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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헤롯들

by 은총가득 2021. 12. 27.

 

헤롯대왕의 영아 학살

 

성경인물설교(42)  헤롯(마2:1-23)

 

● 신약성경에 보면 이름이 비슷하여 혼동을 일으킬 때가 더러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헤롯 왕이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헤롯 왕들이 동일 인물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확인해 보도록 하자. 먼저 성경 몇 곳을 찾아서 확인해보자.

 

1)마2:1이하 -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당시 유대 땅의 왕은 헤롯이었다.

2)마2:22 아켈라오 -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이 되었다. 그의 정확한 이름은 헤롯 아켈라오였다.

3)마14:1이하 - 예수님 공생애 시작 후 등장하는 분봉왕 헤롯. 세례요한의 목을 벰

4)눅3:1이하 -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이때 역시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될 무렵, 세례요한의 등장 시기

5)행12:1이하 -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쌔 때는 무교절일이라. 이때는 이미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진 다음이다. 이때 등장한 헤롯왕은 누구인가? 이 헤롯왕은 얼마 후 충이 먹어 죽게 된다.

6)행25:13 - 아그립바 왕. 또 다른 유대인의 어떤 왕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헤롯왕과는 아무런 관련은 없는 것인가? 옛날에는 왕위를 아들에게 계승해 주었는데...

 

자, 이처럼 예수님 탄생 때부터 초대교회 시절까지 수십 년에 걸쳐 등장하는 헤롯왕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동일한 사람인가?

 

 

 

● 먼저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헤롯 왕가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 넘어가자. (* 아래 헤롯 가계도 참고)

 

※ 헤롯 안티파터 2세 : 비록 성경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헤롯 왕가를 설명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바로 헤롯 안티파터 2세이다. 그는 이두메 출신(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의 토후로서 로마가 권력투쟁을 할 당시 줄리어스 시이저의 편에 가담하여 애굽에서 목숨을 걸고 시이저를 위해 싸웠다. 이런 연고로 시이저는 헤롯 안티파터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으며 그를 유대의 행정장관(초대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유대땅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그의 장남 파사엘을 예루살렘 총독으로, 둘째 아들 헤롯을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리하여 향후 1세기 이상 지속된 헤롯 가문의 유대 통치의 기초를 마련한다.

 

 

이제 성경에 등장하는 헤롯왕들을 살펴보자.

1) 헤롯대왕(B.C.37-A.D.4) : 헤롯대왕으로 불리는 헤롯 안티파터의 둘째 아들 헤롯1세는 약관 25세의 젊은 나이에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이 되어 상당한 역량을 발휘한다. 그러나 줄리어스 시이저가 암살되고 로마의 정황이 어수선할 때 그는 여러 시련을 겪다가 로마에 가서 옥타비아누스(후일 가이사 아구스도가 됨)로부터 환영을 받고 B.C.40년 원로원의 비준을 얻어 유대왕으로 지명된다. 하지만 그가 유대땅에 와서 정식으로 왕으로 등극한 것은 B.C.37년이었다. 그는 정통 유대인 혈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환심을 얻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헤롯이 로마에 대해 보인 과잉 충성은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적개심을 더욱 야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헤롯 왕가가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헤롯대왕’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많은 업적을 쌓기도 했는데, 특히 여러 건축물들을 남겼다. 그중 가장 대표적이며 최고, 최대의 건축물이라 볼 수 있는 것은 B.C.20년 경에 시작된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유대인 랍비문헌에는 “헤롯의 성전을 보지 않은 사람은 아름다운 건축물을 결코 보지 못한 사람이다.”라는 글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헬라문화를 적극적으로 보급하였으며, 영토를 안정되게 통제하여 로마제국의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통치 말년에는 열명의 왕비 사이에서 난 다섯 아들이 모두 왕위 쟁탈전에 휘말려 심각한 가정불화를 겪게 되는데,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물론 첫째, 둘째, 셋째 아들을 모두 처형했다. 결국 자신도 신경과민, 공포심으로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한다. 헤롯대왕은 죽기 직전 유대인의 왕을 경배하기 위해 찾아온 동방박사들을 만났다.

 

 

2) 헤롯 아켈라오(B.C.4-A.D.6) : 헤롯대왕의 네 번째 아내 말다케의 소생으로 헤롯대왕 사후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 지역의 분봉왕이 되었다. 아켈라오는 통치 시초부터 무자비하게 백성들을 다루었다. 유월절에 민중의 봉기를 막기 위해 군대를 보내여 3천명의 시위군중을 무차별 살육하기도 했다. 마2:22에 보면, 애굽으로 피신했던 요셉이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켈라오는 그의 아버지 헤롯과 마찬가지로 잔혹했고 불의를 일삼았다. 결국 A.D.6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대표들이 아켈라오의 잔인하고 포학한 무단 정치에 대해 황제 아구스도에게 공식적으로 불평함으로써 아켈라오는 직위에서 면직되어 고울지방(지금의 프랑스)으로 추방당한다. 그가 다스리던 지역은 로마총독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된다.

 

 

3) 헤롯 안디바(B.C.4-A.D.39) : 역시 헤롯대왕의 네 번째 아내 말다케의 아들로, 헤롯대왕 사후 유대북쪽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이 되었다. 헤롯 아켈라오의 친동생으로, 아켈라오가 잔혹한 무단정치로 일찍 직위에서 쫓겨난 것에 비해, 안디바는 무려 43년이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갈릴리 지방을 통치한다. 안디바는 세례요한과 예수님께서 대부분 사역을 했던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의 영주였기 때문에 신약성경에서 가장 대표적인 헤롯왕으로 등장한다.

 

그는 세례요한을 죽인 부도덕한 왕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데, 자신의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이자 조카였던 헤로디아와 재혼함으로써 세례요한의 질타를 받게 되었고, 세례요한을 죽일 핑계거리를 찾던 중 살로메의 청을 마지못해 들어주는 것처럼 꾸며 세례요한을 목베어 죽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판결 당시 그는 유월절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에 잠시 거주하고 있다가 유대 총독 빌라도로부터 갈릴리 사람 예수에 대한 판결을 의뢰받기도 했으나, 결국 최종 판결권은 빌라도에게 넘겨주기도 했다. 이 당시 그의 나이 50세 전후였는데, 이후 그의 삶은 비참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헤로디아와 재혼하기 위해 내쫓았던 왕비가 다메섹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결국 이 일로 다메섹 왕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고 패배하였으며, 칼리굴라 황제에 의해 59세때 그 형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리용으로 유배당한다.

 

 

4) 헤롯 빌립(B.C.4-A.D.34) : 헤롯대왕의 다섯 번째 아내 예루살렘의 클레오파트라의 아들로 이두래와 드라고닛의 분봉왕이었다. 그가 다스린 백성들은 주로 수리아인과 헬라인 계통의 비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주화에 황제의 초상을 새겨 넣은 최초이며 유일한 헤롯 왕조의 영주였다. 그는 두 도시를 건설하였다. 파네아를 확장 재건하여 황제를 기리기 위해 가이사랴 빌립보로 개명했는데, 이 도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유명한 곳이다. 어촌 벳세다를 헬라식 도시로 재건하여 아구스도의 딸 줄리아를 기리기 위해 이 도시의 이름을 줄리아스로 개명하기도 했는데, 이곳은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고쳐주신 곳이며, 근처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형제들처럼 야심도 없었고 간교하지도 않았던 빌립은 그의 영토를 온건하고도 평온하게 다스렸다. 그는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는 세례요한의 머리를 요구했던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결혼하였으며, 슬하에는 자녀가 하나도 없었다.

 

 

5) 헤롯 아그립바 1세(A.D.39-44) : 헤롯대왕의 손자인데, 일찍이 헤롯대왕에 의해 살해된 헤롯대왕의 둘째 아들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며, 헤로디아의 친오빠이다. 어릴 때 가족간의 참화를 피해 로마에서 자랐으며 교육을 받고 그곳에서 긴 세월을 보냈다. 티베리우스 황제에 의해서는 한 때 투옥당하기도 했으나 칼리굴라의 숙부인 클라우디우스가 황제에 오를 수 있도록 공헌하여 그 대가로 유대 지역의 통치권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친유대주의 정책을 폄과 동시에 초대교회를 핍박했던 인물이다. 아그립바는 철저하게 헬라문화를 숭상하였는데, 그러다가도 유대에서는 유대적 행동을 취하는 기회주의자였다. 초대교회가 부흥할 당시, 사도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투옥시켰다. 하지만, A.D.44년 질병으로 급사한다. 그때 상황을 성경은 행12:21이하에서 기록하고 있다. (읽기)

 

 

6) 헤롯 아그립바 2세(A.D.48-70) : 아그립바 1세의 아들로, 아버지가 죽었을 때 17살의 어린 나이여서 부친이 다스리던 지역은 로마 총독이 다스리게 되었다. A.D.50년에 칼키스의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으며 후에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이 되었다. 그는 누이 버니게와의 근친 상간으로 유대인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다. 가이사랴의 베스도 총독에게 문안하러 갔을 때 구류되어 있는 사도 바울을 만나 그의 변증을 듣게 되었다(행26). 그의 재임 기간 중 유대전쟁 (A.D.66-70)의 발발로 예루살렘이 완전히 훼파되는데, 철저히 로마의 신복이었던 헤롯 아그립바 2세는 A.D.70년 8월5일 예루살렘을 함락한 로마의 디도장군과 함께 자기 백성을 참담하게 정복한 로마의 개선 축하식에 참석했으며 로마의 행정관 노릇을 하다 100년경 죽었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결국 헤롯 아그립바 2를 마지막으로 헤롯 왕가는 종막을 내리게 된다.

 

 

● 이들 여러 헤롯왕 가운데 두 사람만 살펴보자.

 

먼저 헤롯대왕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자신의 처자식과, 또 베들레헴의 2살 이하의 유아들을 무참히 죽인 것으로 보아 권력욕이 강하고 잔학한 자이다. 한편 로마의 정권 변화에 능수능란하게 대처하여 자신의 통치 기반을 확고히 한 것으로 보아 국제 정세에 밝고 처세술이 뛰어난 자였으며, 이방인으로서 30년 동안이나 유대를 통치한 것으로 보아 조직력과 지도력을 갖춘 자였다. 한편 대규모 건축 사업을 벌여 왕궁과 요새, 예루살렘 성전 및 이방 신전 등을 건축한 것으로 보아 의욕적인 추진력을 갖춘 자이다.

