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왕들과 이스라엘 민족(단11:33-45)
1. 로마의 등장과 세력 확보
다니엘서에는 이스라엘 민족과 연관하여 로마가 등장하는 시점이 기록되어 있다. 다니엘서 앞부분의 느부갓네살의 신상 가운데 로마제국이 나타나며, 네 짐승에 관한 환상에서도 로마제국이 나타난다. 그것을 보아 다니엘서 11장에서도 로마제국이 예언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학자들 가운데는 다니엘서 11장 후반부를 셀류쿠스 왕국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 연관지어 해석하는 자들이 있다. 또한 동일한 본문을 종말에 등장할 적그리스도와 연관짓는 자들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11장 33절 이하의 예언을 로마제국과 연관지어 해석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이는 다니엘서 12장 1절에서 시작되는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라는 말씀 가운데 ‘그 때에’가 가리키는 시기와 연관된 문구해석을 위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11장 후반부의 예언이 메시아 강림에 가까운 때 발생하는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의 11장 30절에서는 깃딤(Kittim)의 해군이 셀류쿠스 왕국을 공격하는 내용이 나왔었다. 그 깃딤은 곧 로마를 일컫고 있다. 따라서 깃딤 즉 로마 군대의 등장은 이후 로마공화국 및 로마제국에 관련된 설명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에 대한 예언적인 성격이 포함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BC192년 ‘시리아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그 뒤부터 셀류쿠스 왕국에 강한 압력을 행사했다. 그 때 안티오쿠스 3세의 아들들을 인질로 잡아 로마로 데려간 것은 그 후 정국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제공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헬라의 영향을 받던 지역들이 서서히 로마인들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기에 이른다.
그리고 BC167년 로마가 안티오쿠스 4세의 톨레미 왕국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게 한 사건 역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는 로마인들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판단을 하고 대신 예루살렘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로 인해 로마 공화국과 셀류쿠스 왕국은 내면상 갈등관계에 놓이게 되지만 로마와 유대인들 사이에는 도리어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헬라인들이 예루살렘과 그 안에 있는 거룩한 성전을 마음대로 유린한 결과 발생한 마카비 전쟁이 완전히 끝난 후 로마는 서부 소아시아 지역과 지중해 지역에 지배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마카비 전쟁의 결과로 세워졌던 유대인들의 하스모니안 왕가는 BC63년 막을 내리고 팔레스틴은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로마 공화국은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자신의 완전한 세력권 안에 넣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힘의 한계가 있었다.
로마의 폼페이우스(Pompeius)가 팔레스틴을 완전히 정복하고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일부 저항세력은 그를 성 안으로 맞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인들과 타협하던 또 다른 세력에 의하여 성문은 열리게 되었다. 저항세력은 성전 지역에서 석 달 동안 로마에 대항했지만 결국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때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 안에까지 들어가는 불경한 행동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성전을 파괴하거나 성전 기물을 약탈해 가지는 않았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로마 공화국의 입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BC60년 경 로마의 통치자 폼페이우스는 지중해 동부지역을 거의 정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파르티아(Parthia) 제국의 미드리다테스 3세를 물리침으로써 소아시아 지역의 내륙과 북부지역을 평정했다. 그리고 지중해와 그 연안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던 해적들을 완전히 소탕함으로써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렇게 하여 셀류쿠스 왕국은 로마의 팽창과 더불어 완전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2. 로마의 간섭 아래 놓인 유대인들(11:33-35)
