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신명기'란? 이름유래,의미.
사진출처 : 오픈 더 바이블
본래 히브리인들이 지은 신명기 이름은 책의 첫 구절인 “엘레 하 드바림(이것은 ……말이다)”, 또는 줄여서 “드바림”이었습니다. 그런데 70인 역 성서는 이 책을 “듀테노미온”이라 불렀습니다. ‘두번째 율법’이란 뜻입니다. 중국어 성서도 70인 역 성서의 추지를 따라, “하나님의 가르침을 되풀이하여 쓴 책”이란 뜻을 담은 “신명기(申命記)”라 지었습니다. 우리말 성서이름도 그 이름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신명기에 40여 회(1:16-18; 3:21; 29:5; 31:9, 24-25, 30), 신약에 80여 회에 걸쳐 신명기의 저자가 모세임을 밝히고 있고,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수 1:7), 신약의 예수(마 19:8)도 신명기를 모세의 책으로 인용하고 있어 모세의 저작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34장의 모세 죽음에 대한 기록은 후대에 가필(加筆)된 것으로 보는 것이 현재까지 정설입니다.
신명기는 한마디로 모세의 설교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야기하는 내용의 핵심은 언제 어디서나, 특히 위기에 처할 때에도 출애굽의 하나님 야훼만을 믿고 따르며 그분이 일러주신 말씀과 율법을 준수해야 살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율법의 최고 권위자인 모세의 입을 열어 이스라엘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광야 세대뿐 아니라 후손들이 이러한 내용을 잘 알아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땅에서 오래오래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가르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서론 |
신명기는 모세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여러 가지 명령들을 재강조함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신앙심을 굳건하게 하고자 쓰여진 책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명기에는 많은 율법들과 교훈들만이 나열되어 있을 뿐 어떠한 사건들의 기록이 아니며 그러한 점에서 신명기는 레위기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신명기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레위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전제로 하며 민수기의 광야 여정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위에 신명기와 레위기의 차이점, 혹은 레위기나 민수기의 보완점을 살펴보고 신명기가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이 무엇인가를 고찰해 보아야 한다. 하지만 본 서론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일일이 다룰 수 없는 한계 때문에 이중에서 율법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십계명과, 신명기의 학적 논쟁의 열쇠인 '모세 저작설', 그리고 신명기의 역사적 배경 등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제1부 신명기의 역사적 배경 I. 명칭 신명기의 히브리 명칭 역시 각 책의 첫 구절을 본떠 그 책의 이름으로 삼는 히브리인의 관습이 그대로 적용되어 '엘레 하떼바림'<!yrib;D]h' hL,ae>이라 명명되었는데 그 의미는 '이것들이 말씀들이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70인역'(LXX)에서는 이 명칭을 따르지 않고 '두 번째 율법', '율법의 재 강조'라는 의미의 '듀테로노미온'(deuvteronomi;on)이라 칭하였는데, 그것은 본문의 율법들이 전에 시내산에서 주어진 첫 번째 율법의 반복, 또는 재강조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명칭은 '불가타역'(Vulgata)에서 그대로 본떠 '듀테로노미움'(Deuteronomium)이라 불렀고, 영어 성경도 70인역을 따라 '듀트로노미'(Deutronomy)라 불렀으며, 한글 개역 성경 역시 이러한 의미를 따라 '신명기'라 부르게 되었다. 한편 혹자는 이러한 70인역과 라틴역, 그리고 영어 성경과 한글 개역 성경의 명칭이 신 17:18절의 '이 율법을 등사하여'라는 말씀을 오역한 것으로 설명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견해이다. 왜냐하면 분명 신명기의 율법이 레위기의 율법과 똑같은 것이 아니며 신명기가 '레위기의 후편이나 부록'은 아니라 할지라도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로 인해 시내산에서 주어진 첫 번째 율법의 수령자들이 거의 죽은 이때에 다시금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거룩한 생활의 준수를 강조하는 율법의 재강조가 필수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II. 저자 신명기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인 '모세'이다. 이에 대한 증거는 신명기 자체의 증거와(참조, 신 1:1, 4:44, 29:1, 31:9, 24) 신약의 증거(참조, 행 3:22; 롬 10:19; 고전 9:9) 예수님의 증거(참조, 막 7:10; 눅 20:28) 등의 성경적 증거와 그 외의 많은 고고학적 자료들에 의해 증거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이성적 비평가들은 신명기의 저자가 모세가 아닌 후대의 저작, 또는 후대의 편집이라 주장하여 성경의 증거에 도전하였는데 이러한 견해에 대한 논쟁은 곧이어 다루게 될 신명기의 모세 저작설 부분에서 자세히 거론하기로 하겠다. III. 수신자 신명기를 기록할 당시의 이스라엘은 가나안 국경에 도달한 상태였다. 이때는 이스라엘이 기쁨과 소망 가운데 출애굽한 지 40년이 지난 후였으며 따라서 가나안 지경에 도착했을 때의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열 재앙으로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시내산에서 최초의 율법이 주어질 때에도 그 언약에 참여하지 못한 어린 나이였거나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새로운 세대가 그들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가나안 땅으로의 입성을 앞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며 그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요구되었으며 그들을 깨우칠 율법의 재 반복이 필요했던 것이다. 신명기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 하에서 기록된 것이며, 이러한 이유에서 신명기의 대상자, 또는 수신자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아닌 광야에서 태어나고 광야에서 자라나 장차 약속의 땅 가나안을 유업으로 얻게 될 '새로운 세대'였다. IV. 기록 목적과 연대 1. 기록 목적 신명기의 기록 목적은 광야에서 출생하고 자라난 '제2세대', 또는 '새로운 세대'를 재교육하기 위한 것인데, 이러한 목적을 세밀하게 분류하면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역사적인 목적-신명기의 역사적인 목적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에서 나온 후부터 모압 평지에 이르기까지의 40년 광야 여정을 돌이켜 회고함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체결된 약속의 땅에 관한 언약이 어떻게 갱신되는가를 보이고자 함이었다. ② 교리적인 목적-신명기는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율법과 규례에 대한 재해석과 재강조이다. 이러한 재강조 속에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의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제시되고 있는데 그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서 신명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할 것'과 그의 '말씀에 복종할 것'을 수차례 강조하였던 것이다. ③ 기독론적 목적-신명기의 기독론적 목적은 신명기에 기록된 여러 가지 말씀들을 통해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 그리고 믿는 자의 구원에 대한 예표를 보여 준다는 것이다. 이렇듯 많은 그리스도의 예표들 중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 말씀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해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라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사역, 그리고 그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는 신 18:15절 말씀이다. 2. 기록 연대 신명기는 40년 광야 생활의 끝 부분, 즉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의 40년 방랑 생활을 마치고 모압 평지에 이르렀을 때에 기록되었다. 따라서 출애굽의 연대를 B.C. 1445년으로 생각할 때(출애굽의 연대에 관한 자세한 증거는 본서의 출애굽기 서론 중 '출애굽의 연대' 부분을 참조할 것) 신명기의 기록 연대는 B.C. 1405년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로는 그들의 최초로 받았던 시내산에서의 율법이 40년이 지난 가나안 땅으로의 입성 직전인 지금 다시 한 번 재 반복해야만 한다는 역사적인 상황과,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라는 31:24절의 말씀에 의해 증거된다. V. 신명기의 특징과 구조 1. 특징 신명기의 특징은 레위기와 민수기에서 언급된 율법의 재 반복 또는 재 강조이다. 그러나 신명기의 재 강조는 단순히 레위기나 민수기의 율법과 사건을 복사한 것이 아니라 레위기에 기록된 율법의 재해석과 민수기에 기록된 사건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으로 앞의 기록에 대한 보충 자료, 또는 증거가 되는데 이 점이 바로 신명기가 다른 성경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이다. 예를 들면 민수기에서 모세를 돕도록 장로들이 임명되었다는 단순한 기록을(참조, 민 11:16, 24, 25) 신 1:16, 17절에서는 모세가 이들에게 준 교훈이 보충 첨가되었으며, 민수기에 기록된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정탐 기록에 대해 신 1:19-23절에서는 정탐을 요구한 것이 백성들이었다고 좀더 분명한 상황 설명을 하였고, 민수기에서는 단순히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사실만이 기록되었으나(참조, 민 27:12-14) 신 3:23-26절에는 그 사건에 관련된 대화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신명기의 특징은 레위기와 민수기 내용의 재강조이지만 그것은 그 앞의 사건에 대한 좀더 정확한 상황 설명과 좀더 분명한 해설을 제공하는 오경의 결론이라는 점이다. 2. 구조 신명기의 구조는 크게 네 부분으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는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에 대한 회상과(1-4장), 둘째는 이스라엘이 받은 현재의 계명에 대한 재 강조(5-26장), 셋째는 미래를 좌우할 선택(27-30장), 그리고 넷째는 모세의 유언과 죽음이다(31-34장). 이러한 구조를 도표로 그려 보면 다음과 같다(참조, 신명기 도표1). VI. 신명기와 레위기와의 관계 신명기에 대한 가장 커다란 오해 중의 하나는 신명기가 '레위기의 부록', 또는 '복사판'이라는 오해이다. 이러한 오해는 신명기와 레위기의 유사점 때문에 비롯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유사점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레위기의 내용이 많은 율례와 규례들로 이루어졌을 뿐 사건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는데, 신명기 역시 레위기처럼 대부분 하나님을 섬기는 올바른 방법과 거룩한 백성이 지켜야 할 율례에 대한 기록으로 일관되어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신명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많은 율법들이 대부분 레위기와 비슷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레위기와 신명기에 이러한 유사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둘에는 전혀 다른 상이점도 존재하는데 주된 차이점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는 기록 장소의 차이이다. 레위기는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거하고 있을 때 주어진 것이고, 신명기는 그들이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진 치고 있는 모압 평지에서 주어졌는데, 시내산은 시내 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곳이요, 모압 평지는 사해 위쪽의 요단 강 건너편의 가나안 땅 맞은편으로서 그 기록 위치의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둘째는 이스라엘의 방랑 생활의 차이이다. 즉 레위기는 이스라엘의 방랑 생활이 시작된 것에 대한 예견이지만, 신명기는 광야에서의 방랑 생활을 종지부 찍고 가나안 땅으로의 입성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레위기가 주로 제사장이나 레위인 같은 성직자의 규례와 그들이 행해야 할 법도를 가르치고 있는 반면 신명기는 성직자보다도 일반인에 그 초점을 맞추어서 일반인이 지켜야 할 법도와 거룩한 생활을 가르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는 데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신명기가 레위기와 비슷한 내용과 비슷한 구조로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레위기의 부록이나 후편'이 아닌 이스라엘의 미래를 축복과 승리의 삶으로 이끌어가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으로서 레위기와는 엄격하게 구별된 독립된 정경이요 오경의 결론인 것이다. 제2부 신명기의 특별 주제들 I. 신명기의 저작설 신명기에서 가장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신명기의 저자가 모세인가 아닌가 하는 '신명기의 모세 저작설'에 관한 논쟁이다. 