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은 과연 완전하였나? (욥 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 1:1)
욥의 온전한 신앙 인격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셨다(욥 1:8). 따라서 구약 시대에 완전한 성도가 있었다면 그는 욥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 욥의 인격에 대한 설명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조화되지 않는 것 같다. 사도 바울은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는가?(23절) 이것이 사실이라면 욥이 어떻게 완전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고(7:20-21; 9:2, 5; 14:16-17), 어렸을 때부터 죄를 지었으므로(13:26) 무죄나 순결을 주장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9:28). 그래서 마침내는 내가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고 하지 않았는가?(42:6)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칭찬과 욥의 고백은 서로 모순이 아닌가?
만약 여기서 말씀하는 욥의 완전히 문자적인 완전이나 무죄의 뜻이 아니었다면 그 참 뜻은 무엇이었는가?
먼저 우리는 욥도 우리와 같은 아담의 후손이므로 죄인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바울이 로마서 5:12에서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거기서 한 사람은 시조 아담을 가리키며 죄는 그가 에덴 동산에서 지은 죄를 가리킨다. 또 모든 사람은 그의 모든 후손된 전 인류요, 그들이 다 죄를 지었다는 말씀은 그들이 모두 그 아담의 죄에 동참한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욥도 아담의 후예였으므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밝힌 대로 욥 자신이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였다.
사도 요한도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10)고 하였다.
다음으로 여기 욥이 순전하고 정직했다는 말의 뜻을 살펴보고 그 말이 욥에게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알아보자.
여기 순전하다는 말은 히브리 어로 탐( )인데 이 말은 희생 제물에 점과 흠이 없는 것을 가리켰다. 그러나 사람에게 쓰일 때는 개인의 성실(정직)로 쓰였을 뿐 죄 없는 완전을 의미하는데 쓰이지는 않았다(수 24:14; 삿 9:16, 19). 따라서 흠 없는 사람이란 말은 하나님과 밀접하게 교제하는 사람이며(창 17:1) 율법에 복종하기를 즐거워하는 자이다(시 119:1)(1).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와 사실에 일치하여 사는 자요,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자이다(27:5; 31:6). 이런 관점에서 욥은 사람에 대한 헌신에서나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헌신에서 모두 온전하였다(2). 이렇게 욥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적합한 성품을 갖춘 자였다. 그러므로 여기 완전하다는 말은 영적 성숙과 내적 순결을 가리켰다(3).
다음으로 정직하다는 말의 히브리어 야살( )은 위와 병행해서 쓰였고(시 33:1) 여기 욥에게는 완전(1:1, 8)으로 쓰였는데 마음의 도덕적 특성에 대한 언급으로 쓰였다(신 9:5; 왕상 9:4). 잠언에서는 자주 도덕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바른 길로 언급되었다(잠 2:13; 4:11)(4). 또 하나님의 법에 성실하게 집착하는 것을 가리켰고(왕상 14:8; 14:5) 하나님을 경외하는 올바름에서 이탈하지 않은 사상이나 행위(5) 또는 정직하며 사랑이 있는 행위를 가리켰다. 실제로 욥은 종들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후대하였고 공정하게 행하였다(31:13-23). 그는 불행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따라서 위의 두 말은 욥의 윤리적 적성을 가리켰다고 볼 수 있다(6). 과연 위의 두 단어는 욥의 고상한 도덕적 성품을 서술하기 위해 준비된 하나의 숙어적 방식으로(7) 욥의 도덕적 완전의 절정을 가리켰다(8).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다. 여기서 욥의 완전은 그가 죄 없는 완전한 인간이었다는 말이 아니다. 저자는 욥의 신앙을 통한 고상한 성품을 설명할 때 인간의 가장 고상하고 최선의 말을 택한 것뿐이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날 수 있다는 말씀(잠 16:6)을 실증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역을 떠나서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으므로(롬 3:19) 여기서 하나님은 사람 앞에서만 욥이 흠이 없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주
1. John E. Hartley, the Book of Job(Grand Rapids: Eerdmans, 1988), p.67
2. R. Laird Harris, G. L. Archer Jr., B.K. Waltake, Theological Word Book of the Old Testament
Vol.2(Chicago: Moody, 1980), p.974
3. Elmer B. Smick, Job, E. B. C. Vol.4(Grand Rapids: Zondervan, 1988), p.879
4. R. L. Harris, G. L. Archer, Jr., B.K. Waltake, Op.cit., Vol.1, p.417
5. C. F. Keil & F.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4(Grand Rapids: Eerdmans, 1980), 48
6. David J.A. Clines, Job 1-20(Waco: Word, 1989), p.12
7. Elmer B. Smick, Ibid.,
8. Marvin H. Pope, Job(Garden City: Doubleday, 1986), p.6
저주한다는 말이 있는데 축복한다는 의미(바락)를 썼는가?(욥 1: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 1:5) 여기 우리말 성경에 하나님을 배반하였다고 번역한 말은 저주하였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말 표준 새번역 성경과 영어 성경에서 모두 저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이 바락( )이란 말은 그 의미가 다양하며 저주 대신 정반대로 축복한다는 뜻도 있다. 그래서 포프(M.H. Pope)는 여기 저주한다는 말을 문자적으로는 축복한다는 뜻이라고 하였다(1). 원래 이 바락이라는 말은 무릎꿇다, 축복하다, 찬양하다, 인사하다, 저주하다는 뜻인데 완곡법으로 쓰였다(2). 그러므로 의미상으로 볼 때 위의 본문은 욥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저주한 것이 아니라 축복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면 왜 분명히 저주한다는 말을 써야 했는데 바락이란 말을 썼는가? 다시 말해서 왜 저주한다는 말이 따로 있는데 축복한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를 골라 썼는가? 그 이유는 크게 보면 두 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첫째로,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특별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저들은 그 이름을 부르는 것까지도 불경하다고 생각하였다. 성경에서 야웨(Yahweh)라는 이름이 나올 때 경건한 히브리 인들은 그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부르지 않았고 주(Lord)라는 의미의 아도나이(Adonai)란 말로 대체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경건했던 욥은 하나님에 관하여 저주라는 말을 쓰거나 말하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축복이란 말로 바꾸었을 것이다(3). 다음으로 여기 바락이란 말은 앞에서도 밝힌 대로 축복한다는 의미만 아니라 저주한다는 뜻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사 베락(berak)이란 말은 창세기 24:60; 32:1; 47:10; 여호수아 22:6; 사무엘하 13:29, 그리고 열왕기상 8:66에서 작별 인사한다는 의미를 가지며 대개 떠나는 사람에 대한 축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함축한다. 이런 용법에서 무례한 죄인이 자기의 마음과 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완전히 저버릴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께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4). 이것은 일반적으로 통용어에서 한 가지 의미를 가지는 단어나 구(phrase)의 사용이지만 그 반대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반어적 완곡법이다. 그러므로 여기 욥기 1:5은 내 아들들이 범죄하여 그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떠났다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 그 말은 하나님을 떠나거나 거역한다는 사상을 기술해 준다(5). 주 1. Marvin H. Pope, Job(Garden City: Doubleday, 1986), p.8 2. R. Laird Harris, G. L. Archer, Jr., B.K. Waltake, Theological Wordbook of the Old Testament, Vol.1(Chicago: Moody, 1980), p.132 3. Norman Geisler & Thomas Howe, When Critics Ask(Victor Books, 1992), p.224 4. 글리슨 아쳐, 성경 난제 백과사전(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0), p.322 5. Norman Geisler & Thomas Howe, Ibid., |
욥기 1:6~12 : 사탄의 존재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주님 앞에서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기쁘고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어떻게 하면 신나는 목회를 할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하곤 합니다.
그 것의 답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한 걸음 한 걸음 묵묵히 걸어가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는 신앙생활이 최선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사탄의 존재를 잘 몰라서, 잘 못된 신앙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을 너무 과대 평가해서도 아니 되며, 너무 몰라서도
안 됩니다. 사탄의 존재는 성경에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며,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은
사탄이 하는 일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를 대적하며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대명사는 시기하고 질투하며 이간질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어떻게 하면 멸망의 길로 가게 할 것인가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도와주시고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면 멸망의 길로
이르지 않는다고 성경에 말씀 하십니다.
우리는 사탄의 존재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두 번이나 사탄에게
욥을 온전하고 정직하다라고 칭찬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9절에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 하리이까”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사탄은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 헐뜯으며, 11절의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처럼
시기와 질투를 일삼으며 참소하는 것이 사탄의 역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7) 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귀에게 틈을 보여 주었던 대표적인 사건으로서 우리는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행 5:1~11)를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처럼 사탄에게 틈을 보여준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처럼 사탄은 전지전능하거나
무소부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음침하고 지저분하며 불의가 성한 곳에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찬양과 기도로 거듭나야 합니다.
