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성경 개요
에스라서에는 이전과는 다른 유대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를 통해 이스라엘 왕국 시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왕들의 통치모습과 열왕기하의 마지막 장과 역대하의 마지막 장에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멸망하는모습까지 보았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구나’ 하는 절망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역대하36장은 바벨론 포로의 기간을 마치고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마칩니다.
그것은 마치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에스겔의 환상을 보는 듯 합니다. 포로의 멍에가 벗겨지고 자유의 몸을 입은 것이지요. 달라진 게 있다면 더 이상 왕들의 이야기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머리에 있던 왕관이 벗겨진 것이지요. 그러나 선지자들은 포로 시대에도 여전히 그들과 함께 있습니다. 그들은 포로 귀환 때도 함께하며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벽의 회복을 이끌어줍니다.
재건과 회복
에스라서는 크게 두 개의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는 제1차 바벨론 포로 귀환자들이 돌아와서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과정의 기록입니다. 이것을 ‘제2의 출애굽’이라고도 합니다.
두 번째는 제1차 포로 귀환자들이 돌아온 지 약 80년 후, 즉 스룹바벨 성전이 건축된 지 60년 후에 제2차 포로 귀환자들이 돌아와서 재건된 성전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삶의 회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1차 포로 귀환자들의 활동
1장-6장에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이미 말씀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 만에 귀환하게 됩니다. 강력했던 바벨론 제국이 멸망하고 새로운 제국인 바사가 등장합니다. 바사는 지금의 이란을, 바벨론은 오늘날 이라크를 중심으로 있던 국가입니다.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제국을 말한다면 바벨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예술, 점성술과 의학 등 여러 영역에서 뛰어난 왕국이었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가장 오랫동안 지속될 것처럼 보이던 바벨론 제국은 100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멸망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제국인 바사가 일어나지요. 바사를 일으킨 첫 번째 왕인 고레스가 왕이 되던 해,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을 명령하며 말합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1:2,3).
그는 세상의 주권자가 누구인 줄 알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사명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고레스가 세상에 오기 약 15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사 45:1-3). 뿐만 아니라 그는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공급하고, 이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옮겨왔던 성전의 보물도 다 가지고 가도록 했습니다(1:5-11).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회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십니다. 그분의 마스터플랜을 위해 나라들을 세우기도 폐하기도 하시며, 왕들을 세우기도 폐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B.C.536년에 총독 스룹바벨과 제사장 예수아가 포로 귀환자들 4만 9,897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무너진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유다 땅에 살던 이방인들도 성전재건에 동참하겠다고 요청합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을 때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앗수르의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게 하지 않고 이방인을 북이스라엘 지역에 와서 살도록 했을 때 옮겨왔던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성전 재건 동참에 거절당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성전 건축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건축 계획을 막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고레스에 이어 왕이 된 아하수에로(4:6,7, 그는 ‘캄비세스’라고 불림)에게 고발하는 편지를 보냅니다(4:7-16). 그래서 아하수에로가 성전 건축을 금지하는 조서를 내립니다(4:17-22).
이런 반대에 부딪혀서 성전 건축은 기초를 놓은 후에 중단됩니다. 그리고 중단된 지 16년 만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들의 격려로 다시 공사를 시작합니다. 이것을 알아차린 주변 사람들은 아하수에로에 이은 바사 왕 다리오에게 편지를 보내어 공사 중단을 명령해주길 요청하지요.
이번에 편지를 보낸 사람들은 이전보다는 훨씬 신사적이어서 고레스가 건축을 허락한 것이사실인지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5:6-17). 다리오 왕은 문서기록 보관소에서 고레스의 조서를 발견하고, 오히려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조서를 내립니다(6:1-12).
드디어 공사를 재개한 지 4년 후, 포로 귀환 후 20년 만에 성전이 완공됩니다. 성전이 봉헌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지 70년 만에스룹바벨에 의해 성전이 지어진 것입니다.
제2차 포로 귀환자들의 활동
두 번째 부분인 7장-10장에서 시간상으로 7장이 6장의 연속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6장과7장 사이에는 60년이라는 긴 공백이 있었습니다.
B.C.458년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왕으로있을 때, 즉 성전이 완공된 후 약 60년이 지난 다음에
에스라의 지도하에 제2차 포로자들1,754명이 귀환합니다.
제1차와 제2차 포로 귀환의 시간 차이는 무려 78년입니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왔을 때 그곳의 상황을 보면서 나라를 개혁할 마음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제1차 포로 귀환자들이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하고 성전 중심으로 살았지만 영적 삶이 점점 희미해지고 열정도 식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죽었고, 제1차 귀환자들의 대부분도 생존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포로 시절을 경험하지 않은 제2, 3세대가 그 땅에서 태어나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학개와 스가랴에 대해서도 듣지 못한 세대였지요. 하나님은 에스라를 통해 이들이 다시금 영적인 열정을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에스라는 아론의 16대손 제사장입니다. 그는 말씀에 익숙한 성경 학자였습니다. 바사 왕 아닥사스다는 조서에 특히 에스라를 지목하여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일하고, 그 일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에게 공급하라고 명합니다(7:11-26). 아닥사스다는 에스라가 성경 학자인 줄익히 알고 있다는 것이 그 조서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할 일이 말씀으로 그 땅에부흥을 주는 것임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바벨론을 무너뜨린 바사가 세워지면서 첫 번째 왕인 고레스에게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게 하시고, 이를 위해 바사전체가 쓰임 받게 하십니다. 또한 약 80년이 지난 후 아닥사스다를 움직여 에스라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부흥을 일으키게 하고, 다시 바사 왕국이 쓰임 받게 하셨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며, 언제나 그분의 일을 이루십니다.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부르시고, 왕들을 사용하시며, 나라들을 움직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서 그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앞으로 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대를 볼 줄 알아야합니다.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가 이백 명이니 그들은 그 모든 형제를 통솔하는 자이며”라고 말씀하심같이(대상 12:32), 우리는 시대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느시대에나 그분의 일을 멈춘 적이 없으십니다.
말씀의 회복
에스라가 중점적으로 한 것은 하나님 말씀의 회복입니다. 성전이 건축되었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라 건축 후에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려면 말씀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기로 결심합니다(7:10). 에스라에게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그가 말씀을 연구하고 바로 가르친 게 아니라 말씀을 먼저 그의 삶에적용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말씀을 따라 준행하며 말씀을 경험해야 합니다. 공부하고 훈련받는 목적은 지식의 증가에 있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며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대할때 가져야 하는 올바른 자세입니다.
먼저 말씀을 공부하여 알고,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고, 경험된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지요.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에스라가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해 그가 먼저 말씀을 연구하고 실천했으며, 온 이스라엘에 말씀을 전함으로 나라 전체가 말씀의 부흥으로 견고하게 되도록 힘썼습니다.
영적개혁 운동
1장-6장의 내용은 바벨론 제1차 포로 귀환자들이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지만 당시 에스라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제1차 포로 귀환자들이 돌아온 지 약 80년 후에야 제2차 포로귀환자들이 간 것입니다. 에스라는 처음 6장까지는 이전에 있었던 역사를 다시 기록하고, 제2차 포로 귀환자들과 함께 돌아와서 나라를 새롭게 하는 일에 힘씁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상황 가운데 영적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중심의 삶이 필요합니다.
열정을 가지고 주를 섬기면서 힘 있게 살며 세상에 영향을 주길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지금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의 회복입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우리의모든 삶의 영역을 그 기반 위에 세우기 시작할 때 비로소 개인과 가정과 나라가 건강해지고, 교회가 활기있게 세상에 영향을 주게 될 것입니다.<홍성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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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Ezra) 개관
1. 명칭
원래는 이 두 책은 한 책으로 되어 있었던 것 같다.
라틴어 번역 성경인 벌게잇에서 는 에스라서를 제1 에스드라스,라고 하고 느헤미야서를 제2에스드라스라고 부르고 있다.
또 이 두책은 정경상의 위치도 다르다.
즉 한글 성경에는 역대하 다음에 있는데 히브리 원전에는 성문서집 중에서 다니엘 다음에 있다(히브리 원전 중에도 팔레스틴 계통의 원전). 전통적으로 우리는 에스라가 느헤미야보다 앞서 예루살렘에 돌아왔다고 믿고 있는데 최근의 어떤 학자들은 사실은 그 반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2. 주제표
초점 | 성전의 재건 | 58년 간격 (에스더) |
백성의 부흥 | ||
구분 | 귀환과 성전 재건 | 성전의 완성 | 2차 귀환 | 더럽힘과 청결작업 | |
본문 | 에 1-4장 | 에 5-6장 | 에 7-8장 | 에 9장 | |
주제 | 스룹바벨 지휘하에 귀한(자재복구) | 에스라 지휘하에 귀환(개혁) | |||
장소 | 페르시아->예루살렘 | 페르시아->예루살렘 | |||
시간 | 23년(538-515 B.C) | 1년(457 B.C) |
2-1. 돌아온 회중 합계
에스라, 느헤미야와 외경인 에스드라Ⅰ이 차이가 나는 것은 미확인된 제사장들(61-63)과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계산에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분 | 에스라 | 느헤미야 | 에스드라Ⅰ |
이스라엘 백성 | 24,144 | 25,406 | 25,947 |
제사장 | 4,289 | 4,289 | 5,288 |
레위인, 노래하는 자, 문지기 | 341 | 360 | 341 |
성전의 수종는 자(느디님),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들 |
392 | 392 | 372 |
계보가 불분명한 사람들 | 625 | 642 | 652 |
합계 | 29,818 | 31,089 | 32,600 |
3. 내용과 주요 사상
개혁자 에스라--느헤미야 에스라는 제사장이요 율법 학자 였다(스7:11). 그는 아닥사스닥왕 때 바벨론으로부터 많은 유대인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그는 먼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이방 여자와 결혼한 제사장과 백성들에게 이혼할 것을 명령하고 율법 준수를 강조하였다.
그림설명 / 에스라 :에스라를 묘사해 놓은 아미아티누스 사본의 삽화. 로렌츠 도서관
그는 또 조직적으로 종교 교육을 실행할것을 계획하는 등 성전 건축과 종교심의 고취 혈통의 순화와 후세 교육의 강화 등 민족 재건에 주력 하였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닥왕의 명령을 받고 예루살렘의 성곽을 제건할 권한과 유다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에스라가 돌아온후 10년 후 이었다.
이 때에 주변 여러 이방 민족의 방해가 있었지만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인 느헤미야는 백성을 무장시켜 일면 재건,일면 국방의 중대사 를 성공적으로 지도하였다.
