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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사복음서의 저작 시기에 대한 고찰/ 7에고에이미

by 은총가득 2021. 12. 7.

     사복음서의 저작 시기에 대한 고찰

 

 

신약성경에는 특이하게 예수의 생애를 다룬 복음서가 네 가지가 있다. 성경의 순서에 따르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순이다. 그러나 학자들을 대체로 마가복음이 가장 빠르다고 주장하며, 가장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것을 ‘마가복음 우선설’이라고 한다. 그러나 근래의 몇몇 학자들은 마가복음 우선설에 희의적으로 반응한다. 그들의 주장은 일부이며, 마가복음 우선설을 재고할 근거가 희박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마가복음 우선설이 우세하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어록을 정리한 Q문서를 기반으로 예수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하여 공관복음으로 부른다. 공관복음은 동일한 관점에서 예수를 바라본다는 의미이지만, 비평학적으로 동일한 문서를 참고하여 만들었다는 의미다. 요한복음은 가장 후대에 기록된 것이며, 앞선 복음서들과는 서술의 방법이나 흐름은 상당한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을 가장 먼저 살피는 것이 순서이고, 그 다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다루고,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을 살펴보자.

 

1. 마가복음

마가복음의 저작시기는 대체로 AD64년과 AD70년 사이로 주장한다. 일부의 학자들은 70년에 일어났던 예루살렘 멸망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다하여 70년 이후로 잡기도 한다. 그러나 전통적 견해는 70년 이전으로 생각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바울 서신에 비해서도 상당히 늦은 시기에 기록되었다. 최초의 서신으로 알려진 갈라디아서는 남갈라디아설을 지지할 경우 48-50년이며, 북갈라디아설을 지지할 경우 57-58년이 된다. 가장 늦은 시기엔 58년을 잡아도 6년이나 빠른 셈이다. 그럼 왜 이렇게 늦은 시기에 복음서가 기록되었을까?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복음서를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경험했고, 기억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제자들의 순교와 죽음 등은 예수의 생애와 말씀을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마가는 급하게 예수님의 어록을 정리한 Q문서와 다른 몇 가지 자료들을 수집하여 급하게 예수의 생애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마가의 저작설을 전제한다면) 대체로 마가복음의 독자들을 로마에서 고난당하는 기독교인으로 본다. 네로 황제의 광기가 극에 달할 때 마가복음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읽혀졌고, 고난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답을 얻었다. 이것이 전통적인 마가복음에대한 관점이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는 근거는 무엇일까? 가장 확실한 근거는 마가복음이 마태와 누가복음에 의해 인용되었다는 점이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적지 않는 구절들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인용되고 있다는 점은 마가복음을 참고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마가복음을 그대로 인용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요한도 마가복음에 대해 알았을 것이라고 추측 가능하다. 랄프 마틴도 스트리터의 를 인용하여, ‘요한복음 기자도 아마 그 책(마가복음)을 알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마가복음의 것을 인용한 것인지, 마태나 누가의 것을 인용한 것인지에 대한 학문적 작업은 학자들의 몫으로 남겨두자. 그들은 이미 마가복음이 우선했음을 대부분 인정한다.

 

L. 방가나이는 2세기의 기록된 <베드로 복음>과 마가복음을 비교 분석한 후 <베드로 복음>의 저자가 마가복음을 친숙하게 알려져 있다고 말한다. 즉 마가복음을 토대로 베드로 복음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마가복음의 본문은 그 외의 초대교회 문헌에도 종종 발견된다. 헤르마스는 마가복음 6:52과 8:17을인용했다. 타티안은 사복음서를 하나로 묶은 <디아테살론>에서 마가복음에서 많은 부분을 가져간다. 초대교부였던 이레니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베드로와 바울)이 죽은 후에, 베드로의 제자요 해석자인 마가가 또한 베드로의 의해 선포된 것을 저술로서 우리들에게 남겼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역시 마가가 베드로가 선포한 복음을 자신의 복음서에 기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2세기 교부들은 마가복음을 인용하지 않은 듯하다. 그들의 문헌 속에 마가복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초대교회가 1세기 후반부터베드로가 아닌 바울의 지대한 영향력 아래 들어간 탓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리처드 보컴은 <예수와 그 목격자들>에서 매우 독특한 사실을 제시한다.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의 이름은 유난히 많이 기록되었다는 것과 공생애의 시작과 끝에 베드로를 배치시킴으로 ‘이 야기가 일찍부터 전승들 속에 자리 잡은 것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논외이기는 하지만 <젤롯>의 저자인 레자 아슬란은 마가가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으로 치부한다. 직접 인용해보자.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마가복음이 상당한 수준의 문학적 기교를 드러낸다고 전제하는데, 그러한 증거는 전혀 없다.(마가복음에 사용된 그리스어는 조잡하고 초보적인 수준이며, 이로서 마가가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아슬란의 일관된 주장은 갈리리 출신의 사람들은 무식하고, 열심?에 압도된 하층민으로 이야기한다. 투박한 마가복음의 문체는 그가 무식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직설적이고 맹백한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방법일 수 도 있다.

