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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에스라 2장 주석

by 은총가득 2021. 8. 1.

 

남은 자들의 유다 귀환(스2:1,2)

 

관련말씀

느 7:6-7/렘 23:3-4, 사 10:20-22

 

중심내용

고레스의 조서 반포에 따라 스룹바벨과 예수아 등 12명의 지도자급 인사(스 2:2, 느 7:7)들의 인도 하에 대략 오만여명(2:64-65)의 각계각층의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오직 여호와의 말씀만을 의지하고 가나안 고토로 돌아왔다. 

      

명제

하나님은 어느 시대건 남은 자들을 통해 구속사를 성취해 가신다. 

 

설교목적

유다백성들의 포로귀환과 성전 건축의 내용이 담긴 고레스의 조서에 따라 대략 오만여명의 각계각층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왕가의 후손인 스룹바벨 등 12명의 지도자급 인사(2절, 느 7:7)들의 인도 하에 가나안 고토로 돌아온다. 이들은 고토에서의 삶이 불확실하고 많은 고난과 시련이 불가피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여호와의 말씀만을 의지한 채 성전재건을 통한 신(新)다윗왕국의 재건을 소망하며 바벨론을 떠난 자들이다. 선지서는 이들을 ‘남은 자’들이라고 부른다(렘 23:3-4, 사 10:20-22). 그런 의미에서 남은 자란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앙과 삶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천상지향적인 가치관의 소유자들인 셈이다(왕상 19:18, 롬 11:4-5, 계 14:3-5).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의 팽배로 현세지향적인 가치관이 만연한 현실 속에서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며 천상지향적인 가치관에 입각해 살아가는 남은 자들의 순수한 신앙적 삶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된다(남은 자 신앙관 회복).

 

 

 

        

Ⅰ. 도입 : 바벨론 포로들의 귀환   

   

1. 하나님께서는 70년의 섭리적 작정의 기간이 찼을 때, 바사의 고레스로 하여금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왕의 마음을 감동시켜 유다민족의 포로귀환과 성전 건축의 허락이 담긴 조서를 반포케 함으로서 예레미야를 통해 약속하셨던 유다의 회복을 성취하신다. 과연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언약성취에 신실하신 분이다.

2. 이 과정에서 대략 오만여명의 가계각층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왕가의 후손인 스룹바벨(여호야긴의 손자)의 인도 하에 많은 금은보화와 성전 기물들을 가지고 가나안 고토로 돌아온다. 선지서는 이들을 가리켜 특별히 ‘남은 자’들이라고 부른다(렘 23:3-4, 사 10:20-22).

3. 이들 남은 자들은 가나안 고토에서의 삶이 불확실하고 많은 고난과 시련이 예견됨에도 불구하고 오직 여호와의 말씀만을 의지해 성전건축을 통한 신(新)다윗왕국의 회복을 염원하면서 가나안 행을 결단한 투철한 여호와 신앙의 소유자들인 셈이다.

4. 하나님은 어느 시대건 하나님의 남은 자들을 통해 구속사를 주관해 가신다. 신약시대도 예외는 아니다(롬 11:4-5). 이들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앙과 삶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천상지향적인 가치관의 소유자들이다. 인본주의와 세속주의가 만연한 현실 속에서 남은 자의 신앙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Ⅱ. 전개 : 스룹바벨에 의한 1차 포로 귀환(BC 537) 

 

A. 1차 포로 귀환자들의 명단(2-67절)과 기준 

 

1.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포로 귀환을 주도한 지도자들의 명단(2절)

(1) 에스라서/11명, 느혜미야서/12명(느 7:7) : 에스라서는 1명이 누락됨

(2) 지도자급 인사 12명으로 구성된 1차 귀환자(남은 자) 총수(대략 오만여명)는 야곱의 12지파에 근거한 과거 역사적 이스라엘 백성들과 연속성을 가지면서도 12지파와는 무관하게 각계각층의 투철한 여호와 중심의 신앙의 소유자들로 구성된 사실로 인해 불연속성을 함께 띠고 있다. 선지서는 이들을 ‘남은 자’로 부른다(렘 23:3-4).

* 이런 사실은 향후 회복될 신(新)다윗왕국의 정체성이 야곱의 12지파에 근거한 가시적인 과거 다윗왕국의 국가적 개념을 뛰어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로 구성될 우주적이며 영적인 메시아 왕국 곧 교회공동체로 나타날 것을 전망케 한다(갈 3:29, 마 16:18-21, 엡 2:11-22).

