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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오경에 나타난 '축복'과 '심판'

by 은총가득 2022. 4. 29.
'축복'과 '심판'은 누가 내려 주나  
구약 안 율법과 신권 권력과의 관계 이야기

 

구약 안에 역사, 시, 영웅 이야기, 지혜 등 다양한 장르들 가운데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율법(Law, Torah)은 신권 권력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보기로 하자.

우리가 구약성경을 펼치면, 처음부터 읽게 되는데,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첫 다섯 권의 책을 오경(五經)이라고 한다. 창세기부터 모세의 출애굽 사건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로 전개되어 흥미를 갖는다. 하지만 출애굽기 20장에서 십계명을 읽은 뒤부터는 각종 율법들이 신명기까지 빼곡하게 나열되어 있어, 지루하고 여간 인내심을 갖지 않으면, 한 줄 한 줄 읽어 나가기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중간에 읽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창세기를 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관통해 나가는 주인공은 바로 모세 한 사람이다. 구약에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름만 나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많게는 일, 이십 장의 분량을 차지하기도 하는데, 모세는 네 권의 책을 차지하고 있으니, 그의 비중을 짐작케 한다. 그러면 과연 모세와 그 많은 율법들은 일치하는 것일까? 다시 말해 실제의 역사적 모세와 그렇게 많은 율법들을 선포한 모세는 같은 인물일까 하는 질문이다.

 

가르비니(Giovanni Garbini)는 "구약에서 모세와 모세 율법은, 포로기까지 모세가 실제로 없는 상황에서도 계속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경에서 모세가 많이 언급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금부터 약 3300년, 기원전 13세기(출애굽 연도는 기원전 1280년경)에, 한 사람이 그처럼 정교하게 많은 율법들을 자신의 기억 속에 포함시켜 선포할 수 있었겠는가? 모세는 사막에서 이동 중이었고, 구약 본문대로 한다면, 거의 일백만 명을 거느리고, 먹을 것, 마실 것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과연 모세가 가만히 앉아 정교하게 고대 함무라비 법 등 주변 세계의 법체계뿐만 아니라, 이미 정착한 사회와 종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율법들을 비교, 검토하고, 제정해 낼 수 있는 여유가 있었을까?

모세의 시대는 기원전 13세기경이지만, 율법의 많은 내용들이 훨씬 후대인 기원전 10세기의 왕정 시대, 훨씬 더 내려가 6세기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포로기 시대, 귀환 후 페르시아 제국의 속국으로 있던 시기까지 만들어진 율법들이 모세가 전하는 형식으로 들어와 있다. 그러니까 대부분 후대에 만들어진 이스라엘의 율법들이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접두어가 붙은 후에 선포하는 문학적 표현으로, 모세라는 카리스마 인물 안에 모두 집어넣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가르비니는 "모세가 고대 이집트에서 선택된 백성을 이끌고 나온 인물이었지만, 바벨론 포로기에는 그가 모델이 되지 못하고, 그 대신, '모세의 율법으로 대치되어 바벨론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새로운 유일신 종교를 위해서 만들어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오경 안에 모세의 율법은 최종적으로 포로기나 페르시아 제국의 관점에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통합, 제2성전의 제사장 주도권, 예루살렘과 바벨론 포로 지역 간에 긴장감, 유일신의 확립 등을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수 있는 의로운 사람으로 모세를 상정한 것으로 본다. 왕정 기간 내내 대부분의 왕들은 백성들을 억압하고, 다른 종교들을 섬겨 그들의 권위가 떨어졌기 때문에, 광야 시대로 소급하여 올라가, 모세의 권위로 선포하게 한 것이 아닐까 가정해 본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시대마다 다른 신권 권력이 세속의 질서를 유지하고 지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며, 종교적으로도 어떻게 통제해야 했기에, 율법들 한 조항 한 조항은 지배이념과 밀접할 가능성이 컸다. 여기서 율법들 모두를 사법시험 준비하는 식으로 다 다룰 수는 없다. 이미 구약학자들은 율법들의 중요한 사상적 맥락들을 다루었고, 필자는 '축복'과 '저주'가 율법들 속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오경 문헌들 속에 지배 이념

구약학에서 현대적 비평을 제시한 학자는 독일의 율리우스 벨하우젠 (Julius Wellhausen)의 <이스라엘 역사의 서막 : Prolegomena to the History of Israel> (1895)이다. 여기서 그는 오경의 문헌 가설을 주장했으며, 그 가설은 1세기 넘도록 지금까지 구약학에서 유효하게 쓰이고 있다. 오경에서 자료들에 따라 하나님 이름이 주(Lord, Yahweh, 독일어 Jahve, J 문서)와 신(God, Elohim, E 문서), 이렇게 제각기 다른 신명을 쓰는 것에 착안을 하여, 자료들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원전 1000년 무렵 부족 동맹에서 왕정으로 변화하면서 나온 것으로 본다.

