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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이사야 59장 주석

by 은총가득 2022. 1. 31.
 
 
 
 
이사야(Isaia)  제59장


선지자가 백성의 죄악을 규탄하다

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3.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4.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
5.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7.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8.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백성이 죄악을 자백하다

9. 그러므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에 행하므로
10. 우리가 맹인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11. 우리가 곰 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정의를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
12. 이는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13.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속였으며 우리 하나님을 따르는 데에서 돌이켜 포학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낳으니
14. 정의가 뒤로 물리침이 되고 공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나타나지 못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구원하려고 하시다

15. 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를 살피시고 그 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16.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17.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18.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원수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19. 서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쪽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강물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
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사야 59장 주석

 

죄의 만연과 그 결과(1) (이사야 59:1-8)

 

선지자는 여기서 하나님과 다투어 왔던 사람들의 잘못을 바로 잡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끔 금식을 했었고 기도를 했었으나 구원은 이룰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58:3). 자 이제 다음을 살펴보자.

Ⅰ. 그것은 하나님 탓이 아니었다. 그들은 원수의 손에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하여 하나님을 비난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는 여전히 도울 능력이 있었다. "그의 손은 짧아지지 않았다." 그의 능력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으며, 제한되지 않았으며 단축되지 않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의 한계나 효과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마음대로 능력을 행사할 수 있으시며, 전과 같이 강한 팔을 펼치실 수 있다. 교회의 구원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주목하라. 더구나 그것은 약화되지도 않았으며,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민 11:23)고 하셨다.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그는 그런 생각이 들게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시간의 길이나 적의 강함이나 기구의 약함이나 어느 것도 하나님의 능력을 짧게 할 수도 감소시킬 수도 없다. 많건 적건 간에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다. 하나님께는 수가 많든 적든 구원하기가 매 한가지다.

 

2.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대한 응답을 해 주실 준비가 여전히 되어 있으며, 기꺼이 도울려고 하고 있었다. "그 분의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함도 아니다" (1절). 비록 그에게는 듣고 응답할 기도가 많더라도 그리고 그는 오랫동안 기도를 들으셨지만 아직도 여전히 기도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정직한 자의 기도는 과거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즐거워하시는 일이다. 기도하는 중에 탄원을 했던 약속들은 여전히 긍정을 받을 것이며, 침해받을 수 없을 만큼 확실하다. 여기에는 표현된 것보다 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 분의 귀는 둔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그는 듣기를 속히 하신다. 비록 "그들이 부르기 전일지라도 그 분은 대답하고 계신다" (65:24). 만약 우리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우리가 기다리는 구원이 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느라고 피곤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기도드리는 데 피곤해서이며 우리가 응답받지 못하는 것은 그 분께 말할 때 우리의 귀가 둔하기 때문이다.

 

Ⅱ. 그것은 그들 자신의 탓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가로막고 자기 문에다 빗장을 질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오시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분을 못 오도록 방해했다.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렘 5:25).

 

1. 죄가 어떤 해를 끼치는지 살펴보자.

(1) 죄는 우리에게로 오는 하나님의 자비를 막는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 놓는 간막이 벽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본질상 무한한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는 상통하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죄가 하나님과 인간을 불화 가운데 놓았다. 그래서 당연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성을 내도록 했고 부당하게도 인간을 하나님께로부터 소외시켜 놓았다. 이와 같이 죄는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분리시켜 놓는다. "그는 너희의 하나님이시며 신앙 고백으로 너희의 것이 된다. 그러므로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는 죄에는 그만큼 악함과 해가 더 많은 셈이다. "죄는 우리들로부터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운다(2절). 이것은 커다란 노여움을 의미한다(신 31:17). 죄는 그 분으로 하여금 화가 나서 은혜스러운 신령함을 물리치게 만든다. 그는 은혜 베푸시는 것을 지연시키며 도와 줄 것을 연기하신다. 그 분은 보이거나 말을 들을까봐 얼굴을 숨기신다. 여기서 죄의 본색을 살펴보자. 피조물을 뒤로 잡아당겨 창조주께 충성하지 못하도록 하는 죄의 모습은 얼마나 죄스러운가! 여기서 죄의 결과도 살펴보자. 죄는 피해를 입히는 존재다.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분리시킨다. 죄는 또한 우리를 모든 복에서 분리시킬 뿐만 아니라, 죄는 모든 화를 향해 우리를 분리시키기도 하며(신 29:21) 그것은 바로 저주의 본체이다.

 

(2) 죄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을 방해한다. 죄는 하나님을 격동시켜 그로 하여금 얼굴을 숨기시게 한다. 그는 1장 15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듣지 않으실 것이다. 만약 우리가 "마음속에 죄악을 품으며 불의에 탐익하고 그것을 허용한다" 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이다" (시 66:18). 우리가 그분께 무례한 것을 하는 한 그 분이 우리에게 대면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2. 이제 선지자는(자기에게 맡겨진 책임대로 그들로부터 얼굴을 숨기시고 그들과 논쟁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들의 죄악이 얼마나 많고 컸는가를 개략적으로 설명한다(58:1).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허물을 보여 주라." 죄는 그들을 치려고 작성된 검은 고발장이다. 그 고발장은 많은 항목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항목들 중 어느 하나라도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들 사이를 갈라놓는데 충분치 못한 것은 없다. 이제 이러한 탄핵 조항들을 적절한 항목으로 나누도록 해 보자.

