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전쟁’에 관한 환상(단10: 1-21)
1. 이스라엘 민족이 귀환할 시기에 다니엘이 본 환상(1-3)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왔다가 본토로 되돌아가면서 꿈에 부풀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나이 많은 어른들은 어릴 때의 기억을 되살렸을 것이며 바벨론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연세 많은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통해 가나안 땅 고향의 모습을 머리로 상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본토로 귀환하는 저들의 앞날은 결코 평탄할 수 없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윤택한 삶을 보장받은 것이 아니었다. 이미 폐허된 고향 땅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예루살렘 성전은 오래전에 파괴되고 없었으며 성벽은 훼손된 채 방치되고 있었다. 한 때 화려한 모습을 하고 떠들썩했던 예루살렘 성 안의 거리는 옛날과 전혀 다른 썰렁한 분위기였을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칠십 년’ 만에 고향 땅으로 귀환하게 된 흥분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앞으로의 삶이 윤택하게 전개되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돌아가서 그들이 행해야 중요한 일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해야 했으며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고 성내의 거리를 정비하고 집들을 다시 지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다니엘 역시 그와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어렵고 힘든 여건들을 직면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실하게 잘 이겨 나가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형편 가운데 있는 다니엘의 마음이 편할 수만은 없었다. 다니엘을 비롯한 신앙이 성숙한 성도들은 그 모든 것이 앞으로 오실 메시아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았지만 어린 성도들은 단순한 민족주의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을 수도 있다.
귀환이 허용되고 나서 첫 번째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당도하였을 즈음인 고레스 왕 삼년에,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한 환상을 보여주셨다. 그것은 ‘큰 전쟁’에 관한 것이었다. 다니엘은 환상을 통해 본 내용이 장래 이스라엘 민족과 연관되어 일어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점은, 장래 일어나게 될 큰 전쟁이 유대인들에게 큰 환란과 고통을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그 전체적인 상황으로 인해 깊은 슬픔에 빠졌다. 물론 그는 미래에 발생하게 될 큰 전쟁의 일반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니엘이 환상을 본 후 깊은 슬픔에 빠졌던 이유는 앞으로 이스라엘을 회복해야 할 이스라엘 자손들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다니엘은 나이 많아 곧 인생을 마감하게 될 노인이었다. 하지만 약속의 땅 본토로 귀환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다지 성숙한 성도들이 아니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를 진정으로 기다리며 그의 구속사역을 소망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직면하게 될 그 어려움을 잘 견뎌야 하는데 그것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큰 전쟁에 관한 환상을 본 다니엘은 세 이레 동안을 슬퍼하며 금식했다. 즉 21일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으며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다. 그는 고기를 비롯한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았으며 얼굴과 몸에 기름을 바르지 않았다. 이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슬픈 마음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 힛데겔(티그리스) 강가에서 본 실제적인 환상(4-9)
(1) 환상 가운데 나타난 그리스도
다니엘은 ‘큰 전쟁’에 관한 환상을 본 후 3주간이 지난 정월 이십사일 다른 여러 사람들과 함께 티그리스 강가에 있었다. 아마도 이스라엘 민족의 귀환이 허용된 사실을 기억하며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때 그는 거기서 아름다운 세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 순금 띠를 띠고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환상과는 다른 실제적인 사건이었다.
그때 다니엘에게 나타난 사람의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개 빛 같았으며 그의 눈은 횃불 같았다. 그리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았고, 그 음성은 무리의 소리의 소리와 같이 들렸다. 그 얼굴과 의상은 영화롭고 위엄 있는 왕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니엘이 환상 중에 본 ‘사람’은 이스라엘과 자기 백성들을 위해 싸우실 자였다. 그 사람은 후일 신약시대 사도 요한을 통해 보이신 분과 같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계1:13-15)
다니엘이 티그리스 강가에서 보았던 그 사람은, 요한이 밧모 섬에서 본 그리스도와 같이 영화롭고 엄위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티그리스 강가에는 여러 사람이 함께 있었지만 다니엘 혼자 그 광경을 보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즉 그와 함께 있던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의 모습을 보지 못했으며 그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
다니엘과 함께 티그리스 강가에 있던 사람들이 가졌던 경험은, 나중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경험했던 것과 흡사하다(행9:27;22:9,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니엘과 바울에게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사람들은 그를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과 함께 있던 자들이 그 특별한 상황에 참여했던 것은 아마도 그들을 증인으로 세우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다니엘과 바울이 각각 처한 독특한 상황 가운데서 혼자 주님을 만났지만,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었으므로 인해 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당시 저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환상의 내용을 보지 못하며 두려워 떨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이 저들의 것이기도 함을 말씀해주고 있다.
그런데 다니엘이 특별한 실제적인 환상을 경험하고 있을 때 티그리스 강가에는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시각적으로 환상을 보지 못하고 청각적으로 아무 소리를 듣지 못했던 사람들이 공포에 빠져 크게 놀라 떨었다. 그로 인해 거기 있던 자들은 그 자리에서 도망하여 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서 다니엘은 두려워하거나 떨지 않았으며 도망하여 숨지도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온 몸에 힘이 완전히 빠졌으며, 자신의 얼굴빛이 변하여 마치 썩은 시체 같이 되었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경외감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 상태에서 다니엘은 천상의 음성을 듣는 가운데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은 잠이 들게 되었다.
다니엘이 티그리스 강가에서 실제적인 사건으로서 환상 중에 보았던 영화로운 모습의 그 사람은 그리스도였음이 분명하다. 그는 다니엘서에서 이미 여러 차례 계시되었던 그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티그리스 강가에서 계시된 특별한 환상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은 감각적인 공포감을 느꼈다면 다니엘은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경외감을 가졌던 것이다.
(2) ‘코람데오’(Coram Deo)
다니엘은 특별한 사건으로서 그리스도의 환상을 본 후, 하나님 앞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거룩하신 심판주로서 영화롭고 엄위한 모습의 그리스도 앞에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있는 다니엘에게는 아무런 아름다운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썩은 시체와 같은 것만 남아 있었을 따름이다.
