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 통치할 왕
1.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2. 또 그사람은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냇물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그늘같으리니
3.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일 것이며
4. 조급한 자의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
5. 어리석은 자를 다시존귀하다 부르지 아니하겠고 우둔한 자를 다시 존귀한 자라 말하지 아니하리니
6.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마음에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여호와를 거스르며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7.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8.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서리라
심판과 회복
9. 너희 안일한 여인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지어다 너희염려없는 딸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0. 너희염려없는 여자들아 일 년 남짓 지나면 너희가 당황하리니 포도 수확이 없으며 열매 거두는 일이 이르지 않을 것임이라
11. 너희 안일한 여자들아 떨지어다 너희염려없는 자들아당황할지어다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베로 허리를 동일지어다
12. 그들은 좋은 밭으로 인하여 열매 많은 포도나무로 인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
13. 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찔레가 나며희락의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에 나리니
14. 대저 궁전이 폐한 바 되며 인구 많던성읍이 적막하며오벨과망대가 영원히굴혈이 되며들나귀가 즐기는 곳과 양 떼의초장이 되려니와
15.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16. 그 때에 정의가광야에 거하며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17.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평안과 안전이라
18.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19. 그 숲은우박에 상하고성읍은 파괴되리라
20.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
●정의의 통치 (이사야 32:1-8)
우리는 여기에서 번영하는 왕국에 대한 묘사를 볼 수 있다. "왕들과 방백들과 백성들이 각자의 본분에 충실할 때, 그 땅은 복되도다." 이 대목은 장관들과 신하 모두에게 그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말해 주는 훈령집이었을 것이다. 또는 히스기야에 대한 찬사의 글일 것이다. 히스기야는 훌륭히 다스렸고, 자기의 선한 통치가 가져올 행복한 결과를 어느 정도 내다보았다. 그리고 이 대목은 그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히스기야의 통치하에서 누릴 행복과 그 때를 선용하기 위해 기울여야 할 노고를 명확하게 깨닫게 하려는 것이요, 그것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 나라가 들여올 개혁의 시대를 기다리게 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교회를 안위하기 위해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약속되어 있고 묘사되어 있다.
Ⅰ. 장관들은 각자의 직책에서 자기의 의무를 행할 것이며, 권세를 지닌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 권세를 제정하신 그 큰 목적에 응해야 한다(1, 2절).
1. 즉위하여 다스릴 한 왕과 방백들이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때, 만사가 잘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방백들에게는 주권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릴 군주인 왕이 있어야 한다. 그들은 왕을 통해서 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왕에게는 관원으로서 그의 아래 있는 방백들이 있어야 한다. 그는 그들을 통해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벧전 2:13, 14).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직책을 알고 완수할 것이다. 왕은 통치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당한 특권을 조금도 감소시킴이 없이, 그 방백들은 보다 낮은 영역에서 그리고 모든 것을 공적인 유익을 위해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2. 그들은 율법대로, 그리고 그것을 거역함이 없이 자기들의 권세를 사용할 것이다. 그들은 의와 공평으로, 지혜와 공의로 선한자를 보호하고 악한 자를 벌하면서 통치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이 왕들과 방백들이 공의를 선포하는 당신에 의해서 그들이 통치하신다고 인정하신다(잠 8:15).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그러한 왕이요 방백이시다. 그는 법규대로 통치하신다. 그리고 "그는 공의로 세상을 판단하실 것이다" (9:7; 11:4).
3. 이처럼, 그들은 그 백성에게 큰 축복이 될 것이다. "그 사람", 곧 의로 통치하는 그 왕은 "피하는 곳 같을 것이다" (2절). 방백들이 그들의 도리를 다하게 될 때, 백성들은 방백들이 원하는 대로 행할 것이다.
(1) 그들은 많은 재앙에서 보호될 것이다. 이 선한 재판장은 그 신하들에게는 피해와 폭력이 폭우를 막아 주는 가리게가 될 것이다. 그는 "가난한 자와 고아를 보호하여," 그들이 강자의 희생이 되지 않게 한다. 압제당하는 무죄한 자는 중상 모략을 당하거나 폭력을 당하면, 그 재판장을 피난처로 생각하여 그에게 가지않고 누구에게로 가겠는가? 그에게 그것을 탄원하여, 그에 의해 시정된다.
(2) 그들은 많은 축복으로 새롭게 되며 안위함을 얻는다. 이 선한 재판장은 가난하고 곤경에 처한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며 칭찬할 만한 일들을 장려하기 때문에, 그는 땅을 시원하게 하고, 소중하게 하는 "마른땅에 냇물 같으며," 불쌍한 나그네에게는 "곤비한 땅에" 내려 쪼이는 태양열로부터 피할 곳을 제공해 주는 "큰 바위 그늘 같다." 멸시와 반박을 받는 중에도 자기의 의무를 충실히 행하는 선한 자들에게 있어서는, 자기들이 결국은 어떤 선한 재판장에 의해 지지받고 인정을 얻으며, 자기 일에 대한 찬성을 얻는다면, 그것은 큰 활기를 불어 넣어 주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나라 충성된 백성에게 그러하며, 특히 그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더욱 그러하다. 최대의 재앙, 곧 광풍뿐만 아니라 폭우가 우리에게 미쳤을 때, 곧 죄책과 진노의 폭풍이 밀어닥쳐 우리를 괴롭힐 때도, 우리는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께로 가게되며, 그분 안에서 우리는 안전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상태에 있다는 것에 만족을 느낀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의에 목마르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냇물을 발견하며, 곤고한 영혼이 바랄 수 있는 원기 회복과 위로를 찾게 되며, 태양이나 비가 뚫고 지나갈 수 있는 그런 나무 그늘이 아니라 나그네가 피할 수 있도록 넓게 마련되어 있는 바위 그늘을 발견한다.
혹자는 여기에서 이러한 사실을 지적한다. 즉 피하는 곳과 가리우는 곳, 그리고 바위 자신이 광풍과 폭우의 강타를 받아들여, 그 속에 피난처를 마련하고 있는 자들을 그 강타로부터 구원해 주듯이 그리스도께서도 손수 폭풍을 담당하시어 우리를 그 폭풍에서 안전케 하신다는 사실이다.
Ⅱ. 신하들은 각자의 직책에서 자기의 의무를 행하게 될 것이다.
1. 그들은 기꺼이 가르침을 받아 사태를 올바로 이해할 것이다. 그들은 상관들과 스승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진리의 빛과 능력에 복종할 것이다(3절). 이 복된 개혁 사업이 착수되어 사람들이 자기들의 임무를 다하면, 하나님도 자기의 일을 행하기에 부족함이 없으실 것이다. 그 때에 "보는 자의 눈" 이 곧 예언자들, 선견자들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상(異像)으로 축복하시어, 그들을 통해 백성들과 교통하실 것이다. 그리고 기록된 말씀을 읽는 자들은 더 이상 그 마음을 베일로 가리지 않고 사물들을 명료하게 볼 것이다. 또한 그 때에는 전파된 말씀을 "듣는 자의 귀가" 열심히 "기울여지고," 그들이 들은 것을 쾌히 받을 것이며, 이전처럼 듣는 일에 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특히 복음의 은총에 의해 되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듣는 자와 보는 눈을 만드셨고," 새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2. 그들은 배움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리라(4절).
(1) 그들은 총명한 머리를 갖게 되어서, 서로 다른 것들을 구별할 수 있게 되고 분별력을 갖게 되리라. 성급하고 "조급하여" 사물을 소화하고 심사숙고할 여유를 가질 수 없었던 자의 마음이" 이제 그 경솔함을 치료받게 될 것이며, "지식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의 총명을 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모든 백성을 위해 자기가 행하시고자 하는 일의 본보기로서,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지각을 주심으로써(요일 5:20)이 복된 일을 역사하셨다(눅 24:45). 선한 방백들의 경건한 의도는 신하들이 사물을 바르게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롭도록 그들에게 심사숙고할 자유를 허용할 때 효과를 거둘 것이다.
(2) 그들은 민첩한 발표력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말할 때마다 머뭇거리곤 했던 "어눌한 자의 혀" 가 이제 자기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 이해하고, 믿는 것을 이해하고 믿기 때문에 말하는 자들처럼,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들에 관한 명확하고 뚜렷하며 체계적인 지식이 크게 증대할 것이므로,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자들이 그런 일들에 대해 총명하게 말하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을 교화시키게 될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이 선한 일들로 가득 차 있으므로, 그들의 혀는 "필객의 붓과 같이" 될 것이다(시 45:1).
3. 선과 악, 유덕과 비행에 대한 구별이 세워질 것이며, 빛을 어두움이라 하고 어두움을 빛이라 하는 자들 때문에 더 이상 혼돈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칭하지 아니하리라" (5절).