 

(1) 우리는 먼저 그들의 생각을 가지고 시작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모든 죄악은 생각에서 시작되며 거기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다" (7절). 그들의 상상도 그렇다. 그들은 계속해서 악한 것을 상상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이런 저런 악과 해를 안출한다. 그들의 계획과 의도는 그렇다. 어떻게 하면 비열한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하고 골몰한다. "그들은 공상과, 목적과 계획과 결심 속에서 잔해를 잉태한다" (태아가 형태와 생명을 갖추듯이). 그리고 나서 그들은 죄악을 생산한다. 시기가 무르익으면 그 악한생각을 실천에 옮긴다. 섭리의 반대와 양심의 제지를 무릅쓰고 죄악을 생한다는 것은 아마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악한 목적을 달성하면 마치 사내 아이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자만감과 기쁨을 가진다. 그러므로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으니라" (약 1:15). 이것은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는 것이라고 표현되고 있다(5절). 이것은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는 것이라고 표현되고 있다(5절). 사악한 자들이 어떤 생각과 계획을 품으며 어 일에 머리를 쓰는지 살펴보자.

 

[1] 그것은 고작 미련하고 경박한 것에 대한 생각이다. 그들의 생각은 거미줄을 치는 것과 같이 헛된 생각이다. 이 가련한 곤충은 아주 많은 수고를 한다. 그러나 갖은 애를 다 써서 줄을 다 쳐 놓아도 그 줄은 보잘 것 없고 약한 것이며, 그 장소만 더럽히는 수치거리며 순식간에 청소되고 말 허무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상상을 즐기며 공중 누각을 짓고, 공상으로 즐거워하는 것도 바로 거미줄을 짜는 것과 같다. 거미는 그 손으로 매우 빨리 잡을 수 있다. 그러나 거미는 자기를 지키지 못한다.

 

[2] 그 생각은 악의와 원한에 차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독사나 살무사의 알을 깐다. 독사는 맹독이 있으며 독액을 머금은 알을 낳는다. 악행에 기쁨을 느끼는 사악한 자들의 생각도 이와 같다. 그 알을 먹는 자(즉 악인과 거래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즉 이모저모로 어떤 화를 당할 위험에 빠질 것이다). 그 알을 먹기 위하여 깨뜨리거나 어떤 유용한 새가 부화될 것이라고 기대하여 깨뜨리면 독사가 나올 것이다. 그 알을 만지고 있다는 것은 목숨을 건 행위이다. 그들의 전 사업은 학대와 괴로움을 입히는 일의 연속 과정이다.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다" (6절). 머리에 있는 폭력의 기술과 마음속에 있는 폭력의 사상에 따라 그들의 손에서 폭력이 행사되는 것이다.

 

(4) 이런 억울한 일을 시정하고 이런 학대를 개혁할 조처가 전혀 취해지지 않고 있다. "어떤 사람도 공의를 부르는 자가 없다" (4절). 정의의 신성한 법을 위반해도 불평하는 자가 없으며 부당하게 고통받는 자를 바로 잡아 주려고 노력하는 이도 없다. 또한 악과 신성 모독, 그리고 수치스런 외설 행위를 금하여 법을 실시하려고 하는 이도 없다. 국가 의 해독이 될 위험이 있는 것은 법대로 처리해야 하는 법이다. 공의가 행하지 않을 때 공의를 행해야 할 위정자도 비난을 받지만 공의를 따라 소송을 제기해야 하는 백성들도 비난을 받는다. 사사로운 사람들은 숨은 악을 찾아냄으로써 공공의 선에 이바지해야 하며 권세자들에게 악을 처벌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공공의 선에 기여해야만 한다. 그러나 방백들이 악하게 다스리고 백성들이 그런 악한 현실을 용납하는 나라는 불행하다. 진리는 배척을 받는다. 진리를 위해 변호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 옳은 일을 옹호하고 사악한 일을 반대하기 위해 나설 만큼 용기와 양심을 지닌 이도 없다. 악이 판을 치고 형통하는 사회에서는 사기 행위와 그릇된 행의에 대항하는 것이 모험이기 때문이다. "평강의 길" 은 진리의 길 만큼이나 존중받지 못한다. 그들은 "그 길을 알지 못한다." 즉 그들은 어떻게 하면 평화를 이룩할 수 있을지 연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평화가 깨지는 것을 방지하거나 처벌할 생각이 전혀 없다. 이웃간의 의견 차이를 조정하기 위한 어떤 배려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조용하고 평화롭게 보이는 것과는 완전히 담을 쌓은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거세게 몰아치고 소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들을 사랑한다.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도다." 그들의 행위에는 정의감이 전혀 없다. 공정은 그들이 전혀 중요시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정의가 악하고 탐욕스러운 계획에 방해가 될 때는 언제든지 공의의 모든 담을 쉽사리 허물어 버린다.