오경의 다른 네 권과 구약의 다른 책에 관해서도 저자에 대한 논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신명기의 저작설에 관한 논쟁이 제일 크게 대두되는 것은 신명기 안에서 모세의 저작이 아닌 후대의 편집처럼 보이는 부분이 가장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들을 가지고 현대의 이성적 비평가들은 신명기의 저자가 모세가 아닌 후대의 여러 저자들, 혹은 여러 문서들의 편집이라 주장하면서 모세를 신명기의 유일한 저자로 증거하고 있는 성경의 증거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해석은 후대의 편집처럼 보이는 말씀들을 그 당시의 상황과 환경에 적용시켜 해석하지 못하고 단순히 그 의미를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려 한 오류의 결과였다. 그러므로 신명기의 모세 저작설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러한 부분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 하는데 본문에서도 모세의 저작설을 증명하기 위해 먼저 신명기의 난해한 해석 부분들을 새롭게 해석 제공한 뒤 모세의 기록에 대한 성경의 증거들과 성경 외적인 증거들을 제시하여 신명기의 모세 저작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증명하고자 한다. 1. 후대의 편집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견해 1) 모세의 죽음에 대한 기록(신34장) 모세의 저작설을 부인하는 자들의 가장 강력한 주장은 모세의 사망을 기록한 신 34장의 내용이다. 그들은 만약에 모세가 진정한 신명기의 저자였다면 어떻게 자신의 죽음과 그 후의 일에 대해 기록할 수 있겠느냐고 주장하면서 모세의 죽음과 그 후에 대한 기록은 모세 이후에 기록된 것이 틀림없으며 따라서 신명기는 모세의 기록이 아니라 후대의 기록을 편집한 편집물이라는 것이다. 2) '요단 저편'(신1:1) 모세의 저작설을 부인하는 자들의 두 번째 근거는 신 1:1절의 '요단 저편'이라는 표현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모세와 이스라엘이 도착한 모압 평지에서 바라본 '요단 저편'은 요단 강 건너편의 땅, 즉 가나안을 의미하며 따라서 신명기의 저자 역시 '요단 저편'의 가나안 땅에 거하던 거주민이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한 후 거기서 태어난 후대의 이스라엘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3) '오늘날과 같으니라'(신 2:30) 모세의 저작설을 부인하는 자들의 세 번째 주장은 신명기에 여섯 번씩이나 기록되어 있는 '오늘날과 같다'라는 표현이다(참조, 신 2:30; 4:20, 38; 8:18; 10:15; 29:28). 그들은 '오늘날과 같다'라는 표현을 후대의 사람들이 과거의 역사를 살펴볼 때 과거의 역사가 현재의 역사와 동일한 상태임을 발견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이 본서에 여섯 번씩이나 강조되어 반복된 것은 본서 신명기의 저자가 모세가 아닌 후대의 역사가, 기록자라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는 것이다. 2. 후대 편집설에 대한 반증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후대의 편집설을 지지하는 듯한 위의 세 구절들은 어떠한 관점에서 해석하는가에 따라 후대의 편집설을 주장하는 말씀들이 될 수도 있고, 정반대로 모세의 저작설을 주장하는 말씀들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관점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문자적 해석을 초월하여 신명기가 쓰여질 당시의 상황이나 풍습, 그리고 고고학적 증거까지도 참조하여 해석하는 해석의 차이이다. 이제 이러한 해석들 중 성경을 보다 넓고 심오하게 해석하는 후자의 견해를 가지고 위의 말씀들을 새롭게 해석함으로 후대의 편집설에 대한 오류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신 34장에 대한 새로운 견해 먼저 신 34장의 해석을 살펴보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 34장에 대한 보수주의의 견해는 '모세의 예언적 저술'이라는 설명이었다. 즉 모세가 자기의 죽음을 예견하고서 자신의 죽음과 그 후에 되어질 일들에 대해 예언적으로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이러한 입장보다도 대다수의 보수주의 역시 신 34장의 기록만은 모세의 기록이 아님을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왜냐하면 신 34장의 기록은 모세의 죽음뿐만 아니라 모세의 죽음 이후의 일, 즉 모세의 장례와 백성들의 애통함, 그리고 여호수아의 영도 하에 가나안으로 전진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에 관한 일들까지도 모세의 예언이라고 보기에는 그것이 너무도 생생하고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 34장의 기록은 아무리 봐도 모세의 기록이나 예언적 서술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우며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기록하여 첨가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듯 신 34장의 기록이 모세의 기록이 아니라 해도 신명기 전체를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 34장의 기록은 어떤 위인의 마지막 작품에 그의 사망 기사를 첨가시키는 매우 관례적인 풍습에 따라 기록된 기록이었는데(Gleason Archer). 이러한 습관은 현대에도 시행되어 위인의 전기나 유명한 저술의 뒤에는 언제나 작가에 대한 프롤로그나 그의 사망, 그리고 그와 관련된 그 후의 일들에 대한 약간의 언급이 뒤따르는데 그러한 기록이 뒤에 삽입되었다고 해서 그 책의 원저자가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비록 신 34장의 기록이 모세의 기록이 아닌 여호수아의 기록이라고 해서 신명기에서 제외시키거나 성경에서 제외시킬 수는 없는데 그것은 신 34장 역시 성령의 영감하에 쓰여진 성경의 한 부분이며 신명기의 끝맺음과 오경의 결론을 위해 가장 적당하고 없어서는 안 될 유익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신 34장의 기록이 모세가 아닌 여호수아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모세의 저작설에 대한 반박 증거가 될 수는 없다. 2) '요단 저편'이라는 표현에 대한 새로운 증거 모세의 저작설을 부인하는 자들에 의하면 '요단 저편'이라는 말은 당연히 '가나안 땅'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요단 저편'이 꼭 '요단강의 저편 쪽'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은 때로 어떤 지역을 칭하는 고유명사를 뜻하기도 하였는데 '요단 저편'은 일찍이 팔레스틴 원주민에 의해 모압 평지에 붙여진 이름이었으며, 동시에 모압 평지에 거하는 주민들에 의해서도 모압 평지가 '요단 저편'이라 불렸었다(정규남, '구약개론', 개혁주의 신행협회, 1986, p. 186). 이러한 사실은 고대 시대에만 통용되던 사실이 아니라 신약 시대 역시 그러한 의미가 사용되어 신약 시대 때에도 모압 평지의 거주자들에 의해 '저편 땅'(Peraea)으로 불리웠다(Archer, 'A Survey of Old Testament Introducion, Moody Press, 1980, p. 256). 그러므로 '요단 저편'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모압에서 바라본 '요단 저편', 즉 가나안 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압인들이 살고 있던 모압 지역 자체를 의미하는 지명이기도 하며 따라서 '요단 저편'이라는 표현 때문에 신명기의 기록자를 모세가 아닌 '가나안 땅의 거주자, 또는 가나안을 정복한 후대의 이스라엘인에 의한 편집'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는 학설이다. 3) '오늘날과 같다'는 말에 대한 반대 해석 모세의 저작설을 부인하는 자들은 '오늘날과 같다'는 표현을 '후대의 저자가 신명기의 사건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동일함을 발견하고 기록한 표현'으로 해석, 신명기의 후기 편집설에 대한 강력한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신명기의 나타난 여섯 번의 표현 모두를 모세가 40년 광야 생활을 회고하는 당시의 상황과 부합시켜 볼 때 이러한 표현은 40년 광야 생활을 회고하는 당시의 상황과 부합시켜 볼 때 오히려 이러한 표현은 40년 광야 생활을 마친 모세가 자신과 이스라엘의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40년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셨던 축복의 약속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는 모세의 모습과 너무나도 잘 일치됨을 발견할 수 있다. 즉 2:30절의 '오늘날과 같다'라는 말씀은 시혼을 정복하는 일이 모세의 임종시까지 계속됨을 뜻하며, 4:20절의 '오늘날과 같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받았던 축복의 약속이 끊이지 않고 계속됨을 가리키는 등 신명기에 나타난 여섯 번의 모든 경우가 이스라엘이 겪었던 40년 광야 생활의 연속성과 계약의 연속성에 관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다'라는 표현이 후대의 자작설에 대한 증거라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는 학설이다. 3. 모세의 저작에 대한 성경적 증거 신명기가 모세의 저작임을 밝히는 성경적 증거는 매우 많은 곳에 산재되어 있으며 그러한 증거들은 모두 신명기가 모세의 저작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들이다. ① 신명기 자체의 증거-신명기의 모세 저작에 대한 성경의 첫 번째 증거는 신명기 스스로의 자증이다. 즉 신명기에는 분명히 '이는 모세가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라고 증거하여 모세의 저작에 대한 불필요한 논쟁을 금하였던 것이다(참조, 신 1:1; 4:44; 29:1; 31:9, 24). ② 예수님의 증거-예수님 역시 신명기를 분명한 모세의 글로 인정하심으로 신명기의 모세 저작설에 대한 확실한 판결을 내리셨다(참조, 막 7:10; 눅 20:28). ③ 신약의 증거-신명기를 인용한 신약은 신명기를 모세의 율법, 또는 모세의 글로 증거하였다(참조, 행 3:22; 롬 10:19; 고전 9:9). ④ 여호수아의 증거-신명기의 저자가 모세라는 사실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 의해서도 증거되었는데 모세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고 받들었던 그는 신명기에 대해 '모세가 자신에게 명한 글'이라고 증거하였다(참조, 수 1:7) ⑤ 구약의 다른 부분의 증거-구약성경의 다른 부분들 역시 신명기를 모세의 글로 인정하였다(참조, 삿 3:4; 왕상 2:3; 에 3:2; 느 1:7; 시 103:7; 단 9:11; 말 4:4). 4. 저작설에 대한 결론 오경의 저자는 모세이다. 예수님 역시 신명기의 저자가 모세임을 증거하셨다. 따라서 신명기의 저자가 모세임을 거부하거나 후기의 편집설을 주장한다면 종국에는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적 무능이나 불완전함을 주장하며 인정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명기에 대한 모세의 저작설은 성경의 증거 그대로 증거되어야 하며 또한 지켜져야 한다. II.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여정 신명기는 오경의 결론적인 책이다. 오경의 결론을 내리는 사건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중 한 가지가 출애굽에서 시작한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이 모압 평지에서 가나안으로의 입성을 준비함으로 광야 생활의 종지부를 찍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명기 연구에 앞서 그들이 지나온 광야 여정과 그 각각의 장소에서 일어났었던 독특한 사건들을 정리해 보는 것도 신명기 연구와 오경 전체에 대한 연구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이며 이제 이러한 목적 하에서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을 총 정리해 보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1. 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일반적인 경로 원래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나아가는 일반적인 행로는 세 가지였다. 그 첫째는 고센을 거쳐 블레셋 사람들의 땅을 통과하여 지중해를 끼고 북상하는 길이었으며, 둘째는 고센 지방에서 숙곳을 우편으로 바라보며 술 광야의 중심부를 통과하여 가나안의 중앙 부분을 통과하는 길이었고, 셋째는 '온'(On)을 출발하여 수에즈만의 북단을 거쳐 시내 반도의 중앙부를 통과 아카바만으로 직행하는 길이었다. 이중에서 세 번째 길, 즉 시내 반도를 통과하는 길은 애굽 사람들이 시내 반도에서부터 '동광석'을 얻어 들일 목적으로 개설한 일종의 산업 도로였다. 한편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향하는 가장 가까운 길은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가는 길'이었으나 그 길은 곳곳에 애굽 군대가 배치되어 있는 길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 길로 인도하시지 않고 '숙곳'쪽으로 남하시켰다(참조, 출 13:17).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는 비록 행로에 약간의 어려움은 따르겠지만 애굽 군대의 추적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기 위한 것이었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러한 세 가지의 경로를 모두 피하여 광야로 인도하셔서 그들의 첫 야영지를 '광야 끝 에담'에 정하게 하셨다(참조, 신명기 도표2) 2. '에담'으로부터 '시내산'까지 '에담'을 출발한 이스라엘은 바로와 그 군대가 홍해에 수장되는 하나님의 기적 속에 홍해를 건넌 후 '마라'와 '엘림', 그리고 '신 광야'와 '르비임'을 통과하여 그들의 첫 번째 정착지인 시내 광야에 도착하였다. 이러한 첫 번째 여행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사건 중 제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사건은 홍해에서의 기적적인 구원이다. 