 

하지만,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온갖 권모와 술수, 또한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헤롯 대왕의 영욕에 넘친 삶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슬픈 종말을 증거해 준다. 더욱이 그 역시 끊임없는 음모로 인해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마침내는 병으로 심히 앓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는가! 이렇듯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권력은 절대 부패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베들레헴의 2살 이하된 유아들을 모조리 몰살시킨 헤롯의 학살사건은 인간의 욕망과 집착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또한 이는 어떻게 해서든지 성도를 넘어뜨리려는 사단의 흉악한 궤계와 미혹을 상징해 준다.

 

그러나 헤롯을 통한 사단의 궤계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은 계획하신 그대로 면밀히 이행되었다. 이는 사단의 궤계가 아무리 사악할지라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승리하심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싸움의 승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성취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음을 기억하며 담대히 주의 뜻을 이루어 가야 하겠다.

 

다음으로 세례요한을 죽인 헤롯 안디바는 이복 동생인 빌립의 아내와 불법으로 재혼한 것으로 보아 부도덕한 자이며, 충언을 아끼지 않은 세례요한을 옥에 가두고 부당하게 목을 벤 것으로 보아 교만하며 권력을 남용한 자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분봉왕으로 등극 후 리비아스, 디베랴 등 폐허된 도시를 재건한 것으로 보아 통치 권력욕이 강하고 다소의 지도력을 갖춘 자이다. 뿐만 아니라 재판 받으러 온 예수에게 이적 볼 것을 기대하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함께 예수를 희롱한 것으로 보아 영안이 어두운 사악한 자로, 악을 행하기 위해 대적 빌라도와 친구가 되고, 예수님께 ‘여우’라 불릴 정도로 간교하고 교활한 자였다.

 

헤롯 안디바와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함을 알면서도 예수를 대적하고 죽이는 일에는 서로의 권한을 인정해 주며 힘을 합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악한 자들이 성도를 대적하고 넘어뜨리는 일에는 비록 그들 사이가 서로 좋지 않다 할지라도 하나가 되어 연합함을 보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들은 악인의 연합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도록 주의 도우심을 덧입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믿음의 백성들은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들고 힘을 소진하게 하는 온갖 어리석음, 상호비방, 시기질투, 분리하며 파당을 나누는 일, 미워하고 다투는 일 등을 중지하고, 성령충만하여,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지진해일의 참상을 보지 않았는가! 우리 앞에도 언제든지 종말은 다가올 수 있다. 언제라도 주님 부르실 때, 부끄럽지 않게 설 수 있도록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아가자.

 

 

헤롯 안티파터 2세 - 유대의 초대 총독

헤롯대왕 - 갈릴리 총독, 유대왕 / 성전건축, 영아 학살(마2)

헤롯 아켈라오 - 유대, 사마리아, 이두메 분봉왕 / 요셉은 하나님 지시로 나사렛에 정착함(마2)

헤롯 안디바 - 갈릴리, 베레아 분봉왕 / 헤로디아와 재혼, 세례요한 참수(막6), 예수님 심문(눅23)

헤롯 빌립(빌립2세) - 이두래, 드라고닛 분봉왕(눅3)

헤롯 아그립바 1세 - 유대왕 / 야고보 살해, 베드로 투옥, 급사(행12)

헤롯 아그립바 2세 - 갈릴리 분봉왕 / 가이사랴에서 바울 만남(행26), 예루살렘 멸망 후 로마행정관이 됨

                             누이 버니게와 근친상간(행25), 버니게는 총독 베스도와 재혼

                             누이 드루실라는 유대 총독 벨릭스와 결혼(행24)

 

* 분봉왕(Tetrarch) : 한 나라의 왕이 다스리는 영토 일부를 나누어 다스리도록 통치권을 위임받은 왕으로, 원래 의미는 ‘4분의 1을 통치하는 사람’을 말했으나 점점 ‘소규모의 땅을 통치하는 사람’이란 의미로 쓰였다. 영주라고도 한다.


 

세례요한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

 

 

헤롯 안티파스 앞에 선 그리스도. 두치오 디 부오닌세냐 작품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 또는 안티파트로스)는 세례요한을 처형한 장본인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인물이다. 그는 대략 주전 20년경에 태어나 주후 39년 이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세기에 로마제국의 속령인 갈릴리와 페리아(Perea: 베레아)를 통치한 테트라크(Tetrach: 지방성주 또는 총독)이었다. 어떤 번역에는 그를 분봉왕이라고 하였고 어떤 번역에는 그냥 왕이라고 했다. 그리스어의 테트라크라는 말은 전체 영토의 4분의 1을 통치하는 자라는 뜻이다. 헤롯 안티파스는 전체 유대 땅에서 4분의 1을 통치할 뿐이기 때문에 테트라크라는 호칭이 붙었다. 일반적으로 헤롯 안티파스를 비롯하여 유대의 영토를 분할 받은 아들들(헤롯 아켈라우스와 헤롯 필립)을 분봉왕이라고 부르지만 이들의 임명권자인 로마제국은 왕이라고 부르지 않고 지방성주 정도로 불렀다. 헤롯 안티파스의 아버지는 헤롯대왕(Herod the Great)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며 어머니 말타스(Malthace)는 사마리아 여인으로서 헤롯 대왕의 네 번째 부인이다. 여기에서 헤롯대왕이라는 사람의 부인들과 자녀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헤롯대왕은 무려 10명의 부인을 두었다. 헤롯대왕은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에 유대 왕이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이 유대의 왕이 새로 태어났다고 말하자 베들레헴과 인근 마을의 두 살 아래의 남자아이들을 모두 죽이도록 한 인물이다. 헤롯대왕은 세례요한의 아버지인 제사장 사가랴도 죽였다.

 

헤롯대왕의 부인과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부인 자녀
1 도리스(Doris) 아들 안티파터(Antipater) - 처형됨
2 마리암느(Mariamne: 마리암네):하스모네아왕 알렉산드로스의 딸 아들 알렉산더(Alexander) - 처형됨
아들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 처형됨
딸 살람프시오(Salampsio)
딸 키프로스(Cypros)
3 마리암느(Mariamne: 마리암네):
대제사장 시몬의 딸
아들 헤롯(Herod: 헤로디아스와 결혼, 살로메의 아버지): 헤롯 2세라고도 부름
4 말타스(Malthace): 사마리아 여인 아들 헤롯 아켈라우스(Herod Archelaus: 아켈라오) - 유대왕
아들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 - 갈릴리-페레아왕
딸 올림피아스(Olympias)
5 클레오파트라(Cleopatra): 예루살렘 여인 아들 헤롯 필립(Herod Philip: 빌립) - 가울라니티스(현재의 골란고원)왕
6 팔라스(Pallas) 아들 파사엘(Phasael)
7 파이드라(Phaidra) 딸 록산느(Roxane)
8 엘피스(Elpis) 딸 살로메 바트 헤로드(Salome bat Herod)
9 조카와 결혼 자녀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음
10 조카와 결혼 자녀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음

 

위의 도표에서 보는 대로 헤롯대왕은 10명의 부인이 있었으며 공식적인 아들과 딸만 해도 14명이나 되었다. 나중에 헤롯대왕이 다스리던 유대 땅을 헤롯 안티파스와 함께 나누어 상속받은 아켈라우스(아켈라오)는 안티파스의 친형이지만 필립은 이복동생이었다. 헤롯 안티파스를 통상 안티파스라고 부른다. 안티파스는 아버지 헤롯대왕의 셋째 부인인 대제사장 시몬의 딸 마리암느(마리암네)의 아들인 헤롯과 결혼한 헤로디아스(헤로디아)와 눈이 맞아 각자 이혼하고 결혼하였다. 즉, 형의 부인과 결혼한 것이다. 헤로디아스의 딸이 우리가 알고 있는 춤 잘추는 살로메이다. 헤로디아스와 살로메 모녀 때문에 세례요한이 잔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헤로디아스의 딸의 이름이 살로메라는 것은 성경이나 다른 어느 기록에도 없다. 다만, 1950년대에 오스카 와일드가 그의 희곡인 '살로메'에서 처음으로 세례요한의 목을 달라고 한 헤로디아스의 딸의 이름을 살로메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렇게들 알고 있을 뿐이다.

 

세례요한이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스의 앞에서 이들의 부정을 비난하고 있다.  

 

 

헤롯 안티파스의 최후

 

헤롯 안티파스가 세례요한의 머리를 바라보고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지도 3년이 지났다. 마침내 안티파스와 나바테아와의 전쟁이 일어났다. 안티파스가 나바테아의 공주인 파사엘리스를 내쫒고 헤로디아스와 결혼한 해묵은 사건에 국경분쟁까지 겹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수 없었다. 안티파스는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더구나 이복동생인 필립이 다스리는 영토에서 백성들이 대거 도주하여 나바테아의 편을 드는 바람에 안티파스의 군대는 지리멸멸하게 되었다. 헤롯대왕의 또 다른 아들인 필립 역시 악행을 밥 먹듯 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었다. 전쟁이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자 안티파스는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안티파스와 티베리우스는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안티파스는 몇 년전에 티베리우스를 기리기 위해 갈릴리호수 동편에 건설한 도시에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붙이기까지 하여 충성을 보인바 있다.

 

티베리우스는 시리아의 로마총독인 루시우스 비텔리우스(Lucius Vitellius)에게 나바테아로 진격하여 아레타스 왕을 생포하던지 죽이던지 하라고 명령하였다. 비텔리우스는 로마군 2개 군단을 동원하였다. 그는 휘하의 사령관들로 하여금 나바테아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갈릴리 호수를 우회하여 진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군대를 진격토록 명령하고 난후 비텔리우스는 안티파스가 예루살렘에서 개최하는 환영파티에 참석하였다. 비텔리우스는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티베리우스 황제가 세상을 떠난 사실을 통보받았다. 주후 37년 3월 16일이었다. 비텔리우스는 서거한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진격하고 있는 로마군을 철수시켰다. 더구나 비텔리우스는 안티파스가 티베리우스의 빽만 믿고 잘난체 하는 것을 아니꼽게 생각하고 있었던 터였다.