(1) 악한 자들이 더 이상 권좌에 등용되지 않을 것이다. 왕이 정의로 통치한다면, 그는 성품이 나쁜 자와 비열하고 인색한 마음을 가진 자, 그리고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권리 침해나 피해도 행하려는 자들을 존귀와 권세의 자리에 앉히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안티오커스를 그렇게 칭하는 것처럼, 단 11:21) "비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출세할 때는 "존귀하고 정대하다" 고 칭하여진다. 또 그들은 "은인" 이라고 칭함을 받는다(눅 22:25).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이 지혜로와질 때 사람들은 각자 자기들의 공로대로 발탁될 것이며, 영예(이것은 미련한 자에게 결코 적당하지 아니하다. 잠 26:1)는 더 이상 그러한 자에게 부여되지 않을 것이다.
(2) 악한 자들이 다시는 백성들 중에서 명성을 얻지 못할 것이며, 악덕이 덕으로 가장되지 못할 것이다. 다시는 나발을 보고 (문자 그대로) "너는 나딥이라" 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발처럼 탐욕스러운 구두쇠, 돈밖에 위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자는 신사 또는 방백이란 칭호로써 칭송을 받지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자기 자신밖에는 생각할 줄 모르는 자들, 자기가 가진 것으로 선을 행할 줄 모르고 세상의 무익한 짐에 불과한 자들, 즉 "궤휼한 자를 내 주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그에 대해 (문자가 뜻하는 것처럼) "그는 부자라" 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선한 행위에 풍족한 자들만이 부유한 자로 간주되어야 한다. 풍부하게 지닌 자들이 아니라 그것을 잘 사용하는 자들이 부자이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그들의 재물이나 그들의 명예로운 직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덕과 유용함과 인류에 대한 선행에 의해 평가될 때, 그 백성들은 복되다.
이런 일이 히스기야 통치 때에 이루어졌는지, 또 얼마만큼 그것이 그리스도의 나라(우리는 그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그 가진 것에 의해 판단되거나 어떤 사람의 성품이 잘못 평가되는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를 가리키고 있는지, 그 점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방백과 백성들에 대한 우수한 법칙, 즉 사람들을 그들의 공적에 따라 존경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이 법칙을 시행하기 위해서, 여기에 인색한 자와 관대한 자가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우리는 그들 사이의 매우 거대한 차이점을 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관대한 자에게만 주어야 할 존경을 인색하고 궤휼한 자에게 준다면, 우리 자신을 아주 잊어버리는 것이다.
[1] 어리석은 자와 궤휼한 자는 죄악을 행하는 것이다. 만일 그러한 자가 등용되어, 권세를 잡게 되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의 높은 지위는 그들을 보다 훌륭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나쁘게 만들 것이다(6, 7절). 비열하고 나쁜 사람들의 성품을 보자.
첫째, 그들은 항상 불의한 것을 계획하며, 개인이나 민중을 해할 뜻을 품으며, 그런 일을 행할 방법을 모색한다. 그리고 그들은 충족해야 할 많은 어리석은 불만과 비천한 원한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일말의 관대함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의 마음은 계속 어떤 불의한 일을 하고 있다. 손의 일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일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생각이 하나님께는 말이듯, 마음에 품은 계획은 하나님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일(works)이다. 죄인들이 죄를 행하는 데 얼마나 많은 수고를 기울이는가 보라. 그들은 애써 죄를 짓는다. 즉 그들의 마음이 거기에 골몰하며, 큰 기술과 열심을 가지고 "불의를 행한다." 그들은 옛뱀이 가졌던 온갖 간교를 동원하고 심사숙고 - 이것은 죄를 더욱 심화시킨다 - 하여 "악한 계획을 베푼다." 죄 속에 계획과 술책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속에는 사탄에게 속한 것이 더욱 많다.
둘째, 그들은 계교와 위장으로 그 음모를 수행한다. 그들은 불의를 꾀하는 동안, "간사(위선)를 행하며," 스스로 의인인 체한다(눅 20:20). 가장 가증스러운 위해가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사람에 대한 참작, 그리고 어떤 공통 선이라는 가장 그럴듯한 구실로 위장될 것이다. 정당한(아름다움) 말을 하면서, 가장 큰 악을 꾀하는 자들이 가장 악랄한 인간이다.
세째, 그들은 "어리석은 것을 말한다." 그런 자들은 격분한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이 존귀한 직책에 있는 자답지 않게 그 주위의 사람들에게 천하고 나쁜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들의 본성을 알게 된다. 또는 판정이나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 정의를 왜곡하여 사실을 고약하게 위장한다.
네째, 그들은 하나님을 모욕한다. 그는 의로우신 하나님으로서 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리며," 그 속에서 불경스러운 짓을 행한다. 우리(KJV)가 "위선" (한글:" 간사")으로 번역한 그 단어가 그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부당하게 형을 언도한다. 그리고 나서는 그것을 비준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불경스럽게 사용한다. 마치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신 1:17), 그 거짓되고 부당한 재판도 그의 것인 것처럼 행한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를 위해 진리와 정의를 말한다는 구실 아래,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 는 짓이다. 악을 장려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뻔뻔스럽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는 없다.
다섯째, 그들은 인간을 학대하며, 특히 자기들이 보호하고 구제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들을 그렇게 한다.
1. 가난한 자의 궁핍함을 채워 주는 대신에, 그들을 빈곤하게 만들며 "주린 자의 심령을 비게 한다." 주린 자들이 가진 양식을 빼앗거나,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를 거부 - 이것은 전자 못지 않은 죄악이다 - 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목마른 자의 마시는 것을 없어지게 한다." 그들은 어느 때보다 더 긴급한 때에 늘 해오던 구제책을 끊어버린다. 가난한 자의 물건을 탈취하는 자들은 정말로 궤휼한 사람들이다.
2. 가련한 자들이 그들의 판단에 호소할 때에 그 가련한 자들의 권리를 찾아 주는 대신에, 그들은 가려한 자들을 멸하며 그들이 노골적으로 좋아하는 부유한 자에게 호의를 보이는 거짓된 말을 함으로써, 법정에서 그들을 파멸시키려 한다. 그렇다. 비록 빈핍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비록 그들의 주장의 공명정대함을 나타내는 증거가 아무리 가득할지라도, 그들을 주관하는 것은 뇌물이지 정의가 아니다.
여섯째, 이 인색하고 비열한 사람들은 그들의 고약한 목적을 도울 준비를 하고 있는 악한 도구들을 항상 그 주위에 가지고 있다. "그들의 종이 모두 악하다" 고 했다. 불의한 일을 수행하는 연장으로 사용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계획보다 더 뚜렷한 불의를 지니고 있는 계획은 없다. 궤휼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다. 따라서 그 외의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이상의 위해를 행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안위해 준다.
[2] 진실로 관대한, 그리고 그렇게 칭함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는 그의 본분에 따라 각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자기의 일로 삼는다(8절). 다음 사실을 주시하자.
첫째, 그는 선을 행하려고 관심을 기울이며, 계획을 고안해 낸다. 그는 "고명한(liberal) 일을 도모한다." 인색한 자나 구두쇠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가진 것을 저축하고 쌓아두는 방법을 설계하듯이, 선하고 자비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최선의 방법으로 자기가 가진 것을 사용하고 내어 주는 방법을 애써 설계한다. 자선은 지혜로써 행해져야 하며, 관용을 베푸는 일은 신중하고 계획하에 행해져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선한 의도가 응답될 수 있도록 즉 잘못된 자선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관대한(liberal) 자는, 그의 능력이 미치는 관대한 일들을 다 행하고 나면,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능력에 따라 관대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꾀한다.
둘째, 그는 선을 행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취하며 유익을 얻는다. "그는 항상 고명한(관대한) 일에 의해서 서리라." 또 세워질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확고한 번영과 견고한 명성을 그의 관대함에 대한 보상으로 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가슴속에 만족감과 견고한 평안을 풍성히 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도 그를 어지럽히지는 못할 것이다. 즉 그의 마음은 확고부동하다. 이것이 자선에 대한 보답이다(시 112:5, 6).
혹자는 그것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방백 곧 영예로운 자는 영예로운 행위를 택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영예로운 곧 정직한 행위에 의해서 그가 서리라. 즉 세워질 것이다." 한 나라의 영예로운 자가 사실상 비열한 일을 멸시하는 존경할 만한 자일 때, 또 그 왕이 이처럼 숭고한 자의 아들일 때, 그 나라는 잘 되어 간다.
●아름다운 전망 (이사야 32:9-20)
이 대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비열한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즉 그들의 악행을 벌하시기 위해 일어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는 관대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그들의 관대함에 대해 베푸시는 것을 볼 수 있다.