그는 종교적,사회적 부패와 나약을 극복하고 민족 중흥과 개혁을 이루는데 큰 공을 세웠다.
4. 내용 분해(대분류)
(A) 에 스 라 1. 포로들의 귀환 스1:1-9:43 1) 고레스왕이 성전 재건을 선포함 스1:1-11 2) 돌아온 자들의 이름 스2:1-70 3) 예수아와 스룹바벨이 성전의 기초를 놓음 스3:1-13 4) 방해 때문에 공사가 중지됨 스4:1-24 5) 학개와 스가랴가 격려함 스5:1-17 6) 성전을 완공하여 헌당함 스6:1-22 2. 서기관 에스라 스7:1-10:44 1)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돌아옴 스7:1-28 2) 함께간 자들의 명단 스8:1-36 3) 백성의 죄에 대한 에스라의 자복 기도 스9:1-15 4) 백성들의 회개와 잡혼자의 명단 스10:1-44
5. 내용 분해(소분류)
○스1:1 바사 왕 고레스의 조서 스1:1 포로들의 귀환 준비 스1:5 여행을 위한 준비 스1:7 성전 기명 반환 ○스2:1 귀환한 포로들의 명단 스2:36 제사장과 레위인들 스2:59 혈통 불명인들 스2:68 성전 재건을 위한 예물 ○스3:1 성전 재건의 시작 스3:1 성전 기초를 세움 스3:8 성전 건축 감독자 스3:10 성전 기공 예배 ○스4:1 성전 건축의 방해 스4:1 사마리아인들의 방해 스4:7 집요한 방해 공작 스4:17 아닥사스다의 조서 ○스5:1 성전 역사가 다시 시작 스5:6 다리오에게 보낸 총독의 편지 ○스6:1 성전 재건 스6:1 성전을 다시 세움 스6:13 성전 건축 완공 스6:16 돌아온 사람들의 첫 유월절 스6:19 유월절 준수 ○스7:1 에스라 일행의 귀환 스7:27 에스라의 찬양 ○스8:1 에스라와 동행한 바벨론 족장들 스8:1 바벨론에서 온 족장들의 계보 스8:15 레위인과 느디님인 스8:21 금식 선포 스8:24 헌물 관리자 스8:31 예루살렘 안착 ○스9:1 에스라의 간구 스9:1 이방 민족과 통혼 관계를 끊다 스9:3 낙심하는 에스라 스9:5 에스라의 기도 ○스10:1 회개하는 이스라엘 스10:8 이스라엘 총회 소집 스10:18 이방여인을 취했다 버린 자들
에스라 서론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이스라엘이 이방 국가의 포로가 된 지 70년 만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다시금 이스라엘로 되돌아오는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이러한 두 책의 공통점은 예로부터 두 책의 저자인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대한 혼동뿐만 아니라 두 책의 관계성에 대해서까지도 심각한 오해와 이견들을 낳게 하였다. 따라서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두 책의 저자와 관계성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때문에 본 서론 역시 이러한 주제를 중점적으로 고찰하여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관계를 분명히 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삼을 것이며, 그 위에 에스라서의 역사적인 배경과 주제들을 고찰하게 될 것이다.
제1부: 에스라서의 역사적인 배경
Ⅰ. 명칭
고대 히브리어 성경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분리된 두 권의 책이 아닌 한 권의 책으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 때문에 고대 히브리어 성경은 이 두 권의 책을 한 권으로 묶어<hy:m]j,n] ar;z][, ;="" 에즈라="" 느헴야="">로 명명하였다. 즉 전체적으로는 두 권을 한 권의 책으로 인정하여 통합시키되 각 책의 체제와 명칭은 그대로 살려 두어 에스라 부분은 <ar;z][, ; 에즈라="">로, 그리고 다시금 1장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느헤미야 부분에서는 <hy:m]j,n] ; 느헴야="">로 표기하는 기이한 형태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러한 분류법은 초기의 몇몇 기독교 교부들에게 그대로 전승되어 '요세푸스'(Josephus)와 '유세비우스'(Eusebius)같은 학자들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한 권으로 받아 들였고 '탈무드', '맛소라 사본', '멜리토 정경'(Canon of Melito, A.D. 171년)역시 이러한 분류법을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70인역에서는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한 권으로 통합시킨 후 외경 작품인 '에스드라 1서'(Esdras Ⅰ서, or ESDRAS A)와 구별하여 '에스드라 2서'(Esdras Ⅱ, or ESDRAS B v)로 표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분류법에서 탈피하여 현대의 분류법을 채택한 최초의 학자들이 '오리겐(Origen)과 '제롬'(Jerome)이었다. 특히 '제롬'은 그의 불가타역(Vulgata)에서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에스드라 1서'(Esdras Ⅰ서)와 '에스드라 2서'(Esdras Ⅱ서)로 분명히 구분하여 표기함으로 현대적 분류법의 기초를 닦아 놓았다. 히브리 성경도 이러한 분류법에 의해 1448년에 분리 수록하였고 '봄버그판'(Bomberg, 1525)에서 최초로 분리 인쇄하였다. 그 후 영어 성경은 두 권의 책을 분리할 뿐만 아니라 책의 명칭까지도 각 책의 중심인물인 '에스라'(도움)와 '느헤미야'(여호와의 위로)를 그대로 제목으로 인용, 각각 'Ezra'와 'Nehemiah'로 칭하였고, 한글 개역 성경은 이것을 그대로 인용하여 각각 '에스라'와 '느헤미야'로 칭하게 되었다. 이제 위에서 열거한 많은 번역본들의 분류법을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참조, 에스라 도표1).
한편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관계, 즉 두 책을 한 권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분리된 두 권으로 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두 권의 저자와 기록 연대는 어떻게 되는가?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이견들이 제시되고 있으나 본 서론에서는 두 권을 독립된 다른 정경으로 보는 견해와 그에 따라 저자도 각각 에스라와 느헤미야로 다르게 보는 견해를 지지한다(이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본서의 '저자'와 '기록연대', 그리고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와의 관계'부분 참조).
Ⅱ. 저자와 기록 연대
1. 저자
에스라서의 저작설에 관해서는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학설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첫째는 본서를 '역대기 사가의 작품', 즉 본서 에스라와 느헤미야, 그리고 역대기상하 전체를 커다란 하나의 기록으로 보면서 그 작품을 후대의 편집자들이 편집했다고 보는 견해이며, 둘째는 본서 에스라서가 에스라의 기록임은 분명하지만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가 한 권의 책이므로 에스라서뿐만 아니라 느헤미야서도 에스라가 기록했다는 '에스라 공동 저작설'(느헤미야서의 단일 저작설에 대해서는 느헤미야서 서론의 '저자와 현대 부분참조'), 그리고 셋째는 '에스라 단일 저작설'이다.
1) 역대기 사가의 편집설
'파이퍼(Pfeiffer), '보우맨'(Bowman),'게오르그 포러'(Georg Fohrer)등의 신학자와 '준츠'(Zunz), '에발트'(Ewald), '베르도우(Bertheau) 등의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이 견해는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 그리고 역대기상하까지를 커다란 한 권의 작품으로 생각한 후 '이 거대한 작품이 후대의 편집자에 의해 편집되었다'는 편집설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영감된 성경의 기록을 고대의 문헌과 여러 자료들에 의존해서 이해하려는 인위적인 노력에 불과하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제 편집설을 주장하는 그들의 견해와 정통주의 해석자들의 반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바사 왕'이라는 단어에 대한 의문
편집설을 주장하는 자들의 첫 번째 근거는 스 1:1에 나오는 '바사 왕'이라는 단어이다. 주로 '에발트'(Ewald) 등의 학자에 의해 주창되는 이 견해는 페르시아 왕의 공적 명칭이 '파사 왕'이 아닌 '왕', '왕 중 왕', '위대한 왕', 그리고 '그 땅의 왕'이므로 본서가 페르시아 시대에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면 '바사 왕'이라는 단어 대신 위의 명칭들이 사용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바사 왕 고레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본서는 분명 페르시아 시대가 아닌 그보다 훨씬 후대의 기록, 또는 편집일 것이라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에스라서의 기록을 에스라가 아닌 페르시아 사람들의 입장에서만 생각한 것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즉 페르시아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왕이 '왕 중 왕' 또는 '위대한 왕'으로 보일지 모르나 유대인인 에스라의 눈에는 그가 비록 위대한 왕 중 의 왕이라 할지라도 이방인의 한 왕 다시 말하면 '바사 왕'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서의 저자를 페르시아 사람이 아닌 유다인, 아니 더 정확히 이방 나라의 포로로 잡혀 있던 '학사 에스라'로 생각할 경우에는 도리어 '바사 왕'이라는 본문의 표현이 지극히 자연스런 표현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견해는 '바사 왕'이라는 용어가 파사 시대에도 사용되었다는 몇 가지 증거들에 의해서도 더욱 분명히 반박된다. 이에 대해 '로버트 딕 윌슨'(Robert D. Willson) 박사는 다음과 같이 증거하였다. '파사 시대에 기록된 19개의 다른 문서에는 다른 18명의 저자들이 바사 왕이라는 명칭을 38번이나 사용하였으며 그것은 적어도 6명의 다른 파사 왕을 의미한다. 즉 그 말은 B.C. 539년 바벨론 정복 전 7년의 고레스에게도 사용되었으며 B.C. 365년경의 아닥사스다 3세에게도 적용되었다. 그것은 파사어, 수산어, 바벨론어, 희랍어, 아랍어, 히브리어에서 나타나며 메데, 바벨론, 소아시아, 헬라, 팔레스틴, 그리고 에티오피아에서도 사용되었다. 또한 이것은 성경 이외의 문서들에서와 같이 성경 문서들에서도 문자나 연대, 그리고 그 밖의 것에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바사 왕'이라는 단어에 의존하여 역사의 모순성을 주장하며 편집설을 주장하려는 그들의 견해는 억지 추측으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다.
