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 이 후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1.[북이스라엘의 멸망].
북이스라엘은 bc931년 여로보암 1세를 시작으로 bc722년 아시리아 제국에게 멸망되기까지 209년간
계속되다가 19대 호세아왕까지 이어졌지만 대부분의 왕들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부도덕과 악정을 되풀이하듯 합니다
bc740년 경 메소포타미아의 아시리아[앗수르]제국은 대군을 거느리고 이스라엘을 공격해 옵니다 이때 19대 호세아 왕은 순종하며 공물을 바쳐 나라의 멸망을 겨우 면하지만 아시리아에 배반하여 이집트에 지원을 요청합니다
이를 알게 된 아시리아 제국의 왕(살만에셀 5세)은 호세아를 잡고 이스라엘을 포위했으나 이스라엘 인들은 3년간 완강하게 저항합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bc722년 아시리아[앗수르]제국은 다시 쳐들어와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시켰고 이때 대부분의 이스라엘인은 포로가 되어 아시리아 제국으로 끌려갑니다
하지만 이 이후에 살만에셀 왕에 대한 기록은 없고 사르곤2세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사야서에 그 이름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유대사람들의 충성심도 사라지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외국인들과 결혼하여 우상들을 받아들이고
[사실 아시리아가 강압적으로 각지의 전통종교를 부정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될 상황이 오게 되더라도
아내는 돌아오고 싶어도 남편은 다른 나라 사람이라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와 같은 문제들이 쌓이고 쌓여 민족 주체성을 조금씩 잃게 되고맙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신약에 배경에서 사마리이안들이유대인들한테 이방인 취급을 받게 되는 가장 큰 계기가 되는데 이방인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순수한 유대인으로 여기지도 않게 됬던 것 입니다 그들은 제국 곳곳으로 흩어졌고 민족의 정체성을 잃게 되어 결국 북이스라엘
10지파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아시리아[앗수르]는 요나가 니느웨성에서 회개를 외치게 했던 니느웨를 수도로 삼은 나라이기도 했고 요나가 갔을 당시에는 살만에셀5세 보다 3번째 전 왕인 아수르단3세가 왕이었을 때이고 앗시리아 에포임에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bc763년 6월 15일 일식현상]
앗수르의 왕들
살만에셀4세/bc783-773-아수르단3세/bc773-755-아수르나라리/bc755-745-다글랏빌레셀3세/bc745-722-
살만에셀5세/bc727-722-사르곤3세/bc722-705-산헤립/bc705-681-에실핫돈/bc681-669-아술바니팔/bc669-633-아술에틸릴라니/bc633-629/신시리스군/bc629-612
진정한 앗수르[앗시리아]의 창시자는 다글랏빌레셀3세(딜갓-빌레셀,티글라스 필레세르)이다 이때 앗수르가
바빌로니아와 시리아를 정벌했으며 이스라엘을 공략한 것입니다
위와 관련된 성경의 기록
[왕하17:3]앗시리아의 살만에셀왕이 그를 치러 올라오자 호세아가 그의 종이 되고 그에게 예물을 바쳤더라.
[왕하18:9]히스키야왕 제 사년, 곧 이스라엘 엘라왕의 아들 호세아 제 칠년에 앗시리아의 살만에셀왕이 사마리아를 치러 올라가서 포위하고
[사20:1]앗시리아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니라
신약 성경을 볼때의 포인트=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게 되었고
그때 남아있던 유대인들이 앗수르제국 사람들과 결혼해서 혼혈인이라 생각하고
이방인 취급을 하며 유대인 취급을 해주지 않았다
이 이후 앗수르왕 산헤립은 남유다를 점령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 랍사게에게 라기스로부터 대군을 거느리게 하여
남유다 왕 히스기야에게로 가게 합니다
랍사게는 지금으로 따지면 영어와 같이 세계 공용어 같은 아람어를 말 할 수 있었으면서 유다 방언으로도 히스기야의 대신들에게 말을 할 수 있었는데
랍사게가 히스기야의 대신들만 듣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 위에있는 남유다 백성이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유다 방언으로 큰 소리로 이야기 합니다
그때 남유다의 대신들[엘리야 김과 셉나와 요나]이 랍사게에게 아람어로 이야기 하자라고 제안하지만
랍사게가 왕하 18:26 그러자 힐키야의 아들 엘리아킴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케에게 말하기를 "내가 청하오니 시리아 말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그것을 알아듣나이다. 성벽 위에 있는 백성의 귀에 들리도록 유대인의 말로 우리에게 말씀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18:27~30 랍사케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 주인이 네 주인과 너에게만 이런 말을 하라고 나를 보내셨느냐? 그가 나를 성벽에 앉은 자들에게도 보내시어, 그들로 너희와 더불어 자기 똥을 먹고 자기 오줌을 마시도록 하신 것이 아니냐?" 하고 일어나서 유대인의 말로 큰 소리로 부르짖어 전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위대한 왕, 앗시리아 왕의 말을 들으라.
'왕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히스키야에게 속지 말라. 이는 그가 너희를 나의 손에서 구해 내지 못할 것임이라. 0 또 히스키야가 말하기를, 주께서 반드시 우리를 구해 내시리니, 이 성읍이 앗시리아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하여 너희로 주를 신뢰하도록 하지 못하게 하라.
이 이야기를 대신들을 통해 들은 히스기야는 참담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이 사태를 이사야 선지자에게 알립니다
그러자 이사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사야
37:6 이사야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주인에게 이렇게 말할지니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들은 바 앗시리아 왕의 신하들이 나를 모독한 말들을 너는 무서워하지 말라.
37:7 보라, 내가 그에게 한 바람을 보내리니, 그가 소문을 듣고 그의 본토로 돌아갈 것이요, 또 내가 그를 그의 본토에서 칼에 쓰러지게 하리라." 하더라.
