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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응답받은 다니엘의 기도 - 다니엘 9장

by 은총가득 2021. 7. 19.

 

다니엘의 결심 (다니엘 9:1-3)

 

앞 장의 끝에서는 다니엘이 "왕의 일" 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다니엘이 보다 훌륭한 직무에 임하는 것을 본다. 그 어떤 왕이 그를 위해 베풀었던 것 이상의 직무에 임하게 된 것이다. 즉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는 직무에 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니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메시야의 날에 관계된 "신탁이 그에게 주어졌다."

 

1. 다니엘이 하나님과 이같이 교제한 것이 언제인가? 그것은 "메데 족 속의 다리오왕 제1년" 이었다(1절). 그는 새로 갈대아인들의 왕이 되었다. 바벨론은 그와 그의 조카, 혹은 손자인 고레스에 의해서 정복되었다. 바벨론은 그와 그의 조카, 혹은 손자인 고레스에 의해서 정복되었다. 이 해에 70년 동안의 유대인들의 포로 기간이 끝이 났다. 그러나 그들의 석방을 알리는 포고가 내리지는 않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다니엘의 이 청원이 그 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그가 사자 굴에 던져지기 전이었던 것같다. 그리고 그가 그의 기도의 의무를 그렇게 성실하게 지킬 수 있도록 해 준 가장 큰 동기는 아마, 비록 그 기도가 그의 죽음을 초래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가 얼마 전에 경험한 기도의 힘과 은택의 체험이었을 것이다.

 

2. 무엇 때문에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청원했는가? 다니엘은 "한 책으로 말미암아 알았다" (2절)고 했다. 즉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존속될 정한 기간이 70년임을 알았다. 이 사실을 알게 한 그 "책" 은 예레미야의 예언서였다. 그 책에서 다니엘은 명백하게 예언된 것을 발견하였다(렘 29:10). "바벨론에서 70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그래서 요아김 "제3년" 인 포로기 첫해부터 시작하여 계산했다. 다니엘도 그 때에 끌려왔던 때문이다. 1:1). 같은 표현이 또 다음과 같이 예언되었다.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렘 25:11).

 

여기에 나오는 황폐란 단어(chorbath)가 본문에 나옹 "예루살렘의 황무" 란 단어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다니엘이 이 글을 쓸 때에 예레미야서를 앞에 두고 썼음을 암시한다. 비록 다니엘 자신이 위대한 예언자였고, 하나님의 환상에 익숙해 있었지만, 그는 성서를 부지런히 탐구했고, 그가 예레미야의 예언서를 참조한다 해서 전혀 자기를 멸시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위대한 정치가였으며, 이 지상에서 가장 큰 제국 중에 한 나라의 수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교제할 시간과 마음을 가질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들도 그들이 성서보다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3. 70년의 만기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 대한 다니엘의 청원은 대단히 진지하고 엄숙하였다(에스겔 예언의 날짜 계산에 의하면, 그들이 포로 기간은 정확히 계산했던 것 같다). 그때 그는 "주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기도를 면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기도를 격려하고 격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또 약 속의 날의 성취가 가까이 왔음을 볼 때, 우리는 보다 더 간절히 하나님께 청원해야만 한다. 다니엘이 여기서 그렇게 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으며, 분명히 기도할 때마다 예루살렘의 황폐를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바쁜 업무에도 시간을 내어서 예루살렘을 위한 특별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비록 다니엘이 여러 의인들과 함께 자기 앞에 서서 중재 기도를 하더라도 이 심판을 막지는 못한다(겔 14:14)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전쟁이 끝나기" 를 기도했다(사 40:2). 마치 그의 기도는 심판을 옮겨달라는 기도로 들렸을 것이다. 구원의 날이 동를 때는, 하나님의 기도하는 백성들이 분발해야 할 때이다. 그 때에는 일상적인 매일의 제사 외에 비장한 일이 기대되며 요구된다. 이제 "다니엘은 기도와 간구로 구했다." 그는 백성들의 죄가 하나님을 노하게 하여서 약속된 구원의 때가 연기되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또는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시려는 이때에 은총을 힘입어 이 백성들도 구원을 맞을 준비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더 검토해보자.

 

3. 천사는 그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신속히 행동했다. "가브리엘은 빨리 날아서" 왔다(21절). 천사들은 날개가 달린 사신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재빨리 움직이며, 그들이 받은 명령을 실행하는데 지체하지 않는다. 그들은 "번개같은 생물처럼" 왕래한다 (겔 1:14). 그러나 때때로 그들은 다른때보다 훨씬 더 신속하게 움직인다. 즉 가브리엘이 여기서 "재빨리 날아" 온 것과 같은 경우가 그것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힘에 의존하여 그들의 일을 실행한다. 비록 그들이 지혜가 탁월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대로 빨리, 혹은 느리게 움직인다. 그리고 천사들이 비록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때만 나를 수 있다. 천사들 자신들은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종" (일군)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을 행한다(시 103:21).

 

4. 천사의 메시지의 서론을 검토해 보자.

(1) 천사는 "다니엘을 만졌다" (21절). 전에 그랬던 것처럼 (8:18), 가브리엘은 다니엘의 잠을 깨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기도를 중지하고 자기가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말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듣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의 전후를 살펴야 하며, 망대 위에서 살펴야 한다.

 

 

(2) 가브리엘 천사는 다니엘과 아주 친근하게, 마치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대하는 것처럼 친근하게 "그와 말했다(22절). 그것은 "그의 공포가 그 (다니엘)를 두렵게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자기의 용무를 다니엘에게 말했다. 즉 하늘로부터 그에게 친절한 소식을 가져왔다고 했다. "나는 네가 전에는 알지 못했던 길들을 말하고 보여 주기 위해서 왔다(23절).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교회가 안티오커스 아래서 박해받은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재난의 기간을 보여 주었다(8:19). 그러나 이제는 더 큰 일을 다니엘에게 보여 준다. 왜냐하면 작은 일에 신실한 그에게 더 큰 일을 맡기기 위해서이다. "나는 너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왔나니, 이 일들을 너에게 보여 줄 뿐 아니라, 그것들을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이니라."

 

(3)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그가 하늘의 사랑을 받는 자임을 확신시킨다.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이기 때문에 내가 왔다. 너는 바람직한 사람이요, 하나님께 용납된 자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니라." 하나님은 그의 모든 자녀들을 사랑하시지만, 그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더욱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리스도는 그의 가슴에 안긴 한 제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받던 제자" 는 다니엘이 구약 성서의 예언적 환상을 위임 받았던 것처럼, 신약 성서에서 예언적 환상을 위임받았다.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보다 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친구" 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고 말씀하신다(창 18:17).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계시해 주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받는다는 점을 알 수 있으리라. 많은 사람들은 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준 칭호가 여기서 다니엘에게 주는 칭호와 대단히 비슷하며, 그것은 그녀에게 이것을 상기시켜 주려 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너는 크게 은총(총애)을 입은 자라" 라는 것이다. 다니엘에게도 "크게 은총(사랑)을 입은 자" 라고 했다.

 

 그에게 향했다" (직역). 그것은 그의 생각의 일관성과 신앙의 견고함, 그리고 그의 의무에 있어서의 헌신적인 사랑을 나타낸다. 기도할 때는, 하나님을 우리 앞에 세워야 하며, 동시에 우리도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야 한다. 하나님에게 우리는 "기도를 직고해야" 한다. 우러러봐야 한다. 아마도 다니엘은 얼굴을 하나님께로 향했다는 표시로써, 매일 하듯이 그의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황폐를 더욱 절실히 느끼게 했을 것이다.

 

(2) 기도할 때의 다니엘의 신체적 고행. 그 자신의 죄와 그의 백성들의 죄 그리고 그 자신의 무가치함 때문에 느끼는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깊은 겸손의 표징으로, 다니엘은 그가 기도할 때,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썼다." 예루살렘의 황폐를 더욱 절실히 체득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는 그 황폐가 복구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며, 자기가 지금 하는 일이 비상한 일이라는 것을 자기에게 주지시켰던 것이다.

 

(4) 천사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이제부터의 자기 말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명령한다. "그러므로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 (23절). 이것은 그의 말이 다니엘이 이전에 보았던 그 어떤 환상보다도 더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는 것임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이상들을 숙고해야 하며, 마음 깊이 간직하고,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 비교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무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깊은 생각(숙고)의 부족 때문이다. 이 환상은 깊은 생각을 요구하며 동시에 그런 숙고를 할 만한 것들이다.


Ⅲ. 메시지 내용을 검토해보자. 그 소식은 대단히 엄숙하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대단한 관심이 기울여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아주 정확하게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예언들이 그런 것처럼 거기에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 있엇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예언서를 통해서 70년간의 포로 생활이 끝나감을 이해하고 있었던 다니엘은, 이제 영광스럽게도 다른 곳보다 더 먼저 영광스러운 해방을 교회에게 알리도록 선택된다.

 

먼저 것은 나중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것은 70주간(週間)이 지나면 곧 해방이 있다. 다니엘은 그 예언을 넘어서 있는 것을 기도했고, 그 기도에 대해 이 같은 응답을 받은 것이다. 다니엘은 "자기 백성" 과 "거룩한 도성" 을 위해서 기도했다. 즉 "저들" 의 석방과 "그것" (도성)의 재건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니엘이 생각하거나 요구했던 것 이상의 것을 응답하셨다." 하나님은 자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베푸신다(시 21:4).

 

 

1. 여기에 확정된 시간은 다소 이해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보면 그 기간은 "칠십 주간," 즉 "7년의 70배" 인 490년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예루살렘 도성에 관해서 앞으로 일어날 거대한 사건은 이 490년이 다하기 전에 있을 것이다.
(1) 따라서 여기서는 햇수가 주(週)로 서술되었다.
[1] 이것은 대부분인 예언자적 문체와 주화되는 것이다. 예언의 문제는 일상적인 화법과는 달리, 너무 분명한 것은 피해서 되어 있다.