홍해를 건넌 곳에 대해서는 '갈대 바다', '쓴 호수', '수에즈만의 위쪽 부분'의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이중에서 성경의 여러 가지 묘사와 가장 정확하게 일치하는 장소는 '수에즈만의 위쪽 부분'이라는 학설이다(홍해의 도하 장소에 대한 보다 자세한 언급은 본서 출애굽기의 서론 중 '홍해에 관한 고찰' 부분을 참조할 것). 다음으로 그들이 도착한 곳은 '마라'였다. 거기서 이스라엘은 쓴 물 때문에 여호와께 원망하였으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쓴 물을 달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의 갈증을 해결하여 주셨다(참조, 출 15:22-26). 하지만 '마라'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과는 달리 이스라엘이 최초로 원망을 시작함으로 그들의 불행스런 미래를 예견하게 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시내산까지의 여행 중 기억해야 할 만한 세 번째 사건은 '신 광야'에서 이루어졌다. 즉 이스라엘이 음식으로 인해 또다시 하나님께 원망을 늘어놓자 그들의 불평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늘의 양식인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셨는데 만나는 이후로 그들의 40년 광야 생활 동안 안식일을 제외하고는 단 하루도 어김없이 내리심으로(참조, 출 16장), 후에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몸을 제공하신 영원한 양식,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예표가 되었다(참조, 요 6:32-35). '신 광야'를 떠난 이스라엘이 최초로 전쟁을 치른 장소가 바로 '르비딤'이었다(참조, 출 17:8-16). 하지만 르비딤에서 기억해야 할 또 다른 한 가지 사건이 있으니 그것은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한 기적적인 사건이었다(참조, 출 17:1-7). 즉 이스라엘이 르비딤에 도착한 후 물이 없어 또다시 하나님께 원망을 털어놓자 하나님은 이번에도 긍휼을 베풀어 그들에게 반석으로 물을 공급하셨고, 후에 아말렉과의 싸움에서도 그들을 기적적인 역사로 보호하여 주셨던 것이다. 시내산까지의 여정 중에서 기억해야 할 마지막 사건은 시내 광야에서의 일이다. 이곳에서는 약 1년 3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수여 받았고(그중 대표적인 율법은 십계명임) 성막을 건축하였으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한 최초의 구체적 범죄도 시행되었으니 그것은 금송아지 우상의 사건이었다(참조, 출 32장). 그리하여 비로소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그들을 모두 멸하려 하셨으나 그의 긍휼로 인하여 이스라엘 광야 여정은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3. '시내산'에서부터 '가데스 바네아'까지 율법을 받고 성막을 건축한 '시내산'을 출발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여정은 '다베라'와 '기브롯 핫다아와' 그리고 '하세롯'과 '에시온 게벨'을 거쳐 그들의 두 번째 정착지인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두 번째 여정은 '이스라엘의 불평'과 '하나님과의 진노'의 연속으로서 이스라엘이 보인 불신앙의 정점은 그들이 첫 번째 정탐꾼을 보낸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사건이었다. 이제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장소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다베라'-여호와의 불이 임한 곳(민 11:1-3). 비록 금송아지 사건으로 하나님께 범죄 하여 삼천 명 가량 죽은 비극이 있었지만 시내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 관계를 유지하여 그들의 정성어린 충성과 헌신으로 성막이 완성되고 성막과 레위인, 그리고 성결에 관한 모든 법률을 수여 받으므로 축복과 기쁨의 생활이 계속되었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의 생활을 뒤로 하고 가나안을 향해 다시금 광야 생활이 시작되자 그들의 불평은 다시 시작되었고, 그러한 불평이 '다베라'에 이르자 드디어 표면으로 노출되어 나타났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불'을 보내어 그들의 진 끝을 사르게 하셨으나 모세의 중재 기도로 자신의 진노를 돌이키셨다. 그런데 이러한 '다베라에서의 사건'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은 시내산까지의 하나님과는 달리 '다베라'에서부터는 이스라엘의 불평에 대한 즉각적인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다는 점이며, 그 불평의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진노 역사 사람의 생명까지도 상하게 하는 형벌과 그렇지 않은 형벌로 나누어 심판하셨다는 점이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신 이유는 '다베라'에서부터의 여정은 그들이 지켜야 할 성결의 법이 주어진 후였기 때문이다. 2) '기브롯 핫다아와'-탐욕의 백성들을 장사한 곳(민 11:4-35) 한 번 시작된 이스라엘의 불평은 그 도를 더해 가서 그들의 불평은 이제 점점 구체화되었고 악랄해져 갔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는 동시에 탐욕으로 원망하던 자들에게는 그 고기를 먹지도 못한 채 죽음을 당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실감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그들의 광야 여정은 점점 더 무가운 발걸음으로 변해가기만 하였다. 3) '하세롯'-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여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린 곳(민12:1-16). 지금까지의 불평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양식으로 인한 불평이었으며, 그 대상도 모세가 아닌 하나님이었고 불평한 자들 역시 이스라엘 전체였다. 그러나 '하세롯'에서의 불평은 그 성격이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즉 불평의 원인부터 그 성격이 지금까지의 불평과는 매우 특이하여 양식으로 인한 불평이 아니라 '모세의 권위에 대한 불평'이었고, 그 대상도 하나님이 아닌 '모세'였으며, 불평하는 자도 이스라엘 전체가 아닌 모세의 형제들인 '미리암과 아론'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평의 특징은 그들의 불평이 단순한 의식주의 문제에서 '권세와 권위로 확장'되었음을 뜻하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불평과 도전에 대해 미리암의 문둥병 사건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언으로 일축해 버리셨다. 4) '가데스 바네아'-첫 번째 정탐을 실시한 불행의 장소(민 13:1-20:21). 하세롯을 떠난 이스라엘은 '에시온 게벨'을 거쳐(참조, 민 33:35, 36). 그들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땅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다. 이곳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절정을 이루었던 곳으로 가난으로의 정탐과 고라의 반역,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붉은 암송아지의 제사, 그리고 모세의 범죄가 이루어진 장소였다. 이중에서 '가나안의 정탐과 불신앙적인 보고를 인한 이스라엘의 불행한 결과'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통해 아론의 직위를 확실하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 그리고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불신앙' 등이 가장 기억해야 할 만한 사건들이었다. 이렇듯 '가데스 바네아'는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진노가 교차되었던 불행의 장소였다. 4.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압평지'까지 불평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불행의 땅 '가데스 바네아'를 떠난 이스라엘은 '에시온 게벨'로 되돌아온 후 '부논'을 거쳐 '아바림'을 통과 '느보산' 옆 모압 평지에 진 침으로 그들의 40년 광야 생활을 마감한다. 이러한 그들의 세 번째 여정에 대한 특징은 한 마디로 가나안 입성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는데 그 준비 과정은 다음의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1) 가나안 입성을 위한 첫 번째 준비-'세대교체'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대부분 축복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불평과,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의 절정인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죄악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저주를 임하게 하였으니 그것은 애굽에서 나온 자 중에서 이십 세 이상 계수함을 입은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제외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저주였다. '가데스 바네아'에서부터 '모압 평지'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세 번째 광야 여정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저주가 실현되는 기간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씩 둘씩 쓰려져 갔고, 이스라엘 최초의 대제사장이었던 모세의 형 '아론' 역시 '호르산'에서 죽었으며(참조, 민 20:22-29), '모세' 자신도 '느보산'에서 요단 강 건너편의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여호와께로 소천되므로(참조, 신 34:1-8) 가나안 땅으로의 입성을 위한 '세대교체'는 완벽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2) 가나안 입성을 위한 두 번째 준비-새로운 세대를 위한 율법의 재 강조 '가데스 바네아'에서부터 '모압 평지'까지의 여정을 통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준비는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의 법을 잊지 않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율법의 재 강조'였다. 신명기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율법의 재 강조는 '시내산'에서 주어진 최초의 율법 수령자들이 40년 광야 생활에서 모두 죽게 됨에 따라 그들의 율법 준수에 대한 개념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새로운 세대'를 위한 율법의 재 강조가 필요했고, 그러한 작업이 가나안 입성 직전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율법의 재 강조와 함께 그들은 두 번째 인구 조사, 즉 새로운 세대의 인구 조사를 실시함으로 광야 40년 동안 그들이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과 그로 인한 자신들의 변화된 모습을 새로이 깨달아 하나님만을 향한 경외심으로 가득한 채 드디어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두게 되었던 것이다. 3) 가나안 입성을 위한 세 번째 준비-가나안 주변 부족들에 대한 정복과 가나안 땅의 분배 '가데스 바네아'로부터 '모압 평지'까지의 세 번째 여정은 '이스라엘의 광야 전쟁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전쟁이 많았다. 사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하여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기까지 오직 '아말렉'과 단 한번의 전투만 치렀을 뿐(참조, 출 17:8-16) 그 이후에는 단 한번도 전투를 치르지 않았다. 그러나 '가데스 바네아를 출발한 이스라엘은 '아랏'과의 전투를 시작으로 하여(참조, 민 21:1-3) '시혼'과 '옥'의 정복(참조, 민 21:10-35). 그리고 '미디안을 정복'(참조, 민 31:1-54)하기까지 많은 전투를 치르며 가나안 지경까지 전진해 나갔던 것이다. 이렇듯 많은 전투를 치르며 요단 평지까지 이른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을 위한 지시'와 (참조, 민 33:50-56) '가나안 땅의 분할을 위한 지시'를 (참조, 민 34:1-36:13) 받음으로써 '가나안 입성'을 위한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5.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에 대한 결론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여정에 대한 정확한 경로를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가데스 바네아'외에는 그들이 머물렀던 장소들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고, 그들이 가나안까지 나아갔을 것으로 추정한 본문의 노정 역시 중간에 많은 장소들이 생략되거나 삽입된 것이기 때문이다(참조, 민 33:1-49). 그러므로 우리가 추정해 낼 수 있는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은 단지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기록되어 있는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기록에 의존하여 만들어지는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 지도나 도표' 역시 하나의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이 불투명한 장소를 추정하여 그려낸 것이라 해도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나타난 그들의 광야 여정만으로도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충분히 계시되고 보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광야 여정을 연구하는 우리의 자세는 그 정확한 위치와 경로에 대한 추적보다도 그들의 광야 여정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구원의 도는 어떠한 것인가를 연구하고자 하는 자세이다. 