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것(신10:1-22)
[1-5절] 그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 . . .
모세는 두 번째 호렙산에 올라간 일을 말한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내가 싯딤나무로 궤를 만들고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 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두 번째 두 돌판은 모세가 직접 다듬어 만들었고 하나님께서 그 판에 직접 십계명을 써주셨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친음성으로 선포하셨고 직접 두 돌판에 써주신 내용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온 인류의 바른 삶을 지시하는 말씀이다.
[6-11절] (이스라엘 자손이 브에롯 브네야아간에서 발행하여 . . . .
모세는 그 후의 일을 조금 언급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브에롯 브네야아간에서 발행[출발]하여 모세라에 이르러서는 아론이 거기서 죽고 거기 장사되었고 그 아들 엘르아살이 그를 이어 제사장의 직임을 행하였으며 또 거기서 출발하여 굿고다에 이르고 굿고다에서 출발하여 욧바다에 이른즉 그 땅에는 시내가 많았었으며 그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이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고 그 일은 오늘날까지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레위는 그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
또 그는 이어서 하나님께서 그때에 자기의 말을 들으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멸하지 않으셨음을 증거하였다. “내가 처음과 같이 사십 주야를 산에 유하였고 그때에도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들으사 너를 참아 멸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서 백성 앞서 진행하라. 내가 그들에게 주리라고 그 열조에게 맹세한 땅에 그들이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하셨느니라.”
[12-13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 . . .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요점을 강조하였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모세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경외하고 섬겨야 할 하나님을 “네 하나님 여호와”라고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속(救贖)하셨고 자기의 친 백성을 삼으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다.
12-13절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다섯 가지 말로 표현하였다.
20절의 두 가지를 더하면, 그는 본장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모두 일곱 가지 말로 표현한 셈이다.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12절,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이것은 앞장들에서 여러 번 이미 증거된 바이다. 신명기 5:29, “다만 그들이 항상 이 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6:2,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6: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6:24,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1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즉 두려워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다. 그러므로 잠언 1:7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인생의 근본적 지식이 있는 자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자는 근본적 지식이 없는 자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의 주인도 모르고 세상을 사는 자요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모르고 인생을 사는 자이다. 또 그는 악을 떠나고 참된 선을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잠언 16:6은 사람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된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는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도를 행하는 것이다. 12절, “그 모든 도를 행하고.” 이것은 앞에서도 이미 강조한 바이다. 신명기 5:32-33,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6:3,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법도를 행하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12절, “그를 사랑하며.” 이것은 신명기 6:5에서 읽은 바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우리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사랑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할 가장 가치 있는 분이시다.
넷째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12절,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신명기 6:13도,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라고 말했고, 본장 20절도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라고 말했다.
다섯째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는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다. 13절,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규례는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들을 다 지키고 준행해야 한다. 신명기 5:29, “[그들이]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받기를 원하노라.” 5: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6:3,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 6:24,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14-19절]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 . . .
모세는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음을 말한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모세는 또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마음의 할례, 즉 심령의 변화가 중요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몸의 할례는 받았으나 늘 목을 곧게 하였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렇게 하지 말고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세상의 많은 신들 중에서 참 신이시요 세상의 많은 주들 중에서 참 주이시다. 그는 크시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마땅히 그 분 앞에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엎드리며 그를 섬겨야 한다.
모세는 특히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고 특히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를 선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였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伸寃)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하나님의 법은 매우 의롭고 선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뇌물을 받지 않으시고 고아와 과부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시고 어려운 자들에게 먹을것과 입을 옷을 주시는 자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도 공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20-22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 . .
모세는 또 하나님의 뜻을 두 가지 더 첨가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가 목도한 바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애굽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70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여섯째로,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바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친근히 하는 것이다. 20절, “그에게 친근히 하고.” ‘친근히 한다’는 원어(다바크)는 ‘꼭 붙잡다’는 뜻이다(BDB, KJV, NASB, NIV). 신명기의 다른 곳들에서는 ‘부종(附從)하다’는 말로 번역되었다. 신명기 11:22,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부종하면.” 13:4,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30:3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위험한 길을 갈 때 어린아이가 아빠를 꼭 붙잡고 따라가듯이, 우리는 험한 세상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을 멀리하지 말고 가까이하며 꼭 붙잡고 따라가야 한다.
일곱째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다. 20절,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 신명기 6:13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하게 말하며 행동하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과 보응 받을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본장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증거한다. 모세는 그것을 일곱 가지의 표현으로 증거하였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도를 행하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넷째로,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다섯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다. 여섯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친근히 하고 꼭 붙잡는 것이다. 일곱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다.