 

헤롯 아그리파의 치하에서 만든 주화. 아그리파의 모습이 들어 있다.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있듯이 헤롯 안티파스의 권세로 날개를 접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새로운 로마황제 칼리굴라(Caligula)와 안티파스의 조카로서 헤로디아스의 남동생인 아그리파(Agrippa)가 있었다. 헤로디아스의 남동생, 즉 안티파스에게는 처남이 되는 아그리파는 천하에 둘도 없는 방탕한 인간이었다. 아그리파는 로마에 있으면서 노름에 정신이 팔려 가산을 탕진하고 엄청난 빚까지 지게 되자 누이인 헤로디아스에게 돈 좀 빌려 달라고 매달렸다. 헤로디아스는 남동생의 사정이 딱한 것을 보고 남편인 안티파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안티파스는 한마디로 ‘곤란하다’고 거절하며 안면을 몰수하였다. 아그리파는 ‘어디 혼자서 잘 먹고 잘 사는지 두고 보자’면서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일이 잘 되느라고 그랬는지 아그리파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인 칼리굴라를 대신하여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사연인즉, 칼리굴라가 ‘그 놈의 티베리우스 황제인지 무언지 빨리 뒈져라, 그래야 카리굴라가 황제가 된다’고 무심코 말한 것을 티베리우스의 측근이 염탐하였는데 눈치 빠른 아그리파가 자기가 그렇게 말했다고 하면서 대신 옥에 갇혔던 것이다. 이윽고 티베리우스가 죽고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었다. 주후 37년이었다. 그러니 아그리파는 어떻게 되었는가? 당장 감옥에서 석방되었고 유대의 분봉왕으로 임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칼리굴라는 전에 필립이 다스리던 땅까지 아그리파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했다.

 

 

아그리파에 의해 감옥에 갇혔던 베드로가 천사의 인도함으로 옥에서 자유롭게 나오는 장면

 

 

남동생 아그리파가 왕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헤로디아스는 속이 상했다. 누구는 그렇게 충성했는데도 아직까지 왕이라는 타이틀은 커녕 총독에도 못미치는 테트라크(성주)라는 타이틀을 쓰고 있는데 누구는 황제와 친분이 있다고 해서 당장 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니 속이 상했던 것이다. 헤로디아스는 남편 안티파스를 설득하여 칼리굴라 황제를 찾아가서 자기도 왕으로 삼아 달라고 부탁하도록 하였다. 그러한 때에 영악한 아그리파는 칼리굴라 황제에게 안티파스의 비행 및 반역적 행동을 일일이 기록하여 보냈다. 이에 의하면 안티파스는 티베리우스에게도 반역의 기미를 보였지만 이번에는 칼리굴라에게도 반역하기 위해 동지들을 규합하였다는 것이다. 아그리파는 그 증거로 안티파스가 7만명 군대를 무장시킬 무기를 쌓아놓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가보다 했던 칼리굴라도 나중에는 무기를 쌓아놓고 있다는 증거를 들이대자 안티파스를 내치기로 결심했다. 더구나 충견인 아그리파의 주장이 아니던가? 칼리굴라 황제는 안티파스의 모든 재산과 영토를 몰수하여 아그리파에게 넘겨 주었다. 그리고 안티파스를 저 멀리 프랑스 남단의 골지방(현재의 리옹)으로 유배를 보냈다. 칼리굴라 황제는 헤로디아스에게 재산을 몰수하지 않겠으니 그대로 가지도록 하였으나 헤로디아스는 무슨 의리가 그렇게 많은지 자기의 재산을 모두 포기하고 남편 안티파스를 따라 유배지로 함께 갔다. 두 사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일설에 의하면 칼리굴라가 사람을 보내어 죽였다고 한다. 헤로디아스의 딸인 살로메는 그후 어떻게 되었는가? 아무도 모른다. 시집이나 갔는지 아이들은 몇명이나 두었는지 모른다.

 

 카리굴라 황제

   글: 정준극


헤롯 대왕(The Great Herod, Herodes)

 

 헤롯 대왕(The Great Herod, Herodes)은 대단한 건축가였습니다. 그가 건축에 엄청난 정열을 쏟았던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고 확장하기 위한 의도를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서 고고학, 헤롯 대왕의 복잡한 진실 이야기

 

1. 혜롯 대왕의 통치

  헤롯 대왕은 BC 37년부터 BC 4년에 죽을 때까지 유대를 통치하였던 왕입니다. 그는 그리스인들의 축제인 올림픽에 많은 기부를 했으며 아테네와 로즈와 같은 유명한 도시의 건축 계획을 후원하였습니다. 또 공공 건물이나 궁전 그리고 도시 전체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대단한 건축가이면서도 헤롯은 무자비한 왕이었습니다.

   헤롯 대왕은, 많은 건축을 하기 위한 재정을 무거운 세금을 매겨 착취함으로써 충당하였습니다. 그래서 무자비하게 압제하였으며 잔인하게 나라를 통치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간음을 의심한 아내 미리암을 처형하기도 하였으며,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직후에는 베들레헴 주변의 두 살 이하의 모든 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2. 헤롯 대왕이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

   그의 대단한 명성 혹은 악명에도 불구하고 헤롯의 진면목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Santa Maria Maggiore) 교회에서 나온 두 개의 모자이크에서 헤롯은 수염이 있으며 파란 망토와 흰색 왕관이 있는 군복을 입고 후광이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초상은 초기 기독교 예술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모습이지만, 헤롯에 대한 이러한 모습은 그가 죽은지 수백 년 후에 묘사된 것임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묘사를 우상 숭배로 생각하고 극히 꺼려했기 때문입니다.

   헤롯 대왕도 유대인들의 이러한 전통을 존중하였으며, 그 결과 헤롯 대왕의 생존 당시의 모습은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3. 그리스-로마 시대의 헤롯 대왕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왕이나 대단한 인물들의 모습을 동상으로 남겼었습니다. 그래서 아테네나 코스(Kos), 시아(Sia)에 있는 시리아 정교회 성도 등에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헤롯 동상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헤롯의 두 조각상은 아크로폴리스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아고라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동상들은 실제 헤롯의 모습을 우리에게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4. 헤롯의 건축

   헤롯은 단지 건축을 좋아하였기에 많은 건물을 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헤롯에게 있어서 건축이란, 자신의 위대한 권력의 표현이자 그 권력을 확장하고 보호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케네스 G. 홀룸(Kenneth G. Holum)은 현재의 지중해변에 있는 "가이사랴 항구" 유적지를 연구하며 당시의 문화와 정치에 대해 조사하였습니다.

   이 고대 항구는 지중해로 뻗어있는 2개의 방파제를 대단한 기술을 바탕으로 건설하였습니다. 그 각각의 길이만 해도 약 460여 미터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항구에는 거대한 극장과 경기장, 각종 사원과 사도 바울이 재판을 받았던 "헤롯의 홀" 등이 있었습니다.

 

 

5. 헤롯의 끔찍한 죽음

   헤롯은 BC 4세기 경에 70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이 때까지 그는 계속해서 유대를 통치했었습니다. 의사들은 오랫동안 그의 죽음의 원인들에 대해 논쟁해 왔었지만, 아직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Herod's Horrid Death'에서 Nikos Kokkinos는 역사 문헌들과 현대 의학 문헌을 검토하여 헤롯의 삶과 통치를 끝내게 한 질병에 대해 진단하였습니다.

 

헤롯의 가까운 동반자였던 다메섹의 니콜라우스가 한 최초의 설명에 근거하여, 1세기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헤롯의 죽음의 증상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장에 끔찍한 통증이 있는 장의 궤양"이 있었으며, "복부 부위에는 악성 종양"이 있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요세푸스의 이러한 주장을 신뢰하기는 어렵습니다. 헤롯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유대의 악한 왕이었던 헤롯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였지만 그의 몸과 마음은 이미 피폐할 대로 피폐한 상태였었다는 것입니다.

   

 

성서 고고학, 헤롯 대왕의 복잡한 진실 이야기


 

아기 예수 죽이려고 했던, 바로 그 사람

헤롯 왕은 2000년 전 멀리서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들에서 유대인의 왕이 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 될 것을 우려해 당시 2살 이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 장본인이다. 헤롯은 25세때 로마제국으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되어 약 34년간 유대땅을 다스린 왕이었다.

헤롯 왕이 중요한 것은 그가 바로 기독교 탄생 시기에 정치적으로 핵심에 있었던 인물로 그의 실존이 바로 기독교 탄생의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헤롯 왕은 건축광으로도 유명한데, 예루살렘 '통곡의 벽'· 맛사다·가이사랴·여리고 겨울궁전·헤브론 막벨라굴 그리고 유대광야에 쌓아올린 헤로디움 등 현재 이스라엘의 주요 유적들이 그에 의해 건축된 것이다.

서기 1세기 역사가였던 요세프스는 헤롯 왕이 장례식 후 그의 요새인 헤로디움에 묻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적 실체를 밝히기 위해 지금까지 끊임없이 그의 무덤 발굴을 시도했으나 그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현재까지는 산 정상의 궁전과 산 아래의 교회유적이 그의 무덤으로 유력시되었지만 확실한 증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네쩌르 교수는 기자회견을 통해 그간의 발굴 과정을 10여장의 자료사진을 보여주며 하나 하나 설명해 나갔다. 그리고 헤롯 왕의 무덤으로 단정한 여러 증거자료를 제시했다.

자신의 원래 전공은 건축학이라는 점을 강조한 네쩨르 교수는 발굴된 무덤의 규모나 수준이 왕이 아니면 건축될 수 없는 대규모 석관묘라는 것을 힘주어 말했다. 특히 그가 헤롯 대왕의 석관 일부로 제시한 문양이나 장식은 요르단 페트라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한 것으로 당시 왕이나 최고위층 인사의 무덤에 썼던 것과 같은 형태라는 주장이다.

헤롯의 이름이 적히 묘비나 그와 관련된 직접적인 유물 등 헤롯 왕의 무덤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찾는 것은 숙제이지만, 외신들은 네쩨르 교수의 주장을 반론의 여지 없이 세기의 고고학 발굴 성과로 타전하고 있다.

 

 

▲ 헤로디움을 하늘에서 본 모습. 헤롯 왕이 쌓아 만든 요새이자 왕궁이다.

▲ 헤로디움 전경. 산 중턱에 무덤 발굴 현장이 보인다.

