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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신명기 8장 연구

by 은총가득 2021. 7. 23.

 

 

40년간의 광야 생활은 축복이었다.(신8:1-3)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蕃盛)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1-3)

도덕과 종교

신자를 포함하여 이외로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도덕과 거의 동일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죄를 짓지 않고 선하게 사는 것을 종교를 가진 가장 중요한 의미로 삼는다.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신앙(信仰)을 가진다는 뜻이며 또 신앙이란 반드시 믿고 따를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대상은 두말 할 것 없이 절대자, 신(神)이다. 따라서 종교의 본질은 믿고(信) 경배해야(仰) 할 대상인 신과 자기와의 관계 정립이다.

반면에 도덕의 본질은 인간 사회에서 인간끼리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잘 살려는 것이다. 인간 공동체를 유지, 번성시키기 위해 그 구성원이 지켜야 할 최소의 규칙이다. 그래서 공동체의 질서를 일정한 한도를 넘어서 무너뜨리는 행위를 죄라고 규정지은 것이 도덕이다.

만약 인간 상호 관계가 없다면 도덕은 아무 의미가 없다. 무인도에서 혼자 산다면 살인, 간음, 폭력, 도둑의 죄란 있을 수 없고 일 년 내내 벌거벗고 지낸다고 풍기문란으로 따질 이유도 없다. 요컨대 도덕은 인간관계를 올바르게 세우는 행동 규율이라면 종교는 한 개인이 절대자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라면 최소한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할, 말하자면 다른 사람과 아무 관계없이 혼자 있더라도 넘어서선 안 될 행동 규범과 사고의 한계가 있음을 본성적, 선험적으로 깨닫는다. 또 그런 측면이 도덕에 상당히 많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윤리적 자각이 왜, 어떻게 유독 인간에게만 들게 되었는지를 규명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근원과 연결되는 문제다. 그렇게 되면 이미 도덕이 다룰 문제가 아니라 종교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인간이 신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데 가장 중요하고도 선결되어야 할 문제는 죄에서 구원 받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가장 중요한 실천 강령이 도덕적 규범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따라서 외형적으로는 도덕과 종교가 동일하게 윤리적 규범을 강조하게 되었기에 신자들마저 그 둘을 잘 구분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선 몰라도 기독교에서만은 이 둘을 엄밀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착하게 살지 말라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신앙 이전에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또 사실은 도덕만으로도 충분히 배울 수 있다. 종교를 통해 따로 더 배울 필요가 없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그 자녀에게 가장 중요하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착하게 살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 년간 방황하는 동안 만나만 먹고 살았다. 성경은 그 사건을 두고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려는 하나님의 시험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말하는 떡은 물질이고 여호와의 말씀은 윤리적 계명이라고 단순히 해석하고 치운다. 예의 종교와 도덕을 혼동하는 습관이 작동된 것이다. 즉 신자라면 물질을 멀리 하고 대신에 착하게 살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 가르쳐지고 있다는 말이다.

광야를 방황하게 된 배경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 하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입구인 가데스바네야에 도착했다. 이제 곧 그 땅으로 진군해 들어가면 이 땅에서 최초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신정국가가 탄생할 참이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 족속과 자신들을 비교하여 도무지 승산이 없는 전투라고 평가했다. 이스라엘은 잔뜩 겁을 먹고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뒤로 한 채 당신이 명한 전투를 포기해 버렸고 당연히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다.

그런데 그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원칙은 너무나 엄격하고 공정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7,28) 이스라엘이 불평한 내용에 정확하게 맞추어 벌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불평했는가?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2,3)  

애굽 땅에 돌아가거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죽었지 가나안 족속의 칼에 죽을 수는 없다고 불평했다. 하나님으로선 열 가지 이적과 홍해를 갈라 구원해낸 백성들을 다시 애굽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대신에 그들이 말한 그대로 광야에서 방황하며 죽게 만들었다. “너의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민14:29,30) 하나님의 징벌은 너무나 엄격했다.  