기원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요시야 왕 때 발견되었다는 신명기의 핵심부인 12~26장이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D(Deuteoronomy) 문서, 끝으로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유다 왕국이 막을 내리고, 바벨론 포로가 뒤따르던 절박한 위기는 제사장 집단(Priestly Group, P 문서)의 작업을 촉발했고, 마침내 기원전 400년경에 오경이 출현하게 되었다.

오경 자료들은 출애굽 시대(기원전 13세기)부터 포로기(기원전 6세기 중반)와 페르시아 제국 초기 시대까지 긴 세월들을 담고 있다. 오경의 역사적 정황은 모세라는 중심인물이 출애굽을 하여 광야와 가나안 땅에 정복해 들어가는 40년을 배경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실제 그 사이사이에 들어가 있는 내용들은 모세 이전 시대부터 바벨론 포로기까지 약 800여 년의 자료들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오경은 이스라엘이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위기 또는 심각한 변화를 기록 형태로 재확인하고 굳건히 다지는 구실을 했다. 그리고 신권 권력 역시 오경의 문서들에 지배 이념들을 넣으며, 백성들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한편 오경은 이야기와 율법,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전통과 사회라는 큰 틀 안에 자료의 문서들이 뒤섞여 있다. 기원전 922년, 솔로몬 왕 이후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국가가 갈리고, 각기 다른 왕조의 전통으로 내려갔다. 학자들은 J 문서는 남유다, E 문서와 D 문서는 북이스라엘로 보며, P는 나라가 없는 시기인 포로기 이후 페르시아 제국 시대로 보고 있다. 따라서 오경의 같은 이야기 자료들도 남과 북이라는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르게 전승되었고, 이름과 이야기들 묘사가 다르게 나올 수 있다. 마치 땅 속의 지층을 파고 내려가면, 모래층, 진흙층, 바위층, 자갈층 등이 번갈아 뒤섞여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다.

 

그래서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오경보다도, 이스라엘 왕정 기간 동안 오경을 엮어 내면서, 어떤 의도로 이 전승들을 수집하고 만들고 편집하고 수정했는지 점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특히 이스라엘 왕정의 제사장들은 성전, 제사, 축제, 그리고 성전에 바치는 세금 등의 행정을 관장하는 국가권력이며, 종교 권력이었다. 한마디로 국가가 신권 권력을 기반으로 했다.

 

예루살렘의 제사장과 왕이 주변의 페니키아 왕과 다르지 않았다. 더 확대해 본다면, 메소포타미아의 제국들과 이집트 제국들의 규모면에서 차이가 큰 차이가 있을 뿐, 신권권력의 본질과 속성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이러한 뒷배경을 이해하지 않고 오경을 읽으면 말 타고 가면서 산을 보는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오경의 문자들, 개념들, 이야기 사건들, 율법 등에 어떤 지배이념이 담겨있는지를 파악해야만 오경의 정확한 해석을 해낼 수 있다.

여기서 대부분 기독교 신자들은 이 같은 필자의 주장에 대해 하나님의 계시를 부정한다거나, 성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며, 하나님을 인간적인 동기로 격하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고대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에서도 보았듯이, 신권정치를 펼쳤으며, 그들이 만들어 낸 신화들은 백성을 지배하고 동원하기 위해서 신을 끌어들여 이용했다. 구약성서도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상당 부분 이러한 시각들을 열어 놓지 않으면, 구약을 옹호하고 정당화만 하는 앵무새 같은 신학이 될 수 있다.

결국 신권권력이 백성들에게 율법들을 지키게 하려면, 감시와 통제의 기능이 있어야 했고, 그것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축복'과 '저주'(심판)라는 인간의 본래적 마음에 파고드는 것이었다.

 


2. 율법의 감시와 규율적 종교 권력 - 축복과 저주

오경 율법의 문학 구조 패턴을 보면, 율법을 만드는 주체 또는 주어는 하나님이고, 전달자는 모세이며,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출 20:22; 25:1; 30:11, 17, 22, 34; 31:1, 12; 40:1; 레 1:1; 4:1; 5:1; 6:1, 8, 24; 7:22; 8:1; 12:1; 13:1; 14:1; 17:1; 18:1; 19:1; 20:1; 21:1; 22:1; 23:1; 25:1; 27:1)

"네가 백성 앞에서 공포하여야 할 법규는 다음과 같다" (출 21:21; 참조. 27:20).

이 문학적 표현의 특징은 강한 신적 메시지와 모세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표현들을 빼고 율법 내용을 보면, 여느 법들과 다를 바 없이 똑같다. 모세의 반응은 강한 긍정이다: "주께서는 저의 이름으로 불러 주실 만큼 저를 잘 아시며, 저에게 큰 은총을 베푸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다면, 제가 주를 섬기며,,,, 부디 저에게 주의 계획을 가르쳐 주십시오"(출 33:12~13). 주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겠다. 그리하여 네가 안전하게 하겠다"(출 33:14). 이 이후에는 모세가 주어가 되고 백성들이 대상이 된다 :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아놓고 말했다. '주께서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명하신 말씀은 이러하다'" (출 35:1).