[2] 본래 안식일에 의해서 이루어진 바 시간을 주간으로 나눈 제도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서이며, 그 영광이 영원함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3] 70년 동안의 포로 기간과 관련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그들 자신의 땅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면 7배나 오래 보존해야 한다. 하나님은 심판보다는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더욱 즐겨하신다. 그 땅은 좋지 아니한 의미에서, 70년 동안을 "안식하였다" (레 26:34).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이 좋은 의미에서, 70년의 7배나 되는 기간을 안식할 것이다. 이것은 희년을 열 번 지내는 것이다. 이러한 비율이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미리 정해진 시간을 작정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아 찬양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2) 70 주간에 대해서 생기는 난점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시작과 끝나는 때에 대한 것이다. 본문에는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재건하라는 명령이 주어지는 때부터" 라고 했다(25절). 나는 그것은 에스라서 1장 1절에 언급된 고레스 왕의 조서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왜냐하면 고레스의 조서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회복"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거기에는 예루살렘의 재건에 대한 언급이 밝혀 나타나 있지는 않을지라도, 성전 건축이 암시되었고, 또 그것이 그레스에 의해서 실시되리라고 예언되었기 때문이다. (사 44:28). 고레스가 "너를 재건하리라고 예루살렘에게 말하게 되리라." 이것은 예언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예루살렘의 건축에 대한 가장 유명한 조서이었다. 아니, (고레스의 명령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뜻이었던)" 이 명령의 공포" 는 "다니엘의 기도의 시작" 에서(23절) 언급된 명령의 선포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70주간이 70년이 만기되지 즉시 시작된다는 것은 대단히 은혜스럽게 보인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이의가 제기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이 사실에 의해서 계산하면, 고레스에 의한 바벨론 정복 때부터 알렉산더가 다리오를 정복한 때까지 "바사 왕국" 은 겨우 130년간 존속했다는 결론이 나와 문제가 된다. 반면에 바사 황제의 통치에 관한 자세한 기록에 의하면, 바사 제국은 230년 간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투키디데스(Thucydbdes), 크세노폰(Xenophon), 그리고 다른 여러 사람들은 이렇게 계산한다.

 

이 때를 첫 번째 조서가 내려진 때로 정하는 사람들은 이방 역사가들의 위와 같은 연대 계산을 불확실하고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일축해 버린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계산에 동조한다. 그래서 그 490년을 고레스의 조서에서(에 1:1)가 아니라, 에스라서 6장에 언급된바 약 백 년 이후에 있었던 다리오에 의해서 선포된 예루살렘의 재건에 대한 두 번째 조서에서 시작한 것으로 이해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에스라를 보낸 왕 아닥사스다 제7년에 못박는다.(에 7:8-12). 박학자 풀(Poole)씨는, 그의 라틴 대조표에서 이 70주간의 시작에 대한 여러 견해차를 아주 광범위하고, 치밀하게 수집해 놓았다.

 

[2] 그 시기의 종말에 대한 어려움이 있다. 이때에 대해서도 해석자 사이에 일치된 견해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때라고 하여, 이 유명한 예언의 명시적인 말들을 보면,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저녁 제사 때에 말했던 바로 그 시간에서부터 그리스도가 죽은 때(그 때도 저녁 무렵이었다)까지의 기간을 말해 준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한다. 그리고 나는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 그 기간은 정확하게 490년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 "주간의 절반에(즉 70주간의 마지막 주간에), 그가 제사와 예물을 중지시킬 것이다(27절)라는 말이 있으므로, 그때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한 때요,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로 향해 나아가던 때이다.

 

그러나 그 때를 정확히 그리스도의 죽음의 때와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27절)을 다음과 같이 읽을 것이다. 즉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증언을 강화시킬 것이다. 최후의 7일, 혹은 최후의 한 주간, 그리고 그 주간의 절반 곧 7년의 절반(즉 그리스도가 그의 공생애를 보낸 3년 반)은 희생과 봉헌을 그치게 할 것이다" 고 해석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때를 그리스도가 죽은 후 37년 경, 예루살렘의 파괴 때까지로 계산한다. 그것은 이 70주간이 유대 백성과 "그들의 거룩한 도성에 대해 정해지리라" 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소의 파괴에 대해 많은 것이 나와 있다.

 

[3] 그것은 7주간과 62주간, 그리고 1주간으로 나눈 것에 대한 난점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한 이유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계산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첫 번째 일곱 주간 곧 49년이 지난 때에 성전과 도성이 건축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주간 동안에 그리스도가 그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의 복음의 선포에 의해서 유대적 질서는 무너졌다. 그리하여 복음의 도성과 성전을 위한 터전이 마련되었다. 이것은 전자의 잿더미 위에 세워질 것이었다.

 

(3) 그러나 이들 시간을 정확히 정하는 것이 아무리 불확실하더라도, 그 때를 결정하는 데는 두 가지 중대한 목적이 있다.

 

[1] 그것은 믿는 자들에게 그것에 대한 기대를 일으키는 구실을 한다. 메시야의 도래하리라는 막연한 약속이 족장들에게 주어졌었다. 이전의 예언자들은 메시야를 "오실 분"으로 말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도래에 대한 정확한 때는 말해지지 않았다. 비록 이 때에 대한 대단한 의심이 있어서 그 때를 확정할 수는 없었을 지라도, 이 예언의 빛에 의해서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릴 때가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대략 알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일반적으로 보면 그가 "이스라엘의 위로"로써, 그리고 "예루살렘의 속량"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안다(눅 2:25, 38). 이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곧바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눅 19:11).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행 2:5).

 

[2] 그것은 지금도 불신자들의 기대를 거부하고 묵살시키는 구실을 한다. 그들 불신자들은 예수가" 오실 분" 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들이다. 이 예언은 그들을 침묵시키고 그들을 비난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명령으로부터 이 70주간을 계산하면, 그 기간은 1500년 전에 다 찼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메시야의 도래를 잘못 계산하고 있는 동안 메시야가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나 그러나 이 사실에 의해서 메시야가 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게 되었으며,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바로 미리 정해진 그 시간에 왔고 영원히 기념되어야 할 시각에 오셨던 분이다.

 

2. 여기에 예언된 사건들은 적어도 지금 우리에게는 보다 평이하고 쉬운 것이다. 여기에서 예언된 사건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1) 유대인들이 자기 조국에 되돌아올 것이며, 다시 그 땅에 정착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된다. 이것은 다니엘이 일차적으로 간구한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에서는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러 가라는 명령" 은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위안이 되었으리라(25절). 그리고 그 명령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그 시대가 대단히 어려웠고, 동시에 그 선한 일이 반대에 부딪힐 것이지만, 결국 수행될 것이며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곤란한 동안" 일지라도 "성벽" 과 길거리가 세워졌듯이, 그 "길거리가 다시 재건되어" 전과 같이 아름답게 되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언제고 "곤란한 때"를 각오해야 된다. "즐거운 때" 에도 떨리는 마음으로 즐거워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섬광에 불과하다.

 

또한 평화와 번영으로 빛나는 막간에 불과하다. 구름은 "비가 온 후" 에도 되돌아 올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땅을 되찾았을 때에도, 그들은 "곤란한 때" 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일을 행하실 것이며, 그의 예루살렘을 중건하시고 아름답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들의 기쁨이다. 아니, 오히려 때의 곤란함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교회를 더 발전시켜 줄 것이다. 교회는 어려울수록 성장한다.


(2) 메시야와 메시야의 사업에 대한 예언이 나와 있다. 현세적인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자기들을 로마제국의 멍에에서 구출하고, 세속적인 권세와 부를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반면에 여기에서는 메시야가 다른 사명, 즉 순수하게 영적인 사명을 위해 오셔야 한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1] 그리스도는 "죄를 제거하기 위해" 오셨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반목을 갖게 했고,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켰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적하도록 자극시켰다.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한 것도 죄며, 인류에게 불행을 가져온 것도 죄였다. 죄는 진실로 재난을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다. 하나님께 진실한 봉사를 하려는 사람, 그리고 참으로 인간에게 친절을 베풀려는 사람은 죄를 파괴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하러 오셨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서, "" 그리스도가 오셨다." 즉 "악마의 일을 부수기 위해서" 이다. 그리스도는 "너희의 죄와 범죄를" "버리라" 고 말하지 않는다. 죄와 범죄 일반을 버리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곧 유대인의 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대속물" 이기 때문이다.


첫째, 그리스도는 먼저 범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또 "죄를 끝내고" 죄의 세력을 파괴하기 위해서, 그리고 숱한 재난을 일으키는 "뱀의 머리"를 파쇄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과 거룩함의 왕국을 세우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사탄의 왕국을 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 은혜를 통한 정의와 생명이 지배하는 왕국을 세우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가 죽을 때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셨다.


둘째, 그리스도는 "죄를 종결짓기 위해서," 제거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리스도가 악마를 깊은 구멍에 던지셨을 때, 그는 "악마를 인봉하셨던" 것이다(계 20:3). 죄가 용서될 때, 죄는 마치 봉인될 것과 같이 다시 발견되지 않는다.

 

셋째, 그리스도는 죄인들에게 화해를 주기 위해서 오셨다. 희생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정의를 만복시키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케 함과 같은 것이다. 그는 심판관처럼 다투는 양편을 서로 잘 이해하게 만드실 뿐 아니라, 우리를 편들어 주시는 보증인이시다.


[2] 그리스도는 "영원한 의가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없애심으로써 죄를 도말하더라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른 방법을 발견하셨다. 죄로부터 죄인들을 구원하심으로써 죄를 없애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죄인을 의롭게 만드는 방법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인으로서 정죄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 있다면 우리의 순결이 우리의 의가 될 것이다. 그러나 타락(넘어짐)한 이상, 우리는 무엇인가 다른 것을 내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에게 호소거리를 주셨다.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독이 "우리의 의" 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율법의 모든 요구를 채운다. 즉" 그리스도는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셨다. "

 

러므로 그리스도는 "주(主) 우리 의(義)이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의가 되셨고, "우리는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 의롭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에 의해서 우리는 그 의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의로 여김을" 받게 된다(롬 4:3, 5). 이것은 "영원한" 의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 이며 동시에 우리의 "평화의 왕" 이신 그리스도가 "영원한 아버지" 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영원 전부터 있었고, 또 영원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이것의 적용은 태초부터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 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까지 그러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원한 공덕이다(히 10:12). 그것은 "우리를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반석" 이다.

 

[3] 그리스도는 "환상과 예언," 즉 메시야를 언급하는 구약 성서의 모든 예언적 환상들을 "응하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들의 봉인을 떼셨다. 즉 그 환상들을 성취하심으로써 그 목적을 이루셨다. 메시야에 대해서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사명은 물론이요 그것들의 진리성을 확증하셨다. 그리스도는 그 환상들을 "응하셨다" (봉인했다-영문 성서). 즉 그는 그의 마음과 뜻을 발견하려는 예언과 환상의 방법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벧후 1:19; 히 1:1).


