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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성경해석을 어떻게 할것인가?

by 은총가득 2021. 12. 30.

성경 해석의 필요성

 

고대의 문서이건 현대의 문서이건 해석되어져야 한다. 성경도 마땅히 해석되어져야 한다. 성경 해석의 필요성은 성경 자체의 계시로서의 특성과 관계된다. 즉 특별 계시로서의 성경이 성경 해석의 필요성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 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감추어진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계시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신학적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 계시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신 일, 지금 하고 계신 일, 또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해 나타내 보여주신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우리들의 신앙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말씀하신 내용을 밝히고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찾아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성경 해석의 필요성을 찾을 수 있다.

 

 

해리슨(E. F. Harrison) 해석 혹은 주석의 기초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주석의 사상이 글로서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고, 둘째, 성경의 내용이 인간을 위해 최상으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많은 노력을 투자해서라도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통해 전달하기 원하시는 내용을 정확히 풀어야 한다는 확신 위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여기서 성경을 해석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성경의 해석은 성경 축자 영감교리 만큼 중요하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로 성경을 해석한다면 이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천명해 보았자 별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이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말할 때 이 말이 마치 성경의 명료성에 도전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성경 해석이 성경의 명료성에 도전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한다. 그들의 이론은 그리스도와 성령이 로마 가톨릭 교회 내에 신비적으로 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마음을 나누어 가졌다고 생각한다. 루터(Luther)는 이 견해를 배척하고 성경의 내적 명료성과 외적 명료성을 주장한다. 외적 명료성은 성경의 문법적 명료성으로 우리들이 언어의 법칙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내적 명료성은 성도들의 마음에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이다. 그래서 성령은 성경의 진리를 하나님의 진리로 인정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조명시켜 주시는 것이다.

성경의 내적 명료성과 외적 명료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성경 해석을 통해 성경의 뜻을 올바로 풀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성경 해석의 노력은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진행되어 왔다. 어쩌면 과거의 교회 역사를 가리켜 성경 해석의 역사였다고 말해도 큰 잘못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성경 해석의 필요성을 몇 가지로 나누어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A. 성경적 증거

성경해석학은 성경 본문을 통해서 원리들을 제시해 줌으로 해석자가 원리에 따라 성경 본문을 해석 혹은 주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결국 성경 해석의 원리들도 성경 본문을 철저히 연구함으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여기서 성경 해석의 필요성을 논할 때 우선 성경 본문 가운데서 몇 구절을 선택하여 성경 해석의 필요성을 증명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1. 누가복음 24장 26-27절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해석하시고 계신 예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내용이 자신을 가리킨 것이라고 해석해 주셨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돕는 자 역할을 하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경 해석자가 되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성경 해석의 행위는 뜻을 분명하게 해주는 기능이라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기억할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해석하실 때 그 초점은 바로 자기에 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 해석을 할 경우에도 역시 강조되어야 할 것은 구속적이고 역사적이며 기독론적인(redemptive-historical-christological) 요소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찾을 수 없게 되고 만다.

 

2. 사도행전 8장 26-35절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본문은 빌립과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권세 있는 내시에 관한 이야기다. 본문에 나타난 빌립의 역할은 성경 해석의 역할이다. 본문에서 빌립이 행한 인간적 행위, 그의 구약에 대한 지식, 특이한 형편에 대한 민감한 반응, 그리고 주님을 향한 빌립의 사랑이 없었더라면 내시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빌립이 행한 성경 해석의 기능에서 네 가지의 중요한 요소를 찾아낼 수 있다. 첫째,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이 나타난다. 둘째, 성경 해석에 인간이 사용되어졌다. 셋째,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해석이 필요했다. 넷째, 성경 해석의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성경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다.

 

3. 베드로후서 3장 16절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본문은 단순히 바울 서신 가운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은 성경 해석의 필요를 말해준다. 성경 본문 자체가 난해한 점을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이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성경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해석이 필요했던 것이다. 즉 본문의 내적 한계와 인간의 외적 한계로 말미암아 정확한 성경 해석의 필요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성경 해석학적 입장에서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성경 해석의 필요성, 둘째, 인도자인 해석자의 필요성, 그리고 성경 해석에 대한 조심스런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4. 디모데후서 2장 15절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본문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나님께 인정함을 받으라고 권면한다. 그러기위해서는 첫째,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해야 하며, 둘째,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결국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는 사람이다. 칼빈은 성경 해석을 함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감화를 주도록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본문은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부정확하고, 비정통적이며, 올바르지 않게 해석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너는 본문을 옳게 분변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사실상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올바른 성경 해석을 권면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 해석의 필요성을 찾을 수 있다.

 

5. 성경적 증거의 요약

지금까지 살펴본 몇 가지 성경 본문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다.

(1) 모든 성구들이 성경 해석의 필요성을 제시해 준다.

성경은 본래 해석되어지도록 기록되었으며 따라서 성경은 마땅히 해석되어져야 한다.

(2) 모든 성구들이 해석자의 필요성을 말해준다.

성경 해석은 본문에 원리를 적용하면 자연적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요, 인격체인 인간이 해석의 역할을 감당한다.

(3) 성경 해석은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

성경 본문의 해석은 결국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 사역의 해석이다.

(4) 성경 해석은 성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성령의 도우심은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5) 성경 해석은 성경 본문에 대한 연구를 무시하지 않는다.

성경 해석은 직감을 통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 본문을 조심스럽게 연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특히 성경 본문의 난해한 내용을 바로 해석하기 위해 부지런히 연구해야 한다.

B.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가운데 성경 해석의 필요성을 말씀하시는 내용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경에 대한 태도와 그분 자신이 직접 성경 해석을 하신 것을 미루어볼 때, 성경 해석의 필요성을 인출해낼 수 있는 것이다.

 

1. 구약성경의 권위 인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권위에 대하여 전혀 의심하지 않고 구약을 인용하고 자신에게 적용시키셨다. 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13권의 책에서 36개의 서로 다른 구절들을 인용하셨다. 그리고 직접적인 인용 외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내용을 더 많이 언급하셨다.

그중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구약을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 적용한 점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을 해석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2. 구약성경의 해석과 적용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사건들을 사용하여 교훈하시는 내용 가운데서도 해석적인 면이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구약 해석과 적용들은 권위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잘못된 성경 해석을 견책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태도에서 우리는 바른 성경 해석의 필요성을 찾아낼 수 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구약을 해석하시므로 성경 해석을 권장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성경에 대한 태도는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연구해야 함을 아울러 가르쳐 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C. 시대의 격차에서 오는 성경 해석의 필요성

해석은 어떤 뜻을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데 문제가 생겼을 때 필요하다. 우리들이 성경을 생각할 때 성경을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이런 방해 요소 때문에 성경 해석의 필요성이 절실히 대두된다.

 

1. 역사적 격차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의 시대와 성경을 읽는 우리들 사이에 오랜 시간의 격차가 있다. 어떤 사건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건과 연관되어 있는 사건과 형편을 알아야만 한다. 바울 서신과 사도행전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 사도의 생애와 그 당시에 발생한 사건들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샬(Marshall)은 역사적 비평을 설명하면서 “성경은 해석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역사적 비평은 그 과정의 한 부분이다. 물론 이 말은 학자들이 성경에 대한 연구를 끝내기까지는 성경이 소망이 없을 정도로 애매하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의 광범위한 의미는 충분히 명백하지만 해석의 구체적인 것들은 학문적인 기술을 필요로 한다.”라고 성경 해석의 필요성을 설명한다.

성경의 책들은 문학적인 저작이지, 고지식하게, 되는 대로, 혹은 연대기순으로, 풀과 가위로 함께 오려 붙여서 묶어 놓은 모음집이나 사본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대의 간격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2. 문화적 격차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문화와 오늘날의 문화의 차이는 성경 해석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문화의 영향 하에서 실제 사건들을 보기 때문에 한 문화 속에서 다른 문화를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가 여러 성경 시대의 문화적 양식을 재생시키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는 성경의 더 풍부한 뜻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성경의 문화적 환경이나 우리 자신의 문화적 환경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 둘 사이의 차이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성경의 용어나 행위의 뜻을 심각하게 곡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해석가나 번역자는 우리 시대와 성경 시대의 문화적 격차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철학적 격차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인생관, 우주관 등과 오늘날의 견해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다른 형편 하에서 기록된 성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석자가 양쪽의 내용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4. 언어적 격차

성경은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이런 언어들의 특징, 문장 구조, 그리고 관용구 등은 오늘날의 것과 다르다.