 

어쨌든 이러한 근거에 의하면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가장 빠른 시기에 기록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저작 시기에 대해서는 약간 모호하다. 대체로 70년 이전에 기록된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다른 복음서에 비해 마가복음은 초대교회 전반에 알려진 상태였으며, 그것을 토대로 다른 복음서를 기록할 결단을 하게 했을 것이다.

 

2. 마태복음

지금도 그렇지만 초대교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복음서는 마태복음이었다. 마소(E. Massaux)는 초대교회 문헌 속에서 마태복음이 얼마나 많이 인용되었는가를 치밀하게 살폈다. 그는 마태복음이야말로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저작물이었다고 결론 내린다. 예를 들어 디다케와 저스틴, 또한 다른 교부들의 문헌 속에서 마태복음의 내용이 적지 않게 인용된 것이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은 언제 기록되었을까?

 

랄프 마틴은 4복음서 문제를 다루면서 마태복음에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의 ‘구성과 관련하여 큰 논란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큰 논란’을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부분은 도날드 거스의 <신약 서론>에 나타난 마태복음 논란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마땅해 보인다.

 

“공관복음 연구가들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예언적 능력을 부정하므로, 마가, 마태 및, 누가의 연대가 모두 마가의 연대에 전적으로 수반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논의는 다음의 순서를 따른다. 첫째, 예수님의 능력이 부인되므로, 마가복음은 예루살렘 멸망 바로 몇 해 전에 작성되었다고 추천된다. 둘째,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을 사용했으므로 예루살렘 멸망 후로 연대가 잡혀야 한다. 셋째, 이그나티우스와 디다케 양자 모두 마태복음을 인용한 것으로 나타나므로, 마태복음은 양자의 저술보다 약간 앞서 권위를 얻은 것이 틀림없다. 넷째, 그러므로 마태복음의 추정 연대는 AD 80-100이다. 이 기간 안에서 정확히 어느 때인가는 일반적인 의견 일치가 없다.”

 

이곳에서 연대 기준의 중요한 잣대는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이다. 마태복음에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예언한 것이 아니라 후대에 예수의 입을 빌려 기록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비평학적 내증에 의해 학자들은 80-100년 사이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은 의외로 늦은 시기에 기록된 것이다.

 

필자는 학자들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마태복음에 종말에 대한 예언과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상세한 첨부는 예루살렘 멸망 이후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여 기록한 것이다. 즉 멸망 이전에는 전해 이해하지 못하다 멸망 후에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한 것이다. 이것은 고향을 잃고 정처 없이 유랑하게 된 상황 속에서 진정한 모세요,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요,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을 증언하기에 충분히 적합한 것들이다.

 

정확한 시기를 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70년 이후 예루살렘 멸망 이후는 분명하다. 마태복음은 성전 파괴 이후,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한 ‘그 메시아’이며 새로운 성전임을 말하고 있다.(마 26:61, 27:40)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이다.(마 27:37)

 

3. 누가복음

학자들의 관심이 다른 복음서에 비해 적기는 하지만 누가는 신약의 가장 중요한 저자 중 한 명이다. 왜냐하면 그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이자, 바울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당대에 엘리트로서 의사이며 역사가이다. 마태복음의 저자가 마태가 확실하다면 누가는 마태와 더불어 바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엘리트이다.