[4] 그리스도는 "지극히 거룩한 자" 에게 "기름붓기 위해서 오셨다." 그 지극히 거룩한 자는 바로 성령에 의해서 기름부음 받은 자가 자신이다. 그는 그의 동료에 비해서 기쁨의 기름을 "넘치도록" 받았다. 혹은 복음의 교회와 그의 영적 성전, 혹은 거룩한 곳에 기름을 붓고 그것을 거룩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기위해서 오신 것이다(엡 5:26). 혹은 그 자신의 보혈에 의해서(히 10:20), 우리에게 "지성소에 들어가는 새로운 생명의 길" 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성소가 "기름부음 받은" 것과 같다(출 30:25 이하).


그리스도는 "메시야" 라고 불리운다(25,26절). 그것은 "그리스도" "기름부음 받은 자" (요 1:41)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5] 이 모든 것을 위해서 메시야는 "끊어져야" 한다. 즉 참혹하게 죽어야만 하고, 이사야 53장 8절에서 예언된 것처럼 "모든 산 자의 땅에서 끊김" 을 당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설교할 때, 예언자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말한 것 외에는 말하지 않았다(행 26:22, 23). 그리스도는 고난받으셔야 했다. 그리스도는 끊김을 당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자신을 위해서," 즉 자기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야바가 예언한 대로, "백성들을 위해서" 죽어야 한다. 즉 우리를 위해 대신, 우리의 선을 위해서였다. 그 "끊김" 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죽음이었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죽음이었다.


[6]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들과 계약을 맺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계약, 즉 은혜의 계약을 수립해야 한다. 죄없는(무흠한)계약에 의해서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그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그리고 세례와 만찬(이것은 새 언약의 "인" 이다)에 의해서 수립한 이 제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의 계약(유언)을 유효하게 했고 우리로 하여금 그것에 의해서 물려받은 것을 요구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곧 대중들을 위해 그 계약을 세우셨다. "지배자들" 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에도, 가난한 자들은 "전도를 받았다." 또한 그리스도는 그 계약을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세우셨다. 즉 이방 세계에도 주셨다. 신약 성서는(구약 성서와는 달리)유대인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모든 나라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생명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 로 주셨다.


[7] 그는 "희생 제사와 예물을 끊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모든 제사적 희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것들을 제거해버렸다. 본체적인 것이 나타날 때는 그림자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가 십자가의 피로써 평화을 이룩했을 때, 그리고 그 십자가에 의해서 화해와 평화의 계약을 수립했을 때, 모든 화목 제물을 중지시켰던 것이다. 세상에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함으로써(이 일은 사도들이 맡았다)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양과 염소의 피에 의한 용서를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게 하신다. 그래서 "희생 제사와 예물을 끊은" 것이다. 사도는 히브리서신에서 당시 율법 아래 있던 것과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 무엇이 훌륭한 제사장 제도이며 희생 제물과 제단인지를 보여 준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3) 예루살렘의 파괴와 유대 교회, 그리고 유대 국가의 파괴에 대해서 예언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메시야의 끊김에 곧바로 뒤따른다. 그 이유는 그 같은 파괴가 메시야를 죽인 사람들에 대한 "의로운 심판" 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말하자면 메시야의 죽음이 목적한 중대한 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의식적인 율법을 제거하고, "계명의 율법" 과 그 의무를 폐지하기 위해 죽으셧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뜻에 따라 그것을 폐지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율법을 지킨다. 그들은 스데반(그는 최초의 기독교 순교자였다)이, 예수는 "모세나 그들에게 준 전통을 변화시켰다" (행 6:14)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돌로 쳐죽였

 

그러므로 성전과 거룩한 도성, 그리고 율법적 제사를 제거시키지 아니하고는, 모세의 질서를 폐지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실제로 그리스도가 죽은 후 40년도 못되어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파괴는 지금까지도 "복구되지 아니한" 황폐를 가져왔다. 그리로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성전 중건을 재건한다하여 지나치게 교만하지 말아야 될 이유이다. 그것이 여기에 자세히 예언되어 있다. 왜냐하면 시간이 오면 그런 것들은 완전히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여기서처럼 70년 동안만이 아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도래를 희망하면서 기뻐하고, 그리고 "결코 파괴되지 않을" 메시야의 영적 왕국이 건설될 것을 즐거워하자.

 

[1] 여기에서는 "장차 올 한 왕의 백성" 이 이러한 파멸의 도구가 될 것이라고 예언되고 있다. 즉 그 도구는 바로 로마의 군대를 가리킨다. 그것은 장차의 왕국에 속해있다. 그리스도는 장차을 왕이요, 그들은 그에 의해서 이 일에 동원된다. 그들은 "그의 군대" 이다(마 22:7). 또 이방인들(지금은 외국인이나 메시야의 백성이 될 자들이다)이 유대를 파괴할 것이다.

 

[2] 그 파괴는 "전쟁에 의해서" 생길 것이며, 그 "전쟁의 종말" 이 미리 "결정된 황폐" 가 되리라, 로마인과 유대인의 전쟁은 유대인들 자신의 완고함 때문에 오래 그리고 참혹한 전쟁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람들이 아주 희소해지는 것이 되리라.
[3] 도시와 성소는 특별한 방식으로 파멸당할 것이다. 로마의 장군 디투스(Titus)는 성전을 구하려고 하였었다. 그러나 그의 군사들은 유대인들에 대해서 아주 분노하였기 때문에, 그는 병졸들이 성전을 불태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예언은 성취된 것이다.


[4] 모든 저항은 무익한 것이었다. "그것의 종말은 홍수처럼 될 것이다." 그것은 옛 세계를 쓸어버릴 파괴의 대홍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파멸을 막아낼 아무 것도 있을 수 없었다.


[5] 이렇게 해서 "희생 제물과 예물은 종식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들의 가족들이 없어졌고 또한 제사장의 족보가 대단히 혼란하게 되어서, 세상에는 자기를 아론의 후예로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으므로 그것은 중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6] "가증스런 것이 만연" 될 것이다. 즉 유대 민족의 전반적인 타락과 유대인들의 불의 때문에 "황폐하게 될 "것이다(살전 2:16).
혹은 "가증스러운 것" 을 유대인들에게 미움의 대상이던 로마 군대로 볼 수도 있다(그들 로마의 군인들은 유대인들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유대 "나라를 휩쓸었고," 그것 때문에 그 나라는 "황폐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런 것을 언급하셨다(마 24: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이것은 누가복음 21장 20절에서 또 설명되어 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7] 그 황폐는 전체적이고도 최종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는 완전히 종말에 이르기까지 황폐하게 한 것이다." 즉 그가 완전히 황폐케 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작정된 황폐" 이다. 그리고 그 황폐함은 철저히 성취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황폐해질 때, 또 하나의 작정된 것이 있으니, "황폐 위에 쏟아질" 것이 있다(27절). 그것은 바로" 혼미한 심령" (롬 11:28, 25)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이것 때문에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는 이스라엘인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야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게 될 것이다."

 

 

 

 약속된 자비를 구함 (다니엘 9:4-19)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다니엘의 기도와 그 기도를 통한 다니엘의 고백을 본다.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였다." 모든 기도에서 우리는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신뢰, 그리고 죄로 인한 슬픔과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도 고백해야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우리가 충심으로 행하기로 서약하는 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며, 우리 자신의 확신에 대한 언어가 되어야 한다.

이 기도는 여기에 기록된 것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이 기도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Ⅰ. 여기에는 하나님께 대한 다니엘의 겸손하고 진지한, 그리고 경건한 간구가 나오며 그 간구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1. 그는 먼저 두려워해야 할 분으로서, 그리고 언제나 두려움으로 그 앞에서야 할 분으로서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오, 여호와여!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이시여!" 그는 극히 크고 두려운 교회의 적들도 능히 처치하실 수 있으신 하나님이다.

 

2. 신뢰해야 할 하나님으로서, 즉 우리가 의지하고 신뢰해야 할 분으로서 그에게 영광을 돌린다.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는 분이시여!" 만약 우리가 우리의 계약을 지킨다면 하나님도 자기 언약을 어기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자기 말씀 못지 않게 선히 대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그들과의 언약을 지키시며, 그의 약속은 일점 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보다 더 좋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뿐만 아니라, 언약된 것 이상의 것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그의 백성들의 불행을 나열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겨냥하고 약 속의 이행을 간원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겨냥한 것은 적절한 것이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크심과 그의 선하심 그리고 그의 존엄과 자비를 결합해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을 주목하자.

 

Ⅱ.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랫동안 그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었던 재난의 유발 원인인 죄에 희개의 고백이 나오고 있다(5,6절). 우리가 민족에 대한 자비를 하나님께 구할 때, 우리는 민족의 죄 때문에 우리를 앞에서 낮추어야만 한다. 다니엘이 여기서 슬퍼하는 죄는 그런 국가적 죄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다니엘이 그들의 큰 죄를 열거하면서 사용한 말의 다양성을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죄의 무거운 짐을 자기가 지려고 하는 것은 참회자에게 어울리는 일이다). "우리는 많은 특수한 경우에 죄를 범했습니다. 아니, 우리는 범죄했으며 범죄의 장사를 했으며 강퍅한 마음과 곧은 목으로 사악하게 행했으며 이 점에서 반역하였으며, 무기를 들고 왕 중의 왕이신 여호와와 그 존엄과 그 왕권에 대적하였나이다. "두 가지일이 그들의 죄를 더욱 악화시켰다.

 

1. 그들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을 위반하였다. "우리는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나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나이다" (10절). 그것은 죄의 본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한 율법의 파괴와 그것의 악의를 말해 주는 것이다. 만일 죄가 죄로 드러나게 된다면 그보다 더 나쁘게 나타나는 것은 없다. 죄의 죄됨은 최대의 증오성이다(롬 7:13). 하나님은 우리 앞에 그의 율법을 분명하고 완전하게 세우셨으나, 우리는 그 법대로 살거나 행하지 않고 곁길로 가거나 돌이켜 갔던 것이다.

 

2.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주신 따끔한 경고를 무시했다. 하나님은 매 시대마다 선지자를 일으켜 보내셨다(6절).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상기시켜 주던 주의 종 선지자들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말했지만 우리는 그들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신분과 지위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존중하면서 그들의 메시지를 신실하게 전했습니다. 그들은 왕들에게 메시지를 전할만큼 용기와 자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열조와 모든 국민들에게 말할 만큼 자신을 낮추고 측은지심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말한 것을 듣지 않았고, 그들에게 관심조차 표하지 않았으며,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조롱하고 그의 말을 경멸한 것은 예루살렘의 죄의 양을 채우는 행위였다(대하 36:16).

