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에 나타난 거짓 교리들
시작하는 말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 자신들이 고백하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항상 교회 안팎으로부터 도전을 받아 왔었다. 교회는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핍박을 대항해야 했으며 동시에 내부에서 발생한 이단 사상들로부터 사도들이 전한 교회의 복음을 보존해야 했다. 이러한 도전들은 교회의 기초가 되었던 사도들의 시대가 끝나갈 즈음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주후 64년을 전후해서 교회는 교회의 신앙을 대표하는 바울과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 등 세 명의 대표자들을 잃게 되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당시 알려진 교회의 대표자들이었다(갈 2:9). 이런 상황에서 불경건한 사기꾼들이 교묘하게 교회에 침입해 들어와 무분별하고 불안전한 신자들을 유혹해서 하나님을 멸시하도록 조장하고 있었다(J. Calvin).
이러한 현상들이 발생하게 된 배경에는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과 이 세대의 대격변을 통한 종말에 대한 약속이 실제로 성취되기보다는 연기되고 있다는 관점이 작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사도 시대가 끝나가고 교회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점에서 교회는 시대적 사명을 확인해야 했다.
그것은 ①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사도들의 복음을 보존하기 위해 성경의 권위를 확고하게 하는 일과 ② 사도적인 신앙이 그릇된 믿음에 대한 절대적이며 확실한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정립하는 일과 ③ 거짓 사상의 도전을 무찌르기 위한 바른 신학의 정립하는 일이었다.
이 글에서는 사도시대에 나타났던 거짓 가르침과 거짓 신앙과 거짓 사상들에 대한 사도들의 대책을 살펴보고 우리 시대의 교회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삶의 지표로 삼고자 한다.
1. 바울과 관련된 복음에 대한 거짓 교리들의 도전
1) 유대화주의자들의 도전
가장 먼저 교회가 만나게 된 거짓 교사들은 갈라디아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유대화주의자들이었다. 이 유대화주의자들은 이방인 회심자들에게 할례와 율법의 규례들을 적용하기 위해 유대로부터 온 거짓 교사들이었다. 그들은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갈 1:7)을 전파했는데 이들은 이방인 회심자들에게 할례의 증표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였다(갈 5:2-12). 이 거짓 교사들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었다(Ralph P. Martin).
이에 대해 바울은 할례를 주장하는 그들의 가르침을 ‘다른 복음’이라고 규정하고 성도들은 ‘이신칭의’에 근거한 복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규명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수리아의 안디옥 교회에서도 발생했었다. 바울은 이 ‘다른 복음’의 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며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는 이방인 회심자들에게 할례를 시행하지 않도록 결정하였다.
2) 반율법주의자들의 도전
갈라디아에 나타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유대화주의자들과 비슷한 정체를 가진 일단의 무리들이 고린도 교회에서도 발견된다. 소위 자신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주장하는 이 무리들은 바울이나 베드로나 아볼로가 전파한 것과는 다른 예수, 다른 성령,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고후 11:4-5 참고). 이들에 대한 바울의 묘사에는 그들이 히브리인이요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요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하는 자들로(고후 11:22-23; 갈 2:4와 행 15:1, 5 참고) 외부로부터 고린도 교회로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었다(고후 3:1).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특별한 지식(γνωσις, 고전 3:18-20; 8:1-3, 10, 11; 13:9)을 받았으며 그 이전의 모든 계시의 권위, 즉 구약과 사도들의 권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이전의 모든 표준들과 모든 도덕적 의무 사항들이 폐기되었고 모든 금기 사항들이 무의미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고전 6:12; 10:23)고 하는 자랑스런 논리를 주장했다. 이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고난과 실패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 이해하는 일종의 승리주의적 관념에 빠져 있었다. 이 무리들이 반율법주의 자세를 취하면서 고린도 교회에서 행하던 주의 성찬은 일종의 축제와 주연의 자리로 바뀌고 말았다.