그리고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 응답해주셨습니다
37:21 그러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키야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앗시리아 왕 산헤립에 대하여 내게 기도하였으니
37:22 주가 그에 관하여 말한 말씀이니라. 처녀, 시온의 딸이 너를 멸시하였고 너를 조롱하여 웃었도다. 예루살렘의 딸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도다.
37:23 네가 누구를 비방하고 모독하였으며, 네가 목소리를 높이고 눈을 높이 치켜 뜬 것이 누구에 대해서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에 대해서니라.
37:33 그러므로 주가 앗시리아 왕에 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그가 이 성읍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거기서 화살 하나도 쏘지 못하며 방패를 가지고 성 앞에 오지도 못하겠고, 성읍을 치러 방벽을 쌓지도 못할 것이라.
37:34 그가 왔던 그 길로 돌아가고 이 성읍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37:35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읍을 지켜 그것을 구하리라." 하더라.
37:36 그때에 주의 천사가 나가서 앗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더라.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났더니, 보라, 그들이 모두 죽은 시체더라.
37:37 앗시리아의 산헤립왕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더라.
왕하
19:32 그러므로 앗시리아 왕에 대하여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가 이 성읍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며, 거기서 화살을 쏘지도 못할 것이요, 방패를 가지고 성읍 앞에 오지도 못할 것이며, 성을 향하여 토성을 쌓지도 못할 것이라.19:33 그가 왔던 길로 돌아갈 것이요, 이 성읍으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주가 말하노라.19:34 내가 이 성읍을 방어하여 구하리니, 나 자신을 위하고 내 종 다윗을 위하여 하리라." 하더라.19:35 그 날 밤에 주의 천사가 나가서 앗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더라. 사람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니, 보라, 모두가 시체가 되었더라.19:36 그리하여 앗시리아의 산헤립왕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였는데
산헤림[앗수르의 왕] 프리즘[점토판]에 의하면
강대국 앗수르가 조그만 유대를 만만하게 보고 공격을 시도했으나
[산헤림은 유대를 보며“나에게 있어 유대는 새장에 새같다”고 할정도로 무시했다]
공격해보기도 전에 그들은 돌아가야 했다 산헤림 군대내에 큰 전염병이 돌아서이다
그리고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토스의 역사 제2권에서는 이 이야기를 좀 더 자세하게 풀어주었는데
하룻 밤에 수많은 쥐 떼가 나타나 앗수르 군의 활과 그 밖에 무기를 갈기갈기 쪼아 놓았다 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폴존슨과 요세프스 역시 그 죽음의 원인은 쥐들이 옮긴 전염병이었다 라고 이야기 한다
나라의 흥망성쇄는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계기였다.
성경에 나와있는 이 점토판 내용에 대한 기록
간단 요약-
1.하나의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는데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다
2.이때 신약에서 사마리아인들이 이방인 취급을 받는 계기가 만들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앗수르가 사마리아[북이스라엘의 수도]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제로 앗수르인들과 결혼시키고
그들이 믿는 종교도 파괴하고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했었습니다
이것을 본 남유대 사람들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른 민족들과 피가 섞였다며 이방인 취급을 한 것 입니다
3.앗수르가 강대국이던 때 남유다를 침공하려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니
초강대국이던 앗수르가 남유다를 침공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들의 나라로 되돌아 가고 맙니다
그 계기는 앗수르가 남유다를 치려고 할때 성경에서 송장이 되었다고 하셨듯
큰 전염병이 앗수르군대에 돌아서 고통스러워 하며 돌아갔다고
산헤립 프리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헤립[=그때 당시 앗수르 왕]프리즘[=점토판]
2 [남유다와 앗수르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
[바벨론에 대한 이미지들]
우선 신바빌로니아(바벨론)에 설명을 먼저 하자면
bc621년 아시리아의 바벨론 총독이었던 나보폴라사르는 아시리아에 반란을 일으켜
신바빌로니아(바벨론)을 세웁니다
신바빌로니아 왕국이 메디아(메데) 왕국과 연합하여 수도 니네베[니느웨]를 bc612년에 함락시키고
아시리아[앗수르]를 멸망시킵니다
이때 이집트는 오리엔트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신바빌로니아와 bc609년 대립하게 되는데
이때 나보폴라사르의 아들 네부카드네자르2세(느부갓네살)은 bc605년에 카르케미시(갈그미스)에서
이집트군을 격파하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이집트 세력을 추방합니다
이집트의 영향 아래 있던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도 이때 함락됩니다
이때 남유다는 bc722년 아시리아 제국이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키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항복합니다
아시리아 제국의 통치는 17대 여호아하스 왕까지 이어졌으나 bc612년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아시리아 제국을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bc605년 제1차 포로가 시작되는데 18대 왕 여호야김 시대에 이집트 군을 격퇴시킨 신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들어오게 되어 여호야김은 인질(이때 다니엘이 바벨론으로 갑니다)과 재물을 느부갓네살 왕에게 바치고 순종의 뜻을 표시해 겨우 멸망을 면합니다(제1차포로) 그 후 남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이집트와 연합해 신바빌로니아에 반역하자 bc597년 느부갓네살 왕은 여호야김을 응징하러 유다 지역으로 오게 되는데 신 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기 직전에 여호야김은 죽게 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유대 왕국 사람들이 신바빌로니아의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사건을
바벨론 유수라고 합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는 신바빌로니아 군대를 맞은 남유다의 왕은 즉위 3개월째를 맞는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이었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한 느부갓네살 왕은 유다의 왕을 비롯한 예루살렘의 주민과 용사 그리고 기술자들을 포로(에스겔을 비롯한 1만여 명)로 사로잡고(제2차포로) 야훼의 성전 안에 있는 보물과 왕궁 안에 있는 보물들을 약탈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대신해서 유다를 통치할 사람으로 요시아의 아들인 시드기야(맛다니야)를 왕으로 세웁니다 시드기야는 취임 9년 차에 예언자 예레미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신 바빌로니아에 반역을 감행합니다
이에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bc586년에 시드기야의 눈 앞에서 그의 자식을 죽이고 그의 두 눈을 파냈으며 청동으로 만든 무거운 족쇄를 채워 바벨론으로 데려가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또한 신바빌로니아군은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과 궁전, 그리고 모든 집을 철저하게 파괴했으며 매우 가난한 백성들만 예루살렘에 남기고 832명의 포로를 바벨론으로 끌고갑니다.(제3차 포로)이렇게 하여 남유다 왕국은 완전히 소멸 되었고 그 결과 유다 왕국은 멸망하고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속주가 됩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완성된 bc960년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경고한 일이 347년 후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제1차 포로/bc605 왕하24:2]
24:1 여호야킴 시대에 바빌론 왕 느부캇넷살이 올라왔으니, 여호야킴이 삼 년 간 그의 종이 되었고, 그 후 그가 돌이켜 그에게 반역하였더라.