 

 

죄에 대한 고백은 여기서 반복되고 강조된다. 회개자는 자기 마음이 완전히 깨질 때까지 몇 번이고 자신을 비판하고 수치스럽게 만들어야 한다. "모든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했나이다(11절). 하나님의 규례를 가장 잘 알고 가장 잘 알 것으로 기대된 백성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특수 민족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 은총으로 둘러쌌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떠나며 범한 것은 여기 저기서 한 사람씩 나온 것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었다. 백성전체였다. 그들은 주의 목소리를 듣지 않음으로써 청종치 않으려고 그 길에서 벗어났다. 이 불순종이이야말로 진정한 모든 참회자가 가장 민감하게 자책하는 점이다. "우리는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으며(14절), 우리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 (15절). 자비를 구하려고 하는 자는 이처럼 자기 죄를 먼저 회개해야만 할 것이다.

 

Ⅲ.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진 모든 심판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한 겸손한 인식이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자의 길이다. 회개자는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분명하시며 죄인들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1. 그는 자기들을 이 모든 환난 속에 빠뜨린 것은 바로 죄였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스라엘은 주위 모든 나라로 흩어졌고, 아주 약화되었으며 궁핍해졌다. 하나님의 손은 이스라엘을 여기 저기로 쫓아 내셨다. 어떤 자들은 가까운 데로, 또 다른자들은 먼 데로 쫓겨났다. 가까이 쫓겨 난 자들은 전부터 그곳에 잘 알려져 있었기에 더 수치스러웠고 먼 데로 추방된 자들은 알지 못하는 곳이기에 더욱 설움을 당했다.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 (7절). 그들은 스스로 열방과 혼합되어 타락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열방에다 섞어서 박탈당하게 하셨다.

 

2. 다니엘은 이 일로도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입히신 모든 재난으로도 그들에게 잘못 행하지 않으셨으며 그들이 마땅히 받을 바를 그들에게 행하셨다고 자인한다. "오, 여호와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나이다. 우리는 당신의 섭리에 어떤 결합도 찾을 수 없나이다. 당신의 심판에는 예외가 없다는 것을 아니이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가 행하시는 모든 일에 의로우십니다. 혹독한 재난 속에서도 주는 의로우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당신의 목소리 즉 주의 입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손의 무기를 느껴 마땅합니다." 이것은 애가 1장 18절에서 인용된 것인 듯하다.

 

3. 다니엘은 그들에게 일어난 사건 속에서 성서의 성취를 눈여겨본다. "그는 약속한 대로 신실하게 그들에게 고난을 주셨다." 그 고통은 그가 말한 말씀에 의해서 생긴 것이었다.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그것은 모세의 율법 가운데 기록된 명세대로 된 것입니다(11절)." . 더 나아가 이것은 그들에게 환란을 주시는 하나님을 정당화시킨다. 즉 하나님은 율법의 형법을 부과하셨을 뿐이다. 그는 율법의 형벌을 공정히 그들에게 경고하셨던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실성에 대한 명예를 보존하고 그의 통치에 대한 경멸을 방지하는 데 필요하였다. 그의 경고의 말씀은 성취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하나님을 단순히 공갈군이나 허깨비로 간주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전혀 놀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와 우리를 판단하는 재판관들을 쳐서 하신 말씀을 확증하셨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율법을 위반했고, 재판관들은 하나님의 율법 위반자들인 우리들을 처벌해야 할 의무를 이행치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재판관들이 행악자들에게 정의를 실행하여 공포를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 자신이 저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여러 번 말씀하셨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그가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커다란 재앙을 내리심으로써" 성취하셨다. 그 재앙은 제왕들과 재판관들 자신도 함께 당했다. "하나님의 말씀의 심판이" "하나님의 손의 심판" 과 얼마나 정확히 일치하는가를 주목하자!

 

4. 다니엘은 그들이 처한 재난을 중히 여겼다. 그래야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이 가져다주는 유익을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저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징계를 업신여겨 왔었던 것이다. "이 재난은 우리가 불평하는 바 생활의 일반적인 고통 같은 것이 아니다. 이 재난 속에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특수한 징표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온천하에 예루살렘에 임한일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12절). 그것은 교회의 이름으로 말해졌던 절규, "내게 임한 슬픔 같은 슬픔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예레미야의 애가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이와 유사한 다른 물음을 생각나게 한다. 즉 "나의 죄와 같은 죄가 또 어디에 있었던가?"

 

5. 다니엘은 온 국민, 즉 그 나라의 가장 높은 자에게서 가장 낮은 자에게 이르기까지 부끄러움을 돌렸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다니엘의 기도에 "아멘" 하고 말하려고 한다면-이것은 저들이 이 기도의 혜택을 같이 누리고자 한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그들은 모두 그들의 손을 그들의 입에 대야하며, 그 입은 땅에 대야한다. "수욕이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날과 같도다(7절). 우리는 오늘날 심판의 부끄러움 아래 있으며, 그 수욕에 우리 자신을 적응 시켜야만 한다. 또한 수욕은 우리 자신 때문에 온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들여야 한다." 만일 이스라엘이 그들의 특성을 보존했더라면, 또 거룩한 백성으로서 계속되었더라면, "모든 나라 가운데서 그들의 이름과 영광이 높아졌을 것이다" (신 26:19). 그러나 지금은 "죄를 범하여 사악하게" 타락했으므로,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거인들" 에게 치욕이 돌아갔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치욕은 "모든 이스라엘," 즉 바벨론의 강가에 "가까이 있던" 두 지파와 앗수르 땅에 "멀리 떨어져 있는" 열 지파에게 모두 속한다. "수욕은 우리 땅의 서민들에게 뿐만아니라, 우리의 열왕과 방백과 열조에게로 돌아왔다(8절). 그들이 보다 선한 모범을 보였어야 했고, 이 같은 악을 막는 데에다 자기들의 권력을 행했어야 했었기 때문이다.

 

6. 그는 이 심판이 계속되는 것은 심판을 당하고도 이스라엘이 완고한 탓이라고 말한다(13,14절). "이 모든 재앙이 우리에게 임했으며 오래 계속되었으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도다. 우리들은 매를 맞았으나 하나님께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지 않았도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평화를 구하는 데 마음을 쓰지 않았도다. 다니엘은 그의 형제들에게 끊임없는 기도의 선한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의 모범을 따르는 자가 거의 없음을 보고 그의 마음이 아팠다.

 

그들이 "재난" 을 당하며 "곧 하나님을 찾을" 것이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죄로부터 돌아서고"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구하지 아니했다. 재난이 오는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들이 죄에서 떠나"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엘리후도 사람들에게 그렇게 설명했다(욥 36:10). 재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귀를 열어, 그들이 죄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훈계와 명령을 듣게 하신다." 그리고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올바르게 "이해하게" 되고, 그 진리의 능력과 권위에 복종한다면, 그들은 그들의 잘못된 길로부터 되돌아올 것이다.

이 길을 가는 첫 번째 단계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즉 재난이 사라지기 전에 먼저 그 재난이 거룩하게 되고, 하나님의 섭리에 뒤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이 옵으로써 재난이 소기의 목적을 다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재난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속박하는 데도 부르짖지 아니하는" 자들은 "죄에서 떠나거나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므로, 즉 저들이 재난을 선용하지 아니하므로, 마치 법관이 선고대로 형이 집행되는가를 주목하듯, 여호와께서 이 재앙을 주시하셨다. 또 우리가 녹지 아니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계속 풀무불에 가두고 그 풀무를 살피셨으니, 풀무를 더욱 뜨겁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는 그가 이기실 것이요, 그 모든절차에서 올바르실 것이기 때문이다.

 

Ⅳ. 여기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이스라엘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의 오랜 증거와 저들의 이해관계에 얽혀있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대한 관심에 대한 간절한 호소가 있다.

 

1. 하나님은 언제나 죄를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다(9절)는 사실이 그들을 크게 위로한다.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사유하심이 있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선포를 말해 주는 것이다(출 34:6, 7). 즉 "주 하나님, 은혜스럽고 죄를 용서하시는 자비의 하나님" 을 나타내는 것이다. 정의가 하나님께 속한 것처럼 "자비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 는 사실을 회상하는 것은 불쌍한 죄인들에게는 더없이 고무적인 일임을 주목하자. 또한 하나님의 정의에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의 위로를 받을 것이다(시 62:12). 하나님에게는 풍부한 자비강 있다. 또한 단 한 번의 용서만이 아니라 끝없는 용서가 있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 이시다(느 9:17 난외주). "비록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였지만," 하나님에게는 자비가 있다. "대적자까지도" 하나님에게는 자비가 있다. "대적자까지도 "용서하시는 자비가 있다.

 

2. 하나님이 옛날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내심으로써 이전에 영광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이 그들에게 힘이 되었다. 그는 자기의 신앙의 격려를 위해서 그렇게 멀리 소급해서 바라본다(15절). "주께서 강한 손으로 주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셨나이다. 그처럼 이스라엘을 강한 손으로 바벨론에서 인도해 내시지 않겠나이까? 이스라엘은 그 때에 주의 백성이 되었사온대, 이제 다시 주의 백성으로 새로이 만드시지 않겠나이까? 지금 이스라엘은 죄가 많고 쓸모없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은 힘이 세고 거만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도 대적자들은 여전히 힘이 세었고 거만하지 않았나이까? 그리고 하나님은 바벨론으로부터의 이스라엘의 구원은 애굽에서의 탈출보다 더 빛난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이까?" (렘 16:14, 15) 이러한 호소의 힘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놓여 있다.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오늘과 같이 명성을 얻으신 우리 하나님, 우리를 계속 바벨론에서 고통받도록 버려두심으로써 그 명성을 상실하시렵니까? 우리가 그토록 자주 회상했던 그 구원으로 명성을 얻으셨는데, 지금은 우리가 이토록 자주 기도하고 대망하는 구원을 베푸시사 다시 명성을 얻지 않으시려 하나이까?"

 

Ⅴ. 여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처한 치욕에 대한 애처로운 호소와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의 타락에 대한 안타까운 호소가 있다. 양자는 모두 하나님께 불명예를 가져왔고,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애굽에서 탈출시킴으로써 얻었던 명성을 격려시켰다.