우리는 흔히 ‘코람데오’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신앙을 표현한다. 이에 대해서 오해하는 자들은 그 말이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는 수단 정도로 여긴다. 즉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개인적인 결단과 그것을 통한 자신의 성실한 삶을 보여주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코람데오’의 진정한 의미는 그런 개념을 훨씬 넘어선다. 이는 하나님 앞에 선 다니엘이 자신의 몸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 옴짝달싹할 수 없을 만큼 무능력한 존재가 된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거룩하고 영화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썩은 것 같이 형편없는 존재가 되어 아름다운 모습이 전혀 남아있지 않는 모습과 연관된다.
오늘날 우리가 ‘코람데오 신앙’을 말할 때도 이와 동일한 관점이 드러나야 한다. 인간들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쭙잖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할 수 없으며,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참다운 의를 만들어낼 재간이 없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 앞에서 무능하고 부패한 더러운 존재일 따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도들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처참한 그런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낮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적인 자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얻게 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도록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 돌리는 성도들의 감사와 찬양의 근본적인 조건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일반 종교윤리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려 할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진리와 더불어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에 놓인 인간이 본질적으로 얼마나 무능하고 부패한 존재인가 하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는 것이 신앙의 바탕이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3. 천사의 도움과 그의 고백(10-13)
(1) 천사를 만남
영화로운 인간의 모습을 한 그리스도 앞에서 온 몸에 힘이 빠진 채 썩은 시체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든 다니엘을 어루만지는 손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로서 앞서 등장했던 가브리엘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니엘은 그 손길을 느끼고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 천사는 다니엘을 일으켜 앉혔다. 천사는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은총 받은 자임을 말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그에게 전달할 사명을 띠고 온 자임을 밝혔다. 다니엘은 그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보내신 특별한 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천사는 깊은 잠에서 깨어난 다니엘이 자신을 하나님의 사자로 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두려운 마음을 가지지 않도록 격려했다. 그리고는 다니엘이 3주간 전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겸손한 자세로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던 때부터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시고자 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 천사는 다니엘에게 그에 대한 메시지를 주기 위해 왔다는 점을 언급했다.
(2) 페르시아 왕국 군주(prince)의 방해와 군장(君長, prince) 미가엘
천사는 다니엘에게 자신이 예상보다 늦게 도착하게 된 이유를 말했다. 그것은 페르시아 왕국의 군주가 자신을 21일 동안 억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페르시아 군주에 의해 억류된 기간은 다니엘이 앞의 2절에서 언급한 세이레 곧 21일 동안 슬퍼하며 금식한 기간과 연관되어 있다. 다니엘은 ‘큰 전쟁’에 관한 환상을 보고 그 의미를 깨달은 후 즉시 슬픔에 빠져 금식하며 자신을 낮추었다.
다시 말하자면, 다니엘은 21일 동안 음식과 음료를 섭취하지 않고 금식함으로써 슬펐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으로 인해 곧바로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이 진정으로 슬퍼하는 모습을 보며 그에게 메시지를 주시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사자를 보내셨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를 중간에서 가로막는 세력이 있었다. 그는 페르시아 왕국을 통치하는 군주였다. 이는 영적인 세계가 육적인 현실과 연결되어있음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의 천사가 인간들의 시간에 해당하는 3주간 억류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우리는 또한 여기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니엘이 티그리스 강가에서 그 환상을 본때는 고레스 왕이 즉위한 지 3년이 되던 해였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고레스 왕은 즉위하지 말자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그 전의 바벨론 제국의 왕들과는 전혀 다른 관용정책을 폈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들의 본토 귀환을 허용했던 것이다.
그런 역사적인 현실 가운데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흥 페르시아 제국과 고레스 왕을 훌륭한 우방이라 판단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사로잡혀와 고생하는 저들에게 가나안땅 본토로 귀환을 허락하는 것은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이 보았던 환상의 전 과정을 통해, 페르시아 왕국과 군주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악한 세력임을 분명히 밝혔다. 이는 페르시아가 이스라엘의 우방이 아니라 도리어 견제해야 할 위험한 적국(敵國)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과 한편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군주는 다니엘에게 가고 있던 하나님의 천사를 무려 21일 간이나 가로막아 억류했다. 그 기간 동안 천사는 페르시아의 진영에 머물고 있으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 21일 동안 다니엘은 깊은 슬픔에 빠져 금식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는 당시에도 실제적인 현상과 더불어 영적인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때 억류된 천사를 도와 문제를 해결한 자는 군장(君長) 미가엘이었다. 그가 페르시아 진영에 억류되어 있는 천사를 도와 다니엘에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것은 다니엘을 위한 것이었으며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니엘서 본문에 언급된 미가엘은 과연 누구인가?
아마도 그 천사는 예수 그리스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앞에서 처음 다니엘에게 등장했던 바로 그 영화로운 모습을 한 분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다니엘과 이스라엘 민족을 궁극적으로 도울 수 있는 자가 없으며, 오늘날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대군(大君) 미가엘에 대해서는 다니엘서 12장에 더욱 분명하게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천사 미가엘에 관한 기록은 신약성경 유다서와 요한계시록에 언급되어 있다. 유다서에는 천사장 미가엘이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시체를 두고 마귀와 다투어 변론하는 특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유9,10)
천사장 미가엘은 모세의 죽은 시체를 두고 마귀와 다투었다. 여기서 천사장은 천사들 중 으뜸으로서 ‘천사들을 통치하는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요구와 지시에 따라 사탄과 싸우는 천사장이었다. 유다서의 위 본문에서 모세의 시체와 관련된 문제를 두고 마귀와 다투는 미가엘의 존재는 평범한 신분일 수 없다.
한편 요한계시록에는, 하늘에서 미가엘과 용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사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미가엘의 세력과 용의 추종자들이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단순히 지상에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공중에서도 동시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임을 말해주고 있다. 물론 여기의 하늘이란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영역을 의미한다.
