃은 바위들이 인접한 주거지에 곤두박질쳐서 그 주민들의 목숨을 빼앗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약 20년 전에는, 이런 유의 사고로 말미암아 마르 드조르도스 근방의 마을 전체가 흔적도 남지 않은 채 돌무더기에 깔려 버렸다. 보다 최근에는, 바로 그 지점 곁에서, 뽕나무와 포도나무를 심어둔 언덕의 토양이 갑작스런 해빙에 의해 그 암반 위로 무너져내려, 마치 물에 띄운 배처럼, 그 아래 계곡으로 그 자태를 그대로 옮겨놓은 모습이 되었다." -로버트 머리 맥셰인.


7절.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하나님의 권능이 "화염"을 "가르며," 땅 위의 구름으로부터 무시무시한 번개를 쏘아보낸다. 그 번개는 전능자의 예리하고 빛나는 검이며, 그 어떤 물질도 이 번개를 견뎌낼 수 없다. 하나님의 동일한 권능이 그 말씀에 의해 나타난다. 그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사람의 마음을 찌르고 녹이고 밝히며 또한 불붙게 만든다(행 2:3 히 4:12). -조지 혼.


7절.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여기서는 화염을 가르시는 것으로 언급된다. 화염을 가른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화염을 내리찍는다'는 뜻이다. 70인역에는 "디아코프테이 플로가 퓌로스"(diakovptei flovga purov")라고 되어 있다. 게제니우스(Gesenius)의 표현을 빌자면, "여호와의 음성이 '화염을 자시고'" 말하자면, "갈라진 화염을 보내신다." 데오도레트(Theodoret)가 갈파한 바와 같이, 이것은 오순절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관한 적절한 묘사이기도 하다. 그때 하나님은 불의 혀 같은 갈라진 화염을 보내셨다. 그것은 천상에 있는 화염의 근원 혹은 원천으로부터 갈려나와 사도들의 머리 위로 임하여 거룩한 열심과 사랑의 불로써 그들을 채웠다. -크리스토퍼 워즈워스.


7절. "화염을 가르시도다." 난외주, "자르시도다." 히브리어 "하차브"(bxj)의 적절한 의미는 (예컨대 돌을) '자르다', '찍다', '절단하다' 등이다. 여기서는 분명 번개를 암시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마치 번개가 혀와 광선 모양을 자르거나 그런 모양으로 잘리는 것 같은 데서 따온 것이다. 혹은, 구름이 마치 잘리거나 찍혀 번개를 위한 통로나 길을 내어주는 것과 같은 데서 따온 것일 수도 있다. 우리 눈이 구름과 갑작스런 번개의 섬광에 고정될 때, 마치 구름은 번개의 통로를 위해 '쪼개어지거나' '열린' 듯이 보인다. 시편 기자의 개념인즉, "여호와의 소리" 혹은 천둥이 마치 화염으로 하여금 폭풍우 가운데서 작용할 수 있도록 구름을 쪼개거나 열어 젖히는 듯하다는 것이다. -알버트 반스.


8절.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레바논의 지리적 위치로 볼 것 같으면, 이는 가데스 납달리를 가리키지만,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비록 시리아에서 지진이 많이 발생하긴 하지만-예컨대, 1822년에 발생한 알렙포의 지진처럼(이 지진은 다마스커스에서도 감지되었다), 여기서 뇌우의 일반적인 영향 그 이상을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9절의 '참나무들'과 '삼림'(한글 개역 성경에는 '삼림'만 언급됨-역자 주)은 레바논 하단 부분에 관한 묘사와 잘 어울린다. 그곳에서는 "도금양 숲, 전나무 숲, 호두나무들, 구주콩나무들, 그리고 터키 참나무" 등이 많이 자란다. 또한 10절의 '홍수'는 레바논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수천 개의 시내들이 갑작스럽게 불어난 상황을 적절하게 묘사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현대의 여행자들에 의하면, 레바논으로부터 연결되는 수로들의 수효는 엄청나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시내들이 갑자기 불어난다는 사실은, 그들의 설명이 서로 상충된다는 점에 의해 뒷받침된다. 어떤 사람은 나하르 엘 사지브를 "비록 여섯 개의 아치들로 구성된 다리를 건너도록 되어 있으나, 개울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하는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큰 강"이라고 지칭한다. 만드렐(Mandrell)은, 레바논으로부터 직접 흘러내리는 다무르(고대의 타미라스)를 가리켜 이렇게 언급한다:"갑작스러운 비로 인해 쉽게 불어나는 강이다. 그럴 경우에, 강물이 산지로부터 급속도로 흘러내려 수많은 행인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혀 왔다." 만드렐은 프랑스 신사 스퐁(M. Spon)에 관해서도 언급한다. 즉 그는 불과 몇 년 전에 그곳을 건너가려고 하다가 급류에 휩쓸려 바다까지 떠내려가서 죽었다는 것이다. 이는 레바논 산지에서 매우 자주 발생했던 일들 중 하나이다. 그곳에서는 시내가 대체로 거의 마른 상태로 있다가, 갑자기 불어나서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급류로 변한다. 볼네가 여름에 시리아의 강들을 내려다보았을 때, 그는 그 강들이 과연 강이라고 지칭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느꼈다. 하지만 만일 그가 뇌우 후에 그것을 건너고자 해보았다면, 그는 더이상 의혹에 잠기지 않았을 것이며, 다음과 같은 시편 기자의 묘사가 정확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로버트 머리 맥셰인.