그러므로 이런 언어적 격차를 메우기 위해 해석이 필요하게 된다. 예를 들어 신약 기록에 사용된 헬라어의 경우 과거 시상(aorist)과 현재 시상(present)의 차이는 동작의 시간성에 강조가 있다고 하기보다 동작의 단회성(aorist의 경우)과 계속성(present의 경우)에 강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언어들은 과거와 현재의 구분을 할 때 시간성에 강조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의 해석을 통해 이런 언어적 격차를 극복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체계적이고도 주의 깊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바른 해석학을 운용할 필요가 있다. 왜 그런가?

 

(1) 하나님의 메시지를 분별하기 위해서이다.

(2) 성경에 관한 그릇된 생각이나 잘못된 시각들과 결론들을

피하거나, 일소하기 위해서이다.

(3) 성경의 메시지를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D. 인간의 무지

인간의 무지가 성경 해석을 촉구한다. 인간의 이해력의 한계성 때문에 성경의 내용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은 인간의 이해 부족을 설명하면서 이는 죄가 인간의 이해 기능을 어둡게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담의 범죄 이후 죄의 영향으로 인간은 신령한 것을 분변할 수 있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신령한 것은 자연인(The natural man)의 범주 밖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령한 자는 자연인에게 항상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칼빈(John Calvin)은 말하기를 “인간 지성은 종교의 교훈을 평가하는데 쓸모없고 이런 일을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은 하나님의 성령께만 속한다.”라고 했다.

이처럼 중생하지 못한 자는 영적인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중생한 자라야 영적인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지만 중생한 자일지라도 그 이해 능력에 한도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완전히 터득할 수는 없다.(롬 8:5-8; 고전 2:6-16).

여기서 우리는 영적인 진리인 성경이 해석되어져야만 하는 필요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E. 상충되는 듯한 구절 해석

성경에는 때로 상충되는 듯한 구절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 말씀의 의도를 알면 아무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의 해석을 통해 먼저 문맥과 의도를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한다.

성경은 해석되어져야 하지만 해석자는 성경이 처음 써질 때에도 그 메시지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주어진 메시지이며, 해석자의 해석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위한 해석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해석에 임해야 한다.

모든 형태의 구전이나 문서를 통한 의사 전달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의 표현을 담고 있다.

(1) 화자나 저자가 자신이 말한 바에 의해서 의미했던 것

(2) 수신자가 실제로 진술된 바를 통해 이해했던 것

(3) 좀 추상적인 의미에서, 의미가 실제적으로 본문이나 말 자체

속에 기호화된 것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존 맥아더

 

성경 해석학(hermeneutics)이란 신학자들이 성경 해석에 대한 학문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다. 해석학은 모든 신학의 중추적인 기본 구성 요소다.

 

해석학의 임무는 본문의 의미를 그 올바른 문맥 속에서 발견하는 일,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에서 의미를 도출해 내는 일이다.

 

주의 깊은 성경적 해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경을 믿지 않는 것보다 나을게 없다. 성경이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계시라는 점에서 동의하지만 그 성경을 잘못 해석한다면 거기에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결과적으로는 성경을 안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리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을 의도하고 있는 듯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분열과 오류와 이단과 배교로 이어지는 확실한 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복음주의는 얼마나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가!

우리는 참석자가 돌아가면서 특정 구절에 대한 자기 생각을 말하는 식의 ‘성경 공부’모임에 참석해 본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 구절은 이런 뜻인 것 같아요.” 그런 식의 성경 공부에서 얻는 소득이란 대개 무지에서 나온 온갖 구구한 생각과 그 구절에 대한 몇가지 가능한 해석인데 그나마 그런 해석들조차 다 틀린 해석일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사실 어떤 구절이 나에게나 다른 누구에게 어떤 뜻으로 다가오는가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구절의 실제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모든 구절에는 어떤 사람과도 관계없는 본래적인 의미가 있다. 성경 공부의 과제는 그러한 성경의 참된 의미를 분별하는 것, 그 본문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다. 때때로 그 의미는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문맥에 대한 보다 세심한 관찰이 요구되기도 한다. 성경의 모든 구절은 일점일획까지도 저자가 의도한 의미만을 담고 있으며 해석자의 과제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식별하는 일이다.

 

 

피해야 할 세가지 오류

 

디모데후서 2:15은 성경연구에 대해 말하고 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옿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성경을 연구하는 엘에는 부지런함과 세심함이 필요하다. 성경은 정확히 다루어야 한다.

 

올바른 해석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자신의 요점을 강조하는 일을 삼가라.

목사나 성경 교사는 자기가 원하는 반응을 얻기 위해 본문에 생소한 의미를 끌어들이기가 쉽고 그런 유혹을 자주 받는다.

 

피상적인 성경 연구를 피하라.

정확한 성경 연구는 어려운 작업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고 정확하게 해석하려면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성경의 주요 진리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특정 본문의 일반적인 요점에 도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진리를 우리에게 숨겨 두시지 않았다. 그러나 말씀의 바른 의미가 언제나 즉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한 본문의 실제 의미는 그 본문의 배경이 되는 문화를 이해해야 비로소 드러난다. 또 때로는 성경 원어의 단순한 뉘앙스인 word play(말장난)를 통해 의미가 분명해질 때도 있다. 우리가 오늘날 일부 교회에서 유행하는 제멋대로의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한 성경 해석을 아무렇게나 용납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몇가지 해석의 차이는 이 세상에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성경을 주의 깊게 부지런히 연구해야 할 우리의 책임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디모데전서 5:17은 교회에서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배나 존경” 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교회에 말씀을 가르치는 이들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끈기 있고 세심하게 말씀 연구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몇몇 신자들 중에 아무 도움 없이도 완벽하게 성경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성령의 도우심만으로 성경을 완벽히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진리로 통하는 지름길인가? 교회의 모든 경건한 지식을 무시할 만한 권리나 지식이 있는 사람이 과연 있는가? 그렇지 않다.

 

첫째로 인간이 지은 책을 무시하고 성경 그 자체로 들어가겠다는 주장은 경건하고 영적인 주장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일종의 감춰진 자기중심주의다. 전통적 교회에 속한 신앙의 선배들의 꾸준하고 경건하며 헌신적인 연구를 도외시하고서도 혼자서 성경을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은 교활한 교만이다.

 

둘째로, 그런 주장은 성경의 영감을 성경의 조명과 혼동한 오래된 착각이다.

성령의 역할은 새로운 진리를 전달하거나 알려지지 않은 문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된 내용을 조명해 주는 것이다. 성경의 어려운 단어들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석서나 성경 사전을 이용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는 즉흥적인 성경 해석을 철저히 조심해야 한다. 너무 많은 사람이 거의 또는 아무런 준비 없이 강단에 서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대개 그런 설교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설교를 전하면서 자신만의 신학을 만들어 낸다.

 

영적인 해석이나 풍유적인 해석은 본문 자체가 그런 해석을 요구할 경우가 아니면 하지 말라.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자신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요점을 가르치기 위한 우화로 이용한다. 그들은 성경적 소재의 의미를 찾는 대신 성경적 소재를 자신들이 가르치고 싶어하는 내용을 뒷받침하는 비유로 만든다.

예를 들어 어느 유명한 은사주의 설교자는 느헤미야서에 대한 설교 도중 거의 모든 내용에 걸쳐 다른 어떤 것을 표현하거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석했다. 예루살렘 성벽은 폐허가 되었고 이것은 인격의 무너진 벽을 말하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인격의 성벽을 재건하러온 성령을 상징한다. 그는 왕의 못(느 2:14)에 대한 대목에 이르자 그것은 성령 세례를 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근거로 그는 방언의 중요성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느헤미야서는 인격의 벽, 성령 세례, 방언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설교자가 이런 식으로 말씀을 적용해서 해석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놀라운 성경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상술일 뿐이다. 그런 해석은 성경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닌 우리가 원하는 말씀으로 만들어 버린다.

 

올바른 방법을 성경을 해석하려면 예수님이 친히 부활하신 직후에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보여 주신 본보기를 따라야 한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여기서 “설명하시니라”라는 뜻으로 쓰인 헬라어는 ‘헤르메뉴오(hermeneuo)'인데 이 단어에서 영어의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예수님은 성경을 가르치시면서 성경을 정확하고 논리정연하게 해석하셨다. ‘헤르메뉴오’, 즉 ‘해석학’을 사용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건전한 해석 방법을 사용하는 성경 교사의 완벽한 모범이다. 예수님과 다른 방법으로 성경을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물을 섞는 것이다.

 

 

건전한 성경 해석을 위한 다섯 가지 원리

 

지금까지 살펴본 방법은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유익하지만 특정한 성경 본문을 올바로 해석하는 일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성경적 해석학에 대한 질 높은 강의에는 다음의 다섯 가지 원리가 포함되어야 한다.