 

2. 1차 귀환자 명단과 기준

(1) 일반 백성들(3-35절) : 가계별 명단(3-20)/지역별로 분류된 명단(21-35)

(2) 제사장(36-39절) : 가계별로 분류된 제사장 명단

(3) 레위인((40-42절) : 노래하는 자(41절)/문지기(42절)

(4) 성전 최하위 봉사자(43-58) : 느디님 사람(43-54)/솔로몬 신복자손(55-58)

(5) 조상을 확인할 수 없는 귀환자(59-63) : 백성(59-60)/제사장(61-63)

(6) 기타 및 총계(64-67절) : 노비와 노래하는 자를 포함 총 49,897명

* 이들의 특징은 남녀노소와 신분의 귀천과 소속의 다양성을 불문하고 투철한 여호와 신앙 안에서 공통분모를 가진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신약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반영한다(갈 3:28-29).

    

B. 1차 포로 귀환자(남은 자)들의 특징

1. 이들은 야곱의 12지파에 근거한 순수한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 곧 역사적 이스라엘의 후손들로 구성되지 않았다. 각계각층의 자원하는 자들로 구성되었다.

2. 이들은 스룹바벨을 위시한 12명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됨으로 과거 12지파에 근거한 역사적 이스라엘과 연속성을 띠나 내용상 불연속성을 함께 가진다. 다시 말해 철저히 여호와 신앙에 투철한 자들 중심으로 구성됨으로 성전 건축을 통한 신(新)다윗왕국의 재건이라는 신정국가의 개념보다는 영적 하나님 나라인 여호와 중심의 신앙공동체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암시한다.

3. 결국 에스라서는 포로귀환자들을 ‘남은 자’들로 규정하면서 이들을 통해 가시적인 국가로서 신(新)다윗왕국의 재건이 아닌 여호와 중심의 영적 하나님 나라 곧 메시아 중심의 신앙공동체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다윗왕가의 후손인 스룹바벨에 대해 특별히 주목하지 않는 이유도 이런 사실과 무관치 않다.

* 이런 관점에서 선지자들의 새 언약에 약속된 회복된 이스라엘로서 신(新)다윗왕국의 정체성은 과거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인 야곱의 12지파에 근거한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친(親)백성들, 곧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로 구성된 메시아 중심의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지향한다(갈 3:29, 엡 2:11-22).

* 마태는

이런 사실을 점진적인 언약적 구속사관에 입각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기술하는 가운데 신정왕국의 회복과 관련된 주제를 포로기 이후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시킴으로(마 1:12-16, 17절) 다윗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해 출현한 신약의 교회야말로 참 다윗왕국의 실체인 사실을 암묵적으로 시사한다. 이때 스룹바벨은 여호야긴의 손자로 소개된다(마 12:12).

4. 하나님께서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섭리적으로 보존하시는 모든 시대의 남은 자들의 특징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앙과 삶의 도리로 붙들고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살아가는 천상지향적인 가치관의 소유자들로 모아진다(왕상 19:18, 롬 11:4-5, 계 14:3-5).

* 우리(나)는 과연 이 시대의 남은 자들로 존재하는가?

 

     

Ⅲ. 결론 :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통해 구속사를 성취해 가신다. 

 

1. 1차 포로귀환자들은 본질상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인 역사적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계승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과 삶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여호와 중심의 신앙의 소유자들인 남은 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새 이스라엘로서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로 존재한다. 

 

2. 하나님은 모든 시대에 섭리적으로 보존하고 계신 그 시대의 남은 자를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를 경영해 가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의 남은 자들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의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가리킨다. 결국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 약속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란 다름 아닌 이 시대의 교회다. 

    

3. 이런 관점에서 교회는 본질상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및 다윗언약과 선지자들의 새 언약이 지향하고 있는 미래지향적인 참 제사장 나라와 신정왕국으로서 참 다윗왕국을 의미한다(벧전 2:9, 마 16:18-21). 따라서 교회는 그 자체로 하나님 나라를 대변하지는 않지만 논리적 사고체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으로 존재한다.

 

4. 그러므로 교회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남은 자들로서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의 팽배로 현세지향적인 가치관이 만연한 현실 속에서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천상지향적인 가치관에 입각해 믿음의 정절과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된다고 하겠다(계 14:3-5/남은 자 신앙관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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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2장

 

●포로의 귀환(에스라 2:1-35)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내용을 관찰할 수 있다.