 

(5) 이 모든 그들의 행동은 매우 어리석다. 그들의 행위는 이 성과 공평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에도 위배된다.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은 "허망한 것을 신뢰한다" (4절). 그것들은 틀림없이 그들을 속일 것이다. 그들이 아주 교묘하게 그리고 부지런히 짜놓은 거미집은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다" (6절). 그들이 짠 것은 몸을 보호하는 것도 장식하는 것도 되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악한 계획으로 남을 해칠 수는 있을지 모르나 자기 자신에게는 어떤 유익이나 혜택도 얻지 못한다. 죄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익은 아무 것도 없다. 손해와 이익을 계산하게 될 때 이것은 분명히 나타났던 것이다. 죄의 길은 "구부러진 길" 이다(8절). 그 길은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것이며 그들을 여행의 종착지까지 인도해 주지 못할 것이다. 그 길로 계속 가도 평강을 얻는다고 말하지만 그리로 가는 자는 누구든지 자신을 기만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다음에 나타나듯이 그들은 평화를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죄의 만연과 그 결과(2) (이사야 59:9-15)

 

이 문단의 취지는 앞 문단 마지막 부분과 동일하여 죄는 큰 화근끼리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죄는 우리를 복에서 멀어지게 하듯 우리에게 재앙을 가져온다. 선지자는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점을 명백히 말했다. 그 목적은 백성을 깨우쳐서 겸비케 하며 그가 말할 때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으로 인정받고 그가 심판할 때 아무 불평을 듣지 않으시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것은 앞에서 받은 경고를 인정하고 자기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처사를 공평하고 의로운 것이라고 겸손히 승복하는 표현같이 보인다. 할례받지 못한 그들의 마음은 다소 겸손해진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반대로 행하신 것은 너무도 당연하셨다고 고백하게 된다(이 자백은 적어도 강요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반대로 행해에 왔기 때문이다.

 

Ⅰ.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다투셨고 자기들과 정반대로 행해 오셨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들의 형편은 매우 비참했다(9-11절).

 

1. 그들은 고통 중에 있었고 원수들에게 짓밟혔으며, 억눌림을 당했다. 그들은 부당하게 취급받았으며, 혹독하게 취급당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의와 피해입은 처지를 옹호하러 나타나지 않으셨다.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 하고있다" (9절). 우리 편에서 보면 우리가 바르고 핍박자들이 행악자 임에 틀림없으나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고 옳다 여김을 받지도 못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 의를 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처럼 부당하게 다루도록 원수들에게 허락하신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우리 자신의 의로부터 멀리 있으며 재산의 회복에서도 멀어져 있다. 압제가 우리에게 가까이 있지만 공평은 우리에게서 멀다. 우리의 대적들은 부당하게도 우리의 처지를 결코 적절히 고려하지 않고 여전히 압제와 강포로 우리에게 급히 달겨든다. 그런데도 공의는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고 그들의 손아귀로부터 우리를 구출해 내지 않는다.

 

2. 여기서는 그들의 기대가 슬프게도 무산되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의 처지를 더욱 더 슬프게 한다. "우리는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같이 빛을 바라나 어두움 뿐이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는 극히 작은 여명도 식별할 수 없다. 우리는 공평을 바라나 없도다(11절). 하나님도 인간도 우리의 구조자로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구원을 찾는다. 왜냐하면(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금식하며 그 약속을 위해 기도했다. 우리는 그것을 밝음 가운데서 찾으나, 그것은 우리들에게 멀리 떨어져 있으며 어쨌든 지각할 수 없다. 우리는 여전히 캄캄한 가운데에서 행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대가 더 높이 상승하면 할수록 우리의 실망도 더욱 크다."

 

3. 그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고 당황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소경같이 담을 더듬는다(10절).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길을 찾을 수 없고 어느 길에서 구원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또한 구원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빛에 대하여 눈감아 버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강한 모든 일에 대해서도 눈감아 버린다는 것은 당연하다. 마땅히 우리의 눈을 사용해서 보아야 할 때 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치 누이 없는 자처럼 취급하는 당연하다." 자기 의무를 보지 않으려는 자는 자기 이익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공의에 눈감아 온 자들은 이상하게도 이성을 잃게 되었다. 그들은 밤에 실족할 뿐만 아니라 낮에도 넘어진다. 주위의 모든 자가 다 보는 위험도 이익도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느다. Quos Deus Vult Perdere, eos dementat----즉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멸하기로 작정한 자들을 넋잃게 만드신다. 빛보다 어두움을 좋아하는 자들의 운명은 그에 상응하게 될 것이다.

 

4. 그들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고 슬픔에 사로잡혔으며 그 표시가 각자의 얼굴에 나타났다. 그들은 점점 더 우울해졌고 서로 교제를 피했으며 고독을 즐겼다. "우리는 건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다." 바벨론 치하에 있는 유대인의 상태는 죽어서 마늘 해골로 묘사되며 거기에 나타난 비유의 설명은 본문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겔 37:12), 이러한 절망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슬픔과 고뇌를 야단스럽게 표현했다. "우리는 곰같이 부르짖었도다" (11절). 골짜기의 비둘기와 같이 울었다. 우리는 우리 죄를 위하여 울었다(겔 7:16). 또한 우리의 재난에 대하여 슬피 울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여호와의 손이 자기들을 치신다" 는 것을 인정했다.