(2) 두 가지 조서의 모순성
편집설을 주장하는 자들의 두 번째 근거는 고레스가 내린 두 가지 칙령의 차이이다. 즉 에스라서에는 고레스가 내린 두 개의 칙령이 나오는데 첫 번째 칙령(참조, 스 1:1-4)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반면, 두 번째 칙령(참조, 스 6:3-5)은 아람어로 기록되었으므로 이 둘 사이에는 일치될 수 없는 커다란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근거로 그들은 스 1:1-4의 첫 번째 칙령을 '가상된 유대적 기록'또는 '무의미한 기록'으로 제쳐 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조서는 모두 다 역사적이며 정확한 기록들이다. 왜냐하면 '엉거'(Unger) 박사와 '영'(Young) 박사의 설명대로 그러한 차이점은 '이 두 조서의 기록 목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즉 스 1:1-4의 첫 번째 조서는 고레스가 처음 바벨론을 정복했을 때에 제정한 것이 분명하니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유다인과 많은 관련이 있는 조서가 되어 유대적 색채를 띠었던 것이며, 스 6:3-5의 두 번째 조서는 '엑바타나'(Ecbatana)에 비치할 공문서 기록을 위하여 정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바벨론에 관한 칙령이 분명하니 자연히 바벨론적 특색을 띠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스 1:1-4은 히브리어로 기록되는 것이 당연하며 스 6:3-5은 아람어로 기록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따라서 두 가지 조서의 모순성을 지적하는 그들의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
3) 시대적 혼돈
비평가들의 세 번째 견해는 4:1-5, 17절까지의 시대적 혼돈에 관한 것이다. 먼저 이 견해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성경과 페르시아 왕들의 치세를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스 4:1-5 고레스대왕(Cyrus, B. C. 559-530)
스 4:6 세륵세스(Xerxes, B. C. 486-465)
스 4:7-23 아닥사스다(Artaxerxes, B. C. 464-425)
스 4:24 다리오대왕(Darius, B. C. 522-486)
스 5:1-17 다리오대왕(Darius, B. C. 522-486)
페르시아 왕조의 순서는 고레스 대왕 다음에 다리오 대왕, 그리고 크세르크세스와 아닥사스다 순이다. 그러나 위의 도표가 보여 주는 대로 에스라서의 기록은 이러한 시대적 순서와 전혀 맞지 않는데 이러한 이유를 들어 편집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본서의 에스라 저작설을 부인한다. 즉 4:1-5 다음에 5:1-17의 내용이 와야 하는데 4:6-23 내용이 먼저 튀어 나왔으므로 본서는 분명 후대의 편집자들에 의해 편집된 기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본서의 저자인 에스라의 관심이 무엇이었는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견해이다. 왜냐하면 에스라서의 관심은 이방 역사의 연대나 순서적 기록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건축에 대한 끈질긴 반대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즉 에스라서의 저자는 건축의 반대 역사가 고레스로부터 다리오에 이르는 전 역사에 걸쳐 일어났음을 증거하기 위해 고레스 대왕시의 반대를 간략히 언급한 후(참조, 스 4:1-5) 고레스에서 다리오로 이어지는 역사적 연대를 잠깐 동안 유보하고 세륵세스의 때부터 시작되어 아닥사스다 시대에 절정을 이룬 반대의 역사를 기록한 후(참조 스 4:6-34) 다시금 다리오 시대의 반대 역사를 기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에스라서의 시대적 혼돈, 또는 역사적 연대의 모순은 그들의 주장처럼 에스라서 기자의 착각이나 실수 혹은 편집의 결과가 아니라 '중요한 주제의 심도 있는 설명을 위한 에스라서 기자의 특별 기록' 또는 '연대적 순서를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하나이 주제를 일관성 있게 설명하려는 역대기 기자의 노력(Young, Unger)으로 보아야 한다(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제2부의 Ⅴ. 1번 참조).
(4) 성전 건축 시기에 관한 혼동
편집자들의 또 다른 주장은 본서에 두 번 등장하는 성전 건축의 역사가 서로 상반된 견해를 보인다는 것이다. 즉 스 4:24; 5:1에 의하여 성전 건축의 역사는 다리오 제2년에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스 3:8-13; 5:16에 의하면 성전 건축이 이미 고레스 통치시에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두 구절은 서로 상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그들 스스로 에스라서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일 뿐 편집설에 대한 어떠한 증거나 자료도 제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전 건축은 고레스 시대에 시작되었으나(참조, 스 3:8-15; 5:16), 스 4:1-5에 진술된 바와 같이 이에 대한 반대가 즉시 시작되었고, 때문에 모사들이 그 방해를 물리칠 다리오의 때까지 성전 건축의 역사가 중단되었다가(참조, 스 4:24) 다시금 다리오 제2년에 재개되었기 때문이다(참조, 스 4:24; 5:1 이하). 그러므로 에스라서의 성전 건축에 대한 두 기록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다리오 시대에 중단되었던 성전 건축에 대한 기록일 뿐이므로 편집설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외에도 에스라서의 편집설을 주장하는 자들의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주장들은 모두가 지엽적인 문제로서 다룰 만한 것이 못 되므로 생략하기로 한다(이에 관한 자세한 고찰을 하고자 하는 자는 영(E. J. Young)의 '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의 'Ezra'부분 참조).
2) 에스라의 공동 저작설
'글리슨 아처'(Gleason L. Acher), '노만 가이슬러'(Norman L. Geisler) 등에 의해 주장되는 이 견해는 에스라서의 저자가 '에스라'임은 인정하지만 에스라를 에스라서만의 저자가 아닌 느헤미야의 저자로까지 확대하여 해석하는 견해이다. 즉 그들은 에스라가 역대기를 편집한 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에스라서를 기록하였는데 그 책의 끝에 '느헤미야의 개인적인 비망록'(느헤미야서=필자 주)을 포함시키고 느헤미야가 가지고 있던 귀환자의 명단을 같이 삽입하였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분류 할 수 있는데 첫째,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가 분리된 두 권의 책이 아닌 한 권이라는 고대 히브리 성경의 체제(본 서론의 '명칭' 부분 참조)와, 둘째,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관점과 주제 그리고 목적이 동일하다는 점, 그리고 셋째는 에스라가 느헤미야의 개인적인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 역시 정확한 근거는 제공하지 못한 채 추측과 고대 히브리어 성경의 체제에만 의존하는 견해이므로 받아들일 만한 것이 못된다. 이제 이러한 위의 근거들을 반박하는 정통주의의 견해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가 한 권의 책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이 견해는 주석가 '카일'(Keil)이 자세히 설명한 대로 고대 히브리어 성경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한 권의 책으로 간주한 것은 '구약의 예언서들의 수자를 히브리어 자음의 수자인 22이라는 숫자에 맞추기 위한 유다식 사고에 의한 것'(본래 히브리어 자음은 23개이지만 v과 c은 동일한 하나의 자음으로 보기 때문에 22개로 맞추려 했던 것임=필자주)인데 만약에 이러한 사고방식에 의해 히브리 정경의 수를 조정하게 된다면 히브리 정경은 22권밖에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는 모세 오경과 사무엘의 저작이라 믿어지는 몇 권의 책을 제외한 다른 모든 정경을 한 저자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실제로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도 이러한 분류법에 의해 나름대로 구약을 모세에 대한 것 5권, 예언자들에 대한 것 13권, 그리고 여호와를 향한 찬미와 인간을 위한 도덕적 훈계를 담고 있는 것 4권으로 분류하였으며, '제롬'(Jerome)은 히브리인들이 자신들의 자음 수에 따라 구약의 정경들을 22권으로 간주한다고 증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다적 사고방식의 분류법은 1525년에 발간된 '봄버그판'(Bomberg) 현대 히브리 성경에 의해 그 스스로 부인되었으니 현대 히브리어 성경 역시 이러한 인위적 분류법보다는 각 권의 특징과 성격의 차이에 의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구분하는 정통적 성경 분류법을 따름으로 그들 스스로 그러한 분류법을 포기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다적 분류법을 근거로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가 한 권이었다고 믿는 동시에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가 동일한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견해는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이에 대해 좀더 자세히 연구하고자 하는 자는 '카일'의 구약 주석 '에스라'서 참조).
둘째,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관점과 주제, 그리고 목적이 동일하다는 견해에 대해서: 물론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기록 목적을 동일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두 권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두 권의 주제와 기록 목적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에스라서의 주제와 기록 목적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던 '회복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느헤미야서의 주제와 기록 목적은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신 이스라엘'을 어떻게 보호하시는가를 보여 주는데 있기 때문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에스라서의 기록 목적과 느헤미야서의 기록 목적 부분 참조). 그러므로 비록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거의 같은 시대에 살았고 사역 또한 비슷했다 하더라도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주제와 기록 목적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으며 따라서 에스라 공동 저작설은 받아들일 수 없다.
셋째, 에스라가 느헤미야의 개인적인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었다는 점에 대히여: 이 견해는 에스라보다 느헤미야가 먼저 활동하고 귀국하였으며 저술 활동을 했다는 견해를 근거로 한다. 즉 에스라보다 느헤미야가 먼저 귀국하고 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느헤미야의 개인적인 비망록'(느헤미야서)을 저술하였는데 늦게 귀국한 에스라가 그러한 느헤미야의 저작과 느헤미야의 개인적인 도서관을 이용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기록 또는 에스라서의 후반부에 느헤미야서를 인용 첨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은 분명히 에스라가 먼저 귀국한 후 느헤미야가 기록했음을 말해 주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이방 역사에 의해서도 증거되고 있으므로 위의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이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관계'부분에서 생각하도록 하겠다).
이 외에도 우리가 에스라의 공동 저작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중요한 이유 하나는 에스라서 2장에 나오는 귀환자 명단과 느헤미야 7장에 나오는 귀환자 명단이 거의 동일하다는 것이다. 만약에 에스라가 느헤미야까지 기록했다면 무엇 때문에 동일한 기록을 느헤미야서에서 또다시 반복했겠는가? 이러한 의문은 결국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저자가 서로 다른 인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며 따라서 에스라 공동 저작설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3) 에스라 단일 저작설
이 견해는 말 그대로 에스라서의 저자를 에스라로 보되 느헤미야는 느헤미야로 생각하는 견해이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가장 명확한 증거는 에스라서 자체의 증언이다. 즉 에스라 7장 이후에 등장하는 에스라와 그를 가리키는 1인칭 주어가 에스라서의 기록자가 에스라임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오랜 동안의 포로 생활 중에서 돌아온 유다인 중에 이렇듯 그 당시의 역사를 생생하고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는 자는 '학사 에스라'(참조, 스7:6) 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에스라서의 단일 저작설에 대한 또 하나의 이견인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와의 관계는 느헤미야서의 저자가 느헤미야임을 분명히 밝힘으로써만이 분명히 해결할 수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느헤미야서 서론의 '저자와 기록 연대' 부분을 참조하시오.