 

Ⅰ. 포로에서 돌아온 가족들에 대한 기록과 각 가족의 수에 관한 기록이 보존되어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신앙과 용기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신념과 자기 고국땅에 대한 애착의 대가요, 그들의 명예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선한 모범을 따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영광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초청을 맞아들인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은 이것보다 더 신성한 기록인 "어린 양의 생명책에서" 영예롭게 발견될 것이다. 포로에서 돌아온 가족들의 명부가 보존된 것은 역시 후손들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즉 후손들은 그 기록을 통해서 자기들의 근원과 가족 관계를 알 수 있었다.

 

1. 그들은 "도(道)의 거민" 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유다는 한때 혁혁했던 왕국이요, 다른 여러 왕국들이 그 나라의 부속 도였다. 그래서 그 부속 도들은 유다에 종속되어 의존했었다. 그러나 이제 유다 자체가 하나의 도가 되어서 바아사왕으로부터 법률과 직권을 위임받게 되었고, 바사왕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의는 민족을 존귀케 하나, 죄는 민족을 왜소하게 만들고 비참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으라. 그러나 이와 같이 그들이 종이 됨으로써(약속으로는 자기들의 땅이었던 곳에서 나그네 노릇을 한 족장들처럼) "더 좋은 나라" "사라져 버릴 수 없고" 한 부속 도가 될 수 없는 "거룩한 나라" (히 11:16)를 회상하게 되었다.

 

2. 그들이 "각각 본성(本城)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즉 이전에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지정해 준 도성을 말한다. 적어도 그 때에 지정된 그 비슷한 도성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이의가 있을 법도 한데, 자기들의 도성이 없다고 항의한 자들은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3. 지도자들이 첫째로 언급되어 있다(2절).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그들에게 있어서 모세와 아론이었다. 전자는 그들의 우두머리 방백이고, 후자는 우두머리 제사장 격이었다. 느헤미야와 모르드게가 여기에 언급되어 있다. 혹자는 우리가 뒤에 가서 볼 수 있는 그 유명한 사람들과는 동명이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마 동일한 사람이었으나, 후에 자기들의 나라를 섬기기 위해 궁정으로 되돌아 갔을지도 모르겠다.

 

4. 이들 중 어떤 가족들은 그들 조상들의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지었고, 또 어떤 가족들은 자기들 이전에 살던 지명을 따라 불리우고 있다. 우리들에게도 많은 성(姓)이 사람들이 이름을 따르거나 지역의 이름을 따르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5. 여기에 기록된 가족들 중 어떤 가족의 숫자는 느헤미야 7장의 기록과 다소간 차이가 있다. 느헤미야 7장에서도 이 목록이 반복되어 있는데, 그것은 여기에서 따간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처음에 기록된 자들의 이름 중 어떤 것은 나중에 가서 빠졌을지 모른다. "가겠습니다" 해 놓고 "가지 않는" 자손이 생겼다면, 그런 경우에는 그들이 속했던 가족의 숫자는 감소되었을 것이다. 또 이와 달리 처음에는 사양했던 자들이 "후에 회개하고 갔을" 지 모른다. 그런 경우에는 숫자는 증가되었을 것이다.

 

6. 여기에는 "엘람의 자손" 이라 불리는 가족이 둘 있다(하나는 7절, 다른 하나는 31절).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두 가족의 숫자는 다 같이 1254명이라.

 

7. "높으신 주" 라는 뜻의 이름인 아도니감의 자손은 바로 "짐승의 숫자" 인 666이다(계 13:18). 계시록에서는 이 수를 "사람의 수" 라고 말하고 있다. 휴 브러턴 씨(Mr. Hugh Broughton)는, 그 숫자가 본문의 아도니감과 관계된 것이라고 본다.

 

8. 베들레헴 사람(21절)이라는 명칭의 사람들은-그 도성이 다윗의 도성이었지만-불과 123명뿐이었다. 베들레헴은 "유다의 수천 성읍들 중에서도" 작은 도성이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메시야가 나오게 되어 있다(미 5:2).

9. 아나돗은 베냐민 족속에게 유명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 가계에 속한 사람은 128명뿐이었다(23절). 이것은 아나돗 사람들이 그들 도성에서 난 예레미야를 박해함으로써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은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이니라" 는 저주이다(렘 11:21, 23). 그리고 "가련하다. 너 아나돗이여" 라고도 했다(사 10:30). 선지자를 박해하는 것은 파멸을 가장 빨리 가져오는 길이다.


돌아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스라 2:36-63)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설명이 있다.

