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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이사야(Isaiah) 65장 주석

by 은총가득 2022. 2. 2.

 

 

이사야 65장 주석

하나님께서 패역한 백성을 벌하시다

1.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2.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3.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4.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밤을 지내며 돼지 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것들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5.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서 있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
6. 보라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7. 너희의 죄악과 너희 조상들의 죄악은 한 가지니 그들이 산 위에서 분향하며 작은 산 위에서 나를 능욕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먼저 그들의 행위를 헤아리고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1. נדרשתי ללוא שאלו נמצאתי ללא בקשני אמרתי הנני הנני אל גוי לא קרא בשמי׃
2. פרשתי ידי כל היום אל עם סורר ההלכים הדרך לא טוב אחר מחשבתיהם׃
3. העם המכעיסים אותי על פני תמיד זבחים בגנות ומקטרים על הלבנים׃
4. הישבים בקברים ובנצורים ילינו האכלים בשר החזיר ופרק פגלים כליהם׃
5. האמרים קרב אליך אל תגש בי כי קדשתיך אלה עשן באפי אש יקדת כל היום׃
6. הנה כתובה לפני לא אחשה כי אם שלמתי ושלמתי על חיקם׃
7. עונתיכם ועונת אבותיכם יחדו אמר יהוה אשר קטרו על ההרים ועל הגבעות חרפוני ומדתי פעלתם ראשנה על חיקם׃

 

 

유대인들의 배반 (이사야 65:1-7)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한 해설자인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를 말해 주었다. 그리고 이 구절이 지적했고 실현되었다는 것, 즉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이방인들을 부르고 유대인들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밝혀 준다(롬 10:20, 21). 그는 이 점에서는 "이사야가 매우 대담하다" 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일어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것을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유대인에게 예언하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자기 민족에 대한 굉장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이 점에서 모세의 말은 이루어졌다(신 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구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Ⅰ. 여기에는 멀리 떨어져 있던 이방인들도 가까이 나아온다는 사실이 예언되어 있다(1절) 바울은 이 구절을 이렇게 읽었다. "나는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에게서 발견되었도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나타나게 되었도다." 그들에게 얼마나 놀랍고 축복된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들이 어떻게 그것을 깨닫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1. 세상에서 오랫동안 하나님없이 지냈던 자들이 이제는 그를 구하게 될 것이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 라고 말하지 않던 자들이 이제는 그를 찾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이나 그들의 선조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으며 기도하지 않았고, 다만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이나 돌 앞에 기도하였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세례를 받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이다" (행 2:21).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과거에는 자기를 구하지 않던 자들에게서 자기가 찾아지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며, 또 그것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는가! 대 죄인들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들에게 축복을 예비하실 것이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서 발견된다." 하나님과 이방 세계 사이에 있는 이러한 행복은 만남과 교신은 하나님 편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그들이 "하나님에게 알려진 바" 되었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갈 4:3). 먼저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고 구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찾고 구하게 되었다. 그들과 교제한 후에는 하나님이 그를 구하는 자에게서 발견된다(잠 8:17). 그러나 처음 교제에서는 그를 찾지 않는 자들에게서 그가 발견된다. "그러므로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사랑한다." 일반 섭리의 의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다" (행 17:27).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아직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하나님" 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발견되었다.

 

3. 하나님은 신앙 고백을 결코 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거룩한 계시를 부여하셨다.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나는 그들에게 나를 보도록 하였고 그들을 초청하여 위안을 얻고 은혜도 얻도록 하였다). 이 말은 오랜 세기 동안 유대인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한 것이다. 사도들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외칠 때 전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하나님을 보라. 그를 보라. 그에게로 향하고, 너의 마음의 눈을 그에게 고정시키라. 그를 보라. 그에게로 향하고, 너의 마음의 눈을 그에게 고정시키라. 그를 알고, 그를 존경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네가 만든 우상에서 벗어나라. 너를 만드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보라. 믿음의 눈을 가지고 나를 보라. 나를 의지하라. 그러하면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 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말은 오랫동안 "아무런 민족이 아니었던 자" 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지 못했던" 자, "로루하마" (롬 1:8, 9)에게 전해졌다(롬 9:25, 26).

 

Ⅱ. 오랫동안 하나님과 가까이 있어 왔던 유대인들이 버려지고 멀리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 예언된다(2절). 사도는 자기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이 말을 적용하였다. 즉 그들을 행악자들의 자손이라고 했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리라" (롬 10:21).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 유대인들을 거룩한 은혜로 인도하려고 얼마나 애썼는가를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예언자들, 그의 아들, 사도들을 통해서 그들을 향하여 손을 폈다. 지혜자와도 같이(잠 1:24),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이야기를 하고 변론하기 위하여 그의 손을 펴신다. 그들을 포용하고 즐겁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손짓을 하고 손을 펴신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사랑의 증거를 보이고, 그들을 용납하기 위하여 끈질기게 이야기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그의 손은 "펴져서 앞으로 향하였었다." 이것은 마치 그가 회개하는 죄인들을 그의 품으로 맞아들이려고 준비한 것 같았다. 그는 은혜스럽게 기다리셨다. 그러나 기다리시는데 싫증을 내지 않으셨다. 제 11시에 온 사람들까지도 물리치지 않으셨다.

 

2. 여기에서 그들이 그 초청을 얼마나 하찮게 여겼는가를 볼 수 있다. 그 초청은 반역적이고 반항하는 백성들에게 주어졌다. 그들은 결혼 잔치에 초대되었으나 가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권고를 거절하였던 것이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취할 수 있다.

 

(1) 이 백성들의 악한 성격을 알 수 있다. 세상은 그들이 하나님에게 거절당한 것이 이유없는 사실이 아니라는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음행 때문에 된 일이었다.

 

[1] 그들의 성격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하늘의 은총을 그렇게 많이 받은 사람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그러한 것들이었다.

첫째, 그들은 매우 완고하였다. 옳든지 그르든지 그들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불선(不善)한 길을 걸었다. 옳은 길과 안전한 길을 걷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생각에 따라 걸었고, 그들 자신의 계획이나 욕망대로 걸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자신의 생각대로만 따라간다면 우리의 길이 선하게 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상상은 악할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마음과 뜻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하곤 했으며, 그들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했다.

 

둘째, 그들은 하나님을 매우 격노케 했다. 이것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처음부터의 불만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비탄케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그들의 적으로 만들까를 생각하는 자들처럼 "그의 성령을 거스렸다." 그들은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65:3)고 했다. 그들은 그러한 일이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이요. 그의 의에 대한 반항적인 태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하나님께 어떤 모욕을 주고 있는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이 화를 내게 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한 백성이 되어 "광야에서의 유혹의 날" 을 증거한 이래로 계속된 그들의 태도와 습관이다.

