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잠언 4장 20-27절
20.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21.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22.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24.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
25.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26.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27.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풀어보면 “세상사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한 편으로는 지나쳐 보입니다. 정말 모든 일이 우리 마음먹기에 달려있을까요? 사실 우리가 마음먹고 무엇인가 이루려고 해보지만 제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보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다른 한편으로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세상 모든 일에 대한 해석은 우리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익숙한 옛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신라시대 원효대사의 일화입니다.
원효가 후배인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경주에서 출발하여 천안 부근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밤은 깊어 가는데 폭우가 계속 쏟아지자 두 사람은 부득이하게 동굴 안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원효가 새우잠을 자다 한 밤중에 갈증이 나서 무심코 주변을 더듬어 무엇엔가 담겨있는 물을 마셨습니다. 시원하다고 느끼며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자기가 마셨던 물을 보니 해골 안에 고여 있던 물이었습니다. 해골 물이라는 생각에 갑자기 구토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같은 현상을 보아도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보입니다. 목이 타서 간절한 마음으로 물을 볼 때와 물을 마실 생각이 없이 물을 볼 때 그 물이 다르게 보입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라는 말은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이 그렇게 중요해도 그 마음이 종잡을 수 없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마음을 먹고 그 마음으로 세상을 보려고 해도 그 마음이 지속되지 못하고 변한다는데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흔히 사람의 마음을 갈대로 비유하곤 합니다. 바람이 불면 갈대는 그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흔들립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도 상황에 따라 변합니다.
예컨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변합니다. 조석변개라는 말처럼 아침저녁으로 마음이 변합니다. 때로는 기분에 따라 그 마음이 변합니다. 기분 좋을 때 마음과 기분 나쁠 때 마음이 다릅니다. 감정에 따라 그 마음이 달라집니다. 화가 날 때 마음과 사랑이 충만할 때 마음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잘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마음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게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늘 좋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잠 16:3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자기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을 잘 관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마음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 것인지를 교훈해 줍니다.
1. 마음을 채우라
본문 20-2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자녀에게 부모가 가르쳐주는 교훈의 말씀을 듣고, 늘 보며, 그리고 잊지 말고 마음속에 잘 담아두라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말씀을 마음속에 채우라는 것입니다.
일전에 한 아파트 광고 카피를 보고 고개를 끄떡였던 적이 있습니다.
“바람도 햇살도 비울수록 가득해집니다.
바람을 위해, 햇살을 위해, 아름다움을 위해 비웠습니다.
비울수록 가득 채워지는 아름다움…”
이 광고 카피의 중심은 두 가지 단어입니다. 하나는 ‘비움’이고 다른 하나는 ‘채움’입니다. 집 안에 바람, 햇살, 그리고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먼저 불필요한 것들을 다 비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빈 공간에 바람, 햇살, 그리고 아름다움으로 채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네 아파트가 참 좋은 아파트라는 광고입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 마음 안에도 이렇게 비움과 채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우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비움입니다. 빌 2:5-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먼저 자기를 비우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있던 하나님으로서의 영광, 능력, 그리고 뜻까지 다 비우셨다는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케노시스“(kenosis)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닮고자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비움 즉 케노시스의 영성을 본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움은 단순히 청소하고 비워두기 위한 비움이 아닙니다. 이 비움은 더 귀한 것으로 채우고자 하는 비움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을 비워둔 채로 그대로 둔다면 더 나쁜 것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말 것입니다. 예를 들어 깨끗이 청소해 두고 나면 계속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어느새 먼지가 가득 쌓이고, 곰팡이도 생기고 어디서 들어왔는지 거미가 와서 거미줄을 쳐 놓습니다.
그래서 비움 이후 채움이 이어져야 합니다. 요1:1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비우신 뒤에 비운 채로 그대로 계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 비우셨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어느새 새로운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와 진리였다는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플레로스”(pleros)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닮고자 할 때 채움 즉 플레로스의 영성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무엇을 채워야 할까요? 겔 3:1-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에스겔이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으며 본 환상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그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의 마음을 닮게 해 줄 것입니다.
2. 마음을 지키라
본문 2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품었던 그 마음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킨다는 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원문을 보면 이 말은 한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가 빼앗기 위해 지속적으로 공격해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성을 지킨다고 할 때 주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누군가가 끊임없이 우리 마음을 빼앗기 위해 공격해 오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서 사랑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을 때 그 마음을 빼앗기 위해 공격해 온다는 것입니다. 충성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 마음을 빼앗기 위해 공격해 온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무엇인가 순종하기로 마음을 정했을 때 그 마음을 빼앗기 위해 공격해 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전 5:8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대적 마귀가 우리를 집요하게 공격해 온다는 것입니다. 이 때 대적 마귀의 주된 공격목표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마음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요? 시 1:1-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이 말씀은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대적 마귀가 우리를 악인들의 꾀를 따르도록 미혹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도록 미혹하고, 그리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도록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는 사람들은 그런 미혹을 뿌리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인도하는 그 길 곧 하나님의 백성이 가야 하는 길을 걷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라는 잡지에 심장 전문의이자 하버드 의대 교수인 허버트 벤슨 박사의 논문이 발표된 일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한 마디로 성경 말씀 묵상이 현대 생활에서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는 주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분은 성경을 한 문장 또는 한 문단씩 묵상했던 그리스도인 환자들에게 분명한 심리적, 신체적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스피린이나 소화제의 효력보다도 더 강력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말씀이 내면화될 때 스트레스도 해소되고 치유가 일어나게 되더랍니다.