그들은 ‘새로운 지식’을 자랑하면서 성령의 은사들을 앞세우며 자신들을 높이는데 현혹되어 있었다(고전 12-14장). 더 심각한 것은 육체를 무시하고 육체의 부활도 거부했다(고전 15장). 그들은 장차 성도가 하나님 나라에서 수행하게 될 왕 노릇을 이미 행하고 있었다(고전 4:8). 그 정도로 자신의 권위를 세운 그들은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도 의문을 피력하고 바울 사도의 권위를 부인하기에 이르렀다(Robert L. Reymond).
이 거짓 교사들은 유대화주의자들과는 달리 할례를 강력하게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강압적인 권위를 부리면서도(고후 11:19-20)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당하거나 열심히 복음 사역을 위해 수고하지 않았다(고후 11:23). 바울은 이들을 가리켜 자칭 그리스도의 일꾼들이었지만 거짓 사도들이며, 속이는 일꾼들이며,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며, 사탄의 일꾼들이라고 혹평하였다(고후 11:13, 15, 26).
3) 종교적 혼합주의자들의 도전
골로새 교회와 에베소 교회는 유대인의 민중 신앙과 브루기아 지방의 토착 신앙 그리고 기독교의 기초적인 가르침이 뒤섞인 종교적 혼합주의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골 2:8)는 점에서 지금까지 나타난 유대화주의자들이나 거짓 교사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종교적 혼합주의자들의 가르침은 ① 자기들이 신지론적(theosophic)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비한 지혜 또는 일종의 비술(occult)로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했다(골 1:9, 28; 2:3, 8, 23; 3:16; 4:5). ② 그들의 가르침에는 의식적(ritualistic)인 성격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할례를 강조하고 음식법과 특별 절기 준수를 강조하였다(골 2:11; 16-17; 3:11). ③ 또한 금욕적(ascetic) 성격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지나치게 금욕을 강조하고 육체를 천하게 여기고 있었다(골 2:21, 23). ④ 그리고 마술적(magic)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천상의 신들에게 의식적 행위와 금욕을 통해 그것들의 능력과 접촉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골 1:16; 2:10, 15; 4:3, 9). 이처럼 브루기아 지방에 나타난 거짓 가르침은 다양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기독교 역사상 등장하는 최초의 혼합주의 성격을 가진 이단이라 할 수 있다.
거짓 가르침을 전파하는 이 혼합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을 보충함으로써 에베소 교회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기독교의 초보 단계를 넘어서 충만하고 완전한 단계로 이끌어 준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이들의 주장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위대성과 그의 속죄 사역의 충족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임을 직시하고 참 복음이 가르치는 우주적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 풍성함과 놀라운 위대함을 제시하면서 실현된 종말론을 통해 이 거짓 가르침을 반박하였다(Robert L. Reymond).
4) 유대 민족주의자들의 도전
빌립보 교회 역시 골로새 교회와 에베소 교회와 비슷한 문제로 신학적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바울은 이들의 정체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지만 수신자들이 이들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단지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이들의 거짓 가르침에 크게 유혹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빌 3:2).
이 거짓 가르침은 유대적 율법주의(빌 3:2, 6-8)와 완전주의(빌 3:12-16) 그리고 일종의 자유 방임주의(빌 3:18-19)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주장이 에베소 교회와 골로새 교회의 이단과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거짓 가르침을 주장하는 무리들이 여럿으로 각기 다른 주장을 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혼합된 하나의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빌립보서에 등장하는 이 거짓 가르침은 유대교의 우수성을 신봉하는 유대 민족주의자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정체는 유대인들 혹은 이교에서 개종한 유대교인들일 가능성이 높다(Gerald F. Hawthorne). 이들이 자신들의 민족적 신분을 나타내는 표지로서 할례를 주장했던 이유는 민족적 지위를 재확인하려는 정치적 갈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들은 할례를 받아들임으로써 진정한 이스라엘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의 이면에는 완전주의라는 거짓 주장이 도사리고 있었다. 또한 장차 올 파루시아(parousia)에 대한 소망을 부인함으로써 도덕적 책임을 소홀히 하는 자유 방임주의로 흐르고 있었다. 이 거짓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이 고난과 역경과 손실들이 전혀 없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리스도인은 이미 영적인 사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이 땅에서 천상의 삶을 살게 될 것을 신봉하고 있었다.
