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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이스라엘의 회복(이사야 40장)

by 은총가득 2022. 1. 28.

 

 

이스라엘의 회복(이사야 40장)

 

1-11절, 하나님의 오심

 

[1-2절]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체바아흐)[‘그의 전쟁’(KJV, NASB), ‘그의 고역’(NIV)]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유다 백성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회복될 날이 암시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로하신다. 그것이 아버지의 심정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로 인해 징벌을 받아 멸망당하고 오랫동안 바벨론 포로생활로 고생할 것이지만, 이제 회복의 날이 올 것이다. 유다 백성은 죄에 대해 하나님의 징벌을 충분히 받았고 징벌로 받은 포로생활의 기간, 즉 전쟁 같은 고역의 기간은 찼고 그 죄악은 사함을 받았다.

 

[3-5절]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본문은 메시아의 강림을 준비하며 선포했던 세례 요한을 암시한다. 그는 광야에서 회개를 전파하며 메시아를 위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준비시켰었다. 광야는 거친 세상의 현실이나 인생의 수고로운 삶을, 골짜기는 거짓과 미움과 탐욕과 음란으로 복잡한 사람들의 죄악된 심령을, 또한 산은 사람들의 교만한 마음을 상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셔서 회복시키실 것이다. 악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히 회개하는 자들만 영광의 하나님을 영접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는 말씀은 신적인 구주의 강림을 계시하는 중요한 내용이라고 보인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육체가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메시아께서 사람으로 오심을 가리킨다고 본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스라엘의 회복은 신적 메시아의 강림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 예언은 하나님의 입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실제로 이루어졌다.

 

[6-8절]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본문은 사람의 생애와 세상 영광의 헛됨을 증거하며, 그것을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한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며,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고 떨어질 것이다. 인생은 허무하다. 그것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것 위에 불기 때문이다. 인생의 허무함은 그들의 죄와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이스라엘 나라의 쇠잔함과 멸망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이사야는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 말씀은 헛되지 않고 영원히 서며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소망이 오직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9절]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 시온이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 예루살렘이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KJV, NASB).17)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나심에 대한 소식을 널리 전하라고 말한다. “너희 하나님을 보라”는 말씀은 장차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오실 것을 증거한다.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요 1:1, 14). 우리는 그것을 성육신(成肉身)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사람이 되어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온 인류의 구주이신 그를 만방에 전해야 한다.

 

[10-11절]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본문은 오실 신적 메시아에 대해 좀더 말하기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며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고 한다. 그는 공의로 심판하시고 보응하실 것이다. 그는 선한 일을 행한 자들에게 상을 주실 것이며 악한 일을 행한 자들에게는 벌을 내리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또 그는 좋은 목자이실 것이다.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그는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들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고,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실 것이다. ‘젖먹이는 암컷들’(NASB)18)은 아마 말씀의 사역자들인 목사들을 상징할 것이다. 양들을 모으시는 것은 그들을 구원하심을 가리키고, 양들을 안으시는 것은 그들을 보호하심을 가리킬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인간의 삶은 헛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영원하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고,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세상의 모든 삶과 그 영광은 과연 헛되다. 그것은 사람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많은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고 쇠하지 않고 죽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은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헛된 영광을 추구하거나 의지하지 말고,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만 믿고 소망하자.

 

둘째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대로 신적 구주께서 오셨다.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다(요 1:1, 14). 사도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라고 썼다(딤전 1:15). 그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분이시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마태복음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족보]라.” 우리는 이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한다(마 28:19; 막 16:15; 행 1:8).

 

셋째로, 이제 우리는 신적 구주의 인도하심만 따르자. 신적 구주께서 능력의 팔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품에 보호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공급하시며 마지막 날에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0:27).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본 14만 4천인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고 정절이 있고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었다(계 14:3-5). 우리는 오직 구주 예수님만 따르자. 그가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 되자. 그의 말씀이 성경에 있으므로 오직 성경의 교훈대로만 믿고 살자.

 

 

 

 

12-17절,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12절]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보았으랴.

 

이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가 심히 크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와 산들을 바라보면, 우리는 온 세계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지구는 매우 크지만 온 우주에서 한 작은 점에 불과하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거대한 공과 같다. 그 둘레는 약 4만 킬로미터가 된다. 표면 면적은 약 5억 천만 평방킬로미터, 그 중 바다가 육지보다 약 2.4배 많다. 육지의 넓이는 약 1억 5천만 평방킬로미터이다. 육지에서 가장 높은 산은 높이 8,848미터인 에베레스트 산이며, 바다에서 가장 깊은 곳은 깊이 약 11,000미터인 마리아나 해구이다.

 

그런데 이 큰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아홉 개의 행성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태양에서 가장 먼 행성인 명왕성은 태양에서 약 60억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그러면 태양계의 직경은 약 120억 킬로미터이며 빛의 속도로 거의 12시간이 걸린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약 1,000억개의 이런 별들이 모여 은하계라는 것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은하계의 직경은 10만 광년이라고 한다. 1광년은 빛이 1년간 날아가는 거리로 약 9조 4,500억 킬로미터이다. 은하계의 직경은 그것의 10만 배라고 하니 상상하기 어렵다.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우주에 이런 유의 은하계가 약 1,000억개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우주의 광대함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누가 지구 표면의 거대한 바다들의 물의 부피를 달아볼 수 있겠는가? 누가 지구의 흙을 되에 담아 달아볼 수 있겠는가? 누가 저 높은 산들과 저 작은 산들의 무게를 저울에 달아볼 수 있겠는가? 누가 저 광대한 하늘의 크기를 재어볼 수 있겠으며, 저 끝없이 펼쳐진 우주의 크기를 재어볼 수 있겠는가? 단지 상상해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지구, 이런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13-14절]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뇨?

 

하나님께서는 홀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 이사야 44:24,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와 우주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얼마나 크신지를 잘 나타낸다. 지혜가 있어서 창조자 하나님을 지도하고 가르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에게 의와 지식을 가르친 자도 없었다.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지식과 능력이 충만하신 하나님이시요 지극히 공의로우신 자이시다. 그러므로 욥기 12:13은,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다”고 말했고, 시편 147:5는, “우리 주는 광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시도다”라고 고백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도덕적인 하나님이시다.

 

[15-17절]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

 

세상에는 악인들이 권세가 있어 보이고 이스라엘 나라를 핍박하고 학대하는 이방 나라들, 곧 앗수르 나라와 바벨론 나라의 세력이 대단해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이방 나라들이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고,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며 이방 나라들의 권세들도 없는 것같이 여기신다. 그는 온 세상을 임의로 다스리신다. 시편 93:1-2는,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도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라고 말한다.

 

다니엘서도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강조하여 말한다. 다니엘 4:17은,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니 곧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느니라”고 말한다. 또 다니엘 4:35는,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라고 말한다.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그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 과정이다. 다니엘 2:44는, 로마 제국 시대에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통해 한 나라를 세우실 것이며 그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을 보인다.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고 또 하나님 나라의 임함과 하나님의 뜻의 이루어짐을 기도하라고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또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씨와 같이 세상에 뿌려진다고 말씀하셨다(마 13장). 그것이 신약교회이다.

 

하나님의 뜻은 죄인들 중에 택한 자들을 다 구원하셔서 자기 백성을 삼으시는 것이다. 그는 그 뜻을 다 이루신다. 주께서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셨고(요 6:40), 또 그의 음성을 듣는 그의 양들이 있고 그가 그들에게 영생을 줄 것이며 그들이 영원히 멸망치 않으며 그들을 그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10:28).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세 전에 택하시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자들, 곧 하나님의 양들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는 것이 구원이며, 구원받은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 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크시고 완전하시다. 이 광활한 세상과 끝없는 우주를 다 파악할 수 없는 사람이 그것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은 지극히 크셔서 피조물인 우리 인생은 다 파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두려운 마음을 가지자.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지극히 크심과 완전하심을 깨닫고 그 앞에 굴복하며 그를 인정하고 그를 높이고 그에게 참된 찬송과 경배를 올리자.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 나라들을 주관하신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많은 나라들이 있지만, 그들은 다 하나님의 피조물들이며 하나님께서 뜻 가운데 세우신 나라들이다. 세상의 모든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고, 실상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 것과 같다. 전지전능하신 크신 하나님께서는 홀로, 주권적으로 온 세상과 모든 나라들을 통치하신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 나라들을 주관하심을 알아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그의 뜻을 이루신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인류 전체 중에서 일부를 구원과 영생에 이르도록 택하셨다. 하나님의 섭리의 목표는 택자들의 구원과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목표를 다 이루실 것이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영원자존하신 하나님께서 이 광대한 우주와 세상을 창조하셨고 홀로 통치하시며 창세 전에 택하신 자들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구원하셔서 교회와 자기 나라를 세우심을 알고 오직 그를 믿고 섬기며 순종하자.