 

[2] 하나님이 그들을 징벌하는 이유로써 이 예언자는 "그들의 죄악과 선조들의 죄악" 을 지적하여 말했다(7절). 이제 예언자는 그 실례를 든다.

 

첫째, 그들의 선조들이 지은 가장 자극적인 죄악도 우상 숭배였다. 예언자가 그들에게 말한 바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둘째 계명이 나타나는 대로 하나님께서 종종 "그 자손들을 징계하시는" 죄악이다. 이것이 그들을 포로되게 한 죄다. 그들이 포로 생활에서 잘 구출되었다 하더라도, 그 민족의 마지막 폐허에 이르렀을 때는 그것이 다시금 그들에 대한 심판의 원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정책하실 때는, 그러한 죄악을 찾아내실 것이기 때문이다(출 32:34). 포로기 후에는 그들이 다른 신들을 숭배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여기에 전술된 부조리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 계속 많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방 여인들과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1. 그들은 하나님의 전을 버렸다. 그리하여 "정원이나 작은 숲에서 희생제를 드렸으며" 자기들 마음대로 그렇게 하는데 만족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제도들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제단을 버렸다. 그들 자신이 만든 "벽돌 위에 향을 피웠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발명한 것에 따라 향을 피웠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에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향을 피우라고 지적하신 금으로 만든 제단에 비하면 벽돌로 만든 제단을 별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붕이 납작한 집을 덮었던 것과 같이 타이르 위에 향을 피웠다. 때로는 그 위에 다른 우상을 위해서 향을 피우기도 하였다. 이것이 열왕기 하 23장 12절에 나타난다. 거기에서 우리는 "아하스의 다락 지붕에 시운 단들" 을 볼 수 있다. 예레미야 19장 13절에서는 "그 집들이 그 집 위에서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였다" 고 되어 있다.

 

3. "그들은 마술을 사용하거나 죽은 사람과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러기 위하여 그들은 무덤 사이에 거하며 기념관에서 산다." 엔돌의 마녀처럼 산 자들을 위해서 죽은 자에게 묻는다(8:19). 그렇지 않으면 무덤에 자주 가는 악령과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4.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식사의 율법을 깨뜨렸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에 의하여 없어지기 전에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 사이의 구별을 깨뜨렸다. 그들은 "돼지고기를 먹었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마카비의 이야기에 나오는 엘르아살과 그의 일곱 형제들처럼 돼지고기를 먹는 것보다는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먹었으며, 특히 그렇게 하는 것이 생활 환경이 되었을 때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우리의 구주가 살아계실 때도 그들에게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돼지고기를 먹으면서도 율법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거의 느끼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왜냐하면 거기서 그들은 돼지 떼가 몰살을 당함으로써 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지된 고기로 고깃국물이나 고깃덩어리" 는 여기에서 "가증한 것" 으로 불리워졌다.

 

그것이 "그들의 국 그릇 안에" 있었으며, 먹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금지된 고기는 "가증한 것" 으로 불리우며 그것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을 가증하게 만든다" 고 했다(레 11:42, 43). 감히 고기를 먹지 못하던 사람들도 고깃국은 대담하게 먹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능한 한 금지된 것에 접근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그들이 얼마나 금지된 과실을 탐내는가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아마도 이것이 여기에서 나온 것은 죄로 인하여 취하는 모든 금지된 쾌락과 이익들을 비유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리라. 그것은 바로 "주께서 싫어하시는 불쾌한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놀기 좋아하였으며, 고깃국을 맛보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이 모험적으로 죄를 지으려고 하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죄악의 심연에 떨어줄어들 위험성을 안고 있다.

 

둘째, 우리 구주 시대의 유대인들의 가장 자극적인 죄악은 그들의 교만과 위선이었다. 곧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죄로써, 그리스도께서는 그 죄에 대하여 매우 여러 번 비난하였다(5절). 그들은 말하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서라" 고 했다. 즉 "너는 너 자신의 동료들과 같이 있으라.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를 더럽힐까 하노라. 나를 만지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하기 때문에 너와 어떤 친분관계도 가지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는 나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선하지 못하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고 이러한 세리와도 같지 않다. "그들은 그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려고 하였다. "나는 너보다 더 거룩하다." 그들은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거룩하고 선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다." 이것은 곧 열을 내고 활활 타오르는 불로부터 나오는 연기가 아니라, "종일 타는" 젖은 나무를 태운 연기이며, 연기만 날 뿐인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교만한 자만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께 대하여 추악하고 불손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다른 사람보다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논쟁을 하셨다. 그들에 대한 증거는 간단하다. "보라,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다" (6절). 이것은 올 시대에 그들에 대해서 기억되도록 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곧장 셈을 치르게 되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죄인들의 죄, 특히 위선자의 허망한 자랑과 경멸 등은 하나님의 "곳간에 쌓인다" (신 32:34). 기록된 것은 잊혀질 것이고 계속 진행될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항상 잠잠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를 자기들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종종 하나님을 자기들과 같이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할 것이다. 신앙 고백을 자랑거리로 삼는 자들은 종교 곧 존귀롭고 신성한 것을 비천한 것으로 변질시키는 자이다.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것에 대해 그들과 셈하실 것이다. 그들이 자랑하는 신앙 고백은 그들의 저주를 악화시킬 뿐이다.

 

[1] "그들의 열조들의 죄악" 이 그들을 정죄할 것이다. 그들 자신의 죄는 하나님께서 어떤 심판을 내리신다 하더라도 받을 만 한 것이다. 그들은 그만한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스 9:1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리 큰 재앙을 내리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파괴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약의 순교자들의 피, 심지어 아벨의 피도 그들에게 돌리신다고 말씀하신다(마 23:35).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선조들의 우상뿐만 아니라 그들의 "산당에 대해서도 그들과 계산하실 것이다." 산들과 작은 산 위에서 행하는 분향이 참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셈을 치르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능욕하고 모독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기록하려고 선택하신 장소에 대한 모독이고 그가 거기에서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축복하신다는 약속에 대한 치욕이다.

 

[2] 그들의 죄는 열조의 죄와 함께 그들에게 재앙을 내릴 것이다. "너희의 죄악과 너희 선조들의 죄악" 은 상호 악화시키면서 이전의 업보를 이룰 것이다. 비록 이전행위가 간과되고 망각된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그들이 품에 보응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적들뿐만 아니라(시 79:12)그의 거짓되고 배반한 친구들에게도 갚으실 것이니 곧 그들이 자기에게 가한 수치로 그들을 수치스럽게 하실 것이다.