이스라엘은 또 하나님께 다른 원망을 했었다. 우리 처자가 가나안 족속에게 사로잡히게 하느니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불평을 귀에 들린 대로 하자면 처자들로 가나안의 포로가 되도록 해야 하거나 최소한 가나안 땅에 들여 놓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이들은 어른들 불평대로 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처리했다.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민14:31,32) 아이들은 하나님에게 불평하지 않았고 또 그 상황에 대해 아무 책임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징벌은 너무나 공정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배교와 불신앙에 대해선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으로 벌을 내린다. 알기 쉽게 말해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고 세상에서 돈 버는 것이 최고라고 큰 소리 치는 자들은 진짜로 돈을 벌게 해준다. 돈을 벌어 형통하는 것이 어떻게 벌인가 싶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바로 벌이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는 세상에서 어떤 부정한 방법이라도 동원해 돈만 모으려 든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상실한 마음과 더럽고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 두어 그에 따르는 추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게 되는 것만큼 사실은 더 무서운 벌은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아무리 제 멋대로 배교해도 당신의 뜻만은 절대 변경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이루신다. 하나님의 역사가 기계적으로 혹은 우연히 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모든 것을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 완벽하게 실현하여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신다.  

하나님의 은총

그래서 하나님의 징벌을 내리는데 간과해선 안 될 또 다른 절대적인 원칙이 하나 있다. 불신자와 당신의 백성에 대해 징계의 원칙이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불신자에게는 벌을 더 세게 내리고 신자는 사정을 봐준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불신자에겐 현실적으로는 아무 벌을 내리지 않고 그대로 두신다. 단지 그들과 아무 관계가 없을 뿐이다.

신자에게 내리는 벌은 불신자의 것과는 정반대여야 한다. 불신자에겐 아무관계를 맺지 않고 그들 원하는 대로 두었다. 신자에겐 당연히 그 관계를 유지한 채로 당신이 원하는 대로 벌을 내려야 한다. 나아가 그 관계를 잘 유지하려니 현실적으로는 징벌이 더 엄정해질 수밖에 없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12:5,6) 남의 아들은 아무리 잘못해도 자기와 아무 관계가 없으므로 함부로 야단칠 수 없다. 그러나 자기 아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더 야단쳐야 한다. 또 사랑하는데도 더 엄하게 야단치는 이유는 당연히 아들이 그 잘못을 고쳐서 올바르게 되기 원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야에서 불신앙과 배교의 죄를 범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아무 벌을 주지 않았다. 광야에서 죽게 해달라는 대로 그들의 욕심과 상실한 마음에 따르도록 40여년을 버려두었다. 불신자의 경우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록 인간의 눈에는 환난이 끝이 없어서 마치 하나님이 자기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은 듯이 보일지라도 그 분 쪽에선 그렇게 하는 법은 결코 없다. 신자를 절대 무심하게 방치하지 않고 그분의 의롭고 강한 손이 붙들고 있다. 고난의 기간 동안에도 하나님의 은총은 변함없이 베풀어진다. 신자가 힘들어 하므로 더 큰 권능으로 함께 해 주신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물과 먹을 것이 없는 곳이다. 낮에는 한여름의 무더위보다 더 찌고 밤에는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광야 생활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무려 40년간이 생존해 내었지 않는가? 하나님이 그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붙들고 있지 않았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민족이 광야를 방황했다면 틀림없이 금방 다 죽었을 것이다. 가데스 바네야로 벌을 받은 자는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였다. 그럼 40년을 생존했으니까 최하 60살 까지는 다 살아남았다는 의미다. 당시로선 그것도 광야에선 아주 장수한 셈이다.

모든 인간이 가장 소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힘들게 노력하지 않아도 먹고 마실 것이 해결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놀고먹을 수만 있다면 한이 없을 것 같다. 광야 40년 동안에 이스라엘이 뚜렷하게 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땅을 갈아 씨를 뿌린 적도 없다. 양이나 가축을 키운 것도 아니다. 그저 아침에 일어나면 구름 기둥이 장막 위에 머물지 떠날지만 바라보고 그대로 따른 것뿐이었다.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진행하였고 구름이 머무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혹시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있다가 아침에 그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그들이 진행하였고 구름이 밤낮 있다가 떠오르면 곧 진행하였으며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유진하고 진행치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진행하였으니.”(민9:17,21,22)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아무 일을 하지 않았어도 그들이 먹고 마실 것을 다 챙겨주셨다. 반석에서 생수를 내시고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다.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단순히 행선지를 가르쳐주는 인도자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다. 낮의 뜨거운 햇빛과 밤의 차가운 날씨를 가려주는 보호막을 겸했다. 비유컨대 냉난방 시설이 되어 있는 곳에서 먹고 마실 것에 부족한 것 없이 지냈다는 뜻이다. 그것도 무려 40 년간을 말이다.