 

 

18-31절, 참 하나님을 섬기라

 

[18-20절]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우상은 장인이 부어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궁핍하여 이런 것을 드리지 못하는 자는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공교한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서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느니라.

 

선지자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생명 없는 우상을 비교한다. 우상은 보통 놋쇠로 부어만들고 금으로 입히고 은사슬로 장식한다. 놋쇠와 금은을 살 여유가 없는 가난한 자들은 나무를 택하여 그것을 공교한 장인으로 조각하게 하여 우상을 만들었다. 현대인도 여전히 조상신을 숭배하여 제사나 차례를 드리며 심지어 부적을 소지하기도 한다. 죽은 선조의 영혼이 자손에게 복과 화를 내리겠는가? 부적 종이조각이 특별한 힘을 발휘하겠는가? 또 현대인은 인간을 숭배하고 자신을 높인다. 그들은 과학을 높이고 의지하고 돈과 몸의 쾌락를 최고 가치로 여긴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람에게 참 평안과 행복을 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이 신이 될 수 있는가?

 

놋쇠, 금은, 돌, 나무 등으로 만들어지는 우상이 생명이 없고 능력이 없으며 그런 것을 섬기는 행위가 헛되다는 것은 너무 자명한 일이다. 또 인간과 돈과 몸의 쾌락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것이 허무하다는 것도 너무 자명한 일이다. 원시적 우상들이나 현대적 우상들이나 그 어떤 우상도, 또 인간이 절대적 가치를 두려 하는 그 어떤 피조물도 헛되고 무익하다는 것은 너무 분명하다. 살아계신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어떻게 감히 그런 것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21-24절]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그는 땅 위 궁창(쿠그)[둥근 천장]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遮日)[휘장]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같이 베푸셨고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그들은 겨우 심기웠고 겨우 뿌리웠고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의 부심을 받고 말라 회리바람에 불려가는 초개 같도다.

 

하나님께서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신 자이시다. 그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초월적 존재이시다. 그는 하늘에 계신 자이시다. 땅의 거민들은 그 앞에 메뚜기 같아 보인다. 그는 하늘을 휘장같이 펴셨고 거할 천막같이 베푸셨다. 그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창조자이시다. 창조자 하나님만 참 하나님이시다. 예레미야 10:11,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 또 하나님께서는 섭리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귀인들을 폐하시고 세상의 재판관들을 헛되게 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25-26절]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다. 그는 피조 세계로부터 초월해 계신다. 그의 존재 자체가 초월적이며 그의 도덕성이 이 죄악된 세상과 구별되신다.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온 세상을 홀로 섭리하시는 주권적 하나님을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만물을 그 수효대로 이끌어 내셨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셨다. 그의 능력이 크고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이 창조되었다. 이 세상의 어느 신, 어느 우상이 이런 능력을 조금이라도 가졌는가?

 

[27절]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이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낙심된 마음 상태를 지적하며 그들을 위로하려 한다. ‘내 사정’과 ‘내 원통한 것’은 그들이 앗수르 나라와 바벨론 나라의 포로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내용을 말한다. 그들은 죄 때문에 당연히 고난을 받지만,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의 구원을 갈망하며 그들을 학대하는 이방 나라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의 공정한 보응을 호소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깊으신 뜻 가운데 자기의 백성을 고난 중에 버려두셨고 그들을 잊으신 것처럼 보였다. 그는 때때로 그러하셨다. 시편 13:1-2에서 다윗은,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라고 말했었다.

 

[28-29절]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그가 자기 백성에게 무엇을 주실 것인지 증거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먼저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알아야 한다. ‘여호와’는 하나님께서 영원자존자(永遠自存者)이심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출애굽기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스라엘 백성은 창조자 하나님께서 피곤치 않으시고 명철과 능력이 무한하신 자이심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고 행할 힘도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무한하신 명철과 능력으로 행하시며 피곤하고 무능한 사람에게 힘을 주신다.

 

[30-31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사람은 피곤하거나 지치지 않는 소년이나 청년이라도 때때로 피곤하고 지친다. 사람은 누구나 넘어질 수 있고 피곤하고 낙망할 수 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엘리야도 실수하거나 낙심할 때가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연약하지만, 창조자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그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고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며 걸어가도 피곤치 않고 달려가고 곤비치 않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상숭배가 헛됨을 알자. 놋쇠나 나무로 만들고 금은을 입힌 우상은 아무 생명이 없다. 제사와 차례도 헛되고 가증한 우상숭배임을 알자. 또 돈 사랑과 사람 자랑과 몸의 쾌락 사랑도 헛된 것이다. 우리는 헛된 우상숭배를 버리자. 사람 자랑, 돈 사랑, 몸의 즐거움 추구를 버리자. 그것들은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지 못하고 참 평안과 행복도 주지 못한다.

 

둘째로, 우리는 참 하나님만 섬기자. 태초부터 계셔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홀로 섭리하시는 하나님만 믿고 섬기자. 그는 명철과 능력이 무한하시며, 피곤치 않으시는 자이시다. 그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자신을 증거하셨다. 그는 자기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겠다고 약속하셨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많은 기적들과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와 저주의 죽음과 3일 만에 자기의 무덤을 비우신 그의 초자연적 부활로 자신을 증거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며 소망하고 섬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앙망하며 새 힘을 얻자. 이스라엘 백성은 고난으로 피곤해졌고 낙심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을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주와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앙망하며 새 힘을 얻고 하나님 안에서 살자.

 

 

 

 

이사야 40장 주석<메튜헨리>

 

예언을 전하라는 명령 (이사야 40:1,2)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위로를 선포하라는 명령과 지시가 이 선지자에게 뿐만 아니라 그와 더불어 모든 여호와의 선지자들에게,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자들에게 내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1. 이것은 그 선지자로 하여금 그의 시대에 살고 언제는 선한 백성들을 격려하도록 지시했을 뿐만 아니라 명령했다. 그 백성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그들의 대담한 불경건한 행위로써 점차 멸망당하게 되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로 그들의 파멸을 재촉하시는 것을 보았을 때, 사태를 매우 암담하게 감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로 하여금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긍휼을 저장해 주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자.

 

2. 그것은 특히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포로시대에 살게 될 선지자들에 대한 지시였다. 그들은 포로들로 하여금 합당하게 석방되리라는 희망을 갖도록 격려해야 했다.

 

3. 보혜사이시며 또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을 돕는 자이신 복된 명령에 의해 고용된 복음의 사역자들은 여기에서 그들의 과업을 상기받고 있다. 이 구절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다.

 

Ⅰ. 일반적인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위로의 말들(1절).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도록 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는다(그분은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 이신 것이다. 계 22:6). 그 훈령은 배가되어 있다. 즉 "너희는 위로하라. 너희는 위로하라." 이것은 그 선지자들이 그것을 행하기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라(그것은 그들의 일 중 가장 즐거운 부분이다) 때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위로자들은 그들이 어떤것에 고착되기 전에 거듭 거듭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사람이 있다.

2. 그의 백성이 최악의 사태에서도 위로받는 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3.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행하는 것이 사역자들의 일이며 과업이다.

4. 우리가 이 책의 전반부에서 보았던 그러한 회개의 말에는 우리가 여기에서 보는 것과 같은 위로의 말이 뒤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상하게 하신자가 우리를 치료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Ⅱ. 특히 예루살렘에 대한 특별한 위로의 말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말하라(우리 성경과 다름;역주. 2절). 그 마음을 조성시키고 예루살렘과 예루살렘에 속해 있으며 그것이 잘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원기를 돋우어라. 그 말을 속삭이지 말고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크게 외쳐 죄인들에게 그 범죄함을 보여 주고 동시에 성도들에게 위로를 보여 주라.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소리를 듣게 하라."

 

1. "예루살렘의 환난의 날은 계산되어지고 끝났다. 그 복역의 때가, 그것이 노력하도록 정해진 때가 끝났느니라. 그 출정이 이제 끝났으니 그것은 그 숙소로 물러가 피로를 풀게 될 것이다." 인생은 전쟁이다(욥 7:1).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더 한층 그러하다. 그러나 투쟁은 언제까지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은 끝날 것이고 그때에 선한 병정들은 안식으로 들어갈 뿐만 아니라 반드시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2. "예루살렘에 환난의 이유가 제거된다. 그리고 그 환난이 사라졌을 때 그 영향도 가실 것이다. 예루살렘에게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다는 것을, 즉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화해하셨으며 예루살렘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자로서 다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말하라." "아들아, 담대하라. 너의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것보다 더 위로가 되는 말은 없다. 죄가 사함을 입었을 때, 그때에 환난은 사랑으로 제거된다.