Ⅰ. 행실이 크게 부패하여 거룩한 하나님을 격동시키는 일이 많을 때는, 곤경의 시대가 올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여기에 바로 그러한 시대가 임할 것이 경고되어 있다. 그 경종은 "안일한 부녀" (9절)와 "염려없는 딸들" 에게 울려지고 있다. 그들의 교만과 허영과 사치를 채워 주기 위해 그들의 남편과 아비들은 가난한 자들을 굶어죽게 만드는 시험에 걸렸다. 그들로 하여금 그 예언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듣게 하라. "일어나라. 그리고 정중하고 주의깊게 들을지어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이 "연락(宴樂)하고 방랑하던" 땅에 큰 황폐를 가져오는 심판을 내리려 하신다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라. 이것은 산헤립이 요새화된 유다의 모든 성읍을 포위하고 있으면서, 그의 군대가 황폐케 만든 일을 주로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여러 날, 여러 해" (KJV)라는 말은(난외의 해석대로) "일 년 남짓" (한글 성경은 이것을 채택) 으로, 즉 이 황폐함이 한 해 이상 지속되리라는 것으로 풀이되어야 한다. 앗수르 군대가 유다 땅으로 처음 들어 왔을 때부터 패배되기까지는 매우 오랜 기간이 걸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에 마음을 두고 거기에다 행복을 거는 자들이 언젠가는 반드시 만나게 될 그 비참한 실망을 말한다고 할 수도 있다. "너희 염려없는 여자들아, 너희가 당황하게 되리라." 우리가 편안할 때 근심을 떨쳐버린다고 하여, 그것이 우리에게 환난에서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할 것이다. 아니, 염려없이 살기를 좋아하는 자들에게는 작은 고통도 큰 괴로움을 줄 것이며, 그들을 크게 압박할 것이다.
그들은 충분한 돈과 쾌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안일했고 염려 없었다. 그러나 그 예언자는 여기에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1) 그들에게 소작료를 주며 산해진미를 대어 주던 그 나라가 멀지않아 황포케 될 것이다. "포도 수확이 없어지리라. 그러면 너희가 어떻게 포도주를 즐기겠느냐? 열매 거두는 기한이 이르지 않을 것임이니라. 왜냐하면, 거두어 들일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는 수확물이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10절). 너희는 티이츠(teats), 곧 젖소에게서 나온 좋은 우유(한글 성경에는 없음)와 좋은 밭과 그 소산물이 부족하게 될 것이다." 인간 생활에 도움을 주는 유용한 밭은 좋은 밭이다. "너희는 열매 많은 포도나무와 그것에서 나온 포도가 부족하게 될 것이다." 많이 있는 것을 남용한 것에 대해서는 기근으로 벌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생활의 필수품을 정욕의 식량과 연료를 삼고 바알을 위해 그 필수품을 준비하던 자들은 그것을 빼앗기는 것이 마땅하다.
(2) 그들이 편히 살며, 소작료를 쓰며, 맛있는 것으로 즐기던 성읍들, 곧 유다의 성읍들도 황폐케 될 것이다(13, 14절). "찔레나무와 가시나무" 곧 죄와 저주의 열매가 "내 백성의 땅에 올라와서" 그 땅은 경작하지 않고 내버려 두게 될 뿐만 아니라, "희락의 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 - 극장, 오락장, 술집 - 에도 "날 것이다." 왜국 군대가 그 나라를 약탈했을 때, 기뻐하던 집은 의심할 바 없이 애곡하는 집이 되었을 것이다. 그 때에 궁전 또는 귀족들의 집은 주인이 애굽으로 피신했기 때문에 버림받은 집들이 되었다. 그 성읍의 지도자들은 그 성민들이 각기 자기 목숨을 위해 급히 도망가도록 방치했다. 그 때에 강함과 웅장함에 있어서 산과 망대 같았던 그 위풍당당한 집들은 "영영히 굴혈이 될 것이다." 그것들은 버림 받을 것이다. 그 주인은 결코 그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사람마다 그것을 여리고, 곧 저주받은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가 회복될 때에도 그것은 중건되지 않고 황폐한 채로 버려질 것이다. 그래서 "들나귀들이 즐겨하는 곳과 양떼가 풀먹는 곳이 되리라." 이와 같이, 많은 집들이 죄로 인해 파멸된다. Jam seges est ubi Troja fuit - 즉 곡식이 토로이의 유적에서 자란다.
2. 이런 광경을 생각하여 그들로 하여금 "떨고 옷을 벗고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라(11절). 이 말씀은, 그 재난이 오면, 그들이 이처럼 공포에 떨게 되고, 스스로 옷을 벗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나아가 그 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의 옷을 벗겨 알몸이 되게 하리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1) 환난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죄를 회개하고 스스로를 겸비케 하는 것이며, 진실된 자책과 경건한 슬픔으로 하나님 앞에 티끌 가운데 앉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평온을 연장시켜 줄 것이다. 이것이 심판을 행하시는 중에 있는 하나님을 만남이요, 우리 자신의 잘못을 고침으로써 징계를 모면하는 길이다. 구부리려 하지 않는 자들만이 꺾여질 것이다.
(2) 환난에 대한 최선의 준비는 자기들 자신을 부인하고, 참회의 삶을 살며 모든 육적인 즐거움을 떠나는 것이다. 이 세상을 거룩히 경멸하면서 이미 자기들 자신을 벗긴 자들은, 환난과 사망이 올 때도 벗김을 당하는 것을 잘 견디어낼 수 있다.
Ⅱ. 자기의 순전함을 지키는 남은 자가 아직도 있을 동안은, 마침내 좋은 시대가 오리라는 것, 그리고 여기에서 이사야가 즐겁게 전망하고 있는 그러한 때가 오리라는 것을 능히 기대할 수 있다. 이러한 때를 그들은 히스기야 통치 말기에 보았다. 그러나 그 예언은 보다 멀리 메시야의 날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메시야는 "의의 왕" 이며, "평강의 왕" 이다. 모든 예언자들은 그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이 축복된 시대가 어떻게 도입될 것인가? "위에서부터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온다(15절).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로써 사람들에게 선한 마음을 주실 때 그때에서야 비로소 좋은 시대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심은," 누가복음 11장 13절과 마태복음 7장 11절과의 비교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사실상 그들에게 온갖 좋은 것을 다 주시는 것이다.
" 성령이 그들 위에 부어지리라" 는 사실, 곧 교회가 황폐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그 필요성에 맞게, 이전보다도 더욱 풍성히 은혜의 성령이 쏟아지리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희망을 가지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위대한 일이다. 이것은 위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것을 위해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를 우러러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에 은총을 내리고자 할 때는, 그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은총을 받을 준비를 하게 하시며, 그가 그의 은총의 도구로써 쓰시고자 하는 자들에게 자격을 부여해 주시고 성공을 허락하신다. 왜냐하면 교회의 황폐함을 복구하려는 자들의 노력은 "성령이 그들에게 부어지기까지는" 모두 허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는 그 일이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메시야의 나라는 성령이 부어졌을 때 임하였고 세워졌다(행 2장). 그리하여 그것은 지금도 존속되고 있으며, 세상 끝까지 존속될 것이다.
2. 그 복된 시대에는 얼마나 놀랍고 행복한 변화가 이루어질 것인가? 메마른 불모의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우리가 지금 "아름다운 밭" 으로 간주하는 것도 그 때에 되어질 일과 비교해 볼 때 "삼림으로 여겨지게 되리라." "그 때 땅이 그 소산을 낼 것이다." 메시야의 날에는 "땅의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리라" 고 했다(시 72:16).
혹자는 이 사실을, 이방인이 복음의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 사실은 광야를 아름다운 밭으로 만들었다)과 유대인의 거부와 배제(이 사실은 아름다운 밭을 살림으로 만들었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방인들 위에는 생명의 영이 부어졌으나, 유대인들 위에는 잠의 영이 부어졌다. 사람에게 성령이 부어진 증거와 결과가 무엇인가를 보라. 성령이 부어지면, 그 사람(영혼)은 열매가 풍성하게 되며, 거룩한 열매를 맺게 된다.
다음 세 가지가 이 시대를 행복하게 한다.
(1) 공평과 의이다(16절). 성령이 땅에 부어질 때, "그 때에 공평이 광야에 거하며" 그 광야를 아름다운 밭이 되게 하며, "의가 아름다운 밭에 있어" 그 밭을 더욱 아름답게 할 것이다. 사역자들은 율법을 설명하고, 재판장들은 그 율법을 집행할 것이며, 이들은 모두 매우 현명하고 충성되기 때문에 이들에 의해 악한 자들은 선하게 되고 선한 자들은 더 선하게 될 것이다. 모든 종류의 백성들, 즉 가난하고 천하며 무식하여 광야처럼 무시당하는 자들과, 부유하고 훌륭하고 유식하며 아름다운 밭처럼 존경받는 자들에게 다같이 사물에 대한 올바른 생각과 훌륭한 령명의 원칙과 선과 악, 죄와 의무에 대한 자각이 있을 것이다. 또는 그 나라 모든 지역, 즉 평원과 울타리를 한 땅, 시골과 도시, 좀더 거친 지역과 보다 더 경작되고 개량된 지역, 어디서나 정의가 잘 집행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은 우리가 그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공평이나 법칙을 들여왔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가 그것에 의해 구원받아야 하는 의를 들여왔다. 그리고 성령이 부어지는 곳은 어디든지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으며, 영원한 의로서 남는다.
(2) 평화와 평안이다(17, 18절). 여기에서 약속되어 있는 평화는 두 종류의 것이다.
[1] 내적인 평화(17절). 이것은 의가 내재할 때 따라온다(16절). 의의 일이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자들은 이 복된 결과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의 그 자체가 평화이며, 그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 이다. 즉 마음의 거룩한 평정과 안심이다. 그것으로써 그 영혼은 스스로를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한다. 그리고 이 즐거움을 방해할 권세는 이 세상에 없다.