결국 천상으로부터 임한 심판의 싸움에서 그 용은 천사장 미가엘에게 패배하여 공중에서 쫓겨나 그 자리를 잃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귀가 공중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본격적인 용의 발악이 지상에서 시작되었다. 요한계시록의 내용 가운데는 그에 대한 분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계12:7-9)
우리는 여기서 미가엘의 원래적 신분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수의 학자들은 미가엘을 그리스도와 동일한 존재로 이해한다. 구약성경에는 그리스도께서 천사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기도 했으며 동시에 인간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가나안 땅에 진입하는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천사와 인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 여호수아서 본문에는 그에 대한 분명한 기록이 나타난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수5:13-15)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진입하는 관문인 여리고성 부근에서 칼을 빼들고 여호수아 앞에 선 자는 그리스도였다. 인간의 모습을 한 천사인 그가 군대장관으로 자신을 밝혔던 것은 대적자를 대항해 싸우는 최고 지위에 있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신 것이다. 여호수아가 그 말을 듣고 즉시 땅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한 것은 그가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메시아로서 하나님 자신이었으므로 여호수아의 경배를 만류하지 않으셨다.
또한 그가 여호수아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수5:15)고 한 내용의 말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있는 말씀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과 동일하다(출3:5; 행7:33). 미가엘을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과 연관된다.
여호수아가 서 있던 땅이 거룩했던 까닭은 그곳이 단순한 약속의 땅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만일 그러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한 가나안 땅에서 항상 신발을 벗은 채 맨발로 다녀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땅이 거룩한 땅이었던 이유는 하나님 즉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거기 계셨기 때문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약속의 땅 가나안 정복은 그리스도께서 주도하신 일이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 건너 여리고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리스도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장관의 모습으로 칼을 빼들고 그에게 보이셨던 것은 앞으로 가나안 땅에서 이루어지게 될 하나님의 사역을 보여주신 것이다. 즉 그 때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앞으로 가나안 땅에서 전개될 메시아 사역에 연관되어 있다.
이와 같이 다니엘서에서 군장(君長)으로 표현된 미가엘은 그리스도이다. 그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 전쟁하는 천사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여호수아 앞에 군대장관으로 나타나셨던 그리스도와 조화된다. 그가 곧 하나님의 백성을 궁극적으로 구원하실 분이며 도우실 자이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직 그의 도움을 통해 진정한 삶을 보장받게 되는 것이다.
4. 다니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메시지(14-19)
하나님께서는 깊은 근심에 빠져 있던 다니엘에게 천사를 통해 위로의 말씀을 전하셨다. 말일(末日) 곧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장래에 일어나게 될 일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천사를 보내 거룩한 뜻을 알려주셨던 것이다. 다니엘은 처음 그 천사의 말을 듣고 나서 기쁘고 반가워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을 땅을 향해 둔 채 어안이 벙벙해 했다.
그것을 본 후 ‘인자 같은 이’(the one who looked like a man)가 다니엘의 굳은 입술을 어루만졌다. 그리하여 다니엘은 입을 열어 앞에 서 있는 자를 향해 말했다. 그 환상을 봄으로써 힘을 얻고 즐거움이 더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근심이 가득하게 되어 힘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편안하게 호흡을 할만한 정도의 힘도 남지 않아 대화를 나눌 기력마저 없다는 것이었다.
그 때 또 ‘인자 같은 이’가 다니엘을 어루만지며 강건하도록 힘을 더해주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은 다니엘이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언급했다. 따라서 그에게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며 평안하고 강건한 마음을 가지도록 격려했다. 그 말을 들은 후에야 다니엘에게 힘이 솟아났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면 그것을 들을 수 있게 되었음을 말했다.
5. 세상 왕들과 싸우는 천사(20,21)
하나님께서는 환상과 더불어 다니엘에게 위로의 말씀을 주셨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평화를 누리게 되리라는 약속을 하지는 않으셨다. 그는 도리어 앞으로 발생할 ‘큰 전쟁’에 관한 예언을 하셨다.
하나님의 진리를 저항하는 사악한 전쟁은 세상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물론 그것은 실제적인 현상과 더불어 일어나는 영적인 전쟁을 의미한다. 즉 여기서 말하는 영적인 전쟁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 없는 전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 전쟁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는 싸움으로서 실체로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의 천사는 다니엘에게 자신이 무엇 때문에 왔는지 알고 있는지 물었다. 그러면서 이제 자기는 돌아가서 페르시아 왕과 싸우게 될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겠노라고 말했다. 그러면 그 후에는 새로운 헬라 왕이 등장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예언했다. 이는 헬라 제국의 세력이 등장하게 되면 또한 그에 맞서 싸우겠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에게 주어진 이 천사의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페르시아 왕과 헬라 왕이 실체적인 지상 왕국의 구체적인 인물들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천사는 적어도 그들과는 다른 영적인 존재이다. 실체를 지닌 지상 왕국의 왕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인 천사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여간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시내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 이미 그 점에 대한 분명한 말씀을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적들에 맞서 싸우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자를 미리 보내 싸우시겠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궁극적인 위로가 되며 힘이 된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출23:20-21);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 것이며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출23:27,28)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일반적인 눈에 보이지 않는 사자(천사:angel)를 지상에 보내시겠노라고 약속하셨다. 이는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에 대항해 실제적으로 싸우는 자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앞서 싸우신 뒤를 따라가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면 된다. 이에 대해서는 오늘 우리시대 역시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앞서 행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그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성도의 도리인 것이다.
다니엘서에는 대적자들을 대항해 궁극적으로 싸울 자는 군주(君主) 미가엘 밖에 없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악한 세력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무력을 동원해 싸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오직 내가 먼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으로 네게 보이리라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적하는 자는 너희 군주(君主) 미가엘 뿐이니라"(단10:21)
군주 미가엘은 그리스도를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니엘서 전반에 걸쳐 여러 차례 천사와 사람의 특별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이는 곧 군주 미가엘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외에도 구약 성경에는 그리스도께서 천사와 특별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경우가 많이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로서 인간의 모습을 띠고 있었지만 대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니엘서에는 그 천사의 이름을 ‘미가엘’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서 본문에서 그 천사는 먼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을 보여주리라고 말했다. 그것은 곧 메시아와 연관되어 있다. 다니엘을 비롯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그것이 삶의 본질적인 지침이 되며 근본적인 의미가 된다.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참된 진리가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발생할 수 없다.