 

3. 그 환난의 목적은 이루어진다.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예루살렘은 그 우상과 분리시키기에 충분하도록, 그리고 그 이상으로 그 모든 죄의 치료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쟁론하시는 큰 죄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바벨론에 사로잡혀가게 함으로써 우상 숭배로부터 교정하시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은 효과를 가져왔다. 즉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우상 숭배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를 갖게 했고, 그 죄악을 추방하는데 두 배나 강한 약이 되었다. 또는 그것을 거룩한 긍휼을 나타내는 말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셨느니라" (삿 10:16). 그리고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그들을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셨으며" (렘 31:20), 그가 그들을 지나치게 징계하셨다고 말씀하신 지경이었다. 그들이 깊이 회개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보다 형벌을 경하게 하셨다" 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정이 많으신 그는 어느 정도 그들을 지나치게 벌하셨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진실로 회개하는 자들은 사실상 그리스도와 그의 고난 속에서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은"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죽음으로 이루신 속죄는 무한히 귀중한 것이었으므로 죄과에 대해 두 배 이상으로 고귀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던" 것이다.

 


예언의 힘 (이사야 40:3-8)

 

시온에 은총을 내릴 때, 그 정해진 때가 이르를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회개가 믿음으로써 그들에게 마련된 은혜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이 두 가지 일에 임하게 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광야와 같은 상태의 포로들과 함께 있었던 그 선지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선지자들은 그들의 구원의 날이 가까와지는 것을 보고 그들로 하여금 그것에 대비하도록 간곡히 요청했고, 그들의 구원의 길을 방해하고 있는 모든 역경이 끝나게 될 것을 그들에게 단언해 주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긍휼에 대비하도록 만드는 것을 우리가 발견한다면, 긍휼이 우리를 위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은 좋은 징조가 된다(시 10:17).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세례 요한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시는 자였을지라도,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과업은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것" 즉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 즐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여호와의 길이 예비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Ⅰ. 죄에 대한 회개로써. 그것은 세례 요한이 온 유다와 예루살렘에게 전파했던 것이며(마 3:2, 5), 그렇게 함으로써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했다" (눅 1:17).

 

1. 경보가 주어지고 있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위기에 처했을 때 그 경보를 주목하게 하자. 하나님은 긍휼의 길로 오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위해 예비해야 한다(3-5절). 이 말을 그들의 포로 사건에 적용시킨다면, 그것은, 그들의 길에 어떠한 난관이 있든지 간에 그들이 돌아올 때 그 난관도 제거되리라는 약속으로 받아들여줄 수 있다. 광야에서의 이 음성(여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따른다)은 선구자들로 하여금 그 길을 평탄케 하는 일을 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의무에의 부름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에 들어오시게 준비하도록 우리가

요청받고 있는 바로 그 의무이다.

 

(1)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상태를 지녀야 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그를 위해 너희 자신을 예비하고, 그가 들어오시는 것을 방해할 만한 모든 것들을 없애라. 그리스도를 위해 자리를 만들라. 그를 위해 대로를 평탄케 하라." 그가 우리를 위해 목적지를 마련하신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를 위해 그 길을 마련해 놓아야 할 것이다. 구주를 위해 예비하라.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시 24:7, 9). 구원을 위해, 그 큰 구원을 위해, 그리고 그밖의 부수적인 구출을 위해서도 준비하라. 우리는 그것에 합당한 자들이 되도록 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역사하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빛 가운데 서 있거나 우리 자신의 문에 빗장을 지르지 말고, 사막에서도 그를 위하여 대로를 찾아놓도록, 또한 만들도록 하자. 이것이 그가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기다리시는 일이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써 우리 마음을 고르게 해야 한다. 자기의 실의와 낙담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위함을 얻지 못하는 자들은 돋우어져야 하는 골짜기이다. 또한 자기 자신의 공로와 가치를 자랑스럽게 여김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위함을 얻지 못하는 자들은 낮아져야 하는 산과 언덕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도에 대해 편견을 지니고 있는 자들, 분명하고 알기 쉬운 것까지도 그것이 그들의 부패한 기질과 세속적인 권익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방해하고 반박하며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평탄케 되어야 할 고르지 않은 곳이며, 평지가 되어야 할 험한 곳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로 듣기만 한다면 그것은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길을 예비한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은 은혜로써 긍휼의 모든 그릇 속에 그 자신의 길을 예비하실 것이다. 그는 루디아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긍휼의 마음을 열어 놓으시기 때문이다.

 

2. 죄에 대한 회개가 이루어질 때,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리라(5절).

(1) 포로된 자들을 건지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을 때, 고레스가 그것을 선포할 것이다. 포로된 자들은 그 혜택을 입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용기와 결심을 불어 넣으시어 그 길에 놓여있는 낙심을 부수어 버리도록 해 주신, 그리고 작은 산과 골짜기와 모든 험한 곳을 없애도록 해 주신 그 사람들만이 그 혜택을 얻게 될 것이다.

 

2) 세례 요한이 회개와 금욕과 개혁을 얼마 동안 가르치므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주를 위하여 예비하도록 했을 때(눅

1:17), 그때에 메시야께서 친히 그의 영광 속에서 나타나실 것이다. 요한은 행하지 못한 이적을 역사하시며, 그리고 요한이 유죄판결을 내려 상하게 했던 자들을 안위로써 싸매시고 치료하시는 이적을 행하시며 영광 속에 나타나실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 영광에 대한 이 계시는 "이방인에게 비치는 빛" 이 될 것이다.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즉 그들이 그것을 보고 경탄할 것이며 그것을 환영할 것이다.

사로잡혔던 자들이 돌아왔을 때 이웃 민족들이 그것을 주시했던 것이다(시 126:2).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일이 될 것이며 호리도, 또는 그것 중 극히 작은 것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의 입이 말씀" 하셨으므로 여호와의 손이 그것을 이루실 것이다.

 

Ⅱ. 어떤 피조물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의지함으로써.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으며," 그 음성은 더 나아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8절)고 외친다(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 구원에 대한 예언과 약속이 이루어지고 합당한 때에 그것이 최대한으로 실행됨으로써, 여호와의 말씀이 확실하다는 것과 그것을 안심하고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할 때, 그것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과 함께 거기에 우리 소망을 둘 때, "그때에" 우리는 건지워지도록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의지하는 가운데 "모든 육체는" 시들어 버리는 "풀" 임을 인정해야 한다.

 

(1) 사람의 능력이 그 구원을 대적하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 앞에서는 풀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들어 버리고 밟히울 것이다. 능욕하는 바벨론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영구할 것을 기대 약속하나 여호와의 성령이 그 모든 영광을 잃게 하고 시들게 하는 풀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구원을 약속한 여호와의 말씀은 영영히 설 것이며, 그들의 대적의 힘으로는 그것이 수행되는 것을 방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사람의 능력이 그 구원을 돕는 것으로 나타날 때에도 그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에 비하면 풀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우리의 소망을 둘 수 있는 유일하며 견고한 토대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의 구원을 역사하시고자 할 때, 그들에게서 피조물에 대한 신뢰를 제거하실 것이며, 언덕과 산으로부터 그것을 기대하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피조물에 실망할 것이며 그것에 대한 기대는 좌절될 것이다.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붐이라."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소망과 의지에 대해 그와 겨룰 만한 피조물들을 두

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설 것은 그의 말씀 뿐이며 동시에 우리는 그의 말씀 안에서만 서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될 때, 그때에야 비로소 긍휼을 받기에 합당하게 되는 것이다.

 

2. 지금 계시될 여호와의 영광인 우리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과, 그것과 더불어 우리에게 임하며 그것에 의해 우리 안에서 역사되는 그 은혜는 영영히 설 것이다. 그리고 믿는 모든 자들은 피조물이 주는 모든 즐거움이 풀처럼 시들어 버린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흡족함을 느낄 것이다. 이처럼 그 사도는 그것을 "우리에게 전한 복음이며," "우리를 거듭나게 한 썩지 아니할 씨처럼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 에 적용시키고 있다(벧전 1:23-25).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깨달아야 한다.

