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의 70주 예언적 연대기
Ⅰ. 다니엘의 “칠십 주”는 언제 시작되는가?
성경에서 “7”이라는 숫자는 항상 완전 수이다. 이방인의 수가 “10”이라고 한다면 “7”은 이스라엘의 수이고, 그들에게는 성스러운 숫자였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인식하시고 일하시는 방식은 항상 이 “일곱”과 관련이 있다. 한 주간은 칠 일이며, 우리 몸의 세포들은 수명이 칠 년이다. 위대한 중세 화가들(미켈란젤로, 다빈치, 램브란트 등)이 사용했던 색은 일곱 가지 뿐이었다. 우리는 또한 일곱 가지 색상과 일곱 음표를 가지고 있다. 레위기 23장과 25장에서도 일곱과 연관된 법칙이 율법에서 적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7”은 하나님의 수인 “3”(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세상의 수인 “4”(봄, 여름, 가을, 겨울)를 더한 것이다.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운영 계획은 “때”(times)와 “시기”(seasons)가 정해져 있다(행1:6-7). 갈라디아서 4:4에서 하나님은 “때가 찬 경륜”이 되었을 때 그 분의 아들을 보내셨다. 우리가 성취된 예언들을 통해서 볼 때, 어떤 예언이라도 정확한 때에 반드시 성취되었듯이 미래에 대한 성경 예언도 정확하게 성취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1. 예언적 연대기(prophetical chronology)
우리는 다니엘의 “칠십 주”를 유대인의 시간 관념에 따라 해석하여야 한다.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 수를 따라, 곧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하여 사십 년 간 너희가 죄악을 질지니, 그리하여 너희가 나의 약속의 파기를 알리라』(민14:34).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불신과 허물로 인해 그들에 대한 심판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약속의 땅 카나안으로 인도하여 거룩한 나라로 세우시겠다는 약속을 40일, 곧 40년 동안 파기하셨다. 이 심판에 대한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되어 그들은 40년 간을 광야에서 보내야만 했다.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계산하는 것(연일 체계)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흔한 일이다. 창세기 29:15-28에서 보면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서 “한 주”동안 일하기로 라반과 합의했으나 “칠 년”동안 일한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두 사람은 이 “한 주”가 “칠 년”을 뜻함을 잘 알고 있었다.
에스겔서 4:4-6에서도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에스겔이 430(390+40)일의 날 수대로 좌편과 우편으로 누워 각각 그 죄악을 담당하여 이스라엘의 집에 징조가 되게 하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이때 4:6에서 『내가 네게 하루를 일 년으로 정하였느니라』(A day for a year)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칠십 주”에서 그 대상은 유대인이므로 이러한 계산 방법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곧 한 주가 칠 일이므로 칠십 주는 7x70=490일이 되는데 위에서 살펴보았던 성경적 계산 방법인 연일 체계(Year-day scale)에 따라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면 490년이 된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신명기 28:13에서 약속하신 대로 이 땅에서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의 머리로 삼으시기 위해 490년의 기간을 정하셨음을 알 수 있다. 다니엘 9:25에 따르면 “칠십 주”의 시작 곧, 490년이 시작 되는 시점은 『예루살렘을 복원하고 건축하라는 그 명령』이 내릴 때부터 시작된다. “복원하다”(restore)는 단어는 대개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이 회복하여 돌아옴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분명히 “예루살렘 성읍”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또 “재건하다”(build)라는 것은 그 당시에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읍”의 성전과 집들과 성벽까지 다시 건축하라(build it up again)는 의미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전과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명령과 관련하여 메대와 바사 왕들이 내린 칙령이 네 번 있다는 것이다. 그 네 칙령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칙령 : B.C.536년 바사의 코레스 왕에 의한 칙령
두번째 칙령 : B.C.519년 메대의 다리오 왕에 의한 칙령
세번째 칙령 : B.C.458년 바사의 아탁세르세스 왕에 의한 칙령
네번째 칙령 : B.C.445년 아탁세르세스왕에 의한 칙령
그렇다면 이 네 칙령 중 다니엘의 “칠십 주”가 시작되는 칙령은 어느 것인가? 위에 제시된 칙령들을 다니엘 9:25과 비교하면서 어느 것이 다니엘의 “칠십 주”의 시작과 관련되는지 차례로 고찰해 보도록 하자.
(1) 첫번째 칙령 : B.C. 536년 코레스 왕의 칙령
에스라 1:1-4에 보면 『하늘의 주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내게 주시고 내게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있는 전을 그를 위하여 건축하라 하셨도다. 그의 모든 백성 중에 너희 가운데 있는 자가 누구냐?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기를 바라노니, 그는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예루살렘에 계신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지니라...』
이 포고는 역대하 36:22-23에서 확인되어진다. 그러나 이 구절들 가운데 어떠한 곳에서도 『예루살렘을 복원하고 건축하라』는 언급은 없다. 단지 언급된 것은 『주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지니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많은 학자나 자칭 기독교인들(서달석, 강병국, 박태선, 이만희, 간하배 교수, 어거스틴, 존 칼빈, 엘렌 G 화이트, 카일 루돌프, 에드워드 영 등)은 이 구절이 바사왕 코레스가 왕좌에 오르기 176년 전 그에 관하여 주께서 말씀하신 구절인 이사야 44:28에 따라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코레스 왕으로 하여금 이 명령을 하도록 고무시킨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므로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다니엘은 예레미야에 의해 예언되었던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생활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는 그때(코레스왕 원년)가 되자 유대인들의 해방을 요구하거나 왕의 관심을 이사야 44:28에 돌리게 하지 않았다. 또한 성령께서 유대인들을 그들의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도록 코레스 왕을 감동시켜서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되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하고, 심지어는 금과 은접시들(느부캇네살이 성전에서 가져갔던)을 되돌려 주게 하셨는가? 코레스 왕으로 하여금 명령을 하도록 부추긴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결과로서 50,000명의 포로들이 예루살렘에 되돌아 오는데(스2:64-65), 이는 그들로 제단을 세우고 그들의 희생 제사와 절기들을 재생하며, 성전을 재건하도록 진행되었지만, 반대자들로 인해 그 사역은 지연되고 오래 끌게 되었다. 자, 이것이 가브리엘 천사가 다니엘에게 전한 말씀의 성취인가? 물론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70년 간의 바벨론 포로생활은 끝났다. 그러나 역대하 7:14 말씀에 따라 그들은 거국적인 회개를 하지 않았으므로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과 그들의 고토로 돌아가는 것이 지연되었던 것이다.
이로인해 그들은 레위기 26:18-21,24-28에 따라 그들의 죄악을 7배나 더 담당해야 하므로 70년의 7배인 490년이 가브리엘 천사에 의해 다니엘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 490 년인 70주가 지난 후에 그들은 그들의 약속대로 완전히 회복될 것임을 의미한다. 코레스는 에스라 1:1-4에 보면 그의 명령을 “성전 건축”에 한정시켰으며, 한 번도 “예루살렘 복원과 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는데도 우리가 그가 그것을 포함시켰다고 확대시켜 추측하거나, 또는 이사야의 예언(사44:28)과 코레스 왕의 명령의 공포 사이에 있는 176년 만에 주께서 그 분의 마음을 바꾸셔서 코레스의 사역을 단지 “성전을 건축”하는데 한정시키셨겠는가? 마치 우리가 고레스 왕에게 단순히 그 분을 위해 예루살렘에 “이스라엘의 집(성전)”을 건축하라고 명하셨다는 코레스의 말(스1:1-4; 대하36:22,23)에만 우리 자신을 한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다.
코레스 왕의 칙령은 단순히 예레미야 25:11과 29:10의 성취이라는 것을 다니엘은 알았던 것이다. 이사야 44:28의 예언은 예레미야의 예언들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바사 왕의 거명에 불과하다. 이것은 에스라 1:1-4과 역대하 36:22,23의 바사 왕 코레스 자신의 진술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다니엘 9:25에서 그 칙령의 결과는 “거리와 성벽이 다시 재건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코레스 왕의 칙령은 단순히 “성전”의 건축에만 국한시키고 있고, 또 역사적으로도 성읍 전체를 방호하는 벽이나 참호(trench), 참호길(ditch)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이 칙령은 다니엘의 “칠십 주”의 시작이 될 수 없다.
(2) 두번째 칙령 : B.C. 519년 다리오 왕의 칙령
이 두번째 칙령은 에스라 6:1-12에 기록되어 있다. 에스라 5:1-17에서 “성전을 건축”하려고 하였던 자들이 그에 대한 권한이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역에 얼마나 많은 방해를 받게 되었는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리오 왕에게 바벨론에 있는 왕의 보고에서 조사를 하게 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래서 다리오 왕은 나라의 보고를 조사하도록 하였고, 정식 문서를 작성토록 명하였다. 그는 17년 전에 이미 코레스 왕에 의해 성전 건축의 조서가 작성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단지 다리오 왕은 첫번째 조서를 인정함을 보이기 위해서 명령을 다시 내려서 유대인들이 성전 건축에 대해 방해 받지 않도록 그 조서를 더욱 강화시켰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다리오 왕의 칙령도 단지 성전에 국한된 언급이며, “예루살렘을 복원하고 재건”하는 것에 관한 언급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도 단지 성전에 제한시킨 코레스 왕의 칙령을 재확인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3) 세번째 칙령 : B.C. 458년 아탁세르세스 왕의 칙령
이는 에스라 7:11-22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칙령은 몇명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에스라와 함께 데리고 가며, 벽돌 및 성전 제물로 드릴 수양과 어린 양들을 모으며, 또한 만약 필요하다면 왕의 보고에서 은 일백 달란트, 밀 일백 말, 포도주 일백 밧, 기름 일백 밧, 소금은 얼마든지 예루살렘으로 가져갈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도 된다는 허락을 하는 편지를 에스라에게 하달한 것이었다. 에스라 7:16-17에서 우리는 왕과 관원들이 그것들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드리는 연보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칙령에서도 “예루살렘 복원과 재건”에 관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고, 이 명령도 역시 성전에만 국한되었다.