 

자비의 약속 (이사야 65:8-10)

 

8.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포도송이에는 즙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 하나니 나도 내 종들을 위하여 그와 같이 행하여 다 멸하지 아니하고
9. 내가 야곱에게서 씨를 내며 유다에게서 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내리니 내가 택한 자가 이를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나의 종들이 거기에 살 것이라

10. 사론은 양 떼의 우리가 되겠고 아골 골짜기는 소 떼가 눕는 곳이 되어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소유가 되려니와

 

8. כה אמר יהוה כאשר ימצא התירוש באשכול ואמר אל תשחיתהו כי ברכה בו כן אעשה למען עבדי לבלתי השחית הכל׃
9. והוצאתי מיעקב זרע ומיהודה יורש הרי וירשוה בחירי ועבדי ישכנו שמה׃
10. והיה השרון לנוה צאן ועמק עכור לרבץ בקר לעמי אשר דרשוני׃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11장 1-5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유대인이 배척을 당하자 그는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라고 묻고" 그럴 수 없다" 고 대답한다. 그는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고 말한다. 이 예언은 선택된 남은 자에 대하여 언급한다. 하나님께서는 위선적 국가를 멸망에 붙이실 때도 그들 중 일부를 구분하여 안전하게 하실 것이다. 일부 유대인 멸망의 날을 감하셨다고 말씀하신다(마 24:22; 막 13:20). "그 환난의 날 수가 줄어들지 않고 그 파멸에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면 구원 얻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 날수가 줄어질 것이다."

 

Ⅰ. 이제 이것은 여기에서 비유로 설명되고 있다(8절). 한 포도나무가 마르고 시들어서 그 안에 즙과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자. 그리하여 포도밭의 관리인이 그것을 파내거나 잘라내고 싶다고 하자. 포도즙이 너무도 적어 차라리 새 포도나무를 가꾸는 것이 타당하고 단 한 송이에서만 포도즙이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곁에 서 있던 자가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 뿌리에는 아직 생명이 있어서 언젠가 유익할지도 모른다" 고 말할 수 있다. 선한 사람들은 그들이 사는 장소의 축복이 된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몇몇 소수의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도시와 국가들을 살려두신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이바지할 수도 있다는 이런 명예는 얼마나 가슴이 벅찬 것인가!

 

Ⅱ. 본문은 이렇게 구원받고 구원하기도 하는 남은 무리는 어떤 사람들인지 여기서 기술하고 있다.

 

1.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다. 그것은 "내 종들을 위한 것이다" (8절). 그리고 내 종들은 거기 거할 것이다(9절).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은 그들이 아무리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나라가 가진 가장 좋은 친구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이 점에서 "자기 세대를 섬기는 자들이다."

 

2.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고, 그의 이름 부르는 것을 필생의 일로 삼는 자들이다. 그것은 "나를 찾은 내 백성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그를 발견할 것이며 그가 자기들의 관대한 보상자임을 발견할 것이다.

 

Ⅲ.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쌓아 두신 자비가 나오고 있다. 포로에서 돌아올 남은 무리는 다시 그들의 땅에서 행복하게 정착하게 될 것이다. "야곱 중에서 씨를 내듯이" 세습적인 권리에 의하여 그 안에서 가족이 유지되고, 계승권이 보존되며, 뿌린 씨앗이 다 수확을 내듯 그들에게서 무수한 증가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신앙으로 복음 교회에 가입될 야곱의 남은 무리를 상징한다.

 

1. 그들은 좋은 분깃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나의 산들" 즉 예루살렘과 성전이 세워졌던 거룩한 산 또는 약 속의 땅 가나안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 이것은 은혜의 언약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모든 종들 곧 그의 택함받은 자들은 은혜의 언약 안에서 거하며 그것을 유업으로 물려받을 것이다. 그들은 그곳을 그들의 피난처로 삼고, 그들의 안식처와 거주지로 삼아서 거기에서 거하고 그 안에서 편안히 생활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영원한 유산으로 삼고 그것은 그들에게 불후의 상속 재산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들은 기도하는 야곱의 영적 자손으로서 축복과 기쁨의 산들을 물려받는 상속자가 될 것이며, 눈물 골짜기를 통과해서 그 산들까지 안전히 이르게 될 것이다.

 

2. 그들은 자기 양떼를 위한 푸른 초장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10절). "샤론과 아골 골짜기" 는 전처럼 다시 가축으로 채워질 것이다. 샤론은 서쪽으로 욥바 가까이에 위치하며 아골은 동쪽으로 요르단 가까이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들이 온 땅을 회복하게 될 것과 그로써 그 모든 가축을 사육하게 되며 평화로운 생활을 향유하며 그들을 방해하거나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란 것을 암시한다. 복음의 규례는 그리스도의 양떼가 드나들면서 꼴을 얻고(요 10:9) 아골 골짜기의 이스라엘 무리처럼 (호 2:15) 거기서 눕는(시 23:2) 푸른 초장이가 골짜기이다.

 


징벌의 예고 (이사야 65:11-16)

 

11. 오직 나 여호와를 버리며 나의 성산을 잊고 에게 상을 베풀며 므니에게 섞은 술을 가득히 붓는 너희여
12. 내가 너희를 칼에 붙일 것인즉 다 구푸리고 죽임을 당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으며 내가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니라
13. 이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먹을 것이로되 너희는 주릴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마실 것이로되 너희는 갈할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기뻐할 것이로되 너희는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14. 보라 나의 종들은 마음이 즐거우므로 노래할 것이로되 너희는 마음이 슬프므로 울며 심령이 상하므로 통곡할 것이며
15. 또 너희가 남겨 놓은 이름은 내가 택한 자의 저줏거리가 될 것이니라 주 여호와 내가 너를 죽이고 내 종들은 다른 이름으로 부르리라
16.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라


11. ואתם עזבי יהוה השכחים את הר קדשי הערכים לגד שלחן והממלאים למני ממסך׃
12. ומניתי אתכם לחרב וכלכם לטבח תכרעו יען קראתי ולא עניתם דברתי ולא שמעתם ותעשו הרע בעיני ובאשר לא חפצתי בחרתם׃
13. לכן כה אמר אדני יהוה הנה עבדי יאכלו ואתם תרעבו הנה עבדי ישתו ואתם תצמאו הנה עבדי ישמחו ואתם תבשו׃
14. הנה עבדי ירנו מטוב לב ואתם תצעקו מכאב לב ומשבר רוח תילילו׃
15. והנחתם שמכם לשבועה לבחירי והמיתך אדני יהוה ולעבדיו יקרא שם אחר׃
16. אשר המתברך בארץ יתברך באלהי אמן והנשבע בארץ ישבע באלהי אמן כי נשכחו הצרות הראשנות וכי נסתרו מעיני׃

 

 

여기에서는 경건한 자와 사악한 자, 믿는 유대인과 아직 불신앙을 고집하는 자의 상이한 상태가 생과 사, 선과 악, 축복과 저주로 대조되고 있다.

 

Ⅰ. 여기에는 바벨론에서 구출된 후 우상 숭배를 고집한 자와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 후 불신앙을 고집하던 자들의 무서운 운명이 나오고 있다. 그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여기에서 위협을 받는 운명은 12절에 나타난다. "내가 도살할 양같이 내가 너희를 칼에 붙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피할 수도 없고 버티지도 못할 것이다. 너희는 다 그 앞에 구부러질 것이다."