나아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수많은 금은보화를 챙겨왔는데도(출12:35,36) 이방 족속이나 광야에 출몰하는 그 흔한 도적 떼로부터 습격 받지 않았다. 하나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지켜주셨기 때문이다. 아마 이방족속도 잘 가지 않는 깊숙한 광야로 인도했기에 그들이 공격할 마음을 아예 먹지 못했을 것이다. 또 가나안 족속들이 애굽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 사건을 익히 알고 있어서 도리어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수2:9-11) 무장이 제대로 되지 않은 이스라엘 자손으로선 천만다행이었다.

하나님이 광야 40 년간 이스라엘에게 허락한 모든 외적 조건은 어느 모로 따져도 환난이라기보다는 너무나 큰 은혜였다. 그들이 광야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에 의해서였다. 요컨대 하나님이 그들을 벌을 주었다기보다는 징계에 감쳐져 있었지만 큰 축복을 베풀었다. 당신의 말씀을 잘 키는지 시험하려고 모든 조건을 그에 합당하게 만드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험은 신자를 나쁘고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어서 죄를 안 짓고 믿음으로 잘 인내하는지 테스트 해보는 방식이어야만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아무런 실제적인 어려움은 없었지 않는가? 또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대로 순순히 따랐다.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광야 사건은 시험으로 성립될 조건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이스라엘이 그 시험을 잘 통과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시험이 신자가 힘든 상황을 선으로 이겨내는 모습으로만 이뤄질 것이고 또 그래야 한다고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실은 편한 상황에서 이뤄질 때가 더 많다. 솔직히 나쁜 상황은 신자라면 믿음의 성숙이나 하나님에 대한 헌신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매달린다. 지은 죄도 회개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문제는 오히려 아무 문제없이 편할 때다.

따라서 악한 상황과 편한 상황에서의 하나님의 시험은 그 성격을 달리 한다. 악하고 힘든 상황은 사흘 굶어서 남의 집 담장 넘지 않을 자 없다는 속담처럼 과연 그런 형편 하에서도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반면에 편안하고 풍족한 상황에선 인간은 구태여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당신을 제대로 찾는지 보길 원하신다.  

물론 이스라엘이 방황했던 광야는 겉으로만 보면 지내기에 힘든 열악한 환경이었다. 인간이 무슨 노력을 해도 먹을 것을 생산해 낼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먹을 것과 거주할 곳과 냉난방 시설은 갖추어 주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백성에게는 광야는 사실은 힘든 곳이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수5:12) 가나안 땅에 입경해서 그곳의 첫 수확을 얻을 때까지 만나를 먹을 수 있어서 전혀 굶지 않았다는 뜻이지 않는가?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사십년 동안에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릍지도 아니하였던 것이다.(신8:4)

떡과 말씀에 대한 오해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는”(신8:3) 시험의 내용은 흔히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뜻이 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떡’은 물질이 풍부한 것이며 ‘말씀’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선하게 사는 것이라고만 단순하게 생각한다. 물질을 추구하느라 하나님 계명을 어기고 죄를 범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질을 추구한 적이 없지 않는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며 살인, 강도, 간음, 거짓말 한 적도 없다. 이미 금은보화를 풍부하게 갖고 있었고 먹고 마실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이 범한 죄는 모세의 지도력에 대해 끝없이 불평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에 대해 원망만 터뜨렸다. 왜 하나님이 이런 곳으로 몰아넣는가, 왜 아무 맛도 없는 만나만 먹게 하는가, 고기는 왜 안 주는가, 조금만 주려도 조금만 허기져도 모세를 못살게 닦달했다.

언뜻 보면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죄를 범한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때마다 만나, 메추라기, 생수로 즉시 해결해 주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불평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다른 말로 당장에 먹고 마실 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환경과 여건이 자기들 기분에 도저히 안 찬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있는 중에 말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문자적으로 적어 놓은 계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라고 했다. 하나님이 신자로 몸담게 하시는 모든 환경과 맞닥트리게 만드는 사건과 사람들 모두를 일컫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끄신 것이 분명하면 그곳이 광야이든, 애굽의 노예살이이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든, 그에 순복하고 감사함으로 반응해야 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도 단순히 물질의 풍부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반대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인도에 따르기보다는 스스로 자기 인생을 꾸려 나가려는 태도다. 무엇이든 자기 뜻과 기분대로만 하려는 뿌리 깊은 죄성이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도 자기가 원하는 때와 방식으로만 이뤄져야 한다는 너무나도 완악한 고집이다.