본문 12절의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말씀처럼
사탄은 하나님이 허락한 범위 내에서만 활동하며, 우리들의 생명을 사탄이 좌지우지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주님의 보혈의 핏값으로 생명을
얻은 우리이기 때문에 사탄은 어떠한 행동도 못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며 늘 감사하는 생활을 하여야
하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욥을 시험하셨는가?(욥 1:6-12)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 1:11)
위의 본문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칭찬에 대한 사탄의 반론이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와 그의 집과 재산에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만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시기만 하면 욥은 하나님을 욕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이 시험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의 문제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 여호와 앞에 선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인가?(6절) 또 사탄은 누구인가? 그 사탄은 후에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탄과 같은 사탄인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 전에 지상에서 하는 일은 무엇이었는가?
야고보서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하였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시험을 허용하셨는가?
먼저 여기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관해서 알아보자.
하나님의 아들들은 다른 근동의 문서에서는 하늘의 법정의 구성원들로 알려지고 있으나 특별히 우가릿 문헌(Ugaritic)에서는 하나님의 아들(bn iL)이나 하나님의 아들들(dr-bniL) 또는 하나님의 가족(dr iL)과 일치하는 말이다. 가나안 종교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의 육신적 후손들로 서술하였다. 그러나 일신 종교의 틀에서 신격의 배우자로(consort) 생각되지는 않았다.
성경에서는 사자, 천사 혹은 하나님의 종들로 알려졌으며(4:18) 후대 유대와 기독교 신학에서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은 분명하게 천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1).
따라서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은 그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란 의미에서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여기 사탄은 신약의 사탄과 같은 존재였는가?
여기서 그렇게 질문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들과는 다르게 사탄이란 이름에는 정관사가 빠져 있다(1:6-9, 12; 2:1-4, 6-7). 그러므로 후대 유대와 기독교 신학에서의 사탄과 동일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탄은 원래 하나님의 대적 자였으나 여기서 사탄은 차라리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듯이 보이며 욥의 대적 자로 나오는 것 같다. 그는 하나님의 궁중에 하나의 신하처럼 나타나서 그의 행적을 보고하며 하나님께 속한 자로 하나님의 권위 없이는 활동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데이빗슨(A.B. Davidson)은 사탄을 그의 시험에서 하나님을 대신한 하나님의 사자의 하나로 보고 독립된 시험 자나 신약의 마귀의 왕도 아니라 하였다(2). 헤세(Hesse)도 사탄이란 말에 정관사가 붙어서 나오는 것은 포로 후 시대의 귀신론의 발전 과정에서만 나온다고 주장한다(3).
그러나 사탄은 원래가 그 별명이 참소자가 아닌가? 그리고 실제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형제를 참소하던 자였고(계 12:10) 지금도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벧전 5:8). 그는 이 시대의 신이며(고후 4:4; 엡 2:2) 온 세상은 이 악한 자안에 처해 있다(요일 5:19).
따라서 여기 본문에 사탄의 역할이나 그의 활동은 신약에 나오는 사탄과 다르지 않다. 물론 이 본문에서 보듯이 구약의 사탄은 근본적으로 악한 존재가 아니었으며 사람을 시험하는 책임을 진 천사적 존재로 나타난다. 사탄의 악한 특성이 구약의 몇 몇 구절에는 나타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여기 욥기 1:2에서도 사탄은 사람의 최선의 유익에 반대하여 행동한 사실이 어렴풋이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정관사가 없이도 그 말(사탄)은 사탄에 대한 적합한 이름이다(삼하 24:1)(4). 다만 여기서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고 하여 사단도 하나님의 아들들 중에 한 일원이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드라이버(Driver)와 그레이(Gray)는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들 중에 하나였을 뿐 아니라 그 계급에서 특출하거나 주도적이었다고 까지 주장한다. 물론 사단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천사였으며 그 천사의 계급에서 타락한 존재이다. 그러나 여기 그들 가운데라는 말은 많은데서 그들 중에서라기보다는 하나의 침입자를 언급하는데 쓰였다. 따라서 여기서 사단은 거기에 있을 권리가 없으며 그는 단지 그의 할 일을 물은 것뿐이다(5).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시지 않는다(약 1:13)고 했는데 왜 여기서 하나님은 욥을 시험하셨는가?
1. 하나님이 욥을 시험하신 것이 아니라 사탄이 시험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신앙의 신실성 다시 말해서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 그리고 하나님 경외와 악에서 떠난 사실만을 밝히신 것뿐이다. 그런데 그것을 트집잡고 욥의 신앙을 시험한 것은 사탄이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9절) 욥의 소유물을 치시면 그가 하나님을 욕할 것입니다” 여기서 사탄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욥을 시험하였다. 욥인들 까닭없이 하나님을 섬기겠느냐는 것이다. 여기 까닭없이를 표준 새번역에서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로 하여 그 뜻을 보다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였다. 그의 항변은 무인판매기에서 아무 것도 나오는 것이 없다면 누가 동전을 넣겠느냐는 것이었다(6).
2. 하나님이 욥을 시험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탄의 시험을 허용하셨다는 의미에서였다. 그렇지 않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죄나 악에로의 시험은 하시지 않지만 테스트로서의 시험은 하시며 욥의 경우는 이 후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욥은 이 시험에 승리하므로 사람이 어떤 특별한 이익을 떠나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그들의 환경이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까지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7). 이런 선한 목적에서 하나님께서는 욥을 시험하실 수 있으셨다.
주
1. David J.A.Clines, Job 1-20(Waco: Word, 1989), pp.18-19
2. Beacon Bible Commentary, Vol.3,(Kansas City: Beacon, 1967), p.29
3. David J.A. Clines, Ibid.,
4. Pictorial Encyclopedia of the Bible, Vol.5(Grand Rapids: Zondervan, 1976), p.282
5. Francis I. Andersen, Job(Downers Grove: IVP, 1974), p.82
6.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Old Testament(Victor Books,1985),p.720
7. Walter C. Kaiser, Jr, More Hard Sayings of the Old Testament(Downers Grove: IVP, 1992), p.187
●욥의 인품과 재산(욥기 1:1-3)
Ⅰ. 그는 인간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와 마찬가지로 감정의 지배를 받았다. 그는 Ish-즉 훌륭한 자였고 중요하고도 탁월한 자였으며, 장관이었고 권세를 지닌 자였다. 그가 살고 있던 지방은 아라비아 동네에 위치한 우스 땅이었는데, 그곳은 유브라데스강 가까이에 있었고 또 갈데아 지방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아마 그곳은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은 갈대아 우르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에서 한 선한 자를 부르셨을 때, 하나님은 "증인도 없이 홀로이 그곳을 떠나게" 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정의의 선포자"로서 다른 한 사람을 그 땅에서 일으키시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그의 남은 자를 두시며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서와 같이 각 나라에서도 그들을 택하신다(계 7:9).
욥처럼 그렇게 훌륭한 자를 가졌다는 것은 우스 땅의 특권이었다. 이 점에서 실상 아라비아는 "행복한" 땅이었다. 그리고 욥이 불모의 땅에서 그처럼 뛰어나게 훌륭했다는 것은 매우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쁠수록 그는 더욱 훌륭했다. 그의 이름은 욥(Job) 또는 이욥(Jjob)이었는데 어떤 사람들의 견해에 의하면 그것은 원수를 의미하며 "미움받는 자"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었다. 또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의하면 그것은 슬퍼하거나 번민하는 자를 의미하였다. 이처럼 그의 이름 속에 담겨져 있는 슬픔이 부요함에서 오는 그의 기쁨을 저지시켰을지도 모른다. 케이브 박사(Dr. Cave)는 그것이 "사랑"(love) 또는 "소망"(desire)을 나타내는 단어 "야압"(Jaab)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그의 부모들이 그의 출생을 얼마나 기뻐했으며 그가 얼마나 "그들이 눈에 기쁨"이 되었었는가를 암시하고 있다는 견해를 밝힌 바가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했던 때도 있다. 찬란한 아침과 함께 시작되는 날이라 할지라도 그날의 날씨가 과연 어떻게 될는지 누가 말할 수 있는가?
Ⅱ. 그는 매우 선한 사람이었고, 뛰어나게 경건했으며, 그의 이웃 사람들보다 훌륭했고,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였다." 이것은 그가 사람들에게서 어떠한 평판을 받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그는 일반적으로 정직한 자로서 간주되었다), 그의 성품이 정말 어떠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욥에 관한 하나님의 판단이므로 우리가 그것을 사실로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1. 욥은 믿음이 있는 자로서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를 섬겼고, 모든 일에서 거룩한 율례에 의해 그 자신을 다스렸다.
2. 그는 믿음에 성실했다. 그는 "순전했다." 그는 그 자신이 고백하는 것처럼 죄에서 떠난 자였다(9:20).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그는 순전함을 목표로 하며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키려 했기 때문에, 그는 겉으로 드러난 것과 같이 실재로도 선했고, 가시적인 신앙 고백을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온건했고 그의 눈도 성했다. 성실은 복음적인 면에서 온전함이다. 나는 성실함이 없는 믿음을 알지 못한다.
