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와 하나님의 나라
1. 들어가는 말
복음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마가복음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님 나라 선포로 시작한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닥쳐왔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어라.'"(막1:4-5) 하나님 나라의 도래(到來) 선포가 지상 예수가 행한 설교의 핵심(核心)이라는 사실은 대체로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는 바이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의 등장을 세례자 요한의 체포(逮捕)와 연결시킨다. '파라디도미'(paradidomi-넘겨주다)는 본래 헬레니즘 세계에서 범죄자들에게 사용되는 법률용어(法律用語)인데, 원시그리스도교에서는 이 개념을 주로 예수의 고난과 재판을 나타내는 전문용어로 사용하였다. 제자들이나 교회의 영적 지도자(靈的 指導者)들이 당하는 고난을 나타낼 때에도 이 개념이 즐겨 사용되었음은 물론이다. 저자는 세례자 요한의 운명을 기록함으로써, 앞으로 예수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독자들에게 예시(豫視)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마가는 세례자 요한의 전기(傳記)를 쓰는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요한이 무슨 이유로 어디에서 어떻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기록하지 않고 있다. 요한의 순교(殉敎)에 관해서 마가는 6장에 이르러 비로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마가는 구속사적(救贖史的) 지평에서 이제 요한의 시대가 지나가고, 예수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데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예수가 시험을 받은 후 세례자 요한의 체포소식을 듣고 곧 바로 갈릴리로 오신 것인지, 아니면 일정 기간 유대지역에서 사역을 하시다가(참조, 요1-3장) 갈릴리로 오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마가에게 중요한 것은 요한의 체포야말로 예수에 의해서 개막되는 새 시대의 태동(胎動)을 알리는 징조라는 사실을 증언하는데 있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 선교의 거점으로 삼은 갈릴리는 어떤 곳인가? 로마 식민지 세력과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유대 기득권 세력에 의해서 경제 정치적인 차원에서 이중 삼중으로 억압과 착취를 당하던 유대 기층(基層)민중들이 모여 살던 소외지역이다. 예수는 소외지역의 소외된 민중을 하나님 나라 선교운동의 기반(基盤)으로 삼기 위해서 갈릴리로 오셨다.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강을 거점으로 삼아 주로 유대아 지역의 중산층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회개운동을 전개하였다면, 예수는 유대의 기층민중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복음'(to euangelion tou theou)을 전파하는 거점으로 갈릴리를 택하였다. 하나님의 복음이 '하나님에 관한 복음'을 뜻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복음'을 뜻하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예수는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요한의 사역이 "죄 용서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baptisma metanoias eis aphesin hamartion)를 베푸는 것으로 국한되었다면,(막1:4) 예수의 사역은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었다.
그러면 하나님의 복음은 무엇인가? 마가는 '복음을 전하다'(euangelizesthai)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그 대신 '복음을 선포하다'(euangelion keryssein)를 즐겨 쓴다.(13:10; 14:9) 바울의 전승에 따르면 원시 그리스도교에서 복음(福音)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사건으로 고백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내용으로 하고 있다.(고전15:3b-5; 롬1:3-4) 그러나 마가에 있어서 복음은 이와 달리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자신과 그가 선포한 기쁜소식을 뜻한다. 이러한 복음이해는 예수의 등단설교(登壇說敎)에 해당하는 누가복음 4장에 잘 나타나 있다 :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4:18-19) 등단설교에서 복음은 자유와 해방을 핵(核)으로 하고 있지만, 예수는 단순히 자유와 해방의 복음을 선포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공생애 삶 자체가 곧 복음(자유와 해방)의 내용을 구성(構成)한다.
15절에서 마가는 하나님의 복음의 내용을 예수의 선포 형태로 증언한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닥쳐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때(kairos)는 자연적인 시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역사개입(歷史介入)의 때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가에 따르면 예수는 그의 공생애(公生涯) 벽두에 갈릴리에 등장한 '지금'이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는 순간이라고 증언한다.
