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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다니엘 9장 70이레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by 은총가득 2021. 8. 11.

 

 

 

메시아는 언제 죽어야 했는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만약 신이 없다면 미래가 정해져 있을 수 없고, 미래가 정해져 있을수 없다면 예언이란 불가능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수 많은 예언들이 존재하고 그것은 놀랍게 성취됩니다. 저는 오늘 다니엘의 70 이레 라고 불리는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일어 날 수 없는 놀라운 예언의 성취를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있는데,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증언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5:39>

 

성경은 예수님이 직접 밝히신바 대로 예수님을 증언하는 책입니다. 우리가 옛날의 이야기로만 읽는 성경은 사실은 수많은 비유와 예표로 가득찬 비밀의 책입니다. 성경의 첫번째 책 부터 마지막 책 까지,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가? 어떻게 오셨는가?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를 말씀하셨을까요?

 

역사적으로 학자들은 예수님이 BC6~1년 사이에 오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AD 30~33년 사이에 십자가에 달리셨을 것으로 봅니다.

 

성경이 사실이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예수님이 메시아인 가장 크고 정확한 증거는 성경에 메시아가 언제 왕으로 선포되고 죽을 것인지에 대한 예언을 예수님이 정확하게 성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복음서에 보면 이런 기록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한복음 2:4>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요한복음 7:8>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성전 보고에서 이 말씀들을 하셨으나 아무도 그분께 손을 대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 <요한복음 8:20>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향해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버지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의 아들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도록 하옵소서.<요한복음 17:1>

 

예수님이 영광 받을 때, 예수님의 그 시간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대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심지어는 지금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신다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미 그들의 메시야는 왔는데 그들은 성경에 역시 예언되어 있는데로 예수님을 못알아보고 죽였습니다. 그 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이스라엘을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만들어 줄 강력한 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생각했던 메시야는 우리를 사탄으로부터 구원하고 죄에 대해 이길수있게 해주실 우리에게 영생을 주고 강력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해주도록 하는것이 였습니다.

 

이사야서에 나의 생각은 너의 생각과 다르고 나의 길은 너의 길과 다르다는 구절이 있습니다(사55:8).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간과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만 한것 이였습니다. 하지만 최근 이스라엘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죠. 지난 2000년간 예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은 정말 드물었거든요.

 

렇다면 오늘의 예언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서 9장은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을 발견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놓고 다니엘이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다니엘이 기도 할때에 천사가 와서 다니엘에게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합니다. 그것은 24절부터 있는 하나님이 이세상의 '70 이레'를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레는 7년입니다. 즉 이 세상이 앞으로 70×7년 즉 490년이 남았다는 것입니다.그런데 490년을 세개로나눕니다. 49년(7 이레)과 434년(62 이레) 즉 69 이레(483년)와 장차 있을 한 이레... 즉 언제인지 모르지만 세월이 한참 지난 후의 마지막 한 이레 (7년) 입니다.

 

그런데 이 '70 이레'의 시작을 언제로 얘기했냐면, 예루살렘을 다시 건설하라는 명령이 있을때부터 하나님이 세우시는 지도자(메시야-즉 예수님을 가르킵니다.)가 올때까지 69이레가 지날것인데, 그때에 하나님이 세우시는 지도자가 죽임을 당할것이다. (26절)

 

 

오늘 이 날자 계산을 하기를 원합니다.

 

정리하면 이 당시에는 예루살렘이 파괴 되고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 있던 때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다시 복원하라는 명령이 있은후 483년에 메시야가 죽을것이다.. 라는 내용입니다.

 

우선 예수님이 언제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AD30~33년중의 한 해이고, 누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AD32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유월절에 즉 니산월 14일날 돌아가셨습니다.

 

 

성경에 예루살렘을 다시 재건하라는 내용이 네번 정도 나오는데, 세번은 예루살렘에 "성전" 즉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곳을 재건하라는 명령이었고, 오직 한 군데만 예루살렘 도시를 재건 하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이십 년 니산 월 에 일어난 일입니다. 왕이 포도주를 달라고 해서 나는 포도주를 가져다가 왕께 드렸습니다. 전과 달리 슬픔에 가득 찬 나의 모습을 보고.... 왕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그대가 여행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소? 언제쯤 돌아올 수 있겠소?" 왕은 나를 기꺼이 보내 주려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말씀드렸습니다. <느헤미야 2:1,2:6>

 

느헤미야 2장에 보면 아닥사스다왕 20년 "니산"월에 일어난 일이라고 1절에 설명하면서 6절 왕이느헤미야에게 성을 재건하라고 명령을 합니다. 이 때가 역사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BC 445년 혹은 BC 444년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기록에 날자가 없이 달만 적혀져 있을때는 그 달의 1일인 경우가 많기에 니산월 1일이라고 가정하겠습니다.

이때 이후 483년이면 메시야는 왕으로 선포되고, 죽임을 당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은 1년이 365일이지만 지금의 달력은 저 때 보다 한참 나중인 4세기 쯤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1년을 360일로 계산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첫번째 책인 창세기에도 한달을 30일로 잡아서 계산했고,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도 한달을 30일로 잡아서 계산을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한달을 30일로계산합니다. 어떤 분들은 윤달을 계산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만약 윤달을 넣어야 한다면 3년반을 42개월 그리고 1260일로 얘기한 요한계시록의 경우 윤달이 중간에 들어가야 하는 기간이므로 43개월로 얘기를 하거나 1260일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의 한달은 30일 1년은 360일 입니다.

 

70 이레 계산

483년x 360일은 173,880일 입니다. 즉 BC 445년 니산월에서 173,880일이 지나면 지금 우리의 달력으로 어느날일지 계산해 봤으면좋겠습니다. 1년은 거의 정확하게 365.2477일 입니다. 대충 365.25일이라고 잡죠.

그러면성경의 483년은 우리의 달력으로 약 476.057년 입니다. 0.057년은 날로 계산하면 365.25x.057=약 20일~21일 이정도입니다.

 

BC445+476년+20일=AD32년입니다. (31년이아닌이유는 AD 0년은 없기때문에)

그리고 20일정도 추가된다면 똑같은 니산월일 가능성이 높죠.

 

저는 개인적으로 이 70 이레 예언이 하루도 다르지 않고 정확하게 일어났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니산월이라고 달까지 정확하게 표기한 것으로 봐서 이 정도라면 하나님이 아주 정확하게 일을 행하셨을거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날자까지 정확하지 않더라도 다니엘서에서 메시아가 죽어야 한다고 예언한 시간에 예수님 외에, 자신이 메시야라고 주장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 한분 뿐입니다.

 

상식적으로 이 70 이레 예언은 우연히 발생했다고 하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없다면 어떻게 이 예언이 성취가 될수 있었을까요?


 

칠십 이레(9:20-27)

 

1. 다니엘이 한 기도의 본질(9:20)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두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모든 것을 작정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기도 내용은 이스라엘 민족 예루살렘의 거룩한 산을 위한 것이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며 간절하게 기도하는 가운데 먼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만 했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죄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문제였다. 다니엘이 그와 더불어 자신의 죄를 자복한 것은 그가 실제로 지은 구체적인 죄라기보다 이스라엘 민족에 속한 백성으로서 그의 죄도 함께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은 죄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다소간 다르다. 아담의 자손인 모든 인간은 당연히 죄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점은 죄의 집단성에 관한 문제이다. 다니엘은 의인이자 믿음의 조상으로서 설령 큰 죄가 없이 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욕되게 한 이스라엘 민족에 속해 있는 한 그 역시 죄에 참여한 것이 된다. 즉 다니엘은 자기와 이스라엘 민족을 분리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개인적인 윤리를 앞세워 의인이 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또한 올바른 교회의 자리를 벗어나 혼자 의로워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자기 관리를 잘하고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한다할지라도 자기가 속한 교회가 하나님을 떠난 위치에 있다면 다른 악한 자들과 동일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죄를 회개하면서 자신의 죄와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동시에 자복했다. 그는 그 죄를 자복함으로써 단순히 개인적인 신앙의 결심을 한 것이 아니었다. 만일 그런 의미에 국한된다면 그것 역시 개인의 종교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한 방편이 될 우려가 있다. 다니엘은 메시아를 보내기 위해 특별히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의 도성인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2. 하나님의 응답(9:21-23)