반면에 바울은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성도들에게 고난이 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 허락된 것이다. 바울이 옥에 갇힌 것 역시 바울이 거짓 사도이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도임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표적이었다. 성도들이 누리는 최종적 완전이란 미래에 얻을 소망이며 끈질긴 노력이 소요되는 달리기 경주와 같이 성도들은 미래의 소망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빌 3:12-15).
때문에 바울은 현재의 완전성을 신랄하게 부인하면서 동시에 장차 올 파루시아를 강조하고 있다(빌 3:20-21). 이 파루시아에 대한 소망은 새 생명에로의 부활이 그 보증이 됨과 동시에 이 세상의 삶에 대한 윤리적 관심을 요한다. 바울은 성도들의 삶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기반으로 개인적, 사회적 관계를 이루어 가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빌 2:1-5). 이에 바울은 고난과 희생적인 순종의 길을 따라 그리스도의 주되심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성도들 역시 바울처럼 고난과 희생적인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2. 사도적 복음을 부인하는 거짓 교사들
1) 베드로후서에 나타난 거짓 교사들
베드로가 지적하고 있는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의 생활과 교훈을 통해 예수님의 주되심을 부인하고 있었다(벧후 2:1). 그들은 교회에서 거룩하게 수행하고 있는 사랑의 사귐인 애찬을 더럽혔으며, 그들 자신들은 부도덕했으며, 음란한 생활을 통해 성도들을 오염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신자들의 생활에서 율법의 위치를 감소시키고 자유와 방임을 강조함으로써 성도들을 방종에 빠뜨리고 있었다(벧후 2:10, 12-13, 18-19).
이 거짓 교사들은 화려한 말솜씨를 앞세워 그럴듯한 재치를 내보이며 자신들의 이익을 탐하고 있었다. 심지어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온갖 추태를 부리는 것까지도 서슴지 않았다(벧후 2:3, 12, 14, 15, 18). 그러면서 그들은 거만하고 냉소적이었다. 특히 주님에 대해서나 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해서 또한 천사들에 대해서 그러했다(벧후 2:1, 10, 11).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도들의 복음을 제시하기보다는 환상이나 예언을 강조했다(벧후 2:1).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분쟁을 일삼았으며 스스로 우월 의식에 빠져 있었다(벧후 2:2, 10, 18). 무엇보다도 그들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할 뿐 아니라 재림의 사실에 대해 조롱하고 있었다(벧후 3:3-4). 그리고 자신들의 주장을 증거하기 위해 구약의 예언들과 바울 서신들을 왜곡하고 도용하고 있었다(벧후 1:18-2:1; 3:15). 그러면서 자신들의 지식이 출중함을 자랑했다(Michael Green).
이러한 이단들의 활동으로부터 교회를 보존하는 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삶의 특징을 이루는 덕목들에 있어서 영적인 진보뿐이었다. 영적인 진보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열매는 맺는 성도들의 덕목을 통해 확인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가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2:5-7)고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덕목들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고 있다는 증표(벧후 2:4)이기 때문이다.
2) 유다서에 나타난 거짓 교사들
유다서는 대부분 거짓 교사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에 할애되어 있다(유 5-16). 여기에서 유다는 모세오경에서 취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로 들어 광야 세대, 범죄한 천사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거짓 교사들과 동일한 범주에 넣고 있다(유 5-10). 이어 거짓 교사들에게 ‘화’를 선포한 후에 그들을 구약성서의 세 명의 악한 죄인들, 즉 각기 하나님을 배반한 가인, 발람, 고라와 연결시키며 그들의 행위와 특성을 묘사하고(유 11-13) 그들의 악한 행실을 묘사하고 있다(유 14-16).