 

Ⅱ.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격동시켜 자기들과 다투시게 했다는 것과 하나님은 올바로 행하셨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는 그들이 사악하게 행했기 때문이었다(12-15절).

 

1. 그들은 자기들이 범죄했고 에스라의 말대로(스 10:10) 그 때까지 큰 죄 중에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우리의 허물이 우리에게 있음이라. 그 허물의 결과가 우리에게 있으며 그 죄의 세력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 허물이 이토록 많은 해를 입혔는데도 우리는 아직 개혁하지 않고 그 죄와 결별하지도 않고 있다. 아니, 우리의 허물이 심히 많다(원의:증가한다). 우리 허물은 이전보다 더 많아지고 더 악해졌다. 어느 쪽을 보아도 우리의 허물이 눈에 띈다. 장소나 신분이나 계급에 구애될 것없이 모든 자가 죄에 감염되어 있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다윗이 말했듯이(시 51:3) 우리의 죄 의식은 우리와 함께 있다. 그 죄는 너무나 분명해서 어느 누구도 부인하거나 감출 수 없다. 또한 그 죄는 너무도 악하기 때문에 용서받을수도 없고 경감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바로 그 죄들에 대한 증인이시다. 우리 허물이 주의 앞에 주의 목전에 심히 많나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대한 증인이다.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우리가 어리석게도 그것을 감출려고 노력했지만 알고 있나이다. 아니, 우리의 죄가 증인이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정면으로 노려보며 우리를 쳐서 증거하오니 그 죄는 너무나 많으며 너무나 악하나이다."

 

2. 그들은 죄의 큰 폐해와 자기들이 지은 죄의 악함을 인정했다. 그것은 여호와를 배반하고 인정하기 않는 것(원의:거짓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임을 고백하고 그의 이름으로 불리는 자들의 죄는 다른 사람의 죄보다 더 나쁘다. 그들은 여호와를 배반하며 그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를 쳐서 거짓 말하며 마치 하나님이 부당하고 불공평하게 학대하기라도 하는 분이듯이 참소하며 그릇되이 묘사한다. 또한 그들은 불성실하게도 그 분과 맺은 계약을 파괴하며, 그와 맺은 가장 거룩하고 엄숙한 약속들을 저버린다. 바로 그것이 "그 분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을 쫓는 데서 돌이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되신 여호와께 묶여 있어야 하며 자의에 의해서 그에게 달라 붙어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그를 배반하고 그로부터 돌이켜 떠났다. 우리는 의로운 왕에게서 모반하는 역신과 같고 소시의 인도자와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떠나는 음녀와 같았다.

 

3. 그들은 도의가 땅에 떨어졌고 부정적이 만연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나님께 거짓된 자들이 서로에게 불충실했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포학을 말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배반이요, 진리에 대한 반역임에도 그들은 그것을 공공연하게 선언했다. 그들은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발했다. 마음속에서는 많은 악한 생각이 생긴다. 그러나 사려 깊은 자는 그것을 마음속에서 사그러지게 만들고 더 이상 나오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이 죄인들은 너무나 뻔뻔스럽고 대담하여서 마음속에 일어나는 악이면 무엇이나 imprimatur ---- 즉 재가를 해서 입 밖으로 나오게 했고 그나마도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발설했다. 악한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나쁘다. 그러나 그것을 말한다는 것은 더욱 나쁘다. 깊은 생각없이 성급히 입 밖에 내다보면 거짓말이 되는 말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은 마음속에서 잉태하여 발설되었으며 심사숙고하여 말한 것이고 계획적인 악의로 발설된 것이다. 그것들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마음속에서부터" 말하여지는 말이었다. 그 말들은 마음속에 있는 실제 감정과 달랐다. 그러므로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들은 마음속에 있는 악의나 사악함과 일치하며 악한 생각을 표현하는 자연스러운 언어였다. 또한 그것들은 "두 마음" 이었다(시 12:2).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런 큰 죄에서 손을 뗀자들이 이같이 전체적으로 부패된 자기 민족을 인하여 죄를 고백한다는 데 주목하자.

 

4. 그들은 그 땅을 개혁하고 잘못된 것을 고칠 수 있었는 데도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시인했다. "공평" 은 앞으로 가야만 하는데 반대로 물리침이 되었다. 공평은 강같이 흘러야만 하면 거센 흐름 같아야만 하는데, 반대로 "뒤로 물리침이 되었도다" (14절). 정의를 실행해야 할 행정이 극히 큰 불의를 은폐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사기와 폭력의 진행을 저지해야 할 공평은 물러가 버리고, 기만과 압제가 계속해서 기승을 부린다. "의가 벌리 서 있다" (14절). 우리의 법정에서조차 정의가 멀이 떨어져 있다. 그 법정들은 압제의 옹호자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어서 정직이 들어가지 못하며 입장권을 얻지 못하며 정직한 말이 들리지 않으며 정직한 말이 주의를 끌지 못한다. 그들이 반포하는 불의한 법령에는 정직이 들어가 있지 않다(렘 10:1).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도다. 진실은 엎드러져서 모든 거만한 발길에 짓밟혀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 친구 하나도 없다. 성실이 모든 대화 속에서 모든 인간 관계 속에서 없어진다(15절). 그래서 누구를 믿으며 누구를 신뢰할 것인가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게 된다.