이제 이러한 전제 하에서 그들이 여행했던 경로에 대한 도표와 지도를 작성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위의 도표는 출애굽기와 민수기의 내용에 따른 도표로서 이것이 이스라엘 40년 방랑 생활의 도표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이 여행한 전부라고 볼 수는 없다. 위의 도표 사이사이에는 좀더 많은 경유지와 정착지가 있으나(참조, 민 33장), 대부분의 장소에서는 특이할 만한 사건이 없었으므로 위의 도표에 의한 추정 경로를 생각하여도 그리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다. III. 신명기와 우상 숭배 신명기의 주된 목적은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광야에서 태어나고 자란 '새로운 세대'를 교육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신명기의 대부분은 이스라엘의 성결을 위한 법률이었는데 그중에서 특별히 그들의 영적 성결을 보존하기 위한 우상 숭배 금지의 명령은 강조된 율법이었다. 이제 이러한 우상 숭배에 대해 고찰해 보되 먼저 우상의 정의와 우상 숭배의 여러 형태, 그리고 여러 가지 우상들의 비교와 우상 숭배를 금지한 이유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 우상과 우상 숭배의 정의 '우상'을 뜻하는 히브리어 <ls,p, ; 페셀>은 '자르다', '조각하다'라는 뜻으로 '조각된 형상'을 뜻한다. 그러므로 '우상'이란 나무나 돌 금속 등의 물질에다가 형상을 새긴 것을 말하며, 그러한 형상에 절하고 그것을 경배하는 일을 '우상 숭배'라 한다. '우상'은 만드는 방법에 따라 '조상'과 '주조상'으로 구분되는데 '조상'은 '깎아 만든 우상'을 말하며, '주조상'은 '쇠붙이를 녹인 다음 형틀에 부어 만들어 낸 우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형상에 절하고 경배하는 우상 숭배는 '인간적 욕망과 욕구가 형상화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비록 우상이 여러 가지 모양과 크기로 만들어졌다 해도 대부분이 인간의 형상을 닮아 제조되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즉 인간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그 자신을 신뢰하였으며, 비록 우상에게 절하고 경배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기는 하지만 실제적인 우상 숭배의 의미는 '자아 숭배(Self-Worship)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만은 현대의 신학자들은 '우상'의 개념을 단순히 '조각된 형상'의 범위에서 초월하여 '하나님보다 더욱 의뢰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확대시켰으며, 이러한 인간의 교만을 허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조상'이건 '주조상'이건 어떠한 형태의 우상 숭배도 용납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영적간음' 으로 정죄하셨던 것이다(삿 2:11-17; 겔 16:15-43). 2. 고대 여러 나라의 우상 숭배 우상 숭배는 고대 동양으로부터 행해졌는데 그들이 행한 우상 숭배는 철저하게 범신론적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연 만물과 자연의 신기한 능력들을 모두 신으로 간주하여 섬겼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태양', '달', '별', '불'과 '천둥', '번개' 등이었다. 그들이 이러한 자연 만물을 신으로 간주하게 된 것은 이러한 대상들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제 고대의 여러 국가들이 행한 여러 가지 우상 숭배에 대해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바벨론 바벨론이 섬겼던 여러 가지 우상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으나, 그들 역시 많은 신들을 섬겼음이 틀림없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들이 섬긴 신 중의 대표적인 신이 '달'을 섬기는 '월신' 인 '신'(Sin)이었는데, 그들은 이 '월신'을 경배하기 위해 독특한 신전과 '지구랏'(Ziggurat) 등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한편 혹자는 이러한 바벨론의 우상들이 이스라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서 아브라함 역시 이러한 '월신'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기 전에 이러한 우상을 섬겼고, 그의 아들 이삭을 기꺼이 희생 제물로 바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이방의 인신제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 주장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반박하는 일조차 쓸데없는 시간 낭비에 불과한 망상이다. 2) 수메르 고대의 수메르인들은 '만신전'의 신들이 우주를 주관하여 다스린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섬긴 중요한 신들은 '안'(An), '키'(Ki), '엔릴'(Enlil), 그리고 '엔키'(Enki) 등으로, 이들을 각각 하늘과 땅과 공기와 물을 주관하는 신으로 생각하며 경배하였다. 3) 메소보다미아(메소포타미아) 메소보다미아인들이 섬긴 신은 약 1500여 종에 이르렀는데 그중에 널리 알려진 신은 '사마쉬'(Shamash), '말둑'(Marduk), '신'(Sin), '이쉬탈'(Ishtar) 등이다. 이들 중 특히 '다산의 신'인 '이쉬탈'(Ishtar)은 널리 숭배되었는데 메소보다미아인들에 의하면 그녀의 사랑은 너무도 강렬하여 그녀의 남편인 '탐무쯔'(Tammuz)를 찾으러 지하 세계에 내려갔다고 전한다. 이 외에도 과학과 학문의 보호자인 '나부신'(Nanu), 전쟁과 사냥의 신인 '네르갈신'(Nergal)이 숭배되었다. 4) 이집트 고대 애굽의 우상 숭배는 다신교적인 동시에 범신론적이었으며 혼합적이어서 매우 복잡하였다. 먼저 다른 나라와 같이 애굽의 우상 숭배 역시 범신론적인 것이어서 모든 만물을 '신'으로 섬겼는데, 그들이 주로 섬긴 신들은 '태양신'인 '라'(Ra)와 '호루스'(Horus), '물의 신'인 '슈'(Shu), '달의 신'인 '톧'(Thoth) 등이 있었으며, 악어의 일종인 '크로코다일'의 모양을 한 '소벡신'(Sobek)과 '재칼'(여우와 늑대의 중간형)의 머리를 가진 '야누비스'(Anubis) 신도 있었다. 또한 농업을 중요시하였던 애굽인들은 농경의 보호신인 '오시리스'(Osiris)와 생산의 여신인 '이시스'(Isis)와 같은 신들도 섬겼으며, '오시리스'와 '이시스', 그리고 '호루스'로 이루어진 혼합적인 신도 있었다. 이집트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애굽의 왕을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으로 간주하여 왕 역시 신과 같은 예우와 대우를 받았다는 점이다. 5) 가나안 가나안의 우상들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위험을 염려하여 본서 신명기는 가나안이 끼칠 위험한 악영향에 대하여 심각하게 경고하였을 뿐만 아니라(참조, 신 7:4; 20:18), 그 땅의 모든 거민들을 멸하라고 했으며(참조, 신 7:1-5) '산당과 아세라 목상과 주상과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없애라고 했던 것이다(참조, 신 12:2, 3). 가나안 거민들이 주로 섬겼던 우상들은 하늘의 신인 '엘'(El), 폭우와 번개의 신인 '바알'(Baal), 다산의 여신인 '아스다롯'(Astarte), 풍부한 결실의 상징이자 '엘'(El)의 배우자인 '아세라'(Asherah)신 등이었다. 이들 중 이스라엘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우상이 '바알'과 '아세라'신이었는데 이들 신은 열왕기 시대를 거쳐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이스라엘에 의해 숭배되던 우상들이었다. 3. 여러 나라의 우상들에 대한 비교 비록 고대의 여러 나라들이 섬겼던 우상들의 이름과 모양은 달랐다 할지라도 그들이 형상화시킨 우상의 대상과 그 의미는 모두 일맥상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여러 나라들의 우상을 비교 검토해 보면 많은 유사점과 일치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러한 사실을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위의 도표는 'C. F. 파이퍼'(C. F. Pfeiffer) 박사의 '오경'에서 발췌한 것으로, 이 사이에는 좀더 많은 우상들의 유사성을 찾아내 삽입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각각의 우상들이 상징하는 것들 역시 정확하게 일치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정확도와 상관없이 각각의 우상들이 뜻하는 바가 서로 일맥상통하므로 한데 묶어도 별 문제는 없다. 4. 우상 숭배의 금지 이유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금지하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우상 숭배의 죄악이 천지와 우주 만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배반'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교만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그 길은 멸망과 저주의 길임을 분명히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자들이 축복과 영생의 길로 들어서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를 금하신 하나님의 본질적인 목적은 '자신의 백성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http://cafe.daum.net/oknjc |
신명기(םירבד; Deuteronomy) 신학적 연구
신명기는 한 마디로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이제 요단강을 눈 앞에 두고 모압광야에서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행한 연설이다. 모세는 옛세대의 대표이자 마지막 인물로서, 광야에서 멸절되도록 되어있는 마지막 사람이므로 모세의 설교는 광야여행의 마무리장이라 하겠다. 또 신명기는 모세의 죽음으로 끝나므로 모세의 유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별설교(Fareuall Adress) : 요 15장의 예수님의 고별설교, 여호수아 24장의 고별설교 = 여호수아는 언약갱신으로 끝난다. 모세의 고별설교도 신 29장에 언약갱신(Covenant Renewal)으로 끝남으로써 같은 구조적 흐름이다.
신명기의 핵심적 단어들을 빼낸다면,
① לארשׂי עמשׁ(샤마 이스라엘) - 너희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רחא 한 분(대문자로 기록함)
② רכז(자칼) 기억하라 현재를 의미함 התע(아타)
과거를 상기하는 표현 הרות(토라; 하나님의 율법을 들으라)
− עמשׁ는 다시 말하면 exaltion(권고, 권면)이다.
− רכז는 과거를 되살리는 의미인데 그 사건은 지금에도 동일한 의미가 있다는 것 - 과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따라서 עמשׁ와 רכז는 같은 의미이다.
실존주의적 의미에서 과거를 되살리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그들은 과거 역사의 자체로서의 의미는 없고 나와 관계될 때만 의미가 있다고 하며 사실적 연결은 무시해 버린다. 과거와 나와는 인과적 법칙에서만 뿐이고, 그 의미는 내가 과거를 받아들이는 결단에서만 온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과거를 과거로서 끝맺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오늘도 그 의미와 효과가 있음을 알도록 하시는 것은 עמשׁ와 רכז로 말해진다. ‘과거를 배우라’고 한다 - 과거의 교훈.
과거에서 무엇을 배운다는 말은 과거가 오늘과 연결된 것이라는 것이다. 역사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본다면 과거역사의 하나님 통치 원리가 근본적으로, 동질적으로 오늘 역사의 원리가 된다는 것이다.
실존주의는 주관적 결단으로서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우리는 객관적 사실로서의 과거 역사가 오늘 역사의 의미의 key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가 기계적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향한 하나님의 뜻이 변함없이 이루어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인간이 참여하는 방식은 믿음과 기도와 인격적 만남이고 하나님께서는 허락, 부여해 주시는 것에 불과하다.
1장 רבעב(베아바르) - 동편, 요단 동편은 아직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이라는 것.
광야 - 아라바(홍해 맞은 편 ףוס םי;임 슈프
절은 요단 동편을 가리키는 아라바 같은데 1절 하반절은 사해 및 아라바를 말한다. 하세롯, 라반, 도벨 등은 광야 전체를 말하므로 신명기는 그렇다면 요단 동편에서만 한 유언이라고 보기보다는 광야생활 전반에 걸친 모세의 이야기 같이도 보인다. 그러나 모세는 요단 동편에 서서 아직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실이 광야 전체의 생활을 회상할 수 있는 배경으로 된다고 한다. 아직 들어가지 못한 것은 아직도 광야생활임을 말하는 것이다. 광야 전체의 삶이 배경이 되는 것은 2절에 나오는 말로 보면 자연스럽다. ‘호렙에서 세일까지 가데스바네아까지는 열 하룻 길이다’
3절은 제 40년 11월 그달 1일이라고 함으로써 11일이라는 기간과 40년이라는 기간을 대조하여, 왜 이런 기간이 많이 필요했는가를 기억하게 한다(너무나 대조적인 기간이다). 이것은 광야여행의 의미와 교훈을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즉 광야여행의 종장으로서 그 모든 과거사건을 돌아보고 그것의 의미를 알려주고자 함이다.
4절은 시혼과 옥을 쳐부수고 난 후의 일을 말한다. 이는 약속의 땅 정복의 시작이며 예비적 성취이다. 민 21장의 발람의 예언의 의미는 이스라엘의 미래의 축복(약속의 땅 정복)이며 승리를 확인하는 것이다. 신명기에서 시혼과 옥을 승리한 것(정복의 역사)을 첫 서술한 것은 앞으로 올 정복과 승리의 역사를 내다보는 의미가 있다.
1-3절은 retrospect(과거의 회상) - רכז이고
4절은 현재의 전망(권고 - Ermahunung) - התע עמשׁ(샤마 아타) 이어 권고의 핵심은 율법해석이다(5절).
− (과거)רכז(기억하라) − − 하나님의 의미 − 과거− 하나님의 주체(율법)
− (지금)התע עמשׁ(들으라) − הרות(율법) − 현재− 통치원리
광야여행에서 배운 교훈의 핵심은 순종 = 생명, 불순종 = 죽음이다. 신명기가 율법을 remind하는 이유가 순종→생명, 불순종→죽음이기 때문이다.