 

하나님이 모든 율법들을 선포할 때마다, 서두에 이러한 문장들을 집어넣어, 모세의 위엄을 높인다. 반대로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백성에게는 강력한 제재나 심판을 내려, 두려움과 공포심을 갖게 했다. 사소한 일상생활에 금지 조항들을 만들어, 이를 어겼을 때 죄의식을 갖게 하고, 성전에 봉헌물을 바치도록 했다.

신권 권력은 바로 이 점을 파고들었다. 하나님이 율법을 제정하고 선포하는 것 같지만, 이것은 명목상이고, 실제로는 신권 권력이 자기 시대에, 자기들에게 유리한 율법들을 제정하고 선포하여 백성들을 통제하고 지배한 것이다. 백성들은 신의 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 그 심적, 물질적 부담을 지면서, 지배 질서에 순종하고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주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문학적 표현에서, 이때 주님은 누구인가? 진정 신(하나님)인가? 아니면 신권 권력인가? 곧 오경의 율법을 선포하는 하나님은 신권 권력으로 대치해도 무방할 듯하다. 그들이 지배하기 위해서 필요해 만든 법들이기 때문이다. 신권 권력이 '주님' 행세를 하며, 모세를 끌어들인 것은 아닐까? 신권 권력은 '주님과 모세'라는 권위에 백성들이 감히 도전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모세 이야기에서 백성들이 모세에 저항하자, 사막에서 질병에 걸려 죽은 사건들을 이야기 속에 담았기 때문에, 그러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이다. 민수기 14장에서 사막에서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자, 주께서 "나를 원망한 사람들은 이 광야에서 시체가 되어 뒹굴 것이다"(민 14:1~38, 26~38에서 여러 번 언급하고 있음).

 

하나님과 모세는 규율적 권위의 최고에 올라 있어 백성들을 제재하고 처벌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하지만 신권 권력이 하나님과 모세보다 더 위에서 조종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신명기에 오면,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는 문장 형식이 아니라,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전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 "이스라엘아, 들어라. 지금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주는 규례와 법도를 귀담아 듣고, 그대로 하여라"(신 4:1; 5:1; 6:4; 9:1; 10; 12; 11:1, 8; 26:16).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표현이 삭제되고, 백성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 "이것은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이다"(신 6:1). "이스라엘아, 들어라"(Hear, O Israel)고 백성에게 직접 계시한다.

 

이 상황은 출애굽기와 레위기, 민수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하던 방식에서, 하나님이 백성에게 직접 명령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은 권력 구조의 큰 변화로 볼 수 있다. 즉 신권 권력이 하나님과 모세를 이용한 것에 대한 반발 내지는 반대적인 것으로, 백성을 계시받는 주체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신명기 문서가 북 이스라엘 전승을 이어받고 있는데, 그 뿌리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 정신에서 나오고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시내산 전승(Sinai tradition)이라고 부른다. 그 의미는 해방과 평등 정신을 지키는 것이며, 나중에 예언자들의 사회와 권력을 비판하는 정신의 모체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신명기에 표현된 "하나님이 백성에게 말씀하셨다"는 표현이 더 원류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오경에서 신명기를 제외한 대부분이 후대 신권 권력이 모세에 덧칠하여 율법들을 첨가시킨 것과 비교할 때, 더 솔직하고 정직하다고 하겠다. 신명기 율법이 북 이스라엘 동안 만들어졌고, 멸망 후 남 유다로 흘러들어와, 기원전 622년 요시야 왕 때 발견되었고, 그는 이 율법과 정신을 바탕으로 개혁을 시도했다.

요시야 때의 신명기 문서에는 모세 대신에 백성이 등장하고, 신명기 27장에서 다시 모세가 등장하는 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그래서 신명기 5-26장의 중간 문서들에 모세가 등장하지 않은 것은 요시야 개혁 시기나 포로기 직후에 모세로부터 유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시야 시대에 신명기 정신, 곧 가난하고 낮은 백성들에 관심 갖는 율법 정신을 고려했다고 볼 수 있다.

 

노트(Noth)와 로핑크(Lohfink)는 신명기 4장이 신명기 역사서(여호수아부터 열왕기하)의 서론이라고 하며, 가깝게는 신명기 5~26장의 많은 율법들을 알리는 첫 포문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즉 신명기 34장 끝에는 모세가 죽는 장면이 나오는 만큼, 신명기서 전체에서 여전히 모세가 계시를 받는 주체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으로 등장하는 것은 신권 권력에 아직 오염이 안 되었거나, 이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하나님이 모세에게든 백성에게든 율법을 선포한다'는 직접적인 계시는 결국 백성들의 잠재의식 속에 하나님이 항상 지켜보고,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나 고대 이집트에서 신권정치는 왕과 제사장이 직접 대중들 앞에서 신적인 권력을 행사했지만, 구약에서 신권 권력은 이들이 하나님의 뒤에, 신의 치마폭에 숨어, 하나님을 대리자로 내세워 권력을 행사하는 차이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신권 권력은 항상 이중적인 모순을 구약사 전역에서, 아니 오늘날 기독교까지 보여 준다고나 할까?