바벨론 제국에 의해 패망함으로써 이방지역으로 사로잡혀 왔던 이스라엘 민족은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칙령’에 의해 본토로 귀환하지만 여전히 불안전한 가운데 있었다. 그들은 헬라제국과 후에 분할된 톨레미 왕국과 셀류쿠스 왕국의 통치 아래서 심한 시달림을 받았다. 그러던 중 에피파네스라는 별명을 가진 안티오쿠스 4세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만행을 기화로 하여 어느 정도 자치권을 되찾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형식상 하스모니안 왕조를 통치자로 둔 왕국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새로운 보호자로서 로마공화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있기도 했으나, 세속적인 로마 권력과 친합하여 저들이 추구하는 바 만족을 얻으려 하는 배도자들이 생겨나게 된다. 다니엘은 그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백성 중에 지혜로운 자가 많은 사람을 가르칠 것이나 그들이 칼날과 불꽃과 사로잡힘과 약탈을 당하여여러 날 동안 쇠패하리라. 그들이 쇠패할 때에 도움을 조금 얻을 것이나 많은 사람은 궤휼로 그들과 친합할 것이며 또 그들 중 지혜로운 자 몇 사람이 쇠패하여 무리로 연단되며 정결케 되며 희게 되어 마지막때까지 이르게 하리니 이는 작정된 기한이 있음이니라”(단11:33-35)
우리는 다니엘서에 예언된 위의 본문 말씀이 로마인들과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바로 앞에 기록된31절과 32절에서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예루살렘성전 모독과 마카비 전쟁에 대한 예언을 했었다. 그러므로 33절 이후에 기록된 예언은 그 때부터 이스라엘 민족과 밀접한 관계에 놓이는 로마인들과연관된 예언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본문 말씀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 중에 지혜로운 자가 많은 사람을 가르칠 것이라는 말은 구속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즉 여기서 지혜로운 자란 메시아를 소망하며 기다리는 자를 지칭하고 있다. 많은 백성들이 변화하는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인간적인 판단을 하며 대처하고자 했지만 진정한 지혜를 소유한 사람들은 메시아를 보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 제국 이후의 톨레미 왕국과 셀류쿠스 왕국으로부터 심한 압제를 받던 유대인들은 마카비 전쟁 이후부터 로마공화국이 등장함으로써 저들로부터 상당한 기간동안 도움을 얻게 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지혜로운 자가 나타나 메시아와 연관된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교훈을 전하며 가르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오랜 기간동안 이방인들의 칼날과 압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쇠패해 갈 때 로마공화국은 약간의 정치적인 도움을 주게 된다(단11:34). 당시 세력을 확장해 가던 로마가 셀류쿠스 왕국에 반기를 든 유대인들과 더불어 우호조약(友好條約)을 체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조약의 내용적인 실상은 일종의 보호조약(保護條約)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로마는 팔레스틴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보호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는 서로 간 대등한 관계에서 성립된 조약이 아니라 사실상 불평등 관계라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자 로마에 아부하며 저들과 내통하며 가까이 지내려는 배도자들이 더욱 많아지게 된다. 그런 자들은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한편 로마인들의 세력에 저항하는 지혜로운 자들 가운데 몇 사람은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그들은 하나님 이외에 어느 누구도 의지할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경건한 자들 가운데는 그런 고통의 과정을 겪으면서 연단을 받아 정결케 되어 마지막 때를 기다리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로마공화국과 유대 왕국의 특별한 우호관계는 마카비 전쟁 이후부터 BC63년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로마의 속주가 될 때까지 상당부분 지속되었다. 그것은 약자인 유대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동북쪽에 있는 파르티아 제국(단11:44)을 견제해야 하는 로마의 정책적인 목적에 의한 것이었다. 로마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유대왕국을 이용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작정된 기한까지 이루어진다. 이는 하나님의 경륜이 역사 가운데 내밀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 로마의 ‘한 왕’ 폼페이우스(11:36-39)
그 후 로마에는 한 탁월한 통치자가 일어나게 된다(단11:36). 그는 ‘세력의 신’을 섬기는 자로 묘사되어있다. 이는 그 사람이 지배욕과 정복욕에 가득찬 사람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과연 누구를 지칭하고 있을까?
유대인들의 팔레스틴 지역을 속국으로 만들 당시 로마 공화국에는 소위 제1차 삼두정치가 펼쳐지고 있었다. BC60년 폼페이우스, 케사르, 크라수스 세 사람의 정치적 거물들이 제1차 3두동맹(三頭同盟)을 맺었다. 폼페이우스는 BC70년과 55년에 공동 콘술(Consul:집정관)에 선출되었으며 BC52년에는 단독 콘술에 취임하게 되었다.