24:2 그때 주께서 그를 치시려고 칼데아 부대와, 시리아 부대와, 모압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보내시어 유다를 쳐서 멸망시키셨으니, 주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주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유다 제18대 여호야김 왕 4년(혹은3년)에 이집트를 격퇴시킨 신바빌로니아의 느브갓네살 왕이 진격해왔고
이때 다니엘 등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제2차 포로/bc597 왕하24:8~16]
24:8 여호야킨이 치리하기 시작할 때 십팔 세였으니, 그가 예루살렘에서 삼 개월을 치리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느후스타로, 예루살렘 엘나단의 딸이더라.
24:9 그가 그의 아버지가 행한 모든 것을 따라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더라.
24:10 그때에 바빌론의 느부캇넷살왕의 신하들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갔으니, 성읍이 포위되었더라.
24:11 바빌론의 느부캇넷살왕이 성읍을 치러 갔으니, 그의 신하들이 그 성읍을 포위하였더라.
24:12 그리하여 유다 왕 여호야킨이 그의 어머니와 그의 신하들과 그의 고관들과 그의 관원들과 함께 바빌론 왕에게 나아가니, 그의 치리 제 팔년에 바빌론 왕이 그를 붙잡았더라.
24:13 그가 주의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끌어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주의 성전에 만든 모든 금 기명들을 산산조각 내었으니,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었더라.
24:14 또 그가 모든 예루살렘 거민과 모든 관료들과 모든 용사 일만 명을 사로잡아 갔으며, 또 모든 장인들과 대장장이들을 사로잡아 갔으니, 그 땅의 백성 중 극빈층 외에는 남은 자가 없었더라.
24:15 그가 여호야킨을 바빌론으로 잡아갔고, 또 왕의 어머니와 왕의 아내들과 그의 관료들과 그 땅의 권세 있는 자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사로잡아 갔더라.
24:16 또 바빌론 왕이 모든 용사 칠천 명과, 장인과 대장장이 일천 명, 곧 모두 건장하고 싸움을 싸울 수 있는 자들을 바빌론으로 사로잡아 갔더라.
[여호야김 왕의 아들인 제19대 여호야긴(여고냐)왕이 이집트와 연합해 대항하자 느브갓네살왕이 쳐들어온다
여호야긴 왕이 100일 천하로 끝을 맺고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유다의 중산층 1만명 지도급 인사 군인 7000명 기능공 1000명 등이 끌려가고 이때 에스겔등이 바벨론으로 끌려간다 느부갓네살 왕은 시드기야를 유다 제 20대 마지막 왕으로 삼는다]
[제3차 포로/bc586 렘52:9-11]
52:9 그리하여 그들이 왕을 잡아 하맛 땅 리블라에 있는 바빌론 왕에게로 끌고 오니 거기서 바빌론 왕이 그에게 판결을 내리더라.
52:10 바빌론 왕이 시드키야의 목전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리블라에서 유다의 모든 고관들도 죽이더라.
52:11 그리고 나서 바빌론 왕이 시드키야의 두 눈을 빼고 그를 사슬에 묶어 바빌론으로 끌고 가서 그가 죽는 날까지 감옥에 두었더라.
[유다 20대 시드기야 왕 때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시드기야왕 9년 10월10일~11년4월9일까지 항전)
시드기야 왕은 눈앞에서 아들의 죽음을 보고 두 눈이 뽑혀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느브갓네살 왕 19년 5월 7일에 예루살렘 성과 솔모몬 정전이 파괴된다 유다의 하층만을 제외한 나머지 유다인들이 모두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bc560년12월 25일(또는 27일)경 끌려간 지 37년 만에 여호야긴 왕이 풀려난다]
- 이때 다나엘의 꿈해석과 예언이 나온다!! -
1.첫 번째 꿈해몽은 느부갓네살이 본 신상에 대한 해석이고
2:1 느부캇넷살의 치리 제 이년에 느부캇넷살이 꿈을 꾸었는데 그의 영이 그것으로 인하여 번민하였고, 그가 잠을 이루지 못하였더라.
2:38 또 사람의 자손들과 들의 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살고 있는 모든 곳들을 하나님께서 왕의 손에 주셔서 왕으로 그들 모두를 다스리는 자가 되게 하셨나니, 왕은 곧 이 금 머리니이다.
2:39 왕 이후에 왕보다 못한 다른 왕국이 일어날 것이요, 또 다른 셋째 왕국이 놋으로 일어나 온 세상을 다스리게 되리이다.
2:40 넷째 왕국은 철같이 강한 왕국이 될 것이니 철은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며 이기는 것이라. 철이 모든 것을 부수는 것같이 그 왕국이 산산조각을 내고 깨뜨릴 것이니이다.