 

(1) 하나님의 심판은 규칙적으로 온다. 그리고 명령에 따라 실시된다. 거기에 해당된 사람들은 칼에 의하여 쓰러질 것이다. 그 외에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다. 칼은 어떤 사람이나 무차별적으로 처치하는 것 같지만 그 수를 알게 되어 있고 그 수를 초과하지 않을 것이다.

 

(2) 하나님의 심판은 필연적으로 온다. 극히 강하고 극히 강퍅한 죄인들도 그들 앞에 엎드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하나님께 대하여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서도 형통케 된 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2. 그들을 칼에 붙이는 죄가 나오고 있다.

(1) 우상 숭배는 옛적부터 있던 죄였다(11절). "너희는 내 백성으로서 나를 찾거나 섬기지 않고, 나 여호와를 버리며, 나를 부인하고 다른 신을 섬기기 위하여 나를 내던진 자들이다. 또한 너희는 너희 우상의 산에서 분향하기 위하여 나의 성산(그 특권과 의무)을 잊었다(7절). 그리하여 유일하게 살아계시고 진정한 한 분, 하나님을 버렸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섬기는 "갓에게 상을 베풀어 놓으며 무수한 잡신들에게 썪는 술을 가득히 부었다." 한 하나님으로는 너무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무 개나 백 개도 결코 충분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신들의 숫자를 늘려가서 마침내는 성이나 제단이 "밭이랑에 쌓인 돌무더기" 처럼 두터워지도록 많은 신들을 두게 되었다(호 12:11).

 

혹자는 갓과 므니를 각각 "군대" 나 "수효" 라고 번역하는데 이들은 여러 신들의 이름 중 하나이다. 이것은 쥬피터(역자 주:모든 신들의 왕이며 하늘의 지배자)와 머큐리(역자 주: 여러 신들의 심부름을 하는 신, 웅변가, 직공, 상인, 도둑의 수호신)에 대응하여 그들의 두 가지 우상에 적당한 이름이 되었다. 여하튼간에 그 우상을 공경하기 위해 어떤 비용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섬기기 위해서 상을 베풀며 술을 가득히 붓는다. 그들은 자기 가족을 희생시켜 가면서라도 우상 숭배에 인색하려고 하지 않았다. 진정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이들의 열성을 보고 자기들의 인색을 부끄러워해야 마땅할 것이다.

 

(2) 불신앙은 후기 유대인들의 죄였다(12절). "내가 불렀을 때 너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은 2절과 똑 같은 것을 나타낸다(내가 손을 펴서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다). 그리고 이것은 복음을 거절했던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우리 주 예수께서도 손수 부르셨다(그는 서서 외쳤다, 요 7:37).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설득에 각성하지 않았고, 그의 타이름에 감동되지 않았다. 그들은 죽음과 파멸에 대한 그의 정당한 경고와 생명과 행복에 대한 그의 정당하신 제의를 무시하였고 그에게서 어떤 감명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너희는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다." 이것은 놀람이나 부주의로 한 것이 아니고 계획적으로 한 것이다. "너희는 나의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니라." 그는 이것이야 말로 자신이 혐오하고 가증히 여기는 것이었다고 암시하신다. 좋은 것을 선택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악한 것을 따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죄의 악함을 살펴보자. 그것은 하나님의 눈에 악한 것이고 그를 아주 노엽게 하는 것이며 더욱이 그것은 그의 면전에서 그를 멸시하여 그의 눈 앞에서 자행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즐겨하시지 않는 일을 택하여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일이 그를 노엽게 한다는 것을 안다.

 

Ⅱ. 회개와 믿음에 이르게 된 자들의 행복한 상태를 고려하면 이런 파멸은 더욱 비참해진다.

 

1.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축복과 그에 적대하는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가 서로 비교되고 있다(13-16절).

(1) 하나님의 종들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자기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에 대해 영원히 신세를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불신앙 안에서 강퍅해지고 멸망하게 될 이웃들이 은혜를 입지 못하여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가를 봄으로써 자신을 더욱 행복하게 생각한다(66:24 참조).

 

(2) 멸망할 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의 행복감을 보고 슬픔이 더욱 커질 것이다(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미워하고 헐뜯으며 매우 경멸하였다). 특히 자기들의 잘못만 아니었다면 자기들도 그 축복에 동참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 그들의 슬픔이야 오죽하겠는가!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본 것은 지옥에 있는 부자의 고통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눅 16:23; 13:28). 때때로 하나님의 섭리는 이 세상에서 선한 자와 악한 자 사이에 이와 같은 차이를 만드신다. 올바른 사람의 번영은 사악한 자에게 눈의 가시처럼 괴로움을 주며 상심시키는 것이 된다(시 112:10). 심판의 날에는 확실히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의 삶을 미친 것으로 그의 목적을 존경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성도들과 함께 계수되며 그의 분깃은 택함받은 자 중에 있게 되었다.

 

2. 그들의 상황은 두 가지 면에서 차이가 난다.

(1) 위로와 만족이란 점에 있어서의 차이.

 

[1] 하나님의 종들은 먹고 마실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생명의 양식을 얻게 될 것이고 잔치에 환대를 받을 것이며 그의 집이 선한 것으로 풍성히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좋은 것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 나라의 행복은 그들의 영원한 향연이 될 것이다. 그들은 현재 배고파하고 갈증을 느낀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들이 충족될 것이다. 반면에 자기 마음을 세상에 두고 거기서 행복을 구하는 사람들은 굶주리고 갈할 것이며, 항상 공허감을 느껴 늘 갈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떡이 아니기 때문이다. 양식은 과식하면 물리게 되고 또 만족시켜 주지도 못한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를 의지하는 데 풍성한 만족이 있다. 그러나 죄를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실망밖에 없다.

 

[2] 하나님의 종들은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의 기쁨을 찬송할 것이다. 그들은 기뻐해야 할 항구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 슬픔이 될 일은 전혀 없고, 그들에게는 슬픔을 완화시키고도 남을 것이 있다. 신앙이 활동하고 작용하는 한 그들에게는 기쁜 마음이 생기며 기쁨은 그들의 힘이 된다. 그들은 소망 중에 즐거워할 것이니 소망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지금 눈물로써 씨뿌리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기쁨의 세계가 될 것이다. 그런 반면에 주님을 버리는 사람들은 모든 진정한 기쁨으로부터 자신을 차단시키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대한 헛된 자신과 자기의 의, 그리고 그 토대위에 세운 자기들의 소망으로 수치를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에 대한 그들의 기대가 산산히 부서질 때 그들의 얼굴은 당황감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들의 웃음이 통곡으로 변하고 기쁨이 고민으로 변하게 될 때 그들은 아마 마음이 슬픔으로 울며, 심령이 상하므로 통곡하게 될 것이다. 저 세상에서는 확실히 그럴 것이다. 거기서는 고통이 끝없고 편함도 없으며 구제받을 가망도 없고 오직 영원히 슬퍼 울며 이를 가는 것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눅 16:25)는 두 가지를 비교해 보라. 우리는 어느 쪽을 우리의 분깃으로 선택할 것인가?