이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하나이신 주재,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있었다. 유다는 이 거짓 교사들의 정체나 그들이 범하고 있는 교리적인 오류보다는 그들의 방종한 행동을 통하여 그들이 근본적으로 기독교의 은혜의 교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구속력을 무시하고 비도덕적인 탐닉을 마치 합법적인 것처럼 여기는 방종주의자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보다는 자기 자신들의 꿈을 더 앞세우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성령론이 아예 결여되어 있었다.
더 문제가 되는 것들은 그들의 도덕적인 결함이었다. 이들은 이성이 없는 짐승들보다도 못한 짓들을 하고 있었다(유 10). 그들은 부자연스러운 탐욕에 제멋대로 탐닉하고 있었으며 분명히 정욕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더렵혀져 있음을 의미한다(유 23). 그밖에도 이들은 불만에 차 있었고 무례하며 탐욕적이었다(유 16). 어떤 점에서 그들은 금전적인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잘못된 사상을 이용하고 있었다.
유다는 이들을 가리켜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 온 거짓 교사들이라고 밝히고 있다(유 4). 그들은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음란하고(유 4, 8), 권위를 멸시하며(유 8-10),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웠다(유 12). 그들은 스스로 공동체의 지도자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가르침에는 내용이 없었고(유 12-13), 스스로 자신들을 자랑하는 자들이었다(유 16). 유다는 이 거짓 교사들의 형태들이 구약과 사도들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으로 제시하며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고 있다.
3) 요한 1서에 나타난 이단과 그 정체
교회의 복음을 위협하는 사상들로부터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나가던 교회는 사도 시대 말기에 또 다른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와도 연결되었다. 당시 교회는 여전히 유대적 색채를 강하게 유지하려고 하는 일단의 무리들과 헬라적 영향으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못한 일단의 무리들로 인해 야기된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전자의 문제는 바울 서신서들에서 충분히 다루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교적 신앙의 영향 아래 있는 후자의 경우에는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헬라의 이교적 체계는 이원론적 배경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헬라적 사고 방식에 길들여져 있었던 회심자들이 예수님의 온전한 사람되심(humanity), 즉 성육신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Stephen S. Smalley). 이들 회심자들에게 있어서 나타나는 주된 문제점들은 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확고한 신뢰에 대한 것(벧후 3:3-4), ②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확고한 신뢰에 대한 것(유다서)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동시에 또 다른 일단의 거짓 가르침이 교회 안에 유포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③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확고한 신뢰에 대한 것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문제점들은 다분히 헬라적 이원론 사상의 영향에 근거하고 있다.
물질이 악하다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떻게 최고의 신이 인간이라는 불결한 육체와 연합하기 위해 땅으로 내려올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이해의 폭을 넘어서는 문제였다. 이런 이유에서 그들은 신적 말씀이신 천상의 그리스도는 실제로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며 단지 인간의 형태를 지닌 것처럼 보였을 뿐이며 공생애 동안 그리스도의 몸은 실체가 아닌 환영이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몸의 실체를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그리스도를 구별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 때 천상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강림하셨으며, 그가 십자가에서 처형되기 직전에 그에게서 떠나셨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신적 존재가 예수의 세례 시 그에게 임했으나 십자가 처형 이전에 예수를 떠났기 때문에 예수는 단지 그리스도가 아닌 인간적 존재로서만 고통을 당했다는 것이다(I. Howard Marshall). 이러한 주장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었다(요일 2:22; 4:2-3).
이들에게 있어서 성육신한 하나님이란 개념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들은 모든 물질이 악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육체와 접촉하셨다는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인간 예수와 단지 인간의 모습을 취한 것으로 보였을 뿐인 천상의 그리스도를 구분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물질, 즉 육체와 같은 본래 악한 것을 타고나셨다는 이례적인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결국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존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인성을 포기하는 방법을 택했다(Donald Guthrie).