 

(1) 피조물의 허탄함, 모든 육체는 연약하며 시들어 버리는 풀이다. 우리 자신도 그러하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다. 또한 우리의 모든 친구들도 그러하므로 그들은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피조물의 모든 아름다움은 고와 보일 수도 있으나 풀꽃에 불과하며, 곧 바람에 흩어져 버리므로 우리를 하나님께 위탁할 수 없고 또 그로 하여금 우리를 받아들이시도록 할 수도 없다. 우리는 죽어가는 피조물이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는 모든 열락은 죽어가는 것이므로 그것이 불멸의 영혼의 지복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구원과 분깃을 위해서는 더 앞을

 

(2)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성.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육체가 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해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이 영영히 서 있으므로 우리 영혼의 존속과 방해될 행복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 않으나 믿어야 할 것들은 영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속이 주는 행복 이사야(이사야 40:9-11)

 

Ⅰ. 어떻게 그것이 나타날 것인가?(9절)

 

1. 그것은 시몬과 예루살렘에 나타날 것이다. 시몬과 예루살렘에 남겨진 남은 자들에게, 포도원지기와 농부들이었던 그땅의 초라한 자들에게 그것이 주어질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형제가 그들에게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듣게 될 것이다. 이 소식은 또한 시몬과 예루살렘에 속한, 그리고 그것에 대해 애정을 품고 있는 자들에게 들려질 것이다. 시온이 "바벨론 딸과 함께 거한다" 고 적혀있다(슥 2:7 난외주). 그리고 거기에서 시온은 고레스의 너그러운 선포의 통지를 받을 것이다. "시온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여" 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그 선언을 널리 알리는 일을 맡고 있던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들로 하여금 선한 의지를 갖고 그 일을 행하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그 나라에 소식을 알리게 하고 자기네들의 방언으로 시온의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2. 그것은 시온과 유다에 의해 공표될 것이다(원문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 거기에 남아있거나 이미 귀국한 자들의 완전한 구원이 시작된 것을 발견했을 때, 그들로 하여금 가장 공적인 장소에서 그것을 선포하게 하여 온 유다 성읍이 가장 잘 들을 수 있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최대로 크게 그것을 선포하게 하라. 즉 그들로 하여금 "힘써 소리를 높이게" 하고 지나칠 것을 우려하지 않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그 대적이 그것을 듣고 그들과 다투지나 않을까 하여, 그것이 사실과 위배된 것으로 나타나지나 않을까 하여, 또는 처음에 선포된 것과 같은 아름다운 소식이 아니지 아닐까 하여 염려하지 않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유다 성읍들에게, 그리고 그 나라 온 거민에게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려 할 때, 그들로 하여금 그 친구들에게 그 소식을 부지런히 전하게 하고 그것을 행하신 자가 하나님이심을 그들에게 말하게 하라. 누가 그 도구로 쓰이든지, 하나님이 그 장본인이시다.

 

그것은 "그들의" 하나님, 그들과 언약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는 그들의 하나님으로서 그것을 행하신다. 그리고 그들은 그 혜택과 위안을 획득할 것이다. "그를 보라. 그 속에 있는 그의 손을 주시하라. 그리고 자연적 원인 이상의 것을 보라. 너희가 오랫 동안 기다렸던 하나님께서 마침내 오셨다.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도다" (25:9). 이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다 성읍들에게 전해진 초청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은 포로에서 돌아온 즉시 제단을 세우고는 유다 성읍들에게 제물을 갖고 와서 참가하도록 초청했던 것이다(스 3:2-4). "하나님께 대한 경배가 다시 시작될 때 그것을 너희 모든 형제들에게 통고하여 그들이 너희와 함께 그 즐거움을 나누게 하라." 그러나 이것은 사도들이 예루살렘 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공적으로, 그리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한 일에서 완전히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는 그가 오고 있음을 통지했으며, 그러나 이제는 그가 이내 오셨음을 알리고 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너희 구속주를 잘 바라보라. 너희 왕을 보며, 너희 하나님을 보라.

 

 

Ⅱ. 나타날 영광은 무엇인가? "너희 하나님께서 오시어, 그 자신을 보이실 것이다."

 

1. "그는 왕의 권세와 위대함을 갖고 오실 것이다(10절). 그가 장차 강한 자로, 비록 대적하는 무리가 있을지라도 매우 강하며 방해받지 않는 자로 임하실 것이니라. 그의 강한 손은 그의 백성들을 그에게 복종케 할 것이며, 그와 그들의 원수들을 속박하고 정복하실 것이다. 자기 길에 놓여있는 모든 어려움을 충분히 깨뜨릴 정도로 강한 자가 오실 것이다." 우리 주 예수는 능력이 충만하셨고 강한 구세주이셨다. 흑자는 그것을 이렇게 읽고 있다. "그가 와서 강한 자를 치실 것" 이며 강한 자를 압도하고 이기실 것이다. 사단은 무장을 한 강한 자요, 우리 주 예수는 그보다 더 강하시며,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자신의 강하심을 나타내실 것이다.

 

(1) 그는 모든 저항에 도전하여 통치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며 지배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 자신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2) 그는 의로우신 재판장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실 것이다. "상급이 그에게 있느니라." 그는 돌아오시는 왕으로서, 반역자들에 대한 벌과 그의 충성스런 신하들을 위한 상급을 가지고 오신다.

 

(3) 그는 그의 목적을 시작하시고 이루실 것이다. "복음이 그 앞에 있느니라." 즉 그는 그가 행하셔야 할 것을, 어떤 길로 가야 할 것인가를,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달성해야 할지를 완전히 잘 알고 계신다. "그는 그가 행하실 것을 친히 아신다."

 

2. "목자의 자애로움과 온유함을 갖고 오실 것이다" (11절). 하나님 "이스라엘의 목자" 이시다(시 80:1). 또한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이시다(요 10:11). 왕의 강한 손으로 다스리시는 바로 그 자가 목자의 친절한 손으로 인도하시고 먹이신다.

 

(1) 그는 그의 모든 양떼를, 그 작은 양떼를 돌보신다.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리로다." 그의 말씀은 그의 양떼가 먹는 음식이며 그의 의식은 그들을 키우는 들이다. 또한 그의 사역자들은 그의 시중을 들도록 임명된 부목자이다.

 

(2) 그는 가장 그의 돌보심을 필요로 하고 있는 자들을, 연약하여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으며 역경에 익숙치 못한 어린 양들을, 그리고 "젖먹이는 암컷들을," 즉 몸이 무거워 어떤 해를 당한다면 그 어린 것들을 팽게쳐 버릴 위험이 있는 암컷들을 특별히 돌보신다. 그는 특별히 자손을 돌보시어서 대가 끊어지거나 잘리우지 않게 하신다.

선한 목자는 온순하고 유망한 자손들에 대해, 천국의 질로 떠나는 어린 개심자에 대해, 연약한 신자들에 대해, 그리고 슬픈 심령을 가진 자들에 대해 자상한 배려를 기울이신다. 이들은 그의 어린 양떼로서 그들의 형편이 요구하는 것이 그 어느 것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1] 그는 그의 능력의 팔에 그들을 모으실 것이다. 그의 힘은 "그들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질 것이다(고후 12:9). 그는 그들이 방황할 때 그들을 모으실 것이고, 그들이 쓰러질 때 일으키실 것이며, 마침내 그들을 집으로 모아 들이실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의 팔에 있는 이 모든 자들을 아무도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다(요 10:28).

 

[2] 그는 그들을 그의 사랑의 품에 안으시어 소중히 품어 주실 것이다. 그들이 지치거나 피곤할 때, 병들어 허약할 때, 그들이 더러운 길에 이르렀을 때, 그가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며 그들이 뒤에 처지지 않도록 돌보실 것이다.

[3] 그가 그들을 온순히 인도하실 것이다. 그의 말씀으로써 그는 그들에게 합당한 것 이상으로, 봉사를 요구하지 않으시며, 합당한 것 이상의 괴로움을 가하지도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의 심경을 고려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 (이사야 40:12-17)

 

이 구절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구세주 이신 주 여호와께서 얼마나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 존재인가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바벨론에 사로 잡혀간 그의 백성들이 그를 바라도록, 그리고 비록 그들이 매우 약하고 그 압제자들이 매우 강할지라도 그가 그들을 구원하리라는 것을 의지하도록 격려 하고 있다.

 

2. 그들이 그만을 붙들도록, 그리고 곁길로 나가 다른 신들을 쫓지 않도록 만들고 있다. 왜냐하면 그와 필적할 만한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3.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의 기쁜 소식을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두려움과 경외감을 갖고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너희 하나님을 보라" (9절). 그러면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리라" (11절)고 적혀 있을지라도 이러한 그의 은혜로운 겸양이 그의 영광의 초월성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보고 그의 앞에서 두려워하도록 하자.