당시 팔레스틴을 포함한 동부 지역은 폼페이우스의 통치관할 아래 있었으며 케사르는 서부의 로마와 갈리아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양쪽에 심각한 정치적 갈등이 발생해 BC49년 내전이 일어나게 된다. 그 때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파르살로스 전투(Battle of Pharsalos)에서 케사르에 의해 참패당했다(BC48). 패전한 폼페이우스는 그 후 케사르의 공격을 피해 이집트로 도망을 갔지만 이집트의 톨레미 왕조는 로마의 내전에 휩쓸리는 것을 꺼려 그를 보호하는 대신 살해하게 된다(단11:36).
폼페이우스는 그의 조상들이 섬기던 신들(gods)이나 여성들이 즐겨 섬기는 다른 신들을 믿지 않았다. 전쟁에 익숙한 용장인 그의 눈에는 종교적인 신들이 아니라 전쟁을 통한 승리만이 현실적이었던 것이다. 그는 동부지역을 평정한 후 BC63년 유대지역을 특별히 ‘독립된 성전국가’로 선포했다.
그는 이를 통해 도리어 자신을 신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두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유린하며 지성소 내부에까지 들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폼페이우스는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행하며 스스로 높여 모든 신들보다 크다고 하며 상식적이지 않은 말로 신들을 대적했다. 나아가 거룩한 하나님을 대적하기에 이른다(단11:36). 이는 그가 이스라엘 민족을 무시하며 예루살렘을 멸시하는 것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그런 가운데서 폼페이우스는 다른 한편으로 금은보석과 보물을 가지고 이방신(a foreign god)에 대해 나름대로의 예우를 다하며 그것을 힘입어 정복지 주민들을 적절히 무마하는 가운데 정복활동을 지속했다. 이는 그가 이방지역의 신을 정략적으로 이용했다는 의미이다. 그런 종교행위를 보이는 것을 통해 이방 지역의 민심을 사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자기를 인정하는 자들에게는 권세와 영예를 부여해 통치권을 허락했으며 뇌물을 받고 땅을 나눠주기도 했다(단11:39).
그 대표적인 경우가 헤롯 집안에 대한 정치적인 입지이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지역의 통치자 노릇을 했던 헤롯 대왕(BC73-4)은 폼페이우스를 물리친 케사르의 지원으로 팔레스틴을 통치하게 된 이두매 출신의 특별한 왕가(BC37-AD70) 출신의 인물이었다. 그들이 팔레스틴 지역의 정치적 중심에 서게 된 것은 BC1세기 초 안티파터 1세부터였다. 그는 하스모니안 왕가의 히르카누스 2세를 조정하여 권력을 쌓아가는 가운데 로마 정치권의 호감을 획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폼페이우스 군대를 섬멸한 케사르는 BC47년 진정한 신앙이 없는 명목상의 유대인인 헤롯의 부친 안티파터(안티바스) 1세를 유대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하게 된다. 그것은 폼페이우스가 팔레스틴을 지배할 때 이미 닦아둔 정치적 기반 위에 이루어졌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의 땅을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때가 이르면 모든 것이 끝장나게 된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경륜적 간섭을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와 가까웠던 안티파터는 그의 정적이었던 케사르의 신임을 얻어낼 만큼 교활한 정치인이었다. 그의 가문은 명목상으로는 유대인이었지만 정통 유대인이라 할 수는 없었다. 즉 그들은 진정한 신앙이 없는 상태에서 정치적 상황에 의해 유대인이 된 자들이었다. 하스모니안 왕가의 요한 히르카누스는 BC125년 이두매 지역을 정복한 후 모든 이두매인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받게 하여 유대교를 신봉하도록 했던 것이다.