평화와 평안, 그리고 영원한 안전은 의의 길과 일(작용)에서 기대될 수 있으며 발견되게 마련이란 것을 명심하자. 참된 만족은 오직 참된 신앙에서만 얻을 수 있으며, 거기서는 반드시 얻을 수 있다. "모든 경건과 단정함(정직) 중에" 사는 생활은 고요하고 평안하다(딤전 2:2).
첫째, "의의 역사(공효)는 평화이다." 우리의 의무를 행하는 가운데서, 풍성한 참 기쁨 즉, 순종이 가져다 주는 커다란 현세적 보상을 맛보게 될 것이다. 비록 의의 역사(役事)가 고생스럽고 값비싼 것일지라도, 또 우리로 멸시받게 할지라도, 그것은 평화이다. 우리의 책임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게 해 주는 평화이다.
둘째, "의의 결과는 평안과 안전이다." 우리 시대의 끝까지 그러할 뿐만 아니라, 영원의 끝없는 세대까지도 그러할 것이다. 참된 성결은 현재에도 참된 행복이며, 앞으로도 완전히 행복 즉 영원히 완전한 성결이 될 것이다.
[2] 외적인 평화이다(18절).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조용하고 평안한 심령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조용하고 평화로운 거처(종용해 쉬는 곳)에 거하게" 되고, 집에서나 예배 중에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큰 긍휼이다. 산헤립의 침입에 대한 두려움이 끝나면, 그 백성들은 의심할 것도 없이, 전쟁의 경보로 소란스럽게 되지 않는 조용한 거처가 주는 긍휼을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깨달았을 것이다. 각 가정으로 하여금 집안에서 둘이 셋을 대적하고 셋이 둘을 대적하는 분쟁과 싸움이 없이 조용하게 지내는 방법을 연구하게 하자. 그리고 나서는 하나님의 보호에 맡겨 안전하게 하고, 외부로부터 오는 "악의 두려움이 없이 조용" 하게 하자.
예루살렘은 평화로운 처소가 될 것이다. 33장 20절과 비교해 보라. 바람받이에 있는 "그 삼림은 우박에 상하고," 그 위에 격하게 부딪히는 폭풍이 임하게 될 때도, 예루살렘은 "조용히 쉬는 곳" 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성읍은 낮은 곳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바람보다 낮은 곳에 있어서(높이 서있는 성읍들처럼) 노한 광풍을 맞지 않고, "예루살렘을 두른 산들" 에 의해(시 125:2) 보호받는 곳에 있게 될 것이다. 그 "산과 망대가 무너지나" (14절) 낮은 곳에 있는 성읍들은 조용히 쉬는 곳이 될 것이다. 겸손하며 낮은 데 처하기를 즐겨하는 자들은 매우 안전하며 매우 편안히 거할 수 있다(19절). 화평한 집에 거하려는 자들은 낮게 그리고 낮은 곳에 거하기를 즐겨야 한다.
혹자는 애굽 땅을 크게 황폐케 만들었던 우박의 재앙을 고센 땅이 피한 것에 대한 암시가 여기에 나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3) 풍성함과 풍족함이 그 시대를 행복하게 한다. 각처에서 매년 매우 좋은 곡식이 모아질 것이므로,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는 농부들, 곧 씨 뿌리기에 적당한 모든 땅에 씨를 뿌리는 자요," "그 식물" 또는 곡물을 "물위에 던지는" (전 11:1) 농부들이 칭찬을 받을 것이며, 행복하게 여겨질 것이다. 하나님이 수확을 증가시켜 주실 것이다. 따라서 농부들은 부지런해야 하고 자기들의 일에 전념해야 하며, 모든 물가에 씨를 뿌려야 한다. 농부가 그렇게만 한다면 곡식은 매우 무성하고 울창하게 자랄 것이므로, 그는 가축, 즉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몰아 그 윗부분은 먹게 하여 곡식을 억제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1] 말씀의 전파를 뜻한다. 혹자는 그것을 농부처럼 그들의 씨를 뿌리러 나가는(마 13:3) 사도들의 사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사도들은 모든 물가에 씨를 뿌렸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다. 물은 백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무리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사람들의 마음이 부드럽게 되고 촉촉하게 되고 말씀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어느곳에서든지 그들은 그 좋은 씨를 뿌렸다. 또 한편으로,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못하게 되었었는데(신 22:10),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시사했다. 그러나 이제 그 구별은 제거될 것이며, 소와 나귀, 곧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복음 경작의 일에 종사하게 되고 그 이득을 즐기게 될 것이다.
[2] 자선 사업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 행복한 때를 보내실 때, 자기가 가진 것으로 선을 행함으로써 그 소유를 향상시키는 자들, 즉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는 자들, 곤궁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모든 기회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들, 그들에게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때가 이르면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Isaiah) 제33장
은혜를 구하는 기도
1. 너 학대를 당하지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이고도 속임을 당하지 아니하는 자여 화 있을진저 네가 학대하기를 그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
2.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3. 요란한 소리로 말미암아 민족들이 도망하며 주께서 일어나심으로 말미암아 나라들이 흩어졌나이다
4. 황충의 떼 같이 사람이 너희의 노략물을 모을 것이며 메뚜기가 뛰어오름 같이 그들이 그 위로 뛰어오르리라
5. 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존귀하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하심이요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심이라
6.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
높은 곳에 거할 자
7. 보라 그들의 용사가 밖에서 부르짖으며 평화의 사신들이 슬피 곡하며
8. 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어지며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들을 멸시하며 사람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9.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레바논은 부끄러워하고 마르며 사론은 사막과 같고 바산과 갈멜은 나뭇잎을 떨어뜨리는도다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제 일어나며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 내가 이제 지극히 높아지리니
11. 너희가 겨를 잉태하고 짚을 해산할 것이며 너희의 호흡은 불이 되어 너희를 삼킬 것이며
12. 민족들은 불에 굽는 횟돌 같겠고 잘라서 불에 사르는 가시나무 같으리로다
13. 너희 먼 데 있는 자들아 내가 행한 것을 들으라 너희 가까이에 있는 자들아 나의 권능을 알라
14.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
15.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16.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시온 성을 보라
17. 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 광활한 땅을 눈으로 보겠고
18. 네 마음은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해 내리라 계산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공세를 계량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망대를 계수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19. 네가 강포한 백성을 보지 아니하리라 그 백성은 방언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하며 말이 이상하여 네가 깨닫지 못하는 자니라
20. 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21. 여호와는 거기에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 곳에는 여러 강과 큰 호수가 있으나 노젓는 배나 큰 배가 통행하지 못하리라
22.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
23. 네 돛대의 줄이 풀렸으니 돛대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고 돛을 달지 못하였느니라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리니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24. 그 거주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에 사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
이사야 33장 주석
●경고를 받는 앗수르 (이사야 33:1-12)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교만하고 거짓된 앗수르인은 공정하게도 그의 모든 속임수와 폭력 때문에 벌을 받아, 재앙 아래 놓이게 된다(1절).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그 대적이 범한 죄를 보자.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학대했고 착취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과의 평화 협정을 어겼고, 비겁하게 행했다. 진실과 자비는 두 가지의 신성한 것이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속성이 매우 많다. 따라서 자기의 악한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진실과 자비 중 그 어느 것도 마음에 두지 않고 완전히 잃어버린 자들, 곧 죄악을 행하거나 탈취하는 일을 꺼려하지 않으며 위선의 죄를 범하거나 엄숙한 약속을 깨뜨리는 것을 개의치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잔인하고 기만적인 사람들은 가장 나쁜 자들이다.
2. 이 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앗수르 인은, 결코 자기에게 해를 끼친 일이 없는 자, 또 다툴 구실도 없는 자를 학대했고, 항상 자기에게 성실하게 대했던 자들을 패역하게 대했다.
우리가 우리로 잘못을 행하도록 하는 자극을 사람들로부터 아주 적게 받았는 데도, 악을 행하면, 그만큼 하나님을 더 격노케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겠다.
3. 이 죄로 인해 그가 받게 될 형벌은 무엇인가? 유다 성읍을 탈취한 그 천사에 의해 자기 군대가 멸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자기 진영이 탈취했던 자들에 의해 다시 약탈당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갈대아 사람들은 앗수르 사람들을 패역하게 대할 것이며, 그들을 반역할 것이다. 산헤립의 아들들 중에 둘이 그를 배반하여 그가 기도하는 중에 비겁하게 살해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흔히 죄인들에게 그들이 뿌린 열매를 거두게 하신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 잡힐 것이다" (계 13:10; 18:6).