 

선지자 다니엘이 간절한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일상적인 저녁 제사를 드리는 시간 즈음 그가 기도하는 동안, 앞서 나타났던 가브리엘 천사가 급하게 그에게 다가왔다.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와서 앞뒤 정황을 설명하며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당시는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생활 칠십년 이후에 본토로 귀환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다니엘이 확정적으로 알고 있던 때였다.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자신이 온 목적은 지혜와 총명을 주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먼저 밝혔다. 그는 또한 다니엘이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입은 자임을 언급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의 선지자이자 당시 가장 중요한 지도자로서 다니엘이 반드시 알아야 할 구속사적인 내용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은 가브리엘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그냥 수동적으로 듣기만 했을 따름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70이레와 앞으로 오시게 될 메시아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주셨다. 메시아에 관련된 예언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진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의미이다. 다니엘에게 특별히 그 말씀이 주어진 것은, 이제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땅 본토로 돌아가게 되는 것에 대한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다니엘서의 70이레는 단순한 역사적 전개가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토 귀환은 결코 자유로운 삶의 획득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즉 귀환의 근본적인 목적은 저들의 독립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 될 수 없었다. 이방민족의 압박과 설움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것이 저들의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그 점을 분명히 알려 주셨다. 이는 비록 다니엘 뿐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깨달아야만 할 중요한 문제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본분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예루살렘과 그 가운데 세우신 성전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가 오심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생활 칠십년을 마친 후 본토로 귀환하게 되면 장래 그곳을 배경으로 하여 새로운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특별히 70이레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다니엘에게 주셨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그 의미를 마음속 깊이 품고 살아가야만 한다.

그렇지만 그에 관한 모든 내용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연대에 관한 문제는 더욱 그렇다. 이는 하나님께서 상징적인 의미와 더불어 그것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한편 생각하면 인간들에게 구체적인 내용을 연대기적인 비밀의 영역에 가두어 둠으로써 겸손한 삶을 요구하셨음을 기억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서에 기록된 말씀을 마지막까지 간수하고 봉함하도록 하신 것(12:9)에는 그런 의미가 함유되어 있다. 

 

그러나 70이레에 관한 예언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다니엘 이후의 구약시대 성도들은 물론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주의해야할 점은 우리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무리하게 해석하여 단정적으로 확정지으려는 태도이다. 우리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성경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되 모든 것을 확정지으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는 가운데 70이레에 연관된 해석을 시도한다면 그것 자체로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해석을 하는 가운데 자기주장을 확정지으려는 자들이 역사 가운데 많이 있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겸손한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그 말씀을 통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깨달아가야 한다.

 

또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다윗 왕국을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다니엘의 70이레에 관한 예언이 커다란 소망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다니엘 이후의 구약시대 성도들이 70이레의 의미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을 것은 틀림없다. 나아가 선지자들과 민족 지도자들은 그에 더욱 민감한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다니엘과 동시대 인물이었던 에스겔을 비롯해 그 후에 살았던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 선지자들은 물론 스룹바벨, 여호수아, 에스라, 느헤미야 등 온전한 신앙을 가졌던 모든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들은 그것의 의미를 깊이 상고했을 것이 틀림없다.

아마도 그들은 숫자적인 의미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비단 정확한 연대를 산정하여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아마 예루살렘을 중건하라(9:25)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명(王命) 자체뿐 아니라 그 명령이 있었던 시기를 기억하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여튼 다니엘의 70이레 예언은 구약시대 성도들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3. 칠십 이레의 기한(9:24-27) 

 

다니엘서의 70이레에 관해서는 오래전부터 다양한 해석들이 있어 왔다. 그것을 전적으로 상징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구체적인 연대를 분명히 제시하는 세대주의적 입장을 가진 자들도 있다. 또한 자유주의자들은 그 내용을 하나님의 계시로 보지 않고 단순한 문학적 상징으로 이해하는 자들도 없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70이레에 관한 상징적 의미와 더불어 연대기적 접근을 해야만 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연대를 손꼽아 계산하며 하나님의 메시아를 기다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힘든 여건 가운데서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계시된 그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원천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70이레로 기한을 정하셨음을 다니엘에게 알려주신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은혜였다. 그 때가 완료되면 모든 허물과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받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게 되리라는 말씀을 하셨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9:24)

 

우리가 이 가운데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할 바는 이 말씀이 메시아 예언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역사를 끝없이 진행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운 심판과 더불어 마감하시게 된다. 따라서 정한 기한이 이르면 인간의 죄를 해결하게 되는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게 된다. 

이것은 사실 불신자와 배도자들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구원을 선포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방인의 포로로 사로잡혀가 신음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본토에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말씀 자체가 참 소망과 기쁨이 된다. 그전에 여러 선지자들과 다니엘에게 보여주셨던 모든 이상들과 예언이 때가 이르면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은 궁극적인 소망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위 본문 말씀 가운데서 또 하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바는 지극히 거룩한 자에 관한 이해이다. 그는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지극히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지극히 거룩한 자라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 그 거룩한 자가 장래 70이레로 정한 때가 이르면 기름부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는 두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는 사실 이미 다니엘서에 기록된 여러 예언들 가운데 상징적인 의미와 더불어 숱하게 등장하셨던 분이다.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을 파괴한 손으로 하지 않은 뜨인 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용광로에 나타나셨던 사람의 아들 같은 분, 벨사살의 왕궁 벽에 나타났던 손가락의 주인, 다니엘의 사자굴에 나타나셨던 인자 같은 이가 곧 지극히 거룩한 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것이다.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실제로 이 세상에 오셔서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왕이 되어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 최상의 소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것은 70이레의 의미와 그 기한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종말의 시기에 대해 궁금해 하던 제자들과,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시기전 재림의 때와 기한에 대한 궁금증을 가졌던 제자들을 기억한다. 

이처럼 다니엘서에 예언된 70이레의 기간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그에 대한 정확한 연대를 산정할 수는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이는 때와 기한에 대해 궁금해 하던 제자들에게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답변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다니엘의 예언 가운데는 70이레라는 구체적인 연수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연대 추정에 더욱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우선 우리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경륜에 대한 구체성을 깨달아야 한다. 즉 그것이 일반적인 상징에 머무르지 않고 그 가운데 구체적인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나름대로 70이레에 대한 연대를 추정 계산하며 계시된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거듭 밝히지만, 필자가 성경의 전체적인 역사를 기억하며 연대를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연대 자체의 정확성과 그에 대한 확정을 짓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역사 가운데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주의 깊게 더듬어 봄으로써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은혜를 깨닫고자 하는 것이 원래의 목적이다. 다시 말해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해서 연대기 자체에 무관심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성취된 과거 역사와 더불어 이를 더듬어보기 위해, 바벨론에 의한 유다왕국의 패망과 포로생활 70, 그리고 그 후 본토 귀환과 함께 전개되는 연대기적 순서를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및 공 사역과 예루살렘 성전의 최종적인 파괴 연대를 기억해야 한다. 물론 그 가운데는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 및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소유한 구속사적 의미가 들어 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그에 대한 대략적인 연대는 다음과 같다: BC605년 예루살렘은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침공을 받아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다. 또한 BC597년에는 바벨론이 두 번째로 예루살렘을 침공해 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BC586년 예루살렘은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으며 성벽은 완전히 허물어졌다. 또한 하나님의 성전은 파괴되어 그 안에 있던 거룩한 성전기물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졌으며 유다 왕을 비롯한 많은 백성들은 처참한 상태에서 이방의 포로로 잡혀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포로생활 70년’이 예언된 바대로, 예루살렘과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했던 바벨론 제국은 BC539년 메대 왕국의 다리오 왕에 의해 패망하게 된다. 뒤이어 BC538년에는 유대인들을 포함한 속민(屬民)들의 귀환 허용이 포함된 ‘고레스 왕의 칙령’이 선포되었다. 그에 따라 BC536년 이스라엘 민족은 스룹바벨의 인도로 제1차 귀환이 이루어졌으며, BC458년 에스라에 의한 제2차 귀환, 그리고 BC445년 느헤미야에 의한 제3차 귀환이 진행되었다. 