우리가 또한 미가엘을 그리스도라 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 가운데 하나는 그가 사탄에 속한 대적자들을 대항해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타락한 세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에 서있다. 본문에 언급된 페르시아 왕과 헬라 왕뿐 아니라 세상에 속한 모든 왕들이 다 그렇다. 그들이 때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대적하는 자의 세력에 속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야할 점은, 자칫 잘못하면 적군을 아군으로 착각하여 혼선을 빚게 될 우려가 있다는 사실이다. 신앙이 성숙한 성도들은 그 점을 깊이 인식하는 가운데 영적인 싸움에 임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악한 자에 대항해 싸울 능력을 소유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광호 목사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환상 (다니엘 10:1-9)
이 환상의 연대는 "고레스 왕 삼 년" 이라고 되어 있다. 즉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한 이후의 통치 3년이었다. 그후 다니엘은 그를 알게 되었고, 그의 신하가 되었다.
Ⅰ. 이 예언의 일반적인 이념을 살펴보자. "그 일은 참된 것이었다" (1절).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그와 같이 참되다. 다니엘이 본 환상들은 모든 것이 진실이었다. 그는 한 예언자의 말씀에 대해 이것을 엄숙히 증명한다. Et hoc paraturmfjsep est verificare-즉 그는 그것을 기꺼이 증명했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하늘로부터 말해진"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확고한 것이요 신뢰할 만한 것이리라. "그러나 지정된 시간은 길었다" (KJV 만 이렇게 번역됨-역주). 안티오커스 통치의 말년에 이르기까지의 약 3백 년 동안이었다. 그동안 그것의 실현을 기다려온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영적이고 영원한 사물을 말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이 예언에서 세계의 종말과 죽은 자들의 부활이라는 먼 미래의 일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작정된 시간이 길었다" (우리 성경-" 큰 전쟁에 관한 것이라" -역주)라고 말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예언이라기 보다는, 역사인 것처럼 그에게 명백해졌다. 그는" 그 일을 이해하고 있었다" 너무도 명백하게 다니엘에게 전해졌고, 또 그가 분명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자기가 "그 환상을 이해했다" 고 고 감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니엘에게 공상력이 아니라 이해력을 낳았던 것이다.
Ⅱ. 다니엘은 이 환상을 보기 전에 고행을 했다. 그것은 그가 환상을 기대해서 한 것은 아니었다. 그 고행은 순수하게 고통받는 백성들에 대한 경건한 동정과 신앙심의 정신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다니엘은 "만 3주간을 슬퍼하였다" (2절). 그것은 다니엘 자신의 죄와 자기 백성들의 죄, 그리고 그들의 환란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다니엘의 슬픔의 실제의 이유는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자유가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포로된 땅에 남아있었던 많은 유대인들의 태민과 무관심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 포로가 된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부여된 특권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다니엘을 더 괴롭혔던 것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니엘도 그렇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자신들을 정당화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니엘의 슬픔의 이유는 유대인들이 적들에 의해서 성전 중건을 방해받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적들은 "모사들을 고용하여 저들을 쳤고, 저들의 목적을 좌절시키려 했다" (스 4:4, 5). 그리고 "고레스 시대에도 계속" 그렇게 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캄비세스(Cambyses) 곧 아닥사스다에게서도 자기들의 뜻을 성취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아냈다. 아닥사스다는 스구디아인과의 전쟁으로 고레스가 부재 중일 때 나라를 대신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가 이 세상에서 몹시도 느리게 진행되고, 많은 방해를 받고, 그 우방은 약한데 적군은 강한 것을 보고 슬퍼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슬퍼하는 동안, 다니엘은 "좋은 떡을 먹지 않았다." 음식없이는 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주 적게 먹었다. 먹는 것의 양이나 질에 있어서도 스스로 금욕을 하였다. 사실상 단식이나 다를 바 없었고, 그의 슬픔과 고행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가 자주 먹던 좋은 떡을 먹지 않았다. 단지 조야하고 거치른 것만을 먹었다. 그 떡은 자기 육체를 보호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 이상은 먹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장식품이나 맛있는 진미는 고행의 날에는 어울리지 않는 법이다. "다니엘은 세 주간이 차기까지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했다" (3절). 비록 다니엘은 대단히 늙었지만 몸이 쇠약해 있으므로 영양이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고 말할 수도 있었으리라. 또 대단히 지위가 높아서 맛좋은 음식을 계속 먹어왔으므로, 그것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므로 만일 그가 그렇게 금욕을 했다면, 그것은 그의 건강을 해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다니엘의 신앙심을 입증하고 돕는데 필요하다면, 그는 그와 같이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들을 부인하지 못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평범한 생활을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두자.
Ⅲ. 다니엘이 환상 가운데서 보았던 영광스러운 사람에 대한 서술이 있다. 그 사람은 분명히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 자신 외에 그 어떤 분도 아니았는 점이 일반적으로 승인되고 있다. 그는 헛데겔 강변에 있었다(4절). 아마도 그 강가를 걷고 있었을 것이다. 산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이삭이 명상하기 위해서 언덕을 거닐었던 것처럼, 신앙과 묵상을 위해서 강가를 거닐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은 지위가 있는 자였으므로, 약간 떨어진 곳에는 그의 종들이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다니엘은 "눈을 들어 바라다 보았다." "한 사람," 단 한 사람, 곧 "그리스도 예수 그 사람" 을 보았다. 그분은 분명히 그리스도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에게 나타났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계 1:13-15)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옷은 제사장의 옷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큰 날인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입은 대로 "세마포" 를 입으셨다. "그의 허리" (요한의 환상에서는 그의" 가슴)는 우바스의 정금으로 만든 "황금의 띠가 둘려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그것의 종류에 있어서 최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 허리를 동인 것" 은 그가 아버지의 종으로서 우리를 구속하는 역사에 즉각적으로 그리고 부지런히 임하려는 그의 자세를 나타낸다. 그의 모습은 온순하였다. "그의 몸은 황옥" 같았다. 그이 용모는 경외스러웠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무서워 떨 정도였다. 왜냐하면 그의 얼굴은 눈을 현란시키는 "번갯불"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눈은 마치 횃불처럼" 빛났다." 그의 "팔과 다리" 는 "빛난 놋" 과 같았다(6절). 그의 목소리는 우렁찼고, 마치 "우리들의 소리" 처럼 대단히 강하고 날카로왔다. Vxo Dei-즉 하나님의 목소리는 즉 사람들의 목소리를 제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영광스럽게 나타나셨고, 그런 그리스도의 현현은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1. 그리스도를 지극히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분으로 생각하게 한다. "이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을 그에게 바치자.