 

 

가. 십계명 속에 ‘감시와 처벌’의 하나님

오경(五經)을 히브리어로 '토라'(Torah, הרות)라고 부르는데, '가르침', '교훈', 또는 '율법'의 의미를 갖고 있다. 오경의 첫 책인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전반부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나머지 네 권은 대부분 율법을 차지하고 있다. 앞의 이야기 구조(창세기와 모세의 출애굽 이야기)가 끝나고 율법의 첫 포문을 여는 것이 바로 십계명이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 거룩한 산에 올라 신비스러운 장면들 - 번개, 천둥, 짙은 구름, 뿔나팔 소리, 산기슭에 자욱한 연기, 산의 진동 등 - 을 문학적으로 연출하는 것도 십계명과 이후 세세한 율법들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함이다. 말하자면 왕이나 대제사장의 즉위식과 같은 일종의 장엄한 선포식을 연상케 한다. 십계명이 고대 히타이트에서 종주국과 그에 복속된 속주 국가들과 맺는 국제 종주권 조약(Suzerainty treaty)과 같은 형식과 구조를 갖고 있다는 주장이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기서는 감시와 규율적 관점으로 보고자 한다.

 

십계명은 규율적 권력의 핵심인 '처벌과 축복'을 우선적으로 내세운다. 십계명은 우선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하게 금지하고(출 20:3), 우상을 만들지 말며(4절), 이어서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베푼다"(5~6절)고 선언한다.

 

고대 이스라엘이 주변의 제국들과 다신(多神)사회 환경에서 가장 우선시한 것이 유일신 사상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주변 나라들의 신들과 경쟁하는 듯한 모습도 연상되지만, 약소국가의 처지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은 그 나라들의 문화, 종교의 정신적인 예속과, 경제와 정치적인 종속을 초래하기 때문에 배타성을 내세운 것은 주체적인 신앙이며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십계명의 서두에는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출 20:1)는 선포를 통해, 이스라엘이 제국의 억압으로부터 탈출해 나온 역사적 공동체라는 하나님과 백성의 정체성을 주지시킨다. 따라서 유일신 사상은 단지 세상에 신이 한 분뿐이라는 것보다는, 사회, 문화, 종교, 정치적으로 독립하려는 의도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큰 전제가 있고 나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은 질투하는 분임을 밝힌다. 보통 주석가들은 하나님이 다른 신들을 예배하고 믿는 것에 대한 질투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금지는 신명기 4장에 의하면, 야웨의 자유와 주권을 지키는 것과 관련 있다. 여기서 '질투'는 하나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질투하는 하나님'(엘 카나, 'el qannâ')은 두 단어가 결합해 있다. 하나님이 질투하기 때문에 심판도 한다는 의미이다. 질투의 히브리어 '카나(qannâ)'는 사랑을 근본에 두고 하는 감정 표현이다. 질투와 미움과 사랑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을 때 나오는 감정이다. 무관심하거나 단절되어 있다면, 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투한다'는 말 속에는 다른 것들에 대한 금지를 주장할 수 있고, 그래서 '보고, 관찰하고, 감시'하겠다는 의중으로 확대 해석이 가능하며, 따라서 금지와 처벌(심판)도 내린다.

질투하는 하나님은 단지 감정으로 끝나지 않고, 심판과 질병, 죽임까지 이르는 이야기들을 앞에서 했기 때문에, 하늘 저 멀리 계신 초월적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 바로 현실에서 제재와 처벌을 하는 두렵고 공포스러운 단어가 될 수 있다. 과연 '질투한다'는 이 표현을 하나님이 했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아니올시다'(no)이다. 아니 '절대적으로 아니올시다'(absolutely not)이다.

 

결국 신권 권력이 고안해 낸 절묘한 문학적 표현으로 하나님이 질투하는(감시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통제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이 E 문서이고, 신 5:6~21절이 D 문서라고 하면, 모두 북 이스라엘 왕정 전승이다. E 문서가 개혁적 사상을 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왕정 체제에서 나왔고, 당시 신권 권력의 범주 안에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십계명이 신권정치를 대표하는 지배 이념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 신권 권력이 십계명에서 백성들에게 확실하게 감시하는 표현을 해 놓음으로써 (다른 말로, 말뚝을 박아놓음으로써), 이후 모든 율법들에 대해서 확실한 충성과 복종을 하도록 하는, 그래서 기선을 제압하는 선제적 단어라고 본다.