 

일반적 견해는 누가복음은 사도행전보다 앞선다. 근거는 사도행전 1:1에서 ‘앞선 글’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선 글’은 누가복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일단 사도행전이 누가복음의 후속작이라 전제하고 누가복음을 접해보자.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던 시기로 마무리된다면, 누가복음은 바울이 로마에 가기 전에 적힌 것은 분명하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누가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바울과 함께 한다. 그렇다면 누가는 바울의 죽임 이후나, 말년에 누가복음을 기록하고 얼마 가지 않아 사도행전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마태복음처럼 누가복음 역시 70년 디토 장군의 예루살렘 멸망 이전인가 이후인가에 대한 논쟁은 여전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울의 죽음(65년)이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최소한 60년쯤으로 예상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누가복음은 마태복음보다 시기적으로 충분히 앞설 수 있다. 마가복음의 절반 가까이가 누가복음에 인용된 것을 볼 때, 누가는 마가복음을 의존하여 연대기적 기술방법으로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피츠마이어는 누가 문헌이 바울의 재판이나 죽음 이전에 작성되었다는 결론을 보장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몇 가지를 제시한다.

 

ㄱ. 누가 이전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저술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언급은 초기 연대설을 지지하기 힘들다.

ㄴ. 예루살렘을 향해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고 말한 누가복음 13:35절은 예루살렘 함락이 분명하다.

ㄷ. 예수님의 성전에 대한 심판(막 13:2, 눅 21:5) 상황이 눅 21:20에서는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상황’으로 바뀐다. [이것은 실제로 그 사건을 목격하거나 들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구체적인 묘사이다.-필자]

 

피츠마이어는 이러한 근거를 통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70년 이후일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말한다. 만약 마태복음처럼 누가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됨을 변증하기 위한 것이라면 70년 이후일 가능성은 농후하다. 또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작 시기가 그리 멀지 않다면, 누가복음은 70년대 중반, 사도행전은 80년대 초기일 가능성이 충분한다.

 

4. 요한복음

요한복음은 너무나 명백해 논쟁의 여지가 거의 없다. 요한복음은 공관 복음서와 확연히 다르며 헬라적 영향을 강력하게 받은 복음서이다. 헬라적 영향을 받은 것이지, 헬라철학을 결코 옹호하거나 칭송하지 않는다. 오히려 헬라철학을 기독교로 바꾸고 싶어 한다. 요한복음은 90년 이전으로 보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어떤 학자는 2세기 중반까지 미루기도 하지만 대체로 90년에서 100년 즈음으로 본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늦은 시기로 기록되었다. [만약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동일한 요한이 아니라는 전제 안에서] 에즈라성경대학원대학교 조석민 교수는 네 가지 이유로 65년 이후에 기록되었다고 확신한다.

 

(1) 이 복음서가 집필된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65년 이후라는 암시가 있다. 그것은 베드로의 순교가 암시되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21:18-19).

(2) 이 복음서 안에서는 공관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사두개인(the Sadducees)의 언급을 찾아 볼 수 없다. 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전 70년까지 성전에서 봉사하며 종교적 특권과 권세를 행사하던 유대교 종파 중 하나이다.

(3) 신약성서 전체에서 이 복음서 안에서만 유대인들의 파문 즉, 출교에 대한 언급이 명시적으로 나타난다(참조. 9:22; 12:42; 16:2).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회당에서 쫓아 낸 일은 80년 이후에 등장한다.

(4) 이 복음서의 기록 시기를 추정하는데 여러 파피루스의 증거가 사용된다. 그 가운데 라이랜즈 파피루스 457(the Rylands Papyrus 457)은 P52로 알려져 있는데, 신약성서 사본 중에서 가장 오래된 사본으로 요한복음 18:31-33, 37-38을 포함하고 있다. 이 사본은 1920년 이집트(애굽)에서 발견되었고,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34년이다. 이 사본은 파피루스 양면에 필사되어 있어서 두루마리가 아니라 코덱스(codex) 형태의 사본이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현재 영국 맨체스터(Manchester)에 있는 존 라이랜즈 도서관John Rylands Library)에 소장되어 있다. 이 사본의 제작 시기는 약 125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이 사본이 제작되기 약 20-30년 전에 이미 요한복음은 세상이 잘 알려진 복음서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글의 출처 http://www.londonkc.com/xe/index.php?document_srl=66841&mid=board]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에 비해 현저히 다르다. 헬라적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며, 그 어떤 복음서보다 변증적이다. 그럼에도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육화된 하나님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관점을 견지(堅持)한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7가지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

 

 

요한복음의 공관 복음서와 다르게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집중한다. 7가지의 기적이나 다른 복음서에 비해 과하게 많은 설교 등은 이것을 반영한다. 또한 신학적 표현 중의 하나님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정확하게 ‘나는~이다’ 형태를 띤 구절은 7번 사용된다.