8장 순종하면 살리라. 지켜 행하면 살고, 번성하고 얻으리라. 만나 주신 이유 = 사람이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 육신적인 생명을 포함한 전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에 달린 것(순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기준이 될만큼 너무나 중요하다.
13장 여기서 선지자가 예언의 성취를 시행하더라도 다른 신을 섬기자고 하면 때려 죽이라고 함. 이 말씀에 대한 중요성은 12:32절(원문 13:1)에서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말을 지켜 행하고 가감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앞으로 올 계시(revelation)와의 unit로 이해해야 될 것을 말한다 = ‘계시의 동일성’(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
모세가 그의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하는데 하나님의 율법을 설명한다는 사실은 율법준수가 이스라엘의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29장에는 언약갱신을 하며 축복과 저주를 눈 앞에 둔다고 한다. 그런데 31:27-30절에 보면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제시해 놓고 언약의 파기를 할 이스라엘을 예언하고 있다. ‘너희가 스스로 הוהי의 길을 떠나서 악을 행할 것이라’고 한다.
* 성경에 나타난 “비관주의”(passimism)
선지서나 마찬가지로 모세는 비관주의로 말한다. 이것은 비관으로 끝나는 비관주의인가? 그것은 더 온전함을 기다리는 자신의 연약성을 바라보는 소망의 비관주의이다. 그것은 선지서에서도 계속 나타난다. 예레미야나 이사야는 현실에 대해 아주 비관적이고 절망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 나은 상태, 온전한 구원을 기다리는 기대감이다. 지금 상태의 불완전함과 앞으로 올 완전함을 대조하여 말한다. 오히려 이것은 미래지향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사상이 이스라엘 구원의 초장부터 나타난다. 하나님 백성의 역사를 배경으로 나타났다(시내산 언약에서의 금송아지 사건). 이것은 완전한 구원(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바라보게 하는 배경적 사실이다. 선지서는 그런 점에서 새로운 계시가 아니고 신명기 32장의 연속인 것이다.
신명기의 구조는 곧 설교구조와도 상통한다. 과거를 기억하게 하고 현재에 권면하는 것이 설교style 같다. Von Rad는 그래서 신명기를 ‘설교’라고 취급한다. 후대 왕국의 레위계통의 설교라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신명기의 기본 테마는 ‘권고’이며 언약수립으로 끝난다(모세). 이것은 여호수아의 경우와 사무엘의 경우 그리고 예수님의 경우에서도 일치된다. 고별설교와 성만찬의 새언약으로 끝나는 것이다.
− 신 명 기 - 언약(신 29장)
「권고 → 언약수립」 여호수아 - 언약(수 24장)
− 예 수 님 - 새언약(요 15장)
신명기의 구조와 신학
(땅의 완성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성취)
도 입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구조적으로 복잡하고 신학적으로 깊은 책이 신명기다. 신명기의 이러한 특성은 신명기 연구의 복잡성 혹은 난맥성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이런 난관을 뚫을 수 있는 연구의 기초는 아무래도 신명기 자체 속에 있다기보다 신명기와 가장 유사한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 특히 출 19-24장과의 관련성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두 책의 상관성은 오래 전부터 세 가지 관점에서 인식되었다 : 법, 신학, 구조.
첫째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법의 상관성이다. 전체적으로 이 두 법체계는 (출 21-23장, 신 12-26장) 내용적인 유사성이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다. 물론 일반적이고 거친 면이 있는 출애굽기의 법에 비해서 신명기의 법은 예민하고 구체적이며 대단히 설득적이다.
둘째로, 법적 차원의 근본적인 내용으로서, 두 책이 신학적으로 상관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제일 특이한 점은 양자가 모두 신학적으로 언약(조약, berith)을 기초로 한다는 점이다.1) 물론 첫째 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본격적인 언약으로서 첫째 언약인 시내산 언약을 다루고, 둘째 책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맺은 언약으로서 갱신된 언약인 모압(세겜)언약을 다룬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셋째로,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구조에서 나타난다. 출애굽기는 사건의 진행순서를 따라서 역사서술적으로 묘사되어서 구조를 파악해 내기가 쉽다. 그러나 신명기는 설교적 혹은 제의적 맥락2)속에 - 심지어는 사건의 역사적 진행순서를 마음대로 변용하면서 - 그 신학적 내용이 완벽히 재편되었기 때문에 복잡한 구조를 띌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차이를 명확하게 의식하여서 신명기의 신학과 구조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1. 신명기 구조의 특이성
1.1. 구조란 무엇인가 ? - 구조의 다중성 (多重性 Multiplicity)
일반화된 용어인 “구조”(structure)라는 단어는 어떤 책이나 장이 어떻게 전체를 형성하고 있는 지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런데 구조는 주로 그 책이나 장이 전달하려는 핵심적인 내용인 신학의 구조로만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 기록된 원래 사건의 핵심적인 내용뿐 아니라 그것을 기록하는 현 상황에서의 목표와 관련된 구조가 있을 수 있다. 전자를 신학적 구조(theological structure)라고, 후자를 상황적 구조(situational structure)라고 표현할 수 있다.3)
신학적 구조(theological structure)는 그 장 혹은 그 책만이 가지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성경전체 계시의 구조 속에 부분 혹은 전부를 형성하는 것으로 하나의 나무의 일부분을 형성하는 것과 같다. 이 신학적 구조들의 연관 안에 성경 계시의 통일성을 발견한다.
상황적 구조(situational structure)는 그 신학적 뼈대 혹은 틀을 지금 기록되는 글의 현실적 상황을 위해서 재구성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사건과 글은 역사성을 가지고 있고 후대의 기록은 반드시 전자의 단순한 반복은 아닐 수 있고 또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1.2. 신명기의 신학적 구조 (theological structure)
신명기의 핵심적인 내용이자 근본뼈대라고 할 수 있는 신학적 구조는 신명기만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신명기가 성경의 다른 책과 공유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을 통해서 성경 전체 계시역사의 대하(大河) 속에 신명기가 같이 흘러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명기가 출애굽기 특히 19-24장과 공유하는 신학적 근본은 언약체결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언약체결이지만 여기서는 언약갱신이다. 즉 거기서는 최초의 언약으로서 시내산언약을 체결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언약갱신으로서 모압(세겜)언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언약체결로서는 다섯 가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 (1) 언약당사자의공적 정의, (2) 언약당사자의 직접 대면, (3) 언약관계유지법, (4) 언약체결예식, (5) 언약체결 축하 피로연.
이 근본구조는 성경, 특히 구약의 각 권의 신학적 구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각권은 이 근본구조를 자신들의 특수한 목적에 맞게 조정하여서 사용하였다.4) 신명기도 마찬가지로 이런 구조를 자신의 제의적, 예식적 상황에 맞게 재조정하고 있으나 본질적인 구조의 요소를 다음과 같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
(1) 언약관계의 공적인 정의 : 신 26:17-19
(2) 언약당사자의 공적인 대면 : 신 5:1-5,22
(3) 언약관계유지법 : 신 5:6-21, 신 12-26장
(4) 언약관계체결예식 : 신 27:1-8
(5) 언약체결축하 피로연 : 신 27:7
그러나 출애굽기의 비교에서 알 수 있듯이 출애굽기 속에서는 언약체결의 내용적 구조 자체가 출애굽기 서술 자체가 되었지만 신명기의 경우는 이런 근본적인 신학적 구조 위에 다른 구조가 씌워있다는 것이 중요한 차이이다. 예를 들어서 신 1-3장, 4장, 29-30장, 31-34장은 언약체결 그 자체의 구조를 넘어서는 것 혹은 구조 밖에 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적 구조를, 물론 내적인 언약체결구조를 포함하는, 우리는 신명기의 상황적 구조라고 표현할 수 있다.
1.3. 신명기 상황적 구조 (situational structure)
신명기의 이러한 상황적 구조는 출애굽기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판명될 수 있는 점은 신명기가 제의적/예식적이라는 특징과 설교적이라는 특징을 지닌다는 부인할 수 없는 점이다.
우선 현재의 신명기는 제의적/예식적 상황을 반영한다. 전체가 거의 모세의 말을 인용하고 그 속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인용되는 등, 수많은 인용으로 이루어진 것은 신명기가 읽는 책이 아니라 들려지는 말씀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반영한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예가 소위 신언공식(神言公式 divine speech formular)가 그 어떤 책보다 많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명확하게 창세기-민수기와는 다른 점이다. 사실을 알리는 기록식이 아니라 어떤 내용을 선포하거나 낭독하는 식으로 제시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두 번째로 이와 유사하지만 이 점과 관련된 것이 신명기가 설교적이라는 점이다. 전체를 다 읽어도 6시간 정도 걸리는 것이라면 어떤 예식에서 공식적인 낭독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 예식은 짧게 하는 현대적 예배가 아니라 일주일씩 걸리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축제와 상관이 있을 수 있다.
이런 특징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상황적 구조의 중요한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 신학적 핵심의 중요성 : 1-4:43 [A] // 4:44-29:1 [X] // 29:2-34:12 [A']
(2) 핵심의 반복 : 4:45-11:32 // 12:1-28:68
(3) 현재와 미래의 반복적 변화 : 4:45-11:32 (현재(모압)-미래(세겜))
12:1-28:68 (현재(모압)-미래(세겜))
(4) 시간의 흐름 : 1-4:43(과거) - 4:44-29:1(현재) - 29:2-34:12(미래)
(5) 봉투구조 1 (envelope figure) : 4:44 / 29:1 (MT 28:69)
(6) 봉투구조 2 (envelope figure) : 1:1-4 // 34:1-12
1.3.1. 신학적 핵심의 중요성 : 1-4:43 [A] // 4:44-29:1 [X] // 29:2-34:12 [A']
먼저 현재의 신명기의 신학적 핵심이 중심에 놓여지는 모습을 보인다. 신명기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모압(세겜)에서 맺는 모압(세겜)언약이다. 이 내용이 근본적인 핵심을 이루도록 4:44-29:1까지를 중심에 배열하고 있다. 그 앞에는 (1:1-4:43) 이 핵심이 이루어지는 사실적 기초로서의 역사, 즉 시내산에서 모압에까지의 여정을 낭독체로 서술한다. 그 뒤에는 29:2-34:12)은 모압(세겜)언약을 맺고 난 뒤의 언약적 충성을 할 것을 2인칭으로 권고하고 권면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렇게 핵심을 주위로 좌청룡 우백호로 펼쳐진 변두리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정교하게 배열하고 있다.
1.3.2. 핵심의 반복 : 4:45-11:32 // 12:1-28:68
이렇게 중심에 배열된 신학적 핵심이 처리되는 방법이 특이하다. 그것은 중복적으로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즉 4:45-11:32까지와 12:1-28:68이 근본적으로 동일한 내용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그 내용이란 모압(세겜)언약의 체결이다. 언약을 체결할 때에는 법적요소와 제의적요소가 다 동원된다.5) 법적요소의 두가지는 언약당사자의 공적인 관계정의와 언약법의 선포이다. 그리고 제의적 요소는 언약체결예식과 언약체결축하피로연이다. 이미 설명한대로 법적 요소는 모압에서 완성하고 제의적 요소는 세겜에서 완성하게 되어 있는 특이한 언약이 모압(세겜)언약이다. 현재(모압)에서 이루어졌으나 미래(세겜)에서 완성되어져야 할 언약이 바로 모압(세겜)언약인 것이다. 물론 이 반복은 무분별한 복사가 아니라 히브리시의 평행법의 원리를 따라서 만들어졌다. 즉 앞에서는 일반적인 내용을, 뒤에서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내용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이 두 요소가 두 본문 4:45-11:32, 12:1-28:68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
4:45-11:32, 12:1-28:68 |
법적 요소 : (1) 언약관계정의 : 6:4 26:17-19 (2) 언약법의 선포 : 5:6-21 12:1-26:15 제의적 요소 : (3) 언약체결예식 : 11:26-32 27:1-8, 28:3-6,16-19 (4) 언약체결축하피로연 : 11:26-32(암시) 27:7 |
이렇게 반복되는 것은 다음의 두가지를 고려하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
(1) 핵심의 중요성, (2) 반복이 흔한 히브리 문학적 관습.