 

5.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선한 자에게 대한 적의가 있었다는 것을 시인했다. "악을 행하는 자가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악을 떠나는 자가 짐승들에게 탈취를 당하는구나." 그들은 인간으로서 하지 못할 일을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악에 가담하지 않으려는 자를 원수처럼 취급한다. "악을 떠나는 자는 미친자로 간주된다" (어떤 사본은 그렇게 읽는다). 홀로 성실하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으로 낙인찍혔고 매우 세차게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미친 자와 다름없이 간주되었다.

 

6. 그들은 이 모든 것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매우 노엽게 했다는 것을 시인했다. 그의 목전에서 악이 행해졌다. 그들은 그 점을 기꺼이 인정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여호와께서 보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쥐도 새도 모르게 악을 행하고 그 위에 그럴듯한 은폐물을 입혔지만 모든 것을 궤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악은 하나님의 목전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불의를 보시지 않기에는 하나님의 시각이 너무나 민첩하며, 그것을 용인하시거나 묵과하시기에는 그의 시력이 너무나 순수하다. 여호와께서는 이를 감찰하시고 그를 기뻐 아니하셨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 자신에게 신앙을 고백하는 백성이었지만 그들 중에 있는 악은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분 보시기에 악했다. 그는 이런 모든 죄의 죄스러움을 보셨다. 더구나 그를 극히 노엽게 한 것은 공평이 없고 개혁도 없다는 것이었다. 비록 죄가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지라도 그는 회개의 징조를 보셨다면 자기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죄인들과 즉시 화해하셨을 것이다.

사회 정의와 사법권이 국민의 죄를 제지하지 않을 때 그 죄는 국가적 죄로 되어 심판을 초래하게 된다.


하나님의 친절하신 중재 (이사야 59:16-21)

 

우리는 본장의 앞 부분에서 놀랍게도 얼마나 죄가 많았던가를 읽었다. 우리는 이 문단에서는 얼마나 은혜가 풍성한가를 읽게 될 것이다. 죄가 계명을 기화로 더욱 심해졌듯이 은혜는계명의 위반을 이용하여 더욱 더 은혜롭게 나타난다. 다음을 관찰하자.

Ⅰ. 왜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패역한 행악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위해 구원을 베푸시는가?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이다. 그들에게는 구원을 유도하거나 가져오게 할 아무 것도 없다. 그들에게는 구원받을 만한 공포도 없으며, 구원을 가져올 만한 능력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 스스로 이 일을 행하려고 하시며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힘으로 높임

을 얻고자 하시는 것이다.

 

1. 그는 그들의 연약함과 사악함을 아셨다. "그는 그들 사이에는 신앙과 덕을 위해 피를 흘리는 자, 즉 중재자가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16절). 공평을 실행하는 사람도 없었으며(렘 5:1) 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 시대의 악함에 대해서 불평하는 사람들도 열심을 가지지 못했으며, 악에 대항하고 나설 만한 용기도 없었다. 예의범절의 부패는 편만하였다. 그 시대의 풍조를 저지하기 위한 그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거의 모두가 악했다. 그러나 악하지 않던 사람들은 힘이 없었고, 따라서 악인의 악에 대항하는 그 어떤 사도도 감히 하지 못했다. "중재자도 없었다" (16절). 하나님께 좋게 말해 줄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기도로써 하나님의 분노를 돌이키게 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공평과 성실을 옹호하기 위하여 중재할 사람은 없었다(14절). 자기 성실을 지키기 때문에 희생되는 자들에 대해 좋은 말로 변호해 줄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15절).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 나타나지 않으신다고 불평했다(58: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스스로 아무일도 하지 않았다고 불평하신다. 하나님은 그들보다 더 많은 이유를 가지고 불평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 중에서 극히 작은 개혁 운동이라도 찾아 볼 수 있다면 기꺼이 그들에게 선한 것을 베풀어 주겠다고 누차 암시하셨던 것이다.

 

2. 그는 힘과 의를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1) 왜냐하면 그들 자신에게는 힘도 없으며, 그들의 고통이나 재난을 시정해 줄 어떤 행동적인 사람들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실 것이다" (16절).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또는 자기가 구원자로 세우실 자에게 구원을 베푸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여호와의 팔이시다. 그는 자기 우편에 있는 분을 강하게 하사 그에게 구원을 베푸셨다. 구원의 조요 조항이 되는 개혁 사업은 인간의 양심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직접적 은혜로 이루어질 것이다. 개혁의 주관 부처나 집행관들이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하며 공평을 행하지 않고 그것을 요구하는 자도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그들 없이도 이 일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리실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 백성으로 자비를 받을 수 있게 준비시키는 때가 올 것이다. 그 때에는 섭리가 인간들의 생각과 사건에 직접 작용하여 구원을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의 마음을 움직여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에서 데리고 나오셨을 때 그는 자기 팔로 구원을 베푸린 것이다. 그의 팔은 짧아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힘으로도 되지 않고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만군의 주 여호와의 신으로 된 일이었다.