 

 

산 중턱에서 무덤이 발견된 까닭은

기자회견 다음날, 기자는 헤롯 대왕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헤로디움으로 향했다. 예루살렘에서 분리장벽으로 둘러싸인 베들레헴으로 들어가 다시 유다광야 쪽으로 달려 자동차로 약 1시간 만에 헤로디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헤롯 왕의 무덤은 서기 135년 전쟁 때 유대인들이 이같이 훼손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헤롯의 어머니는 원래 에돔의 이방 여인으로 집안이 개종을 통해 유대인이 되었고, 로마의 도움으로 유대인의 왕이 되었다.

따라서 헤롯은 언제든지 유대인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해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으며 유사시를 대비해 헤로디움을 비롯해 맛사다·여리고·마케루스 등 여러 개의 피신할 수 있는 요새를 만들었다.

사후에 자신의 무덤이 유대인들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안전한 장소를 찾던 중 헤로디움 중턱에 만들었을 것이라는 게 네쩌르 교수의 추측이다. 헤로디움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이 무덤은 분명 예루살렘쪽 을 향하고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추가 발굴을 거쳐 이 유적이 헤롯 대왕의 무덤으로 최종 확인될 경우 중동 지역의 고고학 발굴 사상 사해 두루마리 발견 이후 최대의 발견이 될 것이며 이스라엘 성서 고고학계에 최대의 미스터리가 풀린 것이란 의미를 부여했다. ⓒ 이강근 기자


헤롯대왕의 사망 연대 논쟁

기독교 초기 교부들은 복음서와 로마의 사료를 바탕으로 BC 3/2년을 예수의 탄생연도로 보았다. 

 
그런데 예수의 탄생을 다루는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 속의 기록의 역사적 신빙성은 결국 헤롯대왕의 사망 연도를 어떻게 확정하는가에 달려있다. 
 
그 이유는 간략하게 말해 다음과 같다.

  • 첫째, 헤롯이 BC 4년에 사망했다면, 예수의 탄생일은 BC 8-4년 무렵이 될 것이고, 이 경우는 BC 3/2년에 있었던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충성서약 관련 센서스 혹은 AD 6년에 있었던 퀴리니우스의 징세 센서스 어느 것도 {누가/루가복음서}의 진술과 일치할 수 없다.
  • 둘째, 헤롯이 BC 4년에 사망했다면, {마태/마태오복음서}에 등장하는 동방박사가 개입할 만한 천문현상이 예수와 무관해 진다.

서로 다른 연대체계 (가령, 서력기원과 중국의 연호)를 비교해서 하나의 통일된 연대체계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두 문화권의 역사 중 서로 겹치는 부분을 기준으로 (신뢰도가 더 높은 쪽의 연표에 따라) 재배열하면 된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은 상대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은 절대적인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는 자연현상에 기준하는 방법이다. 가령, 일식이나 월식의 출현일을 바탕으로 절대적인 기준점을 산정하는 것이 그런 방법에 속한다.

우선 현대 역사학자들이 예수의 탄생연도와 헤롯의 사망연도를 어떻게 추정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BC 12년?
  • "Places the Crucifixion of Jesus in 36." p. 162. "It follows that Jesus was born in 12 BC." p. 163. --- Nikos Kokkinos, {Chronos, Kairos, Christos: Nativity and Chronological Studies Presented to Jack Finegan}. Winona Lake, IN: Eisenbrauns, 1989
  • "Prevailing view is that Jesus was born between 8 and 2 BC and that he died around AD 30-33." p. 56. "my judgment that Jesus was born in late 12 BC and that he was crucified around AD 21." p. 56. --- Ephraim Jerry Vardaman, {Chronos, Kairos, Christos: Nativity and Chronological Studies Presented to Jack Finegan}. Winona Lake, IN: Eisenbrauns, 1989

BC 7년 -BC 4년 사이?

  • "Jesus was born somewhere between 4 and 6 B.C.",  --- Ben Witherington III, {Primary Sources} Christian History, August 1998 p12(1).
  • "About the date of Jesus' birth there are equally perplexing problems. The belief that he was born in AD 1 only came into existence in the sixth century AD when a monk... His birth-date should be reassigned to 6 or 5 or 4 BC, though some prefer 11 or 7 . , --- Michael Grant, {Jesus: An Historian's Review of the Gospels}, Scribner's, 1977, p. 71
  • "Jesus is linked with the reign of king Herod teh Great (37-4 B.C.E.), during whose incumbency Jesus was allegedly born. We also have the name of Herod Antipas, tetrarch from 4 B.C.E. to 39 C.E., who ruled Galilee during Jesus' life and beheaded John the Baptist; and the name of Pntius Pilate, the Roman procurator (26-36 C.E.) under whom Jesus was crucified. Jesus therefore lived in a period bounded by a date prior to the death of Herod on the one side and by the end of Pilate's tenure in 36 C.E. on the other." --- Robert W. Funk and the Jesus Seminar, The Acts of Jesu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Deeds of Jesus, HarperSanFrancisco, 1998, p. 528 
  • "All things considered, then, we can only estimate that Jesus must have been born sometime during 6-4 B.C." -- D. A. Carson, Douglas J. Moo and Leon Morris. {A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2. 
  • "During the reign of King Herod the Great (and if Matthew is to be believed, toward the end of his reign, therefore somewhere between 7-4 B.C.), a Jew named Yeshia (=Jesus) was born, perhaps in Bethlehem of Judea but more likely in Nazareth of Galilee-at any rate, in a small town somewhere within the confines of Herod's kingdom." --- John P. Meier, A Marginal Jew, Doubleday, 1991-, vol. 1:407, p. 229
  • "...yields 5 BC, the most likely date for the Nativity." p. 119 -- Paul L. Maier, {Chronos, Kairos, Christos: Nativity and Chronological Studies Presented to Jack Finegan}. Winona Lake, IN: Eisenbrauns, 1989

BC 6년?
  • The first enrolment (?πογραφ? πρ?τη). A definite allusion by Luke to a series of censuses instituted by Augustus, the second of which is mentioned by him in Ac 5:37. This second one is described by Josephus and it was supposed by some that Luke confused the two. But Ramsay [q.v., Luke the Physician] has shown that a periodical fourteen-year census in Egypt is given in dated papyri back to A.D. 20. The one in Ac 5:37 would then be A.D. 6. This is in the time of Augustus. The first would then be B.C. 8 in Egypt. If it was delayed a couple of years in Palestine by Herod the Great for obvious reasons, that would make the birth of Christ about B.C. 6 which agrees with the other known data. When Quirinius (Κυρην?ου). Genitive absolute. Here again Luke has been attacked on the ground that Quirinius was only governor of Syria once and that was A.D. 6 as shown by Josephus (Ant. XVIII. I.I). But Ramsay has proven by inscriptions that Quirinius was twice in Syria and that Luke is correct here also.. -- A. T. Robertson's Word Pictures of the New Testament (Broadman & Holman, 1970), on Luke 2:2:

BC 6년 이전?

  • "Both Matthew and Luke assign Jesus' birth to "the days when Herod was king of Judea" -consequently before 3 B.C. Luke, however, describes Jesus as "about thirty years old" when John bptized him "in the fifteenth year of Tiberius" -i.e., A.D. 28-29; this would place Christ's birth in the year 2-1 B.C. Luke adds that "in thjose days there went out a decree of Caesar Agustus that all the world should be taxed . . . when Quirinius was governonr of Syria." Quirinius is known to have been legate in Syria between A.D. 6 and 12; Josephus notes a census by him in Judea, but ascribes it to A.D. 6-7; we have no futher mention of this census. Tertullian records a census of Judea by Saturninus, governon of Syria 8-7 B.C.; if this is the census that Luke had in mind, the bith of Christ would have to be palced before 6 B.C." -- Will Durant, Caesar and Christ, Simon and Schuster, 1994, p. 557-558

BC 3/2년 ?

  • "If we remember the prevailing tradition represented by the majority of the early Christian scholars dated the birth of Jesus in 3/2 B.C., and if we accept the time of Herod's death as between the [lunar] eclipse of Jan 9/10 and the Passover of April 8 in the year 1 B.C., then we will probably date the nativity of Jesus in 3/2 B.C., perhaps in mid-January in 2 B.C." p. 319, §549. Jack Finegan, Handbook of Biblical Chronology, rev. ed. (1998)
  • "I believe that there are seven historical and biblical factors that show the reasonableness of a 3 or 2 BC birth for Jesus." p. 86. -- Ernest L. Martin, {Chronos, Kairos, Christos: Nativity and Chronological Studies Presented to Jack Finegan}. Winona Lake, IN: Eisenbrauns, 1989

여기서는 헤롯대왕의 사망에 관한 현대의 표준이론인 BC 4년설과 전통적인 BC 1년 설 두가지를 다루도록 하겠다.


# 현대의 표준연표 : 헤롯의 사망연도 = BC 4년?

헤롯의 사망연도를 BC 4년으로 설명한 첫 시도는 1605년 폴란드의 역사가 Laurentius Suslyga에 의한 것이다. 그는 (1) 요세푸스의 기록 중 헤롯대왕의 연대기 (2) 헤롯 필립포스의 연대기 (3) 아우구스투의 딸 율리아의 유배시기 등을 바탕으로 BC 4년을 헤롯대왕의 사망일로 추정했다.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이 주장을 발전시켜서 BC 4년 3월 14일의 월식을 요세푸스가 헤롯대왕의 죽음 얼마 전에 있었다는 그 월식으로 해석했다.

현재 BC 4년은 헤롯대왕의 사망연도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연도이며, Emil Schurer의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Time of Jesus Christ} 이후 학계의 표준이론이 되었다.


Emil Schurer,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Time of Jesus Christ}
https://archive.org/stream/historyofjewishp01sch

우선, 쉴러와 그 지지자들의 논증근거를 정리해 보자.


## 헤롯의 통치기간

요세푸스는 다른 저작에서 조금 다른 헤롯의 통치기간을 언급하는데 (Antiquities XVII, 190; War, I, 665), 헤롯의 통치기간은 예루살렘을 폼페이누스와 공략할때 안티고누스 왕의 죽음 (BC 37년 혹은 36년) 으로부터 계수해서 34년이고, 로마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은 BC 40년으로부터 계수해서 37년이다.그렇게 되면 대략 BC 4-2년 사이가 헤롯대왕의 사망연도가 된다. (BC 3년에는 월식이 없다.)