 

Ⅰ. 돌아온 제사장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의 수가 현저하게 많았었다. 귀환자 전체의 약 10분의 1이 된다. 전체 수가 42,000명 정도(64절)인데, 4제사장 가족들의 수가 4,200명이 넘고 있다(36-39절). 이 수는 하나님의 몫인 열 중 하나-즉 축복된 비율이다. 여기에 기록된 제사장들 가족들 중 세 가족은 그 반열의 우두머리였다(대상 24:7, 8, 14). 네 번째 가족이 바스훌이었다(38절). 이들이 예레미야를 학대한 바스훌(렘 20:1)의 후손이라면, 그렇게 악한 사람이 이렇게 선한 씨를 얻고 그 수도 많아졌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Ⅱ. 레위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나는 이들의 수가 적음에 대해 이상히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을 합쳐서 350명이 되지 못했다(40-42절). 옛적에는 레위 족속들이 대제사장들보다 더 그들의 직무에 열성이었다(대하 29:34).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경건한 열심을 가졌다는 평판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바람은 임의로 불어" 방향을 바꾼다.

 

Ⅲ. 느디님 가족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들은 생각건대 기브온 사람들로 추측된다. 기브온 사람들은 처음에 여호수아에 의해(수 9:27) 생명이(이름의 뜻대로) "주어졌고", 그 후에는 사울에게 추방되었다가 다시 다윗이 하나님의 전을 섬기는 레위인들에게 붙여 나무 베는 자와 물긷는 자로 삼았던 자들이다. 그리고 솔로몬은 자기의 종들과 그들이 같이 일하게 하였으며(외간상으로는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나타나 있지 않다), 여기서 성전 하속들 중에 들어 있고, 느디님 사람이란 명칭으로 계수되어 있다(55, 58절). 비록 천한 위치에서 일할망정 하나님의 전에 속해 있다는 것은 명예롭다는 것을 기억하자.

 

Ⅳ.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이요, 또 제사장들로 간주되었으나, 그런 영예로운 호칭이 불분명한 자들도 있었다.

 

1. 자칭 야곱의 자손이라고 하나 이스라엘인임을 입증할 수 없는 자들도 상당히 있었다(59, 60절). 그러나 그런 자들이 자

기의 가문을 밝힐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의 전과 그 백성에 대한 애착은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도 예루살렘에까지 올라가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은 참으로 "유다의 근원에서 나온" (사 48:1) 참 이스라엘의 씨들이었지만, 그 물의 맛을 잃어버린 그런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2. 또 여기에는 제사장임을 입증할 수 없으나, 사실은 아론의 씨라고 생각해야 될 사람들도 있었다. 문자로 보존되지 아니한 것은 얼마 안 가서 잊혀지는 수가 허다하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다음 몇 가지를 들을 수 있다.

(1) 그들은 어떻게 하여 자기들의 증빙자료를 상실했는가? 그들 조상 중 한 사람이 다윗 때에 훌륭한 사람이었던 바르실래의 한 딸과 결혼했다. 그래서 그는 이 훌륭한 가문과의 결연을 자랑했고, 제사장의 가족으로서의 이전 명칭보다 바르실래의 가문을 더 좋아하여 그 가문의 이름을 따라 그의 후손이라고 불리기를 원했다. 그렇게 되자 그들의 족보도 아론의 계보가 아니라 다윗 계보에 들어가게 되어, 결국은 가계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바벨론에서는 제사장 직분으로 인해서 오는 특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므로 제사장 계보에 드는 것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자기들의 사역직이나 사역자와 자기들과의 인척 관계가 자기 자신을 경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가 나의 직무를 존귀케 하리라" 고 말씀하신 분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2) 그들이 그 결과를 잃은 것이 무엇인가? 그들은 자기들의 제사장 직임을 증거할 수 없게 되자, 제사장이 될 수 없었었고 제사장 직위에 쫓겨나며 제사장 직분을 모독한 자로 여겨졌다. 이제 제사장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회복했고, 제단도 다시 섰으므로 점차 본래의 직위가 회복될 터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천부의 권리를 인간적인 영광과 바꾸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마땅히 그 직위에서 쫓겨나고 "지성물(至聖物) 먹는 것이" 금지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당신을 섬기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실 것이다. 그들의 제사장 직분을 몰수 한사람은 총독이었다. 혹자는 현재의 총독 스룹바벨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느헤미야였다고 생각한다(느 8:9; 10:1 에는 그를 총독이라 했다. 그리고 그가 몇 년 후에 돌아와서 이 명령을 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금령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일시적인 정지에 불과했으며, 이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 볼 수 있는 "우림과 둠밈을 가진" 대제사장이 나올 때까지일 뿐이었다. 그런 때가 오기를 바랬다. 그러나 제2 성전에서 대제사장은 있었지만, 그런 시기는 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우림보다도 더 훌륭한, 완전한 표준 구약 성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신탁이 없어지자 가장 위대한 신탁인 메시야를 대망하도록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 우림과 둠밈이란 메시야라는 신탁의 한 모형에 불과했다. 제2 성전에는 법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또 있었다면 옛 것인지 새로 만든 것이었는지 확실치 않다. 실체가 다가오게 되자, 점차 그림자들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법궤가 없다는 것 때문에 어떤 손상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암시하고 계신다(렘 3:6, 17). "그 때에, 곧 예루살렘을 여호와의 보좌라고 부르는 날에, 모든 민족이 그리로 모이는 그 날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시는 이야기되거나 기억되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이도 그들이 만사를 잘 해나갈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행자들의 총계(에스라 2:64-70)