폼페이우스와 케사르의 전투가 끝난 직후 유대지역의 총독이 된 안티파터 1세는, 스물다섯 살이 된 자신의 둘째 아들 헤롯을 곧바로 팔레스틴의 갈릴리 지역 관리 책임자로 임명했다(BC47). 공권력을 소유하게 된 헤롯은 당시에 골칫덩어리였던 도적 떼를 즉시 소탕하고 처형함으로써 문제해결을 했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운동을 하던 투사들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것으로 인해 헤롯은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심한 분노를 샀지만 로마와 갈릴리의 유대인들로부터 인정받아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 후 헤롯은 파르티아 제국의 사주를 받은 하스모니안 왕가의 안티고누스(Antigonus)의 갈릴리 침공을 물리쳤다. 그의 부친 안티파터가 암살당하게 되자, 로마의 집정관 마르크 안토니(Marc Antony)는 헤롯과 그의 형 파사엘(Phasael)에게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권세를 허락했다. 하지만 BC40년 예루살렘은 안티고누스를 전면에 앞세운 파르티아 군대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포위를 당해 그들 형제가 체포되었다. 그때 파사엘은 파르티아에 의한 감금 중에 스스로 자결하고 말았다.
그러나 헤롯은 감금 중에 탈출해 로마로 도망쳤다. 그는 그곳에서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지역의 왕으로 임명받게 되었다. 로마군대가 BC38년 파르티아인들을 몰아내고 난 후 1년이 지난 뒤에, 헤롯은 안티고누스를 물리침으로써 실질적인 유대지역의 왕위를 획득하게 된다. 그는 유대인 신하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며 로마 지도자들과도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헤롯은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충분히 드러내며 군사력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했다.
그리고 그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로마의 안토니우스가 사망한 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로부터도 호감을 샀다. 헤롯은 그들의 원조를 배경으로 하여 유대지역의 주변을 향해 세력을 확장했으며 사마리아, 예루살렘, 여리고 등 대도시를 재건하고 여러 성들을 전략적인 요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기념해 지중해 연안의 ‘스토라토 성채’를 개명하여 ‘가이샤라’로 불렀는데 그곳이 유대지역의 수도가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케사르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4. ‘북쪽 왕’으로 묘사된 ‘아우구스투스’(11:40-43)
다니엘서 11장 40절에는 북방 왕과 남방 왕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왕들은 앞의11장 9절과 11절에서 언급된 북방 왕 및 남방 왕과는 상이한 나라의 다른 인물들이다. 11장 앞부분에 언급된 남북의 왕들은 셀류쿠스 왕국과 톨레미 왕국의 두 왕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11장 후반부에 기록된 남북의 왕들은 로마의 통치자와 그의 지배를 받는 나라의 왕을 지칭하고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BC1세기 후반 로마의 주요한 통치자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여기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인물은 옥타비아누스이다. 그는 폼페이우스를 제압하고 로마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케사르의 양자로서 제2차 삼두정치를 끝내고 단독으로 집권하게 되었다. 그 후 아우구스투스(Augustus) 칭호를 받아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케사르가 BC44년, 신뢰하던 부하 브루투스(Brutus)에 의해 피살된 후 제2차 삼두정치가 시작된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가 곧 그들이다. 레피두스는 일찍 실각했지만 동부지역을 지배하던 안토니우스와 로마를 비롯한 서부지역을 통치하던 옥타비아누스는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 때 이집트의클레오파트라는 동쪽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안토니우스의 편에 서 있었다.
급기야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정치적 갈등 끝에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로마지역을 통치하던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를 멸시하고 있다는 듯한 여론을 조성함으로써 서방 지역의 로마인들은 심히 분개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로마인들에게는 치욕적으로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클레오파트라의 군대는 동부 지역의 안토니우스의 편에서 싸우게 되었다.