1. AND now Herod altered his testament upon the alteration of his mind; for he appointed Antipas, to whom he had before left the kingdom, to be tetrarch of Galilee and Perea, and granted the kingdom to Archclaus. He also gave Gaulonitis, and Trachonitis, and Paneas to Philip, who was his son, but own brother to Archclaus (10) by the name of a tetrarchy; and bequeathed Jarnnia, and Ashdod, and Phasaelis to Salome his sister, with five hundred thousand [drachmae] of silver that was coined. He also made provision for all the rest of his kindred, by giving them sums of money and annual revenues, and so left them all in a wealthy condition. He bequeathed also to Caesar ten millions [of drachmae] of coined money, besides both vessels of gold and silver, and garments exceeding costly, to Julia, Caesar's wife; and to certain others, five millions. When he had done these things, he died, the fifth day after he had caused Antipater to be slain; having reigned, since he had procured Antigonus to be slain, thirty-four years; but since he had been declared king by the Romans, thirty-seven. (11) A man he was of great barbarity towards all men equally, and a slave to his passion; but above the consideration of what was right; yet was he favored by fortune as much as any man ever was, for from a private man he became a king; and though he were encompassed with ten thousand dangers, he got clear of them all, and continued his life till a very old age. But then, as to the affairs of his family and children, in which indeed, according to his own opinion, he was also very fortunate, because he was able to conquer his enemies, yet, in my opinion, he was herein very unfortunate. ---{유대고대사} 17.8.1

8. So Herod, having survived the slaughter of his son five days, died, having reigned thirty-four years since he had caused Antigonus to be slain, and obtained his kingdom; but thirty-seven years since he had been made king by the Romans. --- {유대전쟁사} 1.33.8

또한 헤롯의 통치 7년 차는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를 패배시킨 해였고 유래없는 대지진이 유대아 일대에 있었다 (Antiquities 15.5.2). 악티움 해전은 BC 31년 9월 31일에 있었으므로, 이렇게 되면, 헤롯의 통치는 BC 37년이 된다. 이것은 안티고누스의 죽음으로부터 계수된 것과 같다.

At this time it was that the fight happened at Actium, between Octavius Caesar and Antony, in the seventh year of the reign of Herod (8) and then it was also that there was an earthquake in Judea, such a one as had not happened at any other time, and which earthquake brought a great destruction upon the cattle in that country. About ten thousand men also perished by the fall of houses; but the army, which lodged in the field, received no damage by this sad accident. When the Arabians were informed of this, and when those that hated the Jews, and pleased themselves with aggravating the reports, told them of it, they raised their spirits, as if their enemy's country was quite overthrown, and the men were utterly destroyed, and thought there now remained nothing that could oppose them. --- {유대고대사} 15.5.2


## 월식

요세푸스는 헤롯대왕의 죽음 얼마 전에 월식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BC 4년"설에서는 BC 4년 3월 13일의 월식이 요세푸스가 말한 그 월식인 것으로 이해한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7.6.4에서 인용한다.

"...But the people, on account of Herod's barbarous temper, and for fear he should be so cruel and to inflict punishment on them, said what was done was done without their approbation, and that it seemed to them that the actors might well be punished for what they had done. But as for Herod, he dealt more mildly with others [of the assembly] but he deprived Matthias of the high priesthood, as in part an occasion of this action, and made Joazar, who was Matthias's wife's brother, high priest in his stead. Now it happened, that during the time of the high priesthood of this Matthias, there was another person made high priest for a single day, that very day which the Jews observed as a fast. The occasion was this: This Matthias the high priest, on the night before that day when the fast was to be celebrated, seemed, in a dream, 1 to have conversation with his wife; and because he could not officiate himself on that account, Joseph, the son of Ellemus, his kinsman, assisted him in that sacred office. But Herod deprived this Matthias of the high priesthood, and burnt the other Matthias, who had raised the sedition, with his companions, alive. And that very night there was an eclipse of the moon..." --- {유대고대사} 17.6.4


## 헤롯의 아들들의 집권기간 

로마 역사가 캇시우스 디오는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스가 권좌에 오른 후 로마 콘술 Aemalius Lepidus와 L. Arruntuis 의 임기에 실각했다고 기록한다. 그해는 그렇다면 AD 6년이 된다.

캇시우스 디오를 인용한다.

"...25 After this, in the consulship of Aemilius Lepidus and Lucius Arruntius, when no revenues for the military fund were being discovered that suited anybody, but absolutely everybody was vexed because such an attempt was even being made..." --- Dio Cassius 55.24.9.25

"...6 These were the events in the city that year. In Achaia the governor died in the middle of his term and instructions were given to his quaestor and to his assessor (whom, as I have stated, we call envoy) for the former to administer the province as far as the Isthmus and the other the remainder. Herod of Palestine, who was accused by his brothers of some wrongdoing or other, was banished beyond the Alps and a portion of the domain was confiscated to the state..." --- Dio Cassius, 55.27.6.

헤롯을 이어 유대아 일대의 통치자가 되는 그의 아들들이 주조한 주화들을 보면, 대체로 BC 4년부터 그의 통치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 헤롯을 이은 세 아들들 (아켈라오스, 안티파스, 필립포스)이 발행한 주화들의 발행연도를 살펴보자. 세 명의 재위기간은 일단 표준연표에 따르겠다

우선 헤롯 아켈라오스 (BC 4년 - AD 6년)가 발행한 주화들은 연대가 불분명하다. 한편, 갈릴리의 분봉왕(tetrarch)인 헤롯 안티파스 (BC 4년 - AD 39년)가 발행한 주화들은 연대가 확정되어 있다. 주화는 그가 새 수도인 티베리아스로 옮긴 후부터 발행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주화 중 가장 이른 것의 제작연도는 재위 24년 (AD 19/20년)이다. 그는 AD 39년에 칼리귤라 황제에 의해 축출당했고, 그해가 그의 집권 43년 임을 입증하는 주화가 남아있다.

파니아스에 도읍을 정한 헤롯 필립포스 1세(BC 4년 - AD 34년)가 지배하던 지역은 유대인 지역이 아니었다. 그의 주화에는 로마황제라거나 헤롯대왕이 파니아스 건립한 이교신전 등이 등장하며 가장 이른 것은 재위 5년부터 시작한다.


# 고대 교회의 표준연표 (BC 1년)의 관점에서 본 "BC 4년"설의 문제점

1960년대 중반부터 몇몇 역사학자들이 쉴러가 계산한 헤롯대왕의 재위시기에 대해 이견을 내어놓았다. Jack Finegan은 1964년에 {Handbook of Biblical Chronology} (284-291)에서 쉴러의 이론을 버리고 예수의 탄생을 BC 3/2년에, 헤롯대왕의 죽음을 BC 1년에 위치시키는 새로운 연표를 발표했다.

이 주장을 따르는 대표적인 논문들과 책들 가운데 내가 참조한 리스트는 아래와 같다.

  • W.E. Filmer, {Chronology of the Reign of Herod the Great,}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ns 17 (1966) 283?298
  • Ormond Edwards, {Herodian Chronology}, Palestine Exploration Quarterly 114 (1982) 29?42
  • Jerry Vardaman (Author), Edwin M. Yamauchi (Editor) , {Chronos, Kairos, Christos: Nativity and Chronological Studies Presented to Jack Finegan}, 1989
  • Paul Keresztes, {Imperial Rome and the Christians: From Herod the Great to About 200 A.D.} (Lanham, MD: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89) 1?43

가장 최근 논문으로는 Andrew E. Steinmann의 논문 {When Did Herod the Great Reign?} (Novum Testamentum 51 (2009) pp 1-29)를 참조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쉴러의 표준연표가 가지는 문제점은 아래와 같이 정리될 수 있다.


## 헤롯대왕의 통치기간에 대한 요세푸스의 다른 기록방식

위에 언급한 대로, 요세푸스의 계산에 따르면 헤롯의 사망시점은 BC 4년에서 2년에 겹친다. 요세푸스는 대체로 헤롯의 즉위로부터 로마의 연표에 맞춘 연대기를 기술해 나갔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부분은 그런 연대기 표기방식이 예수의 탄생 얼마 전인 헤롯의 재위 28년에 끝난다는 것이다. 요세푸스가 다시 로마의 연표를 이용해서 서술하기 시작하는 때는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의 재임 10년 차인 AD 6년이며, 이때부터 유대전쟁이 벌어지는 AD 66-73년까지는 다시 로마연표를 참조한 연대기를 작성한다.

결과적으로 요세푸스가 이 무렵 유대아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 남긴 사건들의 상대적 전후관계만 의존해서 연대기를 재구성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당시의 사건 (가령, 아우구스투스/퀴리니우스의 등록령, 월식, 유월절)을 무엇으로 맞추느냐에 따라 헤롯의 사망연도는 들쭉날쭉하게 된다.

헤롯 재위 28년부터 아켈라오스 재임 10년에 걸치는 약 10여 년의 (추정)기간은 유대인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들이 벌어진 시점이었다. 가령, 헤롯의 처 가운데 하나인 마리암네의 자식들이 처형당했고,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맹세를 거부한 6000여 명의 바리새인들의 서약거부 사건이 있었고, 헤롯과 공동으로 국정을 수행하던 장남 안티파트로스가 헤롯을 시해하려는 음모로 기소되어 시리아의 로마총독에게 보내졌고, 헤롯의 형제인 페로라스가 죽었고, 안티파트로스에 대한 헤롯의 친국이 이어졌고, 로마의 황금독수리상이 부숴지는 사태가 발생했고, 두 명의 랍비가 본보기로 처형되었고, 안티파트로스가 헤롯의 손에 처형당했다. 이 사건 어느 것도 요세푸스가 이 전에 사용한 벤치마크 연도 (즉 올림피아드나 악티움 해전)에 참조되어 기술되지 않았다.


## 아우구스투스의 등록령/충성맹세 시점과의 충돌

예수의 탄생 무렵 로마 전역에서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이 있었던 것은 BC 3/2년 무렵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요세푸스는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충성서약을 거부한 6000여 명의 바리새인들에 대한 헤롯의 처벌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즉 헤롯이 BC 3/2년에도 살아있었다는 뜻이 된다.
 


## 월식부터 사망까지의 빠듯한 기간

요세푸스는 헤롯대왕이 월식이 있은 후부터 이어지는 유월절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지만 연도를 특정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월식을 BC 4년 3월 13일에 발생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 그 해의 유월절은 30일 후에 오게 된다. 그런데 요세푸스는 이 한 달 남짓의 기간에 발생한 너무나 많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대체로 한 달 안에 일어나기에는 빠듯한 사건들의 배열이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출처: Ant. XVII.vi.5-ix.3; Wars I.xxxiii.5-9).