8절.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위대하신 하나님, 나는 당신을 피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내게 하나님을 상기시킬 수 없는 곳으로 은거한 데 대한 자책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썼습니다. 종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태로부터 멀리 벗어나고, 내게 은혜를 전해줄 모든 통로로부터 멀리 떨어지며, 나를 꾸짖고 감시하여 불법에 처하지 않도록 억제시킬 수 있는 모든 이들로부터 멀리 이탈하였습니다. 하지만 심지어 그곳에서도, 위대하신 하나님, 당신의 영원한 자비와 닿을 수 없는 도피처라고 내가 믿었던 그곳에서도 무사히 죄를 범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광야와 같은 곳에서도 당신의 음성이 나를 사로잡아 당신의 발 앞에 엎드리게 하셨습니다. -장 밥티스트 마시용.


9절.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이 구절에 대한 통상적인 독법과 관련하여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암사슴이 큰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새끼를 낳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아 그 괴로움을 지내어 버리며"(욥 39:3). 그러므로 이는 뇌우의 무시무시한 특성에 관한 묘사의 효과를 고조시킨다. 즉, 여기서 "하나님의 소리"로 지칭되고 있는 천둥은 새끼 밴 암사슴으로 하여금 공포로 말미암아 낙태케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시적 이미지에 관한 우리의 개념에 의하면, 이것이 문맥 가운데 포함된 다른 이미지들과 그다지 조화를 잘 이루지 못하며 여호와의 소리에 떠는 참나무에 관한 이미지처럼 아름답고 고상한 것 같지도 않다. -존 칼빈.


9절.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하나님이 신자들에게는 물론이고 짐승들을 향해 베푸시는 배려와 자상하심은 그분께 대한 찬양을 야기시킨다. 하나님이 야생 짐승들을 돌보신다는 사실이 그분의 영광을 크게 드높여 주듯이, 그분이 우리를 보살펴주실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믿음을 크게 강화시킨다. 여호와께서 암사슴들을 보살피시는가? 그렇다면 그분은 자신께 속한 자들을 특별히 보살피심에 분명하다. 이와 같은 짐승들이 새끼를 낳는 일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개입된다. 그분은-만일 내가 외경심을 가지고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그러한 야수들에게 고통이 닥칠 때 친히 산파역을 맡아 그것들을 도와주신다. 여호와께서 탁월한 방법으로 사람을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듯이(시 22:9), 짐승들을 그 어미 태에서 나오게도 하신다.

우리는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하시도다"(8절)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진동하시도다"로 번역된 단어는 욥기 39:2에 나오는 "낳을"에 해당하는 말과 동일하다. 히브리어에 박식한 어떤 이들은 우리처럼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시도다"라고 번역하지 않고,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로 하여금 낳게 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로 하여금 낳게 하시도다"로 번역한다. (여호와께서 숲의 나무들로 하여금 잎과 열매들을 내도록 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는 식물들에 대해 적용되지 않으며, 짐승들에 대해서만 적용된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로 하여금 낳게 하심이여"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광야의 야생 짐승들로 하여금 새끼를 낳게 하신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내용에 의해서도 분명 이와 같은 의미가 뒷받침된다. 왜냐하면 시편 기자가 8절에서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로 낳게 하심이여"라고 말한 것이 전반적인 언급이었다면, 9절에서는 특별히 암사슴의 경우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조셉 캐릴.