 

Ⅰ. 그의 능력은 무한하다. 그리고 그 어느 피조물도 그와 필적할 수 없으며 더욱이 다툴 수는 없는 것이다(12절).

 

1. 그는 거대한 영역을 소유하고 계신다. 천재를 보라. 그러면 너는 그 크기에 놀랄 것이다. 그러나 광대하신 하나님은 "뼘으로 하늘을 재신다." 그에게는 그것이 한 뼘에 불과하고 그 정도로 그의 손은 크시다. 지구를 보라. 그는 그것도 통솔하신다. 세상에 그 물을 조금밖에는 담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는 메마른 땅을 조종하신다. 즉 "그는 땅의 티끌을 되에," 또는 그의 세 손가락에 "담아 보신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엄지와 두 손가락으로 집어 올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2. 그는 거대한 힘을 갖고 계시며 상인이 상품들을 저울에 달아보고 다시 내려놓는 것처럼 쉽게 산들과 작은 산들을 이동시킬 수 있다. 또 마치 저울에 다는 것처럼 정확하게 그의 손으로 그것을 달아 보실 수 있다. 이것은 창조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에 하늘은 뼘으로 재어진 것처럼 정확히 펼쳐졌고 땅과 바다는 마치 측정된 것처럼 공정한 비율로 배열되었으며 산은 지구를 안정되게 해 줄 수 있는 무게로, 더 이상도 아닌 꼭 그 정도의 무게로 만들어졌다. 또는, 그것은 섭리의 역사(그것은 계속되는 창조이다)와 온 창조물이 서로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가리

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Ⅱ. 하나님의 지혜는 헤아릴 수 없으며 어떤 피조물도 그에게 정보나 지시를 줄 수 없는 것이다(13,14절).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이전에 행하셨고 지금 행하시는 것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누구도 그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그를 돕거나 그가 생각하시지 못한 어떤 것을 그에게 시사할 수는 없다. 여호와께서 그 신(성령)으로 세상을 만드셨을 때(욥 26:13) 그의 성령에게 무엇을 행하라고 하거나 그것을 어떻게 행하는가에 대해 지시하거나 충고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가장 지혜로운 왕이 "구례와 법률을 아는 자" 들에게 묻는 것처럼(에 1:13) 세상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그에게 지시해 줄 어떤 모사가 필요하거나 그가 의논할 상대가 필요하지도 않다. 하나님은 해야할 일을 지시받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올바른 목적과 적합한 방법을 모두 아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이 여기에서 그게 강조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 불쌍한 포로들이 궁중에서 그들의 사건을 처리하거나 그들에게 자유를 얻을 방법을 알려줄 만한 정치가가 그들 중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너희를 위해 행하실 하나님을 갖고 있으니 염려할 것이 없다. 그는 정치가들의 도움이 필요없는 자이시다." 그리스도에 의한 그 위대한 우리의 구속사업 속에서 모든 것들이 "만세 전에" 협약되었고(고전 2:7), 그때에 "하나님께 공평의 도를 가르친" 자는 아무도 없었다.

 

Ⅲ. 세상의 열방들은 우리의 하나님에 비하면 무의미한 것이다(15,17절).

 

그것들을 모두 모아 보라. 땅의 크고도 강대한 모든 나라들과 가장 화려한 왕과 가장 인구 많은 나라들, 그리고 가장 부유한 나라들을 모두 함께 모아 보라. 섬들, 무수한 섬들, 이방인의 섬들을 모아 보라. 그것들은 그와 비교되거나 그와 대적될 때, "그에게는" 광대한 대양과 필적되는 "통의 한 방울 물 같거나" 땅의 모든 티끌과 필적되는 저울의 적은 티끌 같다" (그것은 저울 눈금을 움직이지 못할 만큼 매우 적으므로 중히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그는 그것들을 "떠오르는" 말할 가치도 없는 "먼지같이" 집어 올리시어 던져버리신다. 그것들은 모두 그가 보시기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은 것과도 같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며" 우리도 그것을 그와 비교하여 그처럼 여겨야 한다.

그는 원하신다면, 그가 처음에 그들을 무(無)에서 만들어 내신 것처럼 쉽게 그것들을 무(無)로 만드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실 일이 있을 때, 어떤 피조물의 도움이나 저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신다. 그들은 모두 "빈 것" 이다. "빈 것" 이라는 말은 혼돈이라는 단어로 사용되어 있는데(창 1:2), 그들은 결국 혼돈케 될 것이다. 이것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높은 생각을 품고 이 세상에 대해 낮은 생각을 품도록 하고,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우리의 두려움과 소망을 두도록 하자. 이것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돋보이게 하는 일이다. 즉 세상이 그에게는 이처럼 보잘 것 없고 가치가 적은 것일지라도, 그것의 구속을 위해 그는 "독생자를 주셨느니라" (요 3:16).

 

Ⅳ. 교회의 농사는 하나님에게 어느 것도 더 할 수 없고 그의 무한하신 완전함에 조화를 이룰 수도 없다. "레바논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느니라" (16절). 레바논에 백향목이 매우 많이 저장되어 있을지라도 제단의 연료가 될 나무가 부족하며, 거기에 가축이 매우 많이 저장되어 있을지라도 제물이 될 짐승이 부족할 것이다(16절). 우리가 어느 것으로 하나님을 영예롭게 할지라도 그것은 그의 완전하신 공로에 영원히 못미친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축복과 찬양," 모든 번제와 제물 "위에 초월하시기" 때문이다.


우상의 무상함 (이사야 40:18-26)

 

선지자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자들을 책망하고 있다.

1. 피조물로써 하나님을 나타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진리를 거짓으로 변하고 그의 영광을 치욕으로 변하게 된 자들. 그들은 우상들을 만들고 나서 그것들이 하나님을 닮았다고 말하고 거기에 경의를 표하는 자들이다.

 

2.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는 자들. 그들은 마치 그것이 하나님과 상대가 되는 것처럼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욱 사랑하는 자들. 여기에서 두 번씩 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느냐" (18절과 25절). 거룩한 자께서 친히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느냐?" 고 말씀하고 계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에 대한 어리석음과 수치를 보여 주고 있다.

 

(1) 신성을 불어넣은 상과 상에 의해 표현되는 신성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는 신상으로 만드는 우상 숭배. 인성의 타락에 대한 일례인 이것은 동시에 거룩한 성품의 영예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손상이 된다.

 

(2) 우리 마음으로 피조물들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드는 영적인 우상 숭배. 교만한 백성들은 그들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되게 여긴다. 탐욕적인 백성들은 그들의 돈을 하나님과 동등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욱 귀히 여기거나 사랑하여 두려워하거나 바라는 것, 우리가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는 피조물들은 "만유의 하나님" 이신 자에게 가장 큰 모욕인 것이다. 이제 이러한 어리석음을 보여 주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Ⅰ. 선지자는 우상을 보잘 것없는 것으로서, 그리고 가장 경멸할만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19,20절). 부유한 백성들이 세우고 경배하는 가장 낫다는 우상의 종류들을 보라. 그것들은 천한 금속으로 만들어지며 주조자가 원하는 모양으로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금상으로 여겨지도록 도금하거나 금으로 입혀진다. 그것은 장인이 만든 피조물이다. 따라서 그것은 참 신이 아니다(호 8:6). 그것이 신이 될 것인지 그리고 어떤 모양이 될는지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뜻에 달렸다. 또한 그것은 사기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밖은 금이지만 안은 납이나 동이었으며, 이것으로써 그것들은 신성을 나타내고 위장된 것을 보여 주며 그 경배자들을 속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상들의 가장 나쁜 종류는, 즉 가난한 사람들의 신상은 얼마나 보잘 것 없겠는가! 궁핍하여 자기 신에게 거의 제물을 드리지 못하는 자도 그 신을 만들었을 때 거기에 신성을 부여할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가 놋쇠나 돌로 된 신상을 마련할 수 없을지라도, 그는 없이 지내기 보다는 오히려 나무로 된 것이라도 가지려 할 것이며 그 목적을 위해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거기에 신상을 새길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그들의 신상을 한 곳에 고착시키기에 적당하여 그것을 도둑맞지 않게 한다. 보다 나은 종류의 신상에는 은사슬이 붙여져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나무로 된 신상에 불과할지라도, 흔들리지 않도록 배려가 기울여진다." 여기서 잠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 보기로 하자.