2.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겸비를 찬탄하게 한다. 그리스도는 종의 형상을 입고, "자신을 비우시사" 너울을 내림으로써 그 모든 광채를 가리셨다.
Ⅳ. 그리스도의 출현이 다니엘과 그의 수행원들에게 끼친 놀랄 만한 영향력, 그리고 그들을 두려워 떨게 한 무서움이 서술되어 있다.
1. 다니엘의 수행원들은 "그 환상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그 환상을 보는 영광을 받는다는 것은 적합한 일이 못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계시도 있다. 아무도 그러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제외하지 않는 이상 제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환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였던 다니엘에게만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사도 바울의 동료들도(다메색 도상에서)" 빛" 은 보았다.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다" (행 9:7; 22:9).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리워진 것이 알려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 받는 영광임을 주목하자. 그리스도는 "자신을 그들(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나타내시지만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으신다" (요 14:22).
그러나 그들이 환상을 보지 못했지만, 그들도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들이 들은 목소리 때문인지 혹은 그들이 어떤 이상한 진동이나 격동을 느껴서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다" 아마도 힛세겔 강변에 서 있던 버드나무사이에 숨었을 것이다. "양자(養子)의 영" 을 받지 못한 많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속박의 영" 을 가지고 있다.
다니엘의 수행자들이 처했던 놀라움은 환상의 사실성에 대한 확인이 된다. 그 환상은 다니엘만의 허황한 꿈이나 그 자신이 만들어 낸 과열된 상상력이 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 수행원들에게도 진실하고 강력한 그리고 이상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었다.
2. 다니엘만은 그 환상을 보았다. 그러나 그도 그 모양을 똑바로 보고 견딜 수는 없었다. 그것은 다니엘의 눈을 부시게 했을 뿐만아니라 그의 영혼까지 압도하였다. 그래서 "그의 몸의 온 힘이 다 빠져버렸다" (8절). 모세처럼 다니엘도 "나는 심히 두려워 떨었다" 라고 말했다. 그의 기력은 이 영광스런 환상에 대한 진지한 숙고나 그 환상의 두려움에 대하여 자기의 마음을 강화시키는 데에 모두 기울여졌기 때문에, 그의 몸은 기력이 하나도 없는, 생명이 없는 몸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다니엘에게는 힘이 없었다. 거의 시체가 되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였다. 혈색이 없어졌다. 그의 "아름다움" 은 "썩은 듯" 하였고, "힘이 다 없어졌다." 아무리 지위 높고 선량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대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는 살 수가 없다. 그 영광의 빛을 조금만 보아도 여기서의 다니엘처럼 거의 죽게 된다. 그러나 영광을 입은 성도들은 있는 대로의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며 그 광경을 견딜 수 있다.
그러나 비록 다니엘이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고 그토록 기절했을 지라도, 그는 그리스도의 "말소리는 들었고," 알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닫도록 해야 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우리들의 경외심이 오히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도록 하는 공포심으로 변하지 아니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환상이 하나님을 두려움에 떨게 했을 그 때에, 곧 그의 목소리가 하나님을 진정시키고 위로하여, 그를 거룩한 평온 속에 눕혀 잠들게 하였음이 분명하다.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나의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느니라" (9절). 다니엘은 그가 환상을 보았을 때, 가장 겸손한 자세로 엎드렸고, 잠들었다. 그것은 그가 듣고 보는 것에 대해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겨기에 매혹되어서였다. 죄책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얼마나 두렵게 느껴질 것인가? 그러나 그의 말씀 가운데서 그들의 마음을 평온케 하고 평안하게 하는 것이 충만히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장래 일에 대한 환상 (다니엘 10:10-21)
그리스도가 다니엘에게 하신 말씀으로 인하여 다니엘에게 더 많은 근심이 주어진다. 여전히 다니엘은 놀라고 있고, 자기 자신을 회복하는데 대단히 어렵고 느리다. 그러나 다니엘은 여전히 "선한 말과 위안이 될 말"로 응답을 받고" 지원" 을 받는다. 어떻게 다니엘이 점차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며 같은 취지를 가진 여러 가지 구절들을 수집하는가를 살펴보자.
Ⅰ. 다니엘은 대경실색하여,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기가 대단히 어려움을 알았다. 다니엘을 "만졌던 손" 이 먼저 "다니엘의 무릎과 손바닥" 을 일으킨다(10절). 힘과 위로가 일반적으로 오랫동안 낙담하여 불안해하던 사람들에게는 점차적으로 온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그들은 먼저 약간의 도움을 받지만 후에는 더 큰 도움을 받는다. "이틀 후에는 그가 우리를 소생시킨실 것이고, "" 사흘 후에는 그가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작은 일의 날이라고 경멸" (슥 4:10)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비의 시작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
그후 천사가 다니엘을 도와 일으켰을 때에, 다니엘은 "떨면서 일어난다" (11절). 다시 넘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기" 이전에, 먼저 저들이 자기 자신들의 약함을 깨닫게 하신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그러나 나중에 그의 수족에 많은 힘이 생겨서 견고하게 설 수 있었을 때에도, 그는 "그의 얼굴을 땅에 향하고 말을 하지 아니했다" 고 한다(15절). 다니엘은 무엇을 들었는지 몰라 놀란 사람처럼 벙벙하여, 두려움과 감탄에 젖어서, "자기보다" 훨씬 높으신 분과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다. 그는 "잠잠했다." "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자신을 약간 되찾을 수 있었다. 마침내 다니엘은 그의 발만 아니라 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다니엘은 "그의 입을 열었다" (16절). 그리고는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침묵한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려 했다. 그 이유는 그가 감히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도저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오 나의 주여!(비록 천사들은 자기 자신을 예언자들과 "동역자인 종" 이라 불렀음에도 불구하고계 22:9), 다니엘은 천사를 이렇게 불렀다), 다니엘은 천사를 이렇게 불렀다) 이 이상을 인하여 슬픔이 내게 더하나이다. 그 이상은 갑자기 격렬하게 나타났으며, 내가 당신의 빛과 순결을 보았을 때, 죄로 가득찬 슬픈 마음이 내게 임하나이다."