 

나. 오경에서 축복과 저주

창세기 처음부터 '축복과 저주(심판)'는 구약성서 전체를 관통해 가는, 중요한 신적 통제 중에 하나이다. 편집상으로 보아도 출애굽기의 십계명 이후부터 신명기까지, 그리고 신명기 사상을 근간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담은 신명기 역사서(여호수아~열왕기하)는 '축복과 저주(심판)'를 중심에 놓고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인간을 통제하기 가장 쉬운 것은 바로 신의 '축복과 저주'이다. 말하자면 당근과 채찍으로 길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포로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주게 하고, 사후 세계에까지 직결시킴으로써, 사실상 사람은 이 범주에 갇히게 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유하게 하고 해방시키는 축복은 극히 적고, 금지 조항이 훨씬 많아 축복보다 저주(심판)내리는 자로 인식된다. 그래서 구약을 보면 백성들이 자유와 해방보다는, 도덕적, 신앙적 두려움 때문에 신앙을 지키는 경우가 더 많아 보인다. 백성들이 큰 맷돌에 눌려 지내는 모습이 연상된다. 물론 인간의 죄성이 강한 면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신권 권력이 인간의 심성에도 파고들어 '저주와 심판'을 강조함으로써, 백성들은 성전 질서에, 제사장 질서에, 신권 권력 질서에 순응하고 복종하게 된다. 푸코가 말하는 '제재'의 기능이 바로 종교에서는, 그리고 구약에서는 '저주'와 '심판'이라는 기제가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이다.

고대에 가뭄, 지진, 화산, 질병, 전쟁 등은 심판이라는 것을 직접 체험하게 하여, 심판을 확실하게 각인시킨다. 이제 구약 처음부터 전체 맥락을 관통하고 있는 '축복'과 '저주'(심판), 이 둘 가운데 '저주' 쪽에 더욱 무게가 실리고 있는 오경의 내용들을 보기로 하겠다.

 

(1) 창세기에서 축복과 저주

먼저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창세기 시작인 아담-하와 이야기부터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 저주(심판)를 받으며, 카인이 동생을 살인하고, 노아 홍수, 바벨탑 신화들의 공통 주제가 하나님이 내리는 저주(심판)이다. 사람들이 창세기의 태고 신화들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을 추방시키고, 들판으로 쫓아내고, 물로 심판하고, 흐트러뜨리는 심판이라는 제재 의식이 각인되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저주와 처벌과 심판이라는 무서움 때문에 신에게 복종하게 되는데, 바로 신권 권력이 노리는 바다. 신권 권력이 하나님을 조종함으로써 백성들(사람들)을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책 1장 4절에서 다루었다.

아브라함 이야기로 가면, 국면 전환을 하여, 비전과 함께 축복이 나온다 :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창 12:1~3).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은 그의 자식을 바치는 충성심으로 절정(climax)에 오르고, 이삭에게'서 쌍둥이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지만, 서로 '축복권’ 때문에 뺏고, 도망치고, 갈등한다. 결국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는 복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다. 한 민족과, 많은 갈래의 민족이 너에게서 나오고, 너의 자손에게서 왕들이 나올 것이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너에게 주고, 그 땅을 내가 너의 자손에게도 주겠다"(창 35:11~12).

그리고 야곱이 임종하며 열 두 아들(지파들)에게 주는 유언을 한다. 여기서 열 두 아들에 각각 다르게 축복과 저주를 내리는데, 유다는 후에 다윗-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왕권을 갖기 때문에, “임금의 지휘봉이 유다를 떠나지 않고, 통치자의 지휘봉이 자손만대에 이를 것이라”(창 49:10)는 축복을 선반영한다. 이것은 지파시대의 삶의 정황에서 기원하는데, 각 지파들에 대한 언급도 독립적인 내용을 나중에 야곱의 유언으로 결합시켰다는 것이다.

 

창 49:10이 솔로몬 시대에 야웨 사가 J의 편집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면, 당시의 신권 권력이 지역 정세 또는 정치적 권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르우벤, 시므온, 레위, 잇사갈, 베냐민 부족(지파)에게는 저주 (심판)을, 스불론, 단, 갓, 아셀, 납달리, 요셉 지파에게는 축복을 내린 것으로 본다. 우리나라를 예로 들어, 고려나 조선 시대에 고구려, 동맹, 부여에는 축복을 내리고, 백제와 신라에는 저주와 심판을 내린다면 저주받은 지역 사람들은 좋겠는가?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다윗 솔로몬 왕정 시대에 신권 권력이 개개인뿐만 아니라, 부족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2) 출애굽기에서 축복과 저주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 내는 것이 축복이지만, 반대로 이집트에 대해서는 저주와 심판을 내린다. 모세가 파라오에게 보여 주는 열 가지 재앙(출 7:14~11:10)을 보면, 물이 피가 되고, 개구리, 이, 파리가 들끓고, 집짐승이 죽고, 피부병이 돌고, 우박이 내리고, 메뚜기 떼가 몰려오며, 어둠이 땅을 덮는다. 마지막으로 처음 난 것, 장자가 죽는 저주를 내린다. 이집트 병사들이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을 쫓다가 홍해 바다에 빠져 죽고. 이런 일련의 연속이 모두 저주와 심판이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재앙들을 보여줌으로써 이집트 제국을 치는 통쾌함도 있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심판자로 여기며, 한편 두려움도 갖게 된다. 우리가 고대 지중해권의 신화들도 보았듯이, 신권 권력은 신을 두렵고 심판자의 성격으로 하여, 백성들을 지배하는 것을 보았다. 야웨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를 건너 환희의 해방 노래를 한 것은 출애굽기 15장의 시편이다.
"내가 주를 찬송하련다.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1절)...바로(왕)의 병거와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빼어난 장교들이 홍해에 잠겼다. 깊은 물이 그들을 덮치니, 깊은 바다로 돌처럼 잠겼다(4~5절). 주님, 신들 가운데서 주와 같은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11절)...주께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손수 구원하신 이 백성을 이끌어 주시고(13절),,,그리고 아론의 누이요 예언자인 미리암이 손에 소구를 들고, 여인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15:20)"는 표현을 보면 해방의 기쁨이 잘 드러나 있다.