 

1. 이 우상 숭배자들은 그들 자신이 만든 신(Nehushtans, 즉 놋쇠 조각이나 나무조각)이 그들에게 친절을 행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몽상할 때, 얼마나 수치를 당할 것이며 그 까닭으로 얼마나 비방을 받을까? 이처럼 그들의 상상은 헛되었다.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은 얼마나 어두워졌는가!

 

2. 이 우상 숭배자들은 홀로 살아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숭배하신 우리를 얼마나 부끄럽게 하는가. 그들은 그들의 우상에게 어떤 내용도 아끼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사용되는 것을 낭비하는 것처럼 인색하게 여긴다. 그들은 그들의 우상이 흔들리지 않도록 돌본다. 그러나 우리는 고의적으로 우리 하나님을 격동시켜 우리를 떠나시게 하고 있는 것이다.

 

Ⅱ. 선지자는 하나님을 무한히 크신 자라고, 그리고 가장 숭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자라고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과 우상들 사이에도 그러하다. 그 사이에 경쟁은 있을 수 있으나 서로 비교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다음 사실에 호소하고 있다.

 

1. 그들이 "주께 대하여 귀로 들은" 것과 그에 관한 모든 시대와 민족들의 동의(21절). "너희가 바로 그 자연의 빛으로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 열조와 선생들이 그들의 조상들과 선조들로부터, 곧 태초부터 받은 끊임없는 유전대로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계시는 창세 만큼이나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다)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은 광대하신 하나님이며 모든 신들 위에 있는 큰 왕이시라는 사실이 항상 인정되어 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느냐?" 모든 존재의 근위인 무한하신 존재가 계시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진리인 것이다. 세상이 시작된 이후 줄곧, 뿐만 아니라 우주의 기원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의 의해 이 진리가 터득되고 있다. 그것은 땅의 기초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은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롬 1:20). 네 아비에게 그리고 네 어른들에게 묻는다면 그들이 네게 이것을 설명할 것이다(신 32:7). 뿐만 아니라 "길가는 사람들에게 물으라" (욥 21:29). 네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 물으라. 그도 똑같은 말을 할 것이다. 흑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읽고 있다. "너희가 알지 않겠느냐? 너희가 들지 않겠느냐?" 이것을 모르는 자는 고의로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빛이 그들의 얼굴에 비치나 그들은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께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1) 그는 모든 피조물들을 통솔하신다. 천지는 그의 조종 아래 있다. "그는 땅 위," 지구의 "궁창에 앉으신다" (22절). 윗 세상에서 특별한 그의 영광을 지니신 그가 이 아래 세상에 대한 주권을 보존하시며, 거기에 율법을 주시고 그의 영광이 되도록 그 모든 활동을 지시하신다. 그는 땅에 견고히 앉아 계시며 그처럼 견고하게 그것을 세우신다. 또한 그는 계속 하늘을 펴고 계시며 그의 권능과 섭리가 그것이 항상 펼쳐져 있도록 한다. 그리고 그것이 두루마리처럼 말릴 날이 올 때까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는 우리가 아침에 커튼을 걷고 밤에 그것을 다시 드리우는 것같이 쉽게 그것을 펴신다. 그리고 이러한 하늘은 이 땅에 대해 "거할 천막 같다." 그것은 우리 머리 위에 드리워진 덮개이며, et quod tegit omnia Celun--즉 모든 것을 에워싼다(오비디우스, 시 104:2 참조).

 

(2) 사람의 자손들, 그 중 가장 큰 자와 가장 강한 자들까지도 그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 땅의 무수한 거민들은 그의 눈에는 우리 눈의 메뚜기와 같다. 즉 매우 보잘 것없고 사소하며, 매우 가치가 적고 거의 소용이 없는, 그리하여 쉽사리 짓밟히는 메뚜기 같다. 교만한 자가 으쓱하는 것은 메뚜기의 뜀에 불과한 것이다. 즉 그들은 바로 다시 땅으로 뛰어 내려야 한다. 염탐꾼들이 아낙의 자손들 앞에서 스스로를 메뚜기로 생각했다면(민 13:33) 우리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되겠는가? 메뚜기들은 개미와는 달리 잠시밖에 살지 못하며 게으른 생활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러한 것이다.

 

(3)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행하는 자들은, 그들이 그 동료 피조물들에게 아무리 무서울지라도 하나님의 강한 손에 의해 반드시 낮추어지고 꺾여질 것이다(23,24절). 큰 권세를 갖고 있으며 그것을 압제와 불의의 일에 남용하는 방백들과 재판장들은 그 주위에 있는 자들을 어렵지 않게 해치운다.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느니라" (시 10:5; 12:5). 그러나 그 크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실 때는 그들을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만드신다. 그는 그들을 낮추시며 길들이신다. 그리고 그들을 헛된 존재로, 거의 존중되지 않는 자로, 두려움이나 사랑의 대상이 못되도록 만드신다. 그는 그들이 그의 심판 앞에서 완전히 설 수 없게 만드신다.

 

[1] 이 심판은 그들의 권력이 자리잡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들은 심기우지 못하며 뿌리우지 못할 것이다" (우리 성경과 다름; 역주). 씨를 뿌리거나 접붙이는 것은 식물을 증식시키는 두 가지 방법이다. 아니, 그들이 아주 적은 이득을 얻기 위해 겨우 심기웠고 겨우 뿌리웠을지라도, "그 줄기가 땅에 뿌리를 박지 못할 것이며" 그 힘이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엘리바스는 우매한 자들이 뿌리를 내리나 "곧 그 거주지를 저주받는 것" 을 보았다. 그렇다면 무화과나무는 얼마나 쉽게 시들겠는가!

 

[2] 또는 그들이 정착했다고 생각할 때, 그는 그들을 시들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곧 "말라" 버려 아무 쓸모가 없게 되는, "회오리바람에 불려가는 초개 같도다." 하나님의 진노는 비록 처음에는 그들에게 가볍게 불어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곧 강한 회오리바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 이기실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굽히려 하지 않는 자들은 그의 앞에서 서지 못할 것이다.

 

2. 그는 "그에 대해 본 그들의 눈" 에 호소하고 있다(26절). "너희 눈을 높이 들라. 이 땅에 항상 골돌하지 말라(O curve in terras anime et celestium inanes!---- 즉 부패한 마음은 그렇게 땅으로 구부려 질 수 있으나 그 속에는 거룩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때때로 위를 보라" (Os homini sublime dedit, ceumque tueri jussit----즉 하늘은 사람에게 직립한 얼굴을 주셨고, 그에게 별들을 응시할 것을 명하셨다). "하늘의 영광스러운 빛들을 보고 누가 그것들을 창조했는가 생각하라. 그들은 스스로 만들거나 정렬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의심할 것도 없이 그들에게 그들의 존재와 능력과 동작을 주신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우리가 창조물에서 본 것이 우리를 창조주에게로 인도해야 한다. 우상 숭배자들은 눈을 높이 들어 하늘의 무리들을 보았을 때 눈에 보이는 것에만 전적으로 몰두하여 더 멀리는 바라보지 못하였고, 우상들을 숭배했다(신 4:19; 욥 31:26).

 

따라서 선지자는 여기에서 우리의 감각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성도 사용하도록, 그리고 그것들을 창조하신 자을 생각하고 그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우리에게 지사하고 있다. 그것들에 대한 그의 주권의 영광을 그에게 돌리라. 그는 대장이 그의 기병대대와 보병대대를 이끌어내는 것처럼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내시고," 그것들에 대해 알고 계신다. 또한 그는 "각각 그 이름을," 각각의 위치와 임무에 적합한 이름을 "부르신다" (시 147:4). 그가 그들을 부르시며 어떤 봉사를 하게 하실 때, 그들은 매우 순종하므로 "그의 큰 권세" 에 의해 "하나도 빠짐이 없고, "마치 "별들이 그 운행에서 시스라를 대적하여 싸웠던" 것처럼 모두들 그가 명하신 것을 행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이미 종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이 피조물들을 하나님과의 경쟁자로 만드는 것은 그를 모욕하는 것인 동시에 그것들을 해치는 것이 된다.

 


여호와의 위대함과 긍휼 (이사야 40:27-31)

 

Ⅰ.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책망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의혹으로 인해 바벨론에 사로 잡힌것으로 여겨지며, 그리고 그 환난 아래서 그들의 심령이 낙심하고 절망한 것으로 보인다(27절)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네 자신에게, 그리고 네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다 하느냐? 어찌하여 네가 네 자신과 네 현재의 상황에 관하여 마치 절망적인 것처럼 가혹하고 우울한 결론을 내리느냐?"