 

 

1.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Ἐγώ εἰμι ὁ ἄρτος τῆς ζωῆς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표현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직후에 하신 말씀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고대 이스라엘의 광야시절에 비유될 수 있다. 광야에 식탁을 베풀 수 있을까? 의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응답하신다. 요한복음은 주리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 뒤에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반석의 생수 사건을 연상시키는 은유적 표현을 덧붙이신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정확하게 사십 년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의 필요를 채우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광야의 떡과 예수님 자신의 ‘떡’과 비교되고 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시며, 먹는 자는 영적으로 주리지 않을 것이다. 즉 영생을 얻을 것이다.

 

 

2.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Ἐγώ εἰμι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게 데려온 후에 주어진 말씀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다그치는 질문에 답하지 않으시고, 땅에 글을 쓰신다. 다시 재촉하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나이든 사람으로부터 시작 젊은이까지 모두 떠난다. 여자 외에 아무도 없자 여자에게 묻는 ‘너는 정죄한 사람이 있느냐?’ 그러신 후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신다. 그리고 이 말씀이 주어진다.

 

요한복음에서 빛은 생명과 진리, 하나님의 영광으로 비유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의’라는 표현이다. 세상은 예수님의 사역의 장소이며, 구원할 타락한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κόσμος)을 사랑하신다. 세상은 악한 자들의 소굴이며, 사단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신다. 그래서 세상(κόσμος)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셨다.

 

Οὕτως γὰρ ἠγάπησεν ὁ Θεὸς τὸν κόσμον, ὥστε τὸν Υἱὸν τὸν μονογενῆ ἔδωκεν, ἵνα πᾶς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αὐτὸν μὴ ἀπόληται ἀλλ’ ἔχῃ ζωὴν αἰώνιον.(Nestle 1904)

 

‘세상의’는 ‘세상에서’ 또는 ‘세상을’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과 분리된 존재가 아닌, 세상에 있고, 세상을 위한 존재인 것을 드러내신다.

 

 

3. 나는 문이다.(10:7,9)

ἐγώ εἰμι ἡ θύρα τῶν προβάτων

 

요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문은 출입구다. 또한 부여된 자격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문은 아무나 들어가지 못한다. 제한된 사람, 출입이 허가된 존재들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시다. 즉 양들이 출입하는 곳이다. 양이 아닌 다른 동물은 들어갈 수 없다. 모든 양도 아니다. 오직 예수님의 양이다. 그것은 주인의 목소리로 구분될 것이다. 예수님의 음성을 아는 자는 그 문으로 들어갈 것이나, 알지 못하는 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 다음 구절들은 양의 문으로 들어간 결과에 대한 것이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9-10)

 

예수님은 문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가를 설명하신다. 먼저는 ‘구원’을 얻는다. 문은 구원의 문이다. 둘째는 ‘꼴’ 즉 양식을 얻는다. 먹을 것이 풍부하다. 이 부분은 문인 동시에 생명의 떡으로 비유하신 것이다. 세 번째는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다.

 

 

4. 나는 선한 목자라.(10:11)

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ὸς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ὸς

직역하면, '나는 이다. 그 목자 그 선한'

 

목자는 양들을 돌보는 사람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목자로 소개함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는 그러낸다. 선한 목자는 삯꾼 목자와 다르고, 강도와 반대된다. 당대 종교지도자들은 겉으로는 목자였지만 강도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제사를 빌미로 백성들의 재물을 탐했고, 과부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오히려 양들을 위해 존재한다. 목숨을 바치고, 꼴을 준다.