실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만 하나님의 모든 도를 행하고 마음을 다해 그를 사랑하고 그를 섬기고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킬 수 있고 그를 꼭 붙잡고 살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마음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고 섬기며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고 행하며 그를 꼭 붙잡고 따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삶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은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삶인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신명기 10:12-22
저는 금년 봄을 맞이하면서 제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봄을 봄답게 살기 위하여 내게 필요한 두 가지 봄, 하나는 ‘하나님을 바라<봄>, 또 하나는 이웃을 돌<봄>’”
아주 멋진 표현이 아닙니까? 제가 말해 놓고도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이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평생 봄이네요. 바라봄과 돌봄을 갖고 살아가야 하니까요.” 하나님을 바라봄, 이웃을 돌봄으로 이 봄날을 풍요롭고 넉넉하게 은혜가운데 살아가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느 가정에 연세가 많으신 아버지가 임종이 가까워지면서 온 집안 식구들이 아버지를 극진히 간호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손가락에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었습니다.
출가한 딸이 와서 “아버지, 돌아가시게 되면 그 반지 저 주세요.” 하고 부탁합니다. 아버지는 “오냐.” 하고 대답합니다.
이번에는 며느리가 “아버님, 돌아가시게 되면 그 반지 저 주세요.” 하고 부탁합니다. 역시 며느리에게도 “오냐, 그러마.”
하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 죽을 때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그 반지를 준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끼고 있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결국 반지 덕분에 그동안 효도를 잘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반지 하나 가지려고 딸과 며느리는 아버지, 시아버지 생전에 잘해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 확인해보니 그 다이아반지는 가짜였습니다.
여러분, 효도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유산을 바라거나 어떤 대가를 바라고 효도한다면 얼마나 불쾌한 일입니까? 우리가 선한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 선한 일이 칭찬을 듣기 위한 것이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수단이라면 정말 위선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좋은 일을 하고 칭찬 받을 수는 있지만, 칭찬 받기 위하여 좋은 일을 하는 것은 정말로 아름답지 못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보면 대체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목적을 나 자신에게 두고 있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의 동기가 나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구하는 자기중심적인 신앙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과 생활이 분리된 율법적인 신앙으로 신앙생활 자체가 즐겁지 않고 부담감과 책임감으로 다가와 자기 자신을 너무 괴롭게 만듭니다.
셋째. 하나님을 위해서 나를 사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신앙생활이 내 삶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 소원보다 하나님의 소원, 내 기쁨보다는 하나님의 기쁨, 내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것이 마땅한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로마서 12:2에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 윤리의 총 강령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출발점이요, 신앙생활의 원칙이요, 믿음의 기초입니다.
예수님 공생애 당시에 예수님과 유대인들과의 의견충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꿈과 유대인들의 꿈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욕구를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시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민족적인 욕구는 나라가 독립되기를 원했고, 개인적인 욕구는 자신들의 소원이 성취하기를 원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드디어 메시아가 왔다고 하니까 ‘이제는 됐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자기 출세를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 갔다고 증거 합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내 중심으로 내 욕망이 목적이 되어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런 소원을 가지고 섬기다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더디다고,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그래도 그 중에 약간의 생각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려고 노력했습니다. 율법과 계명도 지켰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게 된 중요한 동기는 진실 된 신앙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저주하실까봐 무서워서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율법을 억지로 지켜 갔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나쁜 폭군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아주 무서운 하나님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한 일을 많이 하고, 하나님께 열심히 예배하고,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종교생활을 나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그 목적은 보상입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함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는 보상심리, 요샛말로는 기복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보상으로 받아낼 생각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선한 일을 하고, 그렇게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합당치 않은 일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의 신명기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다섯 가지가 나옵니다. 저는 이 다섯 가지가 그 당시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12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첫 번째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경외함,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 임재 의식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나를 보시고, 나와 함께하신다고 생각하며 항상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임재를 인정하고, 생각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신성한 두려움은 영혼의 문지기라는 말이 있듯이 이것이 경건입니다. 십계명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도 경건한 마음으로, 그 앞에 나올 때에도 경건한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거리에서든 시장에서든 어디에서든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경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된 의식, 그 생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두 번째는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내 뜻을 버리고 주의 길로 나아갑니다. 세상은 넓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좁은 문 좁은 길로 갑니다. 원치 않았지만 주님 말씀이라면 주님의 뜻이라면 순복하고 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세 번째는 ‘그를 사랑하며’ 가슴은 항상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그리워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네 번째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섬기는 자세입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
다섯 번째는 13절입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계명을 따라서 행동하는 믿음의 행위를 말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 다섯 가지를 원하십니다.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다섯 가지를 다시 생각해보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절입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네 행복을 위하여’ 우리에게 요구하는 다섯 가지 계명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요, 결국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내 행복을 위하여 은혜로 내게 주신 것입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에 의해 기록된 모세5경 중에 하나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그 약속대로 가나안에 들어갈 시점에 서 있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새로운 땅에 대한 기대감을 가진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은 여러 교훈을 주셨습니다.