양쪽 군대는 BC31년 그리스의 펠레폰네소스 반도 북서쪽 바다 건너 위치한 악티움(Actium)해전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그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완승을 거두고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대패하게 되었다. 당시 클레오파트라의 군대는 패전의 기미를 보며 급작스럽게 기수를 돌려 이집트로 퇴각하게 되는데 역사학자들은 그것이 결정적인 전쟁패배의 요인으로 보고 있다. 본문 말씀 가운데 기록된 예언은 바로 그 사건을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때에 남방 왕이 그를 찌르리니 북방 왕이 병거와 마병과 많은 배로 회리바람처럼 그에게로 마주 와서 그 여러 나라에 들어가며 물이 넘침 같이 지나갈 것이요”(단11:40)
우리는 위 본문에 명시된 ‘마지막 때’ 라는 말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 세상을 심판하실 때가 임박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다니엘서는 마지막 때 이스라엘 민족 주변에서 발생할 사건을 예언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언급된 남방왕은 안토니우스 혹은 클레오파트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북방왕은 옥타비아누스를 지칭하고 있는 것 같다. 즉 남방 왕이 북방 왕을 찌르게 되리라는 예언은 당시 남방 지역을 포함한 동부를 통치하던 안토니우스 세력이 북방으로 묘사된 로마와 마게도니아 지역 등을 지배하던 옥타비아누스 군대를 공격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병거와 마병을 동원한 것은 당시 전투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며 배로 회리바람처럼 그에게 맞서 싸워 승리하게 된다는 말은 악티움 해전을 일컫는 것으로 생각된다. BC31년에 있었던 악티움 해전은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옥타비아누스가 그 전투에서 완전히 승리함으로써 로마의 일인 통치체제를 구축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로마 공화정을 끝내고 제정시대 곧 로마제국 시대를 여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됨을 의미한다.
옥타비아누스가 전 로마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원로원으로부터 부여받은 아우구스투스(Augustus)칭호는 ‘존엄자’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성경본문은 또한 그가 ‘영화로운 땅’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그는 또한 많은 나라들을 패망시키고 정복하게 될 것이 예언되었다. 그의 세력은 거대한 이집트를 통치아래 두게 됨으로써 그곳의 금은보물들을 탈취하게 될 것이 언급되고 있다. 나아가 리비아와 구스 사람들도 그를 섬기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의 주변 왕국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 귀족들은 그로부터 벗어날 것이 예언되었다.
“그가 또 영화로운 땅에 들어갈 것이요 많은 나라를 패망케 할 것이나 오직 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의 존귀한 자들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단11:41)
북쪽 왕으로 묘사된 옥타비아누스는 남방 왕의 세력을 제압한 후 영화로운 땅 곧 하나님의 언약의 땅인 팔레스틴에 들어가게 된다. 그의 막강한 세력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나라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당시 주변의 모든 세계를 정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의 존귀한 자들은 그로부터 벗어나게 되리라고 예언되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영화로운 땅인 약속의 땅 가나안이 정통 유대인들이 아니라 주변 종족들에 의해 억압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던 헤롯 가문과 특별히 연관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앞서 언급한대로 헤롯은 원래 순수 유대인 혈통을 지닌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에돔 출신으로서 이두매 지역에 살던 그의 선조들이 유대인들에 의해 강압적으로 개종한 후 반쪽짜리 유대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들을 은근히 예우하는 정책을 폈다.
헤롯의 부친은 로마의 집정관 케사르의 신임을 얻어 유대 지역의 총독이 되었으며 헤롯은 안토니우스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 인맥을 통해 그는 유대지역의 왕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교활한 정치력을 발휘했던 그는 안토니우스가 사망한 후에 그의 정적으로서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 곧 아우구스투스로부터도 두터운 신임을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다니엘서 11장 40절에 기록된 ‘북방 왕’은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성 있는 해석이다.
5. ‘자고(自高)에 빠진 왕’의 파멸(11:44,45)
본문 말씀 가운데 ‘동북에서부터 소문이 이르러 그로 번민케 했다’는 것은 동북쪽에 위치한 파르티아 제국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당시 로마공화국에 있어서 파르티아는 항상 민감하게 신경을 써야만 하는 강한 경계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그들을 그냥 두고는 불안을 떨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동북에서부터 소문이 이르러 그로 번민케 하므로 그가 분노하여 나가서 많은 무리를 다 도륙하며 진멸코자 할 것이요”(단11:44)
파르티아 제국은 카스피 해의 동쪽에서 온 유목 민족이 건국한 나라이며 왕의 직접적인 통치 하에 봉건적인 신분의 귀족들이 지배하는 국가였다. BC2세기경 이후부터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인도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다. 파르티아는 지리상 동서 문화의 중간 지역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중계무역이 성행했다.