이처럼 이교적인 신앙이 기독교에 접목되면서 교회는 신학적 위기를 가지게 되었다. 요한은 이러한 시대적 경향이 교회에 심각한 위험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적절할 대책을 강구할 필요를 가지게 되었다. 이에 대해 요한은 균형잡힌 기독론을 바탕으로 예수님은 태초부터 존재하신 분이며, 거룩하고 정결한 분이며, 마지막 때에 영광 중에 돌아오실 분임을 강조한다(요일 2:13-14, 20, 28-29; 3:2, 3, 5, 7; 5:20-21). 그리고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허상이 아니라 분명하게 역사적이며 실제적이고 참이었던 예수님의 사람됨을 강조하고 있다(요일 2:6; 4:2, 9, 17). 이렇게 함으로써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하신 그리고 사람과 함께 하신 분이셨다는 진리를 제시하고 있다(요일 1:1-4; 2:22-23; 5:1-2).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로 임하였으며(요일 5:6) 영원한 성자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요일 1:7)이라고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강조했다. 영원한 아들을 물과 피를 지닌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이 거짓 교사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바로 구원의 핵심이었다.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그분의 몸과 우리를 위해 흘려주신 그분의 피는 세상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었다(요일 2:2; 3:16). 뿐만 아니라 그분의 몸과 피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최초의 증거이자 그 사랑에 대한 최고의 보증이었다(요일 4:10).
요한은 그들을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단정하고(요일 2:4, 22; 4:20) 그들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있는데(요일 2:18) 이는 그들이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요일 2:18, 22; 4:3). 그들은 자신들의 우월한 교화를 통하여 도덕적으로 완전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우월감에 빠져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두움 속에서 무지한 채로 있다고 멸시했다. 그들은 스스로 새로운 도덕적, 영적 엘리트 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와 같은 태도는 교회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David Jackman).
요한은 이들이 전파하던 부적절한 관점들, 즉 잘못된 기독론과 윤리적 관점을 바로 잡고 기독교적인 믿음과 행함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요한은 사도적 복음을 유지할 것을 격려함으로써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신실한 신자들의 믿음과 결심을 강하게 하고 있다. 이 목적을 위해 요한은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적절한 평가를 받아들일 것과 그리스도인다운 도덕성을 갖고 행동하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것은 곧 신자들에게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신자답게 살아갈 것(요일 1:5-2:29; 3:1-5:13)을 권면하고 있다(Stephen S. Smalley). 이렇게 함으로써 요한은 참빛과 어두움의 본질을 면밀히 검토할 것과 끊을 수 없는 줄로 묶여 있는 다른 모든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참된 영성을 이어주고 있다(요일 4:20-21).
성육신 하셔서 실제로 존재하신 역사적 예수님과 나누었던 특별한 개인적인 관계를 너무나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요한이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가 가지는 위대한 핵심 진리들을 선포할 수 있었다. 아울러 성육신하신 성자를 믿는 사람들은 진실로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보증하고 있다(요일 5:13).
실재의 징표들과 그에 따른 보증의 표시들은 신비하거나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이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거룩한 삶도, 죄와의 철저한 단절도, 다른 신자들에 대한 깊은 사랑도 없이 하나님을 아노라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 못지않은 기만행위와 다를 바 없다. 믿음과 행위는 불가분의 관계다. 참된 빛은 참된 사랑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David Jackman).
마치는 말
사도 시대의 교회들
은 바울이 전한 이신칭의에 근거한 복음만이 유일한 교회의 신앙으로 고백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오신 그리스도이시며, 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과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사랑을 이루어 낸다는 진리를 지켜내었다.
이와 관련해 요한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7)고 사도들이 서신서들을 기록한 목적을 밝히고 있다. 이로써 교회들은 사도들로부터 받은 믿음 위에서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서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 교회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믿음에 근거한 이신칭의에 의한 구원만을 고백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신앙을 지속하도록 하고 더욱 신앙 안에서 발전하도록 하며 또한 잘못된 가르침 및 저급한 성도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 의해 미혹되는 것을 피하도록 독려해야 한다(I. Howard Marshall).