 

여기에서는 다음의 내용을 볼 수 있다.

 

Ⅰ.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총계가 나와 있다. 앞에 나온 전체 숫자는 실제로 3만 명에도 이르지 못한다(29,818명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계수에 들어오지 못한 자가 만 2천 명 이상이었다. 이들은 아마 다른 이스라엘 족속, 즉 유다 족속과 베냐민 족속 이 외의 사람들로서, 그들의 가족이나 그들이 속했던 성읍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1. 이 수는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간 숫자의 두 배가 넘는다. 이것을 볼 때, 애굽에서와 같이 고난의 때가 그들의 수효가 증가하는 때였다.

 

2. 그 민족의 출발은 극소수였다. 그러나 그들의 열조에게 주어진 약속으로 말미암아, 그 후 거의 500년이 지나, 로마에 의해 최후로 멸망받기 전에는 대단히 큰 숫자의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고 하실 때는 "하나의 작은 자가 천 명이 될 것이다."

 

Ⅱ. 그들을 따른 수행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종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종들이 비교적 소수이고(65절) 짐을 진 짐승들의 수효가 그와 비슷하다는 것은 이상할 게 없다(66, 67절). 그들의 형편은 과거와 같지 않았다. 그들 중에 "노래하는 남녀" 가 200명이었다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 이들은 아마 "그들의 애통을" 보조하기 위한 자라고 생각된다(대하 35:25 에 있는 자들과 같이). 이런 때가 오면 그들이 애가를 부르며 "울며 행하리라" 는 것이(렘 50:4) 미리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Ⅲ. 그들이 성전 건축을 위해 바친 공물. 이 내용은 68, 69절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1.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왔다" 고 했다. 그러나 거룩하고 아름답던 그 전이 지금은 폐허가 되었고 쓰레기 더미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제단이 없어지자 "그 제단이 있던 장소" 에서 제사를 드렸다(창 13:4). 그리고 바로 이런 태도가 "성전의 티끌까지도" 사랑하는(시 102:14) 참 시온의 아들들의 자세이다.

 

2. 그들은 "그 곳에 성전을 세우기 위해" 예물을 즐거이 드렸다. 그들은 먼저 성전을 세우려고 했던 것 같다. 비록 그들이 여행에서 방금 돌아와 삶을 시작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들은 성전 건축을 위해 즐거이 예물을 드렸다. 아무도 자기들의 신앙을 위해 드는 비용 때문에 불평하지 말자.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께 바칠 때 그 대가를 다시 얻게 된다는 것을 믿게 하자. 이들의 헌물은 다윗 때에 방백들이 드린 헌물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다윗 시대에는 헌물을 달란트로 바쳤으나(대상 29:7), 지금은 몇 다릭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몇 다릭도 그들의 능력에 비추어 본다면 과부의 동전 두 입과 같이 수천 달란트와 같이 하나님이 받으실 것이다. 금 6만 1천 다릭이란, 컴블란드(Cumberland)의 계산에 의하면, 상당히 많은 파운드에 해당된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1마네 60세겔이다(즉 30온스). 이것은 영국 돈으로 7파운드 10온스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본문의 5천 마네는 영국 돈으로 3만 5천 파운드 정도의 돈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바벨론에서 그들의 인원 증가에도 축복하신 것과 같이 재산 증가에도 축복하신 것 같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번성케 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즐거이 하나님 전 건축을 위해 바쳤다.