그래서 이 분은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그리고 저녁에 잠들기 전에 또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라고 열심히 권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지켜줍니다. 외부로부터 우리 마음을 향해 공격해 오는 대적 마귀의 미혹을 물리쳐 줍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받게 되는 각종 스트레스를 완화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 1:1에 나오는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들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특히 주야로 묵상할 때 그 효과는 놀랍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욱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3. 마음을 실천에 옮기라
본문 24절 이하를 보면 우리의 신체 기관 세 가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입입니다. 2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
한 마디로 마음속에 담겨있는 선한 마음 그대로 말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눈입니다. 25절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한 마디로 이곳저곳 한 눈 팔지 말고 선한 마음이 닿는 곳을 보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입니다. 26-2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한 마디로 선한 마음을 따라 인생길을 걸어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채우고 또 지켜온 그 마음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경계해야 할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특히 두 가지를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는 마음이 없는 행동입니다. 이선관이라는 시인이 쓴 짧지만 여운이 긴 시가 있습니다.
제목이 <없다>입니다.
번개시장에는 번개가 없고,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국화빵에는 국화가 없고,
정치판에는 정치가 없네.
혹시 우리가 하는 행동 속에 우리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가정에서 아내를 대하고 자녀를 대할 때 마음 없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에서 봉사하면서 마음이 없지는 않습니까? 일터에서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 속에 마음이 담겨있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이렇게 마음 없는 행동을 계속해 갈 때 우리 마음은 꽃병에 담겨있는 꽃들처럼 시들어 갈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마음과 다른 행동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중에 하나가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행동을 다르게 할 때일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마음과 다른 말을 해야 할 때가 있고, 어쩌다 생각 없이 마음과 다른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압박이 두려워서 또는 눈앞의 이익을 놓칠세라 마음과 다른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마음 따로 행동 따로 살아가게 될 때 우리 마음은 병들기 시작합니다. 양심이 마비되기 시작합니다. 죄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합니다.
잠 3:5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신앙생활할 때 마음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마음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채워진 선한 마음, 말씀을 묵상하며 지켜온 그 선한 마음을 이제 실천으로 옮기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그 선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 마음을 잘 지키고, 그리고 그 마음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마음을 잘 관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박봉수 목사(상도중앙교회)
잠언 4장 메튜헨리 주석
● 부모의 훈계(잠언 4:1-13)
Ⅰ. 솔로몬이 자기 자녀들에게 와서 자기 교훈을 받으라고 하는 초대.
"너희,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라"(1, 2절). 즉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 "나의 타인들의 사용을 위해 교훈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맨 먼저 나의 친 소생들이 그 훈계를 받으며 그 말씀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야겠다."
위정자나 목회자는 보다 많은 사회 대중의 지도를 맡은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가정을 잘 교육시키는 데에 보통 이상의 주의를 기울이도록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저희의 공적인 업무도 결코 이 의무에 대한 발뺌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이 일이 거기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고 하더라도 이 자선은 가정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자기 자녀를 아주 근엄하게 순복시키지 않고 그들의 선도에 수고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 미땅히 해야 할 자기의 의무를 수행할 것인가?(딤전 3:4, 5) 지혜나 공익성으로 저명한 인사들의 자녀를 그런 부모를 둔 관계로 얻는 잇점에 비례하여 지식이나 은혜의 증진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자녀들의 교욱에 으레 수반되는 희망이나 기대에 자녀가 부응하지 못하는 경우 그 부모의 명예나 위로 같은 것은 차치하고라도,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조차도 가장 지혜로운 자나 가장 훌륭한 사람 축에 전혀 끼일 수 없었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함직한 것은 정작 솔로몬의 잠언이 헌신한 것처럼 보이는 솔로몬의 친아들보다는 수 천의 사람들이 더 많은 유익을 그의 잠언에서 받았다는 사실이다.
2. 모든 젊은이들로 하여금 그들이 어리고 젊을 때 지식과 은혜를 구비하기 위해 고심참다하게 하라.
왜냐하면 그 때가 저희의 학습시기이며 그때에 그들의 사상이 형성되고 무르익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자녀들아" 하지 않고 "너희 자녀들아(혹은 아들들아)"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솔로몬이 가졌던 단 하나의 아들에 대해 읽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려 한다면)그는 선뜻 교장 선생님을 자처하면서 기꺼이 타인들의 자녀들을 가르치려 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 시기가 성공할 수 있는 가망이 극히 높은 나이인 때문이다. 가지는 어리고 연할 때에 잘 휘는 것이다.
3. 교훈 받기를 원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성인들일지라도 어린 아이의 기질을 가지고 나오게 하라.
모든 편견은 접어 두고 마음은 백지처럼 되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공손하고 유순하며 수줍어하도록 하라. 그리고는 이 말씀을 아버지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도록 하라. 아버지의 말씀에는 위엄과 사랑이 실려 있는 법이다. 우리는 이 말씀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곧 하나님께로서 나오는 것임을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기도 드리는 대상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고 축복을 기대하는 대상도 우리 영들의 아버지되신 그분이시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그러한 아버지께 복종함이 마땅하다.
우리는 선생도,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의 행복을 구하는 아버지처럼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비록 그 훈계 속에 책망과 징계가 들어 있더라도(훈계라는 단어 자체의 뜻도 그러하다) 우리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1) 이것을 우리에게 권장하기 위해서 이것이 "아비의 훈계"일 뿐만 아니라 "명철"이기도 하다는 말씀을 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지적 동물이라면 그것을 환영해야 마땅하다. 종교는 자기 나름의 이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우리는 공명한 이성의 추리에 의거하여 그가르침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참으로 하나의 법(2절)이며 그 법은 도리어 기초 위에 세워져 있다. 명백한 진리의 원리 "선한 도리"를 기초로 하고 세워져 있다. 이 선한 도리는 신실할 뿐만 아니라 전부 받아들일 만한 가치도 있다. 만약 우리가 그 도리를 인정한다면 그 법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2) 그 도리를 우리 안에 단단히 죄어 넣기 위해 그것을 하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열성을 다해 주의를 기울이며 온전히 알기 위해 애쓰라고 지시해 주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교훈을 행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우리는 또 그 도리를 부인하거나 그 법에 순종치 아니함으로써 그것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Ⅱ. 그가 자녀들에게 주는 훈계.