2.두 번째 벨사살왕때 바벨론의 수명이 다하고 페르시아가 온다는 것을 예언하였다
5:1 벨사살왕이 그의 귀족들 일천 명에게 잔치를 베풀고 그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5:3 그때에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집의 성전에서 취해 왔던 금 기명들을 가져오니, 왕과 그의 고관들과 왕의 아내들과 후궁들이 그것들로 술을 마셨더라.
5:4 그들이 술을 마시고 금으로 만든 신들과 은으로 만든 신들과 놋으로 만든 신들과 철로 만든 신들과 나무로 만든 신들과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더라.
5:5 바로 그 시각에 한 사람의 손의 손가락들이 나와서 촛대 맞은편 궁전 회벽에 글을 쓰니, 왕이 글을 쓰는 그 손가락을 보니라.
5:17 그러자 다니엘이 대답하여 왕 앞에 말하기를 "왕의 선물들은 왕께서 가지시고 왕의 상들도 다른 사람에게 주소서. 그래도 내가 그 글을 왕께 읽어 드리고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
5:24 그 분께서 손가락을 보내어 이 글이 기록되었나이다.
5:25 기록된 글은 이것이니, 메네 메네 테켈 우파르신이라.
5:26 그것의 해석은 이러하니, 메네는 하나님께서 왕의 왕국을 헤아려서 그것을 끝내셨다 함이요,
5:27 테켈은 왕을 저울에 달았더니 부족함이 나타났다 함이요,
5:28 페레스는 왕의 왕국이 나뉘어서 메대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진다 함이니이다." 하더라.
3.바벨론 이후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통치하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7:1 바빌론의 벨사살왕 원년에 다니엘이 자기 침상에서 한 꿈을 꾸고 머리 속에 환상들을 받고서 그가 그 꿈을 기록하고 그 일들의 실상을 말하니라.
7:2 다니엘이 고하여 말하였더라. 내가 밤에 환상을 보았는데, 보라,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불어 닥치더니
7:3 큰 짐승들 넷이 그 바다에서 올라오는데, 그 짐승들이 서로 다르더라.
7:4 첫째는 사자 같고 독수리의 날개가 있는데, 내가 보니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발로 서 있게 되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더라.
7:5 또 다른 짐승을 보니 둘째는 곰과 같고 그것이 몸 한쪽 편을 들어올렸는데, 그 입의 잇사이에 갈비뼈 세 대가 물려 있으며, 그들이 그 짐승에게 이렇게 말하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7:6 이 일 후에 내가 보았더니, 보라, 또 하나는 표범과 같은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은 머리도 네 개가 있으며 권세를 받았더라.
7:7 이 일 후에 내가 밤에 환상들을 보았고, 넷째 짐승을 보았는데 무섭고 무시무시하며, 힘이 매우 세고, 또 철로 된 큰 이빨을 가졌더라. 그 짐승이 먹고 산산이 부수며 그 나머지는 발로 밟더라. 그 짐승은 먼저 있었던 모든 짐승들과 다르며, 또 그 짐승은 열 뿔을 가졌더라
8:4 내가 서쪽과 북쪽과 남쪽을 향하여 밀어붙이는 숫양을 보았는데, 그 앞에 설 짐승들이 없으며 그 손에서 구해 낼 어떠한 것도 없으나 그 숫양은 자기 뜻대로 행하고 크게 되더라.
8:4 내가 서쪽과 북쪽과 남쪽을 향하여 밀어붙이는 숫양을 보았는데, 그 앞에 설 짐승들이 없으며 그 손에서 구해 낼 어떠한 것도 없으나 그 숫양은 자기 뜻대로 행하고 크게 되더라.
8:20 네가 본 두 뿔을 가진 그 숫양은 메디아와 페르시아의 왕들이요,
8:21 그 거친 숫염소는 그리스의 왕이며, 그의 양 눈 사이에 있는 큰 뿔은 그 첫째 왕이라.
8:22 이제 그 뿔이 꺾이고 그대신 그 자리에 네 뿔이 났으니, 네 왕국이 그 민족에서 일어날 것이나 그의 권세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다니엘서를 다니엘이 기록하지 않았다는 망언이 돌지만 예수님께서 마24장에 다니엘이 쓴것을 확인시켜주셨다]
-간단요약-
1.앗수르가 강대국이던 그때 앗수르나라에 바벨론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 앗수르를 점령합니다
2.그 바벨론은 앗수르를 멸망시키고 남유다를 향해 들어오는데
남유다의 왕이 순종의 뜻으로 뇌물?과 인질을 바치는데 이걸 1차 포로기라 하고 이때 다니엘이 끌려갑니다
그 뒤에 남유다가 이집트랑 합해서 바벨론에 발란을 꾀하는데 이때 다시 바벨론이 와서 남유다에게 압박하고
인질들 [기술자 주민 등등]들을 끌고 가는데 이때 에스겔이 끌려가고 이걸 2차포로기라고 합니다
3.그뒤에 남유다의 왕이예레미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또 바벨론에 반대하려 하자
바벨론이 남유다를 멸절시켜 버립니다
4.그리고 바벨론에 끌려간 다니엘은 그 나라가 멸망할 것과 바벨론 뒤에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통치하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https://blog.naver.com/jacal23
메대사람 다리오의 정체[다니엘서 5장끝, 6장, 9장]
다니엘 5:31,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
6: 1 다리오가 자기의 뜻대로 고관 백 이십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메대 제국의 다리오 왕은 페르샤 제국의 고레스 대왕과 함께 6장의 배경을 이루고 있어, 이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다니엘의 경험과 연관짓기 전에, 메대와 다리오 왕, 그리고 이들과 불가분한 페르샤의 초기 역사와 고레스와의 관계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가.메대 제국과 페르샤의 초기 역사
메대(the Medes)는 민족 이름이고, 메디아(Media)는 그들이 세운 나라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메대는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하나인 야벳의 아들 마대(Madai)의 자손들이 세운 나라로(창 10:2, 대상 1:5), 페르샤와 함께 인도-유럽족(Indo-European)에 속한다.