4. 그가 이렇게 될 시기는 언제인가? 그가 "학대하고 속이기를 마치고 나서" 회개하고 개심 - 이것은 그의 멸망을 막을 수 있다(단 4:27) - 하지 않으며, 최악의 일을 다하고 났을 때, 즉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한계인 막다른 지경에 이르를 그 때에, 떨림의 잔이 그의 손에 놓여질 것이다. 그가 사악함에 있어서 한계에 다다를 때, 즉 그의 죄악의 한도가 차게 될 때, 그 때에 모든 것이 다시 검열될 것이다. 그가 행하기를 마칠 때, 하나님은 시작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날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Ⅱ. 환난 중에 있는 그 땅을 위해 은혜의 보좌에서 간곡히 긍휼을 구하는 하나님의 기도하는 백성들이 있다(2절).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들은 잔인하나, 주께서는 너그러우소서. 우리는 주의 진노를 마땅히 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 은총을 간구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게 된다면, 우리는 행복할 것입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환난은 우리를 해할 수 없으며, 우리를 멸하지 않을 것입니다. 피조물들에게 도움을 기대하는 것은 헛된 것입니다. 우리는 애굽을 의지하지 않고 그 환난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주께 복종하기로 결심하고, 이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가 오직 주를 앙망하나이다."
믿음으로 겸손하게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로우시다는 것을 반드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기도했다.
1. 즉 자기들을 위해 군복무에 임하고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했다.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소서. 히스기야와 그의 방백들, 그리고 모든 용사들은 주께로부터 힘과 용기를 끊임없이 공급받을 필요가 있사오니,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충족케 하시는 하나님이 되소서. 매일 아침 그들이 그날의 과업을 위해 나가고 아마도 새로운 일일 하게 되고 새로운 난국에 당면할 때, 그들로 하여금 활기를 되찾고 기운을 회복하게 하소서. 그리고 날(日)을 따라서 능력이 있게 하소서" (신 33:25 참조).
영적인 싸움에 있어서도 우리의 손은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팔을 힘있게 하실 뿐만 아니라(창 49:24) 친히 우리의 팔이 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일도 성취시킬 수 없다. 우리가 매일 아침 그를 우리의 팔로 믿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침마다 새로와지는 그의 긍휼과(애 3:23) 또 그의 능력을 끊임없이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아침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신다면, 우리는 파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애일 아침 우리 자신을 그에게 의탁해야 하며, 그날에 그날 일을 행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에게서 얻어야 한다.
2. 백성들 전체를 위해 기도했다. "주는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가만히 앉아 있으며, 감히 높은 곳에 오르려 하지 않는 우리들의 구원이 되소서."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을 위해 구원을 역사하시는 구세주로서 뿐만 아니라 구원 자체로서 의지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세속적인 이익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들은 만일 그를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삼는다면, 자기들은 안전하다고 여기며, 구원받은 것으로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들의 구세주의 역할을 하신다면, 그는 그들의 구원이 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행사는 완전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것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고," 이미 우리 열조의 끊임없는 힘과 도움이 되셨던 주께서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주께서 그들을 도우신 것처럼, 우리를 도우소서.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도다(시 34:5). 그러므로 우리는 흑암 가운데 행하지 말자."
Ⅲ. 멸망당한 앗수르 군대가 부유하게 되었지만 유다와 예루살렘에게 쉽게 희생물이 된 그들의 진영을 보자. 기도를 하자마자(2절) 그것은 응답된다(3절). 아니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그들을 대적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으로 행하셨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그 대적들을 이기게 해 주셨고 또 개가를 부를 만한 이유를 풍성히 주셨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그 멸망시키는 천사가 앗수르 군대의 수 천 명을 살해하자, 그들의 기운은 꺾어졌다. 죽어가는 사람들(우리는 이들이 조용히 죽어가지는 않았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의 비명으로 인해 "진동시키는 소리가" 났기 때문에 그 나머지 "민족들도 도망하여" 각자의 안전을 위해 피신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일어나자, 앗수르 군대를 구성하고 있던 여러 민족이나 씨족들이 흩어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재앙일 일어났으므로, 그것은 분기해야 할 때였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면, 그의 원수들은 흩어진다(시 68:1).
2. 요새화되었던 유다의 모든 성읍들이 황폐한 것을 복구하는 보복적인 조처로서, 앗수르 진영의 녹획물이 탈취된다(4절). "황충이 모임같이," "메뚜기의 뛰어 오름같이" 예루살렘 거민들이 "너희 노략물을 모을 것이다" 라고 했다. 즉 약탈자들(옐살렘 주민들)은 황충이나 메뚜기의 무리가 밭이나 나무를 황량하게 만드는 것처럼, 쉽게 그리고 신속히 앗수르의 재물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죄인은 그 재물을 의인을 위해 쌓아 두며," 이스라엘은 애굽 사람의 약탈물로 풍요케 된다.
혹자는 앗수르 사람들 자신을 황충과 메뚜기로 보고 있다. 그들이 죽임을 당했을 때, 애굽의 개구리떼처럼 무더기로 쌓여졌고, 사람들의 발에 밟혀 흙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Ⅳ. 이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영예롭게 되었다. 대적의 노략물이 이처럼 모아졌을 때,
1. 하나님은 그것으로 인해 찬미를 받으실 것이다. "여호와는 지존하시도다" (5절). 이처럼 교만한 자들을 낮추시고 그들을 모두 티끌 속에 감추시는 것이 바로 그의 영예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 자신의 이름을 존귀케 하시며, 애굽 사람들이 물에 빠졌을 때의 이스라엘처럼(출 15:1, 2 이하), 그의 백성은 그에게 그 영광을 돌린다. 그는 그들의 모독이 미치지 못하는 높은 곳에 거하는 자이며, 그들을 주관하는 권세를 지니신 자이므로 지존하시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교만하게 자랑하는 그 점에 있어서도 그 자신이 그들보다 위에 계시다는 것, 즉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시는 대로 행하신다는 사실과,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밝히신다.
2. 그의 백성은 그 사건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시어서 예루살렘을 치기로 맹약한 자들을 흩어지게 하실 때(3절), 그 때에 그 축복의 준비 단계, 또는 그 사건의 열매와 소산으로서, "그는 시온에 공평과 의를 충만케 하신다," 즉 정의감 뿐만 아니라 정의에 대한 열심과 정의가 잘 지켜지도록 하는 보편적인 배려가 시온에 충만케 하신다. 예루살렘은 다시 "의의 성읍" 이라고(1:26) 불리우게 될 것이다. 앗수르 군대의 멸망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가 존귀하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럼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이 높임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공평과 의를 내리시고,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행동과 일들이 그 공평과 의에 의해 다스려지게 되고, 그 공평과 의가 매우 풍요하므로 아무도 이것을 거역하는 다른 생각을 품지 못하게 될 때, 그 때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 자비를 예비해 두신 것으로 결론 지을 수 있다.
히스기야와 그의 백성들은, 환난 중에도 하나님께서 자기들 곁에서 계시리라는 확신으로 격려를 받고 있다(6절).
(1) 즉 그들이 의지할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이 있다.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다." 여기에 보면 미리 계획된 바람직한 목적이 나와있다. 그것은 "우리시대의 평안함," 즉 나라가 소란하지 않고 어지럽지 않게 되는 것이며, "구원의 힘" 즉, 나라 밖의 대적에게서 건져지고 그들에게 이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정하신 구원은 그 속에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뿔이다. 그리고 이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이 있는데, 그것은 "지혜와 지식" 즉 경건함뿐만 아니라 신중성이다. 그 구원의 방법은 하나님의 축복에 의해 오는 것인데, "우리 시대의 평안함과 구원의 힘" 이 될 것이다. 그곳은 곧 처음에는 순전하고, 그 다음에는 평화로운 지혜요, 또 사적 이익을 공적인 유익을 위해 종속시키는 지혜이다. 이러한 신중성은 진리와 평화를 세울 것이며 진리와 평화를 방어하는 성을 요새화해 줄 것이다.
(2) 히스기야와 그의 통치를 받는 그 백성들의 상태에 대한 경건한 격언이 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보배이며, 하나님은 그곳으로부터 조공을 받으신다. 나아가 그것은 군주의 보배이다. 선한 군주는 그것(하나님 경외)을 그렇게 (지혜를 금보다 낫게) 여기며, 그 진가를 알게될 것이다. 참된 신앙은 군주나 백성들의 참된 보배임을 명심하자. 그것은 그들을 부유한 자로 명명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자들과 또 신실하고 선한 백성들이 많은 곳이 정말로 부유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라를 이 세상에서 부요케 하는 데에 기여한다. 그러므로, 국민의 신앙을 지원해 주고, 그 신앙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경계하는 것이 국가의 이익이다.
Ⅴ. 예루살렘에 임한 큰 환난이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그 예언자의 말을 믿은 자들이 앞으로 어떤 환난이 올 것인가를 미리 알 수 있게 그것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근원에 대한 (앞에 나온) 약속이 성취될 때, 그들의 극한적인 상황에 대한 기억이 그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을 돕고 또 그들로 더욱 감사하도록 만들기 위해, 여기에 나와 있다(7-9절).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예고되어 있다.