 

3. 그들은 "본성(本城)에" 거하였다(70절). 그들의 도성이 보수되지는 못했지만, 그곳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기들의 도성들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사는 것을 만족해 하였다. 또 화려함이나 풍요함이나 권세도 없었지만 자유와 자기 소유에 대해 감사했다. 그들은 대단히 빈곤했으나, 그들의 통일과 단결이 그 빈곤의 결과를 좋게 만들었다. 그들 모두와 모든 재산을 위해 충분한 터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 중에 다툼이 없었고 오히려 완전 조화만이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안정을 말해주는 좋은 전조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후대에 가서 그들이 서로 불화했을 때는 그 불화가 파멸의 전조가 되었던 것이다.

 


돌아온 자의 수(스2:1-70)

 

[1-2절]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의 자손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도(道)로 돌아와 각기 본성에 이른 자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

 

본장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자들의 수를 기록하였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건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선 이스라엘에게 지도적인 인물들을 주셨다. 2절은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를 비롯하여 11명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돌아온 백성의 지도자들이었을 것이라고 보인다. 

 

[3-20절] 바로스 자손이 2,172명이요 스바댜 자손이 372명이요 아라 자손이 775명이요 바핫모압 자손 곧 예수아와 요압 자손이 2,812명이요 엘람 자손이 1,254명이요 삿두 자손이 945명이요 삭개 자손이 760명이요 바니 자손이 642명이요 브배 자손이 623명이요 아스갓 자손이 1,222명이요 아도니감 자손이 666명이요 비그왜 자손이 2,056명이요 아딘 자손이 454명이요 아델 자손 곧 히스기야 자손이 98명이요 베새 자손이 323명이요 요라 자손이 112명이요 하숨 자손이 223명이요 깁발 자손이 95명이요.

 

3-20절은 열 여덟 명의 이름들의 자손들의 수효를 기록하고 있다. 그들 선조들은 포로 생활 중에 회개하고 믿음을 회복한 듯하다. 그들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고국으로 돌아왔다. 

 

[21-35절] 베들레헴 사람이 123명이요 느도바 사람이 56명이요 아나돗 사람이 128명이요 아스마웻 자손이 42명이요 기랴다림과 그비라와 브에롯 자손이 743명이요 라마와 게바 자손이 621명이요 믹마스 사람이 122명이요 벧엘과 아이 사람이 223명이요 느보 자손이 52명이요 막비스 자손이 156명이요 다른 엘람 자손이 1,254명이요 하림 자손이 320명이요 로드와 하딧과 오노 자손이 725명이요 여리고 자손이 345명이요 스나아 자손이 3,630명이었더라.

 

21-35절은 여러 지역들의 사람들의 수효를 기록한 것 같다. 그들은 비록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들이지만, 어느 사람의 자손들로 분류되기 어려운 자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도 복종하여 돌아왔다.

 

[36-42절] 제사장들은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이 973명이요 임멜 자손이 1,052명이요 바스훌 자손이 1,247명이요 하림 자손이 1,017명이었더라. 레위 사람은 호다위야 자손 곧 예수아와 갓미엘 자손이 74명이요 노래하는 자들은 아삽 자손이 128명이요 문지기의 자손들은 살룸과 아델과 달문과 악굽과 하디다와 소배 자손이 모두 139명이었더라

.

돌아온 자들 중에는, 특히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성전 제사 회복에 필요한 자들이었다. 레위인들 중에는 일반 레위인들 외에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의 자손들도 있었다. 

 

[43-58절] 느디님 사람들은 시하 자손과 하수바 자손과 답바옷 자손과 게로스 자손과 시아하 자손과 바돈 자손과 르바나 자손과 하가바 자손과 악굽 자손과 하갑 자손과 사믈래 자손과 하난 자손과 깃델 자손과 가할 자손과 르아야 자손과 르신 자손과 느고다 자손과 갓삼 자손과 웃사 자손과 바세아 자손과 베새 자손과 아스나 자손과 므우님 자손과 느부심 자손과 박북 자손과 하그바 자손과 할훌 자손과 바슬룻 자손과 므히다 자손과 하르사 자손과 바르고스 자손과 시스라 자손과 데마 자손과 느시야 자손과 하디바 자손이었더라.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은 소대 자손과 하소베렛 자손과 브루다 자손과 야알라 자손과 다르곤 자손과 깃델 자손과 스바댜 자손과 하딜 자손과 보게렛하스바임 자손과 아미 자손이니 모든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이 392명이었더라.