그 기간 중에 중요한 구속사적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스룹바벨의 인도 하에 본토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이었다. 그들은 많은 반대에 부딪치면서 일시적으로 공사가 중단되었으나 그 일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결국 성전공사는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린 다리오 왕과 동명이인(同名異人)이었던 다리오 1세(BC522-486)가 통치할 때인 BC520년경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에 의해 재개되었다(학1:14,15). 그리고 그 성전은 다리오 1세 왕의 즉위 6년인 BC515년 경 봉헌하게 되었다(스6:15,16) 

 

또한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은 BC458년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지도자였던 에스라에게 본토 귀환을 원하는 자들을 인도해 가도록 조서(詔書)를 내림으로써 두 번째 귀환이 이루어졌다(스7:11-13). 그런데 왜 왕은 그런 특별한 조서를 내렸을까? 그것은 아마도 쉽게 동화되지 않는 유대 민족주의자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점은 적어도 그것이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페르시아 제국을 위한 정책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학사 겸 제사장이었던 에스라는 본토로 귀환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교육하고 영적 회복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애썼다. 이는 사실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페르시아 제국의 법보다 모세를 통해 허락된 이스라엘 민족의 법을 우선시하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BC445년 페르시아 왕은 총독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의 중건을 명령했다. 그리하여 무너진 성곽을 건축하게 된다(느2:7-9).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을 보수하며 건축하게 되었다. 그런데 페르시아 왕은 왜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 분명한 사실은 페르시아 제국이 그에 연관된 정책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페르시아와 유대인들은 동일한 사안을 두고 서로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다. 

우리는 세 차례에 걸쳐 포로 생활에서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활동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 재건> - <율법 교육> - <성벽중건>의 도식을 보게 된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언약과 연관된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허물어진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이 다시금 확립되었다. 그 가운데는 신앙적인 삶을 회복하는 언약의 백성들을 통해 메시아가 선포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공 사역, 그리고 그에 대한 완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의 최종파괴 연대이다. 예수님은 BC4년 경 탄생하여 AD26년 경 공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 후 AD30년 경 십자가와 부활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셨다. 그로부터 40년 정도 지난 AD70년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인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제 우리는 다니엘이 예언한 70이레에 관한 의미와 더불어 위에 기술한 연대기를 배경으로 하여 70이레의 예언에 구체적으로 접근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가브리엘 천사는 다니엘에게 70이레에 관한 역사적인 의미와 더불어 연대에 관한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70이레의 시작과 끝에 관한 언급과 함께 메시아 예언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찌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9:25)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내용들을 생각해 본다. 그것은 우선 70이레의 시작이 예루살렘 중건 명령이 날 때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 예언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중건 명령은 언제 내려졌는가? 만일 그에 대한 사실적 해석이 분명하다면 아무런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다양한 신학적인 견해들이 있어 왔다. 그 중 하나는 BC538년 고레스 왕의 귀환 칙령이 내려질 때 이미 예루살렘 중건 명령이 포함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 견해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스룹바벨과 함께 본토로 귀환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중건했던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치적 여건을 감안한다면 지배국의 왕이 예루살렘 중건을 명령했는데 귀환자들이 그것을 어기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립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아마 고레스 왕은 귀환만 명령했을 뿐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명령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다수의 학자들은, BC445년을 70이레가 시작되는 시점인 예루살렘 중건명령이 있었던 해로 간주한다. 이는 아닥사스다 왕이 조서를 내려 유다 총독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 중건에 관한 명령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느헤미야서 2장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연대를 다니엘서에 기록된 페르시아 왕의 예루살렘 중건명령과 동일한 것으로 확정지어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혹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역사적으로 또 다른 시기에 그와 유사한 명령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는 없는가? 조심스런 견해이지만, 필자는 BC445년의 중건명령에 앞서 BC487년경에 그 명령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을 해본다. 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BC536년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1차 본토 귀환이 있은 지 거의 백년이 지난 BC445년에 예루살렘 중건을 처음으로 명령한다는 것은 그 공백 기간이 너무 길다.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고 봉헌된 것이 BC515년이었던 사실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때에 어떤 이유에서든지 예루살렘 중건 명령이 내려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우리는 페르시아 제국에 연관된 당시 국제적인 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 성전 재건이 완성되고 봉헌할 시기의 왕은 페르시아의 다리오 1세 왕이었다. 그는 호전적인 인물로서 BC492년 그리스를 공격하여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그의 군대는 에게 해 북쪽 바다를 건너 트라키아를 공격하지만 거센 폭풍으로 인해 실패의 쓴잔을 마셨다. 그는 BC490년 또다시 에게 해를 지나 그리스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지만 여전히 성공하지 못한다. 

 

당시 다리오 1세 왕은 동쪽으로 상당히 넓은 영토확장을 꾀했다. 그리고 서쪽 세계를 향한 정복 야망을 가졌던 그는 몇 차례의 원정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가 죽고 난 후 크세르크세스 1세가 왕위에 오른 후 다시 한번 그리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지만 역시 실패하고 만다. 페르시아 군대는 BC480년 살라미스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페르시아 원정은 실패하여 소아시아 지역의 많은 도시들을 잃게 되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다리오 1세의 정략적 태도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된다. 우선 다리오 1세는 BC492년과 490년 두 차례에 걸쳐 그리스 공격에 실패했지만 여전히 자신감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군대를 재정비해서 그리스를 공격하고자 하는 야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두 차례의 그리스 원정을 실패한 후 다리오 1세는 그리스의 동향과 독특한 민족성을 지닌 유대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지 모른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내용은 그가 예루살렘 중건을 명령했다는 사실이다. 즉 그는 예루살렘 중건을 허락한 것이 아니라 명령했다. 그것은 명령을 받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싫어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강압적인 일이다. 만일 그렇다면 다리오 1세는 무엇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중건을 명령했을까?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유대인들의 민심해이(民心解弛)로 인한 동요를 우려했을 수 있다. 그와 같은 우려는 오랫동안 있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나중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보수할 때도 많은 사람들은 그와 유사한 염려를 했다. 물론 그에 대한 우려의 이유는 서로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두 차례 승리를 맛본 그리스인들이 지중해를 건너 이스라엘 지역을 통과해 공격해 올지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해상활동과 해상전투에 능했던 당시 그리스 군대로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다양한 이유와 함께 다리오 1세는 BC487년 예루살렘 중건을 명령했지만 그의 죽음과 함께 유명무실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므로 나중 페르시아 제국의 유다지역의 총독 느헤미야를 통해 또 다른 역사적 이유와 맞물려 실제로 예루살렘 성벽이 보수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이다.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이 차게 되면 끝을 내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으며 뒤이어 고레스 왕의 예루살렘 귀환 칙령이 내려졌다. 그 후 다니엘을 통해 70이레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 주어졌다. 그 가운데는 7이레, 62이레, 한 이레 등으로 구분된 이레가 중요한 의미로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BC536년 본토로 귀환한 후, 7이레(49) 후인 BC487년에 있었던 페르시아 왕의 예루살렘의 중건 명령이 내려진 시점 사이에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가 들어있지 않았을까?  7이레 기간 중에, BC586년 바벨론 제국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이 본토로 귀환한 유대인들의 손에 의해 다시금 재건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그 성전 재건이 완성되었을 때, 성전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는 성벽의 보수와 예루살렘 중건을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런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몇 가지 형편들을 감안해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첫 번째 본토 귀환 후,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재건과 더불어 7이레인 49년이 지난 BC487년 경 예루살렘 중건명령이 내려졌을 수 있다. 페르시아인들의 정치적 의도와 정책 목적은 분명했겠지만, 그와는 별도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그 역사 가운데 작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필자는 이러한 역사적 가설을 재구성하며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다리오 1세가 예루살렘 중건명령을 내렸다면 그것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페르시아 제국의 원활한 정국을 위한 것이었다. 그것이 국내적인 정서때문이든 대외적인 국제관계 때문이든 페르시아를 위해서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만일 이러한 역사 구성이 가능하다면, 그 때 왕위에 있던 다리오 1세 왕이 BC485년에 죽게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어떤 문제 때문이었다 할지라도 당시의 분위기를 엿보게 해준다. 그것이 비록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왕의 건강상의 문제라 할지라도 통치 말기에 처한 왕은 조급한 마음을 떨치지 못했을 것이다. 