1. 그 대적은 매우 무례하고 사나울 것이며, 그와 평화 협정을 맺는 일이나 (왜냐하면 그는 마치 그의 말에 충실한 것이 그를 낮아지게 하는 것처럼 주저함이 없이 "조약을 파하기" 때문이다), 사전의 협정 같은 것도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읍들을 멸시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그들의 호소를 정의대로 판단하거나 그들의 탄원을 자비롭게 들어 주는 일을 멸시한다. 그는 매우 쉽게 그들의 주인이 되었고(비록 그것들이 "견고한 성읍" 이라고 불리울지라도) 또 그들에게서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멸시하며, 모든 사람들을 칼로 칠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즉 그는 어떤 사람도 존중하지 않으며 그가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야 할 자들에게 동정이나 배려를 베풀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에게 오만하고 거만하다. 온 인류를 짓밟는 일에서 긍지를 느끼는 자요, 존귀한 자에게 존경심을 지니지 않고 비참한 자에게 동정을 베풀지도 않는 자이다.
2. 그러므로 그는 어떤 조건으로도 화해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용사들" 은 대적에 대한 자기들의 역할을 다 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소란스럽고 무례하게 짓밟힘을 당하는 것을 만족해야 하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밖에서 부르짖게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국가를 위해서 당당한 적수를 만나서 할 바를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화친을 맺기 위해 히스기야가 보낸 "평화의 사신도," 그가 매우 교만하여 협상하기 힘들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실망으로 상심하여 "슬피 곡할" 것이다. 그들은 그를 달래기 위한 모든 시도가 실패한 것을 알고서 어린아이들처럼 울 것이다.
3. 그 나라는 그 대적으로 인하여 얼마 동안은 아주 황폐케 될 것이다.
(1) 아무도 그 길을 다니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역과 통상은 중지되었고, (설상 가상으로) 어느 누구도 엄숙한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안전하게 올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대로(大路)는 황폐하였다." 밭이 대로처럼 짓밟혀져 황폐케 될 때, 대로도 "행인이 끊치기" 때문에 밭처럼 다니는 사람이 없게 되어 황폐케 된다.
(2) 어느 누구도 땅으로부터 유익을 얻지 못했다(9절). 땅은 지금까지 자기의 산물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봉사할 수 있는 것을 즐거워했으나, 이제는 이스라엘의 대적이 그 산물을 먹어 버리거나 짓밟아버렸다. 그래서 땅은 "슬퍼하고 쇠잔도하다." 그 땅은 우울해 보이고 그 땅 백성은 그들 자신과 그 가족들을 위한 필요한 양식이 모자라게 되어 그 얼굴이 수심에 찬다. 예전의 추수의 즐거움은 이제 탄식으로 변한다. 세상적인 모든 기쁨은 이처럼 덧없이 시들어 버린다.
황폐가 전박적인 것이 된다. 열 지파에 속했던 지역은 이미 황무케 되었다. "백향목으로 유명한 레바논, 장미꽃으로 유명한 샤론, 가축으로 유명한 바산, 곡식으로 유명한 갈멜은 모두 매우 비옥했으나 이제는 광야처럼 되었기 때문에, 그 옛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그것들은 이전의 상태와는 매우 다르게 된 것이다. 때에 알맞게 그 주인의 손에 모아지곤 했던 그것은 그 때가 이르기도 전에 그 약탈자의 손에 다 그 열매를 떨어치는도다."
Ⅵ.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 교만한 침입자를 치시기 위해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것이다(10-12절). 사태가 이처럼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1. 그 때 하나님은 그 자신을 귀히 드러내실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무관심한 방관자로서 계신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제 일어나리라. 이제 내가 나타나 행할 것이며, 그것을 통해서 내가 나를 증거할 뿐만 아니라, 높임을 받을 것이다." 그는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만유의 하나님이시며 가장 높은 자보다 더욱 높으시다는 것을 증명하실 것이다. "이제 내가 나를 지극히 높이리라. 내가 행동할 준비를 할 것이며 활기있게 행할 것이고, 그 일을 통해 영광 받으리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나타나시는 시기는 그들의 상황이 가장 쇠퇴기가 되었을 때, 곧 "그들이 무력하고 갇히 자나 놓인 자가 없을 때" (신 32:36) 이다. 돕는 자들이 모두 끊어졌을 때, 그 때가 하나님이 도우실 시기이다.
2. 그가 앗수르 사람을 파멸시키실 것이다. "너희 앗수르 사람들은 너희가 예루살렘의 모든 재물을 소유하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부풀어 있고, 또 그렇게 되기까지 수고를 하나, 너희 모든 희망은 허사가 될 것이다. 너희가 겨를 잉태하고 짚을 해산할 것이다. 그것들은 무가치하고 아무런 유익도 없을 뿐 아니라, 너희 호흡이 불이 되어 너희를 삼킬 때 좋은 연료 구실을 할 것이다. 즉, 너희 죄의 호흡, 너의 사악한 호흡은 하나님의 진노의 입금을 촉발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을 치기 위해 내뿜는 위협과 살기는 너희 자신을 삼킬 것이며, 하나님과 그의 이름을 거슬러 내뿜는 너희 불경스러운 호흡도 너희 자신과 저희 이름을 삼킬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혀(말)가 그들 자신에게 떨어지도록 (실현되도록) 하시며, 그들 자신의 호흡이 그들을 불사를 불에 부채질하도록 만드실 것이다. 그 때에 그 백성이 횟돌가마 속에 있는 "횟돌 불같이" 될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횟돌가마 속의 횟돌은 서로가 엉켜서 불에 타고 있다. 또 "잘려나간 가시나무같이" 된다는 것도 그렇다. 잘린 가시나무가 마라 시들었었으므로, 불이 잘 붙고 또 순식간에 다 타버린다. 앗수르 군대으 멸망이 바로 그러했다. 그 멸망은 잘 아껴두었던 가시나무를 불태우는 일이나 어떤 좋은 일을 위해 횟돌을 불에 굽는 것과 같다. 앗수르 군대를 불태움으로써 여호와의 능력에 관한 지식이 세상을 밝혀 주었고, 그의 이름은 눈부시게 빛나게 되었다.
●희망의 예언 (이사야 33:13-24)
여기에 주의를 요청하는 서문이 있다. 또 가까이에 있거나 멀리 있거나 간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것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마땅하다(13절).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너희 먼 데 있는 자들아 들으라." 먼 지역에 있는 자들과 미래의 세대에 속한 자들로 하나님께서 행한 것을 듣게 하라. 그들은 실상 그것을 듣는다. 그들은, 가까이에 있는 자들, 곧 그 이웃 민족들과 그 당시에 살았던 자들과 마찬가지의 큰 확신을 가지고, 성경으로부터 사건에 대해 들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듣는 자마다, 먼 데 있든지 가까이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권능과 그는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자.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듣고서도, 그의 권능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자들은 매우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러면 우리가 주목하고 그 속에서 그의 권능을 인정해야 하는 그의 행위는 무엇인가?
Ⅰ. 하나님은 시온에 있는 죄인들에게 두려움을 급파하셨다.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떨었다" 고 했다(14절). 시온에는 죄인들, 곧 시온의 특권을 누리고 시온의 봉사에 협력하나 그 마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지 않은 사곡한 자(위선자)들이 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외형적 신앙 고백을 미끼로 은밀한 죄의 소굴에 거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위선자임을 증명한다. 시온에 있는 죄인들은 다른 죄인들보다 더욱 크게 문책받을 것이다. 그리고 시온에 있는 그들의 처소가 그들의 안전함을 보장해 주기는커녕 그들의 죄와 그들의 벌을 더욱 무겁게 할 것이다. 시온에 있는 그 죄인들은 항상 은밀한 놀람과 공포의 지배하에 있었을지라도, 이제는 자책감으로 인해 평소보다도 더욱 간담이 서늘해졌다.
1.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곧 거기에 불을 질러 그것을 재로 만들 준비를 하며, 벌집을 불사르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들은 자기들은 애굽으로 피신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한 편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지시리라는 것을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 들려주신 그 약속을 믿을 수 없었을 때, 어찌할 바를 몰랐고 미친사람처럼 이리저리 도망하면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성읍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자. 여기에서 사는 것은 영영히 불타는 불과 함께 사는 것과도 같다." "우리를 위하여 누가 삼키는 불을 막아 주리요?" (혹자는 그것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이 퍼질 때, 시온의 죄인들이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를 여기에서 보라. 그들은 위협만 받고 있을 때는 그 심판을 경시하고 무시했다. 그러나 그들이 심판을 받게 되었을 때, 곧 다른 궁지에 몰리게 되었을 때, 그 때에 그들은 그 심판을 과장하여 큰 변인 듯이 말한다. 그들은 그것을 "삼키는 불과 영영히 타는것," 그리고 구제와 도움이 끊어진 것이라고 부르고 있다. 말씀의 명령을 거역하는 자들은 곤궁한 때에 안위함을 얻을 수 없다. 또는 오히려
2. 앗수르 군대가 멸망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왜냐하면 그것의 멸망은 바로 앞에서 언급되었던 그 불이기 때문이다(11, 12절). 시온에 있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무서운 일을 행하는가를 알았을 때는, 자기들이 다른 신들을 은밀히 섬김으로써 이 하나님을 격동케 했다는 것을 알고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렇게 외친다.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리요?" 즉 가시나무처럼 거대한 군대 앞에 거하겠는가? "우리 중에 누가 타는 불과 함께 거하겠는가?" 즉 앗수르 사람들을 불에 굽는 횟돌같게 만든(12절) 이 불과 누가 함께 있겠는가?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아니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
시온의 대적들에 내린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 시온의 죄인들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다윗 자신도 그런 심판을 보고 떨었다(시 119:120). 하나님 자신이 이 소멸하는 불이시다(히 12:29). 그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삼상 6:20) 하나님의 진노는 스스로 자기를 불태우는 연료가 된 자들을 영영히 태울 것이다. 그것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요 저절로 소멸되지 않을 불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멸하는 영혼의 양심을 벌 주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진노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대담한 죄인들도 그것에 대항할 수 없으며, 그것의 시행을 견딜 수 없고, 그 무서움을 예상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우리의 피난처이신 그리스도께로 도망함으로써 장차 임할 진노를 피하도록 하자.