 

(2) 명예와 평판에 있어서의 차이(15,16절)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을 썪을 것이다" (잠 10:7).

[1] 우상 숭배자들과 불신앙인의 이름은 저주로 남을 것이고 치욕을 당할 것이며 영원히 불명예스럽게 될 것이다. 그 이름은 악평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 즉 "너는 유대인처럼 잔혹하다" 는 말이나 "하나님께서 너를 유대인처럼 비참하게 하시기를!" 이란 저주는 그 예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택한 자의 저주거리가 될 것이다." 즉 이것은 택함받은 자에게 경고가 된다. 그들은 유대인에게 임한 저주에 떨어질까봐 겁내며 "저 순종치 않는 본" (히 4:11)을 따라 멸망할까봐 두려워할 것이다. 하나님께 배척받는 자들이 당하는 저주는 하나님의 택함입은 자들을 떨게 만든다. "주 여호와가 너를 죽이리라." 그는 유대인들을 멸종시키실 것이고 그들로 하여금 한 민족을 이루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한 민족으로 살 수 없고 다시 통합되지 못할 것이다.

 

[2] 하나님께 택함받은 자의 이름은 축복이 될 것이다. "그는 그의 종들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실 것이다." 언약의 백성은 더 이상 "유대인" 이라고 불리워지지 않고 "기독교인" 이라고 불리운다. 새 언약의 모든 약속과 특권은 그 이름으로 불리는 자들에게 보장될 것이다. 이 다른 이름은 명예로운 이름이 될 것이다. 그 이름은 한 민족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그 이름으로 인하여 이 땅 위에, 전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축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에게서 새 이름으로 고귀하게 될 종들을 얻으시게 될 것이다. 그들은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하게 될 것이다."

 

첫째, "그들은 기도와 엄숙한 서약,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청원, 심판자 되신 그의 공의에 대한 호소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충성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복을 구해야 한다. 즉 우리가 그를 우리의 하나님으로 모신다면 우리는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을 소유하며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으며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복을 구한다는 것과, 우리가 극히 큰 즐거움을 구한다는 것과, 우리의 이익이 결부되어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 소유물의 넉넉한 데서 복을 구한다(시 49:18; 눅 12:19).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은 자기들에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충분히 주실 수 있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향해 복을 구한다. 그는 그들의 영광스러운 면류관이시고, 아름다운 보관이시며, 그들의 힘이요, 분깃이다. 또 그들은 피조물이나, 거짓 신으로 맹세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맹세 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길 것이며 모든 사람의 심판은 그에게서 나올 것이다.

 

둘째, 그들은 "진리의 하나님, 아멘의 하나님" 되신 그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에덴은 진리란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그리스도께 대한 말로 이해한다. 그리스도는 바로 "아멘" 이시고 "신실한 증거" 이시다(계 3:14). 그리고 모든 약속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와 아멘" 이 된다(고후 1:20). 우리는 그에게서 복을 구해야 하며 그를 통하여 여호와께 서약을 해야 하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맺어야 한다. "땅에서 복된 자는 진리의 하나님 안에서 복될 것이다(혹자는 그렇게 읽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참 하나님이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요 5:20). "그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축복을 받는다" 는 것은 옛날에 약속되었다(창 12:3). "그는 신실한 백성의 하나님을 향해 복을 구할 것이다" (그렇게 읽는 이도 있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신자들이 받는 축복에 동참하는 것 이상 탐내지 않을 것이며 신자들이 받는 대접 이상 바라지 않을 것이다.

 

셋째, 그들은 자기들이 경험한 이러한 복된 변화의 장본인으로서 그에게 영광을 돌릴 것이다. 그들은 그를 그들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이전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하셨고 참당한 추억을 현재의 안락으로 말살시킨 하나님이셨다.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니라." 이전 환난은 완전히 제거되었다. 만약 그들이 당한 고통의 잔재가 남아 있으면 그들에게 대한 긍휼심과 동정심에서 하나님은 어김없이 그것을 보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이전의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것들을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그들을 편안하게 해야 자신도 편안해진다는 듯이 말씀하시기를 좋아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주 굉장한 만족감을 가지고 그를 향해 복을 구하게 될 것이다.

 

 


행복의 예고 (이사야 65:17-25)

 

새 하늘과 새 땅 창조

17. 보라 내가 새 하늘새 땅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20.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 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이리라
21.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22.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
23.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17. כי הנני בורא שמים חדשים וארץ חדשה ולא תזכרנה הראשנות ולא תעלינה על לב׃
18. כי אם שישו וגילו עדי עד אשר אני בורא כי הנני בורא את ירושלם גילה ועמה משוש׃
19. וגלתי בירושלם וששתי בעמי ולא ישמע בה עוד קול בכי וקול זעקה׃
20. לא יהיה משם עוד עול ימים וזקן אשר לא ימלא את ימיו כי הנער בן מאה שנה ימות והחוטא בן מאה שנה יקלל׃
21. ובנו בתים וישבו ונטעו כרמים ואכלו פרים׃
22. לא יבנו ואחר ישב לא יטעו ואחר יאכל כי כימי העץ ימי עמי ומעשה ידיהם יבלו בחירי׃
23. לא ייגעו לריק ולא ילדו לבהלה כי זרע ברוכי יהוה המה וצאצאיהם אתם׃
24. והיה טרם יקראו ואני אענה עוד הם מדברים ואני אשמע׃
25. זאב וטלה ירעו כאחד ואריה כבקר יאכל תבן ונחש עפר לחמו לא ירעו ולא ישחיתו בכל הר קדשי אמר יהוה

 

 

이 약곳들은 바벨론 포로 귀환 후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즉 그들은 고도에 평화로운 정착을 하게 되었고 말하자면 새로운 세계에 들어간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약속은 복음 교회에서 온전한 성취를 이루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투쟁하는 교회가 되나 나중에는 승리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다" (갈 4:26).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위안을 얻는다. 우리는 이 속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도록 해야 한다. "옛 것이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 고 하는 것은 복음서에도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 이다(고후 5:17). 16절에 묘사된 것과 "이전의 고통들이 잊혀졌다" 고 하는 것은 강력하고 행복한 변화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것은 더욱 높이 상승한다.