군사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파르티아는 막강한 나라였다. 로마는 보병이 강했던데 반해 파르티아는 활을 쏘는 궁기병이 강했다. 삼두정치의 한 축을 형성했던 크라수스는 파르티아와 사막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패배하여 전사하게 되었다. 당시 크라수스의 로마군대가 패전한 것은 전술적인 문제도 있었겠지만 파르티아 제국의 막강한 전투력 때문이었음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파르티아 제국은 미트라다테스 2세(Mithradates II, BC123-87)가 통치하는 동안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그리고 인도와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소유하고 로마공화국과 대치상태에 놓여 있었다. BC1세기의 파르티아는 로마인들에게 매우 잔혹한 자들로 인식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는 왕위에 오르기 위해 자기 아버지와 형제를 죽이는 사건이 예사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케사르와 동시대 인물이던 파르티아의 왕 오로데스 2세(BC57경-37, 재위)는 자신의 형 미트라다테스 3세를 도와 아버지인 프라테스 3세를 죽이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리고는 나중에 형까지 몰아내 처형했다. 그는 자기 부하들에게도 무자비한 모습을 그대로 보였다. 로마의 삼두 집정관 중 한 사람이었던 크라수스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한(BC53) 자신의 심복까지 처형해버렸다.
그리고 오로데스 2세는 자신의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 아들 프라테스 4세(BC37-2, 재위)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행했던 것이다. 프라테스 4세는 로마의 제2차 삼두정치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로마를 통치하던 시대에 파르티아를 통치했다. 그는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인 오로데스 2세뿐 아니라 다른 형제들마저도 무참하게 살해했던 것이다.
BC36년 로마의 안토니우스 휘하의 군대가 아르메니아를 통해 파르티아를 공격했지만 그의 방어에 의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나중 파르티아에서 반란이 일어나 아르메니아의 티리다테스 2세가 프라테스의 왕위를 박탈하자 그는 다른 지역으로 도망을 갔다. 그러나 BC30년 다시 본국으로 돌아와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자 티리다테스는 프라테스 4세의 아들을 인질로 잡아 로마로 도망쳤다. 그 후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파르티아의 프라테스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그의 아들을 본국으로 되돌려 보내주었다.
그 대신 파르티아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아르메니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프라테스에게 무사(Musa)라는 미모의 이탈리아 여인을 아내로 선사했다. 거기에는 아마도 로마의 치밀한 정치적 계략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라테스는 후일 그녀의 권면에 따라 자신의 아들 가운데 4명을 로마로 보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파르티아 왕자들이 로마의 인질상태에 놓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프라테스 4세는 말년에 로마의 여인 무사에 의해 독살 당한다. 그 후 무사는 자신의 아들 프라테스 5세와 공동으로 파르티아를 통치했다. 이처럼 왕위를 두고 집안 내부에서 살해가 난무한 파르티아의 잔인한 모습을 보며 로마는 잠시도 방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 왕이 당시 전 세계를 지배하는 막강한 권위와 위엄을 갖춘 통치자란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단11:42,43). 그는 당시 주변의 세계를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한 후 자신을 위한 화려한 궁전을 짓게 될 것이라 예언되고 있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건축한 장막 궁전들(royal tents)은 과연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가 장막 궁전(royal tents)을 바다와 영화롭고 거룩한 산 사이에 베풀 것이나 그의 끝이 이르리니 도와줄 자가 없으리라”(단11:45)
우리는 여기서 장막궁전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땅에 완전히 정착된 화려한 궁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동식으로 지어진 임시 궁전이다. 그리고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그 장막궁전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사실이다.
위에 언급된 왕이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라면 그가 지중해와 영화롭고 거룩한 산 사이에 장막궁전들을 세우게 되리라는 사실이 예언되고 있다. 이는 그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친히 통치에 나서게 되리라는 사실과 연관된다. 로마 황제는 팔레스틴 지역을 통치하면서 친위부대를 주둔시켰다. 이 말은 하나님의 언약의 땅을 공포정치 가운데 몰아넣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로마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당시 팔레스틴에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열성당이 있었으므로 취할 수밖에 없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막강한 세력을 확보한 그의 일시적인 화려함과 승리는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모든 권력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가 전쟁의 승리를 이루어 통치하던 시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했다는 사실은 세상의 통치자에게 임하게 될 무서운 심판과 연관된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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