3. 그는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 정직했고, 그의 약속을 충실히 지켰으며, 그의 뜻을 꾸준히 밀고 나갔다. 그리고 그에게 위임된 모든 부탁에 진실했고 양심적으로 말하고 행했다(참조, 사 33:15). 비록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지만 실상은 "간사한 것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4. 그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은 그의 모든 대화를 지배하는 원리였다. 이것이 그를 순전하고 정직하게 만들었고, 하나님께 대해 성실하고 흠없게 했으며, 믿음에서는 일관성 있고 완전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그의 의무에 충실하고 꾸준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다." 그의 위엄에 대해 경외감을 품고 있었고, 그의 권위를 존중했으며 그의 진노를 두려워했다.
5. 그는 잘못된 것을 행하려는 생각을 가지기를 두려워했다. 지극한 증오와 혐오감으로써, 그리고 끊임없는 주의와 경계로서 그는 "악에서 떠났으며" 죄의 모든 모양과 그것의 접근을 피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느 5:15) 나온 태도였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잠 8:13). 그리고 사람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된다"(잠 16:6).
Ⅲ. 그는 이 세상에서 크게 형통했고, 자기의 나라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부자이면서도 경건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매우 어렵고 드문 일이긴 해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나님에게는 이러한 일까지도 가능하며 그의 은혜로 인하여 세상적인 재물에 대한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 그는 경건했고, 그의 경건은 그의 형통을 가져오게 하였다. 왜냐하면 경건함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약속 받기 때문이다. 그는 형통했고 그 형통은 그의 경건에 광채를 더해 주었고, 그처럼 선한 그에게 더욱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마련해 주었다. 그의 경건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케 해 주신 일들에 대한 감사의 보답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풍성한 은혜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더욱 기쁘게 섬겼다.
1. 그는 많은 가족들을 거느렸다. 그는 신앙 생활에 충성하였다. 그러나 은둔자가 되어 은폐된 생활을 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가장으로서 신앙 생활에 충실했다. 그의 집안이 자녀들이 가득하다는 것은 그의 형통을 보여 주는 일례였다. 왜냐하면 자녀들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그의 "상급"이기 때문이다(시 127:3).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었다(2절). 그 자녀들은 아들과 딸이 모두 있었으나 아들들이 더 많았다. 이렇게 그의 가족은 구성되었다. 자녀들은 축복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들은 사실상 축복이며, 더욱이 그들을 훌륭히 가르치며, 좋은 본이 되며, 그들을 위해 훌륭한 기도를 드리는 선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자녀들이 축복이다. 욥은 많은 자녀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거나 가혹하게 대하지 않고 매우 너그럽게 대했다(31:17 이하). 부양해야 할 가족을 많이 거느린 자들은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는 자선이 자녀들을 위해 가장 유익하게 쓰여지는 기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2. 그는 그의 가족들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가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 "소유물"은 막대했다(3절). 흔히 쓰여지는 말에 의하면 부는 "본질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영혼과 다른 세상에 있어서 그것은 그림자요, "허무한 것"에 불과하다(잠 23:5). 우리는 하늘의 지혜를 가지고서야 참다운 "재물을 얻을 수" 있다(잠 8:21). 그때는 땅에 사람들이 많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지금의 어떤 농촌 모양으로 사람들이 그 땅을 사들일 만한 자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땅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욥의 재산은 그가 차지했던 땅의 넓이로 표시되지 않았다.
(1) 그의 가축들. 즉 "양과 약대 그리고 소와 암나귀"로 표시되었다. 각 짐승의 수효가 여기에 나열되었는데, 아마 그것들은 정확한 숫자가 아닌 어림수로서 실재보다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양이 제일 먼저 언급되었는데 그것은 솔로몬이 본 바와 같다. 집안에서 가장 요긴한 가축이었기 때문이다(잠 27:23, 26, 27). "어린 양의 털은 네 옷이 되며 젖은 네 집 사람의 식물이 되느니라." 욥은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창 13:2) 은과 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겉으로 화려하게 나타내 보이기가 좋고 또 보관하기에만 합당한 물건보다는 보다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써 그들 자신들과 이웃의 재산을 평가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식물과 과일로써 먹고 살아가도록 하신 후 곧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심으로써 그를 풍족하고 크게 만들어 주셨다(창 1:28). 그러므로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관계가 여전히 계속 지속되느니 만큼(잠 9:2) 그것들이 사람의 부와 영예와 권세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보기들 가운데 하나로 지금껏 간주될 수 있다(잠 8:6).
(2) 그의 종들의 숫자에 의해 표시되었다. 그는 매우 많은 식구들과 종들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일했고 또 그의 지시를 받아 살림을 꾸려 나갔다. 이처럼 그는 명예를 지니고 있었고 또 일을 잘 해 나갔다. 그러나 이처럼 그는 늘 마음을 크게 써야만 했으며 또 일을 많이 해야만 했다. 이 세상의 허탄함을 보라. 재물이 늘어남에 따라 그것들을 지키고 돌봐 주어야 하는 사람들도 늘어나야 한다. 그리고 "먹는 자도 더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전 5:11) 한 마디로 말해서 "욥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였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자들이었다. "동방 사람들보다 풍족한" 자들은 정말 부유했던 자들이다(사 2:6 난외).
욥의 재물은 그의 지혜와 함께 욥에게 그의 나라에서 영예와 권세를 부여해 주었으며(그는 이것을 29장에서 서술해 놓고 있다), 그를 중요한 자리에 앉게 했다. 욥은 의롭고 정직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유하게 되었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 왜냐하면 정직은 가장 훌륭한 정책이며, 경건과 자비는 일반적으로 번영으로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는 큰 집안을 거느리고 있었고, 또 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항상 하나님을 경외했고 그를 예배했다. 그리고 그와 그의 집은 여호와를 섬겼다.
욥의 경건과 번영에 관한 이야기가 그의 큰 환난에 관한 이야기보다 앞에 나오고 있는데 그것은 경건과 번영이 인생의 일반적인 재앙 뿐만 아니라 특수한 재앙으로부터도 우리를 지켜 주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경건은 욥의 친구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일이 모든 사람에게 일반으로 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번영도 마찬가지로 부주의한 세상 사람들의 생각처럼 우리를 지켜 주지 못한다(사 47:8). "나는 여왕처럼 앉아 있으니 슬픔을 보지 않게 되리라" 하나 소용이 없다.
●자녀들에 대한 욥의 염려(욥기 1:4,5)
우리는 여기에서 욥의 번영과 경건에 관한 더 많은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Ⅰ. 그가 자녀들에게서 큰 위로를 얻고 있었던 일은 그의 번영을 나타내는 일례로서 지적되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세적인 위안은 빌려온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 주위에 있는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욥 자신도 그의 "자녀들이 그를 둘러 있었다"는 사실이 그가 형통한 가운데 즐겼던 가장 큰 기쁨이라고 언급하고 있다(29:5). 그들은 어떤 정해진 날이 되면 서로 돌아가면서 잔치를 베풀었다(4절). 그들은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1. 욥에게 있어서는 그의 자녀들이 성장하여 이 세상에 정착하는 것을 보는 것이 낙이었다. 그의 모든 아들은 아마도 결혼하여 분가했고, 그들에게는 각각 적당한 재산이 분배되었을 것이다. 그의 "상에 둘린 감람나무 같았던" 자식들은 이제 그들 자신들의 상으로 옮겨갔다.
2. 그들의 일이 형통하고, 각자가 배불리 먹을 뿐만 아니라, 서로 잔치를 베풀어서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은 보기가 즐거웠다. 좋은 부모들은 그들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로 그 자녀들이 부귀하고 형통하기를 원하며 그렇게 되도록 힘써 도와주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을 기뻐한다.
3. 그들이 건강하여 그들의 집에 병이 없는 것을 보는 것이 낙이었다. 왜냐하면 병은 그들의 잔치를 망치고 그것을 슬픔의 자리로 만들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4. 특히 그들이 서로 사랑 하에 하나가 되어 서로를 좋게 생각하는 가운데, 서로 분쟁이나 다툼이나 멀리하는 일 없이, 서로 부끄러워하거나 곤경을 겪는 일 없이, 자기의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서로의 것을 자유롭게 통용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형제들이 이처럼 서로 의좋게 지내는 것은 부모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며, 모든 사람의 눈에 아름답게 보인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가!"(시 133:1).
5. 아들들이 그들의 누이들에게 매우 친절하여 그들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도록 부르는 것을 보는 것이 욥을 더욱 즐겁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딸들은 초대를 받지 않으면 그런 곳에 가지 않으리 만큼 정숙했다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이들을 멸시하며 그들과 합석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그들의 즐거움을 고려하지 않는 형제들은 욥의 아들들과는 달리 잘못된 교육을 받고 잘못된 성품을 지닌 자들이다. 그들의 잔치는 매우 온건하고 고상하여 그들의 누이들도 참석하기에 좋은 자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6. 그들은 더 많은 유혹의 공격을 받게 될지도 모르고 또한 그리 미덥지도 못한 공공연한 장소에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들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우리는 욥 자신이 그들과 함께 잔치를 즐겼다는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물론 그를 초대했을 것이며, 언제 그들의 식탁에 나타나든지 간에 가장 반가운 손님이 되었을 것이다. 그 모임은 그를 멀리할 만큼 까다롭거나 심술사납거나 혈연의 정이 모자라는 그런 좌석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바실래처럼(삼하 19:35) 늙어서, 이 모든 것을 즐길 수 없었고 젊은이들끼리만 있으면 그들이 좀더 자유롭고 유쾌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이 즐기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그 오락을 하지 못하도록 제제하려고 하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젊음의 자유를 누리도록 허락 받아야 하며 젊음의 정욕을 피하도록 도움을 받아야 한다.