1.3.3. 현재와 미래의 반복적 변화 :
4:45-11:32 (현재(모압)-미래(세겜))
12:1-28:68 (현재(모압)-미래(세겜))
이 구조와 필연적으로 관계되어 있는 점이 장소와 시간의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명기의 핵심적 내용이 모압에서 시작되나 세겜에서 완성되어야 하는 특별한 언약인 점과 관계한다. 그래서 모압에서 세겜으로 다시 모압으로 또 다시 세겜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장소의 변화뿐 아니라 시간의 변화에서도 동일하다. 현재에서 미래로 다시 현재로 다시 미래로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다시 이것은 모세에 의하여 현재에 시작되었으나 여호수아에 의해서 미래에 완성되어야 할 언약의 모습을 보인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렇게 독특하게 배열된 이유는 무엇일까 ? 그것은 이미 필자가 밝힌 바와 같이6) 두 장소, 두 시간대를 걸쳐서 행해져야 하는 예식이기 때문이 이 예식이 둘이 아니라 하나의 언약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문학적 구조와 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점이 학자들이 신명기의 통일성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혼돈하는 원인이다. 이것은 현대적 관점으로 고대의 책들과 제도들을 이해하려고 하였을 때에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3.4. 시간의 흐름 : 1-4:43(과거) - 4:44-29:1(현재) - 29:2-34:12(미래)
다시 신명기 전체를 보면 시간상의 명확한 흐름을 볼 수 있다. 우선 핵심에 해당하는 4:44-29:1은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이 이제 들어가서 살아야 할 역사적 삶의 현재를 다룬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이 들어가서 살아야 할 삶을 나타내기 때문에 엄밀하게 아주 가까운 미래이지만 이 핵심 속에서 사실상 이스라엘이 그 땅에 정착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어떻게 살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실상 이스라엘의 삶의 현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앞의 내용(1:1-4:43)은 이스라엘의 과거의 삶을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장르를 사용하여 총정리한다. 우선 1:1-3:29까지는 호렙(시내산)에서 모압까지의 여정을 역사서술적으로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것은 가까운 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4:1-43까지는 설교적 맥락에서 현재에서 시간을 거꾸로 아주 먼 과거로 여행하는 모습을 본다. 즉 현재, 모압(4:3)에서 호렙(4:10)을 거쳐 애굽으로 간다 (4:20). 거기서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열조의 시간으로 가서 (4:32), 다시 거기서 최초의 역사의 시작인 태초(4:32)에까지 올라간다.
그리고 그 뒤의 내용(29;2-34:12)도 여러 가지로 이스라엘의 미래의 삶을 역시 다양한 장르를 사용하여 정리한다. 우선 31-34장은 이스라엘의 가까운 미래를 예언적으로 묘사한다. 이 속에 유명한 두 장, 31장과 32장이 시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29-30장은 아주 먼 미래로 여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먼 미래를 나타내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당할 가장 먼 미래의 불길한 예언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이 언약에 충성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언약적 저주를 받아서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까지를 상정하는 것이다 (30:1). 그리고 이 장들은 대단히 설교적이고 교훈적이다.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1) 시간의 흐름에 있어서는 순서는 명확하다 :
과거 (1:1-4:43[A]) --> 현재 (4:44-29:1[X]) -->미래(29:2-34:12[A'])
(2) 그 변두리의 시간적 변화는 독특하다 :
1:1-3:29 4:1-43 29-30장 31-34장
가까운 과거 먼 과거 먼 미래 가까운 미래
[a1] [a2] [b2] [b1]
이렇게 해서 신학적 핵심(4:44-29:1)을 중심으로 동심원적 구조를 형성하는 것을 알 수 있다 : [a1] - [a2] - [X] - [b2] - [b1]
1.3.5. 봉투구조 1 (envelope figure) : 4:44 / 29:1 (MT 28:69)
이런 구조를 형성하는 작지만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중요한 지시어 두개가 신학적 핵심을 주위로 봉투구조(envelope figure, inclusio)를 형성하는 것이다. 즉 4:44에 표현된 torah라는 단어와 29:1(MT 28:69)이 표현한 Moab berith란 단어이다. 이것은 신학적 핵심의 시작과 끝에 있어서 하나의 지시어로 역할하며 하나는 시작을 나타내며 다른 하나는 끝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둘은 하나를 표현하는데 그것은 바로 torah가 Moab berith라는 점이다. 이 점은 4:44의 표현이 겉보기에는 4:45과 중복된 것같이 보이는 데서도 나타난다. 신명기같이 정교한 책이 불필요한 반복을 이은 절에서 할 수가 없으므로 이것은 저자의 의도적인 반복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이것이 바로 신명기가 신명기의 핵심을 지칭하는 진정한 내용은 torah이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모압(세겜)언약이라는 것이다.
13.6. 봉투구조 2 (envelope figure) : 1:1-4 // 34:1-12
여기에 또 다른 봉투구조가 보이는데 이것은 앞에서 말한 봉투구조보다 더 외곽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신명기의 시작과 끝에서 보이는 모세를 3인칭으로 서술하는 부분이다 : 1:1-4 // 34:1-12. 전자는 모세가 모압에서의 특별한 활동의 시작을 알리고 후자는 모세의 죽음을 다룬다. 이 두 부분은 그 안의 내용을 모두 포괄하여 운송하는 보자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 안에서는 실제로 모세가 거의 모든 부분에서의 서술자로 등장한다. 이것은 신명기의 시작과 끝이 모세의 모압에서의 활동과 그 끝으로 이루어짐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우리가 신명기의 이러한 독창적이고 전무후무한 상황적 구조를 형성하는 것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전통 위에 서 있음 : 우선 신명기는 출애굽기에서 민수기까지에 포괄적으로 표현된 시내산언약의 기초 위에 확실하게 서 있다. 그 본래의 내용을 결코 벋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쉽게 언약법의 핵심인 십계명의 거의 그대로의 반복에서 볼 수 있다 : 출 20:1-17, 신 5:6-21. 그리고 언약관계 당사자의 공적인 정의에 대한 표현에 있어서 알 수 있다 :
출 19:5-6 : 보배(segullah) ----- 제사장 나라 ---구별된 백성
신 26:18-19 : 보배(segullah) -- 칭찬,명예,영광 / 지존자 --- 구별된 백성
(2) 반복이 아닌 진정한 발전 : 그렇다고 해서 신명기는 단순한 반복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 진정한 역사적 발전을 담고 있다. 십계명을 표현해도 그 속에 진정한 발전을 볼 t수 있는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제 4계명이다. 더 구체적으로 법을 다룸에 있어서도 훨씬 더 구체적이고 발전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출 21-23장까지가 시내산언약의 세부법이라면 신 12-26장 전체가 모압언약의 세부법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두 법체계의 근본적인 내용은 동일하게 십계명의 구조를 따르고 있으나 신명기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 자세한 모습을 보인다. 또 같은 언약적 축복과 저주이나 시내산언약의 축복과 저주(레 26장)에 비하여 풍성하고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신명기의 축복과 저주이다 (신 28장).
(3) 독창적인 내용과 표현방식들 : 신명기의 내용과 표현은 독창적이다. 예를 들어서 시내산언약에서 제사장 나라(출 19:6)라는 용어를 칭찬-명예-영광 그리고 지존자로 풀어서 표현함(신 26:19)으로 그 의미를 명확하게 드러내었다. 출애굽기에서 십계명(출 20:1-17) 어서 바로 세부법(출 21-23장)이 주어졌으나, 신명기에서는 십계명(신 5:6-21)과 세부법(신 12-26장) 사이에 긴 강화 내지 설교가 포함되어 있다 (신 6:4-11:32). 이것은 신명기에 아주 흔하게 나타나는 설교적 표현들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현실(재)적 목적에 충실함 : 신명기는 이 책이 만들어지던 상황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고 그 현실적인 목회적 목적에 부응하는 내용과 구조를 가진다. 신명기는 전체적으로 설득적이다. 심지어 법 항목을 표현함에 있어서도 고대법에 비하여 엄청나게 높은 동기절(動機節 motive clause)의 사용비율이 높음을 통하여 이 선포와 낭독을 듣는 이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유도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설교적인 신명기의 모습과 일치하는 것이다.
(5) 신명기는 읽혀지는 책이 아니라 낭독되고 들려지는 책7) : 이런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신명기는 읽혀지는 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은 의도적으로 공적인 예배적 상황 속에서 낭독되고 들려지도록 만들어졌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점이 신명기가 신학적 내용에 있어서도 독특할 뿐 아니라 상황적 구조나 형식에 있어서도 완연히 구분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2. 신명기의 신학
2.1. 신명기신학의 기초로서의 사경(四經 tetrateuch)
신명기의 내용은 사경(tetrateuch)과 상관이 있는 점은 명확하다. 그 중에서 핵심으로서의 언약적 상관성은 필자가 명백하게 지적하였다.8) 즉 창세기는 족장언약을,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는 시내산언약을 나타내고 신명기는 모압언약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언약들이 모두 하나의 목표인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려고 한다. 창세기의 족장언약은 하나님 나라의 씨와 땅이 준비완료되는 것을 드러내고,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의 시내산언약은 하나님의 나라의 씨가 완성되는 것을 나타낸다. 이에 비해서 신명기의 모압언약은 땅의 완성을 나타낸다. 이렇게 해서 다섯 책이 하나를 이루어서 하나의 총체적인 목표를 이룬다. 이 점에서 신명기는 독창적이기는 하나 선배의 기초 위에 명확하게 서고 있다.
특히 신명기는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의 기초 위에 선다는 것은 이미 많이 지적되었다. 시내산언약은 최초의 언약으로서 가치를 가지지만 신명기의 모압언약은 갱신되는 언약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특히 신명기에서 언약형성에서 시내산언약을 전제로 하고 있는 부분은 언약당사자의 직접대면이라는 부분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의 당사자로서의 이스라엘과의 만남은 시내산에서 최초로 이루어졌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언약갱신은 모두 이 언약의 만남을 전제로 한다. 신 5:2-5에 나타난 소위 열조의 역사의 ‘현재화’(Vergegenwaertigung, actualization)은 바로 이런 점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그 때 그 시내산의 언약체결의 현장에 이미 후대에 있는 이스라엘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이 법적인 관련성인데 그 중에 차이가 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출애굽기에서는 공적 예배장소의 복수성(출 20:24)을 나타낸 반면에 신명기에서는 예배의 중앙집중화를 표방한다 (신 12장). 이러한 차이를 여러 가지 신학적 배경을 따라서 해석하는 전통이 주어졌으나 두 본문의 실제적인 차이를 그대로 일단은 반영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출애굽기의 본문은 이스라엘에게 아직 그 땅이 주어지는 상황이 아닌 가운데 주어진 것이나, 신명기의 경우는 이스라엘이 이제까지 살던 성막을 중심으로 하던 삶을 중지하고 다양하게 흩어진 삶을 살아야 하는 경우를 반영하고 있다. 그럴 경우에 언약공동체가 하나로 될 수 있는 상황을 아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배처소의 단일화로서 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2.2. 신명기의 언약적 기초로서의 모압(세겜)언약
이제 신명기의 핵심부분(신 4:44-29:1)에 담긴 신학에 대해서 살필 때가 되었다.