자기의 순결을 상실한 인간은, 순결을 간직한 축복받은 천사들의 영광을 보거나 생각할 때,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음을 주목하자. "근심이 내게 더하므로 천사들을 향하여 머리를 들 힘도 없나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마치 반쯤 귀먹은 사람처럼 다니엘은 불평하기 시작한다(17절). "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의 출현과 하나님의 뜻을 감당할 만한 힘이 없나이다. 아니, 내게는 호흡조차 없나이다." 그것으로 다니엘은 "실신" 하였으므로, 숨을 계속 쉴 수도 없었고, 생기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라는 보물이 "질그릇" 에 담겨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은 천사의 모습이 아니라 "사람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큰 다행인가를 살펴 보라. 우리가 무엇을 원하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에 대해서 투정댄다는 것은, 마치 시내 산에서 "당신이 우리에게 말하면 들을 것이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하게 하면 우리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요" (출 20:19)라고 이스라엘인들이 모세에게 말했던 때의 마음과 똑 같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만일 다니엘이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면, 우리도 어떻게 견딜수 있었겠는가?
이제 다니엘은 그의 무죄한 침묵에 대한 변명으로서 "내 주여, 이종이 어찌 능히 내 주로 더불어 말씀할 수 있으리이까?" (17절)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갈 때면, 언제나 우리와 거룩한 천사들 사이에 막대한 거리와 불균형이 있으며, 우리와 거룩한 하나님의 사이에도 무한한 거리가 있고, 조금의 균형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마땅히 든다. 또한 우리는 "어두움의 이성(理性)에 의해서 우리들의 말을 늘어놓을"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티끌과 재와 같은 우리들이 어떻게 영광의 여호와께 말할 수 있겠는가?
Ⅱ. 다니엘과 이야기하도록 그리스도에 의해서 선택된 거룩한 천사는 다니엘에게 가능한 모든 격려와 위로를 주었다. 여기에서 다니엘을 "만지고" "이야기했던" 그 천사는 다니엘이 그의 환상 가운데서(5,6절) 보았던 그 사람이 아니다. 그가 환상 가운데서 보았던 사람은 그리스도였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천사는 8장 16절에서 그리스도가 다니엘에게 지시하도록 전에 한 번 보냈던 천사 가브리엘으로 보인다. 그와 같은 영화로운 출현(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영광의 하나님의 출현처럼 행 7:2)은 천사의 할 말에 주의를 끌고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요한이 죽은 자처럼 그의 발 앞에 엎드렸을(계 1:17) 경우에도 요한을 위로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리스도가 그 일를 천사를 시켜서 행하셨다. 그 천사는 다니엘이 그 이전에 보았던 환상에서 보다는 훨씬 낮은 영광에 있는 천사였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의 아들들(인생)의 모양과 같았고" (16절 한글성경은 그대로 "인자")" 사람의 모양 같은 것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18절). 이전처럼(9:21), "그가" 그저 "나타났을 때," 다니엘이 환상을 본 경우처럼 그렇게 혼란에 빠지지는 아니했다. 그러므로 이 천사는 다니엘에게 세 번째로 나타난 것이다.
1. 천사는 다니엘을 돕기 위해서 그의 "손을 뻗쳐 어루만져," "그의 손바닥과 무릎을 일으켜" 세운다(10절). 여전히 다니엘이 엎드려 있자, 천사는 "그의 입술을 만졌고" (16절). 여전히 어리벙벙하자 다시 천사는 다니엘을 "만졌다" (18절). 그리고 다니엘을 강건케 하였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는 여전히 비틀거리면서 떨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따라오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은 우리의 모든 슬픔을 치료하고 우리의 나쁜 것을 고치는 데 가장 훌륭한 것임을 주목하자.
하늘로부터 한 사람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며 우리의 입을 열게 하며 우리를 강건케 하신다. "우리에게" 선한 일을 할 "마음을 주시고 할" 힘을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 천사는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은 자임을 다니엘에게 확신시킨다. "너는 크게 은총을 받은 사람이니라" (11절). 19절에서도 다시" 크게 은총을 받은 자" 라는 말이 반복된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확신 이외에 성도들의 상심한 영혼을 재생시킨는데 효과적인 것도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을 주목하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이야말로 크게 은총(총애)을 받은 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위로를 받는다.
3. 천사는 좋은 말과 위로의 말로써 다니엘의 희망을 격려하였고, 그의 두려움을 진정시켰다. 천사는 다니엘에게 "다니엘아, 두려워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19절)라고 말했다. 아무리 자애로운 어머니도, 천사가 여기에서 다니엘을 위로했던 것 이상의 열심과 사랑을 가지고서, 슬퍼하고 놀란자녀를 위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어떤 재앙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평화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이 그들에게 평안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말씀의 근거 위에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평안하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여호와를 기뻐하는" 그 평화가 바로 "그들의 힘" 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위대한 능력으로써 우리를 치실"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우리의 약점을 이용하실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강건하게 하실 것이다" (욥 23:6). 바로 여기서 천사가 그렇게 했다. 환상의 광채로 인해서 다니엘에게 힘이 다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강건함을 허락하셨고, 다니엘은 그것을 알았다(19절). "그가 이같이 내게 말하매 내게 곧 힘이 났도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써 생명을 주시고, 그의 백성들에게 강건함과 기백을 주신다는 것을 주목하라.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강하라!" 하고 말씀하신다면 그 말씀에 따라서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제 다니엘은 하나님의 강건케 하는 말씀과 은총의 효능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행할 준비가 되었다. "이제 주께서 말씀하시옵소서. 나는 들을 수 있고, 받을 수 있나이다.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서 행할 준비가 되었나이다. 그것도 주께서 나를 강건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는 자들에게(여기에서의 다니엘처럼) 하나님이 "힘을 더하신다" 는 것에 주목하자(사 40:29).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힘에 의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건케 하시기를 기뻐하실 때, 우리는 그것을 선하게 이용해야만 하며, "여호와여 말씀하소서. 당신의 종이 듣나이다" 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뜻에 우리가 따르도록 하자. 그러면 그 뜻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그 뜻 안에서 완전히 설 것이다.