Ⅱ. 자녀들에 대한 그의 큰 관심은 그의 경건의 일례로서 지적되었다. 왜냐하면 상대적인 우리가 실지의 우리이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들은 그들의 자녀에게 선할 것이며, 특히 그들의 영혼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할 것이다. 자녀들의 영적인 번영을 위한 욥의 경건한 관심을 주시하자(4절).
1. 욥은 경건한 경계심을 가지고 그들을 경계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할 필요가 있고, 우리의 귀중한 자들의 유익을 위한 일이라면, 우리 자신과 그들을 경계해야 한다. 욥은 그의 자녀들을 훌륭히 교육했고 그들로부터 위로를 얻었으며, 그들에 대해 좋은 소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때보다도 잔치 날에 더욱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지나치게 쾌락을 추구하고, 먹고 마시는 일에 지극히 방종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다시 말해서 그것은 이런 뜻이다. "그들이 마음으로 무신론자적인 또는 불경스러운 생각을 즐기고 하나님과 그의 섭리를 귀하지 않게 여기며, 믿음의 일에 등한히 하였을까 함이라." 사람들은 "배부를 때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하기 쉬우며"(잠 30:9),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신 8:12 이하)라고 말하기 쉽다. 육신의 정욕에 빠지는 일보다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은 또 없다.
2. 욥은 그들의 잔치날이 끝나자 마자 그들을 엄숙한 종교 의식에 불러 모았다. 그들의 잔치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가 아니다(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때를 즐기게 하라.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그러나 잔치가 끝났을 때, 그들의 훌륭한 아버지는 그들이 언제 그런 일을 끝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과, 매일을 가치스럽게 지낼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비록 그들이 "한 주간" 동안 계속 잔치를 베풀었다 할지라도 "일 년" 내내 잔칫날로 삼아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그 밖에도 해야할 일들이 있었다. 즐거운 날을 보내는 자들은 심각한 날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욥은 그들로 하여금 엄숙한 의식을 위한 준비를 하도록 하고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허탄함을 멀리하고 믿음의 일을 위해 마음을 평정시키기 위해 그들 자신의 양심을 살피고 그들의 잔치에서 잘못된 것을 회개하도록 명했다. 이처럼 욥은 그들의 유익함을 위해 그들에 대한 그의 권위를 계속 행사했고, 그들은 각자 분가를 했을지라도 계속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했다. 여전히 그는 그 집안의 제사장이었으며, 자녀들은 그의 재산 상속에 동참하는 것보다도, 그의 기도에 동참하는 것이 더욱 귀한 일이라고 여기면서 그의 제단에 참석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은총을 줄 수는 없다(성결케 하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들은 적절한 경고와 권유로써 그들의 성별을 촉진시켜 주어야 한다. 세례식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성별된다. 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성별되어지도록 우리는 바라고 또 노력하자.
4. 욥은 그들을 위해 제물을 드렸다. 그들이 잔칫날에 혹시 범죄 했을까 우려하여 속죄를 위한 제물을 드렸고, 또한 그들이 방종으로 인해 마음이 더럽혀지고 행실이 타락하는 것을 막아 주도록, 그리고 그들의 경건과 결백을 보존해 주도록 하는 은총을 간구하기 위해 제물을 드렸다.
그래서 그는 종종 눈물고인 눈으로 쾌락의 초원을 응시했다. 그러나 들리나니 믿을 수 없는 소식뿐…… 덕은 본능이 집어삼켰고, 순결은 난파당하여 떠다니는 뱃조각이 되었구나.
-블랙모어 경-
욥은 아브라함처럼 그의 가족들을 위한 제단을 마련했다. 아마도 그는 그 위에다 매일 제물을 바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특별한 경우에 그는 한 자녀에 하나씩, "그들의 명수대로" 평소보다 더 많은 제물을 더욱 엄숙하게 드렸다. 부모들은 그들의 집안의 여러 가지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데 있어서 세밀하게 한다. "이 아이를 위해 나는 그의 특별한 기질과 재능과 상황 그대로 기도 드렸나이다." 이러한 때는 노력 뿐만 아니라 기도도 함께 곁들여야 한다.
(1) 이 제물들을 바칠 때 욥은 그의 자녀들이 오랫동안 범죄 가운데 있지 않도록 주의하는 자로서 그리고 그의 마음으로 그것을 소망하고 그것을 구하는 자로서, 일찍 일어났다.
(2) 그는 그의 자녀들이 제물을 드리는 자리에 참석하도록 만들어 그들도 그가 제물과 함께 드리는 그의 기도에 함께 참여하도록 했고, 제물을 죽이는 광경을 보고 그들이 그들의 죄를 위해 마음을 매우 겸손히 하도록 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를 위해 그 제물들은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바치는 광경을 보는 것은 결국 그들을 중보자에게 인도하기 때문이었다. 이 엄숙한 행사는 그들이 즐거운 날들을 지낸 후에 다시 엄숙해지도록 도와주었을 것이다.
5.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다. 이러한 경우가 생겼을 때에만 행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목욕한 자라도 발을 씻을 필요가 있다"(요 13:10). 회개와 믿음의 행위는 자주 되풀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주 범죄를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항상, 그리고 매일 그는 제물을 드렸고 꾸준히 헌신했으며 그것을 하루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따금씩 믿음의 일을 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정기적인 것을 행하지 않는 사실을 변명해 주지는 못한다. 하나님을 정직하게 섬기는 자들은 그를 항상 섬겨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선 사탄(욥기 1:6-12)
욥은 매우 부유하고 큰 자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지혜롭고 선한 자였다. 그리고 그는 하늘과 땅 모두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형통이라는 산은 매우 견고히 서있기 때문에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를 끔찍스러운 폭풍우를 동반한 짙은 구름이 그의 머리 위에 모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낮은 세상에 있는 동안 우리 스스로가 폭풍우를 피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의 환난이 보이는 이 세상에서 그를 어떻게 엄습해 오고 얼마나 놀라게 했는가를 읽기 전에, 그 환난이 영들의 세계에서 어떻게 합의되고 있는가를 읽게 된다. 즉, 욥의 경건 때문에 그를 매우 적대시한 마귀는 그를 괴롭힐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여 그 허락을 얻었다.
이 구절에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대화가 미가야의 이야기처럼(왕상 22:19 이하) 우화적이며, 선한 사람을 대적하는 마귀의 악의를 나타내 주매, 밑바닥에 악의가 깔려 있는 그 거룩한 저지와 규제를 제시하기 위해 풍유적인 용법을 사용하였다고 해서 전반적인 욥의 이야기에 대한 진실성을 결코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오직 그것은 이 땅의 모든 일들은 보이지 않는 세상에 의해 영향받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크게 시사해 줄 뿐이다. 그 세상은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고 어둠에 속한 세상이지만 우리는 그 세상 앞에 매우 적나라하게 놓여져 있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하나님의 아들들 가운데 있는 사탄(6절). 즉 하나님, 인간, 모든 선한 것의 "적"(사탄은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을 볼 수 있다. 그는 와서 "여호와 앞에 선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임에 끼어들었다.
1. 이것은 땅 위에 있는 성도들의 모임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족장 시대에는 믿음을 고백한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렀다(창 6:2). 그 당시 그들은 종교적인 회합을 가졌었고, 그 회합을 위해 시간을 정했다. 왕이신 하나님은 그의 손님들을 보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은 모든 참석자들을 둘러 보셨다. 그러나 낙원에도 뱀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들 가운데 사탄이 있었다. 그들이 함께 모였을 때 그는 그들을 혼란시키고 교란시키기 위해 그들 가운데 있었고 또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그들의 오른 편에 섰다. "여호와께서 너 사탄을 책망하시도다."
2. 또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의 모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38:7). 그들은 세상에서의 그들의 활동에 대해 말하고 새로운 지시를 받기 위해서 모였다. 사탄은 원래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오루씨퍼(계명성-사탄)여 너는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는가!(사 14:12) 사탄은 더 이상 그 회중에 나설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죄수처럼 소환되었거나 또는 그의 불법침입이 잠시 묵인되었을 것이다.
Ⅱ. 그가 어떻게 여기에 왔는가 하는 심문이 있었다(7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물으셨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 하나님은 그가 어디서 왔는가를 잘 알고 계셨으며, 그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곳에 왔다는 것도 알고 계셨다. 천사들은 선한 일을 하려고 오는 것같이 그는 나쁜 일을 하기 위해 허락을 받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에게 어떤 답변을 요구하심으로써 그가 조사를 받고 있으며 통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하셨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
1.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그가 여기 왔는지 의아하게 여기시며 물으셨다.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사탄도 하나님의 아들들 중에 있느냐? 그렇다. 왜냐하면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고후 11:13), 그들 중의 하나로 보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마귀의 자식이 되어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임에 끼어들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의 정체가 사람들에게도 발각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도전을 그는 받게 된다. "친구여 네가 어찌하여 이곳에 왔느냐?"