1. 그는 어떻게 이 훈계들을 입수하게 되었는가? 그는 자기 부모에게서 이 훈계를 받았다.
그래서 자기 부모가 자기에게 가르쳐 준 꼭 같은 사실을 자기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있다(3,4절).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그의 부모는 그를 사랑하였고 따라서 그를 가르쳤다.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느니라." 다윗에게는 아들이 많았으나 솔로몬은 이삭이 그렇게 불리우듯(창 17:19) 정녕 그의 아들이었고 더욱이 이삭의 아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셨듯 솔로몬의 아비 다윗에게도 언약이 체결되었던 때문이다.
그는 그의 부와 다윗의 애자였으면 딴 어느 자녀보다 총애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특별하신 친절을 베푸셨고(선지자는 그를 "여디디야"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신 때문이라, 삼하 12:25), 그 이유로 해서 다윗도 그에게 각별한 친절을 베풀었으니 이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을 좇는 사람이었던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부모가 여러 자녀 중 한 자식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겨우, 하나님께서 그리하신다는 사실이 뚜렷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 부모가 다 같이 사랑할 때 이와 같이 구별할 만한 명백한 이유가 확실히 있었다. 이제 우리는 그의 부모들이 자기들의 사랑을 어떻게 나타냈는지 살펴 보자. 그들은 그를 가르쳤고 자기 책을 붙들고 있게 하였으며 엄한 규율에 그를 붙들어 매놓았다. 그가 비록 왕자였고 왕세자로 책봉된 자였지만, 그 부모는 그를 마음대로 매이지 않은 생활을 하도록 하지는 않았고 따라서 그들은 그와 같이 훈육을 하였다. 그리고 다윗의 아도니야에게서 지나친 방종이 미치는 나쁜 결과를 보았기 때문에 아마 솔로몬을 교육시킴에 있어 보다 엄격한 쪽이었을 것이다. 다윗의 압살롬의 경우에서처럼 아도니야에게도 "무슨 일에서나 그를 가로 막은"적이 없었던 것이다(왕상 1:6).
(2) 그는 자기 부모가 가르쳐 준 것을 남에게 가르치고 있다.
[1] 장성한 솔로몬은 어릴 때 자기 부모가 가르쳐 주었던 선한 교훈을 기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되풀이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얻었다. 그는 그 교훈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토록 그들이 미친 감명은 깊이 박혀 있었다. 그는 그 교훈들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그는 그 교훈에 대해 그토록 높은 가치를 두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는 성인이 되어 임금이 되었다 하여 그 교훈들이 자기에게 불명예라도 되는 듯이 버려야 할 유치한 것이나 천한 일로 생각지 않았다. 그러니 그것을 어찌 되풀이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부모의 엄한 교훈과 억제를 벗어나게 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부모의 교훈을 조롱하며, 그것들을 자기 친구들을 즐겁게 만드는 농담거리로 삼는 일부 못된 자녀들도 있는 것이다.
[2] 비록 그 자신이 현인이었고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는 자기 아버지의 말을 인용하고 말을 이용하는
것을 자기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종교에서 잘 배우며 잘 가르치려고 하는 자들은 선배들의 지식과 언어를 보잘 것 없다는 듯이 멸시하려고 새로 찾아낸 개념이나 새로 만든 용어들은 즐겨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선한 옛 길을 고수해야 한다고 하면서 왜 선한 옛 말씀을 비웃어야 한단 말인가?(렘 6:16)
[3] 자기 부모에게 좋은 교육을 받았던 솔로몬은 따라서 자기 자신의 자녀에게도 훌륭한 교육, 즉 자기 부모가 베풀어 준 것과 꼭 같은 교육을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가정에서 경건을 보이기까지 우리를 키우느라 고생하신 부모의 노고에 보답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이다(딤전 5:4). 그들은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가 배워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자녀에게 하나님의 선한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시 78:6). 만약 우리가 이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탁(信託)에 부실한 셈이다. 왜냐하면 경건한 교훈과 율법은 "우리 뒤에 올" 자들에게 순전하고 온건히 전달하란 부탁과 함께 신성하게도 우리 손에 위탁된 것이기 때문이다(딤후 2:2).
[4] 솔로몬은 자기 당대에 모든 점으로 유명한 인물이던 아버지 다윗의 권위를 빌어서 자기 권면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시대마다 가장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은 종교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실천에 극히 열성이었을 뿐만 아니라 타인들에게 그것을 전파하는 데에도 극히 열심이었다는 사실을 주시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배운 일에 거하고 있어야"하며 뉘게서 배운 것을 알아야"한다(딤후 3:14).
2. 이 훈계들은 무엇이었는가?(4-13절)
(1) 교훈과 권면의 수단. 다윗은 자기 아들의 교육에 있어서 비록 솔로몬이 비상한 재질과 총명을 소유한 아이였지만 자기가 매우 열심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가 한 말로 자기 아들을 더욱 감동시키기 위하여 아주 온화하게 간곡히 말하였으며 같은 일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가르쳤던 것이다. 아이들은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 "너는 네 자녀를 부지런히 가르칠지니라"(신 6:7). 다윗은 공무로 분망한 사람이었고 자기 아들을 위한 개인 교사들을 두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아들의 교육에 이처럼 친히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1] 다윗은 성서와 자기의 교리 문답집을 방편으로써 그에게 권장하고 있다.