9절.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고대인들 중 한 사람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암사슴이 새끼 낳는 것을 네가 보살피느냐"(한글 개역 성경에는,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로 되어 있음-역자 주)고 하신 것은(욥 39:1) 매우 적절한 말씀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짐승은 걸핏하면 달아나고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늘상 뛰며 돌아다니므로, 그처럼 각별하신 보살핌이 없다면 자기 새끼를 결코 길러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어미와 새끼를 보호하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두드러진다. 둘 다 그분의 애정과 자상하신 배려의 대상들이다. 또한, 결과적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자신의 창조주를 불친절하다고 비난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분은 염소와 암사슴을 돌아보실 정도로 자신을 낮추신다. 암사슴이 새끼를 낳을 때 큰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실인 듯하다. "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아 그 괴로움을 지내어 버리며"라는 구절도 그러한 의미를 충분히 암시하는 듯하다. 한편 만일 플리니(Pliny)와 다른 자연주의자들의 견해가 믿을 만하다면, 새끼 낳는 일을 매우 수월하게 해주는 특정한 풀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공급되어 온 셈이다. 


그리고 그분은 본능을 이용하여, 암사슴으로 하여금 새끼 낳을 때가 가까워옴과 더불어 그 풀을 먹도록 이끄신다. 이러한 확신이 어느 정도 진실하든지 간에 보다 권위 있는 근거를 통해 우리가 아는 바에 의하면, 섭리가 작용하여 요란한 천둥 소리로 말미암아 암사슴에게 두려움을 일깨우고 그 골격을 뒤흔듦으로써 새끼 낳는 일을 도와준다고 한다:"여호와의 소리(이는 히브리적 표현에서 흔히 천둥을 가리킨다)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역사상 가장 거만한 자들 중에도 천둥 소리에 떤 자들이 있었음을 고려할 때, 암사슴처럼 겁많은 짐승이 그처럼 무서운 환경적 요동에 의해 그토록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수에토니우스(Suetonius)에 의하면,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천둥 소리에 너무도 놀란 나머지 번개를 피하려는 생각에 모피로 자기 몸을 감싸고서 폭풍우가 멎기까지 한쪽 구석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때때로 주피터까지 위협하는 척했던 폭군 칼리굴라도, 천둥 소리에 자기 머리를 가리우거나 침대 밑에 몸을 숨겼다. 또한 호레이스는, 천둥과 번개에 대한 공포로 인해 무신론으로부터 전향했다고 고백하며, 그 결과 얻게 된 행복을 자신이 흔히 사용하는 표현으로써 묘사하고 있다. -조지 팩스턴, Illustrations of Scripture.



9절.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제롬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라는 표현에 대해, 하나님의 음성인 복음에 의해 영혼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소리에 의해 삼림의 잎들을 말갛게 벗기신다는 것은, 복음의 능력을 통해 참나무처럼 강하고 백향목처럼 거만한 세상 존재들을 겸비케 하시는 사역 및 세상적인 마음을 지닌 영혼들에게서 그 갖가지 겉치장들을 벗겨내시는 사역을 가리킨다고 한다(S. 바실). 또 다른 이들은 이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들의 행동에 적용한다. 그들은 성령에 의해 제시되는 복음의 빛을 통해, 성경 안에 감추어진 신령한 비밀들이라고 하는 어두운 숲을 들추어낸다(S. 제롬). -크리스토퍼 워즈워스.


9절 상반절. "여호와의 소리가 참나무들을 파괴하고 숲을 벌거벗기시니." -사무엘 호슬리.


9절. "그 전에서." 어떤 이들은 생각하기를, 다윗이 천둥치는 때에 성전에서 이 시편을 노래하도록 지정했다고 한다. 이는 터무니없지는 않은 생각이다.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이라는 동사의 주어를 하나님으로 보고서, '그분이 그 성전에서 자신의 영광을 언급하신다'로 번역한다. 하나님은 천둥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많이 발하시지만, 그분의 성전에서는 모든 영광을 발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기서 자신의 입으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필히 성취시키시기 때문이다. -존 트랩.