 

돌아온 자들 중에는 종들도 있었다. ‘느디님 사람들’은 성전에서 봉사한 종들이었다. 이들은 나무 패며 물 긷는 일을 한 기브온 족속들처럼(수 9:27) 이방인들 중에서 이스라엘로 귀화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모든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의 수는 392명이었다. 그 선조들의 이름이 많이 기록된 것을 보면, 비록 종의 신분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충성되었던 것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와 같이, 돌아온 자들은 각 가족과 소속을 따라 정확히 파악되었고 그 선조의 이름이나 출신 지역과 그 수효가 정확히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거국적 역사를 이루셨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그가 하지 않으시면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59-63절]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단과 임멜에서 올라온 자가 있으나 그 종족과 보계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는 증거할 수 없으니 저희는 들라야 자손과 도비야 자손과 느고다 자손이라. 도합이 652명이요, 제사장 중에는 하바야 자손과 학고스 자손과 바르실래 자손이니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중에 하나로 아내를 삼고 바르실래의 이름으로 이름한 자라. 이 사람들이 보계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한 고로 저희를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고 방백이 저희에게 명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

 

돌아온 자들 중에 소속과 족보가 불확실한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그 소속과 족보가 불확실하다고 기록되었다. 그들의 수효가 652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소속과 족보를 잃어버린 불성실한 자들이었다. 

 

제사장들 중에도 족보가 불확실한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제사장 직분에서 제외시켜졌다. 그들은 부정하게 여겨져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했다. 그것은 성실한 처사였다. 63절은, “방백이 저희에게 명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고 말한다. ‘방백’(티르솨사)은 파사 총독의 명칭이다. 그는 스룹바벨을 가리킬 것이다. ‘우림과 둠밈’은 그 정확한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판단하는 한 방법이었다고 보인다. 

 

[64-67절] 온 회중의 합계가 42,360명이요 그 외에 노비가 7,337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200명이요 말이 736이요 노새가 245요 약대가 435요 나귀가 6,720이었더라.

 

파사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해방되어 돌아온 자들의 온 회중의 합계가 42,360명이었다. 느헤미

야 7장에도 돌아온 자들의 수효가 기록되어 있다. 분류 방법의 차이가 있는 것 같으나 온 회중의 합계는 동일하였다. 그 외에 노비들이 7,337명이요 노래하는 남녀들이 200명이요 말이 736마리요 노새가 245마리요 약대가 435마리요 나귀가 6,720마리이었다. 

 

[68-70절] 어떤 족장들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 터에 이르러 하나님의 전을 그곳에 다시 건축하려고 예물을 즐거이 드리되 역량대로 역사하는 곳간에 드리니 금이 61,000다릭(512kg)이요 은이 5,000마네(2,500kg)요1) 제사장의 옷이 100벌이었더라.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 몇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이 그 본성들에 거하고 이스라엘 무리도 그 본성들에 거하였느니라.

 

마지막 몇 절은 돌아온 자들 중에 어떤 족장들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렸다는 것을 기록한다. 그들은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들은 70년 동안 정착했던 바벨론에서의 삶의 터전을 다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결단을 했다. 그들은 신앙의 회복과 계승을 가진 자들이었다고 보인다. 그 족장들은 하나님의 전을 다시 건축하기 위해 물질까지 즐거이, 자원하여(68절) 그리고 그 힘대로(69절) 드렸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본장에 기록된 42,360명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온 자들이었다. 오늘날도 죄와 마귀와 멸망으로부터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죄인들의 영혼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로마서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둘째로, 바벨론에서 돌아온 자들의 수가 정확히 기록되었다. 돌아온 자들의 온 회중의 합계가 42,360명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얻을 자들의 수도 정확할 것이다. 사람의 머리털까지도 세시는(마 10:30) 하나님께서는 구원 얻을 영혼들의 정확한 수효를 아실 것이다. 주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6:39). 사도 바울은 그 수효를 ‘충만한 수’라고 표현하였다(롬 11:25). 사도 요한은 그 수효를 14만 4천이라고 증거했고 그들을 “땅에서 구속(救贖)함을 얻은”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계 14:3). 그것은 상징적 숫자, 12x12x1000 즉 충만한 수라는 뜻이라고 생각된다. 과연 그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선 것”을 보았다(계 7:9). 하나님께서는 충만한 수의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들의 수는 정확하고 그들은 하나도 잃어지지 않고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셋째로, 돌아온 자들 안에는 지도자들과 일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 재건과 제사 제도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기타 봉사할 자들을 예비하셨다. 신약교회에도 하나님께서 많은 지도자들과 일꾼들을 일으키셨다. 주의 말씀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므로 우리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고 기도해야 한다(마 9:37-38). 주께서는 교회에 각양의 은사들과 직분들을 주시고 그들을 통해 역사하신다(고전 12:4-6). 우리 몸에 각 지체를 주셨듯이(고전 12:18),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교회를 위해 많은 일꾼들과 헌신자들을 주실 것이다. http://www.oldfaith.net/01exposit/ 

 


왜 에스라 2장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귀환자의 수에서 느헤미야 7장과 서로 다른가?