(4) 네번째 칙령 : B.C. 445년 아탁세르세스 왕의 칙령
이 칙령은 느헤미야 2:1-8에 나와 있듯이 바사 왕 아탁세르세스 20년에 바사 왕정의 고위 관원이었으며 왕이 신임하던 신하 중의 한 명이었던 왕의 술관원 느헤미야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어느날 그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찬 채 왕에게 나아갔다. 왕은 그가 병이 들었는지 무슨 근심이 있는지 물었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자신이 슬퍼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 성읍, 즉 내 조상의 묘들이 있는 곳이 황폐하게 되고 그 성문들이 불에 탔으니, 어찌 내 용모가 슬프지 아니하겠나이까?』 느헤미야의 설명을 들은 아탁세르세스 왕은 성전과 예루살렘 건축에 필요한 목재를 주도록 삼림 감독에게 조서를 내렸고 느헤미야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그 성읍을 재건하고 복원하도록 허락하였다. 물론 이 칙령은 성벽을 재건하고 성읍을 요새화하는 것이 반역적 행동이라고 생각한 산발랏과 토비야와 같은 외부 세력의 반대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단지 정치적인 것이었지 종교적인 파송은 아니었다. 성벽이 52일만에 재건된 반면에, 성읍이 복원되고 율법이 재정비되기까지는 12년이나 걸렸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니엘 9:25 『그 거리와 그 성벽이 재건되리니 곧 고난스런 때들이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성읍의 재건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대 역사>에서도 이에 대하여 잘 나타나 있다. 느헤미야 파송의 목적은 정치적 수도로서의 예루살렘의 복원이며, 또한 유대 민족의 회복이었다(완전한 회복은 아니다). 비록 조서와 칙령이란 말은 없지만 느헤미야 사역의 성격은 예루살렘의 복원과 재건에 관한 것이었으며 그 본질상으로도 증명한다. 왕에 의해서 하달된 편지는 분명히 조서의 형태였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느헤미야는 이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아탁세르세스 왕 20년이 B.C.445년이라는 것은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확인된 연도이다. 우리는 세속적인 역사에 의뢰할 수 밖에 없으므로 다니엘의 “칠십 주”는 바사 왕 아탁세르세스 20년인 B.C.445년 3월 14일에 시작한 것으로 정확한 시점을 확증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알고 깨달으라. 예루살렘을 복원하고 건축하라는 그 명령이 나오는 때부터 메시야 통치자까지 칠 주와 육십이 주가 될 것이요, 그 거리와 그 성벽이 재건되리니 곧 고난스런 때들이라』(단9:25).
지난 호에서 우리는 다니엘의 “칠십 주”가 시작되는 시점을 검토하면서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복원하라.”는 명령은 B.C.445년 3월 14일에 아탁세르세스왕에 의해 주어졌음을 알았다. 계속해서 다니엘 9:25에 보면 “칠 주”와 “육십이 주”, 그리고 마지막 “한 주”(7년) 사이에 끊어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7주와 62주 사이의 끊어짐은 어떤 공백의 기간이 있음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이다.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다니엘에게 전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경륜을 보여 주신 것이다. 성경을 통해 볼 때 하나님께서 역사를 인식하시는 방법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고토에 있고, 또한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화해관계에 있을 때이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고토에서 쫒겨나 흩어져 있다든지, 하나님께서 그들로부터 얼굴을 돌리시고, 돌아보지 아니하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인식하시는 역사로서의 연대기적 계산 안에는 삽입되지 아니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7주는 49년(7X7)으로서 성전을 복구하고, 예루살렘을 복원하게 되는 B.C.445년 아닥세르세스왕의 칙령으로부터 B.C.396년 히브리적 예언과 구약성경의 종지부를 찍게 되는 말라키까지의 전 기간을 말한다. 그리고 남아 있는 62주는 구약 예언의 끊어지는 시점인 B.C.396년 이후부터 “메시야 통치자”이신 그리스도께서 A.D.32년 4월 6일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때까지로서 계시도, 예언도 없는 “침묵의 시기”를 망라하는 전 기간을 말한다. 그러므로 7주와 62주 사이의 끊어짐이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역사 인식 방법인 것이다. 곧 B.C.396년을 기점으로 한 히브리적 예언과 구약 성경의 종지부를 찍는 시점인 것이다
그러면 다니엘의 “칠십 주”의 처음 7주가 구약 계시와 예언의 종결점인 B.C.396년에 끝났다면, 62주가 끝나는 시기는 언제인가? 이것에 관해서도 신학적 이견이 분분하다. 이 문제는 다니엘 9:25의 “메시야 통치자”(Messiah the Prince)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견해가 다양해진다. 이 용어를 정확하게 연구, 고찰하여 규명하는 것이 그 열쇠인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성경을 모르는 무식한 자들이 이것을 바사의 ‘코레스 왕’ 또는 바빌론의 ‘느부캇네살 왕’을 지칭한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고론되어질 수 있는 문제는 다니엘 9:25이 지시하는 “메시야 통치자”이신 그리스도를 지칭한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거론되어질 수 있는 문제는 다니엘 9:25이 지시하는 어느 시점을 가르키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세 가지 신학적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69주의 종료점인 “메시야 통치자”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가리킨다.
2. 69주의 종료점인 “메시야 통치자”는 그리스도의 침례를 가리킨다.
3. 69주의 종료점인 “메시야 통치자”는 그리스도의 종려주일 예루살렘 입성을 가리킨다.
그럼 이제부터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이 69주의 종료점인 “메시야 통치자”가 나타나는 때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1.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하여
(가) 주장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칠십 주”에 대해 알려 주러 왔었으며, “육십구 주”의 종료점인 메시아 통치자의 탄생을 알려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인물로서 또한 가브리엘이 왔다. 그러므로 “칠심 주”의 “그 때가 차니”(갈4:4)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전하여 준 메세지는 바로 “메시아 통치자”로서 오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가르킨다.
(나) 반증
첫째,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혹은 천사들에게 “예수는 메시아 통치자(Messiah the Prince)시다”라고 말하지 않고, 단지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조상 다윗의 보좌를 차지할 것이라”고 알렸다.
둘째, 그 단어가 지칭하는 언어적인 면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메시아의 출현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유대인에게 있어 메시아의 나타남은 그들의 회복과 영광, 그리고 하나님과 그들의 조상들이 맺었던 약속을 성취시키는 것이므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기대이자 소망이었다. 구약 성경 전체의 주제는 유대인들에게 약속된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고 그들을 모든 죄악과 허물을 제하여 주고, 열방 가운데서 지위와 영광을 안겨다 줄 메시아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무천년주의자들과 후천년주의자들이 영적으로 끼워 맞춘 그리스도의 초림 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것인데, 이러한 메시야적 사역의 성격은 “메시아”라는 언어적 표현상에서 나타나듯이, 갓 태어난 그리스도의 탄생이 아니라 그 직분을 공개적으로 수행하게 되는 때를 의미함을 분명히 알 수 있다.
2. 그리스도의 “침례”에 관하여
(가) 주장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공생애의 첫 시작은 그 분이 침례인 요한에 의해서 침례를 받으실 때부터였다. 그 때 그 분의 나이는 삼십 세였고, 그 분의 신성에 대한 두 증인으로서 아버지와 성령께서 증거하셨다(마3:13-17). 그러므로 “메시아”라는 단어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침례 받으실 때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심으로 그 분에게 기름부으셨다. 그러므로 그 때가 다니엘 9:25의 “메시아 통치자”에서 의미하는 “메시아”로서, 바로 69주의 종료점을 알려주는 것이다.
(나) 반증
침례 받으심으로써 그 분은 자신의 공식적인 사역에 들어가셨고,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왕국에 대한 계시가 거절되고, 그때부터 예수님이 사역은 다른 형태로 바뀌었다. 곧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자신을 메시아로 말씀하신 것에 대한 모든 공개적인 인식이나 알려지시는 것을 피하셨고, 심지어는 그 분의 제자들에게까지도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알려지지 않도록 거듭 당부하셨다. 구약에서는 메시아의 나타나심과 표적, 이스라엘의 회복과 왕국이 통치를 알리는 메시아 통치자이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그 어느 것보다 많이, 분명한 어조로 또한 공개적으로 계시해 주고 있다. 그런데 공생애 가운데서 자신을 공식적으로 드러내지 않으시려한 것이 구약에서 계시된 메시아의 사역인가?