9절 하반절.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다윗은 이 시편의 앞 부분에서는 자연 현상으로서의 천둥의 효력에 대해서만 언급하나, 끝 부분으로 가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에다 적용한다:"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말하자면 성전이나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들은, 우리 귀에 들리는 세찬 천둥 소리 혹은 우리 눈에 번쩍이는 예리한 번개보다 더욱더, 모든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권능을 인정하고 말하도록 만들 것이다. 천둥을 통해 전해지는 말씀보다는 말씀을 통한 천둥 소리가 왕적 권능을 훨씬 더 많이 드러낸다. 전자는 위협하여 확신에 이르게 하지만, 후자는 위협적인 음성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위협적인 어투로 두려운 말씀을 발하신 후에, 약속을 통해 위로를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무서운 폭풍우를 통해서와 같이, 우리의 죄악과 그 죄악으로 인한 그분의 진노를 우리에게 감지케 하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를 두렵게 하실 때, 그분은 계시된 은혜라고 하는 부드러운 미풍으로써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그분의 자비라고 하는 온화한 햇살로써 우리를 이내 새롭게 하신다. -조셉 캐릴.


11절.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그분은 전쟁 시에 그들의 힘이시며, 평화 시에는 그들의 복이 되신다. 전쟁 때에 그분은 모든 힘의 원천이 되시며, 그 힘을 통해 그들은 강력한 대적들을 대항하여 물리칠 수 있다. 그리고 평강의 때에 그분은 그들의 진정으로 복된 유익이 되시며, 그들과 친히 함께해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진정 복된 백성이 되게 하신다. -존 하우(John Howe).


11절.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그리스도와 가까이 해왔던 그리고 복음을 수용했던 고귀한 영혼들 중에는 현재적으로 자신의 양심상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잠시 동안 계속해서 불만과 곤경 속에서 지내지만, 심지어 그럴 때에라도 그들은 세 가지 관점에서 양심의 평강을 얻는다:'대가의 관점에서, 약속의 관점에서, 그리고 씨앗의 관점에서.' 먼저, 모든 진실한 신자는 '대가라는 측면에서' 양심의 평강을 얻는다. 복음은 그 대가를 그의 손에 쥐어줌으로써 그것으로써 평강을 구입하게 한다. 그 대가란 바로 그리스도의 피이다. 우리는 금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것을, 그리고 어디서나 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을 가리켜 금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피가 그러한 것이다. 그것은 양심에 대한 대가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지닌 영혼은 그것으로써 양심을 교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는 가련한 피조물을 거절하실 수 없다:여호와여, 제게 양심의 평강을 주소서. 그것에 대한 대가인 그리스도의 피가 여기 있나이다. 빚을 지불하면 저당잡힌 물건을 되찾을 수 있다. 양심의 값은 하나님의 손 아래에서 면제받는 것이며,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로 인한 빚은 충분히 지불된다. 그리스도의 피가 신자들을 위해 더 큰 일도 이루었은즉, 더 작은 일이야 당연히 이룰 것이다. 만일 누구나 먹기만 하면 건강을 회복시켜주는 희귀한 복용약이 있다면, 병자가 그것을 삼키자마자 우리는 그가 건강을 마신 것이라고 안심하고 말할 수 있다.