하나님은 비록 이스라엘로 광야에서 방황하다 죽는 엄정한 징벌을 내리셨지만  세상 어느 민족도 받지 못한, 아니 전혀 알지도 못하는 놀라운 은총으로 함께 하셨다. 어쩌면 그런 방황 중에도 그들이 다시 가데야 바네야로 진군하겠다고 회개하고 일어섰다면 더 빨리 가나안으로 입경시켰을 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까지 원하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 만나를 주신 당신의 뜻만은 알아주기를 원했다. 당신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의 궁극적인 목적은 항상 구원이며 또 그러기 위해선 신자의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그 진리를 말이다.  

환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징벌 가운데 신자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분이 신자의 회개를 더 기다리신다. 신자가 고난을 인내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신자의 배교와 불신앙을 인내하시는 것이 더 힘들고 안타깝다. 신자는 자신이 자라는 것보다 고난의 종결에만 관심을 쏟지만 하나님은 고난을 더 보태더라도 신자의 성숙을 원하신다.

만나 시험의 본질은 과연 이스라엘이 먹고 마실 것에 부족함이 없을 때도 하나님을 제대로 경배하는지 보겠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신자가 도저히 견디다 못해 어쩔 수 없이 당신 대신에 재물부터 추구해야만 할 만큼의 극심한 궁핍으로는 좀처럼 몰아넣지 않으신다. 신자가 고난에서 구원받으려 기도하는지 안 하는지만 알아 보려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대신에 그분은 신자를 어떤 곳, 어떤 상황으로 인도하더라도 과연 당신께 진정으로 순복하고 제대로 경배할 것인지 가장 알고 싶어하신다. 신자들이 흔히 “지금 제 코가 석자이니까 조금 형편이 나아지고 여유가 생기면 그 때 가서 열심히 봉사하고 경배 하겠습니다”라고 핑계 되는 것이 아주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궁핍하여 재물이 없을 때 보다는 반대로 넘쳐날 때 오히려 하나님을 외면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하나님에 대한 인류 최초의 배교도 하나 부족함이 없는 낙원에서였지 않는가?

따라서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은 항상 동일하다. 도덕적인 죄를 짓도록 일부러 더럽고 추한 상황으로 몰아넣지 않으신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는지 보려고 시험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찾을 것인지,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지만 보길 원하신다.  

광야의 만나 시험은 가데스 바네야의 죄의 연장선 상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데스에서 물질을 밝히느라 윤리적 종교적 죄를 지은 것이 아니었다. 만약 정말로 물질을 밝혔다면 오히려 가나안으로 쳐들어갔어야 했다. 대신에 그들은 전쟁은 해보나마나 빤히 질 것이므로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거나 광야에서 죽겠다고 나섰을 뿐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이렇게 힘들게 만들 것 같으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포기해도 좋으니 차라리 하나님을 따르지 않겠다고 했다. 하나님이 힘들게만 안 하면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먹고 마실 것에 부족한 것이 없으면 하나님 하라는 대로 다 하겠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정말로 원한다면 바로 그것을 두고 시험을 해보자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먹고 마실 것에 부족한 것이 없었는데도  끝까지 하나님을 제대로 경배하지 못했다는 것이 광야 40년의 결산서였다.

신앙생활의 본질

인간은 주위 여건과 상관없이 심지어 아무리 편해도 무조건 자기 뜻대로만 하고 싶어 하는 존재다. 세상만사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신자가 된다는 의미의 본질은 바로 그 근본적인 생각을 거꾸로 바꾸는 것이다. 주위 여건이 어떠하든 자기 뜻은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전 생각이 어지간해선 바뀌지 않는다. 원죄로 인간의 출생과 함께 따라오는 인간의 본성 그 자체다. 다른 말로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도 가장 고치기 힘든 습성이다. 당연히 하나님은 신자가 가장 먼저 그리고 중점적으로 바로 그것을 고치길 원하신다. 그래서 그 겉모습이 환난이든 평안이든 또 그 내용은 징벌이든 은혜이든 하나님이 신자에게 직간접으로 베푸시는 모든 섭리와 은혜를 오직 그 본성을 고치는데 초점을 맞추신다.