먼저 광야 40년 동안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해 주셨고, 또 광야에서 인간이 범한 죄를 회상하면서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을 다시 상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들어가게 될 땅에서 이 율법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어떻게 그 율법에 따라 살아야 될 것인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신명기입니다. 신명기란 “두 번째 율법”(Deuteronomy)이라는 말입니다.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을 다시 반복하고, 상세하게 확대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있게 될 상황과 미래에 있게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적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밝고 건강하며 행복한 미래를 가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행복한 미래를 소유하고 경험할 수 있을까요? 바로 이 점을 신명기에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이후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정리하고 이제 새로운 세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행복한 미래를 꿈꾸었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모세는 그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사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에서의 행복한 생활을 위한 지침, 이것이 신명기의 기록배경입니다.
때때로 부모님들이 자식을 위하여 잔소리를 합니다. 공부해라, 무엇해라, 또 무엇해라. 여러분 생각에 자녀들이 어떻게 생각하기를 바랍니까? 누구를 위한 잔소리입니까? 자녀들이 ‘어디까지나 나를 위한 것이고, 내 행복, 내 장래를 위한 것이다.’ 라고 소화해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어떻습니까? 왜 나를 괴롭히느냐고 대듭니다. 달리 불효가 아니라 이게 불효입니다. 무슨 말씀이 들려오든지 전부가 나 자신을 위해서 하시는 것이라고, 나를 사랑하셔서, 내 행복을 위하여 주시는 말씀이요 명령이라고, 그렇게 받아들여주기를 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신명기입니다.
여러분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가장 좋은 말은 “나는 당신으로 인해서 행복합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아도 내가 당신을 선택한 것은 참 잘한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 싶지 않습니까?
자녀들이 부모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싶을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의 자녀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부모님으로 인해서 저는 행복합니다.” 이런 말 한번 들어본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지요.
그런데 왜 자식들은 그렇게 불만이 많습니까? “난 이 집에 태어난 것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다.” 라고 합니다. 사실 고통스럽고, 무겁고, 괴롭고,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 빠져나갔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이에 사랑이 식어지고, 그만 실종되었어요. 그래서 짐이 무거워 진 것이고, 그래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사실 부하고 가난하고가 문제입니까? 잘되고 안 되고 가 문제입니까? 진실한 사랑이 있다면 수고 자체가 기쁨입니다. 그래서 행복의 극치를 이렇게 표현하지 않습니까? “이대로 눈을 감고 죽어도 한이 없다고” 우리에게 이런 경험이 한 번도 없다면 인생 헛되게 산 것입니다. 순간순간을 살아감에 있어서 정말 이대로 내 생애가 끝나도 한이 없어야 합니다. 왜요? 나는 지금 사랑을 받고 있으니까, 그 큰 사랑 안에 있으니까. 긴 위로의 말이 필요 없습니다. 사랑 하나만 있으면 이 고통은 오히려 즐거움이 될 수도 있고, 얼마든지 행복으로 소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5절에서 “내가 너희를 먼저 사랑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속하시고, 인도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 받는 사람으로, 많은 은혜 가운데 사는 자로 인식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내가 주는 계명, 이것은 곧 너희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또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계명을 잘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근본적인 신앙을 회복하고자 할 때 십계명을 외우곤 합니다. 십계명 참 중요한 핵심적인 율법이지요. 그런데 십계명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십계명의 서론입니다. 출애굽기 20:2~3에 보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실 때에 바로 그 서두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게 말라.” 바로 이 대 전제가 중요한 것입니다. 너희가 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고, 이 율법을 지켜서 가나안에 들어간다, 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구원하여 낸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이 얼마나 귀중한 말씀입니까? 나는 너를 구원했다, 그런고로 이 명령을 지키라, 이 명령은 너희 행복을 위한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호세아서에 나오는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자신이 원하지는 않았지만 창녀와 결혼을 합니다. 아주 프로급 창녀와 결혼을 합니다. 결혼 자체도 어려웠었는데, 고멜이라는 이 창녀는 고마운 줄도 모르고 결혼이후에도 행위가 불결하였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에 호세아는 “로암미”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무래도 내 백성이 아니다.’ 라는 의미로 이름 지은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고멜이 집을 나가버립니다. 그래서 다시 창녀가 되어서 팔려가 버렸습니다. 호세아는 내심으로는 잘되었다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호세아 3:1입니다.