 

(2) 그들은 이런 은혜를 받을 만한 자신의 의도가 없었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 역사하데도록 주목을 끌 만한 의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셨다. 그들이 죄로써 무장하고 대항해 왔던 하나님의 공의가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을 위해 나타난다. 그들은 죄악 때문에 어떤 은혜도 기대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실 것이며 자신의 의도와 약속, 그리고 자기 백성들과 맺은 언약에 공정하실 것이다. 그는 의로우심 가운데서 자기 백서의 원수들을 벌하실 것이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오히려 쫓김을 당한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함이니라" (신 9:5). 우리들에게는 의가 없으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속죄로써 우리를 대속하시고 독생자의 공로와 중재로써 의를 가져오셨다. 바로 그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서 난 의다" (빌 3:9). 하나님은 이 의를 의지하셨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를 격동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모든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는 의로 호심경을 삼으셨다" (17절). 호심경이 앞에서 생명을 보호하듯이 의와 공평이 앞장 서서 그의 영광을 보호했다. 그는 구호의 투구를 그 머리 위에 쓰신다(17절). 그는 자기가 의도하는 구원을 틀림없이 달성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머리에 쓰시는 구원의 투구는 뚫리지 않는다. 구원의 투구를 쓴 그의 모습은 아주 뛰어나고 원수들이 보기에는 극히 두렵고 그의 친구들 보기에는 아주 사랑스러울 것이다. 의가 갑옷이라면 구원은 투구에 해당한다. 복음은 이것을 암시하여 의의 흉배라고 하며 구원의 소망이라고 한다(엡 6:14-17; 살전 5:8). 그것은 "하나님의 전신 갑주" 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그것을 입으셨고 우리에게도 그것이 꼭 맞기 때문이다.

 

(3) 그들에게는 스스로 어떤 일을 할 만한 마음도 열심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걸옷을 삼으신다" (17절). 그는 교회와 백성들의 원수들에 공의를 베풀 것이다. 또한 자기 영광을 위하여 질투할 것이며, 사람들 간에 신앙과 미덕을 가지도록 하실 것이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 분명하고도 뚜렷하게 나타내실 것이다. 마치 인간이 자신의 부유한 옷차림이나 사무실의 특별한 장식으로 자신을 나타내듯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로 자신의 위대하심을 나타내실 것이다. 만약 인간들이 열심을 내서 죄에 대항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과 백성들의 안녕에 입힌 모든 손실에 대하여 복수하실 것이다. 그런데 죄의 제거와 죄에 대한 복수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하실 사업이었다.

 

Ⅱ. 하나님 자신의 의와 힘으로 베푸실 수원은 어떤 것인가?

 

1. 바벨론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는 현세적 구원이 베풀어질 것이다. 또 고통과 포로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구원이 베풀어질 것이다. 이것은 그 이상 가는 일의 예로써 약속되고 있다(18,19절). 비록 그들이 촉진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시기가 도래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수행하실 것이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일이 약속되고 있다.

 

(1) 하나님께서는 자기 대적과 셈하실 것이며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실 것이다. 그 분께서는 백성들을 억압했던 외국의 언수들에게 보복할 것이며 그들을 학대하고 공평과 성실에 대적하던 국내의 사람들에게도 복수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하나님의 원수들이기 때문이다. 멀지않아 복수의 날이 올 때 하나님께서는 받을 만한 "보응에 따라서" 응보의 법칙대로 그리고 옛날의 응보에 따라서 복수하실 것이다(계 13:10). 그는 이전의 "원수들에게 복수하셨던 것처럼 이제도 보복하실 것이며 그 대적들에게 분노하실 것이며 원수들에게 보응하실 것이다" (18절). 그의 분노는 공의의 법을 초월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분노는 흔히 지나치지만 그의 분노는 정당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 만약 섬들이 그를 대적하였다면 가장멀리 떨어져 있는 섬들에게까지도 "그는 보복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손은 그의 모든 원수들을 발견해낼 것이기 때문이다(시 21:8). 그리고 그의 화살은 그들에게 미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비록 악하게 행동하여 구원받을 가치가 없다고 해도 그의 적들은 더욱 악하게 행동하여 멸망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원수들이 그들의 평화를 교란시키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할지라도 그들의 시도는 좌절될 것이며, 낭패로 돌아갈 것이다. "원수가 급히 흐르는 하수같이 올 때 그 앞에 있는 것은 전부 휩쓸어 버릴 듯 밀려오는 대조(大潮)나 홍수처럼 올 때 여호와의 기운이 식별할 수 없는 어떤 비밀의 힘에 의하여 그에게 깃발을 드시며 그를 도주하게 하실 것이다" (한글 개역 성서와 다름:역주). 구원을 베풀었던 분은 이제도 구원을 베푸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연약하고, 도와주는 이도 없으며 침략 세력에 대항하여 들 만한 기치도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기를 주실 것이며(시 60:4) 성령으로써 깃발을 드실 것이며 그 깃발은 무수한 자들을 끌어 모아 교회의 편에 서게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해독하기도 한다. 즉 "여호와께서 급히 흐르는 하수같이 오실 것이며 그의 신이 그를 기호로 드실 것이다." 이것은 약속된 그리스도를 예견하기 전 여호와의 이름과 영광을 말한다. 복음의 선포에 의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으로 세상을 홍수처럼 덮으실 것이다. 여호와의 신은 그리스도를 이방인의 기호로 세우실 것이다(11:10).