4. 천사는 다니엘의 단식과 기도가 하나님 앞에 기억되었다고 확신시킨다. 마치 고넬료에게 말하는 것처럼(행 10:4) "두려워말라. 다니엘아" (12절)라고 말한다. 하늘로부터 나타난 이상한 사신을 보고 비보가 전달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3주간의 고행과 간구를 통해서 "비범한" 사신을 하늘에 보냈고, 그가 평화의 올리브 가지를 가지고 되돌아 올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며-이것이 기도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이것으로 기도를 다듬어야 한다-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이신 바 되었느니라." 마치 이전에 기도를 시작하던 때와 같았다(9:23).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이" 정적한 자에게는 "번개빛" 이듯 정직한 자들의 기도를 듣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이다(시 119:130). 우리가 하나님을 의무의 길에서 바라보기 시작하는 첫날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자비의 길에서 바라보기 시작하는 첫날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자비의 길에서 기꺼이 만나신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준비가 되어 있다.
5. 천사는 교회를 위한 다니엘의 기도가 하나님께 수락되었다는 증거로서 교회의 미래를 상태를 다니엘에게 지시해 주기 위한 목적에서 보냄을 받았다고 알려 주었다. "무슨 이유로 내가 네게 왔는지 아느냐? 만일 내가 너에게 무슨 사명으로 왔는지 안다면 너는 그렇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이미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훨씬 더 거기에 잘 순응하게 될 것이다. "나는 네 말로 인해서 왔느니라(12절). 너의 기도에 은혜스러운 응답을 가지고 온 것이니라. "이와 같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은 "내가 여기 있다" (사 58:9)라고 말씀하신다. 기도의 능력을 보라!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가! 얼마나 놀라운 발견들이 그 기도 안에 있는지를 보라!
그러면 천사는 무슨 사명으로 다니엘에게 왔는가? 천사는 다니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14절). "내가 말일(末日)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다니엘은 대단히 호기심이 강한 사람이었고, 그의 생애의 대부분은 감추어진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래의 것들에 대한 지식을 대단히 좋아하였다. 다니엘은 언제나 교회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교회의 상태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그에게는 특별한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은 자기가 일생 동안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좋은 일인가를 알았으리라. 다니엘은 자기 백성들이 현재 만난 난관을 슬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난과 속에서 그를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천사는 그의 백성들 앞에 아직 더 큰 난관이 남아 있음을 말해야 했다. "보병을 보고 달아난다면, 기병대와 어떻게 싸우랴?" 우리 앞에 더 큰 난관이 놓여있다는 것을 알면, 현재의 고난에 대한 불평은 완화될 것이다.
예언이 중지된 이후, 그리고 메시야의 출현의 때가 가까이 온 때, 즉 교회의 "마지막 날" 에 그의 백성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인지를 다니엘은 알아야 했다. "그 이상(환상)은 오래 후의 일이다." 이 환상이 교회에게 준주요 의도는, 이 환상이 있은 후 약 3백 년에 안티오커스 시대에 성취될 것을 예견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제 천사가 다니엘에 알리도록 위임받은 것, 그리고 다니엘이 천사에게 기도하도록 격려된 것은 어떤 호기심이 강한 명상도 아니며, 도덕적 예지도 아니다. 또 다니엘의 전망도 아니다. 또한 비록 그가 천사이었지만 그것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교회에 다 전하라고," 사도 요한에게 명령되었던 천사의 전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였다(계 1:1). 여기서도 그렇다. "내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을 네게 보이리라" (21절). 즉 하나님의 확정된 뜻과 예지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령" 은 기록된 것이다. 그것은 "글(책)" 이라 변경될 수 없다. "나는 내가 기록한 것을 기록하였느니라" (영문은 이러하다). 세상에 공포된 바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위한 책이 있는 것처럼, "그의 보고 가운데 봉인된" 바 하나님의 감추어진 뜻을 위한 책도 있다. 그 양자는 모두 "진리의 글" (책)이다. 아무 것도 그것에 덧붙여지거나 감해질 수 없다.
" 감추어진 것들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단지 때때로 극히 적은 부분만이 하나님의 의사의 책에서 베껴져, 여기에서 다니엘에게서처럼 교회를 위해 예언자들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그것들이 "계시된 것들" 이다. 심지어는 "이 율법의 말씀들" 이다. 그것은 "우리와 또 우리 자손들에게 속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진리의 글" 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를 연구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평화" 에 속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6. 천사는 다니엘에게 교회의 대적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했다. 그 적대자들로부터는 고난이 다시 생길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교회의 보호자들을 설명한다. 이 보호자들에게서는 최종적인 승리와 안전을 확신할 수 있다.
(1) "지상의 왕들" 은 교회의 적이며,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를 대적하고,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기 때문이다(시 2:2). 천사는 다니엘에게 그가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은혜로운 응답을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바사의 국왕이 이십 일 일 동안 천사를 가로막았다." 그 3 주간은 꼭 다니엘이 금식하며 기도하던 기간과 같다. 바사의 아닥사스다왕은 유대인 사건을 방해하는 일에 바빴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었던 모든 재앙을 유대인들에게 행했다. 그리고 천사는 아닥사스다왕의 모든 일을 방해하도록 고용되었다.