 

문자적 원리

우리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모방적이고 경직된 직해(literalism)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적 해석이란 우리가 성경을 비유, 과장, 직유, 은유, 상징 등의 비유적 표현을 포함하는 자연스러운 의미로 이해한다는 뜻이다.

 

성경은 자연스럽게 독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을 전달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능한 한 분명하고 단순한 방식으로 말씀을 전달하셨을 것이라고 가장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일상적인 대화의 언어를 이해할 때와 똑같이 이해해야 한다. 성경에는 가끔씩 비유적인 언어와 상징적 표현도 등장하지만 그런 표현들은 사용되는 대목이 명확히 드러난다.

스가랴, 다니엘, 에스겔, 이사야, 요한계시록 등과 같은 묵시적인 본문들은, 그 본문이 전달하는 문자적 진리를 알려면 신중하게 연구해야 할 분명한 비유와 상징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상징적인 언어가 성경의 표준은 아니며, 그런 언어는 사용되는 곳에서 눈에 띄게 드러난다.

때때로 상징적 표현은 해석하기 어렵지만 그 역사적 배경을 연구해 보면 보통은 분명한 의미를 식별할 수 있다. 비유적 언어조차 분명한, 문자적 진리를 전달한다. 성경은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일종의 퍼즐이 아니다.

비유는 성경에서 때때로 사용되는 또다른 형태의 비유적 언어다. 비유는 영적인 진리를 보여 주는 이야기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실제로 역사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비유의 구체적 내용-인물, 사건, 시대 및 장소-은 가설적이거나 은유적이거나 단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유가 보여주는 영적인 진리는 언제나 문자적이고 실제적이다.

 

신비적 또는 풍유적 해석을 좋아하는 나머지 문자적 해석을 포기한 이들은 정확성과 일관성에 이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버린 것이다. 그들은 그 대신 상상력만이 지배하는 무한경쟁을 벌인다. 그들이 문자적 의미를 부정할 때, 그들은 성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주인처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말하고 싶은 내용을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왜곡함으로써 성경을 자신들의 노예로 만든다.

 

역사적 원리

본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단계 가운데 하나는 그 본문이 기록된 문화적, 지리적, 정치적 배경을 파악하는 것이다.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면 본문은 종종 실제적으로 저절로 해석된다.

성경의 어떤 책을 볼 때든지 우리는 그와 관계된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그 책이 어느 교회에 보내는 편지라면 그 교회의 신자들이 살았던 도시의 특징은 무엇이었는가? 그 당시의 정치적, 문화적 상황은 어떠했는가? 어디서 누가 다스리고 있었는가? 어떤 사회적 압력이 어느 정도까지 관련되어 있었는가? 그 공동체의 갈등과 문제와 위기는 무엇이었는가? 그 당시 문화는 실제로 어떠했는가? 사람들의 관습은 무엇이었는가?

예를 들어 오늘날에 베드로전서 1:13에 나오는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라는 베드로의 권면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군인들이 길게 흘러내리는 통옷(투니카)을 입었기 때문에 전쟁터에 나갈 때 옷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면 허리띠를 단단히 매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뜻이 즉시 분명하게 이해된다. 즉 “전투에 나갈 마음의 준비를 하라. 너에게 방해가 되거나 걸리적거리는 것은 무엇이든 정리하라.”라고 베드로는 권면하는 것이다.

 

문화적, 역사적 의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성경 사전, 성경 입문서, 주석, 역사책, 성경적 관습에 대한 책 등을 이용하면 된다. 그런 책들을 참고하면 우리는 어떤 성경 본문의 배경을 재구성할 수 있다. 그러면 보통은 그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분명한 의미가 도출될 것이다.

 

문법적 원리

한 본문의 구문론적 구조는 종종 그 의미를 알아 내는 열쇠가 된다. 예를 들어 때때로 어떤 문장의 의미는 전치사 같은 간단한 요소에 달려 있을 수도 있다.

어떤 본문에 ‘~ 때문에’, ‘~을 통해’, ‘~안으로’, ‘~안에’, ‘~에 의해’ 등의 전치사가 사용되고 있는지의 여부는 분명히 중요한 문제다. 어떤 경우에는 원문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가 둘 또는 그 이상의 영어 단어로 옮겨질 수도 있다. 영어 성경에 나타나는 그 단어에 가능한 대안적 번역어가 있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또 어떤 문장이 ‘이것’, 또는 ‘그것’을 언급하면 그 대명사의 선행사를 파악하는 일도 중요하다.

 

문법은 우리가 좋아하는 과목이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는 성경의 언어를 해석할 때 기본적인 문법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단어과 구절의 순서를 따라가야 한다. 본문의 정확한 이해가 그것에 달려 있을 수도 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때 무엇보다 가장 먼저 성경 본문을 원어(헬라어나 히브리어)로 공부하는 것이다. 단어와 문장의 올바른 순서에 주목하고, 문장 구조와 문법을 살펴봐야 한다. 다음으로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몰라도 원어 위에 그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가 적혀 있는, 헬라어나 히브리어 본문이 실린 원어 대조 성경을 사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최소한 좋은 성경 주석서라도 참조하면 된다.

 

문법에 주의를 기울이는 저자와 설교자에게 주목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조심하라. 성구를 구절별로 분해하여 그 의미를 좀더 명확히 알 수 있도록 명사, 동사, 수식 어구, 및 그 밖의 품사들을 보여주는 방식의 귀납적인 성경 공부법을 배우는 것이 좋다.

 

종합의 원리

종교개혁자들은 ‘스크립투라 스크립투람 인테르프레타(scriptura scripturam interpretatur)', 즉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말의 뜻은 애매모호한 구절은 보다 명확한 구절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자체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성경의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과 모순되지 않는다. 한 분의 신적인 저자(성령님)가 성경 전체에 영감을 불어넣으셨으므로 성경은 놀랍고 초자연적인 통일성을 띠고 있다. 종합의 원리는 분명하고 일관된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 성경을 다른 성경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성령은 자기모순을 일으키시는 분이 아니다. 분명한 의미를 지닌 구절을 가지고 난해한 구절을 해석해야 한다. 단 하나의 애매모호한 불분명한 본문에 기초해서 교리를 세우면 안된다. 성경 각 부분의 핵심은 나머지 전체의 계시 속에서 보아야만 비로소 충분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 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11)

 

실제적 원리

우리가 언제나 물어야 할 마지막 질문은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이다.

디모데후서 3:16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성경의 모든 내용은 우리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적용된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교훈이란 기본적인 신령한 진리, 특정한 구절이 가르치는 원리를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기준으로 삼는 원칙을 포괄한다. 책망이란 성경이 우리의 죄를 폭로하며 숨겨진 죄책을 드러내고 감춰 둔 치부를 밝히 드러내는 방법이다. 책망은 바르게 함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우리가 책망받은 죄로부터 돌아서는 일을 내포한다. 다음으로 의로 교육하는 일, 즉 참된 교리에 대한 반응으로 새롭고 의로운 길을 준비하는 일이 시작된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의 실제적인 역사다.

 

 

성령의 조명하심과 의식적인 성경공부

 

해석의 다섯 가지 원리도 중요하지만 그런 원리들도 성령의 조명하심이 없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 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2,14)

 

바울의 이 말은 성령의 조명하시는 사역을 묘사한 것이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에게 영적인 진리를 보여 주실 수 있다.

누구든 사실을 듣고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성경의 의미에 대한 지적인 이해를 조금이나마 얻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성령을 떠나서는 성경이 인간의 마음을 관통하고 변화시키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한 법이다. 조명, 즉 성경에 기록된 내용에 대한 참된 이해는 성령과 더불어 임한다. 모든 신자에게는 성경 기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으신 분인 성령이 내주하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조명해 주시는 성령의 사역이 없다면 성경의 진리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관통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책을 읽을 때 종종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과 마주칠 때 저자가 내 앞에 있어서 그가 의도한 내용을 직접 물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해보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저자에게 언제나 직접 물어 볼 수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도우실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성령의 조명하시는 사역이 의식적인 성경 공부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 둘은 서로 보완 관계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성경을 부지런히 공부하기를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주의 깊게 철저히 탐구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가 어떤 도구를 얻든지, 어떤 경건한 지혜를 접하든지 그것을 우리 마음을 조명하는 방편으로 이용하신다. 성령께서 성경과 관계없이 우리를 가르치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기도교 내의 광신주의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요한일서 2:27“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 구절을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는 데 있어서 어떤 스승이나 인도자도 필요하지 않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이 구절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하는 에베소서 4:11-12절 말씀과 모순된다.