이들은 페르샤와 함께 메소포타미아와 인도 사이에 놓인 이란 고원(高原) 지대에 살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아리아누"(Arianu) 즉 "귀족들"(nobles)이라고 불렀으며, 그들의 나라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되어 "아리아나"(Ariana) 혹은 지금의 이란(Iran)으로 1935년부터 불려지고 있다.
이들 메대 족속에 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주전 9세기 중엽인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III세(859-824 BC) 때부터인데, 그후로는 계속 역사에 등장한다. 이들은 앗시리아의 여러 왕들에 의해 거듭 정복되어 조공을 바쳤고, 북방 이스라엘이 망한 후 포로된 백성들이 앗시리아에 의해 메대의 여러 도시들로 강제 이주되기도 했다(왕하 17:6, 18:11).
헤로도터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 후 기원전 7세기 초에 데이코스(Deikos·혹은 c. 700 - c. 647 BC)가 일어나 메대 족속들을 통일하여 왕국을 세우고, 엑바타나(Ecbatana)를 수도로 정하였다.
데이코스 다음에는 그의 아들 파라오르테스(Pharaortes)가 22 년간(c.647 - 625)다스렸는데, 이때 그들 남쪽에 있던 페르샤족을 복종시켰다고 한다. 그 후 파라오르테스의 아들인 시악사레스(Cyaxares I)가 즉위하여 약 40년간(c. 625 - c.585) 다스렸는데, 그는 앗시리아를 넘어뜨리기 위해 느브갓네살의 아버지인 바벨론의 나보포랏살과 동맹을 맺어, 기원전 612년 니느웨를 함락시켰다.
정복한 앗시리아의 영토는 양분하여 티그리스강 동쪽과 북쪽은 메대가 차지하고, 바벨론은 이 자연적인 경계선의 서쪽과 남쪽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러한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왕실(王室)혼인이 이루어져, 시악사레스(1세)의 아들인 아스티아게스(Astyages)의 딸 아미티스(Amytis)가 나보포랏살의 아들 느브갓네살에게 시집가게 되었다. 그 후 시악사레스는 소아시아의 스키디아(Scythians)족을 정복하여, 그 영토를 병합하였으며, 기원전 585년에는 리디아와도 접전했으나, 그해 5월 28일 일식(日飾)이 일어나자 서로 전투를 중지하고 강화(講和)하였다.
시악사레스 1세 다음에는 그의 아들 아스티아게스(Astyages)가 즉위하여 약 35년간(c. 585 - c. 550) 다스렸는데, 그가 바로 고레스의 외조부라고 전한다.
역사가 헤로도터스에 의하면, 아스티아게스는 꿈에 자기의 딸 만다네(Mandane)에게서 강물이 흘러나와 아시아 전역에 넘치는 것을 보고, 이를 경계하여 딸을 메대의 귀족에게 시집 보내지 않고, 안산(Anshan)에 있는 그의 페르샤의 봉신왕(封臣王)인 캄비세스 I세(Cambyses I c.600 - 559)에게 멀찍이 시집 보냈다.
이렇게 이루어진 결혼 관계를 통하여 태어난 것이 바로 페르샤의 국부(國父)인 고레스 대왕(Cyrus II 558-530 BC)인 것이다.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의 기록에 의하면, 고레스가 12세 되었을 때, 외조부인 아스티아게스는 딸과 외손자를 불러들였는데, 어머니가 페르시아로 귀국한 뒤에도 고레스는 메대에 남아서 외조부에 의해 양육되었다.
고레스의 비범한 재간과 통솔력은 그가 장차 위대한 통치자가 될 것임을 분명히 드러냈다. 한 때 외조부에 의해 고레스를 죽이려는 시도까지 착수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고레스에 의하여 도전받게 되었다.
기원전 553년 고레스는 종주국(宗主國)인 메대에 대해 반기를 들고, 외조부 아스티아게스에 도전했다. 처음 두번은 패했지만, 세번째 싸움에서 메대의 주장(主將) 하르파구스(Harpagus)가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550년 고레스는 수도 엑바타나를 점령하는데 성공해서 외조부 아스티아게스도 사로잡았으나, 선대(善待)하여 저 멀리 카스피해 남쪽의 히르카니아(Hyrcania)의 지방 장관으로 보낸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본래 메대와 페르샤는 종족도 같고, 두 왕가가 왕실 결혼으로 긴밀히 관련되어 한 나라 같았기 때문에, 급격한 정변(政變)이 없이 한 왕가에서 다른 왕가로 정권이 교체된데 불과했다.
단지 페르샤의 귀족들이 정부 요직(要職)에 대거 진출한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역시 유능한 메대 사람들은 여전히 기용되었다.
고레스는 메대 사람들에게 유화(宥和)정책을 써서, 아스티아게스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 시악사레스 2세(Cyaxares II)를 즉위시켜, 메대의 상징적인 왕으로 남아 있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메대와 페르샤의 연합군은 바벨론을 침공하여, 기원전 539년 10월 13일 고레스의 장군인 구바루(Gubaru), 혹은 희랍어로 고브리아스(Gobryas)가 바벨론에 진입(進入)했고, 고레스는
10월 29일에 입성했다.
나.다리오의 신원
그렇다면 바벨론이 함락된 후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고 나서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62세"라 하였고(단 5:31), "자기의 심원(心願)대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다니엘을 총리로 기용한 그 다리오는 누구인가(단 6:1)?
다리오의 신원에 관하여, 그 동안 여러 가지 추론이 있어 왔다.
다음과 같은 윤곽을 기초로 그의 신분을 확인해 보자.
a. 성경상의 진술
[아하수에로의 아들]이었다(단 9:1).
벨사살이 죽던 밤에 나라를 "얻었"으며(단 5:31),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었"다(단 9:1).