 

(3)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세상 사람들의 신앙의 증진에 기여할 것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모든 민족은 "여호와의 이름과 그의 영공을 두려워할 것이다." 유대인 포로들의 해방과 압제자들의 파멸은 무수한 사람을 각성시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해 묻게 할 것이며, 그들로 여호와를 섬기고 예배하게 하며 성령이 드시는 깃발 아래 들어오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교회의 옹호자로 나타나시는 것은 많은 사람을 교회에 들어오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 일은 복음 시대에 완전히 성취되었다. 복음 시대에는 많은 자들이 동과 서에서 와서 쫓겨난 자녀들의 자리를 대신 채웠고(마 8:11) 또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세워졌던 것이다.

 

2. 때가 차면 메시야로 말미암아 보다 영광스러운 구원이 베풀어질 것이다. 그 구원은 모든 선지자가 항상 대망하던 구원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구원에 관한 두 가지 커다란 약속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속죄자로서 오실 것이다. "구속자가 임하리라" (20절). 그 모든 바로 그리스도시다. "구원자가 오실 것이다" (롬 11:26). 그리스도가 구속자로서 오신다는 것은 신 구약을 통털어 이루어진 모든 약속의 요약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바라던 예루살렘의 구원이었다(눅 2:38). 그리스도는 가난한 채무자의 신분과 신체를 다 속해 주시는 우리의 고엘(Goel) 즉 가장 가까운 혈족이시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이 구속자가 앞으로 오실 장소. 그 분은 "시온에 오실 것이다" (20절).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그 거룩한 산 위에서 그를 옹으로 세우실 것이기 때문이다(시 2:6).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벧전 2:6). 그분은 거기 있는 성전에 오시기로 되어 있었다(말 3:1). 구원은 거기서 베풀어질 것이었다(46:13). 왜냐하면 거기서 율법이 나온 때문이다(2:3). 시온은 복음 교회의 유형이었다. 왜냐하면 구속자께서는 복음 교회를 위해 여러 가지 모양으로 행동하시기 때문이다. "구속자가 시온을 위해서 오실 것이다" 라고 70인 역은 읽는다.

 

[2] 구속자가 오심으로 위로를 받을 사람들은 구속할 날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므로 그들의 머리를 쳐들 것이다. 그 분은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할 것이다" 920절). 그는 야곱 족속중에 있는 자들과 야곱의 기도하는 자손에게 임하실 것이며,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다. 그러나 야곱 중에 있는 자나 가시적 교회의 경내에 있다고해서 다 그의 임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죄를 떠나 홰개하고, 고치고, 버리는 자들에게만 기도의 응답이 있고 구속함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러나 시온의 죄인들이 여전히 자기 죄 중에서 행한다면 구속자가 시온에 오신다고 해서 그들의 형편이 더 호전되지는 않을 것이다.

 

(2)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자로서 오실 것이다(21절). 구속자에게는 우리에게 채결된 새로운 언약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세대를 통해 자기 교회와 백성에게 말씀과 성령을 계속 주신다고 하는 것은 그 언약 중 최대의 약속이며 가장 포괄적인 언약이다. "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다는것에는 그들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눅 11:13; 마 7:11). 본문은 이것을 그들과 세운 언약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즉 죄과를 떠나 모든 자들과 세운 언약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악한 행위를 중지하는 사람들은 선행을 배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속은 단 한 사람과 체결되고 있다. "네 위에 세운 나의 영" 이란 말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를 가리킬 것이다.

 

[1]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주시기 위해 먼저 받으셨다. 교회에게 약속된 성령은 먼저 그리스도 위에 있었다. 그 보배로운 기름은 그의 머리에서 그의 옷 자락으로 흘러내린 것이다. 복음의 말씀은 처음에 그리스도의 입에 두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께 의하여 말하여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모든 믿는 성도들은 그의 자손이다. 그 모든 이 자손들 속에서 자신의 날을 연장하신다(53:10).

 

[2] 따라서 그리스도의 보좌와 자손이 영원히 존속하리라는 약속(시 89:29, 36; 22:30)과 병행하여 이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시간의 종말까지 영속하리라는 약속이다.

첫째, 인간 세계가 후손과, 후손의 후손에 의해서 이어지듯 이 교회도 계속적으로 계승될 것이다. 한 세대가 지남에 따라, 또 다른 세대가 올 것이다. 아들들이 열조를 계승할 것이다(시 45:16).

둘째, 교회는 영영토록 즉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을 위하여 존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세상에 남아 있는 한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보이지는 않더라도 세상에 교회를 두실 것이다.

셋째, 성령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라도 계속 역사하실 것이다. 말씀과 성령으로 끊임없이 역사하실 것이다.

 

1. 그리스도께 있는 성령은 항상 충실한 마음속에서 계속할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실 모든 세대 속에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을 배우다. 그러므로 그 위로자이신 성령은 영원히 교회와 함께 거할 것이다(요 14:16).