https://cafe.daum.net/correcttheology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생명에 대한 이해
가. 들어가면서
최첨단 과학 이론에 대한 기독교회의 반응을 비꼬아 나타내는 말이 있다. 새로운 이론이 발표되는 첫 세대의 교회는 그 과학 이론이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요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비판한다. 다음 세대에 가면 교회는 그 이론을 아디아포라의 하나로서 신앙의 본질에 무관한 것이라고 무시한다. 그러다가 그 다음 세대의 교회는 그 이론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게 된다(Krister Stendahl, “Immortality Is Too Much and Too Little,” Meanings:The Bible as Document and as Guide[Philadelphia:Fortress, 1984], 194). 그 대표적인 예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교회의 태도 변화이다. 요즘 간간이 흘러나오는 인간복제에 대한 문제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왔다. 지금 교계를 비롯 사회적인 문제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인간 복제 실험, 아니 이미 성공한 듯한 기술이 과연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대한 도전인가? 두 세대가 지나면, 이 문제에 대한 교계의 태도는 어떻게 변할까?
다음 세대가 어떻게 평가하든, 우리는 인간복제에 대한 의문을 덮고 넘어갈 수는 없다. 유전자 조작을 통하여 인간의 신체를 복제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명까지도 복제한다는 말인가? 혹은 새로운 인간의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말인가? 아니면, 신체만 복제할 뿐, 인간이 갖고 있는 고유한 생명까지는 복제한다고 볼 수 없다는 뜻인가? 여하튼 유전공학적인 측면과는 달리, 인간복제와 관계하여 생명의 문제를 검토하는 것은 그만한 의의가 있으리라 여겨진다.
여기서 제기하는 “생명”은 현재적인 측면에서의 인간의 생명을 뜻하지, 죽음 후의 생명이나 이른바 “영생(永生)”을 뜻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복제의 문제는 모든 인류의 현재 문제이지, 일부 그리스도인만의 혹은 죽은 후의 생명을 복제하는 것이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생명을 나타내는 단어의 용례들을 고찰함으로써 생명에 대한 이해를 밝혀 보되, 공관복음서들에 나타나는 이해로 제한하기로 한다.
나. 문제를 풀어가면서
1. 조에(ZWH)와 프쉬케(YUCH)
신약에서 생명을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용어로는 zwhv(조에)와 yuchv(프쉬케)를 들 수 있다. zwhv의 주된 용례는 신자들이 다가오는 세대에서 받게 되거나 현세에서도 누릴 수 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초자연적인 생명, 혹은 삶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몇 번 죽음과 대조되는 의미에서 육체적인 생명을 나타내기도 한다. 복음서들에서는 누가복음만이 두 번 정도 그렇게 사용할 뿐이다. zwhv가 예수님의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다”(12:15)는 말씀 중에 사용되나, 그 후에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 현재의 생명은 yuchv로 설명이 된다(12:19, 20). 다른 경우는 음부에서 고통 하는 부자의 지상 생활 때를 지칭한다 (16:25). 누가복음의 후편인 사도행전에서도 역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참된 생명을 가리키는 경향이나, 구약 70인역을 인용하면서 지상에서 취해질 현재의 생명을 나타내고(행 8:33), 하늘과 땅의 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zwhVn kaiV pnohvn)”을 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설명할 때 사용한다(17:25). 이 마지막 경우는 의미 있는 용례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예외적인 경우들 외에는 zwhv의 용례 고찰은 우리가 추구하는 현재적인 생명을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와는 달리, yuchv는, 비록 ‘영’, ‘영혼’, 혹은 ‘마음’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현재 지상에서의 생명과 관계하여 이해하는 경우가 주종을 이루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이 단어의 용례를 중심으로 생명의 이해를 살펴보기로 한다.