두 차례의 그리스 원정에 실패한 다리오 1세 왕이 재위 말기에 이르러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의 중건을 명령했다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때는 이스라엘이 BC536년 본토로 귀환한지 7이레(49)가 되는 해라는 점도 구속사적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우리가 이런 견해를 염두에 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쉽게 연관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출생하시면서부터 왕으로 오셨다. 그는 나중에 왕이 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왕이었다. 동방박사들이 헤롯을 찾아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이가 어디 계시뇨?(2:2)라고 선포한 점과 그들이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치고 경배한 것은 처음부터 그의 왕위를 받아들인 것을 보여준다. 이는 그 때 예수님이 처음부터 기름부음을 받아 왕으로 확인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우리는 69이레(483)가 지나면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일어나게 된다고 한 예언의 구체적인 내용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간이 차면 기름부음 받은 왕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여기서는 메시아에 대한 매우 실제적인 약속이 제시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그 기한을 정해주셨다는 사실은 역사적 구체성을 의미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69이레에 대한 정확한 기간을 알지 못한다 해도 그 가운데는 이미 구체성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예루살렘 중건에 대한 명령이 있은 후 69이레가 되면 이 땅에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신 메시아가 오시게 된다는 사실이다. 

메시아를 대망하던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알고 기다렸던 중요한 근거 가운데 하나는 다니엘의 70이레 예언과 연관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그 당시에 하나님의 특별한 관여가 있었겠지만 성경을 통한 계시적인 반응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동방에 있던 박사들 곧 성경을 연구하던 서기관들은 69이레의 마지막이 되어가는 그 때 즈음 베들레헴으로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7이레와 62이레가 뚜렷하게 구분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다니엘서에는 69이레라 하지 않고 7이레와 62이레를 분리하여 표현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분명한 점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란 사실이다. 이는 예루살렘 중건 명령이 있은 후 한 이레 즉 49년 동안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만일 70이레가, BC487년에 예루살렘 중건 명령이 내려지고 그 때 시작되었다면 그로부터 7이레 곧 49년 후인 BC438년까지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그 때는 과연 어떤 특색이 있는 시기였을까? 그 시기는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제사를 지냈지만 성벽이 허물어진 상태였으므로 거룩한 성전이 보호받지 못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중건되고 성벽이 보수됨으로써 이스라엘의 민족적 정체성이 확립되어 갔던 것이다. 

다니엘서 예언 가운데는 ‘곤란한 동안’(in time of trouble)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垓字)가 완성될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 때’는 과연 언제일까? 이는 아마도 성이 중건되는 동안 반대파들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상당한 곤란을 겪게 될 형편을 보여주고 있. 

 

그리고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란 말 속에는, 예루살렘 성내는 질서가 회복될 것이지만 외부적으로는 공격이 끊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성벽을 중심으로 안팎이 선명하게 구분됨을 의미한다. 이 말은 에스라의 율법 교육과 더불어 민족적 정체성 회복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 요구되는 시기임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우리는 70이레의 예언이 메시아와 직접 연관된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영원한 왕이 이 세상에 오시게 되지만 죄에 빠진 악한 세상은 그를 수용하지 않으려 한다. 이는 그에게 상당한 고통이 따르게 되리라는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다. 다니엘서는 7이레와 62이레 후에 메시아께서 도래하지만 그가 곧 끊어지게 될 것을 예언했다.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9:26) 

 

이 본문에서 62이레 후란 7이레와 62이레가 지난 다음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 말씀은 70이레의 마지막 부분에 속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초림과 직접 연관된다. 그런데 그 때 기름부음 받은 자가 오게 되지만 곧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 예언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오시게 되면 오랜 기간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끊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 

 

우리는 본문 가운데 사용된 끊어져 없어진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생명이 끊어지는 죽음으로 이해하고 있다. 한글 성경들 가운데는 그 문구를 죽음에 연관된 것으로 직접 번역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른 성경 번역본들은 직접 그렇게 번역하고 있지는 않다. 물론 주석이나 해석에 있어서는 대개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다시금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필자는 이 말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예수님의 갑작스런 은닉으로 이해한다. 다른 성경 번역본들에는, 그가 끊어진 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없어지게 될 사실에 대한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는 아기 예수께서 애굽으로 피신하신 후부터 삼십년 후 공 사역을 시작하실 때까지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예수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출생하셨을 때 헤롯 대왕은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영아살해정책을 폈다. 그는 아기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그를 찾아 죽이고자 했다.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을 부모와 함께 애굽으로 피신시키셨다. 그 사건을 두고 다니엘의 예언 가운데는 메시아가 끊어져 없어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만일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두고 말하는 것이라면 그의 죽음 뿐 아니라 부활에 연관된 사실도 언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후 없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 죽음에 연관된 그의 끊어짐만 언급되고 다시 살아나는 부활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리고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게 된다는 말은 로마제국 황제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나중에 언급될 마지막 한 이레(7)와 그 절반에 해당하는 3년 반과 연관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읍과 성소 파괴를 언급한 이 예언은 AD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 군대에 의해 파괴된 것과 직접 연관된다. 이 사건은 감히 하나님의 언약을 담은 거룩한 성전을 파괴하는 사탄에 속한 자들의 무서운 세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종말이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라 언급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악한 통치자의 멸망을 의미한다. 그에게 속한 악한 자들이 상당한 세력을 펼치는 듯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아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는 사실이 예언된 것이다. 

 

또한 마지막에는 끝까지 전쟁이 있을 것이며 황폐하게 될 것이 작정되어 있음이 예언되었다. 하나님의 왕국과 세상 왕국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은 인간 역사 가운데 지속된다. 다니엘서에는 그 전쟁이 세상 끝까지 가게 되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물론 그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궁극적인 승리로 장식하게 된다. 

다니엘의 70이레 예언 가운데는,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가 이 땅에 온 이후에 일어나게 될 그의 사역에 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은 구체적인 메시아 사역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이다. 이는 물론 위에 언급한 다니엘서 9 26절에 있는 말씀에 대한 보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과 연관된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9:27)

 

기름부음 받은 왕이 하시는 사역은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는 일이다. 본문에 언급된 는 메시아를 지칭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가 장차 많은 백성들에게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한다. 그런데 그는 그 이레 즉 7년의 절반의 기간에 해당하는 3년 반 동안 제사와 예물을 금지하게 된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이는 앞의 9 26절에 기록된 대로, 끊어져 없어졌던 메시아가 공 사역을 위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드러나는 것과 연관된다. 즉 그는 배도에 빠진 헤롯왕의 악행으로 인해 약 삼십년 동안 은닉한 후 세례요한의 사역을 통해 공사역(AD27-30)을 시작하셨다. 본문에서 말하는 그 이레의 절반 곧 3년 반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사역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27절의 상 반절에 기록된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라고 기록된 말은 예수님의 공 사역 기간에 발생하는 의미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3년 반 정도의 공 사역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성전 제사와 예물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선포하셨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진정한 제사장이며 제물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제 그들은 그 전에 하던 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동물을 잡아 번제와 희생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예루살렘에 두고 그를 배척하여 성전에 동물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소행에 지나지 않는다. 

 3년 반이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는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제물로 바쳐져 구약의 언약을 완성하시게 된다. 다니엘의 예언 가운데 7이레와 62이레가 시간적으로 연결된 개념이라면 마지막 한 이레는 그렇지 않다. 그 이레는 나중에 독립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27절의 하 반절에 나타나는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는 말은 AD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앞둔 약 3년 반 동안 있었던 유대반란(AD66-70)에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본문에 나타난 미운 물건이란 헬라 계통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한 일을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미운 물건이란 역사적으로 그 후에 나타난 확장된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마태복음 24 15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동일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과 연관된다. 