요컨대 하나님이 신자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도덕 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 정확하게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선하고 의로우신 절대자를 절대적으로 믿고 경배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 생각과 판단으로는 불평불만이 자기도 모르게 따라 나오는 상황이라도 그분의 보호와 인도에는 그 분만의 너무나 선하고 의로운 뜻이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서 완전하시고 공평하시다. 인간의 죄악을 다루는 모습도 신자와 불신자에게 차별대우를 하지 않으실 만큼 엄정하시다. 오히려 신자들을 더 엄격하게 다루신다. 그분의 궁극적인 목표는 당신이 신자의 하나님이자 아버지가 되며 신자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이자 자녀가 되는 것뿐이다.

또 그런 뜻이 당신의 모든 섭리와 사역에 완벽하고도 세밀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백성의 칼에 죽는 것을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보다 더 무서워하자 비록 징벌하긴 하셨지만 정말로 이방 족속의 칼에는 죽게 하지 않았다. 또 극한적인 광야로 내몰았지만 냉난방과 먹고 마실 것은 마련해 주셨다. 당신의 자녀들이 도덕적으로 선해지기 이전에 당신의 품 안에서 순복하며 사는 것을 먼저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신자더러 물질로 인해 죄에 빠질 것인지 아니면 죄를 행하지 않을지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하지 않는다. 항상 하나님과 신자 자신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신다. 인간이 물질에 넘어가지 않고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는 보장은 결코 없다. 반면에 바울처럼 부요에 처하든 궁핍에 처하든 자신보다 하나님을 먼저 택할 때라야 죄에서 당당하게 자유할 수 있을 뿐이다.  

기독교 신자 만은 물질을 멀리하고 도덕적 종교적으로 선하고 거룩해지려 신앙 생활을 해선 안 된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든 자기 방식으로 살려는 습성부터 완전히 버리고 자기는 살든지 죽든지 간에 오직 자기를 통해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길 소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다른 말로 비록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만으로도 살아도 진심으로 감사할 것인지, 자기 기분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 의심, 심지어 배교할 것인가 만이 진정한 신자 됨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마음에 안 들어도 신자니까 억지로 감사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지금 현재 자기에게 허락하신 환경과 그 일어나는 일 모두가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광야라고 확신하며 살라는 것이다.

나아가 삶의 모든 세밀한 구석까지, 또 단 한 순간의 누락도 없이 그 모두가 하늘에서 내려주신 만나임을 믿고 감사해야 한다.   http://www.nosuchjesus.com

 


 

왜 하나님은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는가?(신 8:1-10)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간 살았습니다. 막판에는 애굽 사람들의 핍박으로 인해서 고통이 심했습니다. 고통스러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자 모세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지만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광야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지중해 바다를 끼고 블레셋지경 지금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거주하는 가자 지구 쪽으로 걸어서 가나안으로 갔다면 1주일 정도면 들어갈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빠른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광야를 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나이 반도로 인도 하셨습니다. 시나이 반도는 사막지대로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 사람이 살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물이 없습니다. 사람이 물이 없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그곳은 사막지대 이므로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양식이 없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셋째로, 일교차가 너무 심합니다. 낮에는 섭씨 45도 이상의 고온이고 저녁에는 쌀쌀하게 추운 날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길로 인도 하셨던 것입니다.

 

   광야를 통과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의 본보기입니다. 고전 10:11에 보면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본보기이며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향해 가는 과정 가운데 광야를 통과했던 것처럼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도 광야와 같은 과정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광야를 통과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상황과 환경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실 만큼 우리들을 사랑하시는데 왜 우리가 당하는 고난 중에 침묵하시는지 이해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신 것처럼 육체도 질병이 없이 건강하게 하시고 물질적인 어려움도 없이 풍족하게 하시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하시면 좋을 텐데 오히려 반대되는 일들이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를 걷게 하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살펴보면서 왜 우리들이 광야와 같은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겸손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기 위해서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것입니다. 2절, 3절, 16절에 보면 3번이나 ‘너를 낮추시며’라고 말씀합니다.
   낮추시는 이유는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겸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초라함을 발견하게 하셔서 겸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고난입니다. 고난을 통과 하면서 세상에는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겸손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위에서 말한 두 가지 방법을 다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함을 지니게 하셨던 것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광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미드바르’이고 동사형은 ‘다바르’입니다. 이 다바르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인 ‘지성소’라는 용어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시면서 그들을 낮추셨고 그들을 겸손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 하면 고난을 떠올리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광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세례요한은 빈들에 거했는데 그 빈들은 유대광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금식하셨습니다.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영적 싸움을 한 후 지쳐있을 때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광야는 고난의 장소입니다. 원어적으로 보면 ‘아무 것도 없음의 자리’라는 뜻이 있습니다. 환경적으로 견디기 힘든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환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의 장소인 광야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겸손해 졌던 것입니다.