가계(家系)는 메대족이었다(단 5:31, 9:1, 11:1).
바벨론이 멸망하던 기원전 539년에 그의 나이는 약 62세였다(단 5:31).
그의 통치 첫 해에 관해서만 언급되어 있다(단 9:1, 2, 11:1).
전국에 120명의 방백을 세우고 다니엘을 세 총리 중 수석총리로 임명했다.
b. 고대 역사의 기록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아래와 같이 썼다.
"페르샤 왕 고레스와 메대 왕 다리오(Darius)는 그(나보니더스)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다리오와 그의 친척인 고레스와 함께 바벨론을 함락시켜 바벨론의 통치를 끝냈을 때, 그의 나이는 62세였다. 그는 아스티아게스(Astyages)의 아들이었으며, 희랍 사람들 가운데서 그는 다른 이름을 가졌다."
희랍의 역사가 크세노폰의 기록에 의하면, 메대에서는 아스티아게스가 죽은 후 시악사레스(2세)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고레스의 어머니 만다네와 남매 관계이기 때문에, 고레스에게는 외숙부가 된다.
고레스는 어린 시절 외조부인 메대 왕 아스티아게스의 궁전에서 자랐기 때문에, 외숙부인 시악사레스(2세)와는 친숙하였다.
후에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한 뒤, 그는 외숙부인 시악사레스(2세)의 딸 카산다네(Kasandane)와 결혼하였으며, 장인은 결혼선물(dowry)로 나라(메대)를 사위에게 주었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해 보면, 고레스는 자신이 메대를 정복하였을지라도, 메대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명목상 외숙부인 시악사레스(2세)를 메대 왕으로 세웠다.
바벨론을 함락한 다음에는, 그를 장인으로 삼아 당시 나이가 약 40세 안팎[BC 585년 출생으로 보았을 때 46세]인 자기에 비해, 이미 노년에 접어든 62세의 장인을 잠시 바벨론의 명예 왕으로 앉힐 수 있었다.
...
이상과 같은 사실을 비추어 볼 때, 5장 31절과 6장의 다리오는, 시악사레스 2세 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왜 그의 이름을 다리오(Darius)라고 하였을까?
이에 대한 설명 가운데 하나는, 다리오(Darius)는 그 자체가 고유명사인 이름이 아니라, 여러 왕들에 의해 채택된 통칭(通稱)인 보통 명사로 "정복자"(Subduer)를 뜻하는 말이요, 보좌 명칭(Throne name)이라고 한다.
또한 다리오를 아하수에로(Ahasuerus)의 아들이라고 했는데(9:1), 이 곳의 아들은 손자나 더 먼 자손을 의미할 수 있으므로, 고레스의 외조부인 아스티아게스가 아하수에로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웠음이 밝혀졌다.
지금까지의 모든 자료를 종합해 볼 때, 6장의 다리오는 고레스의 외숙부요, 장인인 시악사레스 2세(Cyaxares II)일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다. 메대 사람 다리오 왕의 신원에 관한 견해들
다니엘서 5장 31절, 9장 1절, 11장 1절에 나오는 "메대 사람 다리오"가 누구인가에 대하여는 그 동안 많은 견해들이 있어 왔다.
물론 잘 알려진 페르샤의 세번 째 왕인 다리우스 1세(Darius I, 522-486 BC)와는 다른 사람이다.
언급된 이름들로는 고레스가 정복한 메대의 왕이요 외조부인 아스티아게스(Astyages), 아스티아게스의 아들이요 고레스의 외숙부이며 장인이기도 한 시악사레스 2세(Cyaxares II), 고레스(Cyrus) 자신, 고레스의 아들인 캄비세스 2세(Cambyses II), 고레스의 장군으로 그보다 두 주일 반 앞서 바벨론에 입성한 구바라(Gubara, 혹은 Ugbaru, 헬라어 표기로 Gobryas로도 부름-ㅅ톰슨성경 지지) 등이다.
이 여러 후보 가운데, 성경의 기사를 모두 충족시키는 역사적 인물이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지금까지 시악사레스 2세와 구바라로 압축되어 왔었다.
실제로 기원전 539년 10월 바벨론을 함락시킨 고레스의 장군인 구바라가 유망하여, 윌리암 쉐이(William H. Shea)나 맥스웰(C. Mervyn Maxwell)은 그 가능성을 택했다. 그러나 맥스웰의 다니엘서 연구가 출판된 이후, 다시 연구된 대영 박물관의 쐐기문자 본문에 의하면, 당시 고레스와 그의 아들 캄비세스의 섭정 연대 해석에 차질이 있음과 함께, 구바라의 사망 날짜도 잘못 이해되었음이 발견되어, 윌리암 쉐이 자신이 자신의 견해를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몇 가지 새로운 이해를 곁들여, 그는 다니엘서의 "메대 사람 다리오"를 다름 아닌 고레스 자신이라 하고, "다리오"는 물려진 "보좌 명"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변동 가운데서, 본서는 이 문제에 관한 크세노폰의 기술에 몇 가지 미흡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악사레스 2세가 다리오의 신원에 보다 적합하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리오가 이들 가운데 누구인가 하는 것은, 다니엘서의 신빙성이나 중요성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과, 계속하여 더 확실한 사실이 밝혀지리라는 기대이다.
출처 = http://ilovejesu.net/board/view.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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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 의문에 둘러쌓인 왕
역사속의 어디에서도 그사람의 이름이 언급된적이 없으며, 오직 성경과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만 언급되었을 뿐, 어디에도 없는 인물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다리우스이다.
기원전 539년 10월 5일에서 6일로 넘어가던 날 밤, 바빌로니아제국의 수도였던 바벨론을 포위하던 일단의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시각 바벨론의 젖줄이자 해자노릇을 하던 유프라테스 강물의 수위가 낮아지고 있었다.