 

심지어 이전의 세계는 잊혀져서 더 이상 마음에 생각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사람들은 그 위로가 너무나 황홀하여 이전에 알았던 모든 안락을 초개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들의 이전 슬픔은 물론 이전의 기쁨도 현재의 기쁨에 압도되고 삼켜졌다. 영화로게 된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잊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저 세상 것에 완전히 빠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노라." 신적인 힘이 얼마나 무진장한가를 살펴 보라. 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도 창조할 수가 있다. 성도의 행복이 얼마나 완전한지 살펴보자. 부분적인 것들이 모여 전체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새 하늘과 함께 새 땅도 창조하실 것이다. "너희가 만약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만물이 너희 것이다" (고전 3:22).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하실 때 우리에게 새 땅을 주신다. 성도들이 장차 얻을 영광은 전에 알던 것과 너무나 달라서 가히 "새 하늘과 새 땅" 이라고 불리워질 만한 것이다(벧후 3:13).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노라" (계 21:5).

 

Ⅰ. 거기에는 새로운 기쁨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모든 교인들과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기뻐할 것이다(18절).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복음에 의하여 창조하신 새로운 것들은 모든 신자들에게 영원한 기쁨의 제목이 되고 또 그럴 것이다. "내 종들은 즐거워할 것이다" (13절). 이제는 그들이 애곡할지라도 결국은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너는 네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라."

 

2. 교회는 그들이 기뻐할 장소가 될 것이고, 교회의 상태는 즐겁고 번영하게 될 것이다. "나는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으리라." 교회는 즐거워하게 될 뿐만 아니라 즐거움의 대상이 되기도 할 것이다. 교회와 함께 슬퍼했던 자들은 교회와 함께 기뻐하게 될 것이다.

 

3. 교회의 번영은 하나님께 즐거움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종들의 번영을 즐거워하신다(19절).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잘되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가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습 3:17).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마땅히 기뻐해야 한다.

 

4. 이 기쁨은 약화되거나 교회의 기쁜 상태가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우는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다." 만약 이것이 이 생에 있는 교회의 상태를 가리킨다면 이전의 슬픈 일이 재현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방해받지 않는 평온을 오래도록 누리게 될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약속된 기쁨의 완성과 영속이란 점에서 생각할 때 이것은 천국에서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눈물이 사라질 것이다."

 

Ⅱ. 거기에는 새로운 삶이 있을 것이다(20절). 이전처럼 칼이나 병으로 인한 불의의 죽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더 이상 울부짓는 소리가 없을 것이다" (19절). 죽음이 없을 때 "슬픔도 없어질 것이다" (계 21:4). 죽음이 죄로 말미암아 왕노릇하듯 생명은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게 될 것이다(롬 5:14, 21).

 

1.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자된 자들은 지상에서의 삶이 아무리 짧다 하더라도 너무 일찍 죽은 것으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 삶이 짧으면 짧을수록 휴식은 길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 사망이 왕노릇 하더라도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 죽으면서 그리고 그의 왕국을 갈망하면서 그들은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은 유아" 라고 불리우지 않을 것이며 유아라 할지라도 "백 세에 죽는 자" 로 간주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다시 일어나 완전한 수명을 누릴 것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것을 유년기에 지혜가 출중하나 요절하는 어린이에 대한 것으로 이해한다. 즉 그들은 이런 아이를 백세에 죽었다고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인의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의의 열매로 그들의 날 수를 채울 것이라" 는 것이 약속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늙어도 결실하며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시 92:14, 15). 그렇게 될 때 그는 선한 노인이라 할 수 있으며 자기 수한을 채우는 자라 할 수 있다. 지혜롭고 착하고 유능한 노인은 참으로 자기 수한이 찬 노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마음을 세상에 두고 있는 노인들은 결코 자기 수한을 채우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풍족한 것을 얻지 못하고 계속해서 오래 살려고 한다. 시므온과 같이 하나님의 구원을 본 뒤 "충분한 수한을 채우고" (Satur dierum) 늙어 죽는 사람은 평화롭게 하직하기를 원한다.

 

2. 불신자들은 인생이 아무리 길다 하더라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불행할 것이다. 죄인들은 그가 아무리 "백 세" 를 산다 하더라도 "저주받을 것이다." 죄인의 장수는 그에게 신적 은총이나 축복의 증거가 되지 못하며 신적이 진노와 저주에 대한 어떤 피난처도 되지 않을 것이다. 죄인이 받은 판결은 클림 없이 확실히 집행될 것이다. 그의 오랜 생명은 단지 긴 유예일 따름이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그에게 저주다. 그가 오래 살면 살수록 전노의 날을 우해 더욱 많은 진노를 쌓게 되고 그가 갚아야 할 죄는 더욱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지상에서의 삶이 긴가 짧은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도의 생활을 하는가, 죄인의 삶을 사는가에 있다.

 

Ⅲ. 그들은 생의 위로물을 새로 향유하게 될 것이다. 전에는 그것이 매우 불확실하고 불안정해서 그들이 건축한 가옥에는 원수가 거했으며 그들이 재배한 나무 열매는 원수들이 먹었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다" (21,22절). 이것은 그들의 손의 수고가 축복을 받고 번영하게 될 것을 암시한다. 그들은 목적한 것을 얻을 것이고, 그들이 얻었던 것은 보존되고 안전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편안히 그것을 즐길 것이고 아무 것도 그들의 향유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것을 즐기며 살아갈 것이다. 이방인들은 이전처럼 그들을 내쫓지 못할 것이다.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다." 그것은 정직하게 얻은 것이어서 오래 지속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손으로 일한 것" 이다. 그들은 손수 일했으므로 그것을 가장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다. 그들은 "게으름의 양식이나 거짓의 떡" 을 먹지 않았다.

 

우리가 만약 그것을 즐길 마음을 갖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전 3:13)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것을 오래도록 즐기며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선물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이렇게 약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 백성의 수한은 나무의 수한과 같다. 또한 상수리나무의 수한과도 같다(6:13). 그 잎이 떨어져도 생명은 그 안에 남아 있다." 잎은 겨울마다 헐벗는다 하여도 다시 회생하고 여러 해 동안 지속된다. "내 백성의 수한은 생명 나무의 수한과 같다" (70인 역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생명의 나무다. 여기에서 약속된 현세적 축복은 영적 위안물을 상징하는데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온갖 영적 위안을 향유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원수들은 그들에게서 이런 축복을 박탈할 능력이 없으며 이 즐거움의 향유를 방해할 권세도 없을 것이다.

 

Ⅳ. 그들 대신 새 세대가 일어나 이런 축복을 상속받고 향유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헛되이 수고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손으로 하는 일을 기뻐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 뒤에 올 사람들에게 만족스럽게 물려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로몬처럼 우울한 전망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전 2:18, 19). 그들이 생산한 자녀는 재난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선조로부터 축복이 상속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소생도 그들과 함께" 그것을 나누워 가질 것이고 그들처럼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 이 될 것이다. 그들이 생산한 자손은 재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소생이 그들에게 위안이 되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자손들이 "진리에 따라 걸어가는" 것을 보고 기뻐할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자손이 편안한 세월을 만나게 하실 것이다. 그들이 선하듯 만사도 순풍에 돛단 듯이 잘될 것이다. 그들은 재난의 때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아기를 배지 않은 태에 복이 있다" 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복음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은 대대로 세습될 것이다.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다(시 22:30). 그는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다."