 

1. 그가 여기에서 그들에게 붙이고 있는 명칭은 그들의 불신을 수치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그들로 하여금 어디에서 그들이 이 이름을 얻었는지를 기억하게 하라. 즉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신실하시다는 것과 모든 역경 속에서 친절을 베푸신다는 것을 발견한 자로부터 얻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라. 그리고 그들이 왜 그런 이름을 얻었는지를 기억케 하라. 그들은 하나님을 고백하는 백성, 그와 언약한 백성으로서 그 이름을 받았던 것이다.

 

2. 그들을 책망하는 방법은 그들과 이치를 따지는 것이다. "왜 그런 말을 하느냐? 네가 그렇게 말할 근거를 갖고 있는가 생각해 보라." 우리의 많은 어리석은 불평과 어리석은 두려움은 그 이유를 엄격히 조사해 보면 사라져버릴 것이다.

 

3. 그들이 책망받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마치 그가 그들을 저버리신 것처럼, 불쾌하고 꺼림칙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네가 어찌하여 이르느냐?" 마음에 악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나쁘다. 그러나 그것을 imprimatur----즉 인가하고 악한 말로 바꾸는 것은 더욱 나쁘다. 다윗은 그가 환난 중에 있었을 때 성급하게 한 말을 회개로써 반성하고 있다.

 

4. 그들이 한 나쁜 말은 그들의 현재의 불행한 상태에 관한 절망의 말이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단정지으려 했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을 관여하지 않으실 것이다. "내 사정이 여호와께 숨겨졌도다." 그는 우리의 곤경을 주목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관심사에 더 이상 관여치 않으신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도 어찌할 수 없도록 우리의 형편이 매우 어려운 것이다. "자기의 길이 숨겨진" 자는 "하나님에게 둘러싸인" 자이다(욥 3:23).

 

(2) 하나님은 그들을 도우실 수 없었다.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숨겨졌다. 나의 송사는 도움을 얻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도와 주기 힘든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도 그 슬픔을 바로 잡으실 수 없다. "우리의 뼈들이 말랐다" (겔 37:11).

 

Ⅱ. 그는 만일 그들이 잘 생각했다면 그들의 모든 두려움과 불신을 충분히 가라 앉힐 수 있었다는 것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이전에 우상 숭배자들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그렇게 했던 것처럼 (21절) 그들이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그는 그들이 알았던 것과 들었던 것에 호소하고 있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알고 있는 백성들이거나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백성들이었으며, 그들의 지식은 들어서 얻어진 것이었다. 왜냐하면 지혜자가 그들의 큰 광장에서 외쳤던 것이다. 이제 다른 여러 가지 중, 그들은 "하나님께서 한 두 번 하신 말씀을 들었다." 또한 그들은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신 말씀을 여러 번 들었다(시 62:11).

 

1.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그가 전능하시다는 것은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영원부터 계셨고, 또 영원까지 계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부족함이나 쇠퇴함이 없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므로 그의 모든 완전하심은 무한하다. 그에게는 날의 시작이나 생의 끝이 없으므로 변화도 없다. 그모든 또한 "땅 끝까지," 즉 온 땅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자" 이시다. 따라서 그는 모든 것의 정당한 주인이고 지배자이시며, 모든 것에 대해 절대적인 능력을 갖고 계시고 그의 백성들이 가장 큰 곤경에 빠져 있을 때에도 그들을 충분히 도우실 수 있다는 결론이 내려져야 한다. 의심할바 없이, 그는 처음에 세상을 만드실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언제나 그의 교회를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이다.

 

(1) 그는 그 구원을 설계할 만한 지혜를 갖고 계시며 그 지혜는 결코 모자람이 없다. "그의 명철이 한이 없으시다." 따라서 그 누구도 그 계획에 맞서고 그 의도를 좌절시킬 수 없으며, 뿐만 아니라 그가 행하실 것을 결정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혼자만의 길들을, 바다 속에 길들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지혜는 이 정도이며 그 이상일 수는 없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도 그는 아시는 것이다.

 

(2) 그는 그 구원을 이루실 능력을 갖고 계시며 그 능력은 결코 고갈됨이 없다. "그는 피곤치 아니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다." 그는 만물을 지탱하시며 모든 창조물을 다스리시나, 피곤하거나 고되심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그가 그의 교회가 위기에 처할 때, 언제나 그것을 건지실 능력을 갖고 계시며 그 능력은 연약해지거나 피곤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2. 그는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며,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돕도록 하심으로써 그들을 도우신다. 강한 하나님이신 그는 곧 이스라엘의 힘이시다.

 

(1) 그는 약한 자를 도우실 수 있다(29절). 여러 차례 "그는 피곤한 자," 금방 쓰러질듯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이 필요할 경우가 생길 때마다 "힘을 더하신다. "육신적으로 연약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놀랍게 회복되고 강하게 된다. 그리고 심령이 연약한, 소심하고 낙심을 잘하여 봉사와 고난을 감당하기에 부적당한 많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속 사람이 강한 힘으로" 강하게 된다. 자기의 연약함을 느끼고 자신이 힘이 없다는 것을 쾌히 인정하는 자들에게 대해 하나님을 특별히 힘을 더하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안에서 "약할때, 우리는 주 안에서 강하기" 때문이다.

 

(2) 그는 자원하는 자들을 도우실 것이다. 겸손히 그를 의지하면서 스스로를 돕는 자들을 도우실 것이며,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 자들에게 좋게 행하실 것이다(30,31절). 자기 자신의 충족함을 의지하고 그것을 신뢰하기 때문에 최대의 노력을 발휘하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도 않는 자들은 "소년들" 과 "장정" 들이다. 이들은 강하긴 하지만 그들 자신을 실재보다 더 강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도 "피곤하며 곤비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봉사 속에서, 그들의 갈등과 무거운 짐 아래에서 '넘어지며 자빠질" 것이다. 그들은 곧 그들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그에 대한 자기의 의무를 자각하고 믿음으로 그를 의지하며 그의 인도하심에 스스로를 맡기는 자는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 그들은 충족한 은혜를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일이 소생되었을 때, 새로운 기회가 생겼을 때, "새 힘을 얻으리라." 그들은 신선한 기름 부음을 받을 것이며 그들의 등에도 기름이 채워질 것이다. 하나님은 "아침마다" 그들의 "팔" 이 되실 것이다(33:2). 그들이 좌절하거나 연약해졌다면 어느 때에라도 그들은 스스로를 되찾을 것이고 따라서 그 힘을 새롭게 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일이, 노고와 고생이 바꾸어지는 것처럼 "그 힘을 바꿀 것이다" (원문의 뜻). 그들은 일할 힘을, 싸울 힘을, 대항하고 견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날이 바뀌는 것처럼 그 힘이 새롭게 될 것이다.

 

[2] 그들은 가장 훌륭한 목적에 이 은혜를 사용할 것이다. 힘을 얻었을 때, 첫째, 그들은 위로, 하나님께로 향하여 치솟을 것이다. "그들은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같이" 매우 강하게, 매우 날쌔게, 매우 높이 하늘을 향하여 오를 것이다. 거룩한 은혜의 힘 속에서 그들의 영혼은 이 세상 위로 오를 것이며 더구나 가장 거룩한 곳으로 들어갈 것이다. 경건하고 믿음이 깊은 감정은 독수리의 날개이며, 은혜로운 영혼은 그것을 타고 올라갈 것이다(시 25:1). 둘째, 그들은 하늘을 향해 돌진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의 길로 행할 것이다. 즐겁고 민첩하게(그들은 "피곤치 아니하리라"), 꾸준히 인내를 갖고(그들은 "곤비치 아니하리라") 그 길로 달려갈 것이다. 따라서 때가 이르면 거둘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과 이스라엘이 가장 큰 환난에 처할지라도 계속 하나님을 앙망하도록 하자. 그리고 가장 합당한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효과적인 도움과 위로를 받게 되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도록 하자.