2. 또는 그가 여기에 오기 전에 무엇을 했는가를 질문하셨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 하는 이 질문은 하나님 앞에 나온 나머지 모든 아들들에게도 물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는 모든 장소와 길에 대해 하나님께 해명해야 한다.
Ⅲ. 사탄은 그 자신과 그의 여행에 대해 말했다. 나는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1. 그는 어떤 선한 일을 행했노라고 가장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익하게 섬기고 구원의 후사들을 위해 일하며 그의 명을 완수하고서 돌아와 "여호와 앞에선" 하나님의 아들들과 같은 말을 그 자신에 대해 할 수 없었다.
2. 그는 그가 해로운 일을 행했다는 사실을 영혼을 속이고 멸망시킴으로써 사람들을 하나님과 이간시켰다는 사실을 자백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내가 악을 행치 않았나이다"(잠 30:20). "주의 종은 아무 데도 가지 아니 하였나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땅을 두로 돌아 다녀왔다"는 말 속에는 그가 그에게 허용된 범위 내에 있었고, 그 한계를 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용이 땅으로 내어 쫓겼을지라도"(계 12:9) 아직 고문대에 감금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땅에 있는 한 우리가 사탄의 손이 닿는 곳에 있다. 그리고 매우 교묘하고 민첩하며 부지런하게 땅의 모든 구석을 꿰뚫어 보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그의 유혹을 안전히 피할 수는 없다.
3.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의 성품을 어느 정도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1) 아마도 그는 마치 "이 세상의 왕"이 된 것처럼, 마치 "천하만국과 그 영광"이 그의 것이므로(눅 4:6) 그 자신의 영토를 한바퀴 돌아보고 온 것처럼, 교만하게 그리고 매우 당당하게 그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2) 아마도 그는 짜증스럽고 불만스럽게 그것을 말했을 것이다. 그는 이리 저리 걸어 다녔으나 아무런 안식도 발견할 수 없었으며, 그는 놋땅의 가인처럼 도망자나 부랑자 같았을 것이다.
(3) 아마도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여기 저기 다니면서" 또는(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땅을 두루 살피러 다니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것은 실상 악을 행할 기회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실상 누구를 삼킬 수 있을 것인가를 살피러 돌아다녔다. 그러므로 우리는 건실한 마음으로 경계하고 있어야 한다.
Ⅳ. 하나님께서 욥에 관하여 사탄에게 질문하셨다(8절).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우리가 매우 사랑하는 친구가 있는 먼 곳으로부터 온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곧잘 "당신이 그곳에 있었군요. 혹시 그곳에 있는 내 친구를 보셨습니까?"라고 묻는다. 다음을 관찰하라.
1. 하나님께서는 욥에 대해 그를 매우 높여서 말씀하셨다. "그는 내 종이다." 선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봉사를 영예롭게 기억하시기를 즐기신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과 칭예와"(렘 13:11) "영광의 면류관"(사 62:3)이 된다. "거기에 내 종 욥이 있는데, 그와 같은 자가 없느니라. 이 세상의 모든 방백과 군주들 중에 내가 그와 같이 귀하게 여길 만한 자가 없느니라. 그와 같이 거룩한 자 하나가 그들 모두보다 낫도다. 정직함과 경건함에 있어서 그같은 자가 없느니라. 선을 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나 그는 그들 모두 보다 낫도다. 이스라엘에서도 그만한 믿음을 가진 자는 발견하기 어렵도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오랜 후에 가나안 여인과 백부장을 칭찬하셨는데, 그들은 모두 욥처럼 그 나라의 이방인들이었다. 거룩한 자는 하나님을 찬양한다-"신들 가운데 주 같은 이가 누구뇨?"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찬양하기를 즐기신다-"백성들 가운데 이스라엘 같은 자가 누구냐?" 그러나 여기 이 땅, 이 불완전한 나라에는 "욥과 같은 자"가 없었다. 하늘에 있는 자들은 실상 그를 매우 능가한다. 하늘 나라에 있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욥보다는 크다. 그러나 "그 같은 자가 세상에는 없다." 그 땅에는 그 같은 자가 없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들은 그 나라의 영광이다.
2. 하나님은 정확하게 욥의 성품을 사탄에게 설명하셨다. "네가 내 종 욥을 마음에 두었느냐?"
(1) 이 말씀에는 사악한 영들의 변절과 비참상을 한결 더 무겁게 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 "너는 그와 얼마나 다른가!"
거룩한 자들의 거룩함과 행복은 마귀와 마귀의 자녀들을 수치스럽게 하고 괴롭게 만든다.
(2) 마귀가 이 세상의 세력을 뻗치고 있는 것을 자랑하는 듯한 태도에 대답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 사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곳을 여기 저기 다녀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나의 것입니다. 모든 육체들이 그들의 길을 더럽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평온하여 죄 속에서 정온하더이다"(슥 1:10, 11).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니, 천만에, 욥은 나의 충성된 종이니라." 사단은 우쭐거릴는지 모르나 승리하지는 못한다.
(3) 거기에는 사탄의 고발을 앞질러 말씀하시려는 뜻이 있었다. 하나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도 같았다. "사탄아 나는 네 일을 알고 있다. 너는 욥에게 불리한 보고를 하기 위해 왔다. 그러나 네가 그를 유의하여 보았느냐? 의심할 나위가 없는 그의 성품이 너로 거짓말하도록 만들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은 그의 종들을 대적하는 마귀의 모든 악의와 그 수단을 알고 계시다. 그리고 우리는 고발 당하기 전에 이미 우리를 위해 나서기로 준비가 되어있는 대변자를 가지고 있다.
Ⅴ. 욥에 대한 하나님의 찬사에 대답하기 위해 마귀는 욥을 헐뜯는 비열한 수단을 채택하였다. 그는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욥이 믿음에 대한 대가를 바라고 있으므로 위선자라는 사실을 암시했다(9절).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 욥을 칭찬하신 분이 하나님 자신이었다고 하더라도 마귀는 욥의 칭찬을 참고 들을 수가 없었다. 사울이나(삼상 18:5 이하) 바리새인들(마 21:15)과 같이 자기들 외에 다른 사람들이 칭찬 받는 것을 참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이 얻고 있는 정당한 명성을 시기하는 자들은 마귀와 같은 자들이다.
2. 그는 욥을 대적할 구실을 찾는 일에 있어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그의 나쁜 점을 들어 그를 고발할 수가 없었으므로, 그가 행하는 선에는 다른 어떤 목적이 있다하여 그를 비난했다. 그의 노한 친구들이 열띤 논쟁 속에서 그를 책망하던 그런 사실이(15:4; 22:5) 반만이라도 진실이라면 사탄은 틀림없이 그를 대적하기 위해 지금 그런 사실들을 들추어 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진술될 만한 것들이 못되었다.
3. 그러므로 사탄은 욥이 위선자라는 것을 단언하지 않고, 단지 "그가 그렇지 않습니까?" 하고 교활하게 묻기만 하였다. 사실이라고 생각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을 때에는 단지 "그렇지 않느냐"고 묻는 방법으로써 그런 사실을 암시하는 것은 비방자들과 아첨하는 자들과 험담군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용납하신 자들이 마귀와 그의 부하들에 의해 부당하게 비방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만일 그들이 달리 비난받을 만한 점이 없으면 사탄이 욥을 비난하듯이 그들을 위선자라고 비난하기가 쉽다. 그런 때 그들은 그들 자신을 밝힐 방법이 없다. 그들은 참을성 있게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위선자가 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런 이유없이 우리가 위선자라고 불리우고 그렇게 간주되는 것은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4. 사탄은 욥이 위선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가 돈만 바라는 자라고 부당하게 비난하였다. 욥이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매우 옳았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경건은 큰 소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건이 증명하듯이 욥이 경건을 통해 이러한 것들을 얻을 수 없다면,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옳지 않았다. 욥의 친구들은 그가 큰 환난을 당한다는 이유로, 그리고 사탄은 그가 크게 형통한다는 이유로, 그를 위선자라고 비난했다. 비방할 구실을 찾는 자들에게는 그 구실을 찾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우리의 순종을 통해 영원한 보답을 바라본다고 해서 그것은 보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 속에서 현세적인 유익을 목표로 하고 거기에 아첨하는 것은 창조주보다도 창조물을 섬기는 영적인 우상 숭배이며, 그것은 결국 치명적인 배신을 초래한다. 사람은 오랫동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Ⅵ. 욥의 형통에 대해 사탄이 이를 원망하였다(10절).