신명기의 모압(세겜)언약은 실체성은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도깨비같은 언약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신명기의 ‘모압언약’(신 29:1)이라는 표현은 실체적이고 그 실체의 구체적인 내용은 신 4:44-29:1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9) 거기서 명확하게 호렙(시내산)언약의 실체성 외에 모압언약의 실체성을 인정하고 있는데, 주로 학자들에게 어려움은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의 상관관계였다. 신 5:2-5에 나타난 시내산의 언약맺는 현장에 왜 현세대, 즉 출애굽 제 2세대가 거기 그 시간에 원리적으로 있었다고 표현하는 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에 의하면 출애굽 당시의 시내산언약의 원리를 그대로 응용하는 모압언약의 성격 때문에 그러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의 것을 거의 그대로 응용하는 것이 시내산언약 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속에는 그 후대에 이루어질 언약의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되었으므로 그것에 근거하여서 언약갱신을 이루는 것을 표현할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압언약을 표현하는 중심부분인 신 4:44-29:1에서 수많은 신언공식(神言公式 divine speech formular)를 볼 수 있다. 모압언약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2.2.1. 언약당사자의 공적 관계정의 (신 26:17-19)
이 점은 시내산언약의 그것보다 훨씬 더 정교하게 표현되었다. 시내산언약의 경우는 거의 하나님 편에서의 언약관계적 표현을 한다 : 출 19:(1-4)5-6(7-8). 그러나 신명기의 경우는 언약의 양당사자의 입장이 골고루 고려되어 있다 : 신 26:17-19.
신 26:17 : 이스라엘의 편에서의 여호와의 언약적 위치로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된다는 선포를 한다.
신 26:18-19 : 여호와 편에서의 이스라엘의 언약적 위치로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보배(segullah), 칭찬,명예,영광/지존자, 탁월한(거룩한) 백성(am qadosh)이 됨을 선포한다.
이 선포는 모압언약을 세울 때에 새롭게 한 것이라기 보다 시내산언약에서 이미 형성된 관계를 원리적으로 부연하면서 재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약관계는 영원히 고정되기 때문이고 필요한 것은 상황마다 그 원리적 선언을 재사용, 재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2.2. 언약당사자의 공적인 대면
이 부분 역시 모압언약에서 새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이미 시내산언약에서 이루어진 사실을 근거로 해서 부연설명하는 것만이 주어졌다 : 신 5:3-5.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였고 직접 음성을 들은 사실의 심각한 경험성은 강하게 표현되었다 : 신 5:23-27. 그 경험이 바로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 아니라 현재 이 모압 땅에 서 있는 출애굽 제 2세대에 하신 것이라는 역사의 현재화(actualization)의 과정을 통하고 있다.
2.2.3. 언약법의 선포
언약법은 두가지 형태로 표현되었다. 하나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선포요 둘은 그것에 대한 세부법을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가지고 오는 것이다. 이 두가지가 표현되는 양식에 있어서는 시내산언약의 상황과 같으나 (출 20:18-22), 모압언약에서 새로운 차원이 소개되었다. 그 새로운 차원은 모세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대리적 선포의 권위를 사용하여서 자신의 말로 백성에게 세부법을 선포하고 설명한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이 직접 선포하신 언약법으로서의 십계명의 절대적인 권위는 부인할 수 없다 (신 5:6-21). 그것은 약간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시내산언약의 그것과 거의 그대로 표현되었다 (출 20:1-17). 그러나 그 약간의 차이는 제 4계명에서 발견하는데 그것은 신명기의 모압언약법의 법정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이다. 즉 안식일 계명의 기초가 창조가 아니라 재창조, 출애굽이 됨으로 훨씬 더 우리의 행동의 기초가 역사적이 된다. 그래서 모압언약세부법이 담긴 신 12-26장에서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해야 할 많은 종교적 윤리적 행동의 기초 원리가 됨을 알 수 있다.
또 둘째로 모세를 통해서 간접으로 선포하신 세부법(신 12-26장)도 원리적으로 직접 선포하신 법, 십계명(신 5:6-21)에 근거하는 것은 시내산언약법과 동일하다. 그러나 그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훨씬 더 확대되었고 자세하며 설득력있게 표현되었다. 무엇보다도 신 12-26장에 표현된 세부법은 하나님에게서 모세가 받아오는 면(신 5:31)보다 그것을 전제로 하는 면이 두드러졌다. 오히려 모세 자신의 말로 그 법들은 백성들에게 절대적 권위로 선포되었다.
무엇보다도 독특한 면은 모세를 통한 세부법이 주어지기 전에 (신 12장), 모세의 긴 설교와 같은 것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 신 6-11장. 이것을 소위 주요법(主要法 Hauptgebot)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했고 앞 뒤 문맥과의 상관관계는 설명되지 못했다.10) 이제 우리는 전체 구조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배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 4:45-11:32까지의 모압언약에 대한 일반적인 묘사와 12:1-28:68까지의 세부적인 묘사 속에 평행법적 반복을 이루며 대칭을 이룬다. 즉 신 5:6-21과 신 6:4-11:25까지에서 모압언약의 법적요소가 일반적으로 표현되었는데 비해서 신 12:1-26:15에서 모압언약의 법적인 요소가 세부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런데 신 6:4-11:25까지에서 시내산언약에서는 없는 모세의 긴 설교 혹은 강화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신명기가 모세 자신의 권위적인 말로 표현된 것과 관계한다.
2.2.4. 언약갱신예식체결
이 요소와 아래의 요소(2.2.5.)는 신명기에서 크게 부각되지 못한 것은 신명기의 주요관심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가서 해야 할 법적인 행동에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후자의 요소가 극단적으로 축소된 것을 알 수 있다 (신 27:7뿐 “여호와 앞에 즐거워하라”). 언약갱신예식이 체결될 장소는 여기, 모압이 아니라 세겜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강조되어야 할 요소는 여전히 법이었다.
먼저 신 27:1-8에서 언약갱신예식을 체결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법의 수행과 기록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27:1,3,8) 그리고 강조해서 (27:8 “명백히 기록할지리니라”) 표현한다. 이어서 언약적 축복과 저주의 선포(신 28:3-6,16-19)와 그것에 대한 모압에서의 모세의 부연설명(신 28:7-14,20-68)에 있어서도 얼마나 언약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가를 설명한다. 또 백성이 해야 할 서약(dodecalogue 신 27:15-26)에 있어서도 그 시대에 당장에 필요한 법적인 요소가 구체적으로 강조되었다.11)
2.2.5. 언약체결축하피로연
이것도 장차 세겜에 가서 여호수아의 지휘하에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가장 들 강조된 부분이다 (신 27:7, 수 8:30-35, 비교 출 24:9-11). 그러나 명백히 이 요소가 언약체결시에 있어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위의 요소와 함께(2.2.4.) 이 요소가 명백히 여호수아의 영도하에 행해졌을 것이나, 정작 여호수아서에서 이 요소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요소가 행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닐 것인 것은 축제와 즐김이 중요한 고대의 예식이기 때문이다.
2.3. ‘땅의 신학’으로서의 신명기 신학
이런 기본적인 언약신학의 요소 외에 신명기 만이 독특하게 가지고 있는 신학적 요소가 있는 데 바로 땅의 신학이라는 점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신학자들이 많이 언급하였으나 그 이유에 대해서 소개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앞의 시내산언약과의 상관관계나 창세기의 족장언약과의 상관관계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더 나가서 언약과 하나님 나라의 상관관계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 나라가 역사 속에 구현되려면 반드시 세 요소가 있어야 한다 : 국민(씨), 주권(뜻), 영토(땅). 이 요소를 구현시키는 역사적인 방법과 수단이 바로 인격당사자인 여호와와 이스라엘이 맺는 언약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일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행동하신다. 즉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의 시내산언약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씨의 완성을, 신명기의 모압언약에서는 땅의 완성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시내산언약이 독자적이지 않고 모압언약을 필요로 하듯이 모압언약도 시내산언약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두 언약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는 데, 이 둘이 합쳐서 하나님 나라의 씨와 땅의 완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 두 요소가 완성되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현재적으로 이루어야 한다. 이 현재적 요소에 있어서 칼과 같이 명백함을 시내산언약에서나, 모압언약에서 볼 수 있다.
즉 신명기는 그 땅을 소유할 것을 전제로 하고 그 땅에서의 구체적인 삶의 다양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씨의 완성의 요소가 강한 시내산언약 세부법의 간략한 모습보다 모압언약 세부법이 자세할 수 밖에 없다. 신명기에서야 말로 이제는 이스라엘이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구현할 수 있게 된 상황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여러 가지 구체적인 상황 중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모압언약 세부법 중에서 가장 먼저 표현된 예배처소의 중앙집중화이다 (신 12장). 즉 땅을 정복하고 난 뒤에 흩어져서 살게 되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12지파가 하나가 된 언약공동체를 이룰 것인가의 문제는 아주 중요한 관건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신명기에서 중요한 땅의 요소라는 거점 때문에 특별히 주어진 법이라고 볼 수 있다.
2.4. 신명기의 역사철학 (4:29-30, 30:1-10)
이제 신명기의 중심부(신 4:44-29:1)를 벋어나면서 외곽에 위치한 내용들의 의미를 볼 때가 되었다. 이 내용들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신명기의 독특한 상황적 구조(situational structure) 속에서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신 4:29-30, 30:1-10에 나타난 신명기의 특별한 역사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양 본문이 놓인 장들은 역사를 앞뒤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앞으로 멀리 진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즉 신 4장은 현재 모압 땅에서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서 창조까지 이르며, 29-30장은 역사를 미래로 나아가서 이스라엘의 먼 미래인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됨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런 양자의 시간의 확장 속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교훈이 바로 4:29-30과 30:1-10에 나타난 신명기의 역사철학이 보이는 부분이다.
이 둘은 동일하게 인간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두가지 의지의 현실화와 관계되는 데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의지이다. 하나님의 뜻만이 나타나면 역사는 인간에게 무의미하고 인간은 로봇과 같은 존재가 된다. 반면에 인간의 의지만 발현되면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허무와 무의미 밖에 없게 된다.