 

2. 그리스도의 말씀은 충성된 자들의 입으로 항상 계속될 것이다. 마음으로 이를 시인하고 혀로써 구원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모든 세대에 걸쳐 있을 것이다. 그 말씀은 영원히 교회의 입으로부터 떠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거룩한 말씀과 그분의 거룩한 신앙을 고백할 자손은 항상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을 살펴보자. 성령과 말씀은 동시에 역사한다. 교회는 성령과 말씀으로 계속 유지되었다. 왜냐하면 목사님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아니 우리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도 성령이 함께 역사하지 않는 다면 우리에게 아무 유긱도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말씀과 협력하여 말씀에 의해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지시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성경에 비추워 보아 일치해야 하며 성서로 시험해야 한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교회는 세워졌고, 확고하게 서 있으며, 영원히 서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신이 요긴한 모퉁이 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의로 친히 구원하심(이사야 59장)

 

[1-2절]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하나님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이 아니고 그의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이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내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간격을 만든다. 죄가 사람의 근본문제이다. 죄는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막는다. 죄는 신앙생활에 가장 큰 장애물이다. 우리가 조심할 것은 죄밖에 없다.

 

[3-5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하며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남을 해치고 죽이고 거짓을 말하였다. 그들의 손에는 피가 있었고 그들의 손가락은 죄악에 더러웠고 그들의 입술은 거짓을 말하였고 그들의 혀는 악독을 발하였다. 또 이스라엘 백성의 법정이 부패하였다.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었다. 의와 불의,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고 판결해야 할 법정이 부패되어 거기에 불의와 악과 거짓이 있었다. 이스라엘 나라는 거짓과 악독이 가득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독사의 알을 품은 것과 같아서 그 결과는 재앙과 죽음과 멸망일 것이다.

 

[6-7a절]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이스라엘 백성의 행위의 의는 더러운 누더기 옷과 같았다. 그들의 행위는 자신의 부끄러운 수치를 가리울 수 없었다. 그것은 곧 메말라 버리는 무화과 잎으로 만든 옷과 같았다.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요,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고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었다.

 

[7b-8절]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부패의 결과는 그 앞길에 황폐와 파멸이 있는 것이고 그들이 평안의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공의를 행치 않으며 그런 길을 걷는 자에게는 평안이 없다.

 

[9-11절] 그러므로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하므로 우리가 소경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우리가 곰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공평을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

이스라엘 백성은 의가 없기 때문에 빛을 바라나 어두움뿐이었다. 빛은 기쁨과 행복을 상징하고 어두움은 슬픔과 불행을 상징한다. 그들은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는 자와 같았다. 그들은 환난과 재앙 속에서 부르짖고 탄식하며 구원을 바라나 구원이 그들에게서 멀었다.

 

[12-15a절] 대저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인정치 아니하며 우리 하나님을 좇는 데서 돌이켜 포학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발하니 공평이 뒤로 물리침이 되고 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들어가지 못하는도다. 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깨닫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인정치 않았고 하나님을 따르는 데서 돌이켜 포학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하였다. 그들에게는 의도, 진실도 없었다. 오히려 의인이 탈취를 당하는 일이 있을 정도이었다. 이스라엘 사회 곧 구약교회는 경건이 없고 의와 정직이 없는 심히 죄악된 교회요 사회이었다.

 

[15b-18절]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시고 그 공평이 없은 것을 기뻐 아니하시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의로 호심경[흉패]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며 보수(報讐)로 속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대적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절망적 상황을 보시고 친히 자기의 팔로 또 자기의 의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주권적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의로 흉패(breastplate)(KJV, NASB)와 투구를 삼으시고 그 의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원수들을 갚고 보응하실 것이다.

 

[19절] 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같이 오실 것임이로다.

다시 번역하면, “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이며, 원수가 홍수같이 올 때에 여호와의 영이 그를 대항해 기(旗)를 들리라(KJV)(혹은 그를 대항해 몰아대시리라).” 본문 하반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물리치실 것을 예언한 말씀이라고 본다.

 

[20-21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救贖者)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罪過)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죄를 떠나는 자, 곧 회개하고 죄를 버리는 자들과 함께하실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과 세우신 그의 언약을 지키실 것이며 그의 영과 그의 말씀을 그들에게 영원히 주실 것이다. 또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원수들에게 분노하시며 보복하실 것이며, 그의 뜻하신 바를 다 이루실 것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은 사람의 불행과 멸망이다.

범죄한 이스라엘 사회에는 평안과 행복이 없었고 황폐와 슬픔과 고통과 학대받음뿐이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구원도, 기도의 응답도 없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 불행과 멸망임을 보여주었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죄가 많은 나라도 그렇다. 우리는 세상에서 때때로 일어나는 큰 슬픈 사건들도 우연한 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죄악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이다.

 

둘째로,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긍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팔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다.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구주이시다. 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의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사람의 의로운 행위들은 누더기 옷과 같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영원한 언약으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는 그의 영과 그의 말씀이 그들과 그들의 자자손손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셋째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 중심으로 말씀과 기도로 살며 모든 죄를 멀리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고 기도의 응답을 얻을 수 있고 자자손손 평안과 복을 얻을 것을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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