1. 하나님께서 욥을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가 살펴보자. 하나님은 욥을 보호하셨고, 그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소유물을
지켜 주시기 위해 그 주위를 산울로 두르셨다.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들은 그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 거룩한 은혜는 그들의 영적인 생명을 산울로 두르며, 거룩한 섭리는 그들의 자연적인 생명을 두르므로 그들은 안전하고 평온하다.
하나님은 게으르거나 불의한 가운데 있는 그가 아니라(마귀는 그것으로 그를 고발할 수는 없었다), 정직하고 근면한 가운데 있는 그를 형통케 하셨다.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었다면 그의 손은 그처럼 강하지 못할 것이며, 그처럼 재간이 많지 못할 것이고, 그 하는 바가 형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때 "그 소유물로 땅에 충만케 하신다." 주님의 축복은 사람들을 부요케 만드신다. 사탄도 그 점을 인정하고 있다.
2. 마귀는 거기에서 무엇을 주시하고 있는가 살펴보자. 그리고 그를 불리하게 하기 위해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가 살펴보자. 마귀는 그것을 매우 분하게 여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주께서 그를 산울로 두르신 것을 보았습니다." 마치 마귀는 그를 해치기 위해 단 하나의 빈틈이라도 찾아내어 그 안에 들어가 그를 해칠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 그 주위를 돌아다닌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실망했다. 그것은 완전한 울타리였기 때문이다. "그 악한 자는 그것을 보고 상심했다." 그리고 욥이 하나님을 섬긴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를 형통케 하신 때문이라는 논쟁을 벌였다. "그를 승진시킨 정부에게 그가 성실한 태도를 취하고 그에게 그처럼 훌륭한 보답을 준 주인을 섬기는 것은 별로 칭찬할 만한 일이 못됩니다"라는 것이 마귀의 태도였다.
Ⅶ. 사탄이 만일 그가 욥의 재산을 몰수하도록 하는 허락을 얻기만 한다면 욥이 위선자라는 것과 욥의 믿음이 대가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11절). "그것을 이렇게 되게 해보십시오. 그를 가난하게 만드시고 그에게 얼굴을 찌푸리시며, 주의 손으로 그를 치시고 그의 믿음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십시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으시면 그가 어떠한 자인가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가 정녕 주를 대면하여 욕하지 아니하면, 그 후로는 결코 나를 믿지 마시고,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하시며 거짓 고발자라고 하십시오. 만일 그가 주를 욕하지 않으면 나를 멸망케 하소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그 저주를 보충하고 있다. 마귀는 그것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지만 우리 시대의 불경스런 맹세자들은 건방지고 대담하게 그 저주를 발설한다.
1. 그는 욥을 시험하고자 하는 그 환난에 대해 얼마나 가볍게 말하고 있는가 보라. "단지 그의 소유물을 치기만 하소서. 단지 그것으로 시작하소서. 단지 그를 가난하게 만드시겠다고 협박만 하시옵소서. 조그마한 고난도 그의 말투를 변하게 할 것입니다."
2. 그는 그것이 욥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 얼마나 심술궂게 말하고 있는가 보라. "그는 믿음을 저버릴 뿐만 아니라, 공공연하게 도전할 것입니다. 그는 주께 가혹하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기까지 하리이다." 저주(curse)로 번역된 단어는 barac인데 그것은 일반적으로 그리고 어원상 "축복"(bless)과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저주한다는 것은 매우 불경스런 것으로 보인다. 그 단어를 그러한 저주라는 의미로 그것을 풀이해야 하는 경우가 열왕기 상(21:10-13)에서 분명히 나타나있는데, 거기에 보면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단어가 나봇이 힐책을 받게 된 죄악으로 사용되었다.
(1) 아마도 사탄은 욥이 만일 가난하게 되면 그의 믿음을 버릴 것이고, 따라서 그의 신앙 고백도 반박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박식한 그의 저서 <심령의 산>에서 관찰한 것과 같이) 사탄은 인간의 자손들 가운데에서 그 자신의 세계적인 제국을 이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나님은 욥이 그 당시의 가장 훌륭한 인간이라는 것을 선포하셨다. 그런데 이제 만일 사탄이 그가 위선자임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사람들 가운데 충성스런 종을 하나도 가지고 계시지 못하며, 세상에는 참되고 진실된 경건같은 것은 없으며, 믿음은 모두 허위이고 "사실상"(de facto) 사탄이 모든 인류를 다스리는 왕이라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는 그에게 속한 자를 알고 계시며" 결코 속임을 당하지 아니하신다.
(2) 그러나 욥이 그의 믿음을 지킨다하더라도 사탄은 그가 심하게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만족을 얻으려 했을 것이다. 그는 선한 자들을 미워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형통함을 기뻐하시는" 것과는 달리 그들의 슬픔을 기뻐한다.
Ⅷ. 하나님께서는 욥의 성실함을 시험하시기 위해 사탄으로 하여금 욥을 괴롭게 하도록 허락하셨다. 사탄은 하나님이 직접 그렇게 행하시기를 원했다. "이제 주의 손을 대소서."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을 허용하셨다(12절).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네가 할 수 있는대로 그를 괴롭혀 보아라."
1.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이러한 허락을 내리시는 것은 "그의 애인의 영혼"을 원수의 손에 "붙이고" 양을 사자에게 붙이는 것과 같이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해, 욥을 영예롭게 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고, 모든 세대를 통해 환난 당하는 그의 백성들을 격려하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 즉 유익한 전례가 되도록 하기 위해 심사숙고 끝에 이러한 경우를 만드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베드로가 체질을 받도록 하셨던 것처럼, 욥도 시험을 당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시어(눅 22:32) 그것이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위한 시련이 되도록 하셨다(벧전 1:7).
2. 하나님께서 마귀를 "쇠사슬"에 그것도 큰 쇠사슬에 묶어 두고 계시다는(계 20:1)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고, 허락을 얻지 않고서는 욥을 괴롭힐 수가 없었으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 이외의 일은 할 수 없었다.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그의 몸에는 상관말고 오직 그의 재산만 간섭하라." 마귀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제한되어 있다. 그는 스스로 그에게 오는 자들 이외에는 그 어느 사람도 타락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위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것" 이외에는 사람을 괴롭힐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Ⅸ.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임에서 떠났다. 그들이 해산하기도 전에 사탄은(가인처럼, 창 4:16) "여호와 앞에서" 물러났다. 그는(도엑처럼, 삼상 21:7) 그의 사악한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지체하려 하지 않았다.
1. 그는 물러가면서 그가 노리던 목적이 성취된 것을 기뻐했고 선한 자에게 재앙을 끼칠 수 있도록 허락을 얻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2. 사탄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곧 그의 계획을 수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제 물러가서 이리저리 가거나 어슬렁거리면서 다니지 않고, 그의 의무를 조심성스럽게 지키고 있으며 그 일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욥에게로 곧장 달려 갔다. 우리들과 관련이 있는 선한 영과 악한 영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욥에게 닥친 재앙(욥기 1:13-19)
우리는 여기에서 욥의 환난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Ⅰ. 사탄은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기 시작하던 바로 그날에 그에게 재앙을 가져다 주었다(13절). 그곳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융숭한 대우를 받았고(우리는 그렇게 추측할 수 있다), 그 연회는 가장 풍요했고 풍성했다. 이제 그들이 이 자리를 다시 마련하였을 때 그 온 가족들은 물론 완전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모두 평온한 상태에서 전혀 환난을 감지하고 있지 않았다. 이 때를 사단은 택했는데 그것은 이러한 때에 오는 환난이 더욱 슬픈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내게 떨림이 되도다"(사 21:4).
Ⅱ. 그 재앙들은 일시에 그에게 엄습했다. 한 사자가 불행한 소식을 전할 때 또 다른 사자가 왔고, 그가 이야기를 끝내기도 전에 셋째, 넷째 사자가 곧 뒤따라 왔다. 이처럼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그 일을 명했다.
1. 그것은 그의 환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욥을 보다 더 불쾌하게 여기시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섭리는 옳든 그르든 욥을 멸망시키고 그에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기로 한 것처럼 나타내 보임으로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에 격분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2. 그것은 또 욥이 그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고 반성해 보아서 그 자신을 설득시켜 마음을 너그럽게 하고 복종할 여유를 가지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복잡한 환난에 의해 위축당하고 압도당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만일 그가 잠시 쉴 만한 여유를 가지지 못한다면, 그는 그의 하나님을 저주하기 쉬울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여러 가지의 유혹으로 인해 때때로 침울해진다. 태산을 넘으면 또 태산이 있다. 파도와 풍랑은 연이어 일어난다. 그러므로 한 가지 환난을 당했을 때는 또 다른 환난을 대비하도록 하자. 우리가 이미 많은 고배를 마셨다 할지라도,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한, 우리는 우리 몫을 다 마셨으며 따라서 우리에게서 다 지나갔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Ⅲ. 그 환난은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아 갔고, 그의 즐거움을 완전히 끝장나게 했다. 그가 잃은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려 주는 품목들은 앞에 열거되어 있는 그의 소유물과 맞먹고 있다.