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를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고멜을 다시 돈 주고 사옵니다. 그리고 이 더러운 여자를 앞에 놓고 사랑을 고백합니다. 호세아 3:3입니다.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내가 너만을 사랑할 터이니 너도 나만을 사랑하라,’ 라고 합니다. '나만을 사랑하라'라는 이 말이 잘못된 것입니까? 호세아의 경우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여기에 복음이 있는 것입니다. 만신창이가 된 인간을 구원해놓고, ‘나는 너만을 사랑했다, 너도 나만을 사랑해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람에게는 여섯 가지 욕구가 있다고 아브라함 네슬로우는 말했습니다. 첫째는 안정의 요구, 평안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둘째는 소속의 욕구, 어디엔가 소속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셋째는 인정의 욕구, 남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입니다. 넷째는 경험의 욕구, 무엇인가 경험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 다음은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마지막으로 여섯째가 가장 중요한 것인데, 이것은 사랑의 욕구입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고,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이 한창 명성을 떨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덴이라는 곳에 있던 플라톤에게 어떤 젊은 사람이 찾아와서 제자가 되겠다고 자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내로라 하는 유명한 분들을 찾아갔었지만 배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민 했었는데 이제야 제 스승님을 바로 만난 것 같습니다. 당신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 말을 들은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어느 스승이라도 그 스승을 사랑해본 일이 있습니까? 스승을 존경하고 사람함이 없이는 어떠한 지식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야 그 뜻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야 그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서야 말씀의 심오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이란 그를 기뻐하는 것이요, 그를 행복케 하는 것이요, 말씀 듣는 것을 즐기는 것이요, 그의 다스림을 가장 행복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를 생각하는 일, 그를 명상하는 일, 그를 섬기는 일을 최고의 영광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를 위하여 수고하는 일은 그대로가 영광이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나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의 소원을 버리고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가는 것이 소망입니다. 나의 기쁨을 버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가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에 거기에 내 행복이 있고, 내 축복이 있고, 나를 향한 기쁨이 그 속에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복된 길로 가라고.
http://blog.daum.net/morningworld
누가 '나그네'인가?(신10:17-19)
나그네(wayfarer, stranger)
고향을 떠나 다른 장소에서 거주하는 사람(신10:19;창23:4;마25:43;딛1:8).
고향을 잃고 이스라엘에 사는 어느 정도 권리만 인정받는 사람(신10:19;출22:21,이방 나그네;레19:33,타국인;딛1:8).
이스라엘 사람이라도 다른 지파 땅에 머물 때는 나그네라 하기도 했다(삿19:1,우거하는 자)
한 젊은 목회자가, 성서에 보면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고 했는데, 나그네보다 더 다급 한 사람들이 있는데, 언제 나그네까지 돌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 목회자는 자기의 집과 교회 건물을 아예 노숙자(露宿者)나 부랑자(浮浪者)나 걸인(乞人)에게 내놓은 사람이다. 여관마저 갈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이 와서 자고 가고, 술 취한 사람도 와서 자고 간다는 것이 다. 술 취한 걸인의 경우는 옷을 입은 채로 대소변을 보는데, 자신이 대변이나 소변을 보았다는 사실 마저 모르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런 경우에는 옷 속의 대변이 말라서 걸음을 옮길 대마다 그 조각이 바지 사이에서 떨어져 나온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을 맞아 돌보아 주기에도 자기가 맡고 있는 교회로서는 좀 벅찬 형편이어서 아직 한 번도 "나그네" 를 대접해볼 여유까지는 없었다고 한다.
그 젊은 목사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세대차(世代差) 라는 것을 느꼈다. 나는 처음에는 그 젊은 목사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50대 후반인 나는 "나그네"라는 개념을 넓게 생각 하는데, 그래서 그가 맞이한 노숙자나 걸인을 성서가 말하는 "나그네"와 아무런 부담 없이 일치시키는데, 이 젊은이는 낱말 사이의 유사점은 극소화하고 차이점은 극대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에게는 "나그네"와 "노숙자"와 "걸인"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60년대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모 교단의 젊은 목회자들이 성만찬을 베풀면서 "포도주"와 "누룩 넣지 않은 빵"을 사용하는 대신에, 우리 고유의 "막걸리"와 "송편"을 사용한 일 이 있어서, 교계에서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그것은 다분히 토착화신학에 영향을 받은 탓이 었다. 포도주도 빵도 다 이국적인 것이므로 우리의 것인 막걸리와 송편으로 주님의 만찬을 준비하는 것이 한국적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썩 좋은 대안이 못되었 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포도주와 빵은 주식(主食)에 속한 것이었는데 반 해 우리의 막걸리와 빵이나 떡은 주식이라기보다는 주변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적절히 선택 된 대응 관계는 못 되었다. 특히 빵은 그들에게는 주식이었는데 반해,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빵이나 떡은 별식(別食)이었다.