무엇보다도 왕직의 계승은 계승될 자가 왕직 계승에 대한 공식적인 부름을 받은 후 왕직 계승에 관한 서약과 공포를 하고, 면류과(왕관)이 그의 머리 위에 씌어지는 대관식을 할 때까지 그는 왕이 될 수 없다. 그 분이 자신을 “메시아”로서 공식적으로 나타내시는 때가 바로 “왕”으로서 직분을 수행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이 마태복음의 주제이다. 구약은 영원히 이 땅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실 메시아 통치자, 곧 그리스도의 출현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재림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전환기적 책으로서의 마태복음을 비롯한 4복음서는 스카랴 9:9의 예언대로 “다윗의 왕좌”를 이은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 통치자의 입성에 그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다니엘 9:25의 “메시아 통치자”는 침례받으신 후 공생애 기간 동안 자신이 드러나게 알려지시는 것을 회피하신 그리스도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시는 다윗의 보좌를 이으실 약속된 다윗의 자손으로서 “메시아 통치자”의 예루살렘 입성을 가르킨다.
다니엘 칠 십 주의 전 기간은 바로 메시아가 수행하고 완성해야 하는 구속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천년주의자들이 후천년주의자들이 밤낮 외쳐대는 초림에 의해서가 아니고 재림에 의해서 완성된다. 물론 70주가 다 이루어지기 전인 69주가 끝나는 정확한 때에 “메시아 통치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출현하시지만 유대인들에게 거절당하고이 왕적 사역은 재림 때까지 연기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여전히 면류관을 쓰지 않았고, 아직 그 분의 왕국(Kingdom)을 받지도 않으셨다. 그 분은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셔서 “대제사장”으로 계시며 (히4:1-4), 그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왕국을 받을 때까지는 결코 왕(King)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영적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와 관련된 것이 아니고, 실질적이고 눈에 보이는, 지상에서 직접 그 분의 “왕국”을 통치하시는 “천국”(Kingdom of Heaven)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귀인이 왕국을 받아서 돌아오려고 먼 나라에 가게 되었더라』(눅19:12).
『내가 밤에 환상들을 보았더니, 보라, 인자 같은 분이 하늘의 구름들과 함께 오셔서 옛날부터 계신 분에게 오시니 그들이 인자 같은 분을 그 분 앞에 안내하였더라. 거기에서 그 분께 다스림과 영광과 왕국이 주어졌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민족들과 언어들이 그 분을 섬기게 하려 함이더라. 그 분의 다스림은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다스림이며 그 분의 왕국은 멸망하지 않으리라』(단7:13,14).
3. 그리스도의 “종려주일 예루살렘 입성”에 관하여
이 사건은 그 분이 십자가에 못박히기 며칠 전에 일어났다. 그리스도의 예루살렘으로의 개선 입성은 놀랍게도 4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때 그 분은 자신이 곧 십자가에 못박히실 것(단9:26)과 그 십자가 사건 이전 단계로서 자신이 스카랴 9:9의 예언 성취를 위하여 종려주일 예루살렘으로 개선 입성하셔야 함을 미리 아시고, 자신을 공개적이고도 본격적으로 드러내셨다. 요한복음 12:13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왕”으로서 공개적으로 선포하시는 것에 동의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는 그 분이 명령하신 대로 따르면 그 분이 타실 나귀 한 마리를 끌고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지시하시면서 예루살렘 개선 입성식을 준비하셨고, 또한 그 분의 개선 입성을 환영하며 외쳐대는 제자들을 꾸짖어 달라는 요청을 받으셨을 때, 그 분은 『이 사람들이 침묵을 지켰더라면 돌들이 즉시 소리를 질렀으리라』고 반박하셨다. 이 사건은 예수를 “메시아”로서 환영하는 사람은 다니엘 9:25에서 예언된 “메시아왕”을 그들의 “왕”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실은 “메시아 통치자”(Messiah the Prince)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특성은 세 가지로 나타난다. 선지자, 제사장, 왕이다.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로 시점별로 구별된다. 구약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직분은 세 가지인데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 가지 직분의 사역을 다 완수하셔야 한다. 그 분은 2천년 전에 “선지자”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과거). 그 후 그 분은 부활 승천하셨고, 승천하신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 우편에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딤전2:5, 히4:1-4). 그 분은 현재 대제사장이시지 무천년, 후천년주의자들(간하배 교수, 서달석, 강병국, 박태선, 이만희, 존 칼빈, 어거스틴, 엘렌 G 화이트)이 주장하는 것처럼 결코 “왕”(King)이 아니시다. 그들은 “천국”, 곧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통치하실 “천년왕국”을 영적인 것으로 해석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현재 교회시대의 “왕”으로 끌어내리려 하는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 곧 “영적인 왕”으로서 그리스도를 모셔 놓고 자기들의 힘과 노력으로 영원한 평화를 자겨다 주는 “왕국”을 오게 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왕”이라고 성경에서는 한번도 언급하지 않는다. 단지 교회의 “주”(Lord) 또는 “머리”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 분은 4복음서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을 “메시아 통치자”로서 공개적으로 드러내시며 예루살렘으로 개선 입성을 하셨으나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영접하기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그 분은 “왕”으로서 거절되고(마21-17장), 십자가에 처형되셨는데(마26-28장), 이로 인하여 그 분의 왕국(Kingdom)은 그 분이 다시 오실 때(재림)까지 연기되어 버렸다(눅19:12, 단7:13,14). 지금 이 세상은 “이 세상의 신”이자(고후4:4) “이 세상의 통치자”인 사탄이 관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요14:30).
주님께서도 『지금은 나의 왕국이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고 분명히 말씀하셨다[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지금”이라는 단어이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과 한글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모든 영어 성경 및 한글 성경들은 무천년주의자들과 후처년주의자들의 “영적인 왕국”을 합리화시키고, 자신들의 노력으로 “천년왕국”을 오게 하기 이해 “지금은”(now)이라는 단어를 삭제시켜 버림으로써 심각한 신학적 오류를 낳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지금은 “왕”(King)으로서 면류관을 쓰시지 못하고 거절당했고, 그 분의 “왕국”(Kingdom)은 그 분이 거절당하신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연기되어 왔으므로 다니엘 9:24은 “메시아 통치자”(Messiah the Prince)라고 기록된 것이다.
초림 때에 그 분은 나귀새끼를 타고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채찍에 맞으시며, 가시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재림 때에 그 분은 가장 큰 위엄과 두려움으로 심판하시는 “왕”으로서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왕국을 받아(단7:13,14) 많은 면류관을 쓰시고 흰 말을 타고서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것이다(마24:30; 25:31, 겔43:1-6, 계19:11-16).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흰 말이 보이더라. 그 위에 앉으신 분은 신실과 진실이라 불리며 의로 심판하고 싸우시더라. 그의 눈은 불꽃 같고 머리에는 많은 왕관이 있고 또 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르며 피에 적신 옷을 입었는데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리더라. 또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정결한 세마포를 입고 흰 말을 탄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는 예리한 칼이 나와서 그것으로 민족들을 칠 것이요 또 철장으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며,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즙틀을 밟으실 것이라. 또 그의 옷과 넓적다리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만왕의 왕, 또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우리는 B.C.445년 3월 14일 바사왕 아탁세르세스다 룡기마누스 재위 20년에 다니엘의 “70주”가 시작되고, A.D.32년 4월 6일 그리스도께서 종려주일 예루살렘 입성하심이 “69주”의 종료점인 것을 성경적인 고찰을 통해 증명하였다. 그러나 예언적 연대기의 계산에 앞서 그리스도의 종려주일 예루살렘 입성과 그 분의 죽으심과 관련하여 그 역사적인 연대를 확정하는 데에는 역사학자들과 신학자들 간에 이견이 분분하다. 우리가 그 정확한 연대를 고찰할 때 최우선적으로는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역사적 또는 고고학적 증거나 자료를 의뢰하는 것이다. 우리가 굳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연대와 그 시기를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예언적 연대기의 계산에 있어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분의 죽으심의 정확한 연대는 그 분의 탄생시기를 알 때에만 가능하므로 우리는 우선 탄생시기를 고찰해보도록 하자. 현재 캐나다의 성경 예언 학자로서 전 세계를 그의 저서 <아마겟돈>을 통해 신선한 충격을 준 그랜트 제프리(Grant Geffrey)의 자료에서 도움을 얻어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으심의 연대를 획기적으로 알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한다.