 

Ⅴ. 그들과 그들의 하나님 사이에 좋은 교제가 이루어질 것이다(24절).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신 축복으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신다. 다윗은 "내가 자복하리라 하였더니 주께서 사하셨다" (시 32:5)라고만 말했을 뿐이다. 탕자의 아버지는 그가 돌아올 때 그를 맞아 주었다.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그들이 아직 기도하고 있는 동안 나는 그들이 기도하는 일을 이루어 주며 그에 대한 확신과 징표를 주리라."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속히 그리고 기꺼이 기도를 들어 주시는지를 나타내 준다. 그리고 이것은 율법보다 복음의 은총에서 더 잘 나타난다. 우리가 편안한 것은 아버지께 우리를 대언하시는 그리스도의 중보하심 덕택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신속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Ⅵ. 그들과 그들의 이웃 사이에는 좋은 교류 관계가 이루어질 것이다(25절). 노아 방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리 가운데 있는 양과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전처럼 원수의 세력을 깨뜨리거나 대적들의 손을 묶지 않으시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시며 은혜로 그들의 본성을 바꾸실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을 박해하던 바울이(그는 베냐민 지파에 속했으므로 이리처럼 물어 뜯었다, 창 49:27)

 

사도 중한 사람이 되었을 때는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원한이 사라지자, 모든 적대 관계가 종식되고 위대한 목자장이신 그리스도 아래서 그들은 한 우리의 양떼가 되었다(요 10:16). 교회의 적들은 자기들이 행하던 훼방을 중단하고 교회의 식구들은 서로 싸우고 남을 해치던 이전 행위를 불식했다. 그래서 거기에는 안팎으로 해치거나 파괴할 사람이 없다.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도 없다. 이사야 11장 9절에 약속된 대로 "모든 성산에서" 교회를 해하는 자는 더욱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람들은 변할 것이다. 사자는 죄가 들어오지 않았었더라면 아마도 그러지 않았을 것인 바 그것은 더 이상 먹이를 찾는 짐승이 되지 않을 것이다. "사자는 소처럼 짚을 먹 을 것이다." "황소처럼 그의 소유자를 알고 주인이 주는 여물통을 알 것이다." 강탈과 약탈로 살고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을 부유하게 하려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의 환경에 적응하고, 정직한 수고로써 살며 자기 일에 만족하게 되었다. 도둑질하던 사람들이 이제 훔치지 않고 그들의 손으로 선한 일을 하게 될 때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다" 는 말은 성취된다.

 

2. 사탄은 사슬에 묶일 것이고 용은 속박당할 것이다. "뱀은 다시 흙으로 그의 식물을 삼을 것이다." 이 무시무시한 대적이 풀려나자 그는 성도들의 고귀한 피를 게걸스럽게 먹었다. 성자들은 사탄의 선동으로 박해를 받았다. 이 원수는 죄인의 고귀한 영혼도 게걸스럽게 먹어버렸다. 죄인들은 그의 선동에 의하여 박해자가 되었고 자신을 영원히 파멸사켜 버렸다. 그러나 이제 다음과 같은 선고에 따라 그 원수는 흙에 한정되었다. "너는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창 3:14). 하나님의 교회를 대항하는 모든 원수는 뱀처럼 교활하고 독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정복되고 진압되어 흙을 먹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왕국의 모든 적들이 자기 발등상이 되고 또 교회의 발등상이 되기까지 시온의 왕으로서 다스리실 것이다.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겠다고 하는 이 약속은 위에 있는 성산에서 그리고 거기에서만이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 새 하늘과 새 땅(이사야 65장)

 

1-16절, 패역한 유대인들을 벌하심

[1절]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대한 예언에서 갑자기 이방인의 구원을 암시하는 예언이 나온다. 이 구절은 로마서 10:20에 인용되었다.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호세아 2:23에서도 비슷한 말씀이 나온다.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2-5a절]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不善)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지내며 돼지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물건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 하나니.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패역을 지적하신다. 그들은 자기 생각을 좇아 사는 자들이며 선하지 않은 길, 곧 악한 길을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패역한 백성들(암 소렐)[반역적인 백성]이다. 그들은 동산에서 우상들에게 제사하며 벽돌을 쌓고 분향하여 하나님 앞에서 항상 그의 노를 일으키는 자들이다. 그들은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지내며 돼지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물건의 국을 그릇에 담는다. 그것은 율법에 금지된 바이었다(레 11:7). 그들은, 그런 일을 하면서도,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거룩하다고 여기는 교만과 위선의 악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참으로 악한 자들이었다.

 

[5b-7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 보라,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내가 잠잠치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할지라. 너희의 죄악과 너희 열조의 죄악을 함께하리니 그들이 산 위에서 분향하며 작은 산 위에서 나를 능욕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먼저 그 행위를 헤아리고 그 품에 보응하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또 산 위에서 분향하며 하나님을 능욕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가 그 앞에 다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신다. 그는 그들의 행위에 대해 반드시 징벌하시고 보응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8-10절]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포도송이에는 즙이 있으므로 혹이 말하기를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 하나니 나도 내 종들을 위하여 그같이 행하여 다 멸하지 아니하고 내가 야곱 중에서 씨를 내며 유다 중에서 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내리니 나의 택한 자가 이를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나의 종들이 거기 거할 것이라. 사론은 양떼의 우리가 되겠고 아골 골짜기는 소떼의 눕는 곳이 되어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소유가 되려니와.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선언 중에서도 구원하실 남은 자들을 언급하신다. 그는 그의 종들을 남겨두실 것이다. 그는 야곱 중에 씨를 내시며 유다 중에 택한 자를 남기셔서 하나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갈멜산 남쪽의 비옥한 목축지인 사론과, 또 아간의 가족들을 처형했던 아골 골짜기는 양떼와 소떼의 눕는 곳이 될 것이다. 그 곳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소유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에도 씨를 남겨두실 것이며 택한 자들을 남겨두실 것이다.

 

[11-12절] 오직 나 여호와를 버리며 나의 성산(聖山)을 잊고 갓에게 상을 베풀어 놓으며 므니에게 섞은 술을 가득히 붓는 너희여, 내가 너희를 칼에 붙일 것인즉 다 구푸리고 살륙을 당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으며 나의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니라.