Ⅱ.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자기를 의지하던 그의 백성들의 안전을 도모하셨다. "이를 듣으라. 그리고 의롭게 행하고 정직히 말하는 자를 높은 곳에 거하게 하시는 일에서 그의 권능을 알라" (15, 16절).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 수 있다.
1. 선한 자의 성품이다. 그는 모두가 죄악에 빠진 시대에도 여러 가지 면에 자기의 선한 성품을 보존한다.
(1) 선한 자는 의롭게 행한다. 그는 생활 전체에서 공의의 법대로 행하며, 모두에게 공평히 대하는 것, 즉 사람에게는 사람의 것을 돌리고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것을 합당하게 돌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의 행함은 의(義) 자체이다. 그는 조금도 부당한 일을 고의적으로 행하려 하지 않는다.
(2) 그는 정직히(문자 그대로 보면) "정직" 을 말한다. 그는 참되고 올바른 것을 정직한 의도를 품고 말한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서 저렇게 말할 수 없으며, 이 길을 보고서 다른 길로 배를 저어갈 수 없다. 그의 말은 그에게 있어 맹세처럼 신성한 것이며, '예' 하고 다시 '아니오' 하지 않는다.
(3) 그는 그릇된 방법으로 얻은 것을 탐내지 않고 경멸한다. 그는 그 이웃을 착취함으로써 스스로를 부요케 하는 것을 천하고 더러운 것으로 여기며, 그런 것을 존경받는 자로서는 합당치 않은 일로 생각한다. 그는 나쁜 일을 행하기를 멸시했고, 나아가 그렇게 함으로써 이득이 생길지라도 가혹한 일 행하는 것도 멸시한다. 그는 얻는 것 자체를 과대평가하지 않으므로, 정직하게 얻어지지 않은 것은 곧 가증히 여긴다.
(4) 그는 언제든지 정의를 굽게 하는 뇌물이 손에 들어오면, 그에게 뇌물이 자기에게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를 모욕으로 생각하여 크게 혐오하면서,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한다."
(5) "그는 귀를 막아," 잔인한 일이나 피흘리려는 꾀를 또는 보복하도록 충동하는 어떤 암시도(욥 31:31) "듣지 아니한다." 싸움을 즐기면서 "함께 제비를 뽑자" 고 유혹하고(잠 1:14, 16) 자들의 말에 대해 그는 귀를 막아 버린다.
(6) 그는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한다." 이처럼 죄를 싫어하므로, 그는 다른 사람들이 범죄하는 것을 참아 보지도 못하며, 범죄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스스로 경계한다.
자기 영혼의 결백함을 보존하려는 자들은 육체의 소욕을 엄격히 감시해야 하며, 유혹에 대해서 귀를 막고, 허탄한 것을 보지 않도록 눈을 돌려야 한다.
2. 선한 자가 받는 위로를 보자. 그는 모두가 재앙에 빠지는 시기에도 위로를 보존할 수 있다(16절).
(1) 그는 안전하게 될 것이다. 그는 삼키는 불과 영영한 불을 피하게 될 것이다. 그는 삼키는 불이신 하나님께 접근하여
그와 교제를 나눌 것이다. 그 하나님이 그에게는 오히려 기쁨의 빛이 될 것이다. 그리고 현세적인 환난에 대해서도 "그는 높은 곳에 거하여" 그것이 미치지 않는 곳, 아니 그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있게 될 것이다. 그는 현세적 환난에 의해서 실제적인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는 그것에 크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 "큰 물의 홍수가 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그 물이 엄습해 온다 하더라도, "견고한 바위가" - 인공적으로 뿐만 아니라 자연적으로 요새화되어 - 강하고 끄떡없는 "보장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안전하게 지킬 것이며 그 능력에 대한 그의 믿음은 그를 편하게 할 것이다. 만세반석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높은 망대가 되어 주실 것이다.
(2) 그는 필요한 것을 공급받을 것이다. 그는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가장 철저히 포위되어 식량 공급이 끊어질 때에도 "양식이 공급되는 물은 끊치지 아니하리라." 즉 그에게는 반드시 물이 끊임없이 공급될 것이다. 따라서 그는 물을 조금씩 그리고 놀라면서 마시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자기들에게 유용한 것이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Ⅲ.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보호하실 것이며, 그 침입자들의 손에서 건지실 것이다. 그들을 위협한 이 광풍은 그칠 것이며,
그들은 다시 번영을 누릴 것이다. 이들의 형통함에 대한 여러 가지 사례가 여기에 제시되어 있다.
1. 히스기야는 베옷과 얼굴의 모든 슬픔을 벗어버릴 것이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왕복을 입고 기쁜 모습으로 공중 앞에 나타나(17절) 사랑하는 모든 신하들을 크게 기쁘게 할 것이다. 의롭게 행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양식과 끊이지 않는 물을 먹게 될 뿐만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아름다움도 그들 위에 임할 것이다.
2. 포위 공격으로 인해 그들이 예루살렘 성벽 안에 감금되어 있었지만, 이제 그들은 대적의 수하에 떨어질 위험이 없이 사업이나 즐거움을 위해 밖으로 나갈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광활한 땅을 보리라." 즉 그들은 그 나라에서 가장 먼 곳까지 방문하고 그 인접한 지방의 경치를 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오래 감금된 후에 그렇게 하는 것이 더욱 큰 즐거움을 줄 것이다. 이처럼 믿는 자들은 천국의 가나안, 매우 멀리 있는 그 땅을 바라보며, 환난 때에도 그것에 대한 전망으로 스스로를 안위한다.
3. 그들이 겪었던 그 두려움에 대한 기억은 그들이 구원된 것에 대한 즐거움을 더해 줄 것이다. "너의 마음에는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하여 내리라." (18절). 즉, 그 두려운 일이 끝났을 때는, 즐겁게 그것을 회상할 것이다. 너는 아직도 너의 귀로 모두를 이렇게 외치는 경종을 듣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각자 자기 부대로 돌아가라. 계산하던 자 또는 서기관이 어디 있느냐? 그로 하여금 점호명부를 작성하게 하라. 공세를 칭량하던 자, 그리고 군대의 회계장관이 어디 있느냐? 각기 충분한 인원수를 확보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로 하여금 그들에 관한 보고서를 가져오게 하라."
아니면, 이 말들은 앗수르 군대가 격파되었을 때 외친 예루살렘의 개가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바울 사도도 이 세상 학문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격파된 것에 대해 개가를 부를 때, 이러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고전 1:20).
그 처녀 시온의 땅은 그들의 모든 전투 준비를 멸시한다. 앗수르 군대의 서기관이나 검열관이 어디 있느냐? 그들의 무게를 다는 사람(즉 회계 장관)이 어디 있으며, 망대를 계수하던 기사들은 어디 있느냐? 그들은 모두 죽었거나 도망했다. 그들은 끝장이 났다.
4. 그들은 앗수르 사람들을 보아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앗수르 사람들은 본래 강포한 백성이었고 유대 백성에게는 특히 그러했다. 그리고 그 앗수르 사람들은 이상한 방언을 썼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탄원이나 호소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것을 유대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구실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앗수르 사람 자신의 의사를 이해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방언이 어려워서 네가 알아듣지 못한다. 이 사실이 그들을 더욱 무서워하게 만들었을 것이다(19절). 그러나 네 눈은 이처럼 강포함 그들을 다시 보지 않을 것이며, 그들이 모두 시체가 될 때의 그 변한 안색을 보게 될 것이다."
5. 그들은 다시는 예루살렘 - 시온과 거기에 있는 성전 - 의 위험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20절). "우리의 절기의 성읍 시온성을 보라. 거기서는 우리의 엄숙하고 신성한 절기가 지켜지며, 우리는 그곳에서 종교적 모임을 갖고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만나곤 했다."
그들 중에 있는 선한 사람들은 이 환난의 시기에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온을 위해 고심했다. 즉 그것은 그들이 절기를 지키는 성읍이었고, 그 정복자들이 그 성전을 불태워 그들이 다시는 엄숙한 절지를 지키지 못하도록 하려했던 것이다. 공적인 위험이 닥칠 때에는, 우리의 신앙에 대해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절기의 성읍은 강한 성읍이나 곡창 성읍보다 더욱 귀중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하시리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이다. 즉 예루살렘은 거룩한 의식을 행하는 성읍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 성읍을, 백성의 영광으로 알아서 그것을 지키도록 하자. 그러면 우리는 그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서 한 방어책을 마련해 주리라고 믿게 된다.