1.그리스도의 탄생시기
우리의 연도 계산방법은 디오니시우스 이그지우스(Dionysius Exiguus)라는 수도사에 의해 6세기에 완성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탄생이 로마년도 754년에 일어났다고 계산했다. 그는 누가에 의해 기록된 그리스도의 탄생년도 다음 해의 1월 1일을 그의 새로운 달력의 A.D.1년으로 산정했다. 그는 이 계산의 산출 근거로서 당시 로마에서 그가 이용 가능했던 역사가 누가의 연대 기록에 기초하였던 것이다(눅3:1,2). 학자들은 그리스도 탄생의 연도를 B.C.4 년까지, 심지어는 B.C.6년까지로 수정할 수 있게 해 주는 증거를 수백 년 전에 발견했다. 그 한 가지 증거로는 누가복음 2:1-3에서 세금을 집행시킨 시리아 총독 쿠레뇨가 B.C.7년부터 B.C.4년까지 그 자리에서 재임하고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밝혀진 고고학적인 증거는 쿠레뇨가 두 번 시리아의 총독이었으며, 그의 첫 번째 재임기간은 B.C.4년부터 B.C.1년까지였음을 입증했다(Commentationes Epig- raphicae, Vol.Ⅱ, Augustus Iumpt). 또 다른 증거로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월식이 있던 해의 유월절 직전에 헤롯 대왕(마 2장)이 죽었다고 기록했으므로 그리스도의 탄생은 B.C.4년 경에 해당된다고 믿었다. 천문학자들도 B.C.4년 3월 13일에 부분일식이 있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학자들은 이것이 B.C.4년에 헤롯왕이 죽었고, 그리스도께서 탄생했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추가로 드러난 천문학적 증거는 헤롯왕이 죽은 연대가 B.C.1년 혹은 A.D.1년까지 늦어질 수 있음을 밝힘으로서 그리스도의 탄생이 B.C.1년에 일어났음을 인정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는 지금 부분월식이 아닌 완전 월식이 B.C.1년 1월 9일에 있었음을 알고 있으며, 이것은 요세푸스가 <유대인의 고대풍습, Antiquities of the Jews> 17권 6장에서 언급한 것으로 보여 진다. 천문학의 기록에 따르면 B.C.5년부터 A.D.4년까지 예루살렘에서 볼 수 있었던 월식은 B.C.5년 3월 23일, 9월 15일, B.C.4년 3월 12일, B.C.1년 1월 9일이다. 위의 증거들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B.C.1년 경에 탄생하셨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탄생일과 관련하여 320년 경 교회는 첫번째 자칭 기독교 황제인 콘스탄틴의 명령 하에 12월 25일이 공식적인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채택하였다. 이 특별한 날은 “Saturnalia”라고 알려진 기존에 있던 태양신을 위한 이방인 축제날을 대체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12월 25일에 탄생하시지 않았음은 다음 세 가지 사실로 입증할 수 있다.
(1) 『그때 그 고을에 목자들이 있었는데 들에서 묵으면서 밤에 양떼를 지키더라』라는 누가복음 2:8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탄생일은 결코 12월이 될 수 없다. 만일 12월 말이라면 양떼와 목자들은 추운 날씨 때문에 들에 있을 수 없으며, 추위를 피할 장소로 들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요한복음 1;14에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라는 단어는 영어로 “dwelt”인데, 이것의 원래 의미는 초막절을 나타내는 단어인 “tabernacled”이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인데, 아마도 탄생을 묘사하면서 잘 쓰이지 않는 “tabernacled”라는 단어를 쓴 것은 이를 통해 탄생일이 초막절(우리 달력으로는 9월 경)에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3)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정한 절기”에 일년에 세번씩 경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다(출23:14-17, 참고 - 출34:24; 시50:5).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던 그 당시에 예루살렘 근교에 각처에서 올라온 많은 순례자들이 일시적으로 증가하여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던 날 저녁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에 유숙할 장소가 없었다. 『이는 여관에 그들이 들 방이 없었기 때문이라』(눅 2:7). 이것은 유대인의 7절기 가운데 대표적인 3절기 중 하나임을 명백히 시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볼 때 시기적으로 그 때가 초막절임을 알 수 있다.
2.그리스도의 사역과 십자가 처형일
『티베리오 카이사가 집권한 지 십오 년째 되던 해에 폰티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이요, 갈릴리의 영주는 헤롯이고, 그의 아우 빌립은 이투레와 트라코니티 지방의 영주이며,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고 안나스와 카야파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사카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였더라』(눅3:1,2).
누가복음 3:1,2은 성경의 구절들 가운데 가장 명확하게 연대기적 설명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 구절에서는 침례인 요한이 그의 사역을 시작할 실제적인 연도를 상세하게 서술해 주고 있다. 또한 누가는 누가복음 3:21,22에서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의 시작이 침례받으시는 것과 더불어 시작됨을 『예수 자신은 약 삼십세가 되어 사역을 시작하셨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의 구절에 나타난 로마 황제 티베리오는 A.D. 14년 8월 19일에 왕위에 올랐다. 이 날은 누가의 시대에는 누구나 다 아는 날짜였다. 그러므로 티베리오 황제 15년 A.D.28년 8월 19일에 시작된다. 역사 기록을 보면 A.D.28년에 누가복음 3:1,2에 언급된 공직의 모든 사람들이 그 지위에서 다스리고 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A.D.28년 가을에 시작한 것이 역사적으로 확실하다. 많은 성경 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사역 시작을 A.D.24에서 A.D.27년까지 앞당겨 보는데,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탄생년도를 B.C.7년에서 B.C.4년까지 일찍 잡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복음 역사가인 누가에 의해 정확히 서술된 A.D.28년을 무시하는 것이다(이 A.D.28년은 누가복음 3:21,22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그 분의 탄생년도가 B.C.1년임을 거듭 확인해 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첫번째 유월절은 6개월 후인 A.D.29년 니산월 14일이라고 볼 수 있다(요2:12- 23).
예수님의 사역이 A.D.28년 가을에 시작되었다는 또 다른 확인은 요한복음 2:19, 20에서 볼 수 있다. 『... 이 성전을 짓는데 사십육 년이 걸렸는데 네가 이것을 삼일 만에 세우겠단 말이냐?』(요2: 20). 이 두번째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 대왕이 B.C.18년에 재건을 시작하였다(요세푸스의 “유대인의 전쟁” 참조).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 후 첫번째 유월절은 A.D.29년으로서 헤롯왕이 성전 재건을 시작한 지 정확히 46년이 됨을 보여준다(요2:13,20). 예수님은 약 3년 반 동안 사역을 하셨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적어도 3차례 유월절에 참석하셨고, 요한복음 5:1에서 말씀하시기는 절기가 유월절이라면 십자가의 날은 A.D.32년 예수님의 최후의 유월절에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 요한복음 5:1에 언급된 절기는 유월절이거나 푸림(Purim)임에 틀림없다. 푸림은 에스더에서 설명되는 일들을 축하하는 사회적인 축제이므로 예수께서 비종교적인 축제일에 특별히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고 보기 힘든데 이는 푸림은 에스더서에서 설명되는 일들을 축하하는 사회적인 축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역은 A.D.28년 가을에서 A.D.32년 그 분의 마지막 유월절인 십자가 처형까지 3년 반 동안이다.
우리는 성경적, 역사적, 그리고 고고학적인 고찰을 통해 다니엘의 “70주”의 시작은 B.C.445년 3월 14일이고, 그리스도의 탄생은 B.C.1년 9월 경이며, 그 분의 종려주일 예루살렘 입성은 그 분이 죽으시기 며칠 전인 A.D.32년 4월 6일임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 확증되고 고증된 역사적인 연도를 통해 성경 예언(다니엘의 69주)이 얼마나 정확하게 역사 속에서 성취되어졌는가를 성경적 계산 방법을 통해 고찰해 보도록 하자.
3.성경상의 1년은 360일
우리가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예언의 정확성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사용된 1년의 기간을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1년의 날수를 전하는 데 있어서는 다음 4가지 방법이 있다.
① 율리시스력(천문학적 달력) : 365.25일/1년
② 태양력 : 365일/1년
③ 태음력 : 354일/1년(현재 이스라엘에서 사용하는 달력)
④ 성경적인 달력 : 360일/1년
현대 이스라엘 달력은 음력과 양력을 혼합해 계산된 것으로서 이것을 우리들이 사용하는 양력으로 고치기 위해서는 19년 주기로 7차례 윤달을 더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1년이 360일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창세기 7:11, 7:14, 8:3,4에서 노아는 땅에서 물이 빠지는데 둘째 달 17일부터 일곱째 달 17일까지 150일이 걸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5개월이 30일씩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해 준다.
둘째, 에스더에서 6개월에 걸친 아하스에로(Xer- xes)왕의 축제를 180일로 계산하고 있다(에스더1:4).
세째, 선지자 다니엘은 적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을 3년 반으로 묘사하고 있으며(단7:25), 사도 요한도 계시록에서 사도 요한도 동일한 3년 반을 30일씩 42개월로 총 1260일이라고 묘사하고 있다(계12:6, 14, 13:5-7).
그러므로 우리는 다니엘의 ‘70주’와 관련하여 성경의 예언적 연대기를 계산할 수 있는 열쇠를 가진 셈이다. 정리해 본다면 “연일 체계”(Year-Day sc- ale)에 의하여 “70주”의 1일은 1년을 나타내며(민14:34; 겔4:6), 성경에서 1년의 날수는 360일로 계산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다니엘 9:25에 있는 “69주”의 성경적 날수를 계산해 본다면,
1주일 = 7일
69주의 날 수는 69×7일은 483일이 된다.
연일 체계에 의하여 483일은 483년을 나타낸다.
성경에서 각 1년의 날 수는 360일이므로 483년× 360일=173,880일이 된다.
그러므로 다니엘 69주의 날 수는 총 173,880일이 된다.
그러면 이제 역사적인 연대기를 계산해 봄으로써 이 성경적 예언의 날수와 어떻게 일치되는지 계산해 보자. 일반적으로 태양력(1년=365일)으로 계산해 보면 B.C.445년에서 A.D.32년까지는 477년인데, B.C.445년과 A.D.32년의 두 연도는 만기된 년의 날수가 아니므로 두 연도를 일단 제외하고 나중에 따로 날수를 계산하고, B.C.1년과 A.D.1년을 2년으로 계산한다.
(1) 두 연도는 제외한 총 년수는 444+31=475년이다. 이것의 총 날수는 475년×365일=173,375일이다.