바로 그 시각 페르시아와 메디아간의 연합군중에 공병대들이, 바벨론성으로부터 30Km지점 상류에 있던 인공호수(바빌로니아 1대 왕이었던 나보폴리사르가 바벨론성을 구축하기위해 만들었다.)로 유프라테스 강물을 돌려놓았던 것이다.
페르시아 연합군은 바벨론성에 진입하였으나, 그들을 막는 바빌로니아 병사는 소수에 불과할뿐, 대체적으로 평화로운 행진이었다.
그날밤 바벨론의 차기 왕이자 당시 바벨론의 왕, 나보니두스의 장남이자 대리섭정자였던 벨사살이 페르시아의 군인에 손에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6일에서 11일까지 반란세력을 진압하게된다. 때는 기원전 539년 10월 11일 페르시아군의 총사령관이자 페르시아의 왕인 키루스 2세가 바벨론성에 입성한다. 그리고는 자신과 함께 싸웠던 다리우스를 바벨론의 왕으로 임명한다.
다리우스는 그후 120여명의 관료를 임명한다. 성경과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 언급된 내용은 이러하다.
하지만, 세속역사에서는 그 이름에 대한 언급을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었다. 다만 밝견할수 있는 것은, 몇몇 자료에서의 그의 일생에 관련된 부분적인 것들이 보여지고있다.
하지만 바벨론 정복과 관련되어 중요한 금석문이 발견되면서, 다리우스를 지칭하는 인물을 찾을수가 있다.
'나보니두스연대기'라는 점토판이 밝견되면서, 다리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금 전해지는데, 과거 어디에서 밝견할수 없었던 인물을 만나게 된것이다.
나보니두스 연대기의 내용은 이러하다.
'키루스가 티그리스 강변 오피스에 있는 아카드의 군대를 공격하였을 때인 타슈리투[티시리(9~10월)]월 14일에, 시파르는 전투없이 함락되었다. 나보니두스는 도망하였다.
같은 달 16일[기원전 539년 10월 5일]에 구티움을 총괄하던 총독 고브리아스(구바루)와 키루스의 군대가, 전투없이 바벨론에 진입하였다. 그의 앞에는 푸른 나뭇가지들이 펼쳐져 있었다. 바로 술무(평화)의 상태가 그 성에 임한 것이다.
키루스는 바벨론 전역에 인사말을 보냈다. 그의 총독인 고브리아스는 바벨론에 부총독들을 임명하였다.'
일단의 역사학자들은 이 '고브리아스(구바루)'를 다리우스라고 말한다. 그의 활동에 대한 기록들이, 우리가 알려고 하던 다리우스와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며, 나보니두스 연대기 이후 그의 이름에 대한 언급이 다른 어디에도 찾아볼수 없다는데 중점을 두고 보고있다.
특히 나보니두스의 장자였던 '벨사살(벨사쟈르)'에 대한 오보적인 기록(다니엘서에서 나왔던 벨사살이 실존인물이 아니었다고 말한것)때문이었을까?
사학자들은 구바루에 대해, 보다 더 신중에 신중을 기한 결과, '그가 다리우스 였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다리우스란 사람이 왜 역사속으로 사라졌으며, 그의 일생에 걸친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을 파해쳐보아야 할것이다.
'짐은 바빌론(바벨론)의 영토 동편에, 튼튼한 성벽으로 울타리를 만들고 해자를 팠으며... 역청과 벽돌로 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을 거대한 성벽을 쌓았다.'
앗시리아를 무너뜨리고 신바빌로니아의 2대 군주로 활약하던 왕 네부카네자르 2세(느부갓네살)는, 자신이 건축한 바벨론성을 자신의 역대기에 기록하였다. 그는 자신이 건축한 바벨론성을 어느 누구도 무너뜨릴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그처럼 그가 지은 바벨론성은 어느 누구도 제압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견고하게 지었다고 그는 자부했다. 하지만 그 성은 그가 생각했던것 만큼 난공불락은 아니었다.
때는 기원전 539년 10월 5일 밤, 페르시아의 왕이었던 키루스 2세는 대군을 이끌고 바벨론 성을 함락시킨다. 그에게는 훌륭한 다른 왕이 옆에 있었다. 그가 바로 다리우스이다. 다리우스라면, 흔히들 다리우스 대왕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인 별개의 사람이었다. 키루스는 이 사람을 어떻게 얻었을까?
그점은 '로버트 콜린스' 라는 사람의 저서에서 살펴볼수 있겠다.
그의 저서「메디아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The Medes and Persians)에서 이렇게 말한다.
'메디아 사람들은 평화로운 가운데, 페르시아 사람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 메디아 사람들은 종종 행정부의 고위직이나 페르시아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외국인들은 메디아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할 때, 피정복자와 정복자 간의 구분을 하지 않았다.'
이처럼 메디아는 페르시아에 합병되어, 페르시아 제국과 급속도로 친화적으로 변모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수의 메디아 사람들이 페르시아의 주요 관직에 앉았다는것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리우스는 어떠할까?
다리우스에 대한 기록은 "메디아의 왕이었던 아하수에로의 아들이었다"는것, 그리고 "페르시아의 메디아 정복 과정 중에 아하수에로는 페르시아와 동맹에 가까운 합병"에 이르게 되었다는것이다.
이 당시 그의 아들이었던 다리우스는 왕자로 있었으며, 페르시아와 메디아간의 평화를 주장한 사람이었다. 선왕 아하수에로의 평화적인 합병에 대한 유지를 이어,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해 그는 페르시아의 키루스를 도울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페르시아와 연합한 메디아 사람들은 바빌론을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주된 역할을 하였는데, 이들(메디아 병사들)의 지도자가 바로 다리우스였던것을 비추어 볼 때, 메디아의 군사들이 얼마나 페르시아에게 협조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겠다.