  1. 월식 전날 헤롯은 그가 성전 동쪽 문에 설치한 로마의 금독수리를 파괴한 혐의로 저명한 바리사리/바리새파 랍비 두 명을 산 채로 화형시켰다.
  2. 훨식 다음날, 헤롯의 병이 위중해져서 여러 부위가 곪고 벌레가 생겼다
  3. 에리코/여리고에서 10마일 정도 떨어진 사해 동편의 온천에서 휴양을 했으나 차도가 없어 왕궁으로 돌아왔다
  4. 헤롯의 아들 안티파트로스가 처형당했고, 헤롯은 그로부터 5일 후 죽는다 (자신의 즉위 34년 하루 후).
  5. 화려한 국장이 치러졌다.
  6. 장례일로부터 7일 간의 애도기간 (shiva)이 시작되었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 3.9.5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통상적인 장례 애도기간 (Sheloshim) 이것은 (장례일로부터) 30일이었다)
  7. 월식이 있은 밤 전날 헤롯에 의해 처형당했던 유대인들을 애도하는 또 다른 애도가 이어졌다.
  8. 이어지는 유월절


## 다른 월식들의 문제

요세푸스는 자신의 저작에서 (연도와 날짜가 불분명한) 단 한 건의 월식만을 기록한다. 그러나 사실 그 무렵에는 여러 건의 월식이 있었다. 천문학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으로 쉽게 확인해 볼 수 있다

  • BC 4년 : 3/13 (1차, 부분월식/35%), 9/2 (2차)
  • BC 3년 : 없음
  • BC 2년 : 1/16 (1차), 7/17 (2차, 부분월식/81%)
  • BC 1년 : 1/9-10 (완전월식), 12/29 (부분)
  • AD 1년 : 없음
  • AD 2년 : 11/4

헤롯의 사망은 이 월식 중 하나와 인접한 유월절 (니산 14일) 사이에 있었다. 그럼 그 무렵의 유월절을 살펴보자.

  • BC 4년 : 4/10
  • BC 3년 : 3/29
  • BC 2년 : 3/18
  • BC 1년 : 4/6
  • AD 1년 : 3/27
  • AD 2년 : 4/14

유대아 일대에서 월식은 거의 매 년 (종종 일년에도 여러 차례) 관측된다. 만약 (요세푸스가 암시하는 대로) 처형이 늦은 오후에 있었고, 그래서 월식이 초저녁 무렵에 관측된 것이라면, BC 10-AD 1년 사이에 있었던 여러 건의 월식 가운데, (1) BC 4년 3월 13일, (2) BC 1년 1월 10일의 월식은 다소 부적절하다. (그러나 가능성은 있다.) 그 이유는 이 두 건의 월식은 일몰 후 6시간 후인 자정무렵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BC 5년 9월 15일에 있었던 월식은 일몰 후 3시간 뒤에 발생했다.

이 기준에 가장 잘 부합하는 월식은 BC 1년 12월 29일에 있었던 월식이다. 달은 (처형이 집행된 여리고에서) 관측 가능한 고도(동쪽 3도)에 있었고, 월식은 일몰 후 20분 후에 시작되었다. 만약 이 월식이 요세푸스가 말한 그 월식이라면, 헤롯의 사망일은 BC 4년이 아니라 AD 1년이 된다.

한편, BC 1월 9일의 월식 역시 유력한 후보이다. 유대인의 기념일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는 문서 {Megillat Ta'anit }에 따르면, 헤롯의 죽음은 세밧(Shebat)월 2일로 되어있다.이 경우 가장 가능성 높은 헤롯의 사망일은 BC 1월 9일의 월식부터 유월절 사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문제의 월식부터 유월절까지는 92일이 된다. 이 정도의 기간이라면 위에 언급된 헤롯이 죽기 전과 그 후의 시간표가 설명되기 충분하다.


## BC 6/5년의 시리아 총독: 바루스? 사투르니누스?

요세푸스는 헤롯이 죽었을 때, 바루스가 시리아 총독이었다고 진술했다. 동전에 따르면 바루스는 확실히 BC 4년 직전까지 시리아 총독이었다. 문제는 로마측 사료에 따르면 바루스는 BC 6/5년에도 시리아 총독이지만,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롯의 사망 2/3년 전 시리아를 관할한 총독은 사투르니누스가 된다. 따라서 로마의 사료가 틀렸거나 요세푸스의 진술이 틀린 것이 된다

만약 로마측 사료와 요세푸스가 모두 맞다면, 이것은 헤롯의 사망을 BC 4년으로 보는 관점이 틀린 것이라는 결론이 된다. 즉, 누가 시리아의 총독이었는지가 불분명한 BC 4-AD 1년 사이에 바루스가 총독으로 재임명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추론이다.


##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행적 문제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롯이 죽은 무렵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체제의 제 2인자로서 헤롯 아켈라오스의 송사에 개입해 있었다.

...4. Sabinus did also afford these his assistance to the same purpose by letters he sent, wherein he accused Archelaus before Caesar, and highly commended Antipas. Salome also, and those with her, put the crimes which they accused Archelaus of in order, and put them into Caesar's hands; and after they had done that, Archelaus wrote down the reasons of his claim, and, by Ptolemy, sent in his father's ring, and his father's accounts. And when Caesar had maturely weighed by himself what both had to allege for themselves, as also had considered of the great burden of the kingdom, and largeness of the revenues, and withal the number of the children Herod had left behind him, and had moreover read the letters he had received from Varus and Sabinus on this occasion, he assembled the principal persons among the Romans together, (in which assembly Caius, the son of Agrippa, and his daughter Julias, but by himself adopted for his own son, sat in the first seat,) and gave the pleaders leave to speak. --- {유대전쟁사} 2.2.4

....5. Now when Archelaus had sent in his papers to Caesar, wherein he pleaded his right to. the kingdom, and his father's testament, with the accounts of Herod's money, and with Ptolemy, who brought Herod's seal, he so expected the event; but when Caesar had read these papers, and Varus's and Sabinus's letters, with the accounts of the money, and what were the annual incomes of the kingdom, and understood that Antipas had also sent letters to lay claim to the kingdom, he summoned his friends together, to know their opinions, and with them Caius, the son of Agrippa, and of Julia his daughter, whom he had adopted, and took him, and made him sit first of all, and desired such as pleased to speak their minds about the affairs now before them. Now Antipater, Salome's son, a very subtle orator, and a bitter enemy to Archelaus, spake first to this purpose:.. --- {유대고대사} 17.9.5

로마 측 사료에 따르면,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BC 1년에 파르티아 변방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동방에 사령관으로 파견되어 있었다. 헤롯이 BC 4년에 죽었다면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BC 4년에서 BC 1년 사이에 로마에 머물렀어야 한다.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이 무렵 행적을 알려주는 사료는 충분치 않지만 꽤 타당한 추정이다.

헤롯의 죽음을 이른 AD 1년 (그리고 아마도 이른 BC 1년?)으로 보는 경우도 약간의 가정을 더 필요로 하지만 무리한 정황은 아니다. 콘술의 업무를 반드시 로마에서 볼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율리우스력) AD 1년 1월 1일부터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두 명의 콘술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본인은 BC 5년과 2년에 콘술이었고,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콘술직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서의 경력을 쌓게하기 위한 배려였다.) 로마 역사가 디오 캇시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AD 1년 초에 파르티아의 왕인 프라타케스(Prataces)와 잠정적 휴전에 동의했는데 그 무렵 가이우스는 "시리아에 주둔하면서" 콘술의 업무를 보고 있었다.

Cassius Dio Cocceianus, {Dio's Roman history, tr. Cary, Earnest, 1879-; Foster, Herbert Baldwin, 1874-1906
 
When the barbarians heard of Gaius' expedition, Phrataces sent men to Augustus to explain what had occurred and to demand the return of his brothers on condition of his accepting peace. The emperor [AD 1년 -- 필자 주] sent him a letter in reply, addressed simply to " Phrataces," without the appellation of " king," in which he directed him to lay aside the royal name and to withdraw from Armenia. Thereupon the Parthian, so far from being cowed, wrote back in a generally haughty tone, styling himself " King of Kings " and addressing Augustus simply as " Caesar." Tigranes did not at once send any envoys, but when Artabazus somewhat later fell ill and died, he sent gifts to Augustus, in view of the fact that his rival had been removed, and though he a,d. i did not mention the name " king " in his letter, he really did petition Augustus for the kingship. Influenced by these considerations and at the same time fearing the war with the Parthians, the emperor accepted the gifts and bade him go with good hopes to Gaius in Syria.
 
.... others who marched against them from Egypt, and did not yield until a tribune from the pretorian guard was sent against them. This man in the course of time checked their incursions, with the result that for a long period no senator governed the cities in this region. Coincident with these events^ there was an outbreak on the part of the Germans. Somewhat earlier Domitius, while still governing the districts along the Ister, had intercepted the Hermunduri, a tribe which for some reason or other had left their own land and were wandering about in quest of another, and he had settled them in a part of the Marcomannian territory ; then he had crossed the Albis, meeting with no opposition, had made a friendly alliance with the barbarians on the further side, and had set up an altar to Augustus on the bank of the river. Just now he had transferred his headquarters to the Rhine, and in his desire to secure the return of certain Cheruscan exiles through the efforts of other persons had met with a reverse and had caused the other barbarians likewise to conceive a contempt for the Romans. This was the extent, however, of his operations that year ; for in view of the Parthian war which was impending no attention was paid to the Germans at this time.
 