2. 기록 연대
에스라서의 기록 연대 역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만약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귀환 순서를 성경의 증거대로 에스라-느헤미야 순으로 생각한다면 에스라서의 기록 연대가 B.C. 457-444년 사이로 설정될 수 있지만 일부 학자들의 주장대로 에스라의 귀환이 느헤미야의 귀환보다 늦다면 에스라서의 기록 연대 역시 그보다 훨씬 뒤로 설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에 대한 자세한 고찰을 뒤로 미루고 성경의 증거와 이방 역사의 증거에 의한 연대 설정으로만 만족하고 넘어가려 한다(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귀국 순서에 대해서는 제2부 특별 주제들 중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관계' 부분 참조). 에스라서의 기록 연대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먼저 스 7:7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거기에는 에스라의 귀환 연도를 '아닥사스다'(Artaxerxes, B.C. 464-425) 왕 7년'이라고 기록하였는데 그 연도는 B.C. 457년이다. 이렇듯 B.C. 457년에 귀환한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제이십 년'(참조, 느 1:1; 2:1-11), 즉 B.C. 444년의 느헤미야 귀환 때까지 활동하게 되는데 에스라서는 이러한 에스라의 활동 시기에 기록되었다고 보아야 하므로 에스라서의 기록 연대는 B.C. 457-444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Ⅲ. 기록 목적
에스라서의 가장 중요한 기록 목적은 '언약 성취의 증거'이다. 즉 에스라서는 주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언약'(참조, 사 44:28; 45:1-4)을 어떻게 성취시키셨는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방의 군주를 움직여 유다인들에게 호의를 베풀게 하시고 스룹바벨과 에스라와 같은 지도자를 일으키시며 학개와 스가랴 같은 선지자들을 일으키신 것도 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그의 섭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단지 그러한 육적인 회복의 성취만을 목적으로 쓰여진 것은 아니다. '젠센'(Irving L. Jensen) 박사의 말대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회복 속에는 육신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는데 육신적인 의미란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게 하여 성전을 다시 건축하는 것이지만 영적인 의미란 이들이 참된 예배를 다시 드리고 율법의 권위를 재정립하여 일상적인 생활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개혁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스라서의 기록 목적은 한 마디로 '이스라엘로의 귀환과 성전의 재건이라는 육적인 회복'과 '제사와 율법, 그리고 경건 생활의 회복이라는 영적인 회복'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전에 자신의 종들로 말미암아 언약하셨던 구원의 약속이 확실히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Ⅳ. 에스라서의 특징과 구조
1. 특징
에스라서의 특징은 이방인들의 관용과 동족인 사마리아인들의 사악함, 대적들의 반대와 하나님의 종의 인내, 그리고 육적인 회복과 영적인 회복이 선명하게 대비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중 가장 특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비록 사마리아인들의 모함과 대적에 의해 한때 성전 건축을 중지시키기는 했으나 에스라서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이방 나라의 군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우호적인 태도와 정책으로 일관해 왔고, 또한 그러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이제까지 이방 나라에 대한 성경의 기록들이 저주 받아야 할 우상의 나라, 또는 이스라엘을 치시기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 그리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대적자들로 묘사되었던 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크게 부각되는 개념은 성경에 최초로 등장하는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의 혼혈족인 사마리아인들에 관한 묘사인데(참조, 스 4:1) 성전 건축의 역사를 방해하는 사마리아인들의 사악함은 이방인들의 우호적인 태도와 너무도 극명하게 대조되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조 외에도 에스라에서는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중요한 개념들을 대비시켜 기록하였는데 이러한 대비적 기록이 바로 에스라서의 한 가지 특징인 것이다. 그러나 에스라서의 특징은 이러한 표면적인 대비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육적인 회복을 통해 영적인 회복을 드러내고 분명히 했던 것처럼 에스라서는 이러한 표면적인 대비를 통해 가장 중요한 영적인 대비, 즉 인간의 범죄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며 범죄한 자의 사악함은 어떠한 지경에까지 이르는가 하는 것과, 그렇듯 범죄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들과 약속한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고 반드시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대비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스라서를 이러한 관점에서 좀더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는 자는 단순한 성전 건축의 역사나 대적들의 방해만을 느끼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흐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역사를 느끼고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 구조
에스라서의 구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첫째는 1-6장까지로 스룹바벨 인도하의 첫 번째 귀환과 그 사역, 그리고 두 번째는 7-10장까지로 에스라 인도하의 두 번째 귀환과 그 사역이다. 그 첫 번째 사역은 주로 육적인 회복, 즉 성전의 재건과 반대, 그리고 완성에 관한 것들이고 두 번째 사역은 영적인 개혁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러한 구조에서도 에스라서의 특징인 '대조'는 잘 드러나고 있다. 이제 이러한 에스라서의 구조를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참조, 에스라 도표3)
제2부: 에스라서의 특별 주제들
Ⅰ.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와의 관계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와의 관계에 관련된 논의들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 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분류할 수 없는 한 권의 책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독립된 두 권의 정경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며, 두 번째는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저자가 동일한 인물인가 아니면 별개의 두 인물인가 하는 문제이고, 세 번째는 에스라와 느헤미야 중 누가 먼저 귀국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세 가지 논쟁들은 모두 에스라서의 저자와 기록 연대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논쟁들인데 이미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저자에 대한 고찰 중 '에스라서의 공동 저작설' 부분에서 살펴보았으므로 여기서는 세 번째 문제인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귀국 순서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1. 논쟁의 핵심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귀국 순서에 대한 논쟁의 핵심은 에스라가 활동했던 때의 파사 왕이 과연 '아닥사스다 1세'(Artaxerxes Ⅰ, B.C 464-425)였는가 하는 것이다. 즉 정통적 입장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귀환 연도를 가리키는 스 7:7의 '아닥사스다 제칠 년'(에스라 귀환)과 느 2:1의 '아닥사스다 제이십 년'(느헤미야의 1차 귀환) 그리고 느 13:6의 '아닥사스다 제삼심이 년'(느헤미야의 2차 귀환)을 모두 '아닥사스다 1세'로 간주 성경의 증거대로 에스라가 느헤미야보다 먼저 귀국했다고 보는 반면에 일부의 비판적 학자들은 느헤미야의 일차 귀환과 이차 귀환은 성경 그대로 '아닥사스다 1세'로 보는 반면 에스라가 귀환한 '아닥사스다 왕'은 아닥사스다 1세(Artaxerxes Ⅰ, B.C. 464-425)가 아닌 그보다 훨씬 후대의 '아닥사스다 2세'(Artaxerxes Ⅱ, B.C. 404-358)로 간주하여 느헤미야가 에스라보다 먼저 귀환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에스라서의 저술 연대에까지 영향을 미쳐 정통주의 견해는 에스라서의 기록 연대를 에스라의 활동 시기로부터 느헤미야의 귀환까지인 B.C. 457-444년 사이로 보는 반면 후자의 견해를 취한 자들은 B.C. 350년경으로 추정한다. 이제 이러한 후자의 견해를 주장하기 위해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와 그에 대한 정통주의의 반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 '아닥사스다2세 귀환설'을 주장하는 자들의 견해와 이에 대한 정통주의 견해의 반박
1) 에스라의 사역 공백설
그들은 만약 에스라가 '아닥사스다 1세'의 제칠 년에 귀환했다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로 작정한 지(참조, 스 7:10) 십삼 년이 지난 후, 즉 느헤미야가 귀국한 '아닥사스다 이십 년'(참조, 느 1:1)에야 비로소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읽어 준 것이 되며 따라서 에스라의 사역 기간에 십삼 년이라는 공백 기간이 생기게 되므로(참조, 느 8:1-8) 에스라의 귀국은 '아닥사스다 1세'때가 아닌 '아닥사스다 2세'때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느헤미야 8장의 사건이 특별한 절기인 장막절 때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지 못한 이론이다. 즉 에스라는 십삼 년 동안 전혀 율법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장막절이라는 특별한 절기가 돌아오자 공적인 석상에서 공적으로 율법을 낭독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위대한 개혁자였던 에스라가 십삼 년 동안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며, 따라서 '아닥사스다 2세 귀환설'은 받아들일 수 없다.
2) 에스라 사역의 실패설
이 견해 역시 위의 견해와 비슷한데 이 견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에스라가 느헤미야보다 먼저 귀국하였다면 그의 사역은 완전히 실패였다'고 보는 이론이다. 즉 그들은 에스라 9장과 10장에 기록된 에스라의 개혁이 느헤미야 13장에서 다시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만약 에스라가 먼저 귀국하여 개혁을 시작했다면 그 개혁은 필경 느헤미야에 의해 다시금 시행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실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에스더와 느헤미야의 사이의 시간이 23년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23년이라는 기간은 백성들이 에스라의 개혁을 잊고 다시금 죄악으로 빠질 수 있는 충분한 기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듯 백성들이 다시금 죄악에 빠졌다고 해서 에스라의 개혁을 '실패'로 몰아세울 수는 없다. 모든 구약의 역사와 사사시대의 반복된 죄악에서와 같이 그것은 에스라의 잘못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백성들의 완악함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에스라의 개혁을 실패로 간주해야 한다면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의 사역 역시 실패로 간주해야 하는 엄청난 결과를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스라의 개혁을 결코 실패로 볼 수는 없고 따라서 느헤미야가 에스라보다 먼저 귀환했다는 '아닥사스다 2세 귀환설'은 인정할 수 없다.
3) 예루살렘 성의 황폐설
'아닥사스다 2세 귀환설'을 주장하는 자들의 세 번째 근거는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당시의 상황에 관한 것이다. 즉 그들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왔을 때는 '주로 황폐한 상태'였으나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왔을 때는 그 도시가 '사람이 거주하여 상당히 안전'하였으므로 에스라는 느헤미야가 어느 정도의 사역을 끝낸 후에 귀국한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의 황폐함이 성벽의 황폐함을 뜻할 뿐 도시 전체에 사람이 전혀 거주하지 않았었다는 말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즉 '글리슨 아처'(Gleason L. Archer) 박사의 말대로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런던이나 베를린이 도시는 파괴되어 황폐해도 사람은 거주하고 있었던 것처럼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의 상황이 바로 그처럼 사람은 있으되 성벽은 허물어진 상태였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처음 귀환했을 때 역시 이와 마찬가지였었다. 그러나 그는 성벽보다도 성전 건축에 더욱 관심이 있었고 성벽의 증축은 느헤미야가 귀국할 때까지 미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물론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 안으로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노력한 것(참조, 느 11:1,2)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예루살렘 성에 사람이 전혀 살지 않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을 대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성으로 만들기 위한 군사적인 대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느헤미야가 에스라보다 먼저 귀환하여 무너진 성과 도시를 수축하였고 에스라는 그러한 사역이 완성된 후 귀국하였다는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고 따라서 '아닥사스다 2세 귀환설' 역시 인정 할 수 없다.