즉 그것은 자기 아버지의 "말씀"(4절)이고 "그의 입의 말"이며(5절) "그의 말"(10절)이고 그가 자기에게 가르쳐 준 모든 교훈이다. 특히 그는 시편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은데 시편 중 다수는 "마스길"(Maschil) 즉 "교훈의 노래"였고 그 중 두 편은 특별히 "솔로몬을 위한" 것이라고 칭하여진다. 솔로몬은 이들과 그 외 다른 모든 말씀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첫째, 그는 "그 말씀들을 듣고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10절). 그는 부지런히 경청하며"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듯"(히 6:7) 그들을 흡수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말씀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그와 같이 미리 말하여 두신다.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둘째, 그는 자기 아버지가 자기에게 한 "완전한 형태의 말씀을 꽉 붙잡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4
절). 내 말을 네 마음 속에 감추지 않고, 네 의지와 사랑 안에 넣어 두지 않는다면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 그는 그 말씀에 의하여 자신을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 명령을 지키라. 그 명령에 순종하라." 그것이 그들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게 되는 비결이다(요 7:17).
넷째, 그는 그 말씀에 충실하고 그것에 의지하여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말씀이 네게 너무 큰 방해가 될까하여 "내 입의 말을 어기지 말고"(5절) 네가 잡은 것을 놓지 않고 계속 유지하고야 말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훈계를 굳게 잡아라"(13절). 좋은 교육을 받는 자들은 설령 자기들이 받은 교육을 떨쳐 버리려고 무진애를 쓰더라도 그것이 아주 오랫동안 자기들에게 베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매우 유감된 일이다.
[2] 그는 솔로몬에게 이런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지혜와 명철을 달성 목표로 삼으라고 권면을 하고 있다. "지혜"를 얻으라. "지혜"중에서도 "제일가는 지혜"를 얻으라. Quod caput est sapientioeeam acquire sapientiam-즉 지혜의 나뭇가지 중 가장 꼭대기에 있는 지혜의 가지를 꼭 유의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여호와께 대한 경외"인 것이다(잠 1:17). 고기를 잡으러 나무에 올라가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며 곰을 잡으려면 그 심장을 겨누어야 한다. 경건한 신앙의 원리는 마음에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첫째, 이 "지혜,"이 "명철"을 얻으라(5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7절). 기도로 그것을 구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고심 참담하며,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지정된 모든 수단을 부지런히 사용하라. 지혜의 문 곁에서 기다리라(잠 8:34). 네가 타락하는 것을 저지하라. 그것은 네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원리와 지혜의 습관을 소유하라. 경험으로 지혜를 얻으며 무릇 네가 얻을 모든 것보다 지혜를 얻으라. 이 세상 부귀를 얻는 일보다 이 지혜를 얻는 데에 보다 주의를 기울이며 보다 수고하라. 네가 무엇을 잊어버리든지 간에 이것만은 가지고 있으라. 그것을 큰 성공으로 간주하고 따라서 그것을 추구하라." 참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얻으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에가서 "우리 힘과 우리 손의 힘이 우리로 이 재산을 얻게 하였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둘째, 그것을 잊지 말며(5절), "버리지 말며"(6절)", "놓치지 말고 지키라(13절)." 이 지혜를 얻은 자는 다시 어리석음으로 되돌아 감으로써 그것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결코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참으로 좋은 짝이요 재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치 그것을 맨 먼저 잊어버리고 자기들 마음에서 빠져 나가게 하며, 그런 다음에는 그것을 버리고 그 선한 길에서 이탈하게 되는 자들처럼 그것을 내던져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 준 그 좋은 것을 간직해야 하며 부주의로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서 강제로 빼앗기게 내버려 두어서도 안 되며 스스로 감언이설에 속아 그것에게서 나와서도 안 된다. 그와 같은 보석을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세상 사람들이 저희 재물을 사랑하며 저희 마음을 물질에 두는 것처럼 "지혜를 사랑하며"(6절), l"그것을 품어라"(8절). 경건한 신앙은 우리가 매우 소중히 여기는 것이 되어야 하며 이 세상 어떤 것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이 도어야 한다. 우리가 위대한 지혜의 교사까지는 못된다 할지라도 지혜를 참으로 사랑하는 자들이라도 되자. 우리가 은혜를 얼마나 얻든지 간에 지혜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자답게 그 지혜를 성실한 애정으로 품도록 하자.
넷째, 그를 높이라(8절). 참 종교에 대해서 언제나 높이 우러러 보는 생각을 견지하라. 경건한 신앙에 대해 말할 때는 존중과 경의로써 하고 그 명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네 종교의 명예를 유지하라.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하라. 그것은 율법을 확대하는 것이며 존귀케 하는 것이다. 그 목적에 부응할 수 있도록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행하라. 지혜의 자녀들은 지혜를 의롭게 여겨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찬미하는 이 세상에서 자기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에 앞서 이 지혜를 더 좋아해야 한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낮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을 존귀한 자로 대접하고 "가난한 지혜자"를 존중하는 일 가운데에서 우리는 지혜를 높이도록 하자.
(2) 이처럼 지혜를 얻기 위해 수고하며, 또 그 지혜의 안내에 복종하게 하는 동기와 유도.
이에 대해 다음 사실을 참작하자.
[1] 지혜는 인생살이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며 이 생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이 끊임없이 돌아봐야 할 주된 관심사이다. "지혜가 제일이다"(7절). 우리가 얻으려고 애쓰고 지키려고 애쓰는 딴일들은 이것에다 대면 아무 것도 아니며,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분"이다(전 12:13). 지혜는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해 주고 영혼을 아름답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능히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하게 하고 이 세상에서 얼마쯤 선한 목적에 따라 살게 하여 마침내는 천국에 이르도록 해 준다. 이것이 제일이 아니고 무엇이냐!
[2] 지혜는 제 나름대로 이성과 정당성을 가진다(11절). "내가 지혜로운 길로 네게 가르쳤느니라." 그래서 결국 그것은 네게 발견될 것이다. 내가 너를 인도하였다. 나는 지혜라는 보호색하에서 그릇된 일을 행하는 세상적 권모술수의 구부러진 길로 너를 인도한 게 아니라 영원한 규칙에 합당하고 선악의 판단력에 일치되는 정직한 첩경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정직하신 속성은 모든 하나님의 법의 정직성 속에 나타나 있다.