'하나님 나라'(basileia tou theou)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런 언급이 없다. 왜 그런가? 아마도 마가 공동체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 개념은 굳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친숙한 용어이었음에 틀림없다.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malkut shamaim)는 장소와는 무관하게 하나님의 왕권이 행사되는 곳이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시45:6 ; 103:19 ; 145:10-13)
이러한 하나님 나라 개념은 한편으로 다윗왕조 전승에서 '다윗 메시아니즘'으로, 다른 한편으로 묵시문학적 전승에서 '인자(人子) 메시아니즘'으로 발전하였다. 다윗 메시아니즘에서는 다윗의 자손에서 정치적 메시아가 나타나 이스라엘을 외세의 압제로부터 해방하고 구원할 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면, 다니엘서에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인자 메시아니즘에서는 다윗 메시아니즘이 추구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해방의 희망을 포기하고, 천상적(天上的) 존재인 인자(hyios tou anthropou)가 돌연히 나타나 이스라엘 민중을 역사의 질곡(桎梏)으로부터 해방한다는 것을 중심내용으로 하고 있다.
정치적 메시아니즘 또는 인자 메시아니즘을 막론하고, 이스라엘 민중이 꿈꾸었던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기존(旣存)의 세계질서와 가치관을 지양(止揚)하며, 동시에 전적인 새로움의 질서와 가치를 지향(志向)한다. 그것은 묵시문학에서 나타나고 있는 '두 에온'(Aon) 사상에 의해서 극명하게 표출된다.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시는 카이로스에는 사탄이 지배하는 '낡은 에온'은 종말을 향하여 치닫고 있고, 놀라움과 산고(産苦) 가운데 하나님이 통치하는 '새 에온'이 동터오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바로 이러한 시대의식(Zeitbewußtsein)에 사로잡혀있었고, 그는 낡은 에온과 새 에온의 교차점(交叉點)인 '시간의 사이'(Zwischen der Zeit)에 서 있다고 마가는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인자 메시아니즘에 지평에서 예수는 갈릴리에 등장하여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였다.
이와같은 하나님 나라 도래(到來)에 직면하여 그러면 인간이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회개하라"(metanoiete)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을 믿는 일이다."(pisteuete en to euangelion) 메타노이아는 '메타'(다르게)와 '노에인'(생각하다)의 합성어인데, 직역하면 지금과 '다르게 생각하다'로 표현할 수 있다. 이 개념은 단순히 죄를 뉘우치고 후회하는 차원을 넘어서 "사고의 전환", "발상의 전환", 곧 기존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근원적으로 뜯어고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적 정서에서 메타노이아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한 근본적인 인생의 방향전환"을 뜻한다. 그것은 히브리어 '슈브'(shub)에 해당하는데, 슈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비뚤어진 관계를 바로잡는 것, 곧 원상회복(原狀回復)을 뜻한다.(렘3:12; 사9:13) 15절의 메타노이아는 이와 동일 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생각의 바꿈을 뜻하지 않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自己義)만을 추구해왔던 인간이 그동안의 삶의 방식을 깨끗이 청산하고, 이제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 앞에서 인간이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돌이키는 일, 곧 회개(悔改)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완전히 개방하는 일이다. 생각을 개방하고, 행동을 개방하고, 삶을 개방하는 일이다. 이러한 삶의 방향전환으로써의 회개는 하나님 나라 도래에 직면한 인간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다.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앞에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무엇인가? 복음을 믿는 것이다.(pisteuein) 복음은 예수가 선포한 기쁜소식인데, 그것은 곧 자유와 해방을 내용으로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믿음은 단순히 복음에 대한 지적(知的)인 승인(承認) 이상이다. 그것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설교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와 전적인 위탁을 포함한다.
2.
그렇다면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앞에서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회개는 무엇을 내용으로 지니고 있는가?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경고한다.(눅3:8)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종말 때에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베어 불 속에 던져진다는 것이다. 그러자 무리가 묻는다. 어떻게해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요한이 대답한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라." 세리들도 요한에게 와서 묻자 그가 대답한다."너희에게 정해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또 군인들이 묻자 요한은 대답한다."남의 것을 강탈하거나 거짓 고발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해라."(3:11-13)
여기에서 회개의 삶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이웃을 배려(配慮)하고 이웃과 연대(連帶)하는 삶에로의 방향전환 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삶의 방향전환이야말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의 행태요, 하나님 나라에 직면한 인간에게 요구되는 사항이다.