 

이 기간 동안 유대 지역에 살던 기독교인들은 그로 말미암아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이는 다니엘서 12 7절에 기록된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까지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는 예언과 연관된다. 이 말은 기름부음 받은 왕으로서 메시아가 통치하는 새로운 왕국의 설립으로 인한 완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진다(12:7)는 말은, 예루살렘 성전을 장악하고 있던 유대인들과 그것을 파괴하는 로마인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아무런 세상적인 권세가 남아있지 않고 완전히 깨어지게 됨을 의미한다. 우리는 본문 말씀 가운데서 성도들의 권세가 완전히 깨어진다고 하는 말을 주의 깊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이후에 하나님의 천년왕국인 보편교회 시대가 도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다니엘의 70이레 가운데 69이레가 마치는 시점을, 인간의 몸을 입고 왕으로 오신 메시아의 탄생으로 본다. 그리고 그는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등장해 3년 반 정도의 공사역을 하시게 된다. 그것이 다니엘서의 7이레의 절반인 3년 반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그로 인해 사십 년 간의 사도교회 시대가 진행되며 메시아 왕국인 보편교회 시대의 기초를 놓게 된다. 즉 앞의 3년 반은 이후 따르게 되는 사십년의 사도교회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십년이 끝나갈 무렵 다시 7이레 가운데 절반인 나중 3년 반의 구속사적 실행이 이루어진다. AD70년을 앞둔 3년 반 동안 또다시 배도자들인 유대인들과 불신자들인 로마인들에 의해 엄청난 고통을 겪은 후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된다. 그것으로써 하나님의 왕국인 새로운 보편교회가 설립되게 된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전의 3년 반이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장래 세워지게 될 하나님의 보편교회의 기초가 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동방박사들 칠십 이레 계산

 

다니엘서에 예언된 70이레는 메시아 예언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아는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자기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동방박사들에게 특별히 보였던 별은 예수님의 탄생을 위한 표지이기도 했지만 동방박사들이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역할을 했다. 박사들은 그 별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서 헤롯왕을 만났으며 그 별의 인도를 받아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 예수께로 갔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바는 동방박사들은 구약성경의 기록을 통해 주님의 강림 시기를 이미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을 것이란 점이다. 성경을 연구하는 박사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아가 출생할 지역이 베들레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비밀에 가려진 장소가 아니라 말씀 속에서 이미 공개된 사실이다.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그가 태어날 장소 뿐 아니라 그가 태어나게 될 시기에 대해서도 이미 성경 가운데 어느 정도 계시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성경에는 그에 대한 분명한 기록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니엘서에 기록된 70이레가 메시아께서 강림하게 될 시기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예루살렘 중건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면, 구약시대 성도들이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신약시대와 차이나는 구약시대의 특별한 계시적 방편을 기억한다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능하다. 즉 우리는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특별계시들이 주어졌던 사실을 기억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동방박사들에게 특별한 별을 계시하신 것과 동일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관심 있게 읽고 묵상하던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구약 성경과 이스라엘 민족에 허락된 특별 계시에 따라 메시아가 오실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아가 그들은 메시아를 막연하게 기다린 것이 아니라 다니엘서에 기록된 70이레와 더불어 성경에 기록된 때를 기억하며 구체적인 시기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특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사실은 메시아로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이 갑자기 사라지고 없어졌는데도 동방박사들이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는 점이다. 복음서의 문맥을 통해 볼 때 그들은 메시아가 없어졌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다니엘서에 기록된 메시아의 끊어짐에 대한 깨달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필자는 다니엘서의 70이레의 기간을 연대기적으로 확정짓고자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이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주장들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그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선상위에, 하나님의 메시아 예언을 두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구체적인 연대를 알 수 없다고 해서 그 시기 자체에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는 없다. 대신 그에 대한 연대기적인 관심을 기울이되 하나님 앞에 더욱 낮아지고 겸손한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광호 목사

 


 70년과 70이레(단9:1-2, 24)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말씀을 통해 전하시고, 장차 될 일을 예언해주신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예언의 말씀을 전하며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 예언은 대부분 직설적이고 실제적이며 역사적이지만, 묵시는 꿈이나 환상을 통해 주로 전달되며 장차 일어날 일들을 '상징적, 간접적, 종말론적'으로 말해준다. 그러므로 이를 이해하는데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

묵시 대부분은 주의 종들이 포로 생활이나 유배 생활하고 있을 때 기록된 것이다. 구약에는 바벨론 포로 당시 '에스겔서', '다니엘서', '스가랴서'가 기록되었고 신약에는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유배되어 있을 때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 다니엘은 유다가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1차 포로로 끌려갈 당시, 젊은 청년으로 함께 잡혀갔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지혜의 사람으로 바벨론 왕의 꿈을 정확히 해석해 줌으로 총애를 받아 바벨론 왕국의 모든 박사들의 우두머리와 총리 자리까지 오른다. 이후 왕이 다섯 번 바뀌고 나라가 바뀌는 데도 숙청되지 않고, 7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높은 지위를 유지하며 선지자와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는 다니엘의 인품과 성실함을 방증하는 것이다.

다니엘서는 1장 부터 6장까지는 시대적으로 기록되었고, 7장 부터는 다니엘이 하나님께 받은 묵시를 기록하였다. 다니엘서의 핵심 장은 9장이며, 이 9장에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해 준 70년의 의미를 다니엘이 재발견하게 됨과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70이레의 계시를 받는 내용을 기록해 주고 있다.

과연 70년과 70이레란 무엇을 말하며 이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깨달아 알고 성경에 대한 우리의 절대적인 확신을 키우는 시간을 가져보자.

1. 70년의 예언과 성취 (1-19절)

1) 숫자는 하나님의 디자인
언어는 인간 상호간 소통의 수단이지만, 숫자는 창조 순서와 질서를 말해준다. 언어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불투명하고 오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나 숫자는 정확하고 분명하여 오해의 소지가 없다.

성경이 말해주는 숫자들의 의미를 살펴보면, 

1은 하나님, 2는 분리와 증인, 3은 삼위일체의 하나님 (Divine Perfection), 4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자연, 5는 자연에다 하나를 더했으니 하나님의 은혜, 6은 이 날에 인간이 창조되었기에 인간, 7은 6일 동안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음날 쉬셨기에 완전수이며 특히 영적완전(Spiritual Perfection)을 의미한다. 8은 완전수 7에 하나를 더했으니 풍성함, 9는 심판, 10은 숫자의 완전수(Numerical Perfection), 11은 무질서, 12는 통치적 완전수(Governmental Perfection)를 의미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것을 기초하여 자릿수가 높은 숫자들이 성경에 나타난다. 즉 17, 24, 40, 50(7x7+1, 오순절, 희년), 70, 70이레(70x7=490), 153, 666, 1000, 144,000등이 있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많은 숫자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의미가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2) 성경에 나타난 숫자 7
7은 하나님의 날짜 계산의 기본이고, 하나님 창조 역사와 질서의 핵심이다. 모든 동물의 임신 기간이 7의 배수이며, 모든 물체의 원소들의 원주율도 7이고, 소리 구별의 기본은 도,레,미,파,솔,라,시로 7개이다. 무지개의 색도 빨,주,노,초,파,남,보로 7개이다.

성경에는 7의 숫자가 많이 사용되었다. 7안식일, 7제사장, 7인, 7나팔, 7촛대, 7교회 등이 있다. 또한 70의 숫자와 70이레 즉, 70x7=490을 말해주고 있으며, 7x7을 칠칠절이라 말하며 여기에 하나를 더하여 50을 오순절이라고 한다.

 

3) 70년 예언과 그 성취
70년이란 예언은 유다의 멸망을 내다보는 기간에 예루살렘에서 활동했던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내용으로 유다의 바벨론 포로생활이 70년(렘25:12)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 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은 신실한 바벨론의 박사들의 어른이 되고 총리가 되어 일하던 중, 바벨론이 메대에 멸망 당하고 메대의 다리오가 갈대아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다리오 원년에 다니엘은 서책(성경)을 읽다가 70년이란 기간을 깨달아 알게 되었고, 그는 결단을 하고 금식하며 기도하기를 시작하였다(단7:1-19).