4) 느헤미야와 에스라 순의 이름 배열
이 견해는 느 12:26을 근거로 하는 이론이다. 그들은 거기에 기록된 '방백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서기관 에스라 때에'라는 순서를 내세워 '이름의 순서에서조차 이미 그들의 귀국 순서가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느 12:26에 기록된 이름의 순서는 그들의 주장과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이름의 순서는 그들의 귀국 순서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직위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1세에 의해 임명된 '총독'으로서 국가의 머리였다. 그러나 에스라는 총독이 아닌 '제사장 겸 서기관'이었다. 비록 영적인 지위로는 에스라의 지위가 높다 하더라도 사회적 지위로는 느헤미야가 국가의 머리이므로 영적 지도자인 에스라보다 높으며 따라서 에스라보다 앞에 기록되었던 것이다.
5) 에스라의 삼십칠 년 귀환설
'아닥사스다 2세 귀환설'의 또 다른 주장은 스 7:7의 '제칠 년'이 '삼십칠 년'을 잘못 쓴 것이라는 이론이다. 즉 그들은 에스라가 느헤미야의 두 번째 귀환이 '아닥사스다 제삼심이 년'(참조, 느 13:6) 후인 '아닥사스다 삼십칠 년'에 귀국했는데 성경 기록자가 이것을 오기하여 '제칠 년'으로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그들 스스로의 오류에 빠지는 이론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에스라가 '아닥사스다 삼십칠 년'에 귀국하여 잡혼 금지에 대한 개혁을 단행했다면 느 13:6부터 시작되는 느헤미야의 개혁은 완전히 실패한 것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에스라 개혁 후 23년 만에 이루어진 느헤미야의 개혁을 두고 에스라 사역의 실패설('에스라 사역의 실패설'참조)을 내세우는 그들이 느헤미야 개혁 후 5년 만에 시작된 에스라의 개혁에 대해서는 무어라 변명할 것인가? 그러므로 에스라의 '아닥사스다 삼십칠 년 귀환설'은 스스로의 모순에 빠진 잘못된 견해임이 분명하며 따라서 '아닥사스다 2세 귀환설'은 받아들일 수 없다.
3.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의 귀국 순서에 대한 결론
성경은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동시대 사람임을 선언하였다. 느헤미야 8장에서 율법을 낭독하는 에스라의 곁에는 느헤미야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에스라 역시 느헤미야와 마찬가지로 '아닥사스다 1세'때에 활동했던 사람임을 증거한다. 왜냐하면 만약 에스라가 '아닥사스다 2세'때의 사람이라면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동시대에 활동할 수는 결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증거는 사마리아를 다스리던 제사장 여호하난과 산발랏을 언급하는 '엘레판틴 파피루스'(약 B.C. 408)의 증거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즉 '여호하난'은 느 3:1과 20절에 기록된 대로 '엘리아십'의 손자인데 그 '엘리아십'이 느헤미야와 동시대 인물이므로 느헤미야의 활동 시기는 자연히 B.C. 400년경에 활약했던 '신발랏'과 '여호하난'보다 오래인 B.C. 470-430년 경, 즉 '아닥사스다 1세'때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스 10:6을 근거로 '에스라'가 '엘리아십'의 손자인 '여호하난'과 동시대의 인물이므로 당연히 후대의 인물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엘리아십의 손자'가 아닌 '엘리아십의 아들'로 표현된 것으로 봐서 그는 분명 '후대의 여호하난'이 아닌 느 13:4, 7에 나오는 '엘리아십의 아들'이 분명하다. 그러나 설령 여호하난이 엘리아십, 즉 느헤미야와 동시대인 엘리아십의 아들이고 에스라가 여호하난과 동시대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느헤미야를 에스라보다 먼저 귀국한 자로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느헤미야와 엘리아십, 여호하난과 에스라가 동시대인이라는 말은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활동했던 그 시기에 그들이 있었다는 것을 말할 뿐이지 정확히 그들의 출생으로부터 사망 연로까지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생애와 똑같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그대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1세'라는 공통적 시대 배경 하에서 활동하되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1세의 칠 년'(B.C. 457)에, 그리고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1세의 이십 년'(B.C. 444)과 '아닥사스다 Ⅰ세의 삼십이 년'(B.C. 432)에 귀환한 것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 성경의 모든 연대는 순조롭게 일치될 수 있으며, 에스라서의 기록 연대는 B.C. 457-444년 사이로, 느헤미야서의 기록 연대는 B.C. 444-425년 사이로 추정될 수 있는 것이다.
Ⅱ.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역사적 배경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 그리고 에스더서의 역사적 배경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지닌 나라는 페르시아 제국이며 그중에서도 고레스로부터 아닥사스다 1세까지의 기간이다. 왜냐하면 이 기간 동안에 고레스와 아닥사스다 1세하에서 스룹바벨과 에스라 그리고 느헤미야 인도하의 포로귀환이 이루어졌고 성전 건축과 성곽 증축이 이루어졌으며 다리오 1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아하수에로'로 표기됨-필자 주)를 배경으로 에스더서가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보다 깊은 연구를 위해서는 페르시아 제국과 그 왕들에 대한 개략적인 연구가 필수적으로 시행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본 서론에서는 페르시아 왕들과 그들의 치적에 대해 살펴보되 그들의 치적과 통치 원리 그리고 그들의 재임 기간에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이스라엘과 연관된 문제들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바벨론의 멸망과 고레스 대왕
주전 1,000년경 이란의 고원에 자리 잡은 아리안족의 바사는 B.C. 645년에 '엘람'(Elam)왕국의 멸망과 함께 그 판도의 일부에서 출발된 작은 나라였다. 이러한 작은 나라가 바벨론의 뒤를 이어 역사의 무대 위로 화려하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고레스' 대왕(Cyrus, B.C. 559-530)때부터였다. '엘람'지역의 '안산'(Anshan) 왕 '캄비세스 1세'(Cambyses J. B.C. 600-559)의 아들인 그에게는 정복해야 할 왕국이 셋 있었는데 그것은 '아스티아게스'(Astyages, B.C. 585-550)의 '메대 제국'과 '나보니더스'(Nabonidus, B.C. 556-539)하의 '바벨론 제국'그리고 '아마시스'(Amasis, B.C. 568-525) 통치하의 '애굽'이었다. 고대 근동 전역에 대한 정복 야망에 불탔던 페르시아의 위대한 정복자 고레스는 자신의 원대한 야망을 실현하는 첫 번째 단계로 자신과 가장 근접해 있는 '메대'를 그의 일차 공격 목표로 삼았다.
1) '메대'와 '파사'(페르시아)의 합병
본래 '파사'는 '메대'의 세력 하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였다. 때문에 '고레스'의 부친 '캄비세스 1세'는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 당시 '메대'의 통치자였던 '아스티아게스'의 딸과 정략결혼을 하여 동맹을 맺었는데 그녀가 바로 '고레스'의 모친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때 바벨론의 '벨사살'과 동맹을 맺기도 하였는데 이는 '메대'의 강성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바벨론의 의도에 의해 취해진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자신의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파사는 그 왕좌가 '캄비세스 1세'에게서 '고레스'에게로 옮겨지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왕위에 오른 고레스는 먼저 페르시아 백성을 통일한 후에 드디어는 그의 첫 번째 정복 사업으로서 약화되고 부패한 '아스티아게스'의 '메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메대'는 '아스티아게스'가 이전에 부당하게 대했던 메대의 대장 '하르파구스'(Harpagus)의 반역으로 어이 없이 무너졌고, 파사인들은 큰 전투 없이 B.C. 550년경 수도 엑바타나(Ecbatana)를 점령하여 일약 고대 근동의 강자로 부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메대를 점령한 '고레스'의 통치 원칙은 매우 특이했다. 즉 그는 메대를 속국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메대와 파사를 연합국으로 합병한 후 자신은 두 나라를 함께 통치하는 통치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두 나라를 전혀 구별하지 않았고 어떤 우열의 등차를 두지 않아서 결국 헬라의 역사가들은 메대와 파사를 동의어로 사용하였고, 성경 역시 '파사와 메대'(참조, 에 1:19). 또는 '메대와 파사'(참조, 단 5:28)라고 둘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할 정도로 성공적인 연합국을 만들었다. 이렇듯 그는 정복 국가의 모든 제도와 문화 그리고 종교까지도 그대로 인정해 주는 통치 원칙을 사용하였는데 유대인의 본토 귀환은 이러한 배경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2) '리디아 제국'(Lidian Empire)의 정복
메대를 병합한 고레스의 다음 목표는 바벨론이었다. 그러나 그가 바벨론으로 향하기 이전에 서쪽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침공을 당하게 되는데 그것은 부유하기로 소문난 '리디아 제국'(Lidian Empire)의 '크로에수스'(Croesus, B.C. 560-546)의 공격이었다. 본래 이 침공은 '크로에수스'와 바벨론의 '나보니더스'(Nobonidus, B.C. 556-539) 사이에 맺어진 동맹의 결과로 인한 성격이 다분했다. 즉 메대의 강성한 세력에 전전 긍긍하던 바벨론은 이제 메대보다 더욱 강력한 '파사'가 등장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 '애굽'의 '아마시스'(Amasis, B.C. 568-525)와 '리디아 제국'의 '크로에수스'와 동맹을 맺었던 것이다. 때문에 '리디아 제국'의 '크로에수스'는 어차피 제거되어야 할 적이었는데 크로에수스의 선제공격으로 말미암아 그 시기가 앞당겨졌던 것이었다.
크로에수스의 공격을 받은 고레스는 B.C. 547년 봄 바벨론에서 우회하여 티그리스를 따라 진군해 가다가 유프라테스 건너 갑바도기아로 진입했다. 처음에 고레스는 크로에수스에게 화해교섭을 벌였으나 크로에수스가 이를 거절하였고, 그 결과 두 군대는 겨울이 다가올 때까지 승부를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전투를 계속했다. 겨울이 다가오자 크로에수스는 고레스가 이듬 해 봄에 공격할 줄로 생각하고 군대를 해산한 후 최소의 방비군과 함께 수도 '사르디스'(Sardis)로 퇴각하여 바벨론, 애굽 및 희랍에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레스는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수도 사르디스로 공격하여 크로에수스의 뛰어난 마병을 약대의 냄새를 맡게 하여 물리친 뒤 크로에수스의 리디아를 점령해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고레스는 에게해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확보하였고 이제는 고립되고 나약한 제국 바벨론을 정복 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3) 바벨론 제국의 멸망
메대에 이어 리디아마저 정복한 고레스는 이제 본격적으로 바벨론 정복에 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레스의 침공이 있기 이전에 이미 바벨론은 그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나보니두스의 종교적인 실정과 그의 아들 벨사살의 폭정 때문이었다.