 

1.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업신여김을 받았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와 조상들의 불의" 에 의해서, 그들의 명예를 더럽혔고, 스스로를 비천하게 만들었다. 당시 그들은 명실공히 하나님의 백성이었으며, 따라서 진실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백성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위 모든 나라들에게 치욕거리" 가 되었다. 그들의 이웃들은 이스라엘을 비웃으며, 자들의 치욕에 개가를 올린다. "죄는 어느 백성에게나 치욕이 된다" 는 것을 주목하자. 그러나 특히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더욱 치욕적인 것임을 항상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저들에게 더 많은 눈이 있어, 더 많이 수치를 당하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거룩한 장소가 황폐하게 되었다.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치욕거리가 되었다(16절). 예루살렘은 그 성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놀람" 과 조롱거리가 되었다. 성소, 거룩한 집이 황폐하였고(17절). 제단들이 파괴되었고, 모든 건물들은 잿더미로 변했다. 거룩한 것의 황폐는 모든 성도들의 가장 큰 슬픔임을 주목하자. 성소의 폐허 속에는 이 세상에서 저들이 받는 온갖 위안이 함께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Ⅵ. 또 불쌍한 유대 포로민들에게 이전의 기쁨을 회복해 달라는 끈질긴 요구가 있다. 이 청원은 대단히 강력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서 자기와 씨름하는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오 여호와여! 내가 구하옵나니(16절) 만일 당신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하시고자 하신다면, 이것을 해하시옵소서. 그것은 나의 마음의 기도이며 소망이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오, 우리의 하나님!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17절). 평화의 응답을 허락하옵소서."

그러면 그의 간구와 요구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1. 그것은 먼저 하나님이 그의 분노를 이스라엘에서 거두시기를 간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이 그 어느 것보다도 더 무서워하고 걱정하던 바이다. "오, 주의 분노를 주의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16절) 다니엘은 이스라엘을 포로 생활에서 탈출시켜 주기를 먼저 기도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진노를 떠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원인을 제거하면, 결과는 쉽게 해결될 것이다.

 

2. 그는 주의 얼굴 빛을 저들에게 비추기를 간구했다(17절).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소서. 자비를 다시 보이시옵소서. 주께서 우리와 화해하시사, 만사형통하리라는 것을 나타내소서." 바로 황폐한 성소에 대한 하나님의 얼굴의 빛이 바로 그것의 회복을 의미하게 된다는 것을 주목하자! 그 기초 위에 성소를 세워야 한다.

 

3.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의 구원을 속히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한다(19절). "주여, 들으소서, 오 주여 용서하소서." 즉 "간구한 자비를 자비롭게 허락하소서. 그리하여 우리와 자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가 떠나가게 급히 하소서. 지체하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신앙을 통해서, 자기들을 속히 구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윗도 종종 "서두르시옵소서, 오! 하나님이시여 나를 도우시옵소서" 라고 기도했다.

Ⅶ. 여기에는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여러 간구와 논증이 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변론도 허락하신다. 이 변론은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은 자신이 행하시려고 하는 것을 스스로 알고 계신다) 우리 자신을 감동시켜 우리의 열심을 극대화시키고 우리의 신앙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1.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어떠한 의로움에도 의존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어떤 것도 받을 만하지 못하다. 다만 진노와 심판을 받아야 할 뿐이다(18절).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선함, 혹은 우리에 의해서 행해진 선행 때문에 주의 사랑을 받을 만하다고 하거나, 혹은 채권자처럼 어떤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가치가 있다는 것처럼 만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아니, 비록 우리가 지금보다 더 의로왔을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의를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재판관에게 간청할 뿐입니다." 모세는 오래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한 모든 것은 "이스라엘의 의로움 때문은 아니었다 "고 말했다(신 9:4, 5). 그리고 에스겔도 나중에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구출됨은 "이스라엘 자신들 때문에" 된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겔 36:22, 32). 자비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의에 대한 일체의 의존과 자만심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주의하자.

 

2.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기도에서 용기를 가졌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의 이유는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서 자비를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자비와 은총을 구할 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

 

(1) "주(主) 자신을 위해서 하시옵소서(19절). 주 자신의 계획의 성취를 위해서, 주의 약 속의 완성을 위해서, 그리고 주의 영광의 선포를 위해서 행하시옵소서." 하나님은 자신의 방법과 때에 따라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 자신의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주목하자.

 

(2) "주를 위해서, 즉 주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시옵소서." 즉 약속된 메시야를 위해서, 다윗이 메시야를 부를 때 말한 주님을 위해서(시 110:1) 행하시옵소서. 그리고 인자(人子)(시 80:17)를 위해서, 또한 "주의 말씀 자신을 위해서 자비를 베푸소서" (삼하 7:21).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주님이심을 주목하자.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들어 죄인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들어 죄인들에게 비추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그것을 인해서 간구의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는 "주의 의(義)" 곧 오직 주님의 의를 말해야 한다" (시 71:16). "기름부음 받은 자의 얼굴을 바라보자." 주께서 친히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도록 가르치셨다."

 

(3) "주여, 주는 주의 공의(公義)를 좇아서 행하시옵소서(16절). 즉 주의 공의를 따라서 우리의 박해자와 억압자들에 대한 우리의 신원을 갚아 주소서. 비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불의하지만, 그들 박해자와의 관계에서는 의롭습니다." 혹은 여기서 "하나님의 공의" 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신실성을 뜻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의 공의를 따라서" 경고를 시행하셨다(11절). 그러니 "주여, 이제는 모든 것을 주의 공의를 따라서 행하시지 않겠습니까? 경고에 대해서처럼 약속에 대해서도 신실하시지 않으시렵니까?"

 

(4) "주여, 주의 큰 긍휼을 인하여 행하시옵소서(18절). 그래서 주는 자비가 풍성한 하나님이 심이 드러나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바 선한 것을 우리는 "자비" 라고 부른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선을 순수하게 하나님의 자비로부터만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참이란 자비의 적절한 대상이 되기 때문에, 여기에서 예언자는 교회의 애처로운 처지를 하나님께 아뢰다. 말하자면 동정심을 자아내려는 것이다. "주의 눈을 들어 우리들의 슬픔을 보시옵소서. 특히 성소의 폐허를 보시옵소서! 이 가엾은 처지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교회의 황폐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아뢰고, 그에게 맡겨야 한다.

 

(5) "주께 대한 우리의 관계를 위해서 행하시옵소서. 황폐케된 성소는 주의 성소입니다(17절). 주의 영광에 바쳐졌고, 주께 봉사하기 위해 세워진, 주의 거처입니다. 예루살렘은 주의 도성이며, 주의 거룩한 산입니다(16절) 또한 예루살렘은 주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도성입니다" (18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거기에 두기 위해" "이스라엘은 모든 지파 가운데서 택하여낸" 도성이었다. "수치를 당하는 백성은 주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당하는 수치로 인해서 바로 당신의 이름이 수치를 당하나이다(16절).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불리우나이다(19절). 주여! 그들은 당신의 것입니다. 그들을 구원하시옵소서" (시 119:94).

 

 

 

응답받은 다니엘의 기도 (다니엘 9:20-27)
 
 
우리는 여기에서 다니엘의 기도가 곧바로 응답되는 것을 본다. 이것은 대단히 기억해 둘 만한 것 가운데 하나인데, 모든 "구약 성서" 중에 있는 그리스도와 복음에 관한 예언으로서는 가장 분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세례 요한이 새벽별이었다면, 이것은 "의의태양" 곧 "위로부터 돋는 해" 의 새벽이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Ⅰ. 이 응답이 주어진 때.
1. 그때는 다니엘이 아직 기도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것을 다니엘이 크게 강조한다. "내가 이같이 말하고 있을 때" (20절). 또 "기도로 말하고 있을 때에" (21절), 다니엘이 무릎을 펴고 일어나기 전에, 그리고 그가 말하고자 하던 것이 아직 더 남아 있었을 때였다.


(1) 다니엘은 그가 기도에서 주로 바라고 있던 두 가지의 골자를 언급한다.


[1] 다니엘은 죄를 고백하면서, 그것을 통애했다. 즉 "내 자신의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 에 대해서 그리했다. 다니엘은 지위가 있고 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할 그 자신의 죄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죄를 기꺼이 고백한다.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하면서 죄를 짓지 않는 의인," 또 죄를 짓고 후회하지 않는 인간도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자기들은 "죄가 없다" 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자들이 되는, 그래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는" 자들 중의 하나로 간주했다(요일 1:8). 선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다(하나님께 잘못함) 자신들의 괴로움을 털어놓는 것은 양심을 편케 해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바로 그것이 "죄를 고백하는 일" 이다.


다니엘은 또한 "자기 백성들의 죄" 를 고백하였고, 그 죄를 슬퍼하였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하는 사람들, 교회의 부흥과 인간의 영혼에 관심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까지도 슬퍼할 것이다.


[2] 다니엘은 "그의 주 하나님 앞에서 간구하고 있었다." 또 그 간구는 이스라엘을 위한 중재자로서 드리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였다. 그리고 이 기도에서 다니엘의 관심은 그의 "하나님의 거룩한 산," 즉 "시온 산"이었다. 성소의 황폐가 땅과 도성의 황폐보다 더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그 황폐한 성소의 재건, 또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공적인 예배의 확립이 저들의 시민적 관심사의 재건보다 더 중요한 관심사였고, 또 그가 바라는 구출도 바로 그런 뜻에서였다.


(2) 다니엘은 그러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 중에,
[1] 하나님은 그에게 기도하는 자비를 허락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기도에 응답하실 준비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평화의 응답을 하신다는 것에 주목하자. 이제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 즉" 그들이 다 말하기 전에 나는 들을 것이다" (사 65:24)라는 말씀이 성취되었다. 다니엘은 기도에 더욱 열심을 내었고 성의를 더하였다(18,19절). 그리고 다니엘이 그렇게 열심히 "말하고 있던 동안," 천사가 은혜스러운 답변을 가지고 그에게로 왔다. 하나님은 생명력 있는 신앙심을 기뻐하신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위해서 천사를 보내실 것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대하여 열심히 기도한다면, 신앙에 의해서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으로 그 약속을 이루어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가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후일 자기가 자기의 교회를 위해서 이루실 보다 크고 영광스러운 구원에 대해 일러 주셨다.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 가까이 하려는 사람들은 더욱 더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2. 그때는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쯤이었다(21절). 제단은 폐허가 되었다. 그리고 제단 위에는 아무런 제품도 없었다. 그러나 포로기 중에도 경건한 유대인들은 날마다 제사드릴 때를 기억하면서 눈물지었을 것이며, 자기들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향으로써 드려질" 것을 믿고 희망했을 것이다. 또 "자기들의 손을 쳐들고," 그 손과 더불어 저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눈에는 "저녁 제물처럼 받아 들여지기를" 희망했다(시 141:2). 저녁 제사는 그리스도가 세상의 황혼에 드린 위대한 희생 제사의 한 모형이었다. 그리고 다니엘이 "주를 위해" 기도하였을 때, 그 기도가 열납된 것도 바로(그리스도가 드릴)제사의 직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이 영광스러운 구원의 사랑이 다니엘에게 알려진 것이다. 어린양은 그 자신의 피로써 "봉함을 떼었다."