 

유다 백성은 하나님을 버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 갓과 므니에게 상을 베풀고 섞은 술을 가득히 부었다. 갓은 바벨론의 ‘행운의 신’인데, 로마의 주피터 신과 같고, 므니는 바벨론의 ‘운명의 여신’인데, 로마의 비너스 신과 같다고 한다. 유다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 대신 이방신들을 섬긴 것이다. 또 그들은 하나님께서 불러도 대답지 않았고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고 그의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택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칼에 붙이실 것이며 그들이 구푸리고 살륙을 당하게 하실 것이다. ‘[칼에] 붙인다’는 원어(마나)는 ‘므니’라는 말과 어근이 같은 말로서 ‘운명짓다, 정하다’는 뜻을 가진다.

 

[13-15절] 이러므로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나의 종들은 먹을 것이로되 너희는 주릴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마실 것이로되 너희는 갈할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기뻐할 것이로되 너희는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마음이 즐거우므로 노래할 것이로되 너희는 마음이 슬프므로 울며 심령이 상하므로 통곡할 것이며 또 너희의 끼친 이름은 나의 택한 자의 저줏거리가 될 것이니라. 주 여호와 내가 너를 죽이고 내 종들은 다른 이름으로 칭하리라.

 

하나님께서는 택한 종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시고 기쁨과 즐거움을 주실 것이지만, 하나님을 배반하여 우상을 섬겼던 악한 자들에게는 주림과 갈함, 수치와 슬픔과 통곡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또 그는 범죄하는 악한 자들을 죽일 것이고 하나님의 택하신 종들은 다른 이름으로 부르실 것이다.

 

[16절]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앞에 숨겨졌음이니라.

 

선지자 이사야는 반역적인 유다 백성에게 심판을 선언하는 중에도 남은 자들이 있어 그들은 진리의 하나님께 복을 구하며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을 ‘진리의 하나님’(엘로헤 아멘)[아멘의 하나님]이라고 두 번 말한다. 우리에게 현세와 내세에 복을 주실 자는 바로 이 진리의 하나님뿐이시다. 그는 진실하시며 그의 모든 진리와 언약과 계명은 참되고 믿을 만하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은 자기 생각을 좇아 우상들을 숭배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계신 참 하나님만 경외하고 섬기며 순종해야 한다. 그는 ‘진리의 하나님’ 곧 ‘아멘의 하나님’이시며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시며 성경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성경에 마음과 귀를 기울이고 성경의 교훈대로 믿고 선을 행하고 악을 버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노를 내시고 보응하실 것을 선언하셨다. 그들은 칼에 붙인 바 되어 살륙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죽이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신약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공로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고는 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롬 8:13).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구원을 감사하며 찬송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찾지도 않았던 이방인이었던 우리들을 구원해주셨다. 또 그는 우리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하셨다. 그것은 구약 백성의 이름과 다른 이름이며 새 이름이다. 또 그는 우리에게 장차 영광의 천국을 기업으로 주실 것이며 또 현세에서도 영육의 필요한 것을 풍성히 주셨고 또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과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항상 올려야 한다.

 

17-25절, 새 하늘과 새 땅

 

[17절]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별한 내용을 말씀하실 때 듣는 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하신다. 본문에서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대조된다. 이 세상은 벌써 6천년 이상이 된 세상이며, 특히 죄로 인해 심히 더러워진 세상이며 저주받은 세상이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땅은 저주를 받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곳이 되었다. 창세기 3:17-18,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그러므로 노아의 부모는 세상이 하나님께서 저주하심으로 안식 없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안식을 갈망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지었었다. 노아라는 말(노아크 )은 ‘안식’이라는 뜻이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과 구별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회복된 세상, 곧 죄와 저주와 불행이 없는 세상, 의와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세상이다. 그 세상이 바로 천국이다.

 

‘창조하나니’라는 원어(보레)는 ‘창조하고 있는’(분사)이라는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고 계심을 나타낸다고 보인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곧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새 창조의 역사이며 회복의 역사이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의 능력으로 회복하실 새 세상이 이 세상과 비교할 때 너무 현저히 변화된 세상이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요한계시록 21:1도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증거하였다. 천국은 현재의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세상, 아름답고 완전한 세상일 것이다.

 

[18-19절]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이는]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아니할 것임이며].

 

새 세상의 한 특징은 기쁨과 즐거움이다. 이사야는 이사야 35:10에서도 “여호와의 속량(贖良)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고 예언하였다. 현세는 눈물의 골짜기이지만, 장차 우리들이 들어갈 천국은 눈물이 없고 기쁨만 충만한 세상일 것이다. 요한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러므로 우리는 현 세상에서도 그 천국을 소망하며 항상 기뻐할 수 있고 기쁨의 생활을 힘써야 한다. 로마서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 빌립보서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20절]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壽限)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것이리라[이는 아이가 백세에 죽을 것이며 그 죄인은 백세에 저주를 받은 것임이라](KJV).

 

새 하늘과 새 땅의 다른 한 특징은 장수(長壽) 곧 긴 수명(壽命)이다. 죽음이나 저주에 대한 언급은 천국에서의 영생을 강조하기 위해 가상적으로 말한 것이거나, 또는 천년왕국 때를 묘사한 것일 것이다. 천년왕국은 천국의 시식(試食)이기 때문이다. 22절도 “이는 내 백성의 수한(壽限)이 나무의 수한[즉, 수백 년]과 같겠다”고 말했다.

천국은 영생의 나라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셨다. 디도서 1:2, “[나의 사도된 것은]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요한일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성도는 천국에서 죽지 않고 복되게 영원히 살 것이다.

 

[21-23절]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의 건축한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壽限)이 나무의 수한(壽限)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새 하늘과 새 땅의 또 하나의 특징은 평안이다. 그것은 그들이 집을 건축하고 거기 거하며 포도원을 재배하고 그 열매를 먹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들이 건축한 집을 타인이 거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이 재배한 포도를 타인이 먹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 그들이 낳은 자녀들도 재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24절]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으로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의 응답을 빠르게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전에,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그들에게 응답하실 것이다.

 

[25절]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聖山)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그것들은 나의 모든 성산에서 해하지도 아니하고 상하게 하지도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천국에는 사나운 짐승이 없을 것이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고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다. 이사야 11:6-9,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거기에는 우리를 시험할 마귀도, 우리를 해칠 악인도 없을 것이다. 천국은 오직 평안으로 충만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을 소망하자. 신약성경은 천국을 밝히 증거한다.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베드로후서 3:12-13,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천국은 기쁨과 평안의 나라요 영생의 나라이다. 우리는 그 천국을 간절히 소망하며 믿고 바라며 기뻐하자.

 

둘째로,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잘 참자. 천국을 바라는 자마다 현재의 고난을 참을 수 있다. 로마서 8:18,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로마서 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셋째로, 우리는 경건하게 살며 의와 선만 행하자. 천국에는 악한 자들이 없다. 거기에는 사나운 짐승도, 남을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것들도 없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갈 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천국의 백성답게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베드로후서 3:11-12,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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