다윗은 좋은 교훈으로 자기 아들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좋은 본보기를 보이고 일반적인 훈계를 개별적 사례에 적용시켜 가면서 그를 인도하였다. 그래서 다윗 편에서 볼 때는 그를 지혜롭게 만들기에 부족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3] 그것은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크게 기여할 것이었다. "만약 네가 지혜롭고 선하다면 너는 네 자신을 위해서도 지혜롭고 선하게 될 것이다."
첫째, 그것은 네 생명이 될 것이며 네 위로, 네 행복이 될 것이다. 그것은 네가 그것 없이는 살수 없는 그런 것이다.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4절). .우리의 구주께서도 이것과 일치되는 말씀을 하셨다. 즉 "네가 생명으로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 우리가 경건해지도록 요구를 받는다는 것은 죽음의 고통, 영원한 죽음 위에서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는 것이다. "지혜의 말씀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10절). 이 세상의 네 연수는 무한하신 지혜자의 눈에 적당한 것으로 보이는 만큼 길 것이며, 저 세상에서는 네가 그 햇수를 셈할 수 없을 정도의 생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네게 드는 비용이 얼마이든지 간에 이것을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13절). 너의 모든 만족도 이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 지혜와 은혜가 없는 영혼은 죽은 영혼과 다름없다.
둘째, "그것은 이 광야을 통과하는 여행길에서 모든 위험과 어려움으로부터 지켜 주는 너의 호위요 안내자이며, 네 방어자요 인도자가 될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고 지혜를 고수하라. 그리하면 지혜가 너를 보호하며 지켜 주리라(6절). 지혜가 너를 죄로부터, 가장 나쁜 악으로부터, 가장 악한 원수들에게서 보호하며 지켜 줄 것이다. 지혜는 네가 다치지 않도록 지켜 줄 것이다. 그리하여 그 외에 어떤 누구도 너를 해칠 수 없다." "상점을 지켜라. 그러면 상점이 너를 지켜 주리라"는 속담처럼 "네 지혜를 지켜라. 그리하면 네 지혜가 너를 지켜 주리라."
지혜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사무를 처리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를 곤란과 장애물로부터 지켜 줄 것이다(12절).
1. 우리는 다닐 때에 우리 걸음이 곤란하지 않게 되고, 다윗이 빠졌던 그런 궁지(삼하 24:14)에 들어가게 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의 기준으로 삼는 이들은 자유로이 다닐 것이며 자기들 스스로 편안할 것이다.
2. 우리가 달릴 때도 우리 발이 실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혜롭고 선량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결단을 요구당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들이 의지하고 다니는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 있는 규칙이 그들을 지키셔서 그들이 해로운 어떤 일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해 줄 것이다. 성실과 정직은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다.
셋째, "그것은 네 명예와 명성이 될 것이다(8절). 지혜를 높이라(단지 너는 지혜의 높아짐에 호의만 보여라). 그리하면 지혜는 네 봉사를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그것에 풍족하게 보상해 줄 것이다.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솔로몬은 왕이 될 몸이었지만 그의 지혜와 미덕은 왕관이나 곤룡포보다 그의 명예를 더욱 높일 것이었다. 그의 모든 이웃 사람이 그를 그토록 존경한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그와 다윗의 치세 하에서는 아마 틀림 없이 지혜롭고 선한 자들의 출세가 아주 순조로왔을 것이다. 종교는 충심으로 "자기를 품는" 모든 자들을 이르든 늦든 간에 모두 "영화롭게" 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존재가 되고 모든 현자들에게 존경받게 될 것이며, 저 큰 날에 인정받고 영원한 영광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그는 다음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9절). "그가 이 세상에서는 아름다운 관(혹은 장식물)을 네 머리에 두겠고, 너를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에 다 같이 드는 존재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저 딴 세상에서는 그가 아름다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 면류관은 결코 흔들릴 위험도 없을 것이며 결코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경건한 신앙에 부수되는 진정한 명예인 것이다. Noibilitas sola est atque unica virtus-즉 미덕은 유일한 귀족이다. 다윗이 이처럼 지혜를 자기 아들에게 권장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원하는 바를 요구하라고 하셨을 때 그가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지혜롭고 분별있는 마음을 주소서"라고 한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못 된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바 좋은 교육을 우리 기도로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악인의 길에 대한 경고(잠언 4:14-19)
다윗이 솔로몬에게 준 교훈은 4절에서 시작되는데 혹자는 이것이 이 4장 끝까지 계속된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이는 9장 끝까지 계속된다고 본다. 그러나 더 앞에서는 아니더라도 솔로몬이 여기서 다시 자기 말을 잊고 있다는 견해가 한층 타당할 것 같다. 그는 자기 아버지 훈계를 빌어 우리에게 지혜의 길로 행하라는 권면을 하였는데, 이 성귀에서는 악인의 길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다.
1. 우리는 죄의 길을 조심해야 하며 피해야 하며, 죄악과 닮았다고 생각되고 죄의 길에 이르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다 피해야 한다.
2. 이를 위해서 우리는 죄인의 길을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며 죄인과 교제하지 말아야 된다. 사악한 행로에 빠지게 될 것을 염려하여 사악한 교우를 회피해야 한다. 이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Ⅰ. 경고 그 자체(14, 15절).
1. 죄악에 빠지고 죄인과의 교제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특한 자의 첩경에 들어가지 말라."