(1) 바벨론 내부의 불안 기류
'네리글리살'(Neriglissar, B.C. 560-556)에 이어 왕위에 오른 '나보니더스'는 본래 '하란'출신의 아람계 귀족 가문의 자손이었다. 따라서 그의 종교적 뿌리는 바벨론의 주신인 '마르둑'이 아닌 하란의 주신인 '신'(Sin, 월신(月神)을 뜻함-필자 주)이었다. 그래서 그는 바벨론의 전통신인 '마르둑'대신 '월신'(月神)인 '신'(Sin)을 더욱 내세우고 강조하였으며 '신'(Sin)을 위한 신전을 세우고 그 의식들을 부활시키며 '마르둑'의 제의에 대해서는 소홀하였다. 이러한 그의 개혁책은 많은 백성들로부터 반감을 사게 되었고, 특히 마르둑 제관(祭官)들의 미움을 사 그들은 나보니더스를 불경스러운 자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와 백성들 사이의 갈등은 그가 그의 아들 '벨사살'(Belshazzar)을 바벨론의 섭정으로 세우고 자신은 북아라비아의 '테이아'(Theima)에 제2의 수도를 세운 후 10년 동안 그곳에서 정주함으로써 더욱 심화되었다.
바벨론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그의 '테이마'에로의 이거는 그의 결정적인 실정(失政)으로 비쳐졌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그곳에서 여러 가지 업적을 쌓았다 하더라도 (이 기간 동안의 나보니두스의 행적을 알기 위해서는 존 브라이트 저, 김윤주 역, '이스라엘의 역사' 하권 p. 161, 162를 참조할 것) 그가 섭정으로 세운 벨사살에게 바벨론의 가장 중요한 신년 축제를 대행할 권한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기에 그가 10년 동안 자리를 비우는 기간에 바벨론 제의력의 절정인 신년 축제는 자연히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에게 이것은 자신들의 신인 '마르둑'을 무시하는 '신성모독죄'로 비쳐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보니두스와 백성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커다란 벽이 생기게 되었고 이것은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내부로부터 서서히 붕괴시키는 분열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후에 제국 붕괴의 위험을 느낀 나보니두스가 다시금 바벨론으로 돌아와 신년 축제를 부활시키는 등의 부흥 정책을 꾀하였으니 이미 이때는 돌이킬 수 없는 시기가 되어 버렸고 백성들은 오히려 나보니두스나 벨사살이 아닌 새롭고 유능한 통치자를 기다리게 되어 고레스의 바벨론 정복 시기는 무르익어 갔던 것이다.
(2) 고레스의 바벨론 정복
제국 바벨론의 붕괴는 놀라우리만큼 신속하고도 쉽게 닥쳐왔다. 그러나 이러한 붕괴는 실상 단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대로 바벨론 내부에서는 새로운 통치자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백성들의 원성이 나날이 높아만 갔었고, 외부로는 상부 메소포타미아 지방과 '엘람'(Elam) 지방을 빼앗긴 채 엘람 지방의 총독이었던 바벨론 장군 '고브리아스'(Gobryas)의 반역으로 인해 극도의 혼란 속에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때 드디어 고브리아스를 선봉장으로 하는 고레스의 대군이 본격적인 바벨론 정복에 나서 무너져가는 바벨론으로 물밀 듯이 밀려 들어와 막대한 타격을 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정적인 교전은 티그리스 강변의 '오피스'(Opis)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바벨론은 여지없이 격파되었고 그 이후 그들은 저항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계속해서 밀리다 '고브리아스'에게 순순히 항복하며 수도 바벨론을 넘겨줌으로 제국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 전쟁으로 인해 나보니더스의 아들 벨사살이 처형되었고 나보니더스 역시 얼마 후에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는데 그가 처형되었는지의 여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3) 고레스의 통치 원칙과 유다인들의 예루살렘 귀환
고레스의 통치 원칙은 한마디로 '자국민의 종교와 풍습, 문화를 그대로 인정하고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통치 원칙은 이미 그가 '메대'를 점령한 후 그것을 자신의 속국으로 만들지 않고 자신들과 동등한 연합국으로 만든 것에서 잘 드러났다(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앞의 '메대와 파사의 합병'부분 참조). 바벨론에 대한 그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바벨론으로 입성한 뒤 그 성의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를 선언하였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도시를 약탈하지 않았고 신전을 폐쇄하지도 않았다. 신전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제 기능을 발휘하였고, 페르시아 군인들에게는 주민들의 종교적 감정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공포감을 주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며 정부의 옛 관리들의 다수가 자신들의 직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레스의 관용 정치는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보니두스'가 억압했던 바벨론의 정통 종교를 부활시켰고, 고레스 자신도 공공연하게 그 예배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고레스는 바벨론인들이나 다른 피정복 국민들에게 '정복자'가 아닌 '해방자'로 환영받게 되었다.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허락한 고레스의 칙령은 바로 이러한 그의 '관용 정책'의 일부였다. 즉 그는 자신이 은혜스러운 해방자임을 보이기 위해 바벨론으로 잡혀 온 사람들이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는데 유대인들의 귀환 역시 그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칙령 가운데 그는 나보니더스에 의해 강제적으로 운반되어 온 바벨론의 각 지방 신을 도로 지방으로 보내었던 것처럼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빼앗긴 솔로몬 성전의 여러 가지 금, 은 기명들을 되돌려 주었으며, 성전 건축 기금을 국고에서 보조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이러한 고레스의 관용 정책에 따라 유다의 멸망과 함께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잡혀갔던 자들은 70년 만에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인도로 예루살렘에 귀환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이유에서 고레스는 이방인들의 해방자였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기쁨이요 은인이었고,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그를 가리켜 '나의 목자' 또는 '나의 모든 기쁨을 청취할 자'(참조, 사 44:28), '나의 기름부음 받은 고레스'(참조, 사 45:1)라고 예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레스에 의해 허락된 성전 건축은 이 년 뒤 대적들의 방해에 부딪쳐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즉 유다의 대적들이 왕의 모사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예루살렘 성전 건축공사를 방해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성전 건축의 역사는 성전 건축이 시작된 지 이 년 만에 중단되어 다리오 2년까지 중단되고 말았다.
(4) 고레스의 최후
바벨론을 점령한 고레스의 남은 목표는 이제 애굽이었다. 그러나 고레스는 너무 많은 원정에 지쳤는지 애굽 정복을 자신의 아들인 '캄비세스 2세'(Cambyses Ⅱ, B.C. 530-522)에게 맡기고 자신은 B.C. 538년 초에 '엑바타나'(Ecbatana)로 가서 생활하였다. 아버지로부터 애굽 원정의 대권을 위임받은 '캄비세스 2세'는 바벨론을 통치하는 전권대리자로 일하였고 바벨론의 신년 축제시에는 '왕의 아들'로서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였다. B.C. 530년 고레스는 먼 북동쪽의 '옥수스'(Oxus)와 '약사르테스'(Jaxartes)지방으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으나 이 자그마한 전쟁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여 전사하고 만다. 그의 시체는 당시의 파사의 수도 중의 하나인 '브살가데'(Pusargadae)에 옮겨져 장사되었다. 역사상 고레스 왕 만큼 정복자로서 존경을 받은 왕도 없었다. 파사의 백성들은 그를 '아버지'(Father)라 불렀고, 헬라인들은 '주'(Master) 또는 '입법자'(Law Giver)라 불렀으며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께 기름부음 받은 자'(The Load's Anointed)라 칭하였다. 후에 알렉산더 대왕은 고레스의 무덤이 폐허가 되지 않도록 힘써 수축했고 그 무덤은 지금까지 현존하고 있다.
2. 캄비세스 2세(Cambyses Ⅱ, B.C. 530-522)
고레스의 맏아들인 '캄비세스 2세'는 페르시아의 정식적인 통치자로 등극하기 이전에 이미 아버지 고레스로부터 바벨론 통치의 권한을 위임받아 2, 3년 동안 다스린 경험이 있었다. 그러다가 고레스가 '약사르테스'(Jaxartes)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갑작스럽게 전사하자 드디어 제국 페르시아의 정식적인 통치자로 즉위하게 된 것이다. 페르시아의 통치자가 된 캄비세스 2세는 맨 먼저 자기의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한 동생 '바르디야'(Bardiya, 이것은 바벨론 명칭임-그의 헬라식 명칭은 Smerdis(스메르디스)임-필자 주)를 제거하고 왕권을 공고히 하는 숙청 작업을 벌였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왕위를 공고히 한 '캄비세스 2세'는 이제 선왕 때부터 자신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임무인 애굽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이 당시 애굽의 통치자 '아마시스'(Amasis, B.C. 568-525)는 '사모스'(Samos)의 전제 군주와 동맹을 맺는 한편 희랍인 용병들을 좋은 대우로 고용하는 등의 궁여지책으로 페르시아의 세력을 견제해 보고자 했으나 이는 무모한 노력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애굽이 고용한 희랍의 용병장이 캄비세스 2세에게 중요한 군사적 기밀을 알려 주며 투항하였고, '사모스'의 전제 군주는 도리어 희랍의 군대와 배로써 캄비세스 2세를 돕고자 '아마시스'와의 동맹을 파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연로한 아마시스가 죽고 그의 아들 '프사메티쿠스 3세'는 희랍의 용병들과 남아 있는 애굽의 군사들을 모아 최후의 공격을 감행했으나 '펠루시움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였고 멤피스 성읍으로 도망친 '프사메티쿠스 3세'는 뒤쫓아 온 페르시아 군인들에 의해 사로잡히고 말았다. 정복자 캄비세스 2세는 포로가 된 애굽의 왕을 호의적으로 대접하였으나 후에 그가 또다시 반역을 꾀하자 처형해 버리고 만다. 이로써 애굽의 자치권은 완전히 상실되었고 그로부터 헬라의 알렉산더가 전 근동을 통일할 때까지 약 2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한 '주'로 편제되어 지내게 되었다.
애굽을 정복한 캄비세스 2세는 애굽 27왕조의 최초의 왕으로 즉위하였으며 새로운 신하들의 호감을 사기 위하여 애굽 왕의 이름과 직함을 사용하였고, 애굽 왕실의 의복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애굽에서의 통치 원년을 페르시아에서의 통치 원년보다 이르게 하기도 하였다. 고대의 역사가들은 캄비세스가 그의 새로운 백성들의 종교적 감정을 무시하고 성전 모독죄와 음란의 죄를 범했다고 지적하기도 하였으나 신빙성 있는 견해는 못된다.