Nevertheless, war did not break out with the [AD 1년 -- 필자 주] Parthians, either. For Phrataces, hearing that Gaius was in Syria, acting as consul, and, furthermore, having suspicions regarding his own people, wlio had even before this been inclined to be disloyal to him, forestalled action on their part by coming to terms with the Romans, on condition that he himself should renounce Armenia and that his brothers should remain beyond the sea. The Armenians, however, in spite of the fact that Tigranes had perished in a war with barbarians and Erato had resigned her sovereignty, nevertheless went to war with the Romans because they were being handedover to a Mede, Ariobarzanes, who had once come to the Romans along with Tiridates. This was in the [AD 2년 -- 필자 주] following year, when Publius Vinicius and Publius Varus were consuls. And though they accomplished nothing worthy of note, a certain Addon, who was [AD 3년 -- 필자 주] holding Artagira, induced Gaius to come up close to the wall, retending that he would reveal to him some of the Parthian king's secrets, and then wounded him, whereupon he was besieged. He held out for a long time ; but when he was at last captured, not only Augustus but Gaius also assumed the title of imperator, and Armenia was given by Augustus and the senate first to Ariobarzanes and then upon his death a little later to his son Artabazus. Gaius became ill from his wound, and since he was not robust to begin with and the condition of his health had impaired his mind, this illness blunted his faculties still more. At last he begged leave to retire to private life, and it was his desire to remain somewhere in Syria. ugustus, accordingly, grieved at heart, communicated his wish to the senate, and.... --- Dio lv.10.4, from Cary, E., {Dio's Roman History}

분명치는 않지만, AD 1년의 휴전으로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에 일시적으로나마 머무르면서 로마에서 콘술의 업무를 볼 여유가 생겼을 듯 싶다. 하지만 디오는 가이우스가 이 기간 동안 시리아에 계속 주둔했는지 혹은 로마를 방문했는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지 않다. AD 2년 아르메니아 전쟁이 발발하게 되는데, 참전한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부상을 입고 AD 4년에 사망한다.


## 율리아(Julia) 문제

요세푸스 Wars I.xxxi.1
Suetonius, Augustus LXIII-LXV; Tiberius IV,3.

헤롯대왕의 아들 중 하나로 분봉왕 중 하나인 헤롯 안티파스는 베트람프타 (=베트-하란)을 성곽을 갖춘 도시로 승격시키면서 그 이름을 "율리아스" (혹은 "리비아스')로 개명했는데, 요세푸스는 이 이름이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기록한다.

한편, 헤롯 필리포스는 소규모 마을이던 벳사이다 (Bethsaida, 벳세다) 를 도시 (polis)로 승격해 이를 '율리아스'라고 명명했는데,  요세푸스는 이번에는 이 "율리아스"가 아우구스투스의 (방탕한) 딸인 율리아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1. WHEN Cyrenius had now disposed of Archelaus's money, and when the taxings were come to a conclusion, which were made in the thirty-seventh year of Caesar's victory over Antony at Actium, he deprived Joazar of the high priesthood, which dignity had been conferred on him by the multitude, and he appointed Ananus, the son of Seth, to be high priest; while Herod and Philip had each of them received their own tetrarchy, and settled the affairs thereof. Herod also built a wall about Sepphoris, (which is the security of all Galilee,) and made it the metropolis of the country. He also built a wall round Betharamphtha, which was itself a city also, and called it Julias, from the name of the emperor's wife. When Philip also had built Paneas, a city at the fountains of Jordan, he named it Cesarea. He also advanced the village Bethsaids, situate at the lake of Gennesareth, unto the dignity of a city, both by the number of inhabitants it contained, and its other grandeur, and called it by the name of Julias, the same name with Caesar's daughter. --- {Antiquities, 18.2.1, --- William Whiston William Whiston 번역 (1737)

이 진술에 따라 BC 4년설을 지지하는 역사학자들은 이 도시는 BC 2년 이전에 건설되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즉, 필립포스가 BC 2년 이전에 집권했었어야 한다는 뜻일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가 율리아를 BC 2년에 유배시켰기 때문에, 처벌당한 아우구스투스의 "딸의 이름을 딴 도시를 세운다는 것은 비상식적이지 않겠는가? ---- 라는 것이 BC 4년설 지지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요세푸스 (혹은 필사자)의 착오라고 볼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우선 로마제국 전역에는 '콜로니아 율리아' (줄여서 '율리아스')라 명명된 로마 식민도시들이 있었다. 가령, BC 45년에 현재 프랑스 남프랑스 일대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세운 Colonia Iulia Paterna Arelatensis Sextanorum나 Colonia Iulia Paterna Claudius Narbo Martius Decumanorum 등이 그런 예에 속한다. 헤롯대왕에 의해 BC 14년 현재 레바논 베이루트에 건립된 요새도시 Colonia Iulia Augusta Felix Berytus 역시 그런 경우다. 이 경우 '율리아'는 아우구스투스의 딸의 이름을 딴 것이 아니라,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계승하는 이른바 '율리우스 황가'를 뜻하는 것이다. 남성이름이 도시의 이름에 붙여질때 여성화되는 다른 한 예로는, 헤롯이 자신이 한때 지지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헌정한 요새도시 '안토니아'가 있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28.2.3 에 따르면, 티베리우스 황제와 가까왔던 헤롯 안티파스의 경우 게네사렛 호수를 낀 도시 티베리아스 Τιβερι??를 건설해 티베리우스에게 헌정했는데, 이는 "티베리우스"의 여성형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AD 130년에 폐허화 된 예루살렘에 건립한 신도시 아엘리아 카피톨리아 (Aelia Capitolia) 역시 그의 가문명 Aelius을 여성화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처 리비아의 본명은 리비아 드루실라 (BC 58 - AD 29)로, 남편인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AD 14년에 그의 유언에 따라 재산의 1/3을 상속받는 한편 율리우스 가문에 공식으로 입양되어 "율리아"를 가문명 (gens)으로 받고 "아우구스타"란 호칭을 받게 된다.

타키투스의 기록이다.


Cornelius Tacitus, {The Annals}
https://archive.org/stream/annalsbooksivi00tacigoog

Tiberius and Livia were his [Augustus Caesar's] heirs, and Livia was adopted into the Julian family with the name 'Augusta.'" --- Tacitus, {Annals} 1.8

티베리우스와 리비아가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의 상속인이 되었고, 리비아는 율리우스 가문에 입양되어 '아우구스타'란 이름을 받았다  --- 타키투스, {연감} 1.8 / 번역: 최광민

이후 리비아는 "율리아 아우구스타"라는 공식 이름으로 로마인들에게 불렸다. 나중에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리비아를 신격화하여 "디바 아우구스타"란 호칭으로 리비아에게 디바/여신의 지위를 부여했다.

헤롯 필립포스는 8세에서 18세까지 로마에서 교육받았으며, 거의 확실히 아우구스투스의 처인 리비아와 교류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이유는 필립포스의 숙모가 리비아와 가까운 친구였고, 또 아우구스투스의 손자들인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와 라틴어 수업을 같이 들었기 때문이다. 1966년의 벳사이다 발굴조사 중 로마신전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리비아 율리아 (즉, 아우구스투스의 처)"의 상과 필립포스와 리비아의 이름이 적힌 동전들이 발굴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처 리비아는 AD 29년에 사망했으므로, 이 신전은 그녀에게 헌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 벳사이다는 AD 30/31년 경, '율리아스'로 개명되면서 '폴리스'급으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이 벳사이다가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의 이름을 딴 것"이란 요세푸스의 진술은 틀린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헤롯의 아들들의 집권연대

이 문제는 헤롯대왕의 죽음을 BC 1년으로 잡는 가설의 가장 걸림돌 가운데 하나다. 일단 헤롯대왕의 아들 안티파트로스의 경우를 살펴보자.


JUDAEA, Herodian Kings. Herod IV Philip, with Tiberius. 4 BCE-34 CE. Æ 17mm (5.51 gm, 12h). Paneas (Banias) mint. Dated RY 34 (30/1 CE). Bare head of Tiberius right; laurel branch to right / Tetrastyle temple (Augusteum) with pellet in pediment; date between columns. Meshorer 106; RPC I 4948; Hendin 538. Good VF, desert patina. Nice example of these usually poorly struck coins. (Source: wikimedia commons)

요세푸스는 자신의 역사저술에서 매 권을 선대왕의 죽음 (즉, 새 정권의 시작)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유대고대사} 제 14권에서 요세푸스는 왕자들의 죽음으로부터 해당 권을 시작한다.

헤롯은 물론 죽을 때까지 통치를 했지만, 집권 중에 아들 안티파트로스를 국정에 참여시켜서 사실상 양두체제를 구성했다. 이 체제는 상당히 의외의 것이었는지 요세푸스는 선례가 없는 것이라고 적었다. 심지어 안티파트로스는 헤롯과 같이 왕을 암시하는 자주빛의 의복을 입었다.

"...However, he governed the nation jointly with his father, being indeed no other than a king already; and he was for that very reason trusted, and the more firmly depended on, for the which he ought himself to have been put to death, as appearing to have betrayed his brethren out of his concern for the preservation of Herod, and not rather out of his ill-will to them, and, before them, to his father himself: and this was the accursed state he was in....2. Now Quintilius Varus was at this time at Jerusalem, being sent to succeed Saturninus as president of Syria, and was come as an assessor to Herod, who had desired his advice in his present affairs; and as they were sitting together, Antipater came upon them, without knowing any thing of the matter; so he came into the palace clothed in purple..." --- {유대고대사} 17.1.1-2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에서 반역죄로 기소된 안티파트로스가 헤롯에게 한 변론을 옮기고 있는데, 안티파트로스는 자신이 이미 아버지와 공동으로 (실질적인) 왕위에 있었으므로 반역 따위를 자기가 꾀할 필요가 없었다고 항변한다.

3. Upon Herod's saying this, he was interrupted by the confusion he was in; but ordered Nicolaus, one of his friends, to produce the evidence against Antipater. But in the mean time Antipater lifted up his head, (for he lay on the ground before his father's feet,) and cried out aloud, "Thou, O father, hast made my apology for me; for how can I be a parricide, whom thou thyself confessest to have always had for thy guardian? Thou callest my filial affection prodigious lies and hypocrisy! how then could it be that I, who was so subtle in other matters, should here be so mad as not to understand that it was not easy that he who committed so horrid a crime should be concealed from men, but impossible that he should be concealed from the Judge of heaven, who sees all things, and is present every where? or did not I know what end my brethren came to, on whom God inflicted so great a punishment for their evil designs against thee? And indeed what was there that could possibly provoke me against thee? Could the hope of being king do it? I was a king already. Could I suspect hatred from thee? No. Was not I beloved by thee? And what other fear could I have? Nay, by preserving thee safe, I was a terror to others. Did I want money? No; for who was able to expend so much as myself? Indeed, father, had I been the most execrable of all mankind, and had I had the soul of the most cruel wild beast, must I not have been overcome with the benefits thou hadst bestowed upon me? whom, as thou thyself sayest, thou broughtest [into the palace]; whom thou didst prefer before so many of thy sons; whom thou madest a king in thine own lifetime, and, by the vast magnitude of the other advantages thou bestowedst on me, thou madest me an object of envy.