2. 프쉬케(YUCH)의 용례 개관
기본적으로 단어 yuchv는 인간의 자연적이고 신체적인 생명을 뜻한다. 이 단어는 죽음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이해되며(마 26:38∕막 14:34; 마 10:28; 막 3:4∕눅 6:9), 몸이 의복을 필요하듯 음식을 필요로 하는 생명으로 이해된다(마 6:25∕눅 12:22-23; 눅 12:19). “목숨[생명]을 찾다”(마 2:20), “목숨을 잃다”(마 10:39; 16:25-26∕막 8:35-36∕눅 9:24; 눅 17:33), “목숨을 주다”(마 20:28∕막 10:45), “목숨을 다하다”(마 22:37∕막 12:30∕눅 10:27), “영혼[생명]을 도로 찾다”(눅 12:20) 등은 ‘죽는 것’ 혹은 ‘죽이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yuchv는 감정을 지니는 인격체로 나타난다.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내 마음(yuchv)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막 14:34∕마 26:38)라고 하심은 이 단어 yuchv는 슬픔을 경험하는 주체라는 것을 보여준다(참고, 눅 2:35).
누가복음 1:46에서 마리아는 “내 영혼(yuchv)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pneu'ma)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이라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 표현에서 두 단어는 동격으로 사용되어 찬양하고 기뻐하는 마리아 자신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말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면 너희 마음(yuchv)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에서 단어 yuchv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그 사람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을 지칭한다. 그리고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yuchv)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마 22:37∕눅 10:27)는 말씀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구분하기보다 전 인격체를 나타내기 위하여 열거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즉, ‘목숨’도 마음과 뜻과 힘이나 다를 바 없이 혹은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한 사람의 인격체를 지칭한다. 곧 뒤이어 막 12:33에서는 다른 것들은 그대로 언급하면서 ‘목숨(yuchv)’을 빠뜨리고 그 말씀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의미에 있어서 차이는 없는 듯하다. 왜냐하면 이 ‘목숨’이 가리키는 것이 이미 다른 것들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즉, ‘목숨’은 다른 것들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비친다. 이렇듯이 ‘목숨’ 혹은 ‘생명’은 단순히 죽음에 반대되고 사람∕신체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서의 개념일 뿐만이 아니라, ‘생명(yuchv)’은 우리의 감정을 나타내고, 대인관계를 형성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랑하는 총체적인 인격체를 나타낸다. 여기에 이른바 감정적인 삶의 좌소와 종교적인 삶의 좌소 사이의 구분은 없다. 그러면 생명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이해를 본문을 통해 살펴보자.
3. 누가복음 12:13-34
누가복음 12:13-34에서 예수께서 자기 형제로부터 유업을 나누어 달라고 요청한 제자에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 후 제자들에게 목숨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교훈에서 생명에 대한 이해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이 본문에서는 zwhv와 yuchv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 부자의 “생명”(yuchv, 한글개역은 ‘영혼’으로 번역)을 도로 찾아가실 것으로 말씀하신다(12:20). 이 표현에서 생명은 하나님께로서 인간에게 부여된 바이며,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가시는 것으로 이해된다. 뒤이어, 예수께서는 사람의 생명과 몸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교훈에서 이 둘의 보호자는 하나님이심을 가르친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가 염려한다고 더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시사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불러 가실 때를 위하여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을 예비할 것을 교훈한다(눅 12:33).
4. 마태복음 10:26-33
이와 같이, 마태복음 10:28은 참으로 두려워 할 자는 “몸(sw'ma)과 영혼∕생명(yuchv)을 [둘 다]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이라고 한다. 본문은 ‘몸’만 죽일 뿐 그 이상 ‘영혼∕생명’을 죽일 수 없는 사람과 하나님을 비교한다. 몸과 영혼을 구분함으로써 사람이 이렇게 이원화되어있는 듯하나,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의 생명이 죽음으로써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까지 생명이 존속되어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이 있을 것이니 예비하라는 뜻이다(32-33절). 인간의 존재 전체를 관장하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과 영혼∕생명”을 둘 다 능히 지옥에 멸하신다는 표현은 오히려 이 둘의 구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는 이 둘이 총체적으로 취급됨을 보여준다. 이 표현은 또한 인간이 죽은 후 몸은 소멸되고 영혼∕생명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도 영혼∕생명뿐만 아니라(비록 새로운 형태일지 모르나) 몸도 존재함을 시사한다.