 

바로 이 장면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서 고난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구원시킨 축복의 절정(climax)라 할 수 있겠다. 출애굽기 15장에서 해방의 기쁨과 감격을 아주 잠깐 본 이후, 구약에서 해방의 감격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구약은 대부분 (필자가 보기에 어림잡아 98%) 부정적이고 심판적이고, 갈등적인 묘사가 주류를 이루어 어둡다고 하겠다.

 

(3) 레위기에서 축복과 저주

레위기 26장은 축복과 저주를 명확히 보여준다. "너희가, 내가 세운 규례를 따르고, 내가 명한 계명을 그대로 받들어 지키면, 비를 내리겠고(3~4절), 땅의 소출로 거두어들인 곡식과 과일이 너무 많아 배불리 먹고(5절), 원수들의 위협을 물리쳐 땅을 평화롭게 하며(6~9절). 자손이 많게 하겠다는 약속(9절), 하나님이 너희의 백성이 되며 함께 하겠다(11~12절)"는 내용으로 규례와 계명을 지킨 축복을 제시한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며, 하나님이 주관하는 자연 질서와 전쟁에서 승리를 보장하는 약속, 자손에 대한 약속은 분명히 완벽한 축복의 내용이다.

반면,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고, 모든 명령과 율법을 지키지 않고, 실천하지 않고, 어기면 보복할 것이며(14절), 갑작스런 재앙, 폐병과 열병, 곡식도 원수들이 먹을 것이며(16절), 원수들이 지배하고(17절), 땅이 소출하지 못하고(19-20절), 들짐승이 가족과 가축 떼를 공격하고(21~22절), 전쟁에 내보내서 원수의 손에 넘기고(25절), 먹을거리를 끊어서 배가 고프게 할 것이다(26절). 살던 마을도 폐허가 되며(31절), 성소도 땅도 황폐하고(31~32절), 살아남은 사람들은 원수의 땅에 끌려가 공포와 버림받아 살게 될 것(36~43절) 등을 말한다.

그런데 저주의 내용 중간에 세 번이나 "너희가 여전히 나를 거역하면, 나는 너희가 지은 죄보다 일곱 배나 더 벌을 받게 할 것이다"(26:18, 24, 28)를 강조한다. 점점 더 강하고 무서운 징벌을 내리겠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본성이 율법을 잘 지키기보다는 거역하기가 쉽기 때문에, 이처럼 처벌 조항은 더 강력하고 무섭게 나온다. 축복에 대한 언급이 26장 4~13절로 네 가지 내용을 제시한다면, 저주에 대해서는 26장 14~45절까지 그 분량도 세배는 길다.

 

레위기 26장의 축복과 저주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법률 문서들인 우르-남무(Ur-Nammu), 함무라비(Hammurabi), 바비론, 앗시리아 조약들 문서들과 관련을 갖는다. 심판과 처벌에서 원수의 손에 넘겨 포로 생활을 하는 것(36-43절)은 기원전 6세기의 포로기와 그 이후 페르시아 제국시대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본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 공동체는 국가적 멸망에 따른 좌절과 구심점을 갖기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오경의 율법들을 지키고, 실천하여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동기를 갖고 있다. 그래서 오경을 최종 손질하는 제사문서 P저자가 멸망과 포로의 결과를 알고, 그 원인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않았다고 보고, 그 내용을 광야시대로 소급시켜 모세의 권위 속에 넣은 것으로 본다. 다른 한편 포로기와 페르시아 시대에. 예루살렘 중심의 성전 권력이 백성들에게 당근(축복)과 채찍(심판)을 갖고 통제할 의도를 가졌을 것으로 본다.