성령께서는 많은 가르침의 은사를 주셨고(롬12:6-7) 모든 신자에게 서로를 가르칠 것을 요구하셨다(딤후 2:2). 요한은 요한일서 2:27에서 그런 성령RP서 주신 가르침과 모순되는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이단, 즉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적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것이다. 이 구절은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이 구절은 우리가 성령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과 관련해서 이단과 진리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말씀이지 성경의 모든 구절에 대한 정확한 해석의 절대적 보증이 아니다.

많은 진지한 사람이 자신의 성경 연구와 성경 지식이 부족을 합리화하기 위해 요한일서 2:27을 악용하고 계속해서 성경을 그냥 펴 놓기만 한 채 성령께서 스스로 성경이 의미하는 바를 말씀하시도록 허용한다는 미명 아래 성경을 엉뚱하게 해석한다. 그런 태도는 많은 사람을 오류에 빠지게 했다. 그리고 은사주의 운동은 바로 그런 오류의 온상이 되었다

 


참다운 성도라면 누구나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 무오한 말씀으로 믿는다. 그런데 같은 성경을 놓고도 서로 해석하는 원칙이 다르기 때문에 혼란이 오고 논쟁이 악화되고 심한 경우는 성경해석의 차이에서 오는 다른 교리로 인하여 가정이 파괴되는 일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가장 기초적인 상식을 말씀 드리고 저 한다.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사람의 머리로 판단해서 믿으려고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유는 유한한 인생이 무한한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지식과 지혜가 제한된 인간이 지식과 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로 인하여 타락한 심성을 갖고 있는 인간이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을 판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불완전하여 실수 할 수 있고, 하나님은 완전하여 실 수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간이 제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도 인간의 머리로 인간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판단할 수 없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누구도 이에 반박할 수 없다. 성경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판단하는 사람의 지혜와 지식과 거룩함이 하나님보다 앞서야 하는데 그런 인간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므로 실 수 할 수가 없고 피조물인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실수를 한다. 유한한 인간이 영원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성경은 스스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딤후 3:16 말씀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강동으로 된 것으로” 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란 말은 원어인 헬라어 원문에서는 “theopneustos" 라는 한 단어로 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 넣었다“ 라는 의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 넣어서 기록했다는 말이다. 또한 베드로후서 1:21에 보면, “성경은 사사로이 기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아서 기록했다“ 라고 말한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성경도 다른 수많은 종교의 경전과 같이 어떤 철학자가 도덕이나 윤리를 전할 목적으로 좋은 말씀을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결코 그런 철학자들이 인생의 도덕이나 윤리를 논하기 위해서 기록된 종교서적이 아니다. 성경은 그들 경전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성경기록자들은 자기의 말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성경 밖에서 입증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분명한 성경자체의 증거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불완전한 인간의 힘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입증하고 싶어 한다. 이것을 16세기 종교개혁을 단행한 Martin Luther 는 “Theology of Glory” 라고 불렀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내어 자기의 만족을 채우려는 인간의 노력을 말한다. Luther 가 신학자를 보는 관점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Theology of Cross” 이고 다른 하나는 “Theology of Glory” 이다. “Theology of Cross ” 는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닫고 주님에게 굴복하고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태도이고 “Theology of Glory” 는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해서 자기만족을 채우려는 노력이라고 했다. Luther 의 기준으로 보면 오늘 기독교계는 대부분 “Theology of Glory” 에 해당할 것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를 내세우기를 좋아하는가?

그러면 성경이외에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할 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한가? 이들은 주로 고고학적 발굴 자료에 의존한다. 그중 유명한 것이 1930년대에 발견된 이른바 “나사렛포고령 Nazareth Decree" 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지 얼마 안 되어 로마에 있는 교회에서 예수님의 육적부활을 믿는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부활이 허구라고 믿으며 제자들이 주님의 시체를 훔쳤다고 믿는 유대인들 간에 충돌로 시끄러워지자 당시 로마의 Claudius 황제가 유대인들을 모두 로마에서 추방했다. 이때 고린도로 들어온 사람들이 아굴라와 부리스가 내외였다. 이것은 사도행전 18장에서 읽어 볼 수 있다.

그런데 “나사렛포고령” 이라는 것은 Claudius 황제가 명령한 칙령으로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의 무덤에는 손대지 말며 만일 이런 무덤을 훼손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라는 일종의 묘지법이다. 사방 1 foot 의 흰 대리석으로 된 이 원본은 지금 프랑스 파리의 Louvre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그 사본은 지금 이스라엘 북방 지중해 해변 가이사랴에 가면 바울이 벨릭스 각하에게 재판받던 원형극장이 있는데 그 원형극장 바로 앞에 갈색으로 된 모조품 (replica) 이 서 있다. 그러므로 이 문헌은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고고학자들은 생각하고 있다.

또 한 가지 고고학적 문헌은 1976년에 발견된 이른바 “에불라 문헌 Ebla Tablets" 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북방 지금의 수리아 Hammath 라는 곳에 있는 높은 언덕에서 발견된 이 문헌은 기원전 22세기에 한창 창성하던 당시의 Ebla 왕국의 왕립도서관에 소장되었던 17,000 장의 토판인데 이태리 로마대학의 Giovanni Pettinato 교수가 판독한 바에 따르면 이 문헌 중에는 에불라 왕국과 소돔과 고모라 성이 교역하던 내용의 문서들이 있는데 아브라함의 이름도 나오고 ”살렘“ 이라는 이름도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이 실제 존재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신학자들 중에는 소돔과 고모라는 실재하는 곳이 아니고 가상 도시였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 문헌의 발견으로 성경의 진리가 다시 한번 입증되어졌다. 한 가지만 더 말한다면 오랫동안 자유주의자들 중에는 헷 족속의 유적은 고고학적 발굴에서 찾을 수 없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헷 족속은 실제로 존재하던 부족이 아니고 가상적인 부족이 라고 믿고 있었고 독일의 신문기자로 있던 Werner Keller 라는 사람도 그렇게 믿고 있었으나 1940년대 고고학 발굴을 취재하기 위해 그가 발굴 팀을 따라가서 헷 족속의 근거지를 발견하게 되어 감탄한 나머지 책을 썼는데 그 책의 이름이 Die Bibel als History 역사로서의 성경이라는 책이며 미국 뉴욕의 William Morrow Co에서 1950년도 초반에 영문으로 번역하여 The Bible as History 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한 바 있다. 그 책 서문에서 저자 Keller 는 “누가 아무리 성경을 믿을 수 없다고 해도 성경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임이 지금도 내 귀속에 방맹이질 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것은 모두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입증하려는 노력이지만 성경은 성경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입증해 준다. 확실히 알 수 있는 정보를 놓아두고 다른 근거를 찾으려는 것은 죄악 된 인간의 심리이며 Martin Luther 가 말하는 “Theology of Glory” “vain glory 심리에 기인 한다

성경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 한다. 하나님에 관한 말씀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계시한 말씀인 것이다. 스위스의 신학자 Karl Barth 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증거가 아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 말씀은 내가 이성으로 받아 드릴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가 받아 드리건 말건 성경은 객관적으로 영원히 불변하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것이다. Barth 가 받아 드리건 말건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경기록자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각자의 죄성은 없이하면서, 그리고 자기의 성격과, 학식과, 언어와, 문화적 배경, 취미 등을 그대로 살리면서, 하나님이 영감을 주시어 하나님의 뜻대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였다 이것을 유기적 영감설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organic inspiration 이라고 한다. 어떤 분은 “기계적인 영감설” 을 주장하면서 성경기록자들은 마치 로봇트 처럼 아무 생각도 없었고, 하나님이 불러 주는 대로 적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잘못인데 그 이유는 그렇다면 성경의 문체(Literary style) 가 왜 모두 서로 다른지 설명이 안 된다. 가령 요한복음은 문체가 간단하고 단문이나 중문이 많다. 복문은 적다. 반면 누가복음 은 복문이 많고 단어도 어려운 단어가 많다. 구약도 아사야서의 문체와 에스더서의 문체가 다르다. 기계적인 영감설로는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유기적인 영감설로만 설명할 수 있다.

성경은 보통 책과 다르다. 성경은 40명 이상의 서로 시대가 다르고 학식과 성격과 직업이 다른 사람들이 1500년에 걸쳐서 기록한 책인데 내용은 모두 한가지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가르쳐준다. 세상에 많은 종교 중에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 알려 주는 종교는 유대교와 기독교외에 없다,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파생했지만 유대교는 기독교를 배척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신약성경이 없다 그들의 성경은 TANAK 라고 해서 구약의 39권을 22권으로 나눈 구약만 있다. 성경은 죄로 인하여 죽게 된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말씀이다. 신구약 66권이 모두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을 분리할 수 없으며 하나의 일관성(cohesiveness)을 가지고 있다. Augutine 이 말한 것처럼 The New Testament is concealed in the Old and the Old in the New revealed 라는 말이 맞는다. 신약을 모르고 구약을 모른다. 흔히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이므로 신약이 완성된 다음부터 구약은 필요 없다고 가르치는 분들이 있지만 잘 못이다.