키루스가 바벨론성을 함락시키고, 얼마후에 "바벨론왕"의 호칭을 당시 "메디아의 왕"이었던 다리우스에게 넘긴다. 당시 바벨론은 상업적으로 절대 필요한곳이었기 때문에, 페르시아가 신임하는 왕이 필요했을 것이었고, 페르시아의 왕으로서의 정무 때문에 스스로가 왕의 자리에는 오르지 않았다.
키루스가 바벨론 왕의 자리에 오른것은, 바벨론성의 함락후 7년후인 B.C. 530년에 자신의 아들이었던 캄비세스 2세와 공동통치자로써 등장했을 때였다. 그것은 결국 7년이란 시간동안 바벨론을 통치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다리우스는 키루스대왕의 이러한 신임을 받고, 바벨론의 왕으로 오르게 된다. 그에 대해 성경에서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메대(메디아)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다리우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다리우스)는 육십 이세였더라..메대와 바사의 변개치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방백 일백 이십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또 그들위에 총리 셋을 두었으니 다니엘이 그 중에 하나였다.'
다리우스는 어지러운 정부를 개편할 필요에 의해, 과감한 정치개편을 단행하여, 페르시아식의 법규를 제정하게된다. 키루스대왕의 군사참모로서, 메디아의 왕으로써, 그의 능력은 이를데 없이 화려하기만 하였다. 하지만 그의 생존 기록은 미미하기만 할 밖에 없다..
왜 그에 대한 기록이 사라진 것일까? 우리가 알 수 있는 범위는 적다고 볼수 있지만,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내용이 있다. 바로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와 '성경 다니엘서'에서 조금이나마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리우스가 바벨론의 총독이 된 후 그는 120명의 관리를 임명하게된다. 이들중에 3명을 더욱 비중있는 지위를 맡기게 되었는데, 그들중의 한명이 바로 다니엘이었고, 나머지는 바벨론에 있던 관리들이었다.
다니엘 이외의 나머지 관리들은, 당시 바벨론에 있던 관행(어느정도의 부패가 있던것으로 추정됨)대로 일처리를 하였고, 다니엘만큼은 정도에 맞게 정치를 하려고 하였던것 같다. 그러자 다니엘의 행정 스타일을 보고 자신에게 불리하게 되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관리들은, 그를 제거할 방법을 모색하게된다.
그것이 '30일간 왕에 대한 충성을 지키는것과, 타 종교에 대한 믿음을 단절한다. 법을 어기는 사람은 사자굴에 넣는다'는 내용을 담고있었다. 다리우스는 자신에게 충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허락을 하였던 것이다.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역사 기록에서는 고대로부터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은 신으로 간주되었으며, 또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숭배하게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주석가들은, 다리우스의 칙령에 나오는 “청원”에 대한 제재 규정은 순전히 종교적인 성격의 청원과 관련이 있는 것이며, 일반적인 종류의 간청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있다.
또한 바빌론에 “사자 굴”이 있었다는 사실은, 오리엔트 지역 통치자들에게는 흔히 야생 동물원이 있었음을 알려 주는, 고대 비문들의 증거와 일맥상통하는데, "손시노 성서 책들"라는 책에서는 말하기를
“페르시아 사람들은 그러한 동물들을 동물원에서 키우는 관습을, 아시리아의 왕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리우스는 그 포고령에 서명하였으며, 오래지 않아 그 결과를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그 결과를 통해 ,이 칙령을 만든 숨은 의도를 깨달았을 것이다.
다니엘은 그 법에 저촉이 되었다. 다리우스는 법을 고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것으로 보여지지만, 당시 페르시아의 법은 왕의 권력으로도 법을 함부로 고치지못한다는 법령 때문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다리우스는 그만큼 다니엘을 신임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다니엘은 사자굴속에서 살아남게된후 다리우스의 개혁이 보여지는데, 당시 바벨론의 신을 물리치고 유대의 신인 '여호와'를 주신으로 할 것을 공표한 것이 주목할만하다.
이러한 문제가 발단이 되어, 당시의 바벨론 신관계급들은 상당한 반발을 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역사를 기록하고 남기는 일을 하였던 사람들, 즉 서기관들 또한 신관들의 영향력 아래에서, 왜곡된 기록이나 기록을 제거하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는 자신 혹은 자국의 이익에 대한 부분만 끌어 올려주고, 문제가 되는 부분은 지워서 소멸시키던가, 아니면 과장되게 기록하는 일이 있었다.
힉소스에 대한 견해를 제시한 '마네토'라는 역사가 역시, 신관계급이란 점을, 또한 이스라엘인을 그 누구보다 증오하고 싫어했다는것, 신관으로서 자신에게 수치스러운 일을 결코 기록하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 등을 통해, 그는 결국 "힉소스"라는 가상의 민족을 만들어 냈을 가능성을 이야기하고있다.
바빌론 신관들의 관련문서 삭제를 통해, 결국 그의 모든 기록들은 소멸되었다. 기록이 완료된 모든 문서들 또한 소멸시켜버렸다.
특히 다리우스의 바벨론 통치가 그리 길지가 않았던 것은, 신관들의 영향력이 줄지 않았다는것을 증명하는것이 되겠는데, B.C.530년에 그는 바벨론의 왕이라는 칭호가 사라진 것이다.
그의 후임자로 키루스의 맏아들이었던 캄비세스 2세가 바빌론과 페르시아의 왕으로서, 키루스와 공동 섭정자로 앉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그가 죽었는 지 혹은 좌천되었는 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다만 그의 바벨론통치는 7년간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 기간동안 기록된 모든 기록물들은, 소멸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사참모이자, 한 나라의 왕, 그리고 함락된 바빌로니아의 왕으로 화려한 일생을 살아간 사람의 일대기는, 어느사이 이기적인 욕심을 품었던 사람들에 의해 사라져 버렸던 것이었다. blog.naver.com/k0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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