우리의 선생은 앞에서 신실한 안내자 같이 우리에게 "정직한 첩경"(11절)을 가르쳐 주었는데, 여기에서는 우리가 자칫하면 빠져 들어갈 곁길에 대해 경고를 해 주고 있다. 자기들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잘 교욱을 받고 그 길에서 훈련을 쌓은 자들은 절대로 가서는 안 될 곁길로 엇나가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 길에 들어가 보지도 말아야 하며, 그 길을 시험해보려고 들어가보는 일조차 금해야 한다. 그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실험으로 판명될 것이며 한번 들어갔다 하면 안전하게 후퇴하기 어려운 걸음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전염병에 감염된 무리들한테 들어가 보는 모험을 하지 말아라. 설사 해독제로써 네 자신이 안전히 지켜진다고 생각되더라도 그런 모험을 감행해서는 안 된다."
2. 어느 때고 간에 설사 꾐에 빠져 악한 길에 들어서게 되더라도 우리는 재빨리 거기서 뛰쳐 나와야한다.
"설령 그 문이 넓어 네가 부지중에 발을 들여 놓게 되더라도 너는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지니라. 네 잘못을 깨닫게 되는 순간 즉시 물러나라. 틀림 없이 파멸로 이끄는 그 길에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말며 일 분 일 초도 더 이상 머물러 있지 말아라."
3. 우리는 죄의 길과 죄인의 길을 두려워하고 혐오해야 하며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려 그들을 타기해야 한다.
"악인의 길은 즐겁고 사교적인 길인 것처럼 보일런지도 모른다. 그 길은 또 우리가 의중에 두고 있는 어떤 세속적인 목적의 추구에 가장 첩경인 것같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악한 길이며, 그 끝이 악할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네 하나님과 네 영혼을 사랑하거든 그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라. 그렇게 해야 너는 그 길로 들어가고 싶은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네가 그 길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거든 돌이켜 떠나가며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떨어져라." 이러한 표현 양식은 우리가 빠져 있는 절박한 위험과 우리에게 대한 이 경고의 필요성과 중대성을 암시해 주며 우리에게 경각심을 촉구하는 우리의 파숫군이 얼마나 열심히 경고하고 있는 지를, 또 그렇게 해야 하는 지를 나타내 준다. 또 마찬가지로 본문의 표현은 우리가 죄와 죄인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적당한 거리로 떨어져 있어라"고 하지 아니하고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한다. 멀면 멀수록 더욱 좋다. "이만큼 떨어져 있으면 충분하겠지"하고 생각하지 말아라. "네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라. 네 뒤를 돌아다보지 말아라."
Ⅱ. 이 경고를 강력히 주장하는 이유.
1. "네가 그 길을 피하라고 경고받은 자들의 특성을 고찰해보라."
그들은 심술궂은 자들이다(16, 17절). 그들은 자기들의 길에 서 있는 자들에게 어떤 해를 끼칠까 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화를 입히는 것이 저희의 본업이요 기쁨이 된다. 그들은 화 자체를 위해 화를 입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사람을 넘어뜨리고 몸과 영혼을 다멸망시키기 위해 부단히 계획하고 노력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본성 안에는 악과 악의가 공존하며 그들의 모든 행동에는 폭력이 있다. 그들은 극도로 원한에 차 있다. 그들이 왜 이렇게 악의로 가득차 있는가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해치는 일은 그들의 잠요 휴식이다. 탐욕에 가득찬 인간이 돈을 얻었을 때나 야심에 불타는 인간이 승진을 하게 되었
을 때, 그리고 선량한 사람이 선을 행하였을 때 얻는 만족감과 같은 정도의 만족을, 악인은 해롭고 심술궂은 일을 말하거나 행동하였을 때 느낀다. 모르드개가 교수형을 받지 않는 동안에는 그 어떤 것도 즐겁지 않았던 하만처럼 그들은 자기들의 시기심과 복수심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때에는 아주 불안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그들이 악한 일의 추구에서 얼마나 부단히 애쓰며 지칠 줄 모르는가를 암시해 준다. 그들은 남을 골려주는 즐거움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잠을 포기하려 할 것이다.
(2) 해를 끼치는 일은 그들의 양식이요 음료이다. 그들은 행악을 음식으로 삼고 그것을 즐긴다. "그들은 불의의 떡을 먹으며"("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는도다." 시 14:4) "강포의 술을 마시고"(17절) "악을 짓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도다"(욥 15:16). 그들이 먹고 마시는 것은 전부가 늑탈과 압제로 얻는 것이다. 악인들은 자기들이 남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는 시간을 손해 본 것으로 생각한다. 선한 사람들은 이에 못지 않게 선을 행하는 일을 자기 본분과 기쁨으로 삼아야 한다. amici, diem perdidi-즉 친구들이여, 나는 하루를 잃었노라. 지혜로우며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모든 자는 악인과의 교제를 피하여야 한다.
[1] 악인과의 교제는 매우 추문이 높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 중, 누구에게나 화를 입히기 좋아하고 성가시게 하기를 취미로 삼으로 남을 해치거나 파멸시키는 것으로 기쁨을 삼는 심사보다 더 치욕스러운 성벽은 없으며, 그것은 또 인류 사회의 최대의 적이며 하나님과 양심에게 있어서는 이보다 더 대담한 도전은 없는 것이다. 이런 마음보는 그안에 마귀의 형상을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며 악인의 이익에 보다 더 쓸모가 있다.
[2] 악인과의 교제는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네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거든 행악을 즐기는 자들을 피하라. 왜냐하면 그들이 어떤 우호를 표방하더라도 언젠가는 네게 화를 입히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만일 그들과 야합한다면 네 스스로 파멸할 것이며(잠 1:18) 네가 그들과 동조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너를 파멸시키려들 것이다."
2. "네게 피하라고 경고된 바 있는 악한 길 그 자체의 특성을 고찰하고, 네게 걸어 들어오라고 초대한 의로운 길과 비교해 보라."