...(전략) 도대체 제가 아버지께 반역을 꾀할 이유가 뭡니까? 제가 왕이라도 되고 싶어서 그랬습니까? 저는 이미 왕이었습니다! 혹시 아버지의 미움을 받고있다고 제가 의심했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아버지의 총애를 받지 않았습니까? ...(후략)  --- {The Wars Of The Jews} Book1, Ch.32.3 / 번역: 최광민

헤롯이 처음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원하다가 대세에 따라 장차 아우구스투스가 될 옥타비아누스로 배를 갈아탄 후부터 헤롯과 옥타비아누스는 오랜 기간동안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사투르니누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직후, 헤롯은 자신의 군대를 아라비아에 파병해 사막에 은신한 강도단을 척결하고 자기에게 부채가 있는 아라비아의 토호들에게서 돈을 걷어들였다. 비록 헤롯의 파병이 시리아 총독의 허락 하에 군사행동을 취한 것이긴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아라비아인인 실레우스/Syliaeus의 말만 듣고 분노하여 헤롯에게 부여된 "황제의 친구 / Amici Caesaris"의 지위를 박탈했다. 이로써 헤롯의 지위는 황제의 '예속민'으로 강등당하게 된다.

요세푸스는 적는다.

"...Caesar was provoked when this was said, and asked no more than this one question, both of Herod's friends that were there, and of his own friends, who were come from Syria, Whether Herod had led an army thither? And when they were forced to confess so much, Caesar, without staying to hear for what reason he did it, and how it was done, grew very angry, and wrote to Herod sharply. The sum of his epistle was this, that whereas of old he had used him as his friend, he should now use him as his subject....” --- {유대고대사} 16.9.3

헤롯이 안티파트로스를 국정파트너로 삼은 사건에는 이런 정치적 사정이 있는 듯 하다. 원래 헤롯대왕과 첫 아내 도리스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였던 안티파트로스는, 헤롯이 도리스와 이혼하고 하스모니안 왕가의 계승자인 마리암네와 결혼을 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유배를 당했던 과거가 있다.

표준연표에 따르면, 안티파트로스는 마리암네의 권력이 몰락하던 BC 13년 무렵 다시 권력을 잡아 헤롯의 계승순위 1위가 되었다. 이후 헤롯과 마리암네 사이에서 태어난 (하스모니안 왕가의 정통계승자인) 알렉산드로스와 아리스토불로스 역시 왕위 계승권에 들어오자 안티파트로스는 두 형제를 살해했다.

이어 헤롯대왕이 사망하기 2년 조금 더 전에는 헤롯대왕의 막내동생이자 당시 갈릴리의 분봉왕이던 삼촌 페로라스를 살해했다. 안티파트로스의 계획들이 밝혀진 후 안티파트로스 대신 아켈라오스가 헤롯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로마에 있던 안티파트로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혐의를 받아 시리아 총독이었던 푸블리우스 퀸틸리우스 바루스의 소환령을 받고 유죄가 선고되었고, 유대아로 돌아온 직후 아버지 헤롯에 의해 직접 사형당했다.


헤롯 아켈라오스

헤롯대왕은 사망하기 얼마 전 후계자를 아켈라오스에서 안티파스로 변경하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러나 그는 최후 유언장에서는 다시 아켈라오스를 유대-이두매 왕국의 계승자로 정했다 (Ant. XVII.i.1, XVII.ii.4, Wars I.xxiii.5. ).

아켈라오스의 경우 자신의 형제 안티파트로스의 지위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자신의 집권시점을 안티파트로스가 헤롯과 함께 국정보조를 시작한 시점에 맞추는 것은 타당한 조치로 여겨진다. 아켈라오스가 안티파트로스를 대신해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것은 헤롯대왕이 죽기 2년 전이다. 중간에 헤롯대왕이 계승자를 한차례 안티파스로 변경하긴 했지만 또 다시 아켈라오스가 계승자로 지명되었다면, 헤롯대왕이 죽기 2년 전부터 아켈라오스는 안티파트로스와 유사한 형태로 국정에 개입했을 수 있다. 만약 헤롯이 BC 1년에 사망한 것이라면, 아켈라오스는 자신의 집권을 안티파트로스가 실각한 시점 (이 경우 BC 4년 하반기)에 맞출 충분한 근거가 된다. 안티파트로스 및 세 형제가 같은 시기에 헤롯의 국정에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정은 사료가 충분하지 않아 사실여부를 알 수 없다.

집권시점에 대한 소급적용은 고대세계에서 꽤 관용적이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왕들의 재위연도에서도 그런 사례가 발견된다. 헬레니즘 세계에서 재위의 시작은 종종 실제 대관일이 아니라 왕권의 정당성을 얻은 시점으로 소급되었다. 가령, BC 2세기의 폰투스 왕가는 자신들의 조상인 미트리다테스 1세가 키우스(Cius)의 총독을 몰아낸 시점을 BC 336년으로 잡았는데, 사실 폰투스 왕가는 미트리다테스 3세 이전까지는 "왕"이란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로마의 사례 중에는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같은 군인황제들을 들 수 있는데, 로마 역사가 캇시우스 디오는 그들이 적용한 소급시점은 그들이 황제의 권좌에 근접할 만한 권력을 잡은 시점이라고 기록한다.

캇시우스 디오를 인용한다

"...For they did not succeed one another legitimately, but each of them, even while his rival was alive and still ruling, believed himself to be emperor from the moment that he even got a glimpse of the throne.." --- Dio, {Roman History}, 66.17.5

...그들은 합법적으로 [아우구스투스 직을]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수가 아직 살아서 통치하고 있는 동안에도 권좌에 오를 수 있을 낌새가 비쳐진 순간부터 그들 스스로를 황제라고 여겼다.....캇시우스 디오, {로마사} 66.17.5 / 번역: 최광민

근세에는 잉글랜드의 국왕 찰스 2세가 대표적인 예로, 실제 대관일은 1660년 5월 29일이었지만, 정치적인 이유에서 자신의 즉위일을 그보다 10여 년 앞선 1649년 1월 30일로 소급적용했다.

물론 헤롯의 아들 셋이 자신들의 집권연대를 소급적용시켰는지에 대해서는 더 분명한 증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헤롯 안티파스의 실제 집권연도

갈릴리의 분봉왕을 맡게된 안티파스가 집권시점을 앞당겨 공표했을 여지 역시 충분하다. 안티파스는 삼촌 페로라스가 죽고 곧 갈릴리를 맡았다. 따라서 갈릴리의 지배자로서의 안티파스의 실질적인 집권시점은 헤롯대왕이 죽기 전 2년 전이 되는 것이다. 헤롯이 BC 1년에 죽었다면 그의 집권시점은 BC 4년 하반기가 된다.


헤롯 필립포스의 집권 20년? 22년?

헤롯의 다른 아들 필립포스의 경우를 보자. 표준 그리스어판 요세푸스 (Ant. XVIII.iv.6)에 따르면, 그는 티베리우스 20년 (AD 33/34년)까지 총 37년을 분봉왕으로 집권했다.

6. About this time it was that Philip, Herod's ' brother, departed this life, in the twentieth year of the reign of Tiberius, (14) after he had been tetrarch of Trachonitis and Gaulanitis, and of the nation of the Bataneans also, thirty-seven years. He had showed himself a person of moderation and quietness in the conduct of his life and government; he constantly lived in that country which was subject to him; he used to make his progress with a few chosen friends; his tribunal also, on which he sat in judgment, followed him in his progress; and when any one met him who wanted his assistance, he made no delay, but had his tribunal set down immediately, wheresoever he happened to be, and sat down upon it, and heard his complaint: he there ordered the guilty that were convicted to be punished, and absolved those that had been accused unjustly. He died at Julias; and when he was carried to that monument which he had already erected for himself beforehand, he was buried with great pomp. His principality Tiberius took, (for he left no sons behind him,) and added it to the province of Syria, but gave order that the tributes which arose from it should be collected, and laid up in his tetrachy.

결과적으로 그의 집권시점은 BC 4년이 된다.

그런데 1966년 W. E. Filmer는 요세푸스 저작 사본에 등장하는 "티베리우스 20년"은 "티베리우스 22년"의 오기 임을 논증하면서, 19세기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인 Molkenbuhr가 1517년 파리 본과 1841년 바티칸 본에서는 "티베리우스 22년"임을 보고했음을 제시한다. 이 경우, 헤롯 필립포스의 집권시점은 BC 4년이 아닌 BC 2년 경이 된다.

한편, 1995년 David W. Beyer는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요세푸스 {유대고대사}의 그리스어 에디션들 가운데 AD 1544년 이전에 나온 에디션 가운데 세 점을 제외한 전부가 "티베리우스 22년"으로 표기하고 있음을 확인했고, 이어서 미국 국회도서관에 보존된 5점 역시 "티베리우스 22년"임을 확인했다. 가장 오래된 AD 4-6세기의 사본 역시 "22년"으로 기록한다. 그렇다면 현재 유통되는 그리스어 에디션은 16세기부터 출판상 식자오류를 지닌 에디션에 바탕해 계속해 출판되어 왔다는 뜻이 될 것이다.


David W. Beyer, {Jesephus Reexamined: Unraveling the 22 Years of Tiberius} in {Chronos, Kairos, Christos II}

Steinmann:
http://historiantigua.cl/wp-content/uploads/2011/08/When_Did_Herod_the_Great_Reign.pdf

만약 요세푸스의 진술처럼 "티베리우스 22년 (즉, AD 36년)"이 "헤롯 필립포스의 총 집권 37년"이었다면, 헤롯이 사망한 시점은 BC 1년이 되며, 필립포스는 헤롯대왕의 사후 분봉왕으로서 집권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 내용은 1995년 [The Society of Bibllical Literature] 연례학회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주장도 헛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베이어가 조사한 1544년 이전의 그리스어 판본은 대영박물관과 미국국회도서관 장서들이다. 그가 조사한 사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AD 12세기의 필사본이다. 그런데 이것들보다 더 오래된 요세푸스의 사본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존재하고 있는데, 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Codex Ambrosianae F 128 사본이며 AD 11세기에 필사되었다. 그리고 가장 신뢰할만한 필사본으로 여겨지는 Codex Vaticanus Graecus 984은 AD 1354년에 필사되었다.  그리고 이 두 필사본은 "티베리우스 20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해당 숫자들의 필사 정확도가 의심되는 라틴어 필사본은 일단 제외하도록 한다.) 草人 최광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