가령 구약이 없다면 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지 모른다. 구약 신명기 21장23절에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 라고 했고 신약성경 갈라디아 3:13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다” 고 한다. 세례는 구약의 할례와 같은 것이며 성찬식은 구약의 유월절과 같다. 구약을 모르고 어찌 이해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구약성경 구절을 신약 특히 마태복음에 인용하고 있는가를 보라 그러면서 요 5:46에 “모세가 나를 증거하는 것” 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알려면 모세를 알아야 하고 모세를 안다는 말은 구약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악을 분리하거나 지금은 신약이 완성되었으니 구약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일등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0장11절이나 로마인서 15장에 4절에 보면 “전에 가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 고 말하고 있다. 구약은 절대로 버릴 수 없고 신약과 구약은 똑같은 권위를 가진다. 구약은 “언약의 약속”이고 신약은 “언약의 성취” 이다. 기독교의 계시는 “점진적 계시(progressive revelation)" 이다. 마치 방안에 불이 켜질 때 점점 밝게 켜지도록 조종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시를 한꺼번에 모두 주신 것이 아니고 점진적으로 자기를 나타내 주셨다.

야곱이나 다윗에게는 부인이 많았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엡 5:22 절 이하에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말하고 있다. 이혼도 마찬가지이다 신명기 24장1절에는 이혼을 허락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 마태복음 19장 7절 이하에서 "이전에는 백성들의 마음이 악하여 임시로 허락했던 것이고 본래는 그렇지 않다" 고 8절에 말한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비늘이 없는 고기나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런 제한이 없어졌다. 골로새 2:16-18에 보면 그리스도가 모두 십자가로 의식법을 철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하나님이 바로 그 저자이시고 디모데후서 3:16절 말씀대로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넣어서” 기록했지만 그 기록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옛날 독일의 신학자였던 Richard Rothe 라는 사람은 성경의 언어는 이상하여 어느 헬라의 학자의 언어와도 다른 이상한 말이라고 해서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알 수 없는 “하나님만 아는 말” 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약은 당시 히브리인들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로 대부분 기록되었고 극히 적은 부분이 아람어(Aramaic)로 기록되었고 신약의 경우는 모두 헬라어로 기록되었는데 헬라어는 크게 고전적 헬라어와 평민의 헬라어로 나누어진다. Classic Greek 이 있고 Hellenistic Greek 혹은 Koine Greek 이란 헬라어가 있다. 신약성경은 Socrates, Plato, Aristotle, Polybius, Xenophon, Sophocles 같은 인물이 즐겨 쓰던 고전적 헬라어가 아닌 시장에서 평민들이 사용하던 Koine Greek 혹은 Hellenistic Greek 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이 방면에 연구를 많이 한 사람은 Adolf Deissmann 이고 그 뒤를 이어 George Miligan, James Moulton, A.T.Robertson 같은 분이다. A.T. Robertson 은 미국 남 침례교 목사인데 20년간 연구하여 2,000 면에 달하는 큰 책 A Grammar of New Testament Greek in the Light of Historical Research 라는 대작을 1922년에 출판했다. James Moulton 도 4권짜리 Grammar of New Testament Greek 이라는 책을 영국 Scotland의 T.&T Clark 출판사에서 1940년경에 펴냈다.

성경의 언어가 인간이 알아듣지 못하는 그런 언어가 아니고 기원 1세기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 일반이 가장 널리 사용하고 있던 평민의 헬라어라는 점을 말씀드렸지만 그렇다면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서 기록방법은 어떠했을까? 성경기록자들은 누가를 제외하고는 무두 유대인들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언어습관, 언어 어법과 유대인들의 관습, 속담, 유대인들이 사고방식 등이 성경에 그대로 나타난다. 이것을 무시하면 성경해석상에 이상한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면 로마인서 12장20절에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게 하라 그리하므로 그의 머리에 산 숯불을 얹으리라” 라는 말이 있는데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큰 일 날 것이다. 어떻게 산 사람의 머리 위에 산 숯불을 얹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유대인의 관습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속담에 “미운 놈 떡 한 개 더 주어라” 라는 말이 있듯, 유대나라에도 속담이 있다. “나를 괴롭히고 핍박하는 사람들을 후히 대하라” 라는 내용을 유대인들은 “저 사람 머리위에 산 숯불을 얹어 주어라” 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또한 마태복음 24:28절에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 떼가 모일지니라” 란 말도 별 신학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말에 “바늘 가는 곳에 실 간다” 란 말이 있다. 같은 말이다. 언어에는 수사학이 있으며 영상법도 있고 상징적 표현도 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직유법과 은유법, 영상법을 보면 이런 것들이 있다. <불꽃 같은 눈동자로>, <병아리 나래 아래 품듯> , 이런 말들이 직유법이고 은유법은 누가복음 13:32에 나타난 ‘여우“ 처럼 또는 요한복음 1:29에 보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라고 했는데 ”양“ 은 은유법으로 예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또 성경에는 다른 문학서적 처럼 영상법을 통해서 말씀하기도 한다. 이것은 특히 묵시 문학(Apocalyptic Literature)에 많이 나온다. 가령 바다에서 올라오는 <머리가 일곱이요 뿌리가 열인 짐승> 같은 것은 사탄이 악함을 나타내 주는 영상표현법이다 (계 13:1). 144,000 같은 숫자는 문자 그대로의 수가 아니라 상징적인 숫자 로 <구원 얻은 자 전체>를 말함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 이런 일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이상한 결론에 도달한다. <붉은말> 은 쏘련이고 <흰말> 은 미국이라고 해석 하는 따위는 성경해석을 그르치는 좋은 예이다. 성경에는 성경해석의 원칙이 있다. 성경해석의 원칙을 따르지 아니하면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결과가 된다.

성경이 왜 헬라어로 기록되었을까? 헬라어로 신약성경이 기록된 이유는 모든 언어 중에서 헬라어는 가장 문법이 정확하고 바른 뜻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엡 2:8에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구원을 얻었나니> 라는 대목에서 <구원을 얻었나니> 라는 말은 <완료형 남성 주격 북수 분사> 로 사용되었으니 한번 구원을 얻으면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성경의 교리가 입증된다. 또한 요한일서 3:9에서 “하나님께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 란 대목에서 <죄를 짓지 아니 한다> 는 말은 <직설법 현재 삼인칭 단수 동사> 이므로 <하나님에게로 난자는 상습적으로 계속해서 고의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는 문법적 설명을 통해서 거듭난 사람은 죄를 함부로 짓지 않는다는 교리가 입증된다.

종교개혁 이후의 성경해석 방법은 즉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해석>이다. 성경구절을 해석할 때, 항상 이 세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옛날 Alexandria 에 Origen 이라는 헬라의 영지주의 철학에 물든 신학자가 있었다 그는 성경의 모든 구절은 4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 네 가지란 <문자적 의미>, <도덕적 의미>. <풍자적 의미>, 그리고 <신학적 의미> 등이다 이것을 Origen 의 <사중해석법 (Origen's Quadruple Interpretation of the Scripture)> 라고 한다.

예를 들면 그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다. <거기에 나오는 예루살렘은 교회이고 여리고는 세상이고 강도만난 사람은 교회에서 타락하여 세상으로 나가니 강도를 만났다. 강도는 마귀이다. 레위사람이나 제사장이 지나갔다 구약을 말한다. 구약으로도 그를 돕지 못했다.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돌보아 준다.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예수이다. 사마리아 사람이 그 당시 가장 천대시 받듯 예수님은 당시 모든 사람에게서 천대를 받았던 인물이다. 기름을 발라주었다. 예수님이 은혜를 베풀었다. 주막으로 데리고 갔다 주막은 술집, 그 술은 포도주, 포도주를 파는 곳은 교회,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를 교회로 인도했다. 그리고 돈 두 입을 주면서 다시 올 때 까지 잘 보아 달라고 했다. 돈 두입은 구약과 신약이다. 주님이 재림할 때까지 교회가 잘 돌보아 줄 것을 당부했다> 라고 그럴듯하게 해석했다.