(1) 의의 길은 광명이다(18절). 정직한 자들이 택하여 걷고 있는 "의인의 길은 햇볕과 같느니라" "그들의 길에는 빛이 비친다"(욥 22:28). 그리고 광명은 저희 길을 안전하고 즐겁게 만든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길"이요 "빛"이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심을 받으며 그것은 "저희 발의 등불"이다. 그들 스스로도 "주 안에서 빛"이 되며 "주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빛 가운데에서 행한다."
[1] 그것은 "비춰 주는 빛"(혹은 돋는 햇볕)이다. 저희 길은 그 길 자체의 기쁨과 위로로 그들에게 빛을 비춰 준다. 그 길은 광채와 명예로 딴 사람들 앞에서 빛난다.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빛이 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으로 의로운 자들의 착한 행실을 보게 된다"(마 5:16). 그들은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자들처럼, 거룩한 안보하심과 마음의 평정으로써 자기들의 길로 계속 행한다. 그 길은 새벽 빛 같아서 "흑암 중으로부터 빛이 나와 어두운 일"에 종언을 고하게 한다(사 58:8, 10)
[2] 그것은 점증하는 빛이다
그것은 "점점 더 빛나느니라." 그 빛은 곧 사라져 버리는 유성의 빛, 혹은 타다가 침침해지고 꺼져 버리는 촛불의 빛과 같지 아니하고, 떠오르는 태양과 같아서 앞으로 나아갈수록 빛나며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빛을 낸다. 이 의로운 길의 안내자 되신 은혜도 점증한다. "그 손이 청결한 자는 더욱 더 강하여지리라." 이 길의 즐거움이 되는 기쁨과 이 길의 밝음이 되는 존귀와 참 빛이 되는 행복은 여전히 계속 증가할 것이다."
[3] 그것은 결국 "원만한 광명"(완전한 낮이란 의미)에 이르게 될 것이다.
새벽 빛은 마침내 한 낮의 빛이 될 것이니 빛을 받은 영혼이 향해 나아가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성도들은 천국에 가기까지는 완전하지 못 할 것이지만 거기에서는 그들이 자기의 강함으로 돌아오는 때의 "해와 같이 빛나리라."(마 13:43). 그들의 은혜와 기쁨은 전부가 다 완전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의 길"을 고수하는 것이 곧 우리의 지혜로움이다.
(2) 죄악의 "길은 어둠같느니라"(19절).
그가 우리에게 사귀지 말라고 경고한 일은 "어둠의 일"이다. 악행하는 일로 얻는 즐거움과 만족 외에는 달리 아무런 즐거움이나 만족을 모르는 자들이 도대체 어떤 참 즐거움과 만족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 던져버리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확실한 안내자란 무엇인가? "악인의 길은 어둡고," 따라서 위험하다. 때문에 그들은 실족하며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에 거쳐 넘어지는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그들은 죄악에 빠져 들면서도 자기들이 정복당한 시험이 어느 길로 왔는지 알지 못하며, 따라서 다음 번에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도 모른다. 그들은 환란 속에 빠져들지만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자기들과 다투시는가를 물어보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이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으며, 그 종말이 어떻게 될지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다(시 82:5; 욥 18:5, 6).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피하라고 지시하는 길인 것이다.
● 선을 행하는 길(잠언 4:20-27)
앞에서 솔로몬은 악을 행치 말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어떻게 하면 훌륭히 행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범죄하게 되는 기회를 피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의무 수행의 방도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부단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그 말씀이 언제라도 우리에게 쓰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1. 지혜의 말씀은 우리 스스로를 규제하는 원리가 되어야 한다. 또 지혜의 말씀은 우리에게 의무와 위험을 경고해 주는 우리의 권고자가 되어야 한다.
(1) 따라서 우리는 그 말씀을 신속히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20절). 겸손히 그 말씀에 복종하며 부지런히 그것을 청취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깊게 듣는다는 것은 마음에 은혜의 역사와 시작됨을 알리는 좋은 징조이며 또한 은혜를 가져오는 좋은 수단이다. 말씀을 알고 싶어하는 자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의무를 행하겠다고 결심하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2) 우리는 그 말씀을 조심스러이 보유해야 한다(21절).
우리는 그것을 규칙으로써 우리 앞에 두어야 한다.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라. 그것을 관찰하고 검토하여 무슨 일에서든지 그것에 맞추어라." 우리는 그것을 우리 안에 기거하도록 하며 하나의 지배 원리로 삼아서 그 영향력이 온 몸에 퍼지게 해야 한다. "네게 소중한 것인 양, 그리고 네가 잃어버릴까 하여 두려워하는 물건처럼 그것을 네 마음 속에 지키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새기어 그 기록이 계속 남아 있도록 해야 한다.
2. 우리가 이처럼 지혜의 말씀을 중시해야 할 이유는 그것이 "생명 나무"처럼 우리에게 음식이 되고 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계 22:2; 겔 47:12). 그것을 구하여 찾으며, 찾아서 지키는 자들은 그 안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 음식.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됨이니라"(22절).
영적 생명이 지혜의 도구인 말씀으로 시작되었듯이 바로 동일한 그 말씀에 의해 그 생명은 양육되며 계속 부양된다. 우리는 말씀 없이는 살 수 없으며, 믿음으로써 그 말씀을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다.
(2) 약. 그것은 "저희 온 육체에 건강"이 된다. 즉 그것은 몸과 영혼을 포함한 전인(全人)에게 건강이 된다. 그것은 영과육을 아울러 좋은 상태로 유지시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것은 "모든 육체에 건강"이 된다(70인역은 그렇게 되어 있다). 말씀에는 이 병든 세상의 모든 질환을 치료하기에 충분한 것이 있다. 그것은 "저희 온 몸에 약"이 된다(이 말씀의 의미는 그렇다). 그것은 육신이라고 불리우는 저희를 썩게 하는 모든 것에 약이 된다. 또 말씀은 육에 가시 같은 저희의 모든 고통에도 약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우리의 영적인 모든 질병에 적절한 약이 있는 것이다.