이 때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 70이레의 비밀을 받게 되었다(단9:20-27). 그 후에 다리오 왕은 갈대아(바벨론)를 다스리는 총리로 다니엘을 세 사람 중에 하나로 택하여 세웠다. 다니엘이 지혜와 실천력이 대단해, 왕이 다니엘을 온 나라를 다스리는 총리로 세우고자 하니 다른 총리들이 시기하여 다니엘의 흠을 잡아 멸하려 하여 계책을 세웠다.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는 자는 사자 굴에 던지게 하자는 명령을 왕의 어인이 찍혀 실행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다니엘을 예루살렘을 향한 문을 열어놓고 기도하기를 중단하지 아니하였다. 결국 그는 사자 굴에 던짐을 받았으나 하나님은 그곳에서도 다니엘을 보호하시고 이를 통해 다니엘은 다리오 왕에게도 더 큰 신임을 얻게 되었다(단6장). (참고: 다니엘서 9장의 사건이 다니엘서 6장의 사건보다 먼저 일어난 사건이다)

실로 70년이란 예언은 역사적으로 정확히 성취되었는데, 다니엘이 바벨론 1차 포로로 잡혀 갈 때(BC 606년)부터 바사왕 고레스 원년(BC 536년)에 이스라엘이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1차 귀환 때까지 정확히 70년이고, 또한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간 3차 포로(BC 586년) 때부터 예루살렘 성전 완성 때(BC 516 년)까지도 정확히 70년이었다. 이토록 하나님의 예언은 틀림없이 역사적으로 정확한 때 즉,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진다.

 

2. 70이레의 예언과 성취 (20-24절)

1) 70이레의 예언
다리오 원년(BC 538 년)에 이스라엘의 해방이 70년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다니엘은 결단하여 회개하고 금식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가브리엘 천사(다니엘에게 두 번째 나타남)를 통해 장차 일어날 사건 즉, 70이레의 비밀을 예언해 주셨다. “네 백성(이스라엘)과 네 거룩한 성(예루살렘)을 위해 70이레로 기한을 정했다”(24절)고 말씀하셨다. 70이레라는 것은 70을 7번한다는 것이니 70x7=490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490일 혹은 490달 혹은 490년이 될 수도 있는 기간이다. 실제 이 예언이 이루어지게 된 때는 날짜나 달이 아닌 490년이었다.

 

2) 70이레의 예언의 성취
70이레의 예언은 셋으로 나누었는데, 첫째는 7이레 즉 49년이며, 둘째는 62이레 즉 434년이다. 이 둘을 합하면 483년이며, 마지막 셋째는 한 이레 즉 7년이다. 이를 모두 합하면 490년이다. 언제부터 시작하는 것인가에 관해 학자들의 견해가 각기 다르지만, 에스라를 중심으로 제 2차 귀환(BC 457년)으로 보는데 이는 육안에 보이는 성전 재건이 아니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성전 재건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래서 2차 귀환 때부터 계산하여 483년이 되는 때는 주후 26년이며, 이 때에 예수(30세)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다. 바로 이 때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마3:16)라고 말씀하시며, 예수를 기름부은 자와 왕으로 인 치셨던 것이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고, 삼년 반의 사역을 마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로써 메시야가 왕으로 오셨고 그가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다니엘서 9장의 486년 반의 예언이 모두 이루어진 것이다. 그 후 삼년 반동안 그의 제자들을 비롯하여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혹독한 핍박을 받으며, 온 세계에 디아스포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니엘의 70이레 즉 490년의 예언이 모두 성취되었다.

 

3) 종말에 얼어날 사건들
다니엘이 받는 70이레의 묵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으로 성취되었다. 앞으로 그 예수는 만왕의 왕이며 심판의 주로 재림하시게 될 것이다. 그 때와 기한을 성경은 70이레와 같이 분명히 말씀해주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밧모섬에서 보았던 묵시들이 분명히 역사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는 장차 되어질 일들을 많은 숫자들로 말해준다. 7촛대, 7교회, 7인 떼심, 7나팔, 7대접이 그것이며, 종말에 이르러 전 삼년 반과 후 삼년 반의 환난의 시대가 올 것을 기록했다. 또한 적그리스도의 666시대도 있지만 종말에는 그 분의 백 보좌 심판 있으며 그는 모든 신앙인들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에는 많은 묵시들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힘들다고 이를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며 재림의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계1:1)이기 때문이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니라”(계1:3)

 

70년과 700이레가 주는 교훈
성경의 약속과 예언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요 예언이다. 그러므로 일점일획의 변함 없이 다 이루어진다(마5:18). 이것을 확신하며 삶에서 실천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며 하나님의 사람들이며 영원한 축복을 소유하게 되는 자들이다.


칠십 이레와 하나님의 구원 달력

(The Seventy “Sevens” of Daniel)

-- 단 9:20-27 --

 

20.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21.곧 내가 기도할 때에 이전에 환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22.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이르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왔느니라

23.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알리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환상을 깨달을지니라

24.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5.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26.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7.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이 시대는 분명 종말의 시대이다. 성경을 깊이 연구한 많은 신학자들이 지금은 종말 시대라고 증거한다. 안토니 후크마, 윌리암 헨드릭슨, 마운스 등 외국 학자들과 박형룡, 박윤선, 이상근 목사님 등 우리나라의 저명한 학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종말의 여러 징조에 대하여 언급해 왔다.

실제로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종말의 예언들을 읽으면서, 수많은 종말의 징조들이 지금 이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크고 중요한 사건들을 경험하고 있는 특별한 때에 살고 있는 복된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이를 특별 계시인 성경 여러 곳에 예언과 상징의 형태로 기록해 두셨다. 우리가 아는 대로 종말 예언의 대표적인 성경 기록으로는 마 24장, 단 2, 7, 9장, 겔 37, 38장, 그리고 계시록 전장(全章) 등을 들 수 있다. 계시록이 마지막 시대의 각론(各論)이라 한다면 앞의 여러 기록들은 총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과연 우리가 종말에 일어날 일들과 예수님 재림 직전에 나타날 징조들을 알 수 있을까? 성경에는 과연 하나님의 구원 달력과 같은 것이 있는가?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이 구절은 요한계시록의 전달 계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그리고 다시 천사들에게, 그리고 사도 요한에게, 그것은 다시 주의 종들인 교회의 목사를 통해 성도들에게까지 전달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달되어야 하는 이 계시의 말씀은 ‘반드시 속히 될 일’에 대한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보면, 종말 시대의 충성된 종과 악한 종을 분류하는 기준은 종말의 소식을 잘 전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마 24:45,46,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악한 종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48절) 하는 자라고 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종’이란 평신도가 아니라 오늘날의 목회자들을 말한다. 계 22:16절에 ‘내 사자에게 증거케 했다’고 한 것도 목사들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이 시대의 때를 따라 나눠 주어야 할 양식은 분명 ‘주인이 온다’는 소식이다. 주님의 재림의 소식이고, 종말의 여러 징조들에 관한 말씀이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성취되어가는 비밀을 풀어 가르치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일의 종말을 작정하시고, 주의 종들을 통하여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적 종말론은 계시록이나 어느 한 두 구절에 국한시켜 연구할 것이 아니라 창세기로부터 전 성경으로 연구 범위를 확산시켜야 한다.

사 46:10,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종말론은 성경 전체의 메시지 속에 일관하여 면면히 흐르고 있기 때문에 종말론을 무시한 채 성경을 포괄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의 첫 장부터 끝 장까지 우리 기독교만의 종말사관이 흐르고 있다. 전 성경에 그리스도의 보혈이 넘쳐나듯이, 전 성경을 통해 종말의 메시지가 줄기차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시대는 세상 끝의 여러 징조들이 성취되고 있는 때이다. 유명한 개혁주의 신학자 루이스 벌코프(L. Berkhof)는 

예수님의 재림에 앞서 일어날 징조 다섯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이방인들의 소명 

이스라엘 전국의 회심

대 배교와 대 환난

적그리스도의 출현 

여러 징조와 기사

 

지금은 분명 종말의 징조들이 성취되고 있는 시대이다.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을 거듭 거듭 밝히셨다. 계시록 22장에서 세 번씩이나 재림을 언급하신 것(7, 12, 20절)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함이다.