예루살렘에 대해 여기에서 다음 두 가지 사실이 약속되어 있다.
(1) 확고한 기초가 있는 안전의 약속이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안정된 처소" 가 된다고 했다. 그들은 이전처럼 전쟁이나 핍박의 칼의 경보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고 방해당하지 않을 것이다(29:20). 그것은 우리의 절기의 성읍인 것과 마찬가지로 안정된 처소가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집에서 안정을 얻은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에서 평안히 거하여, 거기에 우리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더욱 바람직하다. 예루살렘이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네 눈에 그것이 보일 것이다" 라고 했다. 이것이 선한 사람에게는 매우 큰 만족이 될 것이다(시 128:5, 6). "너는 예루살렘의 복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너는 생전에 그것을 볼 것이며 그것을 누릴 것이다."
(2) 옮겨지지 않는 안정의 약속이다. 예루살렘, 곧 우리의 절기의 성읍은 새 예루살렘과 비교해 볼 때, 실상 "장막" 에 불과하다. 현재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는 미래를 위해 보존되어 있는 그것과 비교해 볼 때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예루살렘은 "옮겨지지 아니할" 그러한 장막이다. 이 고통이 끝난 후, 예루살렘은 오랫동안 확고한 평강을 즐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장막의 말뚝과 줄 - 신성한 특권 - 은 옮겨지지 아니할 것이며, 또 그 종교적인 사업의 진로와 범위를 방해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땅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장막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록 이곳 저곳으로 이동될지라도, 세상이 서 있는 한, 뽑혀지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각 시대마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섬길 후손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언약의 약속은 결코 뽑히지 않을 교회의 말뚝이요, 복음의 규례와 제도는 결코 끊치지 아니할 그 줄이다. 그것들은 비록 천지가 요동할지라도 흔들릴 수 없는 것이요, 남게 될 것이다.
6.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보호자와 구주가 되실 것이다(21, 22절). 이것이 그들의 확신의 주된 근거이다. "영화로우신 여호와가 되시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기 영광을 보이실 것이며, 우리에게 영광이 되실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그 대적이 겨루는 영광을 무색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주님이 되심으로써 또한 영광스러운 주님이 되신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구주가 되실 것이며, 그의 영광스런 주님이 되실 것이다.
(1) 외적으로는 그들의 적에 대한 호위자가 된다. 그는 넓은 하수나 강이 둘림 같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대부분의 큰 성읍들과는 달리 기드론 시내 외에는 그 주위를 흐르는 중요한 강이 없었으므로, 무역과 통상에 가장 큰 편의를 주는 것들 중 한 가지이며, 가장 훌륭한 자연적인 요새 중의 한 가지가 결여되어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그들의 대적은 그들을 업신여겼고, 그들을 쉽게 손에 넣으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은 우리에게 있어서 언제나 피조물의 결합과 피조물의 장점과 아름다움의 결함을 언제든지 충분히 메워 준다. 하나님 안에는 모든 것, 우리가 필요로 하고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이 있다.
예루살렘은 다른 장소가 가지고 있는 많은 외적인 이점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으나, 하나님 안에는 그에 상당하는 이상의 것이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 둘레에 넓은 하수나 강이 있었다면, 침입자의 함대가 쉽게 그곳에 접근할 수 있겠는가? 접근 할 수 없다. 이것은 노질하는 배가 "통행치 못하고", 용사나 위풍당당한 배가 통행치 못할 하수와 강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강이 되신다면 대적들은 거기에 접근할 수 없다. 그들은 거기에서 길을 발견할 수도 없으며 그들의 길을 강행할 수 없다.
(2) 그들의 나라 안의 일에 대한 안내자로서 이다. "여호와는 우리의 재판자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게 해명할 의무가 있으며, 그의 심판에 우리 자신을 의뢰하고, 또 그의 심판에 따라 처신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건대) 그가 우리를 위해 재판하실 것이다.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이시다. 그의 말씀은 우리에게 율법이며, 우리 안의 모든 생각은 그에게 복종한다.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는 그에게 경의와 조공을 드리고 어김이 없는 충절을 바친다. 따라서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보호가 충성을 요구하듯이, 충성은 보호를 기대할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의 보호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에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방백과 구주로 삼으며 또한 그를 의지하고 우리 자신을 그에게 바친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얼마나 높이 강조되어 있는가를 살펴보라. 그들은 이것으로써 그들 자신을 안위하고 있다.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자존자(自存者)이요, 자족자이며, 우리의 모든 것을 넉넉히 채우시는 자이다" .
7. 그 대적들은 완전히 얼이 빠질 것이며, 그들의 모든 능력과 계획은 파선하리라. 마치 날씨가 험악해서 폭풍을 이겨낼 수 없으며, 돛대가 끊어져 돛대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고, 또 아무런 수리도 할 수 없어서 파선된 배처럼 무너질 것이다(23절). 앗수르 사람의 "돛대 줄은 풀렸다." 그들은 선원들이 돛대 밑을 튼튼히 할 수 없음을 알고 포기해버려 곧 갈아 앉게 될 또는 도대 줄이 풀린 배와 같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틀림없이 예루살렘을 얻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전처럼 그 항만에 마구 들어와서 모든 것이 자기들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때에, 배를 아주 멈추게 되었고, "돛을 달지 못한" 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의 진노를 퍼 부우실 때까지 항해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교회의 원수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거의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그 때에, 흔히 무력하게 되고 무장해제를 당한다.
8. 그들의 진영의 재물은 유대인들에게 풍성한 노획물이 될 것이다.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리라" 고 했다. 앗수르 군의 절반 이상이 살륙당했을 때, 그 나머지는 혼비백산하여 다급하게 도망했으므로 (아람 사람들처럼) 그들은 "장막을 그대로 버려두고 갔다." 따라서 그들의 모든 보화는 포위당했던 자들의 손에 떨어졌다. 심지어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했다." 집에 머물러 있던 자들도 노략물을 나누었다. 그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으므로, 강한 자뿐만 아니라 손이 불구여서 싸울 수 없고 발이 불구여서 추격할 수 없는 저는 자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위험을 겪지 않고서도 승리를 얻게 될 뿐 아니라, 애쓰지 않고서도 약탈물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노획물이 매우 풍부하기 때문에, 먼저 서둘러온 자들이 원하는 만큼 많이 가져 간 후라도, 늦게 온 저는 자가 충분히 가져가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악한 것에서 선을 내셨고, 예루살렘을 건지셨을 뿐만 아니라 부요케 하셨고, 그들이 당한 손실을 풍족하게 보상해 주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두려움과 고통은 흔히 이처럼 기분좋고 만족스런 결과로 끝났다.
9. 병과 죄가 모두 제거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결과가 이렇게 될 때, 병은 긍휼 가운데 제거되며 심지어는 죄까지도 제거된다.
(1) "그 거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다.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마찬가지로 병든 자도 그들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몸을 움직여 그 버림받은 적진으로 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노획할 것이다. 또는 이 말씀은, 이 때를 맞이하여 전체적인 환희가 있을 것이므로, 병든 자들도 잠시 자기들의 아픔과 그 슬픔을 잊어버리고 함께 그 기쁨에 연합할 것을 뜻할 수도 있다. 그들의 성읍이 건지우는 것이 그들의 치료가 될 것이다. 또는 대게 오랜 포위 공격의 결과는 전염병이지만 예루살렘의 경우는 그렇지 않을 것이며, 그 거민들은 그들의 승리와 평화와 더불어 건강도 또한 지니게 될 것이며, 그들의 대문 앞에서는 병 때문에 원망하는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시사할 수도 있다. 또는 병든 자들은 예루살렘에게 일들이 잘되는 것을 보는 동안에는 불평없이 그들의 병을 견디어 낼 것이다. 우리의 개인적인 근심은 공적인 긍휼에 대한 우리의 감사 속에 갈아 앉아야 한다.
(2) "거기 거하는 백성이 죄사함을 받으리라." 민족적 심판이 제거됨으로써 민족이란 집합체의 죄책이 사함받게 될 뿐만 아니라, 거기에 거하는 각 사람이 회개하고 개심함으로써 죄를 사함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모든 은총의 기저가 되는 것으로서 약속되어 있다. 하나님은 실로 그렇게 하실 것이며, 그들을 위해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히 8:12).
죄는 영혼의 병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실 때 병을 고치신다. 그리고 죄라는 병이 용서의 긍휼에 의해 고쳐질 때, 육신의 병의 가시는 뽑혀지고 그 원인이 제거된다. 그러므로 그 거민은 더 이상 앓지 않게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내가 병들었노라" 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외적인 고통으로 인하여) 죄악이 제거된다면, 우리는 그 외적인 고통을 불평할 이유가 거의 없게 된다. "아들아, 기뻐하라. 네 죄가 사함받았느니라."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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