 

(4) 민수기에서 저주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는 40년 동안 사막에서 많은 시련들을 겪는 내용들을 전한다. 그런데 탈출하기 전에는 '저주와 심판'이 이집트의 파라오(왕)를 향한 것이었으나, 탈출 후에는 그 대상이 백성으로 바뀐다. 곧 모세의 지도력이나 권위에 대해서 비판을 하면, 하나님은 가차 없는 심판을 내린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은 것에 비판했다고 하여, 미리암만 악성 피부병에 걸리는 벌을 받는다(민 12:1~16). 백성들이 광야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물과 식량이 부족한 것에 모세에게 불평을 하자, 백성 삼사 대 자손에까지 벌을 내린다(민 14:18). "주를 멸시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그 땅을 못 볼 것이며,,, 주를 원망한 사람들은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 광야에서 시체가 될 것이다"

 

민수기 13~14장은 야웨 사가(J)의 이야기로 보며, 14:11~25절도 대부분 야웨 문서(J)의 것이나, 편집자나, JE의 추가 내용으로 보는 경향이다. 또는 포로기 제사 저자(P)가 11b-25절의 야웨 문서를 신명기적으로 확대시켜 보존한 것으로도 본다. 야웨 문서(J)에 이미 심판 또는 저주 개념이 들어가 있다. 이것은 다윗 또는 솔로몬 시대에 야웨 사가가 백성들을 통치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응징을 모세 시대로 소급시켜 고안해 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야웨 사가는 모세의 지도력 이야기 속에 비판과 도전을 못하게 함으로써, 현재의 다윗 또는 솔로몬 왕권에 대한 비판과 도전을 금지시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야웨사가는 모세를 비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멸시한 것으로 말하며, 저주를 내린다. 다윗 솔로몬 시대에 신권권력은 백성들이 왕이나 지도자들을 비판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죽음과 저주를 받는다는 공포심을 넣어주는 구절이다.

 

이것은 곧바로 16장에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모세와 아론에게 반역을 한 이야기에서 분명하게 보여준다(민 16:1~50). 이들이 반역을 한 이유는 모세와 아론이 왜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가?(16:3)와 이 광야에서 죽일 작정인가?(13절)라는 것이다. 사실 이 질문들은 평범하고 타당한 내용이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인 것이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한 후, 고라에게 "너희 레위 자손이 성막 일을 하게 하였는데, 그것도 부족하여 너희는 제사장직까지 요구하고 있다. 아론을 거역하여 불평을 하는가?"(10~11절)라고 묻는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은 회중과 따로 있게 하고, 땅이 갈라지고 모두 죽는다(16:30~33). 반역에 가담한 250명이 불로 죽고(35절), 백성들에게 염병이 돌아 1만 4700명이 죽었다(49절).

이렇게 백성들의 반역에는 가장 무서운 재난의 징벌을 보여줌으로써, 마음속에 비판과 반역을 못하도록 철저히 봉쇄시키고 있다. 포로기 이후 제사 사가(P)의 신권 권력은 다윗 솔로몬 시대부터 반역을 못하도록 전승시켜 내려오던 자료를 이용하여, 현재 자기들의 성직 위계질서에 대한 도전과 같은 권력 갈등을 모세의 이야기 속에 반영시켜, 신권 권력을 지키기 위한 지배 이념의 수단으로 삼아 이용한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평신도들의 집단적인 반발을 고려한 것일 수도 있다. 또는 소수의 고위 제사장들이 다수의 하위 제사장들의 도전과 반역을 막는 방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백성들이 모세의 권위에 비판을 하거나 도전하면, 그 이유를 불문하고, 하나님이 자연 재앙과 질병을 통해 백성들까지 죽이는 장면이다. 이것은 모세의 강력한 지도력에 도전을 못하게 하며, 아론을 통해서 레위인들이 제사장직에 넘나보지 못하게 막고 있다. 왕정 초기부터 나라가 멸망한 시대까지도 신권 권력은 하나님과 모세의 권위로 하극상을 못하도록 광야 시대로 소급하여 차단시켜, 자신들의 신권 권력을 지켜가고 있다. 곧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신권 권력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좋은 방패가 되고 있음을 본다.

(5) 신명기에서 축복과 저주

신명기에서도 순종(신 28:1~14)보다도 불순종하여 받는 저주(신 28:15~68)가 내용적으로나 분량으로도 네 배는 더 많다. 신명기에서 십계명(5장)이 다시 등장하고, 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규율을 잘 지키면 자손이 오래오래 잘 살 것이며(2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가 잘 되고 크게 번성할 것(2절)을 제시한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면, 천대에까지 사랑을 베풀며(7:9), 주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당장에 벌을 내려서 그를 멸할 것(10절)을 말한다. 레위기에서 축복의 내용들과 비슷하며(7:12~8:10), 28:1~14절에서 다시 순종하여 받을 복을 다시 언급한다.