에스라 2:3-35과 느혜미야 7:8-38에는 바로스의 자손(두 곳에서 모두 2172명이다)으로부터 시작된 서른 세 가족의 목록이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그 서른 세 가족의 숫자 중에서 열 네 가족의 숫자가 서로 다르다.

아쳐(G.L. Archer)는 그 차이를 아래와 같이 소개해 준다.  

4명이 차이가 나는 가족이 하나(로드 와 하딧과 오노의 자손, 725명과 721명으로 서로 다르다).  
6명이 차이 나는 가족이 둘(바핫모압 자손 곧 예수아와 요압 자손이 2812명과 2818명으로 다르게 기록되었으며 빈누이의 자손이 642명과 648명으로 다르게 기록되었다)


]베들레헴 사람 느도바 사람에 있어서는 그 합계가 느혜미야 7:19(2067)보다도 에스라 2:14(2056)이 11명 적다.  
삿두 자손의 경우에 있어서는 에스라는 945명으로 보고하고 있는데 845명(느 7:13)보다 100명이 많은 숫자이다.  
벧엘과 아이 사람(스 2;28의 233명과 느 7:32의 123명)의 경우도 유사하다.  
아딘 자손의 경우에는 에스라 2:15(454)은 느혜미야 7:20(655)보다 201명이 적으며
하숨 자손에 있어서는 에스라의 기록이 105명이 적다(스 9:29은 223명이고 느 7:22은 328명이다).  
스니아 자손에 대해서는 에스라 2:35이 느혜미야 7:38보다 300명이 적다(3,630명 대 3930명).  
가장 큰 숫자상의 차이는 아스갓 자손의 수치에 대한 에스라 2:12에 1222명의 기록과 느혜미야 7:17에 2,322명의 기록이다.  


다른 19번의 경우는 두 기록이 같다(1).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14번의 불일치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  이런 불일치는 에스라와 느혜미야만이 아니다.  예루살렘 귀환 자의 총수는 느혜미야 7:66과 에스드라 1서(I Esdras 5:4)에서는 42,360명인데 개인적 항목을 더한 세 다른 총수는 에스라가 29,818명이며 느혜미야가 31,089명이고 에스라 1서가 30,143명이다. 그러면 서로 차이가 나는 없어진 천여 명은 어디로 간 것인가?  또 서로 총수가 다른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차이에 대한 가장 쉬운 해답은 아무래도 필사자의 오류였겠다(2).  다른 해답은 여기 에스라서에서는 전체가 29,818명밖에 안된다.  따라서 42,360명의 전체 숫자에 비하면 12,542명이 적은 셈이다.  어떤 학자들은 그 수가 바로 여인과 아이들의 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 수는 전체의 수에 비해 너무 적다.  또 어떤 가족은 제외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회중은 종교적인 공동체를 가리켰다.


군중이 아니라 모든 유대인 종들과 같이 여인들 모두가 포함되었다(Galling)(3).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석은 아마도 제미슨, 퍼셋, 브라운의 아래와 같은 설명일 것이다.이 가족에 속하는 것으로 언급된 모든 사람들은 전체의 집결지로 모였거나 아니면 처음에 가겠다는 의사가 있을 때에 등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행을 준비하는 기간 도중에 어떤 사람들은 죽었고 어떤 사람들은 병이나 극복할 수 없는 장애 때문에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이 두 번의 등록이 실시된 환경이 다르다는 사실로부터 이 불일치는 충분히 설명된다.  


에스라의 기록은 바벨론에서 실시되었지만 느헤미야의 기록은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된 후에 유대에서 실시되었다.  이렇게 여러 해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질병 혹은 다른 어떤 원인으로 말미암아 이 목록에 그만한 차이가 생길 수 있으리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4). 따라서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통계상의 차이는 어렵지 않게 설명이 가능하다.  

 

주   1. 글리슨 아처, 성경 난제 백과사전, 황영철역(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0), p.310  

2. Derek Kidner, Ezra & Nehemiah(Downers Grove: IVP, 1979), p.43 

  3. F. Charles Fensham, The Books of Ezra and Nehemiah(Grand Rapids: Eerdmans, 1983), p.57 

  4. 글리슨 아처, 상계서, p.311

 

http://revdavidsuh.com/bbs/view.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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