(2) B.C.445년 3월 14일부터 12월 31일까지 총 날수는 293일이다.
(3) A.D.32년 1월 1일부터 4월 6일까지 총 날수는 96일이다.
(4)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태양력 365일은 정확한 날수가 아니므로 정확한 천문학적 날수가 되려면 우리는 위 두 년도 간의 총 연수에 해당하는 윤일을 계산해서 더해야 한다. 이 기간 동안의 윤일은 그리니치 천문대에 의해서 116일임이 밝혀졌다.
(5) 그러므로 우리가 B.C.445년 3월 14일부터 A.D.32년 4월 6일까지의 총 날수는 173,375+293+ 96+116=173,880일이다.
자, 다니엘 9:25에서 예언된 “69주”의 날수 173,880일과 역사적 사실에 의해서 확인된 두 년도간의 정확한 날수가 일치하지 않는가? 놀랍지 않은가? 하나님의 예언적 말씀은 한치의 오차와 실수가 없다. 성경은 다른 경전들과 달리 수많은 예언을 담고 있으며, 그 예언의 성취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됨을 입증하는 것뿐이다. 할렐루야!
위대한 세대주의 전천년 성경학자인 클라렌스 라킨은 그의 주석 에서 그리스도의 탄생 년도를 B.C.1년이 아닌 B.C.4년으로 잡았고, 이를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종려주일 예루살렘 입성을 A.D.30년 4월 2일로 보았다. 그리하여 위와 같은 계산 방법으로 계산한 결과
172,645일 (473년 간 날수)
293일 (B.C.445년 3월 14일부터 12월 31일 까지의 날수)
2일 (A.D. 30년 1월 1일부터 4월 2일까지의 날수)
+ 116일 (두 연도 간의 윤일수)
173,146일 (총 날수)
이 나왔다. 이 날수를 성경적 1년 날수인 360일로 나누면 14일 모자란 481년이 나온다. 이것은 다니엘 69주의 483년보다도 2년하고도 14일 모자라는 수치이다. 이러한 약간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탄생년도를 B.C.4년으로 잡은 데서 기인된다. 최근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자료가 나오기 전 대부분의 성경적인 성경학자들은 모두 그 시기를 B.C.6년에서 4년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오차가 나왔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정확한 계산과 일생을 바쳐 헌신한 성경 예언 연구에 관한 고찰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재능 있는 성경학자인 로버트 앤더슨(Robort And- erson)경이 저술한 저서 과 현재 성경 예언 연구가이자 저작자인 캐나다의 그랜트 제프리(Grant Geffrey)의 베스트셀러작인 [ARMAGEDDON]에서 이들은 성경적 연대기 계산 방법과 역사적, 천문학적 증거들을 통해 밝혀진 정확한 역사적인 기록 연대들을 계산하여 다니엘 69주의 총 날수인 173,880일과 일치하였으나 이들의 계산 방법 중 B.C.445년 3월 14일부터 12월 31일까지, 그리고 A.D.32년 1월 1일부터 4월 6일까지의 각 날수 293일과 96일을 따로 계산하지 않고, 유대인 관습에 따른 계산 방식대로 두 연도의 날짜 간의 간격 차인 24일을 그 계산 내용에 넣는 실수를 하였는데, 우연히도 그 계산 결과가 다니엘 9:25의 “69주”의 날수인 173,880일과 일치하였던 것이다(이들은 B.C.1년과 A.D.1년을 1년으로 계산하였음). 그들은 라킨이나 필자가 계산했던 방식, 곧 만기가 되지 않은 두 년도의 날수를 각각 계산해야 하는 것을 미처 고려해 보지 않음으로써 계산 방법에 있어서 약간의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성경 연구에 대한 열의와 그 깊은 통찰력은 수많은 전천년 세대주의 성경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이들의 이러한 업적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남을 것이다(게으른 무천년주의자들과 후천년주의자들은 이 모든 성경 연대기의 계산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모두 영적으로 해석해 버림으로써 성경 계시의 ⅓ 이상을 닫아 버렸다).
우리는 본 예언적 연대기의 고찰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당시의 예언 연구가나 학도들이 방심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70주”에 관한 다니엘의 예언을 깨닫고, 준비되어 있었다면 그들은 그 분이 어느 때에 오실는지, 또 그 분이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확실히 알았을 것이며, 그 분의 오심을 갈망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성경 교사나 목사, 신학자들도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깨어있지 못하고, 성경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초림 때의 위선적이고 무지한 종교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준비되지 않은 채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게 될 것이다.
『악한 자들은 아무도 깨닫지 못하나 현명한 자들은 깨달으리라』(단12:10).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어 어두운 곳에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 예언의 말씀을 주의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먼저 이것을 알지니 성경의 어떤 예언도 사사로운 해석이 되어서는 안 되나니』(벧후1:19,20).
다니엘의 69주와 마지막 70째주는 연속적인가? 아니면 그들 사이에 공백 기간이 있는가?
다니엘 9:24-27의 “70주”에 관한 신학이론 중 또 하나의 중요한 논쟁거리는 마지막 70째주의 기간에 관한 것과 “이 기간이 연속적으로 성취되어졌는가?”, 아니면 “시간적 공백이 존재하는가?” 라는 것이다. 대개 전자를 “연속적 성취설”, 후자를 “공백기설”(또는 삽입기설)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도 앞으로 그렇게 지칭하여 부르도록 하겠다. 만일 69주와 70째주 사이에 공백기간이 없이 연속적으로 성취되어진 것이라면 70째주는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이 될 것이고, 공백기가 존재한다면 70째주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미래에 속한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다니엘 9:26 이하의 구절들 속에 있는 정확한 성경적 의미를 살펴보기 전에 이 70째주의 기간과 위치를 규정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에 대한 성경적인 고찰을 명확하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러가지 논쟁시비에 말려들게 될 것이고, 성경적인 종말론의 정립은 거짓 교리들로 인하여 난황을 거듭하게 될 것이며, 결국 혼란과 비극적인 파국만을 초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연속적 성취설”은 에드워드 영, 어거스틴, 존 칼빈, 엘렌 G 화이트, 간하배 교수, 박형룡, 서달석, 강병국, 박태선, 이만희등을 위시한 무천년주의자들이 가르치는 성경 해석이다(이들 가운데 마지막 70째주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때로부터 마지막 때까지 계속되는 불특정한 기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공백기설”(삽입기설)은 초대교회 이후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였던 세대주의 전천년적 성경해석이다. 다니엘의 69주가 그리스도의 침례받으신 때 혹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더불어 종결되었다고 보는 것은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다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마지막 70째주에 관하여 무천년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 주장들을 내놓는다.
(1) 70째주는 69주에 잇달아서 연속적으로 성취되었다.
(2) 마지막 주, 즉 ‘한 주’는 A.D.70년 경 티투스에 의하여 성취되었다
(3) 70째주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때로부터 마지막 때까지의 불특정한 기간을의미한다.
위와 같은 주장들은 마지막 70째주를 한 순간의 사건이나 무한한 길이의 기간으로 일축시켜 버린다. 이들의 주장은 성경적으로 신빙성이 없다. 지난 호에서 설명한 것처럼 69주는 483년을 나타내며, 정확한 연수대로 정확하게, 또 한치의 오차도 없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마지막 70째주도 무한한 시간 개념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기간, 곧 7년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확신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69주의 483년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마지막 7년은 임의대로 축소시켜 버리거나 무한하게 연장시켜서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성경은 그 말하는 바를 말하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의미할 뿐이다. 더 이상 어떠한 것도 덧붙여야 할 필요가 없다.
연속적인 성취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백기설”을 성경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면서 70년간 어떤 끊어짐 없이 연속적으로 성취된 70년간의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그 예로서 제시한다. 그들은 또한 이집트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430년 간체류생활을 했다는 것으로 입증하려고도 한다(창15:13; 출12:40-42; 갈3:17). 심지어는 이스라엘 자손의 40년 간의 광야 생활도 문자적으로 어떤 끊어짐 없이 이루어졌다고 예를 들면서(민14:34) 이러한 것들을 통해 볼 때 69주와 마지막 70째주는 어떤 끊어짐 없이 연속적으로 성취되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한 사실은, 위의 사건들은 모두 그 예언되어진 구절 속에서 어떤 끊어짐의 사실이 전혀 나타나지 않지만, 다니엘의 70주는 본문 다니엘 9:25 -27 속에서 그 끊어짐의 시점표시가 “7+ 62+1”로서 명백히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의 7주는 예루살렘 성읍의 재건과 복원에 소요된 시간으로서 구약의 히브리적 예언이 종결되는 시점인 B.C.396년까지의 49년의 기간을 나타내는데, 7주와 62주의 끊어짐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식하시는 역사 가운데 어떤 끊어짐이 있음을 이 예언의 세 등분의 구분을 통해 표현하신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중간의 62주, 곧 434년은 B.C.396년부터 A.D.32년 종려주일날 “메시아 통치자”(단9:25)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때까지를 망라해 주는 “침묵의 기간” - 더 이상의 히브리적 예언도 계시도 없는 - 을 예시해 줌을 우리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한 주를 다루기 전에 다니엘 9:26은 우리에게 69주와 70째주 사이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 보여주는데,
첫째, “메시아 통치자”가 끊어지고
둘째, 예루살렘의 성전이 로마인들에 의해 파괴되며
세째, 예루살렘 멸망 후 오랜 기간 동안 전쟁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종말에 관해 예언하셨던 말씀 중 마태복음 24:15과 마가복음 13:14에서 『선지자 다니엘이 말했던』이라고 그 예언의 내용을 인용하셨던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 21:24에서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때가 찰 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라고 더불어서 언급하셨는데, 누가복음 21:24은 다니엘 9:26-27에서 말한 이 마지막 기간에 관한 것이며, 이 언급하신 “이방인들의 때”는 현재 계속 진행중이므로 다니엘 9:26은 70째주가 69주에 바로 잇달아서 연속되는 기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연속 성취설”을 지지하는 자들 가운데는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셨던 때에 69주가 끝나고, 70째주가 시작되었으므로, 그 때부터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인 3년 반은 70째주의 전 삼년 반을 나타내며, 십자가에서 죽으시던 시점은 70째주의 중간에 일어나는 때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 때 예수 그리스도는 다니엘 9:27에 있는 『그 주의 중간에 그가 희생제와 예물을 금지시킬 것이요』라는 구절을 성취시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 살펴보면 다니엘 9:27에 나타난 위 구절의 의미는 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도 문자적인 『희생제와 예물의 금지』를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 일어난 일들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에 의하여 실제적으로 금지되거나 폐기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분이 죽으신 후에도 희생제와 예물은 유대인들에 의해 A.D.70년 예루살렘의 멸망까지 계속 행해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70째주의 미래적 성취를 피력하는 “공백기설”이 성경적인 것임을 좀 더 구체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조명해 보도록하자.