비록 그가 지금 당장은 건강을 회복한 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그의 속에 들어 있다. 시간이 되면 그 효력이 나타날 것이다. 둘째로, '약속의 관점에서'이다. 모든 진정한 신자는 약속 안에서 양심의 평강을 얻는다. 우리는 마치 지갑 속에 준비된 돈을 세는 것과 매한가지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11절). 그분이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셨으니, 누가 그것을 막겠는가? 여호와께서 이 감미로운 약속에다 얼마나 큰 비중을 두고 계시는지를 여러분이 알게 된다면, 시편 전체를 읽은 보람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약속의 실행을 기대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신다. (가슴 속에는 온갖 소동이 일어나고, 그 양심은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불과 검, 분노, 복수 등의 위협을 받는) 가련한 피조물의 마음속에 평강과 위안에 대한 생각이나 소망이 깃들기란 그 무엇보다 어렵다. 이제 이 시편은 하나님이 어떤 위대한 일을 행하실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 가련한 피조물에게 있어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4절), 혹은 "그것이 백향목을 꺾고, 화염을 가르며, 광야를 진동시키고, 암사슴으로 낙태케 한다"는 말보다 더 곤혹스러운 것은 없음을 시사한다. 이 모든 것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외적으로 그리고 내적으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왜냐하면 이러한 내적 평강이 없다면, 설령 그분이 그들에게 평강을 줄 능력을 갖고 계시더라도 그분이 약속하신 것과 같은 평강으로 그들에게 복을 줄 수는 결코 없겠기 때문이다. 거리는 조용하되 자기 집 안에는 숨통을 조르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서글픈 평강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거리나 집 모두에 평강이 있으되 우리의 죄악된 양심 속에 전쟁과 피가 가득하다면, 그것은 무한히 더욱 서글픈 일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검이 양심의 목을 겨누고 있는 동안, 즉 하나님 자신과 더불어 화평하지 않는 동안, 가련한 피조물이 무슨 평강을 맛볼 수 있으며 또한 즐길 수 있겠는가?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용서의 평강을 사서 사함받은 자들을 위한 양심의 평강을 확보해 두셨으며, 그리하여 그들에 대한 약속을 통해 그것을 유언으로 남겨주셨다:"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이 말씀에서 그분은 유언을 남기는 분임과 동시에 자신의 뜻을 실행하는 분으로 언급되며, 자신의 사랑을 통해 신자들에게 남긴 것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나누어주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그분의 뜻은 온전히 실행될 것이다. 그리고 그분 자신이 생전에 그 뜻의 성취를 보게 되실 것이다. 셋째로, '씨앗의 관점에서'이다. 모든 신자는 이와 같은 내적인 평강을 간직한 씨앗을 지니고 있다.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렸도다"(시 97:11). 그것은 신자의 가슴 속에 뿌려졌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은혜와 거룩함이라고 하는 원칙이 그 속에 새겨졌다. 그러기에 그것은 "의의 평강한 열매"로 지칭된다(히 12:11). 모든 열매가 그 종류대로 씨앗으로부터 생겨나듯이, 자연히 의의 평강한 열매는 거룩함으로부터 나온다. 사실, 그 씨앗이 얼마나 빨리 열매로 자라는가 하는 것은 그것을 지닌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이러한 영적 수확을 모든 이들이 똑같이 거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영혼에 은혜의 파종기가 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쁨의 수확기를 맞을 것이라는 사실이 위안을 준다. -윌리엄 거놀.



11절. "평강." 일시적인 평강, 영적인 평강, 그리고 천상의 평강이라고 하는 삼중의 평강이 있다. 외적인 평강인 '축복'이 있고, 내적인 평강인 '은혜'가 있으며, 또한 영원한 평강인 '영광'의 평강이 있다. 장엄한 궁전을 볼 것 같으면 가장 안쪽에 위치한 특실로 인도하는 뜰이나 별채가 있듯이, 외적인 평강은 양심의 감미로운 평강이라고 하는 혹은 영원한 안식이라고 하는 내실로 인도하는 출입구 역할을 한다. 그 영원한 안식을 통해 우리는 하늘에서 평강을 누릴 것이다. 이는 외적인 평강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해주고 이러저러한 것들을 얻도록 도와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에브라임 유돌(Ephraim Udall, 1642).




[설교힌트]


1절. 우리의 권능과 그것으로 인한 영예를 하나님께 돌려드릴 의무. 그렇게 하기를 무시함에 따르는 징벌. 그렇게 하는 기쁨.

1절. 국가적인 영광을 기릴 때에도 반드시 주님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2절 상반절. 충성스러운 신하들은 세금을 바치고, 왕은 그것을 받는다. 밀수업자 및 그것을 막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이다.

2절 중반절. 영감에 따른 의식 준수. 무엇을? “예배를.” 누구에게? “여호와께.” 어떻게? “거룩한 옷을 입고.” 장소, 시간, 규정, 필요한 말들, 형태, 예복 등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3절. 곤경 속에서 그리고 곤경을 넘어, 혹은 개인적, 민족적 큰 재난 가운데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


4절. 복음의 권능과 위엄. 이어지는 구절들을 통해 예시된다.

4절 하반절. “위엄찬 소리”(“Spurgeon’s Sermons,” No. 87).


5절. 복음의 파하는 능력.

6절. 복음의 뒤엎는 능력.

7절. 불과 같은 말씀. 이는 광범위한 주제이다.


8절. 말씀 증거를 통해 불경건한 자들을 일깨우고 경고함.

9절. 인간의 마음속 비밀들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거듭나게 하는 힘.

9절 하반절. (1) 비할 데 없는 성전. (2) 한결같은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3) 강력한 동기. (4) 전반적인 열정, “영광.” 강해를 참조하라.


10절. 항존하며 동요되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

11절. 동일한 근원으로부터 말미암는 두 가지 축복들. 그 축복들의 연관성 및 완성.

11절. 두 가지 뜻, 두 가지 축복들, 한 백성, 한 분 여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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