   바울이 바울 되기 전에 그는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교만하기 짝이 없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권력과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했으니 학문적인 면에서도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서도 바리새인이었으니 종교적으로도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배경이 그를 교만하게 만들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를 사용하시려고 계획하셨습니다. 그래서 정오의 빛 보다 더 밝은 빛과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으로 그에게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주셨고, 그 결과 눈이 멀어 사흘을 보지 못하는 고난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 이스라엘을 겸손하게 하셨던 것과 동일한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작은 자인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또 눈이 멀게 된 고난을 통해서 그의 자아를 박살내신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사울은 겸손하게 되었고 예수님을 믿게 됐으며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당할 때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낮추시고 겸손하게 하십니까?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겸손이 복이기 때문입니다. 잠 22:4입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또 하나의 이유는 교만이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잠 16:18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2. 시험하시려고
   2절, 16절에 보면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는 또 하나의 목적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는 부르짖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째는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고난이 찾아오면 ‘시험이다’라고 생각하고 잘 통과해야 합니다. 대학입시를 잘 통과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지만 입시를 잘 통과하지 못하면 재수를 하든지 취직을 해야 합니다. 입사 시험을 잘 통과하면 직장에 취직이 되지만 입사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백수생활을 해야 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광야 시험에 합격하면 가나안에 들어가지만 광야 시험에 불합격하면 합격할 때가지 광야생활을 통해서 고된 훈련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광야 시험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광야 시험을 통해서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기 원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광야는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 불편함이 백성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망과 불평으로 자신들의 잘못된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어느 한 집에 아버지와 아들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에게는 친구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놓고 "애야, 너는 친구가 많은가 보구나?" "예, 아버지, 저는 많은 친구를 두었습니다." "그래, 이 애비는 친구가 하나 밖에 없는데, 너는 친구가 많구나? 그런데 하나 물어보아도 괜찮겠니? 이 애비 친구는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버리는 정말 귀한 친구란다. 너의 친구들은 어떠니?" "예, 아버지, 제 친구들도 저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친구들입니다. 얼마나 의리가 많은데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너와 내가 각자의 친구들을 시험해 보면 어떻겠니?"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새끼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가마니에 둘둘 말아 넣은 다음, 짊어지고 각자의 친구 집을 방문하기로 하고, 먼저 아들의 가장 친한 친구집에 도착했습니다. 친구집에 도착한 아들은 힘차게 그 집 대문을 두드리며, "여보게 날세, 나야, 나. 내가 실수로 사람을 찔러 죽였다네. 이 시체를 잠시만 맡아 주지 않겠나? 나 자네의 가장 친한 친구야!" 안에서 그 소리를 들은 친구는 문도 열어주지도 않고 "미안하네. � ご�당신 같은 친구를 둔 적이 없네"하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상심한 아들은 그 다음 친구집에 가서 똑같이 "여보게 날세, 나야, 나. 내가 실수로 사람을 찔러 죽였다네. 이 시체를 잠시만 맡아 주지 않겠나?"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든 친구집을 갔지만, 어느 누구도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아버지 차례가 되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친구 집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는 큰 소리로 "여보게 나야, 내가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네"라는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문을 열면서 "어서 들어오게. 걱정하지 말게. 내가 자네 친구 아닌가?" 결국 아버지가 짊어지고 간 시체, 아니 새끼 돼지를 가지고 그 날 저녁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친구가 많습니까? 그러나 진실된 친구를 평소에는 구분하지 못합니다. 진실된 친구는 어려울 때에 알 수 있습니다.
   진짜 믿음은 고난 중에 알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똑같습니다. 똑같이 기도하고, 똑같이 찬양 드리고, 똑같이 봉사도 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고난과 역경이 찾아올 때, 생각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할 때, 내 마음이 힘들고 괴로울 때 사람의 믿음의 진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 때 성도들의 마음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입을 열어서 부정적인 말을 하고 교회가 시험 들게 만드는 마귀의 도구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교회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문제는 있으나 믿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하실 일을 말하며 기도하면서 교회에 힘을 보태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 때 사람들의 마음을 봅니다.
   주님은 광야 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기 원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문제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말씀대로 하는지 안 하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광야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광야 백성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백성들의 생각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동과 거할 곳을 결정하셨습니다. 이 때 이들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심대로 순종하고 따라오는가 아니면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는가를 보신 것입니다. 또 광야 백성들의 양식으로 매일 아침 만나라는 특별한 양식을 이슬처럼 내려주시는데 안식일에는 거두러 나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도 그들이 말씀대로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알려하심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시험을 보고 있습니다. 성경과 성령의 음성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가르쳐주십니다. 이 때 하나님은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가 아니면 자기 맘대로 사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린아이가 어른이 시키는 대로만 해도 어린아이가 생각할 수 없는 지혜로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지혜로운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는지 그렇게 하지 않는지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문제를 만나면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문제를 던져 주실 때 그것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도 우리의 기도 제목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기도 응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를 통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신 것처럼 고난 중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시험하십니다. 그 마음이 어떠한지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지 여부를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3.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광야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알기를 원하셨을까요?