(1)무천년주의자인 류폴드(Leupold)도 “70주”를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연장시켜 생각하면서 “70째주”의 역사적인 성취를 반박하여 말하기를 “마지막 주와 칠십 주의 종결부에 대하여 그들이 남겨놓고 있는 과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 이후의 칠 년이라는 중요하지 않은 연대뿐이며, 그 때에는 그다지 중대한 일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주석가들은 어떤 것을 지칭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여 당황하고 있다. 그러한 해석은 용두사미꼴이 되고 만다. 그러한 영광스러운 역사의 종지부가 그렇게 계시한 시기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는 이유에 관하여 조금이라도 만족할만한 답변을 제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Leu- pold's Exposition of Daniel, pp.436 -437, quoted by Walvoord, John F.)고 했다. 또한 류폴드는 26절에 언급된 “장차 올 통치자”를 27절에 언급된 언약과 관계된 인물로서, 그 인물은 적그리스도라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전천년적 입장을 표방했다(Ibid. p.431).
(2)몽고메리를 비롯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B.C.2세기 경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이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주장한다(A Critical and Exegetical Com- mentary on the book of Daniel by Jam- es A. Montgomery, p.385). 그러나 안티오쿠스는 7년 동안 많은 사람들(유대인들)과 언약을 맺지도 않았고, 그 주의 후 3년 반 동안 성전을 황폐케 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을 무시한 채 성경을 그들의 입장에 끼워 맞추려는 것 밖에 되지 못한다.
(3)에드워드 영, 필립 머우로, 간하배 교수, 어거스틴, 존 칼빈, 엘렌 G 화이트, 박형룡, 서달석, 강병국, 박태선, 이만희 등을 비롯한 무천년주의자들은 27절의 『그』가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26절의 『장차 올 통치자의 백성』이 로마의 티투스에 의해서 성취되어졌다고 주장한다(The Prophecy of Daniel by Edward J. Young, p.209, The Seventy Weeks and the Great Tribulation by Philip Ma- uro, p.85, 간하배 교수의 <다니엘의 메시아 예언>, pp.208, 214). 그러나 다니엘 9:24-27의 문맥을 볼 때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26절의 상반부에서 메시야는 끊어지고(그리스도의 죽음) 중반부에서 또 다른 왕이 옴을 암시하고 있으며, 시제도 미래 시제로 되어 있음을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4)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24:1-35, 마가복음 13:1-31, 또 누가복음 21:5-33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해 말씀하시기를 『이방인들의 때가 찰 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고 예언하셨다(눅21:24). 그리스도는 이 일이 있은 후에야 오실 것이다(무천년주의자들처럼 영적인 오심이 아니라 실제적인, 문자적인 재림이다. 그러므로 “70째주”는 이 세대의 끝에 가서야 일어날 것이다.)
(5)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리니』라는 마태복음 24:15은 다니엘 9:26 ,27의 예언을 인용하신 것인데, 이에 대한 서술은 마태복음 24:15을 역사적 성취로 끼워 맞추기 위해 제시하는 A.D.70년보다 22년 후인 A.D. 92년 경에 기록된 사도 요한의 요한계시록 13장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요한계시록 13장은 주님에 의해 마태복음 24:15에서 언급된 “멸망한 가증한 것”과 동일시되는 인물인 장차 나타날 “적그리스도”에 관해서 상세하게 묘사해 주고 있는데, 이는 다니엘 2장, 7장, 8장, 9:27, 마태복음 24:15과 일맥상통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70째주”는 여전히 미래에 있을 사건임을 명백히 증명해 준다.
거의 2000년 가까이 유대인들은 지상에 흩어져 있어 왔으나 그들은 열방 국가들에 의해 동화되거나 흡수된 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그들의 신분이나 민족적인 독특성을 상실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이 A.D.70년 이후 지금까지 호세아 3:4에 예언된 그 말씀대로 성취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희생제도 없으며, 형상도 없고 에봇도 없으며, 드라빔도 없이 거하리라』(호3:4). 그러나 그 다음 구절인 5절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덧붙여 이렇게 말한다. 『그 후 이스라엘 자손들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아서 나중의 날들에 여호와와 그분의 선하심을 경외하리라』(호3:5). 이 구절들 속에 그들이 보존되고 있는 비밀이 담겨져 있다. 그들은 “나중의 날들”(the latter days)에 되돌아 오기 위해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11:1,2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단언한 사도 바울의 언급을 통해 서도 알 수 있다. 이는 단지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는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11:25-26a).
우리는 수 많은 성경구절들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에서 민족적으로 회복될 것임을 명백히 알 수 있다(렘30:10,11, 16:14,15, 24:6; 사11: 11,12, 43:5-7; 암9:14,15 등등).
유대인에 관한한 하나님의 시계는 그들이 주를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인(행2:22, 23) 다니엘의 “70주” 중 “69주”에서 멈추어 버렸다. 우리는 “69주”와 마지막 “70째주” 사이의 공백기간 속에 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다시 다루실 때까지 다니엘의 “70째주”는 시작되지 않는다.
비교내용
기간 다니엘의 70째주(단9:27) 그리스도의 올리브산 설교(마 24:1-31) 요한계시록(계5:1-19:21) 전반부 3년 반 장차 한 왕(적그리스도)이 일어나 유대인과 7년 간 언약을 맺음 전쟁과 기근, 역병과 지진, 거짓 선지자 --> 이것이 슬픔의 시작임(마24:4-14) 흰 말을 탄 적그리스도가 평화의 왕으로 가장하여 나타남(계6:2). 전쟁과 기근,사망이 뒤따름(계5:3-8) 중반 시점 그 언 약이 깨어짐 - 희생제와 예물이 금지됨 ‘멸망의 가증한 것의 출현’ - 다니엘에 의해 예언됨 (마24:15-19) 용이 하늘에서 땅으로 쫒겨나고 그 자신이 적그리스도로 육화함(계12:10-17) 후반부 3년 반 황폐의 기간 전무후무한 환란 기간(마 24:29-31) 하나님의 진로가 쏟아짐 문자적이고 실제적인 재림 그리스도의 재림(단9:24b) 그리스도의 재림(마24:29. 31) 그리스도의 재림 (계19:1-21) 이 성취됨
다니엘의 “칠십 주”와 “올리브 산 설교”와 “대환란”의 비교도표
비교내용 기 간 |
다니엘의 칠십 째 주(단 9:27) |
그리스도의 올리브 | 대환란 기간 |
산 설교(마 24:1-31) | (계 5:1-19:21) | ||
① 전 3년 반 | 장차 한 왕(적그리 | 전쟁과 기근, 역병, | 흰 말을 탄 적그리 |
스도)이 일어나 유대 | 거짓 선지자 ☞ 이 | 스도가 평화의 왕으 | |
인들과 7년 간 언약 | 것이 슬픔의 시작임 | 로 가장하여 나타남 | |
을 맺음 | (마 24:4-14) | (계 6:2). 전쟁과 기 | |
근, 사망이 뒤따름 | |||
(계 5:3-8) | |||
② 중반 시점 | 그 언약이 깨어짐 | ‘멸망의 가증한 것의 | 용이 하늘에서 땅으 |
☞ 희생제와 예물이 | 출현’☞ 다니엘에 의 | 로 쫒겨나고, 그 자 | |
금지됨 | 해 예언됨(마24:15- | 신이 적그리스도로 | |
19) | 육화함(계 12:10-17) | ||
③ 후 3년 반 | 황폐의 기간 | 전무후무한 대환란 | 하나님의 진노가 쏟 |
기간(마 24:29-31) | 아짐(일곱 재앙들) | ||
④ 문자적이고, | 주 예수 그리스도의 | 주 예수 그리스도의 | 주 예수 그리스도의 |
실제적인 재림 | 재림(단 9:24) | 재림(마 24:29-31) | 재림(계 19:1-21) |
출처 :6천년의 성경역사 원문보기▶
다니엘의 70이레 예언 해설
7년의 시간적 간격이 있는가?