Ⅱ. 천사에 의해서 이 응답이 주어졌다. 그 답변은 꿈에서 주어진 것도 아니요 하늘에서 들리는 목소리로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커다란 확실성과 엄숙성을 위해서, 사람의 모습을 한 천사가 직접 가지고 왔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더 관찰해 보자.


1. 이 천사는 누구인가? 그것은 "그 사람 가르리엘" 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만일 미가엘 천사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면, 이 가브리엘은 성서에 그 이름이 기록된 유일한 피로 된 천사이다. 가브리엘이란 "하나님의 전능한 자" 를 뜻한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힘과 능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벧후 2:11). 그 천사는 다니엘이 이전에 이상 중에 본 사람이었다. 다니엘은 그 천사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다니엘은, 천사가 가까이 왔을 때 비록 두려워 떨었지만, 천사를 주의깊게 살펴보았고, 그가 이전의 환상에서 본 가브리엘임을 알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전에 떨었던 것처럼 그렇게 두려워하지는 않게 되었다. 이 천사가 스가랴에게 "스가랴야, 나는 가브리엘" 라고 말했을 때(눅 1:19) 그것은, 다니엘에게 신앙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미리 말해주었던 이 소식 곧 메시야의 도래를 알렸던 이 통고를 그에게 상기시켜 준 것이었다.


2. 다니엘이 기도한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이 천사가 받은 소식은 무엇이었나?(23절) "기도(간구)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말씀)이 내렸다." 하늘에서의 하나님의 자문회에서 천사들에게 전갈이 내렸다. 천사들은 그런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명령을 다니엘에게 곧 가져가라고 가브리엘에게 명령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을 움직이게 한 것은 다니엘이 기도 자체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응답이 다니엘이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기도의 의무에 진실한 것을 기뻐하셨다. 그리고 그 증거로 그에게 이 은혜스러운 소식을 전하셨다.
혹은 앞에 언급되었던 바(25절)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고레스 왕의 명령" 이 바로 "다니엘의 기도가 시작되던 때" 에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 날에 이 일이 실시되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자유의 선언이 이 날 아침에 서명되었다. 그때가 바로 그것을 위해 기도하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제, 금식일이 끝나가는 이제 다니엘은 "속죄일" 의 끝에서처럼, 희년의 나팔이 자유를 알리는 통지를 받았다.


3. 천사는 그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신속히 행동했다. "가브리엘은 빨리 날아서" 왔다(21절). 천사들은 날개가 달린 사신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재빨리 움직이며, 그들이 받은 명령을 실행하는데 지체하지 않는다. 그들은 "번개같은 생물처럼" 왕래한다 (겔 1:14). 그러나 때때로 그들은 다른때보다 훨씬 더 신속하게 움직인다. 즉 가브리엘이 여기서 "재빨리 날아" 온 것과 같은 경우가 그것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힘에 의존하여 그들의 일을 실행한다. 비록 그들이 지혜가 탁월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대로 빨리, 혹은 느리게 움직인다. 그리고 천사들이 비록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때만 나를 수 있다. 천사들 자신들은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종" (일군)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을 행한다(시 103:21).


4. 천사의 메시지의 서론을 검토해 보자.


(1) 천사는 "다니엘을 만졌다" (21절). 전에 그랬던 것처럼 (8:18), 가브리엘은 다니엘의 잠을 깨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기도를 중지하고 자기가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말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듣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의 전후를 살펴야 하며, 망대 위에서 살펴야 한다.


(2) 가브리엘 천사는 다니엘과 아주 친근하게, 마치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대하는 것처럼 친근하게 "그와 말했다(22절). 그것은 "그의 공포가 그 (다니엘)를 두렵게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자기의 용무를 다니엘에게 말했다. 즉 하늘로부터 그에게 친절한 소식을 가져왔다고 했다. "나는 네가 전에는 알지 못했던 길들을 말하고 보여 주기 위해서 왔다(23절).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교회가 안티오커스 아래서 박해받은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재난의 기간을 보여 주었다(8:19). 그러나 이제는 더 큰 일을 다니엘에게 보여 준다. 왜냐하면 작은 일에 신실한 그에게 더 큰 일을 맡기기 위해서이다. "나는 너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왔나니, 이 일들을 너에게 보여 줄 뿐 아니라, 그것들을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이니라."


(3)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그가 하늘의 사랑을 받는 자임을 확신시킨다.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이기 때문에 내가 왔다. 너는 바람직한 사람이요, 하나님께 용납된 자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니라." 하나님은 그의 모든 자녀들을 사랑하시지만, 그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더욱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리스도는 그의 가슴에 안긴 한 제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받던 제자" 는 다니엘이 구약 성서의 예언적 환상을 위임 받았던 것처럼, 신약 성서에서 예언적 환상을 위임받았다.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보다 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친구" 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고 말씀하신다(창 18:17).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계시해 주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받는다는 점을 알 수 있으리라. 많은 사람들은 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준 칭호가 여기서 다니엘에게 주는 칭호와 대단히 비슷하며, 그것은 그녀에게 이것을 상기시켜 주려 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너는 크게 은총(총애)을 입은 자라" 라는 것이다. 다니엘에게도 "크게 은총(사랑)을 입은 자" 라고 했다.


(4) 천사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이제부터의 자기 말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명령한다. "그러므로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 (23절). 이것은 그의 말이 다니엘이 이전에 보았던 그 어떤 환상보다도 더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는 것임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이상들을 숙고해야 하며, 마음 깊이 간직하고,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 비교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무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깊은 생각(숙고)의 부족 때문이다. 이 환상은 깊은 생각을 요구하며 동시에 그런 숙고를 할 만한 것들이다.


Ⅲ. 메시지 내용을 검토해보자. 그 소식은 대단히 엄숙하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대단한 관심이 기울여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아주 정확하게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예언들이 그런 것처럼 거기에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 있엇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예언서를 통해서 70년간의 포로 생활이 끝나감을 이해하고 있었던 다니엘은, 이제 영광스럽게도 다른 곳보다 더 먼저 영광스러운 해방을 교회에게 알리도록 선택된다. 먼저 것은 나중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것은 70주간(週間)이 지나면 곧 해방이 있다. 다니엘은 그 예언을 넘어서 있는 것을 기도했고, 그 기도에 대해 이 같은 응답을 받은 것이다. 다니엘은 "자기 백성" 과 "거룩한 도성" 을 위해서 기도했다. 즉 "저들" 의 석방과 "그것" (도성)의 재건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니엘이 생각하거나 요구했던 것 이상의 것을 응답하셨다." 하나님은 자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베푸신다(시 21:4).


1. 여기에 확정된 시간은 다소 이해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보면 그 기간은 "칠십 주간," 즉 "7년의 70배" 인 490년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예루살렘 도성에 관해서 앞으로 일어날 거대한 사건은 이 490년이 다하기 전에 있을 것이다.


(1) 따라서 여기서는 햇수가 주(週)로 서술되었다.
[1] 이것은 대부분인 예언자적 문체와 주화되는 것이다. 예언의 문제는 일상적인 화법과는 달리, 너무 분명한 것은 피해서 되어 있다.


[2] 본래 안식일에 의해서 이루어진 바 시간을 주간으로 나눈 제도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서이며, 그 영광이 영원함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3] 70년 동안의 포로 기간과 관련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그들 자신의 땅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면 7배나 오래 보존해야 한다. 하나님은 심판보다는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더욱 즐겨하신다. 그 땅은 좋지 아니한 의미에서, 70년 동안을 "안식하였다" (레 26:34).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이 좋은 의미에서, 70년의 7배나 되는 기간을 안식할 것이다. 이것은 희년을 열 번 지내는 것이다. 이러한 비율이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미리 정해진 시간을 작정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아 찬양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2) 70 주간에 대해서 생기는 난점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시작과 끝나는 때에 대한 것이다. 본문에는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재건하라는 명령이 주어지는 때부터" 라고 했다(25절). 나는 그것은 에스라서 1장 1절에 언급된 고레스 왕의 조서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왜냐하면 고레스의 조서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회복"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거기에는 예루살렘의 재건에 대한 언급이 밝혀 나타나 있지는 않을지라도, 성전 건축이 암시되었고, 또 그것이 그레스에 의해서 실시되리라고 예언되었기 때문이다. (사 44:28). 고레스가 "너를 재건하리라고 예루살렘에게 말하게 되리라." 이것은 예언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예루살렘의 건축에 대한 가장 유명한 조서이었다. 아니, (고레스의 명령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뜻이었던)" 이 명령의 공포" 는 "다니엘의 기도의 시작" 에서(23절) 언급된 명령의 선포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70주간이 70년이 만기되지 즉시 시작된다는 것은 대단히 은혜스럽게 보인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이의가 제기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이 사실에 의해서 계산하면, 고레스에 의한 바벨론 정복 때부터 알렉산더가 다리오를 정복한 때까지 "바사 왕국" 은 겨우 130년간 존속했다는 결론이 나와 문제가 된다. 반면에 바사 황제의 통치에 관한 자세한 기록에 의하면, 바사 제국은 230년 간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투키디데스(Thucydbdes), 크세노폰(Xenophon), 그리고 다른 여러 사람들은 이렇게 계산한다.

 

이 때를 첫 번째 조서가 내려진 때로 정하는 사람들은 이방 역사가들의 위와 같은 연대 계산을 불확실하고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일축해 버린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계산에 동조한다. 그래서 그 490년을 고레스의 조서에서(에 1:1)가 아니라, 에스라서 6장에 언급된바 약 백 년 이후에 있었던 다리오에 의해서 선포된 예루살렘의 재건에 대한 두 번째 조서에서 시작한 것으로 이해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에스라를 보낸 왕 아닥사스다 제7년에 못박는다.(에 7:8-12). 박학자 풀(Poole)씨는, 그의 라틴 대조표에서 이 70주간의 시작에 대한 여러 견해차를 아주 광범위하고, 치밀하게 수집해 놓았다.