 

 

 

 

위로는 어디에서 오는가?(이사야 40:1-5)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출판계에서 위로에 관한 책들이 폭발적으로 유행했습니다. 삶이 퍽퍽한 사람들에게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위로를 주는 말랑말랑한 책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말랑말랑한 말의 위로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위로하는 말이 넘쳐나도 형편이 하나도 나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속된 말로 입금이 없으면 말의 위로가 공허합니다. 뭐니 뭐니 해도 돈이니까요. 일하다가 사고가 났는데 회사에서 위로금을 주지는 않고 말로만 떼우면 어떻게 합니까? 위로를 돈으로만 떼우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말로 떼우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오늘 이사야 40장 말씀에 보면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위로하라는 것입니까? 이번에도 말로만 떼우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대가를 다 치루었기 때문에 사후적으로 위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돌아가고 그들과 함께 해 주실 것이니 위로가 충분합니다. 오늘 말씀을 가지고 ‘위로는 함께함을 통해 온다’는 주제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위로는 함께 벌을 받을 때 옵니다.
둘째, 위로는 함께 길을 닦을 때 옵니다
셋째, 위로는 함께 영광을 볼 때 옵니다


1. 위로는 함께 벌을 받을 때 온다

하나님은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십니다. 고생할 만큼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고생한 정도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포로생활을 하고,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갇혀 있는 것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지 못하면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해방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암살’이라는 영화에 보면 독립군 중에서 일제에 전향한 이들이 있었고, 이중간첩역할을 했던 이들이 등장합니다. 해방 후 그들이 재판정에 섰을 때 왜 일제편에 섰냐고 물으니까 말합니다. 해방이 올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해방이 될 줄 알았다면 변절했겠냐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도무지 기대하지 않았던 해방의 날이 드디어 찾아왔습니다. 꿈꿀 수 없던 해방의 날이 왔습니다.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이방 땅에서 돌아오게 되었기 때문에, 감옥에서 풀려났기 때문에 위로받는 것이 아닙니다. 더 큰 위로는 죄악이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라도 벌을 조금이라도 덜 받고 싶어합니다. 조금이라도 벌을 덜 받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정반대여야 합니다. 벌을 제대로 받아야 마음이 편합니다. 벌을 제대로 받지 않으면 얼마나 불안합니까? 벌을 받을 만큼 다 받고 나면 발을 쭉 뻗고 잘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권징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대교회로부터 큰 죄를 지은 이들은 공개적으로 자기의 죄를 고하고 고해자로 등록했습니다. 그리고는 교회가 정해준 벌을 받았습니다. 자기 죄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런 심한 죄를 지었다고?’하면서 신자들이 조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치 당하는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창피를 당해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지은 죄보다 벌을 두 배나 더 받았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벌을 두 배나 받겠다고 자처하고 나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과도한 징계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고난 당할 때에 그 날을 줄여 주십니다. 마태복음 24장 22절에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아끼십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자기 백성을 아끼시기 때문에 고난의 때를 줄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고난이 심하면 주저앉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끼시는데, 아끼지 않은 자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드님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백성의 죄를 짊어지도록 자기 아드님을 아끼지 않고 이 땅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벌을 두 배나 받으신 분은 하나님의 아드님입니다. 우리 때문에 아무런 죄 없이 두 배나 벌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니 위로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2. 위로는 함께 길을 닦을 때 온다

두번째 위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돌아올 길이 닦이는 것입니다. 나의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신 하나님이 이번에는 크게 외치라고 하십니다.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라’고 외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길이라면 무엇을 말할까요? 이사야 3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대로를 닦으신다고 했죠? 이번에는 ‘하나님이 오실 길을 준비하라, 하나님이 걸으시는 길을 닦으라’고 하십니다. 길 닦는 것을 자기 백성들에게 맡긴다는 것일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끄시고 돌아오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방 땅에 포로로 잡혀 가서 지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친히 이끌고 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는 이들을 앞장서서 이끄십니다. 돌아오는 것도 하나님이 주도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사실, 바벨론 70년 포로생활을 하고 난 다음에 이스라엘은 돌아올 마음이 없었습니다. 70년동안 이방 땅에서 생활했으니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을 것입니다. 눈치밥을 먹다 보면 이방 땅에서도 살 궁리가 생깁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에스더 이야기입니다.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로의 왕비가 된 에스더 이야기 말입니다. 에스더서는 그녀의 외삼촌 모르드개와 왕비 에스더의 영웅담이 아닙니다. 에스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돌아가라고 해도 돌아가지 않고 주저앉은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세상 성공을 위해 세상에 주저앉은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땅에 주저앉은 이들도 버리지 않고 돌아보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스스로 자초한 위기를 하나님께서 친히 벗어나게 해 주십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들이고, 그들을 통해 메시아가 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돌아오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돌아올 길을 닦으십니다. 골짜기가 돋우어지고, 산과 언덕이 낮아지라고 합니다. 고르지 않은 땅은 평평하게 만들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라고 합니다.

 

도로를 닦을 때 주로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실 길을 닦으라는 것은 전심으로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분명하게 나옵니다.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하신 오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세례 요한은 오늘 말씀처럼 회개하면서 주님이 오실 길을 준비하라고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우리는 길을 잘 닦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길을 닦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돌아오십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성전의 환상이 있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 문을 벗어나 떠나갑니다. 하나님께서 포로로 생활하는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성전을 떠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함께 포로로 가시고, 함께 돌아오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의 길을 잘 닦아야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위로를 누릴 수 없습니다.

 


3. 위로는 함께 영광을 볼 때 온다

마지막 위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절에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입니다. 사람들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빛과 영광이 나타나면 우리가 어깨가 으슥거리고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저 거 봤지? 어디서 까불고 있어?’라고 말하면 되니까요. 문제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나타내는 방식이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과 다르기 때문에 기독교인조차도 알아채기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시듯이 놀라운 장면을 연출하시면 누구나 알아봅니다. 산 전체가 요동치고,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거리고, 나팔소리가 온 산을 울리면 말입니다. 이쯤 되면 누구나 겁을 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굉장한 방식으로 나타나시는 것은 아주 예외적입니다. 평상시에는 말 그대로 너무나 평범한 방식으로 나타나시기에 알아채기 힘듭니다. 하나님은 굉장한 장면이 아니라 말씀으로 찾아오시니까요. 하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우리가 영광을 독차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여호와의 영광을 누가 볼 수 있다고 합니까? 몇몇 사람들만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볼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명명백백하게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영광을 독차지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독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은 공개적으로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다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영광이 나타나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구해야 할 것입니다. 나 혼자 본 것은 영광이 아닙니다. 스스로 착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모두가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하나님의 영광을 알아채기 힘듭니다. 이것을 예수님에게 적용해보면 딱 맞아 떨어집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까?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이고요. 믿지 않는 이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습니까? ‘웃기고 앉아 있네. 니가 뭔데 하나님 노릇하냐?’고 하면서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의 영광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몸으로 하늘 영광에 들어가셨으니 우리도 영광에 들어갈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질문 3번 문장처럼 ‘우리의 (몸)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합니다.’ 우리의 육체도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연약한 육체도, 장애가 있는 육체도 영광 받을 수 있으니 이것만큼 큰 위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위로를 구합니다. 나 좀 위로해 달라고 합니다. 위로는 어디로부터 옵니까? 하나님은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시지만 하나님만이 모든 위로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벌을 다 받으면 위로가 넘칩니다. 벌을 요리 조리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벌이라면 다 받겠다고 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 벌을 함께 받으셨다고 하는 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을 통해 위로가 옵니다. 하나님의 길을 아는 것이 위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홀로 버려 두지 않으시고 징계받은 자기 백성을 이끄시고 함께 돌아가자고 하시는 것이 사랑이고, 이 사랑이야말로 우리에게 너무나 큰 위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면 갈수록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 소망이고, 그 소망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가 옵니다.

 

이 모든 위로는 오직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셔서 옵니다. 이 모든 위로는 오직 하나님의 아드님을 통해 우리에게 옵니다. 연말이 쓸쓸해도, 보너스가 손에 쥐여지지 않아도 우리는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합격만 사람만, 승진한 사람만, 분양권 당첨된 사람만 위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위로 받습니다. 오늘부터 주님이 오시는 것을 대망하는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드님을 통해 가까이 다가오셔서 베푸시는 위로를 함께 경험할 수 있기 바랍니다. 함께 할 때 위로가 옵니다. 함께 하는 것만큼 위로는 커집니다. 위로는 함께 하는 능력에 달렸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위로를 구합니다. 위로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지 못하지만 위로해 달라고 구합니다. 위로를 찾는 저희들에게 참된 위로를 베풀어 주겠다고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를 배나 벌하시고 저희의 죄를 씻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가 죄가운데 눌러앉아 있을 때 돌아올 수 있도록 손잡고 이끌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가 세상 영광에 눈멀어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참된 위로를 베풀어 주시니 이제는 저희들이 일어서겠습니다. 이제는 일어나 주님의 용서, 주님의 돌이키심,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게 하옵소서.

 

이 대림절에 아드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동행,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게 하시는 은혜를 찬양하게 하옵소서. 2천년전에 아기로 오신 주님이 아니라 영광의 왕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게 하여 주옵소서. 그 영광의 주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의 모든 눈물과 상처와 서러움을 씻어주실 것을 기다립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오시고, 우리를 계속해서 위로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재경 목사

https//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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