1. 그는 "소가 오백겨리"였고, "암나귀가 오백"이었으며, 그것들을 돌보기에 충분한 수효의 종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 버렸다(14, 15절). 여기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야만 했다.
(1) 그것은 그의 종들이 부주의한 때문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는 그의 종들에게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소는" 놀지 않고 "밭을 갈고" 있었으며, 나귀는 길을 잃거나 부랑아들처럼 충돌함이 없이 종들의 감시 하에 "그 곁에서 풀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듯이 그 곁을 지나는 사람들은 그들을 축복하면서 "하나님께서 밭 갈기를 빨리하게 하시는도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아무리 신중하고 조심성 있으며 근면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환난을 당하지 않도록 해 줄 수 없으며, 대체로 부주의와 태만에서 생기는 그 환난으로부터도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없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시지 아니하시면" 아무리 깨어 있을지라도 "파수군의 파수가 헛되도다." 그러나 우리가 그릇된 길을 가지 않고 우리의 의무를 성실히 행하는 중에 환난을 당했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2) 그것은 그의 이웃인 스바 사람들의 사악함으로 인해 일어났다. 아마도 그들은 약탈과 노략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강도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소와 암나귀들을 빼앗아 갔고, 그들을 방어하기 위해 충성스럽고 용감하게 최선을 다했던 종들을 살해했다. 그리고 "한 사람만 피했는데," 그것은 그에게나 그의 주인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한 것이 아니고 욥이 서서히 전해지는 풍문으로 듣기 전에 한 목격자에 의해 그것을 분명히 알도록 하여 주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욥이나 그의 종들이 스바 사람들로 하여금 이렇게 기습하도록 그들을 노하게 하지나 않았겠는가를 의심할 필요가 없다. 사탄이 그들의 마음 속에 그런 일을 지금 행하도록 불어넣어 주어 이중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은 이를 통해 욥이 괴로움을 당하게 하고, 그들이 죄를 범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탄이 그런 악을 행할 수 있는 허락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었을 때, 그는 그런 일을 행하는 일에 그의 도구가 되어 줄 악랄한 인간들을 얻는데 힘들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기 때문이다.
2. 그는 "양이 칠천"이었고, 목자들이 그것들을 지켰다. 그리고 벼락에 의해 그는 이들을 모두 한꺼번에 잃어버렸다(16절). 욥은 아마도 그의 마음으로 그 스바 사람들을 비난하고 그들의 불의와 가혹함에 대결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곧 다음 소식은 그로 하여금 위를 쳐다보도록 만들어 주었다.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왔나이다." 천둥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면 번개는 그의 불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이상한 번개였다. 아주 곧바로 욥에게 떨어졌다. 그리하여 모든 그의 양과 목자들은 죽임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 불에 의해 단번에 불살라졌고, 단지 한 명의 목자만이 살아남아 불쌍한 욥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욥이 하나님을 저주하고 믿음을 버리도록 만들려고 노리던 마귀는 이러한 시련을 매우 교묘하게 또한 차례대로 조종해 나갔다.
(1) 욥의 양들은 특별히 그가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려고 했던 것인데, 욥은 그것들을 모두 빼앗겼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헌물에 노하시어 그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마련해 놓은 바로 그것들을 통해 그를 벌하시려는 것 같았다. 하늘과 땅을 이간시키기 위해 사탄은 욥을 하나님께 나쁜 종으로 그릇된 보고를 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여기에서 욥에게 그가 그처럼 많은 번제를 드렸건만 그 양 떼들을 보호해 주시지 않는 하나님은 가혹한 주인이라고 그릇되게 나타내 보여 주었다. 이것은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하도록 유혹할 수도 있었다.
(2) 사자는 번개를 하나님의 불이라 불렀다(그것은 매우 순수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탄은 그것을 그렇게 부름으로써 욥의 마음에 이러한 생각, 즉, 하나님께서 "그의 대적이 되시어 그를 치신다"는 생각을 불어넣어 주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바 사람들의 어떠한 침입보다 더욱 그를 슬프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한다"는 것을 고백했다(31:23). 그렇다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직접 내려진 이 멸망의 소식은 그를 얼마나 두렵게 했겠는가! 하늘로부터의 불이 제단 위에 있는 양을 불살랐다면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총의 표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풀밭에 있는 양들을 불사른 불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징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돔이 불탄 이후로 그러한 일은 없었다.
3. 그는 "약대가 삼 천"이었고, 그것을 돌보는 종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갈대아 사람들에게 의해 한꺼번에 그들을 모두 잃었다. 갈대아 사람들의 세 무리가 와서 그것들을 끌고 갔고 종들을 죽였다(17절). 만일 그들의 의무를 충실히 행하고 있던 욥의 정직한 종들에게 떨어졌던 하나님의 불이 악한 일을 행하던 스바와 갈대아 강도들에게 떨어졌다면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심판은 큰 산과 같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의 길이 형통하고 그들이 노획물을 가져가는 반면에 의롭고 선한 자들이 갑자기 끊어짐을 당할 때, 하나님의 의는 매우 깊어서 우리가 그 깊이를 잴 수가 없다(시 36:6).
4. 그의 가장 귀하고도 중한 소유물은 열 자녀 들이었다. 이제 마지막 비극을 알려주는 소식이 그에게 동시에 전해졌는데 그것은 그의 자녀들이 잔치를 베풀고 있던 집이 무너지자 그의 자녀들이 그 속에 파묻혀 죽었으며, 그 소식을 전하러 온 하인만을 한 사람 제외하고는 그들을 시중들던 종들도 모두 죽었다는 것이었다(18, 19절). 이것은 욥의 가장 큰 아픔이며 그에게 치명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므로 마귀는 그것을 맨 마지막까지 보류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다른 소식들이 그를 격노케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 소식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반드시 저주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자손은 우리들의 분신이다. 그들과 헤어지는 것은 매우 가혹한 일이며, 그것은 선한 자의 심금을 울린다. 그러나 욥이 오랫동안 그의 근심과 동시에 희망이 되었던 자녀들을 한꺼번에 잃게 된 것은 그에게 골수에까지 미치는 한을 주었을 것이다.
(1) 그들은 모두 함께 죽었고, 그 중에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다윗은 지혜롭고 선한 자였지만 한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서 매우 상심했던 일이 있다. 하물며 그들 모두를 한꺼번에 잃고 삽시간에 자식이 없는 몸이 된 불쌍한 욥은 어떻게 그것을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2) 그들은 갑자기 죽었다. 그들이 어떤 지병으로 죽었다면, 욥은 그들의 죽음을 예상하고 이별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경고도 없이 그에게 엄습해 왔다.
(3) 그들은 잔치를 베풀며 즐겁게 지내던 중에 죽었다. 만일 그들이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죽었다면 욥은 좀더 잘 그것을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들의 피가 그들의 "제물들"과 섞였다면, 그 죽음이 그들에게 좋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고 바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그들의 잔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라고 염려했던 일, 즉 그들의 머리가 과음과 과식으로 포만되어 있을 때, 밤의 도적처럼 그날이 그들도 모르게 임하지 않을까 하고 염려했던 일이 일어났다. 그가 항상 그의 자녀들의 영혼에 대해 매우 지극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들이 지금은 그가 "그들의 명수대로" 바치던 제물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의 죽음은 그를 더욱 상심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일들이 모든 사람에게 얼마나 똑같이 임하는가 보라. 욥이 그의 자녀들을 위해 아버지로서 언제나 간구하였으며, 그들도 서로 사랑하며 살았으나 이처럼 예기치 않았던 죽음을 맞게 되었다.
(4) 그들은 "공중의 권세잡은"(엡 2:2) 마귀가 일으키는 바람에 의해 죽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손에 의한 것으로 그리고 그의 진노의 표징으로 간주되었다. 빌닷도 그것을 그렇게 해석하였다(8:4).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느니라."
(5) 욥이 모든 것들을 잃었으므로 그들의 위로가 욥에게 가장 필요했을 때 그들은 죽임을 당했다. 이처럼 모든 피조물은 하잘 것 없는 안위자들이다.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는 항상 어려운 때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욥의 슬픔과 굴복(욥기 1:20-22)
마귀는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가 욥을 치도록 허락을 받은 그 모든 일을 행했다. 마귀는 욥이 가진 모든 것을 쳤고, 증인이 있는 곳에서 그것을 쳤다. 떠오르는 태양이 동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부유한 자로 보았던 그가 밤이 되기 전에 속담거리가 될 만큼 가난해졌다. 만일 사탄이 암시한 대로 그가 믿음을 가졌던 중요한 이유가 그의 재물에 있었다면, 이제 그가 그의 재물을 잃었으니 만큼 그는 분명히 믿음도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에서 환난 중에도 경건을 잃지 않는 욥의 태도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 마귀가 거짓말쟁이며 욥이 정직한 자라는 것을 충분히 입증해 주고 있다.