그래서 천사는 지금까지 다니엘 방문을 부득이 연기했던 것이다. 그것은 천사가 한 때, 한 곳밖에 나타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의 말처럼, 바사의 이 새로운 왕은 성전을 훼방함으로써 천사가 다니엘에게 가져와야 했던 좋은 소식을 방해하였다. 지상의 왕들과 그 왕들의 제국들은 분명히 때로는 교회에 유익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훨씬 더 많이 교회에 해로웠었다. "내가 바사의 왕들에게서 나간 후에, 즉 그들의 왕국이 유대인에 대한 불친절 때문에 몰락한 후에, 헬라의 왕이 올 것이다(20절). 바사 왕국처럼 처음에는 유대인에게 호의적이었던 헬라 왕국도 곧 유대인들에게 성가신 나라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투하는 교회의 상태이다. 하나의 적이 제거되면, 또 다른 적을 만나게 된다. 9개의 머리를 가진 뱀 히드라의 머리가 바로 저 옛뱀의 머리이다. 하나의 폭풍이 지나가면, 곧 다른 폭풍이 일어난다.
(2) "하늘에 계신 하나님" 은 교회의 보호자이시며, 또 보호자가 되실 것이다. 그리고 그 밑에서 하늘의 천사들도 교회의 안내자와 보호자가 될 것이다.
[1] 천사 가브리엘은 여기에서 교회를 섬기는 일에 대단히 분주하다. "바사의 왕에 대적하여" 21일 동안 그의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 "바사와 왕과 함께 남아서" 유대인 사건을 돌보는 대사 역할을 하느라고 분주하였던 것이다(13절). 그리고 비록 바사의 왕이 유대인들에게 많은 나쁜 일을 행했지만(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그것을 방해하시지 않으셨다면 훨씬 더 많은 재난이 임했을 것이고, 그들은 완전히 멸망했을 것이다. 가브리엘은이 사명을 다니엘에게 급속히 전하고 난 뒤, "바사의 왕과 싸우기 위해서 돌아갈 것" 과, 계속해서 그를 대적할 것, 그리고 결국 그 교만한 왕을 겸손하게 복종시킬 것을(20절) 결심한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헬라 제국에서도 마찬가지의 또 다른 재난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
[2] 여기에 우리의 왕이신 미가엘이 나타난다. 그는 교회의 위대한 보호자이시며 군장(君長) 중의 첫째이다(13절). 어떤 사람들은 이 미가엘을 피로 된 천사이나 가장 높은 천사장으로 이해한다(살전 4:16; 유9). 또 다른 사람들은 "천사장 미가엘" 이 그리스도 자신이며, 다니엘이 이상 가운데서 보았던 "계약의 천사," 천사들의 주(主)라고 생각한다(5절). "미가엘이 나를 돕기 위해서 왔느니라" (13절).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적하는 자는 미가엘 이외에는 아무도 없느니라" (21절).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시지 천사들이 머리인 것은 아니다(히 2:5). 그는 교회의 일을 주재하시며, 실제적으로 교회에 선을 베푸신다. 그리스도는 "천사들을 주관" 한다고 했다. "구원의 상속자들" 을 위해서 천사들을 부리는 자는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가 교회의 편이 아니라면, 그것은 최악의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다윗과 교회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도다" (시 118:7).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시 54:4).
다니엘은 언제까지 살아 있었는가?
"바사 왕 고레스 삼년에 한 일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에게 나타났는데
그 일이 참되니 곧 큰 전쟁에 관한 것이라 다니엘이 그 일을 분명히 알았고 그 이상을 깨달으니라" (단10:1)
위의 말씀은 다니엘이 바사 왕 고레스 3년까지도 살아 있어서 그에게 전쟁에 관한 이상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니엘서 1:21에서는 다니엘이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어느 것이 옳은가? 다니엘은 고레스 왕 제3년까지도 살아 있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고레스 왕 원년까지만 살았는가?
많은 주석가들이 다니엘 10:1과 1:21을 비교하면서 저자가 그 자신의 후에 언급에 기초해서 실수를 범했다고 비난한다. 다니엘 1:21은 독자들에게는 다니엘은 고레스 왕 제1년에 죽었다고 해석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만일 다니엘이 18세에 바벨론에 잡혀 갔다면(대략 주전 605년) 그리고 그가 아직은 살아 있다면 그는 이제 88세가 되었을 것이다.1)
그러나 여기 다니엘 10:1에 고레스 왕 제 3년은 주전 537년으로 포로의 첫 그룹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으나 다니엘과 많은 다른 사람들은 뒤에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2) 따라서 다니엘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면 1:21은 어떻게 볼 것인가?
첫 구절(단 1:21)은 다니엘이 더 이상 살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유대인 포로들이 그들의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허락 받는 영광스러운 해까지 살았음을 기록한다(참고, 에스라 1:3). 그리고 두 번째 구절(단 10:1)은 다니엘이 그 시간 이후까지도 살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더구나 있었다(continued)는 말은 단지 그가 그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말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바벨론에 계속 있었다는 뜻이다. 우리말 표준새번역이 그 뜻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하였다. "다니엘은 고레스 왕 일년까지 왕궁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그는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한 후까지 살았으나 메대 파사가 나라를 접수하였으므로 그 시간 이후에 바벨론에서 그의 정부 요직을 보유하는 것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3)
이상에서 본대로 다니엘 1:21은 다니엘이 죽었을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왕들의 통치의 기간으로 산출하였다.
그의 생애는 권력의 흥망에 연루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느브갓네살 2세(주전 602년부터), 아멜 말둑(Amel Marcuk, 주전 556년부터), 나부네이드(Nabunaid, 주전 555년부터), 그리고 마지막으로 538년 바벨론을 정복한 고레스(Cyrus)였다. 주전 602-538년의 군주들의 통치 기간에 정말 다니엘은 유익하고 탁월한 삶을 살았다.4) 과연 다니엘은 이방 나라에서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의 지위와 역할 속에서 밝히 보여 준 선지자였다.
http://revdavidsuh.com/bbs/view.php?i//cafe.daum.net/correcttheology
'구약의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니엘 9-10장 주석 (0) | 2021.08.11 |
---|---|
다니엘의 70주 예언적 연대기 및 해설 (0) | 2021.08.11 |
다니엘 9장 70이레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0) | 2021.08.11 |
성막 구조 (0) | 2021.08.05 |
에스라 2장 주석 (0) | 2021.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