5. 마가복음 8:34-9:1
마가복음 8:34-9:1과 이에 병행하는 마태복음 16:24- 28, 그리고 누가복음 9:23-27은 제자도를 설명하면서 ‘목숨∕생명(yuchv)’을 언급한다(참고, 마 10:38-39; 눅 17:33). 막 8:35의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그것을(au*thvn)=목숨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그것을(au*thvn)=목숨을] 구원하리라”라는 말씀은 자기모순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특히 후반절의 “제 목숨을 잃으면”은 이미 잃어버렸음을 나타내는데, 어떻게 다시 “목숨을 구원하리라”하는가? 여기엔 목숨에 대한 어떤 구분이 있음이 틀림없다. 조건절의 ‘목숨을 잃으면’은 앞 절(34절)이 말한 바를 가리키는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뜻한다. ‘목숨∕생명’은 자기 자신을 가리키지, 자기의 어떤 한 부분이나 다른 어떤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즉 제자도는 현세적인 자아의 희생, 죽음까지의 희생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귀결절에 대명사로 나타난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별되는 생명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본문은 앞서 언급하였던 ‘목숨’을 대명사로 받음으로써 이 둘의 동등성과 연속성을 나타낸다. 현세의 목숨∕생명은 죽음으로써 소멸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구원의 대상이다. 따라서 현세에 있어서 육신의 자연적인 생명과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으로서의 생명 사이에는 어떤 구별이 없다. 또한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의 영광을 함께 누릴 자도 바로 이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본문에서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살게되는 생명, 참된 생명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참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됨으로써 얻게된다.
그렇다고, 우리의 본문이 이렇게 구원의 대상인 생명이 단지 미래의 영생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생명을 육신과 구별하여 생각할 인간의 그 어떤 한 부분으로만 여기지도 않는다. 그 생명은 육신으로 사는 생명이요, 잃을 수도 있으며, 구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마지막 심판에 있어서 (막 8:38) 이 현세의 삶∕생명에 따라[참고,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그 생명은 완성될 것이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것이다(마 16:27). 이런 맥락 속에서 막 8:36-37은 현세의 목숨∕생명의 고귀함을 역설한다. 우리의 생명은 온 천하보다도 더 고귀하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된 것이기 때문이다.
6. 마가복음 10:45∕마태복음 20:28
생명의 고귀함을 나타내는 또 다른 중요한 구절은 마가복음 10:45∕마태복음 20:28이 될 것이다. 예수의 목숨∕생명(yuchv)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함은 그 많은 사람들의 생명도 특히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귀한, 온 천하보다도 더 고귀한 그 예수의 생명을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도 사람의 생명을 고귀하게 여기셨기에 사람들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 예수의 생명까지도 희생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셨다.
7. 정리하면서
지금까지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yuchv의 용례를 중심으로 생명에 대한 이해를 검토했다. 정리하면,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으로서 인간의 어떤 한 부분이 아니라 인격을 나타내는 총체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생명은 몸과 구분된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음식을 필요로 하지만, 그것으로 생명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현실 생활에서 그 생명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랑하는 인격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죽음으로써 이 세상의 삶은 끝나지만, 생명은 영원히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존재이며 구원의 대상이 된다.
다. 나가면서
우리는 인간복제 문제와 관련하여 인간의 생명에 대한 이해를 공관복음서에서 찾아보았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것으로서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 앞에 책임 있는 존재로 나타날 인격체이다. 그러기에 복음서에서는 생명을 온 천하보다도 더 고귀한 존재로 규명하며, 예수의 생명까지 희생하여서라도 구원하실 대상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복제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까지 복제하여 동일한 인격체의 생명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두 개의 동일한 생명이 나타나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생명은 복제되어 양산(量産)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하시고 불러 가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복제될 때, 하나님께서 새로운 인격적인 생명을 부여하시겠는가는 또 다른 의문으로 남을 것이다. 만일 인간복제가 기술적으로는 가능한데 생명까지 부여받지 못한다면, 인격적인 인간이 아닌 동물적인 존재의 복제는 될지언정, 참 인간복제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연락 교수(안양대학교 신학과 교수/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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