Ⅰ. 그는 고통 중에서도 인간다웁게 처신했다. 즉 목석같이 무감각하거나 감정이 없이 행하지 않았으며, 그의 자녀와 종들의 죽음에 대해 무감정하거나 마음에 흔들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20절) 그는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었다." 이것은 큰 슬픔을 나타내는 표현으로서 그가 그를 치신 주님의 손을 깨달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무례한 일을 범하거나 과도한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는 기절하지 않았고, 싸움에 나서는 용사처럼 일어섰다. 그는 더위 때문에 옷을 벗어젖힌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 관습에 순응하여 매우 슬픈 가운데 겉옷을 찢어 버렸다. 그는 격렬하게 머리를 쥐어 뜯지 않고, 신중히 그의 머리를 밀었다. 이 모든 것에 의해 그는 이런 진통 속에서도 절제를 지키고 용감히 자제하며 그의 영혼을 안식시키려고 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욥이 그의 감정을 나타내기 시작한 때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의 자녀들의 죽음을 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일어나 그의 겉옷을 찢었다.
세상적이며 믿음이 없는 자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졌으니 그것을 먹을 입들도 없어진 것은 참 잘된 일이다. 이제 나누어 줄 것도 없는데 자식들도 없으니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욥은 더 귀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만일 하나님의 섭리가 그의 자녀들을 남겨 두었다면 비록 그들을 위해 줄 것은 거의 아니, 아무 것도 없었을지라도 감사드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Jehovah jireh-즉 주께서 마련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유대 사람들이 불경한 것을 들었을 때에 그들의 옷을 찢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유혹하기 위해 이제 사탄이 그의 마음에 던진 불경한 생각에 대해 거룩한 분노를 품으면서 그의 옷을 찢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Ⅱ. 그는 그의 환난 속에서도 지혜롭고 선한 자와 같이, 처신하였고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외적인 환난에 의한 악에서는 물론 죄의 "악에서 떠난 자"처럼 처신했다.
1. 욥은 하나님의 손 아래 그 자신을 낮추었으며, 어찌하여 풍성해지고 또 빈곤해지는 가를 아는 자로서,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했다. 하나님께서 울고 슬퍼하도록 명하셨을 때 그는 울고 애통해 했으며,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그 자신을 티끌만도 못한 자로 여겨 그의 "불의의 보응을 받아들이면서" 죄를 참회하고, 하나님의 뜻에 참을성 있게 복종하는 자로서 "땅에 엎드렸다." 이것으로 그는 그의 신실함을 나타내 보였다. "마음이 사곡한 자들은 하나님께 속박을 받을지라도 도우심을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36:13). 이렇게 함으로써 욥은 이 환난에 의해 오히려 도움을 얻을 준비를 하였다. 도대체 아무런 느낌이 없는 우환을 우리는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겠는가?
2. 욥은 이 사건으로 인해 그 자신의 영혼의 소유물을 빼앗기거나 방해받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숙고함으로써 스스로를 평정시켰다. 그는 인생의 일반적 상태를 추론하고, 그것을 그 자신에게 적용시켜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다른 사람들처럼)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어린아이가 아프거나 지쳤을 때 그 어머니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어머니의 무릎인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의 근원은 "흙이니" 우리가 퇴장할 때에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전 12:7), 우리의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것으로 지으심을 입었다(33:6).
사도 바울은 디모데 전서 6장 17절에서 욥의 이 일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무 물건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우리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얻으나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남겨 주어야 함이라. 우리는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옷도 안 입고 무기력하고 힘도 없이 맨몸으로 이 세상에 왔다. 다른 생물이나 다름없이 헐벗고 무방비된 상태로 온 것이다. 우리가 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앞에서 우리로 하여금 매우 수치스럽게도 알몸이 되게 했다. 우리는 또한 적신 곧, 맨몸으로 이 세상을 떠난다. 육신은 그러하나, 우리의 성별된 영혼은 옷을 입고 간다(고후 5:3). 죽음은 우리의 모든 기쁨을 빼앗아 간다. 옷은 죽을 육신을 따뜻하게 하거나 돋보이게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생각은 모든 것을 잃은 욥을 잠잠케 했다.
(1) 그는 단지 제일 처음의 상태로 돌아갔을 뿐이다. 그는 그 자신을 단지 적신으로 간주했다. 그 자신이 불구가 되거나 상처를 입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본래의 그 자신이었고, 그 자신 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그의 제일 처음 상태로 되돌아온 것 뿐이었다. Nemo tam pauper potes esse quam natus est-즉, 아무도 태어날 때의 상태만큼 가난해 질 수는 없다. 우리가 망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해를 당하거나 손상을 입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태어났을 때의 그 상태에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2) 그는 단지 그가 마지막에 임해야 할 상태에 처한 것 뿐이다. 그리고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빨리 옷을 벗었을 뿐이다. 아니, 오히려 짐을 벗었을 뿐이다. 우리가 잠자리에 들기 훨씬 전에 옷을 벗는다면 어느 정도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잠자리에 들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그 불편을 좀 더 잘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
3.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리고 이러한 때에 거룩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큰 존경과 그 처분에 대한 온유한 복종을 나타냈다. 우리는 욥이 이처럼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을 기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록 그가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의 결백함을 시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귀는 욥이 이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욥은 그를 축복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이 정직한 자임을 입증했다.
(1) 그는 이전에 즐겼던 은혜 속에서 그리고 지금 그가 겪고 있는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을 인정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이시다." 우리도 거룩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해야 한다.
[1] 우리의 모든 즐거움 속에서 이를 인정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의 존재를 부여하시며 우리에게 재물을 주셨다. 우리를 부요케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재주나 근면함이 아니고, 우리들의 관심과 노력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셨고, 우리를 위해 피조물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우리 몫을 하사하셨다.
[2] 우리의 모든 고난 속에서 이를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셨던 것을 빼앗아 가시기도 하신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것을 가지시고 그가 원하시는 대로 할 수 없겠는가? 욥이 어떻게 구체적인 방편들 너머를 바라보며 만물의 원인이 되시는 하나님 자신을 주목하는가를 보라. 그는 "주께서 주셨고 스바 사람과 갈대아 사람이 빼앗아 갔으며, 하나님께서 나를 부요케 하셨고 마귀가 나를 궁핍케 했다"고 말하지 않고 "주신 자가 취해가셨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즉 하나님께서 그것을 행하셨기 때문에 그는 벙어리가 되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주신 이가 그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취하여 가실 수도 있다. 세네카(Seneca)는 Abstulit, sed et dedit-즉 그가 빼앗기도 하셨지만, 주시기도 하셨다 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에픽티터스(Epictetus)에는 이런 훌륭한 말을 했다(Cap 15). "네가 어떤 즐거움을 빼앗겼을 때, 예를 들어서 자식을 잃었다던가 또는 재산의 일부를 잃었을 때 내가 그것을 잃었다(apwlesa auto)고 말하지 말고 내가 그것을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다(apedwka)고 말하라. 그러나 너는 이의를 제기하면서 나를 탈취해간 자는 악한 자이다. (kakoj o afelomenoj)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준 자가 자기 손으로 준 것을 회수해 간들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tidesoi melei)
(2) 그는 이 모든 경우에서 하나님을 경배했다.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그는 엎드려 경배했다. 환난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믿음의 일을 떠나지 말고 더욱 열심히 행해야 한다. 슬프다고 해서 씨뿌리기를 중지하거나, 예배드리기를 중지해서는 안 된다. 그는 환난 중에서 하나님의 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주시했다. 그리고 거기에 영광을 돌렸다.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그는 예전과 똑같이 하나님을 위대하고 선하신 분으로 생각하였으며, 전처럼 부지런히 그를 찬송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실 때는 물론, 빼앗으실 때에도 하나님을 찬송할 마음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는 "인자와 공의를 찬송해야" 한다(시 101:1).
[1] 욥은 지금은 비록 빼앗기긴 했지만 받았던 것에 대해 하나님께 찬송을 돌렸다. 우리의 즐거움이 우리에게서 떠나 갔을 때, 우리는 우리가 그것들을 전에 가졌었고 우리가 누릴 만한 기간보다 더 오랫동안 그 즐거움을 누렸던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2] 아니 욥은 빼앗긴 것을 두고서도 하나님을 경배했고 기꺼이 복종함으로써 그를 영화롭게 했다. 다시 말해서 욥은 선한 의도로 그에게 환난을 주신 것에 대해 환난 중에서도 은혜롭게 부축해 주신 것에 대해, 그리고 그 결과가 행복하게 되리라고 믿는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끝으로, 여기에 환난 가운데서도 잃지 않는 욥의 지조와 훌륭한 품행에 대해 성령이 언급하신 영예로운 증거가 있다. 그는 성원을 받아가며 그의 시련을 견디어냈다(22절). 이 모든 일에서 욥은 잘못 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서 하나님을 탓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고 조금도 그의 지혜를 비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만을 품은 것과 참을성이 없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을 어리석게 책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욥은 이러한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행하실 때 우리는 사악하게 행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지혜롭게 행하실 때 우리는 어리석게, 매우 어리석게 행한다는 사실을 우리를 인정해야 한다.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온유한 마음을 지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선한 생각을 품고 그와 더불어 달콤한 교제를 나누는 자들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든 못 받든, 여기에서의 욥처럼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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