이렇게 해석하면서 Origen의 문자적 해석은 문자 그대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는 것이고, 도덕적 해석은 불쌍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고 퐁자적 해석은 방금 위에서 말한 대로이고, 신학적 해석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 라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지금도 소위 영해 (靈解) 라는 것을 좋아 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성경의 구절은 한 가지 뜻 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자.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이상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하면 그것은 이미 성경해석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이 현령 비 현령(耳懸鈴 鼻懸鈴) 이 아니다.

성경 해석시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이 있고, 상징적으로 해석할 구절이 있다. 일률적으로 모든 성경구절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 가령 요한복음 2:19-20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문자 그대로 46년간 걸려서 지은 성전을 사흘 만에 주님이 재건하신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 뒤에 계속해서 읽어보면 주님은 그의 몸을 가르켜 하신 말씀임이 들어난다.

몸이 죽어도 삼일 만에 부활한다는 뜻이다. 요한계시록 11장의 <1260일이니 42달이나 한때와 두 때 반> 이니 하는 말은 모두 상징적이며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요한계시록의 경우는 단 9:27절과 반드시 병행해서 해석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20장1-7절 사이에 6 번 나오는 <천년> 이라는 말은 문자적인가 아니면 상징적인가? 문자적이라면 성경이 기록된지 벌써 1,000년이 넘었으니 문자적이 아님을 금시 알 수 있다. 상징적이다. 우리는 이 숫자가 상징적인 것을 한다. <말세> 란 히브리 1:1이나 베드로전서 1:5이나 1:20등을 통해서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이 말세임을 안다. 그러므로 계시록 20장의 천년은 <문자적 천년>이 아니고<주님 재림 때까지 전 기간을 통한 기간>을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임을 알 수 있다.

성경 해석 시에 가장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것은 성경의 문맥을 무시하고 선입견을 가지고 혹은 임의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가령 마가복음 3:29에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금세와 내세에 영영 구원이 없다“ 는 말에서 ”성령을 훼방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목사들, 특히 부흥사들 중에서 이 구절을 오해하는 분들이 예상외로 많다. 심지어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방언 못하는 죄라고 가르치는 목사도 있다. 성경을 해석하는 기본 지식이 없는 사람이다. 문제의 성경구절에서 앞뒤의 문맥 (context)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일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본인이 하신 것이 아니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사탄의 이름중 하나) 의 힘을 빌려서 행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때 주님께서 29절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해석을 믿기 어려우면 성경 마가복음 3장29절 그 다음절인 30절을 보면 의미가 의심의 여지없이 아주 분명해 진다.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저가 더러운 귀신이 들였다 함이라“ 라고 스스로 설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이와같이 문맥을 통해서 성경을 해석하라. 성경에 지금 내가 연구하는 구절이 왜 기록되었는지 앞뒤를 읽으면서 문맥을 잡아라.

이와 같이 성경은 항상 문맥을 통해서 해석해야 한다. 영어로는 “A text without a context is a pretext” 라고 한다. “문맥을 보지 않고 해석하면 궤변이 된다” 는 말이다. 얼마나 많은 설교자가 문맥을 무시하고 스스로 억지로 풀다가 이상한 교리를 만들어 내는가 우리들 주위에서 사이비 목사들을 보라, 주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너희중 지극히 적은 소자 하나 라도 실족케 하면 큰 연자 돌을 목에 달고 깊은 물에 빠져 죽은 편이 낫다” 고 마태복음 18장6절에 엄하게 경고하신다. 바른 성경해석으로 바른 복음을 전해야 한다.

앞서 성경해석 원칙은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방법>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종교개혁의 성경해석 방법이다. 어떤 성경구절을 해석할 때 우선 역사적인 배경을 공부해야 한다. 어떤 시대적, 정치적, 종교적 배경 속에서 이 성경구절이 기록되었는가를 본다. 이것을 알려면 Halley의 성경핸드북도 좋고 Hendrickson 이 쓴 성경 개관 Bible Survey 도 좋고 성경의 배경을 다룬 참고서들을 읽어보면 좋고 만일 그럴 재정적 여유가 없으면 그 성경구절이 들어 있는 성경 앞뒤를 계속해서 주의 깊게 읽어본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그 책의 처음부터 읽는다.

가령 마가복음은 어떤 문화적 정치적 환경 속에서 기록되었는가? 하박국은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기록되었는가? 학개서는? 등을 연구한다. 마가는 로마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는데 예수님의 섬기는 종 됨을 기록하면서 가장 간결하고 명료한 문체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안다. 학개서는 유대인들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와서 성전 수축을 등한히 하고 개인의 가옥 수리만 열중인 유대백성에게 하나님은 학개 선지를 통해서 성전 수축을 명하는 배경이고 하박국은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는 잘 되어 가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선지자 하박국이 <결국은 아무리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해도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 한다> 는 내용을 알아 두어야 한다.

역사적 배경을 알게 되면 다음은 골치 아픈(?) 문법적인 면을 해석해야 하는데 이것은 일반 평신도로서는 어렵다. 이유는 원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원어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다. 그래서 신학생들은 코피를 쏟아가며 매일 그 어려운 헬라어와 히브리어, 라틴어를 공부한다. 그러나 일반 성도도 열심만 있다면 집에서 능히 헬라어를 자습할 수 있다. Princeton 신학교 신약학 교수였던 J. Gresham Machen 박사가 쓴 신약헬라어 입문 같은 문법책을 사서 스스로 매일 아침 조금씩 헬라어를 터득해 갈 수 있다. 구약의 히브리어도 공부해야 하지만 히브리어는 그 언어의 체계가 헬라어와는 전혀 다른 어족(語族) 인 <셈어족, Semitic Language> 에 속하여 일반 평신도가 공부하기는 심히 어려울 것이고 헬라어만 공부해 두어도 구약은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해 둔 칠십인역(七十人譯)이라는 책이 있으니 그 LXX (칠십인 역 성경을 나타내는 기호) 를 헬라어로 읽으면 헬라어만 알아도 신학 공부를 엉터리로 마친 웬만한 목사 보다 더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

문법적인 해석의 좋은 예는 요한복음 3:16이다. 많은 분들이 “그를 믿으면” 이라고 해석하지만 문법적으로 그것은 그릇된 해석이다. 원문은 <믿고 있는 모든 사람> 은 즉 의 의미이다. 요한일서 3:9에서도 "하나님께로서 난자는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 에서 <죄를 도모지 짓지 않는다> 라는 말이 아니다. <죄를 상습적으로 짓지 아니한다> 는 의미이니 헬라어의 문법에서 <직설법 현재 형으로 부정문> 이니 <상습적으로 무엇을 계속 하지 않는다> 는 말이 된다. 엡 2:8에서도 “구원을 얻었나니” 에서도 <완료형 분사> 이므로 <한번 구원을 얻으면 영원토록 변치 않는다> 는 뜻이 헬라어의 완료형 의 성격에서 입증된다.

신학적 해석은 그 성경구절의 앞뒤를 보아서 신학적으로 이 말이 무슨 교리를 가르치는가 를 연구한다. 가령 요 3:16을 보면 처음에 “사랑하사” 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에서 <사랑>의 개념이 앞선다는 것을 안다. 그 다음 부분은 <주사 ,아들을> 이렇게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 구속은 아들 예수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안다. 성경의 다른 곳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믿음이란 우리가 스스로 믿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안다( 엡 2:8) 고로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누린다> 는 내용이니 <그리스도의 구속의 가장 기본 교리> 를 터득할 수 있다.

이제 중요한 부분을 말하고 저 한다. 성경을 해석할때 주의할 것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특별은사 혹은 임시 은사> 이다. 이런 은사는 성경기록이 완성 될 때까지 하나님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셨다. 히브리 1;1 이나 WCF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에 보면 이런 방법이 성경완성과 함께 지금은 끝났다고 가르쳐 준다. 이것을 <계시의 종결> 이라고 한다. 개혁주의는 계시의 종결을 믿는다. 지금은 하나님이 옛날 성경기록 당시처럼 그렇게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지 않으시고 기록된 말씀만 가지고 역사하신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앙의 골자 이다. 종교개혁가들은 이라고 외쳤다. “오직 성령” 이 아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중거 한다 (요15:26). “오직 성경“이란 말 가운데는 ”성경의 충족성, Sufficiency of the Bible" 이 들어 있으을 알자.