비밀 휴거를 주장하는 세대주의자들은 7년 환란을 너무나 자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그 기간을 매우 자주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경의 단 한 구절도 7년이라는 기간을 세상 끝이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련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A)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70주 예언:
성경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라면, 비밀 휴거를 가르치는 세대주의자들이 7년이라는 기간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니엘 9장 24~27절을 문맥을 무시하고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 놀랄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은 다니엘 9:24~27을 잘못 해석하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다니엘에게 보내준 그 소식을 그리스도의 재림에 적용하기 때문이다. 그 성경 구절은 재림이 아니라, 메시아의 초림에 관한 예언임을 이해해야만 한다.
다니엘 9:23에는, 다니엘이 예언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니엘이 기도하고 있는 동안, 가브리엘 천사는 그의 기도에 대한 답을 들고서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을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
B) 유대인들을 위한 70주의 은혜의 기간:
가브리엘 천사는 즉시로 예언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였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70 week, 70주일)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단 9:24). 바로 여기에 나오는 70 주에 관한 예언은 비밀 휴거를 주장하는 세대주의자들이 종말의 시간표를 작성한 기초를 이루고 있다. 이 예언을 올바르고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비밀 휴거론자들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포착할 수 있다.
이 예언에 나오는 70이레 기간은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렘 29:10)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다시 한번 허락된 마지막 은혜의 기간을 의미한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70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70 주일이라는 예언적 기간은, 그들이 메시아의 오심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은혜의 기간이었다.
C) 70주 예언의 계산법:
기간적인 예언을 해석할 때에는 하나님의 계산법을 따라야 한다. 마치 건축기사들이 청사진을 만들 때, 1인치를 1피트로 계산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기간적인 예언을 해석할 때에는, 그분께서 지정하신 계산법을 따라야 하는데, 그것은 에스겔 4:6과 민수기 14:34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1일은 1년이니라”라는 법칙이다. 따라서 70이레 즉, 70주일은 70 x 7 = 490일인데, 490일은 예언의 해석법칙에 따라서 490년으로 환산된다.
그런데 490년이 시작되는 시점은 언제인가? 계속해서 나오는 가브리엘 천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7 week)와 육십이 이레(62 week)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요”(25절). 자,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70주일 즉, 490년의 시작점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려질 때이며, 그때부터 시작해서 7주일과 62주일 즉, 69주일(69 x 7 = 483일, 즉 483년)이 지나면,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 가브리엘 천사의 설명이다. 누가 감히 천사가 설명하는 예언 해석을 부인할 수 있는가?
그런데, 70주일 예언이 시작점인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내려진 해가 언제인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마지막 명령이 언제 포고되었는가? 에스라 7:7,13에서 우리는 예루살렘 성의 중건령을 볼 수 있다. “아닥사스다 왕 7년에 ... 조서하노니.” 중건령이 내려졌던 아닥사스다왕 7년은 역사적으로 확립된 해이다. 성경의 관주에 나오는 해석을 보아도, 중건령이 내려진 해는 B.C. 457년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70주일 예언의 시작점은 B.C. 457년이다. 예루살렘성의 중건령의 조서가 그 효력을 발휘하는 B.C. 457년 가을부터 시작해서 483년을 내려가면, 역사의 연대표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사건이 일어나는 해를 만나게 되는데, 그 해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받으셨던 해와 일치한다.
D)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 대한 예언의 성취:
누가복음 3:1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침례를 받은 해에 관한 매우 결정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디베료 가이사 즉위 열다섯 해,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 분봉왕으로.” 역사는 가이사가 즉위한 해가 A.D. 12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디베료 가이사 즉위 15년은 A.D. 12년에 15년을 더한 해, 곧 A.D. 27년이 된다. A.D. 27년에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 같은 장 21절에 나와 있다. “백성이 다 침례를 받을 새 예수도 침례를 받으시고 ...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 하셨으며,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심”으로서, 다니엘 9장에 나오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아”라는 예언을 성취시키셨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예언을 근거로 당신의 지상 사업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마가복음 1:14~15에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The time is fulfilled, 때가 성취되었고).” 무슨 때가 찼다는 것인가? 다니엘 9장에 예언되어 있는 69주일(483년)의 예언의 때가 찼던 서기 27년에, 예수께서는 침례를 받으셨으며,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 공중전도를 시작하셨다.
E)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한 예언의 성취:
70주일 중에 마지막 남은 1주일(70주일-69주일=1주일)인 7년 동안에는 무슨 일이 이루어질 것인가? 마지막 남은 한 이레에 대하여, 가브리엘 천사가 하는 설명을 들어보자.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가 끊어져 없어지겠고”(26절). 가브리엘 천사는 62이레 후, 즉 서기 27년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언급한 후에,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하실 일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1 week)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week)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27절). (여기서 “이레(week)의 절반”은 7년의 반이므로 3.5년 즉, 3년 반이 됨)
그렇다면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서기 27년 가을부터 3년 반 후인 서기 31년 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인간이 범죄한 이래 장차 오실 것으로 약속된 메시아의 죽음을 상징하여 드려온 “제사와 예물을 금지하”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유대인들은 양을 성소의 번제단 위에서 태움으로써 죄의 용서를 받아왔으며, 동시에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믿음을 나타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양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서, 더 이상 양을 잡아서 태워 죽이는 제사 제도는 필요 없게 되었다.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였도다 ...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5~7). 또한 “이 (구약 시대의)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2),
그리스도의 지상 봉사가 3년 반 동안 이루어졌으며, 서기 31년 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성소 안에 있던 성전 휘장이 갑자기 찢어짐으로서(“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자, 이에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고.” 마 27:50), 모세가 제사 제도에 대해서 기록하였던 의문의 율법이 더 이상 필요 없음을 보여주셨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골 2:14).
그러나 비밀 휴거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으심에 관한 예언인 다니엘 9:24~27을 적그리스도의 행적으로 해석하는 엄청난 착오를 일으켰다. 그들은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하셨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적그리스도로 해석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생애의 목적에 대한 예언을 완전히 왜곡시켰는데, 이것이야말로 비밀 휴거론이 만든 최대의 비극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F) 유대인들을 위한 은혜의 시간의 종결:
이제, 마지막 1주일인 7년 중에서 나머지 3년 반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허락하신 70주간의 전체 예언이 완전히 종결된다. 나머지 3년 반동안 제자들은 주로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끝까지 일했다. 예수께서 돌아가신지 3년 반 후인 서기 34년, 새언약의 복음을 끝까지 거절하는 유대인 지도자들을 향하여 경고와 호소의 설교를 하던 스데반에게 산헤드린 공회가 돌로 쳐서 죽이는 판결을 내림에 따라, 스데반은 그리스도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으며(행 7:51~60), 이로서 유대인들을 위한 70주일(490년)의 유예 기간은 완전히 끝났으며, 곧 이어서 일어난 핍박과 함께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행 8:1~).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기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46).
서기 70년, 다니엘 9:26~27에 예언된 대로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로마제국의 군대들에 의하여, 성전은 불타서 잿더미가 되었으며, 110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포위된 채 예루살렘성 안에 갇혀서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 24:1~2)라는 예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다니엘서에 기록된 여러 예언들이 일시에 성취되었다.
로마에 세워진 타이터스 장군의 개선문에 부조된 옮겨지는 예루살렘 성전의 기구들:
서기 70년 예루살렘을 포위 함락시킨 후 성전의 금 촛대, 진설병 떡상, 나팔 등을 전리품으로 가져간 것을 개선문에 부조한 것이다.
서기 34년부터 그들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롬 11:25,26) 이방인들처럼 개인 단위로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 민족으로서 하나님의 총애 받는 기간에 일단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유대인들의 은혜의 시간이 끝난 것에 대해서 신약 성경은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마 21:43).
“길가에서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자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개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 나무가 곧 마른지라(무화과 나무는 유대 국가를 상징함)”(마 21:19).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기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46).
F) 결론:
이제, 우리는 비밀 휴거론자들이 어떻게 7년이라는 환란 기간을 만들어 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다니엘의 70주 예언에서 마지막 7년을 역사의 중간으로부터 뚝 떼어서 저 멀리 미래 즉, 세상 끝으로 가져갔다. 그들은 마지막 70번째 주일은 말세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의인들을 비밀리에 휴거시킨 후에야 성취될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7년 환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어떤 성경절을 붙잡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다니엘 9:25의 69주일이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예언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69주와 70번째 주 사이에 2000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을 집어넣었다. 즉, 예언의 시간표를 69주(483년)+거의 2000년에 이르는 그리스도 교회시대+1주(7년)로 만들었다. 70번째 주인 마지막 7년을 “7년 대환란”이라고 이름붙인 후, 7년 환란기의 앞과 뒤에 비밀 공중 휴거와 공개 지상 강림이 있을 것이라는 2단계의 재림설을 만들어 낸 휴거론이야말로 너무나 허구에 찬 인간의 상상인 것이다.