 

[2] 그 시기의 종말에 대한 어려움이 있다. 이때에 대해서도 해석자 사이에 일치된 견해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때라고 하여, 이 유명한 예언의 명시적인 말들을 보면,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저녁 제사 때에 말했던 바로 그 시간에서부터 그리스도가 죽은 때(그 때도 저녁 무렵이었다)까지의 기간을 말해 준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한다. 그리고 나는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 그 기간은 정확하게 490년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 "주간의 절반에(즉 70주간의 마지막 주간에), 그가 제사와 예물을 중지시킬 것이다(27절)라는 말이 있으므로, 그때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한 때요,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로 향해 나아가던 때이다. 그러나 그 때를 정확히 그리스도의 죽음의 때와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27절)을 다음과 같이 읽을 것이다. 즉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증언을 강화시킬 것이다. 최후의 7일, 혹은 최후의 한 주간, 그리고 그 주간의 절반 곧 7년의 절반(즉 그리스도가 그의 공생애를 보낸 3년 반)은 희생과 봉헌을 그치게 할 것이다" 고 해석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때를 그리스도가 죽은 후 37년 경, 예루살렘의 파괴 때까지로 계산한다. 그것은 이 70주간이 유대 백성과 "그들의 거룩한 도성에 대해 정해지리라" 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소의 파괴에 대해 많은 것이 나와 있다.


[3] 그것은 7주간과 62주간, 그리고 1주간으로 나눈 것에 대한 난점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한 이유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계산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첫 번째 일곱 주간 곧 49년이 지난 때에 성전과 도성이 건축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주간 동안에 그리스도가 그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의 복음의 선포에 의해서 유대적 질서는 무너졌다. 그리하여 복음의 도성과 성전을 위한 터전이 마련되었다. 이것은 전자의 잿더미 위에 세워질 것이었다.


(3) 그러나 이들 시간을 정확히 정하는 것이 아무리 불확실하더라도, 그 때를 결정하는 데는 두 가지 중대한 목적이 있다.
[1] 그것은 믿는 자들에게 그것에 대한 기대를 일으키는 구실을 한다. 메시야의 도래하리라는 막연한 약속이 족장들에게 주어졌었다. 이전의 예언자들은 메시야를 "오실 분"으로 말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도래에 대한 정확한 때는 말해지지 않았다. 비록 이 때에 대한 대단한 의심이 있어서 그 때를 확정할 수는 없었을 지라도, 이 예언의 빛에 의해서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릴 때가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대략 알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일반적으로 보면 그가 "이스라엘의 위로"로써, 그리고 "예루살렘의 속량"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안다(눅 2:25, 38). 이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곧바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눅 19:11).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행 2:5).


[2] 그것은 지금도 불신자들의 기대를 거부하고 묵살시키는 구실을 한다. 그들 불신자들은 예수가" 오실 분" 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들이다. 이 예언은 그들을 침묵시키고 그들을 비난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명령으로부터 이 70주간을 계산하면, 그 기간은 1500년 전에 다 찼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메시야의 도래를 잘못 계산하고 있는 동안 메시야가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나 그러나 이 사실에 의해서 메시야가 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게 되었으며,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바로 미리 정해진 그 시간에 왔고 영원히 기념되어야 할 시각에 오셨던 분이다.

 

2. 여기에 예언된 사건들은 적어도 지금 우리에게는 보다 평이하고 쉬운 것이다. 여기에서 예언된 사건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1) 유대인들이 자기 조국에 되돌아올 것이며, 다시 그 땅에 정착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된다. 이것은 다니엘이 일차적으로 간구한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에서는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러 가라는 명령" 은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위안이 되었으리라(25절). 그리고 그 명령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그 시대가 대단히 어려웠고, 동시에 그 선한 일이 반대에 부딪힐 것이지만, 결국 수행될 것이며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곤란한 동안" 일지라도 "성벽" 과 길거리가 세워졌듯이, 그 "길거리가 다시 재건되어" 전과 같이 아름답게 되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언제고 "곤란한 때"를 각오해야 된다. "즐거운 때" 에도 떨리는 마음으로 즐거워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섬광에 불과하다. 또한 평화와 번영으로 빛나는 막간에 불과하다. 구름은 "비가 온 후" 에도 되돌아 올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땅을 되찾았을 때에도, 그들은 "곤란한 때" 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일을 행하실 것이며, 그의 예루살렘을 중건하시고 아름답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들의 기쁨이다. 아니, 오히려 때의 곤란함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교회를 더 발전시켜 줄 것이다. 교회는 어려울수록 성장한다.

 

(2) 메시야와 메시야의 사업에 대한 예언이 나와 있다. 현세적인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자기들을 로마제국의 멍에에서 구출하고, 세속적인 권세와 부를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반면에 여기에서는 메시야가 다른 사명, 즉 순수하게 영적인 사명을 위해 오셔야 한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1] 그리스도는 "죄를 제거하기 위해" 오셨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반목을 갖게 했고,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켰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적하도록 자극시켰다.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한 것도 죄며, 인류에게 불행을 가져온 것도 죄였다. 죄는 진실로 재난을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다. 하나님께 진실한 봉사를 하려는 사람, 그리고 참으로 인간에게 친절을 베풀려는 사람은 죄를 파괴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하러 오셨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서, "" 그리스도가 오셨다." 즉 "악마의 일을 부수기 위해서" 이다. 그리스도는 "너희의 죄와 범죄를" "버리라" 고 말하지 않는다. 죄와 범죄 일반을 버리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곧 유대인의 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대속물" 이기 때문이다.


첫째, 그리스도는 먼저 범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또 "죄를 끝내고" 죄의 세력을 파괴하기 위해서, 그리고 숱한 재난을 일으키는 "뱀의 머리"를 파쇄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과 거룩함의 왕국을 세우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사탄의 왕국을 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 은혜를 통한 정의와 생명이 지배하는 왕국을 세우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가 죽을 때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셨다.

 

둘째, 그리스도는 "죄를 종결짓기 위해서," 제거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리스도가 악마를 깊은 구멍에 던지셨을 때, 그는 "악마를 인봉하셨던" 것이다(계 20:3). 죄가 용서될 때, 죄는 마치 봉인될 것과 같이 다시 발견되지 않는다.

 

셋째, 그리스도는 죄인들에게 화해를 주기 위해서 오셨다. 희생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정의를 만복시키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케 함과 같은 것이다. 그는 심판관처럼 다투는 양편을 서로 잘 이해하게 만드실 뿐 아니라, 우리를 편들어 주시는 보증인이시다.

 

[2] 그리스도는 "영원한 의가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없애심으로써 죄를 도말하더라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른 방법을 발견하셨다. 죄로부터 죄인들을 구원하심으로써 죄를 없애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죄인을 의롭게 만드는 방법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인으로서 정죄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 있다면 우리의 순결이 우리의 의가 될 것이다. 그러나 타락(넘어짐)한 이상, 우리는 무엇인가 다른 것을 내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에게 호소거리를 주셨다.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독이 "우리의 의" 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율법의 모든 요구를 채운다. 즉" 그리스도는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주(主) 우리 의(義)이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의가 되셨고, "우리는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 의롭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에 의해서 우리는 그 의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의로 여김을" 받게 된다(롬 4:3, 5). 이것은 "영원한" 의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 이며 동시에 우리의 "평화의 왕" 이신 그리스도가 "영원한 아버지" 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영원 전부터 있었고, 또 영원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이것의 적용은 태초부터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 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까지 그러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원한 공덕이다(히 10:12). 그것은 "우리를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반석" 이다.
[3] 그리스도는 "환상과 예언," 즉 메시야를 언급하는 구약 성서의 모든 예언적 환상들을 "응하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들의 봉인을 떼셨다. 즉 그 환상들을 성취하심으로써 그 목적을 이루셨다. 메시야에 대해서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사명은 물론이요 그것들의 진리성을 확증하셨다. 그리스도는 그 환상들을 "응하셨다" (봉인했다-영문 성서). 즉 그는 그의 마음과 뜻을 발견하려는 예언과 환상의 방법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벧후 1:19; 히 1:1).


[4] 그리스도는 "지극히 거룩한 자" 에게 "기름붓기 위해서 오셨다." 그 지극히 거룩한 자는 바로 성령에 의해서 기름부음 받은 자가 자신이다. 그는 그의 동료에 비해서 기쁨의 기름을 "넘치도록" 받았다. 혹은 복음의 교회와 그의 영적 성전, 혹은 거룩한 곳에 기름을 붓고 그것을 거룩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기위해서 오신 것이다(엡 5:26). 혹은 그 자신의 보혈에 의해서(히 10:20), 우리에게 "지성소에 들어가는 새로운 생명의 길" 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성소가 "기름부음 받은" 것과 같다(출 30:25 이하).


그리스도는 "메시야" 라고 불리운다(25,26절). 그것은 "그리스도" "기름부음 받은 자" (요 1:41)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5] 이 모든 것을 위해서 메시야는 "끊어져야" 한다. 즉 참혹하게 죽어야만 하고, 이사야 53장 8절에서 예언된 것처럼 "모든 산 자의 땅에서 끊김" 을 당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설교할 때, 예언자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말한 것 외에는 말하지 않았다(행 26:22, 23). 그리스도는 고난받으셔야 했다. 그리스도는 끊김을 당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자신을 위해서," 즉 자기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야바가 예언한 대로, "백성들을 위해서" 죽어야 한다. 즉 우리를 위해 대신, 우리의 선을 위해서였다. 그 "끊김" 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죽음이었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죽음이었다.


[6]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들과 계약을 맺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계약, 즉 은혜의 계약을 수립해야 한다. 죄없는(무흠한)계약에 의해서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그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그리고 세례와 만찬(이것은 새 언약의 "인" 이다)에 의해서 수립한 이 제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의 계약(유언)을 유효하게 했고 우리로 하여금 그것에 의해서 물려받은 것을 요구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곧 대중들을 위해 그 계약을 세우셨다. "지배자들" 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에도, 가난한 자들은 "전도를 받았다." 또한 그리스도는 그 계약을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세우셨다. 즉 이방 세계에도 주셨다. 신약 성서는(구약 성서와는 달리)유대인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모든 나라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생명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 로 주셨다.