 

   첫째,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셨고 만나를 먹이신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광야생활은 말씀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홍해를 만났을 때는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라고 말씀하셨고 모세가 순종하자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홍해는 말씀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마라의 쓴물을 만났을 때는 나뭇가지를 지시하셨고 그 나뭇가지를 물에 던지지 쓴물이 단물이 되었습니다. 마라의 쓴물도 말씀으로 단물이 된 것입니다. 말씀을 받고 말씀에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리했습니다.


   광야에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먹을 것 때문에 걱정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 하늘에서 만나가 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말씀대로 하늘에서 40년 동안 만나가 내렸습니다. 백성들은 만나를 먹은 것만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필요 이상의 만나를 거두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많이 거두어서 보관해 놓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겨둔 것은 상해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6일에는 다른 날 보다 두 배를 거두고 제7일에는 거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날에는 남은 만나가 상했었는데 신기하게 안식일에는 상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험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다는 확신을 갖게 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좀 더딘 것처럼 느껴지기는 해도 그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스승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은 오래 전에 아들의 인생에 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답니다. 아들은 자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살아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지금은 그 아들이 하나님께서 목사님에게 들려주셨던 말씀 그대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공급하신다는 것을 알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광야 생활을 한 사람들이 장정만 약 60만 명이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200만 명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사람들을 40년간 먹이셨습니다. 그것도 광야에서 말입니다. 이 일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사실 이 기적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하다고 근심하거나 절망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만 있다면 위대한 일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큰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에 도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풍성하게 공급하신 이유는 그분은 우리의 영혼의 친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이들의 학원비를 공급해줍니다. 아이들의 용돈도 줍니다. 아이들의 먹을 것과 입을 것도 공급해줍니다.우리아이들이 착하게 사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공부를 얼마나 잘하느냐 못 하느냐도 관계없이 공급합니다. 그 아이들이 제 아이들이기 때문에 그 아이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 없습니다.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돈을 더 잘 벌기 때문에 자기는 다른 사람들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풍성하게 사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능력을 누가 주셨는가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능력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재물 얻을 능력만이 아니라 모든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식을 낳고 못 낳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야곱의 아내 라헬이 자식을 낳지 못하다가 결혼한 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자식을 낳게 되었습니다. 창 30장에 보면 라헬이 자식을 잘 낳는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야곱의 말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식도 하나님께서 주신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공급하시며 모든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4. 마침내 복을 주시려고
   16절입니다.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것은 마침내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애 3:33에 보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광야 생활을 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우상숭배에 빠졌던 것입니다.


   지금 시대에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도 비슷합니다. 아버지께서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해서 훈련을 시키는데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떠나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 나이가 몇 살인데 지금 훈련하셔서 언제 복을 누리겠느냐고 말합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지만 진리적이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무엇입니까?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영원한 세계에 비교하면 일순간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만 생각한다면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겠습니까? 영원한 세계가 있기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 아닙니까?


   아이들에게는 학교 다니고 학원 다니는 일이 피곤하고 괴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부모들은 싫다는 학교와 학원을 억지로라도 보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모가 아이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 아이가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하게 하는 것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 잘되라고 하는 일 아닙니까!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세요. 우리를 괴롭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잠간 힘들지만 그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마침내 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지금 광야 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광야를 지나면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지금 광야 생활이 힘들다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오. 곧 하나님이 예비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곳에 도착하게 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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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생활의 교훈(신8:1-20)

 

[1-2절]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 . .