 

계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본문은 저 유명한 ‘다니엘의 70 이레’에 관한 말씀이다. 성경학자들도 풀기 어려워하는 난해구절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가 마지막 시대가 확실하다면 반드시 풀어야 할 말씀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70 이레’의 말씀이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을 보여주는 구원 달력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본문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오묘함과 그 성취를 새로이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자. 그리고 이제 속히 오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을 소망하는 재림 신앙으로 무장하자.

 

1. 본문의 배경과 칠십 이레의 개요

 

단 9: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본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있을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바벨론 포로 1, 2, 3차 중에서 다니엘은 1차 때, 에스겔은 2차 때 포로로 잡혀갔다.

다리오 왕 원년(BC 538년)에 다니엘이 예레미야서 책을 보았다. 거기서 뜻밖에도 바벨론 포로로부터 회복 된다는 약속의 말씀을 발견했다

렘 29: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깜짝 놀란 다니엘은 금식하며 자기 민족의 죄를 회개하고 주의 은총을 간구했다. 그때에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놀라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

 

24절=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한이 70 이레라는 것이다. ‘이레’(샤부아)는 보통 ‘주’(week) 나 ‘년’(year)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거의 모든 학자나 번역본들이 ‘년의 이레’로 해석한다.

본문의 내용을 분해한다면, 24절은 70 이레 전체의 총론 격으로서 70 이레에 대한 약속과 결과를 보인다.

그 목적은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그리고 70 이레가 끝날 때의 결과는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이다.

 

25~27절은 각론으로서, 70 이레 성취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먼저 25절을 보자.

25절=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다니엘이 받은 칠십 이레의 예언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令)’에서 출발하고 있다. 세계 역사를 보면 ‘예루살렘 중건령’은 3차례 있었는데, 1차 귀환령은 BC 536년 고레스 원년에 내려졌고, 2차 귀환령은 BC 457년 아닥사스다 왕 7년에(스 7:11-13), 그리고 3차는 BC 445년 아닥사스다 왕 20년에 내려졌다.

이 중 일곱 이레(49년) 후에 예루살렘 성이 중건된 경우는 온갖 핍박을 물리치고 성벽 중건을 이룬 느헤미야의 성 중건 연대(BC 408)에 비추어 볼 때 제2차 귀환령이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2차 귀환령(BC 457년)으로부터 ‘7 이레와 62 이레’ (69x7=483년) 가 지난 AD 26년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해와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은 삼십세 쯤이라 했는데(눅 3:23), 이것은 서력 기원에 4년의 오차가 있기 때문에, 위의 계산대로 주후 30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놀라운 사실을 보라. 단 9:25의 예언대로 주전 457년에 예루살렘 중건령이 정확히 내려졌다. 그후 일곱 이레(49년) 후 느헤미야에 의해 성이 중건되었고, 또다시 육십 이 이레(62x7=434년) 후인 AD 30년에 헤롯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중건되고 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심으로 이 예언은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할렐루야!

 

이제 육십 이 이레 후에 일어날 사건을 예언하고 있는 26절을 살펴보자.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본절에는 세가지가 예언되고 있다: 기름부음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짐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철저히 훼파됨 예루살렘은 끝까지 황폐해질 것임.

이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내용이다. ‘기름부음 받은 자가 끊어진다(카라트)’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언급함이 분명하다.

‘성과 성전이 훼파된다’는 것은 AD 70년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이 이끈 5만 8천명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여 완전히 멸망시킨 사건으로 정확히 이루어졌다.

그리고 ‘끝까지 황폐해 진다’는 것은 지난 2천년의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어쩌면 이렇게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정표 대로 오셨고, 이제 하나님의 구원 달력에 따라 다시 오실 것이다.

 

예언대로 오셨다는 것은 두루뭉실한 표현이 아니다. 태어난 시기와 장소, 공생애를 시작한 시기, 하신 사역과 십자가에 죽으신 모든 것이 예언대로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하나님의 일정표, 하나님의 시간표를 따라 구원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할렐루야!

 

2. 공백기(=신약시대)와 한 이레(=대환난기간)

 

이제 우리는 칠십 이레 예언의 가장 어려운 부분에 도착했다. 난점은 69번째 이레와 마지막 한 이레가 연속적이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만일 연속적으로 해석한다면 칠십 이레는 예수님 초림으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지막 한 이레는 연속적이 아니라 ‘장차’ 오는 기간임을 알 수 있다.

 

27절=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왜 공백기가 필요한가? 한 이레 언약은 ‘장차’ 정할 것이라고 했기 때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성읍과 성소의 훼파(AD 70년), 그리고 끝까지 전쟁이 있은 후(26절)에 마지막 한 이레의 사건(27절)이 이루어진다.

끝까지 있을 전쟁의 시기는 이방인 시대가 될 것임이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행 13:46, 갈 3:14). 이 시기는 신약의 교회시대이고, 이스라엘에게는 형벌의 시기이다. 계시록의 7교회(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는 각각 초대교회시대, 순교시대, 국교시대, 암흑시대, 종교개혁시대, 선교시대, 종말시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난 2,000년간의 이스라엘 형벌의 역사는 세계 어느 민족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기막힌 역사이다.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마 21:19)은 이것의 모형이며 비유이다. 수도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힐 것(눅 21:24)과 저들이 노예로 팔릴 것(신 28:68), 피흘릴 것(마23:35), 세계의 포로가 될 것(신 28:64-68) 등등, 수많은 예언들은 지난 2,000년 동안 이미 성취되었고, 또 이루어지고 있다.

 

종말에 될 일을 기록한 계시록이 장차 될 일으 기록이듯이 한 이레는 장차 하나님의 섭리하신 때에 이루어질 것을 가리키고 있다.

한 이레에 무슨 일이 있을까? 본문 27절에서 핵심 열쇠는 ‘그가’라고 표현된 인물이 누구인가에 달려 있다. 신학자들 중 초림 예수로 보는 분들도 있지만, 본문 자체에 묘사된 인물의 성격상 적그리스도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는 잔포(殘暴)한 자이다. ‘그’는 ‘미운 물건’(=혐오스런 것, 흉측한 우상 따위)을 세울 자이고, 황폐케 할 자이다. 그는 적그리스도임이 틀림없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작은 뿔(단 7:20, 8:9), 멸망케 할 미운 물건(단 11:31, 12:11), 멸망의 가증한 것(마 24:15), 대적하는 자(살후 2:4) 등으로 묘사되고 있다.

 

본문 해석은 매우 중요하다. ‘그’를 초림 예수로 보면 칠십 이레는 이미 과거사이지만, ‘그’는 분명히 적그리스도요 주님 재림 때 활동하고 있을 자이기 때문이다.

 

한 이레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대환란 기간이다. 이때는 적그리스도가 출현하여 각종 환란의 주인공으로 활동할 것이다. 27절에는 ‘그’의 가증한 활동과 관련된 모습이 7가지로 요약되고 있다.

 

27절,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한 이레의 언약을 정할 것임: 이것은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과 온 세상 사람들에게 평화의 사도로 추앙받게 될 것을 가리킨다.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임: 적그리스도는 처음에는 평화를 보장하나, 곧 본색을 드러내어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예물 드리는 것을 철저히 금지시킬 것이다.

잔포할 것임: 마치 안티오쿠스 4세처럼 무자비하고 교활하고 극단적인 음모자의 모습이다(계 13:2,15).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임: ‘잔포하여 미운 물건’은 문자적으로 ‘가증한 황폐케 하는 자’란 뜻으로, 이는 곧 예수께서 감람산 강화에서 밝히신 ‘멸망을 가져오는 가증한 것’(마 24:15)과 같은 적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날개를 의지한다’는 것은 세상통치자로서 자신의 권력과 힘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할 것을 표현한 말이다.

정한 종말이 있음: 적그리스도는 종말에 무섭게 활동하는데, 단지 정해진 종말 안에서만 활동할 뿐이다(벧후 3:10). 최후 승리는 어린양 예수의 것이다!

황폐케 할 것임: 이 세상은 적그리스도를 통해 마귀의 세력이 창궐하게 되고 영적으로 황폐하고 생명이 없는 곳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질 것임: 적그리스도가 세상을 삼킬 권세를 가지고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하나님 나라를 훼방하지만, 최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임할 것이다(계 19:20). 짐승과 거짓선지자는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게 된다.