Ⅱ. 우리는 우리 속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해 경계의 시선과 엄중한 손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23절).
1. 지혜를 얻고 보존하도록 하기 위해 지혜의 법이 요구하는 큰 의무가 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우리에게 이 영혼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에 대해 우리에게 엄한 당부를 하셨다. 즉 남자나 여자나 "네 마음을 지키라. 네 심령을 조심하라"(신 4:9). 우리는 자신에 대해 거룩한 질투심을 계속 품지 않으면 안 되며 따라서 영혼의 모든 통로에 대해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마음을 가해와 피해로부터 지키며 죄로 더렵혀지지 않게, 고통으로 말미암아 동요를 받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우리의 보석이나 우리의 포도밭처럼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범죄가 없는 양심을 견지하며 악한 생각을 들어오지 못 하도록 막아라. 선한 생각을 유지하라. 적당한 범위 안에서 정당한 대상에게 대한 애정을 품어라.
"모든 지킴으로써 그들을 지키라"(말 뜻은 그렇다). 사물을 지키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즉 조심하거나, 힘으로써 하거나 남의 도움을 요청해서 하는 수가 있는데 우리는 그런 모든 것을 다 사용하여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한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이고 온갖 것을 다 동원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하다. 마음은 그토록 부패하기 쉬운 것이다.(렘 17:19). 또는 "무릇6 지킬 만한 모든 것보다"(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라고 해석된다. 우리는 그 외의 어떤 것을 지킬 때보다 더욱 조심하고 부지런히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우리 눈을 지켜야 하며(욥 31:1) 우리 혀를 지켜야 하며(시 34:13) 우리 발을 지켜야 한다(전 5:1).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2. 이런 보살핌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충분한 이유는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는" 때문이다. 잘 지켜진 마음에서는 생명의 근원이 유출될 것이며 선한 소산이 나와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타인들에게는 교훈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아 모든 생명의 행동은 마음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마음을 지키는 것은 나무를 훌륭하게 기르는 것이며 근원을 고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을 잘 지키는가 아니면 소홀히 버려두는가에 따라 우리의 생명이 규칙적으로 되든가 불규칙적으로 되든가, 안락한 삶이 되든가 불편한 삶이 되든가 결정될 것이다.
Ⅲ. 우리는 혀로 범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 입술의 문앞에 감시"를 세워두지 않으면 안 된다. "궤휼을 네 입에서 버리며 사곡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24절). 우리 마음은 원래 부패한 것이므로 악한 표현이 쏟아져 나오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갖 악한 말에 대해 큰 두려움과 혐오감을 품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것은 저주, 맹세, 거짓말, 중상모략, 말다툼, 음담패설, 횡설수설 등 "궤휼한 입과 사고한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이름인데, 이들은 이성이나 경건한 신앙의 규제를 받으려 아니하고 오히려 이 양자를 부인한다. 그래서 기형적으로 비뚫어지고 일그러진 입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듯이 이런 말을 하는 입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흉하고 추한 것이다. 우리는 악한 못브을 한 모든 말을 삼가고 그런 말을 배울까봐 두려워하면서 혀로 범하는 온갖 모양의 죄를 끊임없이 감시와 확고한 결의로써 "우리에게서 버리지" 않으면 안되며 "우리로부터 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Ⅳ. 우리는 우리 눈과 계약을 맺지 않으면 안 된다.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앞을 곧게 살필지어다(25절). 네 눈을 고정되게 하며 이리저리 방황하게 하지 말라. 눈에 보이는 것마다 다 따라 다니지 말게 하라. 그렇게 될 때에는 네 눈이 선으로부터 벗어나 악의 유혹에 걸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헛된 것을 바라보는 일로부터 네 눈을 돌리라. 네 눈은 하나가 되게 하며 나뉘지 않게 하라. 네 뜻을 성실하고 균일하게 잡아 어떤 부수적 목적을 곁눈질 하지 말게 하라." 우리는 우리 주님께 눈을 고정시키고 그에게 우리 자신의 그렇다는 것을 입증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 시선을 우리의 목표 곧 "높은 데서 부르시는 상"에 못박고 우리의 눈을 전부 그쪽으로 향하자. oculum in metam-즉 눈은 목표에!
Ⅴ. 우리는 행하는 모든 일에서 사려깊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26절). "네 발의 행할 첩경을 헤아리며 그 길을 달아 보라(단어의 의미는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울 한 쪽에 얹고 네가 행한 일이나 행하려고 하는 일을 다른 한 쪽에 얹어서 그 두 쪽이 평형을 이루는지 살펴 보아라. 네 길이 여호와 앞에서 선한지의 여부와 그 끝이 좋을런지의 여부를 검사함에 있어 한 눈금이라도 따지고 한치라도 관용하지 말라."
우리는 과거에 지나온 길을 살펴야 하며 우리가 행한 일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길, 즉 우리는 무엇을 행하고 있으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가 근신하여 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도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 길의 의무가 무엇이며 어려운 점들은 무엇이고 유리한 점은 무엇이며 위험은 무엇인지 고찰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이는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무슨 일이든지 경솔히 행하지 말라."
Ⅵ. 우리는 견실성과 경각심, 그리고 일관성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26절).
그리하여 그길 안에서 두마음을 품은 사람처럼 불안정하지 않도록 하라. 두 길 사이에서 엉거주춤하니 서 있지 말고 평탄하고도 일관성 있는 순종의 길로 나아가라.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라(27절). 이 양편에는 다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사탄이 어느쪽 길이든 한 쪽으로 가도록 우리를 이끄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자기 목적을 이루는 셈이 된다.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이라. 극단을 삼가라. 왜냐하면 거기에는 악이 있기 때문이다. 네 눈을 바로 보라. 이는 너로 하여금 중용의 도를 지킬 수 있도록 해 준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슬기 있는 자로 입증시키고자 하는 이들은 언제나 감시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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