이후 캄비세스 2세는 '카르타고', '에디오피아' 암몬의 오아시스에 대해서도 정복 사업을 벌였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그러자 애굽을 총독 '아리얀데스'에게 맡기고 페르시아로 귀국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귀국길은 그의 최후 여정이 되었으니 그가 애굽 정복에 나선 동안 페르시아에 스스로 '바르디야'(캄비세스 2세가 죽인 동생)라고 속인 '가우마타'(Gaumata)가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팔레스틴의 갈멘 산 부근엣 상속자를 남기지 못하고 자살하였던 것이다(그의 정확한 사인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자살이라는 견해 역시 가장 널리 인정되고 있는 학자들의 추측일 뿐이다-필자 주). 한편 캄비세스 2세의 통치 기간은 예루살렘에서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지도 하에 진행 중이던 성전 건축이 대적자들의 방해로 인해 중단되었던 시기였다.
3. 다리우스 1세(Darius Ⅰ, B.C. 522-486)
'다리우스 세'(Darius Ⅱ, B.C. 423-404)와 구별하기 위해 '다리우스 히스타스페스'(Darius Hystaspes)라고도 불리는 '다리우스 1세'는 '캄비세스 2세'(Cambyses Ⅱ, B.C. 530-522)의 측근 장교이자 태수였던 '히스타스페스'(Hystaspes)의 아들로서 고레스 왕가의 방계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페르시아의 역사상 가장 어렵고도 혼란스러운 시기에 왕권을 잡았는데 이러한 그의 생애를 시대와 주제별로 분류해 보면 크게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반란의 진압과 '베히스툰 비문'(Behistun Inscription)
'캄비세스 2세'의 왕위를 찬탈한 '가우마타'(Gaumata)의 통치는 여러 도의 반역을 재촉했고, 따라서 제국은 붕괴 직전의 위기에까지 처하게 되었다. 이때 고레스 왕가의 방계 가문이었던 '다리우스 히스타스페스'가 군대의 지지를 받고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 후 즉시 동부의 메디아로 진격하여 가우마타를 굴복시키고 처형한 후 페르시아의 정식적인 통치자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일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가우마타에 대한 다리우스 1세의 승리는 그의 왕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전국에서 도화선처럼 일어나는 반란의 불길을 끄는 그의 반란 진압 사업의 시초에 불과했던 것이다. '가우마타' 통치하의 반란은 확실히 전국적인 규모의 대단한 것이었다. 근 2년 동안 19번이나 출정해야 했던 반란은 메디아, 엘람, 파르사(Parsa) 등지에서 시작되어 아르메니아와 이란 전역으로 번졌고, 가장 먼 동부 국경선에까지 퍼져나갔을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는 애굽과 소아시아에까지 파급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주목할 만한 반란은 바벨론으로부터 일어난 두 번에 걸친 반역이었다.
처음의 반역은 '니딘투-벨'(Nidintu-bel)이라는 자가 스스로 '나보니두스'의 아들임을 자처하여 '느부갓네살 3세'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오른 것인데 몇 달 동안 그런대로 왕의 행세를 하다가 결국에는 다리우스가 그를 사로잡아 처형함으로 진압되었고, 두 번째의 반역은 그 이듬해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또 다른 반역자에 의해 일어났는데 그 역시 자신을 느부갓네살이라 부르고 나보니두스의 아들이라 자칭하며 소란을 부리다가 결국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말뚝에 찔러 꿰는 처형을 당함으로 진압되었다.
이러한 여러 차례의 반역들을 2년 동안 진압한 후에야 비로소 그의 왕위는 공고해질 수 있었고, 붕괴 직전에 있었던 제국은 다시 강력한 제국으로 그 위세를 떨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그는 그의 이러한 진압의 역사를 '엑바타나'(Ecbatana)로 가는 길옆의 높은 산벽에 기록으로 남겨 두었는데 '베히스툰 비문'(Behistun Inscription)으로 불리는 이 비분은 고대의 가장 유명한 비문 중의 하나로 꼽히며 '페르시아어'와 '아카드어', 그리고 '엘람어'의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이유로 오늘날 고대 근동의 언어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2) 다리우스 1세의 건축 사업
반란의 진압에 성공한 다리우스 1세는 계속해서 북서 인도의 정복(B.C. 514년경), 리비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의 정복(B.C. 521년경), 이오니아 그리스인들 사이의 폭동 진압(B.C. 500-493) 등을 통해 계속해서 그의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고 그 결과 그의 통치시에 페르시아의 영토는 최대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다리우스 1세는 이러한 전투적 능력만이 뛰어난 자가 아니었다. 그의 뛰어난 통치 능력은 오히려 제국을 조직적으로 통치하는 조직력과 건축술에서 더욱 그 진가를 발휘했다. 그는 먼저 제국의 조직을 새로 정비하기 시작하여 그의 광대한 재국을 20개의 총독 관구로 편성하였고, 이를 감독하기 위해 고정적인 순회 판사를 두었으며, 이들의 효과적인 교류를 위해 19세기 미국의 속달 우편과도 비슷한 우편 제도를 설립하였다.
다음으로 그는 제국의 내적인 강화를 위해 그들이 가장 위대한 신으로 믿는 '아후라-마즈다'(Ahra-Mazda, 하늘과 땅, 인간과 인간을 우한 평화로운 번영을 창조한 페르시아의 최고의 신-필자주)의 이름으로 법규를 만들어 반포했다. 그는 이 법규집에 '선한 규칙 조례'(The Ordinance of God Regulations)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 법전은 초창기의 '함무라비 법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었다(Olmstead).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업적 중 가장 크게 두드러지는 업적은 건축사업이었다. 그는 먼저 새로운 수도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의 건설에 착수하였는데 '자비의 산' 꼭대기에 세워진 이 거대한 도시는 본래 3중의 방어물과 함께 전략적인 요새의 구실을 하기 위해 세워졌던 것 같다. 다음으로 그는 지난날 메대의 수도였던 '엑바타나'(Ecbatana)와 '수사'를 새롭게 증축하였다. 그 중 '수사'에는 페르시아 최대의 건축물이라 할 수 있는 정교하고도 아름다운 왕궁이 있었는데 이 궁이 에스더서에 나오는 '수산의 궁'인 듯하다. 이러한 그의 건축 사업은 운하를 파는 사역으로 절정을 이루는데 그는 나일강으로부터 홍해에 이르는 거대한 운하를 판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행적 조직과 건축 사업은 그 이전의 어떤 왕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매우 위대한 업적이었다.
3) '마라톤 전투'(Battle of Marathon)에서의 패배와 죽음
이렇듯 상승일로로 치닫던 다리우스 1세는 결정적인 패배를 그리스에서 당하게 되는데 그것이 유명한 '마라톤 전투'(battle of Marathon)이다(B.C. 493).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페르시아의 서방 진군은 저지되었으며 이후 그리스에의 복수를 준비하던 '다리우스 1세'는 갑작스런 애굽의 반란으로 인해 그곳에 관심을 쏟다가 B.C. 486년에 죽음을 맞아 그리스를 향한 복수의 무산과 함께 그의 생은 마감된다.
4) 다리우스 1세와 유다인과의 관계
다리우스 1세와 유다인과의 가장 중요한 관계는 그가 그 동안 중단되었던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허락하였다는 것이다. 즉 그는 닷드내의 상소를 받은 후 이전에 유대인을 위해 내렸던 고레스의 조서를 조사하여 중단된 성전 건축이 재개될 수 있도록 율령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성전을 짓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며 서방으로부터 들어오는 공물에서 성전 건축의 비용을 마련해 줄 것을 명하였던 것이다(참조, 스 6:6-12). 이러한 '다리우스 1세'의 조서에 따라 유다인들은 중단되었던 성전 건축 공사를 계속하였고 그리하여 다리우스 1세 제육 년(참조, 스 6:15)에 성전 건축은 완성된다. 그 이후 다리우스 1세의 통치 30여 년간 유다인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4.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Ⅰ, B.C. 486-465)
에스더서의 '아하수에로' 왕으로 알려진 '크세르크세스 1세'는 역사상 무능한 왕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왕위에 오른 그는 무엇보다도 그의 부친이 죽기 전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던 애굽에서의 반란과 얼마 뒤에(B.C. 482) 바벨론에서 일어난 반란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중에서 그는 특별히 바벨론의 반란을 너무 심하게 진압하여 B.C. 482년 느부갓네살에 의해 세워진 요새를 파괴하였고 '에사길라'(Esagila) 신전을 파괴하였으며 360kg의 마르둑 순금상을 옮겨 금괴용으로 용해시켜 버린 후 앗수르에 통합시켜버렸다. 이어 그는 그의 부왕 '다리우스 1세'가 실패한 희랍 정복길에 나서게 된다. 헬라 원정의 처음은 성공적이어서 장관을 이루었을 '헬레스폰트(다아다넬즈 해협)를 건너 '테르모필레'(Thermopylae)의 승리에 이어 '아테네'를 점령 '아크로폴리스'(Acropolis)에 불을 질러버렸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승리는 잠깐뿐이었고 그 이후 그는 패전을 거듭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첫 번째 결정적인 패배가 '살라미스'(Salamis)해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는 그가 자랑하던 함대의 3분의 1을 잃었고 이에 크세르크세스 1세는 '마르도니우스'(Mardonius) 장군과 일단의 군대를 희랍에 남겨놓고 아시아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다음 해에 그가 희랍에 남겨 두었던 군대는 '플라테아'(Plataea)에서 무참히 패배하였고 잔존 함대 역시 '사모스'(Samos) 부근에서 격파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에우리메돈'(Eurymedon) 부근에서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당함으로 '크세르크세스 1세'는 결국 유럽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그의 함대 역시 에게해 수역에서 철수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본국으로 돌아온 그는 '아파다나'를 건축하는 등 건축에 열을 올리다가 왕궁 수비대장 '아르타바누스'(Artabanus)에게 암살당한다.
한편 이 시대의 유다인은 그의 총리였던 하만에 의해 전멸당할 뻔한 위기에 처했다가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신앙적 용기에 의해 구원받는 사건이 있었고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부림절'이 제정된다.