3.
예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 선교여행을 마치고 유대아 지역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한 사람을 만난다. 마태는 그를 부자 청년으로(19:22) 그리고 누가는 한 관원으로(18:18) 밝히는데 반해서 마가는 단순히 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예수 발 앞에 엎드려 "선한 선생이여,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묻는다. '선한 선생이여'(didaskale agathe)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예수를 이름난 라삐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영생(zoe aionion)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의 물음(15절; 23-25절)과 동일한 의미지평(意味地平)을 갖는다. 그러나 예수는 계명의 수여자이신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선한 분이 없음을 상기(想起)시키면서, 영생을 얻는 길로써 대인관계(對人關係)를 내용으로 하는 십계명 후반부를 제시한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 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19절)(참조, 신24:24; 레19:13) 이 계명들을 그는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한다. 그의 대답에 대해서 예수는 비판적으로 대꾸하지 않고, 사랑스럽게 여기면서 그에게 말한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20절) 예수가 그에게 지적한 '한 가지 부족한 것'(hen hysterei)이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를 따르는 일'(akolythein)이다. 여기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Nachfolge)은 모든 소유로부터의 분리(分離)를 뜻한다.(막1:17-18; 2:14)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ptochos)에게 주는 적선(積善)행위는 하늘에 있는 보화를 얻는 일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예수를 따를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다. 복음서 저자는 그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맺는다. 이 결론을 통해서 마가는 영생(永生)을 얻는 일,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과 소유(所有)의 관계를 첨예하게 대립시킨다.
영생과 소유 사이의 관계는 이어지는 23-27절에서 주제를 형성한다. 이상의 담론(談論)에 근거하여, 예수는 제자들을 둘러보면서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선언한다. 제자들이 당황한 표정을 짓자, 예수는 다시 한 번 반복하여 말한다. "이 사람들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kamelon)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25절) 본문에서 낙타를 '뱃줄'로 바늘귀를 '좁은 문'으로 해석한다면, 본문의 의도를 크게 벗어나는 해석이다.(참조, 마7:13-14/눅13:24) 낙타(kamelon)는 팔레스틴에서 가장 큰 동물이고, 바늘귀(trymalia tes raphidos)는 가장 작은 것을 상징한다. 동물 가운데 가장 큰 낙타와 가장 작은 바늘귀를 대조(對照)시킴으로써 예수는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함을 표현하고 있다. 재산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장애물(障碍物)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의 이러한 말씀에 제자들은 더욱 황당해 하며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하고 수군거린다. 예수가 말한다:"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하실 수 있다."(27절)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구약에 자주 등장하는 신앙고백형식이다.(참조, 창18;14; 욥42:2; 슥8:6; 대하14:10; 막14:36) 결론적으로 제자직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소유의 포기를 전제한다.
이 장면은 28-30절에서 베드로의 고백과 함께 제자직(弟子職)으로 확대된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 마치 1장16-20절에서 처럼,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가 대답한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를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을 것이다." 예수와 복음을 위한 제자직은 가족과 소유의 포기(抛棄)를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그 가운데 예수는 현존(現存)한다. 오는 세상에서 받을 '영생'(zoen aionion)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마가본문과 병행을 이루고 있는 Q전승(눅14:26/마10:37)의 제자직에서는 "자기 목숨까지" 버릴 것을 요구함으로써 더욱 엄격한 조건이 제시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Q는 제자직의 조건으로써 머리둘 곳이 하나 없는 떠돌이 삶과 아버지의 장사지내는 것 조차도 거부된다.(눅9:57-60/마8:19-22)
결론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영생을 얻는 것과 예수를 따르는 삶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데, 회개로써의 제자직은 재산포기(Besitzlosigkeit)와 이웃과 연대적 삶(solidarisches Leben)을 전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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