하지만 신 28:15~68에서 불순종에 관해 더 많은 언급을 한다. 내용은 레위기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구체적이다: 성읍과 들, 곡식 광주리, 가축들에 대한 저주(16~18절), 전염병, 폐병, 열병, 염증이 돌며, 무더위와 한발과 열풍(21~22절), 가뭄과 주검(23~26절), 이집트의 악성 각종 피부병들, 눈이 멀고 정신 착란증이 걸려도 고침을 받지 못하며(27~28절), 압제와 착취를 당해도 구원해 줄 사람이 없다(29절). 씨앗을 뿌려도 곤충들의 피해로 못 먹게 되고(38~40절), 외국 사람이 너희보다 높아지고(43~44절), 심지어 극한적으로 뱃속에서 나온 자식을 먹을 것(53절)을 언급한다. 이집트의 모든 질병과 재앙을 망할 때까지 내릴 것이며(60~61절), 마지막에는 몇 사람밖에 남지 않을 것이며(62절), 민족을 흩으실 것(64절)을 선포한다.

신명기의 저주 내용을 보면, 레위기보다 더 구체적이고, 매우 가학적(sadist)이다. 여기에 비하면 놀부 심보는 양반이다. 율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 돌아오는 처벌을 끔찍하게 두렵게 하여 순종하게 하려는 의도이었다. 물론 잘 지키면, 하나도 해당 사항이 안 된다고 하겠지만, 이 저주 내용이 무서워 '울며 겨자 먹기'로 지키려 했을 것이다. 요시야 왕 때 발견된 문서를 원신명기(12~26장)이라고 하면, 신명기 28장은 남유다에서 후대 첨가물로도 볼 수 있다.

북이스라엘 왕정시기에 신명기 율법(D) 기자, 혹은 신명기 그룹이 백성들을 강하게 통제하기 위한 언어 표현이다. 명분은 하나님의 명령과 규율들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구체적으로 제사장을 통해서 표현되기 때문에, 제사장 그룹의 권력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축복과 저주를 내리는 근간에는 '감시하는'(panoptic) 하나님이 있다 : "오랫동안 광야에서 머물게 하여, 너희가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그 속마음을 알아보려 했다"(신 8: 2).

종교에서 상(당근)과 벌(채찍)은 통제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오늘날 자연과학과 현대의학이 발달한 모습으로 본다면, 자연 재앙, 풍년과 흉년, 땅의 토질 조건이 지구의 기후적 조건에 따르며, 질병 역시 몸의 면역력과 기후적 조건에 따른다. 고대 사회에서 신의 진노와 심판에 따라 자연 조건이 달라진다고 본 것은 그 시대에 당연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준 명령과 율법의 준법 여부로 보았다. 이들 율법 속에 먹을 것, 질병, 신체 현상에 이르기까지 매우 세밀하게 제시하고, 그 준수 여부에 따라 개개인, 그리고 가족과 후손들이 축복과 저주로는 가는 기로에 서도록 하여, 일상생활 모든 것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스라엘 왕정 기간 동안 신권 권력은 자기 시대에 필요한 율법들과 지배이념을 모세시대로 소급시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축복과 저주'로 선포하는 형식으로 백성들을 통제했다.

 

한국의 한 대형교회 목사가 인도네시아와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인명 피해를 하나님을 안 믿는 국가라서 그랬다는 설교에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다. 하지만 기독교 국가라는 미국에도, 동부에는 거대한 태풍이, 내륙에는 회오리 돌풍이 강타하고, 서부에는 지진과 잦은 산불이 자주 난다. 이것에는 침묵을,,.

오경의 형성 과정은 다윗-솔로몬 왕정 시대와 그 이후 왕정 기간에는 강력한 신권 권력이, 국가가 멸망한 이후 포로기와 페르시아 제국 시대에는 제2성전 권력에 대한 주도권을 쥔 사독계와 레위계와 제사장 집단들이 새로운 신권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율법들과 신화들을 제정한 것으로 본다. 동시에 그 많은 율법들 위에는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인식을 시켜, 마치 인공위성처럼 올려놓아, 백성들의 모든 삶 자체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장치를 가동시켰다.

이렇게 왕정 시대와 포로기, 페르시아의 속국 시대에 제사장들은 오경의 이야기와 율법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모세의 권위를 비판하거나 도전하지 못하게 원천적으로 막음으로써, 왕 권력에 대한 비판과 반역을 막았다. 특히 현재의 페르시아 당국과 제사장들의 종교 권력에 대해서도 비판과 거역을 못하게 하는 장치로 이용했을 것으로 본다.

결국 구약의 신앙은 신권 권력이 만들어 놓은 축복과 저주라는 개념 안에 가두어 놓은 매우 미성숙한 신앙의 모습이라 하겠다. 한국교회도 '축복'과 '저주'(심판)를 아주 잘 이용하면서 급성장했다. 한국교회는 교인들에게 예수 믿고 성령을 따르면, 돈많이 벌고 잘살게 해 준다는 천박한 자본주의 축복으로, 주일날 교회 빠지고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을 안 하면 심판과 죄의식을 갖도록 하여, 교회 권력의 양적, 물질적 토대를 만들었다. 교회가 사회적, 역사적 책임은 무관심한 채,,,

[출처] '축복'과 '심판'은 누가 내려 주나 / 김은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