5. 아닥사스다 1세(Artaxerxes Ⅰ, B.C. 465-424)
아닥사스다 롱기마누스(Artaxerxes Longimanus)라고도 불리는 '아닥사스다 1세'는 그의 부왕인 크세르크세스 1세가 '아르타바누스'에 의해 암살당하자 왕위에 즉위하였다. 왕위에 오른 그의 첫 번째 과업은 왕위를 노리는 많은 대적들을 없애는 일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통치는 통치 초기부터 큰 시련에 직면해야 했는데 그것은 아테네의 지지를 받는 '이나로스'(Inaros)지도하의 애굽 반란이었다. B.C. 460년경에 시작된 이 반란은 '아바르-나하라'(Abar-nahara)의 태수 '메가비주스'(Megabyzus)가 지휘하는 페르시아 군대에 의해 B.C. 454년에 진압될 때까지 약 6년간 계속되었었다. 그 후 '이나로스'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한 자신의 말이 무시되고 그가 처형되자 이번에는 '메가비주스' 자신이 반란을 일으켰으나(B.C. 449) 이 싸움은 메가비주스의 직분을 확고히 보장하는 선에서 수습되었다.
이 당시 헬라의 세력은 날로 팽창되어 있었다. 때문에 '아닥사스다 1세'는 마침내 '칼리아스'(Callias)의 평화 조약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는데(B.C. 449) 그 조약은 두 나라가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 대신 아테네와 동맹을 맺은 소아시아의 희랍인 도시들의 자유가 허락되었고, 아테네 측에서는 그 밖의 다른 도시들을 해방시킨다는 종래의 주장을 포기하였으며, 페르시아의 정복군은 할리스강 동쪽으로, 그리고 페르시아의 함대는 에게해 수역에 들어가지 않기로 약정하는 치욕의 조약이었다. 이때부터 제국 페르시아의 세력은 서서히 약화되어가기 시작했으며 제국을 유지하는데 급급해야만 했던 것이다.
한편 그는 조서를 내려 B.C. 458년의 에스라 귀환을 허락해 주었으며(참조, 스 7:8-16). 일시적으로 예루살렘 성곽 건축 공사를 중단시키기도 하였고(참조, 스 4:7-23), 느헤미야의 두 차례에 걸친 예루살렘 파견을 허락하였다(참조, 느 2:1-11; 13:6)
6. 아닥사스다 1세 이후의 페르시아 정세
'아닥사스다 1세' 이후에 페르시아의 세력은 급격히 감소되었는데 그러한 역사의 자세한 고찰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폐하기로 하고 간단히 왕조의 계승만을 밝혀 두기로 하겠다. 아닥사스다 1세 이후 다리오 3세 때까지 페르시아는 '다리우스 2세'(Darius Ⅱ, B.C. 423-404), '아닥사스다 2세'(Artaxerxes Ⅱ, 404-359), '아닥사스다 3세'(Artaxerxes 3세, B.C. 359-358). 그리고 '다리우스 3세'(Darius Ⅲ, B.C. 336-331) 등 네 명이었는데 이중 얼마동안 '아테네'까지 굴복시켰던 '다리우스 2세'때 잠시 그 세력을 회복하였을 뿐 내부의 반란과 부패로 쇠퇴 일로를 거듭하다가 B.C. 331년 그리스의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Alexander, B.C. 336-323) 대제에 의해 제국의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제 이러한 페르시아와 고대 근동의 역사를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에스라 도표5). 한편 페르시아 제국 최대의 번영기였던 B.C. 500년경의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를 지도로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에스라 도표4).
Ⅲ.스룹바벨 성전
스룹바벨 성전은 B.C. 539년 바벨론을 굴복시킨 '고레스' 대왕(Cyrus, B.C. 559-530)의 조서로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그 성전은 B.C. 536년 유다인들의 본토 귀환과 성전 건축을 허락하는 고레스의 조서가 내려지자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인도 하에 예루살렘으로 귀국한 일 차 귀환자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성전 건축의 위대한 사역은 포로 귀환자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몇 개월 뒤에 번제를 드릴 수 있는 제단을 처음으로 복원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참조, 스 3:1, 2). 그들은 복원된 제단에서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번제와 상번제를 드렸으며 초막절을 비롯한 각종 절기를 지켰고 이러는 동안에 성전 건축에 필요한 재료들을 예루살렘으로 이송하여 성전 건축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았다. 그리하여 모든 준비를 끝낸 그들은 드디어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의 장엄한 찬송 속에 성전의 기초석을 놓았고 이로써 성전 건축의 힘들고도 귀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렇듯 기쁨과 즐거움 속에 시작된 성전 건축은 얼마 못가서 대적들의 방해로 말미암아 중단되어야 했는데 그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신들의 성전 공사 동참 제의를 스룹바벨이 거절하자 페르시아의 여러 관원들에게 뇌물을 줌으로 성전 건축의 역사를 중단시켰던 것이다. 그러자 이때 하나님의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나타나 성전 건축의 재개를 호소하였는데 그들은 이방인의 방해에 의한 중단보다도 그러한 방해를 이길 수 있는 믿음과 열심히 부족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함으로 그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그리하여 중단되었던 성전 건축은 다리우스 1세(Darius Ⅰ, B.C. 522-486) 통치 2년에 재개되었고 다리우스 1세 통치 6년에 완공된다(참조, 스 6:15). 그런데 아쉬운 것은 스룹바벨 성전의 모양이나 규모, 그 기물들에 대한 정확하고도 신뢰할만한 정보가 남아 있지 않아서 그에 대한 좀더 깊은 연구를 계속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비록 이렇듯 스룹바벨 성전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없다 할지라도 여러 가지 역사서들과 위경, 그리고 외경들을 이용해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할 수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스룹바벨 성전이 솔로몬 성전과 같은 위치에 건축되었으며(이것은 헤롯 성전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그 위치는 현재 예루살렘 내에 있는 '쿠베트-사크라', 즉 '바위 사원'이라고 일컬어지는 회교 사원이 있는 곳이다-필자주), 패니키아의 건축물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는 양식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성전은 솔로몬 성전과 그 설계와 규모면에서 매우 유사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그러한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제2성전이라 불리는 스룹바벨 성전은 솔로몬 성전과 중요한 몇 가지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무엇보다도 제2성전은 솔로몬 성전보다 그 화려함이나 건축 비용면에서 뒤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성전의 기초석이 놓여지던 날 예루살렘의 노인들(이들은 솔로몬이 성전을 본 자들이었다)은 대성통곡하였던 것이다(참조, 에 3:12).
다음으로 새 성전의 바깥쪽에는 '놋바다'와 '바퀴달린 물두멍'이 없었고, 안쪽에는 언약궤와 그룹이 없었으며, 기둥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고 성전 본당에는 분향단과 진설병을 차리기 위한 상이 하나 있었을 뿐이며, 등경은 열 개가 있었던 솔로몬 성전에 비해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이외에 제2성전은 문들 대신에 취장들을 사용하였고 종합 건물군 속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따로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 제1성전과의 차이였다.
스룹바벨 성전은 이후 B.C. 20년 헤롯에 의해 새로운 성전이 건축될 때까지 근 5세기 동안 존속해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스룹바벨 성전은 많은 개축과 증축의 역사를 겪었고 그러한 역사 가운데 대제사장 시몬 2세와 하스모네가가 제2성전을 요새화하였던 적도 있었다. 결국 이러한 성전의 요새화는 헤롯에게 새로운 성전 건축의 구실을 주었고 그리하여 B.C. 20년경 헤롯의 새로운 성전 건축과 함께 스룹바벨 성전은 그 역사의 종지부를 찍는다.
Ⅳ. 에스라서의 주요 인물들
에스라서에는 결코 간과하고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이름들이 무수히 많이 나온다. 본서의 저자이며 주인공인 에스라, 제일 차 포로 귀환을 주도했던 스룹바벨과 세스바살 그리고 예수아, 중단된 성전 건축을 위해 다리우스 1세에게 상소문을 올린 닷드내와 스달보스내, 뿐만 아니라 학개와 스가랴 같은 선지자와 페르시아의 여러 왕들까지 실로 엄청난 수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원래는 이들에 대한 전체적인 고찰이 본 서론의 의무이겠으나 이중에서 페르시아의 왕들은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으므로 생략하기로 하고, 학개와 스가랴는 학개서와 스가랴서의 서론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며, 스룹바벨과 세스바살은 그 관계에 대한 여러 가지 이견 때문에 Ⅴ. 에스라서의 난제들 중 제2번 '스룹바벨과 세스바살과의 관계'부분으로 미루고 본 서론에서는 '에스라'와 '예수아'만을 다루기로 하고 '닷드내'와 '스달보스내'는 알려진 자료가 없으므로 생략하기로 하겠다.
1. 에스라
'여호와가 도우신다'는 뜻의 에스라는 대제사장 아론의 십육 대 손으로서 시드기야 왕 때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잡혀간 스라야의 아들이었다(참조, 스 7:1-5). 그는 바벨론에서 출생한 자였으나 모세의 율법에 능통한 서기관이었고(참조, 스 7:6), B.C. 458년 아닥사스다 제7년(참조, 스 7:8)에 약 1,750명가량의 남자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제2차 포로 귀환을 주도하였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에스라는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실시하였는데 그 중심 내용은 이방인과의 혼인에 대한 것이었다. 즉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에스라가 이방 여자와의 혼인이 성행하고 있는 것을 보고 탄식하며 회개하자 모든 백성들도 회개하였으며 이미 치루어진 결혼은 취소되었다. 그 후 이방인과 결혼한 자들의 명단이 작성되었고 만인 앞에 공개됨으로 그 문제를 종결지었다.
이렇게 하여 이방인과의 혼인 문제를 종결지은 에스라는 후에 느헤미야가 유다인 포로를 이끌고 3차 귀환을 실시하자 느헤미야와 함께 또 한번의 종교 개혁을 실시하였는데 이때는 초막절 절기에 율법을 낭독하였고(참조, 느 7:73-8:12), 전체가 함께 죄를 고백하는 총회의 날이 준수되었으며(참조, 느 8:13-99:37) 지도자들은 율법이 낭송되자 그 율법에 인을 쳤고(참조, 9:38-10:39), 이방 결혼을 반대하였으며, 안식년과 안식일을 지키고, 성전세를 내며, 성전에 나무와 합법적인 희생 제물 및 예물을 공급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하였다.
한편 에스라의 정치적 직위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바사 궁정에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받은 아람어로 된 조서 속에 재무에 관한 특권과 관리를 임명할 권리를 받은 것(참조, 스 7:21-26)에서 잘 알 수 있는데 에스라는 이 권한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 적이 있다
http://cafe.daum.net/oknjc/ITdc/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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