-퍼온 글에 사진 및 도표자료를 추가해 재편집 했음-
다니엘서에 나타난 문제점
1. 다니엘서의 논쟁
다니엘서는 논쟁(論爭)이 많은 책이다. 그 가운데서도 주된 논쟁은 이 책에 나오는 "메시야 왕국"에 대한 개념이 신약시대에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인류의 종말에 성취될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이 신학적 논쟁은 오랜 기간 끊임없이 대두되어 왔으며 아직도 결론이 나오지 않고 있다. 이 문제는 다니엘서를 극단에서 극단으로 양립되는 해석을 유출하기 때문에 다니엘서를 연구하려는 신학생들이나 다니엘서를 강해하려는 목회자들은 이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2. 다니엘서는 왜 등장했는가?
다니엘서의 위치는 성경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다니엘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가 언제인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그들 앞에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계시는 언제나 그 응답의 시기 곧 성취의 역사적 시기가 있다. 계시가 계시 자체로 끝나는 경우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 특히 그 계시가 하나님의 계시인 경우, 반드시 성취의 시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성취는 인류의 역사적 무대위에 실현되어야 하며 그것도 그 계시에 나타난 말씀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 신명기 18 : 22 =
그러면 이 다니엘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예언이 인간의 역사적 무대 위에 성취되었는가에 대한 해답부터 얻어야 한다. 이 말씀에 대한 해답이 12장에 나와 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 단 12 : 4 =
이 글을 봉함하라고 하신 이 글은 다니엘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봉함된 상태에서는 그 말씀이 성취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아직도 이 글은 봉함된 상태 그대로 있으며 앞으로 이글이 역사적으로 성취될 그 때에 개봉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개봉되는 날, 그들이 소망하는 메시야 왕국이 세워질 것이다.
3. 다니엘서의 일관성
다니엘서에는 여러 가지 사건들에 대한 계시가 파노라마처럼 전개된다. 그런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서의 계시는 오직 한가지 문제에 그 계시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초점은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서에 전개되는 모든 계시는 이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어야 하며 "하나님 나라"의 대두를 위한 전제조건으로만이 다니엘서의 존재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열왕의 때에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 단 2 : 44 =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 단 7 : 14 =
4. 다니엘서는 누구에게 주시는 계시인가?
우리가 디니엘서를 펼 때 과연 이 책은 누구에게 해당되는 사건이며 누구에게 주는 경종과 축복인가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 다니엘서의 결론은 전세계적이다. "하나님의 나라"란 어느 한 지역이나 어느 한 백성을 지칭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다니엘서는 어느 한 민족에 대한 민족적인 사건과 경종으로 일관되어 나가고 있다. 다니엘서의 대상은 이스라엘 곧 유대인이다. 그리고 그 지역도 유대 지역에 국한시킨 점이 거의 전부다. 우리는 다니엘서를 연구하는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점에 유념해야 한다. 만약 이점에 명백한 한계를 설정하지 않으면 다니엘서의 해석은 공중 분해되거나 미로(迷路)에서 방황하는 것으로 끝장이 나게 된다.
"네 민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70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 단 9 : 24 =
"네 민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란 표현은 다니엘에게 계시의 대 상을 명시해 주고 있는 대목이다. 다니엘에게 말씀하고 있는 "네 민족과 네 거룩한 성"은 결코 "하나님의 교회"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말씀 이 아니다. 문장에 나타난 문자 그대로 다니엘이 혈통적으로 속한 유대민족과 다니엘이 몽매에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는 다니엘의 조국 땅 "예루살렘"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하여 다니엘에게 언급한 바 "네 민족과 네 거룩한 성"을 유대인이나 예루살렘 성이 아닌 신약 시대의 하나님의 교회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인가? 다니엘서 9장은 다니엘서에 나타난 모든 계시의 해결점을 최종적으로 제시해 주시는 중요한 내용이다.
이 다니엘서 9장의 대상이 유대인과 예루살렘의 운명에 관한 것이라면 다니엘서 전체의 대상이 유대인과 예루살렘의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70 이레의 기한을 정하신 그 기한도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기한이요 70 이레에 들어 있는 모든 계시도 유대인에게 적용되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계시에서 보여 주시는 종말적인 모든 내용이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인류의 종말적인 사건의 계시를 유대인 들과 예루살렘을 구심점(求心點)으로 전개시킨 것이 다니엘서에 나타난 종말적인 계시이며 이같은 종말적인 계시를 더 광의적(廣義的)인 사건으로 전개시킨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5.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떼려야 뗄 수 없는 계시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이 두 권의 책이 모두 인류의 종말에 대하여 계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명심할 일은 요한계시록이 다니엘서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고 다니엘서가 요한계시록에 미치는 영향은 많다는 사실이다. 만약의 경우 다니엘서 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가 신약시대의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뜨인 돌"은 예수님의 초림이 되며 다니엘서의 해석은 자동적으로 상징적 해석 방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다니엘서 9장의 "70 이레"와 "한 이레"의 언약 역시 인류의 종말과 연결시키지 않기 때문에 신약 시대의 기간으로 해석하게 되며 7년간이란 "종말적 기간"(보통 7년 환난이라고 부른다)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다니엘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신약 시대의 교회 시대로 해석하는 견해는 요한계시록을 상징적(象徵的)으로 해석하는 진원지가 되고 있다. 우리는 다니엘서의 잘못된 해석은 다니엘서 뿐 아니라 그 여파가 요한계시록의 해석에까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의 해석이 이런 방향으로 전개될 때, 종말론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니엘서의 전반적인 내용을 문장적(文章的)으로 자세히 연구하는 가운데 다니엘서에 나타나 있는 계시의 진실을 밝혀 낼 수 있어야 한다.
6. 다니엘서 각 장에 나타나 있는 종말적 계시
다니엘서에 나타난 계시의 중심은 전장에 걸쳐 일관된 사건으로 전 개되는데 그 계시가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다. 이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이 본 다니엘서의 최종적인 결론으로 매듭 짓게 되는데 각 장별로 살펴볼 때 그 계시의 대략적인 흐름을 알 수 있다.
전체 : 앞으로 이스라엘이 겪을 역사적 운명을 종말론적으로 계시해주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등장시
킴으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소망을 갖게 하였다.
2장 :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으로 보인 인류의 종말과 하나님의 나라) 2장에서 바벨론으로부터 시작되는 인류의 역사의
진전을 보여 주신다. 이같은 역사의 진전에는 교회를 등장시키지 않았으며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의 역사적 진행 과정만이 기술되었다.
7장 : (종말에 등장할 네 바람과 10뿔과 작은 뿔) 7장에서 인류의 역사에 등장할 네 바람(단7:2.계7:1.9:14,15) 을 보여주
시며 그중 넷째 짐승의 출현이 곧 작은 뿔의 등장인데 이자의 등장으로 이스라엘은(유대인) 전대미문의 종교적 핍
박을 받게 된다. 이때 이스라엘이 고대하는 메시야가 출현하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해 주시고 작은뿔을 섬멸
하심으로 그의 왕국(하나님의 나라)을 세울 것임을 계시해 주신다.
8장 : (작은 뿔의 등장으로 보여준 구약적 적그리스도의 모습) 8장에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시대로부터 메대바
사와 헬라를 거쳐 종말에 등장할 적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4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자에 의해 이스라엘이 종교적 핍박을 받으면서 2,300 주야간의 시련을 겪을 민족적 비운의 계시가 나온다. 이 자가
"작은 뿔"로 나오는 것은 7장의 작은 뿔의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9장 : (70 이레로 보여준 초림과 재림의 메시야) 9장에서 다니엘서의 핵심적 계시가 되는 "70 이레"가 나온다. 9장에
서는 다니엘서 전반에 걸쳐 성취될 모든 예언적 계시를 70이레의 틀에 넣어 간략하게 전개시키고 있다. 이같은 70이
레의 계시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때부터 초림의 메시야가 등장하여 고난을 당
하기까지 69 이레가 지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민족적 역사는 인류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중단 될 것이다
(마23:38-39. 눅19:41-44). 이 시기에 "한 이레"의 언약을 세울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면 이자에 의하여 예루살렘은 다
시 한번 환난을 겪게 될 것이다(슥14:- 5). 이때 메시야의 출현으로 이자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구속과(단9:24)
유대인들이 고대해 온 메시야 왕국이 세워지게 될 것이다(단7:26,27).
11장 : (예루살렘에 등장할 두 적그리스도의 역사적 등장 모습) 11장에서 메대바사의 쇠패와 헬라의 등장을 보여주며
라의 분열로 그 가운데서 4대 열강이 등장하는데 그중 애굽의 남방 왕과 시리아의 북방 왕과의 끊임없는 전쟁의 진
행 과정을 보여 준다. 이같은 계시는 시리아에 등장할 한 인물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 자가 구약적 적그리스
도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B.C. 175-164)로 종말에 예루살렘에 침입하여 유대인들에게
우상 숭배를 강요하므로 종교적 핍박을 가할 적그리스도의 모형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이자는 작정된 기한에 (2,300
주야) 최종적인 운명을 고하게 되는데 이자가 인류의 종말에 가서 이스라엘 앞에 신적인 존재로 다시 그 모습을 보
여주게 된다(살후2:4).
12장 : (인류의 종말과 메이야 왕국의 소망) 12장은 인류의 종말에 등장할 메시야 왕국의 출현에 대한 계시이다. 그런
데 그 나라가 "한 이레"중 후반부에 속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가 시작될 때부터 1335일만에 성취될 것임을 계시
해 주신다. 민병석 목사
https://cafe.daum.net/correcttheology/1Esc/85?svc=cafea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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