 

여기서 선한(καλὸς)이란 단어는 ‘선하다’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하다. 리유(Rieu)는 ‘나는 아름다운 목자다’라고 번역하도록 권유한다. 요한이 말하는 ‘선한’이란 말의 정체는 무엇일까? 성경의 용례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먼저 롬 7:16에서는 ‘율법이 선하다’는 의미다. 딤전 1:8에서는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율법은 선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딤전 4:6에서는 약간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좋은’이란 단어로 번역했다.

 

딤전 4: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좋은 교훈’을 자신이 가르치는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된다. 마태복음 13:24로 넘어가면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좋은 씨’를 뿌리는 농부가 나온다. 그가 뿌리는 씨앗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8:8에서 ‘더 낫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롬 7:16 νόμῳ ὅτι καλός

딤전 1:8 δὲ ὅτι καλὸς ὁ νόμος

딤전 4:6 τοῖς ἀδελφοῖς καλὸς ἔσῃ διάκονος

 

영어 성경은 칼로스(καλός)를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beautiful, as an outward sign of the inward good, noble, honorable character; good, worthy, honorable, noble, and seen to be so.) 이러한 의미를 볼 때 ‘좋은’이란 뜻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완전한 상태이거나, 흠이 없고, 일반적인 어떤 상태보다 월등한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은 양자삼으신다. 양들은 아무런 힘이 없고, 방어할 수도 없다. 그들은 느리고, 둔하다. 목자가 없으면 살 수 없는 동물들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는 이처럼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과 포용으로 가능한다.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Ἐ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 선언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나사로의 집에 갔을 때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셨다면 나의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마르다가 말한다. 마지막 날에 대한 부활의 확신은 있지만,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소망이 없음을 말했던 것이다. 마르다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과 생명이라고 소개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부활이다. 그리고 생명이다’라는 표현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 선언을 굉장히 중요하게 다룬다. 부활과 생명을 하나로 보며, 예수님을 진정한 생명이라고 재선언한다.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1:4은 생명과 빛이 연결된다. 이제 부활과 연결되고, 부활은 새로운 생명이다. 이로서 생명의 정체가 드러나며, 죽음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영원한 능력이 완전하게 드러난다. 죽음까지 정복하신 예수님이시다.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Ἐγώ εἰμι ἡ ὁδὸς καὶ ἡ ἀλήθεια καὶ ἡ ζωή·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의 마지막 강론이 시작되는 곳이다. 공관복음서와 다르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강론을 길게 넣는다. 도마는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모른다고 투덜거린다. 의심이 많았던 도마는 무엇인가 확실하게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 때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다.

 

11장에서 부활과 생명이 만났다면, 14장에서는 생명이 길과 진리와 만난다. 세 개의 정의에 모두 관사(ἡ)가 붙어 있다. ‘내가 그 길이고, 그 진리고, 그 생명이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예수님은 여러 개의 길 중의 하나가 아니다. 바로 ‘그 길’이다. 길은 곧 진리와 만나, 예수님의 배타성과 진리의 순수성을 강조한다. 그 진리는 다시 생명으로 나아간다.

 

 

7.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5)

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ἡ ἀληθινή,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곳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도의 관계를 드러낸다. 먼저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절) 예수님은 농부가 기르는 포도나무다(1,5절) 성도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가지’라고 말씀하신다.(5절) 성도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포도나무이시다.

 

헬라어 원문은 ‘참’에 관사가 있어, 포도나무와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은 하나의 동사를 취함으로 앞선 문장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참’이라는 표현은 다른 거짓된 것과 구분된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거짓된 포도나무, 즉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는 다른 것과 구분하고 차별화 시킨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에 나타난 포도나무는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돌포도나무다. 그들은 거짓되고, 악하며,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빈약하다.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그릇된 포도나무다.

 

‘안에 있다’는 표현은 중요하다.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원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붙어있다.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계명에 순종하는 삶이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열매 없는 가지(성도)를 잘라 낸다는 말은 종말론적 심판을 상징한다. 이곳에서 선택된 백성이 버려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요한은 붙어 있다는 의미는 겉으로 드러난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한 듯하다. 즉 교회에 있으나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아니라면 그는 심판의 때에 제해질 것이다. 그가 진정한 제자인지는 열매가 보증한다 : [Pensé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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