[7] 그는 "희생 제사와 예물을 끊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모든 제사적 희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것들을 제거해버렸다. 본체적인 것이 나타날 때는 그림자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가 십자가의 피로써 평화을 이룩했을 때, 그리고 그 십자가에 의해서 화해와 평화의 계약을 수립했을 때, 모든 화목 제물을 중지시켰던 것이다. 세상에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함으로써(이 일은 사도들이 맡았다)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양과 염소의 피에 의한 용서를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게 하신다. 그래서 "희생 제사와 예물을 끊은" 것이다. 사도는 히브리서신에서 당시 율법 아래 있던 것과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 무엇이 훌륭한 제사장 제도이며 희생 제물과 제단인지를 보여 준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3) 예루살렘의 파괴와 유대 교회, 그리고 유대 국가의 파괴에 대해서 예언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메시야의 끊김에 곧바로 뒤따른다. 그 이유는 그 같은 파괴가 메시야를 죽인 사람들에 대한 "의로운 심판" 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말하자면 메시야의 죽음이 목적한 중대한 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의식적인 율법을 제거하고, "계명의 율법" 과 그 의무를 폐지하기 위해 죽으셧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뜻에 따라 그것을 폐지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율법을 지킨다. 그들은 스데반(그는 최초의 기독교 순교자였다)이, 예수는 "모세나 그들에게 준 전통을 변화시켰다" (행 6:14)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돌로 쳐죽였다. 그러므로 성전과 거룩한 도성, 그리고 율법적 제사를 제거시키지 아니하고는, 모세의 질서를 폐지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실제로 그리스도가 죽은 후 40년도 못되어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파괴는 지금까지도 "복구되지 아니한" 황폐를 가져왔다. 그리로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성전 중건을 재건한다하여 지나치게 교만하지 말아야 될 이유이다. 그것이 여기에 자세히 예언되어 있다. 왜냐하면 시간이 오면 그런 것들은 완전히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여기서처럼 70년 동안만이 아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도래를 희망하면서 기뻐하고, 그리고 "결코 파괴되지 않을" 메시야의 영적 왕국이 건설될 것을 즐거워하자.

 

[1] 여기에서는 "장차 올 한 왕의 백성" 이 이러한 파멸의 도구가 될 것이라고 예언되고 있다. 즉 그 도구는 바로 로마의 군대를 가리킨다. 그것은 장차의 왕국에 속해있다. 그리스도는 장차을 왕이요, 그들은 그에 의해서 이 일에 동원된다. 그들은 "그의 군대" 이다(마 22:7). 또 이방인들(지금은 외국인이나 메시야의 백성이 될 자들이다)이 유대를 파괴할 것이다.

 

[2] 그 파괴는 "전쟁에 의해서" 생길 것이며, 그 "전쟁의 종말" 이 미리 "결정된 황폐" 가 되리라, 로마인과 유대인의 전쟁은 유대인들 자신의 완고함 때문에 오래 그리고 참혹한 전쟁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람들이 아주 희소해지는 것이 되리라.


[3] 도시와 성소는 특별한 방식으로 파멸당할 것이다. 로마의 장군 디투스(Titus)는 성전을 구하려고 하였었다. 그러나 그의 군사들은 유대인들에 대해서 아주 분노하였기 때문에, 그는 병졸들이 성전을 불태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예언은 성취된 것이다.

 

[4] 모든 저항은 무익한 것이었다. "그것의 종말은 홍수처럼 될 것이다." 그것은 옛 세계를 쓸어버릴 파괴의 대홍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파멸을 막아낼 아무 것도 있을 수 없었다.


[5] 이렇게 해서 "희생 제물과 예물은 종식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들의 가족들이 없어졌고 또한 제사장의 족보가 대단히 혼란하게 되어서, 세상에는 자기를 아론의 후예로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으므로 그것은 중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6] "가증스런 것이 만연" 될 것이다. 즉 유대 민족의 전반적인 타락과 유대인들의 불의 때문에 "황폐하게 될 "것이다(살전 2:16).
혹은 "가증스러운 것" 을 유대인들에게 미움의 대상이던 로마 군대로 볼 수도 있다(그들 로마의 군인들은 유대인들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유대 "나라를 휩쓸었고," 그것 때문에 그 나라는 "황폐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런 것을 언급하셨다(마 24: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이것은 누가복음 21장 20절에서 또 설명되어 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7] 그 황폐는 전체적이고도 최종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는 완전히 종말에 이르기까지 황폐하게 한 것이다." 즉 그가 완전히 황폐케 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작정된 황폐" 이다. 그리고 그 황폐함은 철저히 성취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황폐해질 때, 또 하나의 작정된 것이 있으니, "황폐 위에 쏟아질" 것이 있다(27절). 그것은 바로" 혼미한 심령" (롬 11:28, 25)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이것 때문에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는 이스라엘인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야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게 될 것이다."

 

 

 

 

 

70주간의 예언이 가르치는 사건과 의미는 무엇인가?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단 9:24)

이 구절은 메시아의 사역과 시대를 설명하고 있다(9:24-25).  어떤 해석자들은 70주간들과 사역의 범위를 이스라엘 백성과 팔레스틴 땅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제한시킨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은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이다(롬 11:1, 11-12, 25-26).  구원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그리스도와 그 분만을 통하여 온다.
  
따라서 이 구절은 메시아의 구원사역에 여섯 가지 양상을 소개해 주고 있다.
  1) 허물이 마치며    2) 죄가 끝나며    3) 죄악이 영속되며  4)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5)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6)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것이다(24절).
  
카일(Keil)은 이 여섯 가지 언급을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환상대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시고 그들이 그의 백성이 되며 그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바 사람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성막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계 21:1-3).1)
  
따라서 이 예언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기 위해 오셨으며 그를 통해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의 새 생명으로 살아나게 된다(롬 6:2, 18).  또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런 일이 성취되었으므로 은혜가 의로 사람을 다스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롬 5:21).
  
뿐만 아니라 이상과 예언이 응한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시며(히 1:1) 그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예가 되고 아멘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후 1:20).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말씀 역시 예수께서 지성소로 설명된 모든 것을 채우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그가 육체로 오시어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했고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였다(성막에서 나타났던 하나님의 세기나 영광)(요 1:14).  더 나아가서 그가 우리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위해 그의 아버지의 존전으로 들어가셨다고 말씀한다.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신다고 하셨다(요 17:19).  예수님 자신이 지극히 거룩하셨고 거룩하시다.2)  따라서 이 예언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그가 오셔서 이루실 구주의 사역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70주간이 가르치는 의미와 기간 그리고 사건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아쳐(Archer)가 지적한대로 이 70주간의 예언은 기독교 교회 전체의 모든 교파의 연구가들과 학자들에 의하여 가장 광범하게 토의되고 있는 주제일 것이다.3)
  
여기서 먼저 영(Young) 박사의 70주간에 대한 네 가지 학파에 대한 해석을 소개하기로 하고 그 후에 더 자세한 내용을 설명해 보기로 한다.

   1.  전통적인 메시아 해석: 이 견해는 70주간의 예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특히 그의 죽음과 예루살렘의 멸망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이 그 첫 해석자요 푸세이(Pusey), 라잇(Wright) 그리고 윌슨(Wilson)이 이 학파에 속하는데 영(Young)도 이 해석을 지지한다.

   2. 자유주의적인 해석: 이 견해는 70주간은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nes 시대와 마카비(Macabbes)하에서 그의 패배의 기간을 기술하고 있는 예언일 뿐이라고 한다.  끊어진 메시야는 안디오커스의 방어를 위해 살해된 대제사장 오니아스(Onias)와 동일시한다.

   3. 기독교회의 해석: 이 견해에서 70은 정확한 해의 주간이 아니라 메시아의 첫 번째 강림과 죽음, 유대 인을 귀환시킨 고레스의 칙령과 적그리스도의 때 그리고 종말에 그의 멸망의 때 사이에 기간을 포함하는 상징적 수로 이해한다.

   4.  괄호적인 해석: 70이레는 7이레와 62이레로 나누이며, 마지막 일곱은 정해지지 않은 괄호에 의해 그 나머지에서 분리된 것이다.  69이레는 메시아의 첫 강림과 죽음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포함한다. 마지막 7은 시대의 끝에 있을 적그리스도의 시기이다.  이 괄호 해석은 세대주의적 해석이다.4)

여기서 이레란(sabu) 말은 일곱이라는 말 세바(seba)에서 파생되었다.  이 말의 정상적인 복수는 그 형태에 있어서 여성인 세부옷(sebuot)이다.  그런데 오직 다니엘서의 이 장에서만 이 단어가 남성 복수인 사부임(Sabuim)으로 쓰였다. 따라서 70이레는 70개가 7번 있는 날이라기보다는 그만큼의 해이다.  그래서 전체는 49년이 된다고 한다.5)
  
그런데 만일 페르샤의 왕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 있었던 느헤미야가 그 왕 20년에 예루살렘 중건에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의 통치 20년은 454년이 된다. 그리고 7+62이레는 69이레나 483년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주후 29년이라는 햇수에 이르게 된다(483-454 = 29).  이 해가 예수님의 사역의 정점의 해가 된다.  그 해 봄에 예수님은 기뻐 환호하는 군중들에 의해 메시야와 왕으로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을 하게 된다(슥 9:9; 마 21:5).6)
  
그러나 칼빈은 그 계산은 예루살렘으로 포로의 귀환을 위한 고레스의 칙령과 시작해야 되며 이렇게 할 경우 예레미야의 70년에 대한 예언이 다니엘의 70주간과 직접 연결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칼빈은 해의 정확한 수는 그것들이 연대적이기 보다 상징적이므로 그렇게 중요하다고 보지 않았다.
  
카일(Keil) 역시 시간의 측정에서 상징적인 견해를 지지하였다.  따라서 실제적인 그 시기의 기간은 우리 인간의 연구로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70주간은 말세에 그 완성에로 가는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를 포괄한다고 주장하였고 영(Young)은 메시아의 끊김은 69주간만 아니라 70이례도 역시 정점에 이르는 것으로 믿었다.  우리는 여기 나오는 7의 숫자를 루폴드의 견해처럼 하나님의 활동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수로 보아야 할 것이다.  70은 7x10으로 완전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칠십 이레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사역의 완성기간을 비유한다.7)

 

  따라서 칠십 일곱들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거룩한 성을 위하여 정하신 것이다. 그 작정은 그의 완전히 지혜로우신 섭리에 의한 것이므로 그 기간이 얼마나 오랠는지는 하나님께서만 아신다.8) 성경에는 어려운 내용들이 적지 않다.  그 중에 상당수는 그 설명이 성경 안에 들어 있어서 해석에 그리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말세에 있을 사건이나 상징적인 숫자에 대해서는 우리의 제한된 지혜로 다 풀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이 성취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 이유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