 

칠십 이레 말씀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칠십 이레의 비밀을 여는 순간 우리 앞에는 놀라운 축복이 예비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칠십 이레의 기간이 모두 끝나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는 흠과 티가 없는 거룩한 신분이 될 것이다.

 

24절=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주님 오심으로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원히 속해진다. 우리가 모르고 지은 죄, 약해서 지은 죄, 고의로 지은 죄까지 모든 죄를 영원히 속해주신다는 놀라운 말씀이다.

주님 오심으로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완성되며 우리의 신랑 예수께서 왕으로 재림하실 것이다. 할렐루야!

 

역사 속에 오신 예수님, 또한 역사 속에 다시 오실 예수님이 칠십 이레 속에서 밝혀졌다. 칠십 이레는 하나님의 구원 달력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핸들을 잡고 운행하고 계신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칠십 이레로 보면 공백기가 끝나가고 있는 시기요, 금 신상으로 보면 열국시대가 가까워오고 있는 시대요, 아시아 일곱 교회로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시대가 거의 끝나가고 있는 급박한 때이다. 지금은 농사 짓는 처음 시기가 아니요 중간도 아니고 추수를 기다리고 있는 때임을 명심해야 한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우리를 불러 깨우시는 때이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69 이레가 문자적, 역사적으로 성취된 것이 사실이다. 이제 이스라엘의 형벌 기간도 다 지나고 그들이 독립을 했다. 온 세상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가나안으로 돌아오고 있고, 복음이 이미 땅 끝까지 전파되어 이방인의 구원농사도 마무리 단계이다. 이제 성도들은 옷깃을 여미며 한 이레를 준비하는 신앙을 가져야 할 때이다.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른다(마 24:36). 종말론이나 계시록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준비 안 된 성도들을 유혹하는 이단에 빠지지 말고, 오직 깨어 주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

깨어 있는 자들에게는 주의 재림이 도적같이 임하지 못한다는 사실(살전 5:4-5)을 기억하고, 잠자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성도가 되어야겠다.

 

칠십 이레의 신앙은 곧 재림 신앙이요 마라나타의 신앙이다. 우리 가운데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든 성도가 임박한 주의 재림을 믿던 초대교회의 신앙을 소유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박순오 목사


다니엘의 기도와 70이레(다니엘 9장)

 

[1-2절]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70년 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3-6절]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다리오 왕 원년에 다니엘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책에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70년 만에 마치리라는 예언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범죄함과 패역함과 행악과 반역을 고백하며 간구했다. 

 

[7-8절]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욕은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날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 데 있는 자나 먼 데 있는 자가 다 주께서 쫓아 보내신 각국에서 수욕을 입었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 주여, 수욕이 우리에게 돌아오고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마는.

 

다니엘은 그들이 각국에서 당한 수욕이 그들의 범죄의 결과임을 거듭하여 인정했다. 그는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이 당하는 환경적 불행과 수욕은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9-11절]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사유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곧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 가운데 기록된 맹세대로 되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다니엘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패역하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고 그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갔고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에게 임하였고 그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또다시 고백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용서하심이 있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한다. 

 

[12-15절] 주께서 큰 재앙을 우리에게 내리사 우리와 및 우리를 재판하던 재판관을 쳐서 하신 말씀을 이루셨사오니 온 천하에 예루살렘에 임한 일 같은 것이 없나이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재앙을 간직하여 두셨다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셨사오니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행하시는 모든 일이 공의로우시나 우리가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강한 손으로 주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오늘과 같이 명성을 얻으신 우리 주 하나님이여, 우리가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

 

다니엘은 계속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리신 큰 재앙은 이미 그들에게 경고하셨던 율법의 내용대로 된 것이고 그러므로 이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다고 말한다. 그는 또 그들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고 범죄하고 악을 행하였고 또 하나님의 징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죄악을 떠나지 않았고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도록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지 않았다고 고백하였다. 

 

[16-19절] 주여, 내가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좇으사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에게 수욕을 받음이니이다.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다니엘은 그들과 그들 열조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의 징벌로 수욕을 당하는 예루살렘을 향해 그의 분노를 거두시고 그의 황폐한 성소에 주의 긍휼의 얼굴빛을 비추시기를 간구한다. 또 그는 자신들의 의를 의지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의지하여 간구한다고 말하며 또 그는 하나님의 성(城)과 그의 백성에게 있는 하나님 이름을 인하여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기를 간구한다. 

 

[20-24절]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및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곧 내가 말하여 기도할 때에 이전 이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가로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나니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70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다니엘에게 보내주셔서 그의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셨다. 그것은 70이레에 대한 예언이었다. 70이레는 이스라엘 백성과 예루살렘 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기간이었다. ‘이레’라는 말(솨부아)은 ‘주간’을 가리킨다. ‘70이레’(솨부임 쉬브임)는 ‘70주간’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70x7년, 즉 490년이라는 뜻이든지(칼빈, 헹스텐버그), 혹은 상징적 숫자일 것이다(카일, 루폴드, 영). 그 작정된 기간 안에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永贖)되며 영원한 의(義)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할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와 그로 인한 의(義)를 가리킨다고 본다(히 9:12; 10:10, 14; 롬 10:4). 또 그때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을 것”이다. ‘지극히 거룩한 자’는, 천년왕국의 성전(개블라인)이나 새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카일, 루돌프)를 가리킨다기보다 그리스도(영, 박윤선)를 가리킨다고 본다. 대제사장 아론은 ‘지극히 거룩한 자’로 불렸다(대상 23:13).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히 거룩한 자이시다(눅 1:35; 행 3:14; 4:30). 

 

[25절]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令)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62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垓字)가 이룰 것이며.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칙령은 파사 왕 아닥사스다 1세 통치 기간(주전 464-424년) 중 총독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 성을 중건할 권한을 주어 고국을 방문케 한 때, 곧 주전 445년에 내려졌다고 보인다.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 성을 중건할 때 악한 자들의 방해가 많을 것이며 거리와, 해자(垓字) 곧 참호나 성 외곽 방어물을 만들 것이다. 그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 메시아가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62이레, 즉 합하여 69이레가 지날 것이다. 일곱 이레는 예루살렘 성의 중건 이후 어느 정도의 안정된 기간을 가리킬 것이다. 62이레를 합하여 69이레, 즉 483년은 음력이므로 양력으로 469년 혹은 470년이 된다(음력은 1년이 354 내지 355일임). 그러면 69이레가 지난 때는 주후 26년 즈음이 되며 그것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때라고 본다(예수께서 주전 4년경에 탄생하셨다고 보므로). 

 

[26절] 62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62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는 말은 그때 메시아의 죽음이 있을 것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또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는 예언은 주후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가리킬 것이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로마 군대를 이끌고 온 디도 장군은 유대인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1년 이상 전쟁을 계속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성 안에서도 항전파와 평화파 사이의 갈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성전 바깥뜰에는 피가 넘쳐흘렀고 하루는 8,500구의 시체가 있었다. 내란으로 인하여 죽은 12,000구의 시체는 매장되지도 못한 채로 방치되었다. 예루살렘 성이 포위된 동안 110만명이 죽었고 97,000명이 종으로 팔렸다. 밤중에 식량을 구하러 다니다 잡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자들이 하루에  500명씩이나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여지없이 무너졌고 성읍은 파괴되었다.5)

 

[27절]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본문은 해석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라는 예언은 그리스도께 대한 것이라고 본다(매튜 풀, 박윤선, 이병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과 새 언약을 굳게 세우셨다. 그 이레의 절반 즉 3년 반은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을 가리킬 것이다. 그가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라는 예언은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구약의 제사 제도가 폐지될 것을 보인다.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는 원문은, “가증한 것들의 확산 때문에 그가 그것을 황폐케 하리니 작정된 완전한 멸망이 황폐한 것에 쏟아질 때까지니라”고 번역할 수 있다(KJV). ‘가증한 것들의 확산’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여기의 ‘그’는 예루살렘을 황폐케 하기 위해 올 인물, 즉 로마의 디도를 가리켰다고 보인다. 이 본문은 예루살렘 성의 완전한 멸망을 예언한다고 본다.

http://www.oldfaith.net//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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