그런데,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성경전서 표준 새번역}(1993)을 번역하 던 80년대 후반에 있었던 일이다. 한 보수교단의 젊은 목회자가 성만찬 예식을 베풀 때, "포도즙"과 "송편" 떡을 사용한 것이다. 그의 생각에 포도주(葡萄酒)는 문자 그대로 포도로 만 든 "술"이므로, 교회가 벌이고 있는 "금연금주" 절제 운동에 어긋나며, 성경에도 "잔을 들어 축사하시고..."라고 했는데, 그 잔이 반드시 포도주가 담긴 "술"잔은 아니지 않느냐는 생각에 서, 그리고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1961) 그 어디를 보아도 성만찬에서 사용된 요소가 "떡" 이었지, 결코 "빵"은 아니더라고 하면서, "송편" 떡을 고집했다는 것이다.
이 때에도 나는 세대 차를 느꼈다. 나는, 우리 {개역}의 "떡"을 "먹거리"라는 넓은 의미 로 이해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고, 지금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젊은 목회자는 "떡"과 "빵"을 절대로 혼돈하지 않고 있다.
어디 이 젊은 목회자뿐이겠는가? 식품점에 가서 '빵을 달라'고 하면 빵을 주고, '떡을 달라'고 하면 떡을 주는 엄연한 차이를 잘 알고 있는 젊은 목 사는, {개역} 성서 번역자들이 "떡"이라는 말에 함축시킨 폭넓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수 있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옛 번역자들의 어휘 이해와 현대의 독자들의 어휘 이해가 그만큼 서로 달라졌다는 점을 착안하게 된다. 이제 우리말 "나그네"는 사회적으로 어느 계층을 가 리키는 사회학적 용어라기보다는, 다분히 낭만이 긷든 문학적 표현 용어이다. "인생은 나그 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최희준의 "하숙생"이 그러하고, "오늘도 걷는다 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였네. 선창 가 고동소리 옛 임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를 부른 백년설의 "나그네 설음"이 그러하다.
성서가 말하는 "나그네"는 외국인이 아닌 자국인(自國人)에서도 있을 수 있고 외국인에게서 있을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나그네는 본토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친족이나 고향 사람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보호나 이익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쉴만한 집도 없이, 정착할 땅도 없이, 일정한 직업도 없이,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며 사는 사람들이다.
나그네를 잘 돌보아야 한다고 하는 구약의 법은, 이스라엘 역시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 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그네를 환대하도록 한 것이다. "너는 이방 나그 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니라" (출 23:9).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 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 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 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신 10:17-19).
이 러한 구절에서 보듯이 성서가 말하는 나그네는, 외교법상 보호를 받는 오늘날의 외국인과는 다른, 고아와 과부처럼 의지할 곳이 없는 사회적 피보호 대상과 늘 함께 언급되는 타국인이다. 성서의 나그네는 여행을 취미 삼아 하고 있는 무전여행자나 외국인 관광객 같은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나그네에 해당하는 사람을 예를 들라면, 코리안 드림을 가지고 한국에 밀입국하여 불법 취업을 하면서 온갖 학대를 받고 있는 제 3세계 노동자 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성서 번역을 부단하게 지속적으로 해야할 이유 중에,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말의 뜻이 바 뀌기 때문에 번역을 다시 해야 한다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성서를 새로 번역하기 이전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기존의 번역을 읽는 경우라 하더라도 "나그네"가 언급되는 문맥을 보면 그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를 아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다만 성서 독자의 머리 속 에, 전체 맥락보다는, 어떤 특수한 낱말만이 강하게 각인이 되는데다가, 그 낱말이 원어에서 지닌 의미의 영역과 번역된 말에서 지니고 있는 의미의 영역이 서로 다른 데에서 오는 의미 전달의 혼란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부랑자(浮浪者)나 노숙자(露宿者)는 돌보면서 "나그네"까지는 돌보지 못한다고 하는 한 젊은 목회자에게 그가 이미 나그네를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고, 불법 입국하여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도 성서가 말하는 "나그네"의 범주에 든다는 것을 밝 히고 싶다. <민영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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