이제 언약으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이것이 적용되는데 특별히 이스라엘이 한계상황 속에 처했을 때에 그러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생활이다. 이런 상황속에서도 역시 바랄 수 있는 것은 두가지인데 이스라엘의 행동과 하나님의 행동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파멸이라는 이 역사적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있는데 그것은 이 두 행동주체가 서로 가진 특별한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언약관계와 그 속에서 표현되는 원리인 인자와 성실(chesed we-emet)이다. 언약의 양주체는 이 원리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 이스라엘의 파멸이라는 절대적 위기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아야 할 것은 언약적 성실함(emet)으로 언약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약의 다른 당사자인 여호와 편에서 언약적 자비(chesed)를 베푸실 날은 이스라엘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있다. 이러한 변증법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상황타개의 긴장된 모습이 양 본문 속에 드러난다. 즉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도(신 4장), 역사를 미래까지 전개해도(신 29-30장) 이 긴장을 인간은 벋어날 수 없고 오히려 그 속에 충실할 때에 역사가 해방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그런데 신 4:29-30은 어느 정도는 이 열쇠를 표현하고 있으나 30:1-10만큼은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지 못하다. 신 30:1-10은 이 두가지를 특별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이스라엘 편의 언약적 의무인 언약적 자비(chesed)를 두 번 표현한다 (신 30:2,9-10) :
이스라엘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순종하면”
---> 여호와가 회복케 하시리라
이것은 조건과 결과라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즉 이스라엘이 언약적으로 다시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자비가 맛보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있는 신 30:6에는 하나님의 자비는 이스라엘이 이런 조건을 채우지 않는 데도 부어지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이것은 거의 하나님 편에서의 무조건적인 자비베푸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역사의 현실 속에서 이런 것이 가능한가 ? 하나님은 인간을 조롱하시는듯이 역사를 조정하시는가, 아니면 역사는 인간편의 활동으로만 충만한가 하는 선택적 질문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둘 중의 하나로 빠지는 것은 아닌가 ? 특히 여호와와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관계 속에서 역사는 어떻게 이렇게 진행될 수 있는가 ? 하나의 대답은 여호와는 자신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의 개별적 모습에 대해서는 철저한 언약적 심판을 행할 수 있지만, 총체적 이스라엘은 전멸시키실 수 없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다” (애 3:22). 이것이 언약적 자비의 실체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이스라엘마다 이런 하나님의 마지막 자비를 경험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것은 총체적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역사요 궁극적인 하나님과 언약의 승리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개별 이스라엘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가 있다. 그것은 총체적, 거시적, 초역사적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자비가 주어지고야 만다는 것을 믿고 혹시 자신의 시대에 경험될 수도 있다고 기대하며 그 기대를 후손들에게 전하는 일이다. 그 기대가 성취될 때에는 우리가 가장 어려워하던 일이 일어날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그렇게 예언자들이 앞으로 호통치면서 이스라엘의 책임으로 선포하던 것이 될 것이다.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로 이루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복음은 장차 후대에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진행하는 동안 이 복음을 기대하면서도 개별 이스라엘의 역사적 책임의식은 조금도 죽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앞으로 수천년의 역사를 이어가면서 지고가야 하고 궁극적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 역사의식인 것이다. 이 역사의식은 특히 앞으로 예언자들의 고통스러운 개인적 삶과 심판받으나 궁극적인 미래의 승리를 확신하는 공동체를 향한 선포 속에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3.5. 신명기의 상황적 구조에 나타난 삶의 정황 : 정기적 언약갱신축제 (31:9-13)
신명기의 상황적 구조(situational structure)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고대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은 정확하게 재구성하기는 극히 힘들다. 우선 성경이 이런 것에 대한 적극적인 증거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고, 고대 근동의 제의들로 성경을 재구성하는 데 동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스라엘이 여호와와 맺은 언약관계는 아주 독특하기 때문이다.
3.5.1. 문서조항 (document clause) : 정기적 언약법의 공적인 낭독 (신 31:9-10)
그러나 이런 삶의 정황을 설명하는 구체적인 요청이 본문 자체에서 일어난다. 즉 신 31:9-13의 내용은 조약문에서의 소위 “문서조항”(document clause)과 관계한다. 조약, 특히 종주권조약(suzerainty treaty)을 맺은 약한 당사자 국가(왕)는 그 조약문을 정기적으로 꺼내서 공적 예식에서 낭독(봉독)하게 되어 있는 의무조항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과 유사한 것이 신 31:9-13에서 발견된다. 이스라엘은 토라를 7년 정기면제년 초막절마다 정기적으로 꺼내어 봉독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하여 H. Gunkel - S. Mowinckel - G. von Rad를 이으면서 하나같이 학자들은 7년을 1년으로 본문을 수정하고 그 이유로 고대근동의 매년제(Thronbesteigungsfest)에서 이것이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근동의 매년제와 이스라엘의 7년마다 하는 이 제의는 성격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고대 근동의 매년제는 신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자연현상에 절기를 맞춘 자연종교의 모습을 가진다면, 고대 이스라엘은 언약과 언약법의 수행이라는 역사적 행위에 특정절기를 지정하는 역사적 모습을 지닌다. 새해가 출발되는 일반적인 초막절이 아니라 매 7년마다 하는 정기면제년 초막절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초막절을 보통의 초막절과는 다른 독특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절기를 우리는 언약갱신축제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축제의 편린을 우리는 시 24, 50편에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12)
3.5.2. 재구성해 본 삶의 정황(Sitz im Leben) : 길갈전승
그러면 이러한 해석이 역사적인 사실로 있을 수 있는 삶의 정황은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 것인가 ?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구체적인 증거 부족으로 재구성은 거의 불가능하나 가설로 재구성해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소위 “길갈전승”이다. 이 가설은 이스라엘의 7년 정기면제년 초막절마다 진행되는 언약갱신축제기간에 이스라엘이 출애굽-입가나안의 역사를 재현하는 것을 기초로 한다. 즉 가나안 정복의 초기에 중요거점이었던 길갈에서 나중에 이스라엘의 중심이 될 증거막이 유하던 곳, 그 중에서도 예루살렘까지의 순례행진과 같은 것을 행했을 것이다. 그 때에 가아나입성 때와 같이 증거궤를 제사장들이 메고 행진을 했을 것이다. 증거궤를 메고 중심도시인 실로나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에 시편 24편과 같은 것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그리고 그 성에 도착하고 나서 증거궤 속의 언약의 책(seper haberith)이 봉독되는 가운데 예식이 7일 정도 진행될 것이다. 실제로 6-7시간이면 낭독이 끝날 수 있는 신명기의 양이 7일동안 전개되는 초막절의 행사에 적당할 것이다. 소위 “레위인설교자”(levitical preacher)들이 자연스럽게 등장하여서 봉독된 언약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설명하였을 것이다. 이런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느 9장과 같은 언약갱신과 같은 후대의 역사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이 속에도 생길 수 있는 위선과 타락에 대한 경고가 시편 50편 같은 곳에서 주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신명기의 상황적 구조에 나타난 신학적 내용인 언약갱신축제는 여전히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적 원리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것이 행해지는 의 정황으로서의 길갈전승가설을 통해서 우리는 설명가능한 다음 단계의 증거를 찾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진다. 송재근 교수( 웨스트민스터 신대원)
성경의 언약과 근동의 조약들
히브리인은 국제적인 조약과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언약에 대하여 같은 낱말을 사용한다. 최근의 연구는 고대 근동의 조약들과 구약성경의 언약들 사이의 유사점들이 이보다 훨씬 더 폭넓게 확대되어 있음을 보여주었고 구약성경의 언약이 지닌 특징들에 관하여 상당한 빛을 던져주었으며 또 그 너약들을 그 당시의 일반 조약들과 비교할 수 있게 됨으로써 구약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를 증진시켜 주었다.
금세기에 발견된 대부분의 고대 조약들은 그 연대가 B.C. 1500년경에 이르는 어간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에 구약성경의 상당부분이 저작되었다. 그러므로 성경 저작자들이 그 조약들의 초안을 작성하는 방법에 익숙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우기 그들의 조약의 용어와 개념들을 사용한 사실은 그들이 조약 당사자들간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윤곽을 찾아내었음을 보여준다.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언약은 하나님이 노아로 더불어 맺으신 것이다(창9장) 하나님은 또한 아브라함과 또 언약들을 맺으셨다.(창15,17장)그러나 이제까지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언약은 시내산 언약이다9출 19장이하) 비록 시내산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려지게 된 장소로 간주되고 있으나 실상 율법의 제정은 훨씬 더 큰 사건, 곧 전적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을 그의 거룩한 나라로 부르신 사건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 새로운 관계는 언약으로 호칭되었다. 시내산에서 맺어진 언약은 이스라엘을 한 나라로 만드는 결정적인 단계였다. 그 뒤에 따르는 모든 언약들은 시내산 언약을 그 모형으로 뒤돌아보는 것들이었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들이 시내산 언약의 갱신으로 간주되었다. 언약들은 언어와 형식과 개념이 세가지 관점에서 조약들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언어
조약의 목적은 속국 또는 속국의 왕들이 그 조약의 당사자인 제국이나 그 제국의 왕에게 전적인 충성을 하도록 규정하는 데에 있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 조약들에는 그 속국이나 속국의 왕을 감동시키고 순종의 중요성을 인상지어줄 화려하고도 수사학적인 언어가 사용되었다. 수사학적인 문체는 오랫동안 신명기의 특징으로 간주되어 왔다. 신명기는 다른 면에서 볼때 속국의 좌약과 아주 비슷한 점을 갖고 있는 책이다. 어떤 용어들은 순종을 잘하는 속국의 행동을 묘사하는 조약들의 대목에서 사용이 되고 있다. 훌륭한 속국 혹은 그 속국의 왕이라면 그의 섬기는 제국의 왕을 "좇으며","두려워하며(경외)""사랑하며","그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거역하는 속국이나 그 왕은 "죄"를 범하게 된다. 이같은 의미의 언어들이 구약성경에 자주 반영되고 있다.
형식
조약들과 구약성경의 언약들 사이의 가장 현저한 유사점은 그 기본구조상의 형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헷족속이 사용했던 전통적인 근동의 조약은 다음 여섯조항들을 갖고 있었다.
1. 조약 발안자의 이름을 밝힌 전문 2. 조인에 앞서 조약 당사자간의 관계를 밝힌 역사적 서언 3. 조약 당사자 쌍방의 의무들을 열거한 약정 4. 그 조약문서를 설명하고 속국의 왕이 정기적으로 그것을 읽도록 하기 위한 기록조항. 5. 그 조약을 증거하는 신들의 목록 6. 저주와 축복들 속국의 왕이 조약을 깨뜨릴 경우 그에게 질병과 죽음, 추방 등의 화가 미치리라는 위협적인 저주들과 그가 신실하게 조약을 지킬 경우 형통과 복이 임하리라는 소망적인 축복들을 열거한 조항.
구약의 언약들은 정확히 일치되지는 않으나 유사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증인들로서의 신들의 목록을 생략하였다. 신명기는 조약형식의 요소들을 대부분 포함하고있다.
1-3장 역사적 서언 4-26장 약정들 27장 기록조항 28장 축복과 저주들
출애굽기 19-24장.여호수아 24장.그리고 사무엘상 12장은 구약에 나오는 조약형식의 또 다른 그러나 보다 축소된 예들이다. 조약들과 언약들은 다 역사로 더불어 시작이 되고 또 그 언약발안자의 은혜와 자비를 강조하고 있다. 헷 왕은 그의 속국왕 중 하나가 최근에 반역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왕의 신분을 유지케 함으로써 그의 자비를 보여준 예가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에게 그의 자비를 다음 말씀으로 상기시키고 계신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2)
조약들과 언약들에 있어서 그 약정들의 기초는 그 최고주권자의 과분한 은총이다. 약정 혹은 율법들은 그 속국의 왕에게 조약의 주권자가 행한 바를 상기시킨 후에 따라 나온다. 속국의 왕 혹은 백성은 그 약정들을 감사함으로 순종할 것이 기대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에서 율법은 은혜에 뒤따라 나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일로 인하여 그들은 순종할 것을 독려받는다.
속국이 계속하여 순종하면 복과 번영이 약속되나 거역할 경우에는 저주가 따른다. 인간의 마음을 잘 알고 있던 조약의 입안자들과 구약성경의 저작자들은 축복보다는 저주의 문구에 훨씬 더 신중을 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백성이 언약의 요구들을 무시할 경우에 당하게 될 고난들을 보면 섬뜩해진다(신28:15-68을 보라) .임박한 심판에 대한 예언적인 위협이 자주 이 언약의 저주들을 반영해준다.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언약관계가 특권만 아니라 의무도 포함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에,암3:2).
사해사본은 언약의 개념들이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대교의 신학에 줄곧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수께서도 분명히 그의 죽음을 새 언약의 시작으로 언급하실 때(막 14:24) 그의 제자들이 언약의 개념에 익숙한 것으로 간주하셨다. 고오돈 웬함 (GORDON WEN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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