모세는 또 말했다.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강조하신 바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라는 것이었다. 그러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살고 번성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행위 즉 우리의 삶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죄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을지라도 결국 행위의 문제이며 삶의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순종하여 거룩하고 선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럴 때 복을 얻을 것이다.

 

모세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40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40년의 삶을 살게 하신 것은 물론 그들 조상들의 죄 때문에 내린 징벌이었지만 또한 그 자손들을 낮추시고 시험하셔서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시험에서 자신들의 심히 부패함과 무능력함을 드러내었다. 그들의 역사는 인간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력을 증명하는 역사이었다.

 

[3-6절]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 . . .

모세는 또 말하였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으로 만나를 내려주셨다. 그것은 그들이 단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므로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은 일용할 양식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의지해야 할 것은 단순히 떡이 아니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모세는 또 “이 40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의복이 해어지지 않게 하셨고 그들의 발이 부릍지 않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식주의 문제를 주관하시며 공급하시고 또 우리의 건강까지도 주관하시고 지켜주신다.

모세는 또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고 말했다. 부모가 자녀를 징계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하셨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를 공경해야 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켜 행해야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우리가 범죄하는 경우에 징계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수록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켜 행해야 한다.

 

[7-10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 . . .

모세는 또 말하였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레츠 토바)[좋은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噴泉)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에레츠 토바)[좋은 땅]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예비하신 땅은 ‘좋은 땅’이었다. 골짜기나 산지나 시냇물과 샘이 있어 물이 많고 밀과 보리 등의 곡식을 재배할 수 있고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 등의 열매가 풍성하고 꿀도 있고 또 철과 동이 있는 땅이었다. 가나안 땅은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땅이었다.

 

[11-18절]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 . . .

모세는 또 말하기를,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고 하였다. 사람은 배부르고 평안하고 부유할 때 마음이 교만해지기 쉽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다.

모세는 또 말하였다.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 되었던 상태에서 건져내어 주셨고,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땅을 통과하도록 인도하셨고 간혹 반석에서 물을 내셨고 날마다 만나를 일용할 양식으로 내려주셨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은 그들을 낮추시는 겸손 훈련의 과정이었고 그것은 결국 그들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모세는 또 말하였다.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사람은 재물의 여유를 가질 때 자기의 능력과 힘으로 얻은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모세는 그런 마음을 경계하였다. 그들이 가나안 땅의 좋은 것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 때문이었다.

 

[19-20절]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 . . .

모세는 또 엄숙하게 경고하였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다른 신을 좇아 섬기면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신 가나안 족속들처럼 그들도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본장은 광야 생활의 교훈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을 회고시키면서 교훈을 주었다. 그가 준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의 종살이와 40년 광야 생활의 어려웠던 때를 기억하라고 교훈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큰 능력으로 건져주셨고 또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광야에서 지켜주셨고 인도해주셨다. 그는 그들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어주셨고 날마다 만나를 일용할 양식으로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과거에 그들의 어려웠던 시절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을 때에 죄 가운데 방황하였던 우리의 과거의 날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부르셨고 회개하고 예수 믿게 하셨고 새 삶을 주셨고 또 많은 은혜와 복을 주셨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둘째로, 그는 평안할 때에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교훈하였다. 사람은 배가 부르고 물질적 여유를 얻고 환경적 평안을 누릴 때 마음이 교만하기 쉽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특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육의 복과 평안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것을 잊어버리기 쉬운 것이다. 사람이 몸이 아프다거나 물질적 궁핍이 있다거나 환경적 어려움이 있다거나 가정적 문제, 자녀들의 문제가 있을 때는 하나님을 찾는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안정되었을 때는 하나님 없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안할 때가 위험한 때이다. 사람은 그때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셋째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면 멸망할 줄 알라고 교훈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살면 멸망한다는 이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이치이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마다 죄를 떠나야 한다.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예수 믿는다고 하는 자가 계속 죄 가운데 산다면 그는 멸망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경고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은 변화된 인격과 생활로 나타난다. 죄만 지으면서 구원은 받아 놓았다는 그런 유의 구원은 없다. 모든 사람은 다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 삶을 살아야 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떠나면 그는 영원히 멸망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늘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모든 계명들을 지켜 행하라고 교훈하였다. 그것이 율법의 요지이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필요한 교훈이다.<김효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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