둘째로, 성경에 나오는 <이적> <기사> 를 모방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성경기록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초자연적 이적이나 기사를 모방하려한다. 가령 죽은 사람을 장사하지 않고 3개월 동안 놓아두고 살아나기를 기다리면서 계속 기도한다든지 병든 자를 고치기위해서 약을 쓰거나 병원에 가지 않고 기도만 한다든지 하는 일은 성경해석의 원칙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예수님이 하셨으니 나도 할 수 있고 내가 해야 한다“라는 말은 위험한 발상이다. 가령 예수를 모방한다면서 채찍에 노끈을 매어 잘 못 하는 교회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마구 내 보내고 강대상을 뒤집어 엎을 수 없다. 주님이 그렇게 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 된 질문이다. 예수는 조물주인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그가 하는 일을 우리가 모두 할 수는 없다. 예수님의 기적과 이적은 항상 구원과 관계가 있다. 구원의 성질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는 목적이 있다. 오히려 이렇게 묻는 것이 당연하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까? ” 라고.

셋째로, 성경해석은 어디까지나 <성경을 성경으로 푸는 것 Scripture is interpreted by Scripture> 이며 <환상>이나 <계시> 이나 <경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오류에 빠지고 있다. 성경구절의 의미는 처음에서 끝까지 성경자체에서 그 바른 의미를 찾아야 한다. 모든 성경이 모두 일률적으로 뜻이 명확하지 않다
잘 이해하기 어려운 어두운 부분은 밝은 구절 즉 확실히 알 수 있는 구절에 비추어서 해석한다. 이것이 성경해석의 방법이다.

성경해석이나 신앙생활에서 인간의 경험은 가장 위험하다. 경험은 사람마다 각자 다르다. 누구의 경험이 옳은가? 성경해석은 경험이나 계시에 의존해서는 절대 안 되며 성경에서 답을 찾고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종교개혁가들은 이 점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부디 우리 모두 바른 성경해석으로 바른 말씀을 전하여 이 다음 그리스도 앞에 설때에 다른 복음을 전했다고 책망을 받지 않도록 주의 하자.

 

 

성경 해석학적인 경향이라고 하면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내려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다 생각해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종교 개혁자 루터와 칼빈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들은 이전의 성경 해석을 비평하고 나아가서는 바르게 세워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 유산을 우리게 물려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적지 않는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차이점의 영향 또한 오늘날 교회에 크게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이 성경을 해석한 경향을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교회가 어떤 해석의 영향을 받고 있는가를 판단하는데 아주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루터와 칼빈 이전까지의 성경 해석 경향

먼저 루터와 칼빈 이전까지의 성경 해석 경향을 간단히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루터와 칼빈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즉 예수님과 사도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친 이후부터 종교개혁 때까지는 어떤 식으로 성경을 해석했었을까요?

 

1) 예수님과 사도들-예수님은 구약을 해석하실 때 자기를 중심으로 해석을 했다( 요5:39, 눅24:25-27,44-47).-모든 성경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은 이 방식을 따랐다. 모든 성경 말씀이 예수님께 와서 이루어졌다고 해석했다(행2장;3:11-26,8:35,13:23,32-35,17:11,고전15:3-4;막1:1-4 등).

 

2) 속사도 시대-사도를 이은 시대라고 해서 속사도 시대라고 한다.

Justin Martyr(A.D. 100-165)-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했다. 이것을 위해서 모형론을 사용했다. 구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사실을 보이는 데 초점했다. 그리스도의 선재, 탄생, 죽음, 부활, 재림 등을 구약에 근거해서 설명하려고 했다. 하나님의 사자, 인자, 한 아기와 아들, 기름부음 받은 자 그리스도, 지혜, 별, 지팡이, 모퉁이 돌, 하나님의 아들, 등등.

이레니우스(Irenaeus;130-200)-저스틴의 해석을 따랐다. 하지만 저스틴을 넘어서 해석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성경을 구세주에 관한 책으로 이해했다. 성경 저자들의 근본적인 주제는 구원의 계획으로 보았다. 그는 세대들(dispensations), 모형들과 약속들, 성취, 그리스도의 나라, 절정 등을 포함하여 성경 전체적인 관점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려고 했다.

 

3)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알레고리적 해석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당시 현존하는 해석방법에 알레고리 해석을 첨가하였다. 그는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데는 알레고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에게 영과 육체가 있는 것과 같이 성경도 영적인 의미와 문자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리겐(185-254)-구약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구약에서 미리 예언되고 있었지만, 성육신 이전까지는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에 그 가리워진 베일을 벗기고 속에 있는 영적인 의미들을 찾으려고 했었다. 그는 삼중적인 의미를 추구했다. 그리스도가 성육신 하신 몸(역사적인 몸), 부활하신 몸, 교희의 형태로 계신 것처럼 성경도 3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영적인 의미(기독론적 의미: 방주= 교회), 도덕적인 의미(개인적인 적용과 비슷-‘방주’: ‘악한 세상으로부터 나와서 돌이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신의 마음 가운데 구원의 방주를 준비하는 것’ 따위), 문자적인 의미(육=방주)가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사람에게 영, 혼, 육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생각한 것은 그리스도를 설교하려고 하는 노력 때문이었다. 고로 알레고리적 해석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해석의 연장이었다.

 

이 후부터는 알레고리적인 해석이 루터에게까지 영향력 있게 사용되었다.

알레고리적인 해석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한 중심은 귀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알레고리가 필요한 부분은 알레고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면 씨뿌리는 자의 비유와 같은 비유들은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으며, 천로역정,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같은 작품은 전체가 알레고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의 비유들은 구속사적인 의미를 알레고리적으로(비유적으로) 구성하여 설교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알레고리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알레고리는 역사적인 배경과 시대마다 다른 계시 수단의 차이 등을 고려하지 않고 해석하면 아주 엉뚱한 해석이 된다. 해석하는 사람 자신이 판단이 기준이 되어서 성경을 자기 해석에 따라서 다시 쓰는 것과 같은 처지에 빠질 수 있다. 예, 나무=십자가, 주홍색=피, 모세=율법, 여호수아=예수님 따위.

 

4) 안디옥 학파의 모형론 해석

모형론은 구약 사건에서 신약 사건의 모형을 찾아서 해석하는 방식이다. 예, 출애굽=그리스도 통한 이 세상 탈출. 성경 속에도 모형론이 있다. 주관 배제, 역사적 해석 중시. 역사적인 것 안에서 메시야적인 것을 찾는다. 계시의 점진성 인정.

그러나 모형화시키려는 유혹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계시적인 의미의 일치됨을 생각하지 않고 모형을 생각할 수는 없다. 모형적으로 유사함 자체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 창조=십자가 위에서 옆구리를 찔리심으로 교회 창조, 멜기세덱의 빵과 포도주=유월절 만찬의 떡과 포도주의 모형, 모리아 산으로 오르는 이삭=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오르시는 예수, 형제들을 찾으라는 야곱의 명령 순종하는 요셉=그리스도의 순종의 모형, 웅덩이에 빠진 요셉=무덤 속에 있는 예수 모형 따위. 이것은 그럴 듯한 면도 많지만, 마구 짜 맞추는 식의 해석이 될 위험이 있다. 하지만 모형론을 시대마다 계시하시는 수단이 무엇이며, 계시의 내용이 무엇이가를 생각하면서 신약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잘 생각하면서 숙고할 필요가 있다.

 

 

모형론이 인정되고, 알레고리가 영향력을 주도하는 가운데 종교 개혁 시대까지 왔다.

 

2. 루터

 

1)루터는 종교개혁을 시작하게 된 사람이다.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 고민하다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깨달은 후에(1514년 경), 마침내 1517년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에 있는 성곽교회의 문에다 붙였다. 로마교에 대한 반박문이었다. 이로써 개혁은 시작되었다. 물론 역사적인 상황은 개혁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라는 인물이 로마교에 의의를 제기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종교개혁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2)루터는 평생을 알레고리적 해석을 극복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는 수도사로 있을 때에 모든 것을 알레고리화하면서 성경을 해석했다. 그가 알레고리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강의한 덕분이었다. 로마서는 알레고리가 아니라 구속사의 의미를 그리스도 중심으로 하여서 논리적이고 사실적으로 설명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로 인해서 그는 알레고리적 해석은 성경에 대한 공허한 사색이요 객담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역사적인 의미가 진리요 건전한 교리를 제공해 준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 후로 그는 본문 자체가 알레고리를 나타내고 있지 않는 한, 또한 알레고리적 해석이 신약에 있지 않는 한 알레고리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에 충실하게 되었다.

 

3)성격해석방법

(a)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이것은 로마 교회의 전통에서 해방되어 오직 성경만이 최종 권위를 가진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성경은 성경 자체를 해석한다”고 믿었다. 성경을 문법적이고 역사적으로 해석하면서 그것이 성경의 다른 곳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지를 살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은 자체가 명료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평신도들도 성경을 읽고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로마교가 ‘오직 교회만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에 반한 주장이다. 로마교는 이런 주장을 하면서 주교(신부)들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지금도 로마교는 평신도들은 성경을 읽기까지만 하고 해석은 신부들만이 하도록 하는 것으로 안다

 

(b) 문자적, 예언적으로 읽었다. 그는 단어들의 단순하고 순수한, 자연적 의미를 고수했다. 문법적, 언어용법을 중시했다. 그러나 비유적인 표현들은 비유적으로 이해했다.

나아가서 이런 문자적인 의미를 바탕으로 해서 예언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예언적인 의미는 문자적인 의미에 의해서 전달된다고 생각했다. 문자적 역사적인 의미를 통해서 예언적인 의미를 파악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 이미 하셨던 일을 잘 이해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앞으로 하시려고 하셨던 역사를 이해하려고 했다. 이것은 요즈음 말하는 구속사적인 안목이라고 할 수 있다.

 

(c)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과 차이점을 함께 강조했다. 그는 성경이 통일성을 성경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았다. 그는 신약을 구약에 비추어, 구약을 신약에 비추어 해석했다. 그에게 있어서 구약과 신약은 단일한 통일체였다.

그러나 차이점 또한 강조했다.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복음이라고 보았다. 물론 구약도 어느 정도 복음을 가지고 있고, 신약도 어느 정도 율법을 가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구약은 율법, 신약은 복음으로 보았다. 구약은 율법으로서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며, 죄를 드러나게 하고 선을 요구하며, 신약은 죄 용서를 통한 은혜와 평강을 가르친다고 보았다.

율법과 복음은 항상 함께 있다. “율법은 병을 드러내며, 복음은 약을 처방해 준다.” 모든 설교에서 이것이 함께 있다. 그는 복음서와 서신서들을 마치 또 다른 율법처럼 취급하여 모범으로 생각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 모든 것에 앞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을 강조했다. 이 안에서 복음서와 서신서들의 교훈을 이해하도록 했다.

 

(d) 구약 성경과 그리스도-루터는 거의 모든 구약 성경이 그리스도를 증거한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않는 것은 정경적인 가치가 없다고 보았다. 예,에스더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그리스도 중심적인 경향을 가졌다. “성경 전체에서 때로는 평이한 단어들 가운데서, 때로는 복잡한 단어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만 존재한다.” “비록 표면상으로는 다르게 들릴지 모르지만, 만약 우리가 성경의 내적 의미를 주시한다면, 성경 전체는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성경 내의 태양이요 진리이다”.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만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구약 전체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 구약 전체가 그분과 일치 한다” 고 했다.

이런 시각으로 처음에는 시편 1편을 “이 시편의 의미는 주 예수님은 유대인들과 당시의 타락하고 패역한 세대가 즐겨 추구했던 것들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시편 2:“이 시편은 예수님의 수난 가운데 나타난 그리스도에 대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분노에 관한 것이다.”

시편3:“‘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라는 표현은 자신의 적대자들인 유대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문자적인 불평이다”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런 자세를 바꾸었다. 그리스도를 시편에 투여하여 읽는 대신, 시편 자체의 역사적인 문맥에 비추어서, 이스라엘에 주어진 시편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그래서 시편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대하고 갈망하는 그리스도 오시기 전 구약의 증언으로 생각하고 읽었다. 약속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기도와 증언으로 읽었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그리스도 일방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경향을 후에 독일의 Wilhelm Visher라는 사람에도 나타난다. 그리고 율법과 복음의 대치는 오늘날도 나타나고 있다.

 

3. 칼빈

a)칼빈(1509-64)은 루터보다 26년 어린 사람이었다. 칼빈은 루터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서로 의견을 같이 한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 그리스도께서 성경의 중심이라는 데 동의했다.

b) 그러난 칼빈은 루터와 매우 달랐다. 칼빈은 이신칭의에 동의했지만, 루터보다 더 넓은 관점, 즉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에 초점을 맞추었다. 칼빈은 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생각했다. 즉 그리스도 중심이라기보다는 하나님 중심이라고 하는 것이 칼빈에게 알맞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속사 즉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언약을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도 설명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니 자연 칼빈은 성경 본문을 명백하게 해석하고 설명하는 데 헌신하게 되었고, 본문의 단어들의 명백한 의미를 임의로 변경하지 않는 것을 그의 목표로 삼을 수 있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의미를 억지로 변경시키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c) 칼빈 역시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반대했다. 그는 ‘알레고리 해석이 성경 교리를 애매모호하게 만들고, 모든 확실성과 견고성을 제거한다’ 고 했다.

 

3.1. 칼빈의 해석 방법론

 

3.1.1. 명료성과 간결성

3.1.2. 저자의 의도-성경 저자의 의도를 끊임없이 찾으려는 것이 칼빈 주석들의 특징이다. 그는 “정당한 주의 없이 성경의 의미를 뒤바꾸는 일을 주제넘은 일이요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성경과 장난을 치고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3.1.3. 역사적 문맥

칼빈은 “성경 진술의 의미를 문맥에 의존하고 있는 수많은 진술들이 존재한다”고 했다. 본문의 의미를 역사적인 배경을 생각하면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3.1.4. 원래적, 문법적 의미

알레고리적 해석에 반하여 문법적으로 이해하여 단순하고도 명백한 의미를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했다.

3.1.4. 문예적 문맥(Literary Context)-문학적인 문맥도 중시했다. 탄식, 찬양, 기도, 예배, 시, 서술문 따위.

3.1.5. 여자적 성경의 언어 넘어 있는 의미

“계명과 금지 조항들은 언제나 단어들에 표현된 것 이상을 담고 있다.”고 했다.

3.1.6. 비유적 표현

칼빈의 문자적 해석은 경직된 문자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비유적인 표현에 관심을 세심하게 기울인다.

3.1.7.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

구약과 신약을 통일시키는 것은 하나의 은혜 언약으로 보았다. 구약은 옛 시대에 나타난 은혜언약의 형태요, 신약은 새 시대에 나타난 은혜언약의 형태로 보았다. 둘이 형태는 다르지만 내용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신구약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언약이라고 생각했다.

3.1.8. 율법의 제 3의 용법

루터와는 달리 칼빈은 율법의 제 3의 용법을 인정한다. 율법은 정죄와 그리스도에게로 가게 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종은 율법에 대한 묵상을 통해 순종의 삶으로 나아가고, 율법 안에서 강건케 되며, 위험한 죄악의 길에서 돌이킬 수 있게 해 준다”고 했다.

3.1.9.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

“칼빈은 주의를 필요로 하는 차이점들을 자유롭게 인정한다. 그러나 차이점들에 대한 인정은 기존의 통일성을 손상시키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차이점들은 본질에 관련되어 있다기보다는 시여의 방법에 관련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조점은 이런 것들이다. 지상의 유익-천상의 유익, 그림자-실체, 문자-영, 종-자유, 이스라엘-열방 등으로 대조하고 있다. 이것은 형식상의 차이일뿐 내용은 하나라고 한다.

 

3.1.10. 구약 속의 그리스도

“그리스도, 비록 그가 율법 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알려진 바 되었지만, 복음 속에서만이 자세히 분명하게 계시되었다.”

구약의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마치 숨겨진 자로, 부재한 자로 소유했는데, 여기서 부재하다는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능력이나 은혜의 측면에서 부재한 것이 아니라, 아직 육체 가운데 나타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부재하셨다는 뜻이다“고 했다.

 

3.1.11.성경 전체의 문맥 속에서 이해하기

칼빈은 개개의 구절을 성경의 전반적인 취지 내에서 이해하려고 전력했다. 오늘날 흔히 말하기를 , 해석자는 전체에 대한 이해 없이 부분을 이해할 수 없고, 부분들에 대한 이해 없이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원리를 칼빈은 성경 이해에 이미 적용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하나의 하나님의 계시라고 생각할 때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이것이 아직도 잘 이해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칼빈은 이미 1500년대에 이 원리를 이해하고 상용하였다.

 

3.1.12. 하나님 중심적 구약 해석

칼빈은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으로 구약을 해석했다. 즉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으로 구약을 해석했다. 때문에 점진적인 계시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풍성함을 아는 데 목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구약을 이해하는 안목으로 다음을 제시한다.

첫째, 영원한 로고스(말씀)-그리스도는 구약에도 여러 형태로 계셨다. 여호와의 사자, 불꽃 속의 사자, 구름 기둥과 불기둥 등이다. 고로 구약 성도들도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둘째, 약속과 성취의 도식이다. 구약은 약속이고 신약은 성취로 보았다. 하나의 큰 구원 사건이 구약에서 출발해서 신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의 구원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 모형론-이것도 구약과 신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방편이었다. 통일성 속에서 구약에 계